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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 no image |신앙단상| 나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_이미선 사모 (1)
편집부
2748 2012-08-21
나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 < 이미선 사모, 순천성문교회 > “어려울 때에도 나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감당할 수 있어” 믿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여름성경학교를 통해서 교회를 처음 찾게 되었다. 서울에서 언니오빠들이 와서 해주는 성경학교였는데 교회보다는 왠지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멋져 보이고 신기해서 서커스를 보듯 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간 것 같다. 그게 내 신앙생활의 시작이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했었다. 초등부 때는 교회예배 항상 개근이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토요일에 큰 전지에 찬양을 써내려가며 예배를 준비하고, 주일엔 아침 일찍 40분을 걸어 나와 교회 봉고차를 타고 마을 곳곳으로 아이들을 데리러 가곤 하였다. 새벽녘 교회 종소리가 울리면 산을 넘어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던 나를 마을 사람이 들에 나가시다 보시구선 부모님께 “어이~ 미선이가 교회에 미쳐부렀는갑네. 어짤근가. 뭔 수를 쓰소~“라는 말을 듣고 화가 나신 부모님은 ”니 맞아죽을래, 교회갈래?“ 하시면서 때리셨다. 그런 부모님 앞에 무릎 꿇고 "아빠! 교회 가게해 주쇼. 교회 갈라요~”라고 말했던 나는 한참을 입술에 피가 날 때까지 더 맞고 나서도 아빠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니 맘대로 해라~”라고 아빠가 포기해 주셨다. 마을 사람들도 “니는 교회에 미쳐가지고 나중에 전도사아니믄 니 델꼬가도 안하겄다~” 하시면서 나를 내려놔주셨다. 그 일 이후로 엄마는 절에 자식들 불 켜놓은 거에서 내 이름은 빼고 명절에도 내 촛불은 켜지 않았다. 그렇게 얻은 나의 신앙생활은 고향을 떠나 직장생활하면서 많이 깨져버렸다. 잦은 회식과 노는 문화에 빠져서 교회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직원 중의 한 분이 “너는 교회 안다니냐?”고 하는 질문에 정신이 번쩍 들어 교회를 찾기 시작해 사명의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예배시간에 늦게 가서 뒤에 앉았다가 끝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청년부 오빠를 통해 청년예배를 드리고 찬양팀에 들어가서 찬양을 드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나누면서 리더가 숙제를 내주었다. 그 숙제가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에게 일주일 안에 사랑한다고 말하기”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 나는 어릴 적부터 아빠를 가장 싫어했다. 극보수적이고 술을 마실 때 마다 엄마를 때리고 자식들을 괴롭히고 창고에 가두는 아빠가 너무 싫었다. 엄마가 바닷물에 빠져들어 허우적대며 죽어가도 삼촌이 구하러 갈 때까지 가지 않았던 아빠가 너무 싫었다. 대화라고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진지 잡수세요. 안녕히 주무세요”가 전부였다. 그 외의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하니 절대 싫었다. 근데 숙제라고 하니 해야 했다. 수요일부터 집에 전화해서 “아빠~”만 부르고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걸었다고 하고선 끊어버렸다. 그렇게 목요일, 금요일 아침까지 했고 토요일 찬양 모임 때까지 해야 하니 금요일 밤 용기를 내어야 했다. 또 다시 전화해선 “아빠~ 있잖애라~“ 망설이니까 ”니, 왜 자꾸 전화해서 암말도 않고 그러냐? 뭔일 있냐?“면서 화를 내셨다. 화내는 아빠 앞에 더 입이 안 떨어졌지만 용기를 내었다. “아빠 있잖애라~ 긍께 있잖애라~ 긍께 사랑하요~” 아빠는 한참을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고 나선 울먹이시면서 말씀하셨다. “나도 니 사랑한다. 근디 말 못했다~ 글고 나가 엄마랑 느그들한테 잘할라, 근디 잘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한참을 수화기를 들고 아빠랑 울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빠와 우리 가족의 벽을 허물었다. 그 후에 휴가를 받아 시골을 갔는데 아빠가 왔냐면서 편안하게 웃어주셨다. 그런 아빠에게 무슨 용기가 났는지 뛰어가 안겨서 사랑한다고 말했다. 대단한 발전이다. 지금은 나의 든든한 응원자가 되어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변화시켰다.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임원으로 청년부를 섬기고 교사로 중고등부를 섬기고 찬양팀으로 예배를 섬겼다. 결혼을 하게 됨으로써 목숨을 걸고 나에게 주신 영혼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모가 되게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마지막으로 고향같은 사명의 교회를 떠나 온수교회에서 1년 정도 사역하면서 많은걸 배우게 하셨고 지금의 나로 만들어가셨다. 지금은 순천 땅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하나님은 청년시절 준비해놓으신 그대로 나를 초등부와 중고등부교사로 사용하시고 찬양을 인도하게 하시고 청년부 시절 때 많은 부서를 음식으로 섬겼던 그때처럼 지금도 우리 성도들을 위해 주일 식사로 섬기게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하셨다. 교회를 섬기게 하시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쉼터와 지역주민들을 섬기게 하시며 복음을 전하는 자로 하나님의 증인된 삶으로 나를 사용하고 계신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면서 다 감당할 수 없고 눈물이 날 때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나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이렇게 서 있다. 나의 삶을 하나님께서 써놓으신 각본 데로 이전에도 지금도 나를 이끌어 주신 것처럼 앞으로의 나의 삶을 멋지게 써주시리라 믿는다. 사람 숫자만 늘이려 급급해하는 교회사역보다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들어가는 그런 교회가 되길 소원해 본다. 수고하는 것을 불평하지 않고 시련가운데 원망하지 않으며 우리의 처지에 감사하면서 교만 하지 않고 맡겨진 것에 최선을 다하고 시작보다는 끝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한다. 나의 고난이 주님의 영광이 되고 주님과 하나됨이 우리의 형통함이 되길 소망하며 오늘도 진정한 사역의 성공과 실패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나서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사마리아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다가가 생명의 길로 초청하신 것처럼 다른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생수를 맛보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멋진 도구가 되기 위해 오늘도 달려간다.
581 no image |초대시| 여름 비탈길에서_신영선 사모 (1)
편집부
3138 2012-08-07
580 no image |목회수상| 도약을 위한 쉼_이주형 목사
편집부
2787 2012-08-07
도약을 위한 쉼 < 이주형 목사 · 오정성화교회 > “일중독에 빠지면 우울증, 강박증 등 질병발생률도 높아져” 연일 폭염특보가 발효되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무더운 날씨에 지치기 쉽고,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더욱 지치게 하는 것은 일중독이란 것이다. 일중독이란 1980년대 초에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로 보통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외로움을 느끼며,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중독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경제력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 또는 완벽을 추구하거나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으며 보통 일주일에 60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고 한다. 여기에 비추어 보면 목회자는 24시간 비상대기조로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 부흥에 대하여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교회가 부흥되지 못하면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경제적인 뒷받침이 안 되면 받는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것도 현실이다. 이런 일로 인해 소화기 계통의 질병, 고혈압, 우울증, 강박증 등의 질병이 생기기 쉽다고 한다. 직장인들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스스로 일중독자라고 대답한 사람들이 남자가 33.5%, 여자가 25.1%였고 그 중에 40대가 가장 많고, 30대, 20대가 그 뒤를 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면 이 보다 더 많이 나오지 않겠는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문제는 자신이 일중독이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더 많다는데 있다. 일중독으로터 목회자는 어떻게 하면 치유를 받을 수 있을까? 주님이 하신 말씀이다.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수고한 제자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막 6:31). 일단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쉼을 가져보며 밖에서 나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도 창조하시고 안식하셨으며 우리에게 안식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목회자들은 잘 쉴 줄을 모른다. 시간에 매여, 일에 매여 살 때가 많다. 그러다가 지치고 탈진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이미 늦은 것이다. 안식년의 제도가 있지만 활용하는 목회자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목회자 자신이 쉬지 못하거나 교회의 형편이 안 되어 쉬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안식년 제도와 휴식의 제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세분화 하여 의무화 하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남미 같은 경우는 근무 연한에 따라 1년에 1개월에서 2개월 휴가 제도를 의무화 했다. 이번 여름행사 하느라 지치신 모든 목회자들에게 최소한 여름휴가를 여유롭게 가져 일상탈출을 과감하게 시도해 보는 것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한다.
579 no image |선교단상(24)| 나의 동역자들_이기종 총무 (1)
편집부
2823 2012-07-24
나의 동역자들 < 이기종 목사 · 합신세계선교회 총무 > “세계 선교에 보다 많은 역할 하기 위해 협력과 동역 자세 갖춰야” 1980년대 이후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꾸준히 선교사를 파송해 온 한국 교회는 이제 성경과 선교 역사가 주는 경험들을 거울삼아 선교의 본질을 시급히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선교에 대한 반성과 본질 회복의 기회를 놓친다면 매우 불확실한 미래를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교회의 선교가 풀어야 할 중요 과제들 중의 하나가 바로 선교 현장에서 ‘협력과 동역’의 문제이다. 한국 선교사들 중 극소수만 팀 사역을 하고 있으며 거의 대부분이 소위 ‘각개전투식’으로 사역하고 있다. 교단, 선교 단체, 교회 그리고 선교사들이 제각기 ‘나름 선교’를 한다. 서구 선교가 오래 전부터 효과가 별로 없다고 결론을 내린 ‘프로젝트성 선교’가 아직도 눈에 많이 띈다. 서구 선교 단체에 소속된 우리 한국 선교사들이 매우 힘들어 하는 부분이 바로 ‘팀 사역’이며 이런저런 이유로 독립적으로 사역하고 싶어 한다. 사도 바울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로마교회를 향한 서신인 로마서의 16장을 살펴보면 16절 이전의 전반부에서 27명 이상에게 문안을 하고 있으며, 21절 이후의 후반부에 8명의 이름을 더 언급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바쁜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관계를 형성했으며, 여러 사람과 협력하고 동역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전략을 몇 가지 말할 수 있겠으나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이 '동역 선교'라고 할 수 있다. 동역자란 한 가지(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골 4:11),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요삼 1:8), “함께 수고하는 자”(빌 2:25), "하나님의 일꾼"(살전 3:2) 등을 말한다. 바울의 선교 동역자들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롬 16:3), 우르바노(롬 16:9), 디모데(롬 16:21), 아볼로(고전 3:9), 디도(고후 8:23), 빌레몬(몬 1:1), 누가(몬 1:24), 에바브로디도(빌 2:25), 유스도 일행(골 4:11)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가 동역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타락한 인간의 죄성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시기와 분쟁 그리고 이기심이다. 동역하려면 예상되는 갈등을 회피하려는 마음에 연유하기도 한다. 한국인의 기질, 습성에 기인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속담 중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도둑질도 손이 맞아야 한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는 협력, 협동정신이 있다. 우리 민족의 풍습 중에 '두레'나 '품앗이'는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농사일을 함께 했음을 보여 준다. 동역은 하나님과 성경의 요청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고전 3:9). 이제 복음화율이 매우 낮은 지역, 미전도 및 미개척 지역은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선교의 남은 과업 성취를 위해서 모두 협력해야 한다. 특히 한국 교회의 선교가 세계선교에 보다 많은 역할을 하려면 교단과 교단, 선교 단체와 선교 단체, 교단과 선교 단체, 그리고 선교사 간의 협력과 동역이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봐야 한다. 그리고 반성, 회개에 따르는 우리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롬 16:3)은 있는가? 나에게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 동역자가 있는가? 왜 동역자가 없는가? 다른 한편으로 내가 동역자가 되면 어떨까? 이제는 내가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 만한 동역자가 될 필요는 없는가? 나는 동역할 생각이 있는가? 복음 전파,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초점이 맞춰지고 열정과 헌신이 아름다운 동역자가 필요한 때이다.
578 no image |신앙수상| 섬김과 헌신 통해 누리는 주님의 은혜_노선호 사모 (92)
편집부
7986 2012-07-24
섬김과 헌신 통해 누리는 주님의 은혜 < 노선호 사모 · 엑스포교회 >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생활 누리고 있어” 벌써 이 마을에 온 지 7년이다. 7년이라는 시간 속에 감사, 절망, 기쁨, 아픔, 회복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전혀 우리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하지만 철저한 주님의 계획 속에 남편과 나는 순종하며 부족하지만 한걸음, 한걸음 주님을 의지하고 섬김의 종으로 우리 자신을 이 교회에 드렸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쌀이 떨어지고 아이들 급식비 독촉장이 날아오는 그런 환경 가운데서도 ‘오직 주만 바라 볼지라’는 주바라기 훈련을 통해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연약한 환경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깨닫게 하셨다. 어느 날 새벽예배 후 40대 중반의 남자 한분이 슬그머니 교회 문을 빼꼼 열고 들어왔다. 무엇인가 맘에 무거운 산덩어리를 짊어지고 있는 듯한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삶의 보따리를 다 풀어놓고 함께 우리와 동거가 시작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이곳에 보내신 이유를 알게 하셨다. 특별한 후원도 없었고 사례비도 없는 상태에서 가족만 5명, 이혼가정 남매를 데리고 사는 상황에 또 한 명이 늘어나 많은 부담이 되었다. 주님께 원망도 했다. 교회로 달려가 하염없이 울기도 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나의 심장을 녹이고 따뜻하게 품어주셨다. 그리고는 이사야 61장 1절 말씀으로 위로해 주셨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자를 고치며 포로된자에게 자유를 갇힌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주님 제가 어떻게 이 일을 합니까? 못합니다. 제겐 이것을 감당할 믿음도, 물질도 없어요. 주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라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주님은 “딸아, 누가 너보고 하랬어. 너를 통해서 내가 할 거야. 너에게 도울 자를 붙여 줄테니 염려하지 말고 나만 바라보아라”며 위로해 주시는 것 같았다. 나는 온 종일 주님의 사랑이 내게 부어지기를, 감당할 믿음 주시기를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주님께 찬양했다.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교회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분이 남편과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서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교회의 반주자로, 교사로, 함께 전도할 수 있어서 교회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3-4년의 여러 훈련 과정을 통해서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여기에 온 지 3년째 되던 해 봄에 한 아이를 엎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술에 취해서 몸도 잘 가누지 못한 채 흔들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 교회 사모님이신가봐요?” 그 여인은 알코올 중독자였다. 비록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나를 알게 된 후로는 술만 마시면 새벽마다 교회 사택에 와서 욕하고 문을 발로 차고 소리 지르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때마다 공포의 순간순간이 나와 아이들에게 매일 밀려왔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딸도 사랑으로 품게 하시고 용서하게 하시고 너무나 많았던 상처와 아픔도 끌어내어 치유해 주셨다. 그 과정들을 다 말하려면 책으로 써도 한권은 족히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 여인이 세례를 받고 아이들도 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고 회복되는 순간 4살과 8살 형제만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 아이들은 내 몫으로 남겨져 이제는 섬길 식구가 또 늘었다. 주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성도들을 많이 보내주셨고, 기도를 쉴 수 없는 긴박한 상황들은 계속되었지만 주님은 감당케 하셨다. 부도를 맞아 바닥까지 내려와 아무 소망이 없는 한 청년도 5년 전에 우리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훈련받아 신대원에 들어가 우리 교회에서 전도사로 3년을 섬기고 지금은 다른 교회로 파송되었다. 우리 교회에서 자매를 만나 결혼도 하고, 거의 사택에서 함께 살았다. 식구는 점점 늘어나 14-15명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주님 안에서 풍성하신 은혜로 채우시는 주님을 늘 경험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돌봄 받지 못하는 아이들, 간질병환자, 우울증환자, 연약한 신학생들... 끊임없이 주님은 이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회복케 하셨다. 몇 번이나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때마다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얼마나 큰지 감사, 감사할 따름이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 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4-36). 열악한 교회 재정에도 남편은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일에 물질을 아끼지 않는 모습에 많은 도전을 받았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우선으로 여기는 모습을 통해 더 많은 성도들이 회복되는 것을 기대해 본다. 아이들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사 모든 것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인도하여 주셨다. 지금은 이 아이들이 동역자가 되어 저녁마다 큰 딸이 동생들을 데리고 교회에 올라가 눈물로 부르짖는 기도를 하고, 경건의 시간을 갖고, 때로는 아이들이 더 믿음이 좋은 것 같아 큰 힘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메마른 땅에 샘물 나게 하시고 가난한 영혼, 목마른 영혼들이 주님사랑 알기를 원한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매주 화요일마다 국수 끓여드리기,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과 보육원 사역에 사랑의 손길들이 전해오기 시작했다. 성도들도 이 섬김에 점점 헌신하고 기뻐하고 있다. 앞으로도 주님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더 많은 일들을 이루실 것을 기대하면 지치고 힘든 마음이 큰 힘을 얻는다. 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577 no image |목회수상| 사랑의 실천과 명예에 대한 존중_우종휴 목사 (1)
편집부
2825 2012-07-24
사랑의 실천과 명예에 대한 존중 < 우종휴 목사 · 황상교회 > “교회를 위한다는 핑계로 형제의 명예 훼손하지 말아야” 몇 년 전에 처음으로 어느 교회의 송사 건을 취급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맡아 처리하면서 생각하게 된 것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우리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법으로 따진다면 죄가 안 될 것이 없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가장 흔하게 짓는 죄 중에 하나는 아홉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겠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9계명, 즉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는 우리가 다 잘 아는 대로 우리의 이웃에게 진실해야 할 것과 이웃의 명예를 보호해주고 더 좋게 해주라는 계명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십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존귀합니다. 최고로 명예로운 존재입니다. 가끔은 자신의 명예가 크게 모욕당한 사람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여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의 극단적인 선택은 몹시 안타깝지만 그런 행동은 ‘존귀한 사람에게 명예란 목숨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일깨워 줍니다. 칼빈은 이 계명에 대하여 간략하게 해설하면서, 명예란 그 어떤 보물보다도 귀중하여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우리의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손으로 도적질하는 것보다 거짓증거로 이웃에게 더 큰 손해를 끼친다고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피해에 대해서는 엄격하지만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무신경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명예를 존중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또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말을 옮길 때 우리는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가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잘못된 말에서 비롯합니다.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혹은 잘 못 전달함으로 일어납니다. 잘 못 알아듣거나 잘 못 전달된 말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서 화평이 깨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지 못하는 원인이야 말할 것도 없이 이웃이나 형제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거나 없어서 일 것입니다. 형제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거나 없어서 일 것입니다. 더욱 우리가 주 안에서 한 몸이라고 고백하는 믿음 안에서 형제의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사랑함이 부족하거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요리문답 제143, 144, 145번은 제9계명과 관계된 문답들입니다. 그중 144번에서는 “제 구 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답하기를 “제 구 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과 우리 이웃의 명성을 우리 자신의 것과 같이 보존하고 조장하며, 진실을 위하여 나서서 이를 옹호하며, 재판과 판결의 일들에 있어서 무슨 일에서든지 진심으로 성실하게 자유롭고 명백하고 충분하게 진실만을 말하며, 우리의 이웃을 사랑으로 평가하며, 그들의 명성을 사랑하며 소원하고 기뻐하며, 그들의 연약을 슬퍼하고 덮어주며, 그들의 은사와 은혜를 기꺼이 인정하고, 그들의 결백을 변호하며, 그들에 관한 좋은 소문을 쾌히 받아들이고, 나쁜 소문을 시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고자질하는 자와 아첨하는 자와 중상하는 자들의 기를 꺾고, 우리들 자신의 명성을 사랑하고 보호하여 필요한 때에는 이를 옹호하며, 합법적 약속을 지키며, 무엇이든지 참되고 정직하고 사랑스럽고 좋은 소문을 연구하여 실천하는 것입니다”라고 답변합니다. 사실 제144, 145번을 읽으면 우리가 이웃이나 형제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새삼 깨닫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이 계명을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오히려 그 반대로 하는 것이 익숙하고 쉽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위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죄의 본성이기도합니다. 다른 계명과 같이 제9계명을 지키는 길도 주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이웃이나 형제에게 최소한의 사랑이라도 베풀어 그들에게 악을 행치만 않아도, 명예를 훼손하지만 않아도 다툼이나 분쟁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나 노회에서나 총회에서나 교회 연합기관에서나 우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 의논할 때, 혹은 사적으로 만나서 이야기할 때에 제9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쓰기만 해도 그 모임은 나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한 몸이라면 형제의 명예는 곧 나의 명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가 서로의 명예를 존중함으로써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 빛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576 no image |신앙단상| 마더와이즈 <자유>를 통해 얻은 내 삶의 자유_윤양숙 사모 (163)
편집부
7646 2012-07-24
마더와이즈 <자유>를 통해 얻은 내 삶의 자유 < 윤양숙 사모, 미래교회 > “주님은 우리가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 깨닫게 돼” 벌써 세 달이 지나는 동안 우리 집 텃밭은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호박넝쿨이 제 길을 찾지 못한 채 장미꽃을 휘감고, 약을 하지 않는지라 깻잎의 반은 벌레들이 차지해 버렸다. 비가 살살 내리고 있다. 그나마 시원하고 모기가 달려들지 않아서 깻잎과 풋고추를 따고 호박을 담 위로 올려 주고, 크게 자라 제 몸을 감당 못하는 접시꽃과 토마토에 지지대를 세워주고 풀들을 대강 뽑아냈다. 어느 것 하나 돌봄 없이 자라는 것이 없다는 것과 씨가 떨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싹이 난다는 것이 텃밭을 가꾸며 얻은 교훈이다. 지난 석 달 동안 텃밭은 거의 내버려둔 채 일곱 명의 엄마들과 네 명의 아기들과 함께 가정이라는 정원을 어떻게 지혜롭게 가꾸어 가야 할 것인가를 고심하며 보낸 시간들이었다. <자유>는 마더와이즈의 자녀 양육 묵상집 이름이다. 마더와이즈 묵상팀을 이끄는 일은 개척한 지 11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이 내게 맡긴 사역이었다. 일주일에 한번 모여서 나누고 자녀 양육에 대한 토론을 하는 10주 과정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매일 성경 공부를 하며 주님께 온전히 무릎 꿇어야 하는 많은 헌신이 필요한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다. 나로서는 처음 하는 사역이어서 “내가 합당한 사람인가?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이 하실 것이다’라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16년 전의 일기를 보고 든 생각이었다. 그때 시작하게 하셨는데 이제야 엄마들과 나눌 준비가 겨우 됐다고 생각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주 이상적인 가정을 꿈꾸며 시작한 결혼 생활은 10년이 지나도록 부부 관계도, 자녀 양육의 모습도 결코 내가 생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어떤 준비와 교육 과정도 없이 주어진 아내 노릇과 부모 노릇은 남편에게 불만만 쌓여갔고 아이들에게는 소리를 지르게 되면서 ‘착한 아내, 아름다운 엄마’가 되고 싶은 소망이 무너진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 자녀교육에 대한 나의 목표를 적어 놓은 것도 있었다. “나는 나의 자녀 영훈이와 다훈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모든 어려움을 참고 인내하며 맡은 일에는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세부 목록을 썼는데 그때부터였다. 큰아이가 초등 3학년, 작은아이가 세 살, 달리 어디서도 배울 곳을 찾지 못한 채 성경과 자녀양육서적만 수도 없이 읽고 기도하면서 내가 배운 것은 마더와이즈의 <자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 내용이었다. 예수님의 조용한 외침 “나는 참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단지 그것이었다. 나는 포도나무가 아니고 가지라는 것. 생명을 주시는 분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라는 것. 남편과의 관계도 자녀 양육도 내가 아닌 주님이 하시도록 맡겨 드려야 된다는 것. 내게는 기도하며 주님이 계획한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 했다. 이것은 결혼한 지 10년이 훌쩍 지나고 난 뒤에야 아주 조금씩 더디게 배운 것이었다. 결혼을 진리이신 주님께 맡기지 못 했을 때 사랑과 자유함은 어디 갔는지 우리는 꼭 함정에 빠진 느낌을 받았었다. 엄마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내 놓으며 시작한 마더와이즈 모임은 마치 주님이 밀고 가주시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것은 기도하며 이 현장에 생생하게 참여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남편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님의 함께 하심은 너무 선명해서 10주 과정 내내 ‘주님이 하셨죠?’ 하고 날 웃게 만드셨다. 포도나무 원리를 묵상하는 엄마들이 하나님께 위로를 받고, 정체성을 회복하고, 가정에서 아내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사명감을 다져 나가고, 양육의 원리들을 배우며 실천하고, 주마다 내주는 숙제들을 해나가면서 예전의 나처럼 이들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구나, 주님께 맡겨야 하는구나” 하는 자유함을 누리는 것을 보는 것은 내게 너무도 귀한 시간이었다. 또한 이 과정 중에 우연을 통해 우리 가정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은 놀라웠다. 고 3인 둘째 아이는 고교 2년을 밴드 동아리에서 기타를 치며 공연도 자주 나가고 친구들과도 추억을 만든다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정작 자신의 진로를 위한 공부는 등한시 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성가대와 찬양팀, 고등부 예배, 오후예배 등등 어느 것 하나 흠 잡을 것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4월초에 컴퓨터에 숨겨놓은 합당하지 않은 볼거리들을 드러내서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것을 시작으로, 4월 중순에는 컴퓨터가 완전히 망가져서 게임을 중단하게 하셨다. 그것은 내게 노트북 컴퓨터를 마련하는 기회를 주셨고 엄마들을 위한 자료 준비에 더 없이 유용하게 사용하게 하셨다. 5월 중순에는 친밀하던 여자 친구와의 관계를 끝내야 할 때임을 엄마인 나에게 보여주셨을 때 아이는 많이 아파하면서도 엄마와 아빠의 간곡한 충고를 받아들이는 등 합당치 않을 것들을 가지치기하며 정리하게 하셨다. 그때 아이가 내게 와서 한 이야기는 우리 부부에게 너무나 큰 기쁨을 주었다. “엄마! 많은 아이들이 강물에 떠밀려 바다로 가고 있지만 나는 엄마 아빠가 있는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살려고 해요.” 아이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보다 무엇이 더 기쁠까. 이제 아이는 좋아하던 개그콘서트도 보지 않고 공부에 집중하며 오히려 친구들을 걱정하고 있다. 내게도 수년 동안 마음의 부담을 느껴오던 언니네 집과 관련된 문제들이 6월말에 완전히 해결되는 자유함을 주셨다. 그리고 더 선명하게 이 일들이 주님의 작업임을 인쳐주셨다고 느낀 것은 아이가 교내 백일장에서 수필로 2등에 당선된 것이다. 제목은 <자유>였다. 정말 주님은 엄마들이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너무도 확실하게 깨닫는 시간이었다. 성경공부를 모두 끝내고 상장과 수료증을 만들었는데 남편의 권유로 7월 첫 주에 수료증 수여와 더불어 중요 성경구절도 외우고 간단한 멘트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그 순서가 너무 간단하게 지나갔다. ‘주일 아침이라 시간도 없고 인도자가 사모라는 이유 때문인가’ 하는 나의 아쉬운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이 이야기를 쓰게 된 배경이라면 억지일까? 지난 석 달 동안 홍해가 갈라진 것도 아니고 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분명 하나님은 마더와이즈 엄마들을 앞으로 계속변화 시켜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주님이 주신 감사함과 자유함이 마음에 가득하다. 이제는 텃밭도 제대로 잘 가꾸고 오늘 따낸 깻잎으로 김치를 담가야겠다.
575 no image |목회수상| 사람의 다스림 받는 정원_박종훈 목사 (103)
편집부
4516 2012-07-10
목회수상사람의 다스림 받는 정원 < 박종훈 목사, 궁산교회 >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다스림 받는 것이 사람의 영원한 행복”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항상 아쉬운 것은 집터가 작아 그 흔한 실과나무나 예쁜 꽃 하나 심고 가꿀 수 없었던 점이다. 마당은 있지만 한쪽에는 돼지우리가 차지하고 그 옆에는 두엄이 쌓여있다. 나머지 공간은 비어두어야만 가을에 벼를 탈곡하는 장소로 사용한다. 그나마 작은 화단이라도 조성할 수 있는 곳은 뒤뜰이어서 뭔가를 심어봤지만 번번이 실패를 했다. 주변에 대나무 밭이 있고 초가집 그늘에 가려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던 이유였다. 당시에는 이 상식을 몰랐고 계속되는 실패에 집터가 작은 것만 불평했다. 그때부터 마음속에 한 꿈이 심어졌다. 장차 내 집을 가지면 넓은 정원에 마음껏 꽃과 나무를 가꾸리라고……. 사람은 기본 욕구가 부족할 때 자연적으로 꿈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은 꿈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은 웬만한 것은 다 충족되는 시대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는 환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은 흘러 고향을 떠나서 서울에서 신학교를 다니며 상가건물 옥탑 방에서 잠시 살던 때가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회색빛 콘크리트 모습이고 땅을 밟아도 신기할 정도로 흙이 묻어나지 않는 인공적인 길로만 다니게 되었다. 이럴수록 마음속에는 흙냄새가 그리워지며 하다못해 콘크리트 건물 사이로 악착같이 자라는 잡초라도 반갑게 느껴졌다. 자연을 사모하는 마음에 옥상의 한 구석에 스티로폼 박스로 귀한 흙을 힘들게 준비하여 채소를 키웠다. 모종을 구해다 심고 돌보면 자라는 그 싹들이 얼마나 기쁨을 주는지, 이렇게라도 해야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될 것 같았다. 신학과정을 마치고 시골로 개척할 장소를 탐색하는 중, 지금의 자리를 보게 되었다. 다른 여러 조건도 맘에 들었지만 특별히 정원이 내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먼저 살던 주인이 꽃과 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과일나무를 잘 조성해놓았다. 작은 텃밭과 아울러 돌담을 끼고 감나무, 사과나무, 석류나무, 앵두나무, 자두나무와 은행나무, 향나무, 벚나무 등 다양한 꽃과 상록수가 심어져 있었다. 맘속에 그리던 정원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구입하기로 하고 귀촌하기로 결정했다. 사월 초에 이사 오는데 이미 여러 꽃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내와 한창 개구쟁이인 큰아들 녀석과 이제 막 돌 지난 딸과 함께 그토록 바랐던 전원생활과 함께 농촌 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로서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열심히 신나게 마음껏 심고 가꾸고 복음전하며 봉사의 즐거움을 누렸다. 사실 농촌교회 개척의 고통과 외로움과 여러 갈등은 항상 있지만 그런 중에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지만, 그 다음은 정원을 돌보는 즐거움이 오래 인내하는 힘이 된 것 같다. 사람과 달리 노력하고 정성을 드린 만큼 보답을 해주는 꽃과 나무들의 정직한 모습은 어떤 나무는 우산 모양으로, 어떤 나무는 무지개를 닮은 형태로, 다른 나무는 접시 같은 모습으로 또 다른 나무는 물결 형상으로 조금씩 멋을 이루어간다. 그렇게 십여 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나무들을 관리하기가 힘들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 넓지 않는 터에 건물과 잔디마당을 포함하여 사계절마다 다양한 꽃을 보도록 여러 종류의 꽃과 나무를 심다보니 자리다툼을 해야 했다. 지나친 크기는 다른 식물들에게 해를 주기 때문에 늘 적당하게 자르고 억제를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키가 큰 나무들은 클수록 세력이 강해지면서 손이 닿지 않아 관리가 어렵게 된다. 주인의 손질을 자주할 수 없으므로 제 멋대로 자라면서 전체적인 균형을 깨는 것을 발견케 되었다. 그때서야 평범한 교훈을 주는 깨달음이 마음에 와 닿았다. 아무리 좋아도 적당한 제어를 받을 수 있어야만 진정한 그 가치와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정원지기의 관리를 받아야만 나무들은 해가 갈수록 그 진가를 발휘하리라 여긴다. 마을 뒷산에는 외래종인 ‘리기다’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특징은 한국 소나무보다 훨씬 빨리 자라지만 적당한 간벌(間伐)이 안 되어 같은 소나무끼리 경쟁해야하고, 밑에는 여러 활엽잡목들이 치열하게 다투며 위협하므로 햇볕을 향해 자꾸 위로만 솟구쳐 오른다. 그로인해 상대적으로 뿌리가 약해서 심한 태풍이 오면 일시에 쓰러지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관리를 받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모두가 공멸(攻滅)할 수 있는 위태함을 느낀다. 우리 인간의 삶에도 다스림 받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리라 여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지나치면 부족함보다 못하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른다. 성경말씀에도 성령의 일곱 가지 열매 중 가장 마지막 열매는 ‘절제’라고 기록되어 있다. 빠른 속도와 편리함을 자랑하는 고급 승용차라도 제동장치가 미흡하면 치명적인 결함이 되기도 한다. 좀 더 빠르게 좀 더 크고 좀 더 편리한 그 어떤 문명의 혜택이 있다 해도 제어할 수 없는 장치라면 오히려 더 큰 고통과 해로움이 될 것이다. 사람의 삶에도 절제하지 못하는 온갖 욕심은 결국에는 파멸로 이르는 역사적인 교훈은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작은 정원이지만 사람의 다스림을 받아야만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잃어버린 에덴동산도 처음에는 아담의 다스림으로 인해 행복한 낙원이었고 또한 창조주의 본래 의도하신 목적이었다. 사람도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다스림 받는 것이 영원한 행복이건만 풍요한 중에서도 더 가지고자 하는 욕심과, 그 욕심을 절제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므로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의 씨앗이 된 것이다. 앞으로 이 세상은 갈수록 더욱 풍요와 편리함과 만족케 하는 추세로 가겠지만 절제야말로 이 시대에 가장 합당한 미덕임을 작은 정원을 가꾸며 느껴본다. 나의 맘속에도 늘 주님의 다스림으로 인해 선한 도구로 쓰임받기를 위해 오늘도 기도한다.
574 no image |목회수상| 내면을 가꾸는 인생의 정원사가 되라_장석진 목사 (1)
편집부
3011 2012-07-10
내면을 가꾸는 인생의 정원사가 되라 < 장석진 목사 · 광주월산교회 > “유명한 사람보다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길” 풍랑에 쉽게 좌초되는 배는 그 배의 하부가 너무 가벼워서 배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수면 밑 부분의 용골(龍骨)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배의 수면 위에 뜬 선실부분을 아무리 화려하게 꾸미고 멋지고 휘황찬란한 돛을 단다 할지라도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배의 하단부분에 배를 지탱해주는 용골이 빠져버리면 어찌 풍랑과 파도를 견딜 수 있겠는가? 무게 중심은 배의 핵심이다. 배를 안전하게 운항하도록 균형을 잡아준다. 흔들리지 않게 한다. 태풍에 견디며 목적지까지 도착하게 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수면 위가 드러난 외모라면 수면 아래는 보이지 않는 인격이다. 뉴욕 타임즈의 인터뷰 기자로 잘 알려진 게이 탈리즈(Gay Talese) 기자는 소위 세상적으로 인기가 있고 유명하다는 사람들을 수 없이 많이 만났는데, 대부분 인터뷰가 끝날 무렵에는 실망이 컸다고 한다. 그 사람에게 주어진 유명세나 인기는 사실상 물거품과 같은 것이었고, 대부분 그들의 내면세계는 볼품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탈리즈는 인터뷰를 하고 돌아올 때는 또 하나의 속인(俗人)을 만난 것처럼 씁쓸한 심정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인기 TV탤런트들에게 종종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청순한 이미지와 그가 살고 있는 숨겨진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브라운관에서 보는 스타의 이미지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을 하는 것이 어떤 사람이라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유명'과 ‘훌륭'은 흔히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지위나 권력이 훌륭한 삶을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유명한 사람은 많아도 훌륭한 사람은 적다. 세네카는 "난쟁이는 산꼭대기에 서 있어도 키가 작고, 거인은 우물 속에 서 있어도 키가 크다"고 했다. 내 모습 그대로 열심히 살아갈 때 유명한 사람보다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이다. 삶의 파도와 폭풍에 떠밀려 때로는 인생의 배가 좌초되었을 때 나의 믿음과 신뢰는 얼마나 가벼웠었던가. 배의 하중(荷重)을 더해주는 용골이나 삭구(索具)는 준비하지 않고 내 수면의 윗부분만을 치장하고 허세를 부리는 가증한 모습은 아니었던가. 내 자신 스스로를 반추하며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높아지려다가 진실이나 진리에 이르지 못한 거품인생의 모습은 없었는지 돌아본다. 속도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속도에 함몰(陷沒)되지 않도록 마음의 속도를 늦추면서 유명함보다는 훌륭함을, 난 사람보다는 된 사람을, 외모보다는 내면의 인격을 쉼 없이 일구어 가는 아름다운 인생의 정원사가 되고 싶다.
573 no image |목회단상| 목회자 조기은퇴 유감_김수환 목사 (1)
편집부
2745 2012-06-26
목회자 조기은퇴 유감 < 김수환 목사, 군포예손교회 > “사람에겐 나이 숫자 분량만큼 삶의 지혜와 깨달음 감춰져 있어” “철들자 노망”이라는 옛말이 있다. 사람이 인간의 도리를 깨닫고 성숙해 진다는 것이 그만큼 더디고 어렵다는 얘기이다. 대다수의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서서 걷고 뛰어다닌다. 그리고 2-3년도 채 안되어서 어른으로 다 자라버린다. 유독 인간만은 임신기간도 길고, 성장하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 제 발로 아장 아장 걷는데 만도 돌이 지나야하고, 자유롭게 걷고 뛰려면 유치원에 다닐 나이는 되어야 한다. 아무튼 육체적인 성장도 최소한 20년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적인 성숙은 육체적인 성장보다 훨씬 더 더디고 복잡하다. 전에는 남자의 경우 군대를 다녀오면 철이 좀 드는 듯 했었지만, 군 생활이 옛날 같지 않아서 그런지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나 자신도 이따금씩 유아적인 티를 벗어버리지 못한 것 같은 생각이 종종 든다. 정말 ‘철들자 노망일까’ 걱정이다. 신학졸업 후, 사회적 경험도 거의 없다 시피 한 아직 새파란 전도사가 부모님 같고 조금 과장하면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분들 앞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이란 이렇고 신앙이란 저렇고 등등’ 거침없는 설교를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오금이 저려온다. 많은 성도님들께서 귀엽게 들어 주셨으리라 짐작하지만, 솔직히 그때 무슨 설교를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물론 욥의 친구 중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욥 32:9)고 했던 엘리후와 같은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젊은 사람도 나이 든 사람 못지않게 더 깊은 것을 깨닫고 지혜로울 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요, 결코 세상을 살아온 나이를 무시할 수가 없다. 인생은 희노애락의 과정 속에서 삶의 지혜와 깨달음이 묻어나는 것이다. 성경이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레 20:32)고 권면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나보다 연장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는 그 앞에서 일어서야 한다. 그에겐 내 나이의 숫자와 차이가 나는 분량만큼의 지혜와 깨달음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사람들 모두마다 그렇게 한 달을 살고, 1년을 살아낸 것이다. 거기엔 결코 가볍지 않은 땀과 한 숨과 슬픔과 눈물이 흘려졌고, 그곳에서 지혜와 깨달음이 산출되어 나온 것이다. 지난 I.M.F 이후 많은 사람들이 명퇴라는 명분하에 정년보다 일찍 직장을 떠나는 일이 빈번해졌다. 몇 년 전부터는 교회에서도 목회자 조기은퇴 바람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조기은퇴하는 것이 대단한 신앙의 용단인 냥, 앞서가는 신선한 교회인 냥 미화되고 있다. 마치 정년을 다 채우면 욕심 있는 목회자가 되고, 조기은퇴를 하면 인간의 명예와 사욕을 버리는 목회자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더 나아가 나이든 목회자가 있으면 무조건 낡은 교회가 되고, 젊은 목회자가 오면 저절로 젊은 교회가 될 것이라는 이상한 기대들이 조기은퇴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것 같다. 목회자가 건강을 잃었거나 다른 특별한 사유가 있어서 조기은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유행 바람에 떠밀려 목회일선에서 일찍 물러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교회적으로도 너무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교회 성도들도 막연히 젊고 새로운 목회자란 기대감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부추기거나 방관해서는 안 된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한다. 교회는 단순히 종교적인 강연을 듣고, 경건한 지식과 정보를 주고받는 곳이 아니다. 아담 안에서 타락하고 부패한 우리 존재를 인격적으로 훈련하고 변화시키는 곳이다. 이것은 책을 통해서 얻은 지식만으론 부족하다. 젊은 패기만으론 한계가 있다. 비오고 바람 부는 숱한 나날 속에서 한 올 한 올 뜨개질 하듯 살아온 인생이 필요한 것이다. 군대 간 아들의 사고소식을 듣고 마음을 졸이고, 결혼한 딸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전화를 받고 하얗게 밤을 세워본 나이가 될 때 비로소 목회할 정년기가 된 것이 아닌가? 설교 같은 설교를 할 나이가 된 것이 아닌가? 평생 그렇게 땀 흘려 만들어진 소중한 경험을 목회 현장보다 더 가치 있게 투자할 또 다른 곳이라도 있단 말인가? 무엇에 쫓기듯 은퇴를 서두르는 모습들이 안타깝다. 그것은 우리의 평균수명이 늘어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생을 경험하고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정도의 시간 소요는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목회는 인생을 다루는 것이요, 우리는 엘리후가 아니다. 몸소 살아보고 겪어봐야 만이 비로소 깨닫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다.
572 no image |신앙수상| 어머니, 꽃구경 가요_남춘길 권사
편집부
3045 2012-06-26
어머니, 꽃구경 가요 < 남춘길 권사, 남포교회, 크리스찬문인협회 회원 > “잠들듯이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 노년 모두의 간절한 소망” 얼마 전 장사익씨가 부르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노래는 들을 적마다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특별히 그날 들은 "어머니, 꽃구경 가요"라는 제목의 노래는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뭉클함이 있었다. 먼저는 곡을 넣어 불렀고 나중에는 가사를 시 낭송으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꽃들이 만개한 어느 봄날 아들은 노모에게 꽃구경 가자고 권했다. 가랑잎처럼 바싹 여윈 노모를 등에 업으니 깃털처럼 너무 가벼워 아들은 가슴이 아팠다. 산에는 진달래, 철쭉, 개나리, 산수유며 이름 모를 들꽃들이 꽃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꽃에 취하고, 봄바람에 취하고 아들은 잠깐 슬픔을 잊었었다. 연분홍빛 철쭉이 구름 떼처럼 피어있는 산속은 이 세상이 아니고 낙원 같았다. “어머니. 꽃좀 보세요.” 아들의 목소리에 잠든 줄 알았던 어머니가 답했다. “쉬엄쉬엄 가거라, 다리 아프겠다.” 노모의 가느다란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아들의 가슴은 찢어졌다. 끝없이 펼쳐지던 꽃 바다가 끝나고 소나무 동산이 나왔다. 아들의 등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노모가 퍼뜩 정신이 든 듯 갑자기 팔을 뻗어 솔잎을 따 뿌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솔잎은 왜 자꾸 따서 뿌리세요?” “아들아, 혼자 내려 올 때 길 못 찾을라.” “아아. 어머니!” 자식은 어머니를 버릴 수 있어도 어머니는 절대로 자식을 버릴 수 없으리라. 제주도 구경을 마친 후 버림받은 노모가 끝끝내 아들의 연락처를 함구했던 슬픈 일화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단한 삶이라도 죽는 것보다는 살고 싶다는 얘기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삶의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아등바등 살아간다. 고령화 시대의 심각성 앞에 젊은이들의 장래를 걱정하면서도 100세 건강을 염두에 둔 듯 9988234를 농담 삼아 외쳐댄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만 아프다가 죽고 싶다는 뜻이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은 점점 줄어드는데 노인들만 넘쳐나는 두려운 세상이 곧 다가온다는 것은 커다란 재앙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만큼 귀하고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태어남과 죽음은 피었다 지는 꽃처럼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자연의 이치 일 것이다. 누가 감히 절대자가 하시는 일을 거스를 것인가. 희망 사항이지만 건강한 사고력으로 내 이웃을 배려할 수 있을 때 까지는, 자식들의 고단한 삶을 쉬어갈 넓은 그늘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까지는, 나를 아끼고 따르는 후배들이 자기들 곁에 머물러 주기를 진심으로 원할 때 까지는, 나의 두 다리로 가고자 하는 곳을 갈 수 있을 때 까지는, 맛있는 음식을 제 맛을 느끼며 즐겁게 먹을 수 있을 때 까지는,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할 때 재미와 감동과 슬픔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때 까지는 살아있을 가치가 있을 것 같다. 물론 건강이 따라 줄 때 말이지만. 자식들이 짐으로 느끼기 전에 주위의 모든 분들이 떠남을 아쉬워 할 때, 잠들듯이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 노년 모두의 간절한 소망일 것이다.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권리와 함께.
571 no image |제 언| 입양과 한국교회의 역할_최일환 목사 (4)
편집부
2984 2012-06-26
입양과 한국교회의 역할 < 최일환 목사, 장안중앙교회 > “매년 천여 명의 아이들 해외입양 실로 부끄러운 일” 우리나라는 매년 5월 11일을 입양의 날로 지키고 있다. 매년 늘어나는 미혼모의 자녀들을 입양하여 사회에 일원으로 적응하며 가정의 보호를 받고 살도록 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이날을 지키고 있다. 최근 미국 정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의 출신국가 명을 보면 중국 필리핀 우간다 인도 러시아 에티오피아 등 전부 가난한 국가들인데 그중에 우리 대한한국이 끼어 있다. 그 숫자가 2011년도에 미국에 입양된 우리 자녀들이 736명이라는 것이다. 또한 보건복지부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2011년도 한 해 동안 해외 입양아동수는 1013명, 국내 입양 아동 수는 2475명이라 한다. 아직도 전체 입양 대상자 40%가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 최근 프랑스에서 새로 들어선 정부의 여성장관이 한국에서 입양된 여성이라는 뉴스는 온 세계에 뉴스거리가 되었다. 문제는 아직도 매일 3명 이상의 우리의 아이들이 비행기에 태워져 피부색도 다르고 이름도 모를 부모들의 손에 넘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는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과거에는 전쟁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제 우리나라는 세계 13위권의 경제 대국이라 자처하는 나라이며 선진국 국가들의 모임이라 하는 OECD 회원국이다. 그런데 아직도 매년 천여 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최근에는 해외 입양아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불편한 진실이 있다. 그것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입양 기관들에게 해외 입양을 쿼터제로 바꾸어 시행하기에 줄어든 것이지 국내입양이 많아져 줄어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입양 비용도 문제다. 국내 입양시 과거에는 입양부모가 250만원을 입양기관에 내고 입양해야 했다. 그러나 현재는 정부가 그 비용을 부담하고 있고 매월 양육비 15만원, 의료비 지원 등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해외입양의 경우 입양부모가 그보다 더 많은 비용을 입양기관에 내고 있다. 그러기에 입양기관의 입장에서는 더 많은 재정을 확보하는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정부의 책임도 있고 입양아 발생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미혼모에 대한 방지 및 출산 후 지원 대책의 미비에도 원인이 있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보고 있는 한국교회는 어떤 대책을 갖고 있는가? 그저 정부만 비판하고 미혼모와 입양기관만 비판해서 될 일이 아니다. 적어도 한국교회는 입양에 대해 새로운 시각과 역할이 있어야 한다. 첫째,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입양을 해야 한다. 국내입양이 다 채워지면 우리 자녀들이 해외로 나갈 일이 없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돌보고 사랑해야 할 의무가 우리 교회와 성도에게 있다면 먼저 목회자들이 앞장서서 입양을 해야 한다. 산적한 교회일로 인해 아이를 기를 시간이 없다고 핑계하는 경우가 많으나 한 생명을 기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면 이 일의 중요성도 알아야 한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고 그도 모자라 나라에서도 버림받고 외국으로 나가는 것은 교회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실상 우리도 버려진 백성인데 하나님이 자녀로 입양(Adoption)해 친자가 되었다. 둘째, 교회 안에서 적극적인 입양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자녀 하나 더 낳기 운동을 전개하되 한자녀 가정이 한명을 가슴으로 낳기 운동을 전개 한다든지, 자녀가 없는 가정에 입양을 적극 권장하는 것이다. 입양은 부담이 아니라 행복임을 알려주고 적극 홍보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각 교회에서 한 가정씩만 입양해도 더 이상 해외에 입양 가는 자녀가 없게 될 것이다. 특별히 남자 아이 입양운동을 펴야 할 것이다. 현재 국내 입양되는 아동의 70%는 여자 아이들이라 한다. 그러니 남자 아이들이 해외로 가는 경우가 많다 한다. 셋째, 입양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버려야한다. 입양아도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다. 그 아이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며 구원받아야 할 하나님 백성이다. 입양아의 대부분이 미혼모의 자녀인데 그 미혼모들은 대부분 마음이 착하고 여리다. 그러기에 태중에서 낙태시키지 않고 자기의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자녀를 출산한 것이다. 그러기에 부정적인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입양은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동시에 입양은 성경적 사랑의 실천 방법이다.
570 no image |신앙논단| 바람직한 장로상_김형근 장로
편집부
2777 2012-06-26
바람직한 장로상 < 김형근 장로, 송월교회 > “섬기고 봉사하여 교인들에게 아름다운 본 보이기를” 장로는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신 거룩한 청지기의 직분임으로 늘 나 자신을 살피면서 겸손과 섬김의 자세로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 이에 순종할 때 바람직한 장로가 될 수 있습니다. 1. 장로의 본질 사도 베드로는 함께 장로 된 내가 장로들에게 권하노니(벧전 5:1-4) 하시면서 6가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①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2절), ② 자원하므로 하며(2절), ③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2절), ④ 기꺼이 하며(2절), ⑤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3절), ⑥ 양 무리의 본이 되라(3절),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4절). 교회에서 장로로 세우는 것은 대접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기 위하여 세웠습니다(행 20:28). 그러므로 장로는 목사와 서로 협력하여 교회 공동체를 선한 방향으로 잘 이끌어가야 합니다. 헌법 정치 제9장 제3조에는 장로의 직무에 대해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① 목사와 함께 지 교회 혹은 전국 교회의 영적 상황을 살피는데 수종들어야 한다. ② 교리적 오해나 도덕상 부패를 방지 하도록 기도하며 사역한다. ③ 신자들을 심방하여 위로하고 교훈하며 보살펴야 한다. ④ 신자의 신앙을 살피고 위하여 기도 하여야 한다. ⑤심방할 자가 있을 때에는 목사의 심방을 청하여야 한다. ⑥ 특히 환자나 슬픔을 당한 자와 회개하는 자와 도움을 받아야 할 자가 있을 때에는 목사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이처럼 장로는 성경과 헌법에 명시한 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노력을 하여야 합니다. 2. 당회장과의 관계 초대교회가 7집사를 택한 것은 사도들이 말씀 사역에 힘쓰기 위해서였습니다(행 6:4). 히브리서 13장 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복하고 복종할 뿐만 아니라 즐거움으로 일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장로는 교회에서 겸허한 자세로 목회자가 소신껏 목회를 잘 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하여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전쟁할 때 모세가 산위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피곤하여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이때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하여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출 17:8-13). 장로가 교회에서 아론과 훌과 같은 역할을 잘 감당할 때 교회는 은혜롭게 부흥이 됩니다. 장로는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목회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협력을 아끼지 말고 늘 섬김의 자세로 담임목사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기도하면서 노력하여 성숙한 모습을 모든 교우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3. 교인들과의 관계 사도 베드로는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벧전 5:3). 장로는 교인들의 택함을 받고 교인의 대표자가 되었기 때문에 매사에 언행을 조심하고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딤전 4:12)고 하셨습니다. 장로는 교회에서 군림(君臨)하는 자세가 아니라 섬기고 봉사하여 교인들에게 아름다운 본을 보이는 장로가 되어야 합니다. (1) 출석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히브리 기자는 모이기를 페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라고 하셨습니다. 주일은 말할 것도 없고 수요예배, 심야기도회, 새벽기도회 등 모든 공식 집회에 잘 참석하여 성도들에게 출석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2) 기도에 본을 보여야 합니다. 장로의 막중한 사명을 성공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무기를 절대적으로 놓아서는 아니 됩니다. 교단 헌법 정치 제3장 제2조에 교인의 의무 중 첫째가 예배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의 의무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서 결단코 범하지 아니 하겠 다(삼상 12:23)라고 하셨습니다. 추우나 더우나 눈이오나 비가 오나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때로는 히스기야 왕 처럼 눈물을 흘리며(왕하 20:5) 기도하여 교인들에게 기도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맺는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 4:2). 우리는 항상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귀한 장로의 직분을 충성스럽게 수행하여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외인들에게도 모본을 보여(딤전 3:7) 존경과 신뢰받는 장로가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장로회연합회는 교단 산하 공식기관이 아니라 장로들의 자발적 협의체입니다. 그러나 교단의 발전과 장로 본연의 사명인지 교회에서 신앙의 지도자로 아름다운 삶에서 모범을 보일 때 바람직한 장로가 될 수 있습니다.
569 no image |제 언| 개혁교회의 진정성과 교단 신문의 역할_이천우 목사 (19)
편집부
3579 2012-06-13
개혁교회의 진정성과 교단 신문의 역할 < 이천우 목사, 부천개혁교회 > “교단 신문은 영리업체가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 교회가 서 나갈 수 있도록 언론의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거리낄 것도 없고 주저해서도 안 된다.” 칼빈은 1533년 11월 1일 파리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는 친구 니콜라스 콥의 연설문을 작성할 때 그 연설문에서 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 일로 인하여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1935년 초에 미사를 반박하는 글을 쓴 것으로 인해 스위스 바젤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교회의 개혁운동을 탄압하는 프랑스의 왕 프란시스 Ⅰ세에게 개혁주의 신앙을 변증하는 글인 기독교강요(초판 1536. 3. 출간, 1559. 중보판 출간)를 저술하여 보낸 것은 루터에 이은 제2의 항의문으로서 개혁주의 사상을 신학적으로 정립한 것이라고 평가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날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교단신문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함을 알 수 있다. 이에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며 필연적으로 교회개혁과 연결되어 있는 교단신문의 사명을 재점검하고자 한다. 1.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전개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저술에 이어서 1536년에 파렐의 요청에 의해서 스위스 제네바로 돌아와 제네바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이곳에서 칼빈은 크게 두 가지 개혁운동을 하였다. 하나는 제네바시의 개혁이었다. 당시 제네바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서 있으면서 제네바시를 주도해 나갈 인물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네바에서 칼빈은 제네바시의 목사로 시의회의 인정을 받아 교회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의 반대에 따라서 1538년에 칼빈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하여 스트라스버그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프랑스 난민들을 대상으로 목회하면서 교회개혁에 힘쓰고 있는 여러 개혁가들과 친분을 쌓아나갔다. 그러던 중 칼빈을 추방한 자들이 실권하고 새로이 제네바의 개혁운동을 펼쳐나가려는 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다시 파렐의 요청으로 칼빈은 1541년에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 교회개혁을 펼쳐나갔다. 이때는 전에 행하였던 신앙요리문답에 의하여 제네바시를 다스려나가고 매월 성찬식을 시행하였던 것에서 더 나아가 교회헌법을 만들어 의회의 결의를 얻어 공포함으로써 국가의 간섭이 배제된 하나님의 통치 실현을 구현하였다. 특히 교회의 직분을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구분하였고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의해서 교회가 바로 서나가도록 함으로써 교회가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도록 하였다. 이런 일련의 조치와 더불어 제네바교회와 함께 오늘날의 개혁교회가 등장하게 된 영향력이 있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1559년에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였다. 칼빈은 교회에서의 설교와 함께 아카데미에서 성경강해를 통해서 개혁교회를 맡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칠 인물들을 양성하였다. 칼빈이 55세로 죽은 해인 1564년까지 5년간 아카데미에서 칼빈의 강의를 들은 학생의 수가 1,300명이 넘었다. 그들은 프랑스,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폴란드, 스페인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제네바에서 칼빈의 강의를 통해 하나님 말씀의 본의가 지닌 구원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제네바에서 시행되어 결실을 보고 있는 교회개혁을 품고 고국으로 돌아가 교회개혁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유럽 각처에서 ‘개혁교회’를 세워나갔으며 ‘칼빈주의’라고 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교회에서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2. 칼빈의 종교개혁에 의한 교회개혁의 시행 칼빈의 종교개혁에 의해서 시작된 개혁교회는 루터교회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성경이 명하지 않는 한’에는 로마카톨릭교회의 옳지 않은 모든 잔재들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교회는 ‘성경이 명하는 것’과 ‘성경이 명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루터교회가 로마카톨릭교회가 행하고 있는 십자가를 걸고 촛불을 켜고 제단은 강단 위에 설치하고 예배를 위한 제동(祭童)을 앞세운 행렬을 하는 관습 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반대하여 그 모든 잔재들을 척결했다. 개혁교회가 성례와 예배의식에 필요한 것은 오직 강단과 성찬대 뿐이었으며, 이것 외의 장식은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나아가 개혁교회가 ‘개혁주의’에 따라 나아감에 있어 교회에 해악된 것 모든 것을 척결한다는 결연한 자세로 그동안 교회에 유입되어서 행해져 온 모든 교회 절기들도 폐지했다. 사도시대의 교회와 이후 3세기까지의 초대교회에서는 오늘날 교회가 행하는 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따위의 교회 절기가 없었다. 교회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절기란 오직 ‘주일’이었다. ‘주일’은 성도들이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공적으로 모이는 유일한 ‘날’의 개념이었다. 따라서 오늘날에 교회가 매년 구약의 절기와 같은 절기를 지키는 일들이 없었으며 또한 절기예배라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있었던 16세기에 이르러서 로마카톨릭 안에는 온갖 절기가 교회절기로 자리하고 있었다. 대강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성령강림절로 구성되는 순서에 의해서 “OO절 후 몇 번째 주일”이라는 식으로 교회가 운영될 정도였다. 이에 루터와 칼빈은 교회가 주일 외의 절기를 가지는 해악을 제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1520년에 루터는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이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칼빈은 1536년에 제네바교회를 개혁할 때 처음부터 “주의 날이 유일한 절기의 날”임을 강조했다. 이렇게 ‘주의 날’(주일)만을 교회가 가지는 유일한 날로 인정하여 존중하고, 이것 외에 어떠한 절기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은 루터와 칼빈만이 아니라 그 시대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의 본질에 따라 참된 교회를 이루고자 하였던 모든 개혁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였다. 3. 개혁교회에서 교회개혁으로 있어야 할 교단신문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참된 교회를 추구해온 개혁교회는 언제나 이러한 잘못된 행실들에 대해 항의문을 발표하는 일을 해왔다. 그 역할을 하는 기관이 기독교신문과 교단신문이다. 특히 교단신문의 경우 교단 교회들이 주장하는 언론의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교단신문은 교회가 하나님 말씀의 순전함에 서있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교단신문이 교단 소식을 비롯해서 여러 정보를 주며 유익한 글을 각 지면에 싣게 되는데, 그 모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닌 믿음을 바르게 서게 하는 데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의 하나라고 자부하며 자기 교단이 역사적 정통주의, 보수주의, 개혁주의, 복음주의라고 하며 온갖 좋은 용어들을 내세우고 있는 모 교단 신문을 보면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만 아니라 교회에서조차도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인 것임을 명백히 지적하여 주의를 주고 경계하는 비 복음적인 글들을 버젓이 싣고 있다. 한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을 수차례 갔다 왔다며 자신이 보았다는 천국과 지옥을 한 면 가득히 연재하고 있다. 교단신문이 천국과 지옥에 갔다 왔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연재하여 소개함으로써 마치 정당한 것인 양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교단에 속한 목사든 신자든 그 누구도 이에 대한 항의문을 내걸고 있지 않다. 그런가 하면 다른 모 교단신문에서는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읽게 되는 기독교신문으로서 교회에 끼칠 해악을 생각하면 실을 수 없는 글, 성도들의 신앙이 미혹 받을 수 있는 불건전한 부흥회 광고를 아무렇지도 않게 싣고 있다. 이런 작태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5장 ‘교회’의 제5항에서 말하고 있는 “지상에서는 아무리 순수한 교회들일지라도 혼잡함과 과오를 범하는데 어떤 교회들은 극도로 타락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공회당이 되기도 한다”고 지적하는 것처럼 교단신문이 사탄의 공회당을 조장하는 일에 동조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마치는 말 교단신문은 영리 업체가 아니다. 사실 교단신문이라고 한다면 본질상 개혁주의가 아닌 신문이 없어야 한다. 개신교는 개혁신교, 곧 개혁파 신교로서 구교로 불리는 로마카톨릭교회에 대항하여 등장한 교회이다. 이런 교회의 신문으로서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교단의 지원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니만큼 교단과 교회의 소식 및 유익한 정보를 알려주고,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에 교회가 서 나갈 수 있도록 언론의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거리낄 것도 없고 주저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개혁교회는 교회개혁에 있어서 먼저 교회의 언론 역할을 하는 교단신문부터 개혁해 나가야 할 것이다. 교단신문으로서 교회가 말하는 언론으로 존재하게 해야 한다. 잘못된 신앙, 즉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이며 비복음적인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그 문제점과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올곧은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변증하는 언론으로 존재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혁교회가 교회사 속에서 추구해 온 하나님 말씀의 순전한 전파에 교단신문도 동참하도록 해야 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교회개혁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568 no image |신앙수상| 사모자리 인정하기_이미애 사모
편집부
2531 2012-06-13
사모자리 인정하기 < 이미애 사모, 군산 샬롬교회 >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일들이 주님의 은혜임을 다시한번 깨달아” 오전시간 1층 예배당에서 기도라기보다는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공상에 빠져있다가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아주 예쁜 목소리로 개혁신보사란다. 너무 익숙한 단어인데 너무나 낯선 말을 한다. 글을 부탁한단다. 앳된 목소리에 간곡함이 묻어나와 거절치도 못하고 부족하지만 한 번 해보겠다 말을 하고 나니 부담감이 백배로 몰려온다. 주제는 무엇으로 할까? 어떤 식으로 이끌어 가야 하나? 신앙생활 쪽으로 중점을 둘까? 아니면 일상생활에서의 경험을 정할까? 머리도 큰데 생각의 무게로 머리가 꽉차버렸다. 갑자기 글을 전문적으로 쓰시는 작가들과 설교 원고를 쓰시는 목사님들이 존경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멋있고 낭만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이리저리로 끌고 다니고 움직이는 고상하고 매력적인 직업이라 생각되었던 작가라는 직업이 이제는 환상이 깨지고 겨우 문장 하나로 절절 메는 내 앞에 큰 산이 되어 서 있다. 환상이 현실이 되는 이 순간 스트레스라는 작은 방망이가 되어 나의 머릿속을 콩콩콩 때리며 돌아다닌다. 아마도 우리의 삶이 다 그렇지 않을까? 멀리서 바라보면 너무나 낭만적인 과수원의 농가에서 하루만 일하고 나면 중노동의 장소라는 것을 깨닫게 되듯 어떤 일이든 무슨 직업이든 한발 건너서 보는 것과 직접 본인이 하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강이 흐르게 마련이다. 다시 정신 차리고 집중하고 나서 ‘나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정리를 해야겠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할까? 그게 내 마음대로니까! 현 위치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났겠다’고 정했다. 나는 지금 한 목사의 아내이지만 그 사모의 자리를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부담스럽고 자격미달임을 알았으므로 틈만 나면 세상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었으리라. 더 솔직히는 생활고의 어려움으로 인해 불편함과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럼 어떻게 지금까지 버텨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목사의 아내라 함은 일명 ‘사모님’이다. 나를 제외한 사모님들의 헌신과 노력을 포함하여 마땅히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할 존칭이다. 그럼에도 혹시 의기소침해 있는 사모님들이 이글을 보신다면 위로 받기 바란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신학생 때부터 6살 된 아들과 한 달된 딸을 데리고 지방으로 오면서 개척한지 벌써 14년째이다. 개척멤버이기도 한 우리가족은 오랫동안 오붓하게 변함없이 넷이서 예배를 드렸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긍휼히 여기사 굶기지 않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너무나 힘든 시기였고 나는 종종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10년째 송구영신 예배에 무론 남녀노소하고 30명도 안 되면 응답으로 알고 전 사모 안 합니다.” 이게 웬일인가? 보도 듣도 못한 몇 분이 예배를 드리러 왔다. 난 혹시 무심결에 성도의 수를 세어보고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정확히 30명이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렇다고 그분들이 우리교회에 다시 나온 것도 아니었고 딱 그날뿐이었다. 예전과 성도는 똑 같았으나 내가 세상을 포기한 계기가 된 것이다. 지금도 부족한 나 자신을 본다. 너무나 하는 일은 적고 부담은 많이 있다. 다른 사모들은 심방에 전도에 각종 세미나에 선교에 시간이 없다는데 심방할 성도들도 별로 없고 전도와 선교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니 주님 보시기에 점수가 아주 낮을 것이다. 지금도 성숙하지 못한 사모로 은혜만 구할 뿐이다. 지금의 우리교회는 가족 같은 분위기로 점심은 간단히 국수로 대신한다. 사모의 솜씨보다 더 맛있게 먹어주심에 감사드린다. 지난주부터는 그동안 열심히 준비한 성가대가 첫 선을 보였다. 가운을 입은 모습들이 마치 천사들이 찬양하는 것처럼 감회가 새롭다. 이제는 힘들고 마음이 아픈 성도들과 이 자리를 지키리라 다짐해 본다. 부담이 되고 걱정이 되던 글은 이렇게 나열해 보니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부분 부분들이 다 주님의 은혜인 것을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반성문도 되고 나의 성찰도 된다. 무슨 일이든 10년이 지나면 전문가가 된다는데 이제부터는 온유한 일에, 성내지 않는 일에, 절제하는 일에, 사랑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567 no image |제 언| 동성애 지지는 천박한 인권주의_이광호 목사
편집부
3096 2012-06-13
동성애 지지는 천박한 인권주의 < 이광호 목사, 실로암교회 > 현대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가치관 상실의 문제이다. 나아가 그 가운데 살아가는 한국교회의 성도들의 진정한 가치관 역시 여지없이 흔들릴 위기에 놓여 있다. 이는 결국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절대다수의 어린 성도들을 위협하게 되지만,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에 대해 분명한 인식조차 없다. 도리어 우리시대의 타락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새롭게 대두되는 위험한 풍조에 대한 성경적 해석과 평가를 도외시한 채 대중화 작업에 몰두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 교인들의 가치관에 대한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현재 우리 주변에서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한 악한 풍조들 가운데 하나는 동성애 문제이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와 그에 대한 성도들의 적용은 시류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동성애 문제에 관련된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그것이 죄가 아니라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동성애자들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애매모호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의 현실적 위기는 기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처럼 위험한 주장에 편승하는 자들이 점차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소위 ‘인권’을 들먹이며 그 더러운 행위를 정당화하며 무지한 교인들을 혼란의 도가니로 빠뜨리고 있다. 현대는 악한 죄를 보고도 죄라고 말하는 것이 주저되는 위험한 시대이다. 우리는 동성애를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더러운 간음을 행하며 악한 누룩을 퍼뜨리는 자들이 정상적인가?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을 도외시하는 자들은 더러운 간음을 죄로 인식하지 않는다. 이미 기독교 언저리에는 경우에 따라 행해지는 간음에 대해 정당화하려는 자들이 상당수 있다. 그렇게 되면 멀지 않아 혼음(混淫)이라 해서 죄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나설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시류에 민감한 불신자들의 사회는 그렇다고 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할 기독교가 어쩌다 이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더욱 한심한 것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자들 가운데는 스스로 목사라 하면서 성경에는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한 내용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성경을 들먹이며 어리석은 교인들을 미혹하는 자들은 다음 성경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18:22);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20:13);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롬1:27). 우리는 동성애를 지지하는 천박한 인권주의자들과, 그들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애매한 수용주의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동성애자를 감싸 안는 것이 의식 있는 기독교 지도자가 되는 것인 양 여기는 한심한 세태를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의 풍조가 그러할지라도 건전한 교회와 성도들은 결코 그럴 수 없다. 불과 10년 전에는 불신자들마저도 동성애를 혐오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에서조차 그에 동조하는 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개들이 토해낸 것을 집어삼키려는가? 참된 성도라면 더러운 죄를 보면서 죄라고 말할 수 없는 한심한 시대를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566 no image |초대시| 순종_송명희 시인 (124)
편집부
4065 2012-05-29
565 no image |신앙수상|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네_임애랑 사모 (1)
편집부
2659 2012-05-29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네 < 임애랑 사모, 제주 동산위의교회 > “하나님은 내가 사람을 의지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첫째 날 - 난소혹 수술 수술하러 간다는 생각이 안 든다. 감기 앓아 주사 맞으러 간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 마침 언니도 휴가를 내어 함께 해주셨다. 수술준비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수술도구들의 철커덕거리는 소리, 분주히 움직이는 간호사들의 소리를 들으니 조금 긴장이 된다. 그래도 감사하다. 염려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게 되어서 이 모든 것이 성령님의 은혜이다. 마취과 선생님이 오셨다. ‘마취 들어갑니다. 같이 새세요.’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 그 다음은 모른다. 마취가 깨고 ‘아이고 배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머리, 목도 아프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산소 호흡기가 동원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셔요. 크게 쉬세요.’ 간호사 선생님의 소리가 들린다.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그래도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첫째 날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작은 언니가 어머니처럼 보듬어 줬다. 내 마음을 읽어주고 고통을 함께 해줘서 너무 고마웠다. 셋째 날 - 한심한 간병인 나름대로 열심히 도와준다. 휴가 온 건지 병원에 간호하러 온 건지 도서관에 온 건지 할 일이 너무 많은 남자. 자기 코가 석자다보니 환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가 보다. 제자훈련 양육준비, 설교준비, 전화심방 바쁘다 바빠. 링거수액이 다 들어가서 피가 10cm까지 올라와도 보이지 않는 남정네. 한 가지 일에 빠지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하나님의 설계상 그렇게 한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 여자의 마음은 옆에 찰싹 붙어서 모든 것을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인데 이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렇게 될 수도 할 수도 없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 ‘야, 이 남정네야 정신 좀 차리고 니 각시 잘 봐.’ 그래도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 청소하고 밥챙겨주고 씻겨주고. 밤에 화장실 가야되는데 자는 사람을 깨울 수도 없고 나 혼자 하려니 힘들다. 둘째 날 밤에 네 번씩이나 혼자 낑낑대며 화장실에 드나들었다. 한 번도 깨지 않는 무심한 남자. 드르렁드르렁 맛있게 잘도 잔다.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수술부위가 너무 아프다. 옆으로 뒤척이며 혼자 잘도 잔다. 그래도 한심한 간병인이라도 옆에 있으니 감사하고 다행이다. 다섯째 날 - 조기퇴원 집에 일찍 간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다. 왜 일찍 가냐고 주변 사람들은 성화이다. 내 몸은 내가 잘 안다. 링거를 맞는 것도 아니고 주는 약, 주는 밥만 먹는 시간이 지루하다. 하루라도 빨리 집에 갈 수 있어서 좋다. 교우들이 근심어린 눈으로 들어온다. ‘고생하셨어요. 아프셨죠.’ 기도해주고 걱정해줘서 너무 고맙다. 퇴원하는 나를 두고 성도들의 걱정이 태산이다. 슈퍼우먼처럼 참지 못하고 일을 해버릴 것이라고, 색안경을 써서 더러운 것 아무것도 보지마시라고 한다. 걱정하는 것은 좋지만 기분은 안 좋다. 옆에 있던 집사님 왈 ‘아픈 사람이 알아서 하실 건데 뭔 걱정 이예요.’ 그 말이 위로가 된다. 성도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나는 막무가내로 일만했다. 나의 속사정은 아무도 모른다. 그대들이 하지 않으니 아파도 아픈 내색하지 않고 할뿐이다. 성도들은 나를 홍길동, 슈퍼우먼이라고 표현한다. ‘나도 그대들과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편하게 앉아 있고 싶다오. 그대들이 하지 않으니 내가 하는 것이오.’ 나에게는 늘 교회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다보니 깨끗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화장실, 마당, 교회, 식당입구, 텃밭 등 일하는 나의 모습이 부담스러운가보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집도 아닌 주님의 집을 아름답게 하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과정, 방법적인 것이 불편하고 못마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를 이해해야할 과제가 아닌가. 누구 때문에 일을 하고 못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내가 주님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지 성도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어떠한 말을 할지라도 잘 골라듣고 내 소신껏 할 것이다. 이제는 이런 것들 때문에 아파하지 않을 것이다. 늘 나만 손해였다. 나의 영과 육이 망가졌다. 돌이켜보면 난소에 혹이 생긴 것도 3-4년 전부터이다. 과다 생리와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었다. 내 자신을 늘 외롭게 두고 나도 모르게 나를 학대한 것이다. 자책감, 원망, 감사하지 못하는 삶, 주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사람을 바라봤던 모습,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볼까보다는 성도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내 안에 깔려있었다. 모든 것을 치유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것들을 깨닫게 하기위해서 아픔을 주셨다. 사람을 의지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던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사람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데 나의 영혼에 병이 들어 이것을 치유하시기를 원하셨다. ‘나의 영과 육을 치료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만 두려워 할 뿐입니다.’ 내 속에 역사하는 두려움은 떠나갔다. 질병도 떠나갔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알았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예수 사랑하심 찬송을 주시며 위로해 주셨다. 퇴원과 동시에 나의 묶은 것을 청산하시기를 원하시는 주님.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살 것이다. 건강하게 주님의 일을 하다가 집에서 편안하게 쉬는 것처럼 자다가 주님께서 돌아갈 것이다. 여러 목사님과 사모님들이 찾아오셨다. 함께 아파해주는 동역자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입원을 통해서 사랑을 받게 해주셨다.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시작해 가족, 성도, 동역자들로부터 혼자가 아니라 함께 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564 no image |제 언| 하나님께서 주신 역사적인 장로교회 안에 담긴 섭리_나택권 장로
편집부
3105 2012-05-29
하나님께서 주신 역사적인 장로교회 안에 담긴 섭리 < 나택권 장로, 호산나교회 > "목사가 협력의 주체가 되고 장로는 협력체가 되어 나갈 때 그 당회는 날로 발전해가는 기관이 될 것" 시작하는 말 장로교정치의 제도적 측면이나 현실적 측면에서 볼 때 개교회의 모든 정책 방향과 중요한 사안의 결정은 대부분 대의기구인 당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만일 장로교회에서 문제가 있다면 이는 제도상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여론조사를 보면 교회 운영에 있어서 당회가 거의 절대적 역할을 한다는 시각을 가진 목회자가 87%이다. 또한 목회자가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며 추진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어려움이 발생했을 경우 그 어려움이 당회원인 장로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목회자 91%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개교회가 아파하고 있는 문제이며 목회자들이 말하는 목회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회가 정책과 사역의 내용들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주체로서 조화롭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임을 반증하는 통계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원만한 당회의 운영을 위한 장로교회의 특성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1. 서로 존중해야 할 직분의 다양성 한국 장로교는 전통적으로 교인들의 대표인 장로들보다는 목사의 영적 권위를 더욱 강하게 강조하는 구조적 특성을 보여 왔다. 그러나 사회가 한 사람의 주도적 권위를 인정하던 산업사회를 지나 전문화와 특성화를 지향하는 후기산업사회로 들어오면서부터 전문성을 지닌 성도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게 되었고, 이것은 당회장 중심으로 움직여가던 당회에서도 많은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목회자들이 당회원인 장로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회적인 입지나 외적 상황보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항상 섬김이로 서 있는 제자도를 앞세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회에서는 행정 절차를 두고 갈등을 겪는 경우가 생길 수 있고, 어떤 문제를 불공정하게 처리한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으며,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 모두는 대부분 선한 의도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사람들 사이에는 실제적이고 천부적인 차이가 존재하고, 모든 사람은 각각 다른 경험을 기준으로 문제를 바라보며,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문제를 접근하기 때문이다. 당회는 이러한 차이를 존중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각 사람들이 지닌 특성을 무시하고 리더들이 원하는 모양대로 획일화하려 할 때에 흔히 말하는 당회의 분란과 장로들과 목회자들 사이의 반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고 했다. 또한 성경은 리더십을 존중하라고 가르치고 있다(살전 5:12-13). 하나님께서 주신 리더십의 목적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하는 것이다. 반면에 리더가 자신의 권위로 지배하려들 때 교인들은 자기가 고유의 사역을 위해 세움을 받았다기보다는 리더의 사역을 대신한다는 시녀역할로 생각하기 쉽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당회에서 분노와 마음의 동요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2. 당회 존재의 본질적 의미 목회자들의 역할은 성경에서 말한 대로 교인들이 목회자의 일을 대신 하도록 그들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그들 자신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세워 주는 것이다. 장로는 목사에게 배워서 말씀으로 성장하며 다스리는 일도 목사에게서 배워서 다스리는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 아닌가? 장로들은 당회에서 부당하다는 생각과 상처받은 마음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해 할 수 있다. 이럴 때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런 현상들을 악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것을 강단의 주제로 내세운다면 서로의 갈등은 해소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일부 목회자들의 시각 속에는 장로의 직무가 치리보다는 교회 행정과 관리 또는 목사를 견제하는데 치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치리’라는 말은 이치나 법리에 따라 다스린다는 뜻이고 치리회란 다스리기 위해 모인 회를 의미한다. 장로교에 있어서 치리란 좁은 의미에서 권징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권징과 행정뿐 아니라 당회, 노회, 총회라는 회의체인 치리회에서의 활동을 하는 정치도 포함하고 있다. 때문에 교회는 당회에 행정권과 권징권을 주었고 목사와 장로가 협력해서 운영토록 했는데 교회에서 행정을 하든 권징을 하든 이것은 교회의 신성유지와 질서유지를 위한 것이며, 교회의 평화와 교인간의 화평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헌법에서는 장로의 직무와 치리회에서의 장로직무를 각각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장로를 세우는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이다. 존 칼빈이 말한 대로 장로의 역할은 교인들을 심방해서 그들과 그들 가정의 신앙생활을 잘 살펴 당회에 보고하고 당회로 하여금 필요한 돌봄, 즉 구제나 위안이나 권면이나 또는 권징 등의 치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당회는 입법, 행정, 사법의 3가지 기능이 있지만 당회 주요 직무는 행정에 관한 업무가 많을 수밖에 없다. 또한 당회의 직무는 목회자들의 목회업무와 동시에 수행되어야 할 업무이므로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회의 직무는 교회의 책임자인 당회장 아래서 수행되어야 하고 당회원은 당회장의 지도아래 분담하거나 대행하도록 되어 있는데 교회에서 장로들을 참정케한 이유는 교인들로부터 선임된 목회자들과 원로들이 역할 분담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함이다. 교회에서 이기고 정복하고 승리하고 지배하여 억압하고 제압하는 영광적인 사고방식은 필요하지 않다. 십자가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지 이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독주를 하고 장로가 행정을 마음대로 해야 장로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고 싸우며 투쟁하는 것은 종교의 기본을 잃은 처사이다. 교회에 목사들과 장로들이 왜 있어야 하며 당회와 노회, 총회는 왜 있어야 하는가? 이것은 주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펴 나가기 위해 목사를 부르셨고 이들을 교회에 보내시고 목사들에게 자기 교회를 위임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셨듯이 교인들의 뜻을 반영케 할 장로들을 뽑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역사적인 장로교회적 섭리이다. 마치는 말 주의 종으로 부름 받은 목사들과 교인들의 대의직으로 선출된 장로들이 십자가를 질 때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며 복음의 능력이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역사적인 장로교회적 섭리를 망각하고 당회나 노회, 총회에서 사리사욕으로 또는 수의 힘으로 개인의 권익과 이해타산을 놓고 혈기를 부리며 적대시하고 파당을 지어 세상보다 못한 추한 정치를 하는 것은 자멸하는 길이고 혼란과 화를 자초하는 길이다. 이제는 목회자이든 장로이든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의식구조를 바꾸는 변화이다. 목회자는 당회장으로서 성도인 장로들에게 절대로 밀려서는 안 된다는 의식, 장로들은 파워가 커져야 목회자들이 물로 안 본다는 의식 등, 이러한 잘못된 의식들은 장로교회의 본질적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므로 속히 버려야 할 것들이다. 치리권은 목사와 장로와의 협력 관계에서 행사하는 것이 장로교회의 특징이다. 즉 교회의 일을 모든 교인이 힘을 합해서 수행하는 데에 장로교 제도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치리권 행사는 말씀 증거의 직무를 전담 수행하는 목사가 협력의 주체가 되고 장로는 협력체가 되어 나갈 때 그 당회는 날로 발전해 나가는 기관이 될 것이다. 교회에서는 결코 어느 한쪽만이 소유하고 있는 고유 권한이란 없는 것이다. 교회의 치리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치리회에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7).
563 no image |목회단상| 당신의 사모님, 안녕하십니까?_김수환 목사
편집부
3035 2012-05-29
당신의 사모님, 안녕하십니까? < 김수환 목사, 군포예손교회 >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김일성 부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위대한 것” 어느 날 아침 어떤 사모 한 분이 교회로 출근하는 목사에게 간단한 침구 한보따리를 내어밀며 “오늘부터 집에 올 생각 마시고, 교회 강단에서 계속 지내시지요” 라고 말했다 합니다. 갑작스런 아내 행동에 화가 난 그 목사가 퉁명스럽게 되물었습니다. “아침부터 무슨 얘기야, 기분 나쁘게...” 그러자 준비해 놓은 듯 사모의 답변이 바로 이어졌습니다. “당신은 강단에서 설교할 때에만 천사 같고, 목사님 같으니까 강단에서 내려오지 말고 아예 거기서 계속 사세요. 그래야 내가 좀 살 것 같네요.” 설교하는 강단의 목사와 강단 아래에서의 목사 사이를 너무 큰 삶의 간극으로 만들어 낸 가슴 아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실천이 없는 목사의 강단은 그렇지 않아도 힘든 사모들의 가슴에 또 하나의 슬픔을 추가합니다. 아니, 목회자 자신의 권위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가장 소중한 동역자인 아내의 내조를 약화시킵니다. 주님이 제1호로 맡기신 양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인간이고, 사람이라고...” 항변해 보고 싶지만, 합리화 시키려는 이성의 얄팍한 계산은 이미 그 진정성을 간파해 버린 신앙 양심 앞에 힘을 잃고 맙니다. 수많은 오늘 날 우리의 설교들이 마치 방송용 멘트처럼, 아무런 감동도 없이 스러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1주일에 1-2시간 강단의 목사만 바라보고,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아닌 매일 매순간 목사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사는 사모들에게 은혜를 받고, 뭇 성도들에게 신앙의 귀감이 되며, 목사의 마음에 드는 내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을까요? 「지킬박사와 하이드」소설 못지않은 우리 목회자들의 이중성은 우선 가까운 가족들, 특히 아내에게 가장 큰 폐해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기에 사모에게 존경을 받고, 매주일 그 사모에게 은혜를 끼치는 목사는 훌륭한 목회자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어쩌다 한 번씩 감동을 주는 것은 비교적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은 우리의 삶이 뒤 따르지 않으면 은혜는커녕 오히려 큰 고통과 괴롬만 줄 뿐입니다. 아니 자칫 한 영혼을 실족케 하는 불행한 사태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말로 천국을 가르치고, 말로 천국을 설교하는 목회자들은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천국을 살아내고, 그 천국을 몸소 삶으로 보여주는 목회자들은 눈에 잘 띠지 않습니다. 만일 목사들이 강단에서 설교한 대로 천국의 실재를 살아낸다면, 가장 먼저 은혜를 받고 가장 많이 감동해야 할 사람은 바로 사모가 아닐까요? 가장 행복해야 할 분이 바로 사모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은혜의 사각지대, 행복의 사각지대가 바로 우리 사모들의 영혼이 아니던가요? 처음 예수 믿고 목회자가 된 이후, 더욱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가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무척이나 기도했었습니다. 그리고 만나기라도 한다면 목을 끌어않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약간의 어려움도 없이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정으로 북받치곤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장 가까이 있는 아내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내 신앙이 얼마나 허구적이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실천 가능한 것은 애써 외면하면서 어차피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이용하여 괜찮은 신앙으로 포장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김일성 부자에게 사랑을 외치고, 아프리카의 영혼 구원을 운운하는 것은 외식하는 신앙의 대표적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디 아내에게 천국을 말로만 설교하지 말고, 직접 삶으로 천국을 보여 드려야 할 것입니다. 차가운 아내의 가슴에 천국의 꽃이 피어날 것이며, 과분한 목양의 내조자가 될 것입니다. 강단에서 내려와 사택에서 잠잘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김일성 부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어야 할 여지가 없고, 마냥 미루거나 핑계를 댈 수 없는 가장 실제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인생이 죄 짓는 일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목회를 할 수 있을까요? 설교를 책임질 수 있을까요? 아내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누구를 감동시키고, 누구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다는 말인가요? 하물며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아내가 아닌가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갈 2:20)하는 원초적 십자가 복음의 삶만이 무너진 우리의 강단을 회복시키고, 마음으로 떠나간 사모들을 가정과 교회의 진정한 돕는 배필과 내조자의 자리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당신의 사모님은 안녕하십니까? 십자가 복음으로 당신의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당신의 사모를 목회하십시오! 당신 자신을 목회하십시오! 천국의 실재와 함께, 목회의 대로가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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