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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 no image |제언| ‘70세 정년제’ 이제는 재고할 때다_성희경 목사 (23)
편집부
3549 2013-05-14
‘70세 정년제’ 이제는 재고할 때다 < 성희경 목사, 초원교회 > “정년제의 취지는 살리되 현실적 여건에 따른 적절한 배려 생각해야” 본시 목사의 70세 정년제는 담임 목사에게 휴식의 기회를 주고, 교회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하여 입법된 법이다. 한국교회에 최초로 목사 70세 정년제 도입을 제안한 목사 중에 한 분이신 고(故) 임택진 목사(청량리중앙교회 원로목사)는 자신의 책 ‘장로교회 정치해설’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항존직에 정년을 규정한 것은 시대적 차이와 후배의 양성과 자신의 휴식을 위하고 교회의 보다 더 나은 발전을 위한 것이다”(p. 71). 고 임택진 목사는 목사로서 귀감이 될 만큼 욕심 없이 사신 분이다. 그가 처음에 발의한 원안은 65세였는데 총회가 결의하면서 70세 정년으로 수정하여 채택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발의한 안에 따라 65세에 은퇴하였다. 한국교회의 ‘목사 70세 정년제’의 역사는 근 40여년 된다. 1969년 8월 20일자 경향신문의 기사를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는 오는 9월의 총회를 앞두고 장로교 기본 헌법을 전면 개정, 교회의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개정안을 마련, 마지막 수정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 마련된 개정안은......중략.......목사와 장로의 정년제를 신설하는 등 상당히 파격적인 것으로 알려졌다......중략...... ③목사의 정년을 만 70세로 하고, 장로도 목사와 같이 만 70세로 정년으로 하며, 이하 생략.” 그 이전까지는 정년이 없는 종신제였기에 당시에는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었다. 이후 J. A. Hodge가 쓴 ‘장로교 헌법은 무엇인가’(What is presbyterian law?)를 한국교회 초대 선교사인 곽안련 목사가 번역하였으며, 원저와 번역서를 다시 참조하여 박병진 목사가 이를 ‘교회정치문답조례’(敎會政治問答條例)라는 제명으로 새로 발간했다. 그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임목사> “한 지교회나 1구역(4지교회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된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이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종신토록 시무한다. 위임목사가 본교회를 떠나 1년 이상 결근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위임이 해제된다”(p. 48). 이 종신제가 정년제로 바뀐 것이다. 이때부터 ‘목사 70세 정년제’가 한국교회에 정착된 지도 어언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개인적으로 정년제가 당장 폐지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은퇴 준비가 전혀 안된 시골교회 목회자나 소형교회의 가난한 목회자들을 생각하면 이 법은 수정, 보완될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그들이 당하는 불행을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고 하며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도 아니며 사랑도 아니다. 예장백석의 경우 목사 정년은 만 70세로 당회가 결의한 경우 3년을 연장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2012년 제35회 총회에서 ‘정년제’를 폐지하지 않는 대신 “지교회의 형편상 목사가 시무를 계속해야 할 경우에 정년 후에도 시무는 계속하되, 담임목사직 이외의 노회 및 총회의 공직은 맡을 수 없다”는 절충안(折衷案)을 추가했다.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이 든다. 캐나다, 호주, 미국 등 외국의 개혁교회에서는 현재 정년제를 실시하지 않고 있다. 캐나다 개혁교회 교회질서 ‘제2장 직분과 교리의 감독 제13조’를 보면 이렇다. <제13조 목사의 은퇴> “말씀 사역자가 나이 때문에 혹은 질병이나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무능력으로 인해 자기 직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은퇴한다면, 그는 말씀 사역자의 영예와 직함을 보유해야 한다. 그는 또한 자신이 마지막으로 봉사했던 교회와 결속하여 자기의 직분을 보유하고 이 교회는 그에게 훌륭히 지원을 해 주어야 한다. 목사의 홀로된 아내나 그의 직계 가족들에게도 이런 동일한 의무가 실행되어야 한다. 목사의 은퇴는 확대 당회의 승인과 노회와 지역 총회의 대표들의 일치된 조언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은퇴 목사에 대한 깊은 배려가 인상적이다. 목사에게 있어서 70세란 단지 숫자일 뿐 퇴물로 넘어가는 경계선이 아니다. 노(老) 목사를 존경하고 대접하는 분위기가 아쉽다. 우리 교단이 목사 정년제를 폐지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時機尙早)일 수 있다. 그러나 농어촌 목회자들과 가난한 목회자들을 생각하면 그들을 위한 실제적이고도 적절한 배려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단이 ‘목사 정년제’를 폐지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수정 보완하는 방법으로 얼마든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총회의 몫이다. 나는 우리 교단의 현명한 판단과 처사를 믿는다.
621 no image |제언| 정치, 권징조례에 부치는 글_이병태 목사 (25)
편집부
3689 2013-05-14
정치, 권징조례에 부치는 글 < 이병태 목사, 시드니 나래장로교회 >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모든 사안들을 보살펴 주기를” 어린 아이들에게 칼은 위험한 도구이다. 그렇지만 성장하면서 걸맞게 사용하게 될 때 이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도구가 된다. 교회들 안에서의 정치라고 하는 것도 그런 성격이 다분한 것 같다. 그러기에 이런 핸디캡을 없애기 위해 어느 노회의 규칙에서는 정치부원의 자격을 목사 시무 7년 이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목회의 년 수로나 경력으로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아쉬움이 있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교회에서의 정치와 권징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영혼들로 하여금 진리와 행위로 바르게 인도하되 세상과는 달리 범죄한 자의 영적 유익을 도모할 수 있는 치리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먼저 헌법에서의 권징은 벌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교훈과 교정과 훈련에 주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권징조례안은 마치 세상의 형사법과 같은 느낌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빈틈없는 법 조항으로 사건을 시원하게 속전속결하는 것만이 명수가 아니라 범죄한 자로 하여금 영적 유익을 도모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는 것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지금 총회에 상정되고 있는 권징 조례안이 어떤 인상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사안이다. 그러기에 무조건 상정하여 통과시키기 위한 것에만 목적을 둘 것이 아니라 그 후유증에 대한 우려와 자제도 지혜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정치하는 일은 진리를 수호하고 신앙을 보전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에 이는 필연적이고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과목이다. 그런데 정치에서 아쉬운 부분이라면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할 줄 아는 태도라 하겠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경제적인 부분(보조)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눈치를 봐야 하고 제한을 받다보니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줄서는 문화에 익숙해져 버린 것에 있다. 그 후유증은 미팅에서도 자기의 뜻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라 하겠다. 이러한 결과가 작게는 집단 이기주의를 조장하고 더 나아가서는 교권주의의 발단이 되었다면 이를 어떻게 하겠는가? 그동안 우리교단은 바른 신학을 바탕으로 바른 교회와 생활을 목표로 하여 많은 고난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닌 줄로 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마지막 시대에 해야 할 사명 중에 하나라면 그것은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일은 생각과 마음으로, 그리고 말 한마디에서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단지 두 가지 성구만이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이는 누구든지 부담 없이 내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이 일에 동참할 수 있는 영적운동이기도 하다. 그 하나는 남의 비밀의 누설에 관한 것이고(잠 20:19) 다음은 증거 없는 일에는 함구하고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마 18:15-17). 이는 신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이기도 하다. 더욱이 권징을 시행하는 치리자라면 이런 부분은 당연한 삶의 한 단면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마태가 왜 마태복음 18장 전장을 통해 그렇게도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루었을까를 고민해 본 자라야 하겠다. 이로 인해 영혼의 귀중성과 그 책임감을 가슴으로 느낀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것이 아닌 권좌에서 그런 부분을 시행할 문제로만 보는 자라면, 그래서 정치나 권징을 지식이나 경력으로 가볍게 접근하는 자라면 그보다 더 큰 불행 또한 없을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 정치나 권징에 대한 신중성을 요구하는 이유라면 치리회에서 권징이 시행될 때 하나님은 무엇을 어떻게 하고 계실까 하는 것 때문이다. 교회 안에는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은 사람들도 있기에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17절).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와 동시에 하늘 보좌에서도 그 과정들이 천사들로 하여금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보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10절). 그 결과에 대하여 예수님은 ‘잃은 양의 비유’로 교훈하시기를 “이와같이 작은 자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라”(14절)는 것에 있다. 때문에 비록 무리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는 쉽게 속단하거나 가볍게 처리할 문제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15절). 무엇보다 치리자의 자세는 소외된 자를 처벌하기 이전에 이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심중을 살필 수 있어야 하고, 법을 다루기 이전에 자신도 모든 빚을 탕감 받은 자임을 기억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이미 천사들의 보고를 받으시고 판정을 내리시게 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정치나 권징의 결과에 대하여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7절)고 하셨기 때문에 우려와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다. 이 사실은 과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사에서 남긴 산 교훈들이고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가 보고 듣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마태가 강조하는 잃은 양을 다루는 그 신중성이 우리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를 잡게 될 때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는 안개와 같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620 no image |제언| 스코틀랜드 성찬 사경회 시즌 도입을 제안하며_김재윤 목사 (17)
편집부
3627 2013-04-16
스코틀랜드 성찬 사경회 시즌 도입을 제안하며 < 김재윤 목사. 염창중앙교회 부목사 > “말씀 사경회와 함께 행하는 성찬으로 교회가 누리는 유익 남달라” 필자가 스코틀랜드에서 공부할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찬 시즌에 사경회를 연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성찬을 그저 주일 예배에 같이 행하는데 반하여 그들은 목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성찬식을 포함하여 말씀 잔치를 연다는 것이었다. 이때에는 보통 한 명의 초청 설교자가 전부를 인도하거나, 두 명의 설교자가 초청되어 목요일과 금요일을 담당하고, 다른 설교자가 토요일부터 월요일을 담당한다. 목요일에는 자기 겸비에 대한 주제의 말씀이 전해진다. 회중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겸비하게 된다. 금요일에는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설교가 행해진다. 회중들은 자신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 설교를 듣게 되고, 성찬식을 준비하는 심령을 갖게 된다. 토요일에는 성찬을 준비하는 설교를 듣게 된다.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회중들은 성찬식에 합당한 심령으로 준비하게 된다. 토요일 모임에 참석하여 ‘토큰’을 받은 사람만이 주일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다. 토요일에는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을 당회에서 문답하는 시간을 갖는다. 당회는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신앙이 있는지, 참 회심의 체험이 있는지를 살펴본 후 신앙의 증거가 있을 때에만 세례 받는 것이 허용되고, 거절되는 경우도 있다. 주일에는 성찬식을 겸해 설교가 행해지는데, 성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앞에 앉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뒤에 앉음으로서 구분된다. 설교자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를 행한다. 세례를 받았으나 권징을 받아 수찬 정지를 당한 사람은 절대로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도 주일 예배에는 꼭 참석한다. 그리고 주일 저녁 예배에는 전도 설교가 행해진다. 이때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참여하여 그리스도께로 초청을 받게 된다. 그리고 예배 이후에는 티타임을 가지면서 설교자의 개인적인 간증을 듣는 시간을 갖는데, 이 시간 또한 매우 유익한 시간이다. 성찬식이 행해지는 주일에는 교인들끼리 삼삼오오 떼를 지어 성도들을 자기 가정에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가지면서 서로 은혜를 나눈다. 성찬 시즌 사경회에는 아이들도 참석시켜 성찬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마지막 월요일에는 감사 예배로 드려진다. 성찬 사경회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감사의 주제에 관한 설교가 행해진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매년 두 번의 성찬식이 이러한 방식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장로교의 위대한 유산으로 한국 교회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말 그대로 성찬식을 해치운다. 성찬에 대한 특별한 의미나 중요성을 회중들이 인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성찬 시즌 사경회를 도입하면 특별히 사경회를 또 갖지 않아도 될뿐더러, 말씀과 함께 성찬식을 행함으로써 그 의미가 배가된다. 성찬은 말씀과 기도와 함께 중요한 은혜의 방편인 것을 생각할 때에 이러한 성찬 사경회 도입이 절실히 요청된다 하겠다. 성찬 사경회를 통해 스코틀랜드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다. 또 말씀의 풍성한 잔치가 이루어짐으로 인해 신앙의 회복과 성숙을 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성찬에 적합한 말씀이 전해짐으로서 말미암아 말씀과 함께 성찬을 준비함으로써 성찬식에 참여한 성도들이 큰 유익을 얻게 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러한 성찬 사경회을 도입한다면 개 교회마다 큰 유익이 될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성찬의 참된 중요성과 유익을 일깨울 수 있을 것이며, 성찬 사경회를 통해 교회에 하나님의 크신 말씀의 은혜가 이루어질 것이다.
619 no image |선교단상(29)| 실버인 선교에 대하여 (2)_이기종 목사 (20)
편집부
2607 2013-04-02
실버인 선교에 대하여 <2> < 이기종 목사 · 합신세계선교회총무 > “실버인 선교사들은 젊은 선교사들과의 세대차 극복 위해 노력해야” 지난 번에는 실버인에 의한 선교의 가능성과 장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실버인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현장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깊이 생각하면서 선교동원의 예방 차원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실버 선교를 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전문성(Speciality)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전문성을 갖추지 않은 채 선교를 마치 노후 대책의 방편처럼 생각하고 선교지로 가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참다운 소명과 헌신이 있을 리 만무하다. 실버인 선교에 있어서의 전문성이란 꼭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와 같이 무슨 학위를 가지거나 아주 능통하고 해박해야 하는 고도의 전문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자 하는 선교사역 분야에 필요한 실제적 기술이나 기능과 같은 전문성을 말한다. 나름 현장에서 요구되는 것으로 지속적으로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전문성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이를 고려할 때 새롭게 전문성을 갖추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어떤 실버인 선교사 훈련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오랜 기간 전문 직업에 종사하고 은퇴한 사람이 그 훈련에 참가했는데, 그는 그 직업에 평생을 종사해서 지겨우니 은퇴 후에는 더 이상하기 그 일은 하기 싫다며 다른 것을 하고 싶어서 지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전문성은 무엇일까? 둘째, 언어의 문제이다. 나이가 들어 새로운 언어를 준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타문화권에서 생존조차 힘겹고 타민족과의 소통(Commuication)이 거의 안 될 것이다. 늘 통역을 데리고 다닐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60세가 넘어 선교지에 나온 분이 동역하기를 원해서 언어학원 기초과정에 등록하고 공부토록 권했더니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중단하는 것을 보았다. 셋째, 실버인의 선교는 대부분 자비량 선교를 원칙으로 한다. 물질적 후원을 받지 않게 되면 자칫 독선적이 되기 쉽고 어느 누구도 어려워하지 않게 될 수 있어 선교사의 책무성(Accountablity)이 문제로 될 수 있다. 지도와 돌봄을 받지 않으려 하고 통제를 거부한다. 게다가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다면 그야말로 자기식의 선교를 하기 쉽다. 실버인 선교도 파송 교회와 선교 단체의 행정 지원과 기도 후원을 받으면서 상호 책임하에 사역해야 보다 건강한 선교가 된다. 넷째, 대체적으로 나이가 들면 살아온 경험을 통하여 형성된 자기의 생각과 가치관을 강하게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자신의 의견에 이의를 다는 젊은 선교사를 버릇없다고 생각하여 나무란다든지 갈등을 증폭시키는 일이 종종 있다. 요즘은 일이년 차의 젊은 사람들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고 할 정도로 제반 의식과 현상들이 급변하고 있다. 실버인 선교사들은 이런 점을 감안하여 젊은 선교사들과의 세대차(Generation gap) 극복을 위해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다섯째, 선교를 늦게 시작하여 시간이 없다는 생각으로 조급하게 무리한 방식으로 선교를 하는 경우를 본다. 이슬람지역, 제한 지역에서는 관계 전도를 중요시하며 이를 위해 많은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급한 마음에 통역을 데리고 전도하므로 물의를 빚거나 위험한 상황이 생긴다. 성급하면 일을 그르친다(Haste makes waste). 한 번 문제가 발생하면 다른 선교사들의 사역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섯째, 나이가 들면 고혈압이나 심장 질환 등 건강(Health)으로 인한 문제들이 갑자기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대체로 선교지는 의료 시설이 열악한 경우가 많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자신의 건강 상태를 살펴보고 선교지를 선정하거나, 사역 형태를 결정할 때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끝으로, 실버들이 가진 여러 장·단점을 고려하여 대부분의 실버인 선교사 훈련원이나 선교 단체에서는 그들에게 독자적 사역을 주도케 하는 것 보다는 조력자(Helper)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버인들이 보다 잘 준비되고 훈련되어 좋은 조력자가 된다면 한국인들의 선교 현장이 활성화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618 no image |목회수상| 신명기가 말하는 인류의 역사관_장창수 목사 (30)
편집부
3163 2013-04-02
신명기가 말하는 인류의 역사관 < 장창수 목사 · 총회선교사 > “한국 교회는 복음의 모든 초점을 재림할 예수님에게 맞춰야” 신약 성경의 사복음서들은 신명기와 선지서들의 모든 예언들처럼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음을 기록한다. 사도행전은 그의 승천 후 성령 강림이 있었고(행2장) 그 결과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음도 증명한다. 돌 판이 아닌 마음의 판에 율법이 성령으로 새겨졌기 때문이다(고후3:3). 이처럼 신약성경의 기록이 증거하는 것처럼 신명기의 예언들은 역사상 문자적으로 모두 성취되었다(신30:5-9). 그런데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신명기에서 예언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류나 민족 또는 나라의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신약 시대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만민에게 전해질 것이다(마 28:18-20). 복음 전파에 따라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은 이스라엘이 밟았던 전철에 따라 종교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비슷한 발전 단계를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언젠가 사명을 마친다면 인류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선민 이스라엘이 보인 발전 단계의 흐름과도 연결되며, 하나님의 구속사의 어느 특정 단계에 놓인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우상과 전제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단계(출애굽 이전 단계). 2) 복음 전파로 인해 서서히 출애굽 현상이 일어나는 단계(출애굽 단계). 3)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변화를 위한 내부 투쟁 단계(광야 삶 단계). 4) 가나안땅에서 지도력 부족으로 인한 혼란 단계(사사 시대). 5) 지도력 확립 후 복락의 땅으로 만들어 가는 단계(다윗 시대). 6) 전반적 성장과 발전 후 주변 나라들을 이끄는 단계(솔로몬 시대). 7) 창조주를 버리고 배금주의로 서서히 쇠퇴하는 단계(열왕 시대). 8) 외적의 침략에 의해 쉽게 망할 수 있는 단계(제국의 포로 시대). 그렇다면 한국은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가? 보기에 따라서 둘째와 셋째 단계를 지나 넷째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보여진다. 여전히 무교, 불교 그리고 유교가 강하지만 기독교가 전반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의 지도력 부족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비난도 듣고 있다. 부분적으로 한국 사회는 5단계 또는 6단계에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 사회가 너무나 급속하게 발전한 결과 한국은 모든 면에서 세계 13위권 안에 들어가는 강국이 되었다. 이것은 기적 같은 사실이다. 곧 7단계로 접어들 수 있다는 뜻이다. 반면 미국과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6단계나 마지막 7단계에 속한다. 이들은 이미 쇠퇴기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뉴질랜드 같은 기독교 나라의 국민은 이미 종교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 이들 나라는 언젠가 8단계에 이르러 내부적으로 서서히 무너질 것이다. 이들 8단계의 도움을 받는다면 지상의 교회들은 자신의 민족이 구속사의 어느 단계에 속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에 힘씀으로 나라와 민족을 도울 수 있을까도 알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성경의 순수한 말씀에 입각한 목회와 신앙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는 아직도 다른 종교들과 영적 투쟁을 계속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젠 삶으로 보여진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이들 종교와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인 다원화 시대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가치관으로 살도록 성도들을 격려함으로써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윤리 면에서 훨씬 우월함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신4:6; 마5:16). 말로 하는 복음 전파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한국 교회가 양적 성장보다는 질적 성장에 힘써야 할 이유이다. 그러나 많은 한국의 목회자들은 사사 시대 일부 지파만을 위해 일한 사사들처럼 자신의 교회의 양적 성장만을 위해 진력한다. 예수님의 보편 교회를 위하기보다 지역 교회의 성장에만 진력하는 목회자들. 사사 시대의 사사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혼란한 사사기를 맞은 이스라엘처럼 한민족도 민족 복음화 후 영적 혼란에서 빠져 나올 줄 모르고 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한국 교회가 복음의 모든 초점을 재림할 예수님에게 맞추는 것뿐이다. 구약 시대 사무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회개케 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므로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로 세웠던 것처럼 말이다. 특정 민족의 장래는 민족 교회의 영적 생동감에 달린다. 이 생동감은 다가올 파국을 그 만큼 더 지연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가 바로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따라서 교회나 성도들은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으로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리겠다는 헛된 희망은 버려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구속사를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로 목적 자체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신약 시대의 교회는 구약 교회와 달리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 신앙과 구원을 완성시킬 것이다. 그의 재림은 세계적 그리고 우주적 파멸을 가져올 것이며 그 후 하나님 나라가 완성(consummated)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617 no image |신앙수상| 교단의 ‘하나됨’과 신앙고백의 ‘하나됨’_신재원 집사 (37)
편집부
3818 2013-03-19
교단의 ‘하나됨’과 신앙고백의 ‘하나됨’ < 신재원 집사, 대덕한빛교회, 대덕연구단지 연구원 > “고신이 고백하고 있는 수정된 고백서는 알미니안적 사상 포용하고 있어” 예장 합신과 고신의 교단 통합 논의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원칙적으로 좋은 일이나, 먼저 생각할 것은 두 교단의 신앙고백이 동일하느냐의 문제이다. 흔히 두 교단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하 고백서)라는 동일한 신앙고백을 한다고 오해한다. 지난 2월 7일자 CBS 기사를 보면 “두 교단이 교단통합 논의를 잡음 없이 순조롭게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두 교단 모두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고 있고 동일한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1729년 미국 장로교회는 1647년에 작성된 고백서를 표준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9세기 알미니안 신학의 도전으로 1903년 세 군데 본문 수정과 함께 제34장과 제35장을 추가한 ‘수정된’ 고백서를 채택하게 된다. 원래 고백서는 알미니안주의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작성된 것인데, 오히려 알미니안주의로 인해 고백서가 다시 수정된 셈이다. 현재 예장 합신은 수정되지 아니한 ‘전통적’ 고백서를 받고 있다. 반면 예장 고신은 고백서 본문의 수정안은 거부하면서도 추가된 제34장과 제35장을 교단의 고백서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셈이다. 몇 가지만 간략히 보자. 우선 성령에 관한 제34장은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크게 문제 될 바가 없지만, 전통적 고백서의 여러 부분의 내용을 반복할 뿐이다. 이는 전통적 고백서에서 성령론이 부족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제35장 1항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과 희생을 통하여 은혜언약으로, 버림받은 온 인류에게 충분하고 다 적용되는 생명과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고, 이 구원을 복음으로 만인에게 값없이 주신다”라고 한다. 물론 예수님의 중보사역과 희생은 온 인류가 구원받기에 모자람이 없고 충분하지만(도르트 신조 둘째 교리 3항), 그렇다고 할지라도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구원의 길을 준비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아니다. 예수님의 중보사역과 희생의 효력은 “오직 택자에게만 적용”된다(도르트 신조 둘째 교리 3항). 또한 영어 본문에서 “freely offer this salvation to all men”이라 하였는데, offer는 ‘제안하다’의 의미가 강함에도 번역본에서는 “만인에게 값없이 주신다”라고 함으로써 더더욱 개혁주의 구원관과 멀어졌다 할 수 있다. 이어서 제35조 3항을 보면, 복음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관하여 제2원인으로서 인간의 반응만을 강조하고 있고 제1원인으로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러한 진술은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어떤 행위에 달린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교단의 하나 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신앙고백의 하나임’일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 교단이 받고 있는 신앙고백서의 차이는 분명하고 중요해 보인다. 물론 현재 고신 교단에서 바른 신학을 지향하시는 분들은 고백서에 추가된 내용을 그대로 고백하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단지, 그간의 신앙고백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오래 전에 채택한 고백서를 지금껏 방치한 저간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교리와 신앙고백서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는 지금, 마침 양 교단의 통합이 논의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두 교단 모두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한 입장 정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만일 고신 교단이 합신 교단과 교단 통합 논의를 계속하고자 한다면 먼저 수정된 고백서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합신 교단 역시 신앙고백서의 차이점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제시해야 한다. 양 교단이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차이점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하고 교단 통합을 논의한다는 것은 장로교의 기본 정신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616 no image |제언| 우리가 보존해야 할 신앙의 유산_황희상 청년 (9)
편집부
3006 2013-03-19
우리가 보존해야 할 신앙의 유산 < 황희상 청년, 안산푸른교회, <특강-소요리문답> 저자 >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을 원안대로 보존해야” 우리는 대체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라서 그런지, 그냥 본문만 슬쩍 읽고는 '다 아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요리문답은 '엑기스'입니다. 엑기스를 복용할 때는 성분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드셔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G. I. 윌리엄슨의 소요리문답 해설서를 참고합니다. 척박한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었던 좋은 책입니다. 그런데 이 책을 차근차근 공부하다 보면 제25과에서 제26과로 넘어갈 때 조금 이상한 점이 보입니다. 잘 나가다가 갑자기 2부에 나와야 할 86, 87문답을 여기로 끌어와서 해설합니다. 저자가 이유를 충분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편의상" 그렇게 하겠다고 단원 도입부에 언급한 것을 보면, 적어도 저자가 의도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 체제를 따르면 제31문과 제32문 사이에 제86, 87문답을 배치시켜서, 소위 '구원의 서정'으로 앞 뒤 구색을 갖추려 하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변형하는 것은 혹 윌리엄슨의 실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단원 끝부분 연습문제 제1번에서 '이렇게 순서를 바꿔야 하는 이유가 무어냐'고 독자에게 확인 질문까지 던집니다. 이 확인 문제가 원저자의 책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한국판 출판사나 번역자의 작업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저자의 의도를 추측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소요리문답을 설명하다 보니까 이쯤에서 이제 소위 ‘구원의 서정’을 설명하고 싶었고, 그렇다보니 ‘회심’에 대한 설명을 넣어야 되겠는데 소요리문답에는 그 내용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있는 제86, 87문에 나오는 ‘회개’를 가져다가, 여기에서 미리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방법일까요? 저자가 소요리문답을 해설하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면서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데, 윌리엄슨의 방식대로 한다면 독자는 ‘회심’(convert)과 ‘회개’(repentance)를 혼동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원래 소요리문답은 이 지점에서 회개를 다루지 않습니다. 대요리문답에서도 회개를 효과적인 부르심이나 칭의의 단계에서 설명하지 '않고' 성화와 관련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의로움을 얻는 과정에서 회개를 논리적으로든 시간 순서로든 어떤 '돌이키는' 행동을 강조하려는 것은 본래 소요리문답의 문맥이 의도하는 바가 '아닙니다'. 17세기의 문맥은 우리가 회개를 통해 구원의 절차나 관문을 통과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중보로 받을 유익을 성령을 통해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소요리문답은 시간 순이든 논리 순이든 ‘구원의 서정’을 설명하지 않고 효과적인 부르심에서 끝냅니다. 칭의, 양자됨, 성화는 거기서 비롯되는 유익입니다. 단순합니다. 그리고 대요리문답은 회개를 성화의 영역에서 부연하고 넘어갈 뿐입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2부에 가서야 나옵니다. 우리는 대소요리문답의 문맥을 면밀히 살핌으로써 이 사실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회개도 그렇고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서정이라는 후대의 도식에 17세기 소요리문답의 문맥을 맞추려 하는 것은 일종의 월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소요리문답의 원래 문맥이 더욱 은혜로웠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으면 거기서 이미 상황 종료입니다. 나머지는 다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통해 받는 유익입니다. 칭의도 유익, 회개도 유익, 죽음도 유익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모든 것은 사나 죽으나 다 유익입니다. 그런데 윌리엄슨은 왜 그렇게 설명했을까요? 어쩌면 ‘소요리문답을 얕잡아 본 탓이 아닌가?’라고 조심스레 추측합니다. 누구든 원래의 순서를 바꾼다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17세기의 작성자들이 '제대로' 작업했을 거라고 존중한다면 그 순서를 바꾸려 할 때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도는 아직 우리 시대에는 과분하다고 봅니다. 우리의 선배들이 물려 준 신앙의 유산, 그것도 공교회가 받기로 결의한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우리 시대의 과업일 것입니다.
615 no image |목회수상| 1250℃ 최고의 나를 만나라전상일 목사 (134)
편집부
5365 2013-02-19
1250℃ 최고의 나를 만나라 < 전상일 목사, 석광교회 > “최적의 온도에서 견뎌내야 최고의 자신도 만들 수 있어” 아들을 군(軍)에 보내놓고, ‘행여나 춥지는 않은지’ 인터넷의 날씨를 살펴보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평소 관심도 없었던 최전방(最前方) 고지 철원지역의 날씨를 샅샅이 들춰보면서 말이다. 아들을 전방에 보낸 세상의 모든 부모처럼 우리 부부의 일상대화는 온통 ‘아들 녀석이 힘들지는 않은지, 눈이 오고 추워서 고생하지는 않은지’이다. 그러다가 아들이 첫 외박을 다녀간 후로 기우(杞憂)였음을 깨닫게 되고, 대한민국의 든든한 젊은이로 만들어져 감에 뿌듯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에서 지낼 때 미처 알지 못하던 것들을 터득하고, 선임 병을 통해서 많은 도전을 받으며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는 아들의 말에 괜히 머쓱해지는 듯했다. 어련히 우리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군이라는 용광로에서 잘 연단하시겠는가? 그저 부모 된 마음에 쉽고 편한 것만 생각했으니 아들에게도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아마 우리의 목회나 신앙생활에도 이런 모습이 없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최근에 접하게 된 김범진의 책, 「1250℃ 최고의 나를 만나라」를 통해서 적잖은 도전을 받았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통해서 자기 계발을 독려하기도 하지만, 도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 시대를 통찰하지 못하고 단지 쉽고 편한 길만 찾아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가져다준다.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 때 훌륭한 도자기가 아닌 평범한 질그릇을 만드는 경우, 가마의 온도가 800℃ 내외라고 한다. 하지만 최고의 고가를 자랑하는 고려청자나 이조백자 같은 작품을 만들 때의 온도는 1250℃라는 것이다. 그렇게 뜨거워지면 흙의 밀도는 놀라울 만큼 강하고 단단해지면서, 마침내 유리같은 빛깔을 내고 어느 질그릇과도 견줄 수 없는 매끈매끈한 청자나 백자 같은 명품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어찌, 도자기뿐이겠는가? 우리도 800℃의 안락한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거나 고집하게 되면 볼품없는 질그릇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내 속에 잠재된 최고의 나를 발견할 수가 없고 최고의 나를 만들 수도 없다. 그러나 1250℃의 뜨겁고 버거운 환경이 주어졌을 때 마다하지 않고 거기서 참고, 빚어지는 삶을 살아낸다면 값비싼 고려청자나 백자의 도자기처럼 ‘최고의 나’가 되고 명품(名品)으로 만들어진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렇다. 최적의 온도에서만이 최고의 나를 만들 수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한 가운데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자꾸 되새기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4:8). 우스갯소리라지만, 요즘 파송예배나 신학교에서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라’는 찬송가가 금지곡(?)처럼 되었다고 한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의 목회지 선택이나 교회출석과 봉사영역에서 토기장이의 뜻이 아닌, 진흙의 선택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빗댄 말일 것이다.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말인 것 같다. 머지않아 질 낮은 신학교, 질 낮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질 낮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접하게 된다면, 우리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6장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병이어’라는 기적을 보여주신 주님은 왜 미처 흥분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어둠이 서서히 깔리고 있는 갈릴리 바다 가운데로 그들을 몰아넣으셨을까? 대답은 48절에서 분명한 것 같다. 주님은 멀리서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과정’을 보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평생, ‘오병이어’같은 은혜와 복을 누리는 명품그릇이 될 것인지, 아니면 은혜의 부스러기나 겨우 먹으면서 사는 질 낮은 그릇이 될 것인지를 가늠하셨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다행히 ‘괴로이 노 젓는 과정’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바다 한 가운데서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1250℃의 과정을 견뎌내고 있었던 것이다. 토기장이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인생의 바다 한 가운데에 몰아 넣으셔서 빚으시고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현장은 주어진 교회와 가정, 현실이다. 지금, 한국교계는 여기 저기 사건이 터지고 고난과 음해와 분열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적잖은 미(未)자립교회는 일꾼부족과 재정난으로 뜨거움의 통로를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1250℃의 뜨거움을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후손들 앞에, 질 좋은 명품교회와 명품신학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웬만해서는 견딜 수가 없을 정도이다. 때론 우겨 쌈과 빈정거림을 당하고, 바보가 되는 순간을 여러 차례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800℃에서 머물지 말자. 볼품없는 질그릇은 시장바닥 어디가나 쉽게 찾을 수가 있다. 토기장이가 쓰실 명품 도자기가 되려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두려워말고, 1250℃에게 나를 맡겨야 한다. 반드시 주님과 이 시대가 요구하는 ’최고의 나‘가 되어 질 것이다. 지금 우리의 환경은 족히 1000‘C는 넘어 점점 온도가 올라가고 있다. 점점 목회하기 힘들고, 의를 위해 살기 힘들 정도로 뜨거움이 도처에 있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고난과 환경의 온도가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토기장이 되신 주님의 손길이 더욱 더 세밀해지고 분주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어진 곳에서 최고의 나를 만나라!
614 no image |선교단상(28)실버 선교에 대하여(1)_이기종 총무 (12)
편집부
2525 2013-02-19
실버 선교에 대하여(1) < 이기종 목사 · 합신세계선교회 총무 > “실버 사역자는 피스메이커 역할 할 수 있어” 1992년 3월 일본에서 열린 '실버 서비스 박람회'를 참관하고 국내에 돌아와 잠실종합체육관에서 「92 실버 페스티발」이라는 행사를 주관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5.2%(약 227만 명) 수준이었으니 노인 문제와 노후 대책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은 매우 낮았다. 그 후 2000년에 65세 이상 비율이 7%를 넘어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고, 2012년에는 그 비율이 11.8%(589만)에 이르렀다. 2018년에는 노인 인구 비율이 14.3%에 이르게 되어 바야흐로 '고령 사회'에 진입할 예정이다. 평균 수명이 계속 늘어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65세 이상 인구가 7%를 넘으면 '고령화 사회', 14%를 넘으면 '고령 사회', 20%를 넘으면 '초고령 사회'라고 한다. 일본은 이미 2005년에 '초고령 사회'에 진입하였다. 평균 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조기 또는 정년 은퇴자들은 길어진 노후를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최근 선교계의 여러 변화들 가운데 하나는 은퇴자 문제와 관련하여 실버 선교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영향의 하나로 해외로 파송되는 선교사들의 연령이 점점 높아지는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활동을 시작한 '시니어 선교 한국'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 잠재해 있는 다양한 인적 자원인 시니어 세대(40-80)를 일으켜 선교 전문 인력으로 동원 육성하여 총체적 선교 사역의 활로를 개척, 지원하는 지상 명령의 남은 과업을 이루어 간다." 남은 인생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를 위해 살겠노라 결단하고 필요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후 일정 기간, 일정 분야에서 헌신하는 것은 매우 귀하고 보람된 일이다. 미주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버선교회, 실버선교훈련원, 실버단기학교 등이 개설되어 운영 중이며, 많은 수의 실버선교사들을 배출하고 있다. 실버 선교에 거는 기대와 장점이 큰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실버선교 동원가들에 의해 많이 알려지고 있다. 은퇴자들 중에는 지식, 경험, 기술, 전문성이 풍부하고 시간이나 재정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 기후나 풍토가 다른 선교지에서 충분히 견뎌낼 만한 건강이 있고 언어가 이미 준비된 사람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신앙과 인격이 성숙한 사람들도 있다. 젊은 선교사들은 자녀 교육방법과 자녀교육비 문제 때문에 선교사역의 방향과 형태가 바뀔 수도 있는데, 은퇴자들의 경우에는 대부분이 자녀교육 문제에서 자유롭다. 교회나 사회에서 지도력을 이미 연마했으므로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격려하며 피스메이커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연륜에 걸맞게 신앙생활과 삶의 노하우가 풍성한 사람도 많다. 분석력과 통합력이 뛰어나기도 하다. 폭넓은 인맥을 통하여 선교재정 동원력이 있는 사람도 있다. 젊은 선교사 보다 오히려 실버 선교사가 더 필요한 지역, 필요한 분야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인생의 후반전에서 맘껏 활용하는 것은 큰 복이다. 그들을 잘 동원하고 훈련시켜 적재적소에 배치한다면 중 단기 헌신을 통해 21세기 세계선교의 남은 과업 성취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613 no image |제언| 오늘날 교회 안에 세습이 있는가?_김수흥 목사 (13)
편집부
2568 2013-02-19
오늘날 교회 안에 세습이 있는가? < 김수흥 목사, 합신 초빙교수 > “정당한 투표 거쳐 목회자 선정하는 것은 세속적 세습과 달라” 모 기독교 방송국의 대담 프로그램에서는 목사 아들이 교회의 후임이 되는 것을 성폭행 정도로 몰고 가는 것을 보았다. 과연 교회 안에 세습이 있는가? ‘세습’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신분, 직위, 재산 등을 대(代)를 이어 물려주거나 받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자세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으니 부득이 현세의 세습을 들어 잠시 말씀하는 수밖에 없다. 북한의 세습과 교회의 소위 세습을 비교할 수 있는가? 기업의 세습과 교회의 소위 세습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일까? 토지를 자손들에게 물려주고, 혹은 개인이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일과 교회의 소위 세습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도무지 불가한 일이다. 오늘날 그런 것들을 가져다가 교회의 소위 세습을 비교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잘못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런 것들은 말 그대로 세습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실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교회의 일들을 비판하는 것 자체가 세속주의라는 것이다. 교회의 소위 세습은 전혀 다른 것으로 세습이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지금 세습이 없는 것이다. 없는 사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교회의 소위 세습이라는 것이 세습이 아닌 이유는 너무 뻔하다. 담임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투표라는 과정을 거쳐야 된다. 투표를 해도 3분의 2이상의 찬표를 받아야 한다. 참으로 통과하기 힘든 수치(數値)이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는 일반 국민들의 투표를 거치지 않았다. 소위 인민 대회에서 하는 투표는 총부리 앞에서 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기업 세습, 땅 세습, 재산 세습들은 투표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물려준다. 그거야 말로 세습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반드시 선거를 거쳐야 하니 어찌 세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들의 경우 대대로 세습을 했다. 그것은 죄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구약 시대와 달리 선거를 한다. 사도를 보선하는 일도 배수 공천을 하여 기도하고 한 사람을 뽑았다(행 1:15-26). 오늘날 교회에서도 후임 목사를 뽑는 일에는 배수 이상이 공천되고 있다. 한 사람을 뽑는데 이력서가 30-40통씩, 때로는 40-50통씩 들어온다. 목사 아들도 그 여럿 중에 하나에 들게 해야 한다. 목사 아들이라고 해서 아예 후임 물망에도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거나 이력서도 내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력서를 내게 해야 하고 또 후보군에 넣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3분의 2의 투표를 받게 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목사 아들이 역차별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혹시 목사 아들이 더 우수할 때는 목사 아들을 후임으로 정할 수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목사 아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수할 수도 있다. 성장 과정에서 목사 가정에서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더 우수할 수 있는 것이다. 우수해서 뽑혔다면 그것을 세습이라는 이름으로 정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추천 과정이나 선거 과정에서 부친 목사의 정치적인 간섭이나 압력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엄연한 범죄이다. 또 교인들도 동정으로 표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전임자를 동정한다든지 목사 아들을 동정하는 일은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생각할 때 큰 죄악이다. 모든 일을 바르게 해야 한다. 소위 교회 세습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 목사 아들들이 잘못된 법 적용으로 역차별을 당하게 해서도 안 되고, 또 한편 부친 목사가 아들 목사를 교회에 억지로 드려놓기 위하여 부당한 압력을 행사해서도 안 될 것이며, 또 교인들은 부친 목사나 아들 목사를 동정하다가 교회에 두고두고 상처가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몸(행 20:28)이니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가 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불행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612 no image |신앙수상| 신학과 신앙이 일치되는 삶_전두표 청년 (20)
편집부
2818 2013-02-19
신학과 신앙이 일치되는 삶 < 전두표 청년, 시광교회 >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 통해 바른 신학과 말씀 동시에 배워” 필자 주위에는 여러 신학 교수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신학생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모두 바른 신학을 추구한다. 바른 신학이라 자부하는 ‘개혁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주위에 꽤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학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종종 몇몇 분들에게서 아쉬운 모습을 발견 할 때가 있다. 추구하는 신학은 바른데 행동은 바르지 못한 이들을 이따금 보게 된다는 것이다. 바른 신학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듣기 거북한 독설을 퍼붓는 이들이 있다. 다른 이들에게 예의 없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신학은 바른 삶을 요구하는데 왜 그들의 행동은 그리 바르게 보이지 않는 걸까? 아무리 말 자체는 바르다고 할지라도 비속어를 사용하거나 비꼬는 태도를 보인다면 누구라도 그것을 바른 행동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바른 행동’에 대한 정의가 필요할 듯하다. 필자가 말하는 ‘바른 행동’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는 예수님의 성품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드러나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래서인지 신학은 직분과 역할에 상관없이 믿는 모든 신자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성품이 변화되는 것과는 다르다. 오직 말씀만이 신자를 변화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은 말씀을 먹어야 한다. 물론 바른 신학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방식을 가르쳐 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른 신학을 견지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흔히들 신학은 특정한 사람들만이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모든 신자는 신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신학은 좁게 말하면 말씀을 분별하는 작업이다.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다. 따라서 신자라면 누구나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 말씀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신학생들을 차치하고 교회의 회원들이 평소 신학을 공부하기에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배우는 것이다.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은 말씀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것은 신자가 말씀을 바르게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참고서이다.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잘 공부하면 성경의 구조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그 내용을 면밀히 이해할 수 있다.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에는 바른 신학이 담겨 있다.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은 신학 작업의 산물이다. 그것은 여러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머리를 맞대어 말씀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특히 바른 신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성경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체계화한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의미에서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 그 자체를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것을 공부하면 바른 신학과 말씀을 동시에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을 공부함으로써 신자들은 삶에서, 신앙생활에서 풍성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은 바른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공부하면 신자들은 신학과 말씀을 함께 얻게 될 것이다. 이는 곧 신자들이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신학과 말씀을 공유하는 삶이 될 것이다.
611 no image |초대시| 눈이 오는 봄골목_조심연 목사 (20)
편집부
2722 2013-02-05
610 no image |신앙수상| 생각을 바꾸면 믿음이 보입니다_오영원 목사 (93)
편집부
6241 2013-02-05
생각을 바꾸면 믿음이 보입니다 < 오영원 목사, 전주산들교회 >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신 참 생명의 본질” 리처드 버크의 저서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all)은 1970년에 출간되어 40개 나라말로 번역이 되어 4,000만부가 팔린 유명한 소설입니다. 그 책에 “너는 네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 너의 진정한 자아가 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 거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아무것도 너의 길을 방해 할 수 없어, 그것은 위대한 갈매기의 법칙이야, 바로 존재하는 법칙이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매이지 않는 자유, 꿈을 향해 스스로 날 수 있는 자유, 존재의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말은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갈매기 조나단은 특별한 갈매기입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선창가를 기웃거리며 먹이를 탐내는 시간 홀로 더 멀리, 더 높이 나는 법을 연습합니다. 조나단에게 나는 것이란 존재의 의미, 자유의지, 해방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과 만물과 사람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변화가 두려워 익숙한 것만 찾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생각이 멈추어 있는, 그러한 정신을 각성시키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입니다. 불필요한 것은 버리고, 내려놓고, 매이는 것이 없어야 마음에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것에 매여 있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입니다. 영혼(마음)이 자유 할 때 창의성이 살아나고, 삶이 활기를 찾으며, 매이는 것에서 자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인생의 의미, 삶의 의미를 알게 되고,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삶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은 선택의 순간순간들과 마주하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 선택은 인간들의 자유입니다.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들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에 도덕적, 지적 능력이 없으면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행복과 불행으로 갈라놓는 선택에서 잘못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택에는 책임도 따르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믿음)은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최상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이 최상의 선택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 선물이 믿음입니다. 현대는 너무도 어지러운 시대입니다. 옛날과 달리 모든 면에서 세분화되어 사람들을 더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어렵고, 피곤하고, 고달픈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더욱이 선택의 최상의 것을 물질과 연결시킴으로써 인간의 사고가 편협 되고 단편적이 되면서 창의성을 잃어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인간들이 어렵고 피곤한 것은 물질적 빈곤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질이 없어서,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이렇게 강퍅하고, 짜증나고, 고달프고,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그 선택의 시점에서 잘못이 게재되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이해관계와 상황적 선택에서 잘못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물질로 얽히면 결말이 좋지 않을 때가 있으며, 사랑으로 얽히면 항상 좋은 관계가 유지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잘못된 선택을 깨닫지 못하고, 그 잘못 된 선택에서 오는 폐해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은 책임도 따른다”고 합니다. 환경이 좋고, 지식이 있고, 숙련된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삶의 태도와 자세”, “가치관의 차이”에 있습니다. 같은 환경,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직업, 같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의 삶의 태도와 인생관 그리고 마음의 자세에서 행과 불행으로 갈라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요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억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 의욕도 없이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운명이다, 팔자다 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불행을 만들고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거기에 불행이 있습니다. 이를 깨닫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기도와 말씀의 묵상은 인생의 가치와 삶의 질을 높여주며 창의력으로 살아가게 하는 고차원적인 삶의 원천입니다. 그런 사람은 인생을 죽지 못해 사는 방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이 복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신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신 참 자유하신 생명의 본질이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자들이라면 참자유인으로서 자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609 no image |제언| 교단교육의 희망이 보인다_정봉채 목사 (20)
편집부
3342 2013-02-05
교단교육의 희망이 보인다 < 정봉채 목사, 새하늘교회, 총회교육부 서기 > “미래의 주역들 키우기 위해 총회교육부를 교육국으로 승격해야” 주일학교가 죽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학교 교육이 위기라고 걱정이 많다. 이 말은 엄살이 아니라 실제가 그렇다. 주일학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영국교회 주일학교는 이미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미국의 경우 기독교 교육학자 존 웨스터호프 3세(John H. Westerhoff III)는 미국의 주일학교는 죽었다고 사망 선언을 한 바가 있다. 한국교회의 주일학교 교육도 갈수록 침체되고 있으며 실제로 주일학교 모이는 수에서 현격한 감소세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한 기독교교육 연구소의 특정 교단을 중심으로 한 실태조사에 의하면 지난 1990년부터 7년 사이에 매년 평균 5-7% 교회학교 모이는 수에 감소가 이어져왔으며, 심한 경우 9%씩 감소한 지역도 있다. 심지어 농어촌 교회의 주일학교는 거의 문을 닫을 판이 되었다고 했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급격한 출산율의 저하와 거의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의 치열한 입시경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원인은 주일학교 교육의 발전이 세상의 일반 교육에 비하여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교육은 갈수록 발전하고 전문성을 더해가고 있는데 반해 주일학교는 여전히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미래 인재 연구소 최윤식 소장은 “1987년 개신교 주일학생 학생 수는 전체 개신교 교인의 거의 50%에 육박하는 수였지만 현재는 27% 이하로 줄어들어 급속한 붕괴속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하면서 차세대 복음화가 위기 상태에 있음을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금년 들어 총회교육부에서는 주일학교 부흥을 위하여 4개 지역을 순회하며 교육 세미나를 가졌다. 처음 개최된 세미나여서 몇 가지 미숙한 점이 있었고 전국을 4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한 장소에서 하다 보니 거리가 멀어 참여하지 못한 교회가 많았다. 하지만 교단 교육의 희망을 볼 수 있었던 매우 의미 있는 모임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강사들의 열띤 강의와 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한 마디 한 마디를 집중하여 경청하는 지도자들과 교사들의 모습에서 주일학교의 희망을 보았다. 이번 세미나를 결산하면서 우리 교단 교육의 발전을 위하여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투자를 해야 한다. 교육의 투자는 미래 우리 교단을 위한 초석이기 때문이다. 주일학교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장기적인 대안은 교육을 위한 투자에 있다. 교단이 어려워도 교육비는 아끼지 말아야 한다. 미국 유명 경영학자 톰 피터스(Peters)는 “경영 실적이 좋으면 교육에 2배를 투자해라. 경영 실적이 좋지 않고 어려우면 교육에 4배로 투자를 늘려라"고 했다. 영국의 금융회사 로이드TSB그룹(Lloyds TSB Group)과 HSBC는 이 말을 그대로 실천했다. 그래서 이 회사들은 경기 침체 때 오히려 직원 교육과 훈련 투자비를 더 늘렸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를 감지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한 기업들은 결국 위기를 성공으로 바꿨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단의 가장 큰 자랑은 선교에 대한 헌신과 열정이라고 말한다. 우리 교단이 한국 선교의 지평을 열었듯이 주일학교 교육이 앞서기 위해서 선교 못지않게 교육에 대한 열정과 투자가 필요하다.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교육의 실행 방안을 연구 개발하여 보급 전파할 수 있도록, 모든 교회 교사 훈련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재정 지원이 확대 되어야 한다. 교단 모든 교회가 적극 지원하고 협력해야 한다. 교단 교육의 발전은 교단 교회의 관심과 협력이 없이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총회 모든 교회가 솔선수범하여 교단 교재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 교재를 우리 교단 교회들이 존중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교재가 발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전문가를 길러야 한다. 교육 전문가를 전략적으로 키워야 한다. 각 교회에서 사역할 교육 전문 목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합신에서부터 일찍이 교육전문가를 길러야 한다. 신학교에서부터 목회자 선교사를 키우듯이 교육 목회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 합신과 총회교육부가 함께 미래 교육을 고민하고 의논하며 머리를 맞대고 교재를 만들고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계발하여 교단 교육의 미래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리고 교단 교회도 이제는 교육 전문 목사를 교육 전체 담당자와 부서별 교육 담당자로 청빙하고 사역을 하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교회교육의 상황은 30-40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 교육 비전문가인 교육전도사에게 교육을 맡겨 두고 교육이 발전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작은 교회 형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해도, 총회교육부 내에라도 교육 전문 목회자들을 두어 노회 강습회와 각 교회 교육을 지도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 오늘의 기독교 교육의 문제는 교육목사들의 빈곤, 전문 정책 입안자들의 부재, 개 교회 내에 교육 전문가들의 부재, 즉 한마디로 전문 인력 부재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대내외적으로 주일학교가 맞고 있는 문제들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한 것들임에도 이를 대처해 나갈 전문 인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빈곤한 것이다. 우리 교단이 하루 빨리 적극적으로 교육 전문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셋째, 총회교육부를 교육국으로 승격시켜야 한다. 이미 교육에 앞서가는 몇 교단들은 미래 교육을 위하여 교육국으로 승격시켜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다. 교육국이 절대 필요한 것은 일 년 내내 노회와 교회를 순회하며 교사 훈련을 도와주어야 하고, 좋은 교재와 자료를 개발하여 각 교회별로 사용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주일학교 교육은 갓 태어난 갓난아이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청년, 장년 그리고 지금은 실버들을 위 한 교육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총회교육부가 교육 담당자들을 재훈련시키고 목회자와 사모, 그리고 교회 직분자들을 끊임없이 훈련시켜야 할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의 교육부 체제로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번에 교육 담당자와 교사들을 위한 세미나를 통해 미래 우리 교단의 교육의 희망을 보았다. 우리 교단 교회만이라도 성경을 바로 가르치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바로 가르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대안이요 해답이다. 아무리 오늘 우리 주일학교 교육환경이 어렵고 힘들다 해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미래의 주역들을 키워야 하는 거룩한 사명이 있다. 그 사명을 함께 감당하여 교단 내 주일학교가 왕성하게 세워져가기를 소원한다.
608 no image |목회수상| 우공이산 (愚公移山)_장석진 목사 (62)
편집부
3074 2013-02-05
우공이산 (愚公移山) < 장석진 목사, 광주월산교회 > “불경기의 강풍에서도 도전과 응전의 새역사 만들어가기를” 우공이산(愚公移山)은 고대 중국 우화로서 한 노인이 자기 집 앞을 가로막은 산을 옮기려고 시도하자 어리석은 자로 불리게 된 내용이다. 노인은 인내심을 갖고 매일매일 굳은 결심으로 조금씩 파므로 결국 산을 옮겼다는 것이다.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서 볼 수 있는 우공이산(愚公移山) 고사는 특히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이 즐겨 사용하면서 중국의 공산혁명의 완수 과정에 초석(礎石)처럼 사용되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고사성어는 중국인 특유의 민족성을 엿볼 수 있다. 우공이산은 지나치리만큼 여유와 통이 크다고도 할 수 있는 중국인들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의지를 굳게 다지면서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새해를 맞아 새 일을 새롭게 시작한다면 우공(愚公)이 산을 옮기는 우직함과 같은 노력을 기울이라. 무엇인가 통과해야할 과업을 안고 있다면 우공이산의 과정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사회적 병폐는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노리는 현대인들의 병리 현상이다. 어떤 일이든 간에 우직하게 꾸준히 끝까지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요행을 바라고 자신밖에 모르는 사회적 병폐를 치료하게 해 줄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라는 책에서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다”라고 말했다. 이 시대는 우공이산의 금강심(金剛心)으로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쓴 사람들이 수없이 존재했었다. 윈도우즈의 역사를 보면 도스(MS-Dos)에서 윈도 1.0, 2.0, 3.0, 95, 98, ME, XP, Vista, 7에서 8로 거듭해서 진보하면서 이제는 터치기반의 윈도 8이 발매되어 태블릿(tablet) PC의 새로운 응전역사의 시대를 맞았다. 어머니의 손길처럼 너무나 촉감이 좋은 태블릿 PC를 사용할 때마다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의 마음과 손길이 계시기에 어떠한 난관이 닥쳐도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만들 용기를 갖는다. 인생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이다. 내가 인생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그건 실패를 통해서였다. 고난과 역경의 거센 파고(波高)를 헤쳐 나가는 끝없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였다. 성경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고 말씀한다(잠 24:16). 인류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 중에서 고난을 당하여 넘어지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다. 존 번연은 전도했다는 이유로 12년 동안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 위대한 ‘천로역정’이라는 신앙지침서를 집필했다. 불경기의 강풍에도 자라나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마음으로 도전과 응전의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분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607 no image |목회단상| 애통하는 자만이 누리는 위로_노천상 목사 (11)
편집부
3243 2013-02-05
애통하는 자만이 누리는 위로 < 노천상 목사, 예림교회, 기독교세계관학교 교장 >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과 위로 누리는 신자 되어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적인 의미의 애통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전혀 복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자연적인 슬픔에 가득 찬 사람이 아니다. 또는 병적으로 슬픔에 젖어 있는 사람도 아니다. 나아가 병적으로 침울한 사람도 아니다. 산상수훈은 모두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영적인 자세를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 애통은 영적인 애통을 말한다. 이 애통은 죄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통해 영적인 무력감과 절망적인 현실을 바라봄으로 인한 애통인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랴!”(롬 7:24)와 같은 부르짖음과 같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보면서 너무나 큰 충격과 비탄에 빠져서 고통 중에 부르짖는 사람, 그 사람이 애통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체험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온 사람들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비추시면 우리의 죄악과 파탄의 상태를 깨닫게 되고, 냉랭하고 돌같은 마음이 부셔지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 애통하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감사함으로 영접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죄에 대해 아무리 많이 슬퍼하거나 애통하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다. 오히려 죄에 대한 깊은 가르침과 기쁨에 대한 진정한 이해, 이 두 가지가 합력하여 이처럼 애통하며 동시에 위로를 받는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위로’란 무엇인가? 죄용서의 기쁨과 양심의 자유와 안식과 평강이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리에서 하나님과 화목되고 연합된 기쁨, 하나님의 영광의 복에 참여하는 기쁨이다. 이것이 진정한 위로이다(사 66:2; 66:1-3; 시 30:5, 11; 126:5-6). 세상의 자원으로 스스로 위로를 찾는 자들은 결코 이 위로를 경험할 수 없다. 도리어 허무와 절망과 영원한 멸망 밖에는 그들을 만나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애통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현세에서 이 위로를 누릴 뿐만 아니라,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완벽한 위로를 누리게 될 것을 소망하면 살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한 사람이지만, 진지하고 강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모든 행사를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영적인 시각으로 자신과 사회에 만연한 죄와 죄의 영향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진지하고 엄숙하면서도 기쁨과 위로를 누리는 사람이다. 그는 위엄 있고 침착하면서도 절대로 냉정하거나 냉소적이거나 부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닮아서 죄를 미워하고 세상의 죄에 대해서 탄식하면서도 ‘그 앞에 올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십자가와 조롱받는 것까지도 피하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는 사람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다. 늘 진지하면서도 늘 행복한 사람이다. 거룩한 기쁨과 위로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애통하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인이다.
606 no image |목회단상| 무엇이 복(福)인가_김수흥 목사 (114)
편집부
3769 2013-01-22
무엇이 복(福)인가 < 김수흥 목사, 합신 초빙교수 > “성령 충만한 삶이란 끊임없이 예수님의 지배와 인도를 받는 것” ‘무엇이 복(福)인가’를 두고 많은 정의(definition)가 있다. '평안하고 만족한 상태와 그에 따른 기쁨'이 복이라고도 하고, 혹은 '좋은 운수'(good fortune)를 복이라고도 한다. 유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복의 정의를 보면 첫째, 오래 사는 것, 둘째,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 셋째,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 넷째, 도덕 지키기를 낙으로 삼는 것, 다섯째, 자기 명(length of life)대로 살다가 평안하게 죽는 것을 복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가정 식구들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면 복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요즈음 새로 탄생한 새 정부에서는 행복추구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국민들의 행복을 추구하느라 야단이다. 그렇다면 경제적인 여유를 추구하고, 건강을 추구하며, 또 마음의 평안만 추구한다고 해서 참으로 복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요즘 많은 사람들이 경제의 여유를 추구하고, 건강을 추구하며, 또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느라 애써도 잘되지 않으며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그런 것들만을 추구한다고 해서 복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분명히 다음의 두 가지를 반드시 추구해야 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 것이다. 첫째, 죄를 해결 받은 새 인격으로 태어나야 한다.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를 살피면 인류는 온통 죄를 겹겹이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사탄이 유혹하여 아담과 하와가 죄를 저지른 사건이 나오고(창 3:1-7), 그들의 첫 아들 가인이 동생을 살해하고 심판받는 일이 나오며(창 4:1-15), 홍수 이전의 인간들이 죄를 짓는 죄악상이 나타나고(창 6:1-8), 노아가 술을 마시고 크게 실수하는 장면이 나온다(창 9:18-29). 그리고 인류는 드디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을 쌓다가 사방에 흩어져 버리는 불행한 사건이 나타난다(창 11:1-9). 인류는 시조(始祖)부터 지은 모든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절대로 복이 없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하나님은 이 땅에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실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시고(창 3:15; 신 18:15; 사 53장), 실제로 유대 땅에 메시아를 보내셔서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나아갈 때에 그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죄를 사하셨다(마 9:2; 눅 7:48).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사함 받고 대신 의(義)를 얻어 의인이 되게 하셨다(롬 3:25-26). 이야말로 엄청난 복이다! 둘째, 성령 충만한 삶이 복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엄청난 복이지만 문제는 가끔 죄를 짓는다는 것이 문제이다(출 15:22-24; 마 16:21-23).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지배와 인도(이것이 성령의 충만이다)를 끊임없이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계속해서 구하면 참으로 복된 삶을 살게 된다. 성령 충만을 간구하면 우리는 즉시 성령 충만의 열매를 맺어 흡족하게 된다. 갈 5:22-23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증언한다. 사람들은 보통 열매라고 하면 오래 있다가 맺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식물의 열매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식물은 적어도 몇 개월이 지나야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즉시 열매를 맺으신다. 우리가 때로는 30분이나 혹은 1시간만 성령 충만을 간구해도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서 열매를 맺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에게 희생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 충만을 간구할 때 "희락"으로 가득하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거룩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살전 1:6). 우리에게 거룩한 기쁨이 있을 때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게 되고 또한 신앙이 건전하게 성장하게 되며 육신도 건강에 이른다. 또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간구할 때 "화평"의 열매를 맺게 된다. 다시 말해 성령 충만을 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되어 상호간에 화목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서로 화목을 힘씀으로 화평하게 되고(마 5:24-26), 서로 용납함으로 화평이 이루어진다(엡 4:2-3). 성령 충만을 구할 때 "오래 참음"에 이르게 된다. 성령 충만을 구할 때 사람들이 행하는 불의한 일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심판해 주실 것을 믿으며 오래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 충만을 구할 때 남을 향한 "자비"(눅 6:35; 고후 6:6; 딛 3:4-7)와 "양선" 즉 '자선행위'를 하게 된다(롬 15:14; 엡 5:9; 살후 1:11). 우리가 성령 충만을 간구할 때 "충성" 다시 말해 ‘사람에 대한 신실한 마음’(faithfulness)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구할 때 우리는 온유한 마음을 얻게 되고 절제하는 마음을 얻게 된다. 우리는 매일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시 1:1-3; 요 15:3), 또 성령 충만을 구하여 매일 좋은 열매들을 맺으며 만족한 삶을 살고 또 성령님이 주시는 경제도 받아서 세인들이 생각할 수도 없고, 꿈도 꿀 수 없는 복된 삶, 만족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605 no image |목회수상| 밟히며 살아나는 잡초의 생명력_박종훈 목사 (12)
편집부
3032 2013-01-08
밟히며 살아나는 잡초의 생명력 < 박종훈 목사, 궁산교회 > “신자라면 짓밟힘 속에서도 경건의 후손을 남기며 생명력 이어가야” 필자가 사는 마을 뒤에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전주(全州)) 이(李)씨 문중(門中) 묘들이 윗 선대 순(順)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일 년에 한두 번 벌초하는 조건으로 그 묘에 딸린 밭을 선친의 뒤를 이어 경작하고 있다. 늘 분주한 가운데서도 운동과 묵상(默想)을 위해 묘사이로 난 산책길을 자주 올라 다닌다. 풀들이 힘차게 자라나는 초봄이 지나면서는 우거진 풀 때문에 다니는 길로만 가게 된다. 멀리서 바라보면 길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넓은 묘 잔디에 갖가지 잡초들이 섞여서 자라는 중에 유독 길에만 싹을 틔우는 잡초가 눈에 들어왔다. 일반적으로 사람 발길이 잦아 밟히는 곳에는 잡초라도 힘을 쓰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런데 분명히 자주 밟고 다니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았다. 또 밟지 않는 곳에서는 그 잡초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원래 씨앗은 그 주위에서 고루 퍼지며 자라기 때문에 하나를 발견하면 분명히 주위에 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그 잡초는 길에만 있었다. 이 잡초는 ‘그렁’이라는 이름으로, 잡초 중에서도 아주 강한 ‘강해초’(强害草)로 분류되는 식물이다. 필자가 어린 시절 동네 뒷동산에서 놀잇감으로 사용했던 친근한 잡초이기도 하다. 그 위로 더 올라가면 숲 속 산책길이 나온다. 그 길에는 또 다른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질기고 질겨서 ‘질경이’라 부르는 나물이 발길 닿는 곳에서만 자라고 있었다. 흔히 잡초하면 동물에게 밟혀도 악착같이 살아난다는 관념(觀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식물은 발아(發芽) 자체도 밟아야만 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나온다. 이것은 일반적인 현상이고 잡초들은 다름을 알게 되었다. 잡초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근성(根性)과 닮은 점이 많음을 느낀다. 반만년의 역사 가운데 외세의 침략으로 국토와 민중이 잡초처럼 짓밟힘 당한 것이 무려 960회라고 한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살아나서 지금처럼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가 되었다. 영웅은 난세에 난다는 말이 있듯이 평화의 시대보다는 국난(國難)의 시기에 많은 위인들이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밟아야만 새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잡초처럼. 이 자연의 원리는 우리 민족의 역사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이기도 하다. 로마 초대교회나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대에도 식물로 표현한다면 그야말로 잡초 중에서도 자생력이 강한 잡초이리라. 작물과 잡초의 차이점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음의 차이이다. 작물은 농부의 보호와 손길로 좋은 조건에서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자연 재해가 오면 전부 사멸(死滅)하는 약점이 있다. 그러나 잡초는 어떠한 자연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싹을 내고 번성하는 강점이 있다. 비록 그 수량이 작더라도 기어이 살아남아 후손을 번식시키는 잡초의 생명력은 척박한 땅이라도 뿌리를 내리고 토양의 유실을 방지하며 옥토로 만드는 밑거름이 된다. 창세 이후로 경건한 자손들은 세상 시류(時流)에 물들지 않고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순전함을 지킨 자들이다. 성경은 그들을 ‘남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엄청난 짓밟힘 속에서도 경건의 후손을 남기며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온 구속의 역사이다. 일반법칙 속에서도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두 번 말하면 잔소리이다. 작금(昨今)의 한국교회를 돌아보면 야성(野性)이 사라지고 온실(溫室) 속의 안일한 기독교가 아닌가 하는 근심을 떨칠 수가 없다. 어디서나 뿌리를 내리던 잡초 근성은 희미하고, 세상의 힘과 화려함을 좆아 몰리며, 어느덧 기득권층에 안주하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인이 최고 권력자가 되자 그에 편승하여 힘을 얻으려는 그 자체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양적 팽창은 있을 수 있으나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경건한 후손들은 급감하는 조짐이 이미 보이고 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했던 선진국의 쇠락(衰落)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부러 고난을 자초하지는 않을지라도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고난이라면 피하지 말고 참고 감당하는 것이 내일의 희망이고 복된 일이다. 밟힐수록 더 강하게 일어서는 잡초의 질긴 생명과 관련해 ‘엔도우 슈사’의 ‘침묵’이라는 책에서 성화(聖畵)를 밟는 것을 배교(背敎)로 여기던 신부에게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밟히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소외됨을 겁낼 것 없다. 주님이 먼저 걸어가신 길을 우리는 묵묵히 따를 뿐이다. 아직도 낙후된 농어촌 오지(奧地)나 후진국에 전도자를 필요로 하는 지역은 아주 많다. 문화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환경이 달라 이리저리 밟혀도 마침내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부름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604 no image |선교단상(27)| 준비해야 할 전문성_이기종 목사 (127)
편집부
4653 2013-01-08
준비해야 할 전문성 < 이기종 목사 · 합신세계선교회 총무 > “전문인 선교사들은 고도의 전문가형과 수익창출형 모델이 바람직해” 수년 전 한인선교사대회 참석 중 만났던 어떤 선교사가 한 말이 생각난다. “나는 0국의 수도 P시에서 5년간 비즈니스 선교를 했는데 비즈니스도 실패했고, 영적 사역도 실패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많이 보아 왔다. 뚜렷한 전문성이나 사업 경험 없이 전문인 선교, 비즈니스 선교에 대해 막연히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언어나 문화에 익숙한 한국에서 전문가로 활동하거나 사업하기도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지만 사회경제적 여건에 익숙하지 않은 선교지에서는 훨씬 더 힘들다. 그 나라의 법과 사회 규범을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늑장 처리와 뇌물 관행을 정직하게 돌파할 수 있어야 한다. 특정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인정받거나 틈새시장에서 사업상 이익을 창출하려면 탁월한 전문성, 아이템 선정과 경영 능력이 필요하다. 출발부터 고도의 전문가형, 수익창출형 모델로 시작함이 바람직하다. 전문인 선교, 비즈니스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지속적으로 한국 교회에 막대한 선교비를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것은 재고해야 할 일이다. 목사 선교사가 이른바 ‘남은 지역’ 선교, 개척적 선교를 감당하려 할 경우에 사업 경험이나 고도의 전문성을 구비하고 있고, 이를 통한 수익적 활동이 가능하다면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수익성은 미미하지만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선교사들의 비자 문제까지 해결해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시간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사용해야 하므로 영적 사역을 충분히 하지 못한다는 고백을 많이들 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빨리 찾아야 할 것이다. 선교사 자신이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하러 선교지에 왔는지, 내가 왜 이 사역을 해야 하는지 등 본질적인 것을 기억하며 사역의 균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믿고 함께 할 현지인 직원을 양성해 과중한 업무를 분담하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목사 선교사가 뚜렷한 전문성이나 사업 경험 없이 전문인 선교, 비즈니스 선교를 하고 싶어 한다면 심사숙고해야 하며 사전에 전문가의 조언을 꼭 구해야 한다. 신분이 드러나서 아무런 선교 활동을 할 수 없게 되는 경우 투자한 토지나 건물을 빼앗기게 되는 경우, 심한 재정적 압박으로 사역을 중단하게 되거나 사업을 계속하기 위한 모금 활동에 전념하게 되는 경우 등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척적 선교, 전문인 선교를 희망한다면 미리미리 자기의 전문 분야를 준비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선교지 부임 직전에 갑자기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교수, 의료인뿐만 아니라 차량 정비, 컴퓨터 등 기술 분야도 생각해 볼만하다. 하지만 선교지의 다양한 변화와 요구에 적합한 전문성이나 비즈니스 모델을 목사 선교사 개개인이 각자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해외 거주하는 교민들 중에는 이미 성공적으로 전문인 사역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 지역뿐만 아니라 어려운 지역에서도 상당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중동의 국가들 중에도 높은 보수를 받고 교수, 의료인, 스포츠인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이 전문성을 가진 사업가, 주재원 등과 협력함으로써 목사 선교사가 갖는 위험 부담을 줄일 수 있게 됨과 아울러 목사 선교사들이 가진 성경과 신학 지식의 전문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교단의 교회에 있는 유능한 전문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MS에서는 오랫동안 농림 분야 공직 생활을 하다 은퇴한 안수집사 한 가정을 탄자니아에 시니어선교사로 파송하였다. 이미 농업 전문성과 영어가 준비되었기 때문에 선임 목사 선교사와 함께 협력하여 사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은 지역’ 선교를 위해서는 유능한 전문인들을 발굴하여 선교 훈련을 통하여 준비시켜 선교사로 지속적으로 파송해야 할 것이다.
603 no image |제언| 사도신경과 교회성장_원영대 목사 (240)
편집부
7295 2013-01-08
사도신경과 교회성장 < 원영대 목사, 부천평안교회 > “눈높이 낮춰 교인들의 불편 해소해 가는 것이 교회성장의 기초” 황당하다! 사도신경과 교회성장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지난 해 모교회에서 담임목사 위임식이 있었다. 위임예배를 인도하는 사회자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데 새로운 버전(새로 번역된 사도신경)으로 했다. 강단의 소리와 청중의 소리가 부딪혀 귀에 거슬리는 불협화음이 신앙고백을 하는 동안 이어졌다. 다음 순서는 찬송 순서였는데 스크린에 비췬 찬송가는 옛날 버전(통일찬송가)이 떠올라 한동안 인도자 혼자 독창하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나는 20대 중반에 예수님을 영접했다.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서 유난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라라”에서 “저리”가 무엇인가 궁금해서 선배들에게 묻기도 했지만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거룩한 공회”라는 용어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암송하곤 했었다. 종종 교우들에게 사도신경의 내용 중에서 “저리로서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압니까?“라고 질문하면 십중팔구는 모르고 암송한다고 대답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제위께 당장 교우들에게 질문해 볼 것을 권한다. 과연 몇이나 이 말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는지? 주관적이지만 사도신경뿐 아니라 주기도문의 내용도 이전의 버전을 암송할 때면 선명하게 마음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지난 90회 총회 때 개정개역판과 새찬송가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후, 새롭게 번역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내용을 보니 약간 품위는 떨어지는 것 같았으나 그 의미가 확실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공예배 중에 사용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서 번역위원으로 참여했던 모 교수에게 문의했더니 대환영이었다. 그래서 그 이듬해부터 우리 교회 모든 예배에 새로 번역된 버전을 사용해 오고 있다. 어떤 분이 말하길 “이 시대는 교회의 ‘존속’이 중요하다”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에도 교회들이 폐쇄되고 약해져서 합병하는 경우를 보았다. 교회성장이 안 된다는 우려의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그러나 교회성장이 안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성도들의 겪는 불편함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새로 전입해온 교우들은 이전 사용하던 성경 찬송을 다시 구입해야 하고, 통일되지 않은 사도신경 암송할 때마다 짜증스러운 불평의 소리를 낸다. 사도신경과 교회성장, 나는 관계가 있다고 본다. 한 마디 한 마디 그 뜻을 이해하면서 암송해 나가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주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게 될 것을 믿는다. 작고 사소한 일이지만 눈높이를 낮춰서 교인들의 불편함을 해소해 나가는 것이 교회성장의 기초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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