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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수의 목회편지(125)

미래의 사람으로 사는 것_ 딤전 6:19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선행은 신자의 멋있는 인격 향상해”


기독교는 모든 면에서 균형을 보여준다. 특히 신앙과 행위의 관계에서 그렇
다. 기독교에서는 믿음에 대한 강조와 행위에 대한 강조가 서로 충돌하지 않
는다. 둘 중에 어느 하나만을 중시하는 것은 기독교의 길이 아니다.

믿음과 행위는 충돌하지 않아

그래서 누구는 믿음만 주장했다느니 누구는 행위만 고집했다느니 말하는 것
이나, 누구에게는 행위에 대한 역설이 결핍되었다느니 누구에게는 믿음에 대
한 생각이 부족했다느니 말하는 것은 모두 잘못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발상과 발언은 무식의 소치이다. 어떻게 믿음 없이 행위가 있겠으며, 행위
없이 믿음이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어느 누가 행위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말
한다고 해서 오해할 것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행위의 가치를 밝힐수록 더
욱 옳은 일이 된다.

것이 사도 바울의 심정이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앞에서 선한 행위, 선한
사업, 나누어주는 것,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동참하는 것, 이런 일들의 의미
를 아주 강하게 밝혀주었다. 그런데 이제 이 내용을 마치려는 순간에 선행
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놀라운 말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장래
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선행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교훈을 하나씩 뜯어내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은 선행을 좋은 터라고 부른다. 사실 터라는 표현은 사
도 바울이 여러 차례 사용한 용어이다. 이 용어는 대단히 깊은 신학을 설명
하고자 할 때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터가 된다고
말할 때(고전 3:10-11),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진다고 말할
때(엡 2:20)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렇게 신학적으로 중요한 말을 사
도 바울이 선행의 의미를 밝힐 때도 사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터는 받쳐주는 기반이며 움직이는 반경이다. 터가 있을 때 지지의 기반을 얻
고 행동의 영역을 얻는다. 선행은 신자의 고상한 품격을 드높이는 토대이

n며, 신자의 풍요한 활동을 넓히는 터전이다. 선행을 발판으로 삼아 신자는
멋있는 인격을 향상시킬 수 있고, 선행을 울타리로 삼아 신자는 뽐내는 생활
을 확장시킬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선행은 미래의 보장이 된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
이 미래에 대한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들은 미래
에 대한 불안을 이기기 위해서 다양한 투자를 한다. 적금을 들고, 보험을 붓
고, 투기를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진정한 미래보장이 되지 않는다. 좀
과 녹이 해하며 도둑과 사기꾼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낡아지지 않
는 하늘의 주머니를 만들라고 일러주셨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구제이
다(눅 12:33). 진정으로 미래를 보장받기 원한다면 선행에 참여하라는 것이
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미래는 함축적으로 내세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렇게 볼 때 내세는 선행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선행은 믿음의 표현이
며, 믿음은 선행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이런 선행은 내세를 보장받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과 염소 비유가 보여주듯이 종말심판
에서 행위를 따진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마 25:31-46). 심판의 보좌
앞에서 자기의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명심
해야 할 것이다(계 20:12).
이런 의미에서 선행은 참된 생명을 취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
이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은 선행이 참된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이다. 참
된 생명이란 표현은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경험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진
정한 생명(영생)을 획득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후자가 우세하지만 전자
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선행으로 신자는 현실적으로는 최고의 삶을 누리
는 효과를 얻으며 미래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효과를 얻는다.

선행은 영원한 생명 보장하는 증표

선행은 신자를 안정된 사람으로 만들어주며, 미래의 사람으로 살게 하며, 진
정한 가치를 지닌 사람이 되게 한다. 이 사실을 몰랐다면야 어쩔 수 없겠지
만, 이 말씀을 배우면서도 이 길을 가지 않는다면 그처럼 큰 어리석음이 있
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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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no image |손에잡히는 교리강좌(2)|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왜말씀연구가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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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1 2008-02-27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2)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왜 말씀연구가 중요한가? 김수흥 목사_합신 초빙교수 “성경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능케 해” 이 연구의 중요성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성경교 리라는 점에 있으며 또한 예수님의 말씀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이 신자들의 최초의 연합과 뒤따르는 계속적인 연합을 이룩하는데 절대 필요하다는 데 있 다. 그리스도와 지속적 연합 중요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의 죄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며 또 한 죄인들에게 주어진 은혜 전체를 포함한다. 달라스 신학교 이전 총장이며 조직신학교수였던 왈보르드(J. F. Walvoord)는 말하기를 “총체적으로 말하 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리일 뿐 아니라 은혜 의 전 영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계산해서 말해도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죄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것보 다 더 중 요한 것은 없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롬 3:10). 죄인들이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전 적으로 저주 아래에 있다(갈 3:10). 성경은 말씀하기를 오직 우리의 주님이 시며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요 20:28)이 죄인들을 죄 가운데서부터 구 원하실 수 있다고 말씀한다(행 4:12). 이 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죄인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는지를 보 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어떻게 죄인들을 그리스도 에게 연합시켜주고 또 영적인 생명을 죄인들에게 부여하며 죄인들을 의롭다 하고 또 하나님 가족의 양자로 삼고 성화시키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구원의 전체 적용을 설명해주고 있다. 버지니아 소재 유니온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 댑니(R. L. Dabney)는 그리스 도와의 연합의 교리가 구원의 전체 적용(whole application of redemption) 이라고 인정하고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와 의 이 연합을 통하여 구원의 전체 적용이 죄인들의 영혼에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와의 최초의 연합과 뒤따르는 연합에 절대 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글은 성령께서 믿는 자들을 어떻게 예수님에 게 연합시키는가를 보여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연합을 이루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최초의 연합과 뒤 따르는 연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관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글은 예수 님을 믿는 자들을 예수님께 연합시키는데 있어서 성령께서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이나 모두 권위와 영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다. 신구약 성경은 믿는 자의 영적인 생활에 놀라운 영향을 던 져주고 있다. 그러나 이전의 많은 운동들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의 위치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해 켄터키 소재 파이크빌 대학의 성경 신 학 교수 로레인 뵈트너(Loraine Boettner)는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비난하였 다. “로마 천주교는 말씀을 무가치하게 만 들거나 혹은 파괴한다. 로마 천주교 는 성문화된 말씀과 함께 기록되지 않은 말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쳤 으나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고 사람의 입을 통하여 대대로 전해져 내려 온 구 전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 기록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 회의들의 선언(pronouncements)과 교황의 칙령을 통하여 표면화되었다는 것 이다. 이 구전이 바로 기록된 말씀에 우선하고 또한 성경을 해석한다. 교황 은 지구상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새로운 환경이 생길 때마다 부가적 인 것을 제정하여 성경에 더할 수 있다.”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성경의 충족성(充足性)을 말하고 있다. 결코 아무도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이 교회 회의나 혹은 교황의 칙령에 의해서 보충되어 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암시를 주는 구절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는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요 10:35)라고 하시고 또 “너희가 성경에 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 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라고 말씀하심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선언하 셨다. 성경은 증언하기를 부자의 다섯 형제에게는 “모세 와 선지자들이 있다”고 증언함으로써(눅 16:29)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천주교는 전통을 따르려고 성경의 진리를 지금까지 타 협해왔다. 성경보다 전통 따르고 있는 천주교 결국 로마 천주교에서는 교회를 성경과 동등 위치에 놓고 있기 때문에 거기 에서 멈추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다음 단계로서 그들은 교회의 전통을 성경 위에 놓을 때가 올 것이다.
180 no image |신학단상(2)| 보물(寶物)과 우상숭배의 심리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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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2 2008-02-27
신학단상(2) 보물(寶物)과 우상숭배의 심리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자기 교회만이라는 개인주의 교회관 버려야” 얼마 전에 숭례문이 불타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모두가 충격을 받았 고 마음 아프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리라. 그 동안 국가 보물 1호인 숭례문 곁을 늘 지나치던 사람들이 유독히 불타버린 그 흔적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무엇일까? 불탄 숭례문에 큰 관심 보여 놀랍고 신기한 것은 숭례문이 불탄 자리 앞에서 눈물 흘리며 절하는 사람들 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제사상을 차리듯 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고 있는 모습 도 있었다. 국가 보물 1호인 숭례문이 그 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그토록 애틋 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까? 만일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그 동안 모르고 지내다가 보물이 불타 없어지니까 마음이 섭섭해서 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숭례문이 불타 없어진 사건으로 대한민국 국민들 가운 데 무의적 으로 존재하는 무속적 종교 심성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사람 들 가운데 숭례문이 불탄 것을 이 나라에 앞으로 있을 어떤 좋지 않은 징조 로 이해하려는 심리는 곧 무속신앙의 모습이다. 이런 무속적 종교 심성은 그 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특히 무속적 종교 심성이 기독교 안에서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과 연결되면, 하나님의 복이라는 옷으로 갈아입고 나 타나며, 사람들은 그 옷을 한번 입어보려고 안달한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6장 19-21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 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명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 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 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다. 우리의 보물 1호는 무엇일까? 그 보물이 우리의 무속적 종교 심성과 어떤 관 련은 없는 것일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물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결국 우상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많다. 특히 그 보물이 기독교 신앙과 접목되었을 때, 우상숭배의 심리는 봄에 새순이 돋듯이 자연 스럽게 나타날 수 있다. 그 보물이 내 가족, 내 교회, 내 직장, 내 나라, 등 등 나와 관련이 되었을 때, 더욱 기승을 부리며 살아나서 잠자고 있는 우리 의 우상숭배 심리를 조장한다. 이런 무속적 종교 심리를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들은 순수한 마음일지라도 기독교의 복과 연관시켜서 한 마디라도 거들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순진한 교회의 성도들은 담임목사의 말에 거 의 전적으로 순종하여,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가르치지 않았어도 본래 가 지고 있었던 무속적 신앙의 한 모습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오늘날 횡행하는 ‘우리 교회 신드롬’은 우리의 보물 1호로 자리매김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이지 어떤 한 개인의 교회일 수 없듯이 한 공동체의 재산 목록이 될 수 없다. 우 리는 신앙의 편향된 모습을 보이는 ‘우리 교회 신드롬’이 자칫 우상숭배 에 이르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물론 내 교회를 사랑하여 헌신하며 봉사하는 것을 누가 탓하랴 만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발상으로 자기 교회만을 자신의 보물 1호로 생각 하는 성도들 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우주적 교회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집단이 기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 교회’도 하늘의 하나님 께 바쳐질 때 교회는 이기적 모습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 앞에 설 수 있을 것 이다. 집단 이기주의 위험 높아 우리의 보물이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부단히 몸부림치지 않으면 불 탄 숭례문 앞에서 보여준 어리석은 몸짓을 교회 안에서 다시 보게 될지도 모 른다.
179 no image |손에잡히는 교리강좌(1)|그리스도의 말씀이 연합에 미치는 영향_김수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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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1 2008-02-13
손에 잡히는 교리강좌(1) 그리스도의 말씀이 연합에 미치는 영향 김수흥 목사_합신 초빙교수 “예수님 떠나서는 누구든지 무력할 뿐” 세계의 신학계가 중생, 칭의, 회심, 믿음, 양자, 성화 등의 교리에 대해서 는 많이 다룬 바 있다. 그러나 신학의 노른자로 취급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와 의 연합이라는 교리는 많이 취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의 신학계도 세계 의 신학계와 마찬가지로 연합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지 않고 있다. 소외된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다(요 15:5, 요 14:20 참 조).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우리 안에 계셔야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을 수 있다고 하시고 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어야 과실을 많이 맺을 수 있다 고 하신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어야 과실을 맺을 수 있다고 하신다. 성경은 성도들과 예수님이 연합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성도들과 예수님 이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다메섹 도상의 바울 사도에게 책망하 신 대목에서도 확인된다. 예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말씀하시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다(행 9:4). 사실 사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이지 예수님을 핍박한 것 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울이 성도들을 박해한 것은 곧 바로 예수님을 박해 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주장하신 것은 예수님 과 성도들이 서로 연합되어 있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훗날의 간증에서 ‘연합’을 말하고 있다. 그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말한 다. 성경은 연합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다. 요한복음 15:1-17에 쓰여 있는 참 포도나무 풍유(allegory)는 예수님과 그 의 제자들 간의 연합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그 동안 한국 교계에서 요한복 음 15:1-17을 비유라고 말해왔으므로 필자도 편의상 비 유라고 표현하려고 한 다. 요한복음 15:5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다. 이 구절은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 예수님은 누구이며 또 제자들은 누구인가(identity)를 보여주고 있으며, 2)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보여주며, 3) 예수님 을 떠나서는 사람이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구절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상호 연합을 이루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 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고 또한 예수님을 심령 속에 모시고 살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구 절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제자들이 완전 무력함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예수님과 제자들 간에 연합을 성립시키는 것인가? 무엇이 불 가분리의 연합을 가능케 하는 것인가? 무엇이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으로부 터 분리되지 못하도록 지탱시켜주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제자들을 예수님 에게 연합시키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인가? 참 포도나무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연합시켜 주는 일 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말씀해주고 있다. 1)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을 깨끗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 거 하게 하고 (요 15:3-4), 2)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 안에 내주(內住)함으로 써 연합이 계속해서 성립되게 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한다(요 15:5-7)고 말해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한번 거하시기 시작하면 이미 영원한 연합 이 이루어진 것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심령 속에 거함으로 더욱 열매를 맺 을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속에 풍성히 거 할 때 열매를 위한 연합을 이루게 된다. 말씀 풍성할 때 연합 이뤄져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연합시키는 일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제자들로 하여금 깨끗하게 해 서 예수님을 믿도록 해주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말씀이 심령 속에 거하 면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게 해주어서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해주는 것이다.
178 no image |신학단상(1)| 화폐의 우상시대_조석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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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6 2008-02-13
신학단상(1) 화폐의 우상시대 조석민 목사_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성도들은 자본주의 급류에 저항할 줄 알아야” 오늘날처럼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시대가 없었던 것 같다. 사람의 인격 도 돈으로 가늠하고, 한 사람의 능력도 돈으로 평가되는 시대이다. 성경은 돈 자체가 악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능력도 돈으로 평가하는 시대 다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 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후 6:10)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바울은 우리 의 삶에 있어서 돈이 필요 없다고 하거나 돈을 벌지 말라고 교훈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의 파괴력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 부정 적인 폐해를 인식하고 젊은 목회자에게 분명하게 권면한 것이다. 우리는 정부가 한국은행을 통해 새롭게 만든 천원, 오천 원, 만 원 권의 새 로운 화폐를 이미 사용하고 있다. 얼마 전 정부는 고액권의 화폐를 발행하기 로 결정했다. 이미 현재의 화폐는 만원이 최고의 액수이기에 불편하다는 이 론이다. 한국은행의 고액권 발행을 앞두고 찬반양론이 오고가고 갔지만, 예 정했던 대로 액면가 십만 원과 오만원의 화폐가 발행될 것이다. 고액권의 화폐 발행에 대한 평가가 아직도 불투명하지만 이 고액권들을 사용 할 날이 멀지 않았다. 한국은행에서 발행될 고액권이 그 동안 돈의 분량이 많아서 어려웠던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고액권의 발행으로 해소될 문제는 항상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고, 부정적인 면에서도 불 가피하게 기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모든 범죄의 뿌리를 캐내어 보면 돈을 사랑하는 것과 연관 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가 만발한 사회에 살면서 돈을 생각하 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자본주의 의 물결에 함께 휩쓸려 갈 것이 아니라 이런 급류의 물살을 헤치며 살아가 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런 삶을 위해서는 함께 생각을 갖고 동조하며 격려하 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런 공동 체는 교회라는 틀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를 머리로 하는 모든 교회가 그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격려하고 붙들어주고, 힘이 되어 줄 때, 우리는 현대의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괴물을 직시하며 위험천만한 사회 속에서도 생 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MBC 방송사가 세금을 안내는 성직자의 문제를 다루면서 일부 대형 교회 의 목사들이 향유하고 있는 부의 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것은 참 슬 픈 일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가 만발한 사회에서는 돈이 모든 것을 말하 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폐가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없음을 그리스도인들 은 입으로만 아니라, 삶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으면서 돈이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없음을 보여줄 수 있을 때 우리는 화폐 의 우상시대를 거슬려 살아가는 것이다. 돈이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없어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처럼 작고 소박한 삶, 필요를 채우는 삶이기보 다는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을 최소한 충족시켜 가 는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 까 생각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이런 소박하고 단 순한 삶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177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26-마지막회)_마지막말을준비하며_딤전 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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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7 2008-01-23
조병수의 목회편지(126 - 마지막회) 마지막 말을 준비하며_ 딤전 6:20-21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진정한 정통은 오직 바울이 ‘남긴 것’ 뿐” 사람은 마지막 말을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은 지혜가운데 하나이다. 우 리는 유명한 사람들의 마지막 말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철학자, 정치가, 종교가, 그리고 특히 우리와 같은 색깔을 띤 위대한 신앙인들이 남긴 마지 막 말들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의미가 매우 깊다. 신자들은 뜻깊은 마지막 말 남겨야 그들이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준비해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심금을 울리는 바가 없지 않다. 위대한 사람들은 언제 마지막 말을 해도 어차피 유명한 것 으로 회자된다. 그러나 갑남을녀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 해설의 마지막 회 를 쓰는 나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들은 평소에 마지막 말을 준 비해두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 편지의 끝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애석하게도 이 서신의 마지막 말 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사도 바울 이미 시작된 배도의 시대를 직시하면서 “망령되다”, “헛된 말”, “거짓된 지식”같은 상당히 경직된 단어들을 열거한다. 그만큼 벌써 진리로부터 벗어난 이론들과 진리를 대적하는 이론들이 판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에서 이탈하는 사람들과 진리 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심지어는 믿음에서 벗어난 사람 들도 적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현상은 역사에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매 시대에 진리를 거스르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등장했고, 그들의 이름은 역사의 여러 페이지에 어두운 색깔로 적혀있다. 이것은 그 자체가 아프게 찌르는 가시처 럼 기독교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런 현상이 절정에 달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는 오 래 전부터 절대를 버리고 상대를 택했다. 그래서 현금을 살고 있는 많은 사 람들은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상대주의가 횡행하는 시대 에 진리에서 이탈할 뿐 아니라 진리를 대적하는 경향은 모든 영역과 계층에 서 대단한 인기를 얻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반기독교적인 책들은 언제나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런 책들 이 잘 팔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첫째로 안티기독교 문서 는 기독교에 회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짜릿한 맛을 주기 때문에 인기가 높다. 이런 책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호기 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그들은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서 이런 책 들에 손을 댄다.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신자들은 반기독교적인 서적에 기 록된 내용을 비판하고 대항하기 위해서 구독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이유 로 반기독교적인 서적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반기독교적인 서적들은 성경에 합리적이지 않은 내용들이 들어있다고 비판한 다. 과학에 비추어, 또는 논리적으로 성경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이와 같은 비판은 결국 신의 절대성과 존재를 부인하는 길로 치달린다. 절대적인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성경에 모순적인 내용들이 기록될 수 있냐는 논리이 다. 반기독교적인 문서들이 반드 시 지적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이다. 그분이 역사의 한 공간에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다 는 것이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기독교를 공격하는 문서들은 기독교의 정통성 에 치명적인 시비를 건다. 절대를 상실한 시대에는 온갖 상대적인 이론들이 난무한다. 이겨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미 시작된 배도의 시대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배도의 시대를 내다보면서 디모데에게 마지막 권면을 한다. “부탁한 것을 지키 라.” 사도 바울이 부탁한 것들은 앞에서 자세히 진술한 것들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이 부탁한 것이 우리의 정통이다. 그것이 우리의 전통이 되어야 한 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사도 바울로 돌아가야 한다. 신자는 사도 바울이 부탁한 것 지켜야 사도 바울이 돌아갔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정통이 며 전통이다. 나도 이 연재의 글을 끝내면서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사도 바울의 말과 다르지 않다. 그동안 나의 글을 즐겁게 읽어준 모든 독자에게 주님의 은혜가 깃들기를 빌 며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Selected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25)_미래의 사람으로 사는 것_딤전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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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8 2008-01-09
조병수의 목회편지(125) 미래의 사람으로 사는 것_ 딤전 6:19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선행은 신자의 멋있는 인격 향상해” 기독교는 모든 면에서 균형을 보여준다. 특히 신앙과 행위의 관계에서 그렇 다. 기독교에서는 믿음에 대한 강조와 행위에 대한 강조가 서로 충돌하지 않 는다. 둘 중에 어느 하나만을 중시하는 것은 기독교의 길이 아니다. 믿음과 행위는 충돌하지 않아 그래서 누구는 믿음만 주장했다느니 누구는 행위만 고집했다느니 말하는 것 이나, 누구에게는 행위에 대한 역설이 결핍되었다느니 누구에게는 믿음에 대 한 생각이 부족했다느니 말하는 것은 모두 잘못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발상과 발언은 무식의 소치이다. 어떻게 믿음 없이 행위가 있겠으며, 행위 없이 믿음이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어느 누가 행위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말 한다고 해서 오해할 것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행위의 가치를 밝힐수록 더 욱 옳은 일이 된다. 이 것이 사도 바울의 심정이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앞에서 선한 행위, 선한 사업, 나누어주는 것,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동참하는 것, 이런 일들의 의미 를 아주 강하게 밝혀주었다. 그런데 이제 이 내용을 마치려는 순간에 선행 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놀라운 말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장래 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선행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교훈을 하나씩 뜯어내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은 선행을 좋은 터라고 부른다. 사실 터라는 표현은 사 도 바울이 여러 차례 사용한 용어이다. 이 용어는 대단히 깊은 신학을 설명 하고자 할 때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터가 된다고 말할 때(고전 3:10-11),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워진다고 말할 때(엡 2:20) 이 단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렇게 신학적으로 중요한 말을 사 도 바울이 선행의 의미를 밝힐 때도 사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터는 받쳐주는 기반이며 움직이는 반경이다. 터가 있을 때 지지의 기반을 얻 고 행동의 영역을 얻는다. 선행은 신자의 고상한 품격을 드높이는 토대이 n며, 신자의 풍요한 활동을 넓히는 터전이다. 선행을 발판으로 삼아 신자는 멋있는 인격을 향상시킬 수 있고, 선행을 울타리로 삼아 신자는 뽐내는 생활 을 확장시킬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선행은 미래의 보장이 된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 이 미래에 대한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들은 미래 에 대한 불안을 이기기 위해서 다양한 투자를 한다. 적금을 들고, 보험을 붓 고, 투기를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진정한 미래보장이 되지 않는다. 좀 과 녹이 해하며 도둑과 사기꾼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낡아지지 않 는 하늘의 주머니를 만들라고 일러주셨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구제이 다(눅 12:33). 진정으로 미래를 보장받기 원한다면 선행에 참여하라는 것이 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미래는 함축적으로 내세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렇게 볼 때 내세는 선행과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선행은 믿음의 표현이 며, 믿음은 선행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이런 선행은 내세를 보장받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과 염소 비유가 보여주듯이 종말심판 에서 행위를 따진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마 25:31-46). 심판의 보좌 앞에서 자기의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명심 해야 할 것이다(계 20:12). 이런 의미에서 선행은 참된 생명을 취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 바울 이 마지막으로 말하는 것은 선행이 참된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이다. 참 된 생명이란 표현은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경험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진 정한 생명(영생)을 획득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후자가 우세하지만 전자 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선행으로 신자는 현실적으로는 최고의 삶을 누리 는 효과를 얻으며 미래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효과를 얻는다. 선행은 영원한 생명 보장하는 증표 선행은 신자를 안정된 사람으로 만들어주며, 미래의 사람으로 살게 하며, 진 정한 가치를 지닌 사람이 되게 한다. 이 사실을 몰랐다면야 어쩔 수 없겠지 만, 이 말씀을 배우면서도 이 길을 가지 않는다면 그처럼 큰 어리석음이 있 겠는가.
175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24)_하나님답게 사는 것_딤전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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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6 2007-12-20
조병수의 목회편지(124) 하나님답게 사는 것_ 딤전 6:18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사람답게 사는 것 넘어 하나님처럼 살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 대한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사색은 깊은 우물에 두 레박을 내리듯 한없이 깊었고, 그들은 그런 사색을 통해서 성육신 신학을 굵 은 가래떡처럼 뽑아냈다. 거기에서 기독론은 말할 것도 없고 장엄한 구원의 이론이 선명하게 형성되었다. 아마도 성탄의 의미를 찾는 데 압권은 아들을 내주신 하나님의 행위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육신 신학 굵게 세운 교부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역사를 통틀어 보이신 최대의 선행이 다. 하나님은 아들을 주심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난파하여 비참하 게 가난한 인간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성탄은 인간을 향한 하나 님의 극한 자선이며, 하나님의 올인(다 걸기)이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하 나님의 성품이 가장 높게 표현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 내신 것은 하나 님의 하나님다움의 절정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통하여 부자들에게 주는 권면에서 하나님다운 삶을 요 구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부자들이 꼭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같 은 말을 두 번씩 반복한다. 이것은 굉장한 강조이다. 첫째 짝은 “선을 행하 다”와 “선한 사업을 많이 하다(선한 사업에 부요하다)”이다. 둘째 짝은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다”와 “동참하는 자가 되다”이다. 사도 바울의 권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첫째 짝에서도, 둘째 짝에서도 앞의 요구보다 뒤의 요구가 더 강해진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아주 간단 한 점층법을 사용해서 부자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멋지게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다. 사도 바울은 부자들이 무엇보다도 선행을 추구하기를 권면한다. 이것은 소극 적인 면에서 보면 신자들이 악행을 멀리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신자들은 악 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해야 한다. 악행을 거절하지 않으면서 선행을 추구 하는 것은 서로 모순적이어서 아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선을 행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이런 소극적인 차원을 넘어 삶 그 자체가 선행이어야 한다는 적극적인 요청을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신자 는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사는 것이다. 신자에게 선행은 삶의 일 부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이며, 일이 아니라 삶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권면 은 이보다 더욱 강렬하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신자들이 선 한 사업에 부요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행이 증가되고 확대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재물에 부요하기 위해 서는 투자를 해야 하듯이, 선행에 부요하기 위해서도 투자를 해야 한다. 신 자는 자동적 선행에서 능동적 선행으로 전진해야 한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선행의 개발과 진흥을 권면하고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부자들이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권면한 다. 재물을 무조건 움켜쥐고만 있는 것은 신자의 삶이 아니다. 성숙한 신자 는 깨끗하게 벌어서 아름답게 나눈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정직한 수입도 중 요하지만 박애적인 지출도 중요하다. 이것은 신자가 평소에 나누어주는 삶 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권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것은 연약한 사람들의 삶에 동 참하라는 것이다. 나누어주는 것이 물질에 관 련된 것이라면 동참하는 것은 인격에 관련된 것이다. 물질적인 구제는 있지 만 인격적인 관계가 없다면 크게 잘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어줄 뿐 아니라 연약한 사람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 는 것이 요구된다. 선을 행하는 것 그리고 선한 사업에 부요한 것,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것 그리고 동참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고스란히 따온 것이 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성육신하게 하심으 로써 이런 성품을 절정에 다다르도록 보여주셨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성품 닮아야 만일에 신자들이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요하며, 나누어주기를 좋아하 고 동참하는 자가 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절친한 친구가 되는 것이 다. 그것이야말로 사람보다도 못한 삶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처럼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목적하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 나님답게 사는 것이다.
174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23)_하나님의 반대편_딤전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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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9 2007-12-05
조병수의 목회편지(123)_ 하나님의 반대편_딤전 6:17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나의 입장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반대편은 꼭 있다. 그 반대편의 성격이 고집스럽거나 그가 제시하는 논리가 치밀하거나 그 편 에 많은 사람이 가담되어 있을 때는 불쾌함을 넘어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된 다. 가장 화가 나는 경우는 나와 절친한 친구가 반대편의 손을 번쩍 들어줄 때이다. 이때는 속이 상할 정도가 아니라 뒤집어지고 눈알이 튀어나온다. 친구가 반대편에 설 때 가장 가슴 아파 그래서 우리는 우리 편 사람이 반대편에 서서 거드는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 지지 않도록 열심히 단속을 한다. 반대편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자 세하게 일러주고,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강도 있게 알려준다. 이렇 게 할 때 사람들은 반대편으로 가는 것을 그치고 우리 편에 견고하게 자리 잡는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반 대편으로 가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사 도 바울에 의하면 이런 오류는 특히 이 세상에서 부한 사람들에게 쉽게 발생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 특히 부한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첫째는 높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며, 둘째는 재물 의 불안정함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높게 생각하는 것은 교만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참 감람나무) 의 꺾임을 본 이방인들(돌 감람나무)이 교만하면 똑같이 꺾임을 당할 것이라 고 말할 때 비슷한 용어를 사용했다(롬 11:20). 또한 높게 생각하는 것은 자 의(自意)를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이 서로를 위한 생각을 가져야지 자기에게서만 나오는 생각을 갖게되면 공동체가 파괴될 것이라고 말할 때 이 와 비슷한 용어를 사용했다(롬 12:16). 사도 바울은 재물을 불안정한 것으로 간주한다. 재물은 풀의 꽃같이 지나간 다(고전 7:31; 약 1:10-11). 그래서 불안정한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처럼 불 안한 일이 없다.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은 흔들리는 물 위에 발을 딛는 것 과 다를 바 없고, 흩어지는 바람을 손으로 낚아채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두 가지를 하지 말라고 말한 다음에 한 가지를 해야 한 다고 역설한다.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 지 말고 ...하라”는 구조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반대편이 무엇인지 명확하 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반대편은 첫째로 재물의 불안정함에 소망을 두는 것 이며, 둘째로 높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특히 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 만일에 우리가 아주 짧은 시간이라 도 하나님의 반대편에 선다면 사도 바울의 속은 뒤집어지고 그 눈알이 튀어 나고야 말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두 가지 반대편에 들 어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소상하게 일러주고, 이어 우리 편인 하나님이 어 떤 분인지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 편인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주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첫째 특징 은 자신의 것을 수여하고 허락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사람들처럼 자기의 것을 꽉 움켜쥐고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손을 벌리고 팔을 펴기를 좋아하신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신다. 하나님은 심지어 자기의 아들까지 도 아끼지 않고 내주셨다. 하나님의 주심에는 희생적인 성격이 들어있다. 그 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심은 총체적 수여라는 말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후히” 주신다. 사실 이 단어의 뿌리는 앞에 나온 “부 한 자들”과 “재물”이라는 단어와 동일하다. 이것은 하나님이야말로 참으 로 사람을 부자로 만들 수 있고 물질을 부요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만들어 주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목적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누리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후히 받아 누리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누리고, 그렇게 하여 하나님 자신을 누려야 한다. 사람의 중요하고 가장 고상한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누 리는(enjoy)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최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나님 편에 서자.
173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22)_가까이 가지 못할 빛_딤전 6: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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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9 2007-11-14
조병수의 목회편지(122) _ 딤전 6:15-16 가까이 가지 못할 빛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조차 관심이 없다면” 부모의 은덕을 기리는 노랫말을 듣거나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를 읽다보 면 부모와 스승을 묘사하기 위해서 무진장 애쓴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보 통 말로 그들의 사랑과 노고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죄송한 일이기에 주로 등장하는 단어들이 하늘, 태산, 바다, 이런 것들이다. 부모 은덕 기리기 쉽지 않아 아마도 이런 현상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정의하고자 할 때도 동일하게 나타나 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화가가 열정을 그리려면 붉은 색을 많이 사용하고, 순결을 표현하려면 대체로 흰색으로 꾸미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색깔 만 가지고는 만족하지 못해 화폭에 어떤 무늬를 그려 넣기 위해 엄청나게 고 뇌한다.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어렵다. 그래서 성경의 기자들까지 도 이 어려움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듯이, 자주 우주 의 신묘불측한 현상을 가 지고 하나님을 묘사한다. 하나님은 홀로 하늘을 펴시고 땅을 그 자리에서 움 직이시며,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고 별들을 흑암에 가두신다(욥 9:6-8). 하나님은 눈을 양털같이 내리시고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신다(시 147:16-17). 특히 욥기 38장에서 41장을 죽 읽으면 하나님의 위용 앞에 그만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욥 자신 의 말을 인용하자면,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다(욥 40:4). 이런 어려움은 사도 바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그에게 하나 님의 지혜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획도 긋지 못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서 사도 바울은 한 단어, 한 단어 그리 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엄청난 신학을 함의하고 있는 여러 가지 장중하고 엄 숙한 표현을 열거하여 하나님을 묘사한다. 사도 바울은 가장 먼저 하나님이 복되시고 유일하신 능력자이심을 선언한 다. 하나님에게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그 자체가 복스러 운 것이며, 다른 어떤 것이 견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복을 주실 수 있고 자신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입증하실 수 있 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얻고 오직 하나님을 의존 할 때 능력을 받는다. 또한 사도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시다. 시간 과 공간을 막론하고 모든 왕들과 모든 주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이 아니며 주 가 아니다. 모든 왕들은 아무리 잘 다스려도 하나님처럼 다스릴 수 없고, 모 든 주들은 아무리 잘 통치해도 하나님처럼 통치할 수 없다. 하나님의 왕권 과 주권만이 영원과 시간에서 그리고 초월과 내재에서 완벽하게 유효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을 때 모든 것은 안전하고 안정된다. 하 나님의 왕권과 주권을 떠나는 것은 그 자체가 파멸의 길이며 패망의 삶이 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죽지 아니함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며 가 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이라고 정의한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 능하지만 절대로 불가능한 두 가지 “안 됨”이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는 죽 는 것이 안 된다. 하나님은 죽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영원한 자존자이시기 때문이다. 따라 서 하나님께만 진정한 생명이 있고, 하 나님이 관련하는 모든 것은 생명을 얻는다. 둘째로 하나님께는 접근하는 것 이 안 된다. 누구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 님은 최상의 광명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장 밝은 빛을 소유하고 계 시므로 모든 것은 하나님과 관련할 때 빛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과 관련하여 두 가지 “못함”이 있다. 첫째는 과거와 이전에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이고, 둘째는 현재와 미래에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실 때만 보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하나님 모습 그리기 쉽지 않아 성경 이상으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면 다시 하나님을 묘사하지는 못할망정, 이미 알려진 설명마저 도외시하다니, 그게 말이 되겠는가.
172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21)_하나님은..._딤전 6: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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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6 2007-10-31
조병수의 목회편지(121)_딤전 6:15-16 하나님은.... “하나님 지식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날씨는 점점 차가워지는데 정계는 점점 뜨거워진다. 대통령 선거철이 다가오 면서 후보들 사이에 그리고 그들을 제각기 밀고 있는 정당들 사이에 정책대 결로 불이 붙을 정도로 열기가 달아오른다. 아마도 그 싸움은 상대방을 쓰러 뜨리려는 흑색선전으로 발전할 경우에 더욱 가열될 것이 분명하다. 대통령 선거 열기 한창 올라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 어느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들이 그 정당에서 출마하는 대통령 후보를 잘 알기 위해서 머리를 싸매고 과외공부를 한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정당 사람들이 그 후보 를 꺾기 위해 온갖 흠집을 찾아내서 공격을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것을 방어하려면 먼저 그 후보의 문제점을 숙지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다. 세상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신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 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는가? 하지만 불행한 것은 그 게 말이 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를 자기가 믿는 종교라고 표방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이루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이 다. 교회에 다니고, 예배에 참석하고, 대단한 직분을 맡아 봉사하고, 기독교와 관련된 사회사업에 열심을 내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별 관 심이 없다. 교회 다니는 것이 재미있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에 만족하고, 직 분을 감당하는 것이 감사하고, 기독교 사회사업을 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 길 뿐 더 이상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지식이 없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의 첫 부분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한 적이 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 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1:17).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마무리하는 끝 부분에 이르러 다시 비슷한 용 어들을 사용하여 (사실은 조금 더 확대된 방식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한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오직 그에게 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6:15-16). 사도 바울이 첫 부분에서처럼 끝 부분에서 다시 한번 비슷하게 하나님에 대 하여 되풀이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믿는 하 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시한 내용은 아마도 초기 기독교가 예배에서 아니면 입교식에서 개인의 신앙고백으로 암송하던 하나 님 찬양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단락에 열거된 여러 가지 표현법은 그 하나 하나가 모두 중요하다 못해 장중하고 엄숙한 것이다. 그래서 이 하나 님 찬양시는 한 단어, 한 단어 그리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엄청난 신학을 함 의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에는 하나님 지식이 있었다. 하나님 지식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이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수록 하 나님을 확실하게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 고 말 할 수가 없다. 신자들에게 믿음이 독실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을 제대 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분명히 아는 일에 게으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 지식이 하나님을 전해야 할 이유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 나님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전하지 않을 때 속이 새까맣게 타버리고 입이 바싹바싹 메마른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전하지 않 는 까닭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더욱 모르는 상태 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지식이 악을 멀리할 뿐 아니라 악과 싸워야 할 이유이며, 하나님 지 식이 선을 가까이 하고 선을 베풀어야 할 이유이다. 우리는 일일이 다 거론 할 수 없는 모든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옛날 호세아 선지자가 말했던 것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호 4:1,6). 하나님 모르면 망할 수밖에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힘주어 외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 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
171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20)_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_딤전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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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7 2007-10-17
조병수의 목회편지(120)_ 딤전 6:14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재림 신앙, 모든 것을 의미 있게 만들어”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삶에 대한 전도서 식의 평가는 초대기독교인들에게 도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인생에 변화가 있더라도 그것은 허무한 것이 며, 순환이 있더라도 그것은 식상한 것이다. 삶이란 비슷한 요철의 반복이 며 평범한 굴곡의 연속이다. 인생에서 모든 게 그렇고 그렇다. 인생에서 새로운 것 없어 이런 입장은 신약성경의 기자들이 부와 가난에 대하여 말할 때 아주 선명하 게 나타난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약 1:9-10). 심지어 부한 자를 포함하여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말할 때(약 1:10; 벧전 1:24) 전도 서 식의 견해는 절정에 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하다는 것 그 자체도 그저 그런 것일 뿐이다. 하지만 부요함이란 것은 그저 그런 것일 뿐 아니라 인생에 엄청난 손해를 끼 치는 독소적인 성분도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째 편 지의 끝부분에서 부에 관한 문제를 꽤 끈질기게 다루면서 이 사실을 강하게 표명하였다. 이미 앞에서 사도 바울은 부하려 하는 자들에게 재물이란 시험과 올무에 떨 어뜨리며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돈을 사랑하고 탐내 는 마음에 주의를 주었고(9-10절), 다시 뒤에서 부한 자들에게 마음을 높이 지 말고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말하면서 오직 모든 것을 후히 주시어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마음과 소망을 둘 것을 권면한다(17절). 부요함이 란 그저 그런 게 아니라 때때로 삶을 치명적으로 망가뜨리는 무서운 세력이 라는 말이다. 그래서 결코 안정되지 않은 재물의 부요함에 의존해서 사는 것은 매우 불안 한 삶이다. 사도 바울이 부의 문제를 다루는 이유가 보통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의존할만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재 물의 부요함을 의존하는 것이 불안하다는 말은 곧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 을 의지해서 사는 것이 불안하다는 말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참된 안정을 줄 수 없다. 오히려 세상 에 있는 것을 의지하면 불 속에서 꺼낸 숱 조각을 잡는 것처럼 손이 더럽혀 지고, 상한 갈대를 잡는 것처럼 손에 상처를 입는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진정으로 의존해야 할 대상이 세상 밖에 있다고 말한 다. 그분은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의 나타나심을 전심을 다해 기다린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대 망하는 데는, 그 이유만은 아니지만, 재물의 부요함이 가장 신뢰할만한 것이 라고 믿는 세상에 대한 불신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상 밖에서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참된 안정을 발견 할 수 있다.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며 신앙하는 것만이 비바람에 도 흔들리지 않는 산성과 같은 것이며, 폭풍우에도 요동하지 않는 요새와 같 은 것이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할 때, 거기에서부터 신자의 윤리가 출 발한다. 그런 든든한 믿음에 의하여 신자는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삶을 견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림에 대한 신앙은 현실적인 윤리 의 동인이다. 예수의 재림이 신자의 현재를 결정한다. 윤리는 신앙의 열매이다. 재림을 믿는 것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발생 하며, 삶의 새로운 시도가 착수된다. 이렇게 볼 때, 재림신앙은 삶의 대변혁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도 바울 자신이 항상 새롭고 항상 역동적이었던 것 도 이런 재림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분명히 신자는 삶이란 것이 그렇고 그런 것이며, 삶에 가장 큰 유익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것조차도 도리어 큰 해악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래서 신자는 세상에 있는 것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 스도를 대망한다. 신자는 재림의 주 소망해 신자는 재림신앙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그렇고 그런 세상이라도, 심지어는 가장 믿을만한 것까지도 손해꺼리가 되는 세상이라도 도피하지 않고 고스란 히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이 세상 에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거룩한 명령을 지키는 것이다.
170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19)_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딤전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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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1 2007-10-04
조병수의 목회편지(118)_ 딤전 6:13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조병수 교수_합신,신약신학 정치에서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종교적인 진리를 귀담아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 진리란 단지 자신의 권좌를 정당화하 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종교의 필요성을 느낀다면, 그것은 단지 정치를 위해서 그럴 뿐이다. 정치에서 진리란 단지 수단일 뿐 이런 모습은 실제로 역사상에 자주 발견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우리 땅을 강점했던 일제가 기독교를 회유하면서 보여주었던 모습이다. 독일의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가 나치에게 충성을 다짐한 “독일 기독교”(Deutsche Christen)에 대하여 가졌던 자세도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아마도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을 들을 때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의문은 막 강한 정치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순전한 마음으로 종교적인 진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 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거북스럽지 않은 까닭은 구태여 로마의 역사서까지 들춰보지 않았더라도 간단히 복음서를 통 해서 빌라도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빌라도는 티베리우스 황제 아래서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유다의 총독으 로 재직했다. 그 때는 유대교 안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쿰란)파 등 등 다양한 갈래들이 생겨 제각기 목소리를 내던 시기였다. 따라서 유다를 관 할하던 본디오 빌라도는 이런 종파들의 설교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을 것이 다. 특히 본디오 빌라도가 세례자 요한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와 동시대를 살았다 는 사실은 정치와 종교가 해후할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된다. 비록 많은 내용은 아니지만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 도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분명하게 진리를 밝히셨다. 이렇게 하여 빌라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접했던 것이다. 빌라도가 여태까지 들었던 말 중에 이보다도 더 귀중한 말은 없었다. 하지 만 사람의 몸을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곁에서 생생한 음성으로 들 려주는 그 놀라운 진리를 최고의 정치 권력자는 아낌없이 내버렸다.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란 것이 정치적인 목적에 그다지 영양가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반복되는 현상이지만, 권력자에게 는 진리라도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를 아연하게 만든 다. 보통은 권력에 아부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 않은가. 정도야 어떻든 지 간에 사람들은 정치를 쥐락펴락하는 세도가에게 빌붙으려고 하는 법이 다. 그런 인물 앞에 설 때 웬만한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자신이 믿 는 종교적인 진리라도 슬며시 감추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골라낸다. 정치 앞에서 진리는 왜곡되기 싶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이런 일반 적인 모습과 현저하게 달랐다. 그분은 당시 최고 실세인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 선한 고백을 당당하게 증언하셨다. 그것은 정치가 진리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정치보다 앞선다는 것을 밝힌 순간이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 향하여 제출한 것이 다름 아 닌 선한 고백이었다고 요약한다(13절). 예수 그 리스도의 선한 고백은 땅의 세계보다 하늘의 세계가 상위한다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땅의 정치는 하늘의 진리를 수용할 때 생명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진리를 수용한 정치만 이 더러운 흙탕물에서 벗어나 맑고 잔잔한 호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 다. 어찌 세상의 정치에서뿐이겠는가. 세상의 정치에서도 진리가 선도적인 역할 을 해야 한다면, 교회의 정치에서는 더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지역교회에 서 담임목사가 진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신자들을 향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 두르고, 몸집이 큰 교회가 작은 교회들을 향해 진리에서 벗어난 횡포를 부리 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을 전혀 알지 못하는 행위이다. 진리가 정치 선도할 때 횡포 없어 이런 오류를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도 진리를 말하는 정신으로, 그리고 진리로 정치 를 선도하는 정신으로.
169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18)_선한고백_딤전 6:1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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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6 2007-09-13
조병수의 목회편지(118)_딤전 6:12b 선한고백 조병수 교수_합신신약신학 소명을 너무 사역과 관련해서만 이해하려는 시도는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 서 어떤 일을 맡기시기 위하여 사람을 부르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어 떤 사람에게는 전도가 소명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구제가 소명이다. 소명은 영생 위한 부르심 의미해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치유사역을 소명으로 받았다거나 찬양사역을 소명으 로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하지만 소명이란 근본적으로 영생을 위 한 부르심이다. 여기에 복음의 요점이 들어있다. 만일에 영생에 부르심을 이 해하지 못한 채 소명을 사역과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초를 놓지 않 고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근본적으 로 전도를 위한 것도 아니고 구제를 위한 것도 아니다. 영생을 위한 부르심 없이는 그런 모든 것이 처음부터 아예 무의미하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생을 위한 부르심을 이해하는 사람은 영생에 대 한 신앙을 고백한다. 오늘 날 현대교회에서 나타나는 치명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영생에 대한 신앙고 백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좋게 표현해서 희미하다는 말이지, 사실은 그런 고 백이 부재하다고 말해도 잘못이 아닐 정도이다. 슬픈 일이지만 영생에 대한 설교도 없고 영생에 대한 찬송도 없다. 설교자들은 이 땅에서의 성공과 행복을 말하느라고 분주하고, 신자들은 이 땅에서 뭔가 신비한 것을 체험하고 싶다는 노래를 부르느라고 바쁘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보느라 햇빛을 놓치는 것처럼 현세의 웰빙에 몰두하다가 영 생의 영광을 느끼지 못한다. 가로등 밑을 떠나지 않으면 달의 찬연한 빛을 맛보지 못하듯이 영생을 알려면 일시의 그늘에서 떠나야 하는 법이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늘에 속한 것이다. 영생 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을 가리킨다. 우스갯소리겠지만 어떤 이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으면 지겹지 않겠느냐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랑하 는 사람과 오래 있으면 지겹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사람은 사랑할 자격이 없다. 아마도 이런 사람은 시편기자에게서 무릎을 꿇 고 공손 히 한 수 배워야 할 것이다(시 16:11). 또한 영생은 하나님을 영원히 아는 것이다(요 17:3). 사도 바울이 다른 데 서 고백했던 것처럼, 신자는 영생의 세계에서 온전한 지식으로 인한 끊임없 는 즐거움을 맛본다(고전 13:12). 달리 말하자면,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영원히 누리는 가장 큰 기쁨의 연속이다. 영생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그 신앙을 간직하려다가 이 세상에서 조금 잘못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신자는 영생에 대한 고백 때문 에 금생에서 희생하는 것도 감수한다. 또 다른 곳에서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신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집, 하늘에 영 원한 집이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고후 5:1). 그런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의 자존심 을 버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포기하며, 영생의 즐거움 을 위해서 금생의 기쁨을 양보한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영생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디모데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영생을 위하여 선한 신앙고백을 한 것을 칭찬 n하면서 가슴속에 두었던 이야기는 대략 이런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사도 바 울이 이런 말을 하면서 끝끝내 입 밖에 내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면, 그것은 영생을 고백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보여야 할 품위에 관한 것 이라 생각된다. 영생을 고백하는 신자는 아무 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이며, 부요에 도 가난에도 처할 수 있기에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 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생을 고백하는 신자는 마음이 너그럽고 넉넉하며, 생각이 여유롭고 부드럽다. 영생을 위해 부름받음 명심해야 보석을 가진 사람은 잡석을 놓고 싸우지 않으며, 하늘을 소유한 사람은 땅 을 위해서 다투지 않는다. 왕궁을 얻은 사람은 모래성 때문에 근심하지 않으 며,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세상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 내일을 아는 사람 은 오늘에 매이지 않으며, 영생을 고백하는 사람은 금생 때문에 쩨쩨하지 않 다.
168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17)_미덕목록_딤전 6:1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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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1 2007-08-16
조병수의 목회편지(117)_ 딤전 6:11C 미덕목록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윤리에서 실패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종교는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 어 떤 종교든지 도덕의 실패는 바로 그 종교의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런 의미에서 종교의 생명력은 윤리의 강도에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윤리 떠난 종교 있을 수 없어 종교는 종교다운 고상함과 우아함을 보이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그 종교가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서 반드시 윤리를 동반해 야 하는 법이다. 종교에서 윤리가 뜻하는 바는 장식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말 이다. 이렇게 볼 때 종교적 윤리라는 말이나 윤리적 종교라는 말은 별거 아 니라는 듯이 절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수평적인 차원에서 보면 초기 기독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방식으 로 이해할 수 있다. 윤리를 무시한 기독교라는 것은 처음부터 지구상에 존재 하지 않았다. 윤리는 초기 기독교에 내재한 본질의 일면이었 다. 우리는 이 사실을 초기 기독교가 윤리를 무한적으로 강조했다는 것에서 어렵지 않게 규 명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윤리만을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윤리를 소유하고 윤리를 교육한 것이 초기 기독교의 성공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말해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윤리 강조는 신약성경에 여기저기 등장하는 윤리목록들을 볼 때 어렵지 않게 입증된다. 신약성경의 윤리목록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자들이 따라야 할 덕목들을 열거하는 미덕목록이며, 둘째는 신자들이 피해 야 할 악행들을 열거하는 악덕목록이다. 신약성경에 분포되어 있는 윤리목록은 초기 기독교가 윤리를 얼마나 중시했 는지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렇게 명확한 윤리목록들을 제 시받음으로써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쓸데없이 힘과 시간을 소모하는 논쟁을 벌이지 않고 세상에서 바로 윤리적인 삶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미덕목록을 한 가지 제시하였다. “의와 경건과 믿 음과 사랑과 인내 와 온유.” 이런 덕목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세상 사람과 질적으로 얼마나 다른지 쉽게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이다. 세상 사람은 의롭지 않고, 경건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고, 예 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며, 성령의 열매인 인내나 온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세상에서 신자는 미덕목록을 따름으로써 신자의 품위를 증명하고 세상 과의 차별을 증명한다. 그러나 신자가 이런 덕목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세 상 사람과의 차별화 때문만은 아니다. 신자가 이런 덕목을 따르는 것은 자신이 고백하는 신앙과 자신이 신앙하는 신학은 반드시 일상생활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학은 윤 리의 나무이며, 윤리는 신학의 열매이다. 초기 기독교의 신자들에게는 신학 과 윤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신학은 신학대로 따로 놀고, 윤리는 윤리 대로 따로 노는 그런 기독교는 아예 없었다. 윤리는 신학에 뿌리를 내리고, 신학은 윤리로 꽃피는 것, 그것이 초기 기독 교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윤리는 철저하게 신학적인 윤 리였고, 초대교회의 신학은 철저하게 윤리적인 신 학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능력은 신학과 윤리의 동반성에서 표출된 것이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에서 최악의 취약점은 윤리를 상실했다는 데 있다. 목회 자도 성도도, 교회도 교회와 관련된 기관들도 그렇다. 부끄럽게도 기독교의 이름을 붙이고 있는 어디 한 곳에서도 고귀한 도덕성 때문에 칭찬을 받는 곳 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우리에게는 신학도 없고, 윤리도 없다. 지금 기독교는 스스로 펜을 꺼내들고, 표준으로 삼아야 할 윤리목록을 작성 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리고 윤리목록을 지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 면서 과시와 사치와 오만과 욕심과 아집, 이런 것들을 내버려야 할 때가 아 닌가? 사치, 오만, 욕심, 아집 버려야 우리는 윤리적 신학과 신학적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의 성공은 우리에게 도외시할 수 없이 중요한 교훈이다. 현대의 기독교가 윤리에서 실 패한다면, 그것은 머지않아 기독교 그 자체의 실패가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한 다.
167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16)_영생을 취하라_딤전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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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8 2007-07-25
조병수의 목회편지(116) 딤전 6:12 영생을 취하라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 가운데 “초기 카톨릭주의”(Early Catholicism) 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초기 역사를 해석하는 한 가지 방식에서 나온 전문어이다. 신약성경 기록이 막 종료될 시기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 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늦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서 세계의 교회를 강력한 조직으로 묶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 다. 종말 공동체에서 현실 바라봐 이렇게 하여 어느덧 1세기 말의 기독교는 종말 공동체에서 현실 공동체로 탈 바꿈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종말이 아니라 현실이 라는 생각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주장이다. 초기 카톨릭주의 이론에 따르면 세계에 흩어진 교회는 점점 집중화되고, 조직화되고, 현실적이 되었다. 그러 다가 마지막에는 로마 카톨릭과 같은 작품이 생산되었다는 것이다. 이 그럴듯한 해석 방식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여기는 그것들을 제시 할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다. 단지 이 주장을 바라보 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주장이 초기 기독교의 상황보다는 현재 기독교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론의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현대의 기독교를 평가하는 데 큰 도움을 얻는다.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하여 개발된 이론 이 현대 기독교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더 잘 맞는다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닌가? 그만큼 현대 기독교는 카톨릭주의의 원단(元旦)으로 너무나도 열심 히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기독교에 이런 귀환성이 너무나 강하고 다양해서 작은 지면에 일일 이 다 적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성직자주의는 언제나 우리 가 경계해야 할 큰 위험요소이다. 목회자가 경건보다는 외형으로 일반 신자 들과 구별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경적 교훈과 가르 침을 버리고 계급과 조직을 강화하여 왕처럼 군림하는 것, 이런 것들은 매 우 위험한 발상이다. 한 교회가 제도적으로 수하에 여러 교 회를 거느리는 것, 정당성이 없는 온갖 기막힌 수단을 다 동원해서 자식에게 목회를 세습하 게 하는 것, 이것도 역시 모두 성직자주의의 일환이다. 이와 연관해서 더 생각해 볼 것은 기독교가 물질주의의 지독한 감염에서 도 무지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는 필요한 교회 건물에 불필요한 고가의 실내장식을 더하느라 열을 올리고, 세상에서 경제적 으로 성공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복 중에 복인 것처럼 자랑한다. 물질주의는 결국 실적위주의 선교를 낳는다. 실적을 요구하는 본국 교회의 눈을 의식하여 선교사들이 한 달, 두 달 길지도 않은 기간 동안 자신이 행 한 세세한 일들을 보고하려고 며칠이나 끙끙대며 문서를 작성하는 것은 바람 직한 일이 아니다. 세속의 물결이 기독교의 중심에서 범람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침몰하는 현장에는 꼭 신비주의가 있다. 신비주의는 영적 몰입을 바탕으로 하는 신비한 체험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을 형성한다고 강변한다. 심지어 아말감으로 때운 치아가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금니로 변 한다는 괴상한 가르침이 인기를 얻는다. 현대 기독교는 신비주의의 유혹 에 약하다. 그래서 기독교는 미신과 크게 다 를 바 없는 종교로 타락하고 있다. 어디엔가에서는 주기도문을 만 번 외우 면 무엇이든 소원 성취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설교가 버젓이 행해졌다니 정 말 가소로운 일이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이런 현상들이 발생한 까닭은 기독교가 현실에 지나치게 목 을 매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영생을 취하라”고 권면함으로써 기 독교의 본질이 여전히 현실 저 너머에 있다는 진리를 설파하였다. 영생이란 이미 현실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뿌리 는 사람들의 “여기”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저기”에 있다. 기독교 본질은 현실을 초월해 현실은 영원에 의하여 해석될 때만 참된 가치가 있다. 본래 이것이 기독교 가 줄곧 가르쳐온 진실이다. 그러나 현대의 기독교는 현실에 골몰하여 영원 을 잊어버렸으니 무엇인들 제대로 책임질 수 있겠는가? 목회수상 안 나누면 불량배 ‘악한 불량배들’이라는 표현은 뒷골목에서 깍두기 머리에 검정양복을 입 고 주먹다짐을 하며 살며 때로는 쇠파이프와 회칼로 무장하고 패싸움을 벌이 는 자들을 연상하게 한다. 만약에 어떤 목사가 불량배들을 기반으로 삼아 교 회를 세운다면 그 교회의 모양새는 어떻게 될까? 혹시 어떤 사람이 불량배들 을 기반으로 국가를 세웠다면 그 국가의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이익만 구하는 사람들 교회이면서 동시에 국가인 다윗 왕국이 세워질 때 다윗을 따르는 무리 가운 데 악한 불량배들이 있었다고 사무엘상 30장 22절에서 말하고 있다. 살기등 등한 사울을 피하여 국외로 떠돌던 다윗이 아둘람 굴에 정착했을 때에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및 전국에서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이 모두 다 윗에게로 모였다. 그들은 모두 사울의 통치하에서 약자들이었고 부당한 대우를 감당하지 못한 피해자들이었다. 다윗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은 그런대로 다윗을 잘 따랐고 그 중에는 후에 엄청난 용사가 된 자들이 많다. 다윗은 이들을 데리고 그일 라를 구출한 적도 있고 후에 블레셋의 시글락에 정착한 후에는 이들과 함께 그술과 기르스와 아말렉을 쳐서 승리하기도 했다. 그런 다윗에게 어느 날 위기가 닥쳤다. 블레셋 왕 아기스가 이스라엘과 전쟁 을 시작하면서 다윗에게 동참하라 고 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아기스의 다 른 부하들이 다윗은 믿을 수 없으니 전쟁에서 제외시키라고 요구했다. 다행 스럽게 전쟁에서 제외된 다윗이 시글락으로 돌아왔을 때 시글락은 아말렉 사 람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폐허가 되어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 말렉을 추격하여 모든 포로들과 전리품을 되찾아왔다. 그런데 아말렉을 추격할 때 부하 가운데 너무 지친 200명을 중간에 머물려 두어 짐을 지키라고 했는데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전쟁에 가담했던 400명 중 에 어떤 사람들이 낙오했던 200명에게는 전리품을 나눠주지 말자고 주장하 는 것이 아닌가? 그들에게는 그저 가족이나 돌려주어서 떠나가게 하자고 했 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고한 사람이 이익을 차지하는 것은 맞다. 적자 생존원칙에 의하면 무능한 자들은 도태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사무엘상 기록자는 “악한 자와 비류들”이라고 부른다(삼하 30:22 개역성경, 개역개정판에는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라 고 표현한다). 물론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 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주신 것 을 모든 형제들이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 옳다 고 하여 그것을 이스라엘의 규례로 삼았다. 다윗의 부하 가운데 불량배가 있었다는 말은 어딘가에서 건달들의 무리가 다 윗 휘하에 들어왔다는 말이 아니다. 이 사건 이전에나 그 후에는 다윗의 부 하 가운데 불량배들이 있었다는 말이 전혀 없다. 결국 그들이 악한 불량배들 이라고 불린 것은 하나님의 복을 나누지 않고 독차지하겠다고 주장했기 때문 이다. 즐겨부르는 복음송 가운데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더 가지지 않는 것” 이라는 노래가 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실제로 성령이 충만한 초대교회의 모습 은 자기 것을 제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유무상통한 것이 특징이었다. 반면 뒷골목 건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들은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으며 자기 만 가지려고 하는 자들이다. 더 많이 가지려고 무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남 을 죽이기까지 하는 자들이다. 다윗의 부하 가운데 악한 불량배들은 약자들은 떠나보내고 강자들끼리 전리 품을 더 많이 차지하자고 했다. 모든 복과 승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것 을 나누지 않고 독차지하려고 한다면 이처럼 악한 불량배가 된다. 그런 자 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사탄의 종이 되는 것이다. 다행한 것은 다윗 의 부하 가운데 일시적으로 불량배처럼 행동했던 자들은 다윗의 강력한 리더 십과 사랑의 법칙에 순응하여 다윗왕국의 세우는데 일등공신들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전리품을 우리에게 나눠주면서 함께 살자고 하셨는데 이젠 우리 차례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리품을 더 연약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서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함께 살도록 배려하자. 물론 다윗의 부하들처럼 오 늘날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데 동참하려고 나선 제자들 가운데에도 그리 스도의 사랑의 법칙에 더디게 적응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아니 우리 중 에 누구든지 그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서 주인공 임상옥은 상인의 최종 목적은 돈이 아니 라 사람을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최종 목적은 천하보다 귀한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사 실을 명심하자. 사람을 얻는데 목적 있어야 하나님이 주신 복은 나만을 위한 것 이 아니라 지경을 넓히라는 수단으로 주 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경을 넓혀나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 에 복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166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15)_피(避)와 추(追)_딤전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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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4 2007-07-11
조병수의 목회편지(115) 딤전 6:11 피(避)와 추(追)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믿음의 성패는 일상에서 결판이 난다. 우리에게는 무슨 신기한 현상을 체험 할 때 믿음이 강화되고 그렇지 못할 때 믿음이 상실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은근히 이런 생각을 조장하고, 또한 적지 않 은 신자들이 뭔가 특별한 것을 맛보고 싶어 안달을 한다. 일상에서 쉽게 판가름나는 ‘믿음’ 물론 어떤 놀라운 일들을 경험한 결과 신앙이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는 경우 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훌륭해지느냐 아니면 망가지느냐 하는 것은 훨씬 더 일상적인 생활에서 벌어진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에서 신앙이 독실하게 자라기도 하고 형편없이 무너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날마다 만나는 삶의 현장을 믿음의 현 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신앙의 이런 일상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피하다”라는 말과 “따 르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피(避)와 추(追)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한 시도 따돌릴 수 없이 필연적으로 반복하는 두 가지 행위이다. 바꾸어 말해 서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을 피하거나 어떤 것을 따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일상 생활가운데 무엇인가를 멀리하고 무엇인가를 가까이하는 것을 수없이 반복한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그러나 피하는 행위와 따르는 행위는 서로 간에 너무나 순간적으로 교체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이 둘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을 피하는 것은 다른 것을 따르 는 것이며, 무엇을 따르는 것은 다른 것을 피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길에서 성공하려면 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피(避)는 우리가 이미 일상생활 가운데 익숙하게 연습한 방법이다. 사도 바 울은 “이것들”을 피하라고 지시한다. “이것들”이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다른 교훈(3절), 교만과 변론과 언쟁(4절),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 (4절) 그리고 돈을 사랑함(10절) 같은 것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우리가 매일같이 끊임없이 마주치는 문제들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이것들 ”이 짙은 안개처럼 빽빽하게 포진해 있다. 우리 의 귀는 계속적으로 다른 교훈을 듣고, 우리의 마음은 쉴 새 없이 교만과 투 기와 악한 생각에 공격을 받으며, 우리의 입은 틈만 나면 변론, 언쟁, 비방 을 내뱉기에 알맞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들”에 직면한 우리에게 아주 간단히 “피하라”는 대처방법을 제시한다. 어찌 보면 이것은 너무나 간단해 서 과연 이런 방법으로 “이것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도 한다. 바로 이런 의구심을 깨뜨리겠다는 듯이 사도 바울은 또 하나의 처방을 내밀 었다. 그것은 “따르라”는 제안이다. 피하는 것은 결국 따르는 것으로 연결 되어야 한다. 추(追) 역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연습한 방법이다. 사 도 바울에 의하면,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 내와 온유”이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 열거한 여섯 가지 단어는 우리의 일상에 들어와 살이 되 어버린 하늘세계의 신비들이다. 그것들은 출처가 하나님인 것임은 분명하지 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본래는 하나님께 속 해 있던 그것들이 이제는 모두 우리의 현장에 들어와 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 켰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같이 지속적으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 와 온유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인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무엇인가를 따르고 무엇인가를 피한다. 갓난아기였을 때 우리는 먹고 싶은 것에는 떼를 쓰면서 달라붙고 먹기 싫은 것에는 악을 쓰면서 거절했다. 소년시절 우리는 재미있는 것을 열심히 했지 만 재미없는 것 앞에서는 미련 없이 줄행랑을 쳤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되 어서도 무엇인가를 따르고 무엇인가를 피하는 것은 여전히 계속된다. 피할 것과 따를 것조차 구별 못해 우리는 피하는 것과 따르는 것을 일생동안 충분히, 정말 충분히 연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렇게 많이 연습한 피함과 따름을 신앙의 길에서 는 잘 실천하지 않는다. 게다가 더 이상한 것은 따라야 할 것은 피하고, 피 해야 할 것은 따르는 기괴한 행위를 전혀 스스럼없이 저지른다는 것이다.
165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14)_하나님의 사람_딤전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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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8 2007-06-13
조병수의 목회편지(114) 딤전 6:11 하나님의 사람 조병수 교수/ 합신 신약신학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부를 때 다양한 표현법을 사용한다. 신자라고 부 르고 성도라고 부르며 사랑 받은 자, 신령한 자 그리고 형제라는 호칭을 쓴 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의 마지막 단락에 이르 면서 디모데를 향해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사도 바 울이 흔히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을 때 무엇을 생각했을까?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높이려고 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칭 은 높임말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칭은 특별한 사람들 에게 사용되었다. 이 명칭은 우선 모세에게 사용되었다(신 33:1; 대상 23:14). 다윗 왕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되었다(대하 8:14; 느 12:24,36). 엘리야와 엘리사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렸다(왕상 17:18; 왕 하 4:9).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처럼 특별 한 사람들에게 사용되던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칭을 서슴지 않고 디모데에게 붙여주었던 것이다.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러 사실상 디모데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 었다. 디모데는 신체적으로 보면 몸이 연약한 사람이었다(딤전 5:23). 나아 가서 디모데는 연령적으로 보면 아직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다(딤전 4:12). 디모데는 영적인 면에서 보면 아직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할 사람이었 다(딤전 4:7). 그런데도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 까 닭은 일차적으로 디모데가 지도자 모세와 같은 뛰어난 인물, 다윗 왕과 같 은 위대한 인물, 선지자 엘리야나 엘리사와 같은 신령한 인물이 될 가능성 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 자신도 주님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획득하였다. 주님께서는 죄인 중의 괴수로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던 바울을 충성스럽게 여기시어 심지어 복음을 전하는 존귀한 사도의 직분까지 맡기셨다(딤전 1:13).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셨던 그 마음을 그대로 디모데에게 표현했 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 이라는 명칭을 우리에게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 가 된 백성이니”(벧전 2:9). 주님께서는 우리를 디모데처럼 하나님의 사람 으로 높이 평가하신다. 주님은 우리를 존귀하게 생각하신다. 우리는 존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사람답게 합당한 삶 요구돼 디모데가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린다면 그 명칭에 걸맞게 살아야 한 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첫째로 피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 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라”(11상). 사도 바울은 가장 먼 저 디모데가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가 되기 때문이다. 돈이 적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기 어려운 것이 아니며, 돈이 많다고 해서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것도 아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따라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11하). 여기에 나오 는 단어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묘사하는 핵심적인 단어들이다. 이러 한 성품 들을 가지면 그리스도인은 영광스러운 사람이 된다. 사도 바울은 이 것들을 “따르라”고 말했을 때, 그것들을 머리 속에서 빙빙 맴돌게 만들어 서는 안 되고 생활가운데 실천에 옮기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 스도인의 성품을 형성하려면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칭은 그에 합당한 생활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하나님 의 사람으로서 합당한 생활은 이 명칭을 한껏 자랑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하 나님의 사람이 아닌 자는 이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없으며,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칭을 소유할 수가 없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구태여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이 유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신자는 범인처럼 살다가 범인처럼 죽어서는 안 되 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생을 마쳐야 할 것이다.
164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13) 돈을 사랑함_딤전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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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8 2007-05-09
조병수의 목회편지(113)딤전 6:10 돈을 사랑함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최근에 출판된 책에서 미래학자인 자크 아탈리는 세계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추구되던 부의 창조가 기독교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복이 아닌 것이 되었고, 상업적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자유와 개인주의가 후퇴했으며, 진보 는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와 ‘부’의 관계 부각돼 이런 주장은 기독교에 관하여 적어도 두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 가운 데 한 가지는 미래학자가 보기에도 기독교는 일반적인 인간 정신과 현저하 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등장은 물질만능주의로 흐르던 세계의 역사 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그만큼 기독교는 새로운 정신이라는 말이다. 그 러나 위의 주장에는 허구가 숨어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물질관을 아주 잘 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물질관을 몇 마디로 정리하기에는 쉽지 않지만 그 핵심은 의외로 간단하다. 기독교는 절대로 부를 부정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하 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어 누리게 하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이 다(딤전 6:17). 또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변에도 그리고 이후에 사도 들의 협력자들 가운데도 풍부한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는 사실로부터 쉽사리 증명할 수 있다. 나아가서 기독교는 재물을 필요악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손으로 성실하게 일하여 재물을 얻는 것을 선이며 복이 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기들의 손으로 수고하여 일할 것을 권면했고(살전 4:11), 일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리고 말썽을 피우 는 것을 도리어 악한 것으로 간주했다(살후 3:11).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기독교의 물질관이 이기적이 아니라 타익 적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베풀어 어리석은 부자를 비판 했을 때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부자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었 다는 점이다(눅 12:21). 사도 바울이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하는 까닭은 돈을 탐내는 사람들이 “자기를” 찌른 다는 사실 때문 이다(딤전 6:10). 세상과 역사의 비극은 이기적인 부의 추구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기독교가 거절하는 것은 “부”가 아니라 “이기적인 부”이다. 사도 바울이 돈을 사 랑함을 비판하는 것은 오직 자기만을 위하여 물질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 적 정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부의 사상은 나의 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부로 연 결된다. 그래서 엄격하게 말하자면 기독교는 이기적 부가 아니라 타익적 부 를 추구하며, 개인의 부가 아니라 전체의 부를 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신 모범이다(고후 8:9).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지 않다면 우리를 부요하게 하실 수 없고, 그리스도께 서 부요함을 나누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요해지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요하지 않다면 다른 이를 부요하게 할 수가 없고, 우리가 부요함 을 나누지 않는다면 다른 이는 부요해지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의 연보와 구제라는 것이 성립된다. 연보와 구제는 재물을 가지는 것을 전제하 면서 동시에 재물을 나누는 것을 전제한다(행 20:34f.; 엡 4:28). 게다가 기독교의 물질 관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그래서 우 리는 이것을 가리켜 신론적인 물질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어리석은 부 자의 비유로 돌아가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 눅 12:21). 사도 바울이 돈 을 사랑함이 믿음에서 떠나는 결과를 일으킨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가 물질관에서 문제시 삼는 것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중시하는 생각이 다(딤전 6:17). 신앙으로 재물을 다스리지 않고 재물로 신앙을 억누르는 것 이 문제라는 말이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재물에 대한 마 음을 지도할 것을 심각하게 가르친다. 재물을 앞세우는 것이 문제 진정한 자유는 물질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에 매이지 않고 다스리는 것이 며, 진정한 개인주의는 남의 가치를 고양함으로써 나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 이다.
163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12) 부자가 되려 하는 자들_딤전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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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8 2007-04-18
조병수의 목회편지(112) 딤전 6:9 부자가 되려 하는 자들 조병수 교수/합신 신약신학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extensions of man)이다. 이것은 1964년에 미디어 연 구의 선구자인 마셜 맥루언 박사가 세상에 제출한 유명한 책의 제목이며 동 시에 그의 주장의 요점이다. 맥루언 박사의 주장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맞다. 한때 유행했던 “부~ 자 되세요” 미디어가 인간의 확장이란 정의에 타당성이 있다는 것은 예를 들면 미디어 가 내 지식을 멀리 있는 남에게 전달하거나, 남의 지식을 멀리 있는 내게 전 달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에서 그렇다. 미디어는 손을 뻗는 것, 발로 걸어가는 것, 동물이나 기계를 타고 가는 것의 효과적 확장이다. 그러나 미디어가 인간의 확장이라는 말은 물리적인 확장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심리적 기능의 확장이기도 한데 심지어 죄의 확장이기 도 하다. 불행하게도 미디어는 좋은 것 뿐 아니라 아주 나쁜 것까지도 너무 나 강력 하게 보급한다. 미디어가 죄의 확장이란 말에 기분이 나쁘다면 잠시 양보하기로 하고, 때때로 곧잘 욕심의 확장이 된다는 점만을 주지시키고자 한다. 한동안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 유행어는 부자의 “부”자를 길게 발음함으로써 코믹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삽시간에 사람 들의 입을 장악했다. 내가 알기로는 이 말이 어떤 텔레비전 광고의 한 토막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말이 미디어를 통해서 광고된 후에 순식간에 퍼져나가 우리나라에서 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나 우리말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유행어를 마 치 인사말처럼 사용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났을 때, 사람과 헤어질 때 “안 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 대신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심지어 목사들까지 그런 유행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무슨 재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생각했는지 설교를 하는 중에 몇 번이고 그 말을 써먹는 생각머리 없는 일을 저질렀다. 물론 그런 유행어가 히트를 친 까닭은 단순히 인간의 확장이라는 미디어의 역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미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밑바닥에는 부자 가 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리고 있는데 미디어가 그것을 풀어준 것일 뿐이 다. 인간은 자고로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소망이다. 사람들이 재물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 때문에 부 자가 되고 싶어하다. 우리는 재물이 많으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다. 이런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재물을 모으는 데 열심 을 낸다. 우리는 부지런함을 칭찬해야 한다. 근면함은 훌륭한 것이다. 그런 데도 불구하고 부자가 되는 일을 무조건 잘하는 일이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제시한다. 부자가 되려고 하면 반드시 거쳐야 할 무 서운 문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열거했다. “시험 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때때로 악한 사업인 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손을 대려는 시험을 만나 고, 시도하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밖에 여러 가지 차원에서 반드시 엄 청난 고통을 수반하게 될 사업에 말려들고, 욕심을 낼수록 손해를 가져다 줄 일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이것은 부자가 되려는 사 람들이 거의 언제나 당면하는 문제점들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무서운 관문들을 정직하게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청렴한 부자라는 말 은 정당성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통과 절차 앞에서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도달하는 지점 이 어디인지 알려준다. 시험과 올무와 욕심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으로 떨 어뜨린다. 결과를 볼 때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은 열 명이면 열 명이 이구동 성으로 이 사실을 증언할 것이다. 치러야 할 혹독한 시험들 많아 그들은 만일에 악한 사업을 모른 채 하지 않았더라면, 고통을 가져다 줄 일 에 말려들지 않았더라면, 손해를 야기할 일에 욕심을 내지 않았더라면, 지금 도 재미있게 사업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러 므로 그런 늦은 때로 빠져드는 길은 처음부터 피하는 것이 옳다.
162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11) 양식과 의복_딤전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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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2 2007-04-05
조병수의 목회편지(111)딤전 6:8 양식과 의복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는 궁금한 것들이 많다. 그것은 미증유의 놀라 운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들이 말을 절제하고 있어서 세부 사항으로 들 어가면 궁금증이 더욱 심해진다. 부활하신 주님이 입으신 옷 궁금해 아리마대 요셉은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마포로 싸서 무덤 에 안치시켰다. 그런데 부활의 아침에 소식을 전해들은 베드로가 무덤에 달 려가 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사라지고 세마포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부활하신 주님은 무슨 옷을 입으셨을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발견한 아 담이 하나님에게서 옷을 받았던 것처럼 주님께서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옷을 입었을 것이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 지 말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 니라고 가르치셨던 주님께서 부 활의 자리에서 친히 이것을 증명하신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인생의 기본 요소라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성경도 이 두 가지 인생의 기본 요소에 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히 언급 을 한다. 예를 들어 애굽에서 나온 후에 불신으로 말미암아 사십 년 동안 광 야를 걸어야 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만나를 먹이시고 의복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다(신 8:3-4). 물론 거기에는 특별한 교훈이 들어있지만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셨음을 의미한다. 영광의 세계에서 신자들이 누릴 삶에 관한 요한계시록의 설명을 들어보면 다 깨달 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떡이게 하는 부분이 있다. 거기에서 우리 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양식과 의복이라는 기본 요소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자주 걸림돌이 된 다. 첫째로 사람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치사해진다. 사람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서 그리고 몸을 감싸기 위해서 굴복하고 아첨한다. 사십 일을 주 야로 금식하신 주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친 것은 이런 인간의 치사함에 대한 거절이기도 했다. 또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대로 입지 못하 는 이들을 무시하고 경멸한다. 야고보서가 편지를 쓰면서 거칠게 몰아붙였 던 부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양식과 의복은 또 다른 면에서 걸림돌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의 부족함을 인생의 가난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잘 먹지 못하 고 잘 입지 못하면 그것을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여긴다. 만일 그렇다면 광야 생활을 했던 세례자 요한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 가운데 속할 것이 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의 풍족함에서 인생의 부요를 발견 한다. 이런 사람들은 온갖 권모술수를 다 사용해서라도 잘 먹고 잘 입는 것 이야말로 행복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고급한 음식을 먹고 비싼 의복을 입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과시한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 의 속임수이다. 우리는 늘 여기에서 속는다. 사도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것은 한편으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너무 없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매여 살면 안 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말로 단순히 신자들이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아야 한 다는 교훈을 주거나 매사에 물건을 아껴쓰는 절약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교훈 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신자들이 양식과 의복 에 매인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의 해서 평가되는 존재가 아니다. 이 두 가지가 인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 본 요소라는 점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들로 인간의 모든 것을 판단해 서는 안 된다. 먹고 입는 것으로 평가할 수 없어 사람의 진정한 의미는 음식과 의복 밖에 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을 때나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주셨을 때 나 다같이 알려주시고자 했던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살 때 그리 고 하나님을 말씀을 따라 살 때 진정한 존귀함을 얻는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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