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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30 (15:50:32)

 

다시 돌아보는 산상수훈

 

< 유선임 청년, 화평교회 >

 

죄로 인해 비참한 인생이 예수 안에서 참된 소망과 사랑 알게 돼

 

예수님의 산상수훈(5-7)을 읽으면서 느낀 점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막연한 개념들이 더욱 선명해지고, 이 땅 가운데서 신자로 부름받은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 산상수훈과 하나님 나라

 

산상수훈의 첫 번째 주된 관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실체란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절대적인 선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불순하고 부정함, 결핍으로 인한 상한 심령과 애통함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공의가 이 땅에서 먼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후로 이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때에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민중들에게 빵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가 마땅히 지향하고 나아가야 할 역사적인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를 이루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는 거기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2. 산상수훈과 인생의 본분

 

산상수훈을 접하면서 새로웠던 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가 더 이상 개인의 구원 문제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와 함께 어떻게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나갈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온유한 자란 막연히 성품의 측면을 넘어서 비록 눈앞의 현실이 녹록하지 않고, 비웃음과 조롱뿐일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의지하므로 믿음의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절대자 앞에서 묵묵하게 자신이 가야 할 길, 곧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점에 깊은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노아에게서 보듯이 세상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에도 방주를 지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땅으로 가서 그 곳에 하나님 나라와 그 문화를 정착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그들의 십자가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누구나 질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에서 건짐 받은 우리가 더 이상 무엇으로 우리 자신의 만족을 이룰 수 있을까요? 새 생명을 주시고 그의 백성으로 보호를 받으며 신자된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성도로 부름받아 존재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3. 산상수훈과 교회의 삶

 

성도는 이 땅에서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하늘의 것을 사모하고, 매일의 삶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간절함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가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내기 위해 아낌없이 자기 자신을 불태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나간다는 것은 온전한 교회를 이루어 가므로 하나님께 참된 예배와 그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그 근본적인 본질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올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온전하게 성례가 시행되고, 정당하게 권징이 집행될 때 거기에서 참다운 교회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만이 이 땅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며 확장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친히 누리게 되는 유일한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위로이며 평안의 약속입니다.

 

마치는 말

 

산상수훈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는 말씀에서 그 절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는 말씀으로 확인될 것입니다.

 

죄로 인해 비참한 인생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소망을 두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드리며,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나아감이 신자의 참된 기쁨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으옵소서.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662 no image |목회수상| 배를 버린 선장, 십자가를 버린 신앙생활_조봉희 목사
편집부
2896 2014-04-29
배를 버린 선장, 십자가를 버린 신앙생활 < 조봉희 목사, 지구촌교회 > “세월호 승객중에도 길이 기억해야 할 훌륭한 영웅들 있어” 우리는 지난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로 민족적 아픔과 국민적 상처 속에 살고 있다. 무엇보다도 ‘배를 버린 선장’에게 큰 허탈감과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런 상념에 젖어봤다. “희생을 버린 목사, 헌신을 버린 직분자, 책임을 버린 관료, 양심을 버린 사람, 사랑을 버린 부부, 리더십을 버린 지도자들. 그리고 십자가를 버린 교회!!!” 결국 배를 버린 선장이 나의 모습일 수 있다. 그리고 십자가를 버린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다. 이 선장은 배를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므로 리더의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버렸다. 그런데 102년 전 초대형 여객선 타이타닉호의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침몰사고가 발생했을 때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출하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다가 자기 목숨마저 장렬하게 바친 숭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당시 구조된 자 중에서 그 선장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생존자에 따르면, 스미스 선장은 한 손으로 아이를 감싸 안은 채 얼음물에서 사투를 벌였다고 한다. 스미스 선장은 아이를 구조 보트에 태운 후에도 다른 승객을 구하러 떠났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건이 수습된 후 타이타닉의 이등항해사 찰스 라이톨러는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이런 감동적인 증언을 했다. “우리는 선장의 지시에 따라 여성과 어린이들만 구명보트에 태웠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바다의 법칙이냐”는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이등항해사는 “그것은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고 또 한 번 감동적인 답변을 했다. 얼마나 훌륭하고 숭고한 태도인가? 타이타닉호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장 에드워드 존 스미스는 여객선의 선교가 물에 잠겨 유리창이 수압(水壓)으로 깨질 때도 조타키를 붙잡고 그대로 서 있었다고 한다. “스미스 선장의 허리까지 물이 차오른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스미스 선장의 고향인 영국 리치필드에는 기념동상이 서 있는데, 그 동판에는 그가 위기 상황에서 선원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써있다고 한다. ‘Be British!’(영국인답게 행동해).’ 우리는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Be Believer’(신앙인답게 행동해). 지난 2009년 미국 항공사(US Airway) 1549편이 미국 뉴욕 허드슨 강에 불시착한 사고를 기억할 것이다. 그 여객기는 이륙 후 4분 만에 두 날개의 엔진에 새떼가 들어와 치명적인 고장이 나는 위기 상황에 처했다. 그때 승객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기장 체슬리 설렌버거는 혹한으로 얼음이 언 허드슨 강 위로 비상 착륙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승객 155명 모두를 구조하기까지 혼신을 다해 리더십을 발휘하여 ‘허드슨 강의 기적’을 일으켰다. 이처럼 리더 한 사람의 판단이 승객 모두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번 ‘세월호’ 승객들 중에도 타이타닉호의 스미스 선장과 같은 훌륭한 영웅들이 있다. 박지영이라는 여자 승무원이다. 그는 배가 침몰하는 위기상황에 처한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해 구명조끼를 입혀주었다. 학생들이 “언니는 구명조끼를 입지 않느냐?”는 질문에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라고 말하며 4층까지 올라가 구명조끼를 구해 3층 학생들에게 건네며 마지막까지 승객을 구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원은 맨 마지막이야!!!” 고등학교 2학년 정차웅 군은 검도 3단 유단자답게 친구에게 자기 구명조끼를 건네주며 “내 구명조끼 네가 입어!”라고 한 후 물살에 떠밀려 살아오지 못했다. 단원고등학교 남윤철 교사는 자기 제자들을 최대한 빠져나가도록 돕다가 본인은 끝내 나오지 못했다. 올해 첫 교편을 잡은 새내기 선생인 최혜정 교사는 “나는 걱정하지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이 나갈게”라고 말하면서 ‘세월호’ 침몰 당시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10여 명의 학생을 구출해주고, 자기 목숨은 잃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숭고한 정신이 아닐까? ‘세월호’의 사무장 양대홍 씨는 인명구조에 얼마나 혼신을 다 바친 영웅인지 머리가 숙여진다. 그가 자기 부인과 나눈 마지막 통화 내용이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있다. “여보,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해. 수협 통장에 돈 있으니까 아이 등록금으로 써. 여보,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해. 길게 통화를 할 수 없어. 사랑해.” 이것이 그가 부인과 나눈 마지막 통화였다. 그런데 선장은 자기 조카들 같은 학생들을 버리고 도망쳐 나왔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십자가 신앙을 요구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눅 9:23). 오늘 나도 ‘세월호’의 선장처럼 십자가를 버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을 긴장해본다. 나이 어린 학생들이나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살신성인의 사랑으로 제자들을 구출해준 교사들처럼 십자가를 지는 숭고한 삶을 살고자 다짐해본다. 예수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해 생명을 취할(use) 것인가,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해 생명을 버릴(lose) 것인가를 물으신다. 인생은 어차피 버리느냐 아니면 취하느냐(lose, or use)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이런 질문으로 살아야 한다. 십자가를 피할 것인가, 질 것인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지난 2007년 7월 아프가니스탄 납치범들에 의해 선교 현장에서 순교했던 배형규 목사의 십자가 신앙을 마음에 새겨본다. 그가 22명의 청년 사역자들과 피랍되었을 때 그는 한두 사람의 죽음을 예견하고 인솔자로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우리 중 한 두 사람을 죽일지 모릅니다. 아마도 선전 효과를 위해 비디오를 찍으며 총살을 할 것입니다. 그때는 제가 먼저 앞장을 서겠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말하겠습니다.” 그의 예견대로 그가 첫 번째 희생자로 선택되었을 때 그는 의연하게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믿음으로 승리하세요!” 이처럼 십자가를 결코 피하지 않는 신앙, 오히려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는 신앙이 얼마나 숭고한가? 이것이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를 이루어놓은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를 비롯한 위대한 영적 영웅들의 십자가 신앙이다. 오늘 우리는 숭고한 인생을 살기 위해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짐하는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배를 버린 선장처럼 희생을 버린 목사, 헌신을 버린 직분자, 책임을 버린 관료, 양심을 버린 인생, 사랑을 버린 부부, 리더십을 버린 지도자, 그리고 십자가를 버린 신자가 되지 않도록 순수한 각오가 필요하다. 십자가를 피할 것인가, 질 것인가? 지면을 통해서라도 함께 찬양하고 싶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661 no image 하나님 전지전능의 하나님이시여_오동춘 장로
편집부
2340 2014-04-29
660 no image |제언| 소요리문답을 넘어 대요리문답으로_황희상 형제
편집부
4278 2014-04-15
소요리문답을 넘어 대요리문답으로 < 황희상 형제, 안산푸른교회 > “삶의 실천적 원리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어” 한국 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너무 단순한 것만 찾고 짧은 것만 좋아하는 풍조를 버려야 합니다. 갑자기 이런 부정적 멘트로 글을 시작한 것은 얼마 전에 있었던 어느 세미나에 참석한 어떤 분과의 대화 때문입니다. 이 분은 3주 후에 목사 안수를 받는데, 저녁 때 세미나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대소요리문답을 단 한 번도 배워본 적도,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헌법에 신조가 나오지 않나요? 목사 안수 받을 때 시험도 본다고 아는데요?” 그런데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이 분이 말하는 것이 어떤 상황인지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12신조 때문입니다. 많은 신학생들이 신조라고 하면 의례히 ‘12신조’를 떠올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오늘날 장로교회의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짧은 고백만으로 만족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관심은 두지 않도록 만드는 이러한 풍조는 우리나라 선교의 초기 때부터 이미 싹튼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곧 감리교와 연합했던 초기 선교 역사에서, 인도의 교회들에서 받아들였던 ‘12신조’를 가져다 쓰기로 한 그 결정이, 오늘의 결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의 교회에서 소요리문답을 가르치는 경우는 있어도 ‘대요리문답’을 교육 과정으로 선택하는 교회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해 오늘 날 전 세계 어디에서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유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요리문답은 이제라도 성인을 대상으로 충분히 가르칠만한 문답서라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주일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요리문답만을 배워야 하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교회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성경적 진리가 순수하게 보존되기를 원한다면, 대요리문답을 적절히 가르칠 수 있는 적당한 교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비록 우리네 교회가 연약함으로 인해 아직까지 시도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노력해서 새롭게 만들어 써야 하는 것이 진리의 기둥으로서 말씀을 보존하고 전파해야 할 교회의 사명일 것입니다. 물론 ‘소요리문답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은 단순하게 '분량'과 '난이도'의 차이가 아니라, 그 목적부터 달랐던 문서입니다. 물어보는 질문 자체가 ‘그 질문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고, 또 그 답변 역시 ‘그 질문에 그렇게 답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요리문답은 어른 성도 및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그 인생의 다양한 적용점을 두고 실천적 명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여러 의문점이나 논쟁거리를 가지고 성경에서 이끌어낸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실천 원리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소요리문답과 완전히 다른 문서입니다. 그래서 대요리문답 교육의 회복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교회와 신학교의 교육 과정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들어 총신, 고신, 백석을 비롯한 몇몇 신학교들에서 소요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 관련 과목이 '선택과목'으로 추가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면서도 한편 아쉬움이 남습니다. 너무 늦은 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차제에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관련 과목들을 선택과목이 아닌 필수과목으로 편성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개인적으로 청년들과 함께 대요리문답을 2년간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 유익이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서든 자랑하고 싶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때 함께 공부했던 청년들은 그런 교육이 또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을 위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어떻게든 무엇이든 헌신하고 싶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지금 그들은 이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한국 교회가, 특히 장로교회라면 소요리문답을 넘어 대요리문답 교육으로 그 지평을 넓히길 소망합니다. 특별히 한국 장로교회의 기둥과 같은 우리 교단이라면 의당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659 no image |신앙강좌| 장로의 직분에 대한 이해_조병수 목사
편집부
3308 2014-03-25
장로의 직분에 대한 이해 < 조병수 목사, 합신총장 > <이 원고는 2014년 3월 15일 수원노회장로회연합회 주관으로 실시된 장로연합회 수련회의 강의안으로 장로의 직분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전문을 게재한다. - 편집자 주> 1. 교회 1) 교회의 기원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기원한다. 하나님은 교회의 유일한 아버지이시다(보살핌).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통치/지도, 연합). 성령은 교회의 영이시다(능력제공).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으로 백성을 삼으셨기 때문에 교회는 은혜의 기관이다. 2) 교회의 현상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에는 통일성과 다양성이 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며, 교회는 몸이고, 신자들은 지체이다. 교회는 몸이기 때문에 통일성(신학적)을 가지며, 교회는 지체로 구성되기 때문에 다양성(사역적)을 가진다. 교회에는 두 가지 교제가 있다. 첫째로 신적/수직적/신앙적 교제이다. 말씀과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리킨다. 둘째는 인간적/수평적/사회적 교제이다. 이것은 다시 교회 내적 교제와 교회 외적 교제로 나뉜다. 교회 내적 교제는 성도의 교제이다. 교회 외적 교제는 대사회 봉사로 나타난다. 교회에는 표지가 있는데 말씀의 참된 전파, 성례의 정당한 집행, 권징의 신실한 시행으로 나타난다. 교회의 사명은 대내적인 것과 대외적인 것이 있다. 교회가 직면하는 대내적 문제는 자유주의와 이단이다. 교회는 진리를 수호하고 전파해야 한다. 이런 사명을 감당하려면 각 지역교회가 교리적으로 강하고 인원적으로 부해야 하며, 지역교회들이 같은 목적으로 연합해야 한다. 교회가 직면하는 대외적 문제는 안티기독교의 공격과 타종교의 공격이다. 교회는 대외적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도덕성을 유지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인력과 물질과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모든 제직이 각성해야 한다. 2. 직분 제직은 당회원과 (안수)집사를 합한 것이다. 그러나 “당회는 각각 그 형편에 의하여 제직회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교역자와 권사 및 서리집사에게 제직회원권을 줄 수 있다”(헌법, 교회정치, 21장 1조). 결국 제직은 당회장인 목사, 당회원인 장로, (안수)집사, 교역자, 권사, 서리집사를 포괄하는 총칭이다. 1) 직분의 유래(마 22:1-14) 하나님이 직분을 세우신다(고전 12:28). 하나님은 사람을 세워 일하기를 좋아하신다. 그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위대한 분임을 나타낸다. (2) 일꾼의 능력을 인정하신다. (3) 사람을 영광스럽게 세우신다. 2) 직분의 자격 예루살렘 교회의 일꾼을 세우는 일에서 직분자의 조건이 잘 나타난다(행 6:1-7). 직분자는 칭찬받는 사람이며 충만한 사람(성령으로, 믿음으로, 지혜로)이다. 직분자는 신앙과 경건이 있어야 한다(기도생활, 교회생활). 직분자는 성경과 신학과 교회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직분자는 순결해야 한다(딤후 2:21).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교회 일꾼은 거룩함을 잃으면 부분이 아니라 전부를 잃은 것이다. 직분자는 사회성이 있어야 한다(딤전 3:1-13). 가정과 사회에서 인정받는 자들이다. 3) 직분의 역할 직분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하나님의 일꾼이며(살전 3:2), 하나님의 대행자이며(고후 5:20),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 또한 직분자는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골 1:25). 그는 대신의 직분, 화목의 직분, 은혜의 직분을 받은 자이다. 3. 장로의 역할 1) 장로의 직분 장로란 무엇인가? “장로는 신자들의 대표자”(헌법, 교회정치, 9장 3조 1항)이다. 이것은 장로의 높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귀함을 말하는 것이다. 장로의 직분은 높은 직분이 아니라 귀한 직분이다. 장로의 직분은 목사와 관계에서 설명된다. 장로에게는 목사와 다른 부분과 같은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부분: “설교와 교훈은 장로의 전무 책임이 아니지만”(헌법, 교회정치, 9장 1조 상단) 목사에게는 설교와 교훈이 전적 책임이다. 그러나 장로에게는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목사와 장로의 관계는 대소관계이다. 목사의 역할은 크고, 장로의 역할은 작다. 같은 부분: “각 치리회에서 목사와 동등한 회원권으로 각 항 사무를 처리한다”(헌법, 교회정치, 9장 1조 하단) 장로는 당회, 노회, 총회에서 목사와 동등한 회원이다. 그만큼 귀하다. 목사와 장로는 치리회에서 동등한 회원이기 때문에 항상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치리회가 목사 없이 장로만으로는 성립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장로는 목사에게 의존적이다. 목사에 대한 장로의 관계는 상하관계는 아니지만 의존관계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목사에게 동행해야 한다. 2) 장로의 직무 장로의 직무는 뛰어난 직무가 아니라 무거운(중한) 직무이다. 헌법의 교회정치는 장로의 직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의 영적 상황을 목사와 함께 성경적으로 돌본다(행 20:28-30)”(헌법, 교회정치, 9장 3조 1항). 여기에서 장로의 직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첫째로 장로는 “교회의 영적 상황을” 돌본다. “교회의” 장로는 교회를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다. 장로의 사역대상은 교회이다(장로의 사역대상은 목사가 아니다. 장로는 목사를 견제하는 것이 아니다). 장로는 교회를 봉사하는 것이다. 교회를 섬기지 않는 장로는 의미가 없다. “영적 상황을”. 교회의 영적 상황이란 매우 포괄적인 것으로서 교리(이단), 도덕(부패), 신체(건강), 물질(사업)와 관련된다. 둘째로 장로는 “목사와 함께” 돌본다. 목사 없이 장로 없다. 장로는 “목사와 협동하여 일할 수 있으나 목사와 협동하지 않고 자의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자”(헌법, 교회정치, 9장 3조 1항)이다. 장로는 모든 치리회에서 목사와 동등한 회원권을 갖지만 목사 없이 장로만으로는 어떤 치리회도 성립이 안 된다. 따라서 장로는 항상 목사와 협동해야 한다. 장로는 독립적이 아니다. 항상 목사를 주시해야 한다. 목사의 조력자로서 목사의 목회방향에 동행한다. 목사 비판자나 견제자가 아니다. 장로는 교회의 영적 상황을 목사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만의 정보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목사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래서 장로는 피부와 같다. 추위와 더위 같은 상황을 알리는 역할이다. 셋째로 장로는 “성경적으로” 돌본다. 따라서 장로는 성경에 밝아야 하며 교리에 능통해야 한다. 넷째로 장로의 사명은 목사를 돕는 목회이다. 장로의 마음이 신자들과 함께 신자들을 위하여 있어야 한다. (교리) 신자들이 설교와 교훈을 잘 이해하는지 확인하고 이해하도록 돕는 일. (도덕) 모범을 보여 신자들이 사회생활에서 건전한 삶을 살도록 지도하는 일. (건강) 병자와 상가 그리고 환난 당한 자들을 위로하는 일. (사업) 신자들이 사회적으로 유익한 일을 하도록 권면하는 일. 4. 당회의 역할 당회는 지교회의 목사와 장로로 성립되기 때문에(헌법, 교회정치, 15장 1조와 2조) 장로는 당회가 성수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당회는 예배모범에 의지하여 예식을 봉사하고, 모든 회집의 시간과 장소를 작정하며, 교회의 토지와 가옥을 관리하며(헌법, 교회정치, 15장 5조), 다음과 직무를 한다(헌법, 교회정치, 15장 4조). 1) 영적 사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교인들의 신앙과 행위를 사랑으로 보살핀다. 2) 입교 부모에게 어린 자녀의 유아세례를 권유하며, 교인을 관리한다. 3) 예배와 성례를 거행한다. 4) 장로와 집사를 임직한다. 5) 권징하는 일에 봉사한다. 6) 기관감독, 교인심방, 성경교육, 부흥장려한다. 7) 노회에 총대를 파송한다.
658 no image |목회수상| “행복, 행복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랑게요”_가정호 목사
편집부
2301 2014-03-25
“행복, 행복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랑게요” < 가정호 목사, 세대로교회 > “자살이라는 극단적 생각 속에서 행복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돼”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이 놀라운 결과가 주님을 섬겨온 열매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실상 어린 시절부터 간절히 기다려 왔던 일이었다. 행복이야말로 인생의 목적이 아닌가? 수십 년을 몸부림쳐 온 결과 그렇게 원하던 행복을 이제야 느끼게 된 것이다. 계절이 조용히, 그러나 불현 듯 바뀌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해 하고 있는 자신과 가족들을 보게 된 것이다.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자신을 본다는 것은 그에게는 큰 희열이었다. 온 식구가 함께 가난을 이겨왔기에 이제는 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고 그 결과, 거의 날마다 현관에 초인종이 울리고 택배 박스가 도착하게 되었다. 자신과 가족들이 그렇게 갖고 싶은 것과 만져보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을 보면서 흠칫 놀라기도 하지만 어느 사이, 연결되지 않는 가스펠 송이나 세상에서 얻어들은 가요를 흥얼거리는 자신의 모습 또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가끔 그는 이런 말도 심중에 중얼거린다. ‘내가 이제 하고 싶은 것은 다 해 봤으니 어쩌면 이대로 죽어도 원이나 한이 없다!’ 가끔 아주 가끔 믿지 않는 친구들과 술 한 잔을 할 때면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 모두가 너무 행복하여 자신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아쉬울 것이 없다며 간증이라는 것을 하곤 하였다. 그리고 빼놓지 않고는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이 반복되고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것도 지루해지고 재미가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문제가 시작 되었다. 어느 때부터 그 무엇도 갖고 싶거나 만지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동시에 분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우울함이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다일까? 이게 삶의 전부일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어느 시점부터 무기력증과 무력감에 시달리게 되면서 과거에 조금씩 먹으며 지냈던 사케를 한잔씩 찾기 시작한다. 집에서는 믿음 생활하는 자식들의 눈치를 보면서 반주나 한잔씩 하던 그가 사케를 먹기 위해 왜식집을 드나들고 고급 부위의 마구로(참치) 회와 독한 술을 빈번하게 마시면서 심중에 혼자 중얼거린다. 이 정도는 다 이해해 줄 거야.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데... 주님도 목사님도 다 이해 하실꺼야...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나 자신에게 보상을 좀 해 주어야 하는거 아닌가? 이러한 생각으로 서서히 빠져들어 갔다. 어느 날은 심한 우울함 속에 있을 때, 사케 하우스의 스탠드바의 동쪽방향 끝에서 자신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는 애정 어린 시선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머리를 흔들며 아니지, 아니지 애써 외면하며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어느 순간 그는 그 강렬한 시선에 사로잡히듯이 이끌리어 헤어나기 어려운 어둠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전에 행복하다고 느꼈던 그 감정은 이제 그 측은한 시선과 함께 함몰되어 아득히 사라지고 무섭고 두려운 일상이 짓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책임질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그 측은한 시선을 이제는 책임져야 된다는 그 무게 때문에 삶은 무너지고 가족들은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걱정하고 애통해면서 공황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그는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전에 누렸던 행복이 거짓된 것임을 서서히 느껴간다. 교회는 멀어지고, 신앙은 흐려져만 간다. 마치 남의 일처럼 그렇게 생각하면서 무엇이 문제였던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인터넷에 SNS를 기웃거리며 혹시 해답이 어디 없을까를 찾게 된다. 삶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라는 말을 가끔 듣기는 들었지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이해 못하였던 그는 안타깝게도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을 무(無)로 돌리는 것이 이 우울함과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는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어느 날부터 여기 저기 서점을 기웃거리게 된다. "자유죽음" 이라는 어떤 이의 책 소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자기 살해라는 범죄적 죽음을 아름답게 묘사한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그는 “장 아메리”를 파고들기 시작한다. 혹시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자유로운 허락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하는 심정으로 빠져들었다. 어느 날 그 동안 기웃거려 왔던 페이스 북의 뉴스피드의 익숙한 인물들을 선택하여 여기 저기 넘나들다가 흠칫 놀라게 되는데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 이라는 책에서 그는 자살이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느 날 페이스 북 페이지에 "자살&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에 자신을 가입시켜 놓고서는 한 번씩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물끄러미 드려다 보곤 했다. 그곳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요상한 질문이 한 번씩 올라왔다가 곧 없어지곤 하는 모습이 마치 질문의 죽음과 부활처럼 느껴지곤 했었다. 그 질문이라는 것이 "아프지 않게 죽을 수 있는 방법 좀 가르쳐 주세요" "혹 모월 모일에 같이 죽을 사람 없나요?" 이런 질문이었는데 운영자와 몇 번의 대화를 주고받으면 모두 죽음을 연기라도 하는지, 또 포기를 하는 것인지 그가 던졌던 질문이 부끄럽다는 듯이 생각을 거두어들이는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불행하다고 말하고 있었고, “삶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냐?” 하고는 간절히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 내용을 보면서 오히려 행복은 인생의 참된 목적이 되어주지 않았던 지난날들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청년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생각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자신을 "없음"으로 소거시켜 버려야 하겠다는 삶과 죽음의 갈 짓자 심로에서 “자살&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에서 오히려 새로운 삶의 방향을 깊이 있게 더듬어 알아가게 된 것이다. 자신을 죽여 이 세상에서 아주 없이하려 했는데, 파악 뛰어내리든, 아니면 퍼억 부딪혀 죽어 버리려고 했는데 자꾸만 "무엇 무엇을 생각하는 모임"을 중얼거리며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삶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다. 삶의 목적은 어떤 상황에서도, 성공과 실패 가운데서도, 행복과 불행 가운데서도 오직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이 놀라운 사실이 가슴에 와 닿고 깨달아 지면서 새로운 삶의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657 no image |목회수상| 책임지는 기독교_최광희 목사
편집부
2206 2014-02-25
책임지는 기독교 < 최광희 목사, 행복한교회 >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먼저 피해자와 화목하는 것 필요해” 영화 ‘밀양’을 개봉한 것이 2007년이니까 벌써 7년이 다되어 갑니다. 처음 이 영화가 방영되었을 때 이 영화가 기독교를 옹호하는 영화냐, 비판하는 영화냐 논란이 많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영화를 생각해 보는 것은 여전히 성경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밀양”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떤 유괴범이 아이를 유괴해서 죽였습니다. 아이 엄마는 절망감에 방황하다가 주위 사람의 인도로 교회를 찾아 믿음을 가짐으로 마음을 추스르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범인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굉장히 힘든 결정을 했다고 성도들이 칭찬을 해 주었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교도소에 가서 범임을 만났는데 범인도 교도소 안에서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는 예수님께 고백함으로 자기 죄를 다 용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이 엄마는 너무나 기가 막힙니다.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받는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말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내가 용서해 주기도 전에 범인을 용서해 줄 자격이 있느냐고 따집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기독교의 가르침은 전부 엉터리 거짓말이라고 마구 항변합니다. 이 영화는 세상 사람들에게 비친 기독교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란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도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용서를 구하는 이상한 집단으로 비쳐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더라도 하나님께 참회의 기도를 하면 다 용서 받는다는 생각을 비성경적입니다. 그런데 다수의 성도들도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고 자연히 세상에도 그렇게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죄는 사람에게 짓고 참회는 하나님께 하면 된다는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사람에게 지은 죄는 반드시 사람에게 가서 사과와 보상을 하고 용서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레위기 제사법에는 속건제라는 제사가 있습니다. 속건제는 사람이 사람에게 잘못을 하고 손해를 끼쳤을 때는 찾아가서 사과하고 손해를 보상하되 1/5을 더하여 보상하라고 합니다. 즉 120%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나아와서 속건제물을 드리는데 제물은 숫양을 드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평민의 제물은 암컷이지만 속건제물은 값비싼 수컷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만큼 부담을 느끼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이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하나님께 죄 지었을 때보다 훨씬 복잡하고 손해도 많습니다. 창피함도 무릅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과 화목하는 것이 더 급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에게 자기 허물을 고백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허물이 있으면 하나님께 고백하기 전에 반드시 손해 끼친 그 사람에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손해변상을 할 때는 120% 이상으로 변상을 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기에 기독교는 무책임하고 이상한 종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이 속건제의 법칙을 삶에 적용하여 책임지는 기독교,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기독교,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656 no image |목회수상| ‘만일 죽음 이후 천국이 없다면’_이은상 목사
편집부
2367 2014-02-25
‘만일 죽음 이후 천국이 없다면’ < 이은상 목사, 동락교회 > “믿음의 생활은 천국에서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복 가져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한 파스칼은 최초로 계산기를 발명했습니다. 그는 도박에도 조예가 깊었던 사람인데 이 도박정신을 가지고 신앙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가령 신앙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는데 (1) 신앙을 가졌을 경우. 만일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천국에 갈 것이고, 만일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그만이다. (2) 신앙을 가지지 않았을 경우. 천국과 지옥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진짜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큰일 난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지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에 여기에 배팅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파스칼의 ‘내기 논증’(Pascal's wager)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론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신앙을 가졌을 경우 천국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만일 천국이 없다면 밑져야 본전이 아니라 손실피해를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손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천국을 위해 이 세상에서 포기한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억울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독자들에게 심각한 질문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만일 죽음 이후 천국이 없다면 과연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하겠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요지인즉,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이 지금 이 땅에서도 우리에게 유효한가를 묻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 오직 천국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이 땅에서도 복이 되는 것인지요? 이 질문의 해답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저희 것임이요’(눅 6:20)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 안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장차 우리에게 임할 천국을 말하기도 하지만 또한 예수를 믿을 때 이미 이 땅에서 신자가 받은 하나님 나라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복인지 누가복음 11장 20절이 그 해답을 말해줍니다. 이 본문의 내용은 우리 마음을 누가 차지하느냐의 싸움을 설명한 대목에서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우리 마음의 통치자가 누구인가를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마귀가 우리 마음을 다스렸지만 예수 믿은 이후부터는 우리 마음을 성령께서 통치하십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를 다스리게 되면 우리에게 엄청난 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 복이 바로 로마서 14장 17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리고 이어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말하는 세상에서 결코 매매할 수 없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복도 누리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에서 누리는 신자의 복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땅에서 누리는 복을 소유의 개념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얼마큼 가졌느냐, 얼마나 배웠느냐, 얼마나 배부르냐?’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당연히 소유의 개념으로 보자면 신자 중에는 복 받지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통치의 개념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독도는 대한민국 땅입니다. 가장 중요한 근거는 ‘옛날 지도책에 대한민국 소유로 나온다’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근거로 실효적 지배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통치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경찰이 주둔하고 사람이 살고 있으며 기상청에서 매일 일기예보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유자 확인보다 더 중요한 근거가 ‘통치’라는 개념입니다. 세계 각국의 영토분쟁에서 국제법상의 판례의 대부분은 ‘소유’보다 ‘통치’가 이겼다고 합니다. 신자가 가지는 고민 중 하나는 이 땅에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손해보고 산다는 연민입니다. 왜 신자의 현실이 이 모양 이 꼴인가 하면서 억울한 마음이 들 때면 나중에 천국에서 보자하며 마음속으로 식식거리곤 합니다. 다시 자신에게 질문해봅시다. 죽음이후 천국이 없다 해도 예수 믿는 일에 배팅하겠습니까? 이 땅에서는 유효 승, 천국에서는 한판 승!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도 결코 손해보고 사는 인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해 우리는 기꺼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습니다.
655 no image |목회수상| 편리(便利) 대 평안(平安)_정요석 목사
편집부
2227 2014-01-28
편리(便利) 대 평안(平安)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문명의 편리함 속에서 오히려 삶의 평안을 헤치는 경우도 많아” 나는 아직도 2세대(2G) 핸드폰을 사용한다. 4세대(4G) 사용자들이 누리는 유익함과 편리함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다섯 아이를 키우는 집안의 경제력 때문에 그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유익함과 편리함이 가벼워 보여 여전히 2G를 사용하고 있다. 중3 올라가는 첫째가 자기도 핸드폰을 갖고 싶다고 중학교 입학하며 졸랐었다. 자기 반에서 핸드폰 없는 사람은 자기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팔구 개월 전에 2G 핸드폰을 사줬다. 그런데 그때부터 딸의 생활상이 바뀌었다. 그 전에는 딸의 친구들이 연락할 일이 있으면 집으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딸에게 바꿔주고 통화 내용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딸의 친구들이 누구인지 알았고, 무엇이 관심사인지도 알게 되었었다. 한참 사춘기 때의 딸이 어디에 근심과 관심이 있는지 알았었고, 무엇보다 서로 접촉하며 서로가 부드러워지게 되었었다. 그런데 핸드폰이 생긴 이후부터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무언가를 해댄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누구와 통화를 하고, 누구와 문자를 주고받는지도 모른다. 딸이 더 예민해지고, 딸과 대화하고 영향을 끼칠 물리적 시간과 공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교회에 오는 중고생들, 심지어 초등생과 어른들도 4G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소통의 원활함을 위하여 등장한 전화와 핸드폰은 분명 이러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진정으로 가까워지고 소통해야 할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게 한 측면이 있다. 식당에 가족들이 식사하러 와서 기다리는 시간동안 모두가 스마트폰 하는 것을 보았다. 기계와 과학의 발달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줄지는 모르지만, 결코 평안함을 주지 않는다. 기계와 과학은 사용하는 이들이 분명한 목표와 내용을 절제하며 사용하지 않는 한 반드시 심각한 부작용을 가져온다. 차와 비행기의 발달은 연락과 접근성을 향상시켰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부산이나 목포나 뉴욕에서 있는 친척과 지인의 결혼식에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참여해야 한다. 사람들은 더 바빠진 것이다. 예전에는 말을 타거나 걸어서 이동을 함으로써 자연스레 운동까지 하고 그 덕에 건전한 식욕도 가졌지만, 지금은 따로 헬스클럽을 등록해 운동을 해야만 하고, 그 후에 자극된 식욕을 채워야만 한다. 왜 이리 요사이 설교시간이 짧아졌을까? 설교자의 능력이 부족하고, 회중의 참을성이 떨어진 것도 한 원인이겠지만, 개인이 자기 방에서 편하게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자극적인 매스 미디어가 발달한 것이 큰 원인이리라. 어렸을 때만 해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래 동안 발언을 하고서 “이상으로 짧은 말을 마치겠습니다”라는 말로 발언을 맺곤 했었다. 심심했던 시절에는 길게 발언을 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래서 길게 발언을 하고서도 더 길게 발언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여 그런 맺음말을 하곤 했다. 집에 가야 특별히 할 것이 없고 심심했던 시절에는 설교를 길게 하는 것이 미덕이었고, 회중들은 더 집중했었다. 지금도 중국이나 제3 세계의 외지에서는 설교를 길게 하는 것이 미덕이다. 기독교 TV가 생기고, 인터넷으로 설교를 언제든 접하며 오히려 예배의 집중도가 떨어지고 말씀이 귀하게 여겨지고 있지 않다. 문명의 이기는 분명 장점을 가져오지만 동시에 이에 못지않은 부작용도 있다. 아무리 집이 크고 화려해도 오히려 적막하고 개인주의가 될 수 있다.우리 집은 방이 3개이다. 안방은 아내와 내가 사용하고, 두 번째 방은 첫째와 셋째가 사용하고, 세 번째 방은 할머니, 둘째, 넷째, 다섯째가 사용한다. 아이들이 잠 잘 시간이 되면 특히 세 번째 방에서는 웃고 떠드는 소리가 진동한다. 네 명이 잠자리에 들어 장난을 치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우리 집안의 사랑과 행복을 드높인다. 나는 짐짓 화난 척 “빨리 자!”라고 소리치지만 아이들도 내 소리에 노기가 없음을 알고, 순간 조용해지지만 잠시 후 또 키득키득 하며 웃고 떠든다. 우리 집 첫째는 이제 중3을 올라가며 사춘기가 끝나가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짧고 부드럽게 사춘기가 끝나간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부부가 지혜로워서가 아니라, 동생들 4명 때문이다. 우리 대신에 동생들이 옆에서 “사춘기 병에 걸렸다”라며 때로는 이런 저런 장난과 도움 요청으로 첫째의 심각함과 예민함을 사소하게 만들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용돈을 받는 조건으로 셋째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며 사춘기가 부드러워지고, 영어 실력이 늘어나고, 동생과의 우애가 깊어진다. 나는 글씨를 워낙 못쓰기 때문에 컴퓨터가 생긴 것이 너무 좋다. 자가용이 있어서 언제 어디로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좋다. 먼 곳에 있는 분들과도 전화와 이메일로 연락할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이것들은 편리함이지, 절대로 평안함이 아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삶을 다소 편리하게 하지만, 다소 부작용도 가져옴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문명의 이기로 우리 가족의 긴밀함과 행복이 오히려 파괴되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가벼워지고 혼잡해지지 않는지 살필 줄 알아야 한다.
654 no image |제 언|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주저하고 있나_손종국 목사
편집부
2222 2014-01-28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주저하고 있나 < 손종국 목사, 청소년교육선교회 대표 > “총회지도부 안에 청소년을 지도할 수 있는 실제 전문가들 배치되기를” 미래학자인 최윤식 박사(<한국교회 미래지도> 저자)는 지난해 신촌포럼에서 다음과 같이 한국의 미래를 진단했다. “1, 2차 베이비붐 세대인 1,640만 명이 은퇴하는 2028년경이 되면 교회 헌금은 반 토막이 날 가능성이 크다”며 “100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은퇴 후에도 30-40년을 살아야 하는 목회자들이 대거 발생하면서, 교회와 은퇴비를 놓고 벌이는 심각한 갈등이 지금보다 더 많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한 “지난 20-30년간의 주일학교의 침체는 이제 30-40대의 본격적인 감소를 불러올 것”이라며 “앞으로 20-30년간 장년층의 감소, 55세 이상의 증가, 주일학교의 완전한 쇠퇴가 맞물리면서 한국교회는 ‘늙고 작은 교회’의 모습으로 변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교회학교의 침체와 몰락이 심화되고 있고, 젊은 세대들의 수평이동 역시 가속화될 것”이라며 “30-50대가 예전엔 교회의 교회건축과 같은 하드웨어에 집중했다면 이젠 자녀교육과 같은 소프트웨어에 집중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진단과 처방에 공감을 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 교단은 미래를 위해 무었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겠는가? 20년 전 봄 필자는 총회교육부의 간사로 3년차를 맞으면서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당시 유화자 교수는 교회교육연구소를 만들자고 제안하셨고, 교회학교 공과를 만들기 위해 교육학 석사학위를 가지고 있던 14명의 합신 전도사들과 학교에서 1박을 하며 머리를 맞대고 아무 대가없이 헌신할 것을 약속했었다. 그런데 한 달이 되기도 전에 간사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속상한 일이었다. 12년 전 가을 총회지도부에서 필자를 불렀다. 총회에서 주관하는 청소년수련회가 어려움에 처해 있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직전 겨울수련회에 참석했던 청소년들과 교회가 철저히 불신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총회지도부장과 총무의 지극한 성원 속에 시작된 수련회는 2년의 조심스런 노력을 경주하여 신뢰를 회복하고 3년차가 될 때 합신에서 2차로 나누어 1,200명이 넘게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도 동일한 패턴으로 정착되는 듯 싶었다. 이 때 주요 핵심은 주제에 일치하는 공과와 활동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말씀을 배우고 체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별도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진행요원을 합신 학생들 중에서 선발해서 훈련하였다. 이러한 구조를 이어가기 위해 지도부 안에 전문위원회를 두기로 하고 총회의 인준을 받는 한편 합신 안에 동아리를 만들어서 진행요원을 확보하였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지도부의 거부로 인해 5년차에는 참여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겪는 좌절이었다. 우리 교단이 출범한 그 이듬해인 1982년 봄, 당시 합신개강수련회에서 청소년에 관심을 가졌던 8명의 신학생들이 청소년교육선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중고등부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과 지도자훈련을 해오면서 교육전문자료집을 30여권 발간하였고 34차에 걸친 수련회를 기획하고 진행해왔다. 청소년교육 전문 월간지도 101권을 발행하였다. 이번 1월에는 성경에 대한 친숙함과 그 내용에 대한 체험을 담는 프로그램으로 “창세기를 전하자”는 주제로 진행했다. 천지창조와 노와홍수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위한 특강, 요셉의 꿈과 욥의 덕목에 대한 설교, 6일 창조를 영상으로 제작하는 활동, 바벨탑을 쌓는 활동 속에 심판의 의미를 배우는 프로그램, 아담을 비롯한 족장들의 4가정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가정을 이해하는 활동, 족장들의 신앙의 모습을 찾는 코스훈련,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찾아내는 큐티활동, 참석자 모두가 밤집회의 기도와 함께 아름다운 성과를 거두었다. 성경을 새롭게 느끼고 살아계신 창조주를 발견하였다고 하였다. 참석자들은 “이번 수련회를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 졌음을 느꼈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하거나 “이번 겨울 수련회에서 처음으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또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다음 세대를 위해 교회들마다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는 이때에 교단 차원의 큰 그림과 구체적인 정책이 실행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교회교육을 위해 상비부서 차원이 아닌 교육전담 기구가 있어야 하고, 총회지도부 안에 실제적으로 청소년을 지도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배치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교단 교육을 위해 합신 안에 교육연구소가 설립이 되어서 다양한 시도가 물질적인 어려움 없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어느 한 단체나 개인에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합신의 수많은 인재들이 교육단체와 선교단체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해왔는지 마음에 헤아리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한 모판이 더 이상 방치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Selected no image |신앙수상| 다시 돌아보는 산상수훈_유선임 청년
편집부
2410 2013-12-30
다시 돌아보는 산상수훈 < 유선임 청년, 화평교회 > “죄로 인해 비참한 인생이 예수 안에서 참된 소망과 사랑 알게 돼” 예수님의 산상수훈(마 5-7장)을 읽으면서 느낀 점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막연한 개념들이 더욱 선명해지고, 이 땅 가운데서 신자로 부름받은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 산상수훈과 하나님 나라 산상수훈의 첫 번째 주된 관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실체란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절대적인 선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불순하고 부정함, 결핍으로 인한 상한 심령과 애통함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통치와 공의가 이 땅에서 먼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후로 이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때에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민중들에게 빵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가 마땅히 지향하고 나아가야 할 역사적인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의’는 거기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2. 산상수훈과 인생의 본분 산상수훈을 접하면서 새로웠던 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가 더 이상 개인의 구원 문제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와 함께 어떻게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나갈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온유한 자’란 막연히 성품의 측면을 넘어서 비록 눈앞의 현실이 녹록하지 않고, 비웃음과 조롱뿐일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의지하므로 믿음의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절대자 앞에서 묵묵하게 자신이 가야 할 길, 곧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점에 깊은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노아에게서 보듯이 세상 사람들의 비방과 조롱에도 방주를 지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믿음의 대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땅으로 가서 그 곳에 하나님 나라와 그 문화를 정착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그들의 십자가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누구나 질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에서 건짐 받은 우리가 더 이상 무엇으로 우리 자신의 만족을 이룰 수 있을까요? 새 생명을 주시고 그의 백성으로 보호를 받으며 신자된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성도로 부름받아 존재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3. 산상수훈과 교회의 삶 성도는 이 땅에서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하늘의 것을 사모하고, 매일의 삶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간절함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가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내기 위해 아낌없이 자기 자신을 불태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나간다는 것은 온전한 교회를 이루어 가므로 하나님께 참된 예배와 그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그 근본적인 본질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올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온전하게 성례가 시행되고, 정당하게 권징이 집행될 때 거기에서 참다운 교회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만이 이 땅에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며 확장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친히 누리게 되는 유일한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위로이며 평안의 약속입니다. 마치는 말 산상수훈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에서 그 절정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말씀으로 확인될 것입니다. 죄로 인해 비참한 인생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소망을 두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드리며,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나아감이 신자의 참된 기쁨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으옵소서.
652 no image |목회수상|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福)이 있다_김성규 목사
편집부
2378 2013-12-17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福)이 있다 < 김성규 목사, 동남교회 > “서로 나눔으로 주님이 주시는 나눔의 기쁨과 복 누리기를” 성탄의 계절이 돌아왔다. 우리 주님께서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땅으로 내려오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신 주님의 낮아지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우리 주님께서 사셨던 이 땅에서의 삶은 죄인들과 낮고 천한 자들과도 기꺼이 친구가 되어 주신 섬김의 삶이었다. 또한 마침내 그 귀한 생명까지도 다 내어 주심으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 지난 12월 10일에는 동남교회와 더불어 초신자가 운영하는 중국집인 하이루반점에서 무료 급식으로 뜻깊은 자장면 나눔 전도 행사를 가졌다. 두 달 전 우리 교회 초청 전도 행사에 초청받아 와서 교회에 등록한 김용원 성도는 한 번 교회에 왔다가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 그와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왔다. 교회가 매주 한 번씩 전도하면서 부침개를 나누어 주는 것을 자기가 늘 보면서 자신도 그런 뜻있는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데 혼자는 어려우니 동남교회와 같이 한번 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것은 단순히 사회 사업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목적으로 우리가 하는 것인데 당신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과 함께 이 나눔의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답변했다. 그는 말뜻을 알아채고 “예, 목사님 저도 과거에 교회에 조금 다닌 적이 있습니다. 저도 교회에 다니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 그는 부인과 함께 우리 교회에 등록하였다. 그 후 우리 교회 구제부와 전도팀이 상의해서 동남교회와 하이루반점 무료 급식(자장면) 나눔의 행사를 결정하였다. 이 일을 진행하는 중 우리 성도들은 이 중국집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되고 이 중국집에서 식사를 하던 장립집사 한 사람은 자기가 그날 쓸 밀가루 값을 다 책임진다고 헌신했다. 그 후 어떤 성도는 그날 먹을 귤을 전부 책임지기도 하고, 또 어떤 성도는 그날 마실 야쿠르트도 다 책임지기도 하고 여러 헌신의 손길이 이어졌다. 드디어 당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날씨를 주셨으며 또 전도팀, 구역장, 권찰 그리고 자원하는 성도들을 붙여 주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식사도 대접하고 전도도 하고 주님이 사랑을 전하는 하루가 되었다. 우리는 그날 이 행사를 마치면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를 기억하며 우리에게 복음과 함께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나눌 수 있는 마음을 주심을 감사했다. 성도들의 마음에도 기쁨과 감사가 넘쳤다. 우리는 초신자인 김용원 성도가 앞으로 그도 복음과 함께 더 많은 것으로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어 줄 수 있고 베풀 수 있는 복을 주시길 기도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비교적 풍요한 삶을 사는 편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어렵게 사는 많은 사람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소한의 기본적인 삶을 누리고 산다. 이제 그들의 관심은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삶의 질을 더 높이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도 삶의 만족도는 늘 불만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최근의 통계청 자료에서 국민의 46.7%가 나는 중산층이기는커녕 하층민이라 생각한다는 국민의식에서도 잘 볼 수 있다. 물론 빈익빈 부익부의 상대적 박탈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은 우리들이 삶의 모든 것에 자족하지 못하고, 또 나눌 줄 모르는 이기심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에서 국민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은 경제적 대국이 아니라 부탄, 방글라데시 같은 가난한 나라들이다. OECD 경제대국에 들어갔다고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세계 103위이다. 모든 목회자들이 다 그렇지 않지만 목사는 상대적으로 남에게 대접을 받을 기회가 많다. 목사도 가진 것이 별로 없지만 가끔 남들에게 나누고 대접하는 경험을 할 때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나누는 자의 기쁨과 복을 조금씩 맛볼 때가 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우리가 많이 가져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이라도 서로 나눔으로 주님이 주시는 나눔의 기쁨과 나눔의 복을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성탄과 연말을 맞아 우리 주님이 우리들을 위해서 생명까지 나누어 주심을 기억하며 우리도 주님의 말씀인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福)이 있다’는 이 진리를 믿고 실천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길 소원해 본다.
651 no image |교리교육 리포트| 교리교육의 실제와 그 효과_문지환 목사
편집부
3259 2013-12-17
교리교육의 실제와 그 효과 < 문지환 목사, 부산 망미제일교회 부목사 > 시작하는 말 처음 교리교육을 실시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교역자로서 체계적으로 또 건전하게 성경을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성경신학에 본래 관심이 많아서 성경에 나타난 구속의 이야기, 창조-타락-구속-완성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이야기를 전하는데 더 주력한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고등부 사역을 하면서 느낀 한계점이 무엇이었냐면, 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성경 이야기를 들어온 아이들이 아니었다는 부분입니다. 그랬기에 마치 6살 저희 둘째에게 하듯 어린이 성경을 읽어주는 수준의 설교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자체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떻고 세계관이 어떻고를 말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이 때 예민한 주제들, 예를 들면 이성관계, 학업 등등 이야기들을 할 때만 주의를 기울일 뿐이고, 강의 중에 성경적인 냄새만 나면 마음과 함께 눈을 닫아버리기 일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생각한 대안이 체계적인 요리문답교육이었습니다. 1. 교리교육의 필요성 사실 교리 교육하면 그것은 성경이 아니라 무시간적인 기독교 사상적 논리와 체계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여러 교리 교육 방식 가운데 특별히 ‘요리문답’이라고 하는 유산은 ‘성경의 이야기’를 잘 요약하여 전해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경우 실제로 그 문답을 따라가다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된 창조 타락 구속에 대한 해설을 듣고 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많은 교리교육 재료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고 교리반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교재 선정에 있어서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요리문답해설서들은 무조건 탈락이었거든요. 그 책들로 교리반을 시작한다면 부흥은 둘째치고 배교의 역사가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추려내고 있던 중 당시 기독교 출판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교리교육의 새지평을 열었던 책이 있었으니 바로 특강 소요리문답입니다. 세련된 디자인, 최고급 재질이 주는 만족감, 본문에 대한 정통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 부합하는 해설, 그러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잃지 않는 필력, 주제와 관련된 풍성한 볼거리 등이 담긴 아주 좋은 해설서였습니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특강 소요리 문답을 교재로 선정하였습니다. 2. 중고등부 교리반의 출범 이런 결심과 함께 중고등부 교리반을 모집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중고등부 학생 모두와 소요리문답을 나누고 싶었지만 이 보석 같은 유산의 맛을 보다 깊게 음미하고 싶어서 자원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모집했습니다. 지원 자격은 제법 까다롭게 제시했습니다. 결석 2회면 탈락, 지각 2회면 결석 한 번으로, 토요일 오후 6시부터 3시간을 온전히 헌신, 주중 교재를 반드시 읽어야 했고 요구하는 숙제도 반드시 제출해야 했습니다. 많은 면에서 부산이 수도권에 비해 열악한 것이 사실이지만 부모들의 교육열만큼은 전혀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특히 토요일 저녁을 완전히 비우라는 요구는 학생들, 부모님, 심지어 교회 중직분자들에게도 불편하게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일단 소신을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갔습니다. 다행히 하나님 은혜로 첫 교리반 모집에 학생들 17명이 자원하였습니다. 구성은 중1부터 고3까지 골고루 포진되어 있었고, 특이한 점이 있다면 청각 장애 학생이 3명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섬긴 교회는 부산 밀알 장애인 단체와 긴밀한 협조 관계에 있었고 그 전부터 청각 장애인, 혹은 구화인들을 섬기는 일을 해왔기에 그런 가정의 자녀들이 중고등부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 중 몇이 교리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리반을 떠올리면 여러 가지 감사제목이 있지만 이 아이들이 함께 했던 일이야말로 가장 감사한 제목입니다. 3. 교리교육의 실제 학습 진행은 사실 말씀드리기가 부끄러운 게 제가 한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토요일 오후 6시 정각에 모여 찬양과 기도로 시작하면 4명으로 구성된 각 조는 지난 일주일동안 읽고 학습한 내용을 서로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종합하여 각자의 개성을 담은 그림, 벤다이어그램, 혹은 마인드맵으로 4절지에 표현하고 각 조마다 발표자를 선정하여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조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다른 조에게서 발견하고 심화하는 자가 학습이 가능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어떤 가이드를 줘야한다는 강박 때문에 강의를 잠시 하기도 했는데 한 3주정도 지나면서 제 강의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이미 아이들은 주중 숙제를 통해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고 혹시 핵심에 벗어난 이해와 적용을 한 친구가 있더라도 조별 나눔을 통해 보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중에 아이들에 해 야하는 숙제는 이렇습니다. 주어진 분량을 읽고 A4 한 장의 1/3정도는 요약 및 핵심 문장 한 문장 만들기, 또 1/3은 읽고 새롭게 배우거나 느낀 점 쓰기, 나머지 1/3은 앞으로의 다짐을 써 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스스로 읽고 해석하여 글을 쓰는 일이 어색하던 아이들이 가면 갈수록 숙제 검사하는 저를 울컥하게 만들 정도로 문답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아주 적실하게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매주 제출한 숙제에 줄을 긋고 코멘트를 달아 돌려주었습니다. 4. 교리교육의 효과 이렇게 교리반이 진행되면서 점점 중고등부 모임의 분위기가 좋아졌습니다. 아이들의 주일 모임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조금씩이지만 17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예배에 집중하고 말씀에 집중하다 보니 중고등부 전체 분위기가 예배는 좀 잘 드려야 된다는 비이성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용어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재수좋다, 운좋다 하던 아이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다’라고 말하며 서로 ‘알지?’ 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중고등부 행사로 독서발표회를 실시했을 때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진지하게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지루해하지 않고 그것을 듣고 배우면서 흥미를 느끼는 모습에서 큰 위로와 소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첫 교리반 학생들은 17명 가운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완주하지 못한 3명의 학생을 제외하고 14명이 수료하였습니다. 수료하기까지 선생님들의 지지와 도움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수화통역이 가능한 세 분의 집사님께서 순번제로 돌아가며 토요일 오후 세 시간을 봉사하셨습니다. 중고등부 선생님들도 자원하여 교리반 간식을 제공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이 부분도 꽤나 중요한 교리교육의 한 요소로 생각합니다. 교리를 통해 개인을 세우는 것을 넘어 함께 식사하는 식구 공동체로의 발전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역시 입이 열려야 마음이 열린다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는 말 이상에서 언급한 아이들의 교리반 후기는 모두 부산동교회 홈페이지, 중고등부 섹션에 가시면 읽어 보실 수 있습니다. 말씀과 교리를 통해 느꼈던 아이들의 감격이 고스란히 담긴 그 글들은 저와 그 아이들만의 일기장이 되어 추억과 함께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교육에서 교리가 천대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주님의 말씀이 이 교리와 요리문답에 잘 녹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결코 교리 가르치기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교리교육, 우리 함께 힘을 냅시다. 끈기 있게 말씀과 교리의 능력을 신뢰하며 나가는 여러분 같은 분들이 있는 한 언약의 자녀들과 교회와,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흥왕할 것입니다.
650 no image |목회수상| 겨울은 꿈꾸는 사랑의 계절이다_장석진 목사
편집부
2297 2013-12-17
겨울은 꿈꾸는 사랑의 계절이다 < 장석진 목사, 광주월산교회 > “고난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성숙한 인격체로 만드시는 과정” 한해의 끝자락에 오면 만감이 교차한다. 좀 더 성실하게 살았으면 하고, 좀 더 이해하고 살았으면 하는 바램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형통할 때는 즐거워하고 곤고할 때는 생각하라고 했다. 누구든지 살면서 어려움을 당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시험과 고통, 유혹과 시련에 시달리는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혹을 받지 않는 자는 짐승이거나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누구나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지만 명분 없는 시련은 견디기 힘들다. 주님은 환난을 당할 때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통일 때 사실은 힘들고 참기 어렵게 된다. 프랑스 작가 뒤마는 “극도의 불행을 겪은 사람만이 가장 최고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에크하르트는 “완전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은 고난을 체험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계적인 명지휘자 토스카니니는 “나의 나쁜 시력이 나를 명지휘자로 만들어 주었다”고 했다. 역경과 위기가 기회가 된 것이다. 고통을 당하므로 강해지는 것이 숭고한 영적 원리이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려 오신 분이 아니시다. 고난을 통해 인간을 위대하게 하신다. 역경 속에서 정제된 영혼은 항상 전진한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방향을 볼 수 있도록 영안을 열어준다. 로키산맥 해발 3,000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 지대가 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어야 한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하며 지낸다고 한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을 꿇고 있는 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사람이다. 성경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이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였다(시 119:71). 고난이 유익한 것은 그것 때문에 우리를 향한 놀라운 주님의 뜻과 섭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부족함이 없을 때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기란 어렵다. 왜 우리를 인내하게 하는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게 하는 동기요 성숙한 인격을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보검은 갈고 닦아야 날이 서고 매화는 추운 겨울에 더 진한 향기를 풍긴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매서운 추위일지라도 꿈꾸는 계절, 사랑의 계절이 되게 하라.
649 no image |제 언| 교리를 어떻게 가르쳐야 잘 가르치는 것일까?_황희상 청년
편집부
2491 2013-12-03
교리를 어떻게 가르쳐야 잘 가르치는 것일까? < 황희상, 안산푸른교회, 「지금 시작하는 교리교육」 저자 > “제대로 된 교리교육만이 성도의 삶을 올바로 바꾸는 유효한 방법” 교회에서 교리를 가르쳐야 되느냐 마느냐, 이것은 그야말로 우문이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이 사실은 교리이다. 설교 안에 교리가 녹아있고, 모든 성경공부에도 이미 해석의 틀이 있다. 그것이 교리이다. 기왕 교리를 잘 가르칠 바에, 정확하고 체계적이고 전통적인 교리교육 커리큘럼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교회 교육은 기본적으로 교리 교육을 기초로 두어야 하고, 교리 교육은 기본적으로 교리문답을 커리큘럼으로 삼아야 한다. 많고 많은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교리문답을 생각해서는 큰 일이다. 왜냐하면 체계적인 교리교육으로 생긴 신앙적 지식은, 단순히 교회생활에 ‘익숙한’ 신자들의 연약함에 비할 수 없는 단단함을 주기 때문이다.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도 모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교회에 그저 앉아만 있다가는, 언젠가 큰일을 치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아름다운 체계성으로 가득한 교리문답의 풍성함으로 교회교육 커리큘럼을 속히 재편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본질의 개념이 없이 명분으로 그치는 종교가 될 것이다. 교리를 가르치려면 성경 지식만 많이 쌓아두어서는 안 된다. 구슬을 제대로 꿰어야 한다. 우선 가르치는 자가 최소한의 ‘논리 훈련’을 해야 한다. 성도를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교육하려면, 생각하는 힘을 자꾸 길러주어야 한다. 신앙의 뼈대가 잘 세워질 수 있도록 체계적이며 논리적인 교리교육이 필요하다. 나아가 교리를 외우도록 하지 말고, ‘생각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이 되는 대답’이 필요하다. 좋은 교사는 좋은 대답을 해주는 교사인 바, '좋은 대답'이란 ‘모면하려는’ 대답이 아니라 정확한 원리에 따르는 해결이 되는 대답이어야 한다. 논리와 논증으로 교육하라는 이야기는 아주 상식에 속하는 말이지만, 안타깝게도 교회 교육에서는 대단히 낯선 주장이다. 논리와 논증은 “왜 그러한가?”를 자꾸 묻는 것이다. 교리적 진술에 대해 무턱대고 그런가 보다 할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믿어야 하는지 되묻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 교회 교육은 대체로 이와 같은 방식을 취하지 않았었다. 지식을 전달하고 그것을 스펀지처럼 잘 흡수하기만을 바랬다. 또, 그래야 착한 학생이라며 좋아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체로 어떻게 반응했던가? 이유를 묻지 않고 그냥 “아멘!” 하지 않았던가? 그 결과 교회에서 “왜 그러한가?”를 묻는 사람이 이제는 거의 없다.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 “그렇지, 당연하지”라고 받아들인다. 그 자리에서 왜 꼭 성경대로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것을 묻는 것이 사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 과정인데도, 교회에서 그런 질문을 하면 그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거나, 심지어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기도 한다. 바로 이런 현장에서, 교회교육이 와르르 망가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물어보는 질문이다. 교회에서도 이 질문을 하도록 해야 한다. 묻고, 그 답을 찾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다. 거기에 대답을 주는 것이 교회이다. 그 대답이 바로 ‘교리’이다. 의사가 병 고칠 준비를 완벽히 마치고 병원을 여는 것이 마땅하듯, 교회도 이미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마땅하다. 또한 교리는 삶으로 나타나는 고백이어야 한다. 교리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전인격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이다. 이 지식은 필연적으로 삶의 개혁과 변혁을 가져온다. 신앙이 삶으로 증명되듯이, 교리가 곧 삶이라는 것을 증명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교리가 삶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거기에도 ‘왜 그러한가’에 대한 답이 없으면 허무한 구호에 그치고 만다. 그저 근거 없이 우기는 것이 아니라, 증명이 필요하다. 증명이 없는 교육은 헛될 뿐이요, 이것 또한 허상이다. 결국 제대로 된 교리교육은 성도의 삶을 바꾼다. 그의 두 눈동자의 초점을 하나님께로 돌리게 하고, 고정시키게 하고, 감탄하게 하고, 무릎 꿇게 한다. 그것이 교리교육의 지향점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겠는가? 교리는 그것으로 타인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교리를 배운 맨 처음 반응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그분의 사랑에 ‘감격’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교만함과 죄성은 쉽게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한다. 배우는 자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 이것이 모든 교회에서 교리교육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를 가늠하는 지표이다. 교리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하나님께만 감사드리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648 no image |긴급진단| 이슬람의 포교전략과 교회의 대응_이재헌 목사
편집부
2491 2013-12-03
이슬람의 포교전략과 교회의 대응 < 이재헌 목사, 새과천교회, 총회다종교문제연구위원장 > “이슬람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우리 가까이 있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기 까지는 약 300년의 시간이 걸렸다. 대부분의 유럽이 기독교화 되는 과정은 무려 2천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 되었다. 중동과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의 많은 기독교 지역들이 이슬람 지역으로 되기까지는 불과 백년도 걸리지 않았다. 놀랍게도 유럽이 비기독교화의 과정을 겪은 시간은 4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를 두고 유럽의 역사적 세속화(Historical secularization)라고 부른다. 이것은 유럽만이 아니다.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미주 대륙까지 거세게 불어 닥치는 비 기독교화(De-Christianization) 혹은 반 기독교화(Anti-Christianization)의 파도는 이미 파도의 수준을 넘어 쓰나미에 가깝게 무차별적으로 세계를 삼켜오고 있다. 여기에 우리나라도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 세계적으로 유래 없다고 할 만큼 빠른 속도로 정착하고 부흥한 한국교회라고 하지만 이미 이슬람의 정착과 포교의 수준은 이를 뛰어넘을 기세다. 1955년 전쟁 시기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첫발을 내딛은 무슬림은 조용히 잠복하는 모습으로 있다가 이제 포교 50년을 넘어서면서 서서히 그 기지개를 켜고 있다.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무슬림의 숫자가 25만을 뛰어 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가 되었다. OIC(Organization of the Islamic Conference, 이슬람 회의기구)에 속한 57개국 출신 외국인의 수는 10만 명을 뛰어 넘었다. 이들 대부분이 무슬림이라는 것을 초정해 보면 우리나라에 체류 중인 무슬림의 수효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들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의 종교적 영향은 우리 사회 깊숙이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셈이다. 수년 전 ‘총칼 없이 유럽은 이슬람화의 과정을 겪게 될 것이며, 그 기간은 수십 년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고 공언했던 리비아의 카타피의 말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면서 이 말이 비단 유럽만을 향한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이토록 빠르게 이슬람의 성장이 가속화 되게 하였는가? 다양한 이유와 상황을 논할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그 포교의 기본적인 방법과 사고에 있다고 보여 진다. 한마디로 우리 기독교의 선교와 이슬람의 포교는 본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적 선교의 개념은(특별히 보수진영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믿음의 고백과 이로 인한 개인의 회심, 그리고 영혼 구원이라는 초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의 선교는 사회 전반적인 제도의 개혁, 곧 한 국가 혹은 사회를 그들이 주장하는 종교적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샤리아 법이 실현 가능하도록 하여 경제, 군사, 문화 그리고 정치적 체계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통합하는 총체적 시스템 구축에 있다. 결국 이런 본질의 차이는 방법적인 면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영혼 구원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 그들은 이슬람화된 시스템 구축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결국 그들은 개인의 개종은 물론이지만 국제 결혼, 도시 건설, 금융 시스템 구축, 대규모 이민, 인구의 자연 증가, 무역의 증대, 교육과 문화, 그리고 정치 통합을 통한 이슬람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절대적인 독단적 사고를 가지고서, 이른바 성전(聖戰)이라고 부르는 ‘지하드’(Zihad)의 명령 앞에서 포교를 위해서라는 얼마든지 거짓말도 용인되는 ‘타끼야’(Taqiyya)교리를 사용하여 회유, 미소, 평화적 변장을 서슴치 않고 있다. 하지만 이를 대면하고 있는 우리 사회는 너무나 온화하고 조용하게 그리고 거부감 없이 그들의 체제 속으로 젖어 들어가고 있다. 마치 실험실 알콜 램프 위에 올려 진 그릇 안에서 물이 조금씩 따뜻해져 오는 포근함을 만끽하고 있는 개구리처럼 평화롭게 미소를 머금으면서 말이다. 피터 하몬드가 ‘노예화, 테러리즘 그리고 이슬람’이라는 책에서 발표한 무슬림 인구 증가에 따른 단계별 이슬람화의 기준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오히려 더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적용되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무슬림 인구 1% 미만에서 보이는 평화의 종교로 가장하는 모습을 표면적으로는 가지고 있으면서 ‘샤리아 법률’의 뿌리 내리기를 위해 주변 상황을 만들어 가는 모습들이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세계적으로 그 열정과 물량에 있어서도 뒤지지 않는 한국 교회의 선교 현실은 참으로 자랑스럽고 감사한 부분이다. 이제는 그 열정을 가지고 우리 안방을 주목해야만 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우리 선조들의 훈계를 흘려보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가 급선무일 것이다. 우리 곁에 들어 와 있는 무슬림들과 그들이 생명으로 여기고 있는 이슬람이란 종교가 어떤 것인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무슬림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형제들이다. 다만 그들이 믿고 있는 신앙은 우리가 가진 신앙과 형제가 될 수 없다. 문화, 경제, 정치의 커튼으로 가려진 막을 걷어내고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본 모습을 정확하게 보아야 한다. 그들은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두텁게 자신들의 본질을 가리고 우리 곁에 와 있다. 그래서 쉽사리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신앙을 인도하는 목회자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현실적인 상황을 직시하며 깨어나는 목자적 의식을 촉구한다. 무엇보다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해진 영적인 혼란과 기준을 잃어가는 사회 윤리적 방황의 파도 속에서 우리 성도들이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알지 못하여 의식 없이 휩쓸려 가는 실수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슬람의 실체와 그들이 지나 온 역사적 사실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알게 하는 것이 현실을 방관함으로 우리 후손들이 겪게 될지도 모르는 진리를 떠난 암울한 영적 혼동을 막게 하는 최선의 수고이며 의무임을 직시하여야만 하겠다.
647 no image |신앙수상|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소고_한병수 박사
편집부
2420 2013-11-19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소고 < 한병수 박사, Calvin Theological Seminary 졸업 > “구원이 우리 마음의 판단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끔직하고 오싹한 일”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해 있다지만 정작 인간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진단이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다윗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는 없다고 증언한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유일하게 알고, 알게 하실 하나님께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인간의 부패성은 그 규모가 측량되지 않아서 그렇다. 욥은 세 친구들의 신학적 능변의 합을 능가하는 구약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 로마서에 버금가는 진리의 규모를 세웠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요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는 자'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택함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 그런 지각에 따라서 그는 근원적인 자기부인이 가능했다. 우리는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적 상태의 심각성에 대해 무지한 그 만큼 그토록 심각한 어두움 가운데서 건져 빛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은혜에도 무지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예정을 생각해야 한다. 진노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영생을 누리게 된 근원을 소급하면 땅에서 펼쳐지는 가까운 원인 그 너머의 차원이 있다. 곧 하나님이 그 기뻐하신 뜻을 따라 정하심이 바로 그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선악을 알거나 행하기도 전에, 그리고 창세 이전의 일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피조물과 시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변경할 수 없는 불변의 신적 작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우리의 마음이 구원의 여부를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고 의로우신 판단력을 따라 우리를 택하신 것보다 더 크고 확실한 은혜란 없다. 따라서 피조물이 그 본성에 따른 자율성에 어떠한 강압이나 위협 없이도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하나님의 정하심은 우리에게 가장 견고한 확신의 근거이며, 가장 깊은 겸손의 샘이면서 가장 은밀한 은혜의 내용이다. 때문에 구원이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우리 마음의 판단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오싹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에는 우리의 판단이나 행위나 그 어떤 공로라 할지라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의 고유 영역일 따름이다. 비록 우리에게 택자와 유기자의 분별이 맡겨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이 작정과 예정의 신적인 신비를 적당한 분량만큼 노출하고 있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음부의 권세가 흔들 수 없는 확신에 거하게 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합당한 경외심을 갖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깨닫게 함으로써 필경 일평생 감사의 행로에서 이탈하게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신적인 인과율인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이 눈에 관찰되는 가까운 인과율을 따라 사물과 사태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인간의 안력이 결코 미치지 못할 신비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하나님이 친히 가려두신 영역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신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알려질 수 있음을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다. 당연히 신비라 할지라도 성경이 침묵하고 있지 않은 이상 묵과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인간의 호기심을 따라 성경이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께 속하도록 가려둔 영역을 함부로 범하는 것도 금물이다. 호기심에 이끌려 선을 넘어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미로에 빠진다는 칼빈의 경고는 빈말이 아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비록 이성의 빛으로도 볼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은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며, 택자와 유기자의 구별은 이성의 빛으로는 조명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에게 맡겨진 심판과 정죄의 무기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확신과 겸손과 감사의 근거로써 하나님의 정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일에 어떠한 주저함도 없어야 할 것이다.
646 no image |목회수상| 황금마차를 타고_홍문균 목사
편집부
2343 2013-11-19
황금마차를 타고 < 홍문균 목사, 주은혜교회 > “우리는 이땅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특급대우’받는 왕족들” 우리 시대에도 황금마차가 있습니다. 곧 영국의 영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여왕과 그 여왕이 타고 다닌다는 황금마차가 그것입니다. 영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을 영국의 여왕은 6마리의 백마가 끄는 자신의 황금마차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물론이거니와 여왕과 함께 마차를 타고 버킹검 궁전을 향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몹시 우아하고 멋져 보였습니다. 우리 대통령을 황금마차에 정중히 모시는 영국 왕실과 영국 정부의 깍듯함도 보기에 참 좋아 보였습니다. ‘그 까짓 마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자존심 강한 영국 왕실이 그 정도로 우리 대통령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상대방에게 인정을 받고 걸맞은 대우를 받는 일은 기분 좋은 일임에 분명합니다.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 안에서 일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로부터 날선 지적과 함께 각종 비판에 시달려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한 때 세계를 주름 잡았던 영국 왕실의 특급 대우를 받았으니 나름, 마음의 힐링과 함께 전에 없는 뿌듯함을 누렸겠다 싶습니다. 제가 우리 대통령이 황금마차를 탄 사실을 관심 있게 언급하는 이유는 저도 한번 황금마차를 타고 싶다거나 우리나라에도 그런 황금마차가 한 대 쯤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식의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특급대우’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진실하게 이 땅에서 믿음 생활한 주님의 종들에게 ‘천상의 특별한 대우’를 예비하고 기다리고 계심을 분명히 성경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선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바른 믿음으로 살다가 오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천사들을 특별히 예비하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눅 16:22). ‘천사들에게 받들려’ 하나님께 인도함을 받는 성도들의 기분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그 느낌은 어떨까.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덜컹거리며 타고 가야하는, 도금 처리한 그 황금마차를 탄 기분과 과연 비교될 수 있을까요.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특급 대우’해 주시기 위하여 천국의 모든 길을 황금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길만이 아닙니다. 아예 하나님은 천국을 황금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을 둘러싼 성벽은 12가지 찬란한 보석으로 쌓으셨습니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 이더라”(계 21:18, 21). 잠시입니다. 그저 잠시, 박 대통령이 부러웠을 뿐입니다. 사후 세계? 그 사후 세계는 두렵고 겁나는 시간이 아니라 믿는 자녀들이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특급 대우’를 받는 복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물론 믿음 생활의 목적이 영원한 세계에서의 ‘특급 대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미 지금 이 땅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종으로 ‘특급 대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진짜 문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에 대하여 둔감하며 오히려 세상의 물질적 가치와 없어질 세상 영광을 목마르게 추구하고 있는 병듦이 아닌가 합니다. 주님을 믿고 오늘을 사는 모든 주의 백성의 삶은 하나님의 왕실의 일가족으로 사는 영광스런 삶인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왕실의 왕족으로서의 합당한 기품과 명예와 존귀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마땅히 지켜 가야할 것입니다. 하나님 시선 앞에서 그리고 세상 앞에서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를 특급 대우해 주시다니 그저 하나님께 엎드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645 no image |제 언| 총회 유지재단에 대하여_박병식 목사
편집부
3251 2013-11-05
총회 유지재단에 대하여 < 박병식 목사, 송파제일교회 원로목사 > 합신 97회 총회는 지교회들이 합신 유지 재단에 재산을 출연하도록 적극 권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이후로 지교회들이 유지 재단에 대하여 문의하는 일이 매우 많아졌다. 곧 유지 재단이 무엇인가, 교회 재산을 출연함이 왜 필요한가, 유지 재단이 총회 위에 군림하여 교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이에 2013년 10월 합신 유지 재단 이사회가 회집되었다. 이사회는 이런 문제의 제기들을 취합하여 이를 소상히 밝히고 지교회들이 유지 재단에 가입하기를 권하기로 하였다. 이사회는 필자에게 그 일부를 밝혀 주기를 요청하였다. 필자가 오랜 동안 합신 유지 재단 이사회 이사장직을 역임한 때문이다. 1. 유지 재단의 의미 어떤 특정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집단을 이루는 일들이 허다하게 많다. 그 집단을 이룬 사람들은 그들이 세운 목적을 극대화하고 합법화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세 가지를 갖춘다. 먼저는 정관이요, 다음은 조직이요, 마지막은 재정이다. 어떤 집단이 정관을 정한다. 다음은 조직을 한다. 그리고 재정을 갖춘다. 재정의 정도에 따라 건물을 구하고, 시설을 갖추고, 직원들을 채용한다. 이렇게 모습이 갖추어지면 그 집단은 공공성을 갖게 되고 특히 재정은 공동 소유가 된다. 재정은 정관에 따라 그 집단의 조직체가 관리를 한다. 누구라도 조직체의 결의 없이 사사로이 재정을 처리할 수 없다. 어느 특정인이 그 재산의 전액을 출연했다 해도 그 집단이 조직되면 그 재산은 공동소유가 된다. 그러므로 그 특정인이 재정의 일부를 공적 결의 없이 사사로이 임의로 사용하면 공금 착복이나 공금 횡령이 된다. 그 조직의 결의 없이 그가 재정의 일부를 사사로이 갖다 잠시 사용하고 다시 반환했어도 이는 공금 유용이 된다. 이는 범죄 행위로 간주된다. 이를 보다 법적으로 분명하고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그 집단들은 유지 재단을 설립한다. 총회도 동일하다. 총회는 여러 지교회들로 이루어진 연합체다. 총회는 역시 헌법이 있고, 조직이 있고 재정이 있다. 총회에는 일반 재정을 수납하기 위한 동산을 갖고 있고 동시에 부동산을 갖고 있다. 총회는 총회 회관, 총회가 운영하는 학원 혹 병원, 각 부서의 고유 재산 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총회는 이를 잘 관리할 책임이 있다. 총회의 임원회는 총회가 맡겨준 임무 수행을 위해 일반 재정을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임원회가 총회의 회관, 학원, 병원 및 특수부서의 고유 재산 등을 관리하는 데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 이는 매년 임원들이 교체되기 때문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오랫동안 관리하기 위하여 유지 재단을 반드시 설립하여야 한다. 유지 재단은 반드시 정부 주무 부처에 재단인가 신청을 하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유지 재단은 총회 회관 및 시설, 학원 및 병원, 특수부서의 고유 재산과 유지 재단에 출연한 지교회들의 재산을 관리한다. 현재 합신 유지 재단의 총회 내의 소관은 기독교개혁신보사 및 총회(합신) 세계 선교회와 함께 총회 내의 각 기관 항에 속해 있다. 합신 유지 재단은 재단 운영을 위해 재단 이사회를 조직하였다. 이사들은 지교회의 재산을 합신 유지 재단에 출연한 교회의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유지 재단이 관리하는 재산은 이사회의 결의 없이 한 개인이나 한 교회가 임의로 처분할 수 없다. 2. 유지 재단의 역사 세속 사회는 신용을 기초로 한다. 학교는 학교 운영을 위해 재단 이사회를 조직하고 정부에 이를 신청해야 한다. 정부는 재단 이사회의 재정 상황 및 조직을 세밀히 조사하고 이를 허가한다. 이 허가를 받으면 학교로서 허가를 받고 학생을 모집할 수 있다. 이는 그 학교가 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신뢰이다. 이를 기초로 학생들은 그 학교를 신뢰하고 그 학교의 학생이 된다. 이런 절차가 무시되면 그 학교는 결코 정식 학교가 될 수 없고, 학생을 모집할 수도 없다. 오늘의 사회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런 신뢰를 기초로 그 구조를 이루고 있다. 교단이나 지교회도 동일하다. 교단이나 지교회가 재단을 조직하고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교단이나 지교회가 한 교단이나 한 지교회로서의 신뢰를 사회로부터 얻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한 교단이 갖는 토지나 혹 건물을 토지 대장이나 건물 대장에 등기할 때 주무관서는 한 교단이나 한 교회의 청원을 그대로 받아 등기해주는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는 교단이라는 집단과 한 지교회라는 집단을 그대로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할 경우 오는 혼란을 생각하면 이는 주무부서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교단이나 교회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무부서는 그 교단이나 혹 그 지교회에게 부동산 등기 청원과 함께 재단 증명을 함께 제출하기를 요구한다. 재단 증명이 없이는 교단으로나 교회로 신뢰하거나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등기 청원을 받아 주지 않는다. 재단 증명이 없이 등기가 되었다면 교회라 해도 교회에 주는 세금 혜택 등을 전혀 받을 수 없다. 1980년대 합신 교단이 막 출범했을 때다. 그 때 합신 교단이 유지 재단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교단으로 출범했고, 교단 내에 지교회들이 가입되어 있었다. 토지를 매입하는 지교회들이 있었다. 토지를 매도하는 지교회들도 있었다. 예배당을 건축하는 지교회들도 있었다. 교회 건물을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는 교회들도 있었다. 이런 중요한 일들은 주무 관서로부터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 때 주무관서는 청원서와 함께 재단 증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합신 교단에는 유지 재단이 없었다. 어느 지교회가 토지 매입을 하고 등기 청원서를 주무 관서에 제출하기 위해 합신 총회 회관에 와서 재단 증명서를 요구한다. 그 때마다 합신 총회 회관에 근무하는 직원은 합동 측 총회 회관으로 갔었다. 그리고 재단 증명서를 발행해 주기를 합동측 총회 회관 담당 직원에게 읍소하였다. 담당 직원은 본인이 임의로 할 수 없는 일이므로 절차에 따라 상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합신 교단의 직원이 이를 얻기 위해 받는 수모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어려움을 다 말할 수 없다. 매 건마다 거액의 수수료를 반드시 지불하여야 했다. 합신 교단이 합동측 유지 재단 증명으로 일을 처리하는 일이 바르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총회 회관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받았던 수고와 수모를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가 설립되었다. 한 기총이 설립된 이후에는 한 기총에 가서 재단 증명서를 발급받아 지교회가 중요한 일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도 역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였다. 합신 교단 내 지교회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재단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할 일들이 아주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합신 총회는 유지 재단 설립 허가 신청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유지 재단 허락을 받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렵고 까다로웠다. 다행히 합신 교단에 속한 모 교회의 한 교인이 재단 허가를 내주는 문화관광부의 장관이었다. 그의 많은 노력과 협력으로 주무 부서로부터 합신 유지 재단 허락을 받았다. 수 백 건의 신청서 중 단 몇 건만 허락됐는데 그 중에 본 합신의 유지 재단 설립 청원이 허락을 받았다. 당시 많은 이들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뻐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가 곧 야기 되었다. 유지 재단 허락에 따른 세금이 3억이 넘었다. 당시 3억은 거액이었다. 각고의 노력과 힘을 모았지만 3억을 만들 수 없었다. 결국 유지 재단 설립을 포기하였다. 다시 재단 증명서를 계속 한기총 회관에 가서 받아 와야만 했다. 합신 유지 재단에 획기 할 만한 일이 2001년에 일어났다. 장신과 합신의 합동이었다. 당시 장신은 유지 재단을 갖고 있었다. 양 교단의 합의에 따라 장신 유지 재단은 합신 유지 재단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유지 재단의 역사를 이해한다면 그 소중함을 우리 모두가 깊이 마음에 담아야 한다. 3. 유지 재단에 출연 합신 총회 유지 재단 정관 제1장 제4조 4항은 유지 재단은 “본 법인 및 각 소속 지교회 재산의 보호 관리”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교회 재산의 보호 관리라는 말이 여러 가지 뉴앙스를 풍길 수도 있다. 그러나 총회 유지 재단이 한 지교회의 재산을 그 교회의 의사나 요구와 상관없이 관리한 경우는 전혀 없다. 또 이러한 일이 있을 수도 없다. 오직 보호 관리만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지교회 재산이라고 말할 때, 그 재산이란 주로 토지나 주택과 같은 부동산이다. 경상비가 아닌 거액의 재정도 교회가 원하면 유지 재단이 보호하고 관리해 줄 수 있다. 지교회의 재산이 보다 안전하게 보호되고 관리되기 위해서는 유지 재단에 출연해야 한다. 지교회는 그 이상의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이는 총회가 보다 더 견고히 세워지기 위해서이다. 교회의 통일성(catholicity)은 여러 교회들의 하나 됨이다. 유지 재단에 출연된 재산을 총유라고 말한다. 이는 한 지교회의 재산이 여러 교회들의 공동 소유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지교회들이 갖는 개 교회주의를 탈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교회의 재산이 그 교회의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교회로 옮겨지거나 혹은 유지 재단 이사회가 이를 임의로 사용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만일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유지 재단은 세속 법정의 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규모가 큰 교단의 총회 유지 재단은 총회 고유 재산 관리만을 한다. 그리고 총회 내의 각 지 노회들이 독립된 유지 재단을 다 갖고 있다. 지교회들은 소속된 노회의 유지 재단에 재산을 출연하여 노회 유지 재단의 보호를 받고 있다. 대형 교회들은 그 교회들의 독립된 유지 재단을 설립하여 교회 재산을 관리하기도 한다. 본 합신 헌법 정치 제17장 총회 제6조 14항은 “총회는 유지 재단을 설립하여 별도의 규약에 따라 일하게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각 교단의 지교회들이 교단 유지 재단에 어느 정도 출연하느냐에 따라 그 교단을 평가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지교회들이 재산을 교단 유지 재단에 출연한 교단들이 있기도 하다. 이런 교단에 대한 정부, 사회 그리고 교계로부터 받는 신뢰가 매우 높다. 이는 지교회들이 지 교단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표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교단들은 지교회가 재산을 유지 재단에 거의 출연하지 않는다. 이런 교단들은 모든 면에서 신뢰도가 떨어진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교회들이 교단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된다. 소위 군소 교단들이 있다. 이 말이 작은 수의 교회들이 한 교단을 이룬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수천을 헤아리는 교회들이 교단 안에 있어도 군소 교단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교단의 유지 재단에 재산을 출연한 지교회들이 거의 없는 경우이다. 교단 내의 교회들이 교단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재산을 출연하지 않는다. 본 합신 교단에 출연한 지교회들은 2013년 10월 현재 16개 교회에 불과하다. 본 교단에 속한 지교회들이 896개 교회이다. 겨우 2%만이 지교회의 재산을 유지 재단에 출연하였다. 이로 보면 본 교단의 취약함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지교회의 재산을 유지 재단에 출연하려면 교회가 강하게 이의 필요를 인식해야 한다. 먼저 공동의회가 회집되어 재산 출연을 결의해야 한다. 출연 허락 청원서를 노회를 경유하여 재단 이사회에 제출해야 한다. 소유권 이전을 위한 제반 서류를 법무사에게 의뢰하여 준비해야 한다. 여기에는 권리증, 등기부등본, 토지 대장, 건출물 대장, 증여 계약서, 대표자 인감 증명, 주민등록 등본, 당회원들의 인감증명 및 주민등록 등본, 등기 위임장이다. 그리고 관할 세무서장의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이 모든 서류를 법무사에게 의뢰하면 문제없이 준비할 수 있다. 4. 유지 재단의 유익 지교회의 재산이 유지 재단에 출연이 되면 유지 재단이 주체가 되어 공신력을 갖고 모든 행정적인 문제를 해결해 준다. 교회가 재산상 세상 법정의 처분을 받는 어려움이 생길 때 유지 재단은 이를 강력히 대처한다. 한 지교회보다 유지 재단이 대처할 때 이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지교회가 작은 규모일 때, 이단들이 교회를 탈취하기 위해 대거 등록하여 합법적으로 교회의 재산을 탈취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럴 때, 유지 재단에 출연되어 있으면 개 교회가 아닌 유지 재단을 상대하여 이런 일을 결코 할 수가 없다. 여러 이유로 교회의 재산이 개인 명의로 등기되어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유지 재단에 출연하는 절차를 거치면 소유권 이전으로 인한 과다한 세금 부과 및 여러 어려운 절차들을 해결할 수 있다. 소유권으로 인해 교회가 겪는 분쟁을 사전에 차단하고 문제를 교회의 유익이 되도록 해결할 수 있다. 재산을 유지 재단에 출연한 교회는 유지 재단의 명의로 교회당을 이전할 수 있다. 교회 재산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는 일이 유지 재단 명의로 가능하다. 한 지교회의 당회장이 중병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일이 있었다. 그 교회의 장로들만의 결의로 교단을 옮겨 갔다. 만일 그 교회가 유지 재단에 출연했었다면 장로들이 결코 다른 교단으로 교회를 옮겨갈 수가 없다.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반면에 지교회의 담임 목사가 교회를 다른 교단으로 옮겨가는 일들이 허다하게 이루어진다. 만일 그 지교회가 유지 재단에 출연한 교회라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본 합신 교단의 한 지교회에 다른 교단의 목사가 담임 목사로 부임한 일이 있었다. 대지와 예배당이 있고 성도들이 꽤 모이는 오래된 중견 교회였다. 그러나 그 교회는 합신 유지 재단에 가입되어 있었다. 결국 그 목사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교회를 떠났다. 지교회가 재산을 유지 재단에 출연하면 그 교회는 교회 본연의 사역에 더욱 집중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유로 유지 재단에 출연한 교회가 다시 재산을 지교회로 환원해야 할 필요가 발생하면 유지재단은 교회의 질서와 관련법규에 따라 최대한 협조한다. 출연한 교회의 재산에 유지재단은 부당하게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이를 십분이해하고 모든 지교회들이 적극적으로 재산을 출연하여 개교회들의 재산을 보호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모든 지교회들이 적극적으로 재산을 출연하여 더욱 신뢰받은 수 있는 합신교단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644 no image |신앙수상| 일 상_조병수 목사
편집부
2194 2013-11-05
일 상 < 조병수 목사, 합신총장 > “우리는 매일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작품 만들고 있어” 학교로 출근하는 길은 집을 나서 골목 끝에서 버스 다니는 도로를 이용하여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버스 다니는 도로를 벗어나 학교로 들어선다. 집으로 퇴근하는 길은 출근길의 역순이다. 출근길과 퇴근길은 똑같다. 하루 일과는 묵상으로 시작해서 결재를 하고, 신문을 읽고, 이메일을 체크하고, 우편물을 점검하고, 회의를 이끌고, 식사를 하고, 통화를 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시설물을 돌아보고, 부서들로부터 보고를 받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인생의 대부분을 사소한 일로 보낸다. 다음 날도 거의 다를 바 없는 삶이 반복될 것이다. 내일도 오늘과 비슷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일상을 탈피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자그마치 비행시간이 반나절이나 걸리는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고색창연한 도시에는 중앙을 가로지르는 운하가 굽이굽이 흐른다. 곤돌라를 탄다. 선미에서 노를 젓는 뱃사공이 풍부한 중저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그에게 삶이 행복한지 묻는다. 이른 아침부터 피곤을 이기지 못하는 몸을 깨워 빵조각을 입에 물고 배를 몰러 나왔단다. 그의 대답은 어제처럼 거의 다를 바 없는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와 비슷하다. 인생의 대부분은 사소한 일로 연속된다. 사람들은 일상을 혐오하며 일상의 사소함에 분노한다. 그래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언젠가 드라마 속에서 본 것처럼 어쩌다 자동차 사고의 현장에 있게 되고, 차 안에 갇힌 멋진 영화배우를 구출해낸다. 사랑이 싹튼다. 갑자기 환경이 달라지면서 지금까지 평범하게 맺어있던 주변의 인간관계는 부질없어진다. 판 박듯이 돌아가는 일상에 지친 우리는 가끔 이런 드라마 같은 사건을 꿈꾼다. 때때로 우리는 극적인 일이 벌어져 일상을 한번 심하게 흔들어주기를 바란다.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지면 감당해내지 못할 줄을 알면서도 말이다. 일상이란 다 쓴 휴지조각처럼 마구 구겨버려도 될 정도로 그렇게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일상은 그 자체가 신기한 것이다. 물론 굉장한 변화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일상은 비록 아기자기하기는 하지만 시시가 다르고 나날이 다르다. 출근길의 구름과 퇴근길의 구름은 서로 모양이 같지 않다. 오늘 찾아온 손님과의 대화는 어제 찾아온 손님과의 대화와 다르다. 아침이 저녁과 다르듯이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 아침은 아침대로 저녁은 저녁대로 의미가 있고, 어제는 어제대로 오늘은 오늘대로 의미가 있다. 일상은 그 자체가 작은 변화의 연속이기 때문에 각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상은 지겨움이나 단조로움이 아니라 신기함과 변화무쌍이다. 게다가 일상은 나를 진정한 나로 만든다. 일상은 매순간 나를 조각한다. 일상은 나의 삶이 실현되는 현장이다. 이것이 일상의 위대함이다. 그래서 일생의 대부분을 사소한 일로 보내는 것에 화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소한 일상이야말로 나를 조금씩 천천히 빚어내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일상은 아주 조금씩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나를 조각하기 때문에 나는 진정한 내가 되는 동안에 아무런 아픔도 역겨움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은 저주가 아니라 은총이다. 사실 일상 하나하나는 매우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상은 모두 모아지면 인생을 형성한다. 마치 어느 아티스트가 여러 색상의 자잘한 돌들을 주어와 바닥에 하나씩 둘씩 조합시켜 나가다보면 어느덧 하나의 그림이 드러나듯이, 일상은 매일같이 쌓여지면 인생이 된다. 일상이란 지금 당장은 사소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다 모아지는 날에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작품이 된다. 따라서 일상의 모음이 특별한 일이다. 위대한 것은 날이 갈수록 일상이 빠짐없이 모아진다는 사실이다. 일상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별한 사람도 일상을 살고 있으며, 일상을 떠나보려는 것도 일상의 일부일 뿐이다. 출근길과 퇴근길이 결국 하나인 것처럼 특별함과 평범함은 결국 하나이다. 출근길과 퇴근길은 단지 오고가는 방향이 다를 뿐이듯이, 특별함과 평범함은 단지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대부분을 사소한 일로 보내는 것에 화내지 말라. 일상이야말로 위대한 삶이 실현되는 현장이다.
643 no image |신앙수상| 생 명_조병수 목사
편집부
2419 2013-10-22
생 명 < 조병수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 “내가 누리는 모든 경험들은 나만이 지니는 위대하고 유일한 가치” 어느 여름날 아침 내 집무실을 방문한 중년신사는 열린 창문으로 쇠파리가 날아들자 순식간에 신문지를 둘둘 말아 때려잡더니 바닥에 떨어진 쇠파리를 무참하게 발로 짓이겼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저럴 수가 있는가!”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아연실색했다. 나 같으면 유리컵을 덮어씌우고 그 아래 빳빳한 종이를 끼어 넣어 컵 안에 갇힌 쇠파리를 살며시 이동시켜 창밖으로 날아가게 해주었을 텐데. 쇠파리는 크게 해를 끼치는 생물이 아니니 말이다. 살아있는 것은 얼마나 귀한가. 누군가가 도토리는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낫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둘 사이에는 생명과 무생명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 법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허투루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자살이 이곳저곳에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입시에 성공하지 못한 학생, 실연한 젊은이, 사업에 실패한 사업가, 인기를 잃은 연예인, 정치에서 몰락한 정치인, 사는 것이 재미없어진 노인, 온라인 댓글에서 받은 모욕을 견디지 못한 교수 등등... 사람들은 별별 자기만의 이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살은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무서운 행위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맺어온 가족과 동료와 이웃이라는 모든 인간관계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악한 행위이다. 자살하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나겠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누구의 것이든지 유일한 것이다. 눈동자의 색깔이건 손가락의 길이건 나처럼 생긴 사람도 없고, 밥 먹는 것이나 잠자는 것이나 나처럼 사는 사람도 없다. 각 사람의 생명은 그 나름대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다른 사람의 생명과 비교할 수도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된다. 세상에는 나 외에는 나와 같은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 나 자신만이 가지는 놀라운 가치를 말해준다. 나의 생명은 세상에서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만나는 모든 일도 나에게만 유일하다. 아주 더운 어느 여름 날 내가 입안에 작은 얼음조각을 하나 물고 있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과 달리 나 자신만이 누리는 기쁨이다. 그래서 그것이 비록 작은 기쁨이라도 나만의 것이기에 가치가 있다. 어느 날 선반을 고치려고 망치질을 하다가 그만 손가락을 세게 내려쳐 혼절할 정도로 아찔한 고통을 느낄 때 그것은 나만이 맛보는 아픔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달갑지 않은 고통일지라도 신기하게 나만의 것이기에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나에게 찾아온 행복은 나만의 행복이기에 유일하고 그래서 가치가 있고, 내가 당하는 고난은 나만의 고난이기에 유일하고 그래서 가치가 있다. 게다가 내 생명은 온 세상을 통틀어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것이건 부정적인 것이건 나와 관계하는 모든 것은 나에게만 유일하게 그 가치를 가지고 관계된다. 모든 것은 나에게만 나에게처럼 다가온다. 내가 오랫동안 사용해서 안경테가 헐거워지고 도수도 시력에 맞지도 않는 안경이 있다고 하자. 나는 그 고물 안경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안경 자체가 아직도 비싼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나에게만 나에게처럼 다가온다. 예를 들어, 바람은 다른 사람에게처럼 나에게 느껴지지 않는다. 바람은 나에게만 나에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바람은 다른 사람이 덥다고 느낄 때 나는 포근하다고 느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시원하다고 느낄 때 나는 춥다고 느낄 수 있다. 이 때문에 한 여름에 에어컨을 돌리다보면 어떤 이는 더우니 온도를 더 내리라고 주문하고 어떤 이는 추우니 온도를 더 올리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나에게만 나에게처럼 느껴지는 것은 온도 뿐 아니라 맛도 색깔도 밝기도 모든 것이 그렇다. 나의 생명은 나에게만 유일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때, 내가 아니라면 그런 사랑을 받지 않는다. 내가 그런 사랑을 받는 것은 오직 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만이 지니는 위대한 가치이다. 역으로 내가 어떤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때, 내가 아니라면 그런 미움을 받지 않는다. 내가 그런 미움을 받는 것은 오직 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에게만 주어진 놀라운 가치이다. 사랑이건 미움이건 내가 받는 것은 나 자신에게만 유일한 것이기에 가치를 지니며 명화 속의 밝은 색과 어두운 색처럼 나의 유일한 인생을 그리는 색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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