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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7 (10:52:43)

갈등관리와 팀사역

 

 

< 이기종 목사 ·합신세계선교회총무 >

 

 

“선교사는 갈등과 해결의 사전 준비 필요해”

 

 

한국선교가 건전하게 발전하고 명실상부한 선교강국으로 자리매김하려면 반드시 해결하여야 할 과제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역에 있어서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한국 선교는 그 동안 협력사역 내지는 팀사역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 결과 선교지마다 교회, 신학교, 선교센타 등을 따로 운영하게 되는 중복투자 현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이 지닌 특성과 어느 정도 관계되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지구상에 남아 있는 매우 어려운 선교지역과 종족들을 위한 전략상 변화와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각개전투식 선교에 안주하기보다는 고도의 정보력과 조직력에 바탕을 둔 전략적 선교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팀웍과 네트워크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고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팀사역을 하고자 할 때 당장 예상되는 문제는 ‘갈등이 생기지는 않을까?, 갈등이 생긴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일 것이다. 갈등에 대한 사전적 이해와 대비가 없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게 되는 것이다.

 

갈등은 의견이나 목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오해나 제한된 자원, 경쟁으로부터 오기도 한다. 일 때문에 겪는 과업갈등도 있고, 사람 때문에 겪는 사람갈등도 있다. 여하튼 갈등을 피하기보다는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고 해결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대부분의 선교사후보나 선교사의 경우 갈등이 무엇이며,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 갈등해결의 원리는 무엇이지에 대해 배울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선교지에 부임한 선교사가 부딪치는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선교사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갈등이 있는가 하면 자녀와 가족 간의 갈등, 선교단체와 지부원들 간의 갈등, 단체와 단체 간의 갈등 등 여러 갈등이 있다. 게다가 선교지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문화적 갈등도 있다. 지역, 언어, 가치관, 생활관습, 문화유형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그것이다.

 

선교지는 영적으로 혼란스럽고 예민한 지역이기 때문에 스스로 깨어있어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매순간 힘든 지역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이 모든 갈등과 해결에 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갈등의 국면들만 미리 알아도 갈등으로 인한 부작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갈등은 다음과 같은 국면으로 전개되므로 현재의 갈등이 어느 국면에 있는지를 알고 있으면 다음 단계를 미리 예상하고 대비하는데 도움이 된다.

 

(1)예상단계- 많은 경우 미리 논쟁 예측됨 (2)견해 차이의 단계- 중요한 문제, 손익 문제 (3)토론의 단계- 자기의 정보나 견해가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서로 검토, 의논 (4)논쟁/대결 국면- 상대방의 문제점 제기, 긴장고조, 감정적 대응, 동맹형성 (5)격화 국면- 오해와 불신, 좌절과 공공연한 적의, 언어나 신체적 폭행 (6)진정국면- 격화의 낭비와 불이익 인식, 협상, 상대방 감정 존중, 신뢰회복, 제3자 개입 (7)갈등의 해소: 토마스-킬만 갈등관리 모델에 의하면 ①회피 ②강요 또는 대립 ③타협 ④양보 ⑤협력 또는 문제해결을 제시하고 있다.

 

조직은 공동의 목표달성을 위해 개인적인 능력뿐 아니라 팀웍과 시너지 효과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갈등을 극복하고 협력사역, 팀사역이 원활히 수행하도록 준비하여야 한다.

 

이런 취지로 합신세계선교회(PMS)는 이번 학기에 합동신학대학원에 개설된 ‘선교의 실제 및 훈련’ 과목의 테마를 ‘갈등관리와 팀사역’으로 정하고 갈등관리와 해결을 위한 성경적 원리들을 훈련하고 있다. 인간과 조직의 특성을 이해하고 갈등의 유형과 여러 국면들을 예견할 수 있도록 도우며, 성경적 원리들을 적용하여 변화의 시대에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게 돕는 것이 이 과정의 목표이다.

 

조직 내에서 갈등이 거의 없을 때 정체현상이 나타나거나, 비생산적인 의사결정이나 비효율성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갈등이 적절하게 관리되지 못하면 오히려 역기능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갈등은 적절하게 관리되고 해결하게 된다면 조직의 성과를 높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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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no image |선교단상(16)| 본 향 의 식_이기종 목사
편집부
3745 2011-03-23
본 향 의 식 < 이기종 목사 · 합신세계선교회 총무 > “선교지 향하는 선교사는 이 땅의 고향을 포기한 것” 선교회 본부사역을 하면서 딱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드는 때가 더러 있다. 선교사 부모님들이 중병이 들어 병문안 갈 때나 소천하여 문상 갈 때, 그리고 선교사 자녀의 결혼식에 참석할 때와 같이 경조사에 참석할 때가 그렇다. 선교사와 가족들의 중대 경조사가 있으면 선교지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들을 생각해서 할 수 있는 대로 참석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때는 선교사들이 채 입국하기도 전에 문상을 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참석하면서 선교사들이 처한 형편을 이해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생을 배우고 하나님과 본향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기도 한다.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오래 머물러 있었기에 가족들의 형편을 잘 살피고 돕지도 못하며, 경조사가 있어도 잘 참여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경조사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인에게 경조사가 발생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못한다.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 친척들을 뒤에 두고 떠난 선교사들의 사정과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나마 가족들이 믿는 가정이어서 기독교식으로 장례식이나 결혼식이 진행되는 경우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가족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하고 믿음과 가족애를 확인하기도 한다. 물론 선교를 잘 이해하고 가족 중에 선교사가 나온 것을 장하게 여기는 믿음 좋은 가족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가족들이 수술비와 치료비, 장례비가 많이 들어 걱정하며 분담금을 의논해도 선교사는 선뜻 얼마를 내겠다고 나서지를 못한다. 왕복 항공료가 큰 부담이 되어 부부가 함께 오지도 못한 처지이기에 더욱 그렇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라도 효도하고픈 마음이 왜 없으랴? 그간 사람노릇 제대로 못했으니 만회라도 하듯 거금 한번 큰 맘 먹고 가족 앞에 내놓고 싶지 않을까? 가족들 중에 불신자들이 많은 경우에는 더욱 안타깝다. 그간 부모님 곁에서 간호도 못하고 생활비도 제대로 보내드리지 못해서 죄인된 심정으로 조용히 있지만 불신자 가족들의 눈총을 받기가 십상이다. 부모형제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가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지내며 일하는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가족 앞에서 무슨 말을 하랴? 게다가 재력이라도 있는 형제가 장례절차를 세상 방식대로 하려고 강하게 주장하면 그들의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경우가 많다. 돌아가시기 전에 부모님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셨다고 거듭 말해도 기독교식 장례절차는 무시당하게 마련이다. 한국의 결혼풍속도 나날이 변하여 엄청나게 늘어난 혼례비, 주거비, 생활비 등도 선교사에게는 천문학적인 숫자로만 보인다. 다른 사람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거나 축하금을 낼 기회가 적었으니 청첩장을 돌리거나 전화로 알리는 것도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것 같아 망설인다. 선교사 자녀들의 결혼식과 신혼살림이 얼마나 소박하고 조촐한지 그 속사정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선교지로 향할 때 이미 선교사들은 이 땅위의 고향과 가족들을 포기했다고나 할까? 어디를 가도 고향 같지 않은 그런 느낌을 가지고 살아간다. 때로는 선교지가 더 편안함을 주기에 고국에라도 잠깐 들어오게 되면 아이들은 얼른 선교지로 다시 돌아가자고 졸라댄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던 아브라함처럼 정든 고국 땅, 친척과 가족들을 떠나는 그들은 누구인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믿고, 이 땅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지내고 장막(텐트)에 거하며 돌아갈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그들은 누구인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경조사를 마치자마자 아쉬움과 미련을 뒤로하고 선교지로 다시 향하는 선교사들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본향의식을 지닌 본향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는 말씀이 새삼 생각나는 대목이다. 누구나 돌아갈 본향이 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 풍조가 바뀌고 온 지구, 한국사회, 교회와 성도들이 진통을 겪고 있다. 전쟁, 기근, 재난이 그칠 줄 모르고 물질주의가 만연한다. 마치 이곳이 영원한 땅인 양 살고 있다. 이제 본향을 생각하며 떠날 채비를 하자.
521 no image |기고| 개혁신학은 유신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는가?_송인규 교수 (239)
편집부
11619 2011-03-09
개혁신학은 유신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는가? < 송인규 교수, 합신 조직신학 > “유신진화론이 전 세대에 비해 훨씬 더 많이 그리스도인의 주목을 끌고 각광을 받는다고 해서 결코 동조할 수 없다.”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은 대체로 보아 “인간을 포함한 생물계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생물학적 진화론을 하나님의 섭리 방식으로 채택하는 신학 이론”이다. 그런데 근자에 유신진화론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일반 복음주의계에 편만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2005년의 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미국 오순절 계통의 대학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 학교에 따라 적게는 12%에서 많게는 27%가 유신진화론을 받아들인다고 반응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증가 추세는 상대성 이론 및 양자 역학의 득세 이후로 번지고 있는 신학과 자연 과학 사이의 밀월 관계, 포스트모던식 과학 철학의 유행, 이머징 처치 운동의 확산 등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의 가르침을 바른 신학의 골조로 삼고 있는 보수적 장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유신진화론을 타당한 이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아니오!”이다. 그러나 “아니오!”라는 부정적 답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가 무슨 근거에 의해 유신진화론을 반대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사항을 언급할 수 있겠으나, 필자는 크게 두 부류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성경적·신학적 근거에 의한 반대 유신진화론은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가 된다. 만일 유신진화론이 성경적 진리로 인정되려면 최소 세 가지 결론이 창세기 1, 2장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첫째, 창 1:21과 1:27에 등장하는 동사 ‘창조하다’(히브리어 ‘바라’)가 ‘자연 과정에 의한 발전’으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바라’는 자연적 과정에 의한 현상을 묘사하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특히 창 1:1에서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함의한다. 또 비록 창 1:21, 27의 ‘바라’는 무에서의 창조가 아니고 기존 재료 - 들짐승과 새의 경우에는 ‘흙’(창 2:19)이, 수중 생물의 경우에는 ‘물’(창 1:20)이, 또 인간 신체의 경우에는 ‘흙’(창 2:7)이 -를 사용한 하나님의 역사를 묘사하지만, 어쨌든 이 역시 자연 과정에 의한 발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에 의한 창출 행위를 나타낸다. 이처럼 ‘바라’라는 용어가 유신진화론의 성립을 반대하게 만든다. 둘째, 유신진화론이 가능하려면 창세기 1장의 여러 곳(11, 12, 21, 24, 25절)에 등장하는 단어 ‘종류’(히브리어 ‘민’)가 오늘날 생물 분류학에서 거론되는 각종 명칭들 - ‘종’(種, species), ‘속’(屬, genus), ‘과’(科, family), ‘문’(門, phylum) 등 - 과 아무런 실질적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생물분류학에서는 모든 생물을 ‘계’(界, kingdom) → ‘문’(門, phylum) → ‘강’(綱, class) → ‘목’(目, order) → ‘과’(科, family) → ‘속’(屬, genus) → ‘종’(種, species)의 체계에 따라 분류한다. 가령 예를 들어 ‘사람’ 같으면, 동물계 → 척추동물문 → 포유류강 → 영장목 → 사람과 → 사람속 → 사람종으로 분류가 된다.] 구체적으로 각기 ‘종류’대로 창조된 생물체들 가운데 ‘동물’(창 1:25)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어떤 이는 이 ‘종류’가 ‘종’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그보다 더 상위 개념인 ‘속’이나 ‘과’ 또는 심지어 ‘문’까지도 가리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껏 양보하여 설사 이 ‘종류’가 ‘문’을 뜻한다고 해도 이로써 유신진화론의 입지가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유신진화론은 생물학적 진화를 액면 그대로 인정하는 고로 최초의 생명체로부터 인간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이 점진적이고 자연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종류’를 생물학적 분류 가운데 아무리 높은 단계로 해석한다고 해도 이로써 유신진화론이 성립될 수는 없는 것이다. 셋째, 또 유신진화론이 성립되려면 창 2:7의 ‘흙’(히브리어 ‘아파르’)이 인간 직전의 하등 동물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흙’이 하등 동물이라는 해석은 성경의 여러 증거로 보아 가당치 않다. 우선 만일 유신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인간이 하등 동물로부터 진화된 것이라면, 이미 흙으로부터 짐승이 창조된 이후(창 1:24-25)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창 2:7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짐승’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더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으셨단 말인가?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 후 심판을 언명하실 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창 3:19)라고 하기보다도, “너는 ‘짐승’이니 ‘짐승’으로 돌아갈지니라”라고 하셨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모든 성경의 증거들은 인간의 육신 창조에 있어서 사용된 재료가 하등 동물이 아니고 그저 흙임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창 2:7의 ‘흙’을 ‘하등 동물’로 해석하는 것이 부당한 이상, 유신진화론 역시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유신진화론은 이처럼 성경의 증거와만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유신진화론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아담이 인류 최초의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인물이라는 것, 아담의 영혼은 뇌로부터의 진화적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직접 창조에 의한 독립적 실체라는 것, 아담이 창조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존재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하등 동물을 다스리도록 문화 명령을 부여받았다는 것, 또 아담이 언약의 머리였던 고로 그의 범죄가 인류 후손에게 원죄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것, 로마서 5장이 예시하듯 첫 아담과 둘째 아담 사이에 대표자로서의 유비가 존재한다는 것 등 개혁 신학의 중요한 진리들이 왜곡되든지 폄하되든지 부인될 수 있다. 이처럼 유신진화론은 신학적으로도 커다란 위험의 소지를 안고 있다고 하겠다. 유신진화론은 이처럼 성경적·신학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보수적 장로 교회(및 개혁 신학)의 입장에서는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2. 과학적/이론적 근거에 의한 반대 비록 우리가 유신진화론을 반대하는 궁극적 이유는 이 이론이 성경의 진리와 개혁 신학의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이지만, 부차적으로는 생물학적 진화론이 가진 이론적 문제점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에 생물학적 진화론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유신진화론에도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진화론이 지닌 과학적/이론적 문제점은 무엇인가? 필자는 여러 가지 사항 가운데에서도 두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생물학적 진화론이 가진 가장 큰 이론적 문제점은 그 이론의 주장 내용과 실증적 자료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물론 화석의 증거에 관한 문제점이다. 화석은 과거에 일어난 생물학적 변화와 발전(혹은 사멸)을 보여 주는 숨김없는 기록이다. 그러므로 화석은 진화론을 입증할 유일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 문제는 그러한 화석의 기록이 진화론의 주장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모순처럼 작용하기도 한다는 데 있다. 만일 생물학적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의 발전을 나타내는 전이적 생물체에 대한 화석이 발견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화석의 증거는 미미하기 짝이 없고 많은 경우 그저 공백으로 남아 있다. 또 화석의 증거가 보여 주는 바에 의하면 어떤 생물체들의 경우에는 (분명 더 나은 형태로 진화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만 년 동안이나 아무런 변화를 나타내지 않은 채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새롭고 복잡한 구조의 생물체들이 어떤 시기의 화석 기록에 매우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일이다. 가장 특이한 예가 소위 말하는 ‘캄브리아기 폭발’(Cambrian explosion)이다. 진화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약 5억 7천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초기의 화석 담지(擔持) 퇴적암 안에서, 주요 해양 무척추 동물문(門)을 대표하는 모든 형태의 생물체들과 후손을 남기지 않은 다양한 다른 문들의 생물체들이 발견된 것이다. 화석의 증거만으로는 이토록 잘 발달된 무척추동물들이 어디서 유래하게 되었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진화론자들의 딱한 실정이다. 화석 증거의 불일치와 관련하여 생물학계 내에 매우 의미 심장한 사건은 1972년 엘드리지(Niles Eldridge, 1943∼)와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2)가 ‘계통적 점진주의에 대한 대안, 단속 평형설’(Punctuated Equilibria, an Alternative to Phyletic Gradualism)이라는 제하의 논문을 발표한 일이었다. 단속 평형설(punctuated equilibrium theory)은 종의 분화를 설명함에 있어 다윈식의 점진적 변화 이론에 반기를 든다. 이는 새로운 종들이 신속히 발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전통적 이론에 수정을 가한 것이다. 즉, 종속 집단이 그 종의 주류 집단과 지리적으로 격리된 채 장시간이 흐르면 얼마 동안 평형 상태(equilibrium)에 도달해 이 상태를 유지하다가, 조건이 맞으면 돌발적으로 종의 분화가 일어난다는 식의 설명을 시도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전이적 형태는 지질학적 시간에서 한 순간에만 나타나고, 단지 오래 존속하는 지배적인 종들만이 화석에 기록을 남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전통적 진화론의 입장, 곧 다윈식의 점진주의(Darwinian gradualism)와 상당한 이론적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화적 변화의 주된 방식이 무엇인가와 관련하여 진화론자들 사이에 첨예한 의견 대립을 유발했다. 단속 평형설이 등장하여 전통적 진화 이론에 수정을 가한 것은 그 정도로 화석 증거의 불일치가 생물학적 진화론에 타격을 주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둘째, 대진화에 대한 증거 확보의 어려움은 생물학적 진화론의 목표인 바 공통 조상으로(common ancestry)부터의 계통 발생(phylogeny) 수립 노력을 거의 무위로 만든다. 오늘날 진화론자들은 생물계의 다양성을 공통 조상으로부터의 발전과 변화로 설명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이 꿈꾸는 이상이자 학문적 노력을 종종 ‘계통수’(phylogenetic tree of life)로 예시하곤 한다. 그러므로 계통수를 구성하는 ‘가지’와 ‘결절’(node)을 정확히 표시하면 할수록 생물학적 진화론은 과학으로서의 위상이 높아질 것이요, 그러한 표시가 불투명하고 모호하면 할수록 단지 하나의 ‘이론’ 차원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의 현황을 보건대 그 전망은 매우 어두운 채로 남아 있다. 특히 한 생물체와 다른 생물체의 진화적 선후 관계를 이어주는 ‘결절’ 생물체들의 존재가 쉽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이미 생물학적 상식으로 되어 있는 ‘소진화’(microevolution)와 ‘대진화’(macroevolution)의 개념을 도입하고자 한다. 소진화는 보통 종의 분화 과정에 수반되는 작은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로 종 내부 혹은 집단 내부의 유전적 변이와 연관이 된다. 이 변화들은 지질학적 연대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짧은 기간에 걸쳐 발생하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사실적 주장과 이를 위한 검증이나 증명이 가능하다. 이에 대해서는 창조론자들까지도 기꺼이 인정하는 바이다. 따라서 생물학적 진화론이 만일 소진화의 범위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진화론에 대해서 하등의 반론을 제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진화론의 이론은 대진화의 메커니즘까지도 포함하고 있고, 오히려 이것이 훨씬 더 핵심적인 주장점으로 되어 있다. 대진화는 ‘종’ 수준 이상의 진화를 말하는데, 진화론자들은 이 방면에서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모든 자원들을 총동원한 가운데 공통 가계의 경로를 추적하고 재구성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실 계통수의 요체는 이렇듯 대진화의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대진화가 아무리 ‘관찰과 비교’ 작업을 성실히 한다 할지라도 소진화에서의 고찰과는 달리 온전히 ‘과학적이지 않은’ 탐구 방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대진화가 현재의 입수 가능한 자료로부터 과거의 사태를 소급적으로 추론해야 하는 통시적(通時的) 성격의 작업이기 때문에도 그렇고, 또 매우 불충분한 자료를 기초로 하여 연구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이처럼 전반적 작업이 과학적으로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진화론의 숙명적 생리이다. 그리하여 1800년 대 생물학자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사안들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른 목(目)의 새들은 서로 간에 어떤 방식으로 연관이 되어 있는가?” “원생 동물류(protozoan groups) 가운데 어떤 것이 후생 동물(metazoans)의 기원이 되었을까?” “어떻게 상이한 무척추 동물문들이 상호 관련을 맺고 있는가?” 등의 의문이 그러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확실한 바는 계통학적 분류의 낮은 수준으로 내려올수록 공통 조상을 추론하는 것이 쉽지만, 그 이상의 수준으로 올라가면 전혀 사정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강’(綱, class)이나 ‘문’(門, phylum) 같이 커다란 분류 범주 사이를 연관시키고 이로써 계통학적 재구성 작업을 시도하는 일은 자연 과학의 표준적 작업 - 반복된 실험과 검증에 의해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일 - 성격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진화론자들이 과거에 비해서 생물학적 진화론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훨씬 더 많이 확보되었다고 주장하고, 또 대다수의 진화론자들은 자기들의 학설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라고까지 말하곤 하지만 대진화의 이론이 아직도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어 있지 않다는 목하의 현실과 공통 조상으로부터의 계통 발생 수립의 전망이 그저 ‘헛된 희망’(wishful thinking)의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감안할 때 생물학적 진화론의 학문적 위상은 아직도 의문 투성이라고 밖에 판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이렇게 불안정하고 전망이 흐린 생물학적 진화론을 핵심적 지지 이론으로 채택한 유신진화론에 대해서도 역시 의심과 비판의 눈초리를 감추기가 힘들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유신진화론이 전 세대에 비해 훨씬 더 많이 그리스도인의 주목을 끌고 각광을 받는다고 해서 이에 동조하는 것은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요동하는”(엡 4:14) 치졸한 모습이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의 진리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에 입각한 바른 신학의 기치를 높이 듦으로써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해야”(고후 10:5) 할 것이다.
520 no image |초대시| -임 가신 지 열 돌을 맞으며- 오동춘 장로 (1)
편집부
3779 2011-02-23
늘 그립고 뵙고 싶은 장경재 목사님 -임 가신 지 열 돌을 맞으며- < 오동춘 장로 , 화성교회 원로장로 > 우리 앞에 오직 신앙으로 거울처럼 여든 셋 한평생 깨끗이 살고 가신 우리 따르며 존경하던 평암 장경재 목사님 2001년 3월 2일 훨훨 하늘나라 가신지도 어언 십 년 잔인한 세월도 너무 덧없이 흘렀습니다 사랑 넘치고 어지신 윤제선 어머님 밤낮 간절하신 기도와 사랑과 눈물로 만주 봉천에서 예수님을 가슴에 영접하신 우리 받들어 모시던 장경재 목사님 일생 주께 충성 봉사하시고 성령의 열매 의의 열매 이루신 그 성스러운 삶은 길이 빛날 한국 기독교계에 믿음의 금자탑이며 참으로 우리 교계의 큰 별이셨습니다 모범 제자로서 만주신학교에서 우리 교계 큰 어르신이던 박윤선 스승님께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 삼대 교육 이념을 뼛속 깊이 배우시고 만주에서 일제와 맞서 신사참배 거부하고 오직 십자가의 길로만 힘차게 달리시며 기도하신 대로 하나님 심판으로 일제는 패망하고 광복을 맞이하셨습니다 광복과 함께 조국은 두 동강나고 북한에서 교역자 생활하시던 중에 주일날 김일성 투표 절대 반대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시고 부산 고려신학교 박윤선 교장 선생님께 다시 바른 칼빈 개혁주의 신학에 전념하고 진해, 밀양, 마산 경남지방 목회에 힘쓰시다가 하나님 뜻에 따라 사역지를 서울로 옮기시고 김성실 권사님과 함께 화곡본동에 화성교회를 거뜬히 개척하시고 오늘의 자랑스러운 우리 화성교회 반석 같은 기초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진통 끝에 새로 선 합신교단 총회장으로 주님 일 크게 하시고 설립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사장으로 애쓰시며 교회당을 팔아 합동신학교를 바로 세우자고 하신 우리 모두 존경해 모시던 장경재 목사님 우리 교단에도 큰 지도자요 교계의 큰 별이셨습니다 온갖 거짓 마귀 날뛰는 오늘 항상 장목사님 계셨던 자리 너무 크며 다시금 배우고 지도 받고 싶은 마음 만주 봉천 설교 다시 듣고 싶은 마음 우리 진실로 가눌 길 없습니다 새봄 속에 가시던 우리 장경재 목사님 2011년 새봄 속에 더욱 그립습니다 저 하늘 나라로 가신지 십 년 세월 흘러갔어도 우리는 늘 뵙고 싶고 새롭게 그리워집니다 장목사님이시여! 우리 다시 만나 뵐 그 기쁜 날까지 주님 품에 부디 편히 쉬소서
519 no image |간증문| 제자훈련을 마치고_백재현 집사 (133)
편집부
10818 2011-02-09
제자훈련을 마치고 < 백재현 집사, 동흥교회 > "항상 주를 가까이 하며 살아가고자 다시 한번 결심해” 제가 피택된 후 제자훈련을 받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20년 전에 제자훈련을 이미 받아본 터라 ‘거기서 거기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20년 전 그때는 직장생활에 30대 청춘이라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지금 다시 1년이라는 기간을, 그것도 평일에 제자훈련을 위해 시간을 낸다는 것이 직업상 부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자훈련 반 평균이 40-50대이기에 저는 딱 중간이라 거기서 위안을 삼았습니다. 드디어 오리엔테이션이 열리고 제자훈련이 시작되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정말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기억도 희미하긴 하지만 지금의 제자훈련에 비하면 예전 제자훈련은 기본훈련만 받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오죽하면 제자훈련 구호도 ‘훈련 중 아프지도 말고 죽지도 말자’였습니다. 하지만 제일 무서웠던 것은 바로 과제물이었던 성경 일독하기, 생활과제로는 공예배 참석, 매주하는 교제 예습, 큐티, 설교요약, 독서 1권 및 독후감, 주간 스케줄 기록, 요절 두 구절 암송하기 등이었습니다. 결석, 지각은 무조건 벌금이었고 요절암송은 틀린 글자 한 글자 당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첫 모임 후 선배 집사님들과 얘기 중 ‘이 나이에 암송을 우째하노, 못 외운다’며 그냥 하자고 서로 약속을 하고서, 저는 다른 모든 과제물은 다하고 요절암송은 짧은 것 한 개만 외우고 첫모임에 나갔습니다. 근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선배 집사님 세분이 요절을 전부 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게 배신(?)을 당한 후 저는 혼자서 벌금을 냈습니다. 첫모임은 그렇게 배신을 당하고 벌금도 내고 이래저래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나도 요절을 외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일단 큰 글자로 몇 장 인쇄를 해서 책상에 한 장, 차에도, 사무실에도 붙이고 주머니에는 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틈만 나면 외웠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몇 주간 주머니의 돈이 꽤 줄어들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하다보니 평소에는 암송에 정신이 없고 새벽마다 성경 읽고 저녁마다 짬짬이 독서 과제 읽기, 화요일에는 제자훈련, 수요일에는 예배참석, 목요일에는 교재 공부, 금요일에는 기도회, 토요일에는 큐티, 일요일에는 설교요약, 월요일에는 독후감 쓰기를 하다 보니 TV는 절로 멀어지고 웬만한 약속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적응이 힘들었습니다. 이게 진짜 제자훈련이구나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주, 두 주 지나다보니 맛을 알게 되고 생활과제와 교육을 실천하면서 식구들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고, 저 자신도 요절을 외우고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라’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 같아 가슴 뿌듯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쁨은 처음이었습니다. 늘 말씀 읽기와 암송과 묵상 큐티, 교재 공부, 독서 교재 읽기 등 하다보니 말씀 속에 사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비록 배운 대로 다 행할 수는 없었지만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실천하면서 살아보리라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교육 기간 중간에 원치 않는 부상으로 입원했을 때 제 과제물을 항상 가져다주신 동료 집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름방학을 거쳐 가을학기를 지나 종강을 하고 나니 정말 이번 훈련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훈련이 되었습니다. 낮에 작업을 하고서 씻을 곳이 없어 이병구 집사님 가게에서 세수만 대충 하고서 허겁지겁 달려갔던 그 시간들이 그래도 하나님을 알아 가는 가장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이 행복했던 시간들을 되새기며 항상 주를 가까이 하고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고자 다시 한번 결심을 합니다.
518 no image |신앙단상| 보지 못하는 것에 소망을 심자_임종태 집사 (93)
편집부
4749 2011-02-09
보지 못하는 것에 소망을 심자 < 임종태 집사, 대림교회 >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이며 행복한 길” 요즈음 세계는 선진국들이 크게 어렵고 힘들어 보인다. 최대 강국 미국의 실업률이 10%를 넘고 이라크전쟁, 아프가니스탄 등 골치 아픈 일들이 산적(山積)해 있다. 또한 유럽 여러 나라들이 빚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국, 프랑스 특히 그리스, 스페인 등이 더욱 그렇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정부가 미래를 보지 않고 지나치게 선심복지예산을 지출하여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도덕해이(解弛)가 큰 원인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로 인하여 교회를 떠난 성도들이 급속히 증가하여 교회가 텅텅비고 다른 업종의 건물로 팔리는 경우가 많아지며 도덕윤리와 사회질서가 무너지며 조금만 힘들어도 노력하지 않고 국가와 대기업들이 대신하여 주기를 바라며, 걸핏하면 데모와 파업(罷業)을 하여 국가와 회사경영을 매우 어렵게 하고 있다. 그렇다고 국가나 회사가 모두 잘 하였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따라 문제를 풀어주었으면 좋겠는데 이 또한 보이는 물질에만 너무 집착(執着)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선진국 진입을 코앞에 두고 있다. 우리의 참 선진국 모델은 노사가 화합하여 열심히 일하고 교회를 떠나지 않고 더욱 하나님을 잘 섬기어 하나님이 모든 일에 주관자이시며 심판자 되시며, 통치자 되시는 선진국을 소망한다. 성경의 겸손(謙遜)이란 어떠한 것일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고도 한다. 교회에서 허리를 90도 굽혀 먼저 인사를 하고 웃는 얼굴로 주보를 나누어주며 안내하는 것도 겸손이라고 할 수 있지만 몸을 낮추는 것은 가시적(可視的)으로는 가능하나 보이지 않는 마음을 낮추는 것은 어렵고 귀한 것이다. 마음의 낮아짐이란 하나님이나 사람들 앞에서 내 뜻,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 계획에 따르는 삶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겸손한 사람이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 2:13). 그렇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나의 존재가 무엇인가 깊이 들여다보며 나의 정체성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 권능과 주권을 인정하게 되며 하나님의 뜻과 세우신 계획이 나의 계획보다 더 유익하다는 것을 비로써 알게 된다(사 55:8-9). 만약 나의 뜻과 계획을 고집한다면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며 이 사람은 교만한 자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10개월 동안 아기가 자라는 어머니 뱃속은 어떠한 곳일까? 그곳은 빚도 없고 물(양수)로 가득 차 있으며 제한된 공간이라서 태아(胎兒)가 움직이려고 하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양수막을 이리저리로 밀어내야 한다. 어머니가 소화시키는 소리, 호흡하는 소리, 심장 뛰는 소리 등 소음(騷音)을 밤낮으로 들어야 한다. 이러한 환경이 편안할까? 자궁 안을 기계로 비춰보면 아기의 모습은 자기 몸을 감싼 채 웅크리고 앉아서 몸을 흔들며 아주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태반과 자궁으로 2중 3중으로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평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세상의 소음과, 환난과, 고난이 닥쳐와도 하나님의 언약 보호막(말씀)이 있기 때문에 평안하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다 키우고 잘 교육시켜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그 말에 나는 머리가 쿵하고 얻어맞는 충격을 느꼈다. 김장무 씨앗을 밭에 뿌려서 겨울김장용 무로 자라게 하는데 여름에 농부가 하는 일은 고작 김을 메고, 거름을 주는 것이 전부이다. 비가 오는 것과 싹이 나고 매일 잎이 자라고 뿌리를 튼튼하게 하여 굵은 무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요, 또한 역사(役事)이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두 살 난 아이가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맘마, 고기, 좋아, 싫어’라는 말을 하며 걷기도 한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아이에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르치고 교육시키신 것이다. 어린 아이 성장에서 부모가 다 하였다는 생각은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처음 출생에서 마지막 죽음까지 우리 삶의 기나긴 여정을 먹이고 입히고 양육하시며 모든 것을 책임지고 다하여 주시겠다는 그 뜻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행복한 길이다. 하나님이 시작(始作) 하신 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완료(完了)하신다는 것을 꼭 명심(銘心)하기로 다짐해 본다. 2011년 새해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중에도 역사하시며 모든 것에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심자(롬 8:24).
517 no image |간증문| 언제나 도와주시는 하나님_허정희 집사 (24)
편집부
4748 2011-02-09
언제나 도와주시는 하나님 < 허정희 집사, 중서울노회 초대교회 > “J가 연수원 생활 마치고 판사의 길 갈 수 있기를” 할렐루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큰 딸 아이의 사법고시 합격의 영광은 오로지 주님의 덕택이며 은혜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초대교회에 발을 디딘 것은 큰 딸 아이의 인도로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의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울고 날마다 생활고에 맘 편할 날이 없을 때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힘들게 살아가던 때였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큰 아이 J가 담임선생님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면서 저도 답답함을 견딜 수 없어서 교회에 나갔습니다. 어릴 때 동네 아이들과 크리스마스 때나 부활절 계란 받아먹는 재미에 잠깐씩 나가곤 했던 것이 전부였었는데 말입니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새벽기도의 시간들이 쌓이면서 저의 마음에 담겼던 원한들이 치유되어갔고 나를 짓누르고 있던 남편에 대한 원망들도 사라졌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나간 내가 변화되니까 가정이 화목해졌고 남편과의 사이도 점차 좋아져 갔습니다. 당시 우리 집은 넉넉지 않았기 때문에 J, S, B 세 아이들의 중고등학교 등록금을 학비지원으로 해결했었습니다. 그래도 J는 학비지원으로 공부하면서 초등학교부터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성적은 늘 우수했고 중고등학교 6년 내내 우등상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글짓기도 뛰어나서 언제나 학교대표로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장관상을 세 번이나 탔으며 최우수상을 수없이 많이 받았습니다. 물질은 부족했지만 저의 집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받아온 상장이 마음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은 수입으로 근근히 생활했기 때문에 큰 아이의 대학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했고,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미 큰 딸 J가 수시로 S대, Y대, K대에 합격이 된 상태였습니다. 대학등록금이 없어서 착잡한 마음으로 새벽에 기도하는데 갑자기 가슴속에서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올라오면서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성령님의 위로하심을 체험하는 시간이었나 봅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한 경험이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교회 밖으로 나와 본 하늘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물이 너무나 새로웠고, 감사했었습니다. 그리고 큰 아이의 등록금은 대출을 받아서 해결했고, S대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만 등록금을 내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주실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대학 생활을 시작한 큰 딸 J가 S대 법대로 전과를 하게 된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연히 학교 선배의 권유로 법대로 전과를 하여 법대 4학년의 생활이 시작되었고, 얼마 되지 않아 휴학계를 내고 본격적으로 사법고시 시험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1차는 낙방을 했고, 그 다음해에 1차 합격을 하고, 2차로 두 번째 시험에서 합격을 해서 총 3년 반만에 사법고시 면접까지 최종합격을 하였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신림동에서 시험을 준비하면서 필요한 물질들을 충당할 수 있게 해주시고 J가 흔들림 없이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들도 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말씀으로 확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2차 시험을 공부하며 시험에 대한 불안이 생길 때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말씀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송구영신 예배 때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리라”는 시편 말씀을 주셔서 저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큰딸 J는 자신의 시험 합격도 중요하지만 아빠를 전도하기 위해서 2차 합격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고 합니다. 건국대 상하관에서 치러진 2차 시험의 4일간, 저는 일이 끝나는 대로 건국대에 찾아가며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딸아이를 기다리며 마음속으로 기도하였는데 왠지 편안한 마음이 들고 합격할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합격 후에 교회 성도님들을 어떻게 대접할까’ 하는 생각에 이런 저런 음식들을 떠올리면서 한편 ‘내가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런 어미의 마음의 아는지 제가 보기에도 딸은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전혀 불안해하지 않았고 기도 때마다 감사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J도 다른 사람들은 시험에 대한 압박감으로 괴로워하였는데 자기는 늘 감사하며 공부했었다고 고백합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경험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험에 합격하고 주일 날 우리 온 식구가 교회 성도들에게 점심 대접을 하며 감사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처음 초대교회에 나갈 때 이런 기쁨이 있을 줄은 몰랐고 하나님이 이렇게 큰 복을 주실 줄 몰랐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으로 새벽에 나가서 참 많이 울었었는데 이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하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막내 딸 B가 호주에 가서 잘 지내는 것도 다 하나님의 덕분입니다. 이제 남편이 속히 하나님을 영접하면서 교회에 나오는 숙제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3월에 연수원에 들어가는 J가 연수원 생활을 좋은 성적으로 마치고 판사의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라며 계속 기도에 힘쓰겠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족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증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J를 위해 기도해 주신 권창기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고 초대교회 성도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모든 영광은 오로지 하나님의 것입니다.
516 no image |선교단상(15)| 진정한 행복_이기종 목사
편집부
3853 2011-02-09
진정한 행복 < 이기종 목사 · 합신세계선교회 총무 > “누군가를 섬길 때 진정한 행복 느낄 수 있어”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새해를 맞아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한 계획들을 세운다. 그리고 분투, 노력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행복을 추구하며 누리고 싶어한다. 가끔 행복지수라는 것이 발표되는데, 가난한 나라들이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로 등장하곤 해서 의아해하기도 한다. 이 행복지수를 산출할 때 사용하는 요소에 따라 조사결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나온다. 그 요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행복의 요소들을 다 망라한 것이 아니어서 한계를 가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의 삶을 수용하며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만약 더 나은 환경의 삶을 경험한다면 여전히 현재의 삶속에서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행복이란 당사자의 주관적 만족감으로 결정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공감을 얻으려면 다양한 행복의 요소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환경적 요소와는 상관없이 행복감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선교사들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은 우리나라보다 후진국이거나 환경적으로 열악한 곳이 대부분이다. 자녀교육을 잘 해보려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부모가 홈스쿨링을 하는 선교사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래도 선교사들은 소명을 따라 사명감으로 묵묵히 일하며, 순종하고 있다. 중동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사역하다 한국에 나와 있는 선교사들은 양고기 꼬치구이와 진흙 화덕에 구운 빵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한남동 이슬람사원 부근에 있는 음식점이나 동대문 운동장 근처의 중앙아시아 식당에 들러 향수를 달래곤 한다. 단지 음식만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선교지와 그곳의 사람들이 그리운 것이리라. 지난 해 연말 인도차이나 반도의 K국에서 어느 선교사와 며칠을 함께 했다. 덥고 낙후된 나라의 작은 시골마을에 있는 음식점이라면 우리는 대강 어떠할지 상상이 될 것이다. 그 곳의 음식이 또한 그리 고급스럽지 않다는 것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특유의 강한 향이 나는 야채와 닭고기를 함께 넣고 끓인 국을 먹게 되었다. 그 나라 고유음식인데 그 선교사는 음식의 냄새를 맡아가며 아주 만족스럽고 행복한 표정으로 맛있게 먹는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고향의 어머니 음식처럼 말이다. 그 먹는 모습을 보고 지금 행복하냐고 물으니 참 행복하다고 대답한다. 참으로 소박한 것에서 행복을 누리는 모습이다. 자신이 섬기는 민족의 음식이 맛있어졌다면 그는 이미 그들과 같은 삶을 나누는 것이다. 음식뿐 만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정서와 마음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누구나 선교지에 갈 수는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적인 것을 버리지 않고 그들의 것들을 수용하지 못하며 단지 사역적인 것만으로 대한다면 진정한 영혼을 얻기가 어렵지 않을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삶을 사신 것은 사랑의 절대적 모범이신 것이다. 행복은 외적, 환경적 요소도 무시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는 주관적 요소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진정한 행복을 나누려고 주님의 분부를 따라 즐겁게 사는 삶이 선교사의 삶이리라. 선교사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를 의식하지 않고, 오직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얻으며 행복을 누린다.
515 no image |초대의 시| 기 도_전 현 목사 (4)
편집부
3805 2011-01-05
514 no image |목회수상| ‘크로노스’와 ‘카이로스’_김종화 목사 (83)
편집부
5364 2011-01-05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김종화 목사, 경비교도 고충상담관 > “우리의 바른신학 계대적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힘 모으길” <# 1> 제가 2505부대 새벽이슬교회를 섬기기 시작한 때가 2007년 더운 여름이 한창 무르익어 가던 때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때’를 의미하는 단어가 여럿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뜻합니다. 제가 부대 교회를 섬긴 세월이 햇수로 4년이 흘러갔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정해진 때, 적당한 때, 깨닫는 때, 깨닫는 시간을 뜻합니다. 지난 4년 간의 흘러간 시간이 무의미한, 깨달음이 없는 시간이 아니길 바랍니다. 제가 섬겼던 대원들은 20대 초반으로서 인생 황금기를 지나고 있는, 매우 가치 있고 중요한 시간의 때를 지나고 있는 청년들입니다. 어떤 깨달음, 어떤 진리 위에 자기 인생을 건설하는가는 자신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가정, 사회, 국가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 인생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 깨달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7:24-27).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깨달은 사람의 생애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부딪칠지라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의 집과 그의 생애는 그 무너짐이 심할 것입니다. 살아가노라면 모든 일에 때가, 기회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지난 2006년 12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큰 의미가 있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때인 성탄절에 두 살된 손자에게 그림 동화책을 한 권 선물했습니다. 그 책은 수지 풀이라는 작가가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린 작은 동화책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어요”(A Time for Everything)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2-4세 어린이는 엄마가 함께 읽을 수 있고, 5-7세 어린이는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거든요. “안녕?” 만나서 기쁠 때가 있고요, “안녕히 계세요” 헤어져서 슬플 때가 있어요. 철벅철벅 장난칠 때가 있고요 보글보글 깨끗이 씻을 때가 있어요. 더운 여름은 쏴아~! 시원하게 노는 때고요 추운 겨울은 호호~ 따뜻하게 껴입는 때지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계속 됩니다. 조용히 해야 할 때 시끄럽게 뛰노는 때 사랑해 줘야 할 때 사랑 받을 때 아침에 일어날 때 잠자야 할 때 이렇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답니다. 이 그림동화책은 솔로몬 왕의 인생논인 전도서 3장을 기초로 해서 쓴 글입니다. 전도서 3장은 이리 시작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에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2505부대도 30여 년 전 성동구치소 안에서 필요에 따라 세워졌고 이제는 때의 필요에 따라 해산하게 됩니다. 이 사실 또한 어떤 의미 있는 배움과 깨달음을 줍니다. 저는 20평의 주말농장에 여러 종류의 식물들을 심고 있습니다. 지난 8월 여름철에는 20일 이상 비가 왔습니다. 많은 비로, 또는 지열로 모종으로 심은 어린 배추들이 견디지 못해 시들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심은 모종이 제법 튼실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10월 말 3-4일 동안에는 갑자기 몰아닥친 한파 때문에 늦은 오후 시간에는 비닐로 덮어주고 아침에는 벗겨주곤 했습니다. 보호해주고 돌보고 거름을 주고 사랑한 덕에 잘 자랐습니다. 자식이나 동식물이나 가족이나 이웃이나 서로에 대한 변하지 않은 관계는 사랑임을 20평 텃밭에서 배웠습니다. <# 2> 기독교의 66권 성경의 핵심은 10계명에 담겨져 있습니다. 10계명의 핵심을 물음 받았을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 37-38절에서 이리 답하셨습니다.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의 탐욕을 위해서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그 하나님을 전 존재와 전인격으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그의 생애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의 시간인 ‘카이로스’가 필요합니다. 이 참 만남과 이 깨달음의 시간이 없다면 목적 없이 사는 허공을 치는 복싱 선수처럼 방황하며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인생(人生)과 시간을 허비하며 낭비하고 말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은 온 율법 선지자의 강령이다”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부모에게 효도합니다. 살인하지 않습니다. 간음하지 않습니다. 도둑질하지 않습니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위증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집을,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그 외 소나 그 외 나귀나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않습니다. 이는 십계명 중 제 5-10계명입니다. <# 3> 10계명 혹은 두 계명을 뜻으로 깨닫는 자는 그의 생애 중에서 ‘카이로스’를 경험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흘러가는 시간 ‘크로노스’안에서 깨달음의 순간 그 때에 ‘카이로스’를 체득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됩니다. 어그러지고 비뚤어진 관계 속에서는 평안도 행복도 화목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가 유럽에 세운 최초의 교회에게 로마옥 중에서 보낸 편지에서 사람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참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 가지 관계를 빌립보서 4장 4-6절에서 이리 권면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4-6).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주 안에서 기뻐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이 관용에는 인내, 양보, 온유, 친절, 자비, 관대함 등의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우리 인생을 향해 꾸준하게 변함 없이 사랑하는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말합니다. 세상적인 가치나 이기적인 탐심으로 추구할 때 나타나는 염려에서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말합니다. 간구할 때 믿음 없이 하지 말고 들어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어떤 결과가 있게 될 것인가를 그 다음 7절에서 보증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제 때가 되어 우리 2505부대는 해산됩니다. 제대하게 되는 병사들은 2505부대의 ‘크로노스’ 안에서 깨달아 체득한 ‘카이로스’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다른 부대로 전출되는 대원들은 어떤 부대로 가게 되든지 2505부대에서 체득한 깨달음의 지식과 지혜로 모든 관계를 어그러짐 없이 잘 감당해서 존중과 인정을 받는 병영 생활이 되길 바랍니다.
513 no image |목회수상| 고장난 복사기_이창주 목사
편집부
5208 2010-12-22
고장난 복사기 < 이창주 목사 · 하나비전교회 > 교회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알게 된 목사님을 통하여 복사기 하나를 얻었다. 그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 새로운 복사기를 구입하면서 안 쓰게 된 복사기가 있다면서 내게 주신 것이다. 감사히 받아 주보나 교육 교재를 제작하는 등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년이 채 못 되어 고장이 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에 인근 수리점을 찾아가 복사기를 고쳐줄 것을 요청했지만 약속만 하고는 오지 않았다. 그 후에도 두어 번 찾아가 수리를 요청했지만 여전히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수리점이 문을 닫고 다른 가게가 차려진 것을 보았다. 아마도 가게를 정리하는 단계였기에 그랬던 것 같았다. 나는 하는 수 없어 그 복사기를 고장 난 채로 목양실 한 구석에 버려두고 스캐너와 컴퓨터 프린터를 이용해서 복사를 하였다. 그러던 얼마 후 서울에 계신 어머님께서 교회를 찾아 오셨다.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린 어머님은 “우리 교회에서는 커다란 TV가 있어서 여기에 찬송가 글씨가 크게 나와서 이를 보며 찬송을 부른다”고 말씀하시며 대형 TV를 사라고 150만원을 헌금하고 가셨다. 그런데 TV보다는 유용성면에서 프로젝터가 훨씬 좋겠다고 생각하여 프로젝터와 함께 이동용 스크린을 샀다. 하지만 프로젝터를 설치하려고 할 때에 이것을 올려놓을 테이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침 고장 난 복사기가 있어 이것을 끌어다가 그 위에 프로젝터를 올려놓으니 아주 적당한 높이와 넓이가 되었다. 이후 지금까지도 매 주일마다 고장 난 복사기 위에 프로젝터를 올려놓고 찬송을 부르거나 성경을 함께 읽는 등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복사기를 주셨던 목사님 부부를 만났다. 그 목사님은 내게 준 복사기를 아직도 잘 사용하느냐고 물으셨다. 난 얼마 사용하지 못해 고장이 나서 사용하고 있지 못한다고 말하자 두 분은 실망하는 모습을 지었다. 아마도 자신들이 좋은 것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가진 것 같았다. 그러자 나는 “목사님! 비록 복사기는 고장이 났지만 프로젝터 받침대로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고 말씀을 드렸다. 며칠 전에 사용하고 있는 프로젝터와 그 받침대인 고장 난 복사기를 치우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처치 곤란이었던 이 복사기가 이렇게 소중히 쓰일 줄이야, 바로 이것 아닐까? 지금 나의 모습은 아무 쓸모 없이 고장 난 복사기 같을 지라도 주님께서 나를 택하시면 나도 소중하게 쓰일 수 있지 않을까? 전능하신 주권자이신 주님께서 원하기만 하신다면 얼마든지 가능할거야.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나 자신을 준비하노라면 주님께서 나를 더욱 소중하게 사용하실 거야.” 목회를 하고 있으나 성도들은 좀처럼 늘지 않고, 얼마 안 되는 성도들마저 주일 예배에 지각하거나 결석하는 등 낙심케 하는 상황들이 수시로 일어난다. 그럴 때면 ‘내가 지금 목회를 제대로 하는 건가? 기업체의 직원들이 나이 들고 입지가 줄어들면 조기 명퇴하듯이 나도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비록 우연한 기회를 통하여 든 생각이지만 이는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믿어진다. 지금의 나는 고장 난 복사기 같은 상태일지 모르나 전능하신 주권자이신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면 지금보다 더 소중히 쓰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미래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아마 지금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를 보다 더 유용하게 사용하실 계획을 갖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낙심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용도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더욱 힘써 경건의 훈련에 임해야 할 것이다.
512 no image |목회수상| 개척교회 6년차_박정희 목사 (1)
편집부
4965 2010-12-15
개척교회 6년차 < 박정희 목사, 죽전남포교회 > “목사로 부름받은 확신 더 분명해” 동료 목회자들이나 주위에 아는 성도들이 “지금 교회가 몇 년 되었냐?”고 물으면 앞에 수식어를 붙여서 “개척한 지 6년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때 ‘개척한 지’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필자의 속내에는 교묘한 핑계와 자랑이 숨어 있음을 보게 된다. 핑계란 지금 교회의 연약한 형편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해달라는 것이고, 자랑이란 그렇게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루어 놓은 소위 목회적 성과에 대한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이 있음을 말한다. 핑계와 자랑, 자랑과 핑계가 늘 왔다 갔다 한다. 필자의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 보다 못한 아들이 드디어 “아빠! 이제 개척교회라는 말을 좀 피해주세요”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얼마나 그 말을 달고 살았으면 아들까지 나섰겠나 하는 생각을 하니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결혼을 하면 물론 부부에 따라 기간이 틀리겠지만 3년 동안을 허니문 기간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도 개척교회 3년은 허니문 기간으로 주시는 것 같다. 이 기간 동안에는 모든 것이 새롭다. 청춘남녀가 처음 결혼을 해서 매일 매일 사는 삶이 얼마나 새롭겠는가! 개척교회 역시 그렇다. 수가 적든 많든 그 교회가 세워지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일들을 하게 된다. 새로운 일이란 다른 교회들이 하지 않는 특이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들도 다 하는 일인데 새로 만난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새로운 일이 된다. 주방봉사, 교회청소, 심방 등 이런 일들은 모든 교회들이 다 하는 일이다. 그런데 개척교회는 이런 일들이 다 신기하고 새롭기만 하다. 지나놓고 보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허니문의 기쁨을 주어서 교회를 시작하게 하시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부부생활도 허니문 다음이 문제다. 영어도 ‘헬로’라고 말한 다음이 어렵다고 하던데 마찬가지이다. 3년 정도 지나면 서서히 늘 하던 봉사가 조금씩 지겨워지고 급기야는 펑크도 낸다. 허니문 기간동안에는 걸리지 않았던 삶의 모습이나 행동들이 3년이 지나면서부터 걸리기 시작한다. 먼저 온 교인과 나중 온 교인들 사이에 삶의 외형, 즉 집이나 재산의 유무에 대한 비교에서 나오는 야릇한 감정들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는 때도 3년 정도 지나서이다. 이런 저런 모임과 만남을 통해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하는 감정적 표현들이 생기는 때도 3년이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목회자에 대한 실망을 본격적으로 갖기 시작하는 때도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예전에 목회학을 가르치시던 목사님께서 “가는 교인 잡지 말고 오는 교인 막지 말라”라는 잠언에 가까운 가르침이 실감나는 때가 바로 이때부터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목회자로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느낌과 기쁨은 허니문 때보다 지금이 더 강하고 분명하다. 비로소 “목회를 하고 있구나” 하는 확인이 된다. 그렇다고 마음의 고통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아프고 쓰라리다. 신물이 나고 단내가 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뭔지 모를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부교역자로 섬기던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교인들과 어려워져서 힘들어 하던 모습을 옆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아파하는 담임목사님의 모습이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가 없었다. 설교를 잘해서 성도들에게 칭송을 받을 때보다, 또는 교회가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서 강한 카리스마로 기가 막힌 결단을 내릴 때보다도 더 위대해 보였다. 모세를 생각해 본다. 모세가 언제 위대하게 보일까? 모세의 사역가운데 가장 빛을 발하던 때가 언제일까? 홍해를 지팡이 하나로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할 때? 반석에서 물을 나게 할 때? 하지만 이것보다 모세가 더 위대해 보였던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앞에 직면해 있을 때이다. 40년 내내 이런 모습 앞에 모세는 서있었다. 아마 이때가 모세로 하여금 가장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때였고, 자기가 은연중에 신뢰하고 있는 모든 근거들을 다 내려놓는 때였으리라. 학교로 말하면 초등학교 6학년 정도 밖에 안 되는 일천한 목회 경력이지만 이제 조금이나마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확실하구나 하는 확인이 된 것 같아서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목회자로서의 단내 나는 기쁨을 확인하면서 이 길을 걸어가리라 다짐해 본다.
511 no image |선교단상(14)| 선교사 은퇴 이후_이기종 목사 (1)
편집부
4967 2010-12-15
선교사 은퇴 이후 < 이기종 목사 · 합신세계선교회 총무 > “2016년경 65세 이상의 선교사 15% 증가할 전망” 최근 A 선교단체 소속의 한 선교사가 30여 년의 선교사역을 정리하고 은퇴하여 귀국하였다. 마땅한 거처와 생계 대책이 마련되지 않아 안식관 몇 곳을 전전해야 했다. 그가 속한 선교단체와 파송교회는 은퇴선교사에 대한 대비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선교단체는 회의를 열고 선교사의 정년에 관한 조항을 개정해 정년 조항을 아예 없애기로 하였다. 파송교회는 부랴부랴 은퇴대비기금을 마련하기로 했다. 위의 사례는 선교사 은퇴에 대해 대비하지 않았던 한국선교 인프라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앞으로 점차 은퇴, 사임하는 선교사가 크게 증가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2006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중에 60세 이상이 10-12%, 65세 이상이 5% 정도이며, 2016년 경에는 65세 이상의 선교사가 15% 가량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현재 PMS의 경우 파송선교사 중에 50세 이상이 39%, 60세 이상이 약 6%에 이른다. 선교사가 은퇴한 후에 귀국하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주거, 생활비, 의료 및 케어(Care)이다. 전통적으로 부모의 은퇴 후에 부양의 일차적 책임이 그 자녀들이나 직계 존비속에게 있다고 여겨왔지만 사회구조전반의 변화에 따라 이러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선교사들의 경우 그 자녀들의 성장과정, 교육, 결혼 등에 있어 재정적으로 넉넉지 못한 가운데 뒷바라지를 하였기 때문에 홀로서기조차 힘든 자녀들에게 노후를 의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현장의 선교사들은 대부분 별도로 노후를 준비하지 않고 있으며 막연히 선교단체나 후원교회의 도움을 기대할 뿐이다. 그래서 은퇴 후에도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사역지에 계속 머물기를 희망한다. 사명감도 이유가 되겠지만 현실적으로 은퇴 후 대책이 막연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수년 전 한국 선교지도자들이 선교사 은퇴문제를 토론한 후에 채택한 다음과 같은 결의문은 아쉬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선교사 은퇴는 한국 내 선교촌을 마련하는 경우와, 선교 현지 인근 국가 중 은퇴촌을 마련하는 경우, 그리고 선교 현지에서 은퇴 없이 선교하다 죽는 경우 세 안을 놓고 토론한 결과 가급적 선교지에서 은퇴 연령 없이 사역하다가 현지에 묻히는 방안을 압도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선교 리더십은 연령 제한을 두어(예를 들어 65세) 후진 리더십 양성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또한 현지에서 계속 사역의 경우 한국 내 후원 교회가 계속 후원하게 하는 선교 문화를 창달시키는데 선교계가 노력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은퇴 후에 비자 획득 곤란, 건강 악화, 지도력 이양 등으로 선교지에서 계속 사역이 어려운 경우이거나 약간의 대책이라도 마련된 경우에는 본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에 대비하여 국가의 공공임대주택제도를 적극 활용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은퇴관 마련이 필요하다. 생활비 대책으로는 자기의 생활비에서 일정 금액을 저축토록 권장하고, 국민연금 등 국가의 복지제도를 적극 활용토록 해야 한다. 후원교회는 은퇴한 선교사의 생활비를 위해 후원금액의 70% 정도를 계속 후원하며 만약, 선교사가 은퇴 없이 선교지에서 계속 사역할 경우에는 계속 후원비를 지원해야 할 것이다. 선교사들은 대부분 한국보다는 열악한 환경에서 수십 년을 묵묵히 사역했다. 그들을 지원할 수 있는 인프라의 범위가 선교지 이후의 삶으로까지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그 동안 선교사 은퇴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해 왔던 한국 교회와 선교단체가 진지하게 선교사 은퇴 이후의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때인 것이다. 선교사의 노후가 최대한 보장되는 방향으로, 선교사의 연령과 교회의 재정형편을 고려하여 적절한 은퇴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는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서 끝까지 사역하다가 그곳에 묻힐 각오로 일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황무지와 같이 영적으로 메마른 선교지에서 한 영혼의 구원과 성장을 위해 말없이 흘렸던 눈물들은 귀하다. 한국교회는 그들의 삶이 다하는 그 날까지 기쁨으로 기도와 후원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성도는 말년의 섬김을 통해, 또 자신이 죽음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를(요 21:19) 갈망한다. 십자가 군병들은 승리의 나팔 소리가 울리기 직전, 그리고 대관식장으로 들어가기 직전, 최후의 만족과 행복 가운데 전투를 끝낼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놀라운 영광이다”(존 파이퍼).
510 no image |초대의 시| 승리는 연평도에 있다_오동춘 장로
편집부
4351 2010-12-08
509 no image |제언| ‘기독교개혁신보’ 명칭 변경에 대한 소견_김용주 목사 (1)
편집부
4484 2010-12-08
‘기독교개혁신보’ 명칭 변경에 대한 소견 | 김용주 목사, 소식교회, 총회노회록검사부장 | <기독교개혁신보사는 2010년 10월 14일 제95회기 제2차 신문운영이사회에서 제호를 변경하기로 하여 본보 제580호에 새로운 제호 모집을 공고한 바 있습니다. 본보 제호 변경 절차는 이사회에서 새 제호를 선정하여 총회에 헌의하게 되면 총회가 이를 받아 가결 혹은 부결하게 됨으로써 최종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이 글은 본보 제호 변경에 대한 필자의 반대 의견을 밝힌 것으로 본보 제호 변경에 대한 독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차원에서 게재합니다_ 편집자 주> “개혁교단의 마지막 보루로서 ‘기독교개혁신보’ 명칭 보존해야” 어떤 단체나 기관에 친히 종사하거나 거기에 근접해 있는 분들의 경우에는 어떤 사안에 필연적인 정당성을 가진다 할지라도 먼발치에서 그 단체나 기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당황케 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본 교단의 기관지인 ‘기독교개혁신보’의 제580호에 ‘기독교개혁신보 새 이름 공모’라는 광고란을 보고서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심히 의아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먼저 이 글의 단순성을 위하여 명칭 변경이나 자구 수정의 실례를 몇 가지 제시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본 교단 ‘기독교 개혁신보 새 이름 공모’에 대한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1. 명칭 변경이나 자구 수정의 실례 몇 가지 세상 방식은 어떤 중대한 일들로 단체나 상호 등의 이미지가 실추되면 명칭을 변경하여 새로움을 모색하여 만회하려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지 실추는 언제나 그들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어떤 분이 총회의장에 피선된 후에 “이제 주님 외에는 다 바꾸어야 한다”고 외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필자가 십 수 년 머물렀던 한 모임도 우리 교단의 3대 강령인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그대로 구현해 보자고 했던 그 명칭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들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종종 노회에서 교회의 명칭 변경이나 총회의 특별 위원회 등의 명칭 변경이 그 회의 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정당한 명칭 변경도 있고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별로 의미 없는 명칭 변경들도 있습니다. 우리 교단은 때로 그 변경이 심화되어 헌법의 중요한 자구 수정까지 감행되어 버려서 개혁 신학이 낙후되는 현실을 맛보고 있고, 비교적 개혁주의를 지향하려는 우리로서는 이로 인해 쓰라린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단 명칭 변경의 실례의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개혁’이라는 말을 싫어하는가?”라고 여길 정도로 신속하게 ‘개혁’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합신’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장로교회’라는 명칭이 ‘개혁교회’ 혹은 ‘개혁장로교회’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을 만큼 동의적인 의미를 품고 있을지라도 ‘개혁교단’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면 더욱 더 좋았을 것입니다. 물론 ‘합신’이라는 교단 명칭이 ‘엄밀한 장로교회에 합치한 혹은 적합한’이라는 의미라면 참으로 좋았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신앙인들이 사용하는 용어란 그 용어가 품고 있는 내용에 있어서 그것을 버릴 때 그 용어가 품고 있는 신학사상까지 생략되고 던져지기 일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이런 일에 매우 신중해야 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2. 개혁주의적 언어 방식의 마지막 보루로서 ‘기독교개혁신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중에 우리는 지금 이 명칭 이외에 새 이름을 구하고 있습니다. 필자로서는 이 일을 주장하고 추구해 나가는 분들에게 몇 가지 묻고 싶습니다. 그 첫째는 “누구의 발상이며 어떤 회의의 결의로 추진하는가?”입니다. 그 둘째는 “개교회로 출발되든지, 최소한 노회 등의 헌의없이 왜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가?”입니다. 그 셋째로 “기독교개혁신보의 명칭 변경으로 인하여 주의 영광이 어느 정도 나타나겠으며 우리 교단과 전국교회와 일반 성도들에게 어떤 유익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단마다 인간적이면서 인간 이성이 추구하는 광범위한 교회를 지향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신학, 곧 교의를 손질하게 되었던 게 지상교회 역사 중 한줄기였습니다. 그런 시도에서 특별히 신학, 곧 교의의 중요한 낱말이나 문헌들을 뒤로 물리거나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일들이 다반사였기에 이번 ‘기독교개혁신보의 새 명칭 변경 공모’에도 심한 우려를 표하는 바입니다. 필자 스스로가 지나치게 소심해서인지 “이제 또 가장 중히 여겨야 할 명칭 하나가 사라지게 되지 않는가” 하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제 늦가을의 끝자락에서 또 초겨울의 입문에서 마지막 잎새 하나도 곧 떨어지려는가?”라는 마음졸임이 필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인간이 혹 인간들이 의도했을 경우에 과연 주와 주의 영광만을 위하고 지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참된 유익을 위한 것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곧 예전이나 지금보다 더 나은 새 잎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인간이 혹 인간들이 고안했다면 신속히 이 일의 진행을 멈추거나 접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칭인 ‘기독교개혁신보’로 주와 주의 뜻과 주의 영광 드러내기를 우리 모두는 기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 우리 교단에 속한 온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508 no image |제언| 대입수능시험과 신앙생활_최태호 목사 (60)
편집부
4995 2010-12-08
대입수능시험과 신앙생활 < 최태호 목사 · 우리교회 > 해마나 수능시험일이 되면 한반도가 전체가 긴 침묵에 잠긴다. 그리고 긴장감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 같은 무거운 시간이 흐른다. 아들, 딸, 조카 등등 이렇게 저렇게 얽혀 수능시험에 있어서 전혀 무관한 사람이 없어 보인다. 수능시험을 바라보는 그들에게 있어 한결같은 바람은 보다 나은 점수이다. 이 점수가 곧 명문대 입학의 보증수표이며 나아가 이 점수가 인생의 점수인양 가치관이 형성된다. 그런데 점수로 인하여 지극히 만족해하는 수험생보다는 만족할 수 없어 비관 끝에 자살을 택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대체적으로 하위 점수대보다는 상위 점수대의 수험생에게서 이런 일들이 빈번히 일어난다.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이기에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수능시험이 목적인가 과정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누구에게서 알아내야 하는가? 누구도 정답을 알려 주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자신들의 생각 속에서는 답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1, 2점으로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답을 놓치고 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수능시험을 목적으로 간주하고 생명을 건 도박을 강요하고 있다. 상위의 점수대일수록 더욱 기승을 부린다. 물론 점수가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목적은 될 수 없지 않은가? 분명히 수능시험은 목적을 이루어 가는 하나의 또 다른 과정일 뿐이다. 수능시험 만점이 곧 인생 만점은 될 수 없다. 수험생과 그리고 그와 관계된 모든 어른들에게 있어 수능은 목적이 아니라 인생 목표의 한 과정이요, 도구요, 수단일 따름이다. 이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하여 실수는 있을지라도 실패라고 단언하지는 않아야 한다. 실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의식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 이런 경우는 신앙인의 삶 속에서도 발견된다. 기도하거나 말씀을 묵상하는 일들은 멋진 신앙인으로 간주되기에 알맞은 신앙훈련들이다. 그러나 이런 훈련들이 결코 목적은 아니어야 한다. 즉 이런 훈련들의 결과로써 새로운 목표물이 빚어져야 하는 것이다. 훈련된 만큼의 신앙 성품이 결정체로써 영롱한 빛을 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신앙훈련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수단이며 도구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배 참석이나 또는 새벽기도회 참석이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 그 참석 횟수가 많아진 만큼 발전되는 인격의 변화가 곧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507 no image |제언| 개혁주의 신학이 환영받으려면_최덕수 목사
편집부
4603 2010-11-24
개혁주의 신학이 환영받으려면 < 최덕수 목사 · 현산교회 > “성경적인 교회 모습 이루는 일에 우리의 총력 기울여야” 우리 주변에는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거나,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문제를 지적하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에서는 매스와 같은 날카로운 말로 상대의 잘못을 질타하는 사람들이 환영받는다. 불평을 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통쾌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의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사람들의 역할은 그 사회의 타락상이 깊어질수록 더욱 돋보이는 법이다. 합신 교단이 태동될 때의 상황이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운동권 학생들이 갖는 젊은 혈기나 현실에 대한 울분을 토해내는 방법으로는 부조리한 상황을 바꿀 수 없다. 개혁은 침묵하는 다수에 의해서도 이뤄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들을 향해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소위 ‘저격수’들에 의해서도 이뤄지지 않는다. 정치계에서나 교계에서 개혁이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 저격수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우리 교단 안에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개혁 자체에 대한 피로감 때문이라기보다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에 대한 피로감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총회나 교계에서 개혁 신학을 주장할 때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어느 청교도 목사가 한 말이다. “기도회에서는 거룩한 성자처럼 기도하며 일반적인 생활에서도 위대한 성자처럼 사는 자들이지만 교회 회의에서는 악마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목회자들이 설교하고 기도할 때는 청교도가 살아 나온 듯한 인상을 주는 분들이 회의석상이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거친 말과 쓴 소리를 쏟아 내어 받은 은혜를 다 쏟아 버리게 만드는 경우들이 없지 않다.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의 치부만을 드러내는 일만으로는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진리를 사랑하는 자는 더불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진리를 사랑한다 하면서도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이들은 사실 진리를 알지도 못하며 진리대로 행치도 않는 사람이다. 진리는 언제나 사랑과 함께 일하고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일하는 법이다(고전 13:6). 사랑은 비록 그 말끝이 날카롭기는 하지만 부드러움을 준다. 사무엘 러더포드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서한집을 읽어보면 러더포드가 신학적으로는 매우 날카로우면서도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은 한없이 넓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은 독기 어린 눈초리로 말하지 않으며 판단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으로 말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말에 의해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통쾌해 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가슴으로 아파한다. 진리는 사랑과 우애의 펴진 손을 가진 마음으로 말해야지 주먹을 쥔 마음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가 우리들의 성화되지 못한 성품으로 인해 방해받지 않도록 사랑으로 말해야 한다. 또한 주장하고 가르치려들기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만을 겸손히 말해야 한다. 그럴 때 개혁신학이 사랑 받을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이 환영받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했던 사람들의 목회 현장의 초라함 내지 열매 없음 때문이다. 실제로 개혁주의 신학을 목회원리로 삼는 대부분의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신학교 다닐 때나 목회 초년생일 때 입만 열면 개혁신학을 외치던 사람들까지 개혁신학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배운 대로 해도 안되더라’는 말도 나오고, ‘30년 동안 바르게 한다고 해왔지만 교회적 상황을 볼 때 그 결과가 미미하니 바르게 한다는 말은 이제 하지 말자’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어떤 마음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지는 일말 이해는 간다. 하지만 정말 바르게 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는지, 바르게 한다는 것을 구호로만 외쳤던 것은 아닌지 우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바르게 했는데 우리가 얻은 복이 얼마나 되는가?’라고 묻기보다 바르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임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개혁주의 신학의 원리에 따라 목회하는 목회현장이 얼마나 풍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가능하면 점진적인 양적 성장도 이루어야 하고, 양적 성장을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그럴 때 개혁신학의 대적자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이나 개혁주의 목회자들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공격하는 말이 ‘그렇게 성경적으로 한다고 하면서 목회 현장은 왜 그 모양이냐?’라는 말이다. 그런 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성경구절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궁극적인 열매는 양적 열매가 아니라 주의 뜻에 얼마나 충실했느냐 하는 열매임을 기억해야 한다.
506 no image |제언| 북한은 지구상에 있는 마지막 선교지
편집부
3848 2010-11-10
북한은 지구상에 있는 마지막 선교지 < PMS OOO 목사 , 총회선교사> “고통받는 형제들 외면한 채 우리는 안일하게 살고 있어” 북한은 모든 주민이 수령 1인에게 절대 복종하는 ‘수령유일지배체제’이다. 김일성은 1974년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라는 행동강령을 통해 수령유일지배체제를 확립하였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인된 1980년대에는 이 체제를 이론적으로 공고히 하기 위해 지도자가 없는 대중은 무의식적인 비조직 군중에 불과하므로 혁명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수령이 필수적이라는 ‘혁명적 수령관’과, 사람에게는 생물학적 생명과 사회적 생명, 정치적 생명이 있는데 수령이 주는 정치적 생명을 가진 사람만 진정 영원한 생명체가 된다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만들어 수령주의를 확립했다. 그리하여 인민 대중들은 수령의 지시를 충성을 다하여 무조건 이행하는 객체가 되었고, 북한은 죽은 김일성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요 인민의 영생하는 어버이 수령으로 받들어 섬기는 신정국가가 되었다. 북한은 300만명 이상이 굶어 죽는 “고난의 행군”을 이겨낸 것을 김정일의 선군정치 때문이라고 선전한다. 지난 5월 8일 《로동신문》은 “선군정치야말로 제국주의침략자들과 그 추종세력들의 온갖 침해로부터 민족의 자주권과 나라의 평화를 굳건히 지키고, 조국통일의 앞길을 힘있게 열어나가는 정의로운 민족자주의 정치,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치”라고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정일을 ‘현세의 한울님’이라고 우상화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행하는 《통일신보》 12월 25일 기사에서 천도교 교령인 오익제는 김정일을 찬양하며 “현세의 한울님이신 장군님의 령도 따라 공화국은 지금 민족사에 류례 없는 번영의 전성기를 펼치며 강성대국을 향해 폭풍쳐 달리고 있다”고 했다. 북한은 조선을 ‘김일성 조선’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이제는 북한의 국민들을 ‘김일성 민족’이라고 부르고 있다. 2010년 8월 21일 《로동신문》에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우리는 김일성 동지의 후손이기 때문에 강성대국 건설에 목숨을 바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사의 결론은 이렇게 쓰여있다. “후손은 저절로 이어지지 않는다. 목숨이 이어져 후손이 아닌 것이다. 사상이 계승되고 력사와 전통이 계승되어야 하며 정신력이 계승될 때 수령의 후손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혁명위업을 개척한 수령의 넋이 온몸의 피에 흐르지 못할 때 설사 목숨이 살아있어도 후손의 대는 끊어지고 만다. 어버이 수령님께서 맡겨주신 사회주의 조국을 우리의 뼈와 살로 가꾸어 김일성민족의 영원한 삶의 보금터로 빛내여 나가자.” 수년 전 평양을 방문했을 때 아리랑 축전을 관람하면서 김일성을 민족의 해방자로, 미제국주의로부터 민족을 구원한 자로, 모든 인민이 세상에서 가장 잘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해 준 위대한 어버이로 찬양하면서 마지막 장면에 “김일성 조선이여 영원하라”고 적힌 카드 섹션을 보았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60년이 넘도록 북한은 외부와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국민들을 수령에 절대 복종하는 노예로, 김일성 개인에 속한 ‘김일성민족’으로 개조하고 있다. 하루 빨리 북한의 허황된 꿈을 깨고 김일성조선을 해방해야 한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개인을 우상화하는 북한은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김일성 우상숭배의 노예가 되어버린 북한의 동포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을 행하는 북한의 수령교는 곧 망한다.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더욱 강팍하게 한 것처럼 김정일과 북한의 지도부도 더욱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있다. 결국 바로는 많은 재앙과 애굽의 모든 장자가 다 죽고 나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었다. 북한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면서도 바로처럼 오히려 더 강팍해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꺾고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와 평화,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유와 기쁨,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들을 누리고 사는 나라가 되게 하실 것이다. 지금은 모든 교회가 일어나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범한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고 북한의 우상화와 공산주의가 무너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북한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며 생명의 빛을 비춰 주어야 한다. 고통받는 형제들을 외면한 채 우리 배만 채운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 땅에 갇힌 백성들이 자유를 얻고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김일성민족’이라는 미전도 종족을 복음화하는 일에 모든 교회가 힘을 합하자!
505 |리포트| 서호 목사님과 함께 했던 세월을 돌아보며..._한 석 목사 파일 (1)
편집부
5971 2010-11-10
서호 목사님과 함께 했던 세월을 돌아보며... < 한 석 목사 _ 천응교회 > “평생 선한 싸움에서 승리한 목사님의 뒤를 이을 수 있기를” 서 호 목사님은 합신 1회 졸업생으로 32년 동안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1동에 소재하고 있는 천응교회에서 사역하다가 2010년 10월 24일 은퇴를 하였습니다. 목회자로서 은퇴하는 서 목사님을 바라보며 느꼈던 몇 가지 감회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2007년 1월 중순 호주의 시드니에서 보냈던 한 여름이 떠오릅니다. 서 목사님과 성옥희 사모님이 한국으로부터 시드니의 저희 가정을 방문하여 약 한 달 정도를 같이 지내며 여행하면서 보내었던 시기입니다. 목사님 내외분과 천응교회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목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모습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에 서 목사님으로부터 천응교회 후임목사(물론 성도들이 동의를 한다면)로 와 줄 것에 대한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2007년 5월 초에 그동안 가족들과 함께 약 11년의 세월을 보내었고 아이들의 고향인 시드니를 뒤로 하고 한국으로 역 이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드니에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시드니의 친구들에게 이야기할 때마다 거의 대부분의 친구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시드니에 머무르도록 저를 설득했습니다. 그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 첫째는 한국 목사님의 구두 약속은 언제 변할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임이 되기까지 1년도 아니고 3년의 세월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거의 깨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아이들의 교육 문제였습니다. 이미 신분상으로나 위치적으로나 안정이 되어 아이들을 교육하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는 시드니를 떠나는 저희를 바라보며 대부분 이민자들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서 목사님과의 약속을 하나님 앞에서 한 것처럼 여겼기에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귀국하였습니다. 그때부터 3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며 목사님과 사모님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신학 공부를 10년이나 했으니’ 생각하면서 한국교회 목회에 대하여 내심 평가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두 분의 목회적 헌신과 교인들을 향한 삶을 보면서 ‘과연 나는 저 정도라도 할 수 있을까?’라는 자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두 분의 헌신에 대해 존경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향하여 “은퇴하는 두 분의 모습처럼 나도 선한 싸움을 잘 마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3년 6개월의 시간을 지낸 후 제일 먼저 시드니에서 저의 역이민을 반대했던 친구들에게 한국교회 안에도 한 번 한 약속을 지키는 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서 목사님은 저와 구두로 약속한 내용이지만 마치 주님께서 인치신 것처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저에게 약속하신 대로 아직 은퇴 연령이 되지 않았는데도 약속하신 대로 은퇴를 하셨습니다. 또한 교회의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교회의 형편을 따라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하셨습니다. 노년에 또는 은퇴의 시기에 있을 법한 노욕이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향한 헌신의 태도를 끝까지 고수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에게 서 목사님은 합신 1회 선배답게 교회의 조용한 개혁을 위해 의분과 체휼의 마음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바르지 못한 목회자를 보면 한편으로는 의로운 분노를 내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라고 하면서 그 당사자에 대해 체휼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 목사님은 밖에서 알려져 있는 것처럼 ‘법통 목사님!’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법에 대하여 계속하여 연구하고 공부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힘을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사람을 격려하여 교회에 들어오게 하는 일에 힘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난 세월 함께 하여 온 연세가 많은 천응교회 성도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요양원이나 복지시설을 알아보고 찾아가서 문의도 하는 모습을 동행하면서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서 목사님은 ‘법통 목사님’이 아니라 정이 많은 ‘정 목사님’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하늘을 향한 헌신이 땅의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목회자 중의 목회자였습니다. 제 친구들과 서 목사님을 알고 지내는 목회자들이 가끔 저에게 질문을 합니다. “한 목사, 당신은 후임 목회자인데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 개혁주의적 목회를 할 것인가? 아니면 복음주의적 목회를 할 것인가? 기대해도 되겠는가?” 등등의 질문을 듣게 됩니다. 그때마다 저는 어떤 목회에도 자신이 없습니다. 아니 서 목사님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잘 따라가는 것만도 제게는 버겁고 힘들 것 같아서 “주어진 목장을 잘 지키고 양육하는 목회가 제 목회입니다”라고 말할 따름이었습니다. 솔직히 목사님처럼만 해도 칭찬 듣는 목회자가 될 것 같습니다. 서호 목사님! 성옥희 사모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두 분처럼 그 길을 잘 따라갈 수 있도록 많은 기도와 지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혹 여러분 중에 목사님 내외분에게 개인적인 감사를 표시하지 못했다면 전화나 문자로라도 그 동안의 돌봄과 기도에 감사의 표시를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제 서 목사님은 32년의 목회를 접고 한적한 고향으로 돌아가 일상의 삶으로 들어가시게 됩니다. 그 길에서도 목사님은 영원한 목회의 선배이며 존경하는 목회자로 제 가슴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Selected no image |선교단상(13)| 갈등관리와 팀사역_이기종 총무 (20)
편집부
5544 2010-10-27
갈등관리와 팀사역 < 이기종 목사 ·합신세계선교회총무 > “선교사는 갈등과 해결의 사전 준비 필요해” 한국선교가 건전하게 발전하고 명실상부한 선교강국으로 자리매김하려면 반드시 해결하여야 할 과제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역에 있어서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한국 선교는 그 동안 협력사역 내지는 팀사역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 결과 선교지마다 교회, 신학교, 선교센타 등을 따로 운영하게 되는 중복투자 현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이 지닌 특성과 어느 정도 관계되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지구상에 남아 있는 매우 어려운 선교지역과 종족들을 위한 전략상 변화와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각개전투식 선교에 안주하기보다는 고도의 정보력과 조직력에 바탕을 둔 전략적 선교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팀웍과 네트워크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고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팀사역을 하고자 할 때 당장 예상되는 문제는 ‘갈등이 생기지는 않을까?, 갈등이 생긴다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일 것이다. 갈등에 대한 사전적 이해와 대비가 없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게 되는 것이다. 갈등은 의견이나 목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오해나 제한된 자원, 경쟁으로부터 오기도 한다. 일 때문에 겪는 과업갈등도 있고, 사람 때문에 겪는 사람갈등도 있다. 여하튼 갈등을 피하기보다는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고 해결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대부분의 선교사후보나 선교사의 경우 갈등이 무엇이며,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 갈등해결의 원리는 무엇이지에 대해 배울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선교지에 부임한 선교사가 부딪치는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선교사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갈등이 있는가 하면 자녀와 가족 간의 갈등, 선교단체와 지부원들 간의 갈등, 단체와 단체 간의 갈등 등 여러 갈등이 있다. 게다가 선교지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문화적 갈등도 있다. 지역, 언어, 가치관, 생활관습, 문화유형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그것이다. 선교지는 영적으로 혼란스럽고 예민한 지역이기 때문에 스스로 깨어있어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매순간 힘든 지역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이 모든 갈등과 해결에 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갈등의 국면들만 미리 알아도 갈등으로 인한 부작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갈등은 다음과 같은 국면으로 전개되므로 현재의 갈등이 어느 국면에 있는지를 알고 있으면 다음 단계를 미리 예상하고 대비하는데 도움이 된다. (1)예상단계- 많은 경우 미리 논쟁 예측됨 (2)견해 차이의 단계- 중요한 문제, 손익 문제 (3)토론의 단계- 자기의 정보나 견해가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 서로 검토, 의논 (4)논쟁/대결 국면- 상대방의 문제점 제기, 긴장고조, 감정적 대응, 동맹형성 (5)격화 국면- 오해와 불신, 좌절과 공공연한 적의, 언어나 신체적 폭행 (6)진정국면- 격화의 낭비와 불이익 인식, 협상, 상대방 감정 존중, 신뢰회복, 제3자 개입 (7)갈등의 해소: 토마스-킬만 갈등관리 모델에 의하면 ①회피 ②강요 또는 대립 ③타협 ④양보 ⑤협력 또는 문제해결을 제시하고 있다. 조직은 공동의 목표달성을 위해 개인적인 능력뿐 아니라 팀웍과 시너지 효과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갈등을 극복하고 협력사역, 팀사역이 원활히 수행하도록 준비하여야 한다. 이런 취지로 합신세계선교회(PMS)는 이번 학기에 합동신학대학원에 개설된 ‘선교의 실제 및 훈련’ 과목의 테마를 ‘갈등관리와 팀사역’으로 정하고 갈등관리와 해결을 위한 성경적 원리들을 훈련하고 있다. 인간과 조직의 특성을 이해하고 갈등의 유형과 여러 국면들을 예견할 수 있도록 도우며, 성경적 원리들을 적용하여 변화의 시대에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게 돕는 것이 이 과정의 목표이다. 조직 내에서 갈등이 거의 없을 때 정체현상이 나타나거나, 비생산적인 의사결정이나 비효율성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갈등이 적절하게 관리되지 못하면 오히려 역기능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갈등은 적절하게 관리되고 해결하게 된다면 조직의 성과를 높일 수 있다.
503 no image |목회수상|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_박형용 목사 (10)
편집부
4635 2010-09-29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 < 박형용 목사 · 서울성경대학원대학교 총장 > 기독교는 항상 도전받을 수밖에 없다. 처음 창조 때 죄 없는 에덴동산에서도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도전했는데 죄의 영향이 삶의 전 영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오늘날에는 말할 필요도 없다. 약 4년 전 댄 브라운(Dan Brown)이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라는 책을 통해 세상을 어지럽게 했다. 그 책은 성경의 기록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댄 브라운은 이 책의 판매를 통해 엄청난 부를 모았다. 아마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도 엄청난 이득을 보았을 것이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성경의 말씀을 허구로 몰아 세웠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은 댄 브라운의 주장은 시들해졌고 기독교의 복음은 힘 있게 계속 전파되고 있다. 얼마 전 캠브리지 대학교 교수이며 세계적인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박사가 세상의 존재와 관련된 자신의 과학이론을 책으로 발간하였다. 호킹 박사는 ‘근위축성 측상 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환자로 휠체어에 자신의 몸을 의지하고 있으며 컴퓨터 음성 신디사이저의 도움 없이는 말도 할 수 없다. ‘근위축성 측상 경화증’(ALS)은 미국에서 루게릭병으로 알려져 있는 병이다. 루게릭병으로 진단 받은 환자의 수명은 3-4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호킹 박사는 45년 동안이나 투병생활을 비교적 잘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최근 발간한 자신의 책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에서 “중력과 양자 이론으로 우주가 무에서 저절로 창조될 수 있음을 설명할 수 있다”고 밝히면서 “신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과학은 창조주 필요 없이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호킹 박사는 인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호킹 박사는 이미 창조된 우주와 중력과 양자의 존재를 근거로 그의 이론을 펼치고 있다. 과학자는 무에서 유를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하신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느냐 사람의 이론을 믿느냐의 갈림길에서 선택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사람을 신뢰하느냐의 문제이다. 앞으로도 하나님과 기독교는 도전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는 지난 20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수많은 역사의 테스트를 통과한 진리요, 구세주요, 생명의 주로 남아 계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런 일화가 있다. 하나님과 과학자의 대결이 있었다. 첨단 과학자들이 2020년에는 더 이상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이제 우리의 손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 계셔서 우리를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럼 한 번 경쟁을 해서 너희들이 이기면 내가 물러나지”라고 대답하셨다. 첨단 과학자들이 흙을 손에 들고 인간을 만들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아니야, 내 것으로 말고 너희들 것으로 시작해야지” 하는 통에 첨단 과학자들이 완패하고 말았다. 인간은 항상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깨닫고 살 때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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