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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2 no image |제언| 헌법 수정에 대한 입장_임영천 목사
편집부
1761 2015-12-02
헌법 수정에 대한 입장 < 임영천 목사, 중심교회 > “헌법 법조문, 편의주의나 실용주의적으로 수정하지 않아야” 우리 교단은 헌법수정의원회가 있어서 장로교회의 교회법의 원리를 바로 이해하고 교단의 헌법을 수정하여 총회에 제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총회는 헌법수정위원회의 연구 보고를 신뢰하고 거의 원안대로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난 총회에서는 헌법수정위원회의 연구 보고를 부결되었거나 수정된 헌법조문들을 보면 과연 헌법수정위원회와 다수의 총대들이 교회법의 원리를 바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이 간다. 첫째, 제5장 제4조 목사의 직임상 칭호 1. 담임목사 ‘… 임시목사로 2년 시무한 후 … ‘를’ … 청빙을 받고 노회의 위임을 받은 자나, 임시목사 시무 2년 이내에 청빙을 받고 노회의 위임을 받은 자이다.’로 개정안을 부결시킨 점이다. 현재의 법조문은 필자가 이미 지난번에 본 교단신문을 통해 그 법조문이 우리 장로교헌법의 원리를 이탈한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듯이 그 조문은 회중정치에로 기울어진 법조문이다. 즉 그것은 교인들이 가진 기본권이 강화되는 것을 의미하고 상대적으로 목사가 가진 교훈권, 혹은 교리권은 약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장로회 정치의 모든 법조문은 기본권과 교훈권이 균형을 유지하도록 제정되어야 하고, 개정이나 수정을 하고자 할 때에도 이 원리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특히 장로교회의 헌법은 개혁신학에 입각하여 제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장로교회의 헌법은 개혁신학을 교회 현장에서 구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수정위원회가 교회법 원리에 입각하여 적절하게 수정안을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총회가 그 법조문을 부결한 것을 보면 대수의 총대들이 교회정치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간다. 필자가 보기에 현행 법조문은 한 마디로 장로교회 정치 원리에서 벗어난 위헌적인 소지가 다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다수결에 의해 수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헌법수정위원회의 법해석으로 자동 폐기되어야 마땅하고 예전의 법조문을 따라야 하리라고 본다. 둘째, 제5장 목사 제4조 목사의 직임상 칭호에서 ‘담임목사를 위임목사로, 임시목사를 전임목사로’ 개정안은 가결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호칭의 문제이므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치부해 버릴 수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전의 법조문이 미조직교회에서 시무하는 목사를 왜 임시목사로 호칭했는지에 대한 숙고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임시목사는 시무기간이 1년이다. 왜냐하면 미조직교회는 당회가 없는 교회이고, 당회가 없다는 것은 기본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무장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시무장로가 없다는 것은 목사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로교회 정치는 미조직교회의 경우에는 기본권을 가진 교인들이 직접 교훈권을 가진 목사를 견제하도록 법이 제정된 것이다. 또 그래야 장로회정치 원리에 부합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지교회에서 목사가 모든 것을 독주하므로 교황처럼 행세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헌법수정위원회가 이런 원리를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목사를 ‘전임목사’로 그 칭호를 변경하므로 ‘위임목사’와 ‘전임목사’의 성격의 차이가 무엇인지 불분명해지고 말았다. 몇 년 전 합동 교단에서 임시목사를 ‘시무목사’로 법조문을 수정하고, 또한 매년 공동의회에서 2/3 찬성표를 얻은 다음 노회의 허락을 받아 계속 시무를 할 수 있게 한 것도 ‘3년마다 그 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목사가 노회에 청원하여 허락을 받은 후 계속 시무’할 수 있도록 수정되고 말았다. 이것은 미조직교회 목사가 교인들의 청빙도 없이 지교회를 계속 시무할 수 있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법조항일 뿐만 아니라 목사를 직접 견제할 수 있는 교인들의 기본권 행사의 길을 차단해 버림으로 과도하게 감독정치에로 기울여지고만 개악된 수정안이다. 이번 우리 총회의 ‘전임목사’라는 호칭의 개정이 단순히 호칭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합동측처럼 감독정치에로 기울여져 나아가는 시발점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셋째, 제136조 제명의 해벌 ‘권징에 의한 제명의 해벌은 면직의 해벌에 준하되, 재임직은 하지 않는다.’는 삽입 개정안이 가결되었다는 점이다. 필자가 여기서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헌법수정위원회가 ‘제명’과 ‘면직’이라고 하는 권징의 성격을 바로 이해했는지 의문스럽다. 제명은 일반적으로 어떤 조직에서의 회원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법에서도 제명은 ‘출교’ 다음으로 중한 권징으로써 교인권 박탈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명을 받은 사람은 면직은 말할 것도 없고 성찬에도 참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제명을 받은 사람은 교회에 출석한다고 하더라도 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면직은 교인권과 성찬참여권은 그대로 유지하되, 다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직분만 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제명을 받은 사람이 해벌을 받았을 때에 그 권한이 어떻게 회복되느냐이다. 즉 제명을 받은 사람이 면직을 받은 사람과 동일하게 그 직분까지 회복되느냐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이번 총회는 가능하도록 법을 수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제명을 받은 사람이 해벌될 때는 교인권이 회복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 직분까지 회복되게 하므로 해벌을 지나치게 확대 적용했기 때문이다. 세속 국가에서도 죄를 범한 사람이 해벌되었을 때에는 공민권을 회복하는 것으로 끝나지 그가 전에 가졌던 직위까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이 죄를 범했다가 처벌을 받고 그 기간이 만료되었다면 다시 국회의원의 자격까지 회복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우리 교단은 이 법조문을 지나치게 편의주의나 실용주의적으로 수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아직 가을노회 때까지 수의(收議)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전국에 있는 노회들이 다시 한 번 심사숙고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701 no image |목회수상| 벤치 클리어링(Bench-Clearing)_안두익 목사
편집부
1781 2015-09-22
벤치 클리어링(Bench-Clearing) < 안두익 목사, 동성교회 > “주님이 기뻐하시는 소망이 넘치는 사회 함께 만들어 가기를” 요즘 우리의 시대의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자기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괜히 나섰다가 낭패를 보는 일들이 있기 때문 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가 있고 아픔이 있어도 진실을 위해 이런 일들을 극복해 나가는 것도 성숙한 사회의 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다름 아닌 한국 교회 안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우려할만한 일들 가운데 하나가 정의 앞에 서야 할 한국교회가 진리를 위해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러야 할 각오를 감당하지 못한 채 세상 앞에 무력한 모습을 보여 주는 사례가 한 둘이 아닙니다. 스포츠 용어 가운데 벤치 클리어링(Bench-Clearing)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벤치 클리어링은 ‘덕아웃이나 불펜의 선수, 코치들이 몸싸움을 벌이는 선수나 심판을 제지하는 싸움에 가담하기 위해 그라운드로 동시에 뛰어나가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집단 이기주의나 패거리주의라고 지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수들의 입장은 좀 다릅니다. 같은 편 선수가 상대방 선수에게 모욕이나 위협 당하는 것을 방관할 수 없기에 모두 그라운드로 뛰어나갑니다. 그 상황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결국은 자신에 대한 위협이나 모독이라고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죠. 일 년에 한두 번 야구장에 가보면 종종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상대방의 투수가 위협적인 공을 타자에게 던질 때 어김없이 모든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뛰어나가 몸싸움을 벌입니다. 심하면 난투극으로 번질 때도 있습니다. 물론 벤치 클리어링이 상황에 따라서는 보기흉한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집단 이기주의 모습으로 비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선수들 간의 끈끈한 사랑과 팀웍(Teamwork)이 녹아 있습니다. 프로야구의 베테랑인 한 선수가 한 말입니다. “같은 팀, 같은 가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에는 화장실에 앉아 있더라도 뛰어나와서 함께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팀은 가족이고, 그게 가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팀은 가족이다’라는 말이 여운을 남깁니다. 승리라는 목표점을 향해 항상 구슬땀을 흘리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 하나하나가 같은 운명을 지닌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가족같은 끈끈한 애정이 있기에 상대 선수로부터 위협을 당하거나 모욕을 당하면 바로 내 가족이 당한 것 같은 공감의 마음으로 화장실에서라도 뛰어 나가야 한다는 프로 선수의 근성이 돋보입니다. 여기서는 우리 한국교회 안에도 이런 벤치 클리어링이 항상 일어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모욕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될 때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침묵하거나 방관합니다. 물론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성하고 회개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부당한 모욕이나 비방에 대해서조차 관심이 없고, 구경꾼처럼 바라보고만 있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좀 더 적극적인 그리스도인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요즘 사회 앞에 비추어진 교회는 정말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될 위기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국회가 추진하는 소수차별금지법은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습니다. 소수인권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약자들의 인권이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성애법의 독소조항만큼은 반드시 빼야합니다. 동성애자들은 고아와 과부 등의 사회적 약자들과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동성애 차별 금지법이 합법화되면 미래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이단에 대한 문제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단의 폐해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가정을 병들게 만들고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사회에 미치는 영향 또한 심각합니다. 이런 문제 앞에 우리 교단에 속한 교회는 진리를 위해 세상이 모르는 영적 싸움의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켜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 안에서도 논의가 되고 있는 이단성 시비에 관련된 문제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일에 관계가 되면 정말 힘든 일을 겪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갖은 협박과 회유를 함으로 힘겨운 싸움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선뜻 이 일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모습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단성 시비가 있을 때, 자신의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냉정하게, 그리고 객관적인 잣대에서 문제 접근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진리가 아니면 돌아 설 줄도 알고, 포기할 줄도 아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또 자신과 연관되었다고 해서 침묵하는 것도 우리는 깊이 재고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섬기는 교회 안에서도 이런 영적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을 때, 또한 상처로 인해 힘겨운 상황에 있을 때 한 가족임을 기억하고 그라운드에 반사적으로 뛰어나가는 선수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함께 아파하고, 함께 도와줄 수 있는 성도관계라면 얼마나 흐뭇할까를 생각합니다. 교회의 본질인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이 결실에 계절을 맞이하여 좀 더 적극적으로 담대하게 우리 한국교회가 벤치 클리어링의 자세로 모두 세상에 뛰어나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기울인다면 이 사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소망이 넘치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700 no image |제언| 합동이 합신에게 '엄중 경고'한 것은 합동의 수치_림헌원 목사
편집부
2052 2015-09-22
합동이 합신에게 '엄중 경고'한 것은 합동의 수치 < 림헌원 목사, 예장합동 한돌교회 > - 두날개 문제를 신학부에 일임하여 연구하게 했어야 할 일 - 합신교단을 향해 엄중 항의 운운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 제100회 예장합동총회는 “두날개 프로그램”을 적극 보호하고 나섬으로 큰 잘못 하나를 기록하고 말았다. 두날개에 대한 신학적 타당성을 신학부에 맡겨 객관적인 연구조차 하지 않게하였다는 점에서 그 직무를 소홀히 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예장 합동은 2015년 제100회 총회에서 4개 노회가 두날개 이단성공청회를 열었던 합신 이대위를 향해 경고와 재발방지를 강력하게 요청하자고 헌의하였다. 이에 대해 제100회 총회는 두날개를 문제삼는 합신에 대해 엄중 항의(抗議)를 결정하고, 두날개 문제를 임원회에 맡기자고 결의했다. 4개 노회들이 헌의안 내용은 “우리 교단 목사님에 대한 이단성이 언론에 유포되었다. 그러나 사실을 확인도 하지 않고 한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총회는 마땅히 사실 여부와 이단성 여부에 대해 합신 이대위가 잘못 판단한 점이 무엇인지를 총대와 전국 교회 앞에서 밝혀야하고, 누가 보아도 성경적, 신학적, 객관적인 측면에서 보편타당성에 근거한 반박을 내 놓으면서 '재발방지'를 결의했어야 옳다. 그래야 합동교단 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신교단을 향해 뜬금없이 합신에 대해 '경고' 결의를 했으니, 이는 결국 합신교단에 대해 크게 결례를 범한 꼴이 되고 말았다. 합동총회가 두날개에 관련한 그 어떤 근거도 성경신학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채 막연히 "우리 교단 목사를 가지고 왜 너희 교단이 왜 시비를 거느냐?"고 윽박지르며 무조건 조용히 하라며 '엄중경고'를 운운하는 것은 매우 수준 낮은 정치 작태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합신 교단을 향해 제대로 된 근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우습지도 않은 경고를 남발하는 무례함을 범했고, 아울러 스스로 수치를 자초한 일이므로 합동 교단에 속한 목사로서 심히 부끄럽다. 이러한 식으로 총회가 진행된다면 과연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 비성경적이며 이단성을 가진 자들이 한국교회를 어지럽히며 피해를 입힌다 해도 친분과 연관이 있으면 신학적으로 비판하여 바르게 경고하지 않고 바다와 같이 넓은 아량으로 보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할 필요도 있다. 피해를 당한 다른 교단과의 형제애를 생각해서라도 이단성이 있다고 시비 받는 사람이 우리 교단 사람이라며 상호간에 건드리고 시비하지 말자고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식이라면 합동교단 총회는 예수님과 바울 등의 사도들이 정리한 성경 말씀에 반(反)하는 교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앞으로 그렇게 되어도 괜찮다는 것인가? 총회가 할 일이 무엇인가? 각종 행정 처리를 위한 바른 정치(政治)는 필요하지만, 정치꾼들이 하는 정치는 사라져야 한다. 총회가 진리의 말씀에 관련해서는 생명을 걸고 비교 논의하여 성경적으로 바로 세워가야 할 사명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진데, 이번 합동 총회의 합신에 대한 '엄중경고' 결의는 대체 무슨 꼴인가? 합신이대위가 다루었던 ‘두날개 이단성’에 관한 문제를 ‘총회신학부’가 아닌 ‘총회임원회’에 맡겼다는 것은 정치가 진리를 논단하는 우리 교단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총회임원들과 정치부의 리더들이 말씀에 대한 진리 수호 의지보다 정치적 의지를 더 우선시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부적절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신임 합동총회장 박무용 목사(대구, 황금교회)는 ‘두날개 국내지역 고문’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이제 알 사람들은 다 안다. 두날개를 자기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고, 더욱이 그 단체의 고문직을 맡고 있는 분이 총회장이 되었다는 것과, 이단성 시비를 받는 두날개 문제를 연구하는 조직인 신학부에 맡기지 않고 임원회에 맡겼다는 사실, 그리고 두날개를 조사하는 합신 교단에 엄중경고를 보냈다는 사실이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애당초 이 문제를 바르게 해결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최근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다며 인터넷 등에 소문이 자자하였고, 그래서 합신이대위가 "두날개 이단성 공청회"까지 열었는데, 합동 교단의 대응은 너무도 실망스럽다. 내 집 자식이 밖으로 돌아다니다 이웃들로부터 잘못한 점들이 드러나면 그 이웃들에게 고마워하면서 오히려 내 집 자식을 꾸짖고 바로 잡는 것이 올바른 상식과 인품을 갖춘 부모의 모습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합동교단이 소속 교회들에게 해를 미치는 이단 문제를 연구하여 발표할 때 사전에 그 사람들이 소속한 교단들에게 '양해'와 '허락'을 받은 전례가 있었던가? 합동이 소속 교회들에게 악영향을 미친 문제 집단들을 보아도 타 교단이므로 연구하지 않고 해당교단에 맡기면서 "귀 교단에 속한 사람이니 잘 교육시켜주시지요!"라고 주문했던 사례가 있었던가? 합신이대위의 두날개 이단성공청회로 예장합동총회의 명예가 실추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한 이웃인 합신교단에 감사할 일이다. "두날개 이단성공청회"의 문제를 마치 합동교단과 합신교단 간의 싸움질로 몰아가려는 정치적인 사람들이 있다면 빨리 뒤로 물러서기를 엄정히 촉구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지금 감찰(監察)하시며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무섭지 않는가? 진실로 두렵고 떨려야 한다. 그것은 과연 누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일을 하느냐의 문제이며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개 ‘두날개 프로그램’을 가지고 양 교단간의 싸움으로 몰아가려는 사특한 공작 정치는 사라져야 한다. 교회를 해치는 이단 문제가 아니고 두 교단 간의 세 대결로 비화시키는 행위는 속히 중단해야 마땅하다. 합동총회는 합신이대위가 "두날개 프로그램 이단성공청회"를 개최함으로 유익을 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두날개에 대해 연구조차 않고 손을 놓고 있었던 합동총회산하 신학교수와 목회자 그리고 교회들을 위해 오히려 자극을 주고 깨우쳐 주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결국 제100회 총회가 그 어떤 신학적 검증 절차도 무시하고 합신교단에 엄중 항의 결정을 했다는 것은 합동교단 총회의 품격을 땅에 내던지는 수치를 스스로 보여준 부끄러운 일이다. 앞으로 이러한 실수를 총회가 반복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699 no image |제언| 헌법 수정의 전제_안해근 목사
편집부
1848 2015-08-25
헌법 수정의 전제 < 안해근 목사, 충청노회 > “헌법 수정은 성경적이며 개혁주의 신학을 보다 충실히 구현하길” 1981년 9월에 창설된 우리 교단이 우리 헌법을 가지게 된 것은 1995년 9월이며 책자로 발행된 것이 1996년 7월이다. 그 머리말을 읽어보면 우리 헌법이 얼마나 충실하게 개혁주의 방향으로 수정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당시 헌법수정위원들은 성경적이라고 공인된 미국 크리스챤 개혁파의 교회 헌법주석을 참조하여 그 당시 장로회 헌법의 비개혁주의적인 표현들을 성경적으로 수정하였다. 그들은 우리 헌법이 “성경적이며 개혁주의 신학을 충실히 구현하기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의 우리 교단 3대 강령이 이 헌법의 성실한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져서 한국교회의 개혁이 성취되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아울러 그 헌법수정 작업에 있어서 박윤선 목사의 노고를 추억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번역이 박 목사님의 정성어린 수고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상기하고 있다. 개혁신보 700호, 2015. 7. 25자 1면에서 헌법수정위원회의 헌법수정 관련 기사를 읽었다. 그 내용인즉 헌법 교회정치 제5장 목사, 제4조 목사 직임상 칭호, 1항 담임목사에서 ‘1. 담임목사 : 조직된 한 지교회의 청빙을 받고 노회의 위임을 받은 자나, 임시목사 시무 2년 이내에 청빙을 받고 노회의 위임을 받은 자’로 수정키로 했으며 이 수정안은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할 경우 바로 담임목사로 청빙하거나 또는 임시목사로 시무하다가 2년 이내에 청빙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교회의 형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임시목사 제도 개선을 위하여 담임목사를 위임목사로, 임시목사를 전임목사로 명칭을 변경하기로 했는데 이는 ‘임시’라는 단어가 일반 사회에서 잘못된 통념과 부정적 이해로 사용되고 있으며 주요 장로교단들도 이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한동안 “임시목사도 담임목사냐?” 하는 논란이 있었다. 임시목사인데도 주보나 달력에 버젓이 담임목사라고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초중고등학교 교사는 한 학급을 1년간 맡아도 담임교사다. 하물며 한 지교회를 1년 이상 시무하는 목사를 담임목사라고 할 수 없단 말인가? 이는 헌법의 목사 직임상 칭호에서 담임목사를 임시목사와 구별하였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러므로 임시목사도 담임목사냐 하는 논란은 헌법 제5장 제4조 목사 직임상 칭호, 1항을 담임목사에서 위임목사로 고침으로 해결된다. 임시목사든 위임목사든 담임목사로 통칭하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담임목사 위임에 관한 것이다. 현행 헌법은, 위임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조직된 한 지교회에서 임시목사로 2년 시무한 후 그 교회의 청빙을 받고 노회의 위임을 받아야 함을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수정안은 ‘조직된 한 지교회의 청빙을 받고 노회의 위임을 받은 자나, 임시목사 시무 2년 이내에 청빙을 받고 노회의 위임을 받은 자’로 고치고 있다. 기존 조항은 한 교회의 담임목사 청빙에 신중을 기하여야 함을 명시하고 있는 반면 수정안은 목회편의주의에 젖은 발상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이는 사실상 신자들의 권리를 약화시키고 급기야 교회들로 하여금 담임목사를 바로 청빙할 것인가, 1-2년 두고 볼 것인가 눈치를 살피게 할 것이다. 개혁주의는, 목회자와 신자들은 지위 고하의 관계가 아니며 만인제사장으로서 역할이 다를 뿐이고 함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자라고 가르친다. 한 교회의 존립에 있어서 목회자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다. 우리 목회자들이 자칫 목회편의주의에 빠져서 성심으로 양들을 돌보지 못할 때 교인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임시목사로서 시무하고 2년 뒤에 교인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어찌 그 교회를 담임하겠는가? 3분의 2라고 해야 70%도 안 된다. 심지어 교회정치 제6장 2조에는 “투표하여 3분의 2 이상이 찬성한다 할지라도 소수의 반대가 심각할 경우에 회장은 회중에게 목사 청빙을 연기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여 청빙에 신중을 다하여야 함을 적시하고 있다. 임시목사를 전임목사로 명칭 변경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 문제를 사회적 관점에서 풀 일도 아니고 다른 교단들을 그냥 따라 할 일도 아니다. 임시목사면 어떤가? 이 명칭은 우리나라 장로교회의 오랜 전통이고 그로 인해서 목사의 영적권위가 훼손될 것도 아니다. 임시면 어떤가? 우리 모두는 이 땅에 임시로 머물 뿐이다. 그리고 이를 전임목사로 고칠 경우에도 문제는 있다. 교회정치 7장 목사전임이라는 용어가 있다. 물론 뜻이 다르다. 그뿐 아니라 교회정치 4장 3조 교회의 임시 직원이 있는데 이것도 전임 직원으로 수정할 것인지 묻고 싶다. 임시 직원이란 전도사, 전도인, 권사, 남녀 서리집사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굳이 그 명칭, 임시목사를 고치지 말고 앞서 언급한대로 담임목사를 위임목사로 수정하여 임시목사든 위임목사든 마땅히 담임목사로 인정하고 호칭하면 된다. 국내외적으로 장로교회 헌법은 교단마다 계속 수정해나가다가 이리저리 변질되었다. 잘하자고 한 것이지만 자꾸 고치다 보니까 이상하게 변질되고 어느 경우에는 타락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우리는 그 당시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교회 앞에 바로 서고자 했던 선배들의 경건과 진리파수의 정신을 계승 발전해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헌법수정 자체에 신중을 기할 뿐 아니라 그 수정안이 기존 헌법 조항보다 “성경적이며 개혁주의 신학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그동안 몇 차례 헌법수정이 있었는데 차제에 이 모든 일이 과연 성경적 개혁주의의 원리에 잘 부합되었는지 돌이켜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698 no image |목회단상| 대한과 대서 그리고 말세_최광희 목사
편집부
1774 2015-08-04
 대한과 대서 그리고 말세 < 최광희 목사, 행복한 교회 > “악이 극도로 심해지면 그 악도 이제 끝난다는 희망 가져야” 지금은 8월 초, 연중 가장 덥게 느끼는 시기입니다. 그동안 더위를 참고 일하던 사람들이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휴가를 떠나고야 마는 시기입니다. 요즘 웬만한 곳에 전화해보면 직원이 휴가 가거나 아예 회사를 문 닫고 쉬는 곳이 많습니다. 교회 성도들도 휴가를 떠난 분이 제법 있지만 그래도 예배는 멈추지 않습니다. 일 년 중에 가장 더운 때는 과연 언제일까요? 절기상으로는 7월 23일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양력에 맞추어 24절기가 있는데 7월 7일이 소서(小暑)이고 7월 23일이 대서(大暑)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삼복(三伏)이 있습니다. 7월 13일이 초복이고 7월 23일, 중복은 대서(大暑)와 같은 날입니다. 8월 12일은 말복이고 그 안에 8월 8일, 입추(立秋)가 있습니다. 이렇게 덥지만 며칠만 지나면 절기상으로는 가을이 시작됩니다. 대서 이후 한 달 후 8월 23일이면 서리가 내린다는 처서(處暑)가 옵니다. 그러면 겨울은 언제가 가장 추울까요? 절기상으로는 1월 20일, 대한(大寒)이 가장 춥다고 하지만 체감적으로는 1월 6일, 소한(小寒)이 더 추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한이가 소한이 집에 놀러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담도 생겼습니다. 절기는 이렇게 정해져 있는데 왜 겨울에는 대한보다 소한이 춥게 느껴지고 여름에는 대서보다 입추가 가까운 8월 초순이 더 덥게 느껴질까요? 제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겨울에는 아직 추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추워지니까 우리 몸이 적응을 못해서 매우 춥게 느끼고 소한을 경험하며 적응한 상태에서 대한을 맞을 때는 그런대로 견뎌내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여름에는 소서(7/7)와 대서(7/23)까지는 그런대로 참았는데 대서를 지나자 그간 참을 대로 참았던 우리 몸이 더 이상 더위를 견디지 못해서 입추가 가까워옴에도 불구하고 가장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겨울에는 소한 이후 대한을 더 잘 견디는데 여름에는 소서 이후 대서를 도무지 못 견디니 사람에게는 추위보다 더위가 더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구는 그렇게 말합니다. 추울 때는 옷을 껴입으면 되고 집안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더울 때는 어디로 피할 데가 없다고. 요즘은 가정마다 에어컨이 있지만 그것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희망적인 것은 대한이 지나면 곧 입춘(立春)이 오고 대서(大暑)가 지나면 곧 입추(立秋)가 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이 가장 덥고 견디기 힘들지만 이 더위도 이제는 끝입니다. 제깟 더위가 앞으로 열흘이면 붙잡아도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또한 이 시대의 영적인 기류를 동시에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날 세상은 너무나 더럽고 너무나 타락했습니다. 죄는 옛날에도 지었지만 지금은 죄인들이 죄를 합법화하여 그것을 죄라고 말하는 사람을 탄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기들끼리 전봇대로 이빨을 쑤셔도 우리가 막을 수가 없는데 지금은 같이 이빨을 쑤시지 않는 사람을 오히려 처벌하려고 합니다. 뭐 이런 세상이 다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악이 극도로 심각하면 그 악이 이제 끝난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대한 후에 입춘이 오고 대서 후에 입추가 오듯이 극도로 타락한 말세의 증상은 곧 예수님의 나라가 가까운 증거입니다. 이래저래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더운 날씨도, 말세의 증상도 조금만 더 견디어 내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697 no image |제언| 선교 계속성 방안으로서 은퇴 앞둔 선교사의 선교 예비생 입양_이병훈 선교사
편집부
2061 2015-06-09
선교 계속성 방안으로서 은퇴 앞둔 선교사의 선교 예비생 입양 < 이병훈 선교사, 필리핀 > “예비생에게 경험을 유산으로, 현 선교사에게는 재정적 도움 줄 수 있어” 필자는 선교 동원가도 전략가도 아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위치에서, 곧 지금이라는 삶의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있는 것 중 나누고 싶은 하나를 정리해보았다. 기존 선교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은퇴 후의 삶에 대한 것이다. 은퇴 후의 주거 문제, 어떤 일을 할 것인가의 재취업 문제 등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새로운 일을 찾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세상과 구별되어 교회의 후원을 받아 살아온 선교사들에게 이 문제는 더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온다. 반면에 선교 지망생들은 선교 현실의 변화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비록 선교사의 존엄은 여전히 동일하나, 예전에 우리의 선배나 동료들이 초창기에 가지던 그런 영예 없이 선교를 준비해야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은퇴 선교사들은 은퇴와 동시에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찾아야하는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선교 지망생들은 뜻은 있지만 종종 사실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위기 중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1. 선교 예비생 입양 요즘 젊은 선교 지망생들은 교회에서 어떤 식으로 인정과 후원을 받고 있을까? 대부분의 지망생들은 격려와 자극 그리고 후원자 모집 등 많은 부분에서 전 세대가 겪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전의 선교사의 삶은 일종의 격리된 삶이었다. 문화와 격리, 또 가족과 친지, 친구들로부터의 격리된 삶이 그것이다. 그들은 현지에서 받는 심신의 고난과 고생하는 삶으로 인해 후원 교회에서 파송, 사역의 현장, 그리고 나중의 귀향에 이르기 까지 남다른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좀 더 쉬워진 지금의 선교지 사정과 한국교회의 현실적 변화에 의해, 최근 장기 또는 평생 선교 지망생은 훨씬 그 기반을 쌓기 어려운 실정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사람들의 노후에 대한 준비를 따로 말하고 있지 않다. 구약의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기력이 쇠진하여 다른 일을 하게 된 법이 없고 신약의 사도들이나 장로들이 나중에 연로하여, 직임을 놓아두고 집에서 남은 인생을 쉬며 살았다는 기록이 없는 것이다. 한세대 전만해도 ‘선교사는 선교지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는 것이, 예전 어떤 교부들이 ‘순교를 지상의 덕’으로 여기던 것과 비슷한 덕목처럼 생각되었다. 사실 전세기 초중반의 선교사들은 지금의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고난 중에 선교했고 그 중 많은 분들이 죽임을 기쁨으로 당했다. 그들은 위기 중 잠깐의 철수 이외에 악식년도 없이 사셨다. 하지만 요즘 시대 선교사 삶의 패턴은 전문화와 동시에 직업화 되어가고 있다. 어떤 후원자들은 ‘요즘 선교사들은 꼭 공무원 같다’고 말한다. 이는 따박따박 후원을 받아서 편안히 잘 살고 있다는 비아냥이 섞인 비판의 말씀이다. 사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보편적이 된 것과 같이 선교사도 희귀한 직이 아니고 흔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일이 그리 크게 생각되지 않을지라도 주어진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으로 감사의 삶을 산다면 지금의 선교사들도 여전히 주님께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문화, 조직화, 직업화는 피하기 힘든 우리의 현실임을 인정하되 이런 시대에서도 영적 충만함을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의 삶이 꼭 삯군의 삶과 같다고 비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예전의 단순한 삶보다 더욱 전문적이고 직업화된 삶의 현실에서, 늙는다는 것은 하던 일에서의 은퇴를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실력이 있고 순발력이 있는 젊은이들이 밀어 차고 올라오는 것은 세상이나 교계 또는 선교계나 모두 한가지이다.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해야 한다는 것은 비록 받아들이기 쉬운 일은 아닐지라도 자연의 순리라고 여겨진다. 더 더욱 한국 교회의 재정능력의 한계를 인식할 때 싫든 좋든 신구 교체의 물갈이는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은퇴하는 선교사의 입장에서 피동적으로 자리를 비어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선교 예비생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다. 즉 은퇴를 앞둔 선교사가 선교 준비생 중 한 사람을 자신의 아들이나 딸의 하나로 여기고 입양한 준비생을 돕는 일을 한다면 장인 정신의 연장선에서 하나님나라 건설에 시너지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은퇴를 준비하는 선교사는 한 번 더 가족을 넘어서 섬기는 삶을 노후를 준비하며, 또 은퇴 이후에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피입양 대상자로서의 선교 예비생의 연령은 은퇴를 준비하는 선교사의 자녀와 비슷한 연령(20대 후반에서 30 초반)이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피차간의 존경과 신뢰 그리고 사랑을 전하기 쉽기 때문이다. 2. 예비생 입양의 기능들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소명과 자질을 겸한 지망생의 발굴과 선정 2. 상호간의 영적 멘토 3. 상호간의 기도 후원자 4. 재정 후원자: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듯 관계 고리로의 주고받기(give and take)는 관계 형성과 지속을 위해 꼭 필요하다. 5. 노하우의 전수: 그것이 학문적인 것이건 작은 조언이든지, 예를 들면 언어 준비의 중요성 또는 문화 이해의 가치 현지에서의 동역자 관계 등등, 은퇴 준비 선교사가 선교 준비생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6. 네트워크 안내 및 구축: 사역의 방향성 그리고 사역지 선정의 제고에, 기도 및 재정 후원자 조직과 연락망 관리에 은퇴 (준비) 선교사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7. 보냄과 자립 이후의 관계: 선교 준비생은 파송과 정착 이후 점차 은퇴 선교사의 도움을 떠나 더욱 독립적으로 사역할 것이나 한국 사회에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관심과 사랑은 끝나지 않는 것처럼 한번 맺어진 관계는 쉽게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8. 위기 상황 대처의 필요 9. 선교의 계속성과 확장 이와 관련해 선교 지망생을 찾는 시기는 은퇴 이전, 즉 4년에서 8년 사이(약 60세 전후)에 준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4년에서 8년은 선교 예비생이 본국에서 선교사역을 준비하거나 선교 사역 초창기에 해당한다. 이 기간에 은퇴 준비 선교사와 선교 예비생은 서로의 신뢰를 쌓아가는 시간을 갖는다. 마치는 말 두 층의 사람들을 보면 한 편은 선교의 종지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고 또 한편은 이제 선교를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 두 층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선교에 있다. 이 두 층의 사람이 서로 만나 협력을 한다면 젊은 준비생은 선교지에서 일생을 보낸 은퇴 (준비) 선교사로부터 큰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반면에 은퇴 (준비) 선교사는 준비하는 선교 예비생을 여러 모양으로 도움으로써 비록 예전과 같이 선교에 전념하지 않고 자신의 생업이 따로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선교에 계속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696 no image |제언| 총회치리협력위원회의 소집과 결정배경_이주형 목사
편집부
2341 2015-05-26
 총회치리협력위원회의 소집과 결정배경 < 이주형 목사, 총회치리협력위원장 > “두 날개측은 전문가들 의견 받아들여 그동안 문제점을 수정하기도” 지난 5월 4일(월) 총회치리협력위원회가 열려 결정한 내용이 보도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정의 배경을 소상히 알릴 필요가 있다고 사료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1. 총회의 치리협력위원회(헌법 교회정치 제7조 2항) 총회는 치리협력위원회를 상비위원회로 설치한다. 이 위원회는 2항 총회가 폐회한 후 총회적인 일이 생겼을 때 처리하고 총회에 보고한다. 2. 치리협력위원회 소집의 근거 예장합동 측(총회장 백남선 목사)에서 “본 교단 김성곤 목사에 대한 조사 중지 요청의 건”이 접수되어 소집하게 되었으며, 그 내용의 요지는 “한국교회의 주요 공교단인 귀 총회가 타 교단에 소속한 회원에 대하여 그 회원이 소속한 교단을 통하여 우선적으로 해결하려는 절차적인 노력 없이 공개적으로 거론한다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처사라 생각합니다. 본 교단에서는 아직까지 프로그램에 대한 이의가 한 번도 공식적으로 제기된 바가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당사자를 지도할 치리권이 있는 소속 교단을 통하여 처리해 주시기를 정중히 요청 드립니다.”는 내용입니다. 3. 치리협력위원회의 구성(총회규칙 제10조 2항) 위원은 15인으로 하되 총회임원과 정치부장은 자동적으로 위원이 되고 나머지 위원은 공천위원회에서 공천하되 증경 총회장 2인이 포함되어야 한다(현위원은: 총회임원 9인, 증경 총회장 5인, 정치부장 1인). 위원회 구성을 말씀 드린 이유는 총회 이후에 총회적인 일이 생겼을 때에 신중하게 처리하도록 총회 대표성 있는 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날 회의 참석위원은 12명이었습니다. 4. 이날 회의 사회자를 바꾸게 된 배경 치리협력위원장 이주형 목사가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위원들의 허락을 받아 사회를 윤석희 증경총회장에게 위임하게 되었습니다. 5. 치리협력위원회의 결정사항 두 시간 넘도록 심도 있는 의견을 충분하게 개진한 후 내린 결의사항의 요지는 이대위는 제99회 총회에서 결정한대로 두날개(풍성한교회 김성곤 목사) 조사 및 청원의 건은 제100회 총회에서 보고하고, 공청회(5월 18일)의 시행여부는 제100회 총회의 결의에 따라 시행하기를 권면하기로 하고 이와 같은 내용은 제100회 총회 후 합동측 총회에 정중하게 답신하기로 하였습니다. 6. 위와 같이 결정하게 된 과정 1) 제99회 총회에서 이대위 청원서 내용을 보면 “두날개(풍성한교회 김성곤 목사)에 관한 조사 보고 및 청원 건은 일 년간 예의 주시한 후에 차기 총회에 최종 결론을 내려 줄 것을 청원하니 받기로 하다.”로 되어있습니다. 2) 조사와 공청회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피의자라 할지라도 소명의 기회를 주고 쌍방의 의견을 듣고 판단해야 하는 것인데, 그러나 합신 이대위는 당사자에게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하여 한 번도 지적해준 적이 없고 두 번 만남 속에서 공청회 당위성만 주장했습니다. 3) 당사자는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면 모두라도 바꾸겠다고 말했고, 그리고 문제성 있다고 보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교재 내용을 거의 바꾸었고 그 바꾼 교재를 우리 총회와 이대위원들에게 이미 보냈습니다. 4) 그리고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문제점에 대하여 김성곤 목사가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동안 문제점을 인정하고 「교회와 신앙」에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7.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 조사를 중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조사는 계속하되 먼저 당사자에게 소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서면 또는 대면하여 문제점을 지적해 주고) 잘못을 고치면 형제 하나를 얻은 것이고 끝까지 잘못된 것을 시인하지 않거나 바꾸지 않을시 공청회를 통하여 객관적 판단을 받아 보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선행조건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제100회 총회에 지금까지 경과를 보고하고 총대들의 동의를 얻어 시행하는 것이 옳다고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치리협력위원회에서 권면위원 5인을 선정하여 이대위원들과 만나서 권면했지만 권면을 받아드리지 않고 공청회를 강행하였습니다. 전국교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695 no image |목회수상| 이제는 살고 싶다. 절박하게!_안두익 목사
편집부
1732 2015-05-26
이제는 살고 싶다. 절박하게! < 안두익 목사, 동성교회 > “복음만이 이 허무한 세상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 뿐” 요즘 신정아씨가 미술관 큐레이터로 복귀를 했다. 그는 예일대 박사라고 학력을 위조해서 대학 교수도 하고 광주비엔날레 예술 감독도 했고, 고위공직자와 스캔들로 한동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람이다. 그녀가 4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절망적인 과정들을 쭉 피력을 했다. 그렇게 인터뷰를 하고 맨 마지막에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죄가 무엇이었는가? 도대체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나라는 그런 질문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과오를 함축적으로 이야기했다. “해선 안 될 사랑을 했고, 돈으로 학위를 사려 했다. 땀 흘려 한걸음씩 가야하는데 잘못된 지름길을 선택했다. 성실하지 못했고 내 인생관이 잘못돼 있었다.” “죽도록 창피했다 죽도록 반성했다… 이제는 살고 싶다. 절박하게!” 그 인터뷰를 보면서 본인이 말했던 그 잘못된 지름길을 추구했던 그런 인생관이 얼마나 비참하게 되었는가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치 그 인터뷰 기사 속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여러분은 저처럼 허탄(虛誕)한 길을 걷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호소하는 듯한 소리로 들려졌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정직한 사회가 되지 못한 채 구정물로 사회가 적셔지는 모습이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다. 요즈음 한 기업인이 자살 직전에 쓴 메모가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그는 불법행위로 사법처리에 몰리자 정치인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거절당했다. 친구들에게 상처받은 그는 자신에게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자 그 충격으로 자살하기 직전 정치가들을 죄인으로 지목하였고 이에 당사자는 물론 나라가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되었다. 죽기 직전 그는 억울하단 말을 수 없이 토로했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을 감싸주지 않는 친구들에게 매우 크게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그 돈이 바른 돈이었다면, 그리고 그 돈을 받은 사람이 정말 값진 돈으로 도움을 받았다면, 어느 누가 도움을 준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겠는가? 허탄한 권력과 허탄한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 밀거래를 한 결과가 아닌가? 이런 시대에 한국교회를 섬기는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서 이 시대를 바라보아야 할 시각은 매우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아모스 5장 24절에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찌니라”고 피를 토하듯이 외쳤다. 아모스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BC 789-747년 경)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이 때 이스라엘은 제2의 솔로몬 시대라고 할 만큼 국가적으로 번성하고 평화를 누리던 시기였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가장 피폐하고 타락한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아모스를 선지자로 부르셨다. 아모스의 뜻은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는 자”이다. 그는 당시의 무거운 짐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힘 있게 선포했다. 그는 불의로 가득한 시대에 하나님의 공의를 온 몸으로 선포한 정의의 선지자였다. 오늘 정말 점점 경건의 능력은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나아가는 이 시대에 하나님은 사건, 사고를 통해 시대를 경고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을 십자가 앞에 겸손히 내려놓고 복음만이 이 허무한 세상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알고 십자가의 보혈을 이 땅위에 뿌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부패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찌니라”는 말씀을 들려줌으로 이제 진리 앞에 서서 “이제는 살고 싶다. 절박하게!”라는 심정으로 살아가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694 no image |제언| “존엄과 가치를 지닌 자”_나택권 장로
편집부
1722 2015-05-12
“존엄과 가치를 지닌 자” < 나택권 장로, 호산나교회 은퇴 > “우리가 누구인지 새롭게 일깨워 사랑과 선행을 하게 서로 격려해야” 우리는 지금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의 사회를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회는 무엇보다도 믿을 만한 사람을 찾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공동체일수록 제 기능을 발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뢰성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만약 공동체에서 이 신뢰성이 사라지게 되면 그 공동체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서로 섬기고 베풀고 양보하는 사람들이 많은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로 오래토록 유지될 수 있겠으나 서로 섬기고 위함이 없는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는 진정한 공동체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즉 남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것보다 나를 위해 남들에게 희생을 요구하거나 자신을 보호하는 것은 진정한 공동체로서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1. 하나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한다면 누구보다도 편 가르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 많은 이들이 차별을 하고 편 가르기를 일삼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고 똑같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닌 자들이라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비록 학력, 나이, 직분, 섬기는 교회, 지역이 다르다고 해도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것이 교인의 자세이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배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편 가르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저들은 모두가 자기중심이며 자기보호만을 위하여 자신과 같은 부류들만 어울려 살아감으로서 그 속에서 안도감을 찾는 것 같다. 그래서 같은 편만 잘 어울리고 그렇지 않으면 거리를 둘뿐 아니라 경계를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에서 성경은 성령 안에서의 연합이란 각 성도가 성령을 통해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서 결국 다른 모든 성도들과 연결되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를 서로 하나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공통된 정체성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차이점과 다른 점 때문에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차이점은 존재하지만 분열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모두 성령을 통해 한 분 그리스도에게 연합되는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가족은 서로가 필요로 하는 존재이지 배척하거나 차별하거나 편 가르기를 할 수 없는 필수적인 관계이다. 2. 신앙에 대한 지식과 이해력을 넓히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은 최소한 자신이 속한 교단의 교리를 알고 신앙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시간이 갈수록 자라고 깊어가야만 올바른 신앙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교회의 교훈과 가르침을 맡은 직분자는 자신뿐 아니라 그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성장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점검할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시행하여야 할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를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장로 그룹들이 교리를 잘 알아가고 신앙에 대한 지식과 이해력을 갖추어야만 교훈과 가르치는 직분과 수행하는 자로서의 직분을 감당할 수가 있겠다는 이유 때문에 보수교육차원에서 공부해야겠다는 뜻의 결집이 장로 교육원이다. 진리는 사람들의 눈이 가려진다해도 좋은 길을 걸을 수가 있고 결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3. 서로 돌아보며 격려하자 히브리서 10장에서 성경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하였다. 격려는 우리 안에 있는 선한 모습을 이끌어내게 하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일깨워줌으로써 사랑과 선행을 하게 만든다. 성도가 잘못했을 때 교회는 엄한 질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할 때도 있어야겠지만 성도의 잘못을 엄한 질책으로만 끝내버리면 그 뒤에는 열 번 이상의 격려가 뒤따라야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실 때 각 사람을 개인적으로 구원하시되 그들을 공동체 안으로 구원하여 믿음의 형제, 자매가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한 모든 것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신학자는 말하기를 교회의 친교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복된 소식의 일부라고도 말했다. 우리가 형제자매의 격려 없이는 험한 세상에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서로 격려하는 일을 한시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693 no image |단상| 케센누마교회, 고난을 딛고 일어서다_이수구 선교사
편집부
1752 2015-05-12
케센누마교회, 고난을 딛고 일어서다 < 이수구 선교사, 일본 >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 2011년 3월 11일 일본 중부 동해안을 강타한 ‘동일본 대지진’은 아직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지진으로 인해 사망자 15,891명, 행방불명자 2,584명 총 18,475명이 순식간에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을 해야 했고, 또한 후쿠시마원전 피해로 인해 인근 주민들은 아직도 불안에 떨면서 지내고 있다. 4년 전, 이러한 피해를 접하면서 우리 합신교단에서는 재빠르게 전국교회에 동정의 손길을 호소하면서 순식간에 5천여만 원이 모금되었고, 당시 총회 사회복지부장(박발영 목사)을 중심으로 피해지역을 방문, 귀한 성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당시 총회선교 일본지장이었던 저에게 의뢰가 오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귀한 성금이 소중하게 사용되기를 기도하면서 피해지역의 정보를 수소문하던 중 우연히 아침 조간 아사히신문을 읽게 되었는데 제1면에 교회의 터만 앙상하게 남은 곳위에 십자가가 세워놓은 사진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미야기현 케센누마에 위치한 케센누마 보수 침례교회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도시와 교회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던 중, 우리교단에서 보내지는 성금이 바로 이곳으로 전해져야 한다고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케센누마시는 어업하는 도시로 그 당시 인구가 74,247명이었는데 츠나미로 인해 977명 사망, 422명 행방불명되어 총 1,419명이 목숨을 잃어버린 곳 이었다. 더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이 도시에 하나 뿐이 없었던 복음주의적인 케센누마교회는 교인이 10명도 안 되는 가운데 어렵게 어렵게 3년 전에 감격의 헌당을 올렸던 교회건물이 츠나미로 송두리째 삼켜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총회 사회복지부팀은 이 교회를 위로하고 헌금을 드리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케센누마 교회의 미네키시 목사님께 성금을 건냈던 것이다. 그 후, 4년이 지난 올해 초 오랫동안 기도해왔던 케센누마 교회로부터 우리 합신교단 앞으로 연락을 접하게 되었는데, 교회가 고난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같이 교회건물이 완공되어 헌당식을 갖는다는 연락을 받게 된 것이다. 총회 사회복지부(부장 김원명 목사)는 회의끝에 축의금과 함께 사회 복지부 서기 고형근 목사를 헌당식에 파견, 4년 만에 케센누마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미네키시 목사님은 4년전에 빨강색잠바차림으로 우리를 맞아주셨는데 이번에도 같은 옷을 입고 다시금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시면서 지난 4년간의 간증을 짤막하게 들려주셨다. “과거에는 케센누마교회에서 1년에 1명의 세례자가 나올까말까 한데, 지난 4년 동안 벌써 10명의 세례자를 주셨으며, 여러 명의 구도자를 허락하셨다”고 기쁨에 가득하게 말씀해주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그 곡식을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시126:5-6) 시편의 말씀이 생각났다. 이러한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과정에서 우리 합신 교단의 교회의 성금이 부분적이지만 사용된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692 no image |제언| 두날개 조사 및 공청회의 필요성_안상진 목사
편집부
2408 2015-04-28
두날개 조사 및 공청회의 필요성 < 안상진 목사, 월명교회, 총회이대위원장 > “총회 결의 사항 이행 무모화 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될 수 없어” 총회이단 및 사이비대책위원회(이하 이대위)는 2013년 98회 총회 때 총회로부터 “두날개”의 이단성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수임을 받아, 2015년 100회 총회 때 최종보고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총회의 권면과 그동안의 관례에 따라 조사대상인 상대방으로 하여금 충분히 변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공청회를 계획한 바, 상대방로부터 공청회 약속을 받았다가, 약속 파기를 당하고, 공청회를 철회요청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본 교단 안에서도 공청회 반대를 위한 연판장이 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조사대상 상대방이 속한 교단의 이대 위원장으로부터 자신들이 조사하겠으니 합신에서는 공청회를 멈추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연판장에 참여한 몇몇 분들이 두날개 공청회와 관계한 과정 설명을 듣고자 함을 보고, 조사 및 공청회 개최의 필요성을 알릴 필요가 있어 본 글을 쓰게 되었다. 두날개 조사 및 공청회의 필요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대위는 공정한 보고서를 올려야 한다. 둘째, 공정한 보고서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본 위원회의 연구과정 및 결과에 대해 이견이 있음을 피력하고, 본 위원회 입장에서 볼 때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게 할 필요성이 있다고 공감이 되었을 때, 공개적으로 서로의 의견을 듣고 할 공개적 장을 마련함이 옳기 때문이다. 셋째, 2014년에 공청회를 개최하려고 한 바, 두날개 측에서 새로운 교재를 수정하여 발간하고 있음으로 새 교재를 살피고 결정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2015년으로 유보하였다. 하지만 새 교재를 가지고 실행된 교육을 받은 피 교역자들이 제출한 자료를 포함하여,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살핀 바, 여전히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넷째, 공청회와 관련하여 두날개 측과 2회에 걸쳐 만난 바, 첫 번째 만남에서는 공청회를 하기로 약속하였고, 두 번째 만남에서는 공청회 철회요청과 자신들을 향한 지적을 수정하겠다고 하면서, 문제가 있다면 지적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두날개 측의 모습을 살핀 바, 합신 이대위와는 관련이 없는 다른 이단연구가들과의 합의를 억지로 이끌어낸 듯한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며, 자신들에 대한 공청회를 철회해 달라는 엉뚱한 요구를 하는 등 두날개 측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모습으로 일관한 바, 공청회의 필요함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다섯째, 두날개는 합신교단의 교회를 포함하여 전반적으로 한국교회를 개혁대상으로 삼고 있고, 개혁대상이 된 배경은 말씀부재라고 못을 박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합신 내 교회들 중에 50여 개 교회 이상이 두날개를 하고 있으며(두날개 시행 측의 주장), 두날개 컨퍼런스에는 훨씬 많은 분들이 교육을 받았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합신 내 교회들 중에 두날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던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여덟째, 두날개는 이미 내외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받고 있기 때문이다. 아홉째, 본 교단에 소속된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면서 두날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교회로부터 공청회까지 기다렸다가, 공청회의 결과를 보고, 교회가 두날개를 계속할지, 멈출지 결정하겠다고 하는 의견을 듣고, 올바른 생각이라고 인정이 된 바, 본 교단의 교회에게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료와 기회를 제공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공청회는 상대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각과 주장을 분명하게 알릴 수 있도록 제공한 기회의 장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고,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프로그램이라면, 공청회를 통해서 공개적으로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며, 또한 홍보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두날개가 문제가 없다면 공청회를 통하여 작금의 두날개에 대한 부정적 소리를 잠재우는 최고의 기회가 될 것이다. 반면에 두날개 측이 문제가 있다면 어떠한 문제들이 있는지 드러내어, 본 교단의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장이 될 것이다. 특히 본 글을 쓰게 된 배경은 두날개 측이 공청회 무산을 위해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이대위의 활동과 배경에 대해 의심하게 하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전해 들었다. 이에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몇몇 분들의 전화를 받았고, 공개적으로 알릴 필요성이 발생하였기 때문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691 no image |목회단상| 하나님의 원근법_조봉희 목사
편집부
2299 2015-03-31
하나님의 원근법 < 조봉희 목사, 지구촌교회 > “직선적으로만 보는 사람은 평면만 보고 이면은 볼 수 없어” 최근에 「직선형 인간과 곡선형 인간의 차이점」을 잘 대비시켜주는 글을 읽으며 너무나 큰 깨달음을 받았다. 그래서 그 동안의 목회와 삶을 반추하며 가슴 깊이 적용해 본다. 오스트리아 화가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직선이란 우회를 용납하지 않는 완고함을 말한다. 즉, 자기 포기를 용납하지 않는 고루함이다. 다른 사람을 살피거나 배려할 줄 모르고 앞만 향해 달려가는 마음이다. 앞만 보는 목표 지향적으로 추진하기에 옆을 보지 못하는 좁은 시야에 갇히는 것이다. 이처럼 직선적인 마음은 모든 것을 자기 기준에 따라 밀고, 끌고, 잡아당기고, 주무르려한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가끔 하나님마저도 뜯어고치려든다. 그러나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대부분 직선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들일수록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몸, 우리 마음의 결, 우리 삶의 현실은 직선보다는 곡선에 해당한다. 요즘은 건축 양식도 곡선 지향적이다. 비행기나 자동차도 곡선으로 처리되어야 바람의 저항을 덜 받게 된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나선형으로 이루어진다. 인생 자체가 구부러진 결을 따라 이루어져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길을 가다보면 이따금 우회도로나 외곽도로를 타야할 때가 있다. 직선으로 가면 거리는 단축 될지 모르나, 오히려 우회도로가 더 빠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공사 중인 도로에는 ‘돌아가세요’(de tour)라는 푯말이 있다. 인생은 때때로 자기가 정한 노선도 바꿀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세찬 바람이 불 때 자기를 굽히거나 숙일 줄 아는 나무는 부러지지 않는다. 유연성 덕분이다. 반면에 자신의 든든함만 믿고 뻣뻣하게 저항하는 나무는 어느 순간에 부러지고 만다. 뒤로 물러서거나 양보하지 않는 완고함 때문이다. 부드러워야 부러지지 않는다. 겸허하게 수용해야 다치거나 상처받지 않는다. 마음 자세가 뻣뻣하여 접지 못하는 만큼 스스로 구겨지고, 큰 상처를 받는다. 특히 구약성경을 보면 그처럼 완전무결하신 하나님도 자주자주 자기 뜻을 굽히시거나 접으신다. “뜻을 돌이켜서 계획을 바꾸셨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하나님도 진짜 후회하시는 불완전한 분이라는 뜻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유연성을 의인법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궤도를 수시로 수정하신다. 이런 측면에서 직선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뜻이다. 진리에 관해 말하는 사람 중에 필요 이상으로 울타리를 치고, 금 긋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네 편 내 편 따지며 진리의 범위를 정하기에 바쁜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진리의 울타리를 꽁꽁 둘러치고는 예수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다. 진리를 사랑한답시고 그 영역을 정하고, 포용 없는 태도로 다른 사람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진리의 영역을 정하는 것보다 우리가 의로운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다. 자꾸만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편협하게 규정하고자 하는 조악한 즐거움이 우리의 인격을 병들게 한다. 그래서 ‘교리의 청결’을 ‘마음의 청결’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우리의 만남에는 기껏해야 판단만이 있을 뿐, 사랑은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율법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6절에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을 강조한다. 사랑 없는 교리나 진리는 생명도 없고, 행복도 없게 만든다. 세계 최고의 심장전문 의사 중 한 분인 정수영 박사가 쓴 〈심장이 뛴다〉라는 책에서 그는 이런 도전을 한다. “사랑 없는 교인 100명이 사랑 없는 교인 200명이 된다고 하나님 나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공동묘지에도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나로서는 엄청난 충격적 깨달음을 얻으며, 나의 목회와 교회 현장을 가슴 깊이 돌아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기만의 의로움’으로 가득한 분노를 품고 있는 직선의 사람보다는 ‘자기만의 부족함’ 때문에 고뇌하는 겸손의 사람을 편들어 주신다. 하나님은 흠잡을 데 없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는 자신의 부끄러움과 수치 때문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세리의 기도를 기꺼이 응답해 주신다. 하나님은 보무가 당당한 직선의 사람보다는, 자신의 허점 때문에 허리조차 곧게 펴지 못하는 곡선형의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신다. 하나님 앞에서는 곧음도 필요하지만, 굽음이 더욱 중요하다. 바빌로니아의 〈탈무드〉에 “참회하는 자가 선 자리에는 완전한 의인도 감히 설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완벽한 자가 의인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을 고백하는 자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은 자기가 정한 기준에 따라 올곧음만 주장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곤궁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스스로 굽히고, 구부릴 줄 아는 자의 편에 서주신다. 이런 측면에서 직선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얼마 전에 유럽 유학생수련회에서 홍정길 목사님과 대화하던 중 매우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다. 직선적으로만 보는 사람은 평면만 본다. 이면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이해의 폭이 좁다. 자기가 보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으면 틀린 것이다. 이것이 직선적 사고의 한계다. 반면에 곡선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은 모든 것들을 입체적으로 보게 된다. 폭넓은 시야로 전체를 보며 살아간다.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면이 있음을 보게 된다. 자기가 보는 것보다 다른 면이 훨씬 더 많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자기 주관에서 객관으로 뛰어넘게 된다. 그만큼 가슴이 넓은 사람이 되고, 인격이 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큰 심장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곡선과 입체적으로 보시기에 우리를 이해해주시고, 있는 그대로 용납해주신다. 우리의 단편적인 모습 때문에 포기하지 않으시고, 큰 은혜의 섭리를 따라 우리를 오래 참아주시며, 그분의 작품으로 빚어가신다. 그분의 구도에 따라 차근차근 그려가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근법이다. 결론적으로 묻고 싶다. 당신은 직선형인가, 곡선형인가? 자기 것만 주장하거나 고집하는 단세포적 평면 지향적인가, 다른 사람의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입체 지향적인가? 오늘 우리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원근법으로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690 no image |목회수상|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_안만길 목사
편집부
2075 2015-03-31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 < 안만길 목사, 염광교회 > “거친 바다에 라도 나가서 그물을 던져야 고기를 잡을 수 있어” 한국교회의 성장이 둔화되었다는 말은 많이 듣고 있다. 실제로 새신자 등록상황이 매우 부진한 것을 볼 때 그것이 사실임을 절감하게 된다. 주일마다 오늘은 어떤 새로운 분이 오실까 기대를 해보지만 그렇게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회중석 가운데 새로운 분이 와 앉아 계시면 기대와 염려가 교차가 되기도 한다. 혹시 저분이 등록을 할까 아니면 그저 살피러 왔을까 하고 말이다. 실은 요즘 많은 교인들은 교회 쇼핑에 빠져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기의 종교적인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교회를 찾는 것이다. 자녀들의 교육을 어디가 잘하는가 하고 자기들의 필요를 중심으로 교회를 찾는 것이다. 심지어 가나안교인들도 있다. 예수를 믿지마는 교회는 안 나가는 교인들이다.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가 된다. 아무튼 요즈음 교회가 과거처럼 힘있게 성장하기를 기대하기가 매우 어려운 때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교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때로 떨어져서 전도하기는 더욱 어려운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 있게 전도하는 교회와 사역자들의 소식을 접하다 보면 전도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일구어 내게 된다. 공주에 있는 모 교회의 목사는 아침마다 교회 앞 사거리에 나가서 오고 가는 시민들과 차량들에게 인사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전도법은 ‘굳모닝 전도법’이라고 부른다. 아침 출근길에 바쁜 시민들과 등교길의 학생들 그리고 승용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이나 택시 기사들을 향하여 어김없이 매일 같이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 나가서 인사를 한다는 것이다. 하도 인사하다보면 피곤이 쌓여서 웃음을 잃기 쉬운데 그럴라 치면 ‘안녕하세요! 김치’라고 하곤 한다고 한다. 물론 김치는 소리는 내지 않고 속으로 하면서 입모양은 김치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얼굴에 미소가 띠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지 어떤 모양으로든지 이웃 주민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그 노력이 매우 귀한 것이다. 그러기를 수년 하다가 보니 공주지역에 유명인사가 되었다고 한다. 공주지역의 메스컴과 관공서 병원 등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번은 전화가 왔는데 검찰청이라고 하면서 지청장님께서 식사를 함께 하고 싶다는 소식이었는데 처음에는 보이스 피싱으로 오해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허리가 아프도록 그 지역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참으로 귀한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노년으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모두가 친근해 지고 친밀해져서 그 목사님 하면 그 지역에 일약 스타가 될 정도라고 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여전도사로서 전도에 힘을 쓰고 있는 분이 계신다. 그분은 약 8,000여 명의 새가족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신 분이다. 그분은 아예 전도에 미친 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옛말에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든지 미쳐야 미친다’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어떤 일이든지 열정을 가지고 그 일에 미친 듯이 달려들어 연구하고 공부하고 실행한다면 다 성공에 다다른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분은 두 달에 구두가 다 닳을 정도라고 한다. 얼마나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다녔으면 그렇게 되었을까? 요즈음 필자가 사는 동네에 몰몬교의 미국인 청년들이 둘씩 짝을 지어 포교 차 다니는 것을 보게 된다. 까만 양복의 정장을 하고 한손에 몰몬경을 들고 이름표를 달고 서툰 한국어로 포교한다. 한번은 그 한 젊은이의 구두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 뒷창이 거의 닳아진 구두였다. 얼마나 다녔으면 구두의 뒷창이 다 닳을 정도가 되었을까? 매우 부끄러운 심정이었다. 바른 복음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며 바른 신학위에서 서있다고 자부하면서 얼마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정을 다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를 탓하기만 한다. 사회가 강퍅하다니, 부도덕하다니, 지나치게 물질적으로 변했다느니 온갖 핑계를 대면서 복음전파의 부진을 합리화 하는 것이다. 그 여전도사님은 아예 전도를 위하여 자기의 전 생활과 전부를 다 드리시는 분이셨다. 그러니 그토록 많은 새신자들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이사를 오는 가정들을 보면 그것은 마치 고양이의 입에다 생선을 갖다주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사할 때 찾아보고, 이사 다하고 정리할 때 찾아보고, 지역을 소개하고, 필요한 것은 협력하고, 그러면서 교회를 소개하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로 인도하신다고 한다. 그분의 모토가 ‘나가면 있고 안 나가면 없다’라고 한다. 우리가 고기를 잡으러 어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연구소에서만 머물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고기의 종류와 특징을 분류하고 어망을 연구하고 바다의 상태만 살피고 있다면 언제 나가서 고기를 잡겠는가? 거친 바다에 라도 나가서 그물을 던져야 고기를 잡게 되는 법이다. 우리교회 주위로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금년 7월이면 입주가 시작된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의 마음이 매우 급하다. 어찌하든지 저 아파트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저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분주하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도다’라고 하시면서 바울에게 전도에 대한 사명을 새롭게 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도 깨워주시어서 이 봄에 복음의 씨앗을 힘차게 뿌리러 나가기를 소망해 본다.
689 no image |목회수상| 남용될 수 없는 하나님의 전능성_천한필 목사
편집부
2469 2015-03-17
남용될 수 없는 하나님의 전능성 < 천한필 목사, 예다임교회 > “하나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해서 내게 주어진 잔 피할 수 없어” 사람은 누구나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으며 대접받고자 한다. 에덴동산이후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의 결핍을 어떻게든 충족하고자 다양한 시도를 감행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미시지 않은 한 인간은 그 사랑의 결핍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그런데도 기적 같은 사랑의 신비를 맛본 자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에게 먼저 ‘사랑의 찜’을 당한 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예수 믿는 우리 성도들이다. 베드로는 우리 신자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벧전 2:9절). 더 이상 신자로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다. 이와 관련해 히브리서 11장 38절은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은 신자들을 가리켜 무쇠로 만든 철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앞서 소개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상을 부러워하거나 가치 있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신자의 반응이다.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이라고 여겨진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철인’, ‘영웅’, ‘성자’를 추구할 이유가 없다. 세상 속의 ‘성공 비법’은 더더욱 의미 없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백하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신앙적 철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일까? 영웅적인 신앙을 뽐낼 수 있는 비법이 있다는 것일까? 여기서는 국어 실력만 있어도 된다. 곧 앞선 11절과 12절을 먼저 읽고, 다시 13절을 보면 쉽게 해석할 수 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곧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말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어떻게 이용하려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의 전능성을 앞세우려는 것인가? 세상이 부러워서, 세상의 그 어떠한 매력적인 것을 쟁취하고 싶어서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다’는 구호를 외치고 싶은 것인가?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시는 데 있어서 불가능이 없으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데 있어서도 불가능이 없으시다. 나의 인생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처럼 나 또한 세상을 공포와 부러움과 가치의 대상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만드실 것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아멘’할 수 있겠는가? 만일 마음에서부터 동의가 안 된다면, 아마도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은밀한 자신의 탐욕을 위해 남용했던 수준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서는 누구도 머리를 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신앙의 년 수, 목회 경력까지도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서는 무가치하다.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과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전능성은 결코 남용될 수 없다.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 나 자신을 숨길 수 없다. 하나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내게 주어진 잔을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의 전능성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성 앞에 나 자신이 겸손히 무릎 꿇어야 한다. 쓸데없이 소리치며 힘 뺄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하자.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절).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시다. 그래서 나의 현실에 요행과 기적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나의 일상과 현실을 더욱 묵묵히 직면해야 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전능성이 배부름과 풍부가 아니라 배고픔과 궁핍의 상황으로 드러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떠올리며 묵묵히 아멘으로 반응해야 한다. 평생에 걸친 거룩한 몸부림의 연습을 통해서 그리해야 할 것이다.
688 no image |목회수상| 잊혀져가기_이대원 목사
편집부
3265 2015-03-03
잊혀져가기 < 이대원 목사, 전 남포교회 부목사 > “목양 그 자체가 최고의 명예이며 영광이요 가장 복된 보상” 오래전에 관람한 한국영화 한편이 지금도 잔잔한 감동으로 기억 된다. ‘라디오 스타’라는 국민배우 안성기와 박중훈 주연의 영화이다. 영화에 조금씩 빠져 들어가는 내내 “참, 이제는 우리나라도 영화를 제법 잘 만드는구나” 하면서 마음의 박수를 보냈었다. 모든 연예인들이 그토록 꿈꾸는 최고 정상의 자리에서 세월의 흐름은 결코 거스를 수 없다는 진리에 순응하기라도 한 듯, 한 때 최고의 가수는 대중들의 기억 속에 서서히 잊혀져가면서 어떻게든 재기를 꿈꾸며 몸부림치는 두 배우의 뛰어난 연기에 몰입하다보니 어느새 내 두 눈에 눈물이 흥건했었다. 참 따뜻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참으로 따뜻하게 그려졌다. 후문에 박중훈은 이 영화에 출연한 후 많은 것을 배웠다하며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이제는 배역에 욕심내지 않고 그 어떤 배역이든지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 연기 하겠습니다.” 그의 이 말에서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배우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가 공감하듯이 몸값을 빼고 말 할 수 없다. 출연료는 곧 배우의 인기도를 말한다 해도 그 누가 딴죽을 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실제 이 문제로 감독과 배우 사이에 시끌벅적한 일도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박중훈의 말 속에서 “앞으로 출연료에 급급하여 자신의 인기도를 확인하지 않겠고 주어진 배역에 상관없이 비록 별 볼일 없는 배역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연기에만 몰입 하겠습니다”는 말처럼 들린다. ‘라디오 스타’ 속의 그 배역에 몰입한 자신이 어쩌면 모든 이들에게 서서히 잊혀져가는 지금의 자신일 수 있다는 겸허함을 그렇게 표현한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목사로서 교우들 앞에서 서서히 잊혀져가는 연습을 조금씩이라도 연습해야 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필자는 1985년 남포교회 설립이후 30여 년간 교육전도사를 거처 강도사와 목사로서 목양의 명예와 더불어 실제로 사이다가 튀는 듯한 목회의 재미를 마음껏 누리는 복을 누려왔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며, 박영선 담임목사님과 믿음의 전우 되는 교우들의 따스한 사랑이 없었다면 이 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때로는 상처받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교인들을 통해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과 따뜻한 위로를 이제까지 받아오게 하셨다. 물론 영화 속의 의미와는 다르겠으나 어쩌면 목사라는 신분과 자리도 교우들 앞에 존경과 감사와 박수를 받으며 살아간다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몇 해 전에 교회 내 미혼자들의 공동체인 청년 3부를 6년간 지도한 적이 있었다. 새로 부임한 목사에게 바통을 넘기며 환송하는 내내 모두들 마치 내가 무슨 전쟁터에 죽으러 나가는 사람 환송하듯 모두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간간이 눈물을 보이는 친구들, 고개 숙여 애써 얼굴을 마주 못하는 친구들, 기립하여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친구들……. 저들이 내게서 배우고 받은 사랑을 이제는 더 연장할 수 없다는 아쉬움도 있었겠고 나 또한 저들의 순수함과 열심으로 신앙생활하려는 멋지고 예쁜 모습들을 더 이상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짙은 서운함이 맞아 떨어진 자리였다. 이런 모습을 최근에 교우들에게서도 엿볼 수 있었다. 지난해로 남포교회에서의 30여년 목회 여정을 내려놓았다. 이는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길을 열어 주고자 함과 이제는 교우들 앞에 잊혀져가야 된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저들의 가슴속에 서서히 잊혀 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교우들 앞에 조용히 잊혀 가는 목사로 자리해야 한다. 보상을 기대하거나 꿈꾸어서는 안 된다. 섭섭함과 억울함을 호소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목양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조성해 주심 자체가 최고의 명예이며 영광이요 가장 복된 보상이기 때문이다. 내 목회 여정과 이름이 오고 오는 후대에 족적을 남기고 보상의 치열함을 부리는 자리 대신에 이제는 엘리야와 방불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충성하며 잊혀져가는 7,000명의 선지자들을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그랬듯이 또 다시 새로운 여정을 향해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687 no image |목회단상| 이 시대의 교회가 가야할 길_김관성 목사
편집부
2600 2015-02-10
이 시대의 교회가 가야할 길 < 김관성 목사, 덕은침례교회 > “고난마저도 유용하게 변화시키는 하나님 믿는 것이 신앙의 정로” 니체는 “신은 죽었다”를 외쳤습니다. 사실 니체의 이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 오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니체의 이 선언은 인격적인 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기보다는 초월적인 세계에 근거를 둔 의미와 가치들이 다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 다스리고,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세상 외에는 다른 궁극적인 가치들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니체는 살아있는 신의 요구에 근거한 ‘절대적인 도덕질서’를 인정하지 않게 될 때,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상대화 되어버림으로써 개별적 인간들의 끊임없는 싸움과 다툼, 도덕적 가치의 붕괴가 가져오는 타락과 부패가 이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그가 뛰어난 철학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런 예리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니체의 예견과 분석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현실과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귀담아 들을 내용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마음의 통일’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개별적으로 가지게 된 것이 이 사건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분열과 쪼개짐은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가 끝나는 그날까지 모든 사안과 사건에 대한 관점과 시각이 제 각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분쟁과 전쟁이 종식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인류는 통일된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이게 옳다고 하고, 저 사람은 저게 옳다’고 하는 아귀다툼이 만연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각 자아들의 개별적 욕망이 서로 싸우고 부딪히는 현장이 사회요 지구촌인 것입니다. ‘초월적인 영역에 계시는 인격적 절대자’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그 마지막 길은 최소한의 윤리와 도덕적 질서도 지킬 수 없는 자리로 달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정해진 길입니다. 사사기의 표현대로 하자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가 되는 것입니다. 마틴 부버는 이런 현상들을 분석하면서 인격적인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인간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후에 심리학적인 사고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전문가의 시각이라서 더 깊은 곳을 꿰뚫어 보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마틴 부버가 단순하게 던진 말이 아닙니다. 심리학적인 사고의 중심에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오만방자한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인간들은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옳고 틀린 것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은 ‘자기 기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고상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직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벌은 죄로 인해서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올바른 지각능력의 파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웰스가 쓴 ‘거룩하신 하나님’에는 죄로 인해 인간이 중심이 된 삶의 현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아무것에도 영향 받지 않고, 속이 텅 비어있고,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인성의 조각들을 취사선택해 이어 맞추고, 약속에 대한 의심이 많고, 성욕 외에 아무런 열정이 없고, 헌신할 능력이 전혀 없고, 실체보다 이미지에만 집착하고, 제약 없는 개인 취향의 매력적인 만병통치약에 따라 움직이고, 개인의 직감만을 따른다. 주님의 몸된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을 닮아버린 교회에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히 여기는 정신들이 다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대접받지 못하는 분위기는 교회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개념을 자동적으로 삭제시키고 있습니다. 개별적 인간들의 욕망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인간들의 다양한 욕망 실현의 장소로 둔갑하고 말았습니다. 교회역시 실제적인 하나님의 통치와는 상관없는 또 다른 ‘세상’이 되어버린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새 교회의 구성원들도 개별적인 자신의 주관적 자아의 욕구를 관철시키고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김 집사. 기다려. 다음번에 목사님과 장로님들과 의논해서 표를 몰아줄 테니까 그 때 장로로 취임해.” “장로님, 돈 없다고 사람을 이런 식으로 무시하는 겁니까? 저 이런 식이면 다른 교회로 가겠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조롱을 받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했을 때 성도들의 의식에서 경외하고 경배하며 순종해야 할 하나님은 찾아보기 힘들고, 이용하고 사용해야 할 하나님에 대한 의식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의 모든 흔적이 죄 뿐임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삶에서 소유하고 있었던 모든 권리와 누림을 포기하겠다고 나서는 성도들은 이제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경제적, 정서적, 환경적 필요를 충만히 채워달라는 신도들로 교회가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그 분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진 시련과 풍파로 인해 심리적인 결핍과 정서적 고갈을 경험하는 인간들의 정서적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가련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너무 심하게 왜곡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들에게 스트레스, 고난, 시련, 아픔, 절망적인 심리적 상태가 없는 세상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구주이신 주님을 따르는 그 길에 수많은 시련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신자는 그런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면서 ‘소망가운데 인내’하는 자리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소망과 기쁨의 원천은 자기중심적인 심리적 안정을 누리는 삶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의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다 걸어갈 때까지 우리와 동행하시며, 힘주시는 소망의 하나님이 신자가 가지는 유일한 자신감이요 희망인 것입니다. 설령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그 고난을 신자의 인생에 가장 유용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아버지의 손안에 있음을 믿고 가는 길,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로이며 자랑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주의 교회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세상을 향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완전하고 변질됨 없는 확신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는 일체의 사상적 흐름과 세상 정신을 버리겠다는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의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외쳐야 합니다. 이 세상과 교회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교회가 가야할 길입니다.
686 no image |목회수상| 정말 중요한 것은 존재의 가치_남웅기 목사
편집부
1983 2015-02-10
정말 중요한 것은 존재의 가치 < 남웅기 목사, 바로선교회 > “능력가치 추구 골몰하다 존재가치의 영광 잃지 않는 것이 지혜” 살다보면 별의별 경험들을 다하기 미련입니다. 저는 지난해 12월초, 차량운행 중에 뇌졸중의 급습을 받기도 했습니다. 의식은 말짱한 채 왼팔과 왼 다리가 스르르 풀려버리는 현실적 경험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나이 들어 여러 내과질환으로 서럽던 몸인데 이제 뇌졸중까지 덮치다니 이런 모진 인생역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하심도 즉각적이었습니다. 동승했던 일행들이 기도하며 주무르는 가운데 어느 한 곳 부작용 없이 모든 게 원상회복되었습니다, 응급실 도착 전에 이미 상황이 종료된 ‘30-40분간의 기적’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마지막 순간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붙잡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생명입니다. 그보다 귀한 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습니다(레 17:11). 즉 피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와 그 혈관의 건강에 대해 무심합니다. 혹 알고는 있더라도 심상(尋常)히 여깁니다. 우리는 생명과 직결되지도 않는 용모와 의복 등에 대해선 전전긍긍하면서도, 생명 그 자체인 피의 건강에 대해선 소홀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대가가 참으로 무섭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병들고 무익한 자에게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2013년도 한 여름이었습니다. KBS 우리말겨루기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하나님의 알음(신의 보호나 신이 보호하여 준 보람)에 힘입어 ‘우리말 달인’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주위로부터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한글박사’라는 소리도 듣게 됩니다. 저는 다만 잊혀져가는 우리말을 익혀가는 기쁨으로 인해 남보다 조금 더 고유어를 공부했을 뿐입니다. 아직도 한글 맞춤법엔 약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한글박사라니 얼마나 듣기에 민망하겠습니까? 이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동일시하는데서 오는 일반적인 오류인 줄 압니다. 공식적인 우리말에는 고유어 외에도 한자어와 외래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글은 우리말과는 또 다른 분야입니다. 말과 글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말은 보이지 않지만 소리가 있고, 글자는 보이지만 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글이 너무 자랑스러운 나머지, 한글만 갈고 닦으면 우리의 얼(정신의 줏대)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얼은 말에 있지 글자에 있지 않습니다, 한글은 소리(얼)를 담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널리 쓰이던 대부분의 고유어들이 지금은 사라졌거나 거의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 말(고유어)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말이 없는데 글자만 있으면 뭣 합니까? 외국어를 한글로 표기한다고 우리말이 되는 건 아닙니다. 몇 해 전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은 자체 문자가 없어 한글을 채용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근데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쓴다고 한민족이 되겠습니까? 문자는 없어도 민족은 존립하지만, 고유한 말과 문화가 없으면 민족은 사라지고 맙니다. 약소국들이 나라는 빼앗겨도 모국어(말)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독립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을 지켜내려는 정책의지를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해방 후 미국의 영향력 가운데 들어가면서 우리는 배고픔은 면했는지 모르지만, 말과 얼을 잊어버린 게 아닌지 두렵습니다. 우리말이 사라지면 우리의 얼이 사라지는 것이고, 언젠가 우리민족이 역사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인생에 있어 육체의 건강도 중요하고 민족의 얼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건 우리의 영혼세계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보혈로 하나님 아들이 되었고, 그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자랑은 그 능력의 탁월함에 있지 않고, 그 존재의 구별됨에 있습니다. 교회는 영생을 노래하는 곳이요, 하나님의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구별되고 거룩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영광의 교회요 영광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영광의 본질은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런즉 교회와 성도는 내 것을 자랑할 여지가 없습니다. 나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자랑하는 순간, 인간의 영광은 모래성이 되어버립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의 참담한 결과를 반면교사로 삼아야겠습니다. 누구나 성공하면 겸손하기 힘들고,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채 하나님을 노래하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언제 우리의 뜻을 이루려고 이 길로 나섰습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거지 나사로를 부끄러워하며 부자에게만 주목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걸 놓치면 안 됩니다. 겉보기엔 멀쩡한 데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서야 되겠습니까? 한글과 세종대왕만 자랑하며 기뻐하다가 고유어를 잊어버린 채 얼빠진 민족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내 영광에 목말라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놓쳐서야 되겠습니까? 부름 받은 교회와 성도는 이미 존재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능력가치 추구에 골몰하다가 존재가치의 영광을 잃지 않는 게 우리의 지혜인 줄 압니다.
685 no image |목회수상| 목사의 멋과 여유_김병곤 목사
편집부
2334 2015-01-27
목사의 멋과 여유 < 김병곤 목사, 예사랑교회 > “편협한 사고 방식이나 독선을 버리고 폭넓게 사람을 용납하길” '멋'이란 말과 '유머'라는 말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멋은 말쑥하고 풍치 있는 맛 혹은 사물의 진미를 의미한다. 그리고 유머라는 말은 우스운 것을 뜻하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정신적인 여유 있는 기질이나 인생을 대하는 타고난 너그러운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멋이 있는 사람에게는 유머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에게는 여유도 있다. 목사는 멋을 풍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여유 있게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유머도 있어야 한다. 나아가 목사는 지도자이므로 너그러운 아량과 관용이 있어야 한다. 마음이 좁고 편협하여 자기의 생각만을 고집하는 사람에게서는 멋을 찾아볼 수 없다.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거주해 갔던 곳에 땅이 좁아서 종들이 서로 다투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여유가 있었고 멋있는 모습으로 롯에게 우선권을 내주었다. 그는 먼저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으나 롯에게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양보하였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고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에 롯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그 선택권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재빠르게 사용하였다. 그 후에 그들의 삶의 내용은 너무나 달랐다. 하나님의 복은 조카 롯에게 양보와 너그러움으로 대했던 아브라함에게 임했다. 하나님은 멋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인하여 여유를 나타낼 수 있었고 그 삶에서 멋을 풍길 수 있었다. 예수님은 멋을 아는 분이시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에 여리고를 들러서 몇 사람을 만나신 후에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여리고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삭개오를 만나시기 위함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죄인취급을 당했던 삭개오의 집에 의도적으로 들어가셨다. 삭개오와 같은 죄인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의 여유 있는 발걸음은 삭개오를 통하여 수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품으시는 멋이 있는 발걸음이었다. 목사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여유로움이 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할 수 있는 여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할 수 있는 여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할 수 있는 여유,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서도 예수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는 여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여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오히려 부요하게 해줄 수 있는 여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의 여유 말이다. 목사에게는 이러한 멋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목사의 멋은 꾸준한 노력과 경건으로 얻어지는 생활의 열매다. 목사의 멋은 곧 목사의 덕과 사랑과 믿음이 합쳐진 인격이다. 예배당에 도둑이 들어와서 헌금함을 뜯고 헌금을 훔쳐 가려할 때에 엄한 목소리로 책망하면서도 친절한 목소리로 '노동을 하면서 떳떳하게 살아가라'고 용돈을 손에 쥐어 주면서 권면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지도자 중에는 선각자 월남 이상재와 같이 여유와 멋 그리고 유머가 넘치는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의 도량 넓은 인격과 유머는 대하는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멋이 있었다. 그의 멋있고 여유 있는 생활과 교훈은 오늘을 사는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월남이 기독교를 대표하여 일본으로 갔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사람들은 그들의 무기가 쌓여 있는 병기창(兵器廠)을 보여 주면서 모인 사람들에게 은근히 위협하면서 자랑하였다. 그리고 환송 만찬을 베푸는데 월남이 한마디 하였다고 한다. "오늘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병기창을 보았더니 대단한 대포와 갖가지 총기들이 있어 과연 일본이 세계의 강국임을 느낄 수 있었소. 그런데 기독교의 성경에 이르기를 '총칼로 일어선 자는 총칼로 망한다'고 하였는데 일본이 그렇게 될까? 다만 그것이 걱정이요." 그 날 지도자의 멋과 유머 그리고 여유 있는 그 한 마디의 말은 일본인의 폐부를 찔렀다. 서울 종로에 있는 YMCA회관에서는 강연회가 열렸을 때에 일본 경찰이 끼어들어 감시를 하였다. 한번은 명사 초청강연이 있어서 월남이 사회를 보는데 군중 속에 일본 형사들이 참석하여 여기 저기 섞여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월남은 먼 산을 바라보듯이 둘러보며 한 마디를 했다. "어허, 철도 아닌데 개나리가 만발 했군..." 장내 청중들은 월남의 눈길을 따라 보며 폭소를 터트렸다. 그 당시 속된 말로 일본 형사를 '개(견)'로, 경찰을 '나으리' 라고 비아냥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목사는 체질적으로 멋을 알고 멋을 풍기는 사람이어야 한다. 목사의 멋은 생활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균형 잡힌 미적 표현이다. 편협한 사고방식이나 독선을 버리고 폭넓게 사람을 용납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관용이 있어야 한다. 우리교단 총회에 참석하면서 멋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참석하는 모습 속에서 목사의 멋을 볼 수 있다. 한 두 사람의 총대가 지나칠 정도로 자기 의견을 많이 표현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 모인 목사 장로총대들이 끈기와 너그러움 그리고 관용으로 대하는 모습 속에서 여유를 본다. 각 노회의 대표로 파송 받은 지혜롭고 성숙한 총대들이 오히려 말을 아끼고 조용하게 끝까지 참석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목사의 멋과 여유를 생각해 본다. 자기의 권위나 위신에 손상이 된다 하여도 자기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고쳐나가는 인간성이 목사의 멋이 아니겠는가! 롯과 같이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선택권을 양보하면서 바보처럼 살아가는 아브라함의 여유 있는 모습 속에서 목사의 멋을 본다.
684 no image |제언| 보다 안정적인 신학교 경영을 위하여_김용주 목사
편집부
2589 2014-12-30
보다 안정적인 신학교 경영을 위하여 < 김용주 목사, 소식교회 > “교회는 신학교에 장로교 신앙고백으로 무장된 석좌교수들 파송해야” 신학교는 장로교 정치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비교적 신중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제언하고자 한다. 1. 교단과 신학교와의 관계 지난번 총회기관지인 개혁신보사에 신학교 교수이면서 노회 의장이자 지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중인 분께서 각 신학교가 스스로 각성하고 신학교의 입학 정원을 줄여야 한다는 제언은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논의는 합동신학교 시절 초기부터 신중하신 최 모 교수께서 제기하신 바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신학교는 그런 신중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급기야 총회와의 관계에 있어 그릇된 교회정치 지도자들을 피한다는 현실적인 명분을 앞세워 인준신학교라는 어정쩡한 관계로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우리는 신학교와 총회가 이런 관계로 계속 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는다. 총회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듯 한 심각한 타락상을 보일 때, 잠정적인 형태로써 인준관계는 바람직했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들의 완전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런 관계가 여전히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신학교 교수회나 신학교 이사회가 완전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는 오류의 여지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혁적 장로교회를 지향하는 어느 지교회가 노회나 총회의 돌이켜 질 수 없는 듯 한 전반적인 부패상을 직시하고 나서 잠정적으로 행정을 보류하는 경우와 같다. 하나님의 뜻에 어느 정도 일치하는 총회가 형성되면 사실상 인준관계는 사라져야 한다. 그 이유는 신학교란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유일한 지체인 교회들과 더 긴밀한 일치를 이루어야 하고 진리와 진리의 주체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2. 석좌교수 제도의 활용 각 신학교의 교수 임용은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문제가 있었다. 유력한 교수들이나 교장들이나 총장들이 자기 사람들로 여겨지는 인물들로 채움으로써 신학교에 대한 장로교회적 개혁주의가 후퇴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신학교 교수 임용의 난맥상이었다. 이러한 난맥상이 조금씩 해소되는 방향으로 진척이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해 몇몇 사람들의 합리적 결정을 넘어서야 하겠다. 또한 많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는 일도 적합하지 않다. 그 문제까지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성과 하나님의 속성과 그 속성으로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적합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여기시는가?”가 교수 임용의 적합성이 될 것이다. 물론 현재 각 신학교들의 교수 임용 제도를 그대로 두고서 진척을 보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신학교 경영의 한 단면을 제시해 보려고 하는데 그것은 석좌교수 제도이다. 합동신학교에도 석좌교수 제도가 비교적 신학교 초창기부터 있었다. 한 분은 옛 남서울교회에서 교수 생활비를 부담했던 형태로 계시다가 은퇴하였으며, 또 한 분은 아마도 고 박윤선 교장의 추천으로 계셨던 홍창표 교수였다. 홍 교수는 부족한 한국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식견으로 성경말씀을 가르쳤다. 때로는 천진난만한 어린이처럼,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라는 찬송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면서 우리에게 들려주기도 하였다. 세 번째로는 조만간에 목회를 자유 사면할 것으로 알려진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이다. 어쩌면 그분의 가르침에서의 특수성 때문에 많은 분들이 기대하는 듯하다. 각 신학교가 신학과 경제적 난맥상을 해소하기 위해 교수진 삼분의 일 이상은 석좌교수로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소한 한 파트에 일인 이상이 석좌교수여야 한다고 여긴다. 3. 신학교 운영을 위한 후원 여러 교단 신학교들의 총장들에 대하여 조금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임무에 대하여 마치 신학교 경영을 위한 영업사원의 선봉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일반신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신학교 총장들이나 유력한 보직을 가진 교수들이 신학교 경영의 난맥상 해결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상황들을 본다. 또 그분들은 그런 상황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기고 받아들인다. 그러다 보니 일반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숫자를 불리고 교회당 등 물리적 경영 때문에, 정작 진리와 진리의 주체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품성과 그 품성으로 하신 일에 대한 선포가 약해지는 결과를 신학교에서도 보게 된다. 각 지교회 목사들에게 의식주에 걸맞은 생활비가 의수히 지급되어야 하는 것은 세상 삶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진리를 조직화 하고, 거기에 살붙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하나님의 모든 부요까지를 증거하고 기도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도들까지도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는가? 마치는 말 이제라도 우리 모두가 신학교마다 교회의 삼직분자들, 곧 목사들과 장로들과 집사들이 선서한 내용으로 무장된 석좌교수 요원들이 있도록 그들을 두 눈을 부라리고 찾아보자. 그리하면 신학교가 신학적이기만 하고 목회적이지 않다는 비난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신학교가 이 제도를 활용한다면 전보다는 편향적 교수 임용도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더욱 더 총회와 긴밀한 신학교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
683 no image |목회수상| 행복한 11월을 보내며_박봉선 목사
편집부
2625 2014-12-30
행복한 11월을 보내며 < 박봉선 목사, 대동교회 > “만날 때 마다 조금씩 보이는 응답에 감사드리며 도전 받게 돼” 10월부터는 분주하고 11월이 되면 행복한 이동이 시작된다. 2008년부터 계속된 교토평화 그리스도 교회와의 김치교실과 바자가 있기 때문이다. 2014년 가을 6년 동안의 경험으로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약간의 떨림으로 준비하는 기도의 사역이 시작된다. 11월 6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되는 김치선교와 6년이라는 시간의 익숙함을 이기기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며 준비했다. 덕분에 매년 걸리던 공항 세관도 무사히 통과 할 수 있었고 정확하다 소문난 일본의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도 빗나가서 맑고 청명한 가운데 바자와 김치 교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선교사님을 통해 듣기로 바자 당일 다른 사정이 있어 참석이 어렵다던 마사코 상이 시작시간 전부터 나와서 계산대를 맡아 감당하고 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열매를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앞으로 더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자연스레 다나카 키누코 상을 떠올린다. 2011년 김치교실을 찾은 다나카 키누코 상은 다른 방문자들과 다르게 교회 2층을 보고 싶다고 하며 예배 처소를 방문하고 돌아갔다. 그 이후 그녀는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열심히 교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던 중 암을 발견하게 되지만 이 일은 그녀의 신앙을 더욱 뜨겁게 달구게 된다. 투병 중에도 견고하게 세워져 가는 모습은 매년 우리를 도전 했다. 2013년에 소천하면서 그녀는 딸 마사코와 사위, 손자를 신앙으로 부르게 되었고 어머니의 신앙을 본받은 가족들의 신앙은 건강하게 성장해 갔다. 2대를 부르시고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의 강에 성도들을 흠뻑 빠지게 한다. 생명을 위해 함께함에는 장벽이 없었다. 준비기간에는 불경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10월이 임박하도록 사역을 위한 최소 인원이 채워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타 교단 S교회 권사님 두 분의 헌신으로 더욱 풍성한 선교현장이 되었다. 현지에서 처음 만나 사역하며 5일 밤을 지내게 될 첫날부터 우리는 이미 가족이었다. 우리는 1년에 한번 만나는 현지교인들과도 장벽을 느낄 수 없었다. 바자와 김치교실을 진행하는 동안 7년을 함께하는 호흡의 힘을 느끼며, 매년 늘어나는 바자 방문자들과 줄어들 듯 하면서도 채워지는 김치교실 지원자들을 감당하게 되었다. 주일 예배와 친교의 시간은 익숙함과 친밀함을 넘어 사명을 공유하며 은혜를 나누고 함께 소망을 바라는 시간 이었다. 매년 5박6일을 마치고 귀국하면 1년 동안을 현지인 중심의 모델교회, 한국인 성도들의 선교사적 마인드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만날 때 마다 조금씩 보이는 응답에 감사드리며 도전을 받는다. 2012년부터 333 비전과 교회 묘지 마련을 위해 함께 기도했다. 2013년 묘지 마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333 비전 또한 허락하실 것을 믿고 기도와 헌신으로 함께 하고자 한다. 333비전은 일본이라는 상황을 감안하면 쉽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심을 믿으며 300명의 예배자, 30명의 헌신자, 300평의 부지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한다. 이 비전 위에 보육소와 교회 사역을 통해 현지의 다음 세대를 세우는 사명을 함께 나누며 준비해 간다. 사명 안에 함께 하는 우리 또한 강한 성도로 강한 교회로 세워져 가고 있음에 감사드린다. 짧지만은 않은 일곱 번의 사역을 통해 일본에서의 한국음식문화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 이 일을 통해 교토 150만 인구에 200개에도 못 미치는 교회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더 나아가 관계를 세우고 대상자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는 일에는 이일만한 것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일본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들과 함께 사역하며 사명을 공유할 수 있는 좋은 도구로써의 한국음식문화선교가 되었으면 한다. 7번째를 마치고 8번째를 준비하는 오늘 우리는 현지 교회의 비전에 동참하고 10년을 넘어 20년 함께 달릴 수 있는 사명의 좋은 도구로써 김치선교를 소망한다. 변함없이 함께하실 김순화 권사님, 심옥녀 권사님 그리고 눈물의 기도와 헌신으로 후원해주신 성도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모두로 인해 11월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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