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조회 수 : 4348
2000.04.07 (00:00:00)
강세형 목사<광양은송교회>

- 소요리문답 제3문 -
◈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믿을 것
은 무엇이며(창1:1;요5:39;20:31;롬10:17;딤후3:15),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

시는 본분은 무엇인가 함입니다.
(신10:12-13;수1:8;시119:105;막6:8;롬1:5;딤후3:16-17;약2:4).

지난 시간에 성경은 ‘성령께서 쓰실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가르침을 반대하고 등한히 하는 경우도 엄위하신 하나님
의 말씀이라는 것과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셔서 나
타내고자 하시는 모든 뜻을 나타내셨다는 것(성경의 충족성)을 말했다. 그
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상고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알아내야 할 의
무가 있다. 성경은 마음을 써서 찾아내야 할 보화가 가득한 창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열심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성경이
기록될 당대의 대상에 따라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언어와 문자로 기록
되게 하실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성경을 여러 나라 말
로 번역되게 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오늘은 성경이 긴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두 가지, 곧 하나님에게 대하여 믿
을 것과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산출할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둘은 결국 하나인데 우리가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내
용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를 믿음과 행위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20:21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는데 믿으면 생명을 얻는 것이고, 생명을 얻으면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얻은 자답게, 죽어 있는 자와 달리 산 사람답게 생
활하는 것이고 행동을 내놓는 것이다. ‘믿음 플러스 행위로 구원을 얻는
다’ 하는 말이 맞다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데 이는 믿음이
행위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있어서, 믿음
이 은혜라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참된 믿음은 삶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삶의 열매’도 하나님의 은
혜인 것이다. 믿음이 은혜라 해 놓고 삶의 열매가 없으면 삶의 열매는 은
혜가 아니라는 말이나 다름없으니 그런 자에게는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참 믿음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믿음은 주
셨는데 삶의 열매는 안 주셨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히브리
서기자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거룩하신 뜻과 그 아들을
통한 계시를 저버린 데 대하여 경고하고 야고보 선생님은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본질상 같은 현상, 즉 행위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부
정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저버리는 일에 대하여 경고한다.
오늘날 구원파의 특징은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켜 놓고 행위를 중시하면 마
치 구원의 도리를 깨닫지 못한 자로 간주하여 얕잡아보는데 이는 성경적
무지로 말미암은 적반하장인 것이다. 구원파가 이단이라는 것을 들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상은 구원파적 이단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파가 건드리면 거기 넘어가는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교리를 전하려
고 접근할 때는 ‘교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행위를 중시하는 듯
이 ‘당신이 참으로 구원을 얻었느냐’고 겁을 주지만 결국 소위 그들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행위를 내팽개쳐 버리도록 하는 깨달음인 것이다.
당위와 능력의 긴장은 구원파적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약속되어졌다. 그
러므로 기도가 능력인 것이다.
그런데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의 부패함과
무능력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깨
운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시작되지만 거
기엔 분명히 하나님의 당연한 요구사항이 있다. 그 거룩한 요구에도 불구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이유는 그의 은혜가 우리를 구언하
였고 또 그를 경외하는 우리에게 그의 뜻을 이루시는 은혜를 믿기 때문이
다.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하는 죄인의 간절한 기도찬송을 비
웃기를 그 가사는 구원받지 못한 자의 가사이니 만큼 틀렸다고 하는 구원
파의 주장
은 거만하고 가력한 주장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을, 그 겸허하게 은혜 구함을 인하여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고 그
부패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구원에로까지 인도하시는 것이다. 지금은 우
리가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고 있지만 장차는 죄 자체로부터 구원을 받
아 우리 내면에 어떠한 갈등도 없는 평화로운 백성이 될 것이다.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6 no image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습니까? (2) (1)
rpress
4152 2000-11-24
강세형 목사(광양은송교회) 소요리문답 제10문(2) 문 :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습니까? 답 : 하나님이 사람을 남녀로 지으시되(창2:24, 말2:15, 마19:4-6), 자기의 형상대로(창1:27) 지식과(골3:10) 공의와 거룩함이(엡4:24) 있게 지으사 모 든 생물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창1:28).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실과 그 존귀 함과 그 평등함을 말하였다. 그런데 첨언하자면 종교개혁은 만인제사장설을 통하여 중세 암흑기의 부당한 권위를 부정하였고 민주주의는 종교개혁의 전통 에 힘입어 후에 비로소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받았다. 종교개혁의 흐름 중에서 도 장로교는 종교개혁의 중심에 서서, 교회정치에 있어서는 귀족적 민주주의 내지는 대의민주주의의 전통을, 그리고 세속정치에 있어서는 대의민주주의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해서 는 더 할말이 있지만 뒤로 미루고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약속한 대 로 하나님이 사람을 남녀로 지으신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녀로 지으셨다고 특별히 표시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둘이 합하여 비로소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다. 물론 남자는 남자로서 완전하고 여자는 여자로서 완전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드러냄에 있어서 둘이 합하여 비로소 완전하도록 하신 것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 을 따라 지으셨다고 했을 때, 그것은 특별히 남자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여자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남자와 여자의 공통점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 니고 남자와 여자를 합한 완전한 몫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 니가 없는 가정을 결손가정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녀로 지으셔서 둘이 합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드 러낸다는 사실에서 우선 첫째로 생각할 것은 남녀가 동등하게 하나님의 영광 을 위한다는 사실이다. 서로 다르게, 특색 있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만 둘 이 조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사실과 그 정도에서 동등하다는 것이 다. 그러므로 왜 나는 여자로 태어났는가, 또는 왜 나는 남자로 태어났는가 하고 한탄할 필요가 없다. 남자는 남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 있고 여자는 여자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 있고 또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녀의 인권은 동등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 고"라고 표시한 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 다. 성경은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라(창2:24)고 했지 '여럿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라'고 하지 않았다. 만일 여럿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고 하 셨다면 둘이 합하는 데도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겪는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 과 갈등이 있겠는가? 사람은 둘이 합하여 비로소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 러내지 않고 여럿이 합하여야 그것이 가능하다면 가정마다 결손의 정도가 심 하여 살 수 없을 것이다. 넘치는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 부다처주의나 다부일처주의나 다부다처주의의 폐해가 심각한 것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난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데 남녀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에 있어서의 이탈이 심각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맞 게 주신 것을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계명을 버리는 것은 곧바로 우리에게 손 상으로 연결된다. 이 점에 있어서 기도와 경계가 절실하다. 셋째로 생각할 것은 '남자와 여자'(창1:27)의 차서가 있는 점이다. 이는 인권 과 전혀 별개이다. 창세기 2장에 보면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언약을 맺으셨 는데 남자하고만 맺으셨다. (물론 여자도 남자 안에서 그 언약에 동참하지만 말이다.) 그 후에 돕는 배필을 창조하셨다. (고린도전서 11:8, 9 참조.) 이 는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문제이다. 거룩하신 삼위 하나님 안에도 질 서가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이 질서의 적용이 문제다. 이를 잘못 적용하면 인권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 같 이 남자가 여자에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둘 이 하나 됨에 있어서 그냥 하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질서 있게 여자가 남 자를 존중하고 그 차서 있는 권위를 존중하며, 의논하되, 순종하는 마음이 있 을 때 하나 됨은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 된 가정으로서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도록 하 신 것이다. 하나 됨의 질서는 이러한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께 서, 가정에서 남자는 남자로서의 책임과 거기에 합당한 일을 주셨고 여자는 여자로서의 책임과 거기에 합당한 일을 주신 것이다.
15 no image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습니까? (1) (1)
rpress
4380 2000-09-28
강세형 목사(광양은송교회) 소요리문답 제10문(1) 문 :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습니까? 답 :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녀로 지으시되(창2:24, 말2:15, 마19:4-6), 자기의 형상대로(창1:27) 지식과(골3:10) 공 의와 거룩함이(엡4:24) 있게 지으사 모든 생물을 주관 하게 하셨습니다(창1:28).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작정 을 성취하심에 있어 그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오늘은 그 천지창조 중, 특별 히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배울 것이다. 원형적 인간론이다. 하나님께서 원 래인간을 어떻게 지으셨는가 하는 사실이다. 인간의 원래의 지위가 어떠하며 따라서 인간은 마땅히 어떠한 상태를 지향해아 하는가?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자 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녀로 지으시되, 자기의 형상대로 지식과 공의와 거룩함이 있게 지으셨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사람을 지극히 존귀 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남녀의 문제는 후론하기로 하고, 우선 사 람 일반에 대해서 논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그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으로서 존귀 하게 대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러므로 민간에서까지 이르기를 "사람 위 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 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 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 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5-27)고 하셨 다. 그러나 볼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믿는 형제에 대하여, 아니 동역자들에게 대하여 까지 가당찮은 "위계질서"를 강요하는자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주님의 주신 거룩한 규례인 권징조례를 부정한 것으로 여 기면서 법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 이는 존경할 자를 존경하자는 것을 금하 고자함이 아니다. 존경은 강요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위계질서를 강요하는 자가 어떻게 존경을 받겠는가? 이는 예수님의 지적대로 이방인의 사상이 다. 선교사들이 그랬던가.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유교라고. 거기 다가 이제는 물량주의까지 들어와서 경건의 척도를, 그리고 발언권의 척도를 거기에다가 두려고까지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받은 은 사대로 충성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시기와 형편에 따라 충성하면 되 는 것이지 꼭 다른 사람의 기준과 형편을 따라갈 필요도 없는 것이다. 심지 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예수님마저도 일정기간 동안은 부모를 섬기지 않았 던가? 그의 공생애는 3년뿐이었다. 이는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말이 아니 라 하나님이 주신 처지에서 사명을 다하는 것이 옳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는 말이다. 대인인체 하면서 믿는 형제를 멸시하는 자들이야말로 남은 천국 에 들여보내고 자기는 들어가지 못할까 걱정해야 한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가? 지금시급한 것은, 아무리 원론적인 말을 해야 지금 썩은 사상을 도려내 지 아니하면 그 원론적인 말이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의 기독교를 유교적 체질에서 구원해내지 못하면 그것은 교회다운 교회가 되지 못한다. 교권주의는 한국의 기독교에서 왕성하게 발호하고 있다. 그리고 교권주의는 반드시 세속화와 부패로 흐른다. 교회가 교회다와지지 못 하고 공의가 시행되지 아니하며 교회가 부패함이 교권주의에서도 비롯되는 줄 알고 우리 교단은 무엇보다도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입장에서 성립된 교 단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체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점점 변하여 가고 있 다. 그리고 부패한 교회와 사회의 소금이 되고자 하는 긍지와 노력을 포기한 채 그런 것을 주장하는 자마저 교만하다고 매도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고 말 았다. 하나의 교단 화하려면 옛날 거기에서 뭐 하러 나왔던가? 이제 선언문 을 접고 그리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기독교의 토양은 교권주의라고 하는 이 지독한 잡초를 위하여 훌륭한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젊은 늙은이도 있고 늙은 젊은이도 있듯이 이제는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수구적, 유교적 젊은 동역자들을 볼 때 숨이 막힌다. 젊은이들이여! 젊은이다워져라. 그리스 도 안에서 진보를 이루라! 기독교가 아닌 것을 버려라! 그렇잖으면 그대들 은 수치스런 역사를 기록할 것이다. 예 수님의 겸손한 사상을 체질화하지 아니하고 (이겸손은 유교적 굴종주의 와 동일시하지 말 것이다. 겸손이란,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먼저 요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높다고 여기는 자들이 아래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 들에게 강요하는 겸손은 겸손이 아니라, 굴종인 것이다.) 스스로 존경받기를 원하면서 위계질서를 강요하는 사람은 이미 주님과 거리가 먼사람이다. 사람 은 이렇게 위력으로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있지 않고 만물을 다스리게 되어 있 다. 사람의 발아래 놓여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만물인 것이다(시8:3-8). 천국은 오직 겸손한 만족의 도에 이른 사람들만 가는 곳이다.
14 no image 창조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rpress
3971 2000-09-07
강세형 목사(광양은송교회) 소요리문답 제9문 문 : 창조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답 : 창조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아무 것도 없는 중에서 그 권능 의 말씀으로써 만물을 지으신 일인데(창1:1, 시33:6, 9, 히11:3, 계4:11) 다 매우 좋았습니다(창1:31, 딤전4:4). 하나님께서 어떠하시면 그 하시는 일도 그러한데 그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어 떠하심을 그대로 잘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소요리문답 제4문에서 하 나님이 어떠하신 지에 대해서 배운 바 있다. 그는 신이신데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무궁하 시며 불변하시다고 하였다. 이러하신 하나님이 삼 위로 계시면서 그 선하신 뜻대로 작정을 하셨는데 그 작정을 창조와 섭리로 성취하신다. 그런데 오늘 은 창조를 배울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아무 것도 없는 중에서 그 권능의 말씀으로 써 만물을 지으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권능이 무한하시므로 그 하시는 일을 단숨에 하실 수도 있고 시간을 끌 수도 있다. 오직 그는 그 기쁘신 뜻대로 엿새 동안에 만물, 곧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창조하셨다(창1:1-31, 골1:16). 이로 써 모든 것이 그에게 속하였고 그의 소유가 되었고 그의 치리를 받게 되었 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이로써 확신할 수 있다. 모 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유지되고 다스려져 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발전되어야 하고 완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야 하고 또 그 주권을 찬양하여야 한다. 하 나님이 만유를 다스리시니 우리는 기쁘다. 둘째는 그 지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표준에서도 매우 좋았다는 사실이다(창 1:31).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 지으신 만물도 선하며 따라서 악은 하 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악은 피조물의 타락에서 온 것이고 타락은 자유의지적 피조물의 죄에서 온 것이다. 죄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그릇 된 태도와 의지이다. 그가 그 자유의지를 죄되게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타락하 였다. 그런데 모든 자유의지적 피조물 이 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것은 아 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천사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면 세 상에 악이 존재하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서 자유의지적 피조물을 지 으신 것 자체에 돌려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자유의지적 피조물이란 그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자유뿐 아니라 책임도 함께 지는 것이다.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러한 타락을 미리 모르셨는 가? 아니다. 죄악의 책임은 자유의지적 피조물들에게 있게 되겠지만 하나님 은 그것들을 어거하시고 그것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관철하실 것이었다. 죄란 그릇된 태도인데 그릇된 태도는 그릇된 태도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그릇 된 지식을 낳는다. 죄로 말미암은 타락은 그 타락한 자의 지식에 영향을 미쳤 는데 세상의 악은 물질에서 온다든지 육체에서 온다는 생각이 있다. 정신보다 는 물질이 악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악이 물질에서 나 온다고 한 것이 아니고 속 곧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였다(렘17:9, 마15:19). 어떤 사람들은 돈이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말하 기를 돈을 "사랑 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한다(딤전6:10). 물질 자체가 죄가 아니라 물 질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죄인 것이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죄가 된다. 그러나 감사함으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받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쓸 때 선한 것이 된다(딤전4:3-5). 그러나 그릇된 사람들은 모든 것을 그릇되 게 사용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인간의 그릇된 동기와 목적을 위하여 쓰게 된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에게는 모든 것 이 악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딛1:15). 악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가 그것들을 악하게 씀으로써 파생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쓰여지지 아니하는 한, 아무리 그럴듯 한 인간제국의 문명이라 할지라도, 죄인들을 인하여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게 되는 것이다(눅21:5-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셨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당연한 진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만물을, 역시 하나님께로부 터 받은 목숨과 삶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선한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 이다. 하나님의 계명 대로 그것들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지으신 만물이 선한 것을 볼 때에 창조는 하나님의 선하신 작 정을 성취하심에 있어 그 기초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만물은 허무 한 데 굴복하는 현실로 인하여 탄식하는 가운데, 자유의지적 피조물들에 의 해 선하게, 바르게 쓰일 날을 기다리고 있다(롬8:20-21). 그러면 어떻게 하 면 바르고 복되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사용할 수 있을까? 죄에서 구속함을 받고 날마다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주신 모든 것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되고 그것들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이 창조의 사실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과, 하나 님의 광대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더욱더 알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이다.
13 no image 하나님께서 그 작정을 어떻게 이루십니까? (2)
rpress
4362 2000-08-23
강세형 목사(광양은송교회) 소요리문답 제8문 문 : 하나님께서는 그 작정을 어떻게 이루십니까? 답 : 하나님께서 그 작정을 이루시는 것은 창조와 섭리하시는 일로 하 십니다(시148:8, 사40:26, 단4:35, 행4:24-28, 계4:11). 하나님은 삼위일체로서 영원하시며 변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그의 존 재와 지혜와 권능뿐 아니라 그의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이 무한하시며 무궁하시며 불변하시다(소요리문답 제4문). 따라서 하나님은 그 무한, 무궁, 불변하신 존재와 지혜와 권능으로써 불변의 완전한 계획을 가지시는 것은 그 속성상 당연하다. 이로써 우리는 그를 언제나 절대적으 로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 과 진실하심이 또한 무한, 무궁, 불변하시므로 그의 영원한 계획은 언제나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누구든지 이미 아담 안에서 심판을 받았으므로, 따라서, 먼저 하나님께 드려 갚으심을 받을 만큼 의롭 거나 선하거나 지혜 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롬11:35). 그러므로 하나님 께서 파멸의 인류 중 얼마를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구원하심으로 그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시고, 그리고 나머지 인류를 그 행위대로 최후의 심판에 붙이시는 것은 정당하며(롬9:19-29) 또한 이러 한 구원과 심판으로써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이란 그의 영원한 계획과 동의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작 정이라는 용어에서는 목적을 의식하고 종국을 의식하게 된다. 하나님이 어 떻게 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은 결국에 가서는 그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 고야 만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의 계시에서 작정의 이러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이루었도 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계21:5,6). 그러므로 우리 는 하나님의 작정을 생각할 때에 방관자적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 하나 님의 입장에 서서 그 작정이 얼마나 의롭고 영광스러운가를 생각하고 그런 데 그 작정이 차질 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신뢰와 찬양의 정을 갖게 되겠는가?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한번 작정하신 바를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그 작정대로 만물을 지으시고, 그 지으 신 것을 유지하고 보존하시고, 또한 지으신 목적에 따라서 그것을 사용하 시고 또는 취급하여 나가시는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어 가시 는 것이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은혜의 영광과 그 종국을 노래하고 있다. 빛과 하늘과 물과, 구름과 바람과 비와, 화염과, 땅과 바다와, 우레와, 산과 골짜기와 샘과 삼림과, 해와 달과 낮과 밤과 절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지으시고, 사용하시고, 섭리하시 는 위엄과 은혜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로써 기르시는 초 목과 들짐승들과 공중의 새들과 바다의 대소 생물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채소와 포도주와 기름과 양식을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찬 양하고 있다. 또한 그 가운데서 살아가는 만물의 역동적인 모습들을 노래 하고 또 그것들이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식물 주시기를 바라고, 주시면 좋 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시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시면 그것들이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며 또 주께서 저희로 번식케 하 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종국을 말하고 있다.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에서 구원을 받아야 되지만 동시에 다른 죄인들 의 도모로부터도 구원을 받아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종국을 인하 여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작정의 성취를 기뻐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시편 33편에 보면, "여호 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 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 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된 의지를 즉시로 막지 아니하시고 그 의지대로 하게 잠깐 허용하시는 것은 그 자유의지를 허용하사 살게 하시는 것과 그 리고 결국에는 그 자유의지의 결과를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의 정당성과 복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계시사와 세속사를 통하여 인류의 야망과 죄된 의지가 얼마나 인류에게 해악을 끼쳤는지 똑똑히 보아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도모를 곧 폐하시고 하나님의 도모가 서게 하셨다. 느부갓네살이 세운 바벨론 제국과, 예수 그리스도를 합동하여 십자가에 달고 그 교회를 박멸하던 권세들은 역사의 심판을 받고 그 제국 적 도모들이 폐하여졌다. 현대에 있어 독일의 나치주의와 일본의 군국주의 의 도모도 역사적 심판을 받았다. 앞으로 그런 도모가 또다시 일어날지라 도 결국 그 패망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고 또한 최후의 심판을 받을 것이 다. 우리는 세계사를 통하여 이러한 지혜를 얻게 되고 또 이로써 미루어 우 리 자신의 죄로부터도 구원을 받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 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만이 영원한 삶의 길임 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과 그 성취를 기 뻐하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작정은 창조와 섭리로 성취 n하신다. 이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며 영원토록 그 를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12 no image 하나님의 작정이란 무엇입니까?
rpress
4984 2000-08-02
강세형 목사/ 광양은송교회 - 소요리문답 제7문 - 문: 하나님의 작정이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작정은 그의 뜻대로 하신 영원한 경륜(계획)인데. 이로 말 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무릇 되어 가는 일을 미리 정하셨습니다(시 33:11, 사14:24, 행2:23, 롬9:22-23, 엡1:4,11-12) 지난 시간까지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대해서 유일하신 하나님은 삼 위 로 계시는 것을 말하였다. 하나님은 아들을 영원히 낳으셨으며 아들은 아 버지로부터 영원히 나셨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영원히 발출하시며 성 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하나님의 계획은 성부에게 돌려지는데 그러나 아들도 그 계획을 영원히 다 들었으므로(요15:15) 이에 동참하신다. 성령께서도 하나님의 깊으신 것 이라도 다 통달하시므로(고전2:10) 역시 이에 동참하신다. 하나님의 작정대로 만물이 창조되되 아들에게 창조되었고 아들로 말미 암아 창조되었고 아들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만물이 그 아들 안에 함께 섰다(골1:16 -17). 또한 만물이 주(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 에게로 돌아간다(롬11:36). 하나님의 신은 이 모든 일에 관여하셔서 창조의 완성과 유지, 그리스도의 구속과, 만물이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주관하신다. 아들은 아버지의 계획대로 말씀으로 만물의 창조에 동참하시고 만물의 구 속에 자신을 드려 수종드시고 그리고 만물을 아버지의 뜻대로 주관하셔서 나라를 아버지께 바치신다(고전15:24). 그리고 바로 지난 시간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 워하는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성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성취하여 주시되 우리와의 연합을 통하여 이루어주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어찌 하나님께서 차질 있게 하시겠는가? 우리는 소요리문답 제4문에서 이미, 하나님은 신이신데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무궁하시며 불변하시다는 것을 배웠다.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에 부족함이 있다거나 그 의 확고부동한 계획에 변동이 있어서 이랬다 저랬다 하신다면 어찌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에 흠결이 있다면 어찌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를 영화롭게 할 인생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이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하나님의 품성은 하나님께 있어서는 전혀 모순 된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자유의지를 서로 상충되 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라이온핸드북, 삼상2:25). 사람의 책임을 망각하는 결정론이나 그와는 반대로 마치 우연히 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다스리심에 맞지 않는 무지몽매이니 매우 해롭고 어 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은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의를 행하는 자에게 보상하여 주시는 것이 사실이 다(히6:10). 그러나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마치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과 은혜 베푸심이 없이 우리의 지혜와 결단으로 이러한 데 이르게 된 것으로 생각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우리 속에 이미 창조하여 두신 어떤 것에 하나 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셔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하나 님은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자라도 구원하 실 수 있다. 반면 아무리 양호한 상태에 있는 자라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있지 아니하면 그 자체가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것이다(엡2:1,10). 요는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성취하심에 있어 우연이란 없이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완전한 계획을 세우셨는가 하는 점이다. 성경은 그렇 다고 말한다(잠16:4). 전혀 인간의 자유의지를 손상함이 없이 그리고 인간 의 책임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돌아가는 방식으로 그러나 한편 전적인 하나 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계획하셨다. 성경이 우연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에 속하는 것이다(왕상22:34). 이런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사실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상상하면 안된다. 오묘한 것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으며 이는 우리로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려 함이라 고 하였다(신29:29).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완전한 통치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되어지는 일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의로우신 통치와 그 영광을 나타낸다. 그런 일들은 우 리 영혼으로 하여금 감탄적으로 하나님을 찬앙하게 만든다. 특히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다(롬5:20)는 것을 절감하며 많이 사함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는 주님의 말씀(눅7:47)처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계 역사의 진행과 나의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볼 때에 비록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리심을 인하여 복종하는 마음으로 그를 의지하며 또 모든 것을 그에게 아뢰고 구할 일이다.
11 no image 하나님의 신격에 몇 위가 계십니까?(3)
rpress
4289 2000-07-20
성도들을 위한 소요리문답 해설(10) 강세형 목사 - 소요리문답 제6문(3) - 문: 하나님의 신격(神格)에 몇 위(位)가 계십니까? 답: 하나님의 신격에 삼 위가 계시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데(마 3:16-17,28:19,고후13:13,벧전1:2) 이 삼 위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본체는 하 나요 권능과 영광은 동등이십니다 (시45:6,사63:10,요1:1,10:30,14:16, 17:5). 지난 시간에, 삼위일체 교리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이시라는 사실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은 더 이상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며 그들을 떠나 계신 것이 아니었다. 그 러나 이는 그때에 비로소 실현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객관적인 진리였는 데(행17:27)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어두움 가운데 있던 자들 이 비로소 하나님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마4:15,16). 그런데 이 진리는 제자들이, 참 사람이시면서도 벽의 장벽에도 불구하 고 방 안으로 들어오신 그리스 도의 부활체를 볼 때, 그리고 승천하시는 것 을 볼 때, 그리고 그의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을 봄으로 말미암아 더 강화 되었다(요16:13a). 이제 인자 되신 그리스도는 그 신성으로 편재하시며 참 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심을 나타내셨는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높이시매 그가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아 “너희의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시는 것으로써 완전히 나타내셨다(행2:14-36). 그래서 이제 성령께서 “오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이처럼 증거 하기 위하여 오셨다(요16:13-15). 성령께서는 역시 하나님의 본체시나 아버 지와 그리고 아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방식으로” 오신 것이다. 그 이전 에도 활동하셨지만 사람들에게 그 구별이 분명히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 나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셔서(영원발출) 아버지께서 계획 하신 창조에 참여하시고 그 창조를 완성하는 일을 하셨던 것이다(창 1:2,31,욥26:13). 또한 성령께서는 만드신 만물을 유지하고 보존하신다. 그는 동식물의 대를 이어주심으로써 지면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호흡 을 주시며 그 후손들을 기르신다(시104:28-30). 뿐만 아니라 그는 이스라 엘 회중에게 제3위의 존재를 명확히 하시는 방식은 아니었을지라도 그 광야교회와 함께 계셔서 그들을 인도하셨다. 그들은 그 불신앙과 반역으로 써 다름아닌 성령님을 근심케 하였던 것이다(사63:7-14). 그런데 마침내 하 나님의 구속의 언약이 성취될 때가 되어서(갈4:4)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오 셔서(요15:27) 그의 동정녀 탄생과 성장(눅1:35,2:40), 그리고 세례(막 1:10) 와 시험(막1:12)과 사역(눅4:18-19)과 고난(히9:14)에 함께 하셔서 그를 도우시고 온전케 하셨다(히2:10).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부활 을 성취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을 나타내셨다(롬1:4). 그는 이렇 게 하나님과 함께 사역하셨으나 사람들에게는 숨어 있는 자와 같았다. 그랬는데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예언을 통하여 “다른 보혜 사”이심이 명확해지고(요14:16)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 이 오실 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하시고(행1:4f), 그 성령께서 오순절에 그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마침내 “오시고”, 그리고 그후 그리스도의 이 름 아래 그리스도의 사역이 계속되게 하심으로써 그 리스도를 강력하게 증 거하는 일에서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나타내셨다(행2:1f,5:3등). 그래서 그는 비로서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그는 또한 장래 일을 알리셨다(요16:13). 그는 장래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을 충만히 성취하심으로써 이제 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하나님의 현존의 강력한 시행자가 되실 것이다 (사32:15-20,65:17-25,롬8:19-21,계21:1-4). 그때는 모든 것이 너무나 명백해 서 연구나 사색이나 믿음을 요구치 않을 것이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성령으로 온 세계에 충만하실 것이다(참고. 렘 31:34). 성령께서는 지금은 우리로 하여금 그 큰 두 가지 사역(그리스도 초림 때의 성령의 역사와 장래 일) 중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 고 믿음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도우시고(요 16:13a) 우리를 인도하신다(롬8:14). 사단은 간교하고, 사람은 연약하고 미 련하며, 세상은 요란해서 하나님을 스스로 알고 그를 경외함으로 생명을 얻을 만큼 지혜를 가진 자가 없다. 이에 성령님의 지속적인 활동이 필요한 것이다(롬 8:26). 성령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요3:5).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사람이 예수를 주시라 하면서 그에게 순종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 는다(고전12:3). 그는 우리에게 내주하셔서(요14:17)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고,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임을 알게 하시고 그리고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을 알게 하셔서 어려움을 잘 견뎌내게 하신다(롬8:15-17).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의 몸을 입게 하셔서(롬8:23,11) 새로 단장하 신 천지를 물려받게 하실 것이다(벧후3:13). 이는 다 하나님을 높이는 자 의 받을 복이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목적이 성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질 것인 데(벧전1:2-5) 영광스럽게도 우리와의 연합을 통해 이루어 주신다(요14:23, 마28:19).
10 no image 하나님의 신격에 몇 위가 계십니까?(2)
rpress
4272 2000-06-29
강세형 목사 하나님의 신격(神格)에 몇 위(位)가 계십니까? 하나님의 신격에 삼 위가 계시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데(마 3:16-17,28:19,고후13:13,벧전1:2) 이 삼 위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본체는 하 나요 권능과 영광은 동등이십니다(시45:6,사63:10,요1:1,10:30,14:16,17:5). 지난 번에는 삼위 하나님의 서로간의 관계에 대하여, 주로 아버지와 아들 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거니와 삼위일체 도리의 의의는 어디 있는가? 이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질문을 한 가지 던질 필요가 있다. 그 질문은 “삼위일 체 교리가 유대교에도 있는가?”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유대교에는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는 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게 되면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믿는 그들로서 는 삼위일체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삼위일체의 강조점이 제2위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새 로운 사실을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가 하 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리스도 그가 하나님 되시는 사실에 대한 주장은 갑자기 튀어나온 화두가 아니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줄곧 말해온 사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미 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눅24:25), 또는 도 무지 믿지 않는(눅22:67) 어리석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리스도께 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생소하고 당혹스럽고 심지어 참람하기까지 한 사실이다(요10:33). 그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견디지 못하였기 때문에 자꾸 의혹을 가지고 그의 신성을 믿지 않았는지도 모른다(요3:20 - “악을 행하 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 까 함이요”). 그러나 약속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야말로 하 나님의 현저한 자기 계시이며 또는 자기 계시의 방도인 것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 셨느니라”(요1:18) - 그렇기 때문에 이 계시를 믿지 않는 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인 것이다(요5:23). 또한 만일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진실로 이해했다면 그리스도의 자기 계 시로 더불어 구약성경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확증한다고 인정하 게 될 것이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연역적으로도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 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옳았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귀납적으로라 도 그리스도 자신의 신적 계시로 말미암아 그의 신성을 믿는 것이 마땅하 였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말씀 하신 바와 같다(요14:11). 만일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게 되면 삼위일체의 큰 진리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은 옛 이야 기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 앞에 두려우신 주로 등장하게 되 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믿지 아니하고 어떻게 현존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가 있는가? 유대인들은 자기의 신성을 주장하는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하나님의 실재와 다스리심을 믿지 않는 추상주의에 빠져서 사실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가 되어 그를 순종 하지도 않았고 구원을 얻지도 못했다. 참으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 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는”(요일5:12) 것이 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계시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다. 죄인들의 깨달음, 즉 자기들과 함께 사시는 예수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깨 달음은 주 하나님을 바로 죄인들인 자기들 곁에 모신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스도의 출현은 죄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 마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죄인들에게 진실로 하나님이 함께 계신 사실(하나님의 현존)을 증 거하고 말았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 로소이다”(눅5:8) 하였고 후에 제자들은 그의 신성이 깨달아질 때에는 그 앞에 엎드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고 두려움으로 경배하 지 않을 수 없었다(마14:33). 또한 백부장도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 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 겠사옵나이다”고 하였다(마8:8). 아! 하나님이 여기 계셨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28:17). 그러나 죄인 들의 마음에 그의 신성이(주 되심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된 것은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서이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이다. 그가 지금 당장 나타나지 않아도 역사적인 사식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재세시에는 그가 친히 이를 증거하셨거니와 이제 그가 승천하신 후에는 그와 함께 처 음부터 계셨던 성령과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를 보았던 사도들이 그를 증거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과 사도들의 증거로 말미암아 예수의 증거 즉 하 나님의 현존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증거는 단순히 지나가버린 역사적인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생생한 증거인 것이다. 우리는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 그가 하나님 이시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믿음이 없이 하나님의 현존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리스도를 주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는 하 나님을 화해적으로 만날 도리가 없는 것이다(요14: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다만 두려우신 주 하나님의 현존에만 머 무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자 비 의 계시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실천으로서 순결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의 죄를 속하여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그를 믿는 자는 멸 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복음, 하나님 메시지인 것이다(요3:16). 복음의 요점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현존으로 영접하고 그 앞에 굴복 하여 하나님과의 화해를 구함으로써 죄사함을 얻고 영생의 약속을 받는 것 이다. 이것이 삼위일체 도리의 핵심적 의의이다. 삼위일체 도리에서 두드러 지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9 no image 하나님 신격에 몇위가 계십니까?(1)
rpress
4483 2000-06-16
- 소요리문답 제6문(1) - 강세영목사 문: 하나님의 신격(神格)에 몇 위(位)가 계십니까? 답: 하나님의 신격에 삼 위가 계시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데(마 3:16-17,28:19,고후13:13,벧전1:2) 이 삼 위는 한 하나님이십니다. 본체는 하 나요 권능과 영광은 동등이십니다(시45:6,사63:10,요1:1,10:30,14:16, 17:5). 지난번에는 ‘다른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다’는 것을 생각하 였다. 사람들이 다른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자기의 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라고 하였다. 우리는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며 그에게 만 영생이 있음을 알고 그 안에서 만족함을 배워야 한다. 이처럼 숫자의 유일성으로 인하여 관계의 유일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 족은 관계는 뒷전으로 하고 숫자의 유일성에 치우친 나머지 진리를 배척하 고 말았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자랑하면서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 를 죽였다.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 그리스도는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고 한 것이라고 당시의 이스라엘 주류의 의 도를 바르게 간파하셨다(눅20:14). 이렇게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만일 하나 님과의 관계에 치중한다면 삼위일체 교리로부터 하나님의 유일성은 더 강 화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다’는 진리는 삼위 일체 교리로 인하여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삼위일체를 생각할 때에 삼 신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삼 위일체는 삼 신의 연합체가 아니라 하나의 신성이 구별되는 세 인격 안으 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삼위일체를 생각할 때에 하나의 자의 식(인격)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인격체란 구별되는 독립적 인격 체이기 때문이다. 삼 위(位) 하나님은 각 위가 인격적으로는 독립적이시다. 원래 위(位)란 인격(Person)과 동의어이다. 삼 위 하나님은 각 위가 독자적 인격들이시지만(Three Persons) 각 인격들의 관계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신 다. 삼 위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는 오직 한 하나님이시지만 인격적으로는 조화를 이루시는 삼 위이시다. 그러면 존재론적으로 한 하나님이 어떻게 삼 위로 계시는가? 우리가 삼위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맨 먼저 생각하게 되는 위는 아버지로 계시된 위이 시다. 그는 ‘모든 충만(신성의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 바로 그 아버지시다(골1:19). 그는 당신의 신성으로 하여금 당신의 인격과 는 구별되는 또 다른 하나의 인격으로 존재하게 하셨다. 그는 신성을 새로 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신성 자체로써 또 하나의 다른 인격으로 계시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인격은 아버지께로서 나신 인격인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아니다. 이것을 대요리문답에서는 ‘구별되는 품 성’, ‘고유한 품성’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아들’ 대신 ‘예수’라는 이름을 써도 되는 이유는 사람 이신 역사적 ‘예수’ 그가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이다. 즉 영원하신 하나 님의 아들이 인성을 입어 역사적 인물인 예수가 되실 때에 영원하신 아들 그 인격 자체에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취하신 인성이 별도의 인격 이 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그 인격 안에서 신성과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동일한 인격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인격이시요 한편으로는 사 람의 인격이신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를 말하는 여기서 ‘성자’라는 이 름 대신 궂이 ‘예수’라는 이름을 쓰는 이유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신성이 보이는 인간으로 계시되어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심 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품성의 차이는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시고 아들은 아버지 로부터 나시는 것인데 이것 외에는 그 신성에 있어서 차이가 없으시다. 왜 냐하면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기 때문이 다(골1:19). 영원성은 신성의 중요한 요소인데 영원하심에 있어서도 차이가 없으시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역사적으로 낳으신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낳으셨기 때문이다(영원출생 또는 영원발생). 예수의 인성은 역사적 으로 창조되셨지만 그 인격 자체는 역사적 산물이 아니요 영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신성은 단순히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동일한 것이다. 똑같은 또 하나의 신성이 아니라 바로 그 동일한 신성인 것이다. 이를 가리켜 한 하나님, 또는 ‘본체는 하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권능과 영광이 동 등’이라고 한 것은 서로 다른 인격이시니까(동일한 인격이 아니 라는 뜻) ‘동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동등’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동일한 신성이 서로 다른 인격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신성으로 말미암는 권능과 영광이 서로 다른 인격에 동등하게 미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신성 을 공유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 신성의 분할되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인격 은 그 신성 안에서 아들이라는 인격을 영원히 낳으시고 아들이라는 인격은 아버지의 그 동일한 신성 안에서 아버지로께로부터 영원히 나신다. 그래서 동일하신 하나님은 아버지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 고 그리고 또 살펴보겠지만 성령으로 계신다. 동일하신 하나님, 그러나 세 이름(세 인격)으로 계신 하나님.
8 no image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하나님이 있습니까? (1)
rpress
4374 2000-05-24
강세형 목사 - 소요리문답 제5문 - 문: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하나님이 있습니까? 답: 오직 사시고 참되신(렘10:10;요17:3;살전1:9;요일5:20) 하나님 한 분만 계십니다(신6:4;사44:6;45:21-22;고전8:4-6). 사람들이 다른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다른 하나님 곧 우 상숭배에 빠지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 타락한 심성상 자기의 사욕을 채워줄 다른 대상을 찾기 때문이다. 탐심은 우상숭배(골3:5)라는 말씀과 같이 사람들 이 하나님 말씀에 만족치 않고 탐심 곧 욕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단이 생 기는 이유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을 다른 모습으로 각색하여 자가의 욕심을 채울 수호신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구원론이 잘못되는 이유도 마찬가진데 자기의 욕심을 마음껏 채우고 하나님을 심판하지 않고 그저 자비나 베푸는 무 력한 하나님으로 만들므로써 그 그릇된 구원론을 인하여 하나님을 다른 하나 님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구원파가 여기에 속한다. 아담 이래로 사람들은 다 른 하나님을 요구하고 있다. 아담은 자신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어 모든 것을 자의로 처리함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자 하였다. 그는 다른 하나님 곧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결국 유물론의 무신론도 자기 자신 외에는 주관자가 없다는 아담의 신관과 그 본질에 있어서 같은 것이다. 그래서 유물론도 하나의 신관이요 하나의 신 앙인 것이다. 사람은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든지 또는 어떠한 신앙을 가지 고 있든지 간에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를 참으로 그렇게 믿고 인정하든지 그를 어떤 형태로든 부정하든지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이 우상숭배자다. 왜냐하면 사시고 참되 신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무죄인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말하 기를 “네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 냐?”(약2:19-20)고 하였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시다 하는 의미는 단순히 그 숫자의 유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치중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요행수를 바라고 다른 하나님을 요구하는 이유 가 여기에 있는 것이요 그 결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도 나왔고 무신론도 나왔 고 다신론도 나온 것이다.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였으며(롬 1:28) 마호멧교도들은 일부다처주의의 내세관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이 연 약하매 다른 신을 의지하고자 하나 주관자가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채워줄 우 상과 수호신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생각건데 이는 불능이다. 사단의 비극은 그가 불가능을 요구하였다는 데 있다. 그는 생명의 주를 버리고 자기가 주가 되고자 하였다. 그는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며 자기의 영역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는 곧 사단의 범죄의 모방인 것이다.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아 단 하나의 금지사항 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는 수많은 종류의 과일을 다 맛보기도 전에 오직 하나 의 과일에 주목하였다. 그 하나의 과일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욕심을 위하여 하나 님을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외에는 참되신 분이 없음 즉 생명의 주가 없음을 가르치시고 인류와 화목하기를 원하셨다. 사람이 삶 을 생각할 때 즉시로 하나님을 생각하여야 하였다.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에게 서 의와 기쁨을 요구하여야 하였다. 하나님 즉 의와 기쁨이시요 우리의 생명 이시다. 그런데 사단은 제2의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시험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필요로 하는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을 보이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하였다. 그러나 그리 스도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 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고 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마지막 아 담이 되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 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 어(롬3:23-24)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광이시 요 만족이시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의 영광에 이를 것이요 그의 사랑과 은 혜로 인하여 만족할 것이다(시23편). 그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를 믿 는 것이 중요하다. 그를 믿으면 그와 연합하게 되 어 잇다. 단순히 유일성의 숫자를 믿는 것이 아니요 그를 영광의 주로 믿고 그와의 관계를 바르게 가지 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 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 하라”(신6:4-5).
7 no image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rpress
4739 2000-05-15
소요리문답 제4문 강세영 목사(광양은송교회) 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답: 하나님은 신이시요(신4:15-19) 그의 존재하심과(출:14) 지혜와(시 104:24) 권능과(창17:1) 거룩하심과(사57:15) 공의와(창18:25) 인자하심과(시 1`00:5) 진실하심이(출34:6) 무한하시며(왕상8:27) 무궁하시며(신33:27) 불변 하십니다(시33:1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우리가 상상하는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뛰어 난 분이심을 이 문답은 말해주고 있다. 사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 사람들은 항상 타를 생각하기를 자기의 차원에서 생 각하게 된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도 아담은 하나님을 자기의 차원에서 이해 한 나머지 뱀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하나님이 신이시라는 것은 우 선 우리의 차원이 아니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다음, 그 차원이 우 리와는 어떻게 다른가를 각론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신이시라는 것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의 대조가 아니라 그 차원의 다름을 일차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비물질적인 존재방식을 취 하신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물리적 세계를 초월하시는 하나님 의 뛰어나심에 있는 것이지 단순히 비물질적인 것을 강조함은 아니다. 우리 는 물리적 세계에 속하므로 그 차원에서 비물리적인 세계를 힘없는 무엇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큰 오해이다. 예를 들어 무엇을 본다고 했을 때 물리 적 세계에서는 광원체나 반사체에서 빛이 발하여 우리의 망막에 들어오고 그 것이 시신경을 통하여 뇌에 전달됨으로 비로소 사물의 빛이나 모양이 어떠한 가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체계는 사실 얼마나 제한적이고 열 등한가? 어두운 곳에서는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력이 나쁘면 명확히 볼 수 없고, 본다 해도 비치는 그대로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착시라는 것도 있 는 것이요 모양은 그럴듯한데 착각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복 잡하고 열등한 물리적 인식체계를 통하지 않고 그 무한하신 능력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시니 그 앞에는 만물이 벌거벗은 것과 같이 드러나는 것이다 r (히4:13). 그러므로 비물질적인 것을 무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이 다. 오히려 제한적인 물리적 세계는 무한한 하나님의 세계를 계시하는 피조물 로 생각하는 것이 바른 것이다. 모든 보이는 것(가시적인 것)은 나타난 것(가 시적인 무엇) 자체에 기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히11:3). 강력한, 보는 것 이 없으면 저차원의 보는 것(물리적 세계에서의 보는 체계)도 없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의 보는 것은 물리적 세계의 보는 것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 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한 가지 현상이요 마찬가지니까. 물에서 물이 나왔다 하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형제에게서 형제가 나왔다 하면 말이 안 되는 것 과 같다. 그러므로 저차원의 보는 것은 고차원의 보는 것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조잡한 보는 체계는 그 자체가 영원할 수가 없고 그것은 반드시 영원 한 무엇에서 기원한 것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 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 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고 한다. 하나님이 신이시라는 것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 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한적 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조잡한 피조세계에 속하지만(하나님의 피조세계는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자 신의 영원하고 무한하신 영광에 비하면 우선 이렇게 편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 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제한에 속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원래 이 세계를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하시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그러하신 가?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에 있어서 그러하시다. 이것들은 그의 대표적 속성이시다. 그러므로 꼭 이러 한 점에서만 그러하시다는 것은 아니고 우선 대표적으로 표현할 때 그러하시 다. 우리는 물리적 존재도 되니 우선 물리적 존재의 속성은 유한함이다. 그러니 우리의 비물질적 속성마저도 유한함을 나타낸다. 반면 하나님은 신이시므로 그 존재하심이 무한하시다. 하나님은 물리적 개념인 공간개념에 있어서도 제 한을 받지 아니하신다. 그가 공간을 창조하셨으니 그는 우주 공간의 모든 점 에 그의 전 존재로 계시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신다. 존재란 물리적 세계 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오히려 그 자의식을 인하여 본질에 있어서 비 물질적이다. 한편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은 순전히 영적 차원이다. 이것들은 영적 존재의 여러 차원들이다. 이러한 속성들이 하나님에 게 있어서 무한하시니 하나님은 제한을 받지 아니하신다. 지혜와 권능이 무한 하심은 그의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고 유지하시는 창조와 통치의 국면에 있어 서의 무한하심을 나타낸다. 그 누구의 또는 그 무엇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시 고 자유로우심을 나타낸다. 그런가 하면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 하심을 그 자신에 있어서 또는 그의 피조물을 대하심에 있어서 그의 기본적 속성을 나타냄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거룩하시며 또는 다른 차원에서도 그 무 엇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시는 구별된 거룩한 속성을 가지고 계시고 그의 피조 물을 대하심에 있어서 공의로우시면서도 인자하시고 그러면서도 그 진실하심 이 무한하시고 무궁하시고 불변하시다. 무한하시고 무궁하시고 불변하시다는 것은 그의 모든 속성에 공동적으로 적용된다. 무한하시다는 것은 일시에 볼 때 무한하신 것이고 무궁하시다 는 것은 그것이 시간적으로도 어느 시에 제한 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신 것이며 또 그것이 자의적으로 변하시는 것이 아니 라 불변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불가능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변 덕이다. 아무리 능력에 있어서 무한하고 무궁하다 할지라도 변덕스럽다고 할 때는 의지하기 어려운 것이요 그 자의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니 불안한 구 석이 남아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불변이시니 우리가 안심하고 의뢰할 수 있 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영광스러우시고 완전하시다.
Selected no image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14)
rpress
4348 2000-04-07
강세형 목사 - 소요리문답 제3문 - ◈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믿을 것 은 무엇이며(창1:1;요5:39;20:31;롬10:17;딤후3:15),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 하 시는 본분은 무엇인가 함입니다. (신10:12-13;수1:8;시119:105;막6:8;롬1:5;딤후3:16-17;약2:4). 지난 시간에 성경은 ‘성령께서 쓰실 때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가르침을 반대하고 등한히 하는 경우도 엄위하신 하나님 의 말씀이라는 것과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셔서 나 타내고자 하시는 모든 뜻을 나타내셨다는 것(성경의 충족성)을 말했다. 그 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상고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알아내야 할 의 무가 있다. 성경은 마음을 써서 찾아내야 할 보화가 가득한 창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열심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성경이 기록될 당대의 대상에 따라 가장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언어와 문자로 기록 되게 하실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성경을 여러 나라 말 로 번역되게 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오늘은 성경이 긴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두 가지, 곧 하나님에게 대하여 믿 을 것과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산출할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둘은 결국 하나인데 우리가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내 용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를 믿음과 행위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20:21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는데 믿으면 생명을 얻는 것이고, 생명을 얻으면 하나님 앞에서 생명을 얻은 자답게, 죽어 있는 자와 달리 산 사람답게 생 활하는 것이고 행동을 내놓는 것이다. ‘믿음 플러스 행위로 구원을 얻는 다’ 하는 말이 맞다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데 이는 믿음이 행위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있어서, 믿음 이 은혜라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참된 믿음은 삶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삶의 열매’도 하나님의 은 혜인 것이다. 믿음이 은혜라 해 놓고 삶의 열매가 없으면 삶의 열매는 은 혜가 아니라는 말이나 다름없으니 그런 자에게는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참 믿음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믿음은 주 셨는데 삶의 열매는 안 주셨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히브리 서기자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거룩하신 뜻과 그 아들을 통한 계시를 저버린 데 대하여 경고하고 야고보 선생님은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본질상 같은 현상, 즉 행위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부 정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저버리는 일에 대하여 경고한다. 오늘날 구원파의 특징은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켜 놓고 행위를 중시하면 마 치 구원의 도리를 깨닫지 못한 자로 간주하여 얕잡아보는데 이는 성경적 무지로 말미암은 적반하장인 것이다. 구원파가 이단이라는 것을 들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상은 구원파적 이단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파가 건드리면 거기 넘어가는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교리를 전하려 고 접근할 때는 ‘교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행위를 중시하는 듯 이 ‘당신이 참으로 구원을 얻었느냐’고 겁을 주지만 결국 소위 그들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행위를 내팽개쳐 버리도록 하는 깨달음인 것이다. 당위와 능력의 긴장은 구원파적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약속되어졌다. 그 러므로 기도가 능력인 것이다. 그런데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의 부패함과 무능력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깨 운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시작되지만 거 기엔 분명히 하나님의 당연한 요구사항이 있다. 그 거룩한 요구에도 불구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이유는 그의 은혜가 우리를 구언하 였고 또 그를 경외하는 우리에게 그의 뜻을 이루시는 은혜를 믿기 때문이 다.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하는 죄인의 간절한 기도찬송을 비 웃기를 그 가사는 구원받지 못한 자의 가사이니 만큼 틀렸다고 하는 구원 파의 주장 은 거만하고 가력한 주장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을, 그 겸허하게 은혜 구함을 인하여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고 그 부패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구원에로까지 인도하시는 것이다. 지금은 우 리가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고 있지만 장차는 죄 자체로부터 구원을 받 아 우리 내면에 어떠한 갈등도 없는 평화로운 백성이 될 것이다.
5 no image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3)
rpress
4280 2000-03-21
강세형목사 - 소요리문답 제2문 - ◈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인가 를 지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무슨 준칙(準則)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 구약과 신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 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인가를 지도하는 유일한 준 칙입니다. (참조/마19:4,5; 신4:2) 지난 시간에는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성경은 하나의 책이 아니라 절대적 권위가 있는 책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 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감동 즉 영감의 성격은 기계적인 것이 아 니라 사람의 개성을 살린 ‘유기적 영감’이지만 사람의 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포함된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부분이 영감되었으므로 ‘완전영 감설’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소산이며 하나님의 계시 를 최적하게 나타내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준비되고 설계된 것이다. 오늘은 우선, 유기적 영감에 대하여 “성경은 사람 의 말이지만 성령께서 쓰실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가르침이 있는데 이는 그릇된 것이다. 성경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에게 구원과 순종의 효과를 내려면 성령께서 그 방향으로 쓰셔야 비로소 그렇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성경의 가르침을 반대하고 등한히 할지라도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이다. 하나님이 쓰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 님의 말씀인 것이다. 다음은, 성경은 완전히(즉 성경의 모든 부분이) 영감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 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셔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당신의 모든 뜻 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이다. 이를 성경의 축족성이라 한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이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하고 구원 얻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어떤 분야는 명문(明文)으로, 더 세밀한 어떤 분야는 ‘선하고 필연적인 귀결’로 나타 내셨다. 밝히 말씀하셨어도 모르는 것은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한 탓이요, 생 각하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을 모르는 것은 성경을 상고하고 연구하지 않 은 탓이다. 노력을 기울이 지 않고 막연히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솔한 것이다. 말씀을 읽고 상고하고 기도함으로 내면화해 나가야 한다. 성경계시가 이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이미 다 나타내고 있 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른 계시를 기다릴 필요가 없고 다만 성경계시를 밝 히 조명을 받으면 된다. 성경을 모르고서 성경과 배치되는 소위 계시들을 믿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선하고 필연적인 귀결로서 알 수 있는 것을 등한히 하고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교훈들을 따라가는 것은 얼마 나 위험한 일인가?
4 no image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2)
rpress
3760 2000-03-04
강세형 목사 - 소요리문답 제2문 - ◈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인가 를 지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무슨 준칙(準則)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 구약과 신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 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인가를 지도하는 유일한 준 칙입니다. (참조/마19:4,5; 신4:2)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은 다른 어떤 책들과도 달리 진실 하고 사실이고 권세가 있어서 사람들이 마땅히 믿고 따라야 할, 권위 있는 책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능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 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이다 (딤후3:15). 그러므로 성경의 교훈, 성경의 말씀은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 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말해서 절대적인 진리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겸손을 빙자하여 여러 주장 가운데 하나라는 식으로 상대화해서는 안 된다. 설령 다른 사람 들이 달리 주장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 점을 선언하고 주장 하고 실천해 나가야 하고 또 가능하면 시민사회에서 법제화해 나가야 한다 (예를 들면 시민사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지키느라 불이익이 없도록, 주일의 사회적 훼손이 없도록, 세계사가 오늘의 발전에 이르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보존되도록 해야 한다. 여러 가지 시험이나 또 는 수업이 주일에 이루어지는 것은 발전된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현대인들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여 그 백성들을 괴롭힘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한 다는 점에서 의분을 일으켜야 마땅한 사안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은 종교의 자유로 인하여 심판 때까지 우리가 직접 간섭할 수 없지 만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인하여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기 회의 균등을 깨드리는 처사는 그들이 모르고 그런다고 변명할지라도 본질 상 후안무치한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땅함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이는 하 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 인 것”이다(딤후3:16-17). 그러므로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중요한 점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성령의 활동하심의 결과로 되었다는 말이고 그래 서 성경은 하나님의 소산(所産)이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을 보면 돌판에 새 겨졌던 ‘십계명’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쓰셔서 주신 것이 있고 어떤 것은 받아쓰는 식으로 듣고 그대로 기록한 것이 있지만 많은 부분은 하나님의 계시하신 일을 역사로 기록하고 그 기록했던 것을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 서 된 것이다(벧전1:1-11, 눅1:1-3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생각을 인 도하시고 그 기록할 말을 선택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생각의 역할이 필요하고 또 기록의 수고가 따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활동 하셔서 비로소 나온 책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감동(영감)의 방식이 기계적 인 것이 아니고 개인의 지식과 성장과정과 문체까지라도 다 특색 있게 준 비하시고 사용하셔서 성경이 기록되게 하신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 ‘유기 적 영감’이라고 한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 께서 사람의 개성을 살려서 기록하게 하셨지만 성경의 내용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는 특히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 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필요한 부분이다. 그들에 의하면 아주 순수한, 인간 성을 잘 나타내고 가르치는 말씀, 예를 들면 산상수훈 같은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고, 메시아가 일어나 세상을 심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당시 유대사회의 사상을 이용한 것 뿐이고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론은 성경은 다 하나님이 말씀인 것 이다. 이렇게 ‘모든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주장을 ‘완전 영감설’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믿어야 한다. ‘성경’에 대해서 다음에 조금 더 생각할 것이 있다.
3 no image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rpress
4464 2000-03-04
강세영 목사 - 소요리문답 제2문 - ◈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인가 를 지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무슨 준칙(準則)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 구약과 신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 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인가를 지도하는 유일한 준 칙입니다.(참조/마19:4,5; 신4:2)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마음도 잘 생기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방법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누구 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에 대하여 잘 알아야만 하는 것처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 영광을 알지 못한다면 그를 사랑할 수 없을 것 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타락하기 이전이라도 만드신 만물을 통해서 뿐 아니라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명령하시고 인도하셨다(창3:8)는 것 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타락한 이후에는 더욱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였으 니 이는 사람이 그 타락한 본성으로 진 리를 억압하고 반대하고 하나님을 기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타락의 결과는 멸망인데 하나님께 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구원하시는 뜻과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지식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행동, 즉 일로써 계시하시고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말씀하심으로써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하셔서 자기를 계시하신 것 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실제적인 것이 되기 위하여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 에 그것이 당대의 다른 사람들과 후대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기록될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의 계시가 다양하고 많지만 그중에 우리에게 필요하고 충분 한 부분을 선택케 하여 전하여 준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구약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계시와 동의어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가 구원도 얻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이 무엇인가 배워서 거기에 순종하고 삶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를 영원토록 기뻐하도록 하신 것이다.
2 no image 사람이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rpress
5172 2000-01-27
-성도들을 위한 소요리문답 해설(1) 강세형 목사 ◈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입니다. (참조/시 86:8-13;16:5-11) 사람의 목적을 성경이 이렇게 가르칠 때 이를 믿으면 불행한 환경에서도 참으로 불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행복이란 그 목적한 바를 이룰 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사랑의 대상이신데 마음껏 사랑할 수 있다면 누구라서 불행 하겠는가? 만일 불행을 느낀다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자문해 보아 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글을 시작함은 우리 사람들이란 그 타락한 본성을 인하여 자기 행복을 최우선시하는 연고로 그 방편으로서 하나님을 끌어들이기 때 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요 나의 행 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언제나 하나님을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죄인인 우리에게 접촉점을 갖기 위하여서 이렇게 시 작하지만 그러나 원래의 순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지 어진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다면 거기에 따라서 우 리의 생명과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 하여 지어졌다는 이 사상이 자연스러운 것이 될 때, 즉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을 기쁘게 여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자 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심성이 바르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자기 아이를 참으로 사랑하 며 바른 가치관을 가진 아버지가 있다고 하자. 그 아버지에게는 이룰 뜻이 있으며 그 이룰 뜻은 아이의 참된 행복에도 조응하는 것이다. 이 아버지가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 아이가 아버지를 믿고 언제나 즐겁게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자관계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러한 관계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도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아들은 자기 행복을 위해서가 아 니라 참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고로 아버지의 이룰 뜻을 통하여 자기 행복 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나타내기는 역부족이다. 아무 래도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어야겠다. 토기장이는 좋은 그릇을 만들기 위하 여 만들다가 안되면 파쇄하여 버린다. 좋은 그릇이 될 때까지 만들기를 주 저하지 않는다. 이 비유가 성경의 진리의 다방면에 다 조응하는 것은 아니 므로 한 가지만 취하자. 토기장이는 ‘좋은 그릇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 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도 궁극적으로 그러하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을 위하여 지으셨다는 말이다. 토기가 온전히 보전될 것은 오 직 그의 뜻이 이루어졌을 때뿐이다. 참으로 이 진리에서 하나님께 대한 경 외심이 나온다. 그리고 이 진리로부터 하나님 중심사상을 배우게 된다. 우 리가 원래 존재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고 우리와 합의하에 무 슨 일을 이루어야 할 형편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뜻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상대적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절대적 관계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화로우심을 믿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이 그것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으로 이것을 믿을 때 우리는 하 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 의 기 쁨이 될 것이다. 우리가 알 것은 이러한 믿음이 순종의 근거가 되며 순종은 하나님을 기쁘 시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며 이 창 조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은 자는 영생할 수 없고 따라서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찬양은 하나님의 모든 점에 대한 찬양이며 찬양은 기쁨이요 더없는 즐거움이라는 사실이다. 찬양하는 자는 더 이룰 것이 없는 것이다. 다 이룬 것이다. 사람이 다 이룬 후에는 오직 즐거워하는 것같이 하나님을 찬양하 는 자는 더 이룰 것이 없이 오직 즐기는 것이다. 우리 주인의 즐거움에 참 예할 것이며 그것을 내다봄으로 지금이라도 찬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알 것은 우리가 무슨 큰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무엇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영화로우신 분이시니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통하여서 일하실 수 있고 순종을 통하여서 자기 영광을 드러내신다.
1 no image 사람이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2) (1)
rpress
5919 2000-01-27
◈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입니다. (참조/시 86:8-13;16:5-11)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담당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였다(사53:11). 또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들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하였다(호4:6). 첫 사람 아담을 생각해 볼 때 그는 하나님처럼 될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을 거부하 였다. 그 결과 그는 죄를 짊어지고 사망의 종이 되었다. 죄란 별 것이 아니다. 죄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거부 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아담 은 자유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그는 사망의 종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진리란 하나님의 종 이 되는 진리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하는 종이 되는 것을 말한다. 종 됨을 통하여 자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 의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고 하였다. 피조물은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담은 자유인이 되려 하였지만 결국 사단의 종 이 되어 멸망의 종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거부한 다면 도대체 누구의 종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인가? 피조물은 종이 된다는 점을 알지 못했던 아담을 속인 점에 있어서 사단은 예수님을 속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게 엎드려 절하라 그리하면 천하의 영광을 네게 주리라” 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뻔뻔스럽게 피조물인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을 이런 식으로 유혹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대담하게’ 그렇게 하였다. 농담하자면 ‘죽을려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그는 하 나님의 종이신 그리스도를 자기의 종이 되라고 유혹하였던 것이다. 그리스 도는 대답하시기를 “사단아 물러가라 오직 주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 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첫 사람 아담과 달리 40 주야를 주리시고 모든 조건이 악한 광야에서도 모든 시험을 물리치시고 하 나님의 종이 되기를 마다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의 종이 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성경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한 것은 피조물은 종 됨을 통하여서만 자유에 이를 수 있다는 것, 하나님 의 종 됨을 통하여서만 참 자유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해주 고 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종이 아니니 피조물의 종이 될 때는 죄와 사 망의 종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의 종이 되 지 아니하고 우리 자신의 종이 되면 어두움과 무지와 멸망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 신을 더 믿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종이 될 것이고 어두움 가운데서 멸망 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것이다. 완전하신 하나님을 믿자.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자. 그리하여 하나님의 종이 됨을 기뻐하자. 우리는 하나님 안 에서 영원히 즐거울 것이다. 강세영(광양은송교회 목사)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