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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no image <웨신해설29-①> 사람의 창조 <제4장 2항>_김병훈 목사 (5)
편집부
3141 2013-02-05
사람의 창조 <제4장 2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4장 2항: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신 후에 이성적이며 불멸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이들을 지으셨으며,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충만케 하시고, 이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셨으며, 이들에게 그것을 성취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의 자유로움에 따라 행하도록 허용이 되었으나, 자유의지는 변화를 받기 마련이므로, 죄를 범할 가능성 아래에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심령 안에 기록된 율법에 덧붙여,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한,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가운데 행복하였으며 피조물들을 다스렸습니다.” “일정한 질서 가운데 남녀는 사랑의 연합에 근거한 혼인생활 유지해야” 2항에서 교훈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첫째,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둘째, 사람은 이성적이며 불멸하는 영혼을 가진 자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가 되었으며 그들은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한 자로 지음을 받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셋째, 사람은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넷째,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를 하며 피조물을 다스리는 행복을 누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지킬 때에라야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다섯째, 사람이 거룩하며 복된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나 죄를 범한 것은 그의 자유의지가 변화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이 본 항에서 교훈하는 첫 번째 내용은 남자와 여자의 창조와 관련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한 사람의 남자를 창조하시고 그 후에 그 남자에게서 몸의 일부를 취하여 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창 2:22). 이 사실은 남자와 여자가 사람으로서 본질상 동일한 존재임을 말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본질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이 완전히 동일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인 성의 차이로 인하여 어떠한 인격적 차별을 받을 이유가 없으며, 완전히 평등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주신 명령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생육하며 번성하여야 하는 책임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주실 때에 아주 특별한 명령을 함께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동물들을 창조하신 것과 비교할 때 뚜렷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을 창조하실 때에는 여러 쌍을 만드셨지만,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단지 남자와 여자를 각각 한 명씩만 창조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는 사람으로서 본질이 완전히 동일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 가운데 연합하여 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명령을 받고 있음을 뜻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3-24). 남자와 여자는 동일한 본질을 지닌 평등한 존재이면서, 서로 구별이 되는 다른 존재이지만, 혼인을 통해 한 몸을 이루는 사랑의 연합을 이루며 살아야 하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일정한 질서 가운데 이러한 사랑의 연합에 근거한 혼인생활을 이루어 가도록 교훈을 하셨습니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창 2:20-21). 여자는 남자에게 있어서 돕는 배필로 창조함을 받았습니다. 혼인 생활에 있어서 남자인 남편은 여자인 아내에 대하여 머리가 되며 아내는 남편에 대하여 돕는 배필로서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175 no image <웨신해설 28 -②> 우주의 창조_김병훈 교수 (103)
편집부
8167 2013-01-08
우주의 창조 <제4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4장 1항: “태초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능력, 지혜, 그리고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무로부터,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모든 것을, 6일 동안에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심히 좋았습니다.” 1항에서 교훈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첫째,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둘째, 창조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사역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자유롭게 행하셨습니다. 넷째, 창조는 영원한 능력과 지혜, 그리고 선하심을 지니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습니다. 여섯째,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이러한 교훈들에 대해서 지난 호에 이어 다섯째 내용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섯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명령을 발하심으로써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말이 뜻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의 원인이 될 뿐이며,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떤 물질이 ‘나타난 세계’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어떤 것도 무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ex nihilo nihil fit)는 명제를 들어 ‘무에서의 창조’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어떤 일이라도 그것이 발생하려면 그것으로 하여금 그렇게 존재하게 한 어떤 것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세계도 이 세계가 나타나기 이전에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원인으로서의 물질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우선 ‘어떤 것도 무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명제가 의미하는 바는 ‘원인이 없는 결과란 없다’는 것임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명제는 질료적 원인으로서 물질이 창조 이전에 이미 존재하여야 한다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에서의 창조’를 말할 때 그것은 이 세상이 어떤 원인도 없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의 유일한 원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도 무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명제는 결코 ‘무에서의 창조’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무에서의 창조’는 두 가지 내용을 말합니다. 하나는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존재토록 하시는 일이며, 또 다른 하나는 존재하도록 만든 그것으로부터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는 일입니다. 혹자는 이 가운데 전자의 경우는 ‘무에서의 창조’라고 할 수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이미 존재한 물질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를 ‘무에서의 창조’라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무에서의 창조’를 말하는 것은 전자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오직 명령만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존재하도록 하신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후자의 경우처럼 물질 그 자체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가지고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들을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세상과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타나 있는 바대로 그렇게 나타나도록 하는 능력을 그 자체 안에 가지지 못합니다. ‘무에서의 창조’는 이처럼 물질 자체의 무능력을 말하면서, 이처럼 물질을 사용하여 오늘에 보는 바와 같은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것들로 하여금 나타나도록 한 창조는 바로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여섯째로 4장 1항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하여 ‘6일 동안의 창조’를 고백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유의하여야 할 점은 창세기 1장은 단지 종교적 진리만을 교훈할 따름이지 과학에 대한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을 도덕과 윤리와 미학과 종교라는 주관적 영역에 가두어 버리고, 오직 과학만을 자연에 대한 설명과 같은 객관의 영역의 주인으로 삼게 됩니다. 그리하여 성경에게서 창조에 대해서 발언권을 빼앗아 버립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기적의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인정될 수 없는 주장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매우 잘못된 접근입니다. 성경은 자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간섭을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성경적 교훈에 합당한 과학은 이적을 배제하지 않는 과학이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은 단지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종교적 주장을 말하고 있을 뿐이며, 창조된 세계를 이해하는 모든 기준과 판단에 대해서는 오직 과학만이 말해줄 따름이라는 주장은 성경과 과학에 대해서 각각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는 ‘6일 동안의 창조’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다양한 주장들이 개진되어 왔습니다. ‘간격’(Gap)이론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광대한 시간의 간격이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지질학적으로 지구의 연대는 오래된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이 주장은 2절에서 말하는 바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첫 창조가 그만 ‘혼돈하고 공허하게 변하여 버렸다’를 뜻한다는 해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절의 말씀은 처음의 창조가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였음’을 뜻하는 것이지, 본래 그렇지 않았던 것이 그렇게 변하여 버렸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해석은 인정할 만한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6일 동안의 각 날은 그 사이에 긴 기간이 존재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흐름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에 걸쳐서 창조의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셨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흐름은 바로 이스라엘이 6일 동안 일을 하고 하루를 안식하는 삶의 형태를 명령하는(출 20:8-11) 신학적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이스라엘의 안식의 주기 사이의 이와 같은 유비는 각 날들이 연속적으로 간격이 없이 연결이 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특별히 첫째, 둘째, 셋째 등으로 이어지는 날의 계수는 각 날 사이에 시간의 커다란 간격이 있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만일 어떤 오랜 시간의 간격이 있다면 첫째 날 이후에 많은 날들이 지나고 나오는 날을 가리켜 둘째 날이라 일컬을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는 ‘6일 동안의 창조’는 하나님께서 실제로 창조하는 데에 사용하신 기간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에 대한 계시를 받는 시간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본문은 이러한 해석을 지지해줄 아무런 근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안식일과 관련한 일주기의 명령은 하나님의 사역과 쉼을 반영하는 명령이지, 모세가 계시를 받은 날을 모방하는 명령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는 ‘날-시대’(Day-Age) 이론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욤’(탗)이 24시간의 하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서 밤과 대비되는 낮 기간을 가리키거나, 특별한 성격을 갖는 어떤 시간의 간격을 가리키기도 하며(습 1:14-16), 또는 불특정한 기간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한 주장입니다(창 19:37, 습 3:11). 창세기 1장 5절(하루 밤낮 주기)과 창세기 2장 4절(천지를 창조한 특별한 성격의 때)은 서로 다른 ‘날’의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 날에 첫째, 둘째, 셋째 등 숫자가 덧붙여져 있으며, 각각의 날이 또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과 연결이 되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각 날이 통상적으로 저녁과 아침으로 이루어진 24시간의 하루를 뜻한다는 판단을 강하게 지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출애굽기 20장 11절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의해 강력하게 지지를 받습니다. 따라서 ‘날-시대’(Day-Age) 이론은 해석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다른 어떤 이는 창세기 1장과 2장을 문학적 관점에서 읽을 것을 요구하는 ‘구조이론’(framework theory)을 주장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창세기는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말할 뿐, 창조와 관련한 시간의 길이나 순서 그리고 방식에 대해서는 말하여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6일의 ‘날’은 문자적으로 24시간 하루가 아니며, 단지 첫 날과 넷째 날, 둘째와 다섯째 날, 셋째와 여섯째 날의 짝으로 상호연결이 되는 문학형식의 수단일 뿐입니다. 이러한 문학형식을 통해서 하늘의 공간, 바다, 마른 땅과 같은 세 영역들의 창조가 첫 날부터 셋째 날까지 제시가 되고, 이어서 공간에는 해, 달, 별들이, 바다에는 물고기와 새들이, 마른 땅에는 동물과 사람들처럼 각 영역의 지배자 또는 왕들에 대한 창조의 언급이 넷째로부터 여섯째 날까지 연결이 되고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더 나아가 ‘구조 이론’은 창세기 1장의 하늘과 땅의 창조를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의 창조로 말하며, 전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하실 곳과 천사들을 위하여 만드신 영적 영역이며, 후자는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이 때 전자는 후자의 원형이며, 후자는 전자의 모형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에 따라서 이들은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은 천상의 영역의 창조에 대한 모형으로서의 보이는 물리적 세계의 창조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따라서 ‘6일의 창조’는 하늘의 영역에서의 ‘한 주 - 6일 노동’이라는 창조의 틀을 반영한 것일 뿐, 물리적인 시간으로서의 ‘6일’과는 상관이 없으며, 단지 앞서 말한 바대로의 주제별로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이 상호 연결된 문학적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구조 이론’의 최대의 약점은 창세기의 1장과 2장을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계시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주석적 관점에서 창세기 1장과 2장을 문자적 의미에 따른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은 훌륭한 해석이라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도 지적한 바처럼 ‘날’이라는 말이 순서에 따라 연속적으로 이어져 나오는 흐름은 각 날이 서로 구별이 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늘의 공간’을 창조한 첫째 날과 그것의 지배적인 왕으로서의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한 넷째 날이 서로 동일한 날로 해석하는 ‘구조 이론’에 대한 강한 반론을 줍니다. ‘구조 이론’은 일곱째 날의 안식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없으며, 또한 24시간이 아니라 끝이 없이 긴 시간을 가리킨다는 점에 강한 논거를 의지합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일곱째 날이 영원한 시간인 만큼, 다른 6일 동안도 24시간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6일 창조’는 문자적 24시간이 아니라 비유적인 시간들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 ‘저녁-아침’의 표현이 생략이 된 것은 더 이상 창조의 사역을 이어가지 않으시고 이미 여섯 날로 완성이 되었으므로 새롭게 덧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안식의 일곱째 날은 한 주간의 마지막으로 그 날로 한 주가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이어지는 다음 날과의 구별을 위해 ‘저녁-아침’의 구절이 덧붙여질 필요가 없습니다. 일곱째 날도 앞의 여섯 날과 마찬가지로 하루의 날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안식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일곱째 날 이후에 그러한 것이므로, 굳이 일곱째 날을 영원한 날로 주장을 하며, 이에 근거하여 앞의 여섯 날도 비유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해석적 적용이 아닙니다. 더욱이 ‘구조 이론’은 창조의 방식에 관하여 ‘자연섭리’를 말합니다. 즉 오늘날 경험이 되고 있는 자연의 질서 과정을 따르는 통상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것들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를 연대기적 시간 개념을 배제하고 문학양식으로 읽는 ‘구조 이론’은 유신론적 진화론자들(theistic evolutionists)이나 점진적 창조론자들(progressive creationists)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은 ‘6일 창조’를 말하면서 하나님에 의한 직접적인 특별 창조를 말합니다. 1절은 하나님의 창조를 특별히 선언하며, 2절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창조된 세계를 보존하고 또한 창조를 이끌어 가는 초자연적 사역을 행하심을 나타내 보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할 때(요 1:3, 히 1:2), 그 말씀들은 일반 섭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특별한 섭리에 의한 직접적인 창조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는 ‘6일 동안의 창조’에 대한 가장 정당한 해석은 종교개혁자들의 해석학에 따라 본문의 명백한 의미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24시간의 6일 동안에 창조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을 부정하려면 앞에 예시한 여러 해석들처럼 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참으로 어렵고도 복잡하면서도 확신을 주지 못하는 해석의 절차들을 따라가야 합니다. 반면에 이러한 해석들과 달리 ‘24시간-6일 동안’의 창조는 창세기 1장을 성경 자체만으로 해석할 때 가장 분명한 해석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있는 대로 ‘6일 동안의 창조’를 믿을 것을 교훈합니다. 어떤 이들은 ‘6일 동안’의 창조론은 현대과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현대과학은 오랜 지구의 역사를 말합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6일 창조론으로 인하여 성경이 믿을 수가 없는 것이라는 불신앙을 조장할 따름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현대과학 이론은 여전히 수정을 겪고 있으며, 또한 이 세계의 창조의 연대와 관련하여서는 많은 점에 있어서 의문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구가 오래되었다는 주장은 현대의 주류 과학이론에 의해서 지지를 받고 있지만 아직 진리로 확정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와 자연의 진리는 둘 다 하나님의 진리이므로 모순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와 관련한 해석들 가운데 ‘6일 동안’의 창조론을 제외한 거의 모든 것들은 현대과학의 주장을 자연에 대한 확정적 진리로 인정을 하고, 그것에 따라서 성경의 해석을 조정하려는 노력의 결과물들입니다. 그러나 지구의 창조와 연대에 관한 현대과학의 주장들을 진리로 확정을 하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의문점들이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을 준거로 하여 ‘24시간-6일’ 창조론을 버리는 것은 지극히 경솔한 성경 해석적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재로서 가장 적절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24시간-6일 동안’에 성숙한 우주를 창조하신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구의 나이가 오래 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판단이 되는 관찰이 나타나면 그것은 성숙한 지구를 만드신 까닭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반면에 지구의 나이가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관찰이 나타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신 때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까닭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때 주의할 점은 성숙한 지구의 나이가 얼마만큼의 나이를 가진 지구인지는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은 성숙한 성인으로 창조가 되었을 것입니다. 창조 때의 아담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 것인지는 아담의 자손들의 성장을 통해 확인을 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창조는 그러한 반복을 통해 초기 창조의 상태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하나님께서 창조를 6일 동안 하셨음을 믿고, 그러한 창조의 시점이 얼마나 오래 된 것인지를 성경과 과학적 연구를 통해 살펴보면서, 아울러 하나님께서 창조 초기에 이미 우주를 일정한 정도로 성숙한 상태로 만드셨음을 기억하면서, 성경해석과 과학의 관찰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권능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끝으로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음을 천명합니다. 이러한 선언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만드신 세계가 창조 처음에는 어떤 악이나 죄가 없었음을 명백히 합니다. 성경이 이 세상이 악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이 세상이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오염이 되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얼마나 오랜 시간 전에 창조가 이루어졌는지를 답하는 앞선 질문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습니다. 동물의 화석들이 긴 연대를 증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수 많은 동물들의 죽음이 있는 세상이 그토록 오랜 동안 있어 왔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인데, 그러한 세상을 가리켜 성경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실 수 있는 것일까? 동물의 죽음은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만일 사람의 타락 이전에 동물의 죽음이 있었다면 사람의 타락은 오직 사람에게만 죽음의 저주를 결과한 것인가? 또 소위 사람 이전의 많은 종류의 유인원들이 있었다면 사람은 오랜 세월의 유인원들의 죽음을 통해 창조된 것이며 그 후에 또한 완성된 사람은 죄로 인하여 자신의 죽음을 다시 초래하게 되었단 말인가? 이러한 죽음의 문제에 대해 긴 연대설은 어떠한 이론들이라 할지라도 신학적으로 커다란 문제점들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긴 연대설을 따르는 새로운 답변이 앞으로 주어질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것은 악과 고통,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고려할 때 ‘24시간 6일 창조’의 해석이 신학적으로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지지해줍니다.
174 no image <웨신해설28-①> 우주의 창조 <제4장 1항>_김병훈 목사 (17)
편집부
3851 2012-12-11
우주의 창조 <제4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4장 1항: “태초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능력, 지혜, 그리고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무로부터,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보이는 것이든지 보이지 않는 것이든지 모든 것을, 6일 동안에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심히 좋았습니다.” “창조의 일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신 공동의 사역” 1항에서 교훈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첫째,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둘째, 창조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사역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자유롭게 행하셨습니다. 넷째, 창조는 영원한 능력과 지혜, 그리고 선하심을 지니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습니다. 여섯째,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에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이러한 교훈들에 대해서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결과로 나타난 피조물입니다. 이 세상은 본래부터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한 바와는 반대되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이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하며 자존적인 것이며,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의 형태는 하나님의 활동에 의하여 혹은 스스로의 원리에 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은 하나님이 외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실현하기 위하여 자신을 발출한 결과라고 주장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아예 하나님의 존재는 부정을 하며 물질만이 스스로 영원부터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오늘의 현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과 물질이 영원하다는 이원론이나, 이 세상이 하나님의 외적 실현이라는 범신론이나, 아니면 물질만이 영원하며 스스로 존재한다는 유물론에 대해서 단호히 잘못된 것임을 교훈합니다. 이 세상은 만들어진 피조물이며, 그것을 만드신 분은 홀로 영원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 창조주의 명예와 영광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려져야 하며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돌려지는 일은 단연코 배격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창조의 일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행하신 공동의 사역입니다. 흔히들 창조는 성부, 구속은 성자, 그리고 성화는 성령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으로 귀속을 시킵니다. 하지만 이것은 각각 사역의 대표성을 각 위에게 우선적으로 돌려드리는 것일 뿐이지, 어느 한 위가 그 사역을 독점적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뜻하지 않음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창조와 관련하여 성부 하나님의 창조는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으로 천명이 되어 있습니다(고전 8:6 참조). 동시에 성자 하나님께서도 창조 사역에 함께 하셨음을 교훈하는 성경의 구절들은 여럿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고전 8:6, 엡 3:9, 골 1:16, 히 1:2 참조). 성령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언급이 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 욥 26:13 참조),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 사 40:12, 13 참조)는 등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는 말씀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함께 언급이 되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결국 창조 사역은 삼위 하나님이 창조자이시며, 그 방식은 삼위일체의 ‘기원’이신 성부께서 성자 하나님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행하신 일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창조 사역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사역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스스로 기원이 되셔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성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영으로 사역을 함으로 공동의 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셋째, 삼위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오직 자신의 기쁜 뜻에 따라 자유롭게 행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행하심에 있어서 어떤 외적인 원인으로 인하여 행하신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신 일입니다. 따라서 창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기로 결정을 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필연적인 존재가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결과적으로 발생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창조의 사역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각 위격이 서로를 향해 갖는 활동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성부에게서 성자 하나님이 나시고, 또한 성부와 성자 하나님에게서 성령 하나님이 나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내적인 본질 안에서 이루어지는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창조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과정적 필연성을 가질 뿐이며, 하나님의 본질에 의한 절대적 필연성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창조를 행하신 목적은 자신의 영원한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렘 10:12; 시 33:5-6; 104:24; 롬 1:20).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은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하지만 이 말을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신 까닭이 자신의 어떠한 필요나 결핍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창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더하여지거나, 반대로 이 세상이 파멸이 됨으로써 감소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창조의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여 비추게 될 따름입니다. 창조 세계 가운데 인격적 피조물인 사람이 이 영광을 찬양하는 일은 그에게 있어 더없이 커다란 행복이 됩니다.
173 no image <웨신해설 27-②> 선택과 유기, 예정의 신비<제3장 8항>_김병훈 목사 (3)
편집부
3936 2012-10-16
선택과 유기, 예정의 신비<제3장 8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3장 8항: “이처럼 매우 신비로운 예정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을 한 사람들로 하여금 확실한 유효적 부르심으로부터 그들의 영원한 선택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히 신중하며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리함으로써 이 교리는 복음에 진실하게 복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 찬양과 경외와 경배를 드리며 겸손함으로 근면히 행하며 풍성한 위로를 누리게 될 이유를 알려주게 될 것입니다.” “예정교리 깨달을 때에 비로소 영원한 선택 확신할 수 있어” 신앙고백서는 예정교리를 가르쳐지고 선포하여야 한다는 데에 강조를 두고 있음에 유의를 하여야 합니다. 신앙고백서가 예정교리는 아주 신중하게 주의를 하여 가르쳐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의 의도는 가급적 가르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되 신중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즉 가르치라는 데에 중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도는 칼빈의 교훈과도 일치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극히 소극적이며 자신이 없어, 예정에 대한 모든 언급들을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않도록 묻어버리자고 할 때, 그들의 행동은 그들도 사려깊이 보고 있는 위험성을 하나님께서 미처 보지 못한 채 적절한 배려를 하지 못했다는 식의 비난을 간접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교만을 무슨 색깔로 덧칠해 감출 것인가?”(기독교강요 3권 21장 4항). 목회적인 고려를 할 때, 예정교리를 가르치면 안 된다는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는 앞서 이미 말한 것처럼 소극적인 것으로, 하나님께서 예정교리를 계시하신 것은 예정교리로 인하여 나타나게 될 목회적인 문제점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보지 못하신 불찰 때문이라는 식의 비난을 하나님께 대하여 하는 셈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보다도 지혜롭지 못하다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그릇된 판단을 담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측면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정교리를 계시하심으로써 그것을 통해 영적인 유익을 얻도록 하신 바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이러한 잘못과 달리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하는 사람들은 예정교리를 통해서 영원한 선택을 확신할 수 있게 됨을 교훈합니다. 예정교리는 구원의 확신을 굳게 합니다. 예정교리를 통해 영원한 선택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유효적으로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으로 회심한 사람이라야 예정교리가 말하는 선택의 은혜를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정의 사실을 먼저 알고 난 후에 회심을 하는 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예정의 사실을 미리 알고서 비로소 복음에 순종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나, 혹은 선택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니 복음에 순종하려고 애를 써보아야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주장은 결코 인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먼저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하나님의 교훈적 명령에 순종을 한 후에 비로소 자신이 선택의 예정에 따라 영원한 선택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가 있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담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9). 그러므로 이처럼 복음에 진실하게 순종을 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유효적으로 나타난 사람은 자신이 선택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복음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은 선택을 받은 자로서가 아니라 죄인으로서 행한 것이지만, 그렇게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순종으로 반응한 사람은 이제 선택의 예정에 관한 계시를 통해서 그 순종이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고 자신의 영원한 선택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통한 영원한 선택을 이처럼 확신하게 되면서 복음에 순종한 사람은 이제 신앙고백서가 바르게 지적하고 있는 바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며 경배를 합니다. 즉 예정교리는 하나님께서는 예정을 하신 이유와 관련해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엡 1:6)이라고 말씀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고 경배를 할 이유와 동기를 밝히 보여줍니다. 아울러 예정교리는 영원한 선택을 확신하는 믿음의 사람을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경건을 쌓기에 근면하며 고난 가운데서도 위로를 풍성히 누릴 수 있게끔 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라는 말씀은 신자의 유일한 위로의 근거가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선택에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만일 구원의 확신이 신자 자신이 행한 노력과 공로에 근거한다면, 어떤 신자라도 자신이 행한 숱한 무력과 불순종과 불의 때문에 결국 어떤 구원의 확신과 위로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중생한 신자라도 옛사람의 흔적 때문에 시달림이 있으며 또한 연약한 믿음으로 인하여 실족함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바라보는 주관적 근거로는 영원한 선택을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적 부르심을 통해 신실한 믿음으로 복음에 복종하는 자를 선택하셨음을 가르치는 선택의 예정교리를 배우고 또한 깨달을 때에 비로소 신자는 영원한 선택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왜 예정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신중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교회에 선포되고 가르쳐져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이 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예정교리로 인하여 복음을 진실히 믿는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 찬양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러한 찬양을 통해 참된 믿음의 자태가 더욱 고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립니다!
172 no image <웨신해설 27-①> 선택과 유기 예정의 신비(제3장 8항)_김병훈 목사 (17)
편집부
3798 2012-09-28
선택과 유기 예정의 신비(제3장 8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 “예정교리는 호기심으로 헛되게 이성과 경험으로 판단할 수 없어” 제3장 8항: “이처럼 매우 신비로운 예정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을 한 사람들로 하여금 확실한 유효적 부르심으로부터 그들의 영원한 선택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히 신중하며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리함으로써 이 교리는 복음에 진실하게 복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 찬양과 경외와 경배를 드리며 겸손함으로 근면히 행하며 풍성한 위로를 누리게 될 이유를 알려주게 될 것입니다.” 8항에서 교훈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첫째, 예정교리는 지극히 신비로운 것이므로 아주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여 특별히 다루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하는 사람들은 확실한 유효적 부르심으로부터 예정교리를 통해서 영원한 선택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 복음에 진실하게 복종하는 사람은 예정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며 경배를 하여야 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며, 또한 겸손함으로 근면히 행하여야 이유와 풍성한 위로를 누리게 될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예정교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은 사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교리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작정을 하시고 작정하신 바를 또한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예정교리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예정교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정수이며 절정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분명하고 높고 깊은 수준에서 고백하고 찬미하는 교리가 예정교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과 선택 그리고 예정의 구원에 대한 심오한 신학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는 먼저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말합니다(롬 9:8). 이어서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 된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며(롬 9:15), 이러한 선택과 관련하여 하나님에게는 어떤 불의도 없음을 선포합니다(롬 9:14). 그리고 그 유명한 토기장이와 토기의 비유를 들어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서 허물하거나 그 뜻을 대적할 수가 없음을 교훈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기초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과 관련한 교훈을 이어가면서 바울은 마침내 절정의 찬미를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사람은 부패하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도 못하며 인정하기도 원치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과 같은 차원의 존재로 이해하려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성과 경험에 비추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존재조차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부패한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중생의 은혜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 사실에 눈을 떠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고백하면서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의 높고 높으신 영광의 위엄과 사람의 낮고 낮은 비참한 처지를 바르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때에 사람이 가장 아름답고 존귀한 신분을 누리게 되며 의와 진리로 거룩하고 순결한 상태를 누리게 됨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럴 때에야 참 신자는 겸손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선하심과 지혜에 대해 점차 깨닫고 알아가며 찬미하게 됩니다. 예정교리는 사람이 호기심에서 헛되게 자신의 이성과 경험 안에서 판단하고 이해하려고 시도할 주제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바대로 믿어야 할 교훈입니다. 예정교리를 어떻게 받으며 가르칠 것인가와 관련하여 신명기의 말씀은 적절한 교훈을 줍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라”(신 29:29).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정교리의 오묘한 신비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인 줄을 알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계시된 일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니 잘 가르치고 배워 행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따라 예정교리 또한 계시된 사실인 만큼 교회는 이를 잘 가르치고 또한 배워 신앙의 행위에 교훈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잘 쓰고 있습니다. “오직 내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 감추신 비밀한 일들은 탐구하려 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은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일반적인 규율로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헛된 호기심으로 행한다는 정죄를 받지 않게 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감사를 알지 못한다는 정죄를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기독교 강요 3권 21장 4항). <다음호 계속>
171 no image <웨신해설26-②> 유기 예정의 목적과 방식(제3장 7항)_김병훈 교수 (17)
편집부
3527 2012-08-21
유기 예정의 목적과 방식(제3장 7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3장 7항: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는 자신의 의지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경륜에 따라서,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자신의 주권의 영광을 위하여 인류 가운데 나머지 사람들을 간과하고, 그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치와 진노를 받도록 기쁘게 작정하시므로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를 찬미하도록 하셨습니다.” “선(先) 정죄의 사실을 고백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공의를 찬미하는 데 있어” “하나님은 유기된 자에게 정죄의 심판을 하심으로써 자신의 공의 나타내셔” 유기 예정의 적극적 측면과 관련하여 신앙고백서는 미리 정죄하시는 선(先)정죄(predamnatio)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유기 예정된 자들을 간과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수치와 진노를 받도록 작정하셨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기 예정된 자들이 자신들이 범한 죄에 대하여 영원한 정죄의 심판을 받도록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공의의 심판자이시라는 사실과 관련한 고백입니다. 아울러 선(先)정죄(predamnatio)라는 이와 같은 유기 예정의 적극적 측면은 단순히 죄를 지은 자들은 정죄를 받도록 작정을 하셨다는 심판의 작정을 가리키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영원한 멸망에 이르도록 작정이 되어 있는 이들이 있음을 뜻합니다. 즉 영광에 이르도록 선택의 예정을 받은 사람이 있는 바와 같이, 멸망에 이르도록 유기의 예정을 받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이러한 구분과 관련하여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마치 불의한 것처럼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선택과 유기의 대상을 결정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며, 이에 대하여 피조물이 하나님께 대하여 불의를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교훈을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3-14). 성경은 선택과 유기의 대상을 결정하실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선택과 유기의 대상들을 향한 뜻과 목적을 결정하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교훈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롬 9:21-22).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요컨대 모든 사물은 하나님께서 각각 목적하신 바에 따라 결정이 되도록 정하여졌다는 것은 성경이 명시적으로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이러한 교훈에 기초하고 있는 선(先)정죄(predamnatio)라는 유기 예정의 적극적인 측면은 하나님께서 유기 예정을 하시는 목적을 명백하게 드러냅니다. 즉 마지막 날에 저주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따라 멸망에 이르게 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과 이러한 운명의 결과가 미리 예정이 되어 있다는 선(先)정죄(predamnatio)의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신앙고백서는 유기 예정의 목적이 하나님의 공의를 찬미하는 데에 있음을 교훈합니다. 이상과 같은 설명을 요약하여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유기 예정을 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유기 예정을 하시는 까닭은 우선 간단하게 말해서 사람이 타락하여 부패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라도 부패한 성품을 따라 죄를 범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유기를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기된 자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유기를 받기에 합당한 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유기된 자에게 정죄의 심판을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임을 나타내십니다. 여기서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유기 예정의 목적이 확인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유기된 자들의 죄를 정죄하심으로써 그의 공의를 나타내며 영광의 찬미를 받으십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 충분한 답이 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사람 가운데 부패하지 않은 자가 없으며 또한 죄인이 아닌 자가 없기 때문에, 유기 예정의 이유가 사람의 죄 때문이라면, 모든 사람이 다 유기 예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기 예정의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할 때, 단순히 사람의 죄 때문이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유기 자체를 작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기의 대상의 작정의 문제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기 예정의 최종적인 이유는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더하여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대답이 주어지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을 지정하여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고 그들을 그들의 죄값에 따라 심판하시기로 자신의 자유로운 기쁜 뜻에 따라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서의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께서 유기된 자들의 불신앙을 미리 보시고 이들을 유기하기로 예정을 하셨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유기하기로 예정을 하신 것은 그들이 불신앙으로 복음을 거부하며 또한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않을 것임을 미리 보시고 그들을 유기하기로 작정을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의지의 신비로운 경륜에 따라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를 찬송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주권에 따라 행하였음을 선언합니다. 모든 선택을 받은 성도들은 이러한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또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경륜에 따라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겸비한 심령으로 찬송하면서, 자신들도 본래는 유기된 자들과 다름이 없이 영원한 정죄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자였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선택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미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170 no image <웨신해설 26-①> 유기 예정의 목적과 방식<제3장 7항>_김병훈 교수 (2)
편집부
3386 2012-08-07
유기 예정의 목적과 방식<제3장 7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3장 7항: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는 자신의 의지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경륜에 따라서,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자신의 주권의 영광을 위하여 인류 가운데 나머지 사람들을 간과하고, 그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치와 진노를 받도록 기쁘게 작정하시므로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를 찬미하도록 하셨습니다.” “선이란 원하시는 바를 행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주권자가 행하시는 모든 것” 제7항에서 교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류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여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도록 하신 것처럼, 나머지 인류를 선택에서 간과하시고 또한 죄로 인해 영원토록 심판을 받도록 하심으로써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를 찬미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유기 예정의 목적과 방식을 교훈합니다. 인류 가운데 일부를 선택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대상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작정을 가리켜 선택과 반대가 되는 유기라고 말합니다. 유기의 예정은 하나님께서 영원하며, 불변하는, 가장 자유로운 목적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공의와 자유와 권능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 죄 가운데 남겨진 자들을 영원토록 저주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을 뜻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유기의 목적에 대해서 자신의 주권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말하며, 또한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를 찬미하도록 하는 데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유기 예정의 목적은 유기 예정의 방식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교훈합니다. 하나는 유기의 소극적 측면으로 간과하시는(preteritio)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유기의 적극적 측면으로 미리 정죄하시는 선(先)정죄(predamnatio) 방식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이 두 가지 방식들에 대해서 “인류 가운데 나머지 사람들을 간과하고, 그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치와 진노를 받도록 기쁘게 작정하시므로”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소극적 방식으로 간과하신다는 고백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 내용을 갖습니다. 첫째로 선택의 예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며 또한 구원의 은혜를 베풀지 않으심을 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일반적인 섭리에 의하여 이들에게 하나님의 호의를 베푸는 것조차 거두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에게도 해와 비를 차별없이 나누어 주시며, 또한 도덕적 또는 시민적 선을 행하도록 호의를 베풀어주십니다. 둘째로 유기 예정된 자들을 부패한 죄인의 비참한 상태에 그대로 내버려두심을 뜻합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선택의 예정을 받은 자들과는 달리, 구원의 방편을 따라 행하지를 않고 자신의 부패한 성품에 따라 죄를 범하기를 기뻐하며 죄로 인한 비참한 상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즉 이들은 회개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법도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처럼 유기된 자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범하며 살다가 마침내 죽어서 영원한 정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유기된 자들이 죄를 범하는 까닭을 그들이 유기된 자로 예정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옳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죄를 범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부패한 죄인의 비참한 상태에 내버려 두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죄를 범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부패한 성품을 좇아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자원하여 행한 결과일 뿐입니다. 따라서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가 없으며, 또한 영원한 정죄의 심판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려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마치 병자의 질병을 고치지 않은 의사에게 질병의 자체의 원인을 돌릴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범하도록 이들에게 어떤 사악함을 주입하거나 부추기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부패한 성품을 거슬려 죄악을 범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구원의 생명력을 주시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유기된 자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하려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 않으신 것과 관련하여 결국 유기된 자들의 죄의 원인은 하나님께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감히 비난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은혜를 모든 사람들에게 주셔야만 하는 의무를 지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어떤 이들에게 베풀지 않으신 것은 결코 불의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비난은 결코 성립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올바른 고려를 전혀 하고 있지를 못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통해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 비유 가운데 주인은 나중에 온 자들에게도 하루 품삯을 줍니다. 이에 대해 일찍 와서 일한 자들이 불평을 하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3-15).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주권자이십니다. 그리고 그가 행하시는 바는 바로 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169 no image <웨신해설 25> 선택 예정의 실행 방편들<제3장 6항>_김병훈 목사 (136)
편집부
4752 2012-07-10
선택 예정의 실행 방편들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3장 6항: “하나님께서는 택함을 받은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바처럼, 그의 영원하시며 지극히 자유로운 목적에 의해 그곳에 이르기 위한 모든 방편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택함을 받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후에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고, 성령께서 알맞은 때에 역사하심으로써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되며, 양자로 되고, 거룩하게 되며,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그의 능력에 의해 보호를 받습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누구도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을 받지 못하며,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지도 못하고, 의롭게 되지도 않으며, 양자가 되지를 못하고, 거룩하게 되지 않으며, 구원을 받지 못 합니다.” “믿음의 고백은 자유의지 아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 제6항에서 교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의 예정을 하실 때에 선택한 자들로 하여금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목적만을 정하신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목적에 이르도록 하는 실행 방편들도 아울러 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어떤 목적을 설정한 다음에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어떠한 방편들을 사용할 것인지를 계획하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바라는 목적은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선택의 예정을 통해 선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이라면, 그 목적 또한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편들에 대한 계획이나 고려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방편에 대한 계획이 없다면 이루기 위한 목적은 결코 목적일 수가 없으며, 우연히 이루어지게 되는 결과물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서는 이번 항목에서 하나님의 예정은 그 목적을 정하신 바처럼, 또한 그 목적의 성취를 위한 방편들도 정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결국 이러한 방편들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경우에는 결코 방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성취될 수 없음을 뜻합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을 핑계로 삼아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편들을 실행하거나 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선택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될 영광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결국에 선택의 예정을 받은 자가 아닌 것이 됩니다. 그렇게 판단하여야 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여 작정하실 때에 그를 선택하시는 작정과 더불어 또한 그로 하여금 선택의 목적에 이르는 방편들을 따르거나 실행할 것도 아울러 작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예정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일을 행하시기 이전에 하나님의 영원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반면에 그 예정의 목적을 실행하시는 일은 창조하신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그 타락한 사람을 구원의 영광으로 이르도록 하는 절차 또는 방편들을 영원 안에서 정하셨고, 이제 선택을 받은 자들이 시간 안에서 그것들을 실행하거나 받음으로써 구원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영원 안에서 이루어진 선택의 작정을 빌미로 삼아, 시간 안에서 그 선택의 작정을 실행하는 절차와 방편을 밟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선택의 예정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편들의 작정과 관련하여 신앙고백서가 먼저 밝히는 바는 그것을 정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 지극히 자유로운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모든 일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가장 지혜로운 방식으로 스스로 자유롭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금 상기시키면서, 인간의 어떤 형편이나 조건들을 고려하여 정하신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편들에 대해서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유효적 부르심, 믿음, 칭의, 양자됨, 성화, 그리고 성도의 견인 등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방편들은 흔히들 구원의 서정이라는 말로 표현이 됩니다. 구원의 서정이라는 말은 그 말 자체의 의미로 이러한 방편들 안에는 일정한 순서 또는 질서가 있음을 뜻하지만, 이것은 시간상의 순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논리적 순서를 살피어 그 방편들의 상관성을 순서로 표시한 것 뿐입니다. 예를 들어 믿지 않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에 논리적 순서상 믿음이 칭의보다 먼저 나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믿을 때에 의롭다함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신앙고백서가 밝히는 방편들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는 일입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선택을 받은 자들의 죗값이 모두 치러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대가로 하여 선택한 죄인들의 형벌을 대신하는 값을 치루셨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선택을 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아직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주어지게 될 구원의 요소들, 곧 칭의, 양자됨, 성화와 영광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죗값이 십자가에서 치러졌음을 뜻할 뿐입니다. 선택을 받은 자들은 이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또 다른 방편들을 따라가야 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죗값을 치렀음을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오직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을 받았음을 확고히 합니다(요 10:15,28,29; 17:9). 그리스도께서는 선택을 받은 자들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며, 오직 그들만을 위하여 죗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신앙고백서는 본 항목 끝에 선택을 받은 자들 이외에 다른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지 않았음을 덧붙여 둠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방편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부르심이 유효적으로 나타나 믿음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을 고백하는 일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인한 것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복음의 초청에 응하는 것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죗값을 치러 구속을 하셨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모든 이들을 구원으로 초청하는 보편적인 초청을 주장하며, 이를 들은 자들 가운데 자신의 자유의지로 순종의 반응을 보이는 자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에 반대하여 신앙고백서는 타락한 죄인이 믿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은 사람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것이며 오직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서만 복음의 초청이 유효적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고백을 합니다.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믿음을 고백하게 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또한 거룩한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을 완성하기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다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이어져 갑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며, 의롭게 되는 믿음에 따라 성화의 순종을 행하게 되며, 마침내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기까지 보호를 받게 됨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모든 구원의 방편들의 실행이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택한 자인 성도를 견인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확고히 합니다. 이처럼 선택의 예정을 실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여러 방편들을 정하여 두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을 운명론적인 결정론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밝혀줍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는 영원한 작정으로 선택의 대상을 예정을 하셨지만, 이를 운명론적인 결정론으로 받아들여 어차피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은 변함이 없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핑계로 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부르심에 대해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녀됨을 기뻐하며 거룩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의 책임을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168 no image <웨신해설24-②> 선택 예정의 이유와 목적_김병훈 목사 (2)
편집부
3573 2012-06-13
선택 예정의 이유와 목적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3장 5항: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의 영원하며 불변한 목적과, 그리고 그의 뜻의 비밀한 의도와 선한 기쁨을 따라서, 생명으로 예정이 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그들에게서 어떤 믿음이나 선행들 또는 그것들이 끝까지 유지될 것을 미리보시는 일과 상관이 없이, 즉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하도록 하게 하는 조건들이나 원인들과 같은 다른 어떤 것들을 미리 보지 않은 채, 그저 순전히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택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목적” 본 항과 관련하여 두 번째로 살필 것은 선택의 예정의 이유와 관련한 내용입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선택의 예정을 하시는 이유가 자신에게서가 아닌 다른 어떤 이유에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진술합니다. 선택의 예정을 하심에 있어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서 어떤 믿음이나 선행들과 같은 것들을 선택의 조건이나 원인으로 삼아 그것들을 미리 보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즉 외적인 피조물의 어떤 조건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선택을 예정하도록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진술은 신앙고백서 제3장 2항을 설명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소위 “예지예정론”이 잘못된 것임을 밝힘으로써, 선택의 예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확고히 합니다. 예정의 이유와 관련하여 개혁신학과 알미니안 신학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갖는 데에는 하나님의 작정에 관련하여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은 항상 단일합니다. 하지만 알미니안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작정을 선택의 대상을 정하는 조건과 관련한 작정과 그 조건에 상합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미리 보고 그를 선택하는 작정으로 구분을 합니다. 그리하여 로마서 9장 13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에서 말씀하고 있는 야곱과 에서의 예정에 관련한 해설에 있어서 개혁신학과 알미니안 신학은 다르게 이해를 합니다. 개혁신학은 앞의 본문이 야곱이라는 특정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또는 에서라는 특정한 사람을 유기하셨음을 교훈하는 것을 이해를 합니다. 곧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은 항상 대상을 향하여 특정적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안 신학에 따르면 앞의 본문이 하나님은 단지 야곱과 같은 부류의 사람을 선택하고, 에서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유기하시기로 작정을 하셨음을 보여줄 따름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이어 말하기를 야곱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미리 보시고 선택의 예정을 한다는 “예지예정”을 주장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알미니안주의가 잘못되었음을 확고히 선언하면서, 오직 선택의 예정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앞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야곱이라는 특정한 사람을 오직 자신의 기쁜 뜻을 따라서 선택하셨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는 말씀이나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롬 9:15)는 말씀, 그리고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9)는 말씀 등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서 특정한 사람들 선택하신다는 개혁신학의 해석을 분명하게 지지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의 비밀한 의도와 선한 기쁨을 따라서” “그저 순전히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의 예정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택의 예정에 대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다 알려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도 하나님께서 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시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을 선택을 하지 않으시는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항들은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한 의도와 선한 기쁜 뜻에 속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에 따라서 사람의 어떤 믿음이나 선행들을 조건이나 원인으로 삼지 않고 오직 순전히 거저 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선택의 예정을 행하셨음을 올바르게 고백을 합니다. 예정의 선택은 하나님의 뜻 이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으며, 그의 뜻은 항상 선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개혁신학이 밝히고 있는 선택의 예정과 관련한 성경적인 교훈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선택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이러한 선택의 예정이 과연 선하신 하나님의 작정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의 선택의 예정에는 어떠한 냉정한 무자비함이나 자의적인 불의함이 있지 않으며, 오히려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충만함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은 주권자가 자의로 그의 권력을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이 이루어지며 또한 실행이 된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개혁신학은 선택의 예정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 불의와 변덕을 말하는 잘못된 주장을 일소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의 예정을 하심으로써 자신의 사랑과 공의를 드러내시는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예정을 통해 선택된 자들을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며, 이 모든 선택의 예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토록 하십니다. 이것이 여기서 살피고 있는 신앙고백서 5항이 밝히는 선택 예정의 목적입니다. 선택의 예정은 먼저 택함을 받은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목적을 갖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며”(엡1:4), “그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엡 1:5) “그의 기업”(엡 1:11)을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은택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이 영광은 후에 사라지거나 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영원한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예정을 통해 이러한 영광을 선택한 자들에게 부으심으로써, 결국 이들로 하여금 이제 이 모든 일을 통해 받은 은혜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도록 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선택의 예정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며 목적이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
167 no image <웨신해설24-①> 선택 예정의 이유와 목적(제3항 5항)_김병훈 목사 (85)
편집부
5644 2012-05-29
선택 예정의 이유와 목적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3장 5항: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의 영원하며 불변한 목적과, 그리고 그의 뜻의 비밀한 의도와 선한 기쁨을 따라서, 생명으로 예정이 된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그들에게서 어떤 믿음이나 선행들 또는 그것들이 끝까지 유지될 것을 미리보시는 일과 상관이 없이, 즉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하도록 하게 하는 조건들이나 원인들과 같은 다른 어떤 것들을 미리 보지 않은 채, 그저 순전히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선택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5항이 앞서 3항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예정 가운데 선택과 관련하여 포괄적인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 내용은 선택의 예정이 이루어진 때와 이유, 그리고 목적 등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선택의 예정이 이루어진 때와 관련하여 신앙고백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 곧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루어진 일임을 진술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실제로 창조하시므로 시간의 역사를 열어 가시기 이전에, 곧 영원 안에서 이미 선택의 예정을 하셨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선택의 예정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실현하시고, 타락한 상황을 보시고, 그 후에야 비로소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를 선택의 구원을 하시기로 시간 역사 안에서 행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선택의 예정은 창조와 타락 등과 같은 사건들의 시간 역사가 시작된 후에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창조, 타락, 구속 등의 시간 역사가 아직 시작이 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 이후의 시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이 실현이 되어가는 과정이지 선택의 예정을 이루는 계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이러한 설명이 곧 타락전선택설(supralapsarianism)을 뜻하는 것이 아님에 주의를 하여야 합니다. 소위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선택설(infralapsarianism)의 논쟁은 선택의 예정이 시간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냐 시간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냐의 논쟁이 아닙니다. 종종 시간 이전에 이루어진 것은 타락전선택설, 시간 이후에 이루어진 것은 타락후선택설로 오해를 합니다. 하지만 타락전선택설이나 타락후선택설이나 모두 시간 이전인 하나님의 영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작정에 관련한 논의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영원 안에서 작정하시는 대로 시간 안에서 펼쳐 가십니다. 그럴 때 선택의 작정과 관련하여서는 하나님께서 영원 안에서 어떠한 논리적 순서를 따라 행하셨을 것인지에 대해 논의를 하면서 두 견해가 나타날 따름입니다. 여기서 타락전선택설은 타락의 작정 이전에 선택의 작정이 먼저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을 하며, 타락후선택설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설명의 순서는 모두 영원과 관련한 것이므로 실제로 시간 역사 안에서 나타나는 아담의 타락 사건 이전이나 혹은 이후의 시간 순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타락후선택설은 선택과 관련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논리적 순서가 시간 역사 안에서 전개되는 실행의 순서와 동일한 것으로 믿는 반면에 타락전선택설은 그 순서가 반대일 것으로 믿는다는 점에서 두 견해는 서로 차이점을 갖습니다. 타락후선택설에 따르면 선택의 대상은 하나님의 영원의 관점에서 - 곧 시간 안에서 실제로 타락이 이루어지는 것과 상관이 없이 - 타락한(lapsus) 존재입니다. 반면에 타락전선택설에 따르면 선택의 대상은 하나님의 영원의 관점에서 타락할 가능성(labilis)이 있는 존재입니다. 대체로 개혁신학의 역사적 신앙고백문서들은 타락후선택설을 따르는 것에 비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뚜렷한 견해를 선택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도르트신경은 1장 7항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의 자유롭고 선한 기쁨의 뜻을 따라서, 그저 순전히 은혜로, 스스로의 잘못으로 타락하여 원래의 순전한 상태에서 죄와 파멸의 상태에 빠지게 되고 말았던 인류 전체 가운데 특정한 수의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선택을 하셨습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르트신경의 고백은 선택의 대상을 타락한 인류 가운데 특정한 수의 사람들로 밝힘으로써 타락후선택설을 명시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보입니다. 이와 비교하건데 지금 살피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3장 5항은 단지 “생명으로 예정이 된 사람들을”이라는 표현으로 선택의 예정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특정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음으로써 타락전선택설과 타락후선택설에 대해 다소 중립적 견해를 유지합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신앙문서를 작성하는 데에 참여한 총대들의 주류는 타락후선택설을 지지하였지만 총회를 주재하였던 윌리암 트위스(William Twisse)를 포함한 소수의 총대들은 열렬한 타락전선택설 지지자들이었다는 역사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3장 7항에서는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 그들을 간과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로 인하여 치욕과 진노를 받도록 작정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고 있음을 볼 때,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또한 타락후선택설에 호의적인 고백을 담고 있는 다른 개혁신앙문서들과 다르지 않은 고백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166 no image <웨신해설 23-②> 하나님의 예정의 불변성(제3장 4항)_김병훈 교수 (249)
편집부
9374 2012-05-01
하나님의 예정의 불변성(제3장 4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3장 4항: “이와 같이 미리 결정이 되고(predestined) 미리 규정이 된(preordained) 까닭에, 이러한 천사들과 사람들은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그리고 불변하게 계획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수효는 일정하며 한정이 되어 있어 그 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신자들은 결코 구원에서 떨어짐 없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주님께서 잡히신 날에 닭 울기 전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을 미리 아시고 주신 말씀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후에 완전히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다시 회복될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자신이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차피 다시 일어서게 될 베드로를 위하여 공연히 기도를 하신 것일까요? 베드로가 돌이킨 후에 다른 형제들을 굳게 할 것이 미리 작정이 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권면은 불필요하며 쓸모없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선택이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불변적으로 확정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서 어떤 경계의 말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구원을 확신하고 하늘의 복을 충만히 누리는 성도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그러한 확신과 기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간절히 애쓰는 경건의 노력을 결코 중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함을 좇으며 죄의 길을 따르지 않으려는 신앙의 의무를 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요컨대 선택의 불변성은 택함을 받은 자가 무엇을 하든지 그는 결국 필연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이라는 목적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방편은 결코 양립할 수 없거나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디모데후서 2장 19절은 선택의 확실성과 불변성에 대한 전거로 개혁신학이 제시하는 중요 구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아십니다. 이것은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의 확실성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나라는 말씀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 편에서 이루어져야 할 신앙의 의무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아 불의에서 떠나 거룩함을 좇는 자들이 되도록 보호할 것을 또한 암시합니다. 끝으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보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여기서 모세가 말하고 있는 “주께서 기록하신 책”이란 영원한 생명의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섭리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를 바라는 열망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세는 이제 어떻게 해서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에서 구하여 내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러한 모세는 정녕 자기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는 것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죽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하나님의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는 말로 자기 백성들의 죄악에 대하여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않도록 하여 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말도 생명의 책에서 지워지기를 바라는 기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여기서 바울이 뜻하는 바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생명에서 끊어져 분리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불경건한 일이 될 것이므로 참된 기도의 간구가 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한 것은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동족들의 구원을 위한 자신의 열망을 표현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 때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 변하여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주님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섭고 큰 것인지를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결코 구원에서 떨어짐이 없습니다(빌 4:3, 계 13:8, 히 12:23). 그리스도께서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하나님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3:5). 결론적으로 이러한 모든 은혜의 사실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천사들과 사람들의 수효는 일정한 수로 한정이 되어 있으며 결코 늘어나거나 감소하는 등 변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165 no image <웨신해설 23-①> ‘하나님의 예정’의 불변성_김병훈 목사 (188)
편집부
8829 2012-04-17
‘하나님의 예정’의 불변성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3장 4항: “이와 같이 미리 결정이 되고(predestined) 미리 규정이 된(preordained) 까닭에, 이러한 천사들과 사람들은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그리고 불변하게 계획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수효는 일정하며 한정이 되어 있어 그 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가 없습니다.” “개별적인 특정한 사람 자체를 선택하는 하나님의 예정은 변치 않아” 제3장 4항이 설명하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러한 예정은 단지 예정된 수효의 전체 범위만 일정한 수로 한정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수효에 포함이 되는 대상이 각각 개별적으로 불변하게 예정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예정한 천사들과 사람들의 수효는 그 범위가 일정한 수로 한정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3장 4항은 비록 짧은 고백이지만, 예정론과 관련하여 개혁신학이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들과 어떠한 차이를 보이는 지를 보여주는 매우 핵심적인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예정론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정의 전체 수효나 그 수효에 포함이 되는 특정 개인의 예정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앞서 3장 2항을 해설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들은 예지에 근거한 예정을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미리 선택을 받기에 합당한 믿음이나 행위를 정하여 놓으시고, 어떤 이가 그러한 믿음이나 행위를 실행하는 자를 미리 보시고 선택하신다고 믿습니다. 개혁신학의 예정론은 하나님께서 누가 선택을 받을 것인지를 이들의 믿음이나 행동에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각각 미리 정하셨으며, 그들의 수효를 또한 불변하게 한정하여 놓으셨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개혁신학의 설명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방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있어서 알미니안주의와 완전히 다른 이해를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개혁신학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선택될 만한가를 미리 정하신 후에 어떤 사람들이 그에 해당하는지를 미리 보시고 그들을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즉 하나님은 단지 선택될 만한 사람들의 특징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각 개별적인 특정한 사람 자체를 선택하신다는 것이 개혁신학의 이해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항목인 3장 5항을 다룰 때에 설명을 좀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개혁신학은 왜 택함을 받은 천사들과 사람들의 수효의 범위가 일정한 수로 한정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살피고자 합니다. 우선 선택과 유기에 대한 작정도 일반적인 다른 일에 대한 작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작정으로서 불변성을 갖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한 수효는 일정하며 불변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뜻은 설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십니다(사 46:10). 하나님의 예정은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와 같이 그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택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롬 9:11). 또한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있어서도 약속과 이에 대한 맹세를 주셨으며 이러한 약속과 맹세는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그의 성품에 따라서 확증을 하십니다(히 6:17-18). 이처럼 구원과 예정에 관한 일도 하나님의 작정이므로 다른 일반에 관한 작정과 마찬가지로 변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있을 환란에 대해 말씀을 하시며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고 경계의 교훈을 주신 것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이 말씀에 따르면, 언뜻 생각하기에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도 미혹을 당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만일 그렇다면 택함을 받은 자들의 수효가 일정하며 불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잘못된 해석에 기초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이라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께 뜻하시는 바는 오히려 택함을 받은 자들이 미혹을 받아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음을 전제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초점은 종말의 때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위태로운 공격을 할 것인가를 강조하기 위한 데에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서 반론을 말하기를 만일 하나님의 예정의 불변성으로 인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이 넘어지는 일이 불가능 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있을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의 위험에 대해 경계의 교훈을 주실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한 경계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것은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도 넘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은 베드로의 경우만 생각해 보아도 바로 힘을 잃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다음호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64 no image <웨신해설 22>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선택과 유기<제3장 3항>_김병훈 목사 (155)
편집부
8324 2012-03-20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선택과 유기<제3장 3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3장 3항: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의 작정에 의해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predestined), 다른 이들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미리 규정되어 있습니다(preordained).” “선택의 예정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와 긍휼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줘” 3항이 설명하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성적 피조물인 사람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이나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끔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서 예정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예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흔히 예정론이라 일컫는 교리는 선택과 유기의 예정을 내용으로 합니다. 선택의 예정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미리 결정이 된(predestined) 사실을 말하고, 유기의 예정이란 영원한 죽음을 당하도록 미리 규정이 된(preordained)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과 유기의 예정이 그 예정의 대상인 인간이나 천사들의 조건을 고려함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진 일임을 말합니다. 이성적인 피조물인 사람이나 천사에게 있어서 선택과 유기가 예정이 되어 있으며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서 주어진다는 사실은 얼른 이해하여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예정 자체를 부정하거나, 예정 교리를 가르치지 않거나, 예정에 따른 난점들을 해결하려는 임의적인 노력을 교리에 반영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은 모두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사도들께서 예정 교리를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는 말씀이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의 말씀은 영생의 복음을 듣고 깨닫는 일이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미리 정하여져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b)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을 행하시며 구원의 복을 받을 자들을 향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단지 이들에게 주어질 천국이 “창세로부터” 예비되어 있었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천국을 상속받을 자들이 그들임이 “창세로부터” 정하여졌다는 사실을 또한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이들의 이름은 이미 하늘에 기록이 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눅 10:20, 12:32).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베푸시는 자들로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께 주신 주님의 양들이며(요 10:27-29), 주님께서 택하여 세운 자들입니다(요 15:16).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 사도들도 또한 예정의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을 택하셨음을 말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이러한 말로 바울은 “창세 전에” “그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택하신” 일에 대해 교훈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다음의 말도 같은 사실을 전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에 의하여 이렇듯이 선택과 유기를 예정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선택을 통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으므로 선택 예정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유기를 통하여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 정죄의 심판을 받으므로 유기 예정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진노의 형벌로 멸하시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은 모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정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들은 예외가 없이 영원한 멸망에 이르러야 하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볼 때, 선택의 예정은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얼마라도 구원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크신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유기의 예정은 하나님께서 죄악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십니다.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자비를,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심으로써 하나님의 크고 온전하신 성품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주권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잘 증거를 합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어찌하여 죄인들 가운데 일부에게만 적용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지를 물으며,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에 대하여 강력하게 의문을 제기합니다. 먼저 공의와 관련한 문제제기는 예정의 대상이 모두가 죄인일진대 어찌하여 모든 죄인들에게 구원의 은혜나 정죄의 형벌을 공평하게 시행하지 않는가의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하여야만 하시는가에 대해서 먼저 답을 하여야 성립이 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신의 뜻을 따라 행하실 권세가 없으신가라는 반문에 답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하여 잘 답을 주고 있습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19-21). 다음 선하심과 관련한 문제 제기는 왜 하나님께서 선택의 예정을 모든 죄인들에게 다 베풀지 않으시고 일부에게만 제한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공의의 문제는 “공평성”에 관한 것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선하심의 문제는 “선택의 범위”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역으로 하나님께서 아예 아무도 선택하지 않아 구원의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선하신가라는 반문을 통해 답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선택의 범위가 왜 제한적인가는 질문에 기초한 불만은 선택 자체를 행하실 이유가 없으시다는 사실에서부터 풀어져야 합니다. 선택의 은혜를 베풀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선택의 은혜를 일부에게라도 베푸신다면 그것은 그것 자체로 이미 선하심을 나타내신 것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포도원 품꾼 비유을 통해 가르치신 교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5-16). 끝으로 언급할 것은 천사의 예정에 관한 부분입니다. 성경은 선한 천사들과(막 8:38; 눅 9:26) 악한 천사들이(벧후 2:4; 유 6) 있음을 말할 뿐만 아니라, 택함을 받은 천사가 있음을 또한 말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딤전 5:21). 천사들의 예정은 선택을 받은 천사는 창조 때의 거룩함을 보존하고 끝까지 선한 상태에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부여받은 자들인 반면에, 타락한 천사들은 그러한 은혜를 받지 않음으로써 구분이 됩니다. 그러나 천사의 선택은 사람의 경우와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으로서 오직 죄인들 가운데 은혜의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과 사도들에 의하여 확고하게 선포되었던 선택과 유기의 예정 교리는 핵심적인 복음의 요소입니다. 예정의 교리는 매우 신비로운 것이어서 피조물의 어떤 이성으로도 예정의 이유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예정의 사실에 대해서는 밝히 말씀하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선택으로 다른 어떤 이들은 유기로 예정을 하신 까닭에 대해서는 감추고 있습니다. 다만 아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일을 배우고 가르치기에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는 악한 일이 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감추신 일을 알아내려 하는 것은 무모하며 교만의 죄를 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성도는 성경의 교훈을 겸손히 받음으로 합당한 믿음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이 예정 교리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한다면 복음에 담긴 은혜의 교리를 훼손하는 일이 되며 그 결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정 교리를 배울 때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 오직 감사를 드리게 되며, 겸비한 심령을 더욱 더 갖게 되고, 어떤 시련과 어려움을 겪는 일이 있더라도 확신과 신뢰의 닻을 그리스도에게 든든히 내려놓을 수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정 교리는 모든 성도에게 위로의 근거가 되며 또한 경건을 통해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진정한 영적인 동력을 제공합니다. 예정 교리가 교회에서 바르게 가르쳐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은혜가 풍성하게 나타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163 no image <웨신해설 21>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지의 상관성_김병훈 목사 (7)
편집부
5397 2012-02-07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지의 상관성 <제3장 2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3장 2항: “하나님께서는 가정된 모든 조건들 위에서 일어날 개연성이 있거나 또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작정하실 때 그것이 미래에 있을 일로 미리 보셨기 때문에 작정을 하신 것이 아니며, 또 그러한 조건들을 보시고 그것들에 근거하여 일어날 것으로 미리 보셨기 때문에 작정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택의 예정은 믿음뿐 아니라 그 행위를 근거로 하지 않아” 본 항목이 설명하는 바는 세 가지입니다. ① 하나는 하나님의 전지성과 관련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든지 그것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들을 다 아시고 그 조건들에 따라서 일어날 개연성이 있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들을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②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작정과 관련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③ 마지막 하나는 작정의 이유와 관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작정하셨을 때 그 일이 일어날 것으로 미리 보셨기 때문에 작정을 하셨거나,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들을 미리 보셨기 때문에 작정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 항목의 세 가지 내용이 가리키는 요점은 하나님의 작정이 예지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러한 개혁주의 견해를 가리켜 흔히들 ‘예정예지’라 일컫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지 사이의 상관성에 관련한 이러한 이해의 차이는 개혁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구분하는 신학적 쟁점입니다.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달리 알미니안주의와 세미-펠라기우스파는 하나님의 작정보다 예지가 앞선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것은 흔히들 ‘예지예정’이라 불립니다. 알미니안주의 또는 세미-펠라기우스파는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선택하기에 앞서서 그 사람이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고백하거나 행위를 실행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러한 예지에 근거하여 선택하시는 작정을 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개혁주의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선택을 하실 때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나 행위와 같은 어떤 조건을 미리 아시고 그것 때문에 작정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작정을 하시는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신학적 견해의 차이는 믿음 또는 행위가 구원을 받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이나, 혹은 선택의 예정이 실행이 될 때 믿음이나 행함이라는 조건들이 충족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냐 혹은 부정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주의나 알미니안주의나 모두 구원을 받기 위하여서는 믿음을 고백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은 믿음을 고백하는 조건을 실행함으로써 이루어지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논쟁점은 이러한 믿음이나 행함의 조건들이 하나님께서 선택의 예정을 하실 때 선택의 이유가 되도록 하나님께 영향을 주느냐에 있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그렇다고 생각하고 개혁주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즉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이의를 갖지 않지만, 믿음이 작정 그 자체의 원인이나 조건이 되느냐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가 다른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이 순전히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어떤 선행이나 믿음의 공로를 미리 보고 이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사람에게서 어떤 원인이나 조건 또는 이유를 찾아 그것들을 고려하여 어떤 이를 선택하기로 예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하고 기쁘신 뜻에 따라 하신 것임을 역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을 얻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 비해 더 선하거나 더 훌륭하기 때문에 선택을 받은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개혁주의에 따르면, 신자에게서 발견하는 믿음과 행함은 선택의 예정을 위한 근거나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의 예정을 받은 결과이며 열매인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선택을 받았으므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주의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성경의 구절에 기초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하나님의 부르심은 믿음으로의 부르심이며 믿음은 그 부르심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의 부르심은 또한 미리 정하신 이들을 향한 것이므로 믿음은 예정의 결과인 것입니다. 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할 때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행 13:48)고 기록된 말씀도 믿음은 예정의 결과이며 열매임을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아울러 디도서 1장 1절의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라는 표현은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의 말씀과 더불어 믿음이 선택보다 앞서 있는 것이 아니며, 선택의 예정이 없이는 누구도 믿음을 가질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해설하시며 이르시기를 “천국이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라고 말씀하심으로 믿음의 지식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예정은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를 근거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의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근거하여 예정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예정은 오직 부르시는 이의 뜻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선택의 예정이 행위를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로 택하심”(롬 11:5)을 받았다고 말하며,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선택의 예정은 믿음이나 행위를 미리 보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하나님께서 믿음이나 행함을 미리 보시고 선택의 예정을 행하시는 주장이 잘못 된 것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미리 보시는 믿음이나 행함이 어떻게 비롯되는지를 따져 볼 때에도 드러납니다. 우선 그것이 우리들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것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협력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미리 보신다는 그 믿음이나 행함이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이라면, 그 믿음이나 행함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주어지는 대상이 이미 정하여져야 하므로 개혁주의 견해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지예정이란 믿음과 행함이 우리들 스스로에게서 비롯되거나, 아니면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협력한다는 두 경우를 말할 뿐입니다. 여기서 믿음과 행함이 우리들 스스로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전형적인 펠라기우스의 이단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또 사람이 하나님과 서로 협력을 하는 경우라고 할 때도 사람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이 행동을 하시는 경우라면, 이것은 펠라기우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조력자가 될 뿐이며,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사실상 구원할 자를 선택하실 수가 없게 되며, 어떠한 의미에서도 미리 선택하시는 예정(豫定)이란 불가능하며, 단지 나중에 보고 결정하는 후정(後定)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예정을 가르치는 성경의 진리에 완전히 어긋나는 오류입니다. 만일 예지예정이 옳다면 사도 바울이 구원과 예정에 대하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고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드리는 일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연한 헛된 일일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결정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함을 신비로 노래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개혁주의의 ‘예정예지’는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를 미리 선택하셨다는 사실로 인하여 불만을 표합니다. 사람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자유가 무시당하며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전횡적인 주권만이 드러날 따름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지예정’을 따라가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지예정’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를 구원하실 수 없는 무능력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신관을 왜곡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구원을 감격함으로 감사하게 받고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는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개혁주의 예정론을 믿고 받는다는 것은 신앙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곧 죄이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162 no image <웨신해설 20-②>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제 2 원인들과의 관계_김병훈 목사 (1)
편집부
4035 2012-01-10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제 2 원인들과의 관계 (제 3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하나님의 작정은 결코 사람의 자유의지들을 훼손하지 않아” 3장 1항: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의 의지에 속한 지극히 지혜로우며 거룩한 계획에 따라서, 일어나게 되는 모든 일을 자유롭게 그리고 변화가 있을 수 없게끔 작정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죄의 조성자인 것이 아니며, 피조물의 의지가 침해를 받는 것도 아니고, 또한 제 2원인들의 자유나 우연성이 제거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확립이 됩니다. 본 항목이 설명하는 두 가지 내용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모든 일들을 그의 기쁘신 뜻에 따라 자유롭게 이루어가신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작정의 실행에 있어서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실 뿐만 아니라 제2원인인 피조물의 자유나 우연성을 확립하신다는 고백과 관련한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내용에 대해서 생각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은 결코 죄의 조성자이지 않음을 확고히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시간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창조 이후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다는 교훈을 들을 때 사람들은 흔히들 그렇다면 사람들이 범하는 죄들도 하나님이 작정한 것인지를 묻는 것이며, 또한 그렇다면 사람들의 자유의지의 행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람들은 단지 정해진 각본을 따라 행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인가를 물으며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하지만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작정 교리는 하나님이 죄를 범하게끔 죄를 조성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의 작정이 사람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님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것일까요? 사람이 이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의 경우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하여 어떤 일을 하도록 작정을 하였다면 그 일을 하는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와 상관이 없이 그 일을 하도록 강요를 받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어떤 사람에 의하여 죄를 행하도록 작정이 되었다면 그 작정에 따라 죄를 범하게 되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와 상관이 없이 그 죄를 범한 것일 뿐이므로 죄를 행하도록 작정을 한 사람에게 죄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그는 필연적으로 죄의 조성자라고 말할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러한 이치가 하나님의 작정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면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라는 결론을 피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러한 결론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그릇된 결론에 이르지 않도록 다음의 설명을 유의하여 듣고 바르게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 교리는 사람들의 철학적 사고에서 비롯된 결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확립된 교훈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의 말씀이나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29-30)의 말씀은 모든 일을 그의 뜻대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아무려면 내가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예정이 되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라 할 수 있을까? 내가 확실히 알거니와 믿은 것은 나 자신이고 내가 생각하고 내 마음에 기쁜 대로 내가 내 의지에 따라 믿기로 한 것이 아닌가? 참새가 땅에 떨어지는 하찮은 일 따위조차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닌가? 이러한 의문들이 들 수 있겠으나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유한함과 미련함 그리고 무능력 때문에 그러한 일들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기 때문에 제기되는 의문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시간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죄악을 행하거나 조장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지 죄를 행하는 분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본질적 속성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을 뿐더라 그와 사귐이 있다고 하며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b).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다”(요일 1:6). 따라서 어느 누군가가 어려운 시험에 들어 죄악을 행할 때에라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여서도 안 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는커녕, 죄악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작정에 따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일어나도록 하시면서도 하나님 자신은 죄에 대한 책임을 갖지 않으며 죄를 범한 사람에게 그 책임이 돌려지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하나님의 작정의 실행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신비로움은 제1원인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을 실행할 때에 자유의지나 어떤 우연성과 같은 제2원인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그대로 확립하면서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어떤 일이 이루어질 때, 그렇게 이루어진 일에 대한 책임이 그 일을 행한 자들에게 있음을 교훈함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도록 넘겨준 유대인들의 행위는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일어난 일이지만 또한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고자 빌라도에게 주님을 넘겨준 죄악의 책임은 그 유대인들에게 요구가 됩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도다”(행 2:23). 하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넘겨준 것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이루어진 일이거늘 왜 유대인들에게 그러한 일에 대한 죄책을 물을 수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작정한 일을 누가 거슬릴 수가 있겠습니까? 죄악을 행한 자가 그렇게 행하였음을 통해 하나님의 작정이 이루어진 것이니 오히려 하나님의 작정의 실행에 도움을 준 것으로 칭찬을 들어야 할까요? 이러한 문제제기들은 죄책이 발생하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여 나오는 질문들입니다. 사람이 죄악을 범할 때 그에게 죄책을 묻게 되는 근거는 우선 그가 행한 것이 하나님의 법도와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점과 또한 그가 그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뜻에 따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외부로부터의 강압이 없이 행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정을 실행하실 때에 놀라운 그의 능력과 지혜에 따라서 사람의 자유의지를 억압하지 않으시며 도리어 그것을 확립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작정하신 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도록 넘겨줄 때 그들은 외적인 강압에 의하여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거슬려 달리 행하지도 못한 채 그러한 죄악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로 죄가 없는 자를 불법한 자에게 넘겨주는 일이 죄악인 줄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자유로운 판단을 따라 의지를 세워 그렇게 행하였으므로 그 일과 관련한 죄책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도 빌라도도 같은 이유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심판을 받을 죄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장차 일어날 모든 일들을 자유롭게 그의 지혜와 기쁘신 뜻에 따라 작정을 하셨으므로, 그 모든 일들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아울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작정은 결코 사람의 자유의지와 같은 제2원인들을 훼손하지 않으며 오히려 제2원인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어떠한 의미에서도 죄의 조성자라는 비난을 돌릴 수 없음을 확정합니다. 이러한 영적 사실에 대해서는 나중에 ‘제5장 섭리’를 해설할 때에 좀 더 상세한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161 no image <웨신해설20-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특징들 그리고 그 방식에 대하여_김병훈 목사 (118)
편집부
6148 2011-12-14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특징들 그리고 그 방식에 대하여 (제3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3장 1항: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의 의지에 속한 지극히 지혜로우며 거룩한 계획에 따라서, 일어나게 되는 모든 일을 자유롭게 그리고 변화가 있을 수 없게끔 작정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죄의 조성자인 것이 아니며, 피조물의 의지가 침해를 받는 것도 아니고, 또한 제 2원인들의 자유나 우연성이 제거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확립이 됩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취소되거나 변경되는 일 없어” 본 항목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사실과 그것의 특징, 그리고 하나님께서 작정을 행하시는 하나님 편에서의 방식에 대해 고백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작정과 제 2원인들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먼저 첫째 내용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개혁신학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영원 전부터 작정하셨음을 또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이란 시간 안에서 장차 일어날 모든 미래의 일들을 이미 영원 전부터 정하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과 뜻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적 세계와 영적 세계를 비롯한 모든 그의 창조 영역 안에서 미리 정하신 그의 계획에 따라서 그의 주권적 의지를 행사하십니다. 곧 하나님의 작정이란 성경에 이른 바처럼,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가지고’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분이시며(엡 1:11),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라는 영적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작정을 ‘영원 전부터’ 하십니다. ‘영원 전부터’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이 말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등의 구절들에서 읽는 ‘창세로부터’, ‘창세 전에’ 또는 ‘영원 전부터’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창세 전에’라 할 때 그것은 세상이 시작이 된 그 시점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때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며, 또 ‘영원 전부터’라 할 때 ‘영원’보다 앞선 어떤 때를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의하여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표현들이 시간 안에서 어떠한 일들이 앞뒤로 이어져 나오는 것과 같은 어떤 순서를 의식하며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시간이란 것이 있기도 이전에 있었던 일임을 뜻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나라를 예비하신” 일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일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시작이 되기 시작한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시간이란 것이 존재하기도 전에 시간 밖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이미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그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정하여져 있으므로, 그러한 일들이 실제로 시간 안에서 실행이 될 때는 어떤 순서를 가지고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시간적 차이를 가지고 실행이 되는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도 또한 어떤 시간의 차이를 가지고 된 듯이 착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시간 안에서 나타나는 실행의 순서가 마치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도 이미 어떤 시간적 순서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의 작정은 시간의 순차적인 흐름에 종속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간 안에 종속된 피조물인 우리에게 있어서 앞선 것과 뒤에 따라오는 것을 시간의 순차적인 구별이 없이는 어떠한 개념적인 인식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앞서고 어떤 것들은 뒤에 나타나는 것처럼 시간의 차이가 있는 듯이 여기지만, 사실에 있어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하며, 하나님의 작정이 그러한 시간적 차이를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또한 지혜롭고 거룩합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는 일이 그의 지혜와 거룩함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임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그의 계획에 따라서 이루어진다고 고백할 때, 그의 계획이라는 말의 원래적 의미에는 의도성과 결심 그리고 협의와 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 사이에 상호 교통을 통해서 이루어진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엡 3:9)이며, 또한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엡 3:11)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뜻과 목적을 이루어가는 방편들을 정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 된 일로서 작정의 실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로움이 드러나며 선포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시 104:24). 바울이 찬양을 드렸듯이 하나님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며, 이것은 그의 판단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실로 깊고 풍성하기 때문입니다(롬 11:33). 하나님의 작정 안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로움은 실로 피조물로서는 측량할 길이 없는 실로 깊고 풍성하여 어떤 피조물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높고 높으신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작정을 이루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와 결심이 실로 거룩하다는 것을 또한 고백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성적 피조물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규범을 정하여 주신 분으로서 거룩하실 뿐만 아니라, 홀로 완전하신 분으로서 영광의 거룩함을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작정 안에 모든 목적하신 바를 이루어 가는 그의 깊고 풍성한 지혜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을 드러내는 거룩함을 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은 취소되거나 변경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지혜의 완전성과 거룩함의 영광은 마치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에 어떤 오류나 실수, 후회함 등이 있거나, 또는 작정은 하였으나 실행 능력이 없어서, 취소하거나 변경하실 일이 있을 수 없음을 보증합니다. 하나님은 영원 안에서 이미 모든 일을 그의 지혜로 완전하게 계획을 하실 뿐만 아니라, 그 계획을 능히 이루실 수 있고, 또한 진실하며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이 이러한 작정을 하심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 이외에 다른 어떤 조건이나 이유에 의하여 행하시는 일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곧 하나님의 자유롭게 그의 작정을 행하십니다. 신앙고백서가 교훈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의 강압이나 요구에 의하여 어떤 일을 작정하셔야만 하는 의존적인 분이 아니시라는 하나님의 주권성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의지에 속한 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신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영적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이것이나 혹은 저것을 작정하도록 강요하거나 원인적으로 작용할 그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으며,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자발적 기쁜 뜻만이 그의 작정의 원인일 뿐임을 교훈합니다. 하나님의 의지만이 하나님의 의지의 원인일 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의 원인도 또한 하나님의 의지 곧 하나님의 뜻일 뿐입니다.
160 no image <웨신해설19-②>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_김병훈 목사 (1)
편집부
4621 2011-11-15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제2장 3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2장 3항> “신성이 단일한 가운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함이 동일하신 세 위격들이 계시니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다른 어떤 분에게서 나시거나 나오시는 분이 아니시며,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영원 안에서 나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게서 영원 안에서 나오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은 구원에 합당한 믿음에 필수적인 내용” 성령 하나님께서 오직 성부 하나님에게서만 나오시는지, 아니면 성부와 성자 하나님에게서(filioque) 나오시는지에 대해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여전히 이견을 보이고 있습니다. 15세기 플로렌스 회의(1439년)에서 성령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오시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으나, 그 후로 여전히 서방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것으로, 동방은 오직 성부에게서만 나오시는 것으로 주장을 합니다. 서방교회 전통 안에 있는 개혁파 신학과 신앙고백서는 성령 하나님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것으로 고백을 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함께 성자에게서 보냄을 받으시며(요 16:7), “아들의 영”이라 일컬음도 받으시며(갈 4:6), 성부와 함께 또한 성자에게 들은 것을 말하시며(요 16:13), 예수님께서 내쉬는 숨에 의하여 제자들에게 주어지셨기 때문입니다(요 20:22).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이와 같이 세 위격들 상호간의 내적인 관계에 따라 구별이 됨과 동시에, 또한 세 위격들이 피조계를 향하여 행하시는 사역의 질서와 관련하여 구별이 됩니다. 성부께서는 성자와 성령의 사역의 기원이시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뜻을 행하시는 반면에, 성자는 성부의 뜻을 행하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는 뜻을 행하십니다. 성부께서는 성자와 성령을 보내시지만, 자신은 성자와 성령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지는 않으십니다. 성자는 성령을 통하여 일하시며 성부로부터 성도들의 심령에 성령을 보내십니다. 하지만 성자 자신은 성령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지 않으십니다. 반면에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십니다. (요 1:3; 5:19; 8:42; 14:26; 15:26) 이처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 구별이 되시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신성이 단일하며, 능력과 영원함이 동일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해야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말을 마치 세 사람이 있는 경우에 그들이 서로 인간이라는 동일한 본질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혹은 마치 부분들이 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것처럼, 세 위격들이 모여서 하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것처럼 생각하면 이 또한 잘못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 완전히 일치합니다. 다만 각 위격이 서로의 관계들 안에서 구별이 될 따름입니다. 그래서 “신성이 단일한 가운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함이 동일하신 세 위격들이 계시니”라는 말로써 신앙고백서는 각 위격의 차이가 어떠한 의미에서도 본질의 차이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삼신론의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단일한 신성 안에 있는 위격의 분명한 구별은 한 위격이 다양한 모양과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성부가 성자로 나타나시고, 또 다른 때에는 성령으로 나타나신다고 말하거나, 마치 한 남자가 아들, 본인, 아버지의 세 역할을 감당하는 식의 설명 또한 매우 잘못된 것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삼위일체의 고백은 모든 신자들의 신앙고백 가운데 꼭 있어야 할 항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계신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모르거나, 무시한다면,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는 표현도 아니며, 더욱이 그것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없는 매우 신비롭고 어려운 교리이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구원에 합당한 신앙고백의 항목이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개혁파 신학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다음의 이유를 들어 그렇다고 답을 합니다. 우선 주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요 또한 영생”(요일 5:20)이십니다. 또한 신앙고백과 더불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하셨습니다(마 28:19). 이러한 말씀들은 구원을 받는 신앙과 관련하여 단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시며 의로우시며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과 같이 단지 그가 어떠한 분이신가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교훈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 자는 마땅히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며(요 5: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습니다”(요일 2:23). 뿐만 아니라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것은 몇 가지 중요한 영적 사실들에 대한 고백을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 그래서 그 아들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 그가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죗값을 치루셨다는 것, 그가 부활하시고 또한 승천하셨으며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보내셨으며,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기도를 하신다는 것 등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복음을 믿는 것은 이러한 영적 사실들을 믿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아버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듯이 예수님도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이상의 설명을 기초로 하여 개혁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 구원에 합당한 믿음에 필수적임을 주장합니다. 이 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한다는 것이 한 하나님이 어떻게 세 위격으로 계실 수 있는 것인지, 세 위격들의 상호관계는 어떠한 것들인지 등에 대해서 알고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천사라도 다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구원받는 믿음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라는 표현이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고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앙을 부정하거나 소홀히 하는 식의 주장은 다 그릇된 것이므로 교회 안에서 용납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모든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광과 존귀를 합당히 돌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159 no image <웨신해설19-①>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제2장 3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4442 2011-11-01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제2장 3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은 성경에서 각각 진리로 고백하고 받기 때문” 제2장 3항: “신성이 단일한 가운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함이 동일하신 세 위격들이 계시니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다른 어떤 분에게서 나시거나 나오시는 분이 아니시며,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영원 안에서 나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게서 영원 안에서 나오셨다.” 본 항목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삼위일체임을 고백합니다. 거룩한 삼위일체의 고백은 두 가지 내용을 담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신성이 단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는 또한 세 위격들이 계시다는 고백입니다. 이 두 가지 고백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서술하면 이렇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단 하나 뿐이며 단순한 본질 안에서 서로 구별이 되는 고유한 상호 관계들의 특성을 가지고 서로 안에 들어가시고 또한 거하시는 세 위격들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성의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고백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어떻게 이해가 불가능한 것을 고백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관련한 내용들을 성경에서 각각 진리로 고백하고 받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각각 성부와 구별이 되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삼신론을 고백하지 않는 까닭은 신앙고백서가 밝히고 있는 바대로 “신성이 단일한 가운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함이 동일”하심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이러합니다. 우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 일컬어집니다.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으셨음”을 노래한 시편(45:7)은 그리스도에게 적용이 되어 히브리서 1장 8,9절에서 그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곧 성부 하나님가 구별이 되는 아들 하나님임이 증거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은 이사야 9장에 이르러 우리에게 주신 바 된 한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6절)이라는 말씀으로 인하여 더욱 뚜렷이 드러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시고” 그로 하여금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실 것인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예레미야서(23:5,6)는 밝히고 있습니다. 신약에 이르면 더욱 뚜렷합니다. 예수님과 관련하여 이르기를 “말씀이 하나님이시다”(요 1: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시고”(요일 5:20),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며(롬 9:5),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고(딛 2:13),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시며(딤전 3:16), “근본 하나님의 본체”십니다(빌 2:6). 이 외에도 많은 구절들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에게서 하나님의 속성들과 그가 행하신 사역들의 신적 성격을 증거합니다(사 40:12, 44:24; 눅 6:8; 요 1:3, 5:17, 8:58, 16:30, 21:17; 골 1:16; 히 1:2, 10, 11,12; 계 1:8, 11:17 등). 성경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성령님께서도 성부 하나님과 구별이 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간명한 몇 가지 예만을 들어보면,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가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만을 사도들에게 줄 때, 베드로는 그 거짓됨을 꾸짖어 말하기를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령님이 인격적 하나님이시므로 가능한 말입니다. 기억할 것은 성령님은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고전 12:3,4). 성령님은 이름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속성들과 행하는 사역들을 통해서 그가 성부, 성자와 구별이 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심이 증거됩니다(삼하 23:2,3; 사 6:9; 눅 1:35; 행 28:25,26; 롬 8:11; 고전 3:16, 6:11,19, 12:4, 15:45; 엡 1:17,18; 살후 2:13; 벧후 1:2,21 등).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이신 성자와 성령님이 각각 “신성이 단일한 가운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함이 동일”한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서로 구별이 되는 세 위격으로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세 위격들이 갖는 각각의 특징들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이와 관련해서 “성부 하나님은 다른 어떤 분에게서 나시거나 나오시는 분이 아니시며,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영원 안에서 나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게서 영원 안에서 나오셨다”고 고백합니다.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시는 것을 가리켜 특별히 영원으로부터 된 일로 이를 “영원의 나심”이라고 일컫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동정녀에게서 출생하셨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있는 영원한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의 나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 안에서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반대하는 중요한 고백적 표현입니다. “영원의 나심”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시간적 의미에서의 기원적 차이를 두는 어떠한 주장도 인정될 수 없는 것임을 확정합니다(시편 2:7, 잠 8장, 미가서 5:2; 요 1:14,18; 골 1:5; 히 1:3,5 등). 성령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과 달리 나시는 분이 아니라 나오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나오심도 시간 안에서 전후가 있는 것처럼 또는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는 공간의 이동인 것처럼 이해를 하면 안 됩니다. 성자 하나님이 영원 안에서 나시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은 영원 안에서 나오십니다. 그리하여 “영원의 나오심”이라는 말로 표현을 하여 오해가 없도록 하기도 합니다. “나심”과 “나오심”이 서로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으며 또한 알지도 못합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성경의 계시에 의하여 서로 다르다는 것만을 알 따름입니다. 중세 신학자들 가운데 나심은 진리의 양식(modus intellectus)에 따른 것이므로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것이고, 나오심은 의지의 양식(modus voluntatis)에 따른 것이므로 성령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이라고 설명을 시도하였으나 이에 대한 성경의 근거는 없습니다.
158 no image <웨신해설 18-②> 하나님 : 주권과 지식과 거룩과 영광(제2장 2항)_김병훈 목사 (29)
편집부
4175 2011-09-20
하나님 : 주권과 지식과 거룩과 영광(제2장 2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것도 우연적이거나 불확실하지 않아” 하나님의 지식의 완전성과 관련하여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미래의 일을 아실 수 있겠는가 물으며 아실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장래의 일에 대해서 아신다면 그것은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을 훼방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과 의문은 성경에 따른 기독교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행할 것인가에 대해 그가 무엇인가를 자유의지에 따라서 선택을 한 후에야 그 결과를 보고 비로소 아는 분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겔 11:5).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도 이미 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무한하며 완전한 지식에 대한 다윗의 찬송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2-4). 이처럼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을 그대로 보존하시면서도 자신의 뜻에 따라서 미래의 일을 미리 알리시고, 알리신 바대로 또한 실행을 하십니다. “내가 예로부터 처음 일들을 알게 하였고 내 입에서 그것들이 나갔으며 또 내가 그것들을 듣게 하였고 내가 홀연히 행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졌느니라”(사 48:3).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어떤 일도 모르시는 바가 없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계 1:4) 하나님은 어제, 오늘, 미래의 연속적인 변화를 좇아서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에 있어서 항상 지금으로 계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십니다. 그러므로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모든 만물들에 대한 지식도 하나님에게는 항상 지금의 지식일 뿐입니다. 미래의 일을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실 것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관련하여 신앙고백은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것도 우연적이거나 불확실하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아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나타나도록 작정하신 모든 일을 다 아십니다. 이 세상의 일은 다 만물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을 실행하심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의 일이나, 미래의 일도 하나님에게도 이미 그의 뜻 가운데 있는 일이므로 모두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필연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작정된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타날 그 일에 대하여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하여 알게 되시거나 혹은 모르시는 일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나타나는 일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여 작정된 일이며, 이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나타나는 모든 일을 아시는 까닭에, 나타날 일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어떤 것도 우연적일 수가 없으며, 또한 불확실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절대성과 그의 무한하며 완전한 지식을 고백한 데에 이어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모든 계획과 일들이 지극히 거룩함을 선포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이 가장 높은 절대적인 것임을 선포함에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무엇인가가 하나님의 계획과 그 실행에 대해서 선 또는 악을 판단할 위치에 있다면 그러한 판단의 권위 아래에 있는 하나님은 결코 최고의 절대적 주권을 가지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계획과 일에 있어서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최고의 주권자이심을 고백하는 이상 필연적으로 따르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악의 일들도 하나님이 주권적인 계획 안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악들을 기뻐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목적에 따라서 최선의 지혜 가운데 그 악들을 계획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악들이 세상 가운데서 경험이 된다고 하여도 그것들이 결코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사역의 거룩함을 결코 해치지 못함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명령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5)에 있을 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명령과 함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명령을 주셨음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오직 스스로 거룩하심을 고백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최고의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 우리가 돌려들여야 할 것은 예배와 섬김과 복종뿐임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서 당연한 주권적 요구입니다. 아담이 이 요구에 대해 거부를 할 때 그는 죄를 범하여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에 어두워진”(롬 1:21)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진노로 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예배하며 마땅한 존귀와 영광을 돌릴 때 사람은 피조물로서 지극한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2-13). 이 영광의 찬송을 드림이 이 땅에서 전투하는 교회의 기쁨이며 존재 이유일 뿐만 아니라, 천상에 있는 승리한 교회의 영원한 안식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최고의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이 찬송을 드리는 예배와 섬김의 부르심에 헌신하는 기쁨을 충만히 누리기를 바랍니다.
157 no image <웨신해설 18-①> 하나님 : 주권과 지식과 거룩과 영광(제2장 2항)_김병훈 목사 (23)
편집부
4501 2011-09-07
하나님 : 주권과 지식과 거룩과 영광(제2장 2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구원 받을 자를 선택하는 ‘예정’에서 드러나” 제2장 2항에서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하나님과 관련한 명제들 가운데 이번에 살필 것은 이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들에 의하여, 그것들을 위하여, 그것들에게로 행하시는 최고의 주권적인 권세를 그것들에게 대하여 가지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 만물은 드러나며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하며, 무오하고, 피조물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것도 우연적이거나 불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계획들과 그의 모든 일들과 그의 모든 명령들에 있어서 지극히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사들과 사람들과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서 예배와 섬김과 복종 등 무엇이든지 받기에 합당하시며, 그것들에게 요구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명제에서 고백하는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성과 지식과 거룩과 영광입니다. 본 항목은 먼저 하나님의 주권을 더할 수 없이 분명하게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스스로 기뻐하시는 뜻대로 무엇이든지 행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이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배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고백을 부인한다면 그는 적어도 성경에 따른 기독교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만드신 만물을 그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떤 다른 모든 존재들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만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향하여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은 이 주권에 대하여 ‘최고’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 절대성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고백한다는 것은 피조물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가장 적절한 답이 욥의 입술을 통해 나옵니다.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욥 9:12). 욥은 여기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저항할 수 없는 피조물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전횡을 지적하며 이에 대한 사람의 무력감을 한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주권의 절대적 의로움을 또한 의심치 않습니다. “...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욥 1:21; 참조, 단 4:25). 욥이 말한 바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마땅히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실 뿐입니다. 여기서 유의하여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으로 만물을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창조하시며 섭리하시는 분이시지만 결코 전횡적으로 악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엘리후가 나중에 욥을 향하여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에게 대하여 일일이 하신 일에 대해 설명이나 이해를 구하셔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욥 33:13). 하지만 오직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행사를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은 또한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에 일치하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과 거룩함에 어긋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관련한 이러한 특성은 구원을 받을 자를 선택하시고 그렇지 못한 자를 유기하시는 하나님의 ‘예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사람들 모두가 예외없이 영원한 진노 아래에 있는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가운데서 어떤 이들에게는 영생의 구원을 주시고,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멸망의 형벌을 내리시는 절대 주권에 따른 예정을 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 하나님께서는 그의 절대적인 주권에 따라서 모세에게 이르신 바와 같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롬 9:15).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두 가지 점에서 결코 불의한 주권적 전횡이 아닙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죄인들 가운데 구원에 이를 자를 선택하실 때, 하나님은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마치 토기를 자신의 뜻에 따라서 귀히 쓸 그릇이나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 권한을 가진 토기장이(롬 9:21)와 같이,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목적에 따라 정하여 만드실 권한을 가진 만유의 주재로서 예정의 선택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토기장이가 불의하지 않듯이, 하나님도 또한 불의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어떤 죄인들을 선택하여 그들을 의롭다하실 때와 관련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죄인들을 의롭다하실 때 그리스도의 대리속죄 형벌을 전제로 하시기 때문에 결코 그의 선택을 실행하심에 있어서 불의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선택을 받지 못한 죄인들을 벌하실 때 하나님은 오직 그들이 범한 죄로 말미암은 형벌을 내리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며, 또한 항상 거룩하며 의롭습니다. 하나님에게 최고의 절대 주권이 있음을 천명한 신앙고백서는 이어서 하나님의 지식의 절대성을 고백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눈을 속이거나 눈에서 벗어나는 일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하며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아울러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하며 완전하므로 또한 오류가 없습니다. 불완전하며 유한한 정보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과 같은 지식의 오류란 하나님에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지식이 무한하며 완전하고, 그렇기 때문에 또한 오류가 없다는 사실은 장차 만물을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드러내시며 결산을 받으실 때, 만물에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항상 의롭다는 사실을 또한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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