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642 no image |목회수상| 진짜신학, 진짜교회, 진짜생활_김창호 목사
편집부
2593 2013-10-22
진짜신학, 진짜교회, 진짜생활 < 김창호 목사, 하안전원교회 협동목사 > “외형적 성장 추구보다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기쁨을 누려야” 우리 교단이 추구하고 합동신학대학원이 지향하고 있는 목표와 표어인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이 이제 이 혼탁하고 어두워진 교계와 교인들 앞에서 ‘진짜 바른신학, 진짜 바른교회, 진짜 바른생활’로 바뀌어져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교단과 교파들도 모두 우리와 같이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을 추구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저는 그들이 진짜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제가 초교파 선교단체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진짜목사, 진짜교회가 거의 없다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보며 얼마나 개탄하고 마음 아파했는지 모릅니다. 부족한 이 사람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는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고 계실까요. 겉 형식과 포장은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영광과 자기의 기쁨을 추구하고 있는 자들을 보고 있으면 역겨움과 절망이 제 마음속에 몰려오고 있어 얼마나 괴로운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 우리 합신 교단의 목사들도 냉정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반성해 보아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외쳤던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였다면 주님의 종이 아니라는 고백”과 “주님의 종이 되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겠다”는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우리 모두는 이러한 말씀을 익히 잘 알고 있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원하고 계실까요? 하나님은 바로 나를 원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부흥과 성장을 원해야 되겠지만 하나님께 그 과정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과 기쁨을 누려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금에 세상에서의 기독교와 교회와 목사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목사들이 더 돈을 좋아하고 명예를 좋아하고 세상에서의 대접을 좋아한다고 기독교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 모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정 하나님과 말씀 앞에서 거룩과 성결과 절제의 회복이 우선 되어야 하겠지요. 그러하므로 말미암아 진짜 바른신학 진짜 바른교회 진짜 바른생활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이러한 교회를 찾고 있는 중에 제 동기 목사의 하안전원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는데 1년 여 동안 담임 목사님과 교회를 통하여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시대에 진짜목사와 교회가 되고자 말씀 앞에서 몸부림치는 목사님들을 보면서 ‘아, 진짜 저렇게 하여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마지막에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사람이 됩시다. 합신의 모든 목사들이여, 진짜 목사가 됩시다.
641 no image |제 언| 군선교사에 도전하려면?_김재광 목사
편집부
2955 2013-10-22
군선교사에 도전하려면? < 김재광 목사, 9사단 30연대 독수리군인교회 >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독교 복음화율이 아동 초등학생 7%, 10대 청소년 2.4%, 20대 청년 3.6%인 것으로 나타났다. 모두가 낮은 복음화율이지만 청소년에서 청년의 복음화율이 조금 높아진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군선교하는 목사들의 영향이라고 확신한다. 많은 분들이 지금은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말씀한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청년들이 교회에서 점점 줄어들고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이 있다. 매년 35만 명의 젊은 청년들이 군대에 들어온다. 이들을 전도하고 양육하는 것이 한국교회와 우리 합신교단이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이다. 군대에는 5대 종교가 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옛날부터 있어 온 초코파이교가 있다. 초코파이 하나로 개종시키는 곳은 군대밖에 없다. 효율적인 면에서 군대처럼 복음 전하기 좋은 곳은 없다. 일단 말이 통한다. 그래서 군선교를 아주 특별한 선교라고 한다. 또한 군선교를 황금어장, 가두리 양식장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21개월 동안 군부대 안에 있기 때문이다. 군선교에 도전하려면 먼저 젊은 영혼을 사랑해야 한다. 목사는 한 영혼을 전도하고 양육하여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 교단은 학부가 없기 때문에 현역 군목은 파송할 수 없다. 그러나 민간 목사는 파송할 수 있다. 매년 군선교연합회에서 운영하는 군선교교육원(봄, 가을/ 13주 과정)을 이수하면 군선교에 참여할 수 있다. 젊은 영혼을 사랑하지 않으면 군선교에 참여할 수 없다. 또한 젊은 영혼을 잘 섬겨야 한다. 목사(전도사, 강도사)는 예수님 때문에 교회에서 사랑과 존경과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군선교는 장병들을 잘 섬겨야 한다. 군에는 1004개의 교회가 있다. 현재 합신 출신 목회자 10명이 군선교를 하고 있다. 모두 젊은 영혼을 잘 섬기는 분들이다. 군선교하면 큰 기쁨과 보람이 있다. 첫째, 젊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매주 새신우가 교회로 온다. 모태신앙이면서 지금까지 신앙생활 잘하는 병사들, 모태신앙이지만 학생 때 교회를 떠난 병사들, 부모님은 믿지 않지만 학생 때 믿은 병사들, 교회에서 상처받아 교회를 떠난 병사들, 옛날에는 친구따라 절기 때 교회에 한 번씩 교회에 가보는데 대부분의 병사들이 교회에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병사들이다. 이들에게 21개월 안에 복음을 들려주고 죄에서 구원하는 일이다. 둘째, 젊은 영혼과 함께 예배드리는 일이다. 찬양도 잘 모르는 장병들과 때로는 손을 들고 때로는 박수치며 큰 소리로 찬양한다. 장병들과 함께 군생활을 위해 비전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한다.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자에게 잘 준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셋째, 젊은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는 일이다. 저희 연대 북한과 대치된 철책이 있다. 실탄을 소유했기 때문에 가끔 자살사고가 일어난다. 지금은 세 번째 믿음의 연대장과 함께 주일오후에 철책에 가서 연대장이 정신교육하고 초조함과 두려움에 싸여 있는 병사들에게 간절히 기도해 준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살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번에 총회특수전도부(회장 이상업, 서기 강종원)의 기도와 헌신으로 합신 군선교회가 창립된다. 우리 군선교사들이 몇 년에 걸쳐 할 수 없는 일을 해주었다. 너무 너무 감사를 드린다. 이제 우리 교단도 군선교사를 발굴, 양성(훈련), 파송(후원)하게 되었다. 아울러 누구나 군선교사에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고 외친 윌리암 케리의 말을 기억하고자 한다.
640 no image |신앙고백문| 입교를 하며_김준행 청년
편집부
3094 2013-09-24
입교를 하며 < 김준행 청년, 실로암교회 > <이 원고는 공예배 시작 전 교회 앞에서 자신의 입교에 대한 고백과 다짐을 한 내용으로, 이와 같은 입교자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하며 독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게재한다 _ 편집자 주> 저는 어머니 태중에서 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언약백성의 자녀로서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그것은 저 자신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부모의 신앙고백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와 증인되시는 성도들 앞에서 부모의 신앙고백이 아닌 저의 신앙고백으로 고백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여러 차례의 성찬과 세례식을 보아왔고 세례는 나이가 들어 때가되면 당연히 누구나 받는 교회의 연례행사일 뿐이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장로님과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교리를 배움으로써 세례와 성찬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가 성도에게 얼마나 큰 은혜가 되며 영광이 되는지 알았고 세례를 받은 자가 어떤 태도로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교회와 증인되시는 성도들 앞에서 입교문답을 하고 저의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실로암교회 입교인이 되고 교회의 회원이 됩니다. 당연히 회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겠지요. 하지만 현재의 저는 너무 부족합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당회의 가르침과 권면에 귀 기울여 교회와 성경에 대한 지식을 바르게 배워 믿음에 굳게 서도록 하겠습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제까지 세상가치를 좇는 저의 옛사람이 하늘의 가치를 좇아 살며 생명의 진리를 바라는 새사람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하며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지식과 믿음이 더욱 성숙하여 ‘교회중심’으로 살아가면서 교회의 동생들에게도 좋은 본이 되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언약백성의 자녀가 공예배 가운데 베풀어지는 성찬상에 참여하기까지 사랑으로 가르쳐 주신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그리고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리고 아울러 여기까지 기다려 주신 부모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앞에서 이 고백을 하게 하시고 군대에 보내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교회를 떠나 성도들과 헤어지는 것이 안타깝지만 병역의무를 다하는 동안 실로암교회 회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군생활을 충실히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도의 승리를 약속하시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자기의 양을 언제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보잘 것 없는 저의 존재를 받아주시고 양자 삼아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세례는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나의 옛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함께 참여하여 죽었으며 또 그의 부활에 참여하여 새사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이광호 목사 지음 ‘개혁조직신학’ 중에서). 2013년 9월 8일 처음 성찬상에 둘러앉은 입교자 김준행
639 no image |목회수상| 영원한 여자_김수환 목사
편집부
2580 2013-09-10
영원한 여자 < 김수환 목사, 군포예손교회 > “성도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한 것은 성례전적 이유 때문”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결혼하여 함께 사는 가정제도를 창설하셨다. 가정제도는 혼자 살면 외롭고 고독해서만도 아니고, 생육과 번성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경륜을 미리 그림자로써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 물론 왕과 백성, 목자와 양과 같은 구원을 설명하는 여러 종류의 그림들이 있지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역시 남편과 아내(신랑과 신부)의 그림이다. 이 그림만큼 하나님과 인간의 신비스럽고 온전한 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없다. 신앙의 완성격인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성은 신랑과 신부가 하나 되듯,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와의 완전한 연합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를 가리켜 이사야와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즉 우리 믿는 성도들의 ‘남편’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다(사 54:5; 렘 3:14).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공식으로 비유하였다(엡 5:22-33). 더 나아가 그는 복음전도를 아예 ‘처녀인 사람을 남편격인 그리스도에게로 중매’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다(고후 11:2). 하나님은 우둔한 우리 인생들이 구원의 의미를 보다 쉽게 이해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결혼제도를 이 땅에 미리 만드신 것이다. 그것은 비단 결혼 제도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제도와 현상들은 장차 오는 영원한 세계의 그림자요, 모형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혼이 단순히 육신의 결혼, 육신의 행복으로 끝나버리고 만다면 그림자만을 붙잡고 실재를 놓치고 마는 샘이다. 그것은 구원문제에 심각한 차질을 가져오게 된다. 결혼이라는 구원의 그림에서 보면 우리 성도들은 당연히 신부요, 아내요, 여자인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특히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우리의 신분과 위치가 아내요, 여자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훈련하고 연습해야한다. 그래서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참 남편 되신 그리스도의 신부와 아내의 역할을 차질 없이 살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여자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1-16절에서 여성의 긴 머리를 통하여 참 여자의 본질을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여자의 짧은 머리는 매우 수치스러운 것이며, 반드시 긴 머리를 가져야 한다. 만일 짧은 경우에는 반드시 수건을 써야만 한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오직 남자의 삶의 색깔만을 오롯하게 드러내야 한다. 여자는 자신을 컨트롤하는 제3자가 있다는 상징적 표(sign)로 긴 머리를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남편 되신 그리스도만을 나타내고 하나님만을 드러내야한다. 창세기의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의 것을 받아서 하나님의 것으로 살아야 할 인간이 그것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삶을 살겠다고 주장한 사건이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것으로 살지 않고, 자기를 주장하며 자기의 것으로 살려는 것은 바로 죽음인 것이다. 그것을 다시 결혼의 그림으로 보면 여자가 여자로 살지 않고 남자로써 살려고 시도한 것이요, 여자가 긴 머리를 포기하고 짧은 머리를 한 것과 같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을 감행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옛말은 매우 상징적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소리보다 타락한 사람의 소리, 죄인의 소리가 더 커지고 담벼락을 넘게 되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옛말은 사도 바울의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딤전 2:11-12)의 말씀을 순수한 우리말의 격언으로 표현한 것과 다름이 없다. 교회에서나 집에서 여자들이 있는 듯 없는 듯 종용히 지내며, 남자를 앞세우는 것은 결코 어떤 관습이나 문화의 이유로서가 아니다. 성도인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여자라는 성례전적인 이유 때문이다. 물론 그것 역시도 임시로 주어진 땅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참 실재로 나아가기 위하여 그림자로 연습하고 훈련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은 모두 여자이다. 여자 성도들도 여자요, 남자 성도들도 의미적으로 여자인 것이다. 신앙생활은 곧 여자를 잘 배우고 훈련하여, 여자로서 잘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닙니다. 나는 없습니다. 나는 먼지입니다.” 하고 끊임없이 나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나를 삭제해야 할 영원한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기억하자.
638 no image 교단총회, 이런 모습을 기대하면서_가정호 목사
편집부
2205 2013-09-10
교단총회, 이런 모습을 기대하면서 < 가정호 목사, 세대로교회 > “회의 통해 역사가 진보, 후퇴하기도 한다는 사실 명심해야” 가을입니다. 지금쯤 총회가 열리고 몇 주 후면 노회가 열립니다. 회의는 생산적이어야 하고 역사 발전을 위한 징검다리를 만드는 기회여야 합니다. 총회나 노회는 지교회의 교회된 성도들에게 소망과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성총회’라 표현하니 이는 마땅한 일이어야 합니다. 1. 큰 생각, 큰 틀에서 의견을 개진하는 그런 회의이면 좋겠습니다. 현재 한국교회가 당하고 있는 고통, 이 땅에 주님의 교회가 시작된 시점부터 오늘을 바라보는 높은 수준의 회의를 기대하게 됩니다. 높은 가치를 소홀이 한 채, 기득권에 집착하여 갑론을박, 이전투구, 흑색선전, 금품수수가 오가는 타락한 모습이 합신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겠습니다. 2. 이전이나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가치 생산을 위하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역동적으로 논의하는 회의여야 합니다. 모든 것이 위기인 시대입니다. 지구생태 환경에서 부터 인간성의 붕괴에 이르기까지, 가견적인 지상교회의 지속가능성에서 부터 언약백성이 사라질 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와 같은 위기의식을 가진 리더들의 진중한 회합인 동시에 치열한 대화가 오가는 모임이어야 하겠습니다. 3. 회의 의장의 의사진행에 대하여 수준 높은 반응을 보이는 회의여야 하겠습니다. 단 한 번의 짧은 총회를 비효율적으로 끌고 가는 총대들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의장의 사회를 간단없이 무시하는 발언을 하거나, 사회자를 통제하려는 과격한 발언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회의에서는 탁월한 총의를 생산해 낼 수가 없습니다. 개진된 의견을 가지고 의사를 진행하는 의장의 사회에 대하여 최대의 지지와 예의 바른 모습이 필요합니다. 4. 내가 아니면 발언할 회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조금의 틈만 보이면 손을 들고 모든 의사진행에 자기 의견을 개진하려는 지나친 열심을 보이는 총대들 때문에 다른 총대들은 혀를 내두릅니다. 이런 이들은 회의의 수준을 망가뜨리는 주인공입니다. 이런 회의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우울합니다. 침묵의 여유와 양보의 아름다움을 배우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5. 의장은 몇몇 소수의 발언자들이 빈번히 일어나 무절제하게 표현하는 열정을 조정하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됩니다. 노회별로 창의적인 발언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안배하고 배려하는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을 품고 기다리는 회원들의 침묵을 깨뜨리는 멋진 사회자가 필요합니다. 말을 할 줄 몰라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기다리는 총대들이 많을 것입니다. 6. 회의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공동체적인 노력인지를 드러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회의에 처음 참여하는 총대들에게는 큰 호기심이 있습니다. 회의를 통하여 역사가 진보하기도 후퇴하기도 합니다. 총회의 결정은 그만큼 큰 영향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총대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참여해야 합니다. 7. 변명과 탓과 원망이 횡행하는 공동체는 미래가 없습니다. 잘못된 것은 과감하게 사과하고 반성하고 수정해야 합니다. 나의 잘못은 동기를 이해해 주길 바라고, 다른 노회나 총대의 잘못은 결과를 가지고 정죄하려드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모든 회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은 인정하고, 잘한 것들에 대하여는 박수와 세움이 절실합니다. 과연 지난 총회에서 결의된 것들이 얼마나 실행되었는지 살펴 볼 일입니다. 8. 회의에서 결의된 내용이 세밀하게 전달되고 전승되는 성실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영문도 모른 채 결정된 내용을 통보만 받는다든지 해서는 안 됩니다. 당사자들에게는 설명과 이해와 동의를 구하는 신실함이 절실합니다. 거짓말, 기담, 악담, 악의에 찬 판단이 있어선 안 됩니다. 침소봉대하여 악의적인 소문이 거룩한 성총회에 끼어들 여지를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회의가 끝난 이후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회원들이 잘되고, 또 이웃 노회가 잘되기를 바라고, 아름답게 성숙해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가끔 이해 못 할 기담들이 들리면 마음이 참담하고 괴롭습니다. 9. 처음 참가한 총대들을 배려하여야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든 처음은 신기하고 두렵고 떨리기도 합니다. 손님 같은 느낌이 들지 않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잔치 같은 총회가 어려울까요? 미래 비전이 활활 타오르는 느낌을 주는 총회는 힘들까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지는 기존회원들의 몫입니다. 그것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옵니다. 처음 참여한 목사 총대들은 물론이거니와 장로 총대들에게도 따뜻한 배려가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637 no image |목회단상| 어느 군선교 목사의 자전적 이야기
편집부
2505 2013-08-27
어느 군선교 목사의 자전적 이야기 < 정OO 목사 > 보안관계상 성명을 밝히지 않습니다 “아직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장병들에게 복음 전해야” 어느덧 대한민국 군부대 안에 1004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민간 사역자들과 현역 군목들이 함께 일궈온 「천사(1004)운동」의 응답일 것이다. 군교회 안에는 적지 않은 영혼들이 주일이면 모여서 뜨거운 찬양과 말씀을 듣는다. 분명히 그 곳은 진리의 기둥과 터이지만 은둔의 땅이요 감춰진 선교지다. 외부와 접촉도 쉽지 않고 어느 교단소속도 없다. 주로 산골짜기 민간 출입이 없는 곳에 세워져있다. 내가 만났던 어느 목사는 “이것도 교회냐?” 라고 하면서 내치는 일도 보았다. 그러나 군교회는 젊은 영혼들이 미래의 대한민국을 꿈꾸며 섬기는 교회중의 교회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고정출입증을 지참하고 1주에 3번 이상 부대로 들어간다. 예배와 상담(전도)이 주목적이고 때로는 훈련이나 관련모임 때문이다. 내가 집을 출발하여 위병소에 들어갈 때면 위병은 총구로 나를 계속 겨누고, 또 다른 한 병사는 출입증을 검사한다. 우린 서로 다 아는 처지인데 말이다. 어떤 때는 방문목적이 뭐냐고 따져 묻기도 한다. 출입증에 ‘목사’라고 적혀 있는데도 말이다. 내가 사역하는 곳은 모 사단의 최전방 수색대대다. GP의 철책을 뚫고 들어가 밤샘 뜬눈으로 지새우며 고난 받는 젊은이들의 땀이 서린 곳이다. 이곳에 나를 보내준 사람도 없고 어느 교회나 단체가 파송한 것도 아니다. 노회로부터 위임도 받지 않았지만 나는 자칭 이 교회의 담임목사다. 이렇게 다진 생각을 스스로 가지며 위로를 받는다. 예전에 물병장이 있었는데 사실 나는 물담임이다. 오늘 당장 그만두고 떠나간들 붙잡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이 분명하다. 병사들은 항상 제대 날짜를 지워가며 집에 갈 날만을 기다리는데 저들에게 마음을 달라고 할 수도 없다. 혼자 사랑하고 혼자 기뻐하는 물담임목사다. 그러나 내가 자칭 담임목사라 불러야 하는 이유가 있다. 왜냐면 군선교는 특별히 담임목사와 같은 마음자세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자식 같은 저들을 내가 자진해서 품지 않고서야 하루도 견딜 수 없다. 도리가 없지 않은가. 대답 없는 메아리가 있을까만은 부대는 대답 없는 메아리가 너무 많다. 그동안 목사로 살아오는 도중에 양들을 버린 일은 없었는지 두렵다. 나는 믿는다. 양이 목자를 버릴 수 있을지라도 목자가 되어 양을 버릴 수는 없다고. 무조건 양들은 위로부터 보내주셨음을 믿는다. 특별히 허물 많은 나 같은 죄인에게 이곳은 최고의 사역지 였던 것이다. 파송을 받았든 스스로든 사역을 하면 되지 그게 무슨 상관이랴 주의 이름으로 서있는 곳이면 족하다. 그래서 그동안 많은 주의 평강과 기쁨을 맛보았었다. 자칭 담임목사로 군사역을 하면서 느낀 보람과 기쁨들이 있다. 무엇보다 훈련장을 찾을 때다. 마트에서 빙과류와 음료를 챙겨 유격장이 있는 산을 오른다. 도착하면 장병 모두가 예외 없이 집합이다. 훈련 중인지라 군기가 바짝 들어 있어서, 목사의 말 한마디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함성을 친다. 힘드니 대답을 하지 말라고 해도 대답이 또 함성이다. 정신교육이라지만 사실 무얼 말하겠는가 당연 복음을 전하고 또 부모님의 은혜를 전한다. 그러면 눈물이 글썽이고 감동의 시간이 된다. 와우! 이들이 누구던가 80%가 불신자들이 아니던가? 저들이 군대니까 앉아서 복음을 듣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실에 놀라고 기쁘다. 또 보람은 상담(전도)이다. 토요일이면 생활관에 들어간다. 잠을 자든 뭐를 하던 목사가 만나겠다고 하면 만나게 된다. 내가 토요상담(전도)을 진행하면서 새삼 놀라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꽤 많은 병사가 입대 전까지 “한 번도 교회(종교)나 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사춘기를 어떻게 살았지?’ ‘대체 사람의 머릿속에 종교사색의 공간이 없기도 한건가?’ 이건 내가 스스로 던져보는 질문인데,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떻게 이해하는지 몹시 궁금하다. 나이 스물이 넘은 인간이면 심원한 존재에 대해 묻게 되지 않던가? 그런데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이도 복음을 제시하면 대부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아직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심령일 것이다. 이런 변화를 보고나서 그들을 고향에 있는 지역교회로 입양 시켜주고 성도가 되는 것을 지켜볼 때, 내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를 확인하며 기쁘다. 위에 쓴 글에는 나의 자랑이 들어가 있다. 긍정적이고 싶은 선관념 때문인데 감삭해서 읽기를 바란다. 어부는 갈릴리로 가야하고 사람을 낚으려면 군대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가두리 황금어장으로 군을 주신 것 같다. 그동안 우리 교단이 가진 해외선교의 열정은 컸다. 그에 비해 군선교는 너무 버려지지 않았던가. 앞으로 우리 총회 안에서도 군선교를 향한 헌신을 기원해 본다.
636 어린이 교리문답의 중요성 파일
편집부
3708 2013-08-06
어린이 교리문답의 중요성 교회는 언제나 어린이들을 기독교 신앙교리 안에서 양육하라는 특별한 권면을 받아 왔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 교회는 옛적에 학교들을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신도 개개인에게 각자의 가족을 잘 가르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또한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주요교리에 대해 어린이들이 잘 알고 있는지의 여부를 심사할 수 있는 공적 규정도 소유하고 있었다. 이를 규모 있게 수행하기 위해 교회는 교리문답이라고 불리우는 어떤 특별한 규범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사탄은 자신이 교회를 흩어서 가동할 만한 폐허로 만들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 안에 아직 어떤 은혜의 징표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자 이 거룩한 규범을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사탄이 남겨놓은 것은 교화 능력이 전혀 없고 단지 미신만을 산출해 낼 수 있는 몇 가지 유물들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 교회 안에 왜 내적인 변화는 없고 허식만이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우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이 교리문답은 옛적부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지켜져 왔고,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된 적이 없은 전통적인 것이다. - 존 칼빈의 제네바교회 교리문답(1542년)의 서문 중에서 ▲ 칼빈이 어린이들을 위해 작성한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서의 서문(위) 및 본문의 일부 모습(아래)
635 no image |살며 생각하며| 아이들과 함께 하는 교리교육_나영균 교사
편집부
2803 2013-08-06
아이들과 함께 하는 교리교육 < 나영균 교사, 열린교회 > “단순히 문답방식 그대로 공부해도 그 깊이와 통찰들을 깨닫게 돼” 교회에서 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봐야 두 명일 뿐입니다. 한 아이는 지난 3월부터, 다른 아이는 6월부터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1. 아이들과 시작한 교리공부 3-4년 전에는 중고등부 아이들을 맡아 사역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가르쳐 본 경험이 있어서 '반신반의'로 초등부 아이들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시작했습니다. 중고등부 아이들도 어려워하고 힘들어 했던 교리공부를 초등부 아이들이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교리공부를 시작하기에 앞서 어린이용으로 번역되거나 만들어졌다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번역도 쉽고 예화들이 적절히 섞여 있긴 했지만 뭔가 아쉬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포기하고 교회에서 성인들이 사용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본문의 번역으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준비 과정에서 저는 각 번역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주 교재의 번역 중 아이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부분을 몇 군데 표시해두고 설명을 마련해둡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꼭 알아야 할 성경 구절을 정하고 가르쳐줍니다. 준비를 마치면 아이들과 만납니다. 3월부터 함께 공부한 3학년 유찬이는 부모님과 아이의 관심이 합해져서 배경 지식들이 많은 편에 속합니다. 이 아이와 일대 일 교리공부를 시작하면서 저는 철저하게 문답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곧 제시된 문답을 읽고 답합니다. 그리고 제가 준비한 질문들을 묻고 답합니다. 그 후에는 성경과 연결시킵니다. 이렇게 시작한 교리공부가 어느 덧 "사도신경"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아직은 아이들에게 완전히 이해시키려 하기보다는 본문을 암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반복합니다. 아이들과의 공부를 통해 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다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눈과 저의 눈으로 동시에 보니 그것이 무척 새롭게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 선배들이 어릴 때부터 교리문답교육을 실시했던 이유라고 탄복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2. 어린이 교리교육의 실제 아이들과의 교육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문답식으로 교육하다보니 아이들의 이름을 표기합니다. 우진, 유찬 군입니다). ⇒ 제19문 : 당신은 이것을 어디에서 압니까? ▲ 우진·유찬 :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처음에 낙원에서 친히 계시하셨고 후에는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제사들과 다른 의식들로써 예표하셨고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 ⇒ 그러면 질문, 거룩한 복음은 뭐지? ▲ 우진 : 성경요 ⇒ 더 자세히 하면? ▲ 우진·유찬 : 예수님요 ⇒ 오케이~ 낙원은 어디일까? ▲ 우진 : 에덴동산? ⇒ 정답~누구에게? ▲ 유찬 : 아담과 하와 ⇒ 그러면 족장은 누구? ▲ 유찬 : 모세? ⇒ 땡~ ▲ 우진 : 요셉? ⇒ 땡~ 요셉의 조상~~~ ▲ 유찬 : 아~~ 아브라함!!! ⇒ 그렇지, 또? ▲ 우진 : 이삭, 야곱 ⇒ 그럼 선지자는? ▲ 유찬 : 엘리야~~ ⇒ 그래, 엘리야도 맞는데 그보다 앞선 사람도 있지 유찬이가 아까 대답한... ▲ 우진·유찬 : 모세!!! ▲ 유찬 : 쌤~ 이거 아빠랑 성경에서 읽었었는데 여기에 다 나오네요^^ 신기하다~ ⇒ 그치? 성경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안에도 다 들어있지? 우진이는 어때? ▲ 우진: 저도 그래요 성경에서 본 적 있던 것이 여기 나오네요 ⇒ 그래~~ 요리문답은 성경의 내용들을 잘 간추린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본 것들이 다 들어있지~~ 앞으로 우리가 배울 부분들은 너희가 더 익숙한 것들도 많아~~ 대강 이렇게 공부를 마쳤습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아이들 스스로가 성경의 내용과 요리문답의 내용이 일치한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제7주일부터는 아이들에게 보다 더 익숙한 '사도신경'을 공부하게 되는데 더욱 기대가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3. 어린이 교리 교육의 유익 10살, 13살 내기들이 이렇게 요리문답을 공부해나가고 있습니다. 조금 더디더라도 좋습니다. 아이들이 이 기회를 통해서 더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저 역시도 열심히 공부하고 가르치려고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요리문답을 공부하게 된 것이 무척이나 감사합니다. 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강해하지는 않으며 그저 단순히 문답방식을 그대로 취해서 공부하고 있지만, 요리문답의 그 깊이와 통찰들이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리교육에서 특별히 누리는 유익은 그날 공부한 내용들을 아이들이 부모에게 전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통해 저는 부모들에게 그날그날 공부한 내용과 덧붙여서 함께 공부해주실 것, 특별히 강조할 사항들을 언급해드립니다. 마침 담임목사님께서 주일 오후 시간에 성도들에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강해하고 있는 중이기에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지난 3월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주일까지 마쳤습니다. 조금 늦기는 하지만 천천히 그 길을 가는 것이 교사인 제게는 무척 기쁜 일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늦어도, 꼼꼼하게 이 길을 걸어갈 생각입니다.
634 no image |제언| 군선교를 아십니까?_이상업 목사
편집부
2493 2013-08-06
군선교를 아십니까? < 이상업 목사, 총회특수전도부장 > “군선교 토대 만들어 체계적, 효율적 전도사업 이루어야” 많은 목회자들이 지금이 한국 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급속하게 노령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청년은 점점 더 줄어가고 있습니다. 몇몇 대형교회를 제외하고 나면 교회에 청년부가 없다고 합니다. 청년부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청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로 몇 년을 가면 교회는 공동화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점을 알고 청년 전도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대로 길거리로 나가보면 젊은 청년들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젊은 청년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청년을 발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또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무엇을 쫓아 달려가는지 도무지 복음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젊은 청년들에게 교회의 복음은 먼 이야기로 들립니다. 심지어는 대학교에서도 기독교 동아리가 점점 더 축소되거나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유는 복음보다는 세상의 가치와 성공이 더 중요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젊은 청년들과 갈급한 영혼이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군대입니다. 모든 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매년 35만 명의 젊은이들이 군대로 들어옵니다. 그들은 가정의 보호와 자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군인이라는 통제된 조직으로 불려 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초조함과 불안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바로 군대는 젊은 청년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이며 그야 말로 황금어장입니다. 우리 교단은 학부가 없는 관계로 현역군목을 파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민간 목회자는 파송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현재 교단 목회자 일곱 분이 군선교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자비량으로 간식을 사들고 부대를 갑니다. 숙소도 없습니다. 하지만 장소가 열악하든 인원이 많든 적든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젊은 청년들의 영혼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특수 전도부는 이분들의 사역현장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예배를 드리고 젊은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간식을 나누어 주며 위로와 권면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들입니다. 작은 간식에 감격해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치고 힘든 가운데 용기와 힘을 얻는 군선교 목회자들을 보았습니다. 눈으로 보고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확신하였습니다. 군선교가 한국 교회와 합신 교단의 미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군대가 황금어장임에는 분명한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째는 군선교 목회자들의 생활문제입니다. 군선교는 100% 자비량입니다. 심지어는 군교회의 운영도 군목회자가 책임지고 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군선교에 마음이 있고 열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문제로 주저하고 설령 군선교를 하다가도 떠날 수밖에 없는 실정입니다. 둘째는 군목회는 지역교회와 달라 인력이나 교재, 교육 프로그램이 부족하여 체계적인 양육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군 특성에 맡는 교재를 만들고 양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체계적으로 양육하여 지역교회와 사회로 보내야 합니다. 셋째는 이들이 제대를 하고 교단의 지역 교회에 연결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없다는 문제입니다. 군에서 세례를 받고 양육된 청년을 지역교회에 연결하여 정착할 수 있도록 관심과 적극적인 돌봄이 군선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특수전도부는 군선교를 도울 수 있는 준비를 하고자 합니다. 먼저 교단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이 군 선교에 대하여 알 수 있도록 홍보를 하고자 합니다. 그 이를 위하여 개혁신보에 광고를 하며, 특수전도부 및 군선교 목회자들의 칼럼과 사역을 소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8월 중에 홍보 전단지를 만들어 각 교회에 배포하고자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교단 차원의 군선교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면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군선교에 소명이 있는 교단 목회자를 발굴하여 적극적으로 군 사역에 헌신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래서 합신 교단 차원의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군선교가 이루어짐으로 우리 교단 교회에 젊은 청년들이 넘쳐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단의 교회와 목회자님들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교회에 젊은 청년이 넘쳐나고 힘 있는 찬양이 들리기를 바라십니까? 진정으로 원하신다면 이들이 모여 있는 군선교에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역에 동참해 주십시오. 기도와 물질로 적극적인 후원을 해 주십시오. 군선교 목회자들이 마음 놓고 온 힘을 다해 젊은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633 no image |제언| 다급해진 유럽의 재복음화_조봉희 목사
편집부
2746 2013-07-23
다급해진 유럽의 재복음화 < 조봉희 목사, 지구촌교회 > “유럽은 모슬렘 이민자들을 가장 쉽게 선교할 수 있는 황금어장” 미전도 종족이란 기독교 인구가 2% 미만에 해당하는 종족을 말한다. 그런데 유럽은 이미 미전도 종족 선교대상이 되고 말았다. 유럽은 현재 세계에서 기독교가 성장하지 않는 유일한 대륙이 되었다. 14세기에는 온 국민이 기독교인이었던 대륙이 이제는 영적으로 척박한 땅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무신론적, 불가지론적 12개 국가 중에서 9개가 유럽에 있다. 7억 3천만 유럽인구 중 실제로 2%로 미만이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는 복음적 신자가 1%도 안 되는 나라가 47개 국가 중에 19개국이나 된다. 그러니 유럽은 이미 미전도 종족이 된 셈이다. 유럽은 본래 종교개혁의 발상지, 경건주의와 대각성 운동의 발원지였는데, 지금은 심각한 선교지가 되었다. 유럽은 현재 세계에서 기독교가 성장하지 않는 유일한 대륙이다. 오히려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이슬람이 유럽을 급속도로 정복해가고 있다. 이슬람 성장은 초고속이다. 현재 전 세계 인구가 70억인데, 모슬렘 교도는 벌써 16억을 넘어서고 있다. 184개 국가에 퍼져있다. 특히 유럽 지역에서의 모슬렘 인구성장은 폭발적이다. 영국은 240만, 독일은 450만, 프랑스는 640만 명을 훨씬 넘어섰다. 동네마다 거리마다 모슬렘 사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다. 특히 유럽에 들어온 이민자들은 대부분 모슬렘 교도들이다. 유럽은 이들의 모슬렘 활동을 전혀 방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 침투를 당한 것이다. 이미 유라비아로 바뀌어가고 있다. 지난해 말 유럽의 모슬렘 인구는 5,300만 명으로 유럽인구의 7%에 해당하는 거대한 숫자다. 향후 10년이 지나면 20%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영국은 매주 마다 4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다. 한 달에 한번 예배에 출석하는 교인이 5% 정도에 불구하고, 매주 출석하는 사람은 2% 수준이라고 한다. 이처럼 유럽교회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이제 유럽은 선교지가 되었으니 아시아교회가 도와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처럼 유럽은 우리에게 건너와서 도와달라는 ‘마케도니아 환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이미 심각한 선교지가 되었다.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에서 선교사를 받아야 하는 나라로 돌변한 것이다. 목회자 한 명이 2-4개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이렇게 유럽의 교회가 힘없이 쇠퇴하는 반면, 모슬렘은 300%-500%까지 급성장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모슬렘 인구가 240만 명으로 성장하는 기간 동안에 기독교 인구는 200만 이상이 줄어들었다. 세계적 선교기관 WEC의 국제본부도 아시아 싱가포르로 옮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럽교회는 노인들만 나오는 반면, 모스크에는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있다. 모슬렘이 이렇게 계속 늘어날 경우 유럽은 향후 20년 내로 이슬람 국가가 될 것이라고 걱정스럽게 전망한다. 그들은 이미 유럽을 ‘유라비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모슬렘들은 “이슬람이 세계를 압도할 것이다”(Islam will dominate the world!)라고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있다. 이슬람의 캐치프레이즈가 위협적이다. “병든 유럽을 이슬람으로 치료하자!” 유럽교회가 이처럼 힘없이 무너지고 있는 근본 이유는 세속화와 포스트모던시대가 낳은 다원주의 영향 때문이다. 즉 15세기 르네상스 혁명을 기점으로 인본주의가 기독교의 절대적 신앙을 좀먹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유럽교회가 앞장서서 상대주의 신앙에 타협하여 오늘의 동성연애 결혼까지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킨 것이다. 신앙의 기준을 무너뜨리는 타협이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옛날 솔로몬 왕이 이방 우상 수입을 타협하므로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한 것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유럽에 불고 있는 바람은 무신론이 아니라 신이교주의(Neo-Paganism)이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국기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신앙에는 십자가가 없다. 다문화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요즘 우리나라도 200만 명이 넘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회교권 나라에서 많이 들어와 있는 만큼, 이슬람의 비밀스런 침투를 사전에 예방해야한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유럽교회가 힘없이 무너지고 있는 근본이유는 신앙의 반석인 성경의 절대권위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성경보다 문화가 더 우선이다. 특히 다문화주의로 인해 기독교신앙의 독특성과 절대성을 양보한 것이다. 이것이 신이교주의(Neo-Paganism)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떠난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은 모래성 쌓기에 불과하다. 유럽이 바로 그 현장이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 우리 한국교회는 유럽을 다급한 선교지로 여겨야한다. 이미 그들은 미전도 종족에 해당한다. 유럽의 재복음화는 하루가 급하다. 그들의 신앙이 회복되어야 아프리카 선교가 활성화되고,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회교권 선교를 쉽게 이루어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유럽이야말로 모슬렘 이민자들을 가장 쉽게 접근하며 선교할 수 있는 황금어장이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내다보시고 하나님은 유럽 전 지역의 디아스포라 한국교회를 미리 포진해놓으셨다. 독일과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국인 이민교회가 든든히 서 있으며 탁월한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영향력 있게 활동하고 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상한 갈대와도 같고, 바람 앞에서 흔들리는 등잔불 같은 유럽교회 목회자들과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부흥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는 유럽재복음화를 위하여 함께 힘을 모아야할 것이다.
632 no image |목회단상| 기도하는 것과 응답의 방법_정요석 목사
편집부
2910 2013-07-23
기도하는 것과 응답의 방법 < 정요석 목사, 세움교회 > “하나님은 높으신 뜻에 따라 우리의 기도에 다양하게 응답하셔” 몇 년 전에 제가 아는 어느 부부는 늦게 얻은 아이가 4살 무렵에 소아암을 앓아 몹시 힘들어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가 다니는 교회는 이런 병이 생기면 믿음의 기도로 해결하는지라, 그 부부에게도 병원 치료 대신 믿음의 기도를 권했습니다. 고민하던 부부는 병원 치료를 받으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남편은 저에게도 찾아와 무릎을 꿇으며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같은 부모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시어 아이를 치료해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아이가 입원한 병원에도 찾아가 아이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몇 달 후에 그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마지막 항암 치료를 받느냐, 아니면 믿음으로 치료된 줄 알고 그만 두느냐를 저에게 묻는 전화였습니다. 육체적으로 너무 고통이 따르는 항암 치료를 어린 자녀에게 받게 하고 싶지 않은 부모의 심정이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아이의 의학적 상황과 항암 치료법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간의 목회 경험으로 중병에 걸렸을 때 민간요법이나 치유 기도를 받는 것보다 의사의 말을 따르는 것이 나은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의사와 잘 상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남편은 통화 중에 자기들은 믿음으로 암세포가 없어졌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표현을 몇 번 했고, 실제로 그 부부는 믿음으로 치료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몇 개월 후에 그 아이는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그 부부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이가 입원했을 때에 목사님들과 소위 기도를 한다는 분들이 많이 찾아와 기도해주었는데, 유독 저만 기도 중에 아이의 병이 나을 것을 믿는다는 말을 하지 않아, 저에 대해서 서운한 마음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자녀가 하늘나라에 간 후에는 오직 제 기도만 옳은 것으로 판명이 되었답니다. 다른 이들은 병이 나을 것을 믿는다고 말했고, 병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믿음으로 외쳤는데, 저만 단순히 하나님께 병이 낫도록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고, 담당 의사와 간호사가 지혜와 열심으로 치료에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자기 자녀가 하늘나라에 가게 되자 출석 교회에서 믿음의 실패자로, 신앙의 열심과 충성이 부족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 교회는 어떤 일에 대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면 정말로 그렇게 된다고 여기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서는 기도한 대로 된 자는 믿음이 좋고, 되지 않으면 믿음이 없거나 약한 자입니다. 그 부부는 자녀가 죽었으므로 열심히 기도하지 않은 자로, 의심하며 기도한 자로, 믿음이 약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 부부는 자녀의 죽음을 통하여 그 교회의 눈초리와 그리고 그 교회의 위험성과 틀림을 알게 되어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병에 걸리거나, 자녀가 없거나,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럴 때 기도를 해야 합니다. 더욱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구하며, 우리가 얼마나 힘없는 피조물인가를 겸손하게 인정하며,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만 이 문제들이 해결함을 믿고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높은 차원과 신비로움으로 하나님은 어떤 성도에게는 건강을 주시기도 하고 병을 주시기도 허락하시지만, 또 하나님은 똑같이 우리를 사랑하심에도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허락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긍휼하심을 우리의 열심의 크기와 비례한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믿음을 크게 여겨주심이 확실하지만 더불어 하나님의 신비롭고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믿음의 기도에 다양하게 응답하십니다. 참된 믿음은 그 다른 응답이 어떠하든지 감사함으로 받는데 있습니다.
631 no image |목회수상| 우주 안에 거짓을 숨길 데가 있는가?_김수흥 목사
편집부
2470 2013-07-23
우주 안에 거짓을 숨길 데가 있는가? < 김수흥 목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 “신자라면 당장 손해 보더라도 정직하게 살겠다는 결단을 해야”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멀리 숨겼던 돈의 출처가 요즈음 생각밖에 들통이 났다. 한 동안 사람들은 스위스 은행에 돈을 많이 숨겼었는데 이제는 스위스 은행은 더 이상 돈의 은신처가 되지 못한다고 멀리 숨겼다가 들통이 났다. 그냥 어떤 은행에 저금하는 형식으로 돈을 숨긴 것이 아니라 서류상 회사(paper company)를 만들어 놓고 그 회사에 투자한 것처럼 돈을 숨겼는데도 발각이 난 것이다. 그렇게 돈을 숨겼는데도 누가 그것을 찾아냈는지 참 대단한 눈들이다. 그것을 찾아낸 당국은 한꺼번에 드러내지 않고 처음에 몇 명, 그리고 다음으로 몇 명, 그리고 또 다음으로 얼마, 이렇게 해서 끝까지 들추어 발표할 모양이다. 아무튼 우주 안에 숨길 데는 없다. 요즈음 또 큰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과거 오래 동안 원전 건설에 짝퉁 부품을 사용한 것을 들추어내는 모양이다. 요즈음 원전들이 가동을 갑자기 중단하는 현상이 나타나 전국에 정전(blackout)이 나타날까 보아 비상이 걸렸다. 그래서 국무총리가 국민들에게 크게 사과하고, 대책을 세우는 중, 원전 건설업자 중에 가짜 부품을 사용한 사람들 몇몇이 자수를 했다는 소식이고 또 앞으로 더 들추어낼 전망이다. 세상에 발각이 나지 않는 것들이 있겠는가. 이것이 다 하나님께서 국가 기관을 통하여 하시는 일이다. 아무튼 요즈음 거짓이 판을 치고 있는데, 인터넷 사기도 극성이고 또 생계형 도둑도 극성이다. 인터넷 사기는 일을 꾸며놓고 자취를 감추는 형식이고, 또 생계형 도둑은 살기가 힘 든다고 남의 물건을 도적하는 형식이다. 생계형 도둑들이 하는 것을 보면 요즈음 돼지저금 통이나 아동복, 심지어 주택가에 널어 말리고 있는 생선까지 훔치는 등 다양하다. 요즈음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공연히 독자들에게 피곤을 줄까 사례를 하나하나 들기가 미안하다. 우리 국민들은 우리나라에나 중국에나 세계 어디에도 도둑들이 충만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째, 거짓이나 도둑질은 언젠가 반듯이 발각된다는 것이다. 시간문제이지 거짓은 다 들통 나기 마련이다. 경찰들은 CCTV에 비친 것들을 보고 다 들추어내고 있다. CCTV에 비친 것만 아니라 DNA를 확인하여 국과수에서도 살인자들을 철저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제는 지구상에 숨길 곳이 없고 또 숨을 곳이 없다. 이런 사실을 일찍이 여호와께서도 말씀하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신 분이라고 말씀한다. 시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신다”(시 72:8)고 증언한다. 또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12)라고 한다. 주께서는 우리의 심령이나 우리의 행위를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다. 우리는 들통이 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둘째, 거짓말이나 도둑질을 계속하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게 되니 결국 고생하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계시록 21장 8절이나 22장 15절은 증언하기를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권하고 있다(골 3:9). 셋째, 거짓을 일삼는 사람들은 자기 신세를 생각해서 살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거짓을 해서 들통이 나 세상에서 부끄럽게 살고 또 지옥으로 떨어져야 하니, 일찍이 죄를 자복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라서 새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갤럽(gallop) 조사에 의하면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 중 80% 정도는 정직하게 살면 잘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때때로 우리는 외국 언론이나 연구기관들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부정직한 국민 중의 하나라는 비난을 듣는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예수님은 거짓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셨다(요 8:44). 예수님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나라에는 마귀의 자식이 너무 많은 것이다. 3.5%의 소금이 바닷물을 짜게 한다. 단 3%의 정직한 사람만 있어도 우리나라는 정직한 나라가 될 수 있다. 속임과 부정직은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당장에는 부정직이 자신에게 유익한 것처럼 보이나 결국에는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한다. 우리는 작은 거짓 하나라도 하나님에 의해서 발각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거짓을 철저히 버리고, 진리 되시는 그리스도만(요 14:6)을 따라는 생명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만을 따라 사는 중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각종 영적 육적 복을 받으며 살아야 할 것이다.
630 no image |제언| 우리 교단에도 ‘군선교회’가 있습니다(1)_이상업 목사
편집부
2906 2013-07-09
우리 교단에도 ‘군선교회’가 있습니다(1) < 이상업 목사, 특수전도부장 > “군목회자 양성과정 이수하면 민간성직자로 군선교에 참여할 수 있어” 우리 교단에는 총회특수전도부가 있습니다. 특수전도부는 우리 교단 내에 일반 교회 목회자가 아닌 특수한 사역을 하시는 목회자들을 돌아보며 격려하고 집회나 예배시간에 말씀을 전하는 부서입니다. 다문화사역, 장애인사역, 노인사역, 교도소사역, 군사역, 병원사역 등등 평범한 교회사역을 제외한 모든 사역들을 감당합니다. 그 중에서도 애정을 가지고 물질과 시간과 몸과 정성을 쏟고 있는 사역이 청년들이 원하건 원치 않건 모였다 흩어지고, 또 다시 모였다 흩어지는 군인목회사역입니다. 얼마 전 백령도 해병대 군 교회 집회도 특수전도부 사역의 하나였습니다. 현재 우리 군에는 1004개의 군인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있는 교회는 680여개 교회뿐입니다. 아직도 320여 교회는 목회자가 없는 실정입니다. 우리 합신 교단의 목회자들 일곱 분이 현재 군목회자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특수전도부 안에 이 분들이 중심이 된 군선교회가 있습니다. 참 배고프고 외롭고 교인들이 몰라주는 관심 밖의 사역일 수 있습니다. 자녀를 군에 보낸 부모님이나, 군대에 갖다온 남자라면 군교회가 얼마나 귀한 황금어장인지는 다 알고 있습니다. 목회 지망생(목사 후보생)들도 이 사역이 중요하고 귀한 줄 다 압니다. 그리고 아마 이런 귀중한 사역이기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교단은 ‘군종 목사’ 자리를 하나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군 청년 목회의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군선교연합회에서 실시하는 군목회자 양성과정(봄, 가을 13주 과정)을 이수하면 군 민간성직자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반 목사나 목사 후보생이 군 목회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해외 선교사는 미리 준비도 시키고 훈련도 하고, 후원회도 조성하여 교회에서 파송을 보냅니다. 온 교회와 성도가 관심을 가집니다. 그 분들은 자연스럽게 자신과 가족과 사역에 관해 소개도 하고 기도 및 후원 요청도 합니다. 그러나 군 선교 목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가장 배고픈 사역이 청년 사역이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청년 사역자 중에 더 배고픈 사역이 군 사역이라 생각합니다. 청년은 그래도 사람인데 군인은 그저 군인일 따름입니다. 관심도, 기도도, 파송도, 후원도 없는 음지 사역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사역에 관심이 있는 목사나 목회자 후보생이라 할지라도 피하거나 포기하게 됩니다. 현재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들도 참으로 힘든 목회 현장입니다. 마치 일반 목회에서 처진 패잔병의 목회자가 기웃거리는 목회 현장처럼 왜곡되어 버렸습니다. 다 귀하고 너무 중요한 사역인 줄 알면서도 말입니다. 때문에 미약한 힘이나마 이 외로운 분들에게 힘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소원을 주셨고 또한 쓰임을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의 목회 현장을 1년에 3곳 이상 방문했습니다. 간식과 필요한 비품과 격려금을 들고 말입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군선교회 위로모임을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말씀 듣고, 마음껏 대화하고 기도하며 잘 먹고, 잘 어울릴 수 있는 1박 2일의 야외 수양회로 바꾸었습니다. 그 계획을 처음 실행한 1박 2일 군선교회 수양회를 지난 5월 31일에 실행했습니다. 이참에 우리 교단 설립 이후, 처음으로 군선교회 이름으로 개혁신보를 통해 광고와 함께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귀하고, 중요하고, 우리 총회에서도 분명히 한몫을 감당해야 할 사명일지도 모릅니다. 특수전도부의 ‘군선교회’가 어떻게 우리 교단 교회와 성도들 앞에 가까이 다가갈지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빌 2:13)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중요했던 황금어장, 형식적으로만 동참했던 사역, 알게 모르게 외면하며 무관심하였던 ‘군선교’ 사역을 새롭게 한 번 생각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군 시절을 생각하시면서, 군에 다녀 온 자제분들, 군 복무 중에 있는 청년, 앞으로 군에 입대할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을 생각하시면서 말입니다. 적은 숫자이지만 외롭게 군 목회에 전념하시는 ‘군선교회’에 속하신 목회자들을 향해 한번 눈을 돌려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목회 현장에 있는 우리 청년들을 가슴에 품고 한번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청년들의 생명을 살리는 영혼구원 사역이 우리 교단을 통해 새롭게 일어나게 하실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당장은 열매가 없는 듯하고, 긴 시간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훗날의 한국 교회의 주역이 될 군 청년의 황금 추수를 꿈꾸며 함께 관심을 가지시고 지켜봐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629 no image |신앙수상| 내가 복권만 못하냐!_안송희 권사
편집부
2455 2013-07-09
내가 복권만 못하냐! < 안송희 권사, 화성교회 > “복권 가지고 철야기도에 갔던 어리석음을 깊이 회개해야 했다” 지난 5월 25일 오후 강남구민회관에서 ‘찬양의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하나님의 작곡가들’ 소속의 작곡가 11명의 작곡발표회가 있었다. 기독교방송, 국민일보, 극동방송, 정동제일교회, 무학교회 등이 후원했다. 이날 딸 오혜림도 <나의 도움 여호와>, <한 걸음씩> 두 곡을 헵시바 중창단을 통해 발표했다. 이 자리에 부모인 오동춘 장로와 내가 참석해서 11명의 작곡가들의 은혜로운 찬양을 잘 들었다. 특히 사랑하는 딸의 두 곡이 발표될 때 감격의 눈물이 솟구쳤다. 딸은 처녀 때 루마니아에 가서 4년간 어린이 선교를 하고 돌아와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졸업하고 결혼 후 다시 아시아의 한 나라로 가족이 선교하러 떠났었다. 그리고 여건이 어려운 지역에서 4년 반을 선교하고 안식년을 맞이하여 지난해 8월에 귀국해 다시 선교하러 갈 재충전을 하고 있다. 덧없는 세월은 혜림이의 가족이 다시 선교지로 가야 할 시간을 앞당겨 오고 있다. 나는 딸이 발표한 두 곡의 찬양을 들으면서 딸의 고3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딸 혜림이는 어느 날 아침 내게 음대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당황했다. 오 장로의 교사 봉급으로 뒷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혜림이는 꼭 음대진학을 하겠다는 아빠 닮은 고집으로 밥도 안 먹고 도시락도 안 가지고 학교를 가며 시위를 나름대로 벌였다. 난 어느 날 기도 중에 복권 한 장을 샀다. 복권만 당첨되면 딸을 음대 보내겠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다. 그런데 새벽녘 기도에 주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복권만 못하냐!” 하는 주님 말씀이 내 귓전을 때렸다. 그러면서 소천하신 화성교회 장경재 원로 목사님 설교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오윤부만 못하냐>라는 제목으로 장경재 목사님이 하신 설교였다. 창원지구 군부대장인 오윤부 대령의 빽이면 병역 연기가 될 수 있었기에 나도 오윤뷰 대령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될 때 하나님은 ‘내가 오윤부만 못하냐’ 하며 당시 젊은 장경재 목사의 가슴을 내리친 것이다. 장경재 목사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했듯이 ‘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하고 나도 깊이 회개했다. 복권을 가지고 철야기도에 갔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여자였던가를 깊이깊이 회개했다. 그리고 부모의 경제 능력이 부족하여 딸의 음악재능을 멈출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우리 부부는 딸의 음대진학을 허락하고 내외가 그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했다. 시험을 보는 날 나도 딸과 함께 연세대 교정에 있었다. 시험장에 들어가는 딸을 두고 시험 잘 보도록 기도했다. 곁에 딸과 함께 레슨을 받던 지연이의 엄마가 있었다. 우리 두 엄마는 딸의 합격기도를 위해 세브란스 5층 기도실로 갔다. 지연 엄마와 함께 딸의 합격을 기도하는데 어느 여전도사가 와서 기도인도를 하기 시작했다. 다급한 세브란스 응급실 환자를 위한 기도였다. 위독한 남편, 위중한 어린이 등을 위해 나는 딸의 기도는 뒤로 미루고 위급한 환자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그리고 난 후에야 시험을 잘 봤다는 딸을 데리고 집에 왔다. 발표날이 왔다. 마음이 두근거려 집에 오지 못하고 교회 모임에 그냥 있었다. 딸이 달려 왔다. “엄마, 나 합격했어” 하며 환하게 웃는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너무 감격하여 딸을 안고 울었다. 너무 기쁜 것은 작곡과 수석합격이었다. 딸은 학부생활 내내 장학생이었다. 하나님의 작곡가들 작곡발표 작품의 찬양을 마치고 귀가 길에 목사 사위가 “오혜림 선교사 음대공부 시킬 때 고생 많이 하셨지요” 하는 말을 들을 때 딸의 음대진학 때의 잠시 고생하던 생각이 뚜렷이 떠올랐다. 자식이 선교사이면 부모도 선교사인 것이다. 오늘 8월 초에 영적 전쟁터에 나갈 딸 가족을 위해 영적 승리를 위해 밤낮 가림 없이 날마다 기도를 불같이 뜨겁게 할 것이다.
628 no image |제언| 장애인障碍人과 장애우障碍友_정용균 목사
편집부
2768 2013-06-25
장애인障碍人과 장애우障碍友 < 정용균 목사, 부산장애인전도협회 > “공공장소나 모임에서는 ‘장애인’이라고 표기해야” 몇 달 전에 한 장애인과 함께 야구장에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매표소에서 가격표를 보는데, 거기에 ‘장애우’라고 적혀 있었다. 공공시설에서 ‘장애우’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조금은 뜨악했다. 몇 주 전, 울산에 있는 어느 교회를 방문했을 때에는 화장실에 ‘장애우 화장실’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사실 부산장애인전도협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장애우’라는 말을 심심찮게 보고 듣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장애인’이란 말을 두고 ‘장애우’라는 말을 쓰는 것일까? 그 말이 가지는 ‘친근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아는지 모르겠다. 당사자, 곧 장애인들은 그 ‘장애우’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장애우’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친구(友)로 보자는 뜻 아닌가? 그보다 좋은 표현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이렇다. ‘장애우’라는 표현은 장애인 스스로 주체가 아니라 ‘늘’ 비장애인의 친구로, 곧 상대적 객체로 존재하게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장애우’는 장애인을 사회 주변부에서 늘 보호를 받고 살아가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게 하는 용어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것을 ‘낙인 용어’, ‘동정 용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나아가 ‘장애우’라는 표현은 인칭에서도 문제가 있다. 어떤 집단이나 계층을 표현하는 용어는 인칭에 관계없이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장애우’는 장애인이 자신을 부를 때에는 쓸 수 없는 용어이다. “나는 장애인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나는 장애우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어색하다. 학생이 자신의 신분을 이야기할 때에 “나는 학생입니다”고 하지 “나는 학우입니다”고 하는가? 이처럼 ‘장애우’는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또 ‘장애우’는 윗사람을 지칭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말이다. “우리 아버지는 장애우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어색하다. “우리 아버지는 장애인입니다”라고 해야 자연스럽다. 단어 하나에, 글자 하나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 싶은가?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그 용어를 장애인 당사자가 좋지 않게 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사실, ‘장애우’라는 용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장애인인권을 다루는 장애인단체에서 만들어낸 말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그곳이다. 연구소를 설립할 당시(1987년)에 ‘장애자’라는 단어가 사회에서 잘못 전달되고 있었다. 그것을 대체할 용어가 필요했는데 그 용어로 ‘장애우’라는 단어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에 장애인 인권을 말하는 자리에는 어김없이 ‘장애우’라는 표현이 등장하곤 했다. ‘장애자’ 이전에 사람들이 주로 쓰던 말은 ‘병신’이나 ‘불구자’였다. 불구자라는 말은 좀 점잖은 표현이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병신’이라는 말이었다. ‘병신 육갑하네’하는 것처럼 이 말은 사람을 아주 심하게 비하하는 말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불구자’도 ‘병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다. ‘불구(不具)’는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는 뜻으로, 온전하지 못하다, 또는 모자란다는 말이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볼 때에는 비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대체한 것이 ‘장애자’이다. 그런데 그것도 부족해 몇 번의 논의 끝에 1989년에 ‘장애인’이란 말을 만들어냈다. 어떤 이는 ‘자’(者)와 ‘인’(人)이 무엇이 다른가 할 것이다. 사실 그렇다. 필자도 그 의미의 차이를 찾지 못하겠다. 굳이 말한다면, 그 차이는 인식에 있는 것 같다. ‘장애우’는 그 중간에 나온 말이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된다. 그 의도대로 그 말은 사람들의 인식 개선에 많은 역할과 공헌을 하였다.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장애인’이라는 말이 있고, 장애인 당사자가 ‘장애우’란 말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현실에서 ‘장애우’라는 말을 계속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장애우’라는 말을 아예 쓰지 못할 용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교인을 향해 ‘교우’라고 하듯 ‘장애우’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공공서 안내 문구에서는 ‘장애우’보다는 ‘장애인’이라는 말을 쓰면 좋겠다. 아니 그것이 옳다. 장애인 단체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장애인’은 법정 용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장애인’이 공용어이다. 공공장소나 모임에서는 ‘장애인’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다. ‘장애우’라는 표현은 적합지 않다. 아무리 봐도 어색하다.
627 no image |제언| 나를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신학_전두표
편집부
2869 2013-06-11
나를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신학 < 전두표, 시광교회 청년부 > 시작하는 말 개혁주의자들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2. 이하 WC)고 고백합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무오한 진리요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써(WC 1:5)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모든 계획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 되어(WC 1:6)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개혁주의자들은 개혁신학이야 말로 그러한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하는 신학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과 그 신학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고백이 정말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그것을 쉬이 받아들이고 같은 고백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그들의 고백 중 어느 부분은 동일하게 고백 되지만, 그들의 신학 전반은 심한 반대를 겪고 있습니다. 이처럼 개혁신학이 심한 부침을 겪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다음 두 가지가 기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1.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수동적인 로봇이나 본능을 따라 사는 짐승이나 무가치한 돌맹이로 취급당하는 느낌을 줍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인간에게 일종의 모멸감을 안겨 줍니다. 한 마디로 개혁신학은 인간의 존재성과 가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개혁신학은 인간을 발가벗깁니다. 그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둔 죄를 적나라하게 들추어냅니다. 그 죄악된 본성을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자꾸만 죄를 들추니 수치스럽습니다. 반대로 인간을 자꾸만 범죄자라 하니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특별히 나쁘게 살지도 않았고, 법을 크게 어기지도 않았는데 죄인이라고 하니 기가막힙니다. 범죄자 취급을 하니 모욕감을 느낍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거나 혹은 하나님을 자기 인생에 있어서 부수적 도우미로 여기는 대다수의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개혁신학의 특성들은 참을 수 없는 거부감과 고통을 줍니다. 그것은 개혁신학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내적 요인이 됩니다. 2. 경계해야 할 불경건한 엘리트주의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개혁주의자들에게서 종종, 아니 자주 나타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적어도 외적으로는 경건함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열매를 의미 없는 껍데기로 여기는 듯합니다. 다시 말해서 개혁주의자들은 믿음과 행함이 불일치합니다. 그들은 믿음을 크게 강조하지만 행함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자들에게 있어 신앙은 믿음만이 전부인 듯 느껴집니다. 행함을 외면하고 그들에게서 신앙인에 어울리는 행함이 안 보이는 것을 보면 개혁신학이 원래 그런 것인지, 과연 개혁신학이 바른 신학이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들의 신학이 더 나아 보이지 않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이류, 신앙의 미달자로 취급하는 태도를 자주 취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무식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한심한 자들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자신들을 특권층에 속한 엘리트 신앙인으로 여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저 무가치한 영지주의자들처럼 마치 자신들이 가진 지식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비밀스러운 참 지식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들만이 옳다는 태도는 독선을 넘어 맹신으로까지 보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개혁주의자들은 메마른 지식으로 형제와 자매들에게 큰 상처를 줍니다. 어떠한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거침없는 독설을 내뱉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형제와 자매의 오류와 무지를 겸손한 자세로 알려주기보다는 고압적인 태도로 교정하려 듭니다. 그것은 마치 칼날을 목에 들이대며 위협하는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개혁주의자들의 태도는 그 신학에 환멸을 느끼게 하며 그것으로부터 돌아서고 거부하게 하는 결정적인 외적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개혁주의자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저들은 죄악된 본성 때문에 바른 신앙과 신학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오만과 판단으로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3. 개혁주의자들이 취해야 할 반성적 태도 인간은 그 본성상 하나님과 그분의 주권을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은 다른 믿음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기회가 되는대로 긍휼한 마음으로 그들이 가장 성경적이라 자부하는 자신의 지식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때 그 지식을 교만이 아니라, 겸손을 바탕으로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거부하더라도, 그럴 때일수록 더욱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때를 보며 전해주어야 합니다. 동시에 자신의 믿음에 합당한 본을 보여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은 아무도 구원 못하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는 살아있는 믿음임을 삶의 모습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은 메마른 지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참 진리임을 증거할 수 있도록 그에 합당한 삶을 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게 아니라 기도와 간구로 그 믿음에 합당한 삶, 즉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는 말 개혁주의자들이 자신의 삶 가운데서 개혁신학의 열매를 꽃피운다면 굳이 전령사 역할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편향된 모습을 유지한 채 억지로 그 지경을 넓히려 든다면 거부와 반대는 더욱 거세질 겁니다. 물론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을 살더라도 개혁신학은 하나님 주권을 바탕으로 하는 그 특성상 모든 이들에게 환영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할지라도 개혁주의자는 더욱더 믿음을 굳게 견지하고, 그 믿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개혁신학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는바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언제 어디서나 늘 그분을 즐거워하기 위해서 말입니다(소요리문답 1번).
626 no image |제언| 통섭적統攝的으로 성경을 접하라_장창수 목사
편집부
3712 2013-05-28
통섭적統攝的으로 성경을 접하라 < 장창수 목사, 총회선교사 > “십자가를 중심으로 학문들을 재해석해 주는 것이 교회와 목회자의 사명” 통섭(統攝: consilience)은 환원주의(還元主義: reductionism)의 반대이다. 환원주의는 대상을 하위 부분으로 세세하게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섭은 나눈 것을 다시 합하는 것을 각각 뜻한다. 환원주의의 장점은 부분들을 세세히 알도록 돕지만 단점은 전체를 보지 못하게 한다. 반면 통섭은 부분들도 보면서 전체를 보도록 돕는다. 16세기 이후 환원주의가 모든 과학의 흐름이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모든 학문들은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서로 연결됨이 발견되었다. 학문 간 경계선을 넘나드는 통섭적 과학 방법이 중요해졌다. 당연하지 않은가? 물건을 하나 들 때 손만 일하지 않는다. 손목, 팔, 어깨와 허리의 도움이 요한다. 몸의 한 행위는 반드시 다른 지체들의 유기적 협력을 요한다. 사고(思考)의 세계에서도 같다. 성경은 통섭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창조주 하나님은 인류에게 문화사명(창1:28절)을 명했다. 그 목적은 인류의 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영적, 정신적, 동물적 그리고 물질적 존재로 창조했다. 다시 말해 문화 사명 수행은 종교학, 사회학, 동물학과 자연과학 사이 유기적 협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문화 사명은 창조주의 명에 따르며 창조주의 복주심이 없다면 불가능하다(창1:28절). 인간의 영적 영역이 정신적, 동물적 그리고 물질적 영역의 중심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영역들 사이 분리는 불가능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문화사명(창1:28절) 자체가 이를 잘 증언한다. 이 사명은 내용상 둘로 나뉜다. 첫째, 인류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에 충만에 관련된 하나님의 명령이다. 둘째는 땅과 모든 생물들의 통치와 관련된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은 동물적 그리고 물질적 존재로서 이 세상 즉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다. 전자의 명령은 후자의 명령에 좌우된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학문적으로 전자는 인문사회과학에 그리고 후자는 자연과학에 각각 속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문과(文科)와 이과(理科)의 분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역으로 이 둘이 함께 해야 인류가 문화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학을 과학들과 분리시키는 자세 자체가 처음부터 비성경적이다. 신학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머리는 있는데 수족이 없는 식이 된다. 신학은 모든 과학에 존재의 의미와 목표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통섭적 접근이 요한다. 기독교 신학에서도 마찬 가지다. 조직신학은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과 종말론이라는 각론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런 구분은 없다. 성경 본문에서 이 각론들은 역사와 문화의 배경에 따라 서로 달리 조합되며 통섭적 가르침 즉 제 일의 가르침을 준다. 이 점에서 조직신학의 주제별 가르침들은 사실상 제 이의 가르침들이다. 성경은 통섭적으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은 환원주의에 의거하여 분해하고 쪼갠 후 제 이의 가르침들을 찾는다. 분명한 것은 후자를 가르치는 것이 설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제별 강의와 강연이다. 통섭적 가르침 즉 제 일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바로 설교이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을 다룰 때 신학만으로 부족하다. 신학은 성경 해석을 위한 기초를 제공할 뿐이다. 성경 본문 안에서 신학적 주제들, 즉 제 이의 주제들이 어떤 역사와 문화의 배경 아래 어떻게 문법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연결되는지를 살피고 성경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제 일의 가르침을 찾아내 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사명이다. 당연히 성경도 통섭적 방법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원은 환원주의에 여전히 지배당한다. 성경신학과 교리신학 사이, 신구약 신학 사이, 성경신학과 교리신학과 역사신학과 실천신학 사이 갈등이 보인다. 자신의 신학적 권위만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동일한 성경을 다룬다. 갈등보다 협력이 더 필요하다. 자기 영역을 전공한 후 다른 영역을 넘나드는 그런 통섭적 신학 연구가 필요하다. 인생, 삶, 몸, 역사, 인격, 신앙 그리고 구원 등등은 한 부분이 아니라 많은 다양한 부분들로 구성된 유기체와 같다. 한 분야의 연구나 지식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이 점에서 성경도 같다. 성경은 사람과 사회를 말하기 때문이다. 신학이나 예배만 주장하며 사화과학이나 사회 삶을 무시하는 것은 이미 이원론적이며 이미 비성경적이다. 그러므로 성경 연구에서 통섭적 방법이 요한다. 성경 본문이 내용 면에서 통섭적임을 알고 해석하려는 노력은 참으로 중요하다. 문제는 신학이 다른 학문들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는 유식한 목회자들은 다른 과학들의 도움으로 기독교 신학을 재해석하려 한다. 이것은 신학을 초등학문으로 변환시키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십자가를 중심으로(고전2:2절) 다른 과학들을 재해석해 주는 것이 바로 교회와 목회자의 사명이다. 예수님과 그가 성취한 구원은 인류 역사와 사회에 전반적인 갱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다른 학문들과 과학들을 배우려 함은 그 성향들을 알고 성경의 관점에서 길과 방향을 제시해 주기 위함이다. 독서를 하는 것은 포괄적 안목을 기르기 위함이지 성경 밖에서 설교 자료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통섭적 성경 해석의 의미는 바로 이해되어야 한다.
625 no image |선교단상(마지막회)| 출구 전략_이기종 목사
편집부
2848 2013-05-28
출구 전략 < 이기종 목사 · 합신세계선교회 총무 > “선교지 교회들의 자립과 지도력 이양의 문제 등 정책적 논의 있어야”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범사가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전 3:1,2) 그리고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말할 때가 온다(딤후 4:6). 하던 일을 잠간 멈추고 마칠 때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선교 사역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출구(Exit) 전략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고, 지도자를 임명하였다(행13, 14장). 그리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으로 계속 이동하였다(롬 15:20, 23). 지난해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선교사들에게 출구 전략의 필요성과 방법들을 소개하고 적용을 도왔다. 선교 사역 중에 출구 개념(Exit mindset)을 가지고 방향성 있게 사역한 사람과 그렇지 아니한 사람과의 차이는 나중에 매우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출구 전략에 대한 용어 사용, 개념의 정의, 바람직한 출구 모델의 개발, 세부 적용 방법, 비판적 시각에 대한 대응 등 향후 심도 있게 논의해 나가야 할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논의는 한국 교회의 해외 선교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인 선교 강국이 되려면 몇 만 명의 선교사 파송과 같은 양적 목표 관리보다는 질적 목표와 전략 수립,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지표 개발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선교가 선교지 진입(Entry) 전략에만 관심을 가진 반면 사역을 잘 정리하고 철수하는 것에 대한 출구(Exit) 전략에는 관심이 부족했음을 바로 인식하고 선교지 현지 교회들의 자립과 지도력 이양의 문제, 선교지 재산권 및 선교사의 성경적인 철수에 관한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다뤄야 한다. 20년이 지나도 현지인에게 지도력을 이양하지 않고 담임목사로 사역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먼저 교회는 선교지 출구 계획, 출구 전략이라는 ‘개념 이해’와 아울러 선교지 철수 내지는 출구라는 문제를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할 때 선교사의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과 출구 전략에 대한 전체적 그림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 교회는 선교비 후원과 기도하는 일뿐만 아니라 전략적 선교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교단 선교부, 선교단체와 정보 및 전략을 협의하고 공유해야 한다. 다음으로, 교단 선교부와 선교 단체는 출구 전략을 신임 선교사 훈련 프로그램에 반영해야 한다. 기존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모임이 있을 때마다 이러한 개념을 적극 소개하고 확산해야 한다. 실제로 최근에 열렸던 PMS 지부 모임(인도차이나 K국, 동아시아 X국)에서 출구 전략의 개념을 소개하고, 이해와 적용을 도왔다. 10년 이상 장기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1년 미만의 초임 선교사들도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특히 사역의 진전이 없거나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향후 진로에 대해 막막해 하던 선교사들에게 실제적인 도움과 격려가 되었다. 여러 출구 모델을 가지고 현지 지도자들과 진지하게 나눌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출구 모델을 만들어 본다면 예상치 못한 시점에 철수 요청을 받게 되는 불미스런 사태를 미리 예방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가급적 빨리 철수하기를 바라는 현지 지도자들로부터 때 이른 철수 요청을 받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파송된 지 3개월 미만인 어떤 선교사는 "현지에 도착하여 이제 막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뜬금없이 무슨 출구 전략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개념을 이해한 후 선교사로서의 방향성이 생기게 되었으며, 특히 제시된 여러 모델들을 참고로 해서 자신의 모델을 만들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각 단계(국면)에서 다음 단계(국면)로 넘어갈 때 검토해야 할 요소들이 예시되어 있어 구체적으로 모델을 만들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출구전략 강의를 통해 저도 늘 떠날 채비를 하는 삶을 살겠노라 다짐하게 되었습니다.”<동아시아 X국 H선교사(9년차)의 편지에서> 향후 여러 지역의 선교 현장에서 모범적인 출구 사례들이 많이 나와서 발표되기를 기대해 본다.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624 no image |목회수상| 순종과 저항의 신앙_김병혁 목사 (11)
편집부
3750 2013-05-14
순종과 저항의 신앙 < 김병혁 목사, 솔리데오 글로리아 교회 > “오직 성경에 의해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는 곳에 진정한 저항도 있어” 기독교 신앙을 다른 말로 정의한다면, 순종과 저항의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순종과 저항을 한데 묶는 것을 모순으로 치부하는 이도 있을 법하나, 적어도 기독교 신앙의 범주에서는 이 두 가지는 양립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순종과 저항은 하나의 진리를 표출하는 두 가지 방식의 독특한 양태이다. 특히나 어떤 개인이 종교개혁운동에 참여한다고 할 때에 순종과 저항은 거의 동시에 나타난다. 더구나 이 운동이 진리성과 맞닿아 있을 때에는 순종과 저항은 가장 좋은 신학과 신앙이 낳는 열매의 성격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한다. 생각하여 보라. 복음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믿음을 말하는 곳에 전적인 순종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안팎에 도사리고 있는 거짓 복음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자리에 분별 있는 저항이 없을 수 있겠는가? 진리에 대한 순종은 비진리에 대한 저항을 낳으며, 비진리에 대한 저항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꿈꾼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에 불복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나님의 법과 뜻을 기꺼이 따르고자 한다면, 인간의 부패와 악의 힘과 담대히 맞서 싸워야 한다. 진리 영역에 인간의 절충점을 찾을만한 중간 지대란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기독교 신앙의 이 두 가지 속성이 조화를 이루는 일을 매우 부담스러워할뿐더러 지극히 편향된 관점을 유지하는 회중이 너무나 많다. 이들은 대개 사람과 조직(교회)에 대한 가시적인 순종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순종을 혼동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을 위한 열심이 얼마든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열정으로 비춰질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소망이 간절한 기도로 치환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이러한 일들을 행함에 있어서 성경에 명시된 순종이라는 단어에 대해 저작권이라고 가진 듯 자주, 거침없이 인용하며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디에도 이러한 작태를 허용하거나 타협하지 않는다. 다양한 명분과 이유로 거짓 복음이 좋은 복음으로 쉽사리 둔갑해 버리는 때일수록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성경적인 저항권에 대하여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개혁신앙을 항상 개혁되어가는 신앙이라고 일컬었다. 항상 개혁되어간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압축될 수 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바른 순종을 의미하는 동시에 비진리에 대하여 정당한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성도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정당한 저항권이란 무엇일까? 우선 날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 부정이란 죄된 속성과 관련된 일체의 사고와 의식과 행위를 거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죄에 대하여 날마다 싸우고, 날마다 죽으며, 날마다 슬퍼하는 저항의 삶을 사는 자이다. 그뿐만 아니라 성도는 교회 안에서도 저항권을 발휘해야 한다.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함을 해치거나 간과하려는 어떠한 의도나 행위에 대하여 저항해야 한다. 성경적인 교리를 폐하고 바른 구원의 교리를 왜곡하며, 참된 교회의 표지를 묵살하기 위해 드러난 무지나 은밀한 시도를 저항해야 한다.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선생과 그들의 모든 가르침과 악한 속임을 거절하며 추방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저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고 깨닫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온전하게 추구하는 것보다 더 강한 저항은 없다. 왜냐하면 성도의 저항권은 근원적으로 말씀(진리)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성도의 저항은 육체적, 물리적 저항이 아니다. 힘과 권력을 통한 저항은 더더욱 아니다. 저항을 위한 성도의 유일한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성도의 참된 저항 정신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사상 위에서만 근거를 확보하며, 효력이 창출된다. 성경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저항이 불가하다. 오직 성경 안에서, 오직 성경과 더불어, 오직 성경에 의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서는 곳에 성도의 진정한 저항이 있다. 이러한 저항은 설령 핍박과 고통 가운데 처하거나 주변에 믿음의 동역자가 보이지 않거나 사람들로부터 공인(公認)받지 못하거나 모든 것을 다 잃고 홀로 남는다 할지라도 결코 상실되거나 무효화 되지 않는다. 오직 말씀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자로 홀로 서 있을 수 있다면 말이다. 물론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일이리라.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때에, 말씀에 균형 잡힌 순종과 저항의 신앙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623 no image |목회수상| 엑스트라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_방동섭 목사 (29)
편집부
3511 2013-05-14
엑스트라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 방동섭 목사, Holy Hill Community Church, LA >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 자신을 선전하고 나타내려는 사람들 많아” 마가는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여 세례 요한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막 1:3). 이 말은 세례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이다. 만일 누군가 “당신은 평생 다른 사람의 길을 예비하면서 살아라. 당신은 평생 엑스트라만 하면서 살아라”고 말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겠는가? 누구든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탤런트 전현주씨는 평생소원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한번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분명한 것은 엑스트라가 있어야 주인공도 있다는 것이다. 요즈음 한국교회는 세례 요한이 사라지고 있다. 모두가 스타가 되고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어떤 교회에서 선전하는 부흥회 포스터나 무슨 세미나 전단을 보게 되면, 그 강사가 예수님을 전하겠다는 것인지 자기 자신을 선전하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그에게 나왔다"고 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요단강으로 오는 것은 그 당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 올 때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어 수십 리를 와야하고 돌아가 때는 험준한 산을 올라야 한다. 세례 요한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그 명성이 예루살렘 주류 사회와 온 유대를 뒤흔들고 벌떼 같은 인파를 모으고 있었는가? 그 당시에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에 있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그를 만나고 싶어 했고, 그의 전하는 소리를 듣기 원했으며, 그에게 세례 받기를 원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세례 요한의 인기는 ‘짱’이었다. 아미 당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역사의 변두리 인물이 아니라 주인공처럼 보았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바로 메시야“라고 주장한다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그의 인기는 절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기 절정의 자리에서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엑스트라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막 1:7)고 고백하였다. 이 고백은 그 당시 세례요한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두 가지 면에서 쇼킹한 뉴스였을 것이다. 첫째, "이 엄청난 인파가 따르는 세례 요한이 메시야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메시야란 말인가?" 둘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세례 요한이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면 그가 기다리는 메시야는 도대체 얼마나 위대한 분이라는 말인가?“ 이러한 세례 요한의 고백을 묵상하는 신자라면 너무 통쾌하고 너무 감격스러워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이렇게 통쾌하고 멋지게 높이고 있는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조금만 일이 잘 되도 우리가 나타나고, 조금만 높아져도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우리가 아닌가? 중국 고전에 "지선후(知先後)면 축근도(側近道)라“고 하였다. 무엇이 앞서고 무엇이 뒤에 오는지를 알면, 그 사람은 도에 가까이 이른 사람이라는 뜻이다. 요즈음 신자들 가운데는 앞뒤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아무리 현대가 자기를 알리는 시대라 할지라도 크리스천이 무엇이 앞서고 뒤에 와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더 이상 주님으로 모신 사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주님을 높이기 위해서,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세례 요한은 무엇이 앞에 와야 하고, 무엇이 뒤에 있어야 하는지 철저히 인식하고 살았던 사람이다. 마가는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면서 초두에 세례 요한을 등장시켰다. 왜 그했을까? 마가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 복음의 시작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마가는 복음서 초두에 세례 요한을 등장시켜 복음의 무서운 시작을 알린다. 이스라엘 역사에 세례 요한처럼 엄청난 백성들이 지지하고 따르던 선지자는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자가 없다“(마 11:11)고 하셨다. 세례 요한은 참으로 그렇게 크고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온 유대와 이스라엘을 흥분시키고, 그 엄청난 인파를 모았던 세례 요한이 "자신은 허리를 굽혀 주님의 신들메를 푸는 자격도 안 된다"고 했을 때, 이 고백은 극적인 반전을 가져온다. 마가는 이렇게 극적이고 멋진 반전으로 주님의 복음의 세계를 시작한다. 마가가 증거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그 분 앞에서는 세례 요한의 그 찬란한 명성과 인기도 그렇게 빛을 잃어버리고, 자리를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것이 아무리 위대하고 자랑할 만 할지라도, 우리 주님의 영광 앞에서 그리고 그 능력과 권세 앞에서 철저하게 완전하게 압도당하여 주님만 나타나기를 우리 모두 기도해야 할 것이다.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