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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 no image |제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의 삼직(목사, 치리장로, 집사) 고시과목으로 채택하는 일에 대하여_김용주 목사 (17)
편집부
4756 2011-10-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의 삼직(목사, 치리장로, 집사) 고시과목으로 채택하는 일에 대하여 < 김용주 목사 · 소식교회 > 본 내용은 제96회 총회를 위해 메모했던 것이고, 총회 회의에서 제시했던 글입니다. 마땅히 총회가 전국교회를 위하여 이런 내용을 제시하고 봉사해야 할 일로 알아서 이 메모를 내놓습니다. 1.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하여 개혁주의적 장로교회를 표방하려고 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고(故) 박윤선 목사님을 통하여 의도하게 하신 바가 있으셨다고 사료됩니다. 1) 그 첫 번째가 박 목사님께서 친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번역하신 일입니다. 그 당시에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번역되어 시중에 나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박 목사님께서는 한 신학도에게 그 번역을 부탁하셨다가 여의치 않자 직접 번역을 하셔서 오늘날 우리 안에 그 책을 소장하는 일이 있게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간단한 해설이 곁들여져 있어서 우리에게 매우 유용합니다. 2) 그 두 번째는 ‘헌법 주석’을 집필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경우입니다. 그 ‘헌법 주석’의 내용인즉 ① 그리스도만을 머리로 한 개혁장로교회 정치와 ② 성경말씀으로부터만 가져오는 개혁장로교회의 예배모범과 ③ 성경말씀의 신론에 입각한 바른 해설과 신론적 적용으로부터만 가져오는 개혁장로교회의 권징조례를 포함합니다. 3) 이와 같은 정신은 총회 교육부에서 발행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서론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웨스트민스터 총회 총대들의 성경 말씀에 대한 이해에서 잘 드러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7)는 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바로 그 성경이 ‘인간의 행동 양식과 사회 규범뿐만 아니라 예배모범과 교회 정치에 이르기까지의 틀’임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서와 대, 소요리문답 그리고 교회정치와 권징조례 및 예배모범 등은 모두 오직 성경으로부터만 배우고자 하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실이었습니다. 2. 우리는 ‘신조’라는 말이 개혁주의 여러 신조들을 포괄하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 총회에서는 유독 12신조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1) 12신조가 유익한 것이 사실이지만 교리 부분의 온전성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12신조란 영국이 인도를 식민통치 할 때, 그 지역의 선교차원으로 제시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그 내용이 영국 국교회(성공회)적인 성격이며, 명확하게 장로교회적 성격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2) 박윤선 목사님께서 친히 번역하셨고, 영음사를 통해 1989년 2월에 발행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서문에 보면 신앙고백서의 성격이 명확히 나타납니다. 박 목사님은 “그 교리적 입장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전문 33장으로 되어 있는 이 신앙고백은 장로교회의 직분자들에게 성경적 교리로 받아들이도록 요구되고 있다. 이 고백서가 교회의 직분자들은 물론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널리 읽혀지도록 역자인 나는 그 본문을 간결하게 번역하기에 힘썼다”고 기록합니다. 이제 우리는 12신조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진척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그런 내용으로서 그리스도로부터만 나오는 바 교회의 삼직에 관한 고시를 시행해야 할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고시과목으로 선택할 이유는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서 맹세하는 방식으로 실행하는 모든 직분자들의 서약과의 일치를 위해서 필요합니다. 지금의 한국장로교회는 서약과 신앙의 불일치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직분자들의 신앙일치, 곧 전체 교회의 신앙일치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한편으로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되는 셈입니다. 이 고백서는 신앙교육과 심지어 이단방지의 대책으로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물론 신앙지도의 실제성과 온전한 체계와 그 부요성까지가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에는 성경말씀 전체가 총망라되었습니다. 적어도 이 신앙고백서는 신, 구약 성경말씀의 통일성에 입각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또 장로교회의 기반이 되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대한 충분한 반영이 되겠습니다.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선진들에게 허락하신 신앙전통을 지키고 신앙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일의 일환으로 매우 귀중한 표준문서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옛 문서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신앙의 선진들을 통해서 대대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의 한 방식인 셈입니다. 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두신 삼직의 일치를 위해 직분자 전체의 고시 내용으로 필요합니다. 기타 고시와의 중복성이 예상될지라도 박윤선 목사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말씀대로 ‘목사후보생이든 교회 직분자들과 그 직분으로 피택된 자이든 여러 차례 시험을 통과하여 임직에 이르는 일이 필연적’입니다. 또 한편 오직 성경말씀으로부터만 배우기 원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실에서 보는 대로 소요리 문답이 ‘능력이 연약한 자들을 교육시키는 안내서’로, 대요리문답은 ‘신앙의 근본지식에 어느 정도 숙달한 자들을 교육시키는 안내서’로 일치 가결했던 것처럼 소요리문답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함께 두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6)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지교회의 통일성과 노회의 통일성과 전체 교단의 통일성과 진척을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고시과목으로 채택해야 합니다. 물론 고시에 수종드는 자들과 고시 당사자들에게 상당한 부담이 문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권유익’(開卷有益)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읽는 사실에 대한 확인만으로도 유익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다음에는 조금씩 더 심화되는 내용으로 출제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고시과목 선택이야말로 온 교단과 신학교에까지 좋은 영향을 줄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 이유로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는 사람의 구조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믿는 바 교의의 골격과 그 내용의 부요함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건실함과 아름다움이 함께 있습니다.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각종 고시과목으로 채택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고시과목 채택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과 교단 교회들의 진정한 유익을 위해 두 노회(중서울노회, 충청노회)에서 헌의된 것으로 믿습니다.
541 no image |목회수상| 행운과 행복_장석진 목사 (38)
편집부
3636 2011-10-19
행운과 행복 < 장석진 목사 · 광주월산교회 > 아나운서 이규항 씨가 1960년대 후반쯤 ‘네잎 클로버’라는 노래를 불렀다. 아나운서의 특이한 직업을 가진 분이 부른 노래라는 점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구수한 저음에 노랫말까지 좋아서 한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네잎 클로버 찾으려고 꽃 수풀 잔디에서 해 가는 줄 몰랐네. 당신에게 드리고픈 네잎 클로버 사랑의 선물. 희망의 푸른 꿈, 당신의 행운을 당신의 충성을 바치려고 하는 말. 네잎 클로버 찾으려고 헤매는 마음 네잎 클로버....” 그 덕분에 어린 시절 초여름이 되면 토끼풀을 뜯으러 갔다가 클로버 밭에 쭈그려 앉아 행운(幸運)을 바라며 네잎 클로버를 찾곤 했던 기억이 있다.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幸運)이다. 우리는 행운을 바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에 수많은 세잎 클로버들 중에서 네잎 클로버를 찾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세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복(幸福)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주위에 무수히 널려있는 행복은 무심코 지나친 채 행운만을 마냥 찾아다녔던 셈이다. 우리는 간혹 특별한 행운을 위해 작은 행복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 것은 아닐까?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삶속에 숨어있는 행복은 무시되었다. 우리 삶에 필요한 건 하나뿐인 특별한 행운을 찾는 것보다는 무수히 많은 작은 행복을 지키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행운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로 행복한 사람은 아니다. 복권 당첨 이후에 그의 인생이 망가지고 깨진 가정이 수없이 많다.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후 1년이 지나지 않아 90% 이상이 무일푼이 되거나, 대부분 이혼하거나, 사고를 당해 일찍 죽게 된다는 보고가 있다. 왜 그럴까? 땀 흘려 번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운은 찾았으나 행복은 잃은 것이다. 세잎 클로버는 눈에 잘 띄는 흔한 것이다. 행복이란 바로 옆에 있는, 찾기 쉬운 곳에서 오는 것이다. 행복은 우연히 일어날 대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을 귀하게 여기며 가꾸어 가는데 있다. 행운을 찾기 위해 지천에 널려있는 행복을 짓밟지 말라! 가까이에 있는 일상의 행복을 껴안아 보자. 사소한 곳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찾아 보라. 행복에는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happiness)과 성경에서 말하는 복(blessing)이 있다. 세상의 행복은 그 근원이 해프닝(happening)이다. 즉, 우연히 발생되는 사건들이 생겨날 때 행복을 느낀다. 성경적인 행복은 피(blood)에 기초한 복(blessing)이다. 오직 예수의 피만이 복의 근원이다. 고통이 찾아와도 그 고통이 주는 의미를 생각한다. 거기에서 감사를 발견한다.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그것만이 매순간 행복을 누리며 나누는 복의 통로이다.
540 no image |선교단상(20)| 가을 사색_이기종 총무
편집부
2727 2011-10-19
가을 사색 < 이기종 목사 · 합신세계선교회 총무 > 한국의 가을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높고 푸른 하늘, 울긋불긋 물든 단풍, 탐스레 익어가는 과일, 황금빛 벌판과 논두렁길, 들판과 산하(山河)에 펼쳐지는 모든 풍경이 정겹다. 광활한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지고 산에는 나무가 거의 없는 중앙아시아에서 만나는 가을 분위기와는 아주 다르다. 한편 가을은 이것저것 우리를 사색하게 만든다. 한 해의 결실에 대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올해 무엇을 심었고, 그리고 거두고 있는지 살필 마음이 절로 드는 계절이다. 선교회 본부사역을 하다 보니 선교사들의 선교편지를 많이 읽게 된다. 그들은 해외에 나가 있어도 때때로 고국의 명절 음식, 계절의 변화를 마음으로 그려보며 향수를 적어 보내곤 한다. 송편, 토란국이 그립기는 하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의 선교편지는 현지정세, 사역이야기, 가족안부, 기도제목 순으로 이어진다. 때로는 어려움 때문에 힘들게 쓴 편지를 대하기도 한다. 가족이 중병으로 투병 중인 사람, 자녀교육의 방향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 사역자 또는 현지인과의 갈등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 물가와 임차료 폭등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 좀 쉬고 싶어도 쉼을 갖지 못하는 사람, 사역에 진척이 없어 고민하는 사람, 철수를 고려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사역의 열매 때문에 힘들어하는 선교사들도 적지 않다. 보통 선교지 부임 후 3년이 지나면서 파송교회와 본부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기 시작하는데, 그런 저런 이유로 5-6년이 지나도 본국사역(안식년)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선교사역의 열매는 지역과 대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며, 선교활동을 극히 제한하거나 위험한 지역에서 사역하는 경우에 열매는 아주 늦게 나타날 수 있다. 7년 전 어떤 선교대회에 참석했을 때 중동의 S국에서 사역하는 모 선교단체 소속의 선교사를 만난 일이 있다. 식당 한 구석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함께 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의 사역에 대해 물었다. 무슬림 대상으로 12년 동안 사역을 했지만 그의 전도를 받고 돌아온 사람은 아직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그 후로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사역의 진정한 열매는 무엇일까? 빈센트 반 고흐는 죽기 직전 10년 동안에 900여 점의 그림과 1,100여 점의 습작들을 남겼는데, 그의 명성은 죽은 지 11년 후부터 인정받고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씨를 뿌리는 일이다. 아니 어떤 때는 씨를 뿌리기 전 자갈밭에서 돌을 고르는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 돌을 고르든, 씨를 뿌리든, 물을 주거나 거두든지 추수 때의 기쁨은 동일하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선교지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영혼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사람이 여러 모양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고, 땀을 흘리고, 수고했음을 보게 된다. 결국 선교는 여러 사람들의 수고의 합작품이며, 그 열매는 하나님께서 거두시는 것임을 알게 된다. 16년 전에 중국서북부 지역에서 지평선(地平線)을 바라보고 끝없이 펼쳐지는 황무지를 달려 지나가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황무지에 버티고 선 나뭇가지의 가랑잎처럼 그저 땅에 떨어져 한줌의 밑거름이 되고 싶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도구로서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비록 내가 하는 일이 작고, 하찮아 보이지만 낙심할 필요가 없다.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일에 순종한 것이라면 그 결과에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 작품의 일부분을 누군가와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수고하면 결국은 하나님께서 거두실 것이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요 4:36).
539 no image |목회단상| 인간의 보편적 삶의 원칙_오영원 목사
편집부
3485 2011-09-20
인간의 보편적 삶의 원칙 < 오영원 목사, 산들교회 > “인간은 상호간에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존재” ‘사회적 원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이론 문리학자인 마크 뷰케넌이 저술한 책입니다. 이 책의 핵심은 인간의 집단 광기, 군중 심리를 사회적 원자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사람도 원자처럼 법칙을 따라 방향성이 생기면 그 흐름을 쫓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뷰케넌은 사람을 사회라는 물질을 이루는 ‘원자’로 보고, 이러한 원자들이 서로 상호 작용을 하면서 패턴이라는 집단의 행동과 기준을 만들어 내고, 그렇게 수립된 집단의 행동과 기준이 다시금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상호 작용의 시각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는 인간을 진화하는 기회주의자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인간들은 사회적 여러 흐름에 따라 적응적인 기회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일부는 이성과 논리로 작용함으로써 본능 시스템이 저지르는 오류를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의식적인 부분이 강할 수 있는 것은 논리 때문이 아니라 적응하는 능력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패턴을 알아보고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세상에서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배우며,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왜 믿는지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 작용에 크게 작용된다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계산기로서 자신보다는 타인의 이야기와 움직임에 자주 영향을 받고 따라 하는 것이 ‘사회적 원자’로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그는 파시즘의 대두와 인종 청소(세계 제2차 대전 때 독일의 유대인대학살과 같은), 집단간 반목과 소득 격차를 설명합니다. 특별히 다른 인종을 싫어하지 않더라도 고립을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인종 간 주거지가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개별 인자들의 차이가 없더라도 ‘사회적 원자’들은 생존에 가장 효과적인 전략을 위해 비슷한 집단끼리 뭉치고, 상대를 공격하며, 진화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타주의와 희생은 집단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독일 태생의 미국 정치 철학자 해나 아렌트(1906-1975년)는 나치의 대량학살을 도운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아이히만은 악마가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해낸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에게는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하는 일의 결과와 의미, 그에 따른 타인에 대한 이해 관계를 판단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그렇게 평범한 모습을 하고 뿌리를 내린다는 것입니다. 곧 인간은 공유적 존재로서 내가 행하는 그 어떤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아집과 독선에 빠지기 쉽고, 그래서 자신이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나쁜(악한) 영향을 끼치는가를 아이히만처럼 판단할 능력을 잃게 되면 ‘악의 평범성’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고통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세계를 보면서 인간의 삶을 바르게 세워나가며 타인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면서 하나님의 창조물들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곳이 바로 교회여야 합니다. 인간성의 파괴는 이기주의와 물량주의로 변하게 하고 인간 생존의 필수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상의 상태인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인간들 스스로 재난을 불러드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물량주의와 편리함만을 자극하는 산업의 발달은 인간들을 조급하게 만들고, 창조력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질서를 깨뜨리고 있으며, 서로를 배려하며 안식을 취할 수 없는 상태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질과 방식의 변화는 먼저 ‘인간들의 심성의 악함’(즉 ‘악의 보편성’)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생산의 도구도 아니며, 컴퓨터도, 로봇도 아닙니다. 양육강식하며 사는 동물도 아닙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됨의 본질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앞에서 말한 뷰케넌의 이론인 ‘사회적 원자’의 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세상에 정하신 인생의 원칙인 ‘이웃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재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잣대가 아니며,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법’이 그 안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신 ‘최고의 법’인 성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압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좋은 점 중 하나가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만물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 상호간에 긍휼히 여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때 사회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들에게 사랑의 씨앗을 심으시고 그 사랑으로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보편적 삶의 원칙이 바로 ‘긍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538 no image |제언| 총대의 숫자 제한과 원할한 운영_김형근 원로장로 (24)
편집부
3147 2011-08-24
총대의 숫자 제한과 원할한 운영 < 김형근 원로장로 · 송월교회 > 장로회 정치는 그 기본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신본주의적 공화정치이다. 그래서 당회는 치리의 사역으로 교회를 섬기는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어 성경 말씀대로 지 교회를 봉사하며 보다 넓은 치리회(노회, 총회)와 함께 교회 화평과 성결을 파수하며 또 증진시키는데 수종들고 있다. 헌법 정치 제17장 4조에 “총회는 각 노회에서 목사 총대와 장로 총대를 동일하게 파송한 총대로 조직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총회를 참석해 보면 언제나 장로 총대들이 모두 참석하지 못하여 장로 총대들이 목사 총대보다 적게 모여 총회를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장로들은 직장이나 또는 사업을 하기 때문에 총회 총대로 선출이 되었지만 직장에서 또는 사업상 부덕이 하여 참석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장로 총대들도 각성하여야 될 점도 있다고 생각이 되어 진다. 그러나 이 면에 있어 좀 더 관심을 가진다면 좀더 많은 장로 총대들이 총회에 참석해서 목사 총대들과 협력하며 또 함께 의논할 수 있으리라고 의심치 않는다. 헌법 정치 제17장 제4조에 “총회 총대는 한 당회에서 목사, 장로 각 1인으로 하되 한 당회에서 목사, 장로 각 1인 이상 총대가 될 수 없다”로 되어 있다. 물론 장로가 여러 명 있는 교회나 장로가 한 명만 있는 교회가 구별 없이 단일 치리회 곧 한 개의 당회만을 갖게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노회에서 파송하는 총회 총대는 상황이 다르다. 당회 수가 많은 노회는 많은 총대를 파송할 수가 있고 당회수가 적은 노회는 적은 수의 총회 총대를 파송하게 된다. 그렇다면 당회에서 장로가 노회 총대로 참석하는 것과 노회에서 장로가 총회 총대로 참석하는 것을 보면 형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어 진다. 다른 노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천노회에서는 장로 총대가 총회에 전원 참석하지 못 할 경우가 더 많이 있다. 왜냐하면 한 당회당 1명으로 제한되어 있는 장로 총대가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총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을 경우, 장로가 여러 명 있는 교회의 장로가 부총대로 선출이 되어 있어서 총회에 참석할 수 있지만 헌법에 한 당회에서 장로 1명 이상 총대로 참석할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부총대조차도 총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장로 총대가 목사 총대와 동일하게 참석하지 못 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한 당회에서 장로가 제한 없이 총회 총대로 참석해서도 아니 되겠지만 최소한 한 당회에서 장로 총대가 2명만이라도 참석할 수 있게 된다면 총회에서 장로 총대도 목사 총대와 동일하게 참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는 한 당회에서 2명이 무조건 총회 총대로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노회에서 총회 총대로 또는 부총대로 선출이 되어야만 참석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한 당회에서 장로를 노회 총대로 파송하는 것도 같은 이치라고 생각이 되어 진다. 헌법 정치 제16장 2조에 “노회 총대로 세례교인 2백 명 미만인 교회는 장로총대 1인, 2백 명 이상 5백 명 미만이면 장로 총대 2인, 5백 명 이상이면 장로 총대 3인씩 파송하는 장로로 조직된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교인수가 천명 이상이 되어도 장로 총대는 3인으로 상한선이 되어 있어서 장로 총대가 3인 이상 참석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 교단이 초창기에 천명 이상 되는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되어 진다. 그러나 지금은 천명 이상 되는 교회 수가 많아지고 있다. 때문에 이제는 현실에 맞춰 총대 수를 조정하면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장로 총대를 교인 5백 명 이상이면 장로 총대를 3명으로 상한선을 두지 말고 5백 명 이상일 경우 매 5백 명 당 장로 총대 1명씩을 노회에 파송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필자는 장로 시무직을 이미 7년 전에 은퇴하였다. 그러나 후배 장로들이 노회나 총회에 더 많이 참석하여 노회나 총회를 섬기는 일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러한 제언을 하는 바이다.
537 no image |목회수상| 목회 사역을 돌아보며!_이주형 목사 (1)
편집부
3376 2011-08-24
목회 사역을 돌아보며! < 이주형 목사 · 오정성화교회 > 금년 12월이면 우리 교회가 설립된 지 28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감사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나는 항상 행복한 목회자라고 간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소명자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목양지에서 즐거움으로 사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좋은 성도들을 만나게 하신 만남의 복이다. 우리 지역 정서도 시골의 훈훈한 정감이 있는 토양이라 할 수 있고 우리 성도들의 마음밭이 너무 고운 것을 감사한다. 더 감사한 것은 이런 정서에서 믿음 생활을 해 온 장로, 안수집사, 권사님들의 아름다운 동역이 목회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이렇게 목회하면서 지내는 가운데 지난 7월 27일 뜻하지 않은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최영찬 장로님의 아들 용규군이 인하대학교 아이디어 뱅크 과학 동아리에서 춘천 상천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과학의 꿈을 심어주기 위하여 봉사 활동을 갔다가 저녁에 펜션 숙소에서 잠을 자다 산사태를 당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용규군의 생사 소식을 몰랐다가 매물자 명단에 들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춘천으로 달려가는 도중에 용규군이 발견되었지만 용규군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참담한 마음이 들었고, 이내 용규군이 안치된 병원에 달려가서 사랑하는 장로님을 안고 심히 통곡을 하고 말았다. 용규군의 장례식은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장례 절차였던 것 같다. 그만큼 형제 이상의 사랑하는 가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태수습이 잘 진행되지 않아서 5일장이 되었는데 비통해 하는 유족들과 함께 하며 유족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저미어 와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연이어서 계획해 놓은 전교인 가족수련회가 있었다. 부득불 예정대로 실시하게 되었고 그 다음 한 주간 부흥회 약속이 있어서 집회를 인도하고 오게 되었다. 힘들고 바쁜 사역 속에서도 이 생각이 떠나지 않아서 심신이 많이 지쳐 있는 상태이다. 인생사에 희노애락이 있듯이 목회에도 똑같은 희노애락이 있다. 기쁜 일을 함께 나누면 그 기쁨이 두 배가 되고, 슬픈 일을 함께 나누면 그 슬픔이 작아진다는 말이 있듯이 이번 여름에 겪은 일들을 하나님께 아뢰고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이제는 산전수전 많이 겪어서 인생사에, 또 죽음에 대해 초연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을 만나고 보니 아비의 마음과 어미의 마음 같이 아프고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정말 이번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세우셨을 것이기에 지금은 당장 그 뜻을 다 알 수 없지만 조만큼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다 알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져본다.
536 no image |신앙수상| 세 번째 안식년 마치고 선교지로 돌아가면서_최태중 선교사
편집부
3357 2011-08-02
세 번째 안식년 마치고 선교지로 돌아가면서 < 최태중 목사, 에콰도르 총회 선교사 > “건강 허락되는 날까지 최선 다해 선교사역에 헌신할 터” 세 살난 손녀가 퍼즐 그림조각을 맞추면서 토끼는 산에다 놓고 고양이는 정원에다 붙이고 붕어는 웅덩이 물 속에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조각들을 다 붙이고 나니 뭉개 구름 조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손녀는 산 위의 토끼 조작을 정원에 있는 개집 옆에다 옮겨 제 자리를 찾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산 위에는 뭉개 구름조각을 붙였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림이 완성되었고 그제야 손녀는 쾌재의 환성을 올렸습니다. 물론 옆에서 이 과정을 지켜보고는 잘했다고 손뼉을 쳐주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교지와 선교사역에서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먼저 할 일과 마지막 결말을 지을 사역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1982년 12월 5일, 당시 총회선교부장 장경재 목사님으로부터 파송장을 받고 83년 1월 1일 드디어 선교지 현장으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남들은 신정이라고 분주하겠지만 생면부지의 먼 땅을 향해 비장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비행기는 태평양 위를 날고 있었습니다. 태평양을 내려다보면서 마치 한 개의 돌을 바다 가운데 던지는 것과 같은 외롭고 고독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왜 먼 나라로 가라고 하시는가?”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선교지를 상상하면서 떠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8년 7개월이 흘렀다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이제 또다시 선교지를 향해 떠나기 위해 분주하게 여장을 꾸리면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니 그동안 지내온 선교지의 변화된 상황이 주마등처럼 흘러갑니다. 그리고 이윽고 하나님께서 ‘에콰도르’로 보내신 뜻을 다시 한번 다짐하면서 남은 사역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지난 5월 12일에 새과천교회에서 안식년에 들어온 선교사 가족의 심사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오랜만에 반가운 동반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노장 선교사의 사역보고를 들은 후 “앞으로도 더 계속할 수 있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는 “건강이 허락되는 날까지 해야 될 것 같다”고 대답을 하며 함께 웃었습니다. 사실 선교사 훈련과정도 없이 처음 한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사역을 답습하는 가운데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이내 신학교육이 필요함을 느껴서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없는 지방에 교회를 건축하여 개척은 하였지만 지도자 부재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7개 교회를 개척하였지만 지도자가 부족하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먼저 ‘오타발로’라는 작은 도시에서 7교회 교역자와 지도자들을 불러모으게 된 것이 오늘의 ‘Casa de Jesus’ 신학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본교에 15명, 분교에 35명 등 모두 50명 이상의 재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4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한 가족의 부부와 아들, 며느리 등 4명 모두가 졸업을 하고 개척교회를 세워서 출석 교인이 1,000여명이 넘은 교회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7교회가 모두 50-200여명으로 성장하는 결과를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처음 시작은 환자를 치료하고 지도하고 육성하는 일로 시작했지만 교역자를 양성하고 나니 놀라운 부흥과 효과적인 복음 전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선교사 혼자 뛰어보아야 힘만 들고 별 성과도 없었지만 제자양육을 통해 교회가 부흥하고 번창하는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께 “그동안 무엇을 한다고 애썼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벌써 나이가 이제 70을 넘겼습니다. 아들 최은석(교대 졸업)과 딸 최은주(외대 졸업)가 그동안 스페인어를 전공하고 모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이제는 우리 가족과 함께 3가정이 한 팀이 되어 후 세대 양성을 위해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에는 도시의 사무실에서 수업을 하였지만 이제는 교외 지역에 대지 2천 여평 건물 100평의 2층 건물을 건축하여 신학교 교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확장 공사나 테라스 증축이 필요하지만 그런 대로 잘 하고 있습니다. 저를 모르시는 분들이 많이 있겠지만 전국 교회와 동역자 여러분들의 기도가 절실히 요청됩니다. 금년 3월부터 7월 19일까지 6개월 동안 안식년을 마치고 이제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맡겨주신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늘 기도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샬롬.
535 no image |선교단상(19)| 선교사를 돕는 교회 (2)_이기종 목사
편집부
3279 2011-08-02
선교사를 돕는 교회 (2) < 이기종 목사, 합신세계선교회 총무 > “다각적인 방안 모색 통해 선교사 돕는 방법 마련하길” 교회가 새로 선교사를 파송하거나 기존 선교사 후원을 안정적으로 지속하기 위해서는 선교비 후원방식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 선교비를 책정하고 후원하는 유형들을 살펴보면, 첫째로 교회(선교부 또는 선교위원회)가 총괄 주관하고 직접 송금하는 방식이 가장 많다. 그 다음으로는 구역(또는 목장)이 지정된 선교사를 책임지고 후원하는 방식을 취하는 교회도 더러 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교회의 공식적인 선교사후원채널 외에 개인적으로 선교사를 후원하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교회가 공식적인 교회채널을 통한 선교후원만을 고집한다면 공식적 채널을 통한 참여도가 떨어지거나, 교회와 성도 그리고 선교사 사이에 입장차이로 인해 미묘한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개인후원자들을 공식적 후원채널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한 예로 P교회는 교회중심의 공식적 후원방식을 근간으로 함과 더불어 선교사별 개인후원채널을 통한 후원방식을 병행하고 있다. 즉, 신규 파송선교사에 대하여 첫 번째 텀(약 4-5년) 동안은 교회에서 월 60만원을 후원하는 한 편, 도우미를 중심으로 하는 후원모금 활동에 의하여 개인후원자들이 월 1,000불 한도 내에서 후원 가능토록 한다. 두 번째 텀부터는 개인후원자들에 의한 후원은 중단되므로 선교사는 본국사역(안식년) 기간 동안 후원교회를 개발하여 부족한 선교비를 충당함으로써 협력선교를 강화한다. 도우미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개인후원자들은 신규 파송선교사를 새롭게 후원하게 되어 지속적으로 선교사 파송을 가능케 한다. 아울러 많은 교회들이 선교부 내지 선교위원회를 설치하여 교회의 해외선교업무를 담당케 하고 있다. 선교업무를 보다 전문적으로 수행하고 파송 및 협력선교사들을 잘 후원하고 관리하려면 선교위원회가 실질적으로 잘 운영되어야 한다. 선교위원 기도모임을 정례화하고, 전교인이 선교기도에 참여하도록 동기부여 한다. 선교위원회 운영규정을 제정하여 해외선교업무 전반에 대해 체계적으로 제도화 한다. 정규적으로 선교훈련학교, 선교교육, 세미나 등을 열어 중직자나 선교위원들의 선교에 대한 이해와 전문성을 증대시킨다. 선교위원과 위원장은 적임자를 선임하고 임기는 2년 이상으로 정하여 일관성과 연속성을 유지하면 좋다. 업무량 증가에 따라 선교담당 전임사역자와 간사를 둘 수 있으며, 선교위원회 내에 분과별 소위원회를 둘 수 있다. 특히, 선교위원회는 대학, 청년부를 지원하고 협력하여 선교 동력화 한다. 선교주일이나 선교주간을 정하여 전교인이 선교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헌신하도록 돕는 것도 좋다. 선교사들이 교회 여러 기관의 주일설교를 담당하게 하거나 선교사 초청 간담회 개최, 선교지 음식체험, 선교바자회 등 선교행사도 열 수 있다. 구역과 선교사를 긴밀히 연계하여 선교사들의 필요를 적절히 돕도록 선교사들을 구역별로 배정할 수 있다. 구역의 명칭을 아예 선교지명으로 변경하기도 한다(예: 탄자니아 목장). 귀국선교사를 구역모임에 초청하기도 하고 선교사 부모님께 어버이날 선물을 보낼 수도 있다. 선교사 가정의 경조사에 생일카드, 이메일이나 선물을 발송할 수 있다. 구역에서 선교헌금을 작정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선교지 환경은 한국보다는 아무래도 열악하고 위험하다. 근래에는 선교사 가족, 특히 부인선교사들이 암이나 중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선교사 한 가정이 여행자보험(사망, 상해, 질병)에 들려면 가족보험료가 년간 약 10-15만원이 든다. 파송교회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본국사역(안식년)으로 국내에 들어와 3개월 이상 편안히 머물 선교관을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이다. 현재 선교관 부족으로 1-3개월마다 이사하는 실정이다. 교회마다 선교관이라는 명칭의 건물이 존재하는 경우는 많지만, 정작 선교사들이 머물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선교사와 가족들의 건강을 살펴주고, 유사시 및 은퇴 후를 대비하여 조금이라도 챙겨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선교사들에게 퇴직금이나 은퇴 후 보장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아직 당연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선교사들 중에 월 약 10-15만원의 국민연금(사망, 퇴직) 보험료를 정기적으로 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선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후원해 왔는데, 이제는 선교사들을 위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책을 생각하고 시행해야 한다.
534 no image |선교단상(18)| 선교사를 돕는 교회 (1)_이기종 목사
편집부
3683 2011-07-06
선교사를 돕는 교회 (1) < 이기종 목사 · 합신세계선교회총무 > “지속적 선교 위해 안정적인 선교재정 확보되어야” 선교회 본부사역을 하다보면 교회들로부터 선교위원회 위원들과 중직자를 대상으로 교회가 선교사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를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선교적 교회, 선교 지향적 교회, 선교사를 돕는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말하고 싶은 내용이 많이 있겠지만 우선 교회가 지닌 선교적 본질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 신학, 교회, 심지어 그리스도인조차도 선교가 없다면 이 땅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선교가 빠진 신학은 성경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 없고 선교를 하지 않는 교회는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또 선교를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이 땅에서의 교회는 하나님의 비전(세계복음화의 비전)을 가져야 하는데 현재 상당히 많은 교회가 그 비전을 잃어버렸다”(패트릭 존스톤, 교회는 당신의 생각보다 큽니다. pp.38-51). 마땅히 선교지향적 예배와 설교, 그리고 기도가 회복되어야 한다. 선교가 교회 모든 부서의 중심이 되도록 일관성이 있어야 하며, 선교사적 삶을 지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일시 귀국한 선교사에게는 설교와 보고의 기회를 주어 모두에게 선교에 대한 도전의 계기가 되고 현장감을 가지도록 하여야하며, 선교사를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저 선교후원비만을 보내는 일에 그칠 것이 아니라 세계복음화의 진전, 선교 지역, 종족 등에 대하여 면밀히 조사 연구해 본 후에 교회가 분담해야 할 영역, 대상을 선택하고 역량을 집중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경기도 부천의 J교회는 C국의 야오족(族)에 집중하고 있으며, 경기도 일산의 Y교회는 최근에 이슬람권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다섯 가정의 이슬람권 선교사를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고비용 저효율의 프로젝트성 선교보다는 복음전도, 제자화, 현지지도자 양성에 중점을 두고 정책을 개발하여야 한다. 시작부터 현지교회 자립형선교, 현지인 지도력 개발에 주력하여야 건전한 현지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거나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단기팀을 해외선교지로 보내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전도훈련팀, 제자훈련팀, 선교헌신자 등과 함께 국내 외국인근로자 밀집지, 결혼이주자 사역지를 방문하는 것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국내에는 200여 국가에서 들어온 해외이주자가 120만 명에 이른다. 서울 한남동의 이슬람 중앙성원과 주변의 이태원 상가, 경기도 안산의 다문화 거리, 그리고 전국 주요 도시에 점차 늘어나고 있는 이슬람사원(모스크) 등을 방문하면 좋다. 양화진의 외국인 선교사 묘지, 강화도의 초기 교회, 용인시 양지 한국기독교순교자 기념관 등 선교유적지를 방문하는 것도 유익하다. 특히, 주일학교 유초등부나 중고등부는 이런 활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청소년 선교자원을 발굴하고 선교교육과 참여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예산을 편성할 때 선교재정과 일반재정을 분리하지 않고 있다. 방향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선교를 하려면 선교재정이 안정적으로 확보되어야한다. 그렇게 하려면 선교재정과 일반재정을 분리하여 예산을 편성함이 좋을 것이다. 매년 1회 전교인이 각자 선교헌금을 작정케 함으로써 참여의식을 고취시키는 면도 있다. 전체 예산대비 선교 예산비율 목표(예컨대, 30%, 60% 등)를 미리 설정해 두면 목표관리도 용이하게 된다. 선교재정을 집행할 때, 즉 선교사에게 선교비를 지출할 때에는 재정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도덕성의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단체(총회 합신세계선교회)를 통하여 송금해야 하며, 선교사 개인통장으로의 송금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533 no image |신앙수상| 성도의 가는 길_이은국 목사
편집부
3495 2011-07-06
성도의 가는 길 - 故 이치신 원로목사(용연교회)님을 기리며- < 이은국 목사 · 용연교회 > “앞서 가신 아버지의 유산인 ‘믿음’안에서 누리는 삶이 가장 소중해” 하늘나라로의 부르심에 대한 암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두어 달 전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올 봄에는 천국으로 가고 싶구나, 이제 살만큼 살았고 다만 부르심이 조금 연기되고 있을 뿐이야.” 그 후 3주 가량의 가벼운 병상생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셨던지 느닷없이 병원비를 계산하라는 것이었다. “아버지, 병원비는 후불로 되어 있어요, 아직은 계산을 안 하셔도 괜찮다고 합니다.” 강청에 못 이겨 병원비를 계산하고 3일 동안의 외출을 허락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 또 한 번의 힌트가 주어졌다. “이제 내 자리를 비워둘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입원할 수 있도록 연락을 취해라.” 집으로 돌아오신 다음날 아침 나를 부르셨다. “너 고생시키지 않으마! 아무래도 오늘밤은 못 넘기겠구나” 하시며 일일이 연락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번잡하게 말 것과 형제들한테도 죽기 전에는 미리 연락하지 말라는 부탁과 아울러 언제부터인지 이따금씩 모아둔 통장을 장례비용으로 보태 쓰라며 고스란히 넘겨주셨다. 무려 아흔 한 해 동안을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며 달려 온 지상의 마지막 밤 문득 아버지는 내게 예배를 드려달라고 부탁하셨다. 준비된 예배가 아닌지라 나는 아버지의 성경찬송을 가지고 가족끼리 드리는 즉석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 잠시 묵상기도를 드린 후에 찬송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였다. 그리고 말씀은 시편 46편 1-3절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주기도문으로 예배는 마쳐졌고 아버지는 아들 목사에게 각별한 인사를 하였다. ‘감사합니다!’라며……. “조금 전까지는 악한 자들이 멀찌감치에서 나를 보고 비웃고 있었는데 이제는 저들이 다 떠나가고 마음이 평안해졌구나!” 하시며 한 가지 부탁의 말씀이 있었다. 얼마 전 고장난 후에 새로 불을 밝힌 예배당 십자가 종탑을 꼭 한 번 보고 싶다며 손수 연약해지신 몸을 일으켜 외출할 채비를 하셨다. “잘 되었구나! 내친김에 동네 한 바퀴를 돌아 달라” 하시므로 늦은 밤 특별한 외출로 이어졌다. “오랜만에 속이 시원하구나!”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한 이 시간이 임종예배가 될 줄을 전혀 몰랐다. 그리고 이것이 아버지와 함께 하는 마지막 외출이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는 이따금 어눌해진 목소리로 말씀하시기를 “죽는 것이 유별난 게 아니라 너와 내가 이렇게 말하다가 죽는 게야. 이젠 됐다 돌아가서 자도록 해라…….” 불과 몇 시간이 흐른 후, 아버지는 은혜가운데 순식간에 하늘나라로 자리를 옮기셨다. 멀고 먼 지상에서의 모든 수고와 짐을 벗어버리고 평안히 주님의 품에 안기셨다. 주님이 불러 주신 마지막 날 밤은 아무런 고통도 없이 편히 주무신 후 일생동안 새벽기도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셨던 그 시간에 맞추어 잠시 앉아 계신 채로 “여호와여!” (함께 한 어머니를 향하여도 부탁하시기를) “여호와여 하라!”며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을 남기신 후 영원한 나라로 옮겨가셨다. 시편 116편 15절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는 말씀과 같이 아버지는 평소에 기도대로 더 없이 좋은 날, 바람 한 점 없이 따스한 날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아버지는 믿음의 길을 승리하신 후, 많은 성도들의 축복가운데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셨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늘나라로 부름 받으시던 그 날에는 아침부터 온 종일 감사의 노래를 읊조리셨다지요, 부럽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南下)하신 후 군용 따불백 하나로 시작하여 일구어 낸 복된 가정이 무엇보다 큰 재산이었다지요, 전쟁터에서 여러 차례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 포로 생활 중 은혜를 힘입었던 일들, 태평양전쟁 때 일제강제 징집생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 일들……. 어린 시절에는 예배당이 멀어서 아예 교회사택으로 이사해 살면서 믿음 생활하신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 때문에 목회자가 되었다는 아버지, 목회현장에서 함께 하신 숱한 도우심의 손길들……. 그 생생한 간증들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지만……. 흔치않은 금혼에 이르게 된 것 그리고 스물둘 저희 후손들 모두가 하나님의 복이요 은혜의 산물인 것을 고백합니다. 그토록 원하셨던 남북통일, 고향이 그리워서 가장 먼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고, 언제라도 달려갈까 아무런 소유도 없이 나그네의 삶을 사신 아버지, 언젠가는 북녘 황해도 신천 땅 아버지가 태어나신 곳으로 달려가 보렵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하다가…….’ ‘이 세상의 소망 구름 같고 부귀와 영화도 한 꿈일세……’를 즐겨 부르셨던 아버지. 앞서 천국가신 아버지가 남겨주신 가장 귀한 유산(遺産), 믿음 안에서 누릴 무한한 은혜의 삶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로 축복하셨던 아버지의 삶을 새삼 되새겨봅니다!
532 no image |신앙수상| “천국 여권 챙기세요!”_김영숙 사모
편집부
3702 2011-06-22
“천국 여권 챙기세요!” < 김영숙 사모, 일산새하늘교회 > “세상일 분주해도 천국 여권만은 챙기며 살아가야지요” 그날은 미국에 사는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려던 날이었습니다. “여권 좀 보여주세요.” “네!”하고 공항 창구에 있던 직원에게 대답하는 순간 ‘아차!’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서야 여권을 아침까지 가방에 잘 챙겨놓았는데 잠깐 확인할 것이 있어 꺼냈다가 책장 위에 놓고 온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나 집에 다녀오기는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탑승시간을 1시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부랴부랴 교회 사무실에 있는 부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우리 집에 있는 여권 가져오기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갓 부임해서 우리 집도 아직 모르고 있는 그 목사님은 우리 집에 가서 번호 키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여권을 찾아 30분 안에 공항에 도착해야 하는 피를 말리는 것 같은 작전을 수행해야만 했지요. 그는 너무도 긴박한 그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차를 과속으로 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체크인을 마친 텅 빈 공항 안에서 여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나는 이것이 부디 현실이 아닌 꿈속의 이야기이기를 바랬습니다. 사실 그날 아침부터 비행기에 대한 울렁증과 불안감 때문에 우왕좌왕하더니만 결국 그런 해프닝이 발생한 것이었지요. 몇 년 전 사랑하는 동생의 뇌종양 수술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급하게 한국으로 오는 동안 극심한 슬픔과 피로감으로 비행기 안에서 안절부절 불안해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비행기만 타려고 하면 비행공포증이 생겨 힘들었는데 결국 그런 일이 생기고 만 것이지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보이는 목사 사모에게 그런 불안감은 상관없는 줄 알고 살았는데 그 불안감이 결국 나를 지배하고 말았습니다. 여권을 집에 놓고 오는 그런 어리석은 실수에 나만은 예외일줄 알고 속으로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곤 했는데 나 역시 그 대열에 서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출국 창구 업무가 마감하기 직전에 여권이 도착했습니다. 남편은 이 기가 막힌 현실 앞에 말을 잃고 있다가 출국장으로 향하는 나를 위해 기도를 하는 순간 목이 메어 목소리가 떨리기까지 했었지요. 그런 남편 앞에서 불안한 음성으로 내가 다시 말했습니다. “나, 미국 안 가면 안 될까요?”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편을 뒤로하고 결국 느릿느릿 출국하는 곳으로 내가 들어서자 남편은 주먹으로 자신의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게이트로 들어갈 수 있었던 나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막상 비행기를 타고나서는 불안감이 사라지고 예수님이 나를 품에 안고 하늘은 나는 것 같은 참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천국 갈 때 멀미할까봐 미리 하늘을 나는 훈련을 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요. 그 포근한 주님의 품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연신 내 볼 위로 흘러 내렸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지내온 것이 모두 주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교만했고 시간을 낭비한 죄, 용서하지 못한 죄, 의무적으로 사역한 죄 등이 끝없이 꼬리를 물고 생각이 나서 회개 기도를 했고 그 때마다 주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그 순간 미국에 가는 여권은 부목사님이 가져다주었지만 구원의 여권을 가져오지 않아 천국 문 앞에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동동거린다면 누가 대신 가져다 줄까하는 상상을 해보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얘야!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 천국을 그렇게 전파했으면서 정작 네가 제외되어 천국에 올 수 없다면 그것처럼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니. 얘야! 아무리 세상 일이 분주하다 해도 천국여권만은 꼭 챙기며 살아라. 천국에서 나는 너를 꼭 만나고 싶단다.” 그것은 비록 현재의 사역이 부진할지라도 나의 남은 사역에 충성을 다하라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지상에서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나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로 사역 부진아를 위한 보충수업은 그렇게 하늘 높은 곳에서 이루어졌지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531 |초대시| 삼십 년 은혜 (합신 교단 30년에)_임만호 장로 파일 (1)
편집부
4020 2011-06-08
530 no image |목회수상| 자신의 자유까지도 부정할 수 있는 자유_장창수 목사 (1)
편집부
3299 2011-06-08
자신의 자유까지도 부정할 수 있는 자유 < 장창수 목사 > “신앙과 윤리의 최고 경지는 자기 부정으로부터 나와” 성공과 출세가 가장 큰 가치이며 인생의 목적인 유교 문화권에서 일반적인 사상을 가진 지도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자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성공이 가져다 주는 달콤한 열매를 즐겨야 한다는 이기적인 소원이 지나치게 강하며,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권위와 권세를 초법적 또는 탈법적으로 사용하려 한다. 이런 잘못된 노력과 자세는 특히 정치 지도자들에게 역력하다. 헌법은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국방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자녀들만은 이 의무에서 면제시키려 한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를 완전히 비웃는다. 이런 통치자와 지도자는 흐르는 시간과 함께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인해 서서히 부패해 간다. 쉽게 말하면 ‘자기 부정’을 모르는 소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자신의 권리를 유보시킬 수 있는 ‘자유자’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보다 한발 더 앞서 갔다.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대속물로 드렸다. 예수님이 그려셨던 것처럼 사도 바울도 ‘자유자’였다. 그도 예수님처럼 한 걸음 더 나가야 했다. 그는 자신의 자유마저 부인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 위함이었다. 유교 문화권의 통치자나 지도자는 도저히 이를 이해할 수 없다. 신앙의 최고 경지에 달했다고 생각할 때 흔히 목회자를 비롯한 성도는 마치 다 끝난 듯이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 때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과 칭찬을 주고 그는 이를 즐기며 은근히 자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이다. 이런 식으로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기독교는 이보다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처럼 수양(修養)을 통해 어떤 도덕적 경지에 도달함을 그 목적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독인은 진리의 깨달음을 최고의 경지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본(本)을 따라 자신이 도달한 자유의 경지마저 부인했다. 그리고 기쁘게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었다. 더 높은 차원의 헌신과 봉사로 나가기 위함이다. 이것은 성숙한 신앙 경지와 그것이 주는 만족감 자체를 부인하고 자신을 낮춤으로 비로소 가능하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자유를 부인하고 스스로 종이 된 목적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자기 부정에 대한 노력이 부족하다면 성도들이 그 만큼 영혼 구원에 소홀할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바로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에 장애 내지 방해가 될 수 있다. 이를 안 사도 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자신을 낮추며 기꺼이 종이 되었다. 그는 율법주의자에게 그와 같이 되었고, 율법폐기주의자에게도 그와 같이 되었다(고전 9:20-21). 그리고 할례자에게도 그와 같이 되었고, 무할례자에게도 그렇게 되어주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철저히 배우고 실천했다(빌 2:6-8). 주 안에서 얻은 자신의 자유마저 부정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신앙과 윤리의 최고 경지이다. 누구에게 이것이 가능한가? 사도 바울이 답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그리스도를 위하여 성도들의 종이 되려면 자신의 자유마저 부정할 수 있는 자유를 소유해야 한다. 이 때 비로소 주님이 원하는 진정한 사랑의 헌신과 봉사가 가능하다. 이렇게 자기 부정은 성화와 목회의 최절정이다.
529 no image |제언| 정론지로서 개혁신보의 변신을 기대하며_장덕순 장로
편집부
3454 2011-05-25
정론지로서 개혁신보의 변신을 기대하며 < 장덕순 장로 · 화평교회 > “바른 기독언론 만들어 감에 있어 물질과 기도 아끼지 않을 것” 내년이면 기독교개혁신보사가 30주년을 맞이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나이가 삼십이면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혈기 왕성한 시기입니다. 우리 신앙의 멘토가 되시는 정암 박윤선 박사님의 줄기에서 시작하여 가지를 맺은 합동신학대학원과 개혁신보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봅니다. 이제 개혁신보는 그동안 많은 분들의 수고와 노력을 거처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30년을 버틴 것이 아니라 이제 더 큰 바다를 향해 제2의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음을 지면을 통하여 느끼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다짐을 하면서 한국 교계에 가장 권위 있고 인정받는 개혁신보가 되기를 충심으로 바라고 기도드립니다. 필자는 화평교회(담임목사 김병훈)의 장로직분을 맡아 섬기는 장로로서 그동안 개혁신보를 읽으며 느끼고 바라는 몇 가지를 말씀드려 봅니다. 1. 귀한 말씀과 귀한 자료를 소수만의 사람들이 읽는 것이 아쉽습니다. 신앙에 도움이 되는 말씀이 많은데 많은 교우님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개혁신보를 볼 때마다 느끼는 마음입니다. 그동안 주위 교우님들께 알리지 않은 나의 부족함부터 고백하며 이 시간 이후로는 개혁신보의 홍보맨이 되어보려 합니다. 더불어 개혁신보사에 소견을 피력해 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을 거란 추측도 하지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 2. 좀더 많은 볼거리와 더 넓은 정보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구도도 한번씩 변화를 주고 신문은 항상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개혁신보에서 나오는 사람들만 나온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정보를 공유하는 하나의 소식 알림지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물론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다른 각도에서 독자가 볼 때 더 새롭고 관심 있는 방향으로 꾸몄으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볼거리와 읽을거리를 신도들과 일반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이면 더욱 좋고(현재도 저는 만족합니다), 테마별 또는 전혀 다른 주제이지만 새롭고 흥미 있으며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주제면 더욱 좋고, 문장이 단순하고 짧고 누구나 금방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씨체와 여백의 미까지 살린다면 좋을 듯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 같지만 가장 쉬운 것부터 하나하나 바꿔간다면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3. 성도들과 청년층 또는 새신자 대상의 특집시리즈 등으로 독자층을 넓혀야 합니다. 총회, 노회, 신학교, 각교회 단체 관련자와 목회자와 장로님들이 대부분의 구독층인 점을 감안하면 갑작스런 변화가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사의 다양화와 말씀의 올바른 해석 등 일반 성도들의 읽을거리가 풍성해야 하고, 심지어 중고등부와 청년부에게도 도움이 되는 정보와 신앙의 어려운 문제풀이와 궁금증들의 답변 등등 다양화가 필요합니다. 직장생활에 대하여, 취업에 대하여, 젊은이들의 고민이 무엇이며 그 해답은 무엇이고, 가장 관심이 있는 혼인에 대한 기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방안 등도 필요합니다. 교회의 생활에 대한 실질적인 문제들을 흥미 있게 특집 방식으로 꾸려나간다면 좀더 많은 호감과 구독자가 생겨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교회마다 일어나는 문제점들(식당, 주차, 공간 사용, 구역모임 등등)을 구석구석 들춰내어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며 해결점을 찾아가는 조그마한 일들이 모여서 많은 구독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무너지는 가정과 이혼과 집안의 가장에 대한 문제, 그리고 현대인 병에 대한 대처방안과 우울증, 자살 등에 관한 해결책 등등 다양한 문제들이 주변에 많다고 봅니다. 한번쯤 이런 새로운 시도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4. 위의 모든 문제가 우선 개혁신보사의 재정이 든든하거나 아니면 구독률이 높아지든지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선은 많은 교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와 재정 협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말 이 시대는 올바른 신학과 올바른 목회자가 필요한 때이고, 온갖 거짓과 꾀임으로 잘못 이단과 마귀에 휩쓸려 갈 수 있는 때이기에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정보지가 곧 기독교개혁신보입니다. 우리 모두가 나서 기독언론으로 교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데 물질과 기도를 아끼지 않았으면 합니다. 신문을 통하여 전도와 선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일반 교우들의 사회 생활이 개혁신보를 통해서라도 우리의 신앙노선과 복음의 진리를 한번 더 점검하고 깨우치게 된다면 신문의 도리로서는 이보다 더 큰 바램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소리를 높이고 교계의 힘을 키우는 길은 개혁신보의 발전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동안 30년 동안 기독교개혁신보사를 위해 수고해오신 많은 분들에게 찬사와 격려와 감사를 보내며 이 땅에 가장 바로 서는 기독언론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528 no image |목회수상| 우물가 사랑_이진수 목사 (1)
편집부
3544 2011-05-11
우물가 사랑 < 이진수 목사 · 은혜교회 > “일어서는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짜리 철부지였다. 우리 집 뒤뜰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위에서 수면까지 어른 키로 네다섯 길은 족히 넘었던 것 같다. 그렇게 깊다보니 수면은 저 멀리서 어두컴컴하게 보였다. 문제의 그날,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은 그 우물가에서 무엇인가를 씻고들 계셨다. 우물가에는 이야기꽃이 만발했다. 호호호… 깔깔깔… 그러나 나는 너무 심심했다. 우물 위에 어른 허리쯤 높이로 세워진 둥그런 우물 턱을 빙빙 돌았다. 그것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두드려 보기도 했다. 빈 두레박을 끌어올려 보기도 하고 내려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두레박에 물을 담고 조금 끌어올리다가 놓았다. 그리고는 “엄마!”하고 소리치면서 재빨리 우물 턱 뒤에 숨었다. 우물 턱 위로 “풍덩!” 두레박 빠지는 소리, “어머나! 세상에!” 아주머니들 놀라는 소리, 후닥닥거리는 소리… 너무 재미있었다. 일순간에 모든 관심을 돌려놓은 것이다. 어머니도 놀라게 만들었고 아주머니들도 놀라게 만들었다. 대성공이었다.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아 웃으며 일어났다. “헤헤헤…” 그러나 일어서는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어머니가 우물 턱 위에 올라서 계신 게 아닌가! 막 우물 속으로 뛰어드시려는 순간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어머니는 벼락같이 화를 내셨다. 물론 나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내 등뒤로 기관총탄처럼 수없이 날아오는 어머니의 성난 목소리… 나는 그때의 일을 종종 생각한다. 어쩌면 어머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우물 속으로 뛰어들려 하셨을까? 어머니는 수영을 못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도 내가 우물에 빠진 줄 아시고 앞뒤 생각도 해보지 않고 바로 우물 턱 위로 올라서셨던 것이다. 그때 만일 어머니께서 우물에 빠져서 잘못되기라도 하셨더라면 어쩔 뻔했나.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나는 그때 확실히 알았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당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물속에 빠져서 당황하고 고통스러워 할 아들 생각에 가슴이 불타는 것 같아 이것저것 생각하실 겨를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철이 들면서 문득문득 그 사랑이 생각날 때마다 내 가슴은 뜨거워졌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아무리 역정을 내시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나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확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 행동 하나 하나가 다 나를 사랑하는데서 나옴을 알았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부모님의 의견과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늘 부모님의 의견을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도 아프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그 사랑은 곁길로 가려는 나를 언제나 그렇게 붙잡아주었다. 우물가에서 확인된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는 말씀이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 영원한 사망에서 나를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기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그 사랑! 지옥의 심연에서 나를 건지시기 위해 갈보리 십자가로 뛰어드신 예수님의 그 사랑! 주님은 그 사랑을 어머니를 통해 그렇게 가르쳐주셨다.
527 no image |선교단상(17)| 30주년 선교사대회를 마치고_이기종 목사
편집부
2989 2011-05-11
30주년 선교사대회를 마치고 < 이기종 목사 · 합신세계선교회 총무 > “한국 선교사 2만 명 시대 걸맞은 정책 개발되어야” 이번 교단 30주년 기념대회 및 선교사대회 참석을 위해 19개국에서 90여명의 선교사들이 고국 땅을 밟았다. 3박 4일 동안 지나온 30년을 뒤돌아보고 의미를 새기며 함께 감사와 축제의 시간을 보냈다. 비록 선교지와 사역 형태는 다를지라도 모두가 한 가족임을 확인하는 복된 시간이었다. 아울러 변화하는 세계선교상황을 살펴보며 미래 발전방향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한철호 선교사의 ‘세계선교상황과 한국 선교의 도전’에 대한 강의와, 유병국 선교사의 ‘서구와 이슬람 중심으로 본 21세기 세계선교동향’에 대한 강의를 들음으로써 상황인식과 변화에 대한 도전을 다짐할 수 있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지내던 선교사들을 만나보는 것도 큰 기쁨이지만 국내 목회자들과 장로님들을 만나서 교제하는 것 또한 더 할 나위 없는 복이었다. 개막식과 대회 기간 중 참석하신 분들이 선교사들을 열렬하게 맞아주시고 반가이 영접해 주셔서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다. 특히, 개막식 때 선교사들이 각자 섬기는 민족의 전통 의상과 국기를 들고 입장하는 모습은 요한계시록 7장 9절의 모든 열방이 주를 찬양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감격을 갖기에 충분했다. 선교포럼 시간에 우리 교단 선교부의 초석을 놓았던 김명혁 목사님과 박병식 목사님, 그리고 PMS 이사님들께서 함께 자리를 같이 해주셔서 큰 격려가 되었다. 김정식 목사님, 이선웅 목사님, 임석영 목사님 등 ‘말씀사역 선교회’ 회원들이 선교 프로그램 중에 함께 해주시고, 특히 간식으로 안흥찐빵을 사 오셔서 섬겨주시니 참석한 선교사들 모두가 행복해했다. 선교지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사역의 부담을 잠시나마 잊고 재충전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셋째 날 오후 4시부터 진행된 선교사 사역나눔 및 친교의 시간은 밤11시까지 이어졌다. 선교사들의 사역이 얼마나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지, 그들이 얼마나 애쓰고 수고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역소개가 끝나자 서로 얼싸안으며 격려하고 축복하는 시간은 감동적이었다. 대회를 끝내고 마치 선교지가 고향인양 다시 사역지로 돌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선교사를 돕는 본부, 선교사를 돕는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한국 선교계는 선교사 파송에 열심을 내어 파송 선교사 2만 명 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현재 PMS 소속 파송 선교사는 109가정 212명이며 협력선교사, 인턴, 동역선교사들을 모두 합하면 236가정 432명으로, 우리 교단의 교회 수, 성도 수를 감안할 때 상대적으로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다고 할 수 있다. ‘파송 선교사 2만명 시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교계에는 파송 전 훈련, 현지 멤버 케어, 위기관리 등 산적한 미결 과제들이 있다. 안식년으로 국내에 들어와도 머물 수 있는 선교관이 많지 않아 1개월마다 짐을 꾸리고 이사해야하는 실정, 선교 후원비 부족, 자녀교육 문제 등 우리 선교회 역시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과제들이기도 하다. 이번 대회를 통하여 지난 30년간 우리 교단은 타 교단에 비해 선교사역을 위해 상대적으로 많은 인적, 물적 투자를 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위의 과제들은 선교의 새 시대를 열어갈 또 다른 도전임을 깨닫는다. 그간 우리 교단 교회들이 보여준 뜨거운 선교열정과 후원, 그리고 기도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526 no image |신앙수상| 하나님만이 전능자_임종태 집사
편집부
3495 2011-04-06
하나님만이 전능자 < 임종태 집사 · 대림교회 > “전능자이신 하나님과 손잡을 때 예수님 안에 거하게 돼” 십 수년을 한 이불 덮고 몸을 맞대고 부부(夫婦)의 연(緣)으로 살았는데도, 어떤 때는 “자기는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요. 그렇게 몰라줄 수가 없어요”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 그때의 서운한 마음을 사람들(남편, 자식)을 대상(對象)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면 안 된다. 그때는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어 주시는 주님을 찾아야 한다(시 17:8). 그리고 생수 같이 흐르는 아름다운 찬양을 불러야 한다. “사랑합니다.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사랑한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하시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네 마음을 알 수 있겠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크게 기대하지도, 요구하지도 말고 항상 네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찾으려므나(시 46:1). 오직 성령님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라고 말씀하신다. 젊은 세대의 이혼률이 급증하는 것도 남편의 온전함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능력 있고, 건강하고, 키 크고, 미남이고, 성격 좋고, 학벌 좋고 이 모든 것을 갖춘 자는 세상에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예수님 외에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 상대의 허물을 보기 전에 나의 허물을 바라보고 개선하는 마음이 더욱 필요하다(마 7:12). 목사님들도 가끔은 파랗게 멍든 가슴을 끄집어 내보이고 싶을 때가 있다. 억울하게 욕을 먹고, 이유 없이 비난받고, 말도 안 되는 누명까지도 뒤집어쓴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똑같이 대적할 수는 없다. 한 영혼이라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다 끌어안고 가야하기 때문이다. 목회 사역의 아픔과 고통을 누가 다 알아줄 수 있을까? 부교역자? 장로님? 사모님? 천부당 만부당 어림없는 이야기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목회가 힘들 때에는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말고 나에게 직접 이야기하려므나, 기도로...” 오직 하나님만이 위로자요. 전능자이다. 성령 안에서의 베드로와 세상 밖의 베드로를 관찰해보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이니라” 말씀하실 때 성격 급하고 덤벙되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1-23)라고 하셨다. 베드로가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한 것인데 사탄아 물러가라니? 아니 그럼 자기 선생이 죽으러 가는데 “주님 잘가세요”라고 말할 제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조금 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했을 때는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 하면서 칭찬하더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행동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조금 전에는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갔지만 나중 것은 베드로 자기 생각으로 이야기하였으므로 당연히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성령님 안에 있어야만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영하 10도 이하의 날씨가 40일 이상이나 계속 되었다. 눈도 1m 이상 내린 지역도 있었다. 내가 섬기는 교회는 사는 곳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금요심야예배를 마치고 늦은 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릴 때면 찬바람이 더욱 세차게 분다. 그러나 찬바람보다 더 가슴을 시리게 하는 것은 외로운 고독이다. 아무도 내 몸을 대신하여 아파할 수 없고, 또한 죽음의 길에 같이 하여 주는 자도 없다. 교회 안에서조차 마음을 열고 얘기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럴 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삶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죽음과, 죽음 뒤에 오는 삶에도 영원히 함께 하여 주실까 하는 깊은 상념에 빠져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 말씀을 확실히 믿어야 할 것이다. 죽음 뒤에 오는 영생의 삶이 영광되기를 소망하면서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갈망하며 간절히 기도드린 적이 많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여 외로울 때에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 같다.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우리의 삶이 외로울 때 성령님과 대화가 더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태어나서 살다가 세상을 떠날 때에 남기고 가는 것은 무엇일까? 수고와 슬픔 그리고 썩어질 육신, 그것이 전부이다.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나의 것은 하나도 없다. 시간도, 물질도, 육신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영혼, 육신, 시간, 물질 등 이 모든 것을 잘 사용하다가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돌려드리고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 전파는 영원토록 생명의 씨앗이 되어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는 주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표현 할 때 곧장 손을 끌어들여 말하기도 한다. ‘누구와 손을 잡았다. 누구와 손을 끊었다. 그 일에 손을 씻었다.’ 그렇다. “외로울 때 하나님께서 내 손을 잡아주셨다.” 이렇게 외치고 싶다. 전능자이신 하나님과 손을 잡으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된다.
525 no image |기고| 은퇴목사의 신분과 권리_김 훈 목사 (22)
편집부
5448 2011-04-06
은퇴목사의 신분과 권리 < 김 훈 목사, 한누리전원교회 원로목사 > 최근 은퇴목사(隱退牧師)에 관련된 법조문에 관한 총회치리협력위원회의 법 적용과 해석을 두고, 관련법을 은퇴목사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쪽으로 적용하고 해석한 위원회의 판단이 옳았다는 쪽과 은퇴목사가 더 빠르고, 완전하게 물러나게 하여 세대교체를 촉진시키는 쪽으로 적용하고 해석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인데, 반대로 한 것은 잘못이라는 쪽 사이에 논쟁이 있다고 합니다. 1. 은퇴목사의 신분과 권리에 대한 문의와 위원회의 답변 문의의 요점은 시무목사가 없는 교회에 후임목사를 청빙할 때까지 섬길 임시당회장으로, 은퇴한 그 교회의 원로목사를 파송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필자는 조목(條目)이 ‘당회장’인 정치 15장 3조 가운데 항목(項目)이 ‘임시 당회장’인 3항(임시 당회장은 시무목사가 없는 지교회가 목사를 청빙할 때까지 노회에서 작정한 목사이다. 노회에서 작정하지 못하는 때는 그 교회 혹은 당회가 노회 소속 목사 중에서 수시로 청할 수 있다)과 정치 16장 3조 ‘노회 회원 자격’(각 지교회에서 시무하는 목사와 원로목사와 공로목사와 총회와 노회에 속한 기관 사무를 위임받은 목사는 회원권이 있고, 그 밖의 목사는 노회에서 투표권이 없으나, 위원회에서는 투표권이 있고, 총회에 파견되는 총대권도 있다)에 따라서 노회 소속 은퇴, 원로목사인 모씨를 임시 당회장으로 작정한 것은 적법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정치 5장 4조 목사의 직임상 칭호 13항(은퇴목사; 연로하여 은퇴하였거나 혹은 특수한 사정으로 노회에 사면서를 제출하여 지교회 시무 사면이 된 목사인데, 노회의 회원권은 있으나, 지교회 치리권은 없다)을 들어 은퇴목사는 치리권이 있는 임시당회장이 될 수 없다고 쪽으로 해석하여 이견을 낸 분도 있었습니다. 2. 정년제의 역사적 배경과 목적(취지) 1) 근로권(勤勞權)은 신부적(神賦的) 권리임 근로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일 처음 주신 신부적(神賦的) 권이며, 인생의 목적과 사명 성취를 위하여 필수적인 기본권이며, 인간 생존(生存)과 행복한 삶을 위하여 필수적인 기본권이므로 지켜야 하고, 지켜주어야 합니다(창1; 26-28. 2;15). 2) 민수기 8장 25-26절의 취지 정년제와 관계가 있다고 할 유일한 성경인 민수기 8장 25-26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25절은 50이 넘으면 회막과 성막 기구들의 운반과 설치와 철거, 제물을 잡는 등의 힘든 일들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뜻이지, 직무로부터 완전히 물러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26절은 이미 20년 이상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해온 50이 넘은 레위인들은 이제부터는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 곧 후임들 교육이나, 회막에서 일하는 후임들 곁에서 그들이 직무를 잘 수행하도록 감독 혹은 협력하는 일을 하라는 취지이지, 직무에서 완전히 물러나 그저 쉬라는 뜻이 아닙니다. 3) 우리나라의 정년제 조선시대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가족에게로 돌아간(致仕) 70이 넘은 관원들에게 봉조하(奉朝賀)라는 칭호와 봉록(俸祿)을 주면서 자문 역할을 맡기고, 기로소(耆老所)라는 기구를 만들어 예우하였습니다. 필요하면 70이 넘은 원로에게 왕이 궤장(?杖)을 하사(下賜)하며 자문하여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따라서 은퇴목사의 완전한 은퇴를 종용하는 것은 부덕(不德)한 풍조입니다. 4) 근대 서구(西歐)의 정년제 1889년,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퇴직자를 위한 연금제도와 함께 정년제를 도입하고, 평균수명이 45세였던 당시에 정년을 65세로 정하므로 정년제가 노동자의 근로권과 퇴직 후의 생활을 보장해 주는데 목적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1986년, 미국은 정년제를 고령자의 근로권의 제약과 차별 법으로 보고 폐지하고 퇴직하여 연금을 받으면서 휴식할 것인지, 근로권을 계속 행사할 것인지를 본인이 선택하게 하고 있습니다. 대개는 65세 전에 퇴직하므로 정년제가 실시되고 있는 효과와 함께 원하는 사람은 70이 넘도록 일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은급제도를 마련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괄적인 은퇴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일입니다. 5) 현대 한국 기업의 정년제 성장기의 한국 기업에서는 근로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일정한 기간의 근로권을 보장해 준다는 의미의 정년제를 도입했는데, 1980대 후반부터 경기가 침체하게 되자 기업 성장의 주역이었으나 이제는 고액임금을 받는 노년의 경력자들을 퇴출시키려는 기업가와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청년의 반발을 무마해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치가들이 합력하여 정년제를 노년을 퇴출시키고, 청년을 유인하는 쪽으로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은퇴목사에 관한 법을 노년목사들을 더 빨리, 더 완전하게 물러나게 하는 쪽으로 적용하고 해석하는 것은 동기와 목적이 세속적이라고 생각됩니다. 6) 합신 교단의 정년제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고신 교단이 1966년에 처음 70세 정년제를 채택하였고, 통합교단은 1975년에, 합동교단은 1991년에 도입하였습니다. 합신에서는 1982년 제67회 총회에서 70 정년제를 채택하자는 수정안이 많은 토론 끝에 부결되었다가, 1996년 81회 총회에서 채택되었습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67회 총회 때는 정년이 가까운 선배들이 세대교체와 교회성장이라는 실용성(實用性)을 내세워 정년제를 찬성하였고, 갓 40이 된 필자 또래들은 정년제가 성경적 근거도 없고, 신부적(神賦的) 인권 침해며, 목회는 젊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등의 명분(名分)을 내세워 부결시켰다는 것과 81회 총회에서도 정년제가 곧 적용될 1세대와 필자 같은 2세대의 찬성으로 반대가 없이 채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미덕과 전통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일입니다. 3. 조기은퇴(早期隱退)와 완전은퇴(完全隱退)를 주장하는 잘못된 풍조 어느 목사님은 다음의 이유를 들어 목사의 조기은퇴와 완전은퇴를 촉구하였습니다. 장기 목회를 하면 절대 권력을 형성하게 되고, 교회 개혁에 장애가 되며, 높은 사례금 때문에 교회 재정에 부담이 되고, 후배들이 일할 기회가 늦어지게 되고, 세속인과 달리 목사들만 70 정년을 고집하면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모든 것을 바쳐 교회를 개척하여 38년을 사역하므로 경륜은 최상의 상태에 도달됐고, 체력과 교인의 지지가 여전했으나, 38년 시무한 제가 신선(新鮮)함이 필요한 교인들과 일터를 찾는 후배를 위하여 물러나는 것이 건덕(健德)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만 65세에 은퇴한 저에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대개 은퇴 후에 생활 걱정은 없고, 오라는 곳은 많을 것 같은 저명(著名)한 분들 아니면, 일터가 필요한 젊은 목사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명의 연장으로 생긴 문제의 해결책을 조기은퇴에서 찾으려는 것이 성경적인가? 이제야 비로소 목회에 전념할 수 있게 된 노년목사들, 도시 변두리와 농어촌에서 목회하여 은퇴하면 갈 곳도, 오라는 곳도, 생활 대책도 없는 무명(無名)의 노년 목사들을 배려하지 않은 그런 주장이 신앙적인가, 혹시나 인기주의는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4. 은퇴목사는 임시당회장도 될 수 없다는 주장의 잘못됨 정치 5장 4조 13항 ‘은퇴목사는 노회의 회원권은 있으나, 지교회 치리권은 없다’ 중에서 ‘치리권이 없다’는 단서조항을 은퇴목사가 임시당회장도 될 수 없다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이유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법 적용을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임시당회장에 관한 문제는 조목과 항목이 당회장인 정치 15장 3조(당회장) 3항(임시당회장)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한데, 정치 5장 4조(목사의 직임상 칭호)의 13항(은퇴목사)을 적용한 것은 잘못입니다. 둘째, 법의 배경과 취지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정치 5장 4조 13의 ‘치리권은 없다’는 것은 은퇴목사가 노회의 결의로 당회장권을 받아서 부임한 시무목사가 있는 교회의 당회에 참견하는 것을 막기 위한 단서조항이지, 시무목사가 없는 교회의 임시 당회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셋째, 시무목사의 당회장권과 임시 당회장의 당회장권을 혼동한 때문입니다. 정치 5장 4조 13의 단서조항은 은퇴목사는 지교회의 청빙과 노회의 결의로 부임하여 사면할 때까지 당회장권을 행사하는 시무목사와 같은 치리권은 없다는 뜻이지, 지교회가 목사를 청빙할 때까지만 당회장권을 행사하는 임시 당회장도 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넷째, 총회 총대도 될 수 있는데 임시 당회장이 못 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정치 16장 3조에 따르면 은퇴목사는 총회 총대도 될 수 있습니다. 보다 큰 치리회인 총회 정총대도 될 수 있는 노회원이 임시 당회장은 안 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다섯째, 법의 목적인 억강부약(抑强扶弱)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은퇴자에 관한 법은 그 때문에 약자가 된 은퇴자의 신분과 권리를 보호하는 쪽으로 해석해야 됩니다. 관련법을 은퇴목사에게 불리하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약자를 배려하는 성경(출 20:22-23:19 외)은 물론 모든 법 정신에도 어긋납니다. 여섯째, 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정년제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는 교인(교회)과 후배목사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마음으로 은퇴한 목사의 권리를 더욱 축소하려 하는 것은 비윤리적입니다 일곱째, 임시 당회장으로는 은퇴목사가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시무목사가 없는 교회의 임시 당회장으로는 본인이 청빙을 받으려는 사심이 있을 수 없고, 주일 오전과 저녁, 수요일까지 봉사할 시간이 있고, 직무를 원만하고 권위 있게 해결해 줄 경륜이 많은 은퇴목사가 가장 적합합니다. 따라서 은퇴목사는 임시당회장이 될 수 없다는 해석은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맺는 말 근로권은 신부적(神賦的)인 것으로서 인생의 목적 성취, 존재 이유의 증명, 성령의 은사와 평생 습득한 전문지식과 경험의 활용, 인간교제의 폭 확대, 사회공헌과 인정받음, 생존에 필요한 것의 획득, 심신의 활력과 행복을 누리는데 필수적인 조건이요 권리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처럼 중요한 권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목사들은 교회(교인)와 후배의 건덕(健德)을 위하여(고전 9:12; 10:33), 그 모두를 희생하는 정년 은퇴법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법을 은퇴목사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덕(不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세례 받음으로 교인이 되면 직분에 관계없이 죽거나 출교 전에는 평생 교인이듯, 목사는 교회의 청빙과 노회에서 안수 받음으로 목사가 되면 죽거나 사직 혹은 면직되기 전에는 평생 목사이며 노회 회원입니다. 따라서 노회 회원권 행사는 물론 교회가 원하면 교회 시무도 평생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양보한 은퇴 목사를 교회와 노회와 총회에서 더 빨리, 더 완전하게 밀어내는 쪽으로 법을 보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연륜과 권위가 있는 노년목사를 배제하므로 교회에서 자기 힘을 키우려고, 자기들이 더 빨리, 완전하게 노회와 총회의 지도자가 되려고, 자기들이 더 빨리, 더 쉽게 목회지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그런 주장을 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개혁교회에는 항상 목사가 있어야 하며, 대의정치를 성경적이라고 믿는 장로교회에는 항상 당회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노회는 시무목사가 없는 교회가 생기면 빨리 목사를 청하도록 지도하고, 당회장이 없는 교회가 생기면 빨리 임시 당회장을 파송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시무목사(당회장)가 없어진 교회가 시무목사를 청빙할 때까지 섬길 임시 당회장을 작정할 때, 조목(條目)과 항목(項目)이 뚜렷한 정치 15장 3조(당회장) 3항(임시 당회장)과 정치 16장 3조(노회회원의 자격)에 따라 그 노회 소속 은퇴목사요, 원로목사인 모씨를 임시 당회장으로 빨리 파송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필자는 조기 은퇴하여 원로목사가 된 지 만 4년 동안 딱 한 번, 후임목사의 요청으로 그것도 해당 안건의 자문만 하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밖에는 어떤 회의에도 참석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 일로 후임목사나 장로들에게 전화한 적도 없었습니다. 고맙게도 후임목사가 자주 상담 전화를 하지만, 가급적 해답을 주는 것도 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 70이 되는 내년에는 노회와 총회의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물론 후배들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되면 참석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나 노회에 속한 교회의 당회장이 저를 대리 당회장으로 청하거나, 노회가 시무목사가 없는 교회의 임시 당회장으로 파송한다면 은퇴목사의 권리요 의무로 알고 순종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후배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혹시라도 우리 합신 교단이 은혜와 덕을 잃게 될까봐 걱정하는 노파심으로 자기 생각을 밝힌 필자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524 no image |기고| 우리는 ‘소진화小進化’라는 용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_이한길 청년 (76)
편집부
4917 2011-04-06
우리는 ‘소진화小進化’라는 용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 이한길, 덕일교회 청년부 > 시작하는 말 학교에서 진화론과 유신적 진화론,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지적설계논쟁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비록 그 강의들은 선택과목이었지만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 맞는다면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다. 무신론자들이 기독교인들을 향해 비판하는 비판은 기독교인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이론적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론을 뛰어 넘어서 진화론을 사실로 여긴다. 하지만 진화론자들 또한 진화가 있다는 것을 전제를 한 후에, 그 믿음을 기반으로 해서 이론을 펼쳐나간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진화론 역시 신앙이며 종교라 할 수 있다. 바빙크(Herman Bavink)가 주장한 것을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 바빙크가 그의 시대 때 지적했던 문제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온다. “첫째, ‘한 혈통에서 내려온다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이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 다윈주의는 그 유기체의 이상 발전단계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한다는 형태는 발견되지 않았다. 중간 단계의 형태가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사람의 기원은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넷째, 다윈주의는 정신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 있어서 인간성에 대해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이제 이 문제는 지구의 고고학이라 여겨지는 지질학이 진화를 뒷받침해줄 만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지로 넘어간다. “지질학의 단층은 항상 특정 순서로 발생하는데 화석들이 낮은 지층에서 발견되면 하등 생물로 간주하는 견해가 대세다. 하지만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한 지질학은 고생물학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고생물학 전체가 진화 학설을 뒷받침하는데 이용된다. 하등형태가 고등형태로 진화된다는 것은 전제되는데, 이 전제를 기반으로 해서 단층의 쌓이는 순서와 기간이 결정된다. 이 단층의 순서가 진화 이론의 증거로 사용된다. 이 논리는 순환논리로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한다”(Bavinck, R.D., Concise Reformed Doctrine, ‘진화론’ 부분에서 발췌). 바빙크가 지적한 것처럼 증거가 없는 이론을 사실로 가정하고 밀어 부치는 행위는 큰 믿음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소진화’라는 용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이러한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즉 송인규 교수님이 2010년 10월 31일 남포교회에서 강의한 “그리스도인은 진화/진화론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강의안이 바로 그 진원의 발상지이다. 이 강의안은 학문적인 갈증을 해소할 만한 강의 자료들로 주의를 끈다. 또한 진화론의 여러 관점들과 창조론의 여러 관점들을 비교 분석하는 다양한 내용들도 돋보인다. 그런데 이 강의안에 대한 송 교수님의 의도와 사상에 대해 위험성의 여지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이 논제와 관련된 ‘강의안’과 기독교개혁신보에 실린 송 교수님의 글을 중심으로 우리가 취할 바른 자세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문제의 제기 송인규 교수님의 “그리스도인은 진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강의 제목은 그리스도인들이 진화론을 대할 때 취해야 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다. 이 강의안에서 송 교수님은 먼저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이론들과 관점 및 그것에 대한 반박과 문제점들을 나열해 두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마지막 부분 ‘V. 그리스도인이 나가야 할 길’의 내용이다. 분명 이 앞에서는 여러 가지 관점들을 소개하는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자료들 속에는 진화론과 창조론도 있지만, 두 가지를 절충하려는 이론들도 담겨 있다. 그 상황에서 송 교수님은 “기독교 내에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가운데 각자가 자기의 소신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마치 자신의 소신이 창조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여러 이론들 중 하나를 취할 수 있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이러한 의도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하다. “내 자신의 결정이 영원불변의 진리보다 우선한다. 진리는 나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진리가 아니다”와 같은 태도는 마치 칸트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칸트는 도덕론에 대해 아주 훌륭한 이론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의 법칙이 어디서 오는지, 양심의 근원이 어디인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이신론자이기 때문이다(헤르만 바빙크, 원광연 역, 개혁교의학개요, p. 221이하). 나아가 송 교수님은 “자기 견해를 형성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 내에서도 창조론에 대한 내용이 다르니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기 분야의 학문을 닦고 섭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 사안에 대해서 균형 잡힌 시각을 형성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며 강의를 마친다. 이는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균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소진화를 의미하는 것인가? 유신진화론을 의미하는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혼란스럽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사실 송 교수님이 한 말은 어떻게 보면 부분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는 합동신학대학원의 한 교수로서 진화론이 어떻게 잘못되었고, ‘진화’라는 용어를 왜 사용해서는 안 되는가를 설명해도 모자라는 판에 오히려 단서를 달면서까지 ‘소진화’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문이 발생한다. 2. ‘소진화’라는 용어 사용의 문제점 송 교수님의 강의안을 보면 ‘소진화’와 ‘대진화’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소진화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제시하는 근거도 자세하게 정리해두었다. 대략 정리하자면 생물의 종(種)내에서 발생하는 발전이나 변화를 ‘소진화’라고 하는데 ‘진화론이 소진화의 범위까지만 머문다면 그리스도인도 인정해도 된다’며 개혁신보의 기고에서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진화는 보통 종의 분화 과정에 수반되는 작은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로 종 내부 혹은 집단 내부의 유전적 변이와 연관이 된다. 이 변화들은 지질학적 연대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짧은 기간에 걸쳐 발생하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사실적 주장과 이를 위한 검증이나 증명이 가능하다. 이에 대해서는 창조론자들까지도 기꺼이 인정하는 바이다. 따라서 생물학적 진화론이 만일 소진화의 범위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진화론에 대해서 하등의 반론을 제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기독교개혁신보 제589호, ‘개혁 신학은 유신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는가?’). 다시 강의안으로 되돌아가 본다면 글 앞부분에서 여러 가지 관점, 즉 소진화에 대한 내용과 유신론적 진화론을 포함한 내용들을 나열한 뒤 ‘각자의 소신’과 ‘균형 잡힌 시각’을 갖자고 한다. 그 후 개혁신보에서는 단서를 달고 ‘소진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자신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이것은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유신 진화론의 입장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강의안에서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라 해서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삼위일체 또한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라는 내용도 담고 있다. 나아가 시편 104편 등 성경을 인용하면서 그 구절들이 생명의 생육과 발전과 관계되는 것으로 이것을 ‘소진화’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강의 제목만 보고 그 나열된 관점들과 예들을 본다면 당연히 비교하는 차원에서 나열된 내용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내용들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소진화라는 단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송 교수님의 논리는 절대로 성립될 수 없다. 만약 송 교수님의 주장이 과학자들의 논거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 과연 그가 ‘소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발언을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서를 달고는 있지만 ‘소진화’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송 교수님의 강의는 그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없어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소진화’라는 단어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을 받아들이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 한국 사람들이 김치를 많이 먹어서 한국 음식에 적응되고, 야구선수나 탁구선수들의 팔이 길어지는 것은 환경에 적응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인데 왜 그것을 굳이 진화라고 하는 학술적 개념의 차원에서 설명을 해야 하는가? 진화라는 단어 속에 하나님의 섭리는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찬양하는 시편 104편을 ‘소진화’의 용어로 둔갑시켜서 증거로 제시하는 자들은 얼마나 사악한가? 창조와 진화를 타협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면 무엇인가? 게다가 강의 내용 중에는 “학문 속의 진리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는 내용도 있어 ‘소진화’라는 용어를 받아 들여야 한다는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카이사가 루비콘 강을 건넜고, 지구는 항상 공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들이 성경에 나오지 않고 우리의 구원과 상관없다면, 이 사실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가 갖고 있는 가치와 동등선상에 둘 수 있을까? 3. 창조론과 다른 의미의 ‘소진화’라는 용어 ‘소진화’라는 단어가 단지 ‘발전’을 나타내므로 이 단어를 사용해도 과연 정당한 것인가? 이 질문에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을 하고 싶다. 왜 더 좋은 단어를 두고 굳이 ‘소진화’라는 단어를 고집하고 있는 의도가 무엇인가? 단지 우리보다 세상적으로 더 똑똑한 것처럼 보이는 과학자들이 그 단어를 사용하기에, 무언가 그들과 타협해보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무식하고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한다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서인가? 여기서 칼빈이 단어의 타당성을 시험하고 채택할 때의 원칙을 따르고 싶다. 기독교 강요 제1권 16장에서 칼빈은 ‘섭리’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섭리 교리는 창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고, 알면 알수록 정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칼빈은 특히 제16장 8절에서 섭리 교리와 스토아 철학의 운명론과 전혀 다른 점을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바실리우스(Basil)가 언급한 ‘운명’이나 ‘우연’이란 이교도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경건한 사람들이 마음에 그 뜻을 새겨서는 안 된다는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운명(fortuna)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술도 인용하고 있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어떤 여신(女神) 따위를 생각하고 그런 단어를 쓴 것이 아니고 만약 하나님의 섭리를 담고 있다면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흔히 ‘운명’이라고 말하면 어떤 은밀한 질서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 이유나 원인이 비밀에 싸여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라고 해야 옳은 일에 대해서 ‘이것은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매우 악한 관습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기독교강요 상, 원광연 역, p. 251). ‘운명’이라는 단어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한 결과물들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닌가? 분명 똑같은 결과를 가리키지만 부르는 이름값이 다를 뿐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운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악하다고 이야기한다. 왜 그런가? 그 단어의 정신에는 본질상 하나님의 섭리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명’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으며 하나님이 아닌 이름 모를 무엇인가에게 영광을 돌린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운명이라는 단어 대신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소진화’라는 용어가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물들과 과정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가리킬 수는 있다. 하지만 발전과 생육을 이행하는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autonomy)으로 보는 진화의 근본 사상은 아무리 ‘소진화’가 하나님의 창조물의 결과를 간접적으로 가리킨다고 해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치 운명이 이름 모를 무엇인가에게 공을 돌리듯, 진화의 본질상 그 공로를 눈먼 시계공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이름이나 명칭은 그 물체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진화’라는 그 두 개의 철자 속에는 ‘적자생존’ 또는 ‘생존경쟁’ 등 옛 수세기 동안 이교도들이 사용했었고 심지어 히틀러의 사상에 기초가 되었던 개념들이 배어 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결코 일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들이 우리의 입에서 고백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성경에는 분명히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진화라는 단어도 그와 같이 사용될 수 있다”는 주장은 타당할까?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그들의 논리에 이용될 수 있을까? 여기서 또 칼빈의 가르침을 인용하고자 한다. ‘삼위일체가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개념이 있으므로 기독교적 단어이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나 개념은 분명 다른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과 마찰을 일으키거나 충돌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진화’라는 용어는 ‘창조론’과는 명백히 그 개념이 일치하지 않는다. 4. 성경 기사에 대한 우리의 자세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욤’(하루)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바빙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의 저서 “Our Reasonable Faith”에서 바빙크는 창조 때 첫 3일과 후의 3일의 기간이 달랐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바빙크의 생각을 들여다보면 그의 주장이 분명 일리가 있어 보일 수 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밤이 되어 낮이 된다”는 말이 지구가 자전해서 만드는 24시간의 그 시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넷째 날에 해와 달이 창조되어 낮과 밤을 주관하게 했다는 것은(창 1:14) 지구의 자전을 의미하는 것이고, 분명 사계절이 있도록 하는 것은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태양이 없었으므로 처음 창조의 3일이 그 후의 3일과 다르다는 것이다. 지구의 낮과 밤이 되는 시간이 분명 넷째 날과 다르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하지만 화란의 그 유명한 바빙크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해서 그의 주장을 옹호할 수 없다. 아무리 저명하고 똑똑한 석학이라도 그의 발언이 성경과 신조에 일치해야만 비로소 신빙성이 있다. 캐나다 개혁교회 신학교의 학장 밴담(Van Dam) 교수 은퇴식에서 피셔(James Visscher) 박사가 ‘바빙크의 창조론’에 대해서 강의한 바 있다. 그 강의에서 피셔는 분명 ‘창조 기사는 문자 그대로(literal)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라는 단어를 말 그대로 하루라 해석하지 않고 또 다르게 해석한다면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의 설득력이 사라지게 된다. 피셔는 “한 신학자가 학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그 신학자가 연구하는 방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강의 마지막에 던진다. 바빙크의 단점은 바로 무언가를 평가할 때 잣대의 기준점을 과학에 우선을 두고 성경 말씀에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그때의 하루가 지금의 하루와 다르다고 가정해보자.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정작 6일이 아닌 몇 천년, 혹은 몇 억년의 시간을 할애하셨으면서 진작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하루’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다시 말해 “왜 굳이 거짓말을 하셔야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분명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를 끝내고 7일째 안식하셨다는 내용의 창조 기사를 다시 인용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분명 이것은 실질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창세기 2장에는 동산에서 발원하고 있는 4개의 강줄기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실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 실제로 창세기의 기사는 기록된 그대로이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셨고 제 7일에 쉬셨다.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하나님께 수십억 년의 진화의 과정을 거칠 만큼 능치 못할 일이 있으시겠는가. 기간을 가지고 장난치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럼 성경 전체를 뜯어 고쳐야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진화론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마땅한가? 우리는 기독교내에서 창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외에 ‘소진화’ 혹은 ‘유신 진화론’을 비롯해 ‘진화’라는 그 용어 자체를 옹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는 말 개인적으로는 송인규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책을 섭렵하고 공부를 하고 싶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우리의 죄 된 본성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불완전하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섭렵해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라는 말이 절대 아니다. 분명 우리는 책을 읽을 때 객관적으로 읽어야 한다. 책을 읽을 때 객관적으로 그 내용을 섭렵한 뒤, 주관적인 비평이 더해져야 한다고 배웠다. 분명 객관적으로 과학 서적을 읽고 주관적인 우리의 생각으로 다가서는데, 그 전에 더 중요한 문제는 그 주관적인 관점이 과연 타락한 인간의 본질과 죄로부터 치우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진화론을 “객관적으로” 다가선 뒤에 우리가 스스로 주관적으로 그것에 지배되지 않고 비평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신적 진화론의 주장에 설득당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학부 시절에 법을 공부하면서 개인적으로 유익이 되었던 것은 법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점이다. 그 중에서 정의론에 대해 배웠는데, 그 과목에서 우리의 판단과 견해가 종교나 도덕적인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다. ‘학문과 신앙 사이에서 학문을 할 때 신앙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신앙의 영역은 학문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메킨타이어(Alasdair McIntyre)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언급에서, 우리의 생각이나 자아가 예전의 역사나 문화와 무관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세상의 철학자조차도 우리의 자아가 역사 심지어 문화와 떼어서 볼 수 없다고 하는데, 우리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항상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종교는 어떠한가? 우리는 삶을 살면서 종교의 영역으로부터 분리하여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위트(John Witte Jr.)는 “Reformation of Rights”에서 종교개혁 시대 이후 인간의 자유와 권리의 사상 중심에는 항상 칼빈주의와 종교개혁의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말한다. 칼빈 또한 그의 기독교 강요 제1권 앞부분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말 할 때,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에 하나님의 알만한 것이 있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 또한 절대적으로 종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삶에서 우리는 신앙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문이 “신앙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라는 위험한 발상보다 사실 “어떻게 옳은 신앙에 맞추어 학문을 할 것인가?”가 더 올바른 질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유인원과 전혀 다른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처음 사람인 아담을 직접 만드셨으며, 수억년이 아닌 문자적으로의 창조를 믿는다. 그리고 아담의 타락과 죄로 인한 죽음을 성경대로 믿는다. 이 때문에 구세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믿는다. 소진화가 되었든 대진화가 되었든 진화론은 기독교 신앙과 공존할 수가 없다. 따라서 진화론 이해와 관련해 “스스로의 견해를 형성”하고 “균형을 이루는 것”을 강조하는 송 교수님의 주장은 기독교 신앙과 공존할 수 없으며 심지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용납될 수 없다고 본다. “균형을 이룬다”라고 하면 신앙과 과학 중 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기 마련이다.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기독교 서적, 특히 개혁교회 안에서의 서적들을 읽고 제대로 된 신앙체계가 확립된 사람이라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결코 ‘소진화’라는 용어를 용납할 자리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조그마한 가능성조차도 열어두지 않을 것이다. 조그만 과학적 일치가 마치 성경의 계시와 같은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면 심히 곤란하다고 본다. 소진화를 인정하게 된다면 마치 반 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이 세상학문이나 인간적인 과학과 타협하게 되며 결국에는 스스로의 모순에 빠지고 파멸하게 될 것이다.
523 no image |기고| 작금의 자연재해 어떻게 봐야 하나?_박발영 목사 (19)
편집부
4435 2011-04-06
작금의 자연재해 어떻게 봐야 하나? < 박발영 목사 · 한우리교회 > “시대의 임박한 상황을 알려서 성도들을 깨워야 할 때” 지금 지구촌에서는 무서운 자연의 재앙이 연일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또한 남극과 북극의 빙산이 놀라운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으며 만년설이 사라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해수면이 상승하여 투발루를 비롯하여 인도네시아 여러 섬이 이미 잠기기 시작했고, 펭귄과 북극곰들이 죽어가고 있다. 지구 평균 기온이 상승하기 시작하면서 자연 질서가 무너지고 생태계가 파괴되어 세계 곳곳에서 물고기 떼가 집단으로 죽어 가는가 하면 꿀벌이 동시에 사라지고 새떼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져 죽어가는 기이한 현상도 발생하고 있다. 최근 들어 기상 이변으로 한쪽에서는 홍수로 또 다른 쪽에서는 가뭄으로 그리고 허리케인이나 폭설로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다. 2008년도에는 미얀마에 싸이클론이 불어와 13만 명이 희생을 당했고 홍수와 태풍은 경작지를 초토화시키고 가뭄으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어 그로 인해 식량부족 현상이 나타나면서 곡물 가격은 폭등하여 기아 인구가 늘기 시작하였고 앞으로 지구 인구 가운데 2/3가 기아 인구가 될 것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조류독감, 사스, 구제역, 신종플루, 에이즈, 에볼라, 뎅기열, 콜레라 등등 수많은 전염병 등이 지구촌에 창궐하고 있다. 최근 발표에 의하면 지금까지 에이즈로 2600만 명 사망, 현재 감염자 4000만 명, 매일 약 7000명이 감염, 매일 에이즈 환자 사망은 6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더욱이 세계 도처에서 하루에 지진이 수 백 번씩 발생하고 있으며 2005년도에는 인도네시아에서 대지진으로 인한 지진해일로 수십 만 명이 죽었고, 2008년에는 중국 스챤성에서 대 지진이 있었다. 이어서 아이티에서, 칠레에서, 뉴질랜드에서 연이어 대지진이 발생했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9.0의 대지진이 또 발생하여 쓰나미로 인해 수만 명이 죽어갔다. 설상가상으로 원자력발전소가 6기가 파괴되어 미국, 한국, 중국 등등 세계가 방사능 피해를 받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아가 인도네시아에서, 아이슬란드에서, 캄차카에서, 화와이를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연이어 화산이 폭발하였고 일본에서만 후지 산을 비롯하여 13개 화산이 폭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백두산도 곧 폭발할 조짐을 보이는가 하면 세계 대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세계 최대 슈퍼 화산인 옐로스톤도 폭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지구를 보호하는 자기장이 사라져가고 무서운 태양풍이 곧 지구를 덥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말들도 나오고 있다. 계속되는 대지진으로 인해 지축이 흔들리고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전문 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앞으로 예측할 수 없는 무서운 자연의 대 재앙이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지구촌에서 연일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자연 재해를, 이 지구촌을 흔들고 있는 이 무서운 자연의 대 재앙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갈수록 그 빈도수가 폭등하고 그 강도가 강해져 가는 자연의 재앙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세상 사람들처럼 자연의 현상으로만 보아 넘기고 말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이 밀접한 인과관계 속에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아담의 죄는 땅의 저주로 이어졌고(창 3:17-18), 가인의 죄는 땅으로 하여금 더 이상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게 하였고(창 4:12), 예언자들은 땅이 황무지로 변하는 것이 하나님을 배신한 결과라고 했다(겔 15:7). 반면에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땅은 소출을 내었고 나무들은 풍성한 열매들을 맺었다(레 26:4).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황무지가 기름진 땅이 되었고 광야는 온갖 곡식을 풍성하게 수확하는 곡창 지대로 변했다(사 32:15). 이런 조응관계를 가장 탁월하게 보여주는 것이 호세아서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호2:21-22). 이는 대 자연을 창조하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진노하시면 자연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에게 순종을 거부하지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자연도 인간에게 순종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마태복음 24장 3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을 했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그러자 예수님은 재림 전에 종말을 알리는 많은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자연 재앙은 주님이 말씀하신 재림의 징조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요즘 그 징조가 그 어느 시대보다 너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개혁주의 종말신학자 후크마는 “우리는 재림에 대하여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임박했다고 하면 안 된다.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재림을 말하면 시한부 종말론이 된다. 그러나 재림의 징조를 가지고 상황적으로 재림의 긴박함을 알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재림의 태도에 대하여 말하기를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라면 재림의 징조를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옥한흠 목사도 “예수님의 재림과 인류의 종말이 우리의 목전에 다가와 있는 긴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침묵하는 것은 위험한 침묵이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의 탄식 소리를 크게 들어야 할 때인 것 같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 날씨가 맑겠구나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 날씨는 붉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를 분별할 줄 못하느냐”(마 16:3).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은 작금 나타나는 재림의 징조를 통해 시대의 임박한 상황을 알려서 성도들을 깨워야 할 때가 아닐까? “주님은 어제 죽으시고 오늘 아침에 부활하시고 내일 재림하실 것이다”는 깨어 있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그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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