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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 no image |목회단상| 수(數)를 생각한다_김성진 목사 (2)
편집부
2479 2012-12-26
수(數)를 생각한다 < 김성진 목사, 늘소망교회 > “신자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것으로 신앙의 기쁨 느끼는 것” 큰 아이 대학입시를 치르면서 수에 대해 민감해진다. 성적, 내신이나 수능 등급, 경쟁률, 수능 반영비율, 학생부 반영비율 등등. 게다가 백분위가 어떻고 변환표준점수가 어떻고 하면 뭔 소린지 모르겠다. 그런데 수에 대해 신경을 쓰면서 한 가지 숫자가 일으키는 착각을 발견한다. 지원 학과 정원이 25명인데 지원자가 1430명이어서 경쟁률이 약 57대 1이다. 그러면 56명을 물리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56명이 아니라 1429명을 앞질러야 하는 것이다. 56명이 갑자기 1429명이 되니, 그렇지 않아도 높은 벽이 까마득히 높아진다. 목회를 하는데도 수에 민감해진다. 교인 수. 거기에는 수가 일으키는 착오가 없을까? 그동안 우리는 부흥의 시대를 거쳤다. 기독교인이 전 인구의 25%라는 통계까지 나온 바 있다. 그러나 지금 그 수가 허수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그 숫자의 분량만큼 우리나라에서 하나님이 알려진 바도, 두려워하는 분위기도, 그에 따른 삶의 모습도 없다. 모두가 동감하는 바다. 인구의 4분의 1이라는 수는 무엇의 수일까?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을 아는 자이다. 그 지식은 단지 개념적 정보만 가진 것이 아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왕이시요 주님이시요 지도자이시며 목자이시고 구주시요 의사요 보혜사요 사람이요 아버지이시다. 그들의 구원과 축복, 진리와 의와 생명과 긍휼, 능력과 힘, 평화와 안식 등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발견된다. 그분은 그들에게 태양이고 방패시며 빛이시고 불이시며 근원이시고 원천이시며 반석이시고 피난처시며 높은 산성이시요 상이시고 그늘이시며 성이시고 성전이시다”라고 하였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있기에 성도의 수에 포함되었을까? 물론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알 수밖에 없고, 장래에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존재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의 완성이신 그 아들을 아는 것은 성도의 본질이다. 신자의 기본적인 정체성은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앎이 그 속에서 생명력을 발휘하며, 그것으로 생동하는 신앙생활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분위기는 그것을 시도하거나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요 낯 설은 것처럼 되었다.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안 되거나 상대적으로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교회에서 깊이 있게 성경을 상고하거나 진지하게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을 대다수가 짐스러워하고 거리끼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말한다. 기독교인의 수가, 하나님을 알고 그를 증언하는 빛과 소금으로서 맛을 내는 수가 아니면 무엇 하겠는가? 다시 부흥의 시대를 꿈꾼다. 외연의 숫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수가 늘어가길 원한다. 바빙크는 말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그 후 그리스도 교회에서 나타나는 일반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해 추상적인 개념으로 철학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고 그들이 생의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께 입고 있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있어서 합리적으로 분석해서 나오는 차디찬 개념이 아니라 살아 계시며 인격적인 힘이었고, 그들 주위의 세계보다 무한히 더 본질적인 현실이었으며, 하나이요 영원하신 경배의 존재이셨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에 있어서 그분과 함께 생각했고 그분의 장막 안에 거하고 마치 그분 목전에 있는 것처럼 행했고 그분의 뜰에서 봉사했고 그분의 성소에서 그분을 경배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야 주님이 말씀하신 영생이라 할 지식이 아닐까? 오 하나님, 저부터 그런 신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말씀이 흥왕케 하옵소서. 또 다른 부흥의 계절이 오게 하옵소서. 딸아이가 통계학과도 가고 싶어 한다. 수량만 아니라 질(質)도 세는 통계는 어디서 가르치나?
601 no image |목회수상| 개념의 혼돈_변재웅 목사 (25)
편집부
2849 2012-12-26
개념의 혼돈 < 변재웅 목사, 송내중앙교회 >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며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 ‘1+1’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를 모르기 때문에 더하기를 설명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빵 한 개보다 두 개가 더 좋은 것은 압니다. 먹을 것이 더 많으니까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노랫말의 ‘사랑’이라는 개념을 몰라도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나 표정으로 분명히 ‘사랑’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십년 동안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이 흘리는 눈물도 보았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하나’를 알고 곧 ‘둘’과 ‘셋’도 배웁니다. 성장하는 단계마다 익히고 배워야하는 ‘개념’들이 쌓여갑니다. 바르게 이해하는 개념도 있고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부딪히고 갈등을 빚으며 살아갑니다. 사람마다 돈에 대한 개념도 다릅니다. 환경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고,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치명적인 개념의 충돌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곧 ‘믿음’, ‘은혜’, ‘복’ 등에 관한 개념의 차이로 인해서 오늘날 교회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의 개념 전쟁은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교회를 위기에 직면하게 하는 주요 요인입니다.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자기 소견대로’ 개념을 정의합니다. 그리고 거짓된 자기주장을 교묘한 ‘논리’로 포장하고, 뿌리 없는 ‘신학’으로 중무장을 시킵니다. 그 실례로 신앙의 ‘상급’을 ‘은혜’의 열매가 아니고 ‘자기 행위와 자기 의’의 열매로 설명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상급을 향한 더 크고 자극적인 동기부여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단순히 ‘상급’의 차원이 아니라 신앙의 ‘근본’을 확인해야 합니다. 교회의 위기를 ‘개념 전쟁’으로 규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은 단순한 구조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신앙의 모든 개념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성경’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기초요 근본이 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신학’이 기독교회의 신앙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기본 요소라는 말입니다. 요컨대 ‘개념의 혼돈’은 결국 ‘신학의 혼돈’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갈수록 교인들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개념 있는 교회는 ‘자기 부인’을 참된 신앙의 본질로 가르치는데 반해, 개념 없는 교회는 ‘자기 부인’을 신앙의 이단으로 여기도록 가르칩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경 말씀 안으로 구체적으로 들어갈수록 ‘개념의 혼돈’은 극치를 달립니다. 아예 ‘신학의 부재’라고 해야 옳을 듯한 이 시대의 상황은 신앙의 ‘가지’의 문제가 아니라 썩어가는 ‘뿌리’를 붙잡고 있는 형국이라고 봅니다. 목회에 신학은 필요 없고 오히려 저해 요소라고 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도록 한 주체가 오늘날의 교회들 아닙니까? 함께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면서,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분별해 가야 할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의 ‘맹목적 신앙’ 개념을 허구라고 단정하고 개혁하면서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래서 믿음은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말입니다. 신자들이 경건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주어진 삶을 기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만이 신자의 참된 위로가 되심’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상황, 어떤 경우에도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은혜와 복’의 참된 개념도 재정립해 가야 할 것입니다.
600 no image |초대시| 마굿간의 꿈_조심연 목사 (86)
편집부
3762 2012-12-11
599 no image |초대시| 하루 단상_김순덕 권사 (1)
편집부
2395 2012-12-11
598 no image |목회수상| 밑거름 잘 줘야 잘 자란다_최광희 목사 (1)
편집부
2500 2012-12-11
밑거름 잘 줘야 잘 자란다 < 최광희 목사, 행복한교회 > 우리교회 울타리 주변에 배추 몇 포기를 심었습니다. 상추를 심어 먹은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집사님이 텃밭에 심을 배추를 사면서 모종 한 판을 사다 주어서 심어 보았습니다. 땅에도 심고 화분에도 심었는데 그게 제법 몇 십 포기 됩니다. 배추를 심을 때는 모종이 너무 어려서 과연 잘 자랄지 걱정하며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 배추가 너무나 잘 자라고 있습니다. 할머니 집사님들은 교회 올 때마다 화분에서 자라는 배추를 보며 잘 자란다고 칭찬을 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잘 자랍니다. 사실은 배추가 이렇게 잘 자라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배추를 심기 며칠 전에 배추 심을 자리에 거름을 듬뿍 주었습니다. 참기름 짜고 나온 깻묵을 구해다가 깻묵 가루와 요소비료를 섞어서 후하게 뿌려 주었습니다. 그 후 때마침 비가 와서 거름이 잘 스며든 자리에 배추를 심어 주었더니 저렇게 잘 자랍니다. 또 배추가 자라는 데는 물이 필수적인데 거의 매일 취미로 물을 주었더니 더 잘 자라고 있습니다. 배추 심을 때 충분히 간격을 띄워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배추들이 서로서로 마주 닿아서 자리가 비좁다고 아우성입니다. 저는 배추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전도도 저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전도를 잘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배추를 심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도를 할 때도 밑거름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직접 전도를 하기 전에 충분히 사랑을 주어 마음 토양을 준비한 다음에 복음의 씨를 심어주면 밑거름의 기름진 기운을 받아서 영혼이 잘 자랄 것입니다. 밑거름이 없는 땅에 식물을 심으면 겨우 살아 있기는 하지만 영 볼 품도 없고 채소가 맛도 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적 성장도 그렇게 더디면 보는 마음이 힘이 듭니다. 내가 심은 배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어떤 분이 칭찬을 하면서 자기 텃밭에 심은 배추는 그렇게 잘 자라지 않는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밑거름 이야기를 했더니 그 분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실 보통 사람이 깻묵을 어디서 구하면 되는지 잘 모릅니다. 퇴비나 요소비료는 또 어디서 사겠습니까? 시골에는 농협에서 다 팔지만 도시에서는 비료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비료는 조금인데 많이 심으려고 넓은 땅에 뿌리면 거름이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전도 이야기를 하자면, 사람들은 전도에 앞서 사랑의 밑거름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또 텃밭에 무슨 거름을 주어야 하는지 모르듯이 사람에게는 무슨 사랑을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어떤 경우에는 열심히 뭔가를 했는데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먹다 남은 요구르트를 화분에 부어 주었다가 꽃을 다 죽여 버린 경우가 있거든요. 내가 맛있다고 식물도 그것을 먹고 살 것이라는 생각이 큰 착각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고 식물에게 못할 짓을 했는지 모릅니다. 마치 그처럼 상대방에게 맞추어 그가 원하는 사랑을 베푸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행착오를 해 보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시행착오를 한다는 말은 마음이 있다는 뜻이며 노력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장롱면허증은 교통사고 경험이 없듯이 시행착오를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채소를 가꾸면서도 전도를 더 잘 할 궁리를 하는 저를 목사의 직업병이라고 놀려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보다 저의 고민은 내가 말하는 밑거름 이론을 전도에 적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밑거름 없는 전도 사실상 실패하기 쉬워 채소 가꾸기에 시행착오를 하면서 성공하듯이 전도에도 그런 시행착오를 열심히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성공하는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597 no image |목회단상| 초대교회의 재물관_김덕선 목사 (1)
편집부
2880 2012-12-11
초대교회의 재물관 < 김덕선 목사, 예람교회 > “사도행전 2-4장을 사회주의 모델로 보는 것은 잘못된 성경해석”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모든 소유와 재산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는 자발적인 행위이지 강압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당시의 성도들은 모두 재산을 팔았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필요가 생길 때마다 그 소유를 팔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소유를 파는 행위도 한꺼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한 번씩 일어난 일이다(행 4:34). 그것은 완전히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초대교회의 재물관을 오늘날 어디까지 적용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서는 먼저 당시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칼빈은 사도행전 4장 32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는 본문이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명시한다. 이 본문은 공산주의적 재산공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은 물질의 공유를 말하고 있다.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사랑에 입각해서 물질이 없어서 고생하는 자들에게 물질을 자유롭게 공급한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자신들의 집과 직업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이사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들에게는 물질이 필요했으며, 이 필요를 충당하기 위해 성도들은 그들이 소유한 물건을 팔아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들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했기 때문이었다(행 4:33-35).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평가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범하는 두 가지 잘못이 있다. 하나는 그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오늘날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를 구체적으로 따라야 할 모델로 보는 사람들은 그것의 독특한 배경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당시에 아마도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유월절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께 돌아온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머무르며,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추방당하고, 정통 유대교로부터 출교당하며, 국가에서 호적이 삭제되는 희생자가 되었다. 그들이 경영하는 사업은 대부분이 망하거나 파괴되었고, 가족 간의 관계는 가슴 아프게 망가져 버렸다. 이러한 결과로 수천 명이 집을 잃고 직장을 잃었다. 이것은 독특한 행동을 요구하는 비상 상황이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완전한 모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돈과 소유에 대한 태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시대를 초월하여 좋은 모델이 된다. 헬라파 출신 그리스도인과 히브리파 출신 그리스도인끼리 음식 분배의 불공정성을 이유로 서로 다투었다(행 6:1). 사도행전 6장의 ‘식료품의 무료배급을 받는 빈민들의 줄’은 교회의 일반적인 특징이 아니고, 새로 시작하는 교회에 나타나는 긴급한 사태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초대교회의 이러한 모습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조직적인 행동을 통해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일이 중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행 6:2-6). 따라서 사도행전 2-4장을 사회주의로 모델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필요한 사람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나누었던 초대교회의 모범을 무시하는 것은 더 잘못되었다.
596 no image |초대시| 아름다운 노래_김순덕 권사 (1)
편집부
2257 2012-11-27
595 no image |선교단상(26)| 고민해야 할 전문성_이기종 목사 (1)
편집부
2269 2012-11-27
고민해야 할 전문성 < 이기종 목사 · 합신세계선교회 총무 > “지속적 활동 가능한 전문성 가진 선교사들간의 협력 필요해” 최근 선교계의 여러 변화들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해외로 파송되는 선교사 중에 목사 선교사의 비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도에는 한국에서 파송되는 선교사의 95%가 목사였다. 다시 말하면 전문인 선교사는 5%에 불과하였다. 그러던 것이 2004년도에는 33%가 전문인 선교사였고 지금은 50%를 넘어섰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 것이며, 특히 파송선교사의 95% 이상이 목사인 우리 교단 선교회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지금 지구상에서 복음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역, 이른바 ‘남은 과업’ 선교를 완수하려면 전문인 선교사가 많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남은 과업’ 성취를 위해서는 목사 선교사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목사 선교사가 많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겠지만 보다 큰 문제는 목사 선교사는 활동상의 제약이 많다는 데에 있다. 많은 선교지의 상황이 목사나 직업적 선교사를 환영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보다 전문적인 영역에서 활동하거나 일상적인 직업을 가지면서 타문화권 영혼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전문인 선교, 비지니스 선교, 자비량 선교 등 다양한 개념들이 등장하고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지의 상황 변화와 효율성을 고려해서 의료인, 교수, 기술직 등 전문인이 이전보다 훨씬 더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해외 취업자나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신자들에 의한 선교가 활성화 되고 있으며, ‘남은 과업’ 성취를 위해서 전문인 선교의 필요성은 날로 증대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목사 선교사들은 자신이 무슨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성경과 신학 지식만 가지고는 발을 붙이기 힘든 지역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전문성이 없이는 비자를 얻고 생존하는 기본적인 일조차 힘들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선교지에서 요구되는 전문성을 확보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비지니스 선교를 생각하는 목사 선교사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으나 이것 또한 심사숙고해야 할 일이다. 가뜩이나 선교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사업상 적자까지 발생한다면 영적 사역조차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힘들어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지니스 영역은 고도로 준비되지 않고 뛰어들면 실패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복음화율이 높고 선교활동에 있어 크게 방해받지 않는 소위 ‘추수지역’에서는 목사 선교사로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남은 과업’ 성취를 위한 개척 선교를 포기하고 계속 ‘추수지역’으로만 선교사를 보낼 수는 없다. 목사 선교사가 ‘남은 지역’ 선교를 감당하고자 할 경우 현재와 같은 방식과 준비로서는 활동 영역이 점차 좁아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과 신학 지식의 전문성을 구비할 뿐만 아니라 선교지에서 지속적으로 활동 가능케 하는 전문성을 준비해야 한다.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유능한 전문인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들 중에 선교사의 소명이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고 훈련하여 목사 선교사와 함께 협력 사역케 할 필요가 있다. 전문인 선교를 생각할 때 앞으로는 선교의 동반자 관계(Partnership)가 이전보다 더욱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선교지의 다양한 변화와 요구를 선교사 개개인이 각자 준비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므로 교단과 선교단체, 목사와 전문인 선교사, 기혼자와 미혼자, 남성과 여성 선교사 간의 협력이 필요하다. 오랜 기간 전문직에 종사하고 은퇴한 시니어와 협력하는 것이 그 대안이라 할 수 있다. 협력사역, 연합사역, 팀사역은 궁극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기 때문에 비록 예상되는 갈등과 어려움이 더러 있을지라도 반드시 극복하고 도전해야 할 과제이다.
594 no image |신앙수상| 열매는 내 몫이 아니다_이미선 사모 (204)
편집부
6955 2012-11-27
열매는 내 몫이 아니다 < 이미선 사모 · 순천성문교회 > “날마다 전도하는 삶은 하나님의 능력에 전율을 느끼는 특별한 경험”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삶의 염려로부터 놓임을 받기 위해 왔고 가난한 자들을 만지는 예수님의 손이 되기 위해 왔습니다. 또 의와 평안과 기쁨을 보기위해 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며, 깊은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위로가 되기 위해 왔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원하는 사모가 되겠습니다.” 3년 6개월 전 순천에 내려올 때 친구가 사준 “사랑이 강권하시도다”라는 책을 읽고 나서 일기장 맨 앞 페이지에 이런 내용을 기록하면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많은 이들에게 친구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딸이 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순천에 내려와 바로 출산을 하고 아이 키우는 일에 바빠 교회 일과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낼 수 없었다. 하람이가 자라고 그 해 늦가을부터 새벽녘에 담군 식혜에 생강을 넣고 팔팔 끓여서 빵과 함께 집근처 노점상 할머니들과 노인정 할머니들을 매주 섬기에 되었다. 이 일을 통해 도와주시는 이들도 많아졌다. 빵집 아저씨는 언젠가 아이를 업고 전도 하는 모습을 보았다며 당신도 돕고 싶다고 빵을 저렴하게 주시고 전날 팔다 남은 빵들도 한 아름 싸 주셨다. 그 빵으로 할머니들 모두 나눠 드리고도 남아서 교회 간식도 하고 우리 가정 간식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노인정에 할머니를 따라 놀러 나온 세빈이를 만났고 몇 개월 후 교회 근처 도서관 앞에서 전도하다가 두 번째 만남을 통해 지금까지 쭉 잘 나오고 있고 있으며 하람이 하율이와 최고로 잘 놀아주는 어엿한 숙녀가 되었다. 난 세빈이를 “식혜 열매”라고 부른다. 하람이가 돌이 될 무렵 빌립 전도훈련을 통해 나의 전도는 단단해지고 성숙되었다. 하람이를 업고 15층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며 전도지를 붙였다. 이 일을 통해서는 정민이와 은지가 전도되어 남매가 사이좋게 잘 다니고 있다가 지금은 은지만 열심히 다니고 있고 은지 엄마와도 친해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때에 정민이와 어머니도 예수님 앞에 다시 나오리라 믿는다. 또 아파트 각동에 있는 경비 아저씨들도 많이 친해지고 얼굴을 알아서 지금도 전도하는 일에 도움을 많이 주고 계신다. 노방전도를 통해서는 지훈이와 지현이를 비롯한 많은 아이들이 전도되었는데 중간에 상품만 받고 그 뒤부터 나오지 않는 아이들이 많았다.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계속 나와서 나를 많이 도와주는 고마운 아이들 덕분에 힘이 난다. 우리 교회에는 “행복이 있는 쉼터“를 운영 중에 있다. 처음에는 교회 교육관으로만 사용하려고 만들었는데 공간이 너무 아까워서 청소년 쉼터로 사용하려고 허가를 받으러 시청에 갔다. 그러나 까다롭고 허가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무료로 지역 주민들이 와서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했는데 오히려 무료이면 사람들이 오지 않을 거라는 사람들의 말에 아주 저렴하게 쉼터를 운영 중에 있다. 두 달에 한번 “일일 무료 분식”을 열어서 오는 아이들에게 설문조사를 하고 그것을 통해 그 아이들에게 연락을 하고 만나고 이렇게 관계를 하고 있다. 물론 쉼터를 통해 교회 출석하는 아이들도 많이 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들에 의해 이모, 아줌마, 사모님 등등 참 다양하게 불리며 그 쉼터에 오는 아이들과 함께 한다. 전도하러 가서 학생들을 만나도 예전처럼 거부감은 없다.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를 모르는 아이들에게도 쉼터 “이모야~”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이에 정말 감사하다. 요즘은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도 많이 오신다. 물론 그들 가운데 믿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런 분들께는 기도를 부탁하고 다니지 않은 분들께는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분들의 마음과 생각도 하나님께서 만지시리라 믿는다. 전도로 시작하고,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쉼터에 나가서 떡볶이, 와플, 파이, 빵 등을 만들어야 하는 매일의 삶이지만 그래도 즐겁다. 때로는 다 감당할 수 없다고, 너무 힘들다고 하나님께 투정을 부릴 때도 있지만 그래도 다 감당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언젠가 선교지에 계시는 사모님께서 이런 글을 보내셨다. “미선 사모! 자기 열심으로 탈진할까 봐 걱정이 돼. 자기 자신이 행복하구 풍성한 삶을 누려야 삶으로 하나님 사랑을 증명할 수 있어. 당신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기쁘게 열납하실 줄 믿어. 아멘.” 나는 할 수 없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만이 일하실 수 있다. 아직 가지가 꺾일 것 같은 많은 열매가 우리에게 없지만 열심히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그 단을 하나님께서 거두어주실 것이라 믿고 오늘도 하나님의 능력에 전율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주님이 세우신 “성문교회”와 주님이 세우신 “행복이 있는 쉼터.” 이곳이 바로 그 장엄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홍해”가 되리라 믿는다.
593 no image |목회단신| 목회자들에게 홀대받는 성경말씀_평도영 목사 (109)
편집부
3594 2012-10-30
목회자들에게 홀대받는 성경말씀 < 평도영 목사, 하안전원교회 > “하나님 말씀 홀대하는 설교자는 목회자로서 직무유기하는 것” 몇 년 전이었습니다. 합동신학대학원 졸업동기 모임에 초청된 강사의 설교를 들으며 저는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1999년도 합동신학교를 졸업한 이래로 우리 교단에서 하는 목회자 세미나, 합신 졸업동기 모임에만 참석해 왔었습니다. 세상에 흔한 전도세미나, 또 이런저런 교회부흥세미나에 지금까지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곳에 참석해서 빼앗기는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 참석해보아야 찰스 피니식 인위적 부흥만 가르치기 때문에 그 시간에 성경말씀 연구하고 책 읽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초청받은 그분은 창세기 14장 1-16절 말씀을 읽고 설교했는데 설교시간 내내 “저 분과 같은 수준의 강사라면 우리 교단 내에서도 얼마든지 있는데” 하며 “왜 저런 분을 초청했을까? 교회 사이즈가 크기 때문인가? 세상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 때문인가? 합동측 큰 교회로 소문나서인가? 그 교회에 세상에서 말하는 엘리트 교인들이 많기 때문인가?” 하는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세기 14장 1-16절 성경말씀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왕들의 연합군대가 소알 땅에 쳐들어와서 소알왕들의 연합군대와 싸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아브람)의 조카 롯이 메소포타미아 연합군대에 붙잡혔습니다. 그리고 포로가 되어 밧줄에 묶여 끌려갑니다. 그 소문을 아브라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렁렁�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 왔더라”(창 14:14-16절) 성경은 말씀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메소포타미아 지역 왕들의 연합군대는 소알땅 왕들의 연합군대를 쳐서 이긴 훈련된 병사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막강한 훈련된 군대와 싸워 이길 수 있는가? 아브라함과 함께 한 318명은 잘 훈련된 정예 병사이기에 이길 수 있는가? 평범한 종들이 그 막강한 군대와 어떻게 싸워 이길 수 있는가? 이렇게 이 본문을 설교하는 목회자라면 이런 저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세상 지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냥 “아멘, 믿습니다” 하기에는 의문점이 너무 많습니다. 본문은 무엇을 말합니까? “아브라함과 함께 한 자들은 잘 훈련된 병사들이었다. 그래서 승리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우시는 하나님나라, 즉 하나님 왕국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창세기 12장 1-3절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나님이 세우시려한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말씀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즉 왕국은 세상 어떠한 막강한 세력에도 멸망시킬 수 없는 나라임을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 즉 왕국이 복 된 나라인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세상 어떠한 나라도 하나님 나라를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시간 내내 그 강사는 본문과 거리가 먼 설교만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강사분이 하나님 말씀을 홀대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했습니다. 설교자로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로서 직무유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예배시간 내내 “하나님께서 세우신 시대의 파수꾼인 목사님들이 너무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님 말씀이 홀대 받는 모습을 보며 우울했습니다. 왜 지금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을까? 왜 그런가? 저는 제일 큰 책임이 목회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도 목회자들에게, 세 번째도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어느 부흥된 교회 목회자가 그렇게 하니, 나도 그렇게 하자, 나도 따라가자, 말씀 가지고 부흥되냐? 하며 세상 조류에 휩쓸려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말씀이 홀대 받고 있구나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교단 목사님들이 모이시면 너도나도 박윤선 목사님 이야기 많이 합니다. 그런데 왜 그 어르신 말씀은 하시면서 성경말씀은 홀대하시나요? 박 목사님에게 그렇게 배우셨나요? 박 목사님이 그렇게 강의시간에 가르치셨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본문을 얼마나 열심히 연구하시고 설교하셨습니까? 그런데 왜 세상 조류에 좇아가며 좋다, 좋다 박수치며 그길로 달려가시나요? “말씀만 가지고 안 된다” 하면서 말입니다. 제가 합신에 입학한 1995년 3월은 박 목사님께서 소천하신 이후라 강의도, 설교도 듣지 못했습니다. 주석과 책으로만 박윤선 목사님 신앙과 설교자로서의 목소리만 접할 수 있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 본이 되는 스승이십니까? 닮기 위한 선생님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합신 동역자 목사님들 말씀연구하고 또 연구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닮으셔야 할 목사님들의 표상이라면, 본이라면, 달려 가야할 푯대라면 세상 물결에 떠내려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012년 11월 6일 화요일 정암 박윤선 목사님 신학 강좌가 있습니다. 합신 동역자 목사님들은 다시 한 번 새로운 마음으로 결단하고 마음에 허리를 동이십시다. 정암 박윤선 목사님이 추구하신 바른 신학, 세우시려 했던 바른 교회, 생활에 본이 되려고 애쓰신 바른 생활을 따르는 목회자들이 되십시다.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 그 길로 달려가시는 목회자들이 되십시다. 세상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맑은 생수를 찾는 목회자가 되십시다.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고, 박윤선 목사님에게 부끄럽지 않는 목회자가 되십시다. “이 타락하고 어두운 세상에서도 올바른 교회가 있구나” 하면서 찾을 수 있는 교회를 세우는 목회자가 되십시다. 그래서 우리 교단이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세우신 정암 박윤선 목사님과 스승들에게 기쁨을 주는 목사들이 되십시다. 합신 동역자 목사님들의 교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592 no image |목회단상| 열정과 사명 그리고 행복_장석진 목사 (289)
편집부
7760 2012-10-30
열정과 사명 그리고 행복 < 장석진 목사, 광주월산교회 > “사명 피해 도망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어” 월트 디즈니가 한때 신문기자로 재직했을 때 편집국장은 ‘당신은 아이디어도 글재주도 없으니 사표를 쓰고 나가시오’라고 말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을 보고 담임선생은 ‘교사생활 12년에 이처럼 멍청한 아이는 처음이다’고 말했다. 영국인들로부터 가장 존경 받는 윈스턴 처칠은 6학년을 유급해서 두 번 다닌 학습지진아였다. 아인슈타인은 일곱 살 때 겨우 글을 깨우치기 시작한 늦둥이였다. 그의 학창시절의 성적표는 형편없었고, 초라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베토벤은 음악 교사로부터 ‘음악에 전혀 소질 없는 아이’로 평가 받았다. 어떻게 이들은 역사 속에서 그토록 엄청난 업적들을 이룰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한결같이 그들이 ‘열정’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처음의 열정이 식어버린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왜 해야 하는가 목적을 잃을 때와 여유가 없이 바쁠 때이다. 그들의 목표가 사명이라고 여겨졌을 때 그들은 열정을 다해 목숨을 걸었다. 왜 해야 하는지를 모르면 열정을 잃을 수밖에 없다. 또한 쉼 없이 몰아붙이면 육신도 정신도 지치게 되어 열정을 상실하게 된다. 열정은 사명으로부터 출발한다. 주어진 사명이 불분명하면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사명이란 ‘죽어도 해야 할 일’이고, 그래서 그 일을 못하고 죽으면 ‘한’이 남는 일이다. 아무리 많은 일을 했어도 정작 해야 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다. 하지만, 남들 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도 맡은 바 사명을 완수한 삶이야말로 성공한 사람이다. 사명을 버린 사람, 사명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 그런 사람의 인생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사명을 완수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미소 지으며 말할 수 있다. ‘다 이루었다.’ ‘이젠 죽어도 좋다.’ ‘이제 내겐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이란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 끝나는 것이다. 미국의 토크쇼 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는 혼혈아로서 가난과 수많은 아픔 속에서 독학으로 자란 불행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성경 속 모세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세운 후 그는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쓴 책 ‘이것이 사명이다’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남보다 더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남보다 설레는 것이 있다면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남보다 부담되는 것이 있다면 강요가 아니라 사명이다.” 열정으로 사는 사명자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591 no image |제 언| 종교개혁주일에 생각하는 개혁 단상_남웅기 목사 (16)
편집부
2280 2012-10-30
종교개혁주일에 생각하는 개혁 단상 < 남웅기 목사, 바로선교회 > “돈에게 뺏긴 권위 되찾는 것이 말씀회복의 본질” 언젠가부터 제2의 종교개혁이 시급하다고 합니다. 이는 어느 특정 단체의 주장이 아니라 이미 우리 모두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일반 시민들은 기독교를 O독교라 일컬으며 조롱한지 오래되었고, 성도들마저 ‘이건 아니다’는 절망감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가슴치며 탄식하는 이들로는 목회자와 신학자, 그리고 신학생들도 예외 아닙니다. 특히나 종교개혁 주간을 맞아 교단과 교회, 기관 단체들도 각종행사를 준비하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신학 교수들도 학술대회와 세미나를 개최하며 개혁의 방안을 쏟아냅니다. 그러나 저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다고 교회가 새로워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저들조차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말은 물론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자는 말입니다. 교회의 정체성을 대외적으로 세상과의 구별됨이라 할 때, 교회는 이미 그 구별됨을 상실한지 오래됐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현실 세계와는 또 다른 ‘그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냥 현실 세계의 축소판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세상 일반 단체나 조직과 다른 것이 있다면 저들이 의식 때마다 국민의례하듯 교회는 예배를 드린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어둠의 세상에서 교회가 그 빛을 잃었다면 빛 되신 하나님은 누가 무엇으로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문제의 해결은 정곡을 찔러야지 변죽만 울려선 안 됩니다. 한국교회가 정말 타락했다면, 그래서 정녕 교회개혁을 염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 타락의 본질을 꿰뚫어야 봐야만 합니다. 그 타락의 진원지는 한국교회의 성장신화일수도 있습니다. 처음 여의도의 OOO교회가 급성장 했을 때만 해도 한국교회는 자제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연이어 OOO교회가 혜성처럼 등장합니다. 때마침 불어 닥친 경제 성장의 호황을 타고 당시 거의 모든 교회가 새 건물을 지으며 급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성장의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당시 누군가 선창한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영광이다’는 구호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 진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교회 성장은 기독교의 최고가치가 되었습니다. 목사의 목회 이념도, 교회의 목표도, 성도들의 기도 제목도 오직 교회 성장뿐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치명적인 실수는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왜곡 선포한데서 비롯됩니다. 하나님 뜻은 결코 교회 성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영광은 교회의 교회다움, 성도의 성도다움, 즉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보다 우리가 그의 백성임을 입증해주길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시험당하실 때 돌로 빵을 만들어 배고픔을 해결하지 않고 빵보다 말씀이 위대함을 증명했습니다. 또한 성전에서 뛰어내려 그 능력을 증명받기보다 말씀의 권위를 내 세웠습니다. 그리고 천하만국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임을 증명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그 능력의 증명이 아닌 십자가 죽으심에 있습니다(요 12:23). 이처럼 교회 개혁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윤리 회복보다 말씀 회복이 급합니다. 돈에게 뺏긴 최종 권위를 말씀에 부여하는 게 곧 말씀 회복의 본질입니다. 내가 먼저 바뀌는 게 개혁의 출발입니다.
590 no image |목회수상| 긍휼로 여는 아침_김수환 목사 (1)
편집부
2656 2012-10-16
긍휼로 여는 아침 < 김수환 목사, 군포예손교회 > “하나님의 긍휼 없이 한순간도 살 수 없어” 퇴직한 어느 친구가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든 모습으로 모임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친구들의 다그침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며칠 전 새벽 잠자리에서 눈을 뜨고 기상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부인이 나타나서 “왜 죽지 않고 눈을 떴느냐?”고 화를 내면서 얼굴을 때렸다는 것이다. 평생 일밖에 모르고 가부장적 권위주의자로만 살아왔던 남편들이 퇴직 후 가정에서 겪게 되는 일화들을 풍자해서 만든, 일명 삼식(三食) 시리즈 버전 중 하나이다. 젊은 날 애틋한 사랑의 추억들을 예금해 두지 않고, 간 크게 살아가는 남편들께서는 조만간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치밀한 기상작전이라도 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 새벽예배를 위하여 일어나다가 문득 부인에게 얼굴을 맞았다는 그 남편의 이야기가 떠오르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눈을 떠도 괜찮은 사람인가......?” 그러고 보니 아무에게도 자신이 없다. 가족들 앞에도, 교인들 앞에도 미안하고 부끄러움뿐이다. 하나님 앞에 너무 송구스럽고, 내 자신에게 마저도 너무 한심스러워 잠시 눈을 감은채로 있었다. 기회를 놓칠세라 마귀는 죄책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내 생각에 틈타고 들어와 “그러고도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그러니까 목회가 그 모양이지” 하면서 마지막 남은 몇 방울의 의욕마저 무력화 시켜 버리고 만다. 이내 마음이 바윗돌처럼 무거워 진다. 그리고 그 무거운 감정은 이내, 남은 인생과 목회에 대한 부정적인 회의로 급속히 번져간다. 나도 모르게 깊은 한 숨이 터져 나왔다. 바로 그때 예상치 않았던 주님의 말씀이 내 영혼의 귓전을 때린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 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가 3:22-23). 그렇다. 우리는 여호와의 긍휼이 없이는 단 하루도 눈을 뜰 수도 없다. 아니, 떠서도 아니 되리라. 그냥 눈을 감은채로 생을 끝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눈을 뜨고, 오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무궁한 여호와의 긍휼 덕분이다. 무궁한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가 나의 연약과 수치와 죄악을 다 덮어 주시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긍휼의 이불은 나의 모든 실수와 죄악까지도 다 덮고도 남을 만큼 아주 길고 넓은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눈을 떴다. 양쪽 눈가에는 이미 굵은 이슬방울들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오래된 체증이 내려간 듯 가슴이 시원해져 왔다. 교회를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이 더 가볍고 빠르게 느껴졌다. 우리는 어제 하루 동안도 떳떳할 만큼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든다. 꿈속에서 조차도 죄를 짓고, 불순종하며 우리의 욕심대로 산다. 그럼에도 그 다음 날 아침에 변함없이 눈을 뜬다. 우리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것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너무나 특별하고, 과분한 일이다. 실로 무궁한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 매일 아침마다 반복된다. 만일 여호와께서 단 하루라도 실수해서 긍휼과 자비를 거르시는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애굽의 장자 재앙 때와 같이 거대한 죽음의 바다가 될 것이요, 정전 때와 같이 우리의 모든 삶이 일시에 멈춰 버리는 비상사태가 발생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실하신 하나님은 단 하루아침도 실수하지 않고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가 없다. 밥을 먹는 일도,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는 일도, 운전하는 일도, 책을 보는 일도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직 자기 의로써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 없는 사람처럼 살아간다. 하나님의 긍휼은 약하고 실수 할 때 뿐 만이 아니라, 강하고 성공할 때에도 필요하다. 우리가 약할 때는 낙심하고 좌절해서 문제지만, 강하고 성공할 때는 우쭐대고 교만해서 넘어진다(잠 18:12). 우리 인간은 약하면 약한 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문제요, 시험거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 동안도 열등과 우월, 교만과 낙심의 경계선을 수도 없이 넘나든다. 따라서 삶의 근간을 우리 자신에게 두고 살아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자신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두게 될 때, 교만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겸손하며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다. 과연 하나님의 긍휼만큼 우리를 소망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예레미야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의 유일한 소망은 오직 무궁한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은총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새롭다고 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소망 역시도 무궁한 주님의 긍휼뿐이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애를 써도 우리는 여전히 유한한 인간이요, 별 수 없는 죄인들이다. 주님의 긍휼이 없이는 매일 아침 눈을 뜰 수도 없고, 순간도 버틸 수 없는 존재들이다. 나는 오늘 아침도 여호와의 긍휼로 눈을 뜨고, 하루를 연다. 그리고 그 긍휼로 나와 가족과 교인들 앞에 선다.
589 no image |신앙수필| 아름다운 당신, 빛나는 그대_남춘길 권사 (96)
편집부
4976 2012-10-16
아름다운 당신, 빛나는 그대 < 남춘길 권사, 남포교회 > “입양은 버려진 아이들이 꿈꿀 수 있는 마지막 희망” 얼마 전 신문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분과 일면식도 없지만 그분이 살아오신 발자취와 정갈한 모습에 담긴 인자함은 훈훈한 온기와 감격으로 마음을 가득히 채워 주었다. 그분은 버려진 아이들이 입양되기 전까지 50년 이상을 젊음을 바쳐 고아들을 진료해온 홀트 복지타운 조병국 부원장이다. 6.25 전쟁고아들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이유로 버려진 수많은 고아들의 슬픈 운명 앞에 안정된 자신의 미래를 던져버린 것이다. 78세이신 지금도 이렇게 단아하고 아름다운데 20대의 그분은 얼마나 예뻤을까 생각해 본다. 의대를 졸업한 뒤 곧 홀트아동복지회 고아원 근무를 시작으로 고아들을 돌보았고 아동병원 과장자리를 박차고 아예 홀트회로 자리를 옮겨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버려진 아이들에게 주어진 운명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거나 살아남아 입양을 가거나 둘 중의 하나다. 사랑하는 엄마 품에서 애지중지 키워도 아프면서 성장하는 것이 아기들인데 하물며 버림받은 아기들이야 말해 무엇 하랴! 친부모가 포기한 장애아나, 희귀질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어 훌륭히 성장해 찾아왔을 때, 또 자기들처럼 버려진 아이들을 입양하겠다고 했을 때, 고마운 마음과 보람됨과 뭉클함을 표현할 없노라고 말한다. “입양은 버려진 아이들이 꿈꿀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씀하였다<‘가슴으로 낳은 아이’ 중에서>. 나도 한때 아기를 데려다 키워 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있었다.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큰 아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물론 남편에게 의논조차 하지 않은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따뜻한 마음으로 키울 수는 있겠는데 잘 교육시켜 아이의 장래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와락 겁이 나며 자신이 없어졌다. 역시 나는 그럴만한 그릇이 못 되는구나 자책하며 생각을 접었었다. 대한민국은 고아 수출국이라는 부끄러운 오명을 갖고 있지만 프랑스의 최연소 여성 장관이 된 폴뢰르 펠르랭을 보면 그 생각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싶다. 펠르랭은 태어난 지 6개월 쯤 되었을 때 프랑스 가정으로 입양 된 한국인이다. 그가 모국인 한국에서 성장 했다면 지금 같은 위치에 올라 꿈을 펼칠 수 있었을까? 1973년생인 펠르랭은 입양된 후 한 번도 한국에 와본 적도 없고 한국어는 전혀 모른다. 그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외모는 동양인이지만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은 프랑스인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한국에서 주목받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한국의 기업혁신 비결을 배우고 싶고, 프랑스의 초고속 통신망 구축에 한국의 경험을 활용하고 싶다고, 삼성/LG가 세계기업 된 비결도 공부하고 싶다며 내년쯤 한국을 방문하고 싶은데 한국 문화를 알고 싶을 뿐 생물학적 가족을 찾기 위함은 아닐 것이라고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펠르랭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든 간에 그의 몸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6개월 된 아기가 강보에 싸여 푸른 눈의 새로운 부모 품에 안겼을 때 얼마나 낯설고 서먹했을까!! 그 또래의 아기들이라면 날마다 얼굴을 대하는 제식구가 아니면 사랑 가득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낯을 가려 울음을 터트리고, 오랫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곤 하는데... 포근한 엄마 품에 안겨 토실토실 살이 오른 보드랍고 작은 손으로 곤지곤지, 젬젬, 도리 도리, 짝짜꿍, 재롱을 떨어야할 시기에 그 아기는 비행기에 태워져 낯선 땅 프랑스로 갔을 것이다. 아마도 사랑에 굶주리고 영양 부족인 아기는 생명이 위독할 만큼 잔병치레가 잦았을 것이다. 조병국 의사 할머니의 손길이 없었다면 이 아기도 희생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펠르랭은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에 대하여, 자신이 버려진 아이였다는 사실이 한때 힘들고 괴로웠지만 좋은 부모님 에게 입양된 행운을 감사함으로 받아 드렸고 훌륭한 부모님의 세심한 배려로 지적 호기심을 키워 나갈 수 있었노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감사를 놓치지 않은 긍정적 사고와 그의 노력 사랑으로 키워준 부모님 그리고 타고난 머리의 명석함, 이 모든 것이 합하여 오늘의 그가 존재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경말씀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꿈도 소망도 사랑도 놓쳐 버린 채 버림받은 생명들, 병마에 시달리던 어린 고아들을 일생 돌보아온 조병국 홀트 복지타운 부원장님 같은 분이 있어서 입양아의 슬픔을 딛고 39세의 젊음으로 프랑스의 중소기업, 혁신, 디지털 경제 담당 장관으로 발탁된 빛나는 폴뢰르 펠르랭이 우리 모두를 살맛나게 해주고 있다.
588 no image |초대시| 쫓기는 주역_권태진 목사 (1)
편집부
2435 2012-09-28
587 no image |초대시| 동 행_김동환 집사 (1)
편집부
2674 2012-09-18
586 no image |선교단상(25)| 선교사와 훈련_이기종 총무 (2)
편집부
2718 2012-09-18
선교사와 훈련 < 이기종 목사 · 합신세계선교회총무 > “타문화권 선교위한 전문적, 구체적 훈련 필요해” 수년 전에 베스트셀러가 된 어떤 한국인 선교사가 쓴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어떻게 선교 훈련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 왔다. 나는 선교 단체에 가입한 적도 없고, 선교 훈련을 별도로 받은 적도 없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기 원하시면 그에 맞게 준비시키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훈련을 하나님께 직접 받고 싶었다. 실제로 하나님은 유학 생활이라는 훈련 기간을 통해 나를 훈련시키셨고 준비시키셨다.” 해외 선교지를 방문하다 보면 선교 훈련을 받지 않았거나 소속 단체가 없이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나름대로 각자의 사정이 있을 수는 있다.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하는 지망생들 중에도 어떻게든 훈련을 조금만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파송 전 선교 훈련만큼은 제대로 받고 선교지로 부임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요셉과 모세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오랜 준비와 훈련을 통하여 지도자로 세우시며 훈련 받고 경험한 만큼 사용하신다. 군에 입대하면 훈련소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하여 초년병이 탄생한다. 비록 입대 전에 여러 가지 고생과 훈련을 많이 받았다고 해도 군사 훈련은 누구나 받아야 한다. 장교가 되려면 고된 훈련을 더 많이 받는다. 왜 그런가? 입대 전 받았다고 하는 훈련들과 군인에게 필요한 군사 훈련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받았다고 하는 훈련, 유학 생활에 따른 훈련은 선교 훈련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사탄의 강력한 공격이 잦고 어두움이 짙은 비기독교 타문화권, 치열한 영적 전쟁터의 최전방에 나가서 전투를 치러야 하는 선교사에게는 선교라는 사역 분야가 결코 그렇게 막연한 준비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누구나 ‘선교사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선교사로 소명을 받고 파송 받아 ‘타문화권 선교사’가 되는 것은 다르므로 특별한 각오와 희생이 필요하며, 거기에 적합한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 지난 8월 27일부터 11주 합숙 과정으로 제1기 타문화권 선교사 훈련이 송탄제일교회 안성수양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30여 년 교단 역사상 처음으로 선교훈련원(MRC-Missionary Resources Center)을 발족하고 우리 교단이 필요로 하는 선교사를 훈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간 우리 교단은 파송 선교사들에 대한 훈련을 여러 외부 기관에 위탁해 왔다. 그 결과 외부 기관의 훈련 철학, 신학적 배경에 따라 훈련 내용과 효과가 다르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우리 교단과 선교회가 추구하는 비전, 가치와 정책에 따른 선교사 양성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파송 전 훈련의 질과 강도에 따라 정체성, 소속감, 그리고 현장에서의 선교 방식과 선교 역량에 차이가 날 수 있다. 선교 훈련이 가져다주는 유익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제는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선교 이론과 실제를 내면화할 수 있고, 팀 내 갈등 관리 및 관계 훈련, 가족 및 자녀 문제에 대한 방향성 있는 지도, 진입 전략과 출구 전략 등을 통해 건실한 선교사 양성이 가능하게 되었다. 향후 파송 전 훈련(pre field training)뿐만 아니라 현지 훈련(in field training), 연장 훈련(continuing training)이 후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585 no image |신앙수상| 태풍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_이미애 사모 (11)
편집부
2482 2012-09-18
태풍 가운데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 이미애 사모, 군산 샬롬교회 > “자연재해에도 우리의 작아짐과 낮아짐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툭 툭 두두둑...... 쏴아악~ 태풍이 지나간 여운인지 이제는 빗소리가 익숙하다. 지금도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난 누구보다도 바람 부는 것과 비가 오는 것을 빨리 느낄 수 있다. 먼저는 콧물이 흐르는 몸이 느낄 수 있고 두 번째는 우리 예배당의 특성상 바람소리와 빗소리를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다. 오래된 판넬식인 예배당은 그 어느 해, 눈이 엄청 많이 오던 그때, 지붕의 눈을 치우고 또 치우다 지쳐가고 있을 때 지붕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다행히 천천히 소리 없이 내리며 누르고 있던 중이라 우리는 큰 재난을 당하지 않고 임시로 철 기둥을 여러 개 대여해 궁여지책으로 받침대로 지지대를 세울 수 있었다. ‘어이할꼬~’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목사님들께 상의를 드리자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해 주셨다. 그리고 기도와 후원을 해 주셨다.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그 중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가장 큰 대안은 기독교개혁신보사에서 눈 피해로 고통당하는 샬롬교회를 위해 기사를 써 주셔서 많은 교회와 목사님들과 성도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지붕을 다시 언질 수 있었다. 내친김에 예배당 바닥에 보일러 공사까지 하는 큰 은혜를 받았었다. 이번에 태풍 피해를 입은 교회들도 동일한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당시 주민센터에서도 공무원이 나와 조사를 하고 안타까워하며 피해 정도를 적어 갔었다. 예배당 공사가 끝나고 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 국가에서 피해 보상금이 나왔다고 통장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지금 기억으로 약 6만 5천 원 정도로 기억이 난다. 개척교회인 우리 사정으로는 적지 아니한 금액이었지만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혀서 남편에게 받지 말자고 했다. 그걸 받고 정부지원을 받았네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난데없이 그것도 한여름에, 한겨울 지붕 무너지는 소리를 할까 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번 여름에 태풍 볼라벤과 덴빈의 영향으로 우리 군산지역에 피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어서 그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특히 과수농가와 축산, 어업, 농업뿐 아니라 지대가 낮은 지역과 산밑의 주민들 그리고 지하의 상가와 1층의 주민들과 상가들이 무너지고 잠기는 그리고 수많은 물건들과 기계, 자동차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과 인명 사고도 당했다. 무엇보다 남부 지역과 서해안 지역이 피해가 크다니 마음이 아프다. 인터넷과 지상파를 타고 소식이 전국에 퍼져나갔으나 우리가 경험했듯이 피해 입은 주민들과 상인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갈 것이다. 국가에서 아무리 재난지역의 선포니 세금감면을 해 주어도 피해액은 많고 대상자는 많으니 그 혜택은 가뭄에 콩나는 정도일 것이다. 참으로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한숨이 바람을 따라 내 가슴에 사무치게 파동치고 있다. 이번 태풍 볼라벤은 바람으로 더 많은 피해를 주고, 덴빈은 비로 많은 피해를 주었는다. 우리 예배당도 예외는 아니어서 허술했던 부분들이 모습을 드러내 다시 나사로 조이고 철사로 동이고 비가 새는 부분은 다시 보강 작업을 해야 했다. 우리는 자연의 큰 재앙 앞에, 우리의 작아짐과 낮아짐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경험을 한다. 처음에는 원망도 하고 한탄도 하며 삶을 뒤돌아보고 후회도 하며, 세상에 손을 놓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주님에게로의 귀화를 통해 거듭나고 새로워지는 복을 얻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단지 이 일을 어찌 재난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생명을 얻는 기회를 주신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태풍은 바다의 정화와 적조현상의 제거 및 적도 에너지의 분배 등 지구의 균형과 더불어 바다의 쓰레기를 밖으로 밀어내고 오염된 물을 정화시키는 중요한 역할도 한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마음을 담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시> 가을 바람 바람에 향기가 묻어나는 가을입니다 어떤 향기 어떤 색깔인지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바람이 닫는 곳마다 튼실한 열매가 바람이 머무는 곳마다 신비한 향내가 바람이 만지는 곳마다 아름다운 색깔이 묻어납니다 참으로 묵상의 계절이요, 사랑의 계절입니다 바람의 성품이 태풍에 쌓여 있을 때와 가을 햇살과 함께할 때가 왜 이리 다른지요 가을의 묵상 속에서 가을바람을 타고 사랑이 영글기를 기도합니다
584 no image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구하는 교회로 회복하자_문민규 목사 (141)
편집부
5404 2012-09-18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구하는 교회로 회복하자 < 문민규 목사, 반석교회 > “칼빈주의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으로 교회의 본질 회복하는 원동력” 2001년 9월 11일 뉴욕 멘하탄 세계무역센터를 가로지른 항공기 두 대의 충돌로 2,749명의 미국 시민이 사망하는 테러가 발생했다. 미국을 공포로 몰아 놓은 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 ‘뉴욕타임즈’지에는 의미 있는 논쟁이 발생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 ‘문명의 충돌’의 저자 새뮤엘 헌팅턴, ‘숙명의 트라이 앵글’의 저자 노암 촘스키, ‘근대 세계체제론’의 저자 임마누엘 월러스타인 등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보수와 진보 논객들이 이 논쟁에 참여했다. 보수적 논객들은 미국의 즉각적 응전을 하려는 지도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논조를 주장했다. 반면에 진보 입장의 논객들은 보복적 전쟁을 준비하려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을 향해 “테러는 극우파에게 하나의 선물”이라며 보복 전쟁의 주장을 질타했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911테러와 같은 사태가 발생했다면 어쩌면 획일적이고 선동적인 논조가 온 매스컴을 압도했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양쪽 진영의 논쟁이 대립하고 있을 때 마이클 왈쩌는 뉴욕타임즈(2001년 9월 21일 자)에 전 세계의 지성인들에게 길이 기억에 남는 글을 기고했다. 그 사설의 제목은 “야만의 방식이 아닌 문명의 방식으로 답하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2년을 채 넘기지 않고 마침내 보복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마하마트 간디는 반영불복종운동으로 비폭력 저항이라는 특이한 방법으로 결국 인도를 영국의 식민지에서 해방시킨 바 있다. 간디의 이러한 저항운동의 근거는 신약성경의 산상수훈이라고 한다. 당시 마이클 왈쩌는 아모스서를 통해 사회적 비판가들에 대해 “야만의 방식이 아닌 문명의 방식으로 답하자”는 의미있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이처럼 사상가나 정신적 지도자들 중에는 성경에서 자신의 사상을 취하는 것을 보게 된다. 기독교, 즉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은 말 그대로 저항사상이다. 이 저항사상을 잘 드러낸 학자가 바로 칼빈이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교회지도자로 있을 때 그는 교회개혁을 통해 제네바 사회에까지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는 번번이 칼빈의 사회 개혁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때마다 칼빈은 묵묵히 제네바 시의회의 제동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국 제네바 시는 칼빈의 사회 개혁을 점차 수용하게 되었다. 칼빈 이후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성경해석의 주도권을 인본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부터 교회는 빛을 잃게 되어 칼빈주의가 가졌던 설득력과 영향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사회에서는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아 꾸준히 사회 개혁을 추구해오고 있다. 지금도 어떤 사회적 위기가 오게 되면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논조가 설득력을 갖기도 한다. 반면에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하다. 교회가 개혁되고 사회를 개혁하는 신앙의 실천적인 모습을 전혀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타락한 사회로부터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왜 한국교회는 사회개혁에 대해 오히려 후퇴하는 모습을 보일까?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성경해석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본다. 한 예로써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 23:23-24)를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율법의 더 중한 바’에 대한 해석과 ‘소경된 인도자’는 누구이며, 그들은 무엇을 버리고 있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이 무엇인가는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논조의 초점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다는데 있다. 칼빈 시대의 교회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구했다. 그리고 그들은 목숨을 담보로 하여 올곧게 신앙을 내세웠다. 제네바에서 칼빈이 목회 활동을 하면서 중점을 둔 사역 중 하나는 선교활동과 더불어 제네바로 피난 온 종교적 난민들에 대한 구제활동이었다. 칼빈은 복음전파와 더불어 난민들의 구제에도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이다. 우리는 칼빈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성경해석과 그 적용에 있어서 실패하고 있다. 이제라도 우리 한국교회가 신앙고백과 더불어 바른 성경해석을 통하여 실천적인 성도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아름다운 교회의 삶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신앙과 삶을 병행함으로써 기독신자들이 있는 곳마다 그곳에 정의가 드러나고 긍휼이 베풀어지며 신의가 편만한 곳이 되기를 바란다. 이럴 때 우리 사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583 no image |목회수상| 쓸개도 없고 속도 없는 아내_이은상 목사 (1)
편집부
3147 2012-09-04
쓸개도 없고 속도 없는 아내 <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 “말만 앞세우는 사랑은 도리어 아내의 마음 힘들게 할 수 있어” 제 아내는 목사인 남편을 두었습니다. 7년 전 제가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 룻처럼 순종으로 따라나선 여자입니다. 온갖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목회자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제 아내는 ‘목사 아내는 남편이 없다’는 말처럼 남편에게 말로만 사랑받고 실제로는 별로 관심 받지 못해 사랑결핍증이 약간 있는 연약한 사모입니다. 그럼에도 여느 개척교회 사모처럼 교회의 요구대로 겉모습은 선머슴처럼 힘이 세고 팔뚝도 굵습니다. 또한 성도들에게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게 보이려고 화장대 앞에 좀 오래앉아 있는 중년여인입니다. 교인들의 바람에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할 말이 많아도 침묵으로 꿀꺽하기를 잘하고 가정에 고난이 와도 실실 잘 웃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는 남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속도 없고 쓸개가 빠진 여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 아내는 세 달 전 위암 판정을 받고 위와 주변 임파선과 쓸개 절제수술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때부터 제 아내는 저에게 소갈머리 없는 여자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합니다. 그래도 저는 제 아내가 행복하다고 확신합니다. 그 이유는요? 스트레스로 속 썩일 일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하! 속이 없으니까요. 사모의 자리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입니다. 특히 현대사회의 목회자 사모는 정확한 정체성도 부여받지 못한 채 여러 가지 역할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먼저 과거로부터 전통적인 사모상을 요구받습니다. 가령 사모는 언제나 따뜻하고 언제나 웃는 얼굴이어야 하며 사모는 자랑도, 실수도 없어야 합니다. 사모는 수수한 옷차림에 무던한 성격이어야 하며 부지런해야하고 미덕이 많아야 합니다. 또한 사모는 현대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과거와 또 다른 사모상을 요구받습니다. 가령 사모는 돈도 있어야 하고 재치도 만점 모든 일에 능한 슈퍼우먼이어야 합니다. 전도도 잘해야 하고 한명의 교인도 놓치지 않도록 구역도 잘 돌봐야 하고 설거지도 깨끗이 해야 하고 음식도 맛깔스러워야 하며 인테리어에도 눈썰미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과거와 현대 사이의 이중적 사모역할은 사모로 하여금 많은 스트레스를 받게 할 것입니다. 이런 중압감을 밖으로 표현할 수 없으니 소화불량이 걸려도 몇 번 걸려야 하겠죠? 그러나 저의 아내는 속이 없으니 소화불량도 없을 겁니다. 저의 아내가 행복한 이유는 남편의 사랑을 진짜 받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은 말을 잘하기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도 말로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내에게 말로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저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저의 아내는 환자이기 때문에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설거지 하느라 얼마나 힘드냐’고 말하면 안 되고 설거지를 해줘야 합니다. ‘배가 얼마나 고프냐’라고 말로하면 안되고 죽이든 밥이든 끓여줘야 합니다. 물론 생각만 해줘도 얼마나 좋겠냐고 하는 남편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 사랑’은 성도들로부터 너무 많이 받아 와서 이제는 지겹기까지 합니다. 사모는 약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모에게 정말 필요한 위로는 생각도 아니고 말도 아니고 행동입니다. 병든 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는 립서비스가 소용없습니다(약2:16). 아니 말만 앞세우는 것은 도리어 마음을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만 해놓고 실제로 행동한 것처럼 착각하는 남편은 사모에게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저의 아내는 저의 행동사랑을 받고 살아가기에, 헌심(獻心)이 아닌 헌신(獻身)을 받기 때문에 아마 지난날보다 행복할겁니다. 이 땅에, 지구촌 구석구석에 땀 흘리며 사모자리를 지키는 여인들에게 사모곡을 불러 보겠습니다. 속없는 여자들이여, 쓸개 빼고 사는 사모님들이여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우리 주님이 아시잖아요. 성경구절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알고 계십니다.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히 4:1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목회자 아내들이여! 주께서 다 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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