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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2 no image |목회수상| 새로운 시작_최광희 목사
편집부
2316 2014-12-30
새로운 시작 < 최광희 목사, 행복한교회 > “새해가 있기에 자신을 추스르고 새 힘내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한 해가 끝나고 또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014라는 숫자에 겨우 익숙해 졌는데 또 2015라는 어색한 친구를 사귀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해마다 연말이면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한다면서 여러 가지 계획들을 세웁니다. 목표를 정하고 실천 방안도 마련해 봅니다. 그런데 연말에 뒤돌아보면 후회되는 것이 많고 올해도 또 한 번의 의미 없는 반복인 것 같아 실망도 됩니다. 이런 식이라면 송구영신이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만일 한 해를 마무리 짓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런 기회조차 없다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가끔 인생을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이러저러하게 해 보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생에는 ‘다시 한 번’이 없습니다. 인생에는 연습도 없고 새로운 기회도 없습니다. 그래서 살다보면 실패도 하고 후회도 하는 법이지요. 인생은 준비도 되어 이지 않은데 어느 날 갑자기 출발해서는 방학도 없고 휴가도 없이 끝까지 내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먹은 대로 순조롭지도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 길이 참 암담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인생 전체에 ‘다시’는 없지만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다시’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새해입니다. 우리에게 새해라는 것이 있기에 지친 사람들이 자신을 추스르고 새 힘을 내어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인생에 ‘새해’라도 없다면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눌려 그만 주저앉고 말 것입니다. 누구나 새해가 되면 각자마다 포부를 가지며 원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물론 연말이 되어서 돌아보면 채 못다 이룬 것도 있지만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새해가 필요합니다. 반성하고 수정하고 새로운 계획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말과 새해의 좋은 점은 또 있습니다. 연말이면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과 만남의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에게 일과 돈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인데 연말에라도 안 만나면 자칫 큰 후회를 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힘이 납니다. 편하게 주고받는 대화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용기도 생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에너지를 불어 넣게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재창조(Recreation)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새해가 있는 것이 참 좋고 다행입니다. 이제 우리 새로운 시작을 해 봅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피 뉴이어. 예브라케카 아도나이(여호와께서 복 주시길).
681 no image |신앙수상| 성도들에게 있어 시련의 의미_최재호
편집부
2715 2014-12-16
성도들에게 있어 시련의 의미 < 최재호, 실로암교회 > “고난과 시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경험하는 삶의 역설” 성도들에게 있어 생각지 않았던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는 일이 종종 있다. 너무 힘들어서 겪는 본인도 고통스러워하지만 주변에서 그를 바라보는 이들도 안타깝다. 생각해 보건데, 고난 또는 시련의 의미에 대해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연단 혹은 시련이 오게 되므로 이런 것들이 전혀 없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과연 그러할까? 연단이 전혀 없는 사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과연 연단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1. 우리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한 시련들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 교정하고 죄악에서 떠나도록 하시기 위해 시련을 주시는 경우가 있다. 수많은 성경말씀이 이 같은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사실이다. 시편 107편 17절의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그리고 시편 119편 67절의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등이 이 같은 입장을 견고히 하는 기반이 된다. 성도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 방치하시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한 채찍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잘못의 자리에서 떠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채찍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릇 행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며 살 것인가. 이러한 채찍을 통해 우리를 교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지 않은가. 하지만 성경에는 꼭 이같은 고난의 이유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또 욥기 23장 10절에도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라고 말씀한다. 연단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을 표현하는 적절한 말이다. 사실 고통을 겪을 때는 너무 힘들고 어려워 제발 이곳에서 벗어나기를 간구하게 되지만, 연단의 기간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그 시간들이 참으로 유익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아마 우리 모두는 이러한 섭리적 경륜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2. 우리의 부패성을 깨닫게 하는 시련들 이와 관련해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고통스러운 연단의 시간들을 통해 우리의 실체를 돌아보고 자신의 추함과 연약함, 나태함,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연단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자신의 비참한 실체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그분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된다.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에게 있어 이같은 근원적인 복은 없다. 하나님의 영광(사랑과 공의 등)과 함께 자신의 악함과 추함, 죄악 됨을 직시하는 자만이 근본적인 구원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참된 복은 하나님의 창세전 선택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날마다의 삶속에서 거울처럼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받은 자로서 마땅하지만 그것이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본성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직시하게 하시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은혜는 고난을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다. 고난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소망과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하시는 하나님은 분명 은혜로우신 아버지시다. 또 연단의 시간들을 통해 우리는 더욱 강해진다.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함께하심을 경험하고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과 은혜로 인해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문제들에 있어서도 우리가 견디고 승리하게 됨을 알게 된다. 예전에는 작은 어려움과 연단 앞에도 어찌할 바를 몰라 했지만 이젠 어지간한 어려움과 고통은 힘들게 느끼지 않는다. 연단을 통해 강해졌기 때문이다. 어제 나와 함께 하여 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과 내일도 나와 함께 해 주시리란 것을 확신하며 살아간다. 3. 시련 속에 담겨 있는 역설 이처럼 교회의 회원된 우리들은 하나님을 배우고 알며 살아가는 삶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깨달아가며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기에 연단을 통해 성도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더 깊이, 더 온전히 알아간다고 할 수 있다. 과연 그러하다면 연단을 통해 당신을 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그의 백성들은 참으로 복되다. 동시에 연단의 시간들은 우리를 더욱 정결하고 순수하게 만든다. 특히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적 성숙을 연단과 눈물의 시간들을 통해 얻게 된다. 불순물들은 연단의 불속에서 태워지고 더욱 순수한 모습으로 남는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이름과 영광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믿음은 안락한 소파나 온 몸이 노곤해지는 온천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거친 광야와 험준하고 깊은 골짜기를 힘겹게 걸어가는 가운데 확고해진다. 마치 힘겨운 운동을 통해 근육이 생기고 더욱 강해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이런 분명한 의식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온 고난과 시련의 시간들을 불평과 낙담으로 보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연단은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비록 괴롭고 힘들더라도 우리는 연단의 시간들을 감사하면서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경험하는 삶의 역설이며 기쁨이다. 마치는 말 모든 시련은 우리의 잘못을 교정하는 회초리의 역할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성도의 성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섭리적 목적도 있다. 인간의 죄성은 꺼지지 않는 불과 같으며 설사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살펴보고 자신에게 닥친 혹은 닥칠 수 있는 고난에 대해 묵상해 보는 것은 많은 유익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이러한 삶의 역설에 대해 과연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궁금하다.
680 no image |제언| 우리 교단에 이런 조직이 필요합니다._최일환 목사
편집부
2591 2014-11-04
우리 교단에 이런 조직이 필요합니다. < 최일환 목사, 장안중앙교회, 총회 부서기 > “전략과 목표를 설정하여 추진하는 기획위원회 기구 필요해” 지난 총회는 합신교단이 한국교회의 자랑이라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은혜 가운데 회의를 마쳤다. 실제로 우리 교단 총회는 자랑할 것이 많다. 무후보(無候補) 무기명(無記名) 투표로 선거에 돈 한 푼 쓰지 않는 제도는 타 교단에서 찾아보기 힘든 제도이고, 총대 서로가 상대를 배려하는 예의가 있고 질서가 있는 모습도 아름다웠고, 상정된 안건에 충분한 토론을 한 후 표결에 승복하는 성숙한 모습도 좋았다. 총회 총대들이나 총회를 섬기는 교회나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하려고 하는 모습들이 면면히 나타난 총회여서 매우 기뻤다. 그래서 이번 총회에 총대로 처음 참석한 수원노회 어떤 총대는 말하기를 총회에 참석해서 이렇게 은혜를 받으니 내가 합신 목사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데 필자가 총회를 임원으로 2년째 섬기면서 우리 교단을 살펴보니 정말 아쉬운 점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중에 가장 시급하고 절실히 필요한 것 한 가지 의견을 피력해 보려 한다. 그것은 교단의 중장기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전략기획팀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교단 역사가 이제 35년째를 접어들고 있다. 출발부터 개혁주의 신앙을 기치로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교단이 되기를 바라며 35년을 달려왔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극단적인 표현인지 모르지만 우리 교단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대가 급속한 경제적 성장과 첨단문명의 끊임없는 발전으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사회전반에 모든 것이 격변하고 있는 시대다. 그래서 기업들이나 대학, 정부조직은 물론이고 모든 조직들이 나름대로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정부를 비롯한 모든 기관과 조직은 전략기획팀을 만들어 급변하는 시대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구상하고 거기서 나오는 전략을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여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교단은 한국교회가 위기를 맞이했다고 걱정은 하면서도 현 위기 상황에 대처할 아무런 대책도, 기구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적어도 10년, 또는 20년 후의 우리교단의 발전 전략과 목표를 구상하고 그 전략을 추진해야 할 ‘테스크포스팀’이나 ‘전략기획팀’이 구성되어 가동되어야 하는데 그런 기능을 하는 기구도 조직도 현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총회가 이 격변의 시대에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전략을 세워 어떻게 시행하여 극복해 나갈 것인지를 제시하는 기구가 필요함을 주장하고 싶다. 우리 교단은 현재 총회 정책위원회가 있다. 그러나 정책위원회는 총회에서 맡겨진 안건만 다룰 뿐이지 시급하고 긴급한 사항을 결정하고 해결해 나가는 기능은 정지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실례로 지난 총회 때 교육부의 교육국 승격을 위한 헌의안이 올라왔는데 한국교회의 교육부서의 심각한 위기를 알면서도 교육부가 현행대로 맡아 진행하자고 하여 안건을 부결시켰다. 그런 안이 올라 왔으면 그것을 교육부가 맡아 처리할 것이 아니라 교단 발전을 생각하고 그 전략을 세워 추진할 부서가 맡아서 처리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리고 현재는 총회 상임위원회가 있어 총회 임원과 각 상비부서장 연석회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임위원회도 각 상비 부서의 사업을 관리, 감독, 또는 조정할 역할과 기능은 주어져 있지는 않다. 그러니 교단 발전 전략 기획위원회는 꼭 필요한 기구라 할 것이다. 물론 교회나 교단은 세상 정부 조직이나 사기업 조직과 같은 목표나 전략을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워진 교회와 교단이기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거룩한 복음 증거사역을 어떻게 하면 보다 효율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추진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모아 기획하고 추진하는 아이디어 뱅크와 같은 조직이 있어야만 교단은 미래가 있을 것이다. 최근에 교회들마다 교회의 핵심가치를 내세우고 그 핵심가치를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전략과 목표를 설정하여 추진하는 기획위원회 같은 조직을 운영하는 교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 교단도 차기 100회 총회 때는 가칭 “교단발전 전략 기획위원회”를 만들어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세계화 속에서 우리 교단의 미래를 내다보고 바람직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 달상을 위한 개혁주의적인 전략을 세워 일을 추진할 수 있는 교단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런 기구는 총회 총대로 구성될 것이 아니라 교단 발전을 위한 전략을 공모한 후 합당한 발전 전략을 내어 놓는 뜻있는 분들을 위원으로 모시고, 또 교단을 이끌어가는 책임 있는 대표자를 비롯해 앞으로 20년 또는 30년 후 한국교회를 책임질 지금의 신학생, 30-40대 목회자, 평신도 지도자, 그리고 교단 내외에서 나이 불문하고 교단 발전 전략을 집행할 만한 능력을 갖춘 분들을 모셔서 섬길 수 있게 한다면 우리 교단의 미래는 밝게 될 것이다. <이 글은 본사의 편집 취지와 동일하지 않은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679 no image |목회수상| 불인지심(不忍之心)_장석진 목사
편집부
2453 2014-11-04
불인지심(不忍之心) < 장석진 목사, 광주월산교회 > “장애인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소중히 여겨져야” 인간에게는 남의 불행을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굶어서 고통 받는 저개발 국가나 북한 어린이의 굶주린 사진을 보게 되면 가슴이 찡해진다. 이처럼 고통에 빠져 절망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을 맹자는 불인지심(不忍之心)이라고 말했다. 아니 불(不)자에 참을 인(忍)자다. 그러니까 ‘불인지심’은 인간으로서 남의 불행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이다. 맹자는 백성들이 굶어죽고 전쟁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당시 전국시대에, 정치 지도자들에게 ‘불인지심’을 가지고 ‘불인지정(不忍之政)’을 펼치라는 강력한 일갈(一喝)이었다고 한다. 맹자는 비유를 통해 이렇게 불인지심을 설명한다. “지금 어린 아이가 내 눈앞에서 우물 속으로 빠지려 하고 있다. 이 때 인간이라면 누구나 측은(惻隱)한 마음이 들어 손을 뻗혀 그 아이를 구해주려 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속으로 그 아이의 부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동네 친구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아울러 내가 손을 뻗혀 구해 주지 않았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욕먹을까 두려워해서도 아니다. 이것이 인간은 누구나 남의 불행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는 본능적인 불인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此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다. 존 왓슨은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대하라.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전쟁을 치르는 이들이다. 그들은 육체적 고통을 느끼며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다. 당신이 그들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들이 짊어진 짐을 발견하고 신음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레위기 19장 14절에 보면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장애인 사랑과 연관시키셨다. 장애인을 귀히 여기는 사회가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사회이다. 21세기 산업화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가져다 준 역기능적 산물이 바로 수많은 장애인의 발생이다. 산업재해, 교통사고와 약물복용이 증가하면서 많은 후천적 장애인을 양산하는 시대가 되었다. 장애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다. 따라서 장애인을 귀히 여기는 것은 우리 자신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 사회의 금기를 깨트리시고 시각 장애인의 눈을 만지시고 청각 장애인의 귀를 만지시고 지체 장애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특별히 장애인들이 소중히 여김을 받아야 할 중요한 이유는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678 no image |목회수상|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_강승주 목사
편집부
2707 2014-10-21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 < 강승주 목사, 섬기는교회 > “적당히 때우며 관록과 재주만으로 목회 하는 일 없기를” 꼭 30년 전, 합신 1학년 첫 학기에 강의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난다. 물론 오래된 기억이라 이야기의 자세한 내용은 다를 수 있겠지만 느낌만큼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는 남서울교회에서 공부하던 시절이었는데, 교수님께서 강의 도중에 건너편에 보이는 한 호텔의 가격이 얼마인지 물으셨다. 정말 값이 얼마인지 물어볼 리는 만무하고 뭔가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 것 같아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답답하셨는지 그냥 바로 말씀해주셨다. 천 원보다는 비싸고 천억 원보다는 싸지 않겠냐고 하셨다. 그 순간 우리들은 모두 웃었다. 다들 황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 가격을 말하려면 이렇게 하면 안 되고 각종 데이터를 동원해서 5백억 원쯤 된다고 말하면 훨씬 설득력이 있는 것인데, 우리가 설교자로 말씀을 대하는데 안타깝게도 늘 이런 식으로 대한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의 말씀은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해야 하는데 두루뭉술하게 맞긴 맞지만 정확하게 딱 맞는 말씀을 전하지 못하는 설교자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었다. 그동안 들었던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은데도 이 이야기만큼은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누구든지 딴 짓 하지 않고 나름대로 오래 목회한 사람이라면 그동안 받았던 도전과 훈련만으로도 성경을 큰 오류 없이 전한다고 자부할 자신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목회자라면 더욱 그렇다 요즘에는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무척 많다. 안타깝게도 수없이 많은 설교들 가운데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어쩌다가 한두 편에 지나지 않는다. 놀랍게도 유명하다고 하는 분들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자주 본다. 꼭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교해서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겨야 유명해지는 것만은 아닌가보다! 지난 총회 기간 중 드렸던 한 예배 시간에 평소 존경하던 증경 총회장님 한 분이 말씀을 증거하셨다. 말씀을 들으면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분은 누가 봐도 그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주해를 근거로 작성된 설교 원고를 들고 강단에 서셨음이 분명했다. 그 연세에도 그렇게 하신다는 것에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그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지 않아 진심을 확인해볼 수 없었지만 굳이 확인이 필요하겠는가? 같은 목회자로서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무엇이 있지 않은가? 목사이기 때문에 말씀을 들고 설교자로 선다. 그리고 반문해본다. 성경을 대충 읽고 그냥 알고 있는 상식선에서 설교할 것인가? 아니면 치열하게 본문에 들어있는 주님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그 결과물을 들고 강단에 설 것인가? 우리는 성경 말씀의 토대 위에서 목회를 한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설교하며 사람들 앞에 선다. 그런데 솔직히 목회 하는데 제일 방해 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우습게도 성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을 읽긴 읽되 본문 해석에 연연하지 않고 몇 마디 필요한 말들만 인용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한다면 참 편하고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주님보다 앞서며 주님의 뜻을 곡해하는 것이 두렵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적당히 때우며 관록과 재주만으로 목회를 하다가 일선에서 물러나는 날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고백하건대, 며칠 전 설교하다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본문 내용이 눈에 들어와 당황했었다. 솔직히 이런 기억이 없거나 있더라도 아주 드물었으면 좋겠다. 사실 생각보다 이런 사고를 많이 치는 편인 것 같다. 그럴 때는 반드시 반성을 하지만 그런데도 시간이 지나면 똑같은 잘못을 자주 되풀이한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설교자가 되려면 한참 먼 것 같다. 그래도 주님께서 30년 전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나름대로 반성하게 하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싶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의도에 아주 근접한 말씀을 근사하게 전할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하며 다시 성경을 본다.
677 no image |제언| 교회 재산 과세와 한국교회의 위상 정립_박종언 목사
편집부
2679 2014-10-21
교회 재산 과세와 한국교회의 위상 정립 < 박종언 목사, 평안교회 > "교회는 사회의 공공성을 선도하는 견인차 되어야"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서늘해졌습니다. 첫눈과 결빙소식도 들립니다. 추수의 풍요로움과 함께 어려운 이웃이 더욱 생각납니다. 이럴 때 교회와 나라를 생각하면 많은 염려가 생깁니다. 9월 15일부터 10월 7일까지 공시되었던 ‘지방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 입법예고’ 때문입니다. 제목이 생소하시겠지만, 내용은 독자들이 잘 아는 내용입니다. 교회가 예배당이나 사택 등을 살 때 발생하는 취득세와, 부동산을 보유하면서 매년 내는 재산세를 그동안 감면받아왔는데 앞으로는 감면혜택을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개정안에 따르면, “...일몰 미설정된 감면에 대한 일몰기간 적용(제6조...제50조...) 1)... 2) 사회복지법인 등의 감면, 학교 감면, 평생교육단체 감면, 종교 및 제사단체 감면... 등에 대한 적용 기간은 각각 2019년 12월 31일로 함”이라는 단순한 내용입니다. 개정 이유는 ‘노인 장애인 등 새로운 복지 수요에 대응해야 하는 등 지방 재정 여건과 지방세 감면의 비정상적 문제들을 정상화하는 방향으로 사전 사후 관리를 강화하고자’ 종교 단체에 대해서 지방세 감면 혜택을 종료할 것이랍니다. 참고로 2012년 한 해 동안 기준 종교계가 감면받은 재산세 및 취득세 등은 324,946건에 2,990억 원 정도입니다. 이와 더불어 목회자과세와 관련하여 목사들 중 일부는 목사는 세금을 내고 교회는 세금을 내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있었으나, 교회의 법적인 지위가 달라지므로 ‘과세의무 없는 자발적 납부’ 외에는 종교의 자유와 납세의 의무를 조화시킬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었습니다. 그런 중에 교회에 대한 과세가 예고된 것입니다. 교회가 한국사회에 비춰지는 모습이 세상의 빛과 소금인 복의 근원이 아니라 종교사업자로 보였기 때문에, 공직자들이 종교, 결국 기독교회에 비과세 혜택을 줄만큼 공익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 시대는 공공선이라는 이름으로 종교가 후퇴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교의 도덕적 가치는 과세정의보다도 높습니다. 종교적 가치 없이 공동체 가치는 불가능합니다. 그 사회의 도덕적 가치의 최후 보루가 종교입니다. 국가제도의 정당성을 돕는 기관이 종교개혁 500년의 기독교회입니다. 링컨과 윌버포스는 당시 산업구조상 경제체제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던 노예제도 폐지를 기독교신앙으로 실현시킴으로써 천부 인권이 확립되었고 산업혁명과 평등한 참정권을 가진 서구의 민주국가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인 복지를 위해 교회에 세금을 물리겠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혹스럽습니다. 신자의 실천적 신앙생활이 섬김과 나눔이고, 한국교회의 복지사역을 빼놓고 노인복지를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는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 존중과, 모두가 다함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자는 공동선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종교의 공익성, 사회통합기능, 사회봉사기능 및 종교 편향을 이유로 변증하여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정부에 반대 의사를 재출하여, 10월 16일에 입법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교회의 위상을 다시 세움에 있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주사위는 다시 한국교회에 주어졌습니다.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에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면 또 다시 이 문제는 재론될 여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잘 아는 것처럼 초대교회는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가 완전히 분리된 상태가 아니고 박해받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회 봉사를 감당했습니다. 가난한 자, 약한 자, 노예들에게 들어가서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우선적으로 전파하면서 사랑으로 봉사해나갔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초대교회에 나타난 사랑은 선택받은 백성 그 안에 머물지 않고 그 경계를 넘어서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 굶주린 자, 병든 자, 약한 자 등등을 다 찾아가는 그런 사회봉사 형태로 나아갔습니다. 목회자 과세, 지방세 감면 일몰 등의 도전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시는 권고라고 보입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초대교회 복음의 능력과 본질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본질로 돌아가기 위해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동안 열심히 했습니다. 여기에 하나가 더해져야 합니다. 곧 우리 주변에 산적해 있는 상당수 목회자들이 최저생계비조차 보장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은 부득이 평일에 생업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창고와 양식을 열어 복음사역자들을 먼저 먹여야 합니다. 이것이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재정이 허락한다면, 그가 전도사이든 목사이든 복음사역자에게 최저생계비를 공급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놓아두고서는 결코 한국교회가 공공성 회복을 위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총회 목회자최저생활비대책위원회가 있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차제에 이 문제를 총회에 위탁하는 것으로 자위하지 말고, 각 노회가 그리고 각 지교회가 앞장서서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676 no image |목회수상| 신자(信者)와 신자(神子)_김수환 목사
편집부
2373 2014-09-23
신자(信者)와 신자(神子) < 김수환 목사, 군포예손교회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종이 아닌 아들의 신분 가지고 있어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혈연관계는 모든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우선한다는 말이다. 피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라면 물은 혈연 이외의 일반적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물의 관계’는 아무리 잘하려고 애를 써도 한계가 있다. ‘피의 관계’에서는 너무 쉽고 자연스럽게 되는 일들도 ‘물의 관계’에서는 어렵고 사무적이 된다. 우리는 그것을 시부모와 며느리와의 관계에서 실감케 된다. 고부관계는 숨이 막힐 만큼 완벽에 가깝게 살아도 거기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게 된다. 매일 정확한 시간에 본분과 의무를 다해도 메워지지 않는 고부 사이의 간극은 차라리 운명적이다. 그러기에 시가에서의 삶은 잘못해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잘해도 문제가 없어지지 않는다. 반면에 친정부모는 매사가 서툴고, 다시 안 볼 것처럼 다투고 싸워도 하룻밤 지나고 나면 고무줄처럼 본래 자리로 되돌아오게 된다. 부부싸움이 수년이 지나도 자국이 남는 걸 보면, 분명 ‘칼로 물 베기’는 아닌 듯하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야말로 정말 칼로 물 베기이다. 심하게 다투고 싸워도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수(水)표면처럼 표시가 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되 자녀가 아닌 종으로써 섬기지 않을까, 매우 염려하였다(갈 4:1-31). 당장 겉으로 드러난 열심만으로 보면, 자녀는 감히 종의 신앙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한 것처럼, 자녀는 종에게 멸시를 받게 되어 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바울 사도가 전해준 순수복음으로부터 다시 율법주의로 회귀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종의 신앙은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고, 호감이 있어 보인다. 아직 미숙한 어린자녀들의 신앙과 비교될 땐 더욱 그렇다. 자녀는 부모와의 삶과 관계를 중요시 여기지만, 종은 오직 일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종의 신앙은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 즉 며느리가 의무적으로 시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이 형식과 겉치레만 남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선 일이나 열심보다도 생명과 신분의 문제를 훨씬 더 중요하게 다룬다. 종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유업이 없다. 왜냐면 그에겐 아버지의 생명이 없고,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가 단지 종교적인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살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모든 유업을 물려받는 것이다. 지난 90년대 경배와 찬양이라는 프로그램이 열풍처럼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무릎 꿇고, 양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향해 찬양과 경배하는 모습은 너무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들이 아닌, 종교심을 갖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내면에 주님의 생명 없이 바깥의 하나님만 높이고, 열심을 내고 만다면, 역시 종의 신앙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요, 자칫 우상숭배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겨서도 안 되지만,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겨서도 안 된다. 사람에겐 영웅심리가 있다. 자기가 직접 영웅이 되고자 하기도 하지만, 어느 특정한 대상을 영웅의 자리에 앉혀놓고, 그를 영웅으로 숭배하며 대리만족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과 열심이 좀 부족해도 양자(아들)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롬 8:15). 그 생명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해야한다. 우리기독교의 참된 신앙생활은 바깥의 하나님을 높이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녀가 되어, 친히 하나님을 표현하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몸소 살아내야 한다(빌 1:21). 종은 아주 모범적으로 율법을 지킬 수도 있고 주변사람들을 감동시킬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할 수도 있다. 심지어 뜨겁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하나님 나라의 유업이 없다. 왜냐하면 그에겐 하나님의 생명이 없고, 주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한 신자(信者)는 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신자(信者)의 모습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신자(神子)로 나아가야 한다.
675 no image |목회단상| ‘좁은 목회? 넓은 사역?’_변재웅 목사
편집부
2595 2014-09-02
‘좁은 목회? 넓은 사역?’ < 변재웅 목사, 송내중앙교회 > “맡기신 말씀대로 성령 의지하여 전하는 사역을 ‘좁다’라고 평가할 수 없어” “목회의 폭 넓힌다는 명분 아래 성공 신화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일 없어야” 교회나 목회자에 대해서 ‘좁아’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목회 사역이 좁다는 뜻입니다. 또는 설교 내용이 좁다는 얘기입니다. 이미 넓은 것이 선이고 좁은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전제가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좁다’고 평가하는 태도에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애매한 자세로 ‘좁다’는 단정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명쾌하고 단호한 그만큼 자신의 평가를 확신한다는 뜻이고, 자신의 ‘넓은’ 목회 사역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좁다’는 진단을 받는 입장에서는 실제로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볼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투다가 한 쪽에서 ‘니 팔뚝 굵다’는 식으로 나오면, 그 동안 각자 내세우던 내용은 사라져 버리고 자존심 대결만 남으면서 더 큰 소리를 치는 쪽으로 판세가 기웁니다. 목회 현장에서의 ‘좁아!’ 이 한마디 판단도 그런 역할을 합니다. 사역의 내용은 온 데 간 데 없고, ‘좁아서 안 된다’는 평가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좁다’고 지적하는 소리의 메아리만 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맡기신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어디서든지 사람에게 맡기신 그 말씀이 전해지는 곳이라면 성령을 통해서 죄 사함과 구원을 얻는 믿음을 허락하시기에 목회 사역이 끊이지 않고 전개되고 있습니다. 적은 사람이 모이든 많은 사람이 모이든,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그로 인해 믿음이 생성되고 자라가는 방식은 인간이 고안(考案)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제공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 사역은 그 본질적 특성상 사람의 입장이나 세상의 관점에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은혜를 ‘넓은 관점’이나 ‘좁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없고, 더더욱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목회의 본질과 신학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는 낄 틈이 없게 만들어 놓고서 ‘좁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이들끼리 싸우다가 ‘니 팔뚝 굵다’ 즉 ‘너 잘 났다’ 하는 식과 다를 게 없습니다. 자기들만 옳은 채 하니까 좁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말이니까요! 교회가 세워져 가는 과정은 초월적인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회심과 거듭남의 역사는 사람의 손안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생명에 속한 것은 머리카락 하나라도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과 의롭다 함을 입는 것과 관련해서는 죄인인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권한도 없을뿐더러 어떤 역할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무능력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의외로 단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맡겨주신 말씀에 대한 자세와 태도만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목회의 생명은 말씀에 있는데, 그 말씀을 전하는 내용과 그에 따른 목회 사역을 진단 평가하는 기준으로 ‘넓고 좁음’이라는 잣대가 대두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기신 대로 우리가 그 말씀을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을 갖게 하시고, 나아가 그리스도를 찾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맡기신 말씀대로 성령에 의지하여 전하는 사역’을 좁다고 평가하는 자체가 성립될 리 없습니다. 더군다나 목회 사역의 옳고 그름을 ‘좁다, 넓다’는 기준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 ‘넓고 좁음’의 기준 자체에 대한 논의를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어디서 온 잣대냐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좁다’는 평가를 내릴 때 망설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관점을 확신한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넓고 좁음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기준이 없이는 구체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을 테고, 그만큼 자신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 ‘좁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준의 출처가 어디일까요? 짐작하건대 외적으로 드러나는 열매, 곧 교인 수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외적 규모’와 ‘사역의 넓고 좁음’의 상관관계가 당연시되는 현실을 감안할 때 그렇습니다. ‘좁다’는 비판은, 어떤 신학 체계를 고집하고 어떤 지도자만을 붙들고 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교회 성장이 지체되고 급기야는 교회가 침체에 빠져 무너져 간다는 것입니다. 교회 침체의 원인을 ‘좁은 목회 방침’과 ‘설교의 좁은 관점’에서 찾는데, 그 원인의 근본은 신학에 집착하고 특정 지도자를 추종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다’는 평가가 현실적으로 성립되고 존재하는 이유는, ‘성공 사례’가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넓게’ 목회하니까 교인수의 양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교회가 커진 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한 마디로 성공 사례의 위력 때문입니다. 그래서 ‘좁다’는 진단을 내리는 주체의 입장은 단호하고 그 태도가 분명합니다. 한 치의 의구심이나 의문이 개입될 여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한층 더 ‘좁으냐? 넓으냐?’라는 기준을 가지고 목회 현장을 바라보고, 또 교회를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기서 얻어지는 결론은, 교회를 세우는 목회 사역을 인간의 단순 논리로 평정해 버리고 일축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넓고 좁다는 잣대 하나만으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일거에 휩쓸어버릴 수 있다는 것인지, 그 의도나 취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힘들고 끝없이 인내가 요구되는 목회 현장에서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괜히 내용도 없는 기준으로 목회 사역의 정당성 시비를 걸고 나오는 이런 쓸데없는 ‘논리 장난’이 목회를 더 힘들게 하고 더 헛갈리게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말씀을 아는 일에, 그래서 말씀대로 전하는 일에 늘 ‘내 코가 석자’라는 입장으로 다가가는데, 이 자체도 늘 긴장되고 무거운 압박감을 견디기 쉽지 않은데, 내용도 기준도 동기도 애매모호한 문제까지 업고 갈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때 성령께서 유효한 역사를 일으키심으로 말씀을 전해 듣는 사람이 자신의 죄인 됨을 통렬히 깨닫고 그리스도를 찾고 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 중심’의 구원 사역입니다. 그런데 넓고 좁음을 따지는 목적과 그 기준을 적용하는 의도는 ‘사람 중심’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중심’과 ‘사람 중심’이 어울려 교차점을 갖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서로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초적인 질문으로 논지를 밝히겠습니다. 말씀을 넓게 적용시켜 전하면 그만큼 성령의 유효한 역사가 더 일어납니까? 반대로 말씀을 좁게 적용시켜 가르치면 그만큼 성령의 역사는 제한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질문을 제시해 놓고 보면, 이 논의를 마무리할 수 있는 단서가 잡힙니다.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무의미한 질문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넓게 적용시킨다? 좁게 적용한다?’, 이런 사람의 논리가 성경에 근거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찌 됐든 목회 사역의 폭을 넓히면, 그만큼 전도의 폭도 넓어지고 열매도 풍성해진다는 입장이 대세인 듯싶습니다. 목회의 폭을 넓힌다는 것이 말씀과는 어떤 관계인지를 해결하지 않은 채로, 성공 신화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형국입니다. 사람이 된다고 하면 되는 곳이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목회의 폭을 넓혀가는 것은 그 사람의 나라는 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맡긴 말씀인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넓은 곳에서도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고 사람이 적은 좁은 곳에서도 말씀은 매이지 아니한다는 신앙고백으로, 이 애매모호한 논리를 정리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역사’가 관건입니다. 감사하게도 이런 명제적 진술에 덧붙일 내용이 주어져 있습니다.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딤후 2:9)는 것입니다. 말씀의 역사가 열쇠인데 그 말씀이 매일리가 없다면,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는 길로만 나서면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한 걸음 한 걸음도 성령의 돌보심만을 의지 하면서 말입니다.
674 no image |목회수상| 성경읽기가 짐이 될 때_도지원 목사
편집부
2482 2014-08-19
성경읽기가 짐이 될 때 < 도지원 목사, 예수비전교회 > “말씀 안에서 하나님 만날 때 하나임 사랑도 점점 자라게 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사랑해서 성경을 읽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사랑이 없이 성경을 읽는 것은 형식에 그치고 짐이 될 뿐이다. 그래서 스티븐 J. 니콜스는 “성경을 제대로 읽으려면, 시편 119편 97절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거기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그에게는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성경읽기와 묵상의 동기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말씀을 시 119편 48절과 147-148절에서도 볼 수 있다. “또 나의 사랑하는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그래서 아더 핑크는 말했다. “성경의 진실성에 대해 동의하는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성경을 애정을 갖고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성경읽기가 짐이 될 때 우리는 성경을 사랑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터는 이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묵상하는 것과 단순히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묵상하는 일은 진지하고 깊이 그리고 열심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마음으로 되새기는 것입니다 . . . 그러나 모든 일에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율법에 고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고 사랑하는 것을 가장 깊은 내면에 열심히 되새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싫어하거나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게 지나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깊게, 열심히, 오랫동안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하는 데 의지가 마음에 뿌리를 내릴 때 묵상은 저절로 나옵니다.” 루터는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것을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 연결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읽기와 묵상을 그만두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럴 때 우리는 성경읽기와 묵상을 훈련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훈련할 때 우리는 성경을 사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읽기와 묵상을 훈련하는 것만으로 성경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중요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J. D. 그리어는 이와 같은 훈련의 유익을 이렇게 설명한다. “영적 훈련에는 복음으로의 깊은 젖어듦이 동반되어야 한다. 복음은 마음의 갈망과 욕망을 변화시킨다. 사실 훈련의 목적은 복음을 생각하고, 묵상하고, 그 안에서 행동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영적 훈련은 우리를 복음의 능력으로 이어주는 줄과 같다. 이것들 자체에 능력이 없지만 그 능력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우리를 연결시킨다. 복음으로 가는 문이지만, 복음 자체는 아니다. 당신이 성경은 읽기 싫고 대신 TV를 보고 싶다고 가정해보자. 스스로를 성경을 읽게 만드는 것이 단순히 율법주의인가? 아니다. 당신은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 당신의 마음이 그것을 사랑하도록 훈련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향한 당신의 사랑은 점점 자라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읽기와 묵상을 훈련하는 것은 도널드 휘트니의 말대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이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훈련이 아니다. 하지만 훈련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 연결시켜주는 통로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읽기와 묵상을 훈련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없어 성경읽기가 짐이 될 때 더더욱 그러하다. 시 119편에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한다는 고백과 주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각각 열두 번 정도 나온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이 넘쳐날 수 있다면, 성경읽기가 더 이상 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때에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673 no image |제언| ‘빈 둥지 증후군’과 그 극복을 위한 대안_서자선 집사
편집부
2657 2014-08-19
‘빈 둥지 증후군’과 그 극복을 위한 대안 < 서자선 집사, 광현교회 > “중년기 성도들은 다양한 방법과 영역으로 봉사의 폭 넓힐 자원들” ‘빈 둥지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생물학적 나이로는 40-50대의 연령대로, 자녀 양육과 교육이 어느 정도 끝나는 시기의 주부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중년의 주부가 자기 정체성 상실을 느끼는 심리적 공황 상태를 일컫는다. 대다수 주부들은 그동안 자기 삶의 목표나 열정이 주로 자식들에게 집중되어 왔었기에 이 시기에 이르게 되면 상당한 크기와 무게의 허전함과 공허함을 겪게 된다. 때문에 인생의 후반부에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라 정서적인 방황은 물론이고 남은 시간과 자원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서성이고 헤매게 된다. 이처럼 자신이 중년의 시기가 될 때까지 남은 인생에 대한 준비가 미처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 대다수의 중년 신자들에게서는 신앙생활조차 역동적이지 못하고 헛헛하며 피상적인 것에 힘겨워 하게 된다. 결국 신자로서 신앙고백은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한 삶의 보람과 기쁨을 가져다주지는 못하고 신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언저리에서 그저 배회하는 입장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주축이 되어 있는 많은 교회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물론이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여러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각양 은사들을 발굴하고 개발하도록 도와야 한다. 곧 각 사람의 다양한 은사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구체적이고 창의적으로 섬기고 나누는데 활용되도록 기여하는 삶이 되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교회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성경적인 세계관에 근거해서 자신들에게 맞는 각양 은사들을 살려 봉사할 때 각각의 신자들의 삶에서는 자발적인 희생과 헌신이 따르게 되며, 이로써 다양한 방법과 영역으로 봉사의 폭이 넓어지고 활성화되어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점검하게 되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대해 실제적으로 실천하게 된다. 곧 세상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사람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거나 혹은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제 문제들에 대하여 성경적인 관점으로 보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각양 은사를 통해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도 알지 못했던 마음의 소원을 감지하고 소명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신자로서 발돋움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이렇게 구별된 성도들의 손과 발로써 이루어지며,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움직이고 찾아 가는 신앙인이 되어 가는 것이다. 특별히 중년의 성도들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경제적으로 능력과 자원이 안정적인 경우가 많고 전문 인력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런 교회 현실의 상황 분석도 없이 교회가 획일화된 방법만 고수하다가는 성도들이 소유한 자원들을 신앙적으로 바르게 발휘하지를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이는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섬김과 나눔의 영역이 대부분 오래되고 구태의연한 방법과 종류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의 은사나 혹은 시간적인 여건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또는 의무적으로 봉사하게 된다면 그 열매도 더디고 때로는 불평이 잦아지며 그 일에 성실하게 임하지도 못하게 된다. 아무리 열정과 열심이 있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에라도 가능한 사역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를 오랜 시간 방치하게 되면 다시 타성에 젖은 신앙인으로 전락하거나 또는 무기력한 삶에 안주하거나 아예 자신의 능력을 포기하기도 한다. ‘지금이 좋사오니’ 하는 편안하고 태만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교회의 회원으로서는 직무유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를 종용한 것은 1차적으로는 개인의 책임도 있지만 2차적으로는 교회 지도자들과 직분자들의 안일한 갈무리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와 방법으로 지금까지 교회들이 신앙생활을 지도해왔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세상으로 나가서 힘을 발휘할 저력 있고 의식 있는 신앙인들을 길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전도’라는 단어조차 얼마나 피상적이고 무색해지고 있는지 모른다. 교회는 동일한 상품을 찍어 내는 공장이 아니다. 많은 성도들에게 있는 다양한 은사와 시간과 자원을 자발적인 희생과 헌신으로 나아가도록 적극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고 일할 사람들을 키우고 세워야 한다. 그리고 내보내어야 한다. 누군가 ‘교회는 세상으로 향하기 위한 베이스캠프’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교회에서는 지도자들과 직분자들과 성도들 사이의 철저한 동역자 마인드가 급선무이며 실제로 교회는 온통 넘쳐나는 자원의 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밭을 제대로 가꾸지 않아서 말라 죽어가는 무궁한 자원들을 보면서 훗날 무엇이라고 변명할 것인가? 우리 주변을 보면 뻔뻔하고 염치없는 사람들, 희생과 양보를 모르는 사람들, 불의하고 악독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도 우리 신자들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이켜 보아야 한다. 이럴 때 몸으로만 때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의식의 전환과 정체성을 바로 정돈하고 실천하는 준비된 성도들이 필요하다. 우리들은 각종 불의와 비겁한 일들과 사람들에게 지혜롭게 대처하고 그들을 돕고 변화시킬 수 있는 손과 발이 되어야 할 것이다.
672 no image |제언| 교회의 예배와 시편 찬송의 사용_최덕수 목사
편집부
2938 2014-08-19
교회의 예배와 시편 찬송의 사용 < 최덕수 목사, 현산교회 > 불교에서 미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면, 기독교에서는 음악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지난 일이지만 서울 동부 이촌동의 한 교회에서 시작된 ‘경배와 찬양’이 모든 교회의 정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던 시절, 전도사나 부교역자를 구하는 광고를 할 경우에는 언제나 ‘찬양에 은사가 있는 자’라고 하는 기준을 예외 없이 요구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 한국교회가 찬양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었는지를 반증한다. 하지만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라는 절규에 가까운 찬송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예배가 예배다워졌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말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순수한 마음과 열정만 있었지 음악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 교회 안에서 음악의 사용 많은 신자들이 음악 자체가 가진 힘에 압도당해 감정이 흥분되고 고양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거룩한 예배와 찬양을 놀이와 축제로 만들어 놓은 줄도 모르고 내가 기쁘고 즐거우면 하나님도 기뻐하시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음악은 사람들에게 주는 기분 좋은 감정을 결코 하나님께 중개하지 못한다. 칼빈은 음악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사용될 필요가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었다. 제네바 시편찬송(1543년) 서문에서 그는 “사람을 즐겁게 하고 그에게 기쁨을 주는 데 적절한 다른 것들 사이에서도 음악은 첫째이거나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음악은 하나님께서 그 사용을 위임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는 점은 필수적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칼빈은 음악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을 경배하면서도 타락할까 염려하는 우려의 마음을 함께 가졌다. 칼빈의 염려는 역사 가운데 현실로 드러났다. 음악사용이 신학적 이해 안에서 이루어졌던 16세기와 달리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용도가 아닌 자기감정을 표현하고 즐기는 수단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오늘날 현대 복음주의 교회들도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 Service’라고 말한다. 예배가 서비스라면 그 중심은 예배자여야 하는가, 아니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어야 하는가? 대답은 자명하다. 서비스가 고객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면 예배와 찬양 역시 하나님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인가’라는 물음보다 ‘예배자들이 오늘 어떤 감동을 받았는가’라는 물음을 더 우선시한다. 이는 종교개혁의 정신과 맞지 않다. 이 세상 왕을 알현할 때에도 왕실의 제도를 따르는 법인데, 하물며 하늘의 왕이시오 만유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이시랴!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송 우리는 우리가 좋은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찬송 중에 하나님의 위엄에 합당한 음악을 선택하여 사용해야 한다. ‘불만 붙이면 되지, 굳이 하나님이 사용하라 하신 불을 사용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렸다가 향단에서 불이 나와 죽임을 당한 나답과 아비후의 실수, 나아가 ‘법궤는 옮기면 되는 것이지 어떤 방식으로 옮기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라고 생각했다가 죽임을 당했던 웃사의 실수를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도 바울이 권면한 바 그리스도의 말씀이 신자에게 충만히 임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를 다스리는 신령한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신령한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신자는 또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마음과 외적인 태도가 진지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또한 미미하다. 가까이 하지 못할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신자의 자세가 세자가 부왕에게 나아가는 자세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신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정서를 함께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시 2:11). 3. 교회가 불러야 할 찬송 많은 이들이 내용과 형식과의 관계를 너무 쉽게 생각한 나머지 가사가 기독교적이라면 선율이야 어떠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멜로디만 듣고 있노라면 세상 유행가와 다를 바 없는 찬송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과 내용을 담는 틀과 형식은 살과 뼈와 관계처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가사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이 행하신 일이어야 하고 선율과 화성도 그에 걸 맞는 것이라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찬송이 바로 칼빈의 제네바 시편 찬송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칼빈의 시편찬송가를 불러 왔다. 어떤 이들은 ‘칼빈의 시편찬송가를 고집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물론 칼빈의 시편찬송만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칼빈의 시편찬송가를 불러 본 경험도 없으면서 비판부터 하고 나선다는 것이다. 필자가 시무하는 현산교회에서는 통일찬송가와 함께 스코틀랜드 시편 찬송가를 10년 이상 불러오고 있고 올해부터는 칼빈의 시편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시편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거룩한 정서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다. 칼빈은 음악이 너무 부요하고 아름답게 되면 음악 자체가 주목을 끌고 마음을 말씀에 집중하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했기에 악기 반주 없이 시편이 불려지도록 하였다. 사람의 음성이 영혼이 없는 모든 악기를 훨씬 능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스코틀랜드 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처럼 무반주로 찬송을 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칼빈과 같은 음악에 대한 세심하고 주의깊은 이해를 가지고 예배하며 찬송해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는 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가사의 내용보다 곡조에 더욱 끌려갔다면 벌 받을 죄를 지은 것으로 고백합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우리 중에 이런 내용의 참회의 기도를 한 사람이 있는가? 신자는 찬양을 자기 흥에 겨워 부르거나 예술적 감흥에 겨워 불러 제치듯이 불러서는 안된다. 진리의 통제를 받지 않은 자기 열정과 자기 과시의 방편으로 음악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주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듯이 찬송 또한 하나님이 들으시도록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불러야 한다. 성령께서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을 따라 불러야 하며, 혀로만이 아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예배가 예배다워지게 된다.
671 no image |제언| 프란체스코의 한국 방문에 즈음하여_김수운 목사
편집부
2721 2014-08-05
프란체스코의 한국 방문에 즈음하여 < 김수운 목사, 대구 성본교회 원로 > 필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대구 성본교회 원로목사 김수운(78세. ksu5397@hanmail.net)임을 밝힙니다. 필자는 얼마 전 대구 계산 성당 앞을 지나다가 소책자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소책자 전면에는 프란치스코의 대형 사진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흥미를 가지고 소책자를 읽어 내려가는 중에 12쪽에 기록된 ‘천주교의 역사’라는 대목에 이르게 되자 나의 흥미와 기대는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소책자에는 천주교의 실체가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이 소책자에 기록된 ‘천주교의 역사’ 내용이 허무맹랑한 거짓말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와 같은 거짓말로 지구상에 있는 11억이 넘는 천주교인들을 가르치며 속여서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도 부족해서, 더 많은 사람을 거짓으로 미혹하려고 한국에까지 프란체스코가 온다고 하니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1. 사탄의 꾐에 넘어간 사악한 종교 집단 ‘천주교회’ 먼저 천주교에서 말하는 소위 ‘교황’의 허구성에 대하여 논하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3-19절을 보면 예수님은 가이시랴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며 유명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하셨고,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하시며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라고 하셨습니다. 위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두 가지의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이어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주교회에서는 위의 두 구절의 말씀을 ‘보라! 예수께서 베드로 위에(기초해서) 교회를 세우셨고,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준 것이 아닌가!’라고 오해하고, 베드로가 천국열쇠를 받은 지상교회에서의 예수님의 대리자요 교황이라고 하면서 진리에서 벗어나 엉뚱한 집단을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천주교는 사탄의 꾐에 넘어간 사악한 종교 집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2. 마태복음 16장 13-19절의 ‘반석’에 대한 해석 베드로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페트로스(Πἐτρος, 남성 명사로서 뜻은 반석 또는 바위)이고, 본문에 나오는 이 ‘반석’은 헬라어로 페트라(πἐτρᾳ, 여성 명사로서 뜻은 반석 또는 바위)이며 페트로스(Πἐτρος)와 페트라(πἐτρᾳ)는 서로가 다른 단어입니다. 1) 페트로스(πἐτρος)가 아닌 페트라(πἐτρᾳ) 위에 세워진 교회 만약 예수께서 ‘반석’이라는 단어를 페트로스(πἐτρος)라고 남성 명사를 사용했다고 한다면 천주교의 해석대로 ‘베드로’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셨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πἐτρος)라”고 말씀하신 후에 “내 교회”는 “페트라(πἐτρᾳ) 위에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페트라(πἐτρᾳ)로 표현된 반석은 어떤 의미일까요. 페트라(πἐτρᾳ)로 표현된 ‘반석’은 누가복음 6장 47-4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눅 6:47).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리라”(눅 6:48)는 말씀에서 언급하신 ‘반석’(πἐτρᾳ)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용된 반석의 헬라어가 페트라(πἐτρᾳ, 여성 명사로서 뜻은 반석 또는 바위)이며 이는 마태복음 16장 18절에 사용된 페트라(πἐτρᾳ)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페트로스(πἐτρος, 남성 명사)와 페트라(πἐτρᾳ, 여성 명사)의 반석은 각각 어떤 반석이며 바위일까요? 반석에는 두 가지의 반석이 있는데 하나는 지면에 우뚝 솟아나서 보이는 반석이 있고, 다른 하나는 땅 속에 있는 큰 암석층이 있는데 이를 암반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페트라(πἐτρᾳ, 여성 명사)는 이 암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란 페트로스(πἐτρος, 남성 명사)가 아니라 페트라(πἐτρᾳ, 여성 명사)로 기록된 ‘암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튼튼한 암반, 곧 반석(πἐτρᾳ)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했습니다. 2) 반석(πἐτρᾳ)이라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 만약의 경우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대로 인간 베드로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웠다고 하면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신 후 몇 시간도 가지 못해서 교회는 사탄에 의하여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부터 지금까지 약 2000년이 넘도록 계속해 오면서 226명의 교황들이 있었는데 그 많은 교황들 가운데 죄를 범한 교황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인간인 교황 위에 교회를 세웠다고 하면 교회는 오늘까지 땅 위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 암반(πἐτρᾳ)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튼튼하게 서 왔고 앞으로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교회는 튼튼하게 서서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세워진 암반(πἐτρᾳ)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이 단어는 인간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믿는 믿음과 그 고백입니다. 곧 암반(πἐτρᾳ)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말하기를 교회의 기초는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릿돌이 되셨다”(벧전 2:4-8)고 했습니다. 바울 역시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고 했습니다. 3.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셨다는 ‘천국열쇠’에 대한 이해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고 하셨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대리해서 세상 교회를 다스리는 전권을 부여했다고 말하며, 베드로로 부터 전해 받은 천국열쇠는 2대 교황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황들이 이어 받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황들은 이 열쇠의 남용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교황과 관련된 교리에 대해서 천주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미화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할 때 12제자를 모아서 그들에게 특별교육을 하셨고, 그 열두 제자 중에서 베드로를 으뜸 제자로 선정하여 다른 제자들을 지도하게 하시다가,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들으시자 즉시 베드로를 사도단의 으뜸 제자로 임명해서 천국열쇠를 주시면서 초대 교황으로 세우시고, 그의 대를 이어가게 해서 오늘까지 교황들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 이어오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허무맹랑한 교황 교리에서 여러 가지의 잘못된 교리가 나오게 됩니다. 즉 고해성사의 교리, 연옥설 교리 등이 그렇습니다. 그야 말로 성도들을 교황의 손아귀에 넣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성도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1) 천주교의 「고해성사」 교리에 대해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란 '세례를 받고 난 뒤에 범한 죄(하느님과 이웃을 거슬러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교회와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사제에게 그 죄를 고백하여 용서를 받는다고 하며, 고해성사를 통해서 고백자의 죄가 용서되고 벌을 면제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또한 내 이웃과도 화해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고해성사는 천주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 교황이 일일이 할 수 없으니 모든 사제들(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부)도 다 천국열쇠를 가지고 있어서 고백자의 고백을 듣고는 고백자의 머리 위에 두 손이나 오른 손을 펴 들고 사죄경을 외우는데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교회를 통하여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라고 기도한 후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라고 선포한 후 ‘주님의 자비는 영원합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하면 고해성사가 끝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천주교의 연옥 교리에 대해 중세기에 천주교회는 교황의 면죄권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죄에 대한 보상을 돈으로 대신하는 소위 면죄부라는 속죄표를 신자들에게 판매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면죄부 상자에 돈을 ‘댕그랑’ 떨어뜨리는 순간에 죄인의 영혼이 연옥에서 나와서 천국으로 올라가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천주교야 말로 미신에 사로잡힌 종교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짓을 하지 않지만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고해성사를 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니 이는 무지한 교인들에게 가해지는 엄청난 공갈이요 협박인 것입니다. 3) 천국열쇠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열쇠는 어떤 개인에게 주어서 어떤 개인의 천국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그런 열쇠가 아닙니다. 성도 개인의 구원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7-8절에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천국열쇠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마태복음 18장 15-18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교회의 모든 성도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모두 형제들입니다(마 18:15). 그중 한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그 범죄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알지 못하게 죄를 범한 사람을 찾아가서 권고하라 했고(마 18:15), 만일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했으며(마 18:16),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당회)에 말하고, 만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치리하여 출교시켜서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마 18:17). 이렇게 하여 치리하는 것은 영적인 권위가 있어서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고 하늘에서도 교회에서 매고 풀고 하는 대로 인정하겠다고 하면서 이것이 곧 천국의 열쇠라고 했습니다(마 18:18). 죄를 범한 사람들이 신부 앞에 가서 죄를 자백기도하고 신부가 고백자를 위해서 하나님께 중보 기도하여야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성경에서 어긋나는 범죄 행위임을 성경은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시기 전까지는 죄인은 감히 성소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가서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었으며, 특히 1년 중 대 속죄일에는 대 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해 줌으로 죄인들은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운명하셨을 때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짐(마 27:51)으로 죄인들이 대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 누구든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죄용서 받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4-16).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시면서 성소의 휘장을 찢어놓으신 것을 천주교의 사제들은 찢어진 휘장을 다시 꿰매어 놓아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서 기도하지 못하게 가로막아놓고 자신들이 고백자를 대신해서 기도하고 사죄의 선언을 하고 있으니 이는 엄청난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4. 천주교 교황 교리의 오류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 1)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다른 사도들보다 특별한 계급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하실 때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를 특별한 지위에 올려 세우거나 교황으로 높이는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마 16:18-19)고 하신 후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아니해서 제자들이 예수께 묻기를 “우리 중에 누가 더 크니이까?”(마 18:1) 하고 다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다른 제자들 위에 특수한 지위인 교황으로 세우셨다고 한다면 제자들이 감히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 베드로는 고넬료가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갔을 때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려 할 때 일으켜 세우면서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행 10:26). 만약 베드로가 교황으로 세움을 받았다고 하면 고넬료가 엎드려서 절할 때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날 천주교에서는 교황을 알현(謁見, 신분이 높은 사람을 뵈올 때 하는 인사)할 때, 사람들이 교황 앞에 엎드려서 절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며 교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3) 제1회 총회 시에 야고보가 의장으로서 사회하면서 안건을 결의했습니다. 제1회 총회 시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였는데 안건은 ‘이방인이 예수를 믿을 때 먼저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으면 구원을 받는가?’ 하는 안건이었습니다. 이 첫 번째 총회에서 야고보가 의장이 되어 안건을 결의했는데(행 15:13-21) 결의 내용은 ‘이방인들이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교황이었다면 베드로가 교황의 권한을 행하지 아니했겠습니까? 이것만 보아도 베드로가 어떤 특수한 지위에 있었거나 교황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바울은 베드로에 대하여 가혹할 정도로 책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당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교회에서 기둥들이라고 했습니다(갈 2:9). 그러면서 또 하는 말이 “나도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 12:11)고 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최고의 높은 성직자인 교황이었다면 바울은 틀림없이 베드로보다 다음 서열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은 바울은 베드로를 호되게 책망하였던 것입니다(갈 2:11-14). 만약 예수께서 베드로를 교황으로 세워 두셨다고 하면 바울이 베드로를 여러 사람들이 다 듣고 보고 있는 앞에서 그렇게 책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가 초대 교황이었다는 것은 성경에도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입니다. 마치는 말 왜 천주교에서는 교황교리를 이렇게 허무맹랑한 거짓말로 꾸미고 장식하고 있으며 기타 사제들까지 높이고 있을까요? 교황을 비롯한 천주교의 모든 사제들(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부)을 신격화하기 위해서이며, 모든 천주교인들을 맹종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한 가지 천주교회의 사제들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천주교회에도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들이 장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필자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회에는 절대로 구원이 없습니다. 천주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믿으면 한 사람도 천국에 가지 못하고 다 지옥에 갑니다. 다만 천주교인들 가운데 그들의 교리대로 믿지 않거나 교리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교회에 나가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의 피로서 죄용서 받고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고백하는 신자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천주교회 안에서는 이처럼 신앙고백이 분명한 극소수의 신자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를 바로 아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천주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오히려 천주교는 기독교의 간판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단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며, 성당 위에는 십자가를 세워놓고,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고 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흡사 기독교 교인이고 성당은 십자가와 관계가 있는 건물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단의 부하인 귀신의 속임수입니다. 교황은 또 다른 적그리스도와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요일 2:18).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필자의 글을 읽고 반론을 하고자 하거나 혹은 천주교의 교리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제나 천주교 신학자가 있으면 언제라도 좋으니 필자와 공개 토론할 것을 정식으로 제안합니다. 제안이 들어오면 약 300명이 모일 수 있는 장소와 일시를 의논해서 정하겠습니다. 천주교의 교인들과 사제들이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속히 그 굴레에서 나와서 구원의 길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670 no image |제언| 눈물로 씨를 뿌려라_김병진 목사
편집부
2373 2014-07-22
눈물로 씨를 뿌려라 < 김병진 목사, 역곡동교회 > “주일학교가 약하거나 없는 교회들을 위한 교단 차원의 배려 필요해”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돌아왔습니다. 여름은 교회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며 온 교회가 힘을 쓰며 수고하는 계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름 사역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역곡동교회도 벌써 한 달 전부터 중보기도를 시작하면서 여름 사역에 대한 준비 체제로 들어갔습니다. 대표기도를 하는 분들도 반드시 기도의 내용에 여름 사역을 위해 기도하도록 부탁을 해두었고, 모든 성도들의 기도 제목으로도 반드시 기도하도록 준비합니다. 그런데 가슴 아픈 현실은 교회마다 주일학교의 숫자가 줄어들고 심지어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기서노회 안에서도 강습회를 해보면 약 16교회 정도 만 강습회에 참여를 하고 나머지 40-50교회는 참석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주일학교 운영이 여의치 않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가슴 아픈 것은 교회 안에 다음 세대가 줄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도함에 있어 우리는 수평적 선교와 수직적 선교를 병행해야 합니다. 수평적 선교는 지역적으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하는 선교를 말하고, 수직적 선교는 세대 간의 선교로 다음 세대를 향한 선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평적 선교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수직적 선교가 잘 이루어지는 것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가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수직적 선교, 즉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사역입니다. 그런데 지금 70%정도의 교회들이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포기하고 있습니다. 학생이 없다, 일꾼이 없다, 요즘 세대가 그렇다 등등을 구실로 삼기도 합니다. 사실 작은 개척교회에서 주일학교를 운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개교회에서 감당하기는 어려운 일인 것이 분명합니다. 여력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몇몇 주일학교 선교단체들의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부분에 대하여 함께 의견을 나누면서 선교단체들은 대안을 내놓고 준비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의 선교단체도 존속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 노회 또는 교회들과 협력해서 작은 교회 주일학교 살리기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단적으로도 교육부에서는 이런 측면에서 고민하지 않으면 총회교육부의 다음 세대를 향한 사역의 장은 점점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실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것은 은사가 있어야만 할 것 같고, 소모전 인 것 같고, 당장에 열매가 없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큰 교회들은 지금 우리는 문제가 없다고 여겨서 간과하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기 때문에 옆집 아이 홍역 앓는 것을 방치하면 우리 아이도 언젠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분명한 것입니다. 작은 교회의 문제는 곧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실제로 지금 주일학교와 여름 사역들을 준비하지 못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교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할 때입니다. 이런 찬양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 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길 / 그 날에 우리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이처럼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 날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눈물로 씨앗을 심어야 할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힘을 써야 할 때 피곤하다고 쉬거나, 놀고 싶다고 농사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농부일 수가 없는 것처럼 교회가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일이 힘들다고, 사람이 없다고 그 일을 포기한다면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결국 교회의 미래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작은 교회들도 이 일을 포기하고 싶어서 포기하는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목회자들의 마음이 미어지겠습니까? 이번 여름에도 씨를 뿌려야 합니다. 기도의 씨, 복음의 씨, 사역의 씨, 구원의 씨를 열심히 뿌려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교회만 씨를 뿌린다는 마음을 버리고 작은 교회들을 돕고 섬기는 나눔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개교회적으로도 노회지역 안에서든지 아니면 타 지역 작은 교회 여름 사역과 전도사역을 도울 수 있는 일들을 계획하여 서로 돕는 일들이 진행되었으면 합니다. 노회적으로 강습회를 준비할 때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주일학교 교회만을 위한 강습회를 하는데서 머무르지 말고 작은 교회 주일학교 세우기 프로젝트나 학생이 없는 주일학교 전도 프로그램 등을 준비하여 주일학교가 약하거나 없는 교회들을 위한 배려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총회교육부에서도 작은 교회 주일학교 살리기 프로젝트를 구상하여서 내년부터는 인적 재원들을 훈련시켜서 섬길 수 있는 사역들에 초점을 맞추어 시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개교회는 자기 교회만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지 말고 노회 소속 교회들과 기타 작은 교회들의 여름 사역을 위해서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헌신이 있기를 바랍니다. 자립하는 교회에서는 아직 자립하지 못하는 교회 하나 만이도 선택해서 여름 사역을 지원한다면 많은 부분에서 또 많은 지역에서 열매를 맺어 주일학교가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리라고 봅니다. 서로 조금 마음을 넓혀서 조금씩 섬기고 배려하며 우리 교단 교회들의 다음 세대를 함께 세워가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해봅니다.
669 no image |목회수상| 걸레 철학_이재헌 목사
편집부
2370 2014-07-08
걸레 철학 < 이재헌 목사, 새과천교회 > “그리스도가 가신 십자가의 삶은 철저한 ‘걸레 철학’이 담겨있는 길” 입당, 헌당, 임직, 기타 여러 가지 교회 행사 때마다 참여한 분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기억될 만한 선물을 생각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골 메뉴 중 으뜸은 수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가능하면 수건이라는 아이템을 선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 왔다. 그 이유는 너무 평범한 보편성에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수건이 갖는 기구한 미래(?) 때문이다. 보통 가정에서 새 수건을 처음에는 소중하게 사용하다가도 일정 기간이 지나고 수차례의 세탁을 거치면서 색깔과 천의 상태가 조금 낡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신분이 격하되어 걸레의 자리에 가게 된다. 문제는 그것이 수건이었을 때나 걸레로 전락한 뒤에나 여전히 그 표면에는 날짜와 함께 선명하게 인쇄된 행사명, 교회 이름 그리고 그 날의 주인공들의 이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온갖 오물을 다 닦아내야 하는 걸레에 버젓이 남아있는 교회 이름, 어느 직분자의 이름 등등, 이러한 것들을 보는 불편함이 있었기에 애초부터 기념품으로서의 수건을 회피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걸레 철학’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말을 들으면서 구지 기념품 아이템에서 수건을 제외시킬 필요까지는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걸레’라는 단어가 그리 기분 좋은 단어가 아니긴 하지만 거기에 철학이라는 단어를 붙이게 되니 꽤 괜찮은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온갖 오물과 더러움으로 찌든 방바닥 위로 걸레가 지나가면 그 방바닥이 깨끗해진다. 책상 위로 지나가면 때 묻은 책상이 깨끗해지며, 무언가 쏟아져 끈적한 불쾌감을 남겼던 자리로 걸레가 지나가면 그 주위가 깨끗이 닦여지는 것이 걸레의 몫이다. 내가 지나간 자리가 이렇게 변화될 수만 있다면 아마도 난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말에 우리 모두는 쉽게 공감한다. 그런데 그 먼지를 닦아 주는 사람에 대해선 전혀 언급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목회자로서의 시간이 조금씩 더 해질수록 이러한 걸레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목회자의 일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기 것은 조금도 내어 놓지 않고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깨끗하고 고급스럽게 포장하는 현대 사회 속에는 귀티 나는 수건은 보이는데, 누구나 편하게 쓱쓱 닦을 수 있는 걸레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도 ‘걸레 철학’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헌신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구속의 은총을 입은 변화된 성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라’(갈2:20)는 말씀은 ‘참 그리스도인이란 이미 자기를 위한 삶에 대해서는 죽은 자들이며, 이제는 오직 주님을 위해 살고자하는 거룩한 헌신의 길만이 내 앞에 남아있음을 아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가 가신 십자가의 삶은 철저한 ‘걸레 철학’이 담겨있는 길이었다고 보여 진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와 또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구석구석에 닦아내야 할 부분이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치유해야 할 상처가 많이 있다. 그곳에 나의 손길과 발길이 닿고 나의 사랑과 관심과 정성이 닿기만 하면 그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되어 누구나 편안하게 그곳에 누울 수 있도록 청소 걸레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때이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걸레란 모든 일을 마치고 나면 마루 한구석에 내 팽개쳐질 뿐 그 어떤 인정이나 대가를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진다. 이렇게 자신을 감추며 낮추는 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는 너덜너덜하게 추한 모습이지만 이 ‘걸레 철학’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 확신한다.
668 no image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이해_박봉규 목사
편집부
2435 2014-07-08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이해 < 박봉규 목사, 기독교학술원 사무총장 >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구현되고 있어” 필자는 젊어서 부흥회를 참석하면서 성령 충만과 은사(방언, 방언통역, 병고침, 지혜의 말씀 등)를 체험하면서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면서도, 한편 이 세상은 마귀적이어서 다 망해야 되고 없어져야 하며 나는 빨리 죽어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천국(하늘 天, 나라 國)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초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already, 마 12:28; 눅 17:20)에 대해 이해하고 나서부터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목적(롬 8:28)과 인생관 그리고 세계관이 크게 달라졌다. 그 이후로 참새가 내 머리 위에서 짹짹거리며 날아다니면 나를 위해 노래하는 것 같았고, 길가의 코스모스가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나를 위해 춤추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존재 가치와 우주 만물을 보는 눈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관점으로 변하게 되었다. 많은 성도들이 천국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막연하게 동경을 가지면서, 마치 죽어서 가는 곳 또는 그곳은 슬픔과 눈물과 죽음이 없는 낙원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런데 천국은 이러한 미래적인 성격만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라는 명칭은 천국, 에덴동산, 낙원 등과 동의어이다. 마태복음(마 3;2, 4:17)에서는 수신자인 유대인들 의식하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못하기에 ‘하늘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인 천국(天國)으로 표시했다. 반면에 마가복음(막 10:15,24,)과 누가복음(눅 8:10; 9:2)에서는 수신자인 이방인을 의식하고 천국을 ‘하나님 나라’로 기록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와 ‘천국’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창세기에서는 에덴동산(창 2:8-9)이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가지며, 신약에 나오는 낙원(눅 23:43; 고후 12:4; 계 2:7)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의 설교 중심 주제(막 1:15)가 하나님 나라였으며, 제자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사명이었다(행 8:12; 28:23).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의미는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하여 추방된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롬 3:25-26)로 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 안에’(In Christ)라는 의미를 164번이나 사용하면서 오직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과 기독교인의 세상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과 왕권으로 정의되며, 그 시제는 현재성(already)과 미래성(not yet)으로 특징되는데 지금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통해 하나님의 왕권이 구현되고 있다는 현재성과 장차 주님이 재림하실 때 완성될 하나님 나라인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고 묻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among you) 있느니라”고 답변하셨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은 당시 상황적으로 볼 때 바리새인과 제자들 가운데(among you) 서 계신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의 나라’임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과 사역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과 참 교회는 이미 하나님 나라(천국)가 그들에게 임한 것이다(벧전 2:9). 예수님은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귀신을 내쫓으며(마 12:28) 신유와 기적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런 점에서 지금 임한 하나님 나라 안에서 신자들은 중생과 회심과 더불어 구별된 삶과 이로 인하여 고난 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현되는 천국의 모습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여기에서 "의"는 인간이 행하는 도덕적인 것이거나 윤리적인 의로움이 아니라 로마서 3장 19-3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원받게 되는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평강" 역시 단순히 인간 세상에서 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상태가 청산되고 완전히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영적 평화의 상태를 가리킨다(롬 5:1). 또한 "희락" 역시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참된 행복을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시작되어 현재에도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은혜와 권능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죄가 없었던 원래의 에덴동산과 같은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해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 최종점에서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이해하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는 믿음 가운데에서 힘차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667 no image |긴급진단| 자기 살해가 급등하는 현실과 ‘죽음공부’(Thanatology)_가정호 목사
편집부
2372 2014-07-08
자기 살해가 급등하는 현실과 ‘죽음공부’(Thanatology) < 가정호 목사, 세대로교회 >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를 잊으려고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거나 사색의 중심에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은 죽음은 현실이다” 한 때 자살의 명예회복을 꾀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자살을 ‘자유죽음’이라고 칭하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실상 이는 자기 살해를 미화한 것일 뿐이다. 이 땅에서 자살이 모든 세대를 걸쳐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제법 산다는 나라들 중 가히 세계 최고이다. 통계청에 의하면 최근은 하루에 5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50여 명씩 죽는 것을 365일로 곱하게 되면 가히 다양한 사건이나 사고의 죽음 중 최고의 인재에 속한다. 이는 어떤 이유로든 가릴 수 없는 부끄러움이다. 자살로 감행되는 죽음의 방식은 동서양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고, 죽음을 다루는 장례의 방식은 나라마다 조금 또는 심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나라에 자가 살해가 이렇게 급격하게 확산되어가는 데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이렇게 많은 이웃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그늘속의 그림자처럼 숨겨져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모든 영역의 전문가들이 속히 대안을 찾아서 이 불행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자살확산을 수치스럽다고 생각하여 발설하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으로는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뿐 전혀 대안이 될 수 없다. 이 자살행렬을 끊고 삶의 희망을 제시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생각이 짧은 예단이며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께 구하고 모여서 지혜를 찾아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 밖을 돌아보면 최근 10여 년간 죽음을 막아보겠다는 관심이 서서히 일기 시작하여 최근에 이르러서는 조금씩 활발해 지고 있다. 필자가 처음 죽음에 관해 접할 수 있었던 책은 물론 성경이다. 성경에서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그 다음은 고전인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죽음"이었다. 그 다음에 접한 책은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의 "인간의 죽음"이었다. 그것이 거의 볼륨 있는 전문서로는 유일했다. 얼마 후에 알폰스데켄이 죽음에 관한 정보를 나누어 주었다. 그 이후부터는 산발적으로 다양한 정보들을 볼 수 있었다. 목회에서는 임종목회, 또는 장례예배를 통하여 죽음을 접하고 다룬다. 그동안 죽음을 학문으로 다루는 접근은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진행되어 왔었고, 실제로 큰 진전이 없었다. 자료도 거의 없어서 글을 써도 결국 반복되는 이야기를 벗어나기가 어려웠었다. 시중에 나온 죽음학에 관한 책은 거의 거기서 거기이다. 천주교에서 죽음을 다루는 태도가 많이 연구 되어진 것은 사실이다. 알폰스데켄 신부는 동지사대에서 죽음을 가르치는 전문가로 오랫동안 일해 왔다. 그의 책들은 몇 권 나와 있다. 한국에도 몇 번 와서 세미나를 진행했다. 그의 책에는 세계 유수한 나라들이 죽음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죽음학 교육과정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러한 논의는 서울 신문로에 있는 ‘각당 복지재단’에서 주로 진행했다. 각당 복지재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전통이 있고 권위가 있는 ‘죽음학’ 연구기관에 속한다. 연세대에서 공부하였고, 세계감리교 여성회 회장을 지냈던 김옥라 선생이 남편 나익진과 함께 자신들의 재산을 들여서 세운 기관이다. 이후에 김옥라 장로와 뜻을 같이 한 여러 선생들의 특별한 헌신으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귀한 기관이다. 세계 도서전에 등장하는 죽음에 관한 전문서적은 몇 권쯤 될까? 확인한바 아니기에 정확하게 기술은 못하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출판된 죽음에 관한 이론이나 학문 또는 실용서는 모두 합해도 500권을 넘지 않는다. 이는 삶의 이면에 언제나 따라다니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려는 열정이 그만큼 숨겨져 있음을 보여주는 실상이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를 잊으려고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거나 사색의 중심에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은 죽음은 현실이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들 곁에 있다. 시내에 장례식장은 언제나 죽음으로 붐빈다. 화장장을 방문해보면 문을 연 시간부터 문 닫는 시간까지 거의 매순간 주검이 태워진다. 거기엔 눈물이 있고 통곡이 있다. 죽음이 특별하게 다루어지던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거의 무시되어지는 듯하다. 금방 잊혀진다. 비참했던 대구의 지하철 참사도 잊혀졌다. 씨랜드에서 비명횡사한 유치원 어린이들의 죽음도 그렇다. 부산 외국어대의 경주 MT사건도 잊혀지고, 세월호에서 죽은 안산 단원고의 금쪽같은 아이들의 엉터리 죽음도 금방 잊으려든다. 더더군다나 마을 어귀 어느 아파트의 옥상에서 떨어져 죽어간 무명의 소녀에 관한 죽음이야기는 TV에 30초도 등장하지 않는다. 최근에 우리 개신교계에도 죽음을 다루는 열심이 조금씩 구체화 되고 있어서 기쁘다. 기윤실에서 주로 죽음을 실천적으로 또는 봉사학으로 다루려고 애쓴다. 실천신학대학원의 조성돈 교수에 의하여 진행되는 생명보듬기 운동, 자살예방 교육사 훈련이 전국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죽음학회도 조직된다는 소식이다. 각 대학마다 ‘죽음학’ 강의가 신설되고 있어서 이 또한 기쁘다. 필자는 최근 SNS인 페이스 북에 “자살&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을 열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 20-30명의 청소년들이 가입하여 죽음을 이야기 한다. 주로 자살 이야기이다. 어떻게 하면 쉽게 죽는지 고민한다. 어떤 이는 같이 죽자고 덤빈다. 몇 달 만에 800여 명을 넘어섰다. 감사한 일은 서로가 돕는다. 죽음을 논한다. 실상은 죽음학이 가장 현실적으로 격렬하게 다루어지는 곳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죽음을 시도했던 사람들 중에 죽지 못하고 살아난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분들 중에 뭔가 죽음에 대한 사색을 많이 하신 분들이 더 열심히 이웃을 돕는다는 사실이다. 역지사지를 알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 고통을 이미 맛보았기에 더 몸부림 칠 것이다. 그래서인지 “죽지마라!”는 이 한마디에 무게가 다르게 다가온다. 치유 받은 상처를 가진 분들이 이웃을 위해 더 울듯이 그런 현상이 여기에서도 동일하다.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666 no image |목회수상| 내 뜻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_정요석 목사
편집부
2311 2014-06-24
내 뜻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남서울노회장 >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이란 단어로 검색을 하면 거의 대부분 도덕법에 관한 내용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와 같은 경우이다. 성경은 우리가 미래에 발생할 일에 관하여 신비적으로 아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개인의 특정한 사안에 대하여 “열린 문, 닫힌 문”, “양털뭉치” 방법 등으로 마치 점괘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법을 알수록 진로, 결혼, 취직 등과 같은 개인의 특정한 사안을 잘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숙한 신자들일수록 하나님의 도덕법을 잘 지키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한다. 자칫 욕심이 있고, 불안할수록 개인의 특정 사안에 대하여 더욱 기도하고 금식하는데 이것은 오히려 신앙이 없거나 약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개인의 특정 사안을 성취하여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이 강한 동기가 되는 기도와 금식은 외형적으로는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신앙과 다름이 아니다. 한국 교회에 그렇게 많은 새벽기도와 금요기도와 산기도가 있지만 기도를 통하여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하지, 이미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새기고 실천하려는 자세는 오히려 빈약한 것 같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이처럼 기도는 이미 명백한 하나님의 뜻을 민감히 분별하고 실천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지, 자신의 뜻을 이루게 해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달라고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가 너무 많은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고, 지혜롭고, 권능 있게 모든 피조물과 그 행동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신다. 그런 점에서 발생한 일에 담긴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우리의 특정 시점에서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특정의 사건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너무나 다르게 그 일이 차후에 진행되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자주 경험하는지 모른다. 지난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면에서는 하나님의 뜻이겠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이라는 면에서는 관련자들의 옳고 그름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에서 가해자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뜻과 은혜라는 표현으로 무마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가해자는 하나님의 도덕법에 미치지 못한 자신의 행위를 회개할 일이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라는 차원으로 이런 일들을 해석할 일이 아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판 행위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면에서 그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번성케 했지만, 하나님의 도덕적인 면에서는 형들이 크게 반성해야 할 일이다. 이 점에서 요셉은 자기를 판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형들을 용서할 수 있지만, 형들이 요셉에게 하나님의 뜻이라며 쩨쩨하게 용서하지 못 하느냐고 질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감추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개인의 특정 사항에 대한 하나님의 뜻보다는 명백하게 성경에 알려진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법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를 한탄해야지, 우리의 일상 속에서나 혹은 역사의 흐름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한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은 명확하다. 그리스도를 통해 누구든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믿고 고백하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그리고 이처럼 구원받은 신자들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이 땅에서 늘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뜻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내가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고 능력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적인 행위이다.
665 no image |목회수상| 동성애는 결코 성적취향이 아니다_노승수 목사
편집부
2497 2014-06-10
동성애는 결코 성적취향이 아니다 < 노승수 목사, 인천노회 > “인권을 빌미로 자신의 성적취향 무차별 살포할 수는 없어” 지난 주말인 6월 7일에 서울 신촌 한 복판에서 동성애자들의 축제인 ‘퀴어축제’가 열렸다. 새삼 실감하는 것이지만 이제 한국도 동성애 문제에서 서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축제는 서대문구청으로부터 합법적으로 집회 허가를 받은 집회였다. 그런데 퀴어축제의 개최측이 자신들이 허가받은 집회 장소를 벗어나 밀려들었고 카퍼레이드까지 강행했다. 퀴어축제 주최 측과 이를 반대하는 보수층과 정면 충돌 양상이 빚어진 것이다.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일부 개신교와 가톨릭 지도자들이 동성애자들을 축복하는 행사도 더불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행사를 기점으로 SNS와 여러 언론에 기고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구설들이 떠돌고 있다. 성경은 분명하게 동성애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죄라고 지적한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위기 18:22).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6-27).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1). 이처럼 성경은 명백하게 동성애가 죄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통상적이고 자연 상의 원리에도 부합하지 않음으로 교회에서 동성애가 용인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소수자인 동성애자의 인권 문제를 들어서 이런 식의 축제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분명히 말할 것은 우리는 한 번도 이들의 인권이 무시되어도 좋다고 말한 적이 없다. 성이란 원래 은밀하고 사적인 것이다. 누가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성적 취향을 드러내면 우리는 그것을 풍기문란이라고 하고 사법적 처벌도 한다. 뿐만 아니라, TV에서도 일정 수위를 넘는 성적 묘사는 19금으로 제약하거나 방송 불가 판정을 한다. 그런데 이 성소수자들인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버젓이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자신들의 성적 취향을 드러내고 있다. 어떻게 이것이 용인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권리는 권리이고 이런 공공 행위를 반대하는 교회와 신자의 권리는 권리가 아닌가? 그러나 동성애는 기본적으로 혐오의 대상이다. 예들 들어, 연쇄 살인범을 보고 죄는 밉지만 사람은 긍휼히 여겨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런 논리가 동성애에 들어오는 이유는 이것이 그저 개인적 취향에 불과하다는 전제, 그것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지하철 성추행 범죄를 범죄자가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발각되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과 수치심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취향으로만 취급하면 결코 이것은 근절되지 않는다. 물론, 자기들끼리 사적으로 사적인 자리에서 그러는 거 뭐라고 할 수 없다. 그게 개인의 취향이니 성경과 사회적 통상 도덕을 들어서 그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적 영역으로 이 주제를 들고 나오는 것, 또 그것을 교회로 들고 들어오는 것은 고상하게 말해서 될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혐오 반응을 보여야 한다. 흡연자의 권리가 소중하지만 흡연하고 싶지 않는 비흡연자의 권리가 더 공공적인 권리이듯이, 공공장소에서 또 교회에서 동성애자들이 자기 표현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마치 비흡연자들에게 간접흡연을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 사회에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인 성적 취향을 공공장소에 들고 나오는 경우는 없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풍기문란으로 단속의 대상이 된다. 하물며 성소수자들의 이 역겨운 행위가 어떻게 공공장소에서 정당화 되는가? 우리는 그들이 성소수자라 해서 그들의 인권을 탄압한 적이 없다. 그들이 그들 나름의 삶을 살아간다는 데 할 말도 없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동성애를 선전하고 인권을 빌미로 자신의 성적 취향을 이 사회와 학생과 어린이들이 보는 데서 무차별하게 선전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우리는 보고 싶지 않고 보지 않을 권리가 있다. 우리 자녀들을 이런 역겨운 행위로부터 보호할 권리도 있다.
664 no image |신앙수상| 창조의 비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_박철호 청년
편집부
2383 2014-05-27
창조의 비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 박철호, 화평교회 청년부, 탤런트 > “우리 시대에 잃어버린 것은 봉사와 선교 아닌 참된 복음의 깨달음” 성경이 말하는 풍요로운 삶은 창조의 비밀과 관련이 있다. 곧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 전에 그들의 영육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완전한 상태였다. 죄가 아직 있기 전인 그 완전한 상태가 풍요로운 상태였다. 하지만 죄를 범하게 되고 인류는 영과 육이 완전하게 타락해 버리고 말았다. 때문에 선악과의 과실을 범한 죄는 그저 하나의 행위로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성을 인간 스스로가 버린 끔찍한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죄이다. 하나님과의 끊어짐, 곧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 하고, 찾지 못하고, 찾지도 않는 것이 죄의 근본인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것으로 율법의 완성을 이루라고 하시지만 실상 우리는 참 하나님을 완전하게 사랑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가능케 하신다. 그 첫 단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역사를 통해서 율법과 언약을 주신 것이다. 그 단절된 관계를 '죄 없이 여겨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에 따라 제사법을 친히 주셨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열심과 노력과 풍성한 제물이 조건이 아닌 이미 은혜로 주신 방편이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은 이 은혜로운 제사 제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때때로 비록 육적인 복만을 원하고 언약을 오해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주께서는 친히 남은 그루터기와 같은 자들을 통해서 그 언약을 스스로 지켜내셨다. 가나안 정복 초기에 그들은 가나안을 차지하였지만 곧이어 등장하는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는 벌써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미간에 붙이고 손목에 매어 기억하라고 했지만 그들의 풍요로움은 그들의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했던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정복케 하실 하나님이었지 영적 가나안을 회복케 하실, 즉 완전한 영의 회복을 주실 하나님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가진 지식의 부족함 때문이라거나 혹은 지식은 있지만 열정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철저한 그들의 부패성에 그 원인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친히 구원해주시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셔서 이제는 이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이다. 곧 단절되어 영원히 끊어진 우리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신 참 복이다. 이처럼 우리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행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깨닫는 것이 복이라 할 것이다. 계명을 지키면 네게 복이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 복 안에는 육적인 의미도 있지만 보다 명확하게는 참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고 깨닫게 하시는 은혜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복이다. 주께서는 일반섭리 가운데서 착하고 성실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신다. 이것은 지당하다. 또한 주께서도 육을 위해 구하라 하셨고 또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친히 아시므로 이것을 보장하신다. 하지만 이것을 완전한 공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창조주와 타락한 인간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는 것과 같다. 주의 은혜를 깨닫는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원래 참 인간이었던 첫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깨어지고, 그것을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회복시키셨는가를 성경을 통해 깨달아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친히 우리를 인도하심을 깨닫게 하시고 보호하시며 은혜를 주신다. 이러한 은혜는 지식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지식은 성령께서 주신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은혜주신 그 사람에게서는 반드시 열매가 맺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를 주장하여 은혜를 깨달으려 노력하기보다는 말씀을 통하여 주의 은혜를 바로 깨달아가는 의지적 노력을 가지는 가운데 이 모든 것이 삼위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닫고 날마다 찬양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잃어버린 것은 봉사와 선교의 활동이 아닌 참된 복음의 깨달음이다. 같은 행위로 보이는 착한 행동도 그 시작은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한없이 작아진다. 따라서 마땅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는 깊은 회개와 반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선한 일 행하기에 힘써야 한다. 하지만 그 선한 일 자체가 복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워지기 위해 혹은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 거룩도, 영광도 모두 주님께 속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 교회 자체가 거룩이요 영광이다. 그리고 참되게 깨달아서 ‘우리가 드리는 모든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요 거져 받은 바 합당한 일을 한 것뿐이다’라고 고백하는 바울 사도의 뒤를 따르는 것이 적합하다 하겠다. 이것이 우리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은 결코 없다. 성령께서 주의 은혜를 바로 깨달아 알게 하는 자에게서는 그 마음을 친히 감동케 하고 소원하게 하고 그 나라를 꿈꾸게 하시기 때문이다. 복음 자체의 문제나 지식에 무엇을 더하는 것의 문제가 아닌, 겸손히 말씀 앞에 무릎 꿇고 은혜를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원한다.
663 no image |목회수상| 성경적 설교와 교회의 부흥에 대한 확신_도지원 목사
편집부
2422 2014-05-13
성경적 설교와 교회의 부흥에 대한 확신 < 도지원 목사 · 예수비전교회 · 서서울노회장 > “설교자는 하나님의 도구로써 설교의 능력에 대한 믿음 가져야”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여기에는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고 하는 목회자의 자기 관리와 성경적 설교에 대한 명령이 있다. 이때 “가르침”은 성경에 기초한 가르침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 4:13)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명령에 따르는 약속이 있다.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이것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써 설교의 능력에 대한 약속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피라”고 했고,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말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써 설교의 능력은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해당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자신과 청중에 대해 이 약속을 의지해야 한다. 이 점에서 오늘날 빈번하게 일어나는 설교자의 스캔들은 현대 설교의 위기를 반영한다. 동시에 설교자에게는 성경적 설교와 교회의 부흥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런 확신을 가진 설교자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러 오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주장에 대한 저의 답변은 참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온다는 것, 그것도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언제나 그랬다는 것을 저는 역사적 증거를 통해 이미 입증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이 여전히 동일하시며 사람 또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참된 설교를 하면 반드시 사람들이 온다’라고 믿지 못하는 것은 결국 성령과 그분의 역사를 거의 배제한 채 이 문제 전체를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으며, 실제로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교는 장기적인 정책입니다. 그럼에도 설교는 하나님이 친히 주신 방법이기에 효과가 있으며 열매가 있고 영광이 있다는 것, 반드시 그렇다는 것이 저의 전체적인 논지입니다. 우리를 설교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설교를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그가 친히 그것을 높이실 것입니다. 존 맥아더 역시 동일한 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목회 초기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처음 그레이스 교회에 왔을 때 나는 별로 많이 알지 못했습니다. 매주 나는 공부하여 설교를 준비하였고, 일요일마다 회중들은 나와 함께 배우곤 하였습니다. 나는 성경 말씀을 그들과 함께 나누었고, 회중들은 ‘와! 저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구나!’ 하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영적 성장과 이해의 큰 발자국을 내딛고 있었으며, 주님은 교회에 많은 사람들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맥아더는 성경을 설교함으로써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부임한 첫 해 무렵, 저는 이런 표어를 사용했습니다. ‘내가 사역의 깊이에 집중하면 사역의 넓이는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조그마한 그 교회에서, 첫 해 이후 저의 사역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제게 사역은 전적으로 성경을 깊게 파고, 주님과 더 깊이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넓이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상황과 비교하며 좌절합니다. 그는 성경적 설교에 집중하면서 그 결과에 대해 하나님을 의지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설교자에게는 성경적 설교와 교회의 부흥에 대한 확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때 설교자는 성경적 설교에서 이탈하여 자아중심적이고 치료중심적이며, 경험과 실용성에 초점을 맞추며, 축복과 오락을 위주로 하는 설교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삶에 피상적인 영향밖에 줄 수 없을 것이다. 설교자는 피상적 영향을 끼치기 위해 세워지지 않았다. 때문에 설교자는 오로지 성경만을 선포하며 그것만이 유일한 교회의 부흥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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