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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no image 2017 신년기획|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2>_이남규 교수
편집부
2292 2017-02-08
2017 신년기획 / 최근 세계 신학의 동향과 한국적 현황 <2> 현대 조직신학의 동향 < 이남규 교수, 합신 조직신학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해를 맞아 본보는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들을 통해 최근의 세계 신학의 동향을 알아보고 한국 신학계의 대응과 현황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편집자 주> 현대 신학자들의 관심은 객관성보다 주관성, 성경 자체의 권위보다 성경의 기능 곧 인간에게 주어지는 의미로 옮겨왔다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등에서 정통신앙을 떠나온 현대신학 현대신학은 더욱 다양해졌고 여러 갈래이며 파편도 많다. 몇 가지 틀에 분류하여 설명하는 것은 벅차다. 한 가지 말한다면 현대신학의 흐름이란 성경의 권위를 내던짐과 동시에 정통교리를 처음엔 조심스럽게, 조금 후엔 서슴없이 대범하게 떠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있었다. 이미 오래전에 소치니(Faustus Sozzini, 1539-1604)가 합리주의적 성경 해석학을 들여왔고, 삼위일체를 부정했으며, 아리우스주의와 펠라기우스를 불러들였다. 그는 윤리를 중심에 두고, 관용, 다원주의를 옹호했다. 이런 면에서 소치니는 현재 자유주의 신학의 시초라고도 불릴 수 있다. 개혁신학자들은 일찍이 이런 흐름에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란 이름을 붙여 강력히 반대했다. 옛 개혁신학자들의 눈으로 본다면 현대의 많은 신학 사상은 아마도 소시니안주의의 다양한 분파들일 것이다. 소위 현대신학이란 다양한 역사비평과 함께 성경의 권위를 벗어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엔 성경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나중엔 교리적 사실로부터 벗어난 후 최종적으로는 성경을 인간의 글로 떨어뜨렸다. 그들 중 몇몇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정통 신앙을 벗어난다. 어떻게 성경에 호소하면서,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성경이 진술하는 명제를 그대로 받지 않는 방식으로 시도된다. 즉, ‘성경의 명제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사람이 계시를 경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칼 바르트)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많은 현대 신학자들의 관심은 객관성보다 주관성으로, 성경 자체가 갖는 권위보다 성경의 기능 곧 인간에게 주어지는 의미로 옮겨왔다. 이런 흐름은 최근에도 계속되어 ‘성경 해석자는 본문 자체를 명제로 받으면 안 되며 그것을 등장시킨 세계관을 읽어야 한다’(톰 라이트)는 의견을 우리는 만난다. 여기서 신학자는 본문의 명제를 걷어내면서 찾아낸 세계관을 우리 시대의 의미로 재구현하는 임무를 갖는다. 그런데 문제는 재구현된 명제가 성경의 명제와 부딪히고 완전히 반대되어도 이 흐름에서는 성경적이라고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적 상황인가? 문맥 안에 숨겨진 세계관을 읽어내는 인간 해석자에게 최종적 권위가 돌아가는 이런 방식은, "성경의 최고 해석자는 성경이다"는 루터의 명제와 부딪힌다. 따라서 우리가 신약과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1-2)으로 받는다고 했을 때, 그 해석권이 인간이 아닌 성경 곧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 돌아간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 본문 전체가 그 자체로서 최고의 해석자로 우리 앞에 있을 때 문화의 차이를 이유로 본문의 명제를 무효화하는 시도가 과연 정당한지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인 성경이 과거의 말씀이 아닌 지금 우리를 향하는 말씀으로서 우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히 4:12). 새로운 성경 해석의 틀 아래서 많은 현대의 신학자들은 성경이란 이름을 가진 채로 쉽게 정통신앙을 떠날 수 있었다. 신론으로 들어가 보면 무엇보다 삼위일체론이 크게 손상을 입었다. 일부에서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회복했다는 평가를 했지만, 그가 근대의 인격개념의 위험성 때문에 인격(persona) 대신에 사용한 '존재방식'(Seinsweise)은 오히려 양태론의 위험성을 남겼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분을 없애버린 칼 라너는 양태론에 더 나아갔다. 일체에 대한 이런 지나친 강조보다 최근에 더 유행하고 있는 것은 몰트만 이후 큰 세력을 입은 삼위의 강조 또는 삼신론적 경향이다. 몰트만은 명시적으로 삼위의 존재론적 한 본질 개념을 버릴 것을 주장했다. 삼위의 관계성과 공동체적 하나됨을 강조하는 자기주장을 그 스스로 사회적 삼위일체라 불렀다. 성부, 성자, 성령이 페리코레시스(상호교통)를 통해 하나 되기 때문에 한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는 동방신학에 호소하지만, 동방신학자들은 본질의 일체로부터 삼위의 페리코레시스를 말했다는 것을 간과했다. 이제 몰트만은 이 페리코레시스에 인류와 피조세계까지 포함시키면서 만유재신론으로 나아간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는 현대신학에 큰 화제를 몰고 왔는데, 신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분열하고 갈등하는 사회와 정치의 여러 문제, 세계의 분쟁, 나아가 환경 및 생태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좋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삼위일체에서 가족적 삼위일체까지 나아간 최근의 삼위일체 담론은 아직 몰트만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교리도 그 교리의 기능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25문). 삼위일체론은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통해 우리가 받은 것이다. 옛 신학자들이 말한 대로 성부 성자 성령에 어떤 구별도 없다는 자들에게 우리는 삼위를 말해야 하며, 하나님이 셋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일체를 말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 최근에 나온 많은 책들은 정통신앙이 말해온 죄론을 크게 벗어난다. 그 중 몇몇은 타락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거절하면서 인간은 처음부터 모두 같은 한계를 갖고 태어난다는 결론으로 가서 펠라기우스에 이르렀고, 또한 인간 안에 처음부터 결함이 있었다는 마니교의 이원론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싸웠고 거절했던 두 이단에로 나아간 것이다. 여기서 죄는 인간이 원래 가졌던 어떤 결함의 결과로서 물리적인 악과 차이가 없게 된다. 따라서 죄책은 죄를 범한 개인이 아니라 그런 개인을 키워낸 사회구조에 돌아가고, 죄인에게는 형벌보다는 교정과 치유가 필요하다는 현대 사회 분위기와 잘 어울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어떠한 신학적인 해결은 물론 실제적인 해결도 주지 못한다. 죄가 물리적 악이 될 때, 사람됨을 규정하는 양심, 도덕, 당위, 가치는 사라진다. 오히려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 묘사하는 인간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 즉 선하게 창조된 인간은 타락 후 전적 부패의 상태에 있으며(창 6:5; 렘 17:9), 개인적인 죄만이 아니라 전가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됨으로써 윤리적으로 연대한다(롬 5). 현대 신학자들이 간과하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부지중의 죄도 하나님의 형벌이 따르는 죄(민 15:29)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인간이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책임을 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아닌가? 죄가 형벌을 불러오는 범법이란 사실을 떠났을 때, 그리스도의 속죄사역도 정통신앙을 떠났다. 현대의 여러 신학자가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지칭되는 객관적 속죄, 즉 형벌 대속론을 포기하거나 반대했다. 화목의 능력을 말하기는 하지만, 최근의 경향은 크게 볼 때 화해를 신자 안에 있는 주관적 능력에 돌렸던 슐라이어마허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속죄사역의 일차적인 목적이라는 설명이 성경이 증언하는 복음과 속죄사역을 정당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를 감화시켜 우리로 하나님께 돌아서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교회 안에서 나타나게 하고, 우리의 사회의 여러 관계를 회복하고, 치유를 가져오고, 폭력을 비폭력으로 바꾸고, 피조물의 질서도 회복하게 하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가장 중요한 형벌대속사역을 버릴 때, 복음의 출발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은 사라져 버렸다. 안타깝지만 교회에서 사용되는 용어들도 더는 거룩, 죄, 심판, 대속, 구원이 아니라, 꿈, 상처, 치유, 비전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형벌 대속이 아니라 우리를 돌이키시고 그를 따르게 하기 위한 모범이라면,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모범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구호인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도 전혀 다른 의미로 변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모범을 따르는 신실함이 되고 자신과 사회를 구원하는 것이 되었다. 이제 믿음은 그리스도를 신앙함이 아니라 그의 신실함을 본받는 것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바울이 수없이 외쳤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심(갈 2:13)과 그의 피로 말미암은 우리의 의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부터의 구원(롬 5:9)이야말로 지금도 유일한 능력 있는 복음이다. 새로운 교리를 발견하고 발명하는 자들은 종종 자기들 자신을 종교개혁자들에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그들의 교리가 새 교리가 아니라 옛 교리임을 증명하려 애썼다면 최근의 많은 이들은 ‘자기들의 교리’가 얼마나 많이 새로운가를 증명하려 애쓴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이남규 교수> 일/문/일/답 1. 성경의 최종적 권위를 훼손하는 현대 조직신학의 도전에 대한 개혁주의 조직신학계의 대응책은? 20세기 초에 미국 장로교에서는 존 그레샴 메이쳔을 중심으로 근본주의 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운동이 세속주의의 큰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실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주요 사명 중 하나가 올바른 옛것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래서 여전히 조직신학자들은 책과 글을 통해 대응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신학자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시대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과 신학교가 함께 믿음을 철저히 지켜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 현대신학의 새로운 교리에 대한 열망은 사회적 상황들에 대한 기독교적 고민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상황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교리가 잘못돼 그런 상황이 왔다거나 교리를 새롭게 바꾸면 답이 나온다는 생각이 잘못이다. 우리는 사회적 상황들을 보면서 복음이 진정한 답이 됨을 확신해야 한다. 또 정당한 사회적 관심을 갖되 먼저 개인의 믿음과 일상적 성경적 바른 삶으로 사회에 근본적 영향을 끼쳐야 한다. 3. 성경을 묵상할 때 적용적 상황 논리와 주관성의 문제를 잘 극복하려면? 성경 연구에 세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성경이다. 권위와 원천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믿음이다. 불신자에게는 성경은 하나의 좋은 책일 뿐이다. 그런데 이 둘만 있으면 가장 주관적인 상황, 즉 자신이 최고해석자가 되는 위험에 빠진다. 따라서 셋째로 교회의 표준문서들, 좋은 주석과 많은 선생들, 동료들과의 교통이 필요하다. 그래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과 함께 해야 한다. 4. 목회와 신앙생활에서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도구를 잘 활용하는 실제적 방법은? 개혁교회는 가장 많은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를 유산으로 받았다. 교회는 이런 신조를 믿음의 고백만이 아닌 진리의 잣대와 교육용으로 사용해 왔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구원, 교회,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만나고 정리할 수 있다. 또 요리문답서의 십계명 해설은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5. 도움이 될 만한 최근의 조직신학적 도서를 추천한다면? 이승구 교수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와 김병훈 교수의 『소그룹 양육을 위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성도들에게 유익하다. 고전으로는 최근에 번역된 김영호 교수의 『게르할더스 보스의 개혁교의학』이 있고 다른 신학에 대한 평가로는 이승구 교수의 『우리 이웃의 신학들』이 있다. 더 세밀히 보려면 합신 교수들이 쓴 『노르마 노르마타』가 있다. 이남규 교수 약력 ·한양대학교 전자공학과(B.S.)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Th.M.) ·Theologische Universiteit Apeldoorn(Dr.theol.) <저서> Die Prädestinationslehre der Heidelberger Theologen 1583-1622, Reformed Historical Theology-Band 10,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09) <공저> 『칼빈과 종교개혁가들』(개혁주의학술원, 2012) 『칼빈 시대 유럽대륙의 종교개혁가들』(개혁주의학술원, 2014)
215 no image <웨신해설 58>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역의 적용과 전달 <제8장 8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2554 2016-11-29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역의 적용과 전달 <제8장 8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8장 8항: “그리스도께서는 값을 치르시고 구속을 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그 구속을 확실하고도 유효적으로 적용하시고 전달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시고, 그들에게 말씀으로 그리고 말씀에 의하여 구원의 비밀들을 계시하시며, 자신의 성령으로 그들을 유효적으로 감화하시어 믿고 순종하게 하시고, 자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의 심령을 다스리시며, 자신의 전능하신 능력과 지혜로, 자신의 놀랍고도 측량할 길이 없는 경륜에 지극히 일치하는 방법과 방식으로, 모든 대적들을 정복하신다.” ‘제한속죄’의 신학적 의의는, 어떤 이들이 오해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속죄가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적용이 제한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말하는 데에 있지 않아 그리스도의 영광, 곧 그의 높아지심은 그의 죽으심, 곧 구속의 사역의 완성으로 말미암은 일이며 그리스도의 승귀가 사실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중보 사역의 적용 및 전달은 또한 분명해 그리스도에 관하여 지금까지 밝혀온 신앙고백서가 이제 본항에서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두 가지 사실을 교훈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적용과 전달에 관한 것으로, 하나는 이것의 확실성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것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차례로 살펴봅니다. 먼저 본항은 “그리스도께서는 값을 치르시고 구속을 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그 구속을 확실하고도 유효적으로 적용하시고 전달하신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이미 앞서 8장 5항에서 고백한 사실, 곧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화목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기업을 사셨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5항은 소위 말하는 ‘제한속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인을 구속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 속죄의 객관적 사역을 성취하실 때, 속죄하기로 의도하신 대상이 보편적인 모든 인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선택을 받은 자들로 제한이 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가치는 인류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 속죄의 가치가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적용이 되는 까닭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에 있음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제한속죄’의 신학적 의의는, 어떤 이들이 오해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속죄가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적용이 제한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말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실은 ‘보편속죄’를 주장하는 이들도 동의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보편속죄를 말하는 이들도 그리스도의 속죄가 무한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보편속죄를 말하는 이들도 제한된 적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편속죄론과 제한속죄론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제한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까닭에 대해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는 제한속죄론과 달리, 보편속죄론은 그것이 인간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차이입니다. 제한속죄는,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위하여 구속의 사역을 행하실 때 의도하신 대상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제한된 자들일 뿐이라고 말하며, 보편속죄는 그리스도께서는 애초부터 그러한 제한된 대상을 의도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설명에 더하여, 8항 본항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무한한 속죄의 가치가 그가 의도하신 속죄의 대상인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적용이 되는 일은 “확실하게 그리고 유효적으로” 적용이 되고 전달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이 그가 의도한 대상들에게 과연 착오나 훼손이 없이 적용이 되고 전달이 되겠는가에 대한 교훈입니다.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적용과 전달의 확실성을 말하면서, 요한복음 6장 37절과 39절(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을 근거 구절로 제시합니다. “내게 주신 자 중에”는 속죄의 의도에 따른 제한된 대상을 말하며,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는 속죄의 의도가 그들에게 반드시 실현이 될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 풀이 됩니다. 신앙고백서는 이것을 바로 속죄의 효력의 적용과 전달이라는 신학적 설명으로 풀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하는 것과는 달리, 본항의 내용은 5항이 말하는 제한속죄를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항이 교훈하는 것은 5항에서 고백하고 있는 제한속죄의 의도가 어떻게 실제로 실현이 되는 지에 대한 확실성 여부와 그것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본항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적용은 어떻게 하여 ‘확실하고도 유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한 대답은 본항에서 다루는 두 번째 사실, 곧 그리스도의 사역의 적용과 전달의 내용에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적용과 전달이 어떻게,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밝힘으로써 그 적용이 과연 ‘확실하고도 유효하다’는 첫 번째 사실을 증거로 뒷받침합니다. 신앙고백서가 언급하고 있는 바는 다섯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중보입니다. 요한복음 17장 9절(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의 말씀에서 보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속죄하신 자들을 위하여 중보하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중보와 속죄의 연결은 그리스도의 중보가 확실한 만큼이나 그의 의 속죄의 효력의 적용도 확실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대언자’가 있어 우리를 위하실 것임을 말하면서, 그가 바로 속죄 사역을 이루신 ‘의로우신 예수’이심을 말하는 요한일서 2장 1, 2절의 말씀도 본항의 고백을 지지해 줍니다. 둘은 구원의 비밀인 말씀의 계시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요한복음 13장 15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비밀들을 알게 하시는 이들은 자신의 친구라고 말씀하시는 사실을 주목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일이 죄인들 가운데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이 적용, 전달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죄사함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리시기 위한 것임을 교훈하는 말씀(엡 1:7-9)은 말씀의 계시와 구속의 적용의 연관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셋과 넷은 성령의 사역과 관련한 것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죄인이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훈에 의하여 심령이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 등은 모두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5장 18-19절(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의 말씀은 복음이 전하여짐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사역의 적용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과 관련한 것은 유효적 부르심을 다루는 10장에서 자세하게 제시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다섯은 그리스도께서 능력과 지혜로 모든 대적들을 정복하신 일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과 능력을 멸하시고, 마귀를 발 아래 두시고 왕 노릇하실 것을 밝히 말씀하십니다.(고전 15:24-26)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권세를 어떻게 행사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6-11) 그리스도의 영광, 곧 그의 높아지심은 그의 죽으심, 곧 구속의 사역의 완성으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승귀가 사실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중보사역의 적용 및 전달은 또한 사실이며 분명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구원의 확신을 갖으며, 또한 일생동안 자신을 붙들고 도우시는 그리스도의 손길 안에서 안전하게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신앙고백서는 17장에서 성도의 견인을 말하며, 그 근거로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 그리고 성령의 내주를 언급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시되는 이 모든 은택들은 바로 속죄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객관적 사역이 죄인들에게 ‘확실하게 그리고 유효적으로’ 적용되고 전달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날에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객관적 구속 사역을 적용, 전달받은 자들은 모두가 한 목소리로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 9-10)고 찬양을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찬양의 가사에 바로 이 사실, ‘피로 사서’라는 간단한 표현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 사역이 적용과 전달을 노래할 것입니다.
214 no image <웨신해설 57> 그리스도의 두 본질의 고유한 사역과 한 위격의 관계 <제8장 7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2778 2016-09-21
그리스도의 두 본질의 고유한 사역과 한 위격의 관계 <제8장 7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8장 7항: “그리스도께서 중보사역을 하실 때, 그는 두 본질들에 따라서 행하셨으나, 각각의 본질에 고유한 것을 그 본질에 의하여 행하셨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위격은 단일하므로, 성경에서는 때때로 어떤 한 본질에 고유한 것이 다른 한 본질에 따라 불리는 위격에 의한 것으로 돌려진다.” 심판주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에 따라, 전지하시며 전능하신 분으로 판결하실 것입니다. 동시에 인성에 따라, 판결의 자리에 앉으시어 눈으로 보고 지각할 수 있는 활동으로 판결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신성에 따른 고유한 일과 인성에 따른 고유한 일이 단일한 인격 안에서 경우에 따라 행사됨으로써 비로소 실행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시작하는 말 신앙고백서가 본 항에서 말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중보사역을 인적 본질 곧 인성, 또는 신적 본질 곧 신성 가운데 어느 한 본질에 따라서만 행하시지 않으시고, 두 본질들을 모두 사용을 하셨으며, 이 때 경우에 따라 각각의 본질은 각각에게 고유한 일을 하는 방식으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의 두 본질들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위격이 단일하기 때문에, 어느 한 본질에 따른 사역이 다른 본질에 따라 호칭이 된 그리스도에게 돌려지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가 이러한 사실을 교훈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신-인(God-man)으로서 단일 위격이시면서도 신성과 인성을 둘 다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신비로운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신비와 관련하여 유의해야 할 것과 관련해서, 신앙고백서는 앞선 8장 2항은 단일한 위격 아래 두 본질들이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교훈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두 본질들이 한 위격 아래 있지만, 두 본질들은 서로 온전하고 완전하게 구별이 되며, 두 본질들의 결합으로 인하여 각 본질에게 어떤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으며, 두 본질들은 분리할 수 없게끔 서로 결합되어 있음을 가르칩니다. 이와 비교해서 여기서 살피는 8장 7항은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하실 때 한 위격 아래에 있는 두 본질들은 각각 어떻게 역할을 하며, 그럴 경우 위격의 호칭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서 8장 2항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관련하여 ‘단일한 위격과 두 본질들’의 문제를 다루는 반면에, 8장 7항은 그리스도의 생활과 사역에 관련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1.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인격은 본래부터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의 단일한 위격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적 본질인 신성을 영원부터 가지고 계신 제2위 하나님이신 로고스, 곧 성자께서는 인적 본질인 인성을 취하셨을 뿐이기에, 성육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은 신적 인격과 인적 인격이라는 두 인격들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적 인격이 없는 상태로 인성을 취하신 이 연합의 방식을 신학자들은 인격이 없는 ‘무인격적 연합’(anhypostatic union)이라는 신학적 명칭으로 가리킵니다. 그런데 인성은 일단 로고스이신 성자 하나님의 위격에 결합이 된 이후로는 더 이상 인격이 없는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자 하나님의 신적 인격이 인성을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연합의 결과를 인격이 있는 ‘유인격적 연합’(enhypostatic union)의 상태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이처럼 단일한 인격이 신성과 인성을 둘 다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행하실 때 그의 생활과 사역은 때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때로는 인간의 특성을 나타냅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신앙고백서는 본 항에서 “그리스도께서 중보사역을 하실 때, 그는 두 본질들에 따라서 행하셨으나, 각각의 본질에 고유한 것을 그 본질에 의하여 행하셨다”고 고백을 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할 수 있는 질문들, 곧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신데 어찌하여 주리시기도 하시며 죽으시는 것일까? 또한 예수님은 사람이신데 어떻게 죽은 자도 살리시며 귀신도 내쫓으시는 등의 초자연적 능력을 행하시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신앙고백서는 올바른 이해의 길을 잡아줍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에 따라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만 해도,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려 오셨다고 하신 말씀이나(5:17), 나병환자를 깨끗이 고치신 일이나(8:2), 중풍병자에게 죄를 사하시는 권능을 나타내 보이시며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신 말씀이나(9:6), 물 위로 걸어서 가신 일이나(14:29),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이나(14:17-21, 16:9),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신 일이나(21:14), 훗날에 천사들과 함께 영광 가운데 오셔서 보좌에 앉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나(25:31),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고 말씀하시며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나란히 자신의 이름을 두어 세례를 주라고 명하시고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 약속하신 일(28:18-20) 등은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보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구절들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초자연적 사건들은 모두 그의 신성에 따라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이르기를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마 8:27)고 한 일이나,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고 말한 맹인의 반응 등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인성을 따라 이러한 일들을 행하시지 않은 것임을 시사해 줍니다. 특별히 나사로를 살리시고 자신을 가리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요 11:23-26)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신성을 따라 행하시고 자신의 신성들 나타내신 가장 결정적인 근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초자연적 사역은 인성에 관계없이 그의 신성에 따라 행하신 일입니다. 반면에 또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모든 환난, 유혹, 시험, 결핍, 고통, 그리고 죽음 등은 모두 그의 인성을 따라서 당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을 구하시기 위한 대제사장의 사역을 행하시기 위하여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7-18).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대리속죄하기 위하여 형벌도 친히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육신으로만이 아니라 영혼을 통해서도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포함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앞두시고 고통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요 12:27) 그리스도께서 당하시는 이러한 고통은 그의 신성과는 관련이 없이 오직 인성의 고유한 성질에 따라 받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날은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신 말씀(막 13:32)이나 그가 자라가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였다는 말씀(눅 2:40,52)은 그가 인성 가운데 생활을 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 곳 저 곳을 다니셔야 했었습니다(막 6:6; 요 6:24; 11:15). 이러한 제한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그의 인성을 따라 행하신 생활의 모습들입니다. 또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서 보듯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날에 모든 자들을 향해 심판을 하실 터인데, 이때 그리스도께서는 이 심판의 사역을 신성과 인성 둘 다에 따라 행하실 것입니다. 심판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에 따라, 전지하시며 전능하신 분으로 판결하실 것입니다. 동시에 인성에 따라, 판결의 자리에 앉으시어 눈으로 보고 지각할 수 있는 활동으로 판결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7절(“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의 말씀에서, “인자됨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은 심판의 권세가 인성에 주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바대로(단 7:13),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으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곧 인자 같은 이가 심판의 권세를 받으셨음을 말씀하실 따름입니다. 이 인자는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중보자 그리스도이십니다. 2. 서로 구별되는 그리스도 안의 두 본질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두 본질들은 각각 본질에 고유한 대로 활동을 나타내지만, 그것의 주체가 ‘하나님-사람’(God-man)이 되신 성자 하나님의 단일한 위격이기 때문에 때로는 인성에 따라 행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으로, 혹은 그 반대로 표현을 하는 경우들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실을 신앙고백서는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위격은 단일하므로, 성경에서는 때때로 어떤 한 본질에 고유한 것이 다른 한 본질에 따라 불리는 위격에 의한 것으로 돌려진다”고 교훈합니다. 예를 들어,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지혜가 없고 무지하여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씀(고전 2:8)을 보면,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가운데 죽는 것은 인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당하시는 분을 가리켜 하나님께 합당한 호칭인 ‘영광의 주’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는 말씀(요 3:13)은 하늘에서 내려오셨다가 다시 오르시는 신비로운 신성에 따른 일을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담은 인자에게로 돌립니다. 이것은 영혼이 몸을 통하여 작용을 하듯이, 그리스도에게서는 신성에 따라 행하시는 일들이 다 인성을 통하여 작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신성에 따른 하나님을 인성에 따라 ‘피’를 흘리시는 분으로 말씀한 것이며, 또는 반대로 인성에 따라 ‘피’를 흘리는 분을 하나님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을 통하여 유의할 것은 각각의 본질에 따라 행하시는 활동과 생활 때문에 그리스도의 단일한 위격을 둘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신성에 따른 고유한 일과 인성에 따른 고유한 일이 단일한 인격 안에서 경우에 따라 행사됨으로써 비로소 실행이 완전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일 자체는 그 일이 각 본질, 곧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것(totum Christi)에 따라서 실행이 되지만, 그 일은 각각 ‘전체로 한 분이신 그리스도’(totus Christus)이신 단일한 위격에게로 돌려져야 합니다. 또한 그 위격은 신성과 인성에 따라 각각 하나님으로 혹은 사람으로 불리어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어떤 일을 실행하실 때, 그 일을 실행한 본질에 따른 이름이 아니라, 다른 본질에 따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바로 단일한 위격 아래 두 본질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의 독특한 존재에 따라 실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213 no image <웨신해설 56-2>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구약성도 <8장 6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2774 2016-08-02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구약성도 <8장 6항>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8장 6항: “구속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이후가 될 때까지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사역으로 인한 능력, 효력, 그리고 유익은 창세로부터 계속해서 모든 시대에서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로 전달이 되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가 계시되었던 약속들, 모형들 그리고 희생제물들에 의해서 전달이 되었으며,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씨로, 그리고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표지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아직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실제로 행하지 않으신 때에 살았던 구약시대의 경건한 자들은 어떻게 죽은 후에 낙원에 이르는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신앙고백서는 본 항목에서 “구속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이후가 될 때까지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사역으로 인한 능력, 효력, 그리고 유익은 창세로부터 계속해서 모든 시대에서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로 전달이 되었다”고 교훈합니다.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구약 시대의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효력을 미리 전달을 받기 때문에 그들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며, 거룩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고, 마침내 세상을 떠나서는 낙원에 이르게 됩니다. 신앙고백서가 이렇게 교훈을 하는 데에는 언약신학에 관한 이해가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앞선 7장, “인간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에서 구약교회의 언약이나 신약교회의 언약이나 모두 하나의 은혜언약이라는 사실을 확증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도 중보자는 오직 유일하신 그리스도이셨으며,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고 영생의 유익들을 누립니다. 7장 5항의 진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언약은 율법의 시대와 복음의 시대에서 각각 다르게 실행이 되었다. 율법 아래에서 그것은 약속들, 예언들, 희생제사들, 할례, 유월절 어린 양, 그리고 유대 백성들에게 전달된 여러 모형들과 규례들에 의해 실행이 되었으며, 이 모든 것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성령의 활동으로 인하여 그 당시에 약속된 메시야에 대한 신앙으로 선택받은 자들을 가르치고 자라게 하기에 충분하며 유효적이었다. 그 약속된 메시야로 말미암아 그들은 완전한 죄 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 이를 구약이라고 일컫는다.” 은혜 언약은 실체적으로 하나뿐이며, 율법의 구약 시대와 은혜의 복음 시대라는 두 세대들의 구별은 은혜 언약의 본질에 관한 구별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 언약의 실행 방식의 구별임을 주의 깊게 기억할 것을 교훈합니다. 하지만 구약성도들이 아직 오시지 않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것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합니다. 1) 하나는 구약시대의 율법 아래에서도 그리스도를 미리 나타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들은 “약속들, 예언들, 희생제사들, 할례, 유월절 어린 양, 그리고 유대 백성들에게 전달된 여러 모형들과 규례들”입니다. 이것은 지금 살피는 신앙고백서 8장 6항이 “그것들은 그리스도가 계시되었던 약속들, 모형들 그리고 희생제물들에 의해서 전달이 되었으며,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씨로, 그리고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표지가 되었다”고 정리하고 있는 것과 바로 동일한 교훈을 전달하는 진술입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는 여인이 아니라 여인의 씨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인인 마리아가 아니라 여인의 씨인 그리스도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과거에 불가타 라틴 역본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자를 여성 대명사(ipsa)로 제시한 까닭에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원수의 정복자를 마리아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하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 영향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를 미리 나타내신 약속, 예언, 모형들을 설명하는 맥락 가운데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복음의 원천적인 약속이 바로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이심을 바르게 교훈합니다. 2) 구약 성도들이 아직 오시지 않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신앙고백서 8장 6항의 끝 부분에 진술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동일성입니다. 6항은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는 말씀을 들어 구약의 성도들도 동일한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을 받으며, 그들도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효력을 미리 취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말씀은 단지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교훈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 그의 구속의 효력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구적으로 지속적으로 적용이 되며 나타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리아나 사가랴가 모두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이는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눅 1:55)고 찬송을 하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그리스도 구속사역의 효력의 선취에 관한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잘 드러납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의 때에도 성령 하나님의 활동으로 인하여 그에게 미리 보이신 그리스도의 약속과 모형들의 계시를 믿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에 관해 신앙고백서 7장 5항에서 “그것들은 성령의 활동으로 인하여 그 당시에 약속된 메시야에 대한 신앙으로 선택받은 자들을 가르치고 자라게 하기에 충분하며 유효적이었다. 그 약속된 메시야로 말미암아 그들은 완전한 죄 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 이를 구약이라고 일컫는다”고 적절하게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서 8장 6항은 구약의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효력을 미리 전달을 받았음을 명확하게 밝혀 줍니다. 구약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계시를 약속으로 받아 믿었으며, 영생의 소망을 바라며 살다가, 믿음을 따라 죽었을 때, 마침내 그들은 하늘의 본향, 곧 죽음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른 것입니다. 신약 교회에 속한 우리들도 구약성도들의 믿음의 자취를 따라 믿음으로 살다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낙원에 이르는 기쁨을 누리고, 마침내 이루실 종말의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는 가운데 오늘의 신앙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12 no image <웨신해설 56-1>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구약성도 <8장 6항>
편집부
2526 2016-07-19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구약성도 <8장 6항> 1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8장 6항: “구속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이후가 될 때까지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사역으로 인한 능력, 효력, 그리고 유익은 창세로부터 계속해서 모든 시대에서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로 전달이 되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가 계시되었던 약속들, 모형들 그리고 희생제물들에 의해서 전달이 되었으며,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인의 씨로, 그리고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표지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기 이전에 살았던 구약시대의 옛 성도들은 세상을 떠난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신약시대 이후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며, 세상을 떠날 때 바로 낙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여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살았던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아직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신약시대 이후의 성도들처럼 낙원에 가지 못한 채 다른 어떤 상태나 장소에 가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신앙고백서의 답은 본 항에서 “구속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이후가 될 때까지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사역으로 인한 능력, 효력 그리고 유익은 창세로부터 계속해서 모든 시대에서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로 전달이 되었다”고 교훈한 것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효력이 구약시대의 성도들에게도 미리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신약시대 이후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사후에 바로 낙원에 갔음이 확인이 됩니다. 이러한 교훈은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견해들 중의 하나를 바르게 교정하여 줍니다. 그것은 소위 선조림보(Limnud patrum)라는 교리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구약교회의 의인인 선조들이 선조림보라 일컫는 곳에 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림보란 음부의 가장 윗자리에 있는 곳입니다. 음부는 가장 아랫자리에 악인들이 죽어서 가는 지옥이 있으며, 그 다음에 그것의 가장자리에 이웃하여 있는 연옥이 있고, 그리고 그것들 위에 소위 구약교회의 선조들이 가는 선조림보와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죽은 유아들이 가는 유아림보(Limbus infantium)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믿기를 구약교회의 선조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기까지 선조림보에 갇혀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육체가 무덤에 계시는 동안 그의 영혼으로 지옥에 내려가셔서, 선조림보에 있는 구약성도들의 영혼을 구하실 때에라야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인 하늘로 가게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그가 실제로 성육신 하신 이후가 될 때까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구약교회의 선조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유익들을 아직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품”(눅 16:22)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천국에서 누리는 잔치(마 8:11), 그리고 기름을 등과 함께 준비한 지혜로운 처녀들에게 허락이 된 혼인잔치(마 25:10) 등이 모두 선조림보를 가리킨다고 해석을 합니다. 이들의 주장과 달리,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들어간 “아브라함의 품”이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함께 앉은 “천국”과 신랑을 맞이하는 혼인잔치는 모두 다름 아닌 영광스러운 하늘을 뜻합니다. 만일 아브라함의 품이 로마 가톨릭이 믿는 바대로 단지 림보일 뿐이라면, 나사로는 결코 아브라함의 품에서 좋은 것과 위로를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눅 16:25).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천국에서 누리는 잔치에는 구약 성도들뿐만 아니라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이들과 함께 천국에 앉아 있습니다. 이들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성취한 다음에 부름을 받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이미 구속사역이 완성된 이후이므로 선조림보에 들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게 되는 천국도 또한 결코 림보일 수가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림보를 오히려 낙원이라 말하며 궁극적인 복락은 미루어져 있지만 그래도 복된 상태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바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림보에는 고통은 없지만 죽음이라는 상태로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어떠한 좋은 것과 위로가 있을 수가 없는 곳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말씀하신 낙원은 결코 하늘의 영광스러운 복락이 유보된 일시적이며 잠정적인 상태가 – 그들은 이것도 행복의 한 종류라고 말하지만 – 아닙니다. 낙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스러운 곳입니다. 강도에게 자신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한 낙원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지극한 복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도 또한 복락의 상태에 있지 않은 것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죽어서 간 곳은 거짓된 림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 11:10), 곧 성도가 죽어서 가는 영광의 낙원입니다. 그러한 낙원을 바라며 야곱은 주의 구원을 기다린다고 말하였고(창 49:18), 시편 73편은 이것을 바라보며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24절)라고 노래한 것이며, 또한 다윗은 자신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한 것입니다(시 31:5). 여기서 주의 손이란 심판주의 무서운 손이 아니며, 또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 죽음의 상태가 아니며, 다만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의 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돌아가시기 이전에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셨던 바대로, 하늘의 영광 가운데로 영접을 받을 것을 소망하고 확신하는 가운데 부탁한 것입니다. 구약교회의 성도들은 모두가 죽은 후에 누릴 영광을 바라보았으며, 그들의 소망대로 낙원에 가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림보라는 곳에 가 있지 않습니다. 림보 교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거짓된 교리일 뿐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211 no image <웨신해설 55-2> 그리스도의 순종의 효과와 그것의 대상 <8장 5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2630 2016-06-21
그리스도의 순종의 효과와 그것의 대상 <8장 5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8장 5항: “주 예수께서는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또한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께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그의 아버지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화목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기업을 사셨다.” 지난 호에 이어 본 항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그의 순종으로 말미암는 유익, 곧 화목과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셨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순종 사역, 특별히 대표적으로 속죄를 위한 희생제사와 대제사장적 사역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한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제한속죄론을 지지합니다. 1. 제한속죄론과 보편속죄론 이해 제한속죄론과 보편속죄론 사이의 논쟁점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의 충분성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제한속죄론이 주장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가치가 오직 제한된 죄인들만을 구할 수 있을 만큼만 충분하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한속죄론이나 보편속죄론은 둘 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가치가 온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에 대해 완전히 동의를 합니다. 아울러 기억할 것은 두 견해 사이의 논쟁점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이 실제로 적용이 되는 범위와 관련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보편속죄론도 모든 사람들이 각각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한 효력을 적용받아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님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한속죄론이나 보편속죄론이나 둘 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이 모든 사람들에게 각각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완전히 동의를 합니다. 보편속죄론과 제한속죄론의 논쟁점은 하나님의 작정과 그리스도 자신의 의지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한 공의의 만족이 각각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의도된 것인가 아니면 단지 선택을 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의도된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논쟁의 초점은 ‘만일 모든 사람들이 믿는다면’ 그들 모두를 구원할 만큼 충분한 그리스도의 속죄의 가치가 일부의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게끔 제한적으로 적용이 되는 까닭이 무엇인가에 있습니다. ‘보편속죄론’이라 함은 ‘그리스도의 속죄는 죄인들 일반을 위하여 의도된 것’임을 주장하는 견해를 말합니다. 보편속죄론의 ‘보편’은 그리스도가 의도한 대상이 죄인들 일반임을 가리키는 표현이며, ‘속죄’는 속죄 사역 자체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속죄이었는가와 관련한 ‘속죄의 의도’를 가리킵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온 세상을 속죄하기에 충분한 그리스도의 속죄의 가치는 곧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속죄하기 위한 의도를 반영합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사람들의 선택에 의하여 어떤 이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거부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의도로 온 세상을 속죄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 속죄의 사역을 행하셨으나, 그것의 실제적인 적용은 사람들의 선택적 의지에 의하여 제한을 받습니다. 이와 달리 ‘제한속죄론’이 주장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속죄는 오직 선택을 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의도된 것’임을 말합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비록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이 온 세상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사역을 통해 구원하시고자 의도한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로 제한이 됩니다. 그리고 제한된 대상만을 향한 그리스도의 의도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작정과 일치합니다. 그것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실제적인 적용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제한된 자들로 제한이 됩니다. 정리를 하면, 보편속죄론은 ‘속죄의 의도는 보편적 대상을 향하고, 속죄의 적용은 사람의 선택에 의하여 제한됨’을 말하며, 제한속죄론은 ‘속죄의 의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택에 의한 제한적 대상을 향하고, 속죄의 적용도 하나님 아버지의 선택에 의하여 제한됨’을 말합니다. 이러한 이해의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세상 또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보편적인 범위를 가리키는 구절들이 있는 반면에(요 1:29; 3:16; 6:33, 51; 롬 5:18; 11:12, 15; 고전 15:22; 고후 5:14, 19; 딤전 2:4; 딛 2:11; 히 2:9; 벧후 3:9; 요일 2:2), 또한 제한적인 범위를 가리키는 구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사 53:12; 마 20:28; 요 6:37, 39, 44; 10:15; 11:52; 15:13; 17:2, 9, 20; 롬 8:33; 엡 1:4, 7; 5:25; 계 5:9;14:4). 2. 보편속죄론과 제한속죄론의 대상 보편속죄론과 제한속죄론은 모두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는 점에 동의를 하고 있으므로, 보편속죄론의 오류는 결국 보편적인 범위를 가리키는 성경의 구절이 보편적인 대상을 향한 속죄의 의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됩니다. 보편적 범위를 가리키는 구절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화목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 속죄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어디에 있든지, 언제 있든지,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범위를 확장한 말씀입니다. 요컨대 보편 범위를 담고 있는 이러한 구절들은 어느 것도 그리스도의 사역이 ‘온 세상의 죗값을 치루는 보상’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로 인하여 화목이 ‘모든 사람들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복음의 제안을 통해 보편적으로 제시하면서도, 그 혜택이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만’ 특별히 제한이 된다는 뜻에서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나 ‘온 세상’이 구원과 관련이 될 때, 그것은 절대적 의미에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 곧 선택을 받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바로 여기에 제한속죄론이라 일컬어지는 주장의 요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효과가 주어지는 대상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제한이 된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의 사역이 온 세상의 죗값을 치르는 보상이기 때문에 그 복음의 제안은 진실하고, 그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은 어느 곳이나 어느 때에나 있기 때문에 복음의 제안과 선포를 차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리는 사역은 보편범위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나 속죄 사역의 효과와 그 대상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예정을 입은” 자들에게(엡 1:11) 제한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속죄사역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될 자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사람들”(요 17:2,7)임을 아셨으며, 또한 그들만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3.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제한속죄론 어떤 사람들은 복음의 보편적 제안과 구원의 제한적 선택을 잘못 이해하여 하나님의 작정을 이중적으로 풀이하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가정적 보편주의론’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속죄의 효과가 나타나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도록 그들 각각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정적인 첫 번째 작정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들에게만 믿음을 주셨으며, 선택을 받은 자들만 속죄의 효과를 누린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두 번째 작정입니다. 이 주장의 문제점은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시고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작정을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과를 누릴 수 없는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하도록 작정을 하셨다는 설명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가정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이라는 이중적 작정으로 만드는 불합리한 설명이며 오류입니다. 신앙고백서는 본 항에서 이러한 복잡한 논의를 간단한 한 구절로 요약하여 바른 이해를 제시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화목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기업을 사셨다.” 주님께서 화목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행하신 모든 사역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이라는 제한 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0:28-30(“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의 말씀은 제한속죄론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압축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주시는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이며, 속죄의 범위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점이 없습니다. 마치는 말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의 선택의 작정에 의하여 제한이 되며, 그렇게 제한이 된 대상이 그리스도 자신이 의도하신 대상입니다. 신앙고백서의 본 항목에서 올바른 신학이란 항상 삼위일체론이라는 평형추에 의하여 균형을 잡는다는 원리를 교훈 받습니다. 개혁파 신앙문서들 가운데 제한속죄의 교리를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은 도르트 신조 이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이 대표적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점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며, 벨직 신앙고백서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들은 그리스도의 제한속죄를 함축하는 진술들을 언급하는 수준으로 교훈을 합니다. 그러한 면을 고려할 때, 본 항목의 간단하지만 분명한 진술은 뒤에 나오는 8항과 함께 제한속죄론의 의도를 잘 드러내는 소중한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210 no image <웨신해설 55> 그리스도의 순종 효과와 그것의 대상 <8장 5항>-1_김병훈 목사
편집부
2479 2016-05-10
그리스도의 순종 효과와 그것의 대상 <8장 5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하나님과의 화목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믿음뿐” 제8장 5항: “주 예수께서는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또한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께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그의 아버지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화목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기업을 사셨다.” 이번 글에서 다룰 내용은 8장 5항의 후반 절입니다. 전반 절을 다루었던 지난 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기 위하여 고난과 의의 순종을 완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이해하기를 그것을 통해 오는 효과들의 성격을 고려하여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구별합니다.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으며 영생을 받을 권리를 주시기 위하여 이루신 율법의 의를 이루셨음을 뜻합니다. 반면에 수동적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하여 모든 고난의 형벌을 자신의 육체와 영혼에 당하신 일을 뜻합니다. 본 항목의 후반 절에 이르러 신앙고백서가 교훈하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순종의 효과로 획득하신 유익들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유익들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차례로 살펴보기로 합니다. 신앙고백서가 본 항에서 특별히 언급하는 유익들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화목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기업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기업’은 다음 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화목 화목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유익들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유익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자기 백성의 죄를 자신의 희생제사로 가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회목제물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거를 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또한 자기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7).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한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제사장 사역은 절실하게 필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타락의 사건 이후에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뿐이며,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며 원수이기 때문입니다(롬 1:18; 5:10; 갈 3:10, 엡 2:3). 여기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화목이 상호적이라는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먼저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하여 행하여야 할 속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 것과 관련한 점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들을 위하여, 자신을 진노의 대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죗값을 치르심으로 화목을 위한 죄인 편에서 해야 할 도리를 완수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도 또한 죄인인 자들과 화목하기 위하여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공의를 만족하는 대리속죄로 받아주신 일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하나님 자신이 화목제물로 내어주시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열납하시고 이로써 자신의 진노를 내려놓으신 일입니다. 죄인에게 공의의 만족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요구를 만족케 할 길이 없는 죄인들을 대신하도록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심으로 이루신 화목의 회복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신비한 진리에 대하여 성경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고 증언합니다. 2. 화목의 은택과 그 내용 화목의 은택을 누리는 우리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든 화목의 사역을 오직 은혜로 행하셨으며, 죄인인 우리는 화목의 사역에 아무런 공로를 주장할 어떤 일도 행한 바가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화목은 오직 은혜이며 선물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화목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믿음뿐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순종의 효과로 인하여 누리게 되는 유익들에는 화목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많은 유익들이 있으며, 이러한 유익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여 짐으로써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본 항에서 특별히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그의 완전한 순종을 통해 얻으신 것은 화목한 관계의 회복만이 아니라, 회복에 근거하여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기업을 상속할 권리도 포함을 합니다. 이러한 복에 대하여 성경은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고 밝혀줍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영생을 얻고 하늘나라의 상속권을 얻으며, 이것을 위하여 먼저는 죄 사함을 받고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한 거듭난 자로서 몸과 영혼의 정결함을 누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자가 되며, 마귀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을 뿐만 아니라, 마귀에게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복들을 누리게 됩니다. 신앙고백서는 본 항에서 이러한 많은 유익들 가운데 화목과 그것으로 인한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의 상속이라는 두 가지를 대표적인 복으로 제시하였을 뿐이지만, 뒤에 가서 그것들 가운데 몇 가지를 다시 구원의 서정이라는 전통적인 순서를 따라서 몇 가지들에 대하여 고백을 이어갑니다. <다음호 계속>
209 no image <웨신해설 54>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8장 5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3419 2016-04-12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8장 5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8장 5항: “주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또한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께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그의 아버지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화목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기업을 사셨다.” 본 항은 크게 두 가지의 내용을 교훈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의 효과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효과를 얻기 위하여 그가 행하신 사역의 성격에 관한 것입니다. 사역의 효과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킨 일, 그리고 화목과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사신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역의 효과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란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가 율법에 순종한 일과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일을 말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두 가지 내용 가운데 먼저 사역의 효과를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의 성격을 살피고, 다음 글에서 그것으로 인한 사역의 효과를 살피기로 합니다. 지금 살피는 5항에서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이 말하는 바는 앞선 4항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나셨으며,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셨다”고 고백을 한 것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4항에서 설명을 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셨음을 말하는 것은 그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피할 수가 없는 자연적 의미에서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하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적 인간들과는 달리 영생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순종하여야 할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일이 ‘위격적 연합’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자 하나님의 위격이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러한 위격적 연합의 사실은 그리스도께서는 출생할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분으로 나셨기 때문에 율법의 의의 보상을 통해 자신의 영생을 얻고자 하실 필요가 없으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죄인들이 영생을 얻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이 필요한가에 관련한 토론의 초점은 그리스도께서 대리속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무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무도 이 점과 관련하여 부인을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만일 율법에 불순종하는 일을 행하신다면 속죄를 위한 희생제물의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일이 있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대리속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의 자격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영생의 권리도 상실하게 되고 맙니다.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신”(히 4:15) 분이십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거룩하며 무흠하여야 할 제물의 조건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에게 속한 죄인들은 대리속죄의 은혜를 입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대리속죄를 이루시기 위하여서는 율법의 의를 이루는 완전한 순종을 행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하셨습니다. 그처럼 율법에 완전히 순종을 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자로 잉태되고 탄생하실 때로부터 이미 자신이 희생제물로서의 자격을 이미 이루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를 보이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무흠한 제물로서의 자격은 그가 거룩한 자로 성육하셨을 때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과 관련하여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순종으로 얻으신 율법의 의와 영생의 권리가 죄인들에게 전가하여 주시는 데에 그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 두는 일입니다. 죄인들의 보증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속한 죄인들을 위하여, 율법을 완전히 순종을 하시어 율법의 의를 이루심으로써 영생의 권리를 획득하시고, 그 권리를 행사하십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을 하신 것은 그가 인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자신에게 속한 죄인들의 보증인이 되는 언약적 관계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항에서 표현한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가 뜻하는 바는 우리의 보증인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으며 영생을 받을 권리를 주시기 위하여 이루신 율법의 의를 이루셨음을 가리킵니다. 즉 자신의 영생을 위하여서는 불필요한 율법의 의를 이루신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인 의지를 따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죄인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보증인으로 행하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보증인으로 율법 아래에서 순종을 하신 것을 가리켜서 ‘능동적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단번에 희생제사를 드리셨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수동적 순종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죄인들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하여 육체와 영혼에 모든 고난의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속한 죄인들의 죄책을 자신에게로 자발적으로 옮기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심판을 받으시어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수동적 순종은 죗값의 형벌을 치르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임의로 죄인에게서 죗값을 면제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은 사실 죗값을 치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에 대하여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죗값을 물으시기로 작정을 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필요하다고 앞의 견해에 대하여 반박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께서 만일 다른 방식으로 작정을 하셨더라면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이 죗값을 치르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 두 가지 견해들과 달리, 세 번째 견해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선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대리 속죄에 의하여 죗값을 치르지 않고는 누구도 죄사함을 받을 수 없도록 뜻을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죗값을 치르지 않고도 죄를 사하시는 일은 그의 공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의하여 죗값을 치르는 일과 관련하여 절대적 필연성을 말하는 세 번째 견해가 17세기 초부터 개혁신학에서 가장 널리 인정을 받아 왔습니다. 두 번째 견해는 가정적 필연성을 주장하는 견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전제 아래 필연성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죗값을 치르는 공의의 만족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소시니안주의자들의 첫 번째 견해가 대두되기 전에는 개혁파 일부에서도 고려했던 견해입니다. 개혁신학은 첫 번째 견해를 부인합니다. 요컨대 본 항에서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께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그의 아버지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다.”의 문장으로 교훈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공의의 속성에 따라서 율법을 범한 죄인들의 죗값을 요구하시는 작정을 행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수동적 순종을 통해 근본적이며 철저하게 속죄의 형벌을 다 갚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음을 확실하게 밝혀줍니다. 이번 항목을 살피면서 유의하여 기억할 한 가지 사항은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구별에 관련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가져온 효과들에 관한 구별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적 측면과 죗값을 치루는 측면을 구별하여 전자는 능동적 순종, 후자는 수동적 순종이라고 구별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죄악의 용서와 영원한 의의 드러남”(단 9:24), “죄사함과 기업을 얻음”(행 26:18), 또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을 받는 것”(갈 3:13)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갈 3:26) 등의 구별을 근거로 합니다. 지옥 형벌에서 벗어나는 것과 천국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 구별이 되고, 형벌을 받는 것과 상급을 받는 것이 동일한 것이 아니며, 사망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는 것과 영생의 영광을 얻는 것이 서로 구별이 되는 것이 마땅하므로, 그리스도의 순종을 공로적 측면의 능동적 순종과 공의를 만족케 하여 죗값을 치루는 수동적 측면으로 구별하여, 전자를 통해 영생을 얻고 후자를 통해 심판을 면하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별이 마치 그리스도의 어떤 사역은 능동적 순종에만 해당이 되고, 어떤 사역은 수동적 순종에만 해당이 되는 것인 양 경직된 구분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인을 죽음에서 건져내기 위한 것일 뿐이며,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은 죄인에게 영생의 권리를 주기 위한 공로의 행위인 것으로만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의 단일체로서 한 편으로는 죗값을 치루는 속상의 측면을, 다른 한 편으로는 영생의 기업을 얻도록 하는 공로의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은 수동적 순종의 측면의 사역이지만, 그것은 자기에게 속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행위이며 곧 율법의 성취라는 점에서 공로의 성격을 갖기도 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열매이므로 율법의 완성이며, 능동적 순종의 측면을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죗값을 치르는 공의의 만족과 영생을 기업으로 받는 공로는 모두 그리스도의 순종이라는 한 사역의 두 가지 측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죄도 율법이 완전히 성취되는 일이 없이는 사함을 받을 길이 없는 법이며, 역으로 영생의 권리는 죄책이 다 제거되는 일이 없이는 주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어떤 능동적 순종도 그것만으로 완전히 공로적일 수 없으며, 어떤 수동적 순종도 그것만으로 완전히 죗값을 다 치르지는 못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라도 율법에 대한 자발적 순종에 의한 사랑이 함께 하고 있으며, 율법의 순종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고난을 기꺼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도록 한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208 no image <웨신해설 53-2> 그리스도의 승귀 사역 <8장 4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2950 2016-02-29
 그리스도의 승귀 사역 <8장 4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8장 4항: “주 예수님께서는 이 직분을 매우 기꺼이 받으셨으며,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율법 아래에 나셨으며,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셨다. 주님은 친히 그의 영혼 안에서 지극히 통탄할 고통을 견디셨으며, 그의 육신 안에서 지극히 고통스러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사망의 권세 아래 놓였으나 썩음을 보지 않으셨다. 셋째 날에 주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고난을 받으셨던 몸과 동일한 몸으로,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 몸으로 또한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으며, 중보를 하신다. 그리고 세상 끝 날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기 위해 돌아오실 것이다.” 본 항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비하와 승귀의 상태, 두 가지로 구별을 합니다. 그 가운데 비하에 대해서는 지난 호에 설명을 하였으므로, 이번 호에서는 승귀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승귀란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어 이 땅에 내려오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어 죽음의 권세 아래 삼일 동안 머무시기까지에 이르는 수치와 고난의 비하 과정을 다 이루신 후에, 셋째 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으시고, 세상 끝 날에 돌아오시는 영광의 과정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그리고 재림의 과정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합니다. 1. 부활 본 항목은 “셋째 날에 주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고난을 받으셨던 몸과 동일한 몸으로, 살아나셨음”을 고백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승귀의 첫 단계로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하여 살펴볼 바는 부활의 사실, 부활의 시점, 부활하신 몸, 부활 사건의 주체, 그리고 부활의 의의와 관련한 내용들입니다. 1) 부활의 사실과 관련하여,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자들이 꾸며낸 거짓 소문이거나, 또는 그리스도께서 사실은 죽지 않으시고 거의 죽을 만큼 되었을 뿐이며, 그 상태로 마치 죽으신 것처럼 기절을 하셨을 뿐이라는 주장을 부인합니다. 즉 신앙고백서는 주님의 부활은 앞서 고백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 그리고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이셨다는 고백의 맥락에서 확실하게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며, 제자들이 결코 꾸며낸 거짓 소문이 아님을 교훈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낙망하여 흩어진 제자들이 거짓된 부활의 소문을 스스로 만들어 유포하고 자신들도 또한 죽을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은 개연성이 극히 없는 일일 뿐입니다. 2) 부활의 시점과 관련하여, 신앙고백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점과 관련하여 “셋째 날”임을 분명하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표현들 가운데, “제 삼일에”(마 16:21, 20:19)의 것과, 또 “사흘 만에”(막 8:31) 또는 “삼일 만에”(막 10:34)의 것이 의미하는 바를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들과 달리,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40)에서 말하는 “밤낮 사흘 동안”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실제로 부활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요나의 표적에 빗댄 은유적인 설명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됩니다. 3) 부활하신 몸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던 몸과 동일한 몸으로” 부활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다음 두 가지 오류를 비판합니다. 하나는 주관적 환상설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는 부활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활을 간절히 바라던 그의 제자들이 심리적 정상상태를 벗어나 예수님을 환영으로 보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였다는 그릇된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제자들이 애초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대도 하지 않았으며 부활의 사실에 대해 회의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성경의 기록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은 환영이 아니라, 분명한 육체의 부활이었음을 선언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객관적으로 인정을 하더라도 그의 부활이 영적인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것을 제자들에게 육체의 형태로 보여주신 것이라는 질못된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결코 그가 죽었던 것과 같은 몸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사실상 부활의 고유한 의미를 부정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빈 무덤과 관련하여 기술하는 성경의 기록들(마 28장, 막 16장, 눅 24장, 요 20장)과 어긋나며,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신 일들(요 20:20,25), 자신에게는 영과 달리 살과 뼈가 있음을 보이신 일(눅 24:39)에 관한 기록들과도 어긋납니다.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거짓된 주장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은 “고난을 받으셨던 몸과 동일한 몸”의 부활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한편 부활하신 몸이 “고난을 받으셨던 몸과 동일한 몸”이라는 신앙고백서의 표현이 육체의 부활을 고백하는 것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이 부활 이전에 가지셨던 몸과 동일한 성질의 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살과 뼈을 가지고 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받으신 상처들도 있었지만, 그 몸은 분명히 아직 만져서는 안 되는 몸이었으며(요 20:17), 바로 알아보지 못할 만큼 다른 모양인 듯도 하였으며(눅 24:16, 요 20:14, 막 16:12), 닫힌 공간에 있는 제자들 가운데 신비롭게 나타나시기도 하셨습니다(요 20:19). 이러한 사실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단순히 지상의 몸이 그의 영혼과 재결합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몸과 재결합을 하면서 몸의 완전한 상태로 승화되었으며, 그의 몸은 이전에 가졌던 욕되고 약한 것으로 심었던 몸이 아니라, 썩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신령한 영적 몸임을 말해줍니다. 4) 부활 사건의 주체와 관련하여, 신앙고백서는 “셋째 날에 주님은 ... 살아나셨다.”고 고백을 할 때, 부활을 있게끔 한 능력이 그리스도 자신의 능력인지, 또는 성부 하나님의 능력인지를 구별하는 표현을 하지 않은 채, “살아나셨다”는 사실만을 언급합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자신께서 자신의 부활을 스스로 이루셨음을 말하는 많은 성경의 증거들(예를 들어 요 2:19; 5:21; 10:28, 롬 1:4, 골 1:18)에 근거하여 언급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표현은 성경이 종종 언급하고 있듯이 부활의 사건이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고백을 포괄합니다(롬 6:4, 행 2:24;13:30, 엡 1:19,20, 갈 1:1, 벧전 1:3). 그렇다면 누가 부활 사건의 주체일까요? 성경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대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권능으로 인한 것으로, 또 성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으로 둘 다 언급을 하고 있는 까닭은 하나님 자신의 내적인 일이 아니라 피조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사건들은 모두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동시에 또한 인성을 가지고 계심으로 특별한 고려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심으로써 죽음에서 부활을 얻으신 것이며(히 5:7), 그의 신성과 관련하여서는 자신 또한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으로, 자신의 부활을 실행하신 것입니다. 5) 끝으로 부활의 의의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자신이 정녕 메시야이심을 객관적으로 선포하고 자신의 왕권과 죽음과 마귀의 권세에 대한 심판주로서의 선언의 의미를 갖습니다(행 2:36; 3:13-15,; 5:31; 10:42). 또한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에 대한 공포이기도 합니다(행 13:33, 롬 1:3). 아울러 우리들을 위한 영적 은택들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용서와 의롭게 하심, 긔리고 영원한 생명, 그리고 우리들의 부활에 관한 보증으로서의 의의를 갖습니다. 2. 하늘에 오르심 승귀와 관련하여 생각할 내용은 두 번째 단계인 “하늘에 오르심”입니다. 신앙고백서는 부활에 대한 고백에 이어서 하늘에 오르신 일, 곧 승천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높임을 받으시고 만유를 회복하실 그 때가 될 때까지 하늘에 취하여지셨음을 말합니다(막 16:19, 눅 24:50,51, 행 1:1-12; 3:21). 승천에 관하여 특별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그의 인성에 따라서 몸을 가지시고 땅에서 하늘로 장소의 이동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 올라가신 하늘은 먼저 세상을 떠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효과를 미리 누리며 거하고 있는 낙원입니다. 승천이 장소의 이동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승천을 단지 비유적으로만 이해하는 루터파 때문입니다. 루터파는 그리스도께서 오르신 하늘을 어떠한 장소가 아니라 단지 기쁨과 영광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보이는 하늘과 구분이 되는 어떤 물리적 하늘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장소로서의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되, 그리스도의 인성의 편재를 주장하면서 이르기를 그리스도께서 오르신 하늘은 먼저 죽은 성도들의 처소인 낙원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복락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고 그의 인성이 이제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상태를 누리게 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가 “하늘에 오르셨다”고 고백할 때, 그것은 이러한 루터파의 주장을 분명하게 거부합니다. 3.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승귀의 세 번째 단계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에 관한 고백입니다. 당연히 이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오른편이나 왼편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은유적인 표현으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우편에 앉으심”이란 은유는 왕의 통치적 권위에 가장 가까운 자를 우편에 앉히는 관습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고백은 그가 하늘에 오르시어 누리시는 존귀와 영광의 상태를 말하며(빌 2:9; 히 1:3) 또한 그가 모든 피조물들 위와 그리고 모든 교회를 향해 행하시는 최고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을 말합니다(고전 15:25, 엡 1:22, 벧전 3:22).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 우편에”(막 16:19, 골 3:1), “자기의 우편에”(엡 1:20), “권능의 우편에”(마 26:64, 눅 22:69),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히 1:3), “하나님의 보좌에”(행 2:30), “하나님 보좌 우편에)(히 12:2)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히 3:1) 등의 표현들은 이러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4. 다시 오심 끝으로 승귀의 네 번째 단계는 “세상 끝 날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기 위해 돌아오시는” 재림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재림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을 고백합니다.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언급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마 19:28; 25:31,34; 눅 3:17, 롬 2:16; 14:9, 고후 5:10, 딤후 4:1, 약 5:9).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모든 심판의 권세를 아버지께 받으셨음을 밝히셨습니다(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그리고 심판의 대상은 단지 사람들만이 아니라 천사들을 포함함을 교훈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악한 천사, 곧 악한 영들과 악인들은 영벌에 처하고,(마 24:30,31; 25:31,32, 계 20:7-15; 21:8-19)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영원한 영광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마 25:33-46; 계 21:1-7).
207 no image <웨신해설 53> 그리스도의 비하의 사역<8장 4항> -1_김병훈 목사
편집부
2870 2016-01-26
그리스도의 비하의 사역 <8장 4항> - 1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8장 4항: “주 예수님께서는 이 직분을 매우 기꺼이 받으셨으며,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율법 아래에 나셨으며,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셨다. 주님은 친히 그의 영혼 안에서 지극히 통탄할 고통을 견디셨으며, 그의 육신 안에서 지극히 고통스러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사망의 권세 아래 놓였으나 썩음을 보지 않으셨다. 셋째 날에 주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고난을 받으셨던 몸과 동일한 몸으로,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 몸으로 또한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않으셨으며, 중보를 하신다. 그리고 세상 끝 날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기 위해 돌아오실 것이다.” 본 항은, 앞서 3항에서 밝힌 바대로, 성부 하나님께서 맡기신 직분, 곧 중보자이며 보증인의 직분을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맡으시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행하신 사역들을 교훈합니다. 그리고 이 사역들을 크게 비하와 승귀의 두 가지로 구별을 합니다. 비하란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어 이 땅에 내려오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어 죽음의 권세 아래 삼일 동안 머무시기까지에 이르는 수치와 고난의 과정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승귀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마지막 날에 심판을 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시기까지에 이르는 영광스러운 높아지심의 과정을 가리킵니다. 이번 호에서는 비하의 사역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니다. 구속언약: 보증인의 사역을 기꺼이 받으신 그리스도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선택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서는 이들의 죗값을 치르는 속죄의 사역이 요구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이 속죄의 사역을 성자 하나님께서 행하여 주기를 바라는 뜻을 가지셨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이 직분을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맺으신 언약이 있음을 말하며, 그것을 구속언약이라 일컫습니다. 구속언약과 관련하여 성부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발기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선택하시고, 그 선택하신 자들의 머리로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뜻을 세우십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구속언약의 실행자로서 스스로 낮아지시어 사람이 되시어 구속사역을 실행하시며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의 구원을 위한 보증이 되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구속언약의 적용자로서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으며 성자 하나님께서 보증이 되신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적용하시고 인치십니다. 이러한 언약의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의 죗값을 치르는 의무를 스스로 짊어지시는 보증인의 직분을 기꺼이 받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사실을 증거하는 성경구절들 가운데 몇 가지 다음과 같습니다.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히 5:5-6).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20-22).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사 53:10-11).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8). 이러한 구속언약은 때가 차매 시간 속에서 계시되고 실행이 된 은혜언약의 확실하며, 영원하며, 불변하는 토대가 됩니다. 반대로 은혜언약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 사이에 맺으신 구속언약을 시행하고 적용하는 과정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택하신 백성과 맺으시는 언약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실행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비하와 승귀로 구별이 되는 사역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보증인의 사역과 비하 그런데 이처럼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의 보증인으로 그리스도가 속죄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서는 소위 비하라고 일컬어지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역이 요구됩니다. 본 항에서 “율법 아래에 나셨으며,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셨다. 주님은 친히 그의 영혼 안에서 지극히 통탄할 고통을 견디셨으며, 그의 육신 안에서 지극히 고통스러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사망의 권세 아래 놓였으나”라고 고백하는 내용은 모두 보증인의 사역을 실행하기 위한 요건이었습니다. 신앙고백서는 본 항에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요건을 완전하게 성취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율법 아래 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는 보증인으로 실행하신 첫 번째 비하 사역은 사람의 인성을 취하신 일입니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어 자신에게 주신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마 1:21; 딤전 2:6; 사 53:4-6; 히 2:11, 히 4:15). 그리고 성육신의 일은 바로 율법의 반포자이신 그가 율법에 순종하여 하는 권세 아래에 들어오셨음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하심에 있어서 원죄가 없으시며 거룩한 출생을 하셨으므로 인간으로서 출생하였다는 자연적 의미에서 자신을 위하여 어떤 의의 보상을 율법에 따라 요구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가 “율법 아래 나시고 그것을 완전하게 성취하셨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셨다는 자연적 사실로 인하여 그가 율법 아래 나셨다는 사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그들의 보증인으로서 그들과 연합함으로써 율법을 성취할 의무를 짊어지셨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즉 신앙고백서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하여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시어 율법의 의를 완전히 이루신 것은 보증인으로서 오로지 대리 속죄를 위하여 감당하신 사역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율법 아래 나시고, 우리를 위하여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신 것입니다. 영혼과 육신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는 보증인으로 실행하신 두 번째 비하 사역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님 자녀들을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겪으신 사역을 가리켜 말합니다. 먼저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위하여 희생 제사를 드릴 때, 그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도 고통을 당하셨음을 교훈합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에게 이르시기를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마 26:37,38)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눅 22:44) 되도록 기도하신 것, 또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것은 죄인들의 죗값을 자신의 한 영혼에 받으셨던 고통을 드러내신 것이며 또한 절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저주의 죗값에 따른 형벌을 홀로 짊어지시고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진노로 갈기갈기 찢기며 마침내 버림받는 고통은 저주의 형벌(poena damni)이었습니다. 더 이상은 하나님의 풍성한 교제의 기쁨을 완전히 상실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면전에서 거부당하고 내침을 당하고 진노를 받아야 하는 자의 고통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형벌을 육신을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이 가시로 찢기며, 뱉어진 침으로 오욕을 당하고, 조소와 멸시 그리고 구타로 인하여 몸이 멍들고, 갈증으로 목이 타며, 채찍으로 피부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가운데 십자가의 형벌의 고통을 오감으로 극한 정도로 당하신 일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영혼과 육체의 고난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일이지만, 영원한 형벌을 내리시는 진노의 정도와 실상이 완전히 부여된 극한의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받은 죄의 형벌의 가치는 온 인류가 받아야 하는 형벌을 치르기에 충분한 가치를 가집니다. 그가 받은 형벌은 모든 인류가 받아야 할 형벌을 자신의 영혼과 육체 하나에로 집적하여 받은 가치를 갖습니다. 죽으시고 장사되어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이신 그리스도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가 겪으신 영혼과 육체의 고난에 이어 그가 죽으셨으며 또한 장사되었고, 사망의 권세 아래 잠시 동안 머물러 계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신 후에 장사를 지내셨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이 확실한 사실임을 확증합니다. 그리스도는 장사를 지내신 후에 3일간 무덤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기간 동안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었던 것이라고 신앙고백서는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죽음은 그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으로 육체는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잠깐 놓여 있었지만, 영혼은 즉시로 낙원에 이르셨습니다. 이 이치를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신 ‘아버지 손’은 영광과 은혜로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의 손을 의미하며, 구원받은 성도들이 복을 누리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을 뜻합니다(참조, 시 31:5, 행 7:59, 벧전 4:19). 여기서 신앙고백서는 사도신경의 초기 본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표현, 곧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를 지내신 후에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혁파 신학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구약 선조의 림보에 실제로 내려가셨다는 로마 천주교의 주장이나, 또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기 위하여 악인들의 영혼의 처소에 가셨다는 루터파의 주장에 반대합니다. 이를 생각할 때, 신앙고백서의 이러한 침묵은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의 의미를 개혁파 신학에 따라 예수님이 받으신 십자가의 고통이 실로 극심하였음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6 no image <웨신해설 52> 그리스도의 인성에 임하신 성령 하나님의 은사의 부요성 <8장 3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2871 2015-12-29
그리스도의 인성에 임하신 성령 하나님의 은사의 부요성 <8장 3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8장 3항: “주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그렇게 연합이 된 그의 인성 안에서 성령 하나님으로 거룩하여졌으며, 기름부음을 넘치도록 받으셨다. 그리하여 그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들을 가지고 계셨으며, 성부 하나님께서는 모든 충만함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일을 기뻐하셨다. 그는 끝까지 그처럼 거룩하고 무해하며 더럽혀지지 않았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여, 중보자이며 보증인의 직분을 실행하기에 철저히 준비가 되실 수가 있었다. 이 직분은 그가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며, 그의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이 직분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모든 권능과 심판을 그의 손에 맡기셨으며 그 일을 실행하도록 그에게 명령을 주셨다.” 본 항목에서 교훈하는 주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의 인성에 부여하시는 은사의 부요성입니다. 이 주제를 언급할 필요성과 중요성은 중보자이시며 보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과 관련이 됩니다. 8장 2항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2 위격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갖고 계신 ‘하나님-인간’이십니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의 실체를 취하여 온전한 인성을 지닌 참 사람이시라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본 항목은 그리스도의 중보직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 답을 줍니다. 그 질문은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완전한 참 사람이시라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의 직분을 감당하실 수가 있었는가?”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부패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의 죄를 스스로 속죄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 아래에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동일한 참 사람이시면서도 우리와는 달리 원죄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죗값을 치러야 할 죄가 없으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는 제사장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교훈을 전하시고 그것에 따라 다스리시는 중보자의 직분을 실행하실 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구원하실 가능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점을 말해줄 따름이기 때문이며, 또한 무엇보다도 인성이란 그 자체로 일정한 제한성을 갖는 유한성을 그것의 본질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 항목은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그리스도의 유한한 인성이 어떻게 중보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지에 대해 몇 가지를 교훈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성령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복음 3장 34절,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는 말씀을 통해 확인이 됩니다.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는 일은 기름을 부어주시는 일로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이를 테면 시편 45편 7절의 말씀이 그러합니다: “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받지 않으셨으며, 성령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공적 생애를 시작하실 때,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 위에 임하시는 특별한 사건도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음을 드러내줍니다. 이를 테면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1,22)는 말씀이 지시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신성에 따라서는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임하시는 일은 영원한 사랑 가운데 계시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신비로움을 암시합니다. 동시에 공적 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강림하신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예수님에게 부여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2.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이 직분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중보자의 직분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신앙고백서는 본 항목 중반 이후에서 “이 직분은 그가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며, 그의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이 직분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었다.”고 기술합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서에서 고백하는 두 번째 교리입니다. 부름을 받지 않고는 누구라도 직분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시고 그 인성에 따라 중보자의 직분을 수행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부름을 받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는 아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사장이 된 것과 같아서, 예수님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히 5:4,5,6,10). 3. 중보자의 직분을 수행함에 필요한 모든 은사들을 충만히 받으셨습니다.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세 번째 내용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중보자의 직분을 수행함에 필요한 모든 은사들을 충만하게 넘치도록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들을 가지고 계셨으며, 성부 하나님께서는 모든 충만함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일을 기뻐하셨다.” 이사야서는 이 사실을 미리 보고 말하여 이르기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11:1,2)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과 경외라는 성령의 은사들이 종류에 있어서나 정도에 있어서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이 넘치도록 예수님에게 임하게 될 것임을 교훈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고 한 신약성경의 증언은 이사야에서 예언한 이러한 일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졌음을 확증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성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시며 또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골 1:19). 4.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되, “넘치도록” 받으셨습니다. 앞서 살펴 본 요한복음의 말씀에서, “한량없이”라는 표현은 “단위를 측량하지 못할 정도로 넘치게” 받으셨음을 표현합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넘치도록” 또는 “한량없이”라는 표현이 “무한”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예수님의 인성에 주어진 것이며, 그 인성은 예수님의 인성이라 할지라도 인성 자체로 유한하며 무한을 수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부여되는 은사들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인성의 성질에 따라 주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넘치도록” 또는 “한량없이”라는 말은 단순히 무한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중보자의 직분을 수행하시기에 필요한 어떤 것이든지 그 정도나 범위에 있어서 넘치도록 풍부하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받으시는 모든 은사들의 충만함과 관련해서, 이 모든 은사들이 신적인 속성인 완전함을 갖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과 관련하여 천주교회는 예수님이 위격적 연합으로 인하여, 곧 성자 하나님 한 분께서 신성과 더불어 인성을 취하심으로 인하여, 예수님의 지식은 전지성을 갖는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예수님의 지식은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인하여 하늘에 속한 일들과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신령한 일들에 관한 지식들을 충만히 가지고 있으셨지만, 인성의 유한함에 따라 예수님도 인성으로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계셨으며,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이 그러하듯이 예수님의 지식도 또한 인성에 따라서는 제한이 있었고 성장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지식은 키가 자라듯이 자라났습니다(눅 2:52).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시는 날과 때가 어느 때인지를 모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3:32).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에 따라 절대적 의미에서 모든 것을 언제나 다 알고 계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성에 따라서는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전지하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인성에 따라서는 일정한 제한 아래 계셨습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지식이 중보자의 직분을 실행하는 일에 필요하는 모든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 또 모든 은사들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이나 천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절대적으로 부요하며 넘치도록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그처럼 거룩하고 무해하며 더럽혀지지 않았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여, 중보자이며 보증인의 직분을 실행하기에 철저히 준비가 되실 수가 있었다.”고 교훈한 신앙고백서의 기술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합니다. 아울러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받으시는 은사들은 마치 사람들이 어떤 사물이나 성질들을 어느 한 때에 한 번 받아 가지시고 사용하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예수님의 은사들도 어느 때는 강하게 나타났다가 어느 때는 사라지거나 소멸되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예수님에게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은사들은 결코 변동이나 변함이 없이 영구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결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에게 항상 충만히 임하시고 계시고 떠나는 일이 없으셨으며, 아울러 성령의 기름부음에 의한 은사들도 결코 예수님에게서 떠난 적이 없습니다. 5. 중보자로서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이라는 삼중직과 연결됩니다. 예수께서 성령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것으로 인하여 은사와 은혜를 넘치도록 충만히 누리시는 일은 예수님께서 중보자로서 그의 선지자 직분과 제사장 직분과 또한 왕의 직분이라는 삼중직과 관련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본 항목에서 표현된 신앙고백서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들을 가지고 계셨으며 ... 끝까지 그처럼 거룩하고 무해하며 더럽혀지지 않았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여, 중보자이며 보증인의 직분을 실행하기에 철저히 준비가 되실 수가 있었다. ... 성부 하나님께서는 모든 권능과 심판을 그의 손에 맡기셨으며 그 일을 실행하도록 그에게 명령을 주셨다.” 그는 선지자로서 성령 하나님의 기름부음으로 인하여 지혜와 모든 지식의 부요함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셨으며, 또한 제사장이시며 제물로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고난과 죽음을 겪으셨고 이를 감당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거룩함으로 충만하셨으며, 또한 왕으로서 모든 권능과 심판의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중보자로서의 이러한 삼중직을 실행하시기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이루실 수가 있었으며, 과연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완전하게 이행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성부 하나님의 뜻, 성자 하나님의 실행, 성령 하나님의 기름부음이라는 공동 사역에 의한 실로 복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205 no image <웨신해설 51-3> 그리스도의 두 본질의 위격적 연합 <제8장 2항(3)>
편집부
3111 2015-12-02
그리스도의 두 본질의 위격적 연합 <제8장 2항(3)>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8장 2항: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 2 위격이신,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하나님과 한 본질이시며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때가 차매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그로 인하여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속성들과 일반적인 연약성들을 모두 함께 가지고 계시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그녀의 실체로부터 잉태되셨다. 그 결과 온전하고 완전하며 구별이 되는 두 본성들인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서,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 분리할 수 없게끔 서로 결합되었다. 그 위격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지만 그러나 한 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제8장 2항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세 가지 사실을 교훈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참되고 영원하신 신성에 관한 것이며, 또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몸에서 나신 것과 관련한 것이며, 오늘 살필 마지막 하나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위격적 연합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어서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하여 중요한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신성과 인성이 서로 구분이 되지만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으며, 섞이지도 않고 서로 혼동되지 않는 상태로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의 글은 (1) 먼저 위격적 연합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한 이후에, (2)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관계가 어떠한 지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1. 위격적 연합에 관한 이해 위격적 연합이란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성을 취하시어 사람의 아들, 곧 인자가 되신 일과 관련합니다.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을 취한 인간으로서의 위격을 별도로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성부, 성령과 구별이 되시는 제2위 위격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그 분이 바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동일한 인성을 가지신 완전한 참 인간이시지만, 그의 인격은 인성에 따른 피조물의 인격이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 곧 말씀이 그리스도의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본질의 측면에서 영원한 신성이신 말씀이신 제2위 하나님의 위격이 별개의 인격이 없는 상태의 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를 가리켜 인성이 무인격적 상태로 말씀이신 제2위 하나님 위격에 연합을 이루었다고 하여 위격적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2위 위격에 인성이 무인격적 상태로 연합을 이루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요컨대 위격적 연합은 ‘위격적’이지만 위격들 곧 말씀의 위격과 인성에 따른 피조물의 위격의 연합이 아니며, 또한 신적 본질과 인적 본질의 연합이지만 본질들의 직접적인 연합은 아닙니다. 신성도 신적 위격인 말씀에, 또한 인성도 신적 위격인 말씀에 닿기 때문에 신성과 인성은 위격을 통하여 위격 안에서 연합을 이룹니다. 결국 신성과 인성은 단일한 신적 위격 안에서 친밀하며 영구적인 연합을 이루며, 그리스도는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인간’(God-man)으로 표현이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여 신앙고백서는 “그 위격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지만 그러나 한 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위격적 연합의 이해는 다음과 같은 성경의 구절들에서 지지를 받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여기서 말씀은 제2위 신적 위격 곧 성자 하나님을 가리키며,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인성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또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에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의 말씀은, 다른 곳, “...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히 2:14)이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 1:14)의 말씀과 동일하게 위격적 연합을 가리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실 수가 없습니다. 2. 한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관계 위격적 연합은 그리스도의 위격이 한 분이며, 본질은 신성과 인성의 두 본질들이라는 고백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한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두 본질들은 어떠한 관계로 있는 것일까요? 신앙고백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을 합니다: “그 결과 온전하고 완전하며 구별이 되는 두 본성들인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서,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 분리할 수 없게끔 서로 결합되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신성과 인성이 각각 “온전하고 완전한” 본질로서 서로 구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실로 하여 마치 신성은 인성으로 인하여, 또 반대로 인성은 신성으로 인하여 각 본질이 고유한 성질을 잃어버리거나 영향을 입어서 성질이 변화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이어서 주목할 것은 “온전하고 완전하며 구별이 되는 두 본성들인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서”입니다. “한 위격 안에서”라는 말은 비록 신성과 인성의 두 본질들이 각각 고유한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지만, 구별되는 본질 각각에게 고유한 위격들이 있다는 것이 아님을 교훈합니다. 위격은 말씀이신 아들 하나님 한 분일 뿐입니다. 한 위격 안에 함께 있는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하여 신앙고백서에서 말하는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 분리할 수 없게끔 서로 결합되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 문장은 진공 상태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위격, 두 본질들’의 고백을 거부하고 이를 뒤틀어버렸던 초대교회의 두 이단들과의 토론을 바르게 반영한 글입니다. 하나는 네스토리안주의라 불리는 이단이며, 다른 하나는 유티키안주의라 불리는 이단입니다. 3. 그리스도의 양성에 관한 오해 네스토리안주의자들은 ■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으신 분, 또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christokos)분이라고, ② 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소유한 사람일 뿐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를 둘로 나누어 한 분은 유대인에 의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은 이러한 고난을 받지 아니하였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 두 분, 곧 두 위격이 서로 도덕적으로 연합을 이루어 사람이 보시기에 한 분 그리스도로 나타나신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에베소 공의회(431년)에서는 네스토리안주의의 이러한 교훈들을 거짓된 것으로 부정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네스토리안주의의 오류는 성경의 증거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의 말씀이나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의 말씀은 마리아에게서 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하는 성경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또는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의 말씀들이 그러합니다. 두 위격이 아니라 한 위격이 죽으시는 분이시며 또한 영광의 주이십니다.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부르는 것으로 마리아를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몸에서 나신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의 위격, 곧 말씀을 가지신 분임을 선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분, 곧 하나님의 말씀이 인성을 취하시어 마리아에게서 나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christokos)으로 고백을 하는 것은 얼핏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이나, 그것의 주장의 배경과 의도는 마리아에게서 나신 분이 하나님의 말씀의 위격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므로 거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격이 인성을 무인격적으로 취한 것임을 분명하게 하고, 네스토리안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인성과 인격을 갖춘 한 개별적 인간을 취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한 것입니다. 다른 한편 유티키안주의자들은 네스토리안주의자들에 대한 극단적인 반대의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네스토리안주의자들이 신성과 인성의 두 본질들을 분리하였다는 비판을 하는 반면에, 자신들은 오히려 신성과 인성을 혼합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본질만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초대교회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의 말씀이나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의 말씀이 그리스도에게 신성과 인성이 모두 구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유티키안주의를 잘못된 것으로 정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결코 혼합되거나 합성이 된 상태로 연합되어 있지 않으며, 각각 고유한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명확하게 선언하였습니다. 마치는 말 신앙고백서는 에베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의 신앙고백을 그대로 계승하여 올바르게 “그 결과 온전하고 완전하며 구별이 되는 두 본성들인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서,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 분리할 수 없게끔 서로 결합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한 편으로 네스토리안주의를 비판하면서 “온전하고 완전하며 구별이 되는 두 본성들인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서... 분리할 수 없게끔”라고 진술을 하고 있으며, 또한 유티키안주의를 비판하면서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라고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술에 따라 오직 말씀에 근거한 기독론적 통찰이 있음을 고백하면서 귀한 신앙의 유산을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204 no image <웨신해설 51-2>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몸에서 나신 그리스도 <8장 2항(2)>_김병훈 교수
편집부
3116 2015-08-25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몸에서 나신 그리스도 <8장 2항(2)>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8장 2항: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 2 위격이신,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하나님과 한 본질이시며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때가 차매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그로 인하여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속성들과 일반적인 연약성들을 모두 함께 가지고 계시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그녀의 실체로부터 잉태되셨다. 그 결과 온전하고 완전하며 구별이 되는 두 본성들인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서,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 분리할 수 없게끔 서로 결합되었다. 그 위격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지만 그러나 한 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이번에 살펴볼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관련하여 교훈하는 세 가지 사실 가운데 두 번째 내용입니다. 본 항의 세 가지 교훈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련한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서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에 관련한 것입니다. 이 중 첫 번째와 관련하여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로 오신 성자 하나님이 참되고 영원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또 두 번째와 관련하여 성자 하나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인간의 모든 연약성들도 취하셨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실체로부터 잉태되셨음을 고백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와 관련하여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은 서로 구분이 되지만 분리되지 않으며 섞이지도 않고 서로 혼동되지 않는 상태로 있음을 고백합니다. 두 번째 고백,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교훈은 크게 세 가지 사실을 가르칩니다. (1)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의 성격 또는 정도에 관한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죄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3) 마지막 하나는 인성에 따른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친 마리아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의 성격 또는 정도와 관련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으며, 그 결과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속성들과 일반적인 연약성들을 모두 함께 가지고 계심”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질인 몸과 영혼을 가지고 계시며, 그러한 본질에 따른 속성들을 가지고 계시고, 본질과 관련한 연약성도 가지고 계심을 고백합니다. 즉 완전하며 참된 인성을 가지고 계심을 천명하면서, 그 결과 그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인성에 따른 영혼을 가지고 계심을 확실하게 밝힙니다. 이러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필요한 까닭은 신앙고백서와 다르게 말하는 이단들 때문입니다. 우선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는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극단적인 치중으로 인하여, 또한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지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존과 몸의 형태는 실상이 아니라 단지 환영일 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회는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서 이러한 주장을 이단으로 배격하였습니다. 또한 아폴리나리우스와 같은 이단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영혼을 가지고 계심을 부인하고 대신에 로고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분이 아니시라는 결과를 낳게 됨으로, 교회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을 정죄하였습니다. 교회는 로고스가 성자 하나님의 위격이며 로고스가 몸과 영혼의 인성을 온전히 취하신 것이라고 바르게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을 통해서 확실하게 증거를 받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으며”(요 1:14), 그 말씀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요일 1:1)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가 자라듯이 자랐으며, 그의 지혜는 우리의 지혜가 자라듯이 또한 자랐습니다(눅 2:40). 그리스도의 영혼은 우리의 영혼과 같이 고통을 아는 영혼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몸과 영혼을 온전히 가지시고 계시며, 그로 인하여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속성들과 연약성들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은 그도 보통의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성장의 과정을 통해 성인이 되셨으며, 굶주리고, 목말라하며, 고통과 고난을 아시며, 슬피 울며, 고민하며, 진노하며, 그리고 마침내 죽기도 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뜻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미혹하는 자”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이며 “적그리스도”입니다(요한 2서 1:7). (2) 이어서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하여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다고 고백을 합니다. 신앙고백서의 진술은 구체적으로 이러합니다: “그로 인하여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속성들과 일반적인 연약성들을 모두 함께 가지고 계시지만 죄는 없으시다.” 예수님의 무죄하시다는 것은 우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는 신성을 지니신 성자 하나님이시므로,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시나 죄가 없으십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에서 무죄성이 드러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단지 출생의 기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출생의 영적 상태가 거룩한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십니다(요 3:34).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으시는 일로부터(마 3:16)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시는(롬 1:4) 전 생애동안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고전 15:56)이며 “죄의 삯은 사망”(롬 6:23)임을 교훈하는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 말씀하며(히 9:14),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죄로나 자범죄로나 율법 앞에 흠이 없으신 무죄한 분이심을 가르칩니다. 요컨대 그리스도께서 신성을 가지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무죄성의 원인이며,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출생의 방식은 그의 무죄성의 방편입니다. 예수님의 무죄성에 대한 이러한 올바른 이해는 예수님의 무죄성을 천주교회가 주장하는 마리아의 무흠수태에 근거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무흠수태설 자체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는 잘못된 주장이며, 또 마리아의 원죄 여부에 따라서 예수님의 무죄 여부가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무죄성은 온전히 예수님의 신성과 그에게 임한 성령의 충만성으로 인한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강조하는 일은 결코 인간을 신격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무죄성은 그의 위격인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가 사람이 되시는 신비로운 사건을 이끄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인한 것으로 그 까닭이 마리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일입니다. (3) 끝으로 인성에 따른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친 마리아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관한 교훈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먼저 신앙고백서는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나신 일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8) 또는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는 말씀은 이 때 성령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예수님의 잉태가 동정녀의 태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실행자로서의 유효적 원인의 역할이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를 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 1:35)라는 말씀도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동정녀 잉태라는 기적과 관련한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유효적 원인이었다는 이해를 갖는 것은 특별히 신앙고백서가 모친 마리아와의 관계를 고백하면서 말하는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그녀의 실체로부터 잉태되셨다”는 것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재침례파들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을 마치 성령 하나님께서 어떤 신령한 것을 무에서 창조하여 마리아에게 주입했다는 것을 오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성령 하나님의 역할이 그리스도의 잉태를 가능케 하는 실행적 원인(efficient cause)만이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를 제공하는 질료적 원인(material cause)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맞서서 신앙고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의 실행을 유효적 원인으로 하여 잉태한 마리아의 몸의 실체로부터 받아 형성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재침례파는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몸을 단지 수도관처럼 통과를 했을 뿐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마리아와 아무런 연결이나 상관이 없이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신령한 실체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마리아도 아담의 아래에 있는 죄인일진대,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몸에게서 자신의 몸을 취하면 그도 아담의 원죄를 이어받은 자가 되어 결국 또한 죄인이 될 것이며,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자신의 죄 때문이지 결코 다른 이들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 될 수가 없다는 이해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파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마리아에게서 취하였다고 하여 그가 원죄의 오염을 받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을 합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한 원죄, 곧 부패한 본성이란 인성 자체의 본질이 아니라 인성에 부가된 성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케 하실 때, 성령께서 잉태된 몸을 타락 이전의 아담의 순전하고 무흠한 상태로 거룩하게 하시어도 그리스도의 인성에는 아무런 해가 없으며, 또한 그렇게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마리아의 살과 피에 참여하신 분이 되셨다는 것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무죄성은 조금도 손상을 받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벨직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는 육체를 좇아 다윗의 허리의 열매이며, 육체를 따라 다윗의 씨에서 나셨으며, 처녀 마리아의 태의 열매이며, 여인에게서 나셨고, 다윗의 가지이며,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이며, 유다지파에서 나셨으며, 육신을 따라 유대인들에게서 나셨으며,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으니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점에 있어서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18항 가운데)고 고백을 합니다. 또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도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고백이 뜻하는 바는 “성자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혈과 육으로부터, 참된 사람의 본질을 취하셨으며, 이러한 일은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뜻하며, 그 결과 그는 다윗의 참된 후손이 되셨으며,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면을 제외한 다른 모든 면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음을 뜻합니다”(35문답)과 동일한 교훈을 줍니다. 이러한 개혁파의 고백들은 성령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를 제공하는 원인으로 보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의 아버지가 된다는 소시니안들의 주장을 전적으로 배격을 합니다. 이러한 개혁파의 고백은 이 자리에서 살피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와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그녀의 실체로부터 잉태되셨다.”고 진술이 되고 있습니다. 요컨대 그리스도는 인성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계시다는 점에서 아담과 연결이 되고 있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아담의 후손들이 죄에 참여하게 되는 언약 안에 속박을 받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에게서 취한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죄의 오염으로부터 거룩하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실체를 취하되, 부패한 성품은 전이되지 않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어 이루어졌다는 기적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고백하는 올바른 신학적 의미입니다.
203 no image <웨신해설 51> 하나님의 아들의 참되고 영원하신 신성(제8장 2항<1>)_김병훈 교수
편집부
3205 2015-07-21
하나님의 아들의 참되고 영원하신 신성(제8장 2항<1>)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8장 2항: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2위격이신,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하나님과 한 본질이시며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때가 차매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그로 인하여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속성들과 일반적인 연약성들을 모두 함께 가지고 계시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에서 그녀의 실체로부터 잉태되셨다. 그 결과 온전하고 완전하며 구별이 되는 두 본성들인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서,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 없이, 분리할 수 없게끔 서로 결합되었다. 그 위격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지만 그러나 한 분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본 항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관련하여 크게 세 가지 사실을 교훈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한 교훈입니다. 그리스도로 오신 성자 하나님은 참되고 영원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한 교훈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심으로써 인간의 모든 연약성들도 취하셨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실체로부터 잉태되셨음을 고백합니다. ■마지막 하나는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에 관련한 교훈입니다. 유일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은 서로 구분이 되지만 분리되지 않으며 섞이지도 않고 서로 혼동되지 않는 상태로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이 세 가지 교훈들 가운데 첫 번째 것과 관련하여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2위격이신,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하나님과 한 본질이시며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니다. (1)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2위격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 곧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 구별이 되십니다. 이 구별은 두 가지 내용으로 확인이 되는데, 질서적인 면에서 그러하고 사역적인 면에서 그러합니다. 먼저 질서적인 면에서 성부 하나님께서는 제1위격으로, 성자 하나님께서는 제2 위격으로, 성령 하나님께서는 제3위격으로 구별이 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다른 두 위격들 가운데 누구에게서도 기원하지 않으시는 반면에,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출생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게서 나오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께 대하여 아버지이시고, 성령 하나님께 대하여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대하여 아들이시고, 성령 하나님께 대하여 성부 하나님과 함께 보내시는 분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와 성자 하나님께 대하여 보냄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특징을 반영하여 성부 하나님에게는 으뜸의 자리를 돌리고,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 차례로 다음의 자리를 돌립니다. 또한 사역적인 면에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은 서로 구별이 되십니다. 본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대외적으로, 곧 피조계를 향하여 행하시는 사역은 각 위격의 차이로 분리되지 않고 각 위격 모두에게 똑같이 공통적입니다. 그렇지만 질서와 제한에 따라서 세 위격들께서 사역적으로 구별이 되십니다. 즉 자신의 기원을 스스로에게서 갖는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역의 질서도 스스로 갖습니다. 반면에 성부 하나님에게서 출생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사역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요 5장 19절(“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에서 하신 말씀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이러한 구별성을 반영합니다. 아울러 제한에 따라서도 세 위격들의 사역은 구별이 됩니다. 어떤 사역은 오직 어떤 위격에게만 돌려지는 제한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나오는 음성은 성부에게로, 이 땅에 성육하신 일은 성자에게로, 비둘기 같이 내리신 분은 성령에게로 각각 돌려집니다. 이러한 사역들은 결코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돌려지는 것이 아닙니다(마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2) 이어서 성자 하나님의 신성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신앙고백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2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하나님과 한 본질이시며 동등하심”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질서적이며 또한 사역적인 면에서 세 위격들이 서로 구별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구별로 인하여 결코 신성에 있어서 어떠한 차이도 없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선언합니다. 즉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출생하신다는 점을 들어, 또는 사역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일을 보고 행하시는 대로 행한다는 점을 들어, 성부 하나님보다는 다소 부족하거나 열등하다는 주장은 결코 성경의 교훈에 합당한 것이 아님을 교훈합니다. 많은 이단들은 위의 두 사실이 성자 하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고 말하지는 않으면서도, 종종 그것들을 성자 하나님의 열등성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릇되게 주장을 합니다.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바대로 성자 하나님께서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하나님과 한 본질이시며 동등하시다는 고백은 이러한 이단적인 주장에 어떠한 틈새도 주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권세와 존귀와 능력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행하시는 파생적이거나 의존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들께서는 신성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한 분이시며, 성부 하나님의 신적 본질과 성자 하나님의 신적 본질은 숫적으로 하나이며 동일합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에게서 출생하셨다는 것은 시간적인 차이를 조금도 내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원으로부터 항상 함께 계시는 분으로서 신적 본질이 같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에게서 출생하신 일을 가리켜 ‘영원출생’이라 말합니다. 신적 본질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위격적인 구별을 가리키는 출생이란 시간적인 차이를 갖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본질, 신성 안에서 두 위격 사이의 관계를 구별하는 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하나님과 한 본질이시며 동등하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성경의 증거는 대단히 풍부합니다. 우선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습니다(참조: 시 45:6,7절과 히 1:8,9; 사 7:14; 9:6; 렘 23:5,6; 33:16; 시 95:9과 고전 10:9; 시 102:26과 히 1:10,11; 사 6:9,10과 요 12:40,41; 사 45:23과 롬 14:11; 욜 2:32과 롬 10:13; 시 68:18과 엡 4:8,9; 요 1:1, 14; 요일 5:20; 롬 9:5; 빌 2:6; 딤전 3:16; 딛 2:13,14).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아들에게도 또한 돌립니다(잠 8:22,23; 사 9:6; 마 11:27; 13:32; 18:20; 28:20; 요 1:1; 3:13; 5:17; 8:58; 16:30; 17:5; 21:17; 골 2:9; 딤후 1:9 히 1:3,11,12; 7:3; 계 1:4,5,8; 2:23; 11:17 등). 아울러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돌립니다(잠 8:27이하; 사 40:12; 44:24; 눅 6:19; 8:46; 요 1:3; 2:19; 5:17, 21; 10:18; 11:41; 14:1; 행 4:7,10; 롬 1:4; 엡 4:5; 5:25과 사 54:5;골 1:17; 히 1:2,3,10 등).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를 받으십니다(시 2:12; 요 5: 22,23; 행 7:59; 9:14; 고전 1:2; 빌 2:9-11; 히 1:6; 계 5:13 등). 이처럼 성경의 증거는 아들 하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신적 본질이 동일하며 숫적으로 하나이시며 동등하시다는 교훈을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이 확고하게 증거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성경의 교훈을 오해하여 그릇된 해석을 시도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장 36절(“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을 들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은 부활 이후에 이루어진 일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는 본래 신적 본질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지 못하시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신적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위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세계를 지으신 분이시며(히 1:2; 요 1:3), 그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요 1:1,1). 사도행전의 말씀은 구속사의 경륜에 따라서 그가 고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제는 영광의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교훈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승귀를 가르치는 이러한 구절들의 표현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시는 비하의 과정과 맞물려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시는 흐름에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참되며 영원한 신성을 부인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그러하듯이 한낱 인간으로서 인성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인성은 참된 인성이지만, 또한 그는 신성도 함께 가지신 분이십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이 부인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신-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중보직을 감당하심을 말할 때,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보다 열등하신 것으로 말하지만, 말씀(로고스)으로서 곧 성자 하나님의 제2 위격으로서 영원 안에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성자 하나님으로서는 성부 하나님에 비해 조금도 부족하거나 열등하지 않습니다. 그는 완전하며 참되며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성부 하나님과 신적 본질이 동일하지며 동등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 1:15)라는 말씀은 그가 만들어진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자(프로토크티스토스, προτοκτίστος)라는 뜻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경은 결코 그리스도를 가리켜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계 3:14)라고 일컫지 않았을 것입니다.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는 표현에서 ”먼저 나신 이“(프로토토코스, πρωτότοκος)는 신적 본질의 측면에서 만물을 만드신 분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만물의 시작이시며 근원이신 분으로서의 권세를 말하기 위한 표현이며, 구속적 경륜의 측면에서는 만물을 소유하신 장자권을 가지신 분이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과 관련한 신앙고백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해설할 내용은 아들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自神, God-of-Himself, autotheos)이시라는 교훈입니다. 앞서 말한 바처럼 아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제2 위격 하나님이십니다.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영원 출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마치 아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이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신성을 전이 받았기 때문인 듯이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출생하시는 일은 성부와 성자의 위격적 관계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지만 본질의 측면과 관련해서는 성자 하나님은 본래부터 영원 안에서 스스로 하나님이십니다. 신적 본질이란 쪼개어 나누거나 두 배로 늘리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에게서 출생하시는 위격적인 기원성을 가지시지만, 신적 본질에 있어서는 스스로 하나님이신 신성의 자기 기원성을 가지십니다. 이상과 같이 본 항목에서 고백하고 있는 “제2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와 관련하여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하나님과 한 본질이시며 동등하심”에 대한 신앙고백서의 교훈은 성자 하나님에 대한 실로 아름답고 오묘한 진리를 간략한 표현으로 담아내고 있는 소중한 신앙 항목이라 할 것입니다.
202 no image <웨신해설 50> 중보자 그리스도의 세 직분과 그의 백성 <8장 1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3477 2015-06-09
중보자 그리스도의 세 직분과 그의 백성 <8장 1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예수님은 인성에 따라서 참 사람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나, 그 인성을 취하시고 그 가운데 계신 분이 독생자 성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 “예수님의 중보 사역에 따른 영생의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직 성부 하나님께서 일정한 범위에 따라 정하여 놓으신 숫자로 제한된 자들에게만 주어져” 제8장 1항: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따라 자신의 유일한 독생자, 주 예수님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곧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으로, 또 교회의 머리와 구주로, 또 만유의 후사로, 그리고 세상의 심판자로 선택을 하시고 정하신 일은 하나님 자신께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 위에, 영원 전부터 한 백성을 주시어 그의 후손이 되게 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때가 되었을 때에 구속함과 부르심과 칭의와 성화와 영화를 받도록 하셨다.” 본 항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사실을 교훈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의 세 직분의 일로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에게 한 백성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과 관련한 첫 번째 교훈은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① 하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을 취하신 독생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님은 인성에 따라서 참 사람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나, 그 인성을 취하시고 그 가운데 계신 분이 독생자 성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성자 하나님, 곧 로고스께서는 하나님과 자신의 백성 사이의 중보자로서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신앙고백서는 이와 관련하여서는 다음 항들에서 자세한 교훈을 줍니다. 다만 본 항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른 중보자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밝히고 강조합니다. ② 이어서 첫 번째 교훈이 말하는 중요한 내용은 성자 하나님께서 중보자로 오신 일이 바로 성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때에 즈음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이루어진 일이며(행 2:23,24), 그것은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된 일이라고(벧전 1:18-20) 설교한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 것이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정하심으로 나타난 일임을 말해줍니다. 중보자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생명책이 창세 때에 이미 주어졌다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계 13:8)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39 참조; 사 42:1)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구속 사역이 임의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교훈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는 구원이 바로 성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③ 이제 첫 번째 교훈에서 배우는 마지막 내용은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의 세 직분으로 설명이 되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6). 중보자의 중보사역이 선지자, 제사장, 왕의 세 직분들로 실행이 되는 것은 중보의 대상인 인간에게서 그 이유가 주어집니다. 세 직분들은 본래 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부여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타락한 이후에 죄의 효과로 인하여 지식과 이해력에 손상을 입고 무지와 오류를 범하게 되었고, 거룩과 공의를 상실하고 싫어하며 영적이며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되었고, 또한 다른 피조물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스리는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죄로 인하여 이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의 직분을 행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는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실행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선지자로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교훈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행 3:22; 참조 신 18:15; 사 49:12, 61:1,2; 눅 4:21). 또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자신의 백성들을 대표하며 그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려서 중보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 참조 히 5:5, 7:27, 9:24, 10:7). 그리고 왕으로서 그리스도(시 2:6)는 만유의 주로서 피조물을 다스리시며 인간에게 타락 전에 본래 주어졌던 지배력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특별히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의 왕직에 속한 사역의 활동과 맞물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와 구주로, 또 만유의 후사로, 그리고 세상의 심판자로” 선택하시고 정하셨음을 고백합니다. 교회의 머리로서 그리스도는 교회에 부으시는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그의 뜻대로 영적이며 유기젹인 방식으로 다스리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한 은혜의 왕국에 속한 통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우주의 통치자로서 만물을 다스리시되 자신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만물에 대한 통치를 행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마귀 원수와 사망을 심판하신 후에, 만유의 후사로서 그의 나라를 영원토록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세 직분들의 사역과 관련하여 특별히 염두에 두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중보자의 사역을 이러한 세 직분들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초대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의 문헌 가운데서도 이미 발견이 됩니다. 가장 구체적으로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그리스도의 속죄론와 왕적 사역을 강조하게 되면서, 마침내 칼빈의 1539년판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세 직분에 따른 구별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의 이러한 구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이해와는 달리 학자들마다 생각이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 직분이 다른 직분들과 뚜렷이 구별이 안 되는 면이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한 말씀 사역은 복음의 선포로서 선지자의 직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나, 그가 말씀으로 왕적 통치를 행한다는 면에서는 왕직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기적은 그의 왕적 권세를 드러냄과 동시에 제사장적 긍휼의 사역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세 직분으로 구별하여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은 세 직분 자체가 혼동이 되거나 하나로 축소될 수가 없이 구별된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성부 하나님과 관련하여 세 직분을 부여받아야 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이 세 직분을 행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타락한 이후에 무지와 어리석음과 오류에 빠져 있으며, 불의와 사욕에 이끌려 가며,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인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죄인을 구속하기 위하여 중보자는 지식을 바로 잡기 위한 선지자 사역이 필요하며, 또 불의와 사욕에 의한 허물과 형벌을 면할 수 있도록 하는 제사장 사역이 필요하며, 아울러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오히려 심판하는 왕적 사역이 필요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여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세 가지 직분을 완전하게 이루신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2) 신앙고백서는 본 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과 관련하여 또 다른 내용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백성에 대해 교훈합니다.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신앙고백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한 백성”이 있으며 그의 “씨” 곧 후손이 있음을 교훈합니다. 이것은 중보의 대상이 임의로 정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일정한 범위에 따라 그 수가 정하여 놓으신 범위에 속한 자들임을 밝혀 줍니다. 신앙고백서는 본 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직을 교훈하면서 먼저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구원에 대해서 교훈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어서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영생의 구원이 보편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모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에게만 주어짐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지극히 성경에 일치하는 교훈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는 계시를 요셉이 꿈에서 받을 때 이미 계시가 되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서 구원할 자들은 보편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라는 일정한 범위로 제한이 된 자들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중보기도를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속한 자들을 위하여 한다고 말씀 했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제한된 무리들을 가리켜 “씨” 또는 “후손”이나 “자녀”로 표현을 합니다(참조, 사 53:10; 롬 9:8). 이러한 신앙고백서의 교훈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중보자로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가를 깨달아 하나님께 깊은 감사의 찬송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201 no image <웨신해설 49> 은혜언약과 신약 <7장 6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3141 2015-05-06
은혜언약과 신약 <7장 6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7장 6항: “복음 아래에서,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드러나시게 되었을 때, 이 언약이 실행되는 규례들은 말씀의 설교와 세례와 주의 만찬인 성례들의 집행이다. 이 규례들이 비록 수에 있어서는 더 적으며, 더 단순하게, 그리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영광은 두드러지지 않게 집행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안에서 언약은 더 큰 충만함과 증거와 영적인 효과성을 가지고 모든 민족들, 곧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제시된다. 이 언약은 신약이라고 일컬어진다. 따라서 실체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은혜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며, 여러 다른 세대 아래에 하나의 동일한 언약이 있는 것이다.” 본 항은 앞선 5항에서 언약의 세대를 구별한 율법의 시대와 복음의 시대 가운데에서 복음의 시대에 대해 교훈합니다. 5항은 한편으로는 율법의 시대와 복음의 시대가 서로 어떻게 구별이 되는 지를 보여주면서도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두 시대가 실체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교훈하여 줍니다. 특별히 5항은 구약이라 일컫는 율법의 시대에 대해 교훈하는 반면에, 본 6항은 복음의 시대인 신약의 관점에서 은혜언약의 특징을 구약과 비교하여 교훈합니다. 은혜의 방편으로 주어진 성례 본 항이 먼저 언급하는 복음시대의 특징은 성례와 관련한 것입니다. 지난 5항에서 신앙고백서는 율법 아래에서는 약속들, 예언들, 희생제사들, 할례, 유월절 어린 양들과 같은 모형들과 규례들이 있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제시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서로 다르게 몹시 다양한 방식으로 행하여졌습니다. 그러나 복음시대에서 은혜언약은 말씀의 설교와 세례와 주의 만찬인 성례들의 시행이라는 세 가지 규례들로 실행이 됩니다. 이 세 가지 규례들은 성례라 일컬어지며, 복음시대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전달하시는 방편들입니다. 세 가지에 불과한 방편들은 구약의 규례들에 비하여 수적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게 적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시행의 방식도 매우 단순하며, 또한 외적으로 나타나는 영광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말씀의 설교는 성경의 교훈을 가르치고 전달하는 단순한 방식으로 행하여집니다. 또한 성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관련이 된 신자의 위치를 견고하게 하며, 세상에 속한 자들과 구분하고, 서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제정한 표(sign)와 인(seal)입니다. 이것은 숫적으로 두 가지이며, 오직 세례와 성찬뿐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중생과 죄 씻음 받았음을 의미하며 단지 물로 적시거나 붓거나 물속에 잠그는 방식으로 행하여집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그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부활 영생의 은혜가 믿는 신자에게 주어진다는 은혜에 대한 보증의 표입니다. 이에 참여하는 자의 영혼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하시어 그들과 연합하시고 영혼을 먹이시고 자라게 하시며, 성도들은 서로 교통하며 더욱 그리스도의 교훈에 따라 살 것을 결심합니다. 이처럼 복음시대에서 은혜언약이 실행이 되는 규례는 세 가지 성례뿐이며 그것의 방식도 단순하고 외적인 영광도 화려하지 않습니다. 신약의 성례가 규약의 규례들에 비하여 이와 같은 까닭은 신약의 성례 가운데 어떤 것도 짐승의 피를 흘리는 제사의 형식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 아래에서는 피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지만(히 9:22), 신약의 성례는 어떤 것도 피흘림의 제사를 행하지 않습니다. 구약과 신약 규례의 차이와 대조 구약과 신약은 뚜렷한 차이와 대조를 갖습니다. 구약의 규례들이 피흘림의 희생제사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은 참된 대속을 이루지 못하며 단지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할 뿐이며, 또한 율법을 성취할 능력도 제공하지를 못합니다. 그것 자체로 인하여서는 누구도 의롭게 될 수가 없으며, 또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구약의 규례들은 그 자체로는 흠이 없는 것이지만, 구원을 주는 일에 있어 무능하며 연약합니다. 그러한 구약의 규례는 실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키는 그림자이므로 장차 폐기될 것이며, 복음의 실체가 오실 때 개혁이 되었습니다. 그것의 영광은 일시적인 것이며, 모세의 얼굴에서 빛났던 영광처럼 사라질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신약의 성례는 비록 구약의 규례들에 비해 시간적으로 뒤에 오는 것이지만, 성례가 가리키는 바가 실체이며 그 실체인 그리스도로 인하여 제정이 된 것이기 때문에 존엄과 완전함에 있어서 그리고 증거와 영적인 효과성에 있어서 구약의 규례들에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은혜언약을 충만하게 실행합니다. 그리고 신약의 성례는 구약의 규례들과는 달리 결코 개혁되거나 폐기되는 일이 없습니다. 신약의 성례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어 하나님을 직접 대하고 교통을 하는 날이 이르기 까지 영구적으로 지속될 것입니다. 또한 구약의 규례들은 옛 언약을 반영하는 반면에, 신약의 성례는 새 언약을 반영합니다. 따라서 돌 판에 쓰인 계명에 의한 것과 같은 구약의 규례들과는 달리, 신약의 성례는 굳지 아니하고 부드러운 새 영과 새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기록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규례를 행하는 은혜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것을 통해 그러한 은혜를 부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렘 31:31-33; 겔 36:26-27). 뿐만 아니라 구약의 규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 물론 이스라엘에 편입해온 극소수의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 주어진 것이지만, 신약의 성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차별이 없이 주어질 것이며(롬 3:22), 또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롬 10:13)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규례들과 신약의 성례 사이에서 확인이 되는 이러한 차이는 각각의 효과성에 있어서, 성경에서 하갈과 사라의 비유를 통해 보여주는 바와 같이(갈 4:24) 종의 신분과 주인의 신분으로, 또는 의문과 영으로, 또는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으로, 정죄의 직분과 의의 직분으로(고후 3:6-9)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규례와 신약의 성례가 가리키는 언약은 실체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언약이 아닙니다. 물론 구약의 규례들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오시기까지, 복음과 대립하는 율법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교회론적으로 예배에 있어서도 그림자적인 의식을 행하는 수고를 요구하고, 또한 이스라엘 민족들과 성소라는 지정된 장소와 같은 외적인 요소들에 묶여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규례들에게 있는 이러한 측면들을 가지고 구약이 신약과 달리 은혜언약이 아니라고 하거나, 또는 구약을 신약과 대립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은혜언약으로서의 구약의 실체를 결정하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른 우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언약으로서 동일한 구약과 신약 본 항은 구약을 행위언약, 신약을 은혜언약으로 보는 오류에 대한 경계에 덧붙여, 구약과 신약을 모두 은혜언약으로 보되 그것을 서로 실체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는 것도 역시 잘못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실체가 서로 다른 두 개의 은혜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며, 여러 다른 세대 아래에 하나의 동일한 언약이 있는 것이다.” 본 항이 교훈하는 바는 비록 은혜언약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과 이후에 각각 다르게 실행이 되므로 인하여 구약과 신약이 구별이 되고 있지만, 그러한 구별을 하나의 은혜언약이 실체적으로 다른 종류로 나뉘는 것인 양 그릇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마치 하나의 포유류라는 동물의 분류 아래 소와 말이 서로 다른 종으로 구분이 되는 것처럼, 하나의 은혜언약아래 구약과 신약이라는 서로 다른 종이 구분이 되는 것으로 보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결코 소와 말이 다른 것처럼 다른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다른 실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시기 이전과 이후라는 시대의 차이로 인하여 본질적이지 않으며 또한 필연적이지 않은 요소들과 관련하여 구별이 될 따름입니다. 비록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며(요 1:17), 율법은 먹으로 쓴 것이며 복음은 영으로 쓴 것이고, 또 율법은 죽이는 것이며 영은 살리는 것이고, 율법은 정죄의 직분이며 복음은 의의 직분이지만(고후 3:6-9), 이러한 차이들은 구약이 실체적으로 신약과 다른 은혜언약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시대의 차이로 인하여 다른 모양으로 은혜언약이 실행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족장들에게 주어진 언약, 곧 은혜언약을 포함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며(신 4:6-8; 7:6-8), 율법의 정죄는 신약의 도덕적 명령과 마찬가지로 죄를 깨닫도록 하여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 나오도록 하여(롬 10:4; 갈 3:24),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의식법에 의해 은혜언약이 약속하는 죄의 용서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10:12; 골 2:16-17). 요컨대 본 항은 구약이 그림자로만 제시하였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셔서 모세의 의식적인 율법을 폐하신 일과, 또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께서 충만케 임하심으로 은혜의 복음을 더욱 더 명료하게 드러나게 하신 일들로 인하여, 신약과 구약을 구별하지만, 그것이 모두 동일한 은혜언약의 실행이 실체적으로 달라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단지 세대의 차이로 인하여 나타난 것임을 제시하면서, 구약과 신약이 은혜언약으로서 동일한 언약임을 교훈합니다.
200 no image <웨신해설 48> 은혜언약과 구약 <7장 5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3729 2015-02-10
은혜언약과 구약 <7장 5항>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인 율법 시대에서나,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한 이후인 복음의 시대에서나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어” “신약 시대는 복음의 순종을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반면에, 구약 시대는 율법의 순종을 통하여 행위로, 곧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잘못된 판단 갖지 않아야” 7장 5항: “이 언약은 율법의 시대와 복음의 시대에서 각각 다르게 실행이 되었다. 율법 아래에서 그것은 약속들, 예언들, 희생제사들, 할례, 유월절 어린 양, 그리고 유대 백성들에게 전달된 여러 모형들과 규례들에 의해 실행이 되었으며, 이 모든 것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성령의 활동으로 인하여 그 당시에 약속된 메시야에 대한 신앙으로 선택받은 자들을 가르치고 자라게 하기에 충분하며 유효적이었다. 그 약속된 메시야로 말미암아 그들은 완전한 죄 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 이를 구약이라고 일컫는다.” 본 항은 은혜 언약의 실행이 두 세대를 따라 진행이 되었음을 교훈합니다. 하나는 율법의 시대이며, 다른 하나는 복음의 시대입니다. 이처럼 두 세대를 따라 은혜 언약이 실행이 되었다는 설명은 두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도록 합니다. 곧 은혜 언약은 실체적으로 하나뿐이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율법의 시대와 복음의 시대라는 두 세대들의 구별은 은혜 언약의 본질에 관한 구별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 언약의 실행 방식의 구별이라는 사실입니다. 본 항은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하나뿐인 은혜 언약이 율법의 시대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실행이 되었는지를 교훈합니다. 1. 두 세대에 걸쳐 실행된 은혜 언약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할 때에 은혜 언약이 비록 두 세대들을 따라 실행이 되었지만, 율법의 시대와 복음의 시대의 언약이 본질상 동일한 은혜 언약이라는 사실을 먼저 유념하여야 합니다. 은혜 언약의 당사자 한 편은 은혜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또한 다른 한 편의 대상자는 타락하여 심판 아래 놓인 죄인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자들입니다. 이러한 언약 대상자들의 관계는 언약의 기초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며 그것에 근거한 하나님의 계획과 실행의 중심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은혜 언약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작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들을 불러 그들을 선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의 복을 누리도록 하는 언약은 오직 하나님의 불변하며 신실한 성품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영원 전에 작정을 하시고 세상의 만물의 시작과 더불어 그의 작정된 계획을 실행하실 때에, 그것을 오직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십니다. 따라서 창조 때로부터 시작되어 새롭게 재창조의 역사를 베푸시는 구원의 경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하여 실행이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자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어 중보자의 구속사역을 이 땅에서 행하시기 이전의 시대나, 이후의 시대나 모두 똑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주어짐을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이전인 율법의 시대에서나, 그리스도께서 지상의 사역을 다 마치시고 승천한 이후인 복음의 시대에서나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즉 구약 시대에서나 신약 시대에서나 구원을 받는 방법은 오직 하나, 곧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뿐입니다. 2.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 하신 말씀이나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는 말씀 등은 구약 시대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이 그리스도를 교훈하고 있으며, 이 시대의 신앙 인물들이 신약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음을 말하여 줍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 10:24)고 말씀하신 것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로 인한 구원 사역이 이미 구약의 시대에 계시되어 있었음을 함축합니다. 여기서 그것이 가리키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마귀의 세력을 궤멸하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든지 복음 아래에 있든지 구원을 받는 사람은 항상 회개하고, 오직 한 분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국 율법 시대의 언약도 복음 시대의 언약과 마찬가지로 언약의 본질상 아무런 차이가 없는 은혜 언약이라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신약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구약 성도들의 중보자도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은혜 언약의 작용 원리는 동일하며, 회개와 믿음을 조건으로 하여 은혜의 생명이 주어지는 약속도 동일합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는 복음의 순종을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반면에, 구약 시대는 율법의 순종을 통하여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잘못된 판단을 갖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을 비롯한 수많은 구약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그들이 율법의 순종이라는 행위의 대가, 곧 공로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 시대의 구약은 결코 행위 언약이 아닙니다. 율법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외적인 형식이며 특권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그들이 자신들의 의로움을 증거하기 위해 사용할 기준이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율법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임을 증거합니다(롬 3:20; 7:7; 8:3) 율법 아래에 있는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의지하는 믿음뿐입니다. 3. 예수님 오기 이전의 은혜 언약 이렇듯이 은혜 언약의 본질은 율법 시대와 복음 시대에서 동일하다고 할지라도, 신앙고백서가 교훈하고 있듯이 이 언약은 “율법의 시대와 복음의 시대에서 각각 다르게 실행”되었으므로, 두 시대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인지를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신앙고백서는 율법 아래에는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제시하는 약속들, 예언들, 희생제사들, 할례, 유월절 어린 양들과 같은 모형들과 규례들이 있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며 아무도 율법의 순종을 통한 의에 이를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율법 시대의 구약이 행위 언약이 아니라 은혜 언약의 은혜를 제시할 수 있는 까닭은 이러한 모형과 그림자들이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구약 시대를 구별하는 두 가지 시대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이 율법 이전의 족장시대이며, 다른 하나는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까지의 시대입니다.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족장 시대에 주어진 은혜 언약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약속의 말씀을 통해 드러납니다(창 15:6; 롬 4:3). 이 약속은 무할례시에 주어진 것이며(롬 4:11), 또한 할례를 통해 그 약속의 보증이 주어졌습니다(창 17:4,6,11). 할례는 육신을 베는 상징을 통해 부패한 인간에게는 중생과 회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뜻하는 표지였습니다. 전적인 은혜의 절실함과 필요를 뜻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베푸신다는 약속에 대한 소망과 믿음의 표지였습니다. 족장 시대의 언약은 모세 시대의 율법의 형태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족장 시대와 구별이 되는 구약의 두 번째 시대인 율법의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셨으며, 그들을 모세의 인도에 따라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포하시며 그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신앙과 회개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상징하는 하늘의 유업과, 또 유월절 어린 양과 제사의 규례 등을 통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4.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 율법 시대의 율법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것을 약속한 행위 언약이 아닙니다. 비록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5; 시 37:27)는 말씀에서 보듯이, 외형적으로는 율법의 순종을 통한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 곧 행위 언약을 말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행위 언약의 새로운 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의 요구가 어떠한 지를 깨닫고, 이어서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자임을 깨닫고, 죄로 인한 심판의 저주 아래에 놓인 자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용서만이 생명의 길인 줄을 알고,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자를 통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7)고 말함으로써, 율법이 은혜 언약을 폐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은혜 언약의 실행을 예비하기 위한 것임을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설명을 모아서 정리해보면, 율법 시대가 족장 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은혜 언약 아래 있다는 사실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는 모세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나태내심으로써 모세 시대의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포되면서도 동시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는 율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갈 3:24)이며,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롬 10:4)이 되신다는 점과 관련이 됩니다.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약속이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마지막 하나는 각종 율법에 따른 모형들과 의식법적인 규례들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예표적인 구약의 의식법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완성이 되었을 때 폐하여졌습니다. 5. 은혜 언약의 유효성 이제 마지막으로 신앙고백서는 본 항목에서 교훈하는 바는 성령 하나님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율법 시대의 예표와 모형들이 “그 당시에 약속된 메시야에 대한 신앙으로 선택받은 자들을 가르치고 자라게 하기에 충분하며 유효적이었다”고 교훈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요? 신앙고백서는 구약 시대의 예표적인 수단들을 통해서도 약속된 메시야의 신앙을 갖도록 하며, 그 신앙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고 또 구원에서 자라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 가능한 까닭에 대해 “성령의 활동으로 인하여”라고 답을 합니다. 은혜 언약은 본질상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베풀어집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실행이 되는 오로지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이렇듯이 구원은 인간이 행하는 어떤 전제적 조건이나 공로가 없이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은혜 언약으로 인하여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인격성이 파괴되거나 인격적 활동이 무시되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과 마음과 정서와 의지를 활성화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중보를 간절히 소망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하십니다. 이처럼 은혜 언약을 선택받은 자들에게 적용하는 성령 하나님의 활동은 은혜 언약을 계획하시는 성부 하나님과 그 계획을 보증하시고 실행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사역과 더불어, 은혜 언약이 참으로 은혜이게끔 하는 근거입니다. 율법 시대에서도 은혜 언약이 실행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서도 활동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구약에서의 성령 하나님의 활동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오셔서 구속의 사역을 성취하신 이후인 신약 시대에서의 성령 하나님의 활동에 비해 효력이 제한적이지만, 신앙 고백서가 교훈하듯이 구약에서도 성령 하나님의 활동은 구속의 효과를 이루기에 충분하였으며 또한 유효적이었습니다.
199 no image <웨신해설 47> 언약과 유언_김병훈 교수
편집부
4284 2015-01-13
언약과 유언 <7장 4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7장 4항: “이 은혜언약은 성경에 종종 유언이라는 이름으로 진술되어 있다. 이것은 유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영원한 기업과 그것으로 유증이 되는, 그것에 속한 모든 것들과 관련한 것이다.” 본 항은 하나님의 은혜언약이 성경에 유언이라고도 불리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 까닭을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은혜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비로소 성취가 됩니다. 이처럼 은혜언약의 생명의 기업과 그것에 속한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이는 주어지지 않으므로, 신앙고백서는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언약을 ‘유언’이라는 이름으로 진술하고 있다고 교훈을 합니다. 1. ‘언약’인가, ‘유언’인가의 문제 그런데 신앙고백서처럼 언약을 유언으로 부르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이의를 제기하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것은 이상한 반응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성경이 스스로 언약을 유언이라고 일컫고 있다면, 성경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언약은 유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신학을 성경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신학을 앞세워 성경의 진술마저도 옳고 그름의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약을 유언으로 일컫는 것과 관련해 이견이 나오는 까닭은 신약성경이 표기하고 있는 그리스어인 ‘디아세케’(διαθήκη)가 어떤 의미로 쓰여 있는 것인가에 대해 다소 논란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디아세케’(διαθήκη)라는 단어의 의미와 관련한 성경 해석상의 논란인 것입니다. 한국어나 영어로 번역된 성경이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유언’으로 표기할 경우, 그것은 성경이 사용한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여 제시한 것입니다. ‘디아세케’를 유언으로 번역을 하는 것에 반대하는 견해에 따르면, ‘디아세케’(διαθήκη)라는 그리스어가 ‘언약’과 관련하여 표기가 된 것은 ‘디아세케’(διαθήκη) 자체의 의미가 언약을 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히브리어(일부 아람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이 히브리어 ‘베리트’(ברית)를 번역하기 위하여 ‘디아세케’(διαθήκη)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본래 언약을 뜻하지 않는 ‘디아세케’(διαθήκη)라는 단어로 언약을 뜻하는 히브리어 ‘베리트’(ברית)를 번역한 70인역의 용례를 고려할 때, ‘디아세케’(διαθήκη)의 의미는 새롭게 부여된 ‘언약’의 의미로만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즉 70인역이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언약의 뜻으로 번역하여 사용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을 언약 이외의 다른 뜻으로 번역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2. 언약을 유언으로 말하는 이유 사실 ‘디아세케’(διαθήκη)의 본래적인 의미는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의 중심 뜻은 ‘처분’ 또는 ‘유언’이었으며, ‘언약’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순세케’(συνθήκη)이었습니다. 바빙크(Herman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3)의 인용에 따르면, 본래 ‘디아세케’(διαθήκη)는 언약이라는 개념을 내포한 적이 없으며, 오직 ‘유언’을 의미하는 단어이었습니다. 그런데 70인역이 ‘언약’을 ‘순세케’(συνθήκη)가 아니라 ‘디아세케’(διαθήκη)로 번역을 하였으며, 그 결과 ‘디아세케’(διαθήκη)에 ‘언약’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니까 70인역은 ‘유언’을 의미하는 ‘디아세케’(διαθήκη)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경의 ‘언약’을 가리키는 단어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70인역이 어떤 이유로 언약을 뜻하는 그리스어로가 아니라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택하여 사용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몇 가지 추론이 되고 있습니다. 벌코프(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에 따르면, 성경의 언약 개념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추론이 됩니다. 성경의 언약은 언약 당사자들이 서로 쌍방 간에 대등한 가운데 세워진 것이 아니며, 또한 언약의 성취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언약을 이루시는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과,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과 인간이 수평적인 동등의 관계가 아니라는 언약의 성격을 반영하는 데에 있어서, ‘디아세케’(διαθήκη)가 ‘순세케’(συνθήκη)보다도 더욱 타당하기 때문에 ‘언약’을 ‘디아세케’(διαθήκη)로 번역을 하였으리라 판단이 됩니다. 이러한 설명은 바빙크에 의해서 제시된 것입니다. 바빙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의 특수한 성격을 설명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언약은 그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푸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스스로 맹세하신 바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하여 죄 가운데 빠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희망을 상실하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를 입어 새로운 순종에로 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언약의 성격은 은혜언약이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일방적으로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빙크는 이러한 언약의 특성을 고려할 때, 70인역이 ‘언약’을 표기하기 위하여 ‘순세케’(συνθήκη)가 아니라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택한 것은 타당한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3. 유언의 실효성과 관련된 당시 사회법 그렇다면 ‘디아세케’(διαθήκη)가 본래 ‘유언’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70인역에서 그것을 ‘언약’의 의미로 사용한 이상, 어쨌든 ‘유언’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까요? 무슨 이유로 신앙고백서는 은혜언약이 성경에서 유언이라는 이름으로 진술이 되고 있다고 교훈을 할까요? 그것은 언약과 성취의 관계에 있어서 언약을 주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역할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바빙크는 유언의 의미와 관련하여 그리스-시리아 법과 로마법에 따른 이해의 차이를 제시합니다. 그리스-시리아 법에 따르면 ‘디아세케’(διαθήκη)는 자산과 권리의 취소되지 않는 양도를 의미하지만, 유언자가 죽지 않아도 부분적인 실행의 가능성을 지닙니다. 반면에 로마법에 따르면 유산의 증여는 유언자가 죽을 때까지는 실행이 되지 않습니다. 즉 유언자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로마법에 따른 유증의 의미를 담아, 유언자인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약의 성취가 됨을 말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디아세케’(διαθήκη)가 사용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말합니다. 하지만 바빙크는 로마법에 따른 유언자의 죽음과 관련한 의미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례가 다만 히브리서 9:16-17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일 뿐임을 지적합니다. 즉 ‘디아세케’(διαθήκη)에 담겨 있는 ‘유언’의 의미는 새 언약의 성취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할 때에만 분명하게 드러나며, 다른 모든 경우에는 ‘유언’보다는 ‘언약’의 의미가 더욱 분명합니다. 새 언약과 관련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역할을 반영하여, 화란어 성경과 영어 성경(흠정역)은 대체로 구약의 이스라엘과 관련하여서는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언약’으로, 신약의 교회와 관련한 새 언약을 가리킬 때는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유언’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해 벌코프는 이처럼 구약에서는 언약으로, 신약에서는 유언으로 해석하는 일반적인 처리보다도, 미국개정판 성경(American Revised Bible)처럼 히브리서 9:16-17의 구절만을 ‘유언’으로 번역하고, 다른 구절들은 ‘언약’으로 번역한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말합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벌코프가 요약하고 있듯이, 히브리어로는 언약을 분명하게 가리키는 ‘베리트’(ברית)가 그리스어로 번역이 됨에 있어서 ‘언약’이 아니라 ‘유언’의 의미를 가진 ‘디아세케’(διαθήκη)가 사용이 된 것과, 그것으로 인하여 성경이 은혜언약을 ‘유언’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해석과 번역이 나타나고 있는 이유가 세 가지로 제시됩니다. 하나는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단어로 본래 언약을 나타내는 그리스어인 ‘순세케’(συνθήκη)보다 ‘디아세케’(διαθήκη)가 더 타당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신약성경의 ‘디아세케’(διαθήκη)의 경우들을 ‘유언’의 의미가 분명한 히브리서 9:16,17의 ‘디아세케’(διαθήκη)와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에서 비롯됐다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라틴어 성경이 항상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유언’을 뜻하는 ‘테스타멘툼’(Testamentum)으로 번역한 것에 대한 반영이라는 것입니다. 미치는 말 이러한 설명들 이외에도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은혜언약의 실행과 관련한 성경의 설명과 신학적 이해입니다. 신앙고백서에서 보듯이 “은혜언약이 성경에 종종 유언이라는 이름으로 진술되어 있다”고 진술하면서 그 까닭과 관련하여, 신앙고백서의 진술 후반에 언급하고 있는 부분에 주목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유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영원한 기업과 그것으로 유증이 되는, 그것에 속한 모든 것들과 관련한 것이다.” 여기서 은혜언약을 ‘유언’이라는 의미로 풀어낼 필요와 관련하여 신앙고백서는 “유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비로소 언약이 약속한 “영원한 기업과 그것에 속한 모든 것들”이 주어진다는 사실이 마치 유언에 따라 유증이 되는 것과 동일한 원리를 보여주고 있음을 언급합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서의 설명은 적절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히브리서 9:16,17절에서 사도가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튜레틴(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2)이 설명하고 있는 바와 그대로 일치합니다. 튜레틴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지적합니다. ■하나는 ‘디아세케’(διαθήκη)의 유언적 의미와 관련하여, 유언자의 죽음이 선행됨으로써 유언의 약속이 실행이 되는 것과 같은 유언적 성격이 하나님의 언약에 반영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언이 유언자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속자만을 위한 것이듯이, 하나님의 언약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인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끝으로 언약의 조건이 비록 쌍방적인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에 근거하여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 마치 상속자가 누리는 유업이 상속자의 공로가 아니라 유언자의 은혜로 인한 것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짧은 한 항목에서 이러한 개혁신학의 언약의 이해를 함축하여 “이 은혜언약은 성경에 종종 유언이라는 이름으로 진술되어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여기에서 살핀 본 항목은 비록 짧은 한 문장이지만, 그러한 압축적인 진술 속에 개혁신학의 많은 노력을 담아내고 있는 신앙고백서의 깊이를 다시금 인식하게 합니다.
198 no image <웨신해설 46> 은혜 언약 <제7장 3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20839 2014-12-16
은혜 언약 <제7장 3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7장 3항: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그 언약[행위언약]에 의하여 스스로 생명을 획득할 수가 없게 되자, 주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일반적으로 은혜언약이라고 일컬어지는 두 번째 언약을 맺으셨다: 그것에 의하여, 주님은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요구하시고, 그로 인하여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도록 하신다; 그리고 생명에 이르도록 작정이 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믿으며 또한 믿을 수 있도록 하신다.” 본 항은 인간이 타락하여 첫 번째 언약인 행위 언약에 의해 생명을 스스로 획득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은혜 언약이라고 일컬어지는 두 번째 언약을 맺으셨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언약이 은혜 언약이라고 일컬어지는 까닭과 관련하여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 언약의 약속과 조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조건을 성취하는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반영합니다. 1.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 인간은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첫 번째 언약인 행위 언약에 따라 영원한 생명의 복을 성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순종에 따른 죽음의 형벌 아래 놓이는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물론, 그의 후손들 가운데 아무도 예외가 없이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참으로 비극적인 운명만이 인간의 몫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이라 불리는 두 번째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즉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약속처럼 행위의 순종을 근거로 하는 행위 언약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약속을 실행하는 은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번째 언약을 인간이 타락한 즉시로 세우셨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 때 유의할 점은 은혜 언약을 맺으신 일로 인하여 온 인류를 향한 행위 언약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언약의 대상과 관련하여 볼 때, 타락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은혜 언약과 다르게, 행위 언약은 타락 이전의 순전한 인간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는 행위 언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위 언약을 위반한 아담으로 인하여 그 언약에 따라서 모든 인간이 받아야 하는 불순종함의 형벌, 곧 영원한 사망의 저주는 여전히 인간 위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처럼 행위 언약에 따른 저주가 모든 인간에게 미치고 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행위 언약이 은혜 언약으로 인하여 폐기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아담의 타락 이후의 모든 인간은 여전히 행위 언약 아래 놓여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2. 은혜 언약에 담긴 의미 신앙고백서는 두 번째 언약을 행위 언약과 구분하여 은혜 언약이라고 부르는 까닭과 관련하여 여섯 가지를 언급합니다. (1) 하나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죄인인 사람과 은혜 언약을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타락하여 불순종함으로 영원한 형벌 아래 놓인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두 번째 언약을 세우신 동인이 오로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있습니다. 두 번째 언약이 이미 행위 언약에 의한 정죄 아래 놓인 인류에게 주어진 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하여 마땅한 진노이외에 “기쁜 마음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주시는 두 번째 언약을 세우신다는 것은 그것인 “은혜 언약”이라 불리는 까닭을 보여줍니다. (2) 두 번째 언약이 “은혜 언약”으로 불리는 까닭과 관련하여 신앙고백서가 두 번째로 밝히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 언약으로 약속하신 것을 “값없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으로 인하여 죄인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주시어 죄인들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행위 언약의 경우 언약 대상자인 인간이 스스로 행위 언약의 의무를 성취하는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언약이 약속한 바를 얻게 되는 것과 비교하여 볼 때, 두 번째 언약에 담겨진 “은혜”의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3) 이처럼 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바를 “값없이” 주시는 두 번째 언약의 “은혜”의 성격은 신앙고백서가 진술하고 있는 바대로 주님께서 두 번째 언약을 통해 요구하시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사실에서 그것이 “은혜 언약”임을 말하는 세 번째 까닭이 확인이 됩니다. “믿음”은 행위 언약의 의무인 순종의 “행위”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믿음”도 인간이 행하는 일종의 행위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행위와 구분할 때, 행위란 인간이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스스로 제공하는 공로의 근거를 말하는 것이며, 믿음이란 인간은 전적으로 공로의 근거를 제공하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단지 받을 뿐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것을 받는 방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두 번째 언약의 약속을 받는 방편은 어떤 의무를 이행하고 그것을 통해 공로나 권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인간이 어떠한 공로를 근거로 언약의 약속인 영생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두 번째 언약은 “은혜 언약”의 성격을 갖습니다. (4) 언약의 약속을 받는 방편인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두 번째 언약이 “은혜 언약”이라는 네 번째 까닭이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은혜 언약을 죄인들에게 베풀어 주시기 위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행위 언약의 모든 의무를 성취하셨습니다(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 그리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습니다(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히키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을 세우시면서 행위 언약의 요구를 폐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위 언약의 의무를 완전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은혜 언약의 공로적 조건으로 요구하시며, 그것을 근거로 해서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값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은혜 언약의 은혜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을 교훈합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뿐인 죄인인 인간은 그리스도의 행함으로 인하여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5) 신앙고백서가 두 번째 언약의 “은혜성”과 관련하여 교훈하는 다섯 번째 사실은 은혜 언약의 약속을 받는 방편인 “믿음”의 기원성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원죄의 부패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리스도와 관련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회개를 행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됩니다(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신앙고백서는 이와 관련하여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믿고 믿을 수 있도록 하신다”고 진술합니다. 부패한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믿고 또한 “믿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까닭입니다(겔 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하여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의 영생을 받는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사실은 은혜 언약이 어찌하여 “은혜”인지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6) 끝으로 신앙고백서가 교훈하는 은혜 언약이 “은혜”인 여섯 번째 까닭은 은혜 언약을 실제로 누리는 대상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로 국한된다는 사실과 관련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작정이 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어 그들로 하여금 기꺼이 믿으며 또한 믿을 수 있도록 하신다”고 진술합니다. 은혜 언약을 체결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의 약속을 받는 방편이 “믿음”을 주시는 대상을 또한 “생명에 이르도록 작정이 된 모든 사람들”로 제한을 합니다. 그러한 선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것이며, 죄인인 인간은 그러한 선택을 받아 언약의 선물인 영생을 받아 누릴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른 선택이 은혜 언약의 기초이며, 은혜 언약은 선택의 작정의 실행입니다. 3. 은혜 언약과 종교개혁의 정신 신앙고백서의 이러한 진술들은 개혁신학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전개되는 구원의 은혜성을 강력하게 선포한다는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는 방편인 믿음조차도 결코 은혜 언약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 까닭은 믿음이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믿음은 은혜 언약을 받는 조건이 아니라 은혜 언약이 약속하는 은혜의 선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껏 살펴본 은혜 언약의 이해를 통해 드러나듯이 구원의 길인 은혜 언약을 여시는 시작부터 그것의 적용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원의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실행하시는 은혜일뿐입니다. 종교개혁의 신학을 드러내는 표지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은 “오직 은혜”로 되는 것이며,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받으며, 그러한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행위의 순종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생의 복락은 “은혜 언약”을 통하여 주어지는 전적인 은혜의 선물임을 신앙고백서의 본 항목은 짧은 진술을 통해서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요약해 줍니다.
197 no image <웨신해설 45> 행위언약_김병훈 교수
편집부
6368 2014-11-04
행위언약 <제7장 2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7장 2항: “인간과 맺으신 첫 번째 언약은 행위 언약이었다. 그것 안에서, 완전한 순종을 직접 행한다는 조건을 전제로 생명이 아담에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그의 후손들에게 주어질 것이 약속되었다.” 본 항은 ①하나님께서 인간과 교제하시며 복을 주시기 위하여 맺으신 첫 번째 언약이 무엇인지, ②그것을 통해 아담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③약속된 생명을 받기 위한 언약의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해 교훈을 줍니다. 1. 하나님의 첫 번째 언약은 행위언약입니다. 행위언약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 16-17절의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에서 행위언약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을 아담에게 주심으로 아담에게 불순종할 경우에 벌을 내리실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아담의 편에서는 이 계명으로 인하여 순종하여야할 의무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물론 16, 17절의 말씀에는 순종의 경우 아담에게 주어질 약속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고 말씀하셨으며, 창 2장 9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이미 말씀하신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에게는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제외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허락이 되었으며, 그 가운데 생명나무도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16, 17절의 계명은 순종을 통해서는 생명이, 불순종을 통해서는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상과 벌의 내용을 포함하는 언약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순종을 통해 생명이 보상으로 주어지는 언약의 사실은 나중에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는 가운데 약속하신 레위기 18장 5절,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의 말씀을 통해서도 추론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순종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도 확인이 됩니다(참조, 신 27:26; 겔 20:11; 마 19:17; 롬 7:10; 갈 3:12). 행위언약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성경의 증거구절로 호세아 6장 7절,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종종 언급이 됩니다. 여기서 “아담처럼”이라는 표현은 포괄적으로 사람들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란 본래 거짓되고 부패하여 언약을 맺어도 늘 깨기 마련이듯이 이스라엘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고 반역을 하였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최초의 사람인 아담이 언약을 불순종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을 해서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욥기 31장 33절, “내가 언제 다른 사람처럼 내 악행을 숨긴 일이 있거나 나의 죄악을 나의 품에 감추었으며”의 말씀에서 “다른 사람처럼”은 “아담처럼”으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앞서 호세아서와는 반대의 경우입니다만 설명은 동일한 경우를 보여줍니다. 욥 자신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감추듯이 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구절인데, 이것은 아담이 자신의 죄를 감춘 것처럼 하지 않았다고 해석을 해도 무방합니다. 요컨대 호세아서와 욥의 해당 구절들은 아담이라는 단어가 최초의 인간을 가리키는 이름이면서 또한 사람 일반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이기도 하므로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따라서 아담과 맺으신 하나님의 행위언약을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구절로 제한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을 가리키는 해석이 또한 여전히 가능한 만큼 행위언약의 입증하는 참조구절로 충분한 효력을 갖습니다. 2. 행위언약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은혜언약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은혜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은 구속주 하나님이시라면, 행위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만드신 만물에게 법칙을 부여하시고, 특별히 이성 있는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법도를 제정하시고 명하십니다. 또한 행위언약은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순전한 상태로 어떠한 죄의 영향도 받지 않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맺으시는 언약입니다. 언약의 대상자가 순전한 자라는 점에서 행위언약은 타락한 자를 언약의 대상자로 삼는 은혜언약과 서로 구별이 됩니다. 이처럼 타락하기 이전이라는 원시상태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도를 그가 원하기만 하면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행위언약의 조건 아래서 아담은 다른 사람에 의한 순종을 전가받는 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자신이 직접 순종을 함으로써 생명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은혜언약을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전가받기 위한 믿음의 언약인 반면에, 행위언약은 스스로 순종을 함으로 언약의 약속을 누리는 행위에 의한 언약입니다. 행위언약의 대상자인 최초의 사람 아담은 하나님과 아담 자신만을 위한 개인의 언약을 맺은 자일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후손들의 대표합니다. 즉 행위언약의 대상자로서의 아담은 하나의 개인으로서의 사적 인간(persona privata)이 아니라 공적 인간(persona publica)으로 모든 후손들을 대표하는 머리(caput repraesentativum)입니다. 3. 아담이 후손들을 대표하는 원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이 됩니다. 하나는 자연적인 연대(unio naturalis)입니다. 아담은 자신에게서 태어날 후손들에게 출생의 뿌리(radix)이며 또한 종자적 기원(principium seminale)입니다(행 17:26). 뿐만 아니라 아담이 모든 후손들을 대표하여 행위언약의 대상자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는 지위는 단지 그가 후손들의 자연적 뿌리이며 기원이라는 자연적 유대에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행위언약의 대상자인 아담이 또한 자신 안에 있는 후손들의 법적인 머리(caput forense)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자신의 후손들에 대한 법적인 대표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로운 경륜과 섭리에 따라 아담을 그렇게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아담에 의하여 좋은 것들이 아담 개인에만 적용되지 않고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달되도록 하셨으며, 또한 마찬가지로 나쁜 것들도 아담 개인을 넘어 모든 후손들에게 적용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아담이 행위언약의 대상자로서 모든 후손들의 대표자라는 사실은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서도 확인이 됩니다. 성경의 두 구절을 대표적으로 살피면,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범하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4)는 말씀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5, 47)는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들은 아담은 온 인류에 대한 행위언약의 머리이며, 또한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역으로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며 또한 둘째 아담으로서 아담이 행위언약의 머리이듯이 은혜언약의 머리이심을 교훈합니다. 아담은 흙에서 난 자이며 그로 인하여 사망이 왔고, 반면에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신 분으로 살려 주는 영이시니 그로 인하여 생명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유비는 아담이 행위언약의 대상자로서 모든 후손들의 언약적 머리임을 확고하게 지지합니다. 아담이 행위언약에 있어서 모든 후손의 법적 대표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불평을 하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심판을 받는 것은 공의롭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반발을 하는 자들은 자신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자신의 운명이 아담의 순종 또는 불순종의 결과에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불만과 맞물려 더욱 반발의 강도를 높입니다. 그러나 만일 아담이 행위언약을 성공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선한 복들을 후손들에게 줄 수가 있었더라도 이러한 반발이 있었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결과가 좋았더라면 아담의 대표성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대표성의 문제는 아담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주로 비롯됩니다. 4. 인류의 자연적 머리인 아담을 그의 후손들의 법적 대표자로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뜻에 의한 섭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며 지혜로운 행사입니다. 그러한 작정과 섭리는 피조물이 거부하거나 불의하다 말할 수가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주재권에 속한 일입니다. 더욱이 아담이 행위언약을 순종할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모든 인류가 누렸을 행복을 생각한다면 설령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사망의 심판 아래 놓인 인류의 처지에 대해 안타까움과 또 그것을 넘어 불만이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 불만 때문에 아담을 후손의 법적 대표자로 세운 하나님의 경륜을 불의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인류의 대표자로 행위언약을 맺은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순전한 상태로 지음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그가 원하기만 하면 죄를 범하지 않을 수가 있는 순전한 상태로 원시적 의와 거룩과 진리를 가진 자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행위언약의 순종의 의무를 지키는 일은 오히려 쉬운 일이었고, 불순종의 일은 아담 자신의 능력이나 상태로 보거나 아담을 둘러싸고 있는 복된 에덴과 창조 세계에 담겨 있는 환경은 행위언약을 순종하기에 대단히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아담과의 연대를 빌미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불평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러한 상태에 있는 아담에게 행위언약을 통해 그의 후손들에게 지극한 복과 영생을 주시고자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송하여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과 언약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는 것 자체가 아담에게는 더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더욱이 그러한 언약을 성공적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거룩과 진리의 원시적 의의 순전한 상태라는 가장 최선의 조건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은 아담 개인에게서나 그 안에 있는 아담의 후손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은혜이며 복 누림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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