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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10) 요람에서 무덤까지_딤전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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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7 2007-03-22
조병수의 목회편지(110)딤전 6:7 요람에서 무덤까지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요람과 무덤은 누가 봐도 극과 극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요람은 생명이 나 타나는 곳이며 무덤은 죽음이 자리하는 곳이다. 요람에는 기쁨이 있고 무덤 에는 슬픔이 있다. 요람이 연두색이라면 무덤은 검은색이다. 그래서 어떤 특 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아기가 출생하는 곳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사람이 죽 은 자리에서 미소를 짓는 것은 매우 큰 실례가 된다. 극단적 대립 관계 보여줘 이것은 무슨 철학적인 사색을 거쳐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어려운 일이 아 니다. 아기가 출생한 집에 심방을 하고 장례에 참석을 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요람과 무덤의 극단적인 대비는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다. 그러나 요람과 무덤이 언제나 차이가 나는 것만은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비슷한 점도 많이 있다. 일반적으로 요람과 무덤이 모두 그리 넉넉한 공간 이 아니라는 것부터 그렇다. 특별한 경우에 요람과 무덤이 예상을 뒤엎는 크 기를 가질 수 있겠으나 보통은 사람의 몸 하나 누일 자리에 지나지 않는다. 요람이 크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며 무덤이 크다고 해서 사 후세계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요람을 보석으로 꾸미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고 무덤을 호화스럽게 만드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다. 사 람들은 때때로 허망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물질과 시간을 허 비한다. 그런데 요람과 무덤의 유사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요람에 누이는 아 기가 아무것도 가져오는 것이 없고 무덤에 누이는 사람이 아무것도 가져가 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세상에 아 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니 라.” 이것은 일찍이 욥이 고백했던 말이기도 하다(욥 1:21). 그리고 이것은 조금 씩 다른 표현으로 변형되기는 하지만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세상에 현 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인생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반복했던 말이다. 사람들은 이 말 앞에서 좌절하기도 하고 또 이 말 앞에서 위로를 받기도 했 다. 세상 에서 이 말은 대체적으로 인생이 허망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종교의 기본적인 체계로 삼거나, 철학 의 한 사상으로 만들거나, 시나 노래로 지으면서 인생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표현했다. 언뜻 보면 사도 바울의 말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것처럼 생각된 다. 물론 사도 바울에게 인생이 참으로 허망하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 다. 특히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헛된 것이라는 생각은 사도 바울의 신학 가 운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신앙 밖에 있는 인생은 아무리 외면적으 로 화려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낫에 베인 풀처럼 허무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인생의 허무함을 가리키 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자족하는 마음이 경건에 큰 유익이 된다 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자족하는 마음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이 말을 사 용하고 있다. 왜 신자들이 자족하느냐 하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 이 없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잘 알면 신자는 자족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가져온 것이 없으 니 세상에 사는 동안 부족할 것이 없고, 가져갈 것이 없으니 인생의 과정에 서 불만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이 자족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출생과 사망을 이해하는 인생관이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그의 사도들이 여러 차 례 가르쳐준 그리스도인 됨에는 자유의 사상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 도인이 자유하다는 것은 물질 소유와 관련해서 보면 자족의 사상에 깊이 뿌 리박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가져온 것도 없고 세상에서 가져갈 것도 없다는 알고 있기에 자족하며,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물질에 매이 지 않으며, 물질에 매이지 않기 때문에 자유하다. 자족하기에 자유할 수 있어 그리스도인은 요람을 벗어날 때도 자유하며 무덤에 들어갈 때도 자유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다.
160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09)_자족하는 경건_딤전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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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6 2007-03-07
조병수의 목회편지(109) 딤전 6:6 자족하는 경건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나는 독일에서 십 년을 살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유대인 학살에 큰 관심 을 가지고 있다. 내 주위에 살고 있던 독일인들은 모두 친절하고, 점잖고, 단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은 다른 민 족을 가스실에 처넣고 그 사체의 살과 뼈로 비누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유대인 학살 관심 갖게 돼 나는 지금 막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일화를 적은 책을 읽었다. 책장을 덮으 며 무겁고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만행을 주저하지 않고 해치우는 학대자들의 악질적이며 비인간적인 모습이 마치 내가 스스로 경험한 것처럼 뇌리에서 연출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 해준 셈이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 아닐 수 있다는 것이 절명의 공간에서 죽임을 바로 눈앞 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에 책읽기를 끝낸 마음이 또 한 심하게 착잡해 진다. 동료에 대한 증오, 눈치보기, 도둑질, 비열함, 요령 피우기, 냉정함...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이런 행위들이 일상화된다. 어 쩌면 이것들은 모두 수용소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동물적인 마지막 행동일 수도 있다. 빵 같지도 않은 빵을 배급받는 수용소의 포로들에게 매일같이 동일한 현상 이 반복된다고 책은 말한다. 서로서로 옆의 사람이 받은 빵이 더 커 보여 내 빵과 네 빵을 바꾸고, 불과 몇 초도 안 되어 교환을 후회하면서 다시 바 꾸기를 여러 차례하고 나서야 비로소 환상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다. 자족은 없다. 인간이 자족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상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것 은 우리가 자주 기만당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환경이 바뀌면 만족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인간이란 존 재는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자족하지 못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 가 없고, 가장 행복하다고 여길 수 있는 상황에서도 늘 무엇인가 부족하여 불행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인간을 바꾸지 못한다. 그만큼 인간의 속 깊은 곳에는 웬만한 외부적 인 요인으로 고치기 어려운 불 만이 꽉 웅크리고 있다. 환경의 변화는 이런 내재적인 불만을 파내거나 해소하기에 힘이 딸린다. 관건은 영혼의 변화이다. 영혼에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하나님과의 연결로 변 화가 일어날 때 드디어 철옹성 같던 불만이 깨지고 지극히 사소한 것에도 만 족하며 감사하게 된다. 이것은 땅의 세계에서 하늘의 세계로, 육의 세계에 서 영의 세계로, 사람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이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땅과 육과 사람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환경의 악화에도 아랑곳하 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떠한 형편에도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빌 4:11) 는 사도 바울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만일에 진정으로 영혼에 변화를 겪었으면서도 자족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거짓이다. 그래서 자족에 바탕을 둔 경건이야말로 진정한 경건이다. 바로 앞 절과 비교 해 보면 거짓 경건도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익의 방도가 되어버린 경건이 거짓 경건이다. 이것은 신자가 항상 경계해야 할 대상 제1호이다. 사실 이처 럼 무섭고 악한 것이 다시없다. 거짓 경건은 밤톨의 속살을 모조리 파먹고 껍데기만 덩그러니 남겨놓는 벌레 같기 때 문이다. 거짓 경건으로 말미암아 신앙은 속이 텅 빈 강정처럼 되고 만다. 이에 반하여 사도 바울은 자족을 동반하는 경건은 큰 유익이 된다고 말한 다. 비록 여기에 그 유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 내 용을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다. 그 유익이란 물질에 묶이지 않 는 것이며, 육체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며, 사람에게 매이지 않는 것이다. 바 꾸어 말하자면 자족을 동반하는 경건의 유익은 영혼이 자유롭게 되는 것이 며, 영원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 다. 만족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선은 그다지 굵지 않다. 초가에 살면서도 만족하는 사 람과 보좌에 앉아서도 불만하는 사람을 볼 때 그 경계선이 항상 환경에 의해 서 그어지는 것이 아님은 틀림없다. 사람됨과 사람 아니 됨은 영혼의 문제, 아니 자족하는 영혼의 문제이다.
159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08)_바른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_ 딤전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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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5 2007-02-14
조병수의 목회편지(108)딤전 6:3-5 바른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나무벽돌 쌓기 놀이는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긴장감을 발동시킨 다. 바닥 위에 여섯 켜, 일곱 켜를 쌓을 때까지는 그래도 자신만만하게 나무 벽돌을 올려놓지만, 열 켜 이상만 쌓아도 다음 나무벽돌을 올려놓을 때는 손 에 힘을 빼고 가만히, 함박눈송이가 살포시 땅에 닿듯이 하지 않으면 큰일난 다. 하지만 쌓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나무벽돌을 다 쌓은 후에 가운데서 하나 씩 빼내는 게임을 하는 시간이 되어, 상대방이 고약한 자리에서 나무벽돌을 빼내 아슬아슬한 상황을 만들어내면, 꼬집어 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는 생 각을 하면서 호흡마저 정지하고 나무벽돌 하나를 꺼내보지만 공든 탑은 속절 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처럼 나무벽돌을 하나 잘못 빼면 열 층, 스무 층으로 쌓은 탑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듯이, 산간마을 창문에 쳐둔 방충망이 찢어지면 온갖 벌 레 와 나방이 삽시간에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원두커피 기계의 필터가 찢어지면 찌꺼기로 머물러 있던 가루 녹은 잔재물이 커피 물과 뒤섞여버린 다. 이런 현상은 마음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긴장감 일으키는 나무벽돌 쌓기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걷어버리면 시기하고 원망하고 배척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침노한다. 청결하고 정숙한 마음이 상실되는 순간 곧바로 방 탕, 패륜, 음란이 엄습한다. 칭찬하고 격려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자마자 욕 설, 저주, 악담을 일삼게 된다. 건전한 것 하나를 따르지 않는 것은 불결한 것 열을 따르는 것이 되고 만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건전한 말씀이다. 그 말씀 안에 머물면 영혼이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은 치료받고 양육되며 강해진다. 그런데 예 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혼을 건강하게 만들 뿐 아니라 생활에도 건강함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경건을 일으키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는 경건한 삶을 생산하고 유지하며 발 전시킬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리켜 건전 한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건전한 말씀이자 경건을 일으키는 교훈인 예 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다른 교훈을 따르는 순간 엄청나게 악한 결과가 수없이 벌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한 가지 건전함을 따르지 않는 것 은 열 가지 불결함을 따르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경건 잃으면 모든 것 무너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 고 변론과 언쟁이라는 병을 앓는 자가 된다. 주님의 말씀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교만과 무지와 논쟁을 일으키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은 주 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나쁜 현상을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주 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악한 결과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교만과 무지와 논쟁은 고 작해야 1회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교만과 무지와 논쟁으 로부터 또 다시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과 다툼이 나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 씀을 따르지 않는 결과의 2회 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표현처럼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결과가 더욱더 심각해진다. 사도 바울은 특히 마지막에 언급한 다툼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한다. 다툼은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경건을 이익의 방도 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다툼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상실하고, 경건을 이익의 방 도로 간주하는 왜곡을 야기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은 예수 그리 스도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 일어나는 악한 결과의 3회전이다. 나무벽돌 쌓기 놀이에도 영적 교훈이 들어있다. 마치 나무벽돌을 하나 잘못 빼낼 때 공든탑이 산산조각으로 무너지듯이, 경건을 일으키는 예수 그리스도 의 건전한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영혼을 순식간에 깡그리 망가뜨리는 두 려운 일에 봉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158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07)_더 잘 섬겨라_딤전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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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5 2007-02-14
조병수의 목회편지(107) 딤전 6:2 "더 잘 섬겨라"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신자에게는 자신이 속한 사회를 부요하게 만들 책임이 있다. 사회를 유익하게 만드는 것은 신자의 사회적 영광이다. 신자가 자신의 사회를 부요하게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 한 일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됨됨이에 대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에서 인격을 인정받아야 한다. 신자는 사회에서도 인정받아야 그리스도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사회가 복을 받는 것은 보기에 아주 훌륭하다. 이것 은 옛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복이며, 요셉에게서 정말로 멋있게 실현되었 던 복이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신자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사회에 서 신자의 인격은 하나님의 동행을 증거하는 탁월한 도구가 된다. 동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아랫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푸는 것, 윗사람을 진 심으로 기쁘게 하는 것, 이런 모습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 를 안정 시키며 행복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우리는 사회의 안정과 불안정이 보통 예상하는 것과는 달리 아주 작은 인간관계에서 비 롯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학문과 지식에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임에도 불구 하고 인간관계가 엉망인 까닭에 불쾌감을 조성하고 결국에는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있다. 신자에게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책임이 있다면 같은 신자를 행복하게 만들 책임도 있다 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 이 유익을 얻는 것은 정말로 귀중한 일이다. 그가 더욱 힘있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의 도움과 협력으로 사회적으로 안정될 뿐 아니라 주님의 일을 더 활발하게 할 수 있는 기회와 여유를 얻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그에게 힘을 실 어준 신자에게도 언젠가는 매우 유익한 반대급부를 제공할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신자인 종에게 신자인 주인을 더 잘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디모데도 이런 가르침 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한다. “너는 이 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사실 주인도 종도 모두 신자인 경우에 종이 눈가림만 하는 요령을 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종은 같은 신자인 만큼 주인이 잘 봐주겠거니 짐작 하면서 일을 엉터리로 해치울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도 그런 신자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사업에서 경영주나 윗사람이 신자인 경 우 거기에 근무하는 그리스도인이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핑계로 업무를 대충하는 사례들이 종종 발견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믿는 상전이 있는 종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주의 를 주었다. 그것은 결국 신자인 주인의 사업을 불리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며, 그리고 마침내는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한 자신도 파멸에 빠지는 무서운 결말을 맞 이하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는 종들이 믿는 상전을 더 잘 섬 겨야 한다고 권면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믿는 종들이 믿는 주인을 잘 섬겨야 할 이 유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이기 때문이다. 신자인 종이 신자인 주인을 잘 섬겨 유익을 얻게 하면, 신자인 주인은 하나님 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된다. 믿는 주인은 믿는 종 의 섬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 이때 신자인 종은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더욱 굳게 만드는 도구가 된 것이다. 이것 은 신자인 종의 영광이다. 그는 비록 종이지만 믿는 주인을 더욱 큰 믿음과 사랑으로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인도자이다. 더 나아가서 믿는 종에게는 믿는 상전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많 이 받고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확증시켜줄 의무가 있다. 신자인 종이 신자인 상 전을 잘 섬겨 유익을 얻게 하면, 하나님이 신자인 상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 에 보여주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 나타내야 그는 결국 믿는 주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명하는 통로인 셈이다. 그는 사 회적으로는 비천해도 영적으로는 너무나도 존귀하다.
157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06)_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_딤전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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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6 2007-01-17
조병수의 목회편지(106) 딤전 6:1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교회는 세상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가 세상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렇다고 해서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사도들은 교회 가 세상과 야합하려는 시도에 대하여도 경고를 주지만 동시에 세상과 결별하 려는 움직임에 대하여도 경고를 준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하 면서도 또한 세상의 잡다한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이런 이중적인 사상은 예 수 그리스도에게서도 이미 발견된다. 소위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불리는 요한 복음 17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편으로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14, 16절)고 말씀하면서도 다른 한편 으로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 다”(18 절)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다양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다양한 체계에서 근 간을 이루는 것은 상하관계이다. 높은 사람이 있고 낮은 사람이 있다. 부리 는 사람이 있고 부림을 받는 사람이 있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있고 명령 을 따르는 사람이 있다. 이런 체계는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다. 공존할 수 없는 교회와 세상 노예제도로 대표되는 주종관계는 이런 체계의 가장 심각한 방식으로서 인류 역사에 오랫동안 세력을 떨쳐왔다. 노예제도는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자취 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인 현상일 뿐이다. 실제적으로는 주 종관계란 것이 지금도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 이다. 이것은 세상에 낙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마지막까지 계속될 현상이 다.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하면서 때때로 그 체계를 수용하는 입장을 표명한다. 교회는 세상의 질서를 무조건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심지어 노예제 도로 대표되는 상하제도와 같은 악한 체계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 는 것처럼 보인다. 본문에 서 사도 바울은 상전들을 크게 존경받을만한 사람 으로 여기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노예제도를 해체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주인들에게 노예를 풀어주라고 말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 인 노예들에게 주인과 싸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뜻 보면 사도 바울 은 마치 노예제와 같은 악한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로서 삶의 가치관 분명해야 하지만 사도 바울이 신자들에게 노예제도에 항거하라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영혼에 변화가 없으면 질서에도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회체계를 개혁한다고 해도 영혼이 개혁되지 않으면 금새 허사가 되고 만다. 관건은 제 도를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바꾸는 데 있다. 영혼에 변화가 없는 사회개혁은 썩은 감자에 금박을 올린 것과 같다. 그래 서 사도 바울은 제도와 관련된 외형적인 변화보다는 영혼과 관련된 내면적 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를 받으면 결국 사회질서가 새로워질 것을 믿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세 상의 변화는 짧은 시간에 성취될 것으로 생 각하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 다려야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악한 제도에서라도 멋있게 사는 법을 가르친 다. 사도 바울은 멍에 아래 있는 종의 위치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 각한다. 이것은 노예근성을 발휘하라는 말이 아니다. 신자가 심지어 종의 신 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 었기 때문이다. 신자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가치관을 가지게 되 었다. 그래서 신자는 종으로 살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낸다. 만일에 그 가 종이 아니었더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신기한 삶을 배울 수만 있다면 종의 위치가 그렇게 슬픈 것만은 아니다. 오 히려 그런 경우에 종으로 있는 것도 즐거움이 된다. 가치관이 새롭게 형성된 신자는 자신의 낮은 신분마저도 충분히 화려하게 누 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또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156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05)_죄와 선행_딤전 5: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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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2 2006-12-27
조병수의 목회편지(105) 딤전 5:24-25 죄와 선행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두 가지 기억이 엇갈린다. 첫째 기억. 우리가 어렸을 때는 고약한 장난질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어 느 날 나를 포함해 동네 친구 서너 명이 구멍가게에서 과자봉지를 하나 슬 쩍 하기로 모의를 했다. 우르르 가게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주인 아 저씨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드는 동안 한 녀석이 과자 봉지를 품에 안고 나오 는 것이었다. 두 가지 상이한 기억남아 둘째 기억. 우리 반에는 소아마비로 양손에 목발을 짚어야 하는 친구가 있었 다. 지체장애 때문에 그 아이는 책가방을 수레 끌듯이 가지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는 마침 우리 집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학교에 오고가는 길 에 내가 늘 가방을 들어다주었다. 과자봉지를 훔친 날 저녁에 온 동네가 소란스러웠다. 구멍가게 주인 아저씨 가 눈을 부라리며 집집마다 찾아와서 우리를 색출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아저씨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친구들을 한 명씩 끄집어내는 소란스러 움이 우리 집 쪽으로 다가올수록 방안에 꼼짝도 못하고 앉아서 어떻게 하면 내가 그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까 머리를 짜냈다. 그러나 그날 밤 구멍가게 주인 아저씨는 기어코 나를 찾아내고 말았다. 지체장애로 통학하는데 고생하는 친구의 가방을 거의 매일같이 들어주던 어 느 날 종례 후에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선생님은 정말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시고는 내 손을 다정스럽게 잡으시면서 언제부터 내가 친구를 도 와주었는지 자세히 물어보셨다. 내가 너무나도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지며 말 을 더듬거리자 선생님은 나의 행실을 이미 다 알고 계셨다는 듯이 칭찬해주 셨다.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운 실수가 감추어지기를 얼마나 고대하는가? 그리고 그 런 수치스러운 잘못을 저지르는 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내 기 위해서 온갖 애를 다 쓴다. 그러나 때가 되면 마침내 죄악의 진상은 드러 나고 만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행한 아주 작은 선행이 너무나 보잘것없어서 남에게 알 리기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 자신마저 도 기억 속에 남겨놓지 않는 경우가 많 다. 그러나 이것도 때가 되면 반드시 알려지게 된다.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 이 선행은 칭찬을 받는다. 사도 바울은 죄도 밝히 드러날 것이고 선행도 밝히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 다. 여기에 사도 가 가르치려는 첫째 내용은 결코 비밀이란 것은 없다는 사 실이다. 이것은 죄에도 해당되고 선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영원토록 숨길 수 있는 죄는 없다. 죄가 혹시 인간에게는 비밀이 될 수 있어도 하나님께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는 아무리 은닉하려고 해도 결국 폭로되고 만 다. 이와 비슷하게 선은 우리가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히 알려진다. 하나님은 선 한 것을 만방에 선포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한 선한 일 을 그대로 덮어두시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선행을 스스로 드러내 려고 할 필요가 없다. 사도 바울은 죄악도 밝히 드러나고 선행도 밝히 드러날 것이라고 말함으로 써 분명하게 심판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에서 “심판에 나아간다”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심판사상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 보응사상이다. 사실 보응사상은 바울 의 신학에서 아주 중요한 근간으 로 역할을 담당한다(롬 2:6-11 참조). 다시 말해서 죄든지 선이든지 하나님 의 심판에 따라서 가장 적절한 보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죄악도 선행도 밝히 드러날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말 이면에는 종말사상이 있다. 그래서 뒤집어 보면 바울에게는 이런 말로 종말사상을 가르치려는 의 도가 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바울의 서신 거의 모두에 종말 사상이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 중요성을 의심할 바가 없다. 종말은 반드시 올 것이며, 종말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며, 종말심판에 따라 조금도 틀림없는 보응이 있을 것이다. 종말에 선행과 악행 심판 있어 구멍가게 아저씨를 골탕먹이던 일과 지체장애 친구를 돕던 일을 조화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나이를 먹을수록 부끄러운 실수가 줄어들고 선행이 늘어나서 이런 부자연스런 조화가 깨지면 좋겠다.
155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04)_포도주를 조금씩 쓰라_딤전 5:2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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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5 2006-11-29
조병수의 목회편지(104) 딤전 5:23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대장암 수술을 하신 윤영탁 교수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그 주간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그날 통화내용은 수술과 치료에 관해서는 잠 시였고 오랫동안 나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건강 걱정해 주시는 스승 어디에 가면 용한 의원이 있다, 몸의 어느 부분이 불편하면 이런 문제가 생 긴 것이다, 음식은 어떤 것을 먹는 것이 좋다, 교수님은 자신의 건강보다는 나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많은 조언을 주셨다. 정작 나는 교수님이 수술을 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괜히 귀찮음을 드릴까봐 전화 한 통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 본래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던데 옛날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는 듯하다.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 시간 내내 죄송한 마 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디모데는 건강이 그다지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최소한 그는 두 가지 문제 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위 장병”이고 다른 하나는 “자주 나는 병들” 이었다. 디모데가 천성적으로 이렇게 몸이 약했는지 아니면 목회를 하다보 니 이런 병을 얻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디모데가 젊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딤전 4:12) 후자의 경우를 배 제할 수 없다. 어쨌든 디모데는 무엇보다도 소화불량으로 고생을 한 것이 분 명하다. 사실 오늘날도 건강한 사람이 목회를 하는 중에 여러 가지 스트레스 를 받아 몸이 상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특히 이런 현상은 소화기관이 민감해지고 불량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디모데가 고통을 당했던 또 한 가지 육체적인 고통은 “자주 나는 병들”이 었다. 디모데는 위장병 이외에도 건강에 또 다른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것이 어떤 종류의 질병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단지 사도 바울 이 포도주를 쓰라고 권면한 사실로부터 디모데의 “자주 나는 병들”은 대체 로 포도주를 약으로 쓰면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질병들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복수적인 표현이 사용된 것을 보아 여러 가지 질병이 디모데를 괴롭 힌 것으로 짐작된다. 디모데는 육체적으로 볼 때 꽤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 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주 나는”이란 표현은 디모데가 시도 때도 없이 질 병에 공격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이런 문제는 디모데의 목회를 심각하게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형편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물만 마시지 말고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조언했다. 디모데는 소화에 문제가 생기다보니 아무래도 수분이 많 이 들어간 음식을 먹었겠고 또 속이 쓰리다보니 맹물을 많이 마셨을 것이 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보기에 그런 처방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 금 더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알려준 포도주 처방이 무슨 대단한 의약처방은 아니다. 포 도주를 약간 사용하면 의학적으로 유용한 효과를 얻는다는 생각은 고대 세계 에서는 상식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 의 건강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는 말이 맞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의 영적 상태만을 주목한 것이 아니다. 그의 생각을 따르 자면 영적인 상태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육체적인 건강도 무시할 일은 아 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위장병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잦은 질병으로 고생 하고 있는 디모데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질병이 목회에 방 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 말미암아 목회를 쉬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적절하게 자가치료를 할 것을 조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질병은 잘 관리할 수만 있다면 목회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목회를 돕는 것이 된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는 디모데가 혹시라도 목회에 좌절하지 않도록, 역설적으로 질병은 목회의 촉매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애 정 어린 조언을 했다.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하는 대신 포도주를 쓰라 는 말에 사도 바울의 사도 바울 됨이 있다. 때로는 목회에 촉매 되기도 이번 주말에는 잊지 말고 윤 교수님께 어떻게 지내시는지 안부 전화를 드려 야겠다. doktorcho@hanmail.net
154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03)_경솔한 안수_딤전 5:2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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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8 2006-11-08
조병수의 목회편지(103) 딤전 5:22a 경솔한 안수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지난 주일 나이가 지긋한 성도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다짜고짜 의 외의 질문을 했다. 궁금했지만 누구에게 딱히 물어보기가 그랬다며 그가 대 뜸 던진 질문은 교단 분열에 관한 것이었다. 언뜻 보면 난처한 질문이지만 나는 숨길 것도 없고 감출 것도 없이 아는 대로 한국교회의 교단 분열사를 한 숨에 설명해주었다. 교단 분열사 담론 나눠 신학적인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에는 지역감정과 같은, 정 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에서는 나타나서는 안될 요인 때문에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다가 교회가 찢어지는 아픔을 겪었다는 것이 대충 설 명의 요점이었다. 이야기가 끝으로 갈수록 말하는 나 자신도 기분이 나빠졌 지만, 설명을 듣는 그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그가 마지막에 한 마디 를 했다. “결국은 목사님들 싸움이었군요”. 교회를 지키는 것이 목회자의 책 임만은 아니리라. 모든 성도가 성경을 제대 로 알고 신학에 바로 서 있다면 교회는 웬만해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교회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성도들 자신이 깨어있어야 한다. 성도들이 평소 에 성경의 가르침을 주도면밀하게 익히며 생활화하고, 바른 신학이 제공하 는 교리들을 최소한 요점적으로라도 가슴속에 깊이 새겨두어 항상 반추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야말로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지름길이다. 그렇지 않고 성도들이 노래나 부르고 춤이나 추면서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 고 신학을 배우기를 멀리한다면 교회는 끝없이 곤두박질치고 만다. 성도들 이 희희낙락하며 아무 생각 없이 반지성화의 대열에 참여하면서 교회가 안전 하기를 바라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러나 교회의 안전을 위해서 아무리 성도들의 책임을 따지려고 해도 그보 다 목회자들의 책임을 강하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목회자라면 한 성도, 한 성도에게 피와 땀을 다해 정성껏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며, 섬세 하고 힘있게 교리를 체계화시켜주고, 깊이 애정 어린 관심을 가지고 일상생 활까지 돌봐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실력향상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하 지 않겠는가. 무익하다 못해 해악한 것에 한눈을 팔고, 잡기를 배우는 데 소 일이나 하면서 교회와 성도를 안전하게 지키겠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보통 어불성설이 아니다. 아니, 목회자가 되기를 지망하는 사람에게 이미 최소한 이런 각오가 요구된 다. 목회자가 된 후에야 비로소 이런 각오를 갖는다는 것은 너무 늦은 일인 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 것 을 당부했던 것이다(딤전 5:22a). “경솔하게”란 본래 시간적인 표현으로 서 급한 행동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말은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 고 잘 교육하지 않은 채 함부로 안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목회자로 세우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 성경적인 신학과 경건한 인격을 가르쳐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실수하고 있는 점이 바로 이것일 수 도 있다. 목회자가 되기를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신학수업과 인격도야와 목회 훈련을 더욱 강도 있게 시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이미 목회자가 된 사람 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오용하면 큰일난다. 경솔히 목회자를 세우는 잘못을 방지하려고 노력할 때, 안수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이권을 고집하는 못된 마음을 제거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 다. 안수를 받으려는 사람이 잘 준비된 모습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 지 않게 안수를 하는 사람이 순전한 모습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 이렇게 안수하는 사람과 안수받는 사람이 다같이 훌륭한 자세를 지니고 있다면 경솔 하게 안수하는 일은 자연스레 방지될 것이다. 목회자는 경건한 인격 갖춰야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교회의 문 제가 목회자 때문에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암시가 들어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암시가 아니라 사도 바울 특유의 역설법일 수도 있다. 생각이 여 기에 이르니 여러 가지 면에서 가슴이 찔리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153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02)_선입견_딤전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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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0 2006-10-11
조병수의 목회편지(102) 딤전 5:21 선입견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요주의 인물’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사람 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다. 혹시나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 음으로 그런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말고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이 미 말썽을 일으킨 적이 있는 사람은 요주의 인물이 된다. 실제로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물의를 빚음으로써 더불어 사는 사람들 에게 폐를 끼치는 요주의 인물이 적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불행하게도 요주의 인물이라는 딱지를 받으면 사람들의 선입 견을 벗어나지 못하고 일생동안 편견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사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가정과 같은 아주 작은 사회에 서부터 모든 사회에 나타난다.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가장 잔인한 방식 중 에 하나이다. 앞에서 사도 바울은 범죄한 사람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책망하여 나머지 사 n람들이 두려워하게 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책망의 과정에 서 아주 조심해야 할 사항을 한 가지 덧붙이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도 중요 한 일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 자신도 매우 엄숙한 마음으로 말을 꺼냈다. 선입견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 니.” 이 구절은 천사들 가운데 선택받은 천사들과 버림받은 천사들이 있다 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개혁신학에서 오랫동안 주목을 받아온 구절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명 령이 매우 엄중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뿐 아니 라 천사들까지도 동원했다는 점이다. 그만큼 책망의 과정에는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도 바울이 책망의 과정에서 그처럼 조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 것은 도대 체 무엇인가? 그것은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책망의 과정에 서 반드시 배제해야 할 것은 선입견이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한 문장에 서 비슷한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이 사실을 강조했다. 편견으로 부터 자유해야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라.” 여기 에 사용된 편견(프로크리마)이라는 말이나 편벽(프로크리시스)이라는 말은 본래 같은 말에서 조금 다르게 파생된 것으로서 둘 다 미리 판단한다는 뜻 을 지니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 두 단어는 선입견을 의미한다. 이것은 진 상을 알아보기도 전에 상대방에 대하여 이미 어떤 부정적인 생각을 품는 것 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책망의 과정에서 선입견을 가지는 것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이것은 잘못된 책망이 되어 사실과 다르게 책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뿐 아니라 선입견을 가지면 때때로 불필요한 책 망을 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선입견에 사로잡힌 책망은 사람에게 엄 청난 상처를 입히고 마침내 회복할 수 없는 좌절에 빠뜨리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오류와 실수는 역사책에서도 수없이 발견되며 또한 우리의 실생 활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반복된다. 때로는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오류와 실수는 다반사로 벌어진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 서 이미 오랫동안 충분히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동일한 오류와 실 수를 저지른다. 그만큼 선입견을 배제한 책망이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책 망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책망에서 선입견을 버리는 것은 더욱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주는 목회지도에서 많은 말을 했지만 선 입견을 버린 책망을 말할 때만큼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 적은 없다(단지 유 사한 예가 딤전 6:13에 한번 더 나온다). 이것은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얼마 나 어려운 일인지 잘 보여준다. 만일 선입견을 버린 사람이 있다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인생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 을 것이다. 특히 목회자가 사람들을 편견 없이 대할 수 있다면 그는 온전한 목회자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을, 무식한 사람 과 유식한 사람을,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을 공평히 대할 수 있는 목회자는 그 자체로 이미 성공한 것이다.
152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01)_체 벌_딤전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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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1 2006-09-21
체 벌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내 기억 속에 소풍은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소풍 가서 어느 시간이 되면 반별로 모여 노래자랑을 했는데, 그것은 나에게 거의 죽음과 같은 시간이었 다. 대부분 다른 아이들이 멋들어지게 유행가를 불러제끼지만 나는 가사와 곡조를 다 외우는 유행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자녀들이 유행 가 부르는 것을 아주 싫어하셨다. 유행가 싫어하신 부모님 특히 우리 부모님은 우리가 가벼운 욕설이라도 입밖에 내놓는 것을 듣는 날 에는 시쳇말로 다리몽둥이가 부러질 정도로 매를 치셨다. 그런 행동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부랑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야단을 맞고 또 야단을 맞았 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장난삼아서라도 욕하는 시늉을 내는 것조차 아예 꿈도 못 꾸어보았다. 유행가도 그렇거니와 재미로 하는 욕이라도 여전히 어 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영향 때문이라고 믿는다. 욕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야단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로 범죄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책망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욕하는 것 때문에 크게 야단을 맞아본 사람은 욕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한다. 이와 비슷 하게 죄를 짓는 것 때문에 크게 책망을 받아본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을 두렵 게 생각한다. 비록 이것이 범죄를 방지하는 데 소극적인 방법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까닭에 범죄의 억 제책으로 범죄를 체벌하는 법적인 조치가 여전히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것은 사회가 존재하는 한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며, 더 나아가 서 사회가 존재하는 한 이런 법적인 조치는 한층 더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사도 바울은 장로에 대한 송사를 말하면서 “범죄한 사람들을 모든 사람 앞 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고 말한다. 사 도 바울에 의하면 범죄에 대한 책망은 당사자가 다시 범죄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게 만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범죄를 두려워하는 효과를 일으킨 다. 실제로 장로가 범죄를 저질렀든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 결백한 장로를 무고 (誣告)하는 범죄를 저질렀든지, 그런 사람을 책망하는 것은 당사자뿐 아니 라 주위의 사람들에게 범죄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책망이 범죄를 예방하는 여러 가지 지름길 가운 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의 말에 비추어 볼 때 범죄를 책망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이다. 오 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구조는 점점 범죄를 책망하지 않는 분위기로 나 아가고 있다. 나나 너나 모두 비슷한 죄를 짓고 있다는 공범의식 때문에 범 죄를 책망하지 않은지는 이미 오랜 일이 되었다. 또한 남의 범죄를 책망하다 가 도리어 앙갚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이런 분위기를 자극한다. 하다 못해 범죄를 체벌하면 자신의 인기가 떨어질까 염려하여 범죄 행위를 눈감아주는 일이 정치권을 비롯하여 여러 분야에서 버젓이 활보를 하고 있 다. 또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범죄가 폭로되었을 때 자신이 범죄 행위를 눈 감아 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는 얄팍한 실리주의 때문에 체벌을 기피 하는 경향도 적지 않은 듯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현상이 사회에만 팽배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도 마 찬가지로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는 점이다. 사회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교회 마저 범죄를 책망하지 않는 상태로 빠져들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한심스러운 것이지 않을 수 없다. 교회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신자들의 범죄를 덮어 버린다. 물론 범죄를 지적 받으면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교회를 비방하면서 다른 교 회로 가버리는 교인들의 저속한 행동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범죄 를 책망하지 않으니 교인들마저도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한 속물들이 되 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죄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책망 사라지고 있어 쌍스러운 행동을 꾸짖지 않는 시대, 범죄를 책망하는 것을 주저하는 시대, 야단치면 도리어 눈에 쌍불을 피고 덤비는 시대, 이런 시대에서 어쩔 수 없 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슬프다.
151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100)_고발_딤전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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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8 2006-09-06
딤전 5;19 고발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지역교회는 단순히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자리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또한 공간을 빌려쓰고 있는 교회가 건물 주인의 부도와 같은 사 회구조적인 문제로 말미암아 위험한 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사 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기독교에 적개심을 품을 때 교회는 엄청난 타격을 입는다. 물론 보통 지역교회의 위기는 안에서 생긴다. 무엇보다도 교인들이 이단에 말려드는 것은 지역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어떤 식으로든지 신자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면 교회에 당파가 만들어져 큰 소용돌이가 일게 된다. 성도들이 세상살이에 재미가 들어 신앙 생활을 등한히 하는 것도 교회에서 작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교회의 생존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문제는 대체로 목회자들에게서 발 생하는 것 같다.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목회자로 말미암아 교회가 당하는 피해는 이미 익히 알려진 일이다. 게다가 목회자에게 이기심에 게으름과 나 태까 지 겹친다면 교회가 치러야 할 값은 매우 비싼 것이 된다. 목회자의 부 도덕한 윤리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다. 그것은 거의 죽음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목회자 윤리 문제 심각해 하지만 이런 문제점들과 더불어 목회자에게 성경 실력과 신학이 부재하다는 것은 두고두고 말거리가 된다. 왜냐하면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는 교회는 먹 지 못해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되고 말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기름진 양식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껍질만 그럴싸한 방법론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교회는 거의 끝장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장로를 존경하라고 말하는 단락에서 “장로에 대한 고발”이라 는 말을 사용했다. 여기에 담겨진 첫째 의미는 간단히 말해서 장로에 대한 고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앞으로 목회자들에게 심각한 문제 가 발생할 것을 내다보고 있다. 사도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계시에 한 줌이 라도 착오가 있을까. 실제로 역사가 풀어져나가는 동안 교회에는 목회자들 과 얽힌 비슷한 문제들이 되풀이되었다. 자신의 목숨 걸만큼 신중해야 목회자도 고발에 노출되어 있다. 목회자는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는 성역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을 보면 서 하나님에 대한 권위의 도전이라고 간주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그는 성경 을 몰라도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이다. 더 세게 말해서 그런 목회자는 이미 성 경의 엄중한 가르침을 떠난 사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장로에 대한 고발과 관련해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한 가지 로 멈추지 않는다. 여기에는 둘째로 고발을 조심하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 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라”고 덧붙인 것이다. 이 표현은 무심코 들으면 안되고 조금 면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목회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사람의 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다. 잘못하면 목소리 큰 사람 한 명이 마구 지껄여댐으로써 교회가 소란스러 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세”라는 숫자는 꼭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을 가 리킨다기보다는 최소한의 복수를 의미한다. 목회자의 문제점을 들출 때는 적 어도 성도들 사이에 서로 납득할만한 의견일치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증인”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본래 어떤 일 에 목숨을 걸 정도로 책임이 있다는 아주 심각한 뜻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목회자에 대한 고발은 목회자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재미 삼아 만우절에 소방 차를 부르는 장난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자들은 목회자가 자기 의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또는 자신과 사소한 갈등이 있다고 해서 비판 을 꾸며내는 것은 더욱 안될 일이다. 요즘처럼 이름을 감춘 채 인터넷에 마구잡이로 목회자를 공격하는 글을 만방 에 공개하는 것은 부패한 인간의 절정적인 모습을 증명하는 것 밖에는 안 된 다. 목회자를 비판하기 전에 그 내용이 목숨을 걸만한 일인가 살펴보아야 하 며, 더 나아가서는 목숨을 걸고라도 진언할 수 있는가 살펴보아야 한다. 교회를 파멸시키는 직격탄은 목회자에 대한 신망을 깎는 것이라는 사탄의 교 활한 수법을 간파하지 못할 바가 없다.
150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99)_소의 입_딤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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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6 2006-08-23
조병수의 목회편지(99)_딤전 5:18 소의 입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터부(taboo)는 교회에도 있다. 요즘 들어 교회에는 말해서 안될 금기사항들 이 더 많이 늘어나는 듯이 보인다. 어떤 교인에게 그의 자녀들이 학교생활이 나 결혼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은 일종의 금기이다. 어떤 여신자 에게 그녀의 남편이 사회생활에서 성도로서 품위 있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지 물어보는 것은 더욱 큰 실례이다. 금기사항들 늘어나는 추세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지, 기 도생활을 잘하는지, 신자의 이런 가장 기초적인 삶에 관해서 물어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신자들의 세계에 숨기고 감추는 것이 더 많아지고, 그러 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점점 더 부담스럽 게 여겨진다. 교회에서 말해서는 안될 금기사항 가운데 가장 큰 것 하나는 목회자의 생활 비에 관한 것이리라. 사실 이것은 터부 중의 터부이다. 목회자의 생활비가 r 얼마나 되는지 아는 신자는 흔하지 않다. 게다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 는 신자는 겨우 손꼽을 정도이다. 목회자의 경제생활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때때로 성도들은 목회자가 알아서 잘 살겠거니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목회자의 먹고 마시는 것을 어련히 책임져주시지 않겠냐는 막연한 확신이 신자들을 붙잡고 있다. 그리고는 애써 이런 문제를 자신의 관심 밖으로 내몰아버린다. 놀랍게도 신자들 가운데는 목회자의 경제 적인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마치 무슨 불경죄라도 짓는 것으로 여 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목회자의 생활비는 반드시 꺼내놔야 할 화제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에 앞서 먼저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목회자가 물질에 대한 자세를 분명 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목회자의 생활비에 너무 무심한 것도 문제 이지만 목회자가 자신의 생활비에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도 문제이기 때문이 다. 목회자는 자신의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많은 경우에 이것이 목회자 의 품위를 결정한다. 우리는 많은 목회자들이 물질적인 분수를 넘어섬으로 써 그 동안 쌓아온 인격과 권 위와 존경을 한꺼번에 허물어버리는 것을 자주 본다. 그래서 물질에 대한 욕심은 목회자가 일생동안 싸워야 할 최대의 적이 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든 목회자의 생활비는 누구나 말하기 싫어하지만 누군가가 끄집어내야 할 주제이다. 경제적인 결핍상태 때문에 제대로 목회하기 어려운 목회자로부 터 심지어는 삶을 영위하기조차 힘든 목회자들이 적지 않다. 담임목회자에 서 부교역자로 눈을 돌리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각해진다. 사실 이것은 교회 의 규모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성도의 의식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 이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데는 목회자의 생활비에 대한 신자들의 무관심이 큰 몫을 차지한다. 게다가 요즘 신자들은 너무나도 이기 적이고 비희생적이어서 목회자로부터 영적인 유익을 챙기려고 할 뿐 물질로 참여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더하여 목회자가 좀더 적은 생활비로 살 면 살수록 더욱 경건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에 실소 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것은 신자들의 신앙성숙도 문 제인 것 같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쉬쉬 하며 감추기보다는 솔직하게 양성화시켰다. 사 도 바울에 의하면 목회자를 존경한다면 물질로 그 존경심을 표시하라는 것이 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면 안되듯이, 일꾼이 그 삯을 받 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목회자가 목회하기에 충분한 생활비를 받는 것은 당 연한 일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도 바울은 물질에 마음을 뺏긴 염치없는 사람이었는가? 그러면 똑같은 말을 하시며(마 10:10), 더 분명하게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전 9:14)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목회자 생활 지지는 교회의 몫 자기를 위해 물질에 욕심을 내는 목회자도 문제이거니와 목회자에 대하여 물질에 야박한 교회도 문제이다. 목회자만 먹여 살리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목회자도 먹여 살리지 못하는 교회가 되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요즘 세대에는 목회자의 입이 소의 입보다도 못한 것이 아닌지...
149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98)_존경하려는 마음_딤전 5:17(c)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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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1 2006-08-02
조병수의 목회편지(98) 딤전 5:17(c) 존경하려는 마음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하교시간에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 한 무리가 소란을 피우며 우 몰려와 마 을버스를 탄다. 버스기사는 출발시간이 지체되자 아이들에게 꾸물거리지 말 고 빨리 타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재촉을 한다. 몇몇 여학생이 버스에 올 라타 안쪽으로 이동하면서 버스기사에게 들으라는 듯이 입에 올리기에도 민 망할 정도로 심한 욕지거리를 해댄다. 막말하는 사람들 많아 언뜻 보기에도 버스기사는 여학생들에게 아버지뻘이나 될 것 같은데. 차안 에 있는 어른들 가운데 누구도 나서지 않고, 심지어 버스기사조차 아무런 반 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다만 너무나 분이 난다는 표시로 차를 험하게 출 발시킨다. 이제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이런 일을 만나는 것이 당연지사가 되 었다. 존경상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사회적인 큰 문제들 가운 데 선두에 속하는 문제이다. 존경이란 꼭 윗사람 에게만 드려지는 것이 아니 다. 물론 윗사람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도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굳세게 살아온 노인들은 무조건 존경의 대상이 된 다. 자기의 분야에서, 그것이 특수한 것이든 평범한 것이든, 최선을 다하여 전문 가가 된 사람은 정말로 존경스럽다. 비록 나이가 어리더라도 학문이나 예체 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존경을 표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이 아니 다. 무엇보다도 교사가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될 것 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이런 사람들에게라도 그렇게 큰 존경을 표시하지 않는 다. 게다가 어느덧 시간은 흘러 심지어 목사까지 존경하지 않는 때가 되었 다. 목사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목사 자신에게 원인이 있 다. 신앙과 인격과 생활에서 존경받을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목사 가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또 한 가지 놓쳐서는 안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어느새 신자들마저도 존경을 상실한 시대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르 게 표현하자면 신자들도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상대 적일 뿐이라는 상대화의 정신에 오염되었다. 사도 바울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 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존경을 상실한 시대를 예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장로가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말속에는 사 람들이 장로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존경의 조 건은 대상에도 관련되지만 주체에도 관련된다. 존경받는 사람에게도 존경의 조건이 필요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도 존경의 조건이 필요하다. 아무리 존경하려고 해도 그 대상이 존경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면 존경할 수 없듯이, 아무리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라 해도 아무도 존경 하지 않으면 존경받을 수 없다. 그래서 존경의 대상도 조건을 갖추어야 하듯 이, 존경의 주체도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법이다. 우리는 존경하려는 마음, 존경을 표현하려는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오래 전 정암 박윤선 박사는 신학교에서 때때로 새파랗게 젊은 목사들이 설교를 해도 맨 앞자리에 앉아 설교를 받아 적으면서 아멘을 연발하곤 했다. 목사들 이 설교를 잘했기 때문이 아니며 정암이 무식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언 젠가 우리가 그에게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다. 설교하 는 목사는 무조건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며, 목사의 설교는 무조건 존경받을만 한 것이다! 정암이 설교학 시간에 우리의 습작 설교에 보여준 예리한 비판은 아직도 가 슴을 떨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생각들 정도로 그 렇게 난도질하는 정암의 설교비판 앞에 머리를 숙인 까닭은 그가 설교자에 대하여 평소에 보여준 진심 어린 존경 때문이었다. 존경스런 모습 남긴 ‘정암’ 그렇다. 비판은 나중이고 존경이 먼저다. 존경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비판 을 표현할 자격이 없다. 존경이 빠진 비판은 악마적인 것이다. 존경을 상실 한 상대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조금씩 수치가 증가하는 매연에 오염 되듯이 시대정신에 오염되어 존경하려는 마음을 점점 뒤로하고 비판하려는 마음을 앞에 점점 두고 있다.
148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97)_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_딤전 5:1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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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3 2006-07-05
조병수의 목회편지(97) 딤전 5:17(b)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목회란 무엇인가? 목회 개념은 시대마다 그리고 관점마다 바뀔 수 있는 것일 까? 솔직히 말해서 목회는 어느 시대에 전개되며 누가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 르게 이해될 수 있고 또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날 어느 목사가 갓 쓰 고 집신 신고 목회를 하겠다고 고집한다면 또 성도들이 목사에게 그렇게 목 회하기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시대착오적인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착오 발상 목회 없어야 최첨단 장비를 갖춘 도시목회에 익숙한 목사가 농촌교회를 섬기면서 겨우 한 글을 깨우친 노인들에게 매일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자기의 설교를 다시 들으 며 공부하라고 강요한다면 이것은 이만저만한 어불성설이 아니다. 목회는 시 대에도 맞아야 하고 대상에도 맞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분명히 “오늘의 목회”와 “여기의 목회”란 것은 있다. 하지만, 하지만 목회의 이런 현장성에도 불구하고 동서고금을 논할 것 없이 모든 목회에 항상 바탕이 되는 것을 한 가지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이 꼭 설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목회에서 설교의 귀중성은 백 번 강조해도 틀림이 없다. 그러나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를 보내 는 중에도, 심지어는 길을 지나가다가 인사를 나누는 때도 목사에 의해서 말 씀이 가르쳐져야 한다. 목회란 시대가 변하고 공간이 달라져도 말씀을 가르 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목회의 뿌리라고 불러 도 괜찮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잘 다스리는 장로가 갑절로 존경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에 서 이 점을 주지시키고 있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은 더욱 그러 하다(갑절로 존경을 받아야 한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다스리는 장로 와 가르치는 장로가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가르치는 장로란 오늘 날로 하자면 목사를 일컫는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과 가르침을 왜 나 누어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두 단어는 구태여 구별해야 할 필요가 없는 비슷한 말이라는 점을 생각 할 때 혹시 사도 바울에게 같은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 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사도 바울은 유사한 단어 를 두 번 사용하여 가르치는 장로의 근본적인 사명이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가르치는 장로)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목사가 교사보다 는 연출자의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목사 자신도 그 길을 욕심내고 성도 들도 목사에게 그런 길을 가기를 요청한다. 가르치는 사명을 내팽개치고 무 대 위에서 공연하듯이 목회하는 목사들도 문제지만 교사보다는 매니저처럼 행동을 하는 목사를 선호하는 성도들도 잘못이다. 그러다 보니 목회는 어느덧 무대공연이나 사업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어버 리고 말았다. 목사는 연출과 경영을 배우는 데 혈안이 되고 신자들은 좋은 게 좋은 거니 생각하면서 아무런 비판정신이 없이 텔레비전의 쇼나 연속극 을 보듯이 그냥 무심하게 교회생활을 해나간다. 교훈이 없는 목회는 상품이 빠진 상자와 같다. 목회가 이렇게 근본 개념에서 벗어나게 된 원인을 시대와 관점의 변화 때문 이라고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공간이 달라져도 목회에서 빠뜨릴 수 없는 뿌리이기 때문이다. 목회의 현장 성은 언제나 이 근거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다. 오히려 목사가 목회의 근본개념에서 이탈한 까닭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자 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표현이다. 목사가 더 이 상 말씀연구에 전념하지 않을 때 역시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도 열심을 내지 않게 된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라는 사도 바울의 진술에 는 교육 뿐 아니라 연구에서 나타나는 수고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 는 안 된다. 연구하는 목사만이 가르치는 목사가 된다. 연구하지 않는 목사 없어야 오늘날 목사와 교회가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연출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진 리 교육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말씀을 공부하지 않는 목사와 교회가 존경 을 받는다는 것은 꿈에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147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96)_갑절의 존경(딤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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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5 2006-06-22
조병수의 목회편지(96)_ 딤전 5:17 갑절의 존경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종종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신기한 능력을 베풀기를 즐겨하신다고 생각한 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 가운데 하나이다. 성경을 봐도 역사를 봐도 하나 님은 직접 능력을 베푸시기보다 대체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어렵 지 않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와 관련하여 이런 현상은 두드 러지게 나타난다. 일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이끄시기 위하여 처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지도자들 을 세우셨다. 그런데 교회의 지도자 중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 하나가 장로라는 직분이다. 장로 직분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목양하기 위해 서 이미 구약시대에 주신 것이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더욱 분명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장로 직분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라는 점에서 교인을 대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리하는 것이다. 만일에 장로가 교인의 대표자라면 목에 힘을 줄 수 있겠으나 하나님의 대리 자이니 만큼 언제든지 겸손할 수밖에 없다. 그는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되 고 항상 하나님의 뜻을 사려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 수많은 갈등과 혼란 이 발생하는 이면에는 이런 간단한 가르침 하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 가 있다. 그런데 장로는 하나님에 의하여 세우심을 받았다는 사실에서만 권위를 찾으 면 안 된다. 물론 하나님의 세우심에 이미 장로의 기본적인 권위가 보장된다 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장로는 이런 기본적인 권위에 만족할 것이 아 니라 두 배의 존경을 받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장로에게는 뉘앙스가 조 금 다르기는 하지만 복지부동이란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장로는 제 자리 걸 음과 무관한 사람이다. 장로의 사전에는 자만(自滿)이란 단어가 없다. 장로에게 “그만하면 됐다” 는 생각은 금물이다. 전진하지 않는 것도 비상하지 않는 것도 장로가 반드 시 피해야 할 사항들이다. 장로는 달려가든지 날아가든지 배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을 의도했다. “잘 다스리는 장 로들은 갑절의 존경을 받기에 합당해야 한다”(17절). 그렇다. 장로는 갑절의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 다. 그런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써야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 은 여기에서 어떤 장로가 두 배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그것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이다. 이 표현은 언뜻 보면 논리적으로 약간 이상한 듯이 보인다. 사도 바울은 장 로가 갑절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결과) 잘 다스려야 한다(원인)고 말하지 않 고,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결과) 갑절의 존경을 받기에 합당해야 한다(또 다 른 결과)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진의는 장로가 잘 다스리는 사람일 때만 갑절의 존경을 받기 위 해 노력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잘 다스리는 장로가 아니면 갑절 의 존경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 장로의 역할을 제 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존경받기만을 구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갑절의 존경과 관련해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장로의 역할은 그다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너무나도 간단해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다. 우리말로는 “다스리다”(개역, 개역개정)로 번역된 단어는 점점 여러 가 지 파생적인 뜻을 가지게 되었지만 본래는 “앞에 서다”라는 단순한 의미 를 가진다. 그러니까 순전히 원래의 의미대로 읽자면 장로의 제일차 역할은 앞에 서는 것이다. 장로는 앞장 서는 사람이다. 장로의 자리는 앞이다. 이것은 장로가 뒷전에 물러서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뒷걸음치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장로는 모범적이어야 한다. 장로에게는 선도적인 기능이 중요하다. 이 것은 장로가 진취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로는 가만 내버려두 면 언제나 발동되는 퇴행성과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장로는 앞장 서는 직분 사도 바울은 갑절의 존경을 받을만한 장로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한 단어를 덧붙였다. “잘”. 이것은 비록 한 단어에 지나지 않지만 무한의 의미를 띠 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촌철살인의 단어이다. 과연 우리는 “잘” 이라는 단어 앞에서 무사히 견딜 수 있을지.
146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95)_교회에게 짐 지우지 말라(딤전 5:1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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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2 2006-06-09
조병수의 목회편지(95) 교회에게 짐 지우지 말라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자기의 유익을 챙기려고 교회를 이용하는 자들은 참으로 악하다. 교회가 어 지럽게 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자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는 데 있다. 때때로 이런 자들은 아주 신앙심이 좋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교회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가장 안전한 자리를 차지하며 교회와 밀착하면서 악 착같이 기생한다. 교회에서 기생하는 사람 있어 그들은 교회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칭찬 받을 곳과 비난받을 곳 을 약삭빠르게 알아채고 절대로 손해를 당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그들은 교 회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므로 사람들이 한 눈에 알아 보기가 어렵다. 그들은 교회에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끈질기게 달라붙어 마침내는 자기를 위한 목적을 이룬다. 교회를 이용해서 자기의 유익을 챙기는 자들은 단순히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 니다. 가끔은 순전히 공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바람에 교회 를 이용해먹은 결과를 일으키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것은 그래도 눈감아 줄 수 있는 경우이다. 또한 그럴 마음을 품지는 않았는데 어찌하다 보니 교 회의 일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삶이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복잡한 상황가운데 이런 일이 벌 어질 수 있고 그래서 그런 일은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교회 를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처사는 악하다. 온갖 치장을 다하여 겉으로는 신 앙이 깊은 것처럼 행동하지만 결국은 자기의 유익을 챙기고 교회에는 짐만 지우는 자는 정말로 악하다. 과부에 관하여 자세한 교훈을 제시하던 사도 바울이 말미에 교회에 짐을 지 우지 말라는 말로 골인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도 바울은 믿는 여자 가 스스로 과부친척을 도와주지 않고 교회에 짐 지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 한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을 방해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때 교회는 아무 친척이 없어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 고 있는 외로운 참 과부(딤전 5:5 참조)를 도와주는 일에 어려움을 겪게 된 r 다. 교회에 짐을 지우는 것은 교회의 진로를 막는다는 점에서 심지어 사탄의 행 위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교회에 짐을 지우는 행위에 관 한 사도 바울의 지적은 바로 앞에서 대적자 사탄을 언급한 것에 이어지고 있 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딤전 5:14-15 참조). 다시 말해서 대적자 사탄 의 악한 작업 중에 한 가지 예는 교회에 짐을 지우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 할 수 있다. 신자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교회에 미루어서는 안 된다. 자기가 하기에는 너무나 귀찮기 때문에 교회에 일을 떠맡기는 것은 나쁘다. 자기를 즐기는 데 시간을 다 소모하고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자기의 일을 교회에 넘겨버 리는 것도 나쁘다. 자기의 돈이 드는 것이 아까워서 교회의 경비를 빼 쓰는 것도 나쁘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자기의 유익을 챙기겠다고 교회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를 통해서 장사하는 것, 예를 들어 교회를 통해서 자기의 고객을 확보 하려는 심보는 악하다. 교회를 선거의 표밭으로 만드는 것이나 인기몰이를 위한 도구도 전락시키는 것도 악하다. 소설이든 영화든 교회를 돈벌이의 재 료로 삼는 것도 악하다. 이런 행위의 배후에는 모두 대적자 사탄의 조종이 숨어있다. 자기가 즐기는 경비를 교회에 물리는 목사, 자기가 파는 물건을 교회에 강 매하여 들여놓는 장로, 교회의 물건을 마치 제 물건인 것처럼 사용하는 집 사, 하다 못해 교회의 정수기 물을 통으로 받아다 제 집 식수로 사용하는 성 도, 이것은 모두 대적자 사탄의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임을 알라. 교회는 돈벌이 대상 아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가운데 교회를 훼방할 기회를 노리는 대적자 사탄에게서 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아주 짧은 한 순간이라도 자기의 유익을 위 해서 교회를 이용한다면 우리는 벌써 사탄의 편이 서 있는 것이 된다. 그래 서 자기가 짐을 지지 않기 위해서 교회에 짐을 지우는 것은 우리가 애써 피 해야 할 일이다. 교회와 가장 가까이 있는 중에도 사탄과 가장 가까울 수 있다는 사실은 이 해하기 어려운 것인가? 신학과 목회 - 그 행복한 만남을 위하여 바른 신학, 바른 생활, 바른 교회 바른 신학, 바른 생활, 바른 교회는 합동신학대학원의 표어이다. 매우 지혜 롭고 성경적인 표어라 생각한다. 한편 우리 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은 바른 신학은 신학교에서, 바른 생활은 집이나 사회에서, 바른 교회는 교 회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함께 조화를 이루어 우 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 삼정(三正) 사상 조화 이뤄야 바른 생활과 상관없는 바른 신학은 있을 수 없고 바른 신학 없는 바른 교회 는 불가능하다. 또한 바른 교회는 바른 생활과 뗄 수 없다. 그 이유는 한 마 디로 하나님은 나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신학 혹은 교리는 반드시 하 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한다. 지식적 체계로 끝나는 신학은 하나님의 성품 을 반영할 수 없고, 바른 지식 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생활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할 수 없고, 바른 신학과 바른 삶이 결여된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할 수 없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과 ‘인간을 아는 지식’ (knowledge of man)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어떤 것이 먼저인지 모른다고 고백 했다.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 특히 우리 죄성을 몰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우리 생활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신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앎과 신학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1:7)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 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 의 뜻을 깨닫는 것과 그 뜻대로 사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 다. 성경 원리와 성경 메시지는 뗄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는 원리를 알면서 성경의 내용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 의 말씀이 아니라는 뜻이다. 게할더스 보스는 “계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연결되는 행동의 명사이다”라 고 말한다. 즉 모든 계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모든 성경의 구절들은 역사하 시는 하나님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연결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솔방울에 관해서 색깔, 모양, 씨, 사용처 등을 아무 리 잘 묘사하고 잘 안다고 해도 소나무와 연결시키지 않으면 진정한 솔방울 을 파악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우리 신학은 반드시 삼위 하나님께로 향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결코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따로 둘 수 없을 것이 다. 바울 은 디도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 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 케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 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 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1-8). 여기 바른 교훈(sound doctrine)은 단지 정보나 지식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고 있 다. 우리가 각기 바른 신학과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잘 이루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세 가지를 잘 조화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이 조화의 작 업은 구석에서 되어질 일이 아니고 또 몇 사람에 의해 되어질 일이 아니다. 신학교와 현장과 교회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개혁주의의 모토인 ‘하나님의 주권’은 신학적으로만 세워 질 수 없다. 아무리 신학적,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논한다고 해도 마 른 빵 조각 앞에 기도할 줄 모른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사변적 넋두리에 불과 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지식, 삶, 교회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 야 한다. 어느 한 쪽이 결여되면 그 진리는 무너지는 것이다. 청교도들이 자주 강조했던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하 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이다”(Theology is not a science of knowledge about God, but an art of life unto God)라는 말이 있다. 신학교는 어떤 지 식적 체계만을 공급하는 상아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을 위한 터전이 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와 우리 삶의 현장도 그러한 터전이 되어야 한다. 신학은 삶의 예술 위한 것 예술은 지식만 갖고 되지 않는다. 바울이 디도에게 말씀하는 바 절제, 경 건, 근신, 믿음, 사랑, 인내, 선한 일, 경건함, 부패치 아니함, 바른 말 등 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 은 신학과 생활과 교회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야 ‘바 른’이라는 말을 앞에 붙일 수 있을 것이다.
145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94)_기회의 명수 사탄을 극복하는 길(딤전 5:1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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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6 2006-05-24
조병수의 목회편지(94) 딤전 5:14-15 기회의 명수 사탄을 극복하는 길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육하원칙은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누가 언제 어디에 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느냐 하나씩 따져 물으면 사건이 훨씬 명확하게 파악 된다. 그래서 조리 있게 분석하는 사람들은 이런 여섯 가지 항목을 따라서 사건에 접근한다. 사건분석이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것은 보통 육하원칙에서 벗어난 경우를 가리킨다. 사건 전말 이해 중요해 그러나 이와 같은 기본요소를 잘 활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사건의 모든 것을 알아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건마다 내러티브에서 말하는 진행과정이 있 기 때문에 기승전결과 같은 흐름을 예의 주시하지 않으면 사건을 정확하게 아는 데 실패하고 만다. 육하원칙이 사건의 점이라면 내러티브는 사건의 선 이다. 그런데 이에 더 나아가서 연루된 인물의 심리를 조사하는 것은 사건 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것은 사건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 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파악에서 일반적으로는 과학적인 방식 을 사용해야겠지만 때로는 직관이란 것도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불평불만을 내뱉고 일을 엉클어뜨리는 젊은 과부들을 보면서 육하원칙, 네러티브 그리고 심리분석 같 은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더 깊은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물론 젊은 과부들 의 모습을 위에서 말한 분석방식으로 어느 정도 확실하게 해부해 볼 수 없 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그들의 행실에는 육하원칙도 있고, 네러티브도 있고, 심리요소도 있 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젊은 과부들에게서 이런 것들을 뛰어넘는 더 무서 운 차원을 인식하였다. 그것은 영적 배후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대적에 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14절),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15절) 말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젊은 과부들의 행실을 위에서 말한 몇 가지 방법으로 분석하 는 것으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방법들은 그가 생각하기에 피상적인 방법 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문제를 일으키는 젊 은 과부들의 악한 생 활 뒤에 도사리고 있는 영적인 배후를 간파했다. 게으름을 익히는 그들의 삶 이면에는 더 악한 세력이 숨어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젊은 과부들의 몹쓸 행실은 단순히 그들에게서 비롯된 것 이 아니라 그보다도 더 악질적인 배후조정자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사건의 진상은 표면에 있지 않고 이면에 있다. 더 악한 배후에서 악한 피상이 나온 다. 작은 오류는 큰 오류의 부산물이다. 그래서 작은 악을 인식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큰 악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게으름을 익히는 젊은 과부들을 조정하는 배후세력이 다름 아 닌 대적자 사탄이라는 사실을 포착했다. 사탄의 특징은 대적하며 훼방하는 것이다. 그는 창조이후 지금까지 줄곧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하며 방해하는 일을 해왔다. 그래서 그는 다른 말로 대적자와 훼방자라고 불린다. 사탄이 젊은 과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방해하기 위해서 택한 방식가 운데 하나가 게으름을 익히게 하는 것이며 불평하게 하는 것이며 괜한 일만 저지르게 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사람들이 감지하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의 강 도를 조금씩 높인다. 이렇게 해서 사탄은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쪽으로 모든 일을 몰아간다. 사도 바울의 말을 따르자면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기 위해서 항 상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탄에게 “기회를 조금도 주 지 말라”고 권면하였던 것이다. 게으름을 익히는 것이 사탄에게 기회를 주 는 것이며, 불평하는 것이 대적자에게 틈을 제공하는 것이며, 일만 저지르 는 것이 훼방자에게 끼여드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사탄에게 틈 주지 말아야 사탄은 기회의 명수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 리고 있다. 사탄이 성도가 가장 안정된 상황에서도 틈을 탄다면(창 3:1) 불 안한 상황에서 틈을 타는 것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바울같이 위대한 사 도가 보살피던 초대교회에도 사탄의 마수가 미쳤다면 오늘날 우리처럼 미력 하고 연약한 교회에는 사탄이 얼마나 더 악랄하게 횡포를 부리겠는가?
144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93)_게으름_딤전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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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1 2006-05-11
조병수의 목회편지(93) 딤전 5:13 게으름 게으름에도 가치가 있다. 온 몸이 부서질 정도로 머리도 회전하지 않고 모 든 뼈의 관절이 마비되고 심지어는 마지막 남은 힘줄마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할 정도로 전력으로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휴식이 필요하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전력투구한 후에는 반드시 여유 있게 쉬어야 한다. 게으름에도 철학 있어야 평소보다 잠도 더 많이 자고 잔잔한 음악을 듣거나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숲 속을 거니는 것이 좋다. 게으르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게으름을 피워야 한 다. 게으름에도 철학이 있고 신학이 있다. 긴장과 이완의 분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철학도 신학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조임과 풂의 절묘한 조 화 가운데 인생의 완성이 있다. 그러나 나쁜 것은 게으름을 익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젊은 과부들의 문 제를 다루면서 그들의 나태함이 얼마나 큰 병폐인지 지적하였다. 조금 더 정 확하게 말하자면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그들의 문제점은 그냥 게으른 것이 아니라 “게으르기를 배운다”(They learn to be idle)는 데 있었다. 사람이란 존재는 가만두어도 게을러지기 일수인데 이 젊은 과부들은 그런 상 태를 넘어서 아예 게으르기를 적극적으로 배웠던 것이다. 이것은 게으름을 몸에 배어버리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으름의 습관이란 게으른 것 이 뭐가 잘못이냐는 자기최면으로 시작해서 게으름을 점점 정당화하고 결국 에는 게으름을 즐기다가 게으름 그 자체에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게으름이 처음에는 습관이 되고 나중에는 생활이 된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 게으름의 모양 한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게으름을 배 우는 젊은 과부들이 “집집에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이 말이 함유하고 있 는 첫째 의미는 게으른 자들이 자기 집을 전혀 돌보지 않는 것이다. 사도 바 울은 앞에서 여러 차례 자기 집을 돌보는 것의 중요성을 갈파했다(딤전 3:4- 5, 12). 게으른 자들은 자기 집을 엉망진창으로 내버려둔다. 그 대신에 게으른 자들 은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 이런 식으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밥이나 얻어먹고 세상에 흘러 다니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입에 올리며 잡담으로 하루 를 소일한다. 그들은 남의 집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나태 행각으로 말미암아 다른 집의 규칙적이며 정상적인 삶이 깨지든 말든 그들 의 머리 속에는 결례가 된다는 생각이 없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게으른 자 들은 다른 가정의 프라이버시를 아랑곳하지 않고 고스란히 망가뜨리는 무례 함을 저지른다. 그런데 게으른 자들의 폐단이 이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데 더 큰 문 제가 있다. 사도 바울은 게으른 자들의 잘못을 몇 가지 더 지적한다. “게으 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어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 니.” 게으른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추가적인 문제점들 가운데 첫째는 망령 된 폄론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평을 늘어놓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는 것이다. 마치 디오드레베가 장로에 대하여 불평을 늘어놓았던 것과 같다(요삼 10). 게으른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란 결국 불평불만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게으름이라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남의 잘못으로 치부한다. 그들은 사회를 욕하고 교회를 비난한다. 그 들은 친구를 비판하고 동료를 험담한다. 또한 게으른 자들은 일을 만들기만 한다. 그들은 정상적으로 일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게으름을 부리고 부리다가 어쩌다가 나타나서 고작 한다는 것 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으로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에도 이 런 사람이 꼭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을 규모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 다. 규모 없는 사람은 도무지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다(살후 3:11).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던 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없는 것 보다도 못한 사람이다. 상식 없는 게으름이 문제 부지런함을 전제하지 않는 게으름은 초대교회의 악한 걸림돌 가운데 하나였 다. 게으름이 비단 초대교회의 걸림돌만은 아니리라. 그것은 전력투구란 열 심을 버린 채 그저 유유자적한 삶을 축복이려니 생각하는 우리에게도 걸림돌 이기 때문이다.
143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92)_시집가고자 함이니_딤전 5:11-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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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8 2006-04-06
딤전 5:11-12 시집가고자 함이니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기독교는 금욕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세상살이를 완전히 끊 고 산이든 들이든 어느 폐쇄된 공간에 갇혀 수도사처럼 생활하는 것이라고 생 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살이에서 멀어질수록 훌륭한 영적인 신자가 된다고 생각을 한다. 사실 이런 생각은 역사적인 문제였다. 기독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피 세주의를 염원했던 개인과 단체가 수없이 많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리고 이런 생각은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이원론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우리 주위에 적지 않은 사람들 이, 심지어 신앙교육을 잘 받았다고 하는 신자들까지도 기독교를 금욕 종교 로 받아들이는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는 금욕종교 아니다 디모데전서만 잘 읽어보아도 이런 생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가 혼인을 금하고 음식을 폐하는 종교 가 아니라는 생각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이런 경향을 가지 고 있는 사람들에게 거센 비판을 가하는 것을 마다 않았던 것을 볼 때 확실하 게 드러난다(딤전 4:3). 특히 사도 바울은 정상적인 혼인생활이야 말로 기독교가 지향하는 올바른 세 상살이의 특징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임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사도 바울이 감 독과 집사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말할 때, 더 나아가서 명부에 올 릴 과부는 한 남편의 아내이었어야 한다고 말할 때 이런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젊은 과부들은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하 기 때문에 명부에 올리는 것을 거절하라고 말했을 때(11절) 기독교를 금욕주 의에 편승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젊은 과부가 다시 혼인하 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금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적 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나는 젊은(과부들이)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기를 바란다”(딤 전 5:14). 사도 바울이 젊은 과부들을 거절하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들이 마 치 혼인문제에는 초연한 것처럼 행동하면서 주님께만 헌신하겠다고 장담하고 는 결국 시집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젊은 과부들이 혼인하는 그 자체에 잘못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혼인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한 후에 결국은 혼인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행동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11절)이며 “처 음 믿음을 저버리는 것”(12절)이라고 불렀다. 젊은 과부들이 처음부터 재혼 을 통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탄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주님께 헌 신하기 위하여 혼인도 고사하겠다고 결심한 후에 결국은 시집을 가는 것은 좋 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이며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과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이유를 정욕 때 문이라고 간주하였다. 사실 여기에 사용된 정욕이라는 말이 꼭 성적인 욕구 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이 단어는 무엇인가에 과욕을 부리는 태도를 의 미할 때 사용된다. 예를 들어 사치에 과욕을 부린다든가 하는 경우이다(계 18:7,9 참조). 여기에서는 이 단어가 혼인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문맥상 정 욕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혼인도 마 다하던 사람이 나중에는 성적인 욕구를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너 무나도 허망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허망한 일이 어디 정욕과만 관계되는 일 이겠는가? 이것은 우리의 모든 세상살이에도 관련되는 일이지 않은가? 금욕 과잉 욕심으로 변질 돼 기독교가 금욕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세상살이를 신앙적으로 승화시키 는 법을 터득해야 할 것이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주님의 영광을 표현하 는 것이 될 수 있다면(고전 10:31) 주님을 위해서 혼인하지 않겠다고 할 것 이 아니라 처음부터 혼인을 주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옳다.
142 no image 조병수의 목회편지(91)_제대로 된 종교_딤전 5:9b-10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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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8 2006-03-24
조병수의 목회편지(91)_딤전 5:9b-10 제대로 된 종교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비록 신학자들이 명명한 것이긴 하지만, 초대교회에는 철두철미하게 신자들 의 도덕을 유지하기 위하여 미덕목록과 악덕목록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런 목 록들은 어느 누가 앞장 서서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 이 초대교회에는 신자라면 최소한 이런 윤리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 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품위 유지 목록 만들어 이것은 초대교회가 신앙만큼이나 도덕에도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분명하게 말하자면 초대교회에는 신앙과 윤리가 분리되지 않았고, 믿음 과 삶이 구분되지 않았다. 신앙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윤리이고 삶을 강조하 는 것 자체가 믿음이었다. 초대교회는 믿음과 삶을 쪼개려 하는 것은 몸과 영 혼을 쪼개려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몇 가지만 간단히 예를 들면 미덕목록은 로마서 12:9-18과 에베소서 5:9에 서, 악덕목록은 로마서 1:29 -31과 에베소서 4:31; 5:3-5에서 살펴볼 수 있 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악덕목록(갈 5:19-21)과 미덕목록(갈 5:22- 23)을 나란히 배열함으로써 그 대조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목회서신에도 미 덕목록(딤전 3:1-13)과 악덕목록(딤전 1:9-10)이 나온다. 미덕목록에 나오는 단골 메뉴는 사랑, 인내, 충성, 화평 같은 것들이며, 악덕목록에서 자주 등장 하는 것은 음행, 사기, 다툼, 교만 같은 것들이다. 이제 사도 바울은 명부에 올릴 여신자들을 언급하면서 선한 행실의 증거를 조건으로 삼았다. 사도 바울이 생각한 여신자의 선한 행실이란 좋은 아내, 자 녀 양육, 나그네 대접, 성도들의 발을 씻기는 것,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 는 것, 그 외에 모든 선한 일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앞에서 감독과 집사에게 요구되었던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 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남자의 특성과 여자의 특성이 고려되고 있다는 것뿐 이다. 초대교회에 의하면 미덕은 지도자들에게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도 요구되는 것이다. 지도자는 도덕적인데 일반 신자는 비도덕적이라든가, 일반 신자는 도덕적인데 지도자는 비도덕적이라 는 것은 초대교회가 생각조차 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초대교회는 신앙과 관련해서는 핍박을 받았지만 윤리와 관련해서는 칭찬을 받았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윤리가 열등하다는 이유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다. 신앙 때문에는 공격을 받을 수 있어도 윤리 때문에는 공격을 받아서 안된 다.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 그러나 세상 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비윤리적인 삶 때문에 공격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공유하고 있던 일종의 공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 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이것은 신앙 때문 이 아니라 윤리 때문에 공격을 받는 우리의 모습은, 또는 윤리가 망가짐으로 써 신앙까지도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공격을 받는 우리의 모습은 초대교회와 비교해 볼 때 얼마나 다른가? 초대교회는 이렇게 미덕목록을 제시함으로써 처음부터 제대로 된 종교로 모 습을 나타내 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생긴 하류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크 신 은혜를 받아 심지어 윤리와 도덕까지 고차원적으로 변화된 제대로 된 상류 종교로 나타나는 것이 초대교회가 바란 이상이었다(골 3:10). 제대로 된 종 교! 우리 시대의 기독교를 향해서도 어렵지 않게 이런 말을 쓸 수 있을까? 소 문대로 하면 온갖 악덕이 보란듯이 활개를 치고 있는 우리 시대의 기독교를 향해서 말이다. 윤리적 지탄 수치스러워 이제 제대로 된 종교이고 싶었던 초대교회로부터 두 개의 천년을 격하고 있 는 우리도 제대로 된 종교가 되기 위하여 나름대로 미덕목록과 악덕목록을 작 성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니, 그럴 필요 없이 괜한 시간을 버 리지 말고 초대교회가 작성해놓은 윤리목록을 철두철미하게 받아들이면 모든 일이 간단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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