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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 no image |목회수상 | 꽃은 단번에 피지 않는다_변세권 목사
편집부
941 2017-08-02
목회수상 꽃은 단번에 피지 않는다 < 변세권 목사, 온유한교회 > 우리의 시간, 현실, 공간은 하나님의 원리를 드러내시는 무대이다 어제 밤에 내린 비로 정원의 장미가 고개를 떨구었다. 꽃은 단번에 피고 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이 땅의 모든 만물과 인생, 역사가 이론과 원칙으로만 되지 않고 실제적 삶의 이야기와 무대로 연결되는 것임을 느낀다. 신자의 대부분의 삶도 고통과 기도로 연결된다. 과정은 비정상적으로 진행이 되더라도 결과는 정상이 되는 것을 본다. 역사만 하더라도 지금은 우리가 다 모르지만 나중에는 그 일이 필연적인 사실이 되듯이 말이다. 역사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하나님만이 그 안에서 일을 하신다. 이스라엘도 엄밀히 보면 성공한 선지자가 그다지 없었고 타락한 통치자 밑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과 시간 속에서 만족한 때가 한 번도 없었다. 인간의 원망은 ‘하나님은 역사와 인생에서 왜 이렇게 일을 하시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란 그 무엇을 원망할 수밖에 없고, 그 무엇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하는 지성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참 이상한 것은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는 원망이 없다가 구원받은 이후에 오히려 원망이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 대목을 잘 통과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을 때까지 원망으로 산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신자의 삶의 현실에서 그 사람의 현실의 분노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어느 한 존재가 분노하고 애를 태우며 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온유한교회 목사로 ‘온유’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만 생각하고 살아온 적이 많았다. 거기에는 공허감이 있었고, 따라서 내가 이중인격자처럼 되기 쉽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박영선 목사님의 메시지를 들었는데, ‘온유한 자는 자기를 주장할 실력과 자격이 없는 자’라고 하셨다. ‘나 또한 어느 곳을 가도 바보짓을 하고 다녔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고 그 순간 ‘온유’의 의미가 더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의 지난 삶들을 돌아보아도 육신이 멀쩡하면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 같았던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그림이 조금 보이는 것 같다. 원망을 하는 것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원망하는 습관을 누구나 예외 없이 기본처럼 가지고 있다. 모세가 그 백성들의 원망을 들었던 것도 이해가 된다. 모세 자신도 원망을 해 봤겠지만 40년 광야생활에서 수많은 인생들을 살펴보며 ‘그래서 목회가 외로운 것이구나!’ ‘사람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구나!’ 하는 걸 배웠을 것이다. 그들은 홍해만 멀쩡히 건넜을 뿐이지 그 후론 원망과 배신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일하신다는 점을 모르면 우리도 동일하게 원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모세의 현실, 예수님의 현실,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깊은 은혜의 도구이고 시간이다. 지금은 하루를 사는 것, 한 가정을 지키는 것이 순교보다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이 현실에서 담아내야 한다. 구원받고 사는 신자의 현실, 시간, 공간은 이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어 선택하게 하시되 하나님이 만드신 자리로 반드시 가게 하신다. 그래서 그 자체가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우리의 시간, 현실, 공간은 하나님의 원리를 드러내시는 무대이다. 죄를 지었든지, 은혜의 자리에 있든지 그 자체가 과정이다. 지금 보면 나중에 그것이 헛것인 것 같고 무의미한 판정을 받을 것 같아도 현재를 그렇게 오늘이라는 현실로 살아 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하루를 삶의 실력만큼 살게 하신다. 그래서 오늘 잘 해도 내일이 불안하다. 이렇게 현실을 잘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설교의 기본도 청중과 설교자가 같은 현실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장이 없는 명분과 정답만 제시하지 말고 성경으로 현실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청중 각자의 고유함, 인생의 특별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와 선택, 지혜와 분별, 책임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 우리는 사실 어떤 문제 해결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의 영광을 누려야 한다. 인생은 늘 못나게 사는 것이고 그래서 세상은 우리에게 함께 죽자고 미혹하지만 우리는 못났어도 신자로서 살아서 고생할 책임이 있다. 그것을 명예와 자랑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의 나이는 숫자적 서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년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현실을 자폭으로 끌고 들어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책과 눈물, 한숨과 선택으로도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갖되 겁을 먹지는 말자. 때로 우리를 죽음의 길로 인도하실 때도 꽃을 피워야하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목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람과 기대를 확인하는 길이 아니라 믿음과 충성과 인내의 길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과 인생의 꽃도 단번에 피지 않는가 보다!
761 |개척, 그 눈물과 기쁨| 개척, 기도로 만난 여호와 이레_김오식 목사 파일
편집부
1351 2017-07-19
개척, 그 눈물과 기쁨 개척, 기도로 만난 여호와 이레 < 김오식 목사, 빛의자녀들교회 > 개척은 기도 없이는 불가능하며 기도로 여호와 이레의 복을 경험한다 이전에 부교역자로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고 교회를 개척하기까지 8개월 간 광야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내일에 대한 어떠한 보장도 없던 기간이었다. 목회자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연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기도와 말씀의 자리에 있기를 원하셨다. 매일 3시간씩, 30일 간 기도하기로 했다. 30일을 끝내었는데도 어떠한 응답이 없자 30일 기간을 더 연장하여 기도했다. 그리고 또 다시 30일을 기도했다. 그러다보니 100일을 기도하게 되었다. 100일을 기도하고 났더니 교회 개척에 대한 마음을 주셨다. 처음부터 교회 개척을 놓고 기도한 것은 아니었고 내가 개척할 거라고 생각지도 않았기에 의외의 응답이었다. 하지만 교회 개척에 대한 확고한 말씀까지 주셨기에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첫 번째 말씀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이다. 앞으로 내가 가는 길은 저 멀리까지 비추는 상향등 불빛이 아니라 나의 발 등만 비추는 등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발걸음을 한 걸음씩 내딛기만 하면 반드시 책임져 주시고 복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었다. 두 번째 말씀은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이다. 이 말씀은 내가 평생 붙들어야 할 목사로서의 마음가짐이요 자세이다. 한 영혼을 귀하여 여기고 소외된 자, 연약한 자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갖는 목사가 되라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성경 말씀을 기도 중에 받고 2015년 12월 14일(월)에 교회를 개척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교회 이름을 “빛의자녀들교회”(엡 5:8)로 정했다. 이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기 위함이다. 그해 2015년 12월 말에 우리 가정(4명)과 이전 교회를 떠나 교회를 찾고 있던 평신도 3가정(9명)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개척 첫 예배는 2016년 2월 14일(주일)로 정했다. 이날로 정한 이유는 설날이 2월 8일(월)이었는데 음력으로 정월 첫 주일이 바로 2월 14일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우리 집(빌라 4층)에서 개척 예배를 드리려 했다. 하지만 성도들의 자녀 중에 유치원생이 2명이 있고, 층간 소음도 문제가 될 것 같아 집 주변에 예배 처소를 찾기로 했다. 1월 25일(월) 오후에 아내와 나는 우리 집 인근에 있는 커피숍을 방문했다. 커피숍 사장님은 타교회를 다니는 분이셨다. 기도 중에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다며 주일 예배 처소로 커피숍을 사용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4개월 전에 다른 개척 교회에 예배 처소로 대여해 주고 있다고 했다. 커피숍 사장님은 가까이에 이종사촌 동생이 일하고 있는 사무실 공간이 가능할지 물어봐 주겠다며 동생을 급하게 불렀다. 놀랍게도 만나서 30초 정도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고민도 해보지 않고 대뜸 예배 처소로 사용하라고 했다. 여호와 이레 되신 하나님은 내가 100일간 기도하는 중에 이미 빛의자녀들교회를 위하여 예배 처소는 물론 함께 동역할 개척 성도들도 준비해 놓고 계셨던 것이었다. 예배 처소가 정해지고 2주 후, 2016년 2월 14일 빛의자녀들교회가 세워지는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날은 하늘에서는 간간이 눈이 내리고 추위로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는 주일이었다. 십여 명이 모여 조촐하게 개척 첫 예배를 드릴 줄 알았는데 소문을 듣고 50명이 넘는 성도들이 찾아오셔서 15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주일부터 20명이 넘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복을 주셨다. 교회가 개척된 지 한 달 정도 지나면서 성도들 중에 주중 새벽예배도 드릴 수 있고, 주일학교 예배도 드릴 수 있는 좀 더 넓은 예배 처소로 옮기자는 의견을 주셨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빛의자녀들교회 성도들이 하나님께 주중에도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주일학교 아이들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처소를 마련해 주세요. 하지만 이제 개척한지 불과 한 달밖에 되지 않아 교회 재정이 없습니다. 장소를 이전하더라도 보증금과 교회 비품들을 감당할 처지가 되지 않으니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십시오. 우리 형편에 가장 합당한 장소와 환경을 열어주십시오.” 기도하고 인터넷 검색창에 ‘교회 임대’를 입력했다. 이곳저곳을 클릭하다가 기독정보넷에서 교회 임대, 매매와 관련된 광고를 보게 되었다. 지금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는 장소와 그리 멀지 않는 걸어서 10분 거리(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에 보증금 삼백 만원, 월세 75만원에 교회 기물들까지 사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임대 광고가 있었다. 문제는 내가 이 광고를 보았을 때 이미 3일전에 올라온 글로서 조회 수가 850이 넘었고, 몇 분의 목사님들이 방문하고 계약을 원하는 분도 있었다. 그런데 나를 보더니 빛의자녀들교회와 계약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개척한지 여덟 번째 주일(4월 3일)부터 50평 되는 예배 처소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는 이전부터 교회로 사용되던 예배 처소였기 때문에 기도가 쌓여 있었고 의자 80개, 마이크와 앰프, 키보드, 양쪽 벽면에 빔프로젝트, 책꽂이 등 많은 부분들을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는 단지 몸만 들어가면 되도록 여호와 이레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까지 아시고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계셨던 것이었다. 그리고 개척한지 만 두 달이 될 무렵 4월 11일(월) 합신 동서울노회로부터 교회 설립 허락을 받고, 그 다음 달인 5월 22일 주일에 교회 설립 감사예배를 드렸다. 개척 전에 받은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빛의자녀들교회에 가난하고 소외된 분들을 보내주시기 시작하셨다. 등록교인 중 10명이 중국 교포 분들이다. 이들은 중국에 가족을 두고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오셨다. 이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우리들이 겪는 고난은 고난도 아닐 정도로 아픈 상처와 힘든 시간을 보내었다. 가정도우미, 청소업체, 막노동, 식당, 요양병원에서 일하면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고 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 주일을 쉰다. 육체노동으로 심신이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주일예배를 사모하여 나온다. 주일 오후에는 순 예배를 통해 말씀을 기반으로 삶을 나누다가 오후 3시 반에서 4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주일 하루 쉬는 날 본인이 하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 어떤 중국 교포 성도는 식당에서 일하는데 주일은 일당을 더 준다고 해서 월요일에 쉬고 주일에 일하러 갔었다. 그런데 심방을 받고 온전히 주일성수를 하겠다고 결단했다. 요즘도 식당 주인은 주일에 나오면 돈을 더 주겠다는데도 교회 가야 하니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2017년 봄에 빛의자녀들교회는 세례 1명, 학습 7명을 세웠다. 세례를 받은 고3 학생은 이전에 대형 교회를 다니다가 부모를 따라 개척 교회로 왔다. 이전에는 교회 문턱만 왔다갔다하던 고등학생이었다. 그런데 빛의자녀들교회로 와서 믿음이 자라고 있다. 작년 가을에 학습을 받고 올 봄에 세례를 받고 예배 중에 간증도 했다. 빛의자녀들교회 첫 세례교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학습을 받은 7명은 빛의자녀들교회에서 처음으로 신앙 생활을 시작하신 분들이다. 빛의자녀들교회는 개척된 지 불과 1년 5개월 밖에 되지 않은 교회이지만 선교적 교회로 한 걸음씩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시다. 교회 개척은 기도로 벽돌을 하나씩 쌓아올리는 것이라 믿는다. 기도 없이 불가능한 것이 교회 개척이다. 기도한 만큼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기도할 때 여호와 이레의 복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교회 개척은 기도로 만난 여호와 이레의 복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때론 기도를 게을리할 때가 있다. 나태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개척의 과정에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경험해 본 자로서 다시 한 번 기도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다. 오늘도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준비하신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우리 모두가 만나기를 바란다.
760 |생각하는 신앙| 그리스도께 배워야 하는 개혁주의자_이상목 목사 파일
편집부
891 2017-07-19
<생각하는 신앙> 그리스도께 배워야 하는 개혁주의자 < 이상목 목사, 동산안교회_전남노회장 > 개혁주의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며 그에게서 생명의 삶을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나는 시골 목회를 한다. 교회에 딸린 넓은 마당이 있어 오래전부터 닭을 키운다. 초지에 닭을 풀어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매일 아침이면 닭장 문을 열고는 닭장으로 들어간다. 청소도 하고 닭모이를 주기 위해서다. 닭장 밖의 풀과 벌레 생각이 간절하던 닭들은 닭장 문이 열리면 줄지어 날아올라 닭장을 빠져 나간다. 한참을 청소하고 닭모이를 모이통에 쏟고 나면 나들이에 바쁘던 닭들이 닭장 안의 모이를 발견하고 흥분한다. 얼른 모이를 먹을 생각에 흥분한 닭들은 모이를 향해 닭장 망으로 돌격하여 머리를 쳐 박는다. 그렇게 몇 번이나 닭장 망에 대가리를 부딪친 후에야 눈앞에 있는 모이와 자기 사이에는 닭장 망이 있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눈치 챈다. 그나마 똑똑한 녀석들은 얼른 닭장 문으로 달려가 식사 대열에 동참하지만 어떤 녀석들은 급한 마음에 눈앞의 모이를 먹으려고 우왕좌왕 할 뿐 도통 문으로 들어가려고 생각을 하지 못한다. 비단 닭 뿐 아니라 사람은 한 가지에 집중하면 그것만 보고 듣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그것 외에는 다른 것을 보려고 하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라는 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무엇을 보든지 이기주의적인 관점으로 본다.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이것이 나에게 손해가 되는가? 이것이 이기주의자의 주관심사이다. 이런 이기주의를 완전히 벗어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세상을 살 수 있으면 참으로 좋으련만 만물보다 부패하고 심히 거짓된 인간의 마음으로 이런 삶을 살기가 결코 만만치 않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런 죄악성이 개혁주의자의 생각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를 배우고 개혁주의를 좋아하여 자신의 입장으로 취하면서도 어떤 개혁주의자들은 이기주의를 개혁주의에 접목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개혁주의같이 이익이 나는 신학이 어디 있겠는가? 개혁주의자는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구원관을 받아들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죄용서 받은 것을 믿는다. 그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믿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신 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재자이신 것을 믿으며 그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다하여 우리를 통치하는 아버지 이신 것을 믿는다. 개혁주의자는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는다. 그것에 만족한다. 의를 누리고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안에 거하는 것을 확신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정도면 만족하는 것이다. 더 이상 좋은 것이 없다. 여기가 일부 개혁주의자의 이기주의적인 관점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왜 그럴까? 개혁주의에 이기주의를 접목했기 때문이다. 이기주의라는 필터를 사용하여 개혁주의를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내게 이익이 되고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우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로 주시려는 자기부인과 희생과 연합의 영광된 삶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자유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야 나를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라고 하셨다. 이것이 너희가 내 제자인 표식이 되리라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진리의 말씀에 투신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과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기적인 개혁주의자의 시각으로 보면 이렇게 사는 것은 너무 불편하고 번거로울 뿐이다. 이기주의의 필터에 걸리는 손해 보는 일이다. 그래서 더 이상 나아가기를 사양한 채 기왕 얻은 구원과 의에 만족하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고 그리스도에게서 믿음의 삶을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주실 천국의 은혜와 영광을 어찌 사모한다 할 수 있겠는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사는 것 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사랑으로 하나 되는 모임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겠는가? 개혁주의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며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의 삶을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하지만 작금에는 이기주의라는 올가미에 걸린 개혁주의자가 많은 듯하다. 홀로 거하기를 좋아하고 자기 포지션에 만족하며 노회와 총회에 참여하여 서로 격려하고 배우기를 소홀히 한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이기주의이다. 오직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취하려다 보니 주의 뜻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야 누릴 수 있는 하나됨의 행복에서 멀다. 이기주의는 마음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뿌리 깊은 죄악이다. 모든 죄가 그렇듯이 이기주의도 어리석어서 그 마수에 걸린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잣대로만 만물을 보려고 하여 해를 도리어 득이라 우기고, 이익을 손해라 굳게 믿는다.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간 아이를 어여삐 본 땅콩가게 주인이 아이에게 말한다. “얘야 한 움큼 땅콩을 집어가도 된다” 아이가 쭈볏거리자 주인이 아이에게 말한다. “옜다 손 내밀어라” 아이가 두 손을 모아 내밀자 아주머니는 두 손 가득 땅콩을 담아 주었다. 엄마가 아이에게 묻는다. “얘, 왜 얼른 땅콩을 집지 않았니?” 아이가 대답한다. “제 손보다 주인아주머니 손이 훨씬 더 크니까요” 어떻게 주를 섬길 것인가를 내가 결정하지 말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주를 섬기는 것이 진정 이익이 나지 않겠는가? 내가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러 오신 구주시라면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이기주의의 무덤에서 일어나 그리스도와 사귀며 그리스도께 배우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데 주목하는 성장하는 개혁주의자가 되자.
759 |은혜의 뜨락| 인생의 꽃망울을 다시 피게 하신 하나님!_김재열 목사 파일
편집부
1092 2017-07-19
< 은혜의 뜨락 > 인생의 꽃망울을 다시 피게 하신 하나님! < 김재열 목사, 뉴욕센트럴교회 > “피지 못한 꽃망울 이제 피게 해 주세요. 평생 주님을 위해 향기를 토하리이다” 나는 믿음이 전혀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이때에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성극을 보러 간 것이 내 생애 교회에 처음 간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후에 서너 번 주일학교에 나갔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에 들어가서 채플도 참석하고 성경도 배웠지만 깜깜하게 지냈으나 돌이켜보면 감사한 일이었다. 고교 시절에 반 친구 중에 목사의 아들이 있어서 고등부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설교 시간에는 늘 졸았지만 모든 행사에는 꼬박꼬박 참여하였다. 그렇지만 신앙의 체험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고3 때 폐결핵 진단을 받으면서 삶의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을 구출하시는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8세 어린 아들을 죽을지 살지 모르는 천리 길 마산 요양소에 맡겨 두고 서울로 떠나시던 그 옛날 어머니의 뒷모습을 그리면서 몇 해 전에 이런 글을 써보았다.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예전에 한국에서는 4월 7일이 보건의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건강을 강조하는 그날. 유난히 사랑했던 18세 큰 아들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중증의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하늘의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다는 국립 마산요양소에 입원 허가를 받고 엄마와 아들이 그 곳에 도착한 것은 5월 8일 바로 어머니날이었다. 아들은 그날 엄마의 가슴에 빨간 카네이션 한 송이 대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피멍을 새겼던 날이다. 밀대처럼 키만 크고 뼈가 앙상한 당신의 큰아들을 떼어 놓고 떠나야 했던 우리 엄마! 유난히도 어렸을 때부터 병치레를 많이 했다며 튼튼하게만 자라기를 일심으로 바랐는데 아이구! 이 자식이 이제 사람 구실을 하겠는가? 아들 대신 피를 토하듯 절규하던 어머니의 통곡이 50년이 다 지났는데도 어머니날만 되면 여지없이 이 늙은 아들의 귓가를 때린다. 요양소에는 전국에서 모인 중증 환자 250여 명이 있었다. 매일 4~5명이 죽어 나갔다. 죽음이 나에게도 가까이 와 있었다. 참 많이 절망했다. 기운이 없어 피를 토할 힘도 없었다. 그렇게 비참하게 죽기보다는 스스로 사라지는 길을 생각했다. 병동 맞은편 깊은 산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키 1m 80cm에 몸무게 47kg이었으니 눈만 감으면 곧 주검이었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숨이 차올랐다. 인적이 닿지 않는 곳. 거기서 며칠만 누워 곡기를 끊으면 더 이상 힘이 빠져 조용히 생이 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움푹 파인 구덩이에 누웠다. 해는 졌고 밤새들이 울었다. 처음 듣는 짐승 소리도 들렸다. 체념은 또 다른 평안을 주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덮었다. 이슬이 내리기 시작했다. 땅속에서 차가운 물기가 허약한 육체를 뚫고 솟아올랐다. 온몸이 떨려 왔다. 도리어 몽롱했던 정신이 쌩쌩해졌다. 도저히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비겁자가 되었다. 병실로 돌아와 몇날 며칠을 정신없이 지냈다. 또 다시 죽음의 길을 찾아 나섰다. 바닷가 높은 절벽 위에 섰다. 밑을 내려다본다. 시커먼 바다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바다는 수영을 잘하는 날 받아드리지 못할 것 같았다. 천길 같은 낭떠러지 벼랑에 온 몸이 뒤틀린 작은 소나무가 나를 향하여 소리치고 있었다. “날 봐! 난 이 벼랑에 붙어서도 살아 있잖아! 생명은 죽음보다 강한 법! 맘대로 못 죽어!” 난 또 한 번 비겁자가 되었다. “그래! 생명이 부질없지만 때로는 죽음보다 강해! 죽는 셈치고 살자! 살아보자!” 얼마의 날들이 지났다. 옆 침대의 몇 살 많은 동아대학생 형의 기침 소리가 잠 못 이루는 내 귀에 들려왔다. 앗! 저 기침… 각혈이 분명해… 본능적으로 일어나 그릇을 받쳐 들고 옆 침대로 건너갔다. 그 형은 사시나무 떨듯 두려워하고 있었다. “뱉어! 뱉어야 해! 토해 내지 않으면 호흡기에 쌓인 피들이 굳어서 숨이 멎는 것이 폐결핵이야.” 그 형은 토하기 시작했다. 한없이 토해냈다. 역겨운 피 냄새를 피해 보려고 읽을거리를 찾았다. ‘박군의 심정’이라는 그림 전도지가 있었다. 어둡고 불행한 박군이 행복한 얼굴로 바뀌는 그림들이었다. 박군의 맘속에는 온갖 추잡하고 사납고 더러운 짐승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맘 밖에서 예수님의 빛이 박군의 마음에 비칠 때에 결국 모든 육신의 더러운 죄악들이 쫓겨나갔다. 그리고 예수님이 박군의 중심에 앉으셨다. 그의 얼굴은 스마일로 바뀌어 있었다. ‘당신의 삶이 행복하길 원한다면 이 기도문을 읽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난 진지한 마음으로 기도문을 읽어 나갔다. 아주 간결하고 짧은 기도문 하나가 마치 연막탄 같았다. 순간적으로 찬란한 구름이 나를 감쌌다. 내가 몸 밖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살아 있음이 이렇게도 찬란한 줄 미처 몰랐다. 그 시간 이후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확신이 가냘픈 가슴 속에 가득 차올랐다. 꼬집어 표현할 수 없이 기뻤고 감사했다. 머리맡의 꽃병에 꽂힌 꽃망울을 보며 기도했다. “주님! 저 피지 못한 꽃망울 이제 피게 해 주세요. 피게 하시면 평생 주님을 위해 향기를 토하리이다!” 이젠 죽어도 살아도 전혀 두렴 없는 커다란 확신에 사로 잡혔다. 6개월 만에 요양소를 떠난 그날 이후 50년의 삶 속에 주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다. 주님은 살게 하시고 죽게도 하신다. 거름더미에서 들어 귀족의 자리에도 앉히시는 분이시다. 꽃망울도 다시 터뜨리시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할렐루야! * 김재열 목사(합신 4회)는 30여 년 간 캐나다 토론토를 거쳐 미국 뉴욕에서 이민 목회 중이다. 최근 동역자들과 2만 6천 평의 비전 랜드를 준비, 전인적 섬김의 프로젝트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시작했고 현재 씨드선교회 USA 이사장으로 130여 선교사 가정을 섬기며 뉴욕실버선교회를 설립했다. 저서로는 「예수, 내 삶의 내비게이션, 생명의말씀사, 2014」이 있다. 본고는 필자의 회고록의 첫 부분을 요약 기고한 것이다. _ 편집자 주
758 |살아가며 섬기며| “나는 네 형편을 모른다”_강승대 목사 파일
편집부
1109 2017-06-21
<살아가며 섬기며> “나는 네 형편을 모른다” < 강승대 목사, 합포교회 > “주님 제 형편을 잘 아시지요?” “나는 네 형편을 모른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전도사로 교회를 봉사하던 우리 부부에게 하나님은 첫째 아기를 주셨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바닥에 눕혀 있는 것과 사람 팔에 안겨 있는 것은 정확하게 구분하였습니다. 바닥에 눕혀 놓으면 30분을 자지 못하고 죽을 듯이 울었습니다. 팔에 안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울지 않고 잠을 잘 잤습니다. 밤새도록 아기를 안고 지내는 우리 부부는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주위 어른들은 아기가 낮과 밤을 구분하는데 보통 100일이 걸리니 그때까지 잘 참고 견디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우리 부부는 100일이 빨리 지나가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아내는 밤새도록 아기를 돌보고, 나는 새벽 3시쯤 일어나 아기를 받아서 새벽 예배 갈 때까지 안고 돌보았습니다. 그러다 피곤하여 졸다가 아기를 떨어뜨린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아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전도사로서 새벽기도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갔습니다. 의무적으로 또는 사명감으로 나갔지만 육체가 피곤하여 새벽예배를 드리고 난후에 졸음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허벅지를 꼬집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럴수록 은혜는 받아야 한다고 제일 앞에 앉았는데 왜 그렇게 잠이 쏟아지는지...... 당시 새벽예배는 작은 교육관에서 드렸습니다. 피곤을 이기지 못하여 잠잘 곳만 찾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새벽에는 이층 예배실이 비어 있었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린 후에 개인기도시간이 되면 아무도 없는 예배당으로 살짝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장의자에 누워 ‘주님 내 형편 이해해 주시죠?’ 하며 다리를 쭉 뻗고는 모자라는 잠을 보충했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100일이 오기를 주님 오시는 것보다 더 기다리면서 새벽기도 시간에 예배당 2층에 올라가 대신 잠을 잤습니다. 그렇게 기다렸던 100일이 지나갔습니다만 이 녀석은 여전히 밤낮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1994년 3월의 어느 새벽, 밤새도록 아기의 울음에 잠이 부족했던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새벽예배를 마치고 본당 2층에 기어 올라갔습니다. 어제처럼 장의자에 누워 다리를 쭉 뻗으며 독백으로 ‘주님 제 형편을 잘 아시지요?’하며 눈을 감으려고 하는데, 내 독백보다 더 단호한 주님의 음성이 마음에 분명하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 형편을 모른다!!” 너무나 분명한 책망의 음성에 나는 깜짝 놀라 잠이 확 달아나며 용수철처럼 후다닥 일어나 의자 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머리카락이 서는 것 같고 놀랍고 두려움으로 그 새벽에 얼마나 회개 기도를 했는지 모릅니다. “주여! 육신의 피곤 때문에 기도를 쉬어도 봐 주실 줄 알았습니다. 100일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 될 줄 알았습니다. 이 일이 영적인 문제인 줄 몰랐습니다. 주여! 이제 육신을 쳐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육신의 생각과 안일주의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그 새벽에 알게 되었습니다. 100일이 지나도 계속 밤에 울어 대는 아이가 민감한 성격을 가졌다고만 생각했지 그런 형편 가운데서도 기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영적 소경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아무리 아이가 울어서 몸이 피곤해도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로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언제 그랬는가 싶게 깊이 잠을 자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요구를 이루어 드리니 주님께서 힘든 환경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또한 둘째 아이 때는 아예 밤에 우는 일이 없이 잘 넘어 가게 하셨습니다. 그날 그 새벽의 사건 이후로는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주님은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757 |개척, 그 눈물과 기쁨| 어느 개척 목회자의 부활_전홍구 목사 파일
편집부
1070 2017-06-21
개척, 그 눈물과 기쁨 어느 개척 목회자의 부활 < 전홍구 목사, 새출발교회 > 개척의 만경창파 속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교회 개척에 대하여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갖고 있었던 꿈을 잊어 본적은 없었다. 그리고 신학생 시절에 “개척 목회는 절망과의 싸움”이라는 개척 선배의 말도 직접 들었다. 그래서 교회 개척이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쉽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했던 기억도 있다. 이러한 꿈을 늘 잊지 않으면서 8년여 부교역자 생활을 끝으로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 가운데 개척을 시작하였다. IMF 한파의 영향도 있었지만, 사역하던 교회를 사임한 다음날 현재 장소가 연결되어져서 지금까지 개척 목회 사역을 수종을 들고 있다. 선배들의 조언을 듣기보다 내 몸이 앞섰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보다 젊은 의욕이 앞서며 뭔가를 보여주리라는 각오도 있었다. 땅을 사지 않고, 수십 억 짜리 예배당 건물을 짓기보다는 먼저 사람 성전(고전 3:16)을 짓는데 투자하는 교회를 세워가리라는 다짐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름의 꿈을 갖고 출항한 개척호. 그러나 막상 이론과 관망이 아닌 몸으로 마주친 개척의 바다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야기 하나 절대로 땅을 사지 않겠다던 치기 어린 맹세는 개척을 시작한지 불과 5-6개월 만에 침수되기 시작하였다. 감정평가사라며 낯선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예배당과 방안 구석구석을 촬영해 가더니 1차 경매 통보가 날아오고 2차, 3차 경매 통보로 몇 달에 걸쳐서 진행이 되었다. 교회와 사택을 포함하여 5천만 원이 넘는 전세금을 모두 잃고 쫓겨나든지, 아니면 땅을 사든지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1년이 넘도록 법원으로 땅 주인에게로 경매 신청자에게로 쫓아다녔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암담함 가운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쫓겨나리라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인 마감 일자를 1주일 여 남겨 두고 노회의 여러 선배 목사님들과 교회들의 도움으로, 개척 2년이 못되어 수천만 원의 은행 채무는 있지만, 예배 처소인 조그마한 땅을 얻게 되었다. 이야기 둘 신학 재학생 시절에 5년이 넘어도 개척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선배 목사님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만이 아시는 불성실함과 게으름이 있을 것이라는 혼자만의 판단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저들과는 다르리라는 일종의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1년, 2년, 3년이 지나면서 초라한 개척호는 잔물결, 큰 물결에 일엽편주처럼 요동쳤다. 왔다가 가는 성도, 서로서로 부딪치면서깨어지는 성도, 친 형제보다 더 반갑게 개방한 목회자 가정의 삶의 모습을 가까이 접하면서 오히려 시험에 든 성도,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간관계의 부대낌 속에서 기둥같이 여겼던 성도들의 너무나 쉬운 이동 등이 거센 파도로 몰아쳐 왔다. 3년이 지나 자립은 고사하고, 몇 안 되는 성도나마 오히려 감소하는 형편. 그리고 쉽게 만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성도들이 몇 명이냐?”는 관심 표현을 받을 때마다 개척 목회자로서의 영적인 자존감과 사명에 대한 자긍심은 무력감으로 역전되면서 분노의 감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8월 어느 새벽기도 시간. 아무도 오지 않는 예배실 강대상 의자에 엎드려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차라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존심과 완전하게 깨어져 버린 것 같은 목회적 야망(?)에 대한 좌절감은 불빛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조각배와 같았고,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죽기를 기도했던 엘리야의 심정(왕상 19:4)과 방불했다. 그 때에 들여온 하나님의 음성은 “네가 이제야 깨달았느냐?”라는 말씀이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눅 9:23)는 말씀을 개척 목회 표어로 삼고서도 알지 못했던 것을 한 순간에 기억나게 하셨다. 새벽기도 시간에 순간적으로 깨달아진 말씀은 나의 목회적 야심과 교만과 자만심과 어리석은 우월감에 대한 죽음을 선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느껴지며, 찬송이 회복되고, 오히려 개척교회 목회자의 길로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나오게 되었다. “성도가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 맡겨 주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라는 말씀의 위로와 함께 옛사람이 죽고 새로운 목회적 방향으로의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주일 후 개척 이래 최대의 등록 사건이 있었다. 근처의 세 가정의 초신자들이 함께 찾아와서 한 주일에 등록을 하였다. 그리고 7개월여 지나도록 그 중 두 가정은 신앙생활을 잘하였다. 어느 개척 목회자의 부활은 만경창파 거센 물결 속에 빠져가는 듯한 완전한 좌절의 환경을 통과하면서도, 모든 것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신 후에 깨닫게 하여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었다. * 본고는 필자의 과거의 ‘개척 일기’ 중의 한 편으로서 개척 목회의 은혜와 귀함을 함께 나누고 생각하기 위해 소개한다. -편집자 주
756 |은혜의 뜨락| 고난이라는 이름의 터널_이영숙 사모 파일
편집부
1065 2017-06-21
< 은혜의 뜨락 > 고난이라는 이름의 터널 < 이영숙 사모, 지구촌교회 > 어두운 터널인 고난을 통과하면 밝은 희망을 만나게 하시는 주님 그해(1986년) 우리 부부의 마음은 온통 설렘과 희망으로 가득했었다. 남편의 꿈이었던 캐나다 유학을 떠나기로 계획하고 준비 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 캐나다 유학의 길이 열린 것이다. 더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누구보다도 컸기에 과감하게 모험을 한 것이다. 우리는 어린 딸과 생후 9개월 된 아들로 인해 쉽게 같이 떠날 수가 없어서 남편이 먼저 가서 준비한 후에 내가 뒤따라가기로 했다. 전세금을 유학비용으로 마련해 놓고, 나와 아이들은 충남에 있는 시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우리가 쓰던 모든 짐은 시골집의 창고에 들여놓고,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는 시골 생활이 시작 되었다. 왠지 모를 막연함과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으로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불안감도 약간 있었다. 김포공항까지 배웅해 주러 나오신 고 장경재 목사님과 많은 교우들이 공부 잘하고 꼭 돌아오라는 격려와 축복을 받으며 남편은 떠났다. 그 시절만 해도 공항에는 많은 사람들이 배웅해 주던 시절이었다. 남편이 출국한 후 잘 지내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하면서, 나는 나대로 캐나다 비자를 얻기 위해 인터뷰 준비를 했다. 교통이 불편한 시댁에서 어린 아들을 업고 서울의 캐나다 영사관을 출입하느라 종종 걸음을 해야만 했지만 희망이 있기에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까다롭게 질문하는 면접을 통과하고 비자를 받은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부푼 마음으로 출국을 기다리던 어느 날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생활비를 절약 하려고 책 배달을 하다가 군대에서 다친 허리를 또 다쳤다는 것이다. 의료보험도 없고 하루 병원비만 백 달러가 넘는 그 곳 병원에 계속 다니기 부담이 되어서 일단 귀국한다는 것이다. 의지가 강한 남편은 한국에서 치료를 받고 다시 출국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지만 무너지는 절망감으로 내 마음은 아득해 졌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출국할 날만 기다리는 나에게 날아든 소식은 부풀었든 내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 유학을 갔다가 그냥 돌아오면 주위에서 사람들이 뭐라고들 할까. 사람이 다친 것이 무슨 큰 죄도 아니련만 부끄러운 마음이 살짝 들었다. 아픈 남편 생각보다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가부터 걱정이 되었다. 공항에 나와서 환송해 주었던 교우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유학을 마치지 못하고 잠시 돌아온다는 남편을 부끄러워하는 내 자신이 정말로 부끄러운 존재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주님! 공부하고 학위를 받고 귀국하면 주님께도 영광이고 저희도 기쁠 텐데 이렇게 돌아와야 하나요?’ 하며 섭섭함이 들었다. ‘그래, 내가 모르는 주님의 뜻이 있겠지.’ 나는 애써 담담해지려고 마음먹었다. 공항에서 만난 남편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순간, 나는 눈이 흐려지고 여린 내 마음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나를 보고 애써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씁쓸함이 묻어나는 모습에 마음이 저려왔다. 옆에는 건장한 남자(사실은 공항의 환자 도우미)가 여행 가방을 밀고 나오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우울하고 슬픈 재회였다. 당하고 있는 처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따뜻하게 맞아 주는 분은 부모님이기에 우리의 세간살이가 있는 시댁으로 갔다. 뜨거운 온돌방에 허리를 찜질하고 쉬면서 남편은 점차 회복이 되어갔다. 아마도 어린 두 남매의 재롱이 큰 약이 되어 회복을 빠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남매에게 ‘아버지’의 얼굴과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시킬 가장 중요한 때를 놓치지 않고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던 것도 잘된 일이었다. 한 달도 안 되었지만 딸은 어느새 사투리 말을 해서 우리 부부에게 웃음을 주었다. 그러나 남편은 아버님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현실에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캐나다로 떠날 생각이었기에 희망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에 마침 섬겼던 교회 담임목사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학은 다음에 가고 교회 사역을 하라는 것이다. 교회의 긴박한 필요에 따른 강력한 부름에 갈등하는 남편에게 나는 단호히 말했다. 사역했던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갈 거면 당신 혼자 가라고. 난 부끄러워 얼굴 내밀지 못하겠다고. 공부 잘하고 돌아오라는 교우들 앞에 실패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너무 싫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마음이 힘들고 복잡했던 그런 시간들이었다. 결국 화성교회로 돌아갔고 교우들의 안타까운 위로와 혀를 차는 모습에 고마움과 함께 부끄러움으로 숨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미숙아처럼 여리기만 했던 나를 하나님은 낮추시어 겸손케 하시고 오직 그분만이 생의 주권자이심을 터득시키시고 믿음을 영글게 했던 아름다운 성숙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은 지금 주님의 뜻을 따라 최선을 다해 사역을 하고 있다. 하지만 12년 전 또 한 번의 큰 수술로 육신의 고난이 끝나지 않았지만 힘든 중에도 맡겨주신 사역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다. 전적인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만약 다치지 않고 그곳에서 학업을 계속 했다면 그곳에서 목회했을까, 아니면 한국에 돌아 왔을까. 가끔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다. 오직 주님만이 아시리라... 그러나 군대에서 다친 허리와 목 수술로 인해 지금까지 통증이라는 고난과 친구하며 살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내 마음에도 처연한 아픔이 있다. 씩씩하고 건강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본인만이 느끼는 고통과 통증으로 늘 한계 인생을 살아가며 안으로 힘들어하는 모습, 고난과 고통을 끌어안고 내색하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힘차게 이겨내는 모습. 하지만 나는 안다. 활동의 제약에서 오는 내면의 고뇌를. 또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을 열어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에게 크고 작은 고난의 터널이 있었기에 조금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때로는 절망과 좌절을 느끼지만, 그 자리에서 희망의 꿈을 꾸고, 희망의 싹을 찾아내어,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을 선물 할 수 있다면 고난이 주는 유익이라 생각해 본다.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고난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면 주님의 선하심을 믿고 어두운 터널인 고난을 통과하면, 아름답고 밝은 내일의 희망을 만나게 하실 주님을 찬양한다. 고난을 동굴이 아니라 터널로 허락하신 주님께…
755 |생각하는 신앙| 감사는 고백이며 훈련의 열매이다_최현갑 목사 파일
편집부
1032 2017-06-21
<생각하는 신앙> 감사는 고백이며 훈련의 열매이다 < 최현갑 목사, 예닮교회_강원노회장 > 조건과 환경에 상관없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감사 지난봄은 목련과 벚꽃이 유난히도 아름답게 피었었다. 그러나 장미 대선 후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 적잖이 편치 않은 마음으로 여름을 맞이한다. 교회를 개척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목회한다고 뛰어다녔는데 벌써 19년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개척한 후 8년 쯤 되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치고 몸도 여기저기 병원을 의지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개척교회를 섬기다 보니 빚도 만만치 않아 많은 고민과 목회에 대한 회의가 느껴지기까지 했었다. 마음 한편에선 목사로서 부끄럽지만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더 이상 기쁨이나 감사보다는 불평으로 하루하루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교회를 지켜야만 했다. 아내는 그런 나를 보다 못해 외국에 선교지 방문을 다녀오라고 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냥 두면 큰 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빚을 내서라도 쉬는 시간을 갖게 해 주어야겠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내의 배려로 선교지를 방문한 것은 내 목회에 전환점을 가져왔던 시점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도네시아라는 나라를 방문하게 됐는데 그곳은 시내에서 약간만 외곽으로 나가도 내가 어릴 적 자랐던 시골집보다 훨씬 더 힘들고 초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나의 목회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를 실감하며 부끄러움으로 내 자신에게 반성의 시간들을 갖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다시 돌아와서는 개척할 때의 심정으로 힘을 내어 먼저 감사를 고백하는 훈련을 하며 하루하루를 이겨내며 걸어왔다. 지나 온 날들 속에 하나님께서 때마다 채우시고 어루만지시는 은혜를 베푸셨음에 하나님께 감사의 무릎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감사하라고 말씀한다. 감사는 좋은 일이나 행복한 일들이 생겼을 때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백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감사는 그 이상의 감사를 해야 함을 성경을 통해 알게 된다. 감사한 일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감사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으로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6:1). 바로 그것이 조건과 환경에 상관없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감사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심리학자 제임스 깁슨(James J. Gibson)은 “다른 공부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방법부터 배우라. 감사의 기술을 배울 때 그대는 비로소 행복해진다”라고 했다. 전광 목사의 ‘평생감사’라는 책에서도 “행복하면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감사는 고백이며 훈련의 열매라는 생각이 든다. 목회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내가 사랑해야만 할 사람이 사랑해지지 않는 점이었다.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지 하는데 나를 비방하고 배신하며 떠나는 사람들까지도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늘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 사람 때문에 내가 훈련되어 지금 이렇게라도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감사함과 더불어 오랜 숙제를 풀어 가는 신비함을 체험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목회자로 부르신 그 부름에 의지하여 지금껏 걸어온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 앞으로 가야하는 사명의 길에서 더 많은 현실적인 고민과 불평할 일들이 다가올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기 때문에 감사할 수 없는 조건에서도 말씀을 붙들고 감사하며, 현실적인 고민의 훈련들을 잘 감당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감격을 감사로 물들이는 은혜가 늘 풍성했으면 좋겠다. 오래전 나는 장신교단에서 목회를 하다가 합신교단과 하나가 되면서 합신의 사람이 되었다. 합신 목회대학원이 좋아서 공부도 하고 개혁주의 목회자로서 자부심을 가지며 목회를 하고 있다. 하지만 ‘개혁’을 말할 때 개혁주의를 위한 개혁이 아닌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을 향한 좀 더 따뜻한 개혁이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참여한 감사가 먼저 늘 풍성히 흐르는 가운데 부족하면 기다려 줄 줄 알고, 틀렸다고 소리부터 높이기보다는 시간이 좀 걸려도 너그러운 인간미와 온유함으로 차근차근 개혁해 가며 감사의 고백과 훈련의 열매로 물들여지는 따뜻한 개혁주의 합신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도 가져 본다.
754 no image |은혜의 뜨락|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잘 싸워라"_나택권 장로
편집부
1057 2017-06-02
< 은혜의 뜨락 >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잘 싸워라" < 나택권 장로, 호산나교회 > 건전한 싸움은 자신과 상대방이 같이 누리는 결과가 되어야 창2:25절에서 보는 바같이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는데 창3:7절에서는 “선악과를 따 먹은 후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에서 보듯이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여 그 분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사단이 제공한 악한 육신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더 이상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순수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순수한 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책임전가, 편견, 악습, 핑계, 단절, 불순, 적개심, 수치심을 가진 악한 육신의 노예가 된 것이다. 스피노자는 말하기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덕의 첫째되는 유일한 기반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이해해준다 또는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얼마나 지혜롭고 중요한지 모른다. 사람들이 일을 저질렀다고 하면 흔히 하는 접근 방식은 그 일의 원인 분석과 그 일의 결과를 따진다. 그리고서는 제각기의 견해대로 평가하며 비난하거나 혹은 칭찬을 한다. 이것으로 모든 일을 평가를 하고 끝을 내면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너무 서둘러서 고정하려고 하거나 충고하게 되면 오히려 문제를 정확히 보지 못하고 일을 그르치게 된다.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는 어떠한 비난이나 충고를 하거나 칭찬을 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탁월하고 객관적으로 사람을 보는 방법이 된다. 철학자 베이컨은 인간을 가리켜 “편견의 동물”이라고 지적하고 편견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했다. 대체로 편견에 사로잡히면 선입관념에 지배되고 고정관념의 포로가 되어 그릇된 판단을 내리기 쉽다. 그래서 남에 대해서는 준엄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며 타인을 사정없이 비판하지만 스스로의 허물은 덮어버린 채 자기 의와 자랑에만 급급하게 된다. 우리 인생이 신념, 가치관, 환경, 생활 방식이 다르더라도 둘이 함께 살아가려면 조율할 일들이 많다. 서로 다른 점에 끌려서 사랑에 빠졌고 또한 그 다른 점 때문에 가끔 싸우기도 하지만 어차피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잘 싸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싸우는 것은 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같이 누릴 수 있는 싸움의 결과가 되어야 한다. 내가 본질적으로 원했던 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753 no image |생각하는 신앙| 충전은 하고 다니십니까?_최광희 목사
편집부
1078 2017-06-02
<생각하는 신앙> 충전은 하고 다니십니까? < 최광희 목사, 행복한교회 > 영혼의 충전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 어제 제가 아주 큰 실수를 했습니다. 외출을 하는데 그만 스마트폰을 놓고 나간 것입니다. 충전을 하느라 꽂아놓고는 깜빡 잊고 나갔으니 이 얼마나 야만적인 행동이란 말입니까? 토끼가 간을 빼 놓고 갈 수는 있어도 현대인이 스마트폰을 두고 나갈 수는 없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 시대입니다. 어린이들은 물론 노인들도 스마트폰을 들고 다닙니다. 남보다 늦게 스마트폰에 돌입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활용하는 것을 봅니다. 스마트폰의 쓰임새는 거의 무제한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합니다. 외출할 때 스마트폰을 놓고 나가는 것은 영혼을 빼놓고 가는 것만큼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가지고 나간다 해도 미리 충전을 완료 해 놓지 않으면 그것 역시 야만적이고 몰상식한 행동입니다. 요즘은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기에 충전만 해 나가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 사이에는 보조배터리가 필수입니다. 선물이나 기념품 중에서는 휴대폰 보조배터리가 최고입니다. 그런데 외출할 때 휴대폰과 보조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에 그렇게 마음을 쓰는 당신은 당신의 영혼은 어떻게 잘 챙기고 있습니까? 사람의 몸은 음식을 잘 챙겨 먹어서 건강을 유지합니다. 그러면 영혼은 무엇으로 충전하고 무엇으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설마 본인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죠? 특히나 성도라면 그렇게 우기는 사람은 없을 테지요. 사람이란 몸과 영혼의 결합체이고 만일 몸에서 영혼이 분리면 즉시 시체가 되는 것은 잘 알고 계시죠? 그러므로 영혼이 죽어버리거나 지쳐서 떠나버리지 않도록 잘 먹여 주어야 합니다. 영혼의 충전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 밖에 없습니다. 조용히 앉아서 천천히 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만이 영혼을 충전하는 방법입니다. 후다닥 급속충전을 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야 충전이 됩니다. 현대인들에게 스마트폰이 방전된 상태란 매우 불안하고 짜증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방전된 것은 훨씬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혹시 최근에 당신은 사는 낙이 없고 너무 짜증스럽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방전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스마트폰이 아니라 영혼 말입니다. 돈이 고갈된 것이 아니라 영혼이 고갈된 것입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스마트폰이라도 한번 충전해서 일주일 내내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한번 식사하고 일주일 내내 버틸 수는 없습니다. 계속 건강하고 활기차게 생활하려면 매일 찰 챙겨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충전입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저는 그 가사를 현대적으로 바꾸어 ‘오늘 집을 나서기 전 충전했나요?’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나 목사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생기 있고 행복한 삶을 위해 날마다 영혼의 충전을 하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752 |살아가며 섬기며| 흑염소 목자_박종훈 목사 파일
편집부
1193 2017-05-24
<살아가며 섬기며> 흑염소 목자 < 박종훈 목사, 궁산교회 > “목회자로서 양을 치는 원리를 창조 세계에서 체득하며 말씀을 더 생생히 깨닫는다” 친환경 농법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작물을 괴롭히는 온갖 풀들이다. 농부의 관리가 없다면 어떤 농작물도 못 이기는 잡풀을 제거하는 일은 힘든 노동이요 전쟁이다.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풀을 잘 활용하기 위해 흑염소를 사육한지 벌써 삼년이 돼 간다. 세 마리로 시작했는데 이제 한 무리를 이루었다. 시대가 변해 시골의 지천에 자라는 풀의 가치가 예전과는 다르다. 농경 중심 시대에 조금 넉넉한 집에서는 한우를 사육했었다. 소는 수레도 끌며 쟁기를 채워 논밭을 가는 재산목록 1호이기도 했다. 날마다 일정한 꼴을 먹는 소에게 좋은 풀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먼저 베는 것을 머슴들의 능력으로 여겼다. 남의 전답을 가리지 않고 풀을 뜯어 가면 토지 주인에게도 이로운 일이었다. 또 산의 풀들은 땔감으로 사용했다. 그래도 남는 풀들은 거름에 이용했다. 풀을 먹고 난 후 배설한 쇠똥은 쇠똥구리의 먹이였고 이를 운반하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은 아이들의 최고의 놀이였다. 마른 쇠똥은 불놀이용 불쏘시개로도 그만이었다. 풀을 귀하게 보던 시대는 가고 지금은 무서운 농약을 살포해 없애야 하는 농사의 방해꾼으로 여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육하고 번성하는 특성은 같지만 오늘날 풀은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나는 흑염소를 키우면서부터 다시 옛날의 가치를 회복하려고 애쓴다. 흑염소는 초식 동물이라 사방의 모든 풀들을 먹는다. 울타리 뒤로 애써 만들어 놓은 넓은 무궁화 동산이 있다. 길이 잘 들면 이곳에서 방목을 한다. 염소들은 무리 지어 다니는 습성으로 대장 염소가 앞장서면 나머지는 줄줄이 따라서 이동하기에 돌보기가 아주 쉽다. 보통은 목자가 되어 따라 간다. 양이라면 앞장서서 가지만 염소는 뒤에서 몰아가야 한다. 필수 도구는 지팡이다. 약간 경사진 동산이라 대나무 지팡이는 힘이 되기도 하고 필요시 염소를 다스리는 막대기 역할도 한다. 이 지팡이는 천적들로부터 안전히 보호하는 무기도 된다. 염소들이 나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면서도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주인임을 알고 안심하는 것을 보면 ‘경외한다’는 말의 의미를 실감한다. 이로써 성경에 나오는 목동 다윗의 생활을 체험한다. 최고의 시편 중 하나인 23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과 자신을 목자와 양의 관계로 아름답게 노래했다. 여러 의미로 이스라엘의 목자였던 다윗의 위대한 능력들이 목동 시절에 훈련됐음을 느낀다. 양치는 현장, 하늘과 땅과 초장이 펼쳐진 창조 세계 속에서 다윗은 신앙과 시심을 길렀고 모든 삶을 신앙적으로 다양하게 표현한 탁월한 시인이 된 것이다. 그는 양을 노리는 포식자들을 지키며 물맷돌을 던지는 훈련을 했고, 맡은 일에 철저한 책임감을 갖게 되었으며 후에는 훌륭한 지도자로 쓰임 받았다. 또한 양을 치며 한가한 시간에는 수금을 타다가 그 실력을 인정받아 사울 왕에게 음악치료를 해줄 정도가 되었다. 시대와 환경은 다르지만 나도 목자의 심정을 알아가고 있다. 염소들이 흩어져 풀을 먹기 시작하면 나만의 시간이 주어진다. 소나무 그늘 아래서 높은 하늘과 푸른 산,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묵상기도를 한다. 목회자로서 양을 치는 원리를 창조 세계에서 체득하며 말씀을 더 생생히 깨닫는다. 요즘엔 기특한 휴대전화로 말씀도 듣고 찬송도 부르며 삶의 여유를 누린다. 예상치 못한 노동의 즐거움을 맘껏 누인다. 칠 년 동안 동산을 관리하며 힘들고 외로웠지만 이제는 악착같이 타고 올라가는 칡덩굴 종류도 염소들이 제거해 주므로 관리와 사료 획득 면에서 일거양득이다. 마을을 아름답게 하겠다는 의지로 가꾸기 시작한 무궁화 동산이 이제는 흑염소들의 가장 중요한 먹이 공급처가 되었다. 그 동안 수고한 대가를 받는 느낌이다. 순환 농법이고 가족농으로 적당한 흑염소 사육을 통해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삶의 방식을 알게 되었다. 현실에 맞게 적용한다면 환경오염 방지는 물론 안전하고 건강한 식탁도 책임지리라 여긴다. 부족하나마 시골의 목사이자 흑염소의 목자로서 섬기면서 하나님과 인간, 창조 세계와 성경을 더 깊이 알아 마을의 가치와 내 자신의 유익이 조화롭게 발전되길 바라며 산다.
751 |마른 땅에 단비를| 바람 불어 좋은 날_이야고보 파일
편집부
1227 2017-05-24
<마른 땅에 단비를>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야고보, T국 일꾼 > 바람 부는 날이면 바울이 걸었던 드로아-아소 길을 기억한다. 동료 선교사들을 보내고 홀로 걸으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처음 선교지를 향해 떠나던 1995년, 교회 앞에서 두 살 반, 오 개월 반 된 두 아이를 안고 우리 부부가 했던 인사말이 떠오릅니다. “저희는 잊히기 위해 떠나갑니다.” 21년이 넘은 지금 아내와 함께 그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웃곤 합니다. 잊힌다는 것의 의미를 선교지에 도착한 후에 비로소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잊힘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고국을 방문할 때면 늘 그 자리에서 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맞아 주신 교회와 교우들, 친지와 벗들의 손길을 통해 잊힌 존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 속에 우리의 자리가 있었던 겁니다. 이제 우리 부부는 잊힘의 비밀을 배워 나가는 선교사의 삶이 너무 행복해서, 이 은밀한 영적 기쁨을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가 사역하는 이곳은 초대 교회의 땅입니다. 바울과 동역자들, 파송 교회와 후원 교회들, 선교사들과 현지인 일꾼들이 함께 일궈낸 초대 교회의 선교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소아시아 땅입니다. 이 선교 현장에서 바울은 바울대로, 로마 제국의 핍박 아래 교회는 교회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몸에 채워야 했던 험한 시대. 그러나 그 시대의 광풍조차 삼키지 못한 교회의 선교. 그 무엇으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 없음을 증명하신 성령의 선교. 1, 2차 세계 대전 속에서도 결코 단절된 적이 없었던 하나님의 선교. 그 세계 선교의 행진이 지금도 한국 교회를 통해서 계속되고 있음은 은혜 중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인구의 99.8퍼센트가 무슬림인 이 나라에서 주님을 섬기며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더 없이 큰 특권입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거친 영적 상황으로 인해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육체적인 고단함이나 관계의 갈등, 사역적 어려움으로 인해 지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저희 가정에 몇 차례 큰 바람이 분 적이 있습니다. 여러 해 전 성탄절 전날 현지인 의사로부터 암 선고를 받은 아내를 급히 국내로 후송한 후 병실에서 밤을 새워야 했던 시간. 돌아가서 현지인들을 다시 한 번 더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을 때 그 응답으로 아내를 살려 주신 하나님. 그래서 망설임없이 선교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시간. 다시 한 번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드렸는지요. 동역자 부부와 현지인 가정 사이의 오해로 인해 공동체가 벼랑 끝에 섰던 두 번째 교회 개척 시기.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동역자들도 현지인 신자들도 떠나가 버린 그 빈자리에 남겨진 우리 부부. 눈물 골짜기를 지나면서 다시 회복된 관계. 다시 한 번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신 주님의 이름을 얼마나 찬양했는지요. 물론 지금도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날을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위기와 갈등에 직면할 때면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 노래하려고 애썼고, 그 결과로 이전보다는 좀 더 빨리 여유를 되찾는 습관이 제법 몸에 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노래하기에는 강도가 너무 센 폭풍의 언덕에 설 때면 여전히 어려워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바람 부는 날이면 바울이 걸었던 드로아-아소 길을 기억합니다. 선교 여행 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중 동료 선교사들을 배편으로 보내고 홀로 아소까지 걸어간 그 한적한 시골길… 그는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는 그 답을 디모데후서 4장 16-17절에서 찾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디모데후서가 기록된 연대가 바울이 로마에서 다시 투옥된 A.D 66-67년이라면, 바울은 드로아에서 아소까지 걸었던 시골길에서 장차 복음의 영광을 위해 받게 될 고난을 감당할 수 있도록 밤새 기도한 것 같습니다. 바울의 생애에서 이 드로아-아소 길이 없었다면, 디모데후서 4장 16-17절의 위대한 고백도 없었을 겁니다. 지난 몇 년 간 한국 사회와 선교 현장이 겪어온 고난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가족임을 기억케 하는 몸의 흔적이 되길 소망합니다. 본국에서도 선교 현장에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열매들이 익기도 전에 땅에 떨어지기도 하나, 그 스트레스는 나무와 열매들을 더 튼실하게도 합니다. 그러니 이제 함께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노래합시다. 노래할 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의 삶은 새 힘을 얻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역사로 세워질 것으로 믿습니다. 샬롬.
750 no image |생각하는 신앙| 간신과 직언_김현일 목사
편집부
1130 2017-05-10
<생각하는 신앙> 간신과 직언 < 김현일 목사, 증평언약교회 > 도서관에서 '간신'을 검색하니 두어 권의 책이 눈에 띤다. 간신은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의 비위를 맞추며 알랑거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지혜롭기도 하고 말도 잘하고 사람을 주도하고 관심을 끄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눈과 귀를 장악한다. 간신이라도 간혹 국가가 어려울 때 충신으로 불렸다. 그러나 많은 왕들이 이뤄 놓은 평화와 번영은 간신의 탐욕에 의해서 서서히 무너졌다. 그들은 겉으로 나라를 위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이익밖에 모른다. 결국 위대한 왕조차도 간신을 곁에 둠으로 자신의 업적을 역사의 뒤안길로 내던지기 일쑤였다. 책을 계속 읽자니 간사한 수법을 이용해 보려는 마음이 꿈틀댄다. 잘만 이용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 매력적인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현세적 욕망을 추구하는 옛 본성과 간사함은 아주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아니 성공과 번영이라는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에게 간사함은 필연인지도 모른다. 비단 간신만의 문제일까? 부르짖는 사자처럼 포악한 왕들,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탐욕을 채우는 굶주린 늑대 같은 재판장들, 거룩한 삶을 포기하고 율법과 상관없이 사는 제사장들, 그들의 말에 미혹된 백성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다. 이들의 비위를 거스르거나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 누굴까? 그들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은 곧 좌천이고 가난이자 변방의 삶을 의미할 텐데 누가 나서서 그들에게 직언을 하려 할까?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을 찾으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지 않겠느냐고 설득한다. 여호와는 의로우셔서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심을 말하는 이유는 공의가 교회의 본분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매일 뜨는 태양이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신의 공의를 비추시는 하나님께서 계심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확인시켜 준다. 사람이라면 간신들의 성공을 은근히 부러워하는 욕망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스바냐 선지자는 직언을 계속한다. 우리는 이 역할을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당연하게 여겨야 할까? 그렇지 않다. 스바냐 선지자로 하여금 사자 같은 왕들과 늑대 같은 재판장들의 불의와 거짓을 대항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간사한 선지자들과 거꾸로 율법을 범하는 제사장들의 위선을 반대할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그 대답은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749 no image |살아가며 섬기며| 마지막 전화_강승대 목사
편집부
1298 2017-04-19
<살아가며 섬기며> 마지막 전화 < 강승대 목사, 합포교회 >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여 준 주일학교 선생님이 생각 나 몇 년 전 모처에 설교를 하려고 나가려는 참에 아내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내의 표정을 보니 심각한 통화인 듯해서 그냥 집을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통화를 한 후 아내는 나에게 휴대폰을 넘겨주었습니다. 전화를 걸어 온 상대방의 목소리는 낮았습니다. 상대는 자신을 통영 해양 경찰서 김 아무개 경사라고 하였습니다. 하도 사기 전화가 많은 세태라 애써 신분을 확인해 보니 틀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분은 마치 죄를 지은 범인을 취조하듯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었습니다. “김O영씨를 아십니까?” 이름을 듣고 보니 옛날 아내의 주일학교 학생이었습니다. “어떤 관계입니까?”라고 다그치는 태도에 기분이 나빠서 “왜 이렇게 기분 나쁘게 질문하십니까?”하고 했더니 “김O영씨가 5월 달에 통영 바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김O영” 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해운동에서 만났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내는 지나가는 아이들을 만나면 전도를 했습니다. 그때 길에서 만난 아이가 ‘김O영’이었습니다. 아내는 토요일마다 집으로 심방가고 주일 아침이면 데리러 가서 초등 6학년까지 교회를 잘 나왔습니다. 그런데 중학교에 올라갈 때쯤 사춘기가 되어 신체적 변화가 찾아와서 갑자기 살이 많이 쪘습니다. 그 아이는 대인기피증이 생기고 밤늦도록 컴퓨터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심방가면 “교회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고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주 “자살하면 왜 안 되나요?”하며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다. 아내는 신앙적으로 권면을 많이 했고 오랫동안 심방을 갔지만 결국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점점 자기만의 세계에 갇혔고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쯤에는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우리를 만나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아는 척도 없이 지나갔습니다. 교회를 건축하고 월영동으로 이사를 와서 더 이상 그 아이를 만나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해 봄 어느 날 거리에서 아내와 함께 길을 걷는데 뜻밖에 그 아이와 마주쳤습니다. “O영아” 이름을 불렀더니 우리를 보고 아주 반가워하였습니다. 대학은 통영에 서 다니다가 휴학하였다고 했습니다. 폰 번호를 서로 주고받고 다음날 문자를 몇 통 보내었더니 그 주일에 교회에 나왔습니다. 아내와 나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잃어버린 어린양을 다시 찾은 목자의 심정이었습니다. ‘O영’이는 우리 교회의 부흥을 보고 놀라워하며 좋아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도 교회를 나왔습니다. 아내는 일부러 아이를 만나 밥을 사 주고 곧바로 소그룹 또래들의 모임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1-2주 교회에 나오더니 그 다음부터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주말마다 아내와 나는 생각이 날 때 연락을 취하였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통영 경찰서로부터 전화가 온 것입니다. 형사가 우리 부부를 전화로 조사한 이유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나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기 때문이랍니다. 그것도 새벽 2시 30분 경에…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인 줄도 모르고 저는 몇 번이나 그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사실 아내는 휴대폰을 잘 사용하지 못해 낮에도 통화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던 사람이 나의 아내였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순간에 10여 년 동안 자신에게 사랑과 관심을 보여 준 주일학교 선생님이 생각이 났던가 봅니다. 형사와의 전화를 끊고 우리는 그 새벽 2시 경에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는지… 많이 자책하였습니다. 며칠 동안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그 후로는 밤마다 혹시 휴대폰이 진동으로 되어 있는지, 배터리는 충전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버릇이 되어 갑니다.
748 no image |개척, 그 눈물과 기쁨| 이제 다시 개척이다!_이원평 목사
편집부
1340 2017-04-05
개척, 그 눈물과 기쁨 본보는 교단 내 개척목회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주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을 틈틈이 함께 나누려 한다. 개척 준비 중이거나 개척 후 분투, 시련, 안정의 길을 걷고 있는 당사자들의 진정성이 담긴 다양한 글(수기, 편지, 일기, 제언, 보고 등)을 기다린다(A4 용지 2장 이내). 또한 주변의 신실한 개척목회자들을 제보로 소개해 주기 바란다. <편집자 주> 이제 다시 개척이다! < 이원평 목사, 합신 36회 졸업_춘천에서 교회 개척 중 > “성경을 진실하게 믿고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배우는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주님의 뜻을 따라 성실하게 목회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실 것임을 믿는다.” 1997년 군 제대를 앞둔 여름에 소명을 받고 이듬해 신학대학에 입학하자 고향 교회의 목사님과 성도님들은 내가 회개하고 신학생이 되었다며 기쁘게 축하해 주셨다. 그리고 장학금과 책값, 심지어 용돈도 주시며 격려해 주셨다. 그렇게 많은 분들의 축복과 기대 속에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도의 길을 걷게 됐다. 내가 자란 교회는 100년도 더 전에 선교사님이 세우셨고, 3.1운동 당시에는 그 일대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던 거점 교회였다. 조부모님과 손자들까지 가족 4대가 예배를 드리고 내가 목사 안수까지 받은 그 교단은 사실 장로교단도 합신도 아니었다. 사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교단과 그 신학적 의미를 거의 몰랐다. 대부분이 그렇듯이 부모님 손에 이끌린 것이지, 신학적 신념 때문에 그 교단 교회에 등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와 교리를 배우며 나는 일종의 신학적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신념은 어느덧 나를 일종의 신학적 회심에 이르게 했다. 아니, 신학교에서 진정한 영혼의 회심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문제는 나의 신학적 신념과 내가 속한 교단의 정체성이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 그렇게 갈등이 시작되었고 그 갈등은 오랜 기간 나를 힘들게 했다. 그 교단의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했지만 내면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당연히 그때의 신학 동기들과도 소원해졌고 지방의 목사님들과도 친밀한 교제를 갖지 못했다. 2011년 봄, 기나긴 고심 끝에 평생 성장하고 안수까지 받은 교단을 떠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신학적 자유주의의 흐름과 혼란된 교단의 정치 상황을 더 이상은 감내하기 힘들었다. 솔직히 나의 결정이 과연 올바른지에 대한 회의도 있었다. 주위의 만류와 목회 현실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오랫동안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교단에 머무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개척했던 교회와 정든 교단, 동기들을 떠난 후 한동안은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자니 미안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많이 외로웠다. 실로 오랜만에 신학생이 나왔다며 장학금과 도서비까지 듬뿍 지원해 주시던 고향 교회의 목사님과 성도님들께도 너무 죄송했다. 고향의 목사님은 반대하시며 화도 많이 내셨다. 그래도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 교단에서도 한동안은 퇴회 조치를 미루고 다시 돌아오면 언제든지 받아 주겠다고 까지 했지만! 이듬해인 2012년 나는 그토록 바라던 합동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할 수 있었다. 이전에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던 중에 박윤선 박사를 만났고, 합신의 설립 과정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합신은 나의 마음에 강렬히 자리를 잡았다. 한번은 새벽까지 박윤선 박사의 전기를 읽다가 너무 가보고 싶은 나머지 대전에서 아침 일찍 한달음에 달려가 합신 교정을 거닌 일도 있었다. 그때 발걸음을 돌려 내려가기 전에 ‘아, 나도 이런 곳에서 신학을 배우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잠시 하늘을 향해 눈물의 기도를 올렸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기도가 응답되었다! 성경을 진실하게 믿고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배우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모두 그렇겠지만 내게는 각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건강이 좋지 않아 처음 일 년은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복학을 했지만, 가방 속에는 한동안 진단서가 들어 있었다. 담당 의사 선생님은 공부를 말렸지만, 내가 계속 배워야 된다고 하자 진단서를 써 주셨던 것이다. 그분은 내가 학교 공부를 다 못 마칠 것으로 생각하셨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드리며 다녔다. 수업 외에 따로 밤늦도록 공부하는 것은 힘들어 수업 시간에는 정말 귀를 기울여 들었다. 본의 아니게 나는 합신에서 가장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났으며 많이 쉬는 게으른 신학생이었다. 그런 생활 중 나는 채플 시간마다 큰 은혜를 받았고 수업에도 늘 감사한 마음으로 임했다. 공부하며 교단 내에서 파트 사역지까지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학업 중에 졸업 후 교회 개척을 염두에 두게 되었다. 물론 좋은 교회에서 부교역자의 경험도 쌓아 보고 싶었고, 자립된 교회의 안정적인 청빙도 소망하기는 했지만,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여러 군데 이력서도 내보았지만 결과는 없었다. 전임 사역지가 주어지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던 때도 떠오른다. 무사히 합신의 과정을 다 마치고 대구의 모 교회에서 2년 동안 파트 사역자로 받아주셔서 감사하게 사역한 후 지난 연말에 사임을 했다. 그리고 지난 석 달간 하나님께 진로에 대한 인도를 구하며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얼마 전에는 앞일과 사역에 대한 조언을 듣고자 개혁주의 목회의 모범을 보여 주고 계신 선배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그분과 대화하던 중에 개척에 대한 논의가 오갔고, 목사님은 격려해 주시며 다시 개척해 보라고 용기도 북돋아 주셨다. 그 목사님은 내게 너무도 고마운 분이다! 그분은 내가 교단을 옮기고 합신에 입학하기까지 친절한 조언과 지대한 도움을 주셨다. 또 장학금 등으로도 후원해 주셨다. 그분이 왜 나를 이토록 도와주시는지 그 이유를 다 알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라는 것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지면을 통해서나마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그렇게 개척할 결심을 굳히고 집으로 내려오면서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는데, 기뻤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시 교회 개척의 은혜를 허락하셨기 때문이었고, 두려웠던 이유는 나의 부족함 때문이었다. 과거 개척 경험을 통해 부족함과 연약함을 뼈저리게 겪었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지금도 별로 나아진 것 같진 않다! 그러나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구원하시는 은혜를 전하는 이정표가 되게 해주십사 진심으로 아뢰었다. 내가 흠모하는 존 뉴턴과 로이드 존스 목사의 생애처럼 말이다. 내 마음은 이내 소망으로 충만해졌다. 감사하게도 망설이던 아내도 의기투합했다. 어린 줄로만 알았던 자녀들도 기도하며 전도하겠다고 힘을 보탰다. 고등학생인 큰 딸은 반주할 수 있고, 중학생인 둘째 딸은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만들어 보겠다고 한다. 셋째 딸은 예쁜 솜씨로 교회를 꾸밀 수 있을 것이다. 막내는 자기 친구들을 많이 전도하겠다고 한다. 요즘은 주일 설교와 전도 계획을 세우며, 개혁교회 전통에 합당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예배 순서를 구상하는 중이다. 성도의 ‘일치된 신앙’과 ‘바른 신앙’의 진작을 위해서 요리문답을 어떻게 가르치며 해설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있다. 수요일은 신앙 강좌(성경개론, 신앙고전 해설, 교회사 강의 등)와 기도회를 겸한 형태로 진행하려고 한다. 또한 규모가 작겠지만 교회도서관도 일단 시작할 것이다. 알차고 아름다운 영혼의 도서관으로 성장할 것을 꿈꿔 본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마치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6-8). 사도 바울이 남긴 이 유언은 죄악의 깊은 늪에서 방황하며 죽어가던 한 청년을 돌이켜 거룩한 목회 사역으로 이끌었다. 바로 이 말씀이 지금까지 나를 붙들어 주었다. 이 말씀이 아니었다면 진작 목회를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시 개척이다! 앞에는 강원대학교가, 옆에는 강원사대부고가, 뒤에는 서민 아파트 단지가 있는 최적의 입지를 주님이 허락하셨다. 도시에서는 매우 드물게 주위에 교회도 하나 밖에 없다. 주께서 예비하신 터로 믿는다. 말씀 가운데, 말씀과 함께 거니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며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며 회개에 이르게 하실 것임을 나는 믿는다. 열심히 기도드리며 주님의 뜻을 따라 성경에 입각하여 성실하게 목회하도록 성령께서 이끌어 주실 것임을 또한 믿는다.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소망한다.
747 |은혜의 뜨락| 세상 떠날 때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_나택권 장로 파일
편집부
1213 2017-04-05
< 은혜의 뜨락 > 세상 떠날 때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 나택권 장로, 호산나교회 >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제 그만 하면 됐다”라는 정도의 말은 남길 수 있어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고 사회적으로 안정권에 들어서면 더 높은 자리를 탐내는 등 위치와 자리를 탐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욕망을 가져야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리고 그것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그만하면 되었다고 만족하고는 하지만 이에 끝나지 않는 지나친 욕심은 비극의 씨앗으로 싹트기 마련이다. 약 1:14~15절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며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된다. 사람마다 그가 죽을 때 유언으로 하는 말이 제각기 다르겠지만 나름대로 만족한 표현을 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즉, 죽을 때 원망을 하거나 후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은 억울해서 차마 죽지 못하는 사람,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 그리고 죽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 앞에서 자기 자신이 살아온 지난 삶을 정리하면서 그래도 만족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고 감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넉넉지 못한 장사를 하는 집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철학 연구에만 힘쓰다가 80세 죽을 때까지 대학 교수를 지내고 독신으로 지냈을 뿐 아니라 불행한 누이들의 생활을 돌보았지만 정작 자신은 여행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교제도 하지 않고 오로지 책을 저술하면서 서재와 학교 사이를 오가며 생활하다가 죽을 때는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칸트가 이러한 말을 한 것을 보면 그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성실하고 보람 있게 살았는가를 알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표는 우리가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고 스스로에 의한 얽매임에서도 자유로워지며 순간순간의 우상숭배도 버림으로써 진실로 그분의 형상을 입게 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나의 삶을 돌이켜 볼 때 실패와 실수도 했고 유혹을 극복 못하고 넘어진 때도 있었으며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인정받기보다는 간신히 벼랑 끝에서 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아슬아슬한 인생길을 걸은 것 같다. 이러함에도 믿음으로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까지 온 것 같다. 세상에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순 없지만 항상 희망이 있는 죄인으로 살아왔기에 오늘도 주님 앞에서 통회하며 자복하는 심령의 자리에 앉아 있다. 특히 전도의 사명에 관해서 그렇다. 한 영혼을 위해 전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아예 어렵게 생각하고 접근하기를 망설이고는 한다. 남의 허물과 잘못은 잘 비방하지만 그 영혼에 대한 불쌍한 마음은 항상 잊어 버리고 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라는 성경 말씀이 있듯이 전하는 자가 없이는 영혼 구원의 사명은 감당치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전도의 사명을 선교헌금으로 면책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직접적 전도를 게을리했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헌금은 물론 직접적 전도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매주 월요일을 택하여 전도하기를 시작했다. 독일의 신학자요 설교자인 본 회퍼는 히틀러 독재 정권 시절에 살면서 그의 독재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다. 어느 날 그는 설교로 청중들에게 말하기를 “어느 미친 운전사가 차를 몰고 전진하면서 많은 교통사고를 내며 달리고 있는 걸 기독교인인 당신이 목격했다면 부상자들을 치료만 해 주고 기도만 해 주겠는가? 아니면 그 미친 운전사를 차에서 끌어내겠는가?”라고 물었다 한다. 이 설교를 간접적으로 들은 히틀러는 이런 예언자적 설교자를 그대로 놓아둘 리가 없었다. 히틀러는 본 회퍼를 핍박하고 사형을 시켰다. 그 당시 본 회퍼가 죽기 전에 환상을 보고 남긴 일화가 전해졌는데 그 내용은 히틀러가 죽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실 때 “너 히틀러는 그동안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무고한 피를 많이 흘리게 했으니 지옥으로 가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한다. 이 때 히틀러는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하나님, 저는 사람이 죽으면 이러한 세계가 있는 줄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알았다면 저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한다. 그리고 “누구도 저에게 이런 것을 알려 주지 않았고 전도하는 자도 없었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히틀러를 비방했던 설교자 본 회퍼는 가슴을 치며 회개했다고 한다. “주님! 저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 전도할 생각은 미처 못했습니다. 그를 권좌에서 끌어 내리려고만 했지 전도하려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라고. 시인 타고르는 ‘죽음의 신이 당신의 문을 두드릴 때 당신은 생명의 광주리 속에 무엇을 담아서 그 앞에 내놓을 것인가’라고 했다. 즉, 우리의 종말론적 삶은 오늘 죽어도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오늘 내가 죽는다 해도 나는 지금까지 이것을 위해 살았고, 내가 사는 동안 이룬 것은 이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시며 가르치시고 우리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달려 고난받으시며 대속물로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조금도 낭비도 아낌도 없었고 몸소 다 내어 주신 실천하신 삶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칸트가 죽을 때 남긴 말처럼 “이제 그만하면 됐다.”라는 정도의 말은 남길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을 조금도 낭비 없이, 아낌없이 살아서 세상을 떠날 때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다. 이 은혜를 통해 다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남은 생애를 긍정적으로 펼쳐 나가야 할 것이다.
746 no image |생각하는 신앙| 다시 황금률을 생각한다_민현필 목사
편집부
1136 2017-03-22
<생각하는 신앙> 다시 황금률을 생각한다 - 어느 콜센터 직원의 자살 소식을 듣고 < 민현필 목사, 산울교회 부목사 >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최근 전주의 한 콜센터에서 일하던 고3 졸업을 앞둔 여고생이 저수지에 몸을 던져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미 50여 일이 지난 일이지만 CBS의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인터뷰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고객들의 온갖 불평과 욕설도 부족해 콜센터 관리자로부터 실적을 강요받는 심리적 압박감까지 더해져 고3 여학생은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 학생이 스스로 생을 포기할 즈음 내가 섬기던 부서 선생님도 고3 졸업을 코앞에 두고 사회 생활 경험을 해 보겠다고 콜센터에 취직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가 오길래 '무슨 일 있냐고' 안부를 물었다. 그랬더니 콜센터 일이 너무 '힘들고 무서워서' 한 달 만에 일을 그만 뒀다고 했다. 그 얘기를 하면서 내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서 나도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다 큰 장정이지만 아직은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순수한 선생님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극한의 스트레스였던 모양이다. 이 두 가지 일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감정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는지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사실 나 자신도 내 이익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콜센터 직원들에게 모질게 굴었던 적이 많기 때문이다. 고객인 내 입장에서 그분들은 인격을 가진 개인이기 이전에 거대한 이동통신사를 대표하는 주체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나도 이런 구차한 모습 보이는 내 자신이 싫지만 서민들을 우롱하는 대기업들의 횡포는 더 싫고, 게다가 주머니 사정이 뻔한 사역자의 삶을 살다 보니 때때로 마음이 너무 작아질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춰 보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내 동생이고 조카이고 우리 부서 선생님일 수도 있는 그런 분들이다. 아주 가끔은 불평을 막 쏟아 놓고서 '혹시 그분이 우리 교회 청년이거나 성도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혼자 있을 때의 내가 진짜 내 모습이다. 동시에 스마트폰 너머 익명의 주체를 향한 내 감정 표현의 방식 또한 내 본 모습일 수 있다. 아무리 상거래의 관계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 고3 여학생은 한 달에 100만원도 채 받지 못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내가 막 짜증내고 감정을 쏟아 부었던 사람들도 결국 고압적인 조직 문화의 피해자이고 약자들인 셈이다. 어쨌든 그 인터뷰를 들으면서 내가 상처 줬던 아파트 수위실 아저씨(이분들도 간혹 완장이라도 찬 것처럼 주민들에게 불친절할 때도 종종 있지 않던가), 이름 모를 콜센터 직원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분들이 자기 직무를 어떻게 감당하든 그분들에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내 몫이고 내 인격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너무 빡빡하게 살지 말아야겠다. ‘감정수업’의 저자인 철학자 강신주씨의 지적처럼 '을끼리의 폭력'에 내 자신을 내모는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역지사지의 공감적 성찰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주님께서도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시지 않았던가. 칼빈은 이웃 사랑의 삶이란 다름 아닌 이 황금률을 실천하는 삶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황금률의 핵심이 정의(justice)와 깊은 상관이 있는 ‘형평(equity)의 원리’라고 보았고, 이것이야말로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을 실천하는 원리임을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분노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속에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웃 사랑의 정신이 담겨 있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볼 일이다.
745 no image |살아가며 섬기며| 고통 중에 있는 당신 곁에_이종석 목사
편집부
1188 2017-03-22
<살아가며 섬기며> 고통 중에 있는 당신 곁에 < 이종석 목사, 좋은교회, C·C·C 사랑의 호스피스 대표 > 사랑의 마음들을 모아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과 다리가 된다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옷은 벗겨지고 거반 죽은 상태로 버려진 사람이었기에 누가 보더라도 가능성이 없고 소망 없는 절망의 사람이었습니다. 한 제사장이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한 레위인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날마다 분주함 속에 살아가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를 보고 먼저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자기희생을 통한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강도 만난 사람은 가장 어려운 절대 위기의 순간을 소망과 평안으로 보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겠습니까? 오늘도 우리 곁에는 말할 수 없는 통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통당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소망이 없고, 생산적이지 못하며, 미래 지향적이지 못하다고 외면해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나의 이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며 마지막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임종 말기 환자들을 우리는 그가 최후에 주님의 부름을 받는 그 순간까지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인간다운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고통 받는 그들 곁에 함께 있어 주어야 합니다. 죽음은 결코 절망이 아닙니다. 죽음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은혜의 한 과정이요 소망의 통로일 뿐입니다. 호스피스 사역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잃은 양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합니다.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사람이 너무 어두워지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삶의 목표를 생각하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궁극적인 치유이자 구원의 완성으로 나아가는 은혜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죽음이 있기에 이 땅에서 사람들이 자만하지 않고 겸손해질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향하여 임종의 과정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픈 것도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말기 암 등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이 마음 깊이 전이되어 오기도 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당신 곁에 있고 싶습니다!’ 이 말은 죽음의 과정을 겪고 있는 임종 말기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C.C.C. 사랑의 호스피스 사역의 표어입니다. 건강한 사회, 건강한 공동체는 반드시 고통 가운데 있는 연약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 져야 합니다. 작은 자, 연약한 자에 대한 배려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그 사회와 공동체의 성숙도를 진단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는 미성숙한 사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까마귀들도 어린 새끼가 모이를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함께 날아간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약자들이 빨리 도태되어 사라져야 사회가 더 좋아진다고 하는 무서운 생각들을 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작은 자들을 업신여기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세상에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죽음의 과정 가운데 있는 임종 말기 환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대의 아픔이며 장애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땅히 우리 사회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의 과정을 겪지 아니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언젠가는 내 자신이나 나의 가족들이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임종 직전의 말기 환자의 고통과 아픔을 신체적, 정서적, 영적, 즉 전인적으로 돌보아 줌으로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호스피스 활동에 자원 봉사자와 후원자로 참여하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악하게만 보이고 어둡게만 보이는 것 같으나 아직도 세상에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들을 모아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이 되고 사랑의 다리가 된다면 이 사회는 점점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가게 될 것입니다. 온갖 것들로 차고 넘쳐나고 있는 이 아름답고 풍성한 세상에서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아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있다는 생각을 한번만이라도 해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744 no image |목회수상| 아버지와 하나님 사이에서_최광희 목사
편집부
1383 2017-03-22
아버지와 하나님 사이에서 < 최광희 목사, 행복한교회 > 평생 섬겨 오던 하나님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길로 갈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나가 살려면 삼 체가 필요하다. 없어도 있는 체, 몰라도 아는 체, 못 나도 잘난 체 해야 한다. 그래야 무시당하지 않는다.”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는 가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내가 어려서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참 나쁜 곳이구나. 그렇게 위선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지. 노력해 봐야겠지만 세상 살기가 쉽지 않겠구나.” 그러다가 학생 시절에 아버지보다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경에서 언제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장이라고 하시면서 겸손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침 아버지는 제가 대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돌아가셨기에 저는 돌아가신 아버지보다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며 평생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종인 사도 바울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하면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순진하게도 그래야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하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남보다 잘난 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좀 할 줄 아는 것이 있어도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제 속에 있는 교만이라는 놈 때문에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좀 더 들고 세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때로 사람들에게 불공평한 대우를 당할 때면 어릴 적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반대로 살았더니 이런 일을 당하는가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바울의 말보다는 각자 자기 아버지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대신에 ‘낮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시옷(ㅅ)에 점만 하나 찍어서 지읒(ㅈ)으로 바꾸면 이렇게 전혀 다른 뜻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모르고 저는 너무 순진하게 살려고 하다가 헛고생을 하는가 싶은 억울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보다 나를 조금 높이는 것, 그것은 제 본성과 잘 어울리고 어릴 적 아버지의 말씀과도 부합되고 세상을 편리하게 사는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잘 모른다, 잘 못한다, 나는 부족하다고 말하면 그게 겸손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진짜 모르는 사람, 못하는 사람, 못난 사람으로 취급해 버립니다. 난 평생을 바보 같이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 시대는 자기 피알(PR)시대입니다. 어떤 회사가 제품을 만들면 제작비와 광고비가 맞먹는다고 합니다. 이제 중년에 접어든 저는 아버지와 하나님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나를 낮추면서 살아야 하나? 아니면 이제부터 못 나도 잘난 체하고 몰라도 좀 아는 체하고 없어도 좀 있는 체하면서 살아야 하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하나,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하나?” 그런데 오십대 중반이 되면 무엇이든지 바꾸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살던 대로 살아야지 지금 와서 나를 부풀려 포장하려고 하면 그건 내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생 섬겨 오던 ‘하나님 아버지’를 버리고 다른 길로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반전(反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한나가 했던 고백이 생각납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을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여호와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흙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사람을 잿더미에서 건져 올리신다. 여호와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고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땅에 기초를 놓으셨고 그 기초 위에 세계를 세우셨다.”(삼상 2:7-8 쉬운성경) 반전(反轉)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저는 지금까지 하던 대로 계속해서 못 나고, 모르고,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잠시 후에 하나님도 만나고 아버지도 만날 것을 생각하면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743 |은혜의 뜨락| 눈 내린 날의 추억_윤순열 사모 파일
편집부
1444 2017-02-21
<은혜의 뜨락> 눈 내린 날의 추억 < 윤순열 사모_ 서문교회 > 주님의 은혜처럼 내려 쌓여 수묵화를 만들었던 흰 눈의 겨울 어릴 때는 눈이 오면 마냥 좋아서 온 들판을 뛰어 다녔지만 지금은 눈이 온 후에 일어날 일들 때문에 어린아이 같이 좋아 할 수만은 없습니다. 눈길에 혹시 나이 드신 성도님들이 교회 오시다가 넘어질까 염려가 되고 앞마당에 쌓이는 눈 치우는 것도 큰 일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연일 쌓이는 눈을 치우다가 팔의 인대가 늘어나 버렸습니다. 새로운 예배당으로 이사 오기 전의 눈 내린 새벽이 생각납니다. 밤새 많은 눈이 내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상황이었지만 천천히 차를 운전하여 교회에 갔습니다. 눈 때문에 느릿느릿 도착한 탓에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흰 눈으로 뒤덮인 적막한 예배당 앞마당에는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만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눈 위에 고양이 발자국이 점. 점. 점... 찍혀있었습니다. 신기 했습니다. 눈이 내린 날 밤은 주위가 조용해져서 그런지 아마 포근하게 잠이 더 깊이 드는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새벽잠에서 미처 깨지 못했는데 고양이가 먼저 예배당 길을 밟고 지나간 것입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잠을 자는 성도님들 대신 먼저 왔다간 고양이 발자국을 보면서 어떤 강사 목사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한 마을에 가까이 마주보고 있는 예배당 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겨울 눈 내리는 새벽, 한쪽 예배당에서는 새벽기도를 드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고 다른 쪽 예배당에는 목사님 발자국 외에는 한 발자국도 보이지 않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발자국이 없는 그 교회 목사님은 맞은편 예배당을 의식하여 예배당 앞길에서 왔다갔다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사람이 새벽 기도회에 온 것처럼 연출을 하였다는 가슴 아픈 일화였습니다. 때로는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을 때가 있었기에 이제는 그분의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겨울이 오면 생각나는 어릴 적 추억이 또한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 당시의 겨울은 왜 그리 추웠는지 눈이 오면 무릎까지 빠지는 일이 예사였습니다. 학교는 또 왜 그리 먼지 십리나 되었습니다. 먼 시골길을 장갑도 없이 얇은 옷 하나만 입은 채 덜덜덜 떨면서 학교에 다녔던 기억은 잊지 못할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겨울이면 손이 동상에 걸려 보랏빛으로 변하였습니다. 그 손을 호호 불면서 학교에 다녔던 기억은 안타까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나보다 세살 위인 언니도 나처럼 보랏빛으로 변한 손으로 겨울을 보냈습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엄마는 ‘동상 걸린 손은 찬물에 담가야 얼음기가 빠진다’는 민간요법대로 놋대야에 찬물을 떠와서 그 속에 나와 언니의 손을 담그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두 시간을 보내며 고문 아닌 고문을 받았던 일이 있습니다. 따뜻한 물도 아닌 찬물에 밤마다 두 손을 담그고 얼음기를 뺀다던 근거 없는 민간요법 때문에 우리는 더욱 춥고 괴로운 겨울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손이 아픈 우리를 향한 엄마의 지극한 사랑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오는 마음 짠한 기억들. 그래도 하얀 눈이 있어서 마냥 좋았던 어린 날의 겨울. 소나무 가지가 눈을 뒤집어 쓴 채 축 늘어진 모습이 아름다웠던 날들. 장독대에도 기와나 초가지붕에도 주님의 은혜처럼 소복소복 내려 쌓여 온 동네를 멋진 수묵화로 만들어 놓았던 그 흰 눈의 겨울이 다시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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