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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no image <웨신해설 44> 인간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_김병훈 목사
편집부
3531 2014-09-23
인간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 <제7장 1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7장 1항: “하나님과 피조물의 간격은 실로 크기 때문에, 비록 이성적 피조물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복종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축복과 보상과 같은 것을 성과로 가질 수는 없다. 단지 하나님 편에서 기꺼이 스스로 낮추시는 겸양으로 가질 수가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방식으로 이것을 표현하시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은 성경의 교훈들의 토대가 되는 핵심 사상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심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복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교제와 영생은 언약을 통해 약속이 되었고 실행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그 언약 안에서 참된 자유의 행사를 통해 언약의 의무를 행하며 언약의 복을 누립니다. 신앙고백서 7장은 이러한 언약에 관련한 핵심 원리들을 교훈합니다. 본 항이 교훈하는 바는 언약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두 가지 교훈을 살필 수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언약의 대상자인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에 대해 언약 대상자로서 어떠한 자격을 갖는지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언약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 또는 가능성에 관한 것입니다. 1. 언약 대상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 우선 첫 번째 교훈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언약이 이루어지려면, 언약을 맺는 대상자들이 서로 동등하거나 또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서로에게 어떤 유익을 주고 또 의무를 요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격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상대에 대하여 일정한 독립성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어떤 일과 관련하여 어느 한 편이 다른 한 편에 대하여 일방적 요구나 명령를 할 수 있는 권한이나 위치에 있다면, 그 일과 관련한 이들의 관계를 가리켜 통상적으로 언약적 관계에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를 테면 종은 주인에게 종의 의무를 행한 후에 그 행한 바와 관련하여 주인에게 어떤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나 위치가 아닙니다. 종이라는 위치는 주인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반대급부를 주인에게 권리로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재산으로 간주되며 출생 때부터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일방적인 의무가 지워진 존재입니다. 어떤 종이 주인에게 유익을 주었다는 이유를 들어 주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향해 어떤 의무를 행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언약이 맺어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의무를 행하여야 함이 마땅하며, 또한 최고의 선이시며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의무를 행한다고 하여 어떤 유익을 새롭게 받으시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무엇인가 선하고 유익된 것을 행하여 하나님께 드린다면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복된 선물일 뿐입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기 아니며, 그의 존재와 활동과 활동의 능력과 또한 누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할 따름인 한낱 피조물일 뿐입니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본 항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간격은 실로 크기 때문에, 비록 이성적 피조물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복종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축복과 보상과 같은 것을 성과로 가질 수는 없다”고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간격을 무엇에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 사용하는 어떤 언어적 표현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언어란 결국 유한한 세계를 반영하며 그것을 가리키는 표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표현은 비공유적 속성으로 영원성, 무한성, 불변성과 같은 부정의 방식(via negationis)이나, 공유적 속성을 주로 나타내는 전능성, 전지성, 선하심과 공의 등과 같은 탁월의 방식(via eminentiae), 또는 사물과 사람의 관계 등에 빗대는 왕과 백성, 목자와 양, 또는 산성, 요새 등 여러 가지 유비의 방식(via analogiae) 등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들은 유한 세계 안에서 이끌어진 것들이며 절대로 영원하시며 무한하신 절대존재이신 하나님을 표현하기에 뚜렷한 한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 또한 너무나 커서 어떤 표현으로도 그것을 충분히 드러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말로도 간격의 차이를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그 간격의 차이가 큰 창조주 하나님께 피조물인 인간이 복종을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복종의 의무를 실행하였다고 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어떤 보상이나 축복 같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신앙고백서의 고백은 지극히 옳은 교훈입니다. 2. 언약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 조건 그렇다면 인간이 이렇게 크신 하나님과 어떻게 언약을 맺을 수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언약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 또는 가능성에 관한 것으로 신앙고백서 본 항이 교훈하는 두 번째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격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기 위하여서는 그 무한한 격차를 뛰어 넘는 특별한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형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관계의 형성은 피조물인 인간 편에서는 무엇인가를 실행하여 되는 일이 도무지 아닙니다. ‘유한은 무한을 도무지 담아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Finitum non capax infiniti).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것뿐입니다. 본 항은 이와 관련하여 “단지 하나님 편에서 기꺼이 스스로 낮추시는 겸양으로 가질 수가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방식으로 이것을 표현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진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어떠한 보상의 약속이 없이 복종을 명하실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조건과 보상의 약속을 언약의 방식을 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마치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언약의 조건을 성취하고 그것을 근거로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상대가 되는 것처럼 인정을 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높여주시는 것이며, 하나님 자신을 낮추시는 겸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언약의 방식을 통해 인간과 교제를 가지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이성적 피조물들”이라는 표현으로 이와 관련한 사실을 반영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의지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을 하고 그로부터 약속된 영생의 복을 누리며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창조는 처음부터 하나님과의 언약적 교제를 염두에 둔 특별한 은혜이었던 것입니다. 언약이 특별한 은혜인 까닭, 그러니까 언약을 위하여 이미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누리는 복이 특별한 은혜인 까닭은 언약을 통해 피조물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영광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곧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언약 아래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약속의 성취를 요구할 일정한 권리를 갖게 되는 어마어마한 영광을 누리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 편에서는 언약의 약속을 성취해야할 의무를 자신에게 부여하며 그것을 선하심과 공의로움과 진실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인간 편에서는 언약 안에 순종으로 머물러 있음으로서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그의 선하심과 공의로움과 진실함을 따라 약속을 이행하실 것을 요구할 권리를 부여받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담은 언약의 방식만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무한한 간격을 뛰어넘어, 인격체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인간과 교제를 하실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입니다. 여기서 창조주 하나님을 지나치게 피조물에게로 끌어 내리면 범신론의 경향을 갖게 되며, 반대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존재론적인 무한한 격차를 그대로 놔두게 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어떤 교제도 불가능한 이신론이 되고 맙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시는 언약은 기독교 성경적 신관이 결코 범신론이나 이신론의 하나님이 아님을 말합니다. 요컨대 언약은 이성적 인격체인 인간에게 인격적 반응을 따라 강요를 받지 않은 채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하며 순종하며 섬기는 피조물의 지극한 행복을 누리도록 하시는 은혜의 방식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의 선하신 교훈을 악한 것으로 판단하고 불순종을 하였던 인간의 최초의 범죄가 어찌하여 죄인가를 드러내주는 원리가 되며, 또한 타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게 되는 구속의 원리가 되며, 아울러 성령의 중생과 조명과 인도하심에 따라 지음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거룩한 경건의 삶을 살아가야할 원리가 되기도 합니다. 3. 맺는 말 언약을 맺는 일이 가능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는 일이 있어야 하고, 또 하나님께서 인격적 교제를 위하여 자신을 낮추시어 겸양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인간에게 가장 으뜸가는 목적을 지시하여 줍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 최고의 행복을 누리게 되며 그것으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항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무엇입니까?”의 질문의 답은 언약의 본질과 가능성과 관련한 본 항의 교훈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195 no image <웨민해설 43> 죄와 죄책, 그리고 형벌 <제6장 6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6388 2014-08-19
죄와 죄책, 그리고 형벌 <제6장 6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6장 6항: “원죄와 실제로 범한 죄는 모두가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어긴 것이며 그것에 어긋나는 것으로, 죄 그 자체의 본질에 따라 죄를 범한 자에게 죄책을 야기한다. 그로 말미암아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에 묶이게 되며, 영적이며, 시간적이며, 영원한 모든 비참함과 더불어, 사망에 처하게 된다.” 본 항은 크게 두 가지를 교훈합니다. 첫째, 죄는 본질상 죄책을 야기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그 죄책에 따라 형벌을 받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죄책으로 말미암아 받는 형벌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이며, 일시적이며, 영원한 비참함과 함께 사망에 처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죄책으로 인한 형벌은 원죄(peccatum originale)와 실제적 범한 죄(peccatum actuale) 둘 다에게 해당됩니다. 죄의 오염과 죄책은 원죄에 의해서도 발생하며, 또한 실제로 범한 죄로 인하여도 발생이 됩니다. 여기서 원죄와 실제로 범한 죄의 구별과 관련해 원죄는 잠재적인 데에 반해 실제로 범한 죄는 잠재된 원죄가 현실적으로 드러났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죄는 단순한 잠재적 죄가 아닙니다. 원죄는 단순히 죄의 가능성이 아니라 원죄 자체도 이미 현실적으로 온 인류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현실적인 죄입니다. 여기서 실제로 범한 죄가 가리키는 것은 단순한 습성이나 성질상의 죄가 아니라 실제로 활동으로 나타나는 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원죄로 인하여 오염된 부패한 성품이 단지 습성이나 기질로 있는 상태를 넘어서 생각으로나 욕망을 통하여 마음으로 활동이 나타나든지, 아니면 입으로 더러운 것을 말함으로 나타나든지, 또 아니면 악한 행동을 통해 나타나든지 실제로 활동으로 나타나는 죄를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원죄와 실제로 범한 죄와 관련한 죄책과 형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니다. 1. 죄는 죄책을 야기함 신앙고백서 6장 4항에서 “원죄로 인한 본성의 부패로 인하여,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않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리고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으로 온통 이끌려져 있고, 온갖 범죄를 실제적으로 범한다”라고 고백하는 바와 같이, 죄는 본성의 부패라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런데 지금 살피는 6항에서 신앙고백서는 죄가 본성의 부패와 같은 오염의 결과뿐만 아니라,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의 책임도 또한 초래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이로써 신앙고백서는 죄로 인하여 나타나는 두 가지 효과, 곧 오염과 죄책에 대해서 모두 설명을 제공해 줍니다. 흔히들 죄로 인한 이러한 효과들로 인하여 죄는 두 가지 개념으로 불립니다. 죄와 관련하여 “더럽고,” “성처를 입었으며” “병들었다”고 할 때 그것은 오염의 결과와 관련한 것입니다. 또한 “범죄,” “위법,” “빚”이라는 표현은 죄책의 결과와 관련하여 죄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죄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①죄로 인한 오염의 상태에서 말갛게 씻김을 받는 것을 뜻하며, 또한 ②죄로 인한 죄책에서 면케 되는 것을 뜻합니다. ①전자는 성령의 도움으로 인한 성화의 구원을 뜻하며, ②후자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칭의의 구원을 뜻합니다. 2. 죄책은 죄로 인한 효과 죄책은 죄로 인한 효과이지 죄의 본질 자체는 아닙니다. 본 항에서 “죄 그 자체의 본질에 따라 죄를 범한 자에게 죄책을 야기한다”는 진술이 의도하는 것은 죄책이 죄의 본질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곧 죄는 그것의 본질 상 죄책을 초래하기 때문에 죄책과 분리하여 죄를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범하면 반드시 죄에 대한 책임을 지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교훈입니다. 그러면 죄를 범하면 죄책을 반드시 지어야 하게끔 되는 죄와 죄책의 비분리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것의 답은 본 항에서 “원죄와 실제로 범한 죄는 모두가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어긴 것이며 그것에 어긋나는 것으로”라는 표현 속에 있습니다. 죄란 본질상 “하나님의 의로운 법을 어긴 것이며 그것에 어긋나는 것으로” 불법성(anomia)을 갖습니다. 이 불법성이라는 죄의 본질은 행하여야 할 것과 금하여야 할 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과 관련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계명으로 행할 것과 금할 것에 대한 명령을 하시면서 동시에 불순종하여 불법을 행할 경우에 미치게 될 처벌에 대한 경고도 덧붙여 주셨습니다. 죄책이란 바로 계명의 불순종에 대해 부가된 제재 조치와 관련한 죄를 말합니다. 불법으로서의 죄와 죄책으로서의 죄의 이해를 위하여 신자와 그리스도의 상태를 비교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로마서 8장 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의 말씀은 신자에게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책이 없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신자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불법성은 여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이와 반대입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벧전 2:22)의 말씀은 그리스도에게는 불법성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책을 짊어지셨음을 교훈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의 말씀 또한 이 사실을 반영합니다. 3. 죄책으로 인한 형벌 신앙고백서는 죄책으로 인하여 받아야 할 형벌에 대하여 몇 가지를 나열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 둘째는 율법의 저주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셋째는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 그리고 사망의 형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일시적으로 육체에만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형벌로 인하여 인간에게 미친 비참함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영원히 미치게 됨을 선포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영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습니다(엡 4:18 참조). 이처럼 내적인 영적 부패와 무능력뿐만 아니라, 외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각종 환란과 재난과 비극과 고통과 눈물과 아픔의 비참함을 겪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구조는 전 피조계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20). 그리고 가장 무섭고 끔찍하게도 영원히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받아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분리가 되고 마귀와 더불어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영원한 사망을 당하게 됩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9). 4. 피할 수 없는 죄책의 형벌 설령 죄책은 피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형벌은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죄책(reatus, guilt)은 죄를 범한 책임(reatus culpae)과 벌을 받아야 할 책임(reatus poenae)를 모두 포괄합니다. 범책과 벌책을 둘로 구분하여 죄책을 나누는 것은 매우 잘못된 시도입니다. 죄책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범한 책임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의 내용은 무의미해집니다. 즉 죄책이란 범책에서 야기되는 벌칙에 대해 의무 또는 책임, 곧 벌칙 이외의 다른 것일 수가 없습니다. 범책이 사라지면 벌책도 사라지는 것이며, 벌책이 남아 있다면 결코 범책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설명이 중요한 까닭은 천주교회가 임의로 범책과 벌책을 구분하여 그릇된 설명을 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천주교의 주장에 따를 때 범책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으나, 벌책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는 비참함에서 죄인을 건지셨으며, 그로 인하여 영원한 형벌에서 놓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받아야 하는 벌책은 여전히 남아 있어 자신의 죗값을 치를 것이 신자들에게 요구가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책과 더불어 영원한 사망의 형벌이라는 벌책은 면케 하여 주셨지만, 신자가 이 세상 살면서 범하는 작은 죄들, 곧 하나님에게서 돌아설 의도가 없이 범하는 작고 소소한 죄들로 인한 형벌을 스스로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이러한 벌책을 감당할 수가 있을까요? 천주교회가 제시하는 길은 고해성사와 연옥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서 참회(contritio)를 하고, 범한 죄를 고백(confessio)하며, 사제로부터 사죄의 선언(absolutio)을 받고, 그리고 나서 행함으로 죗 값을 갚는 보속(satisfactio)을 행하여 합니다. 여기서 이 세상 사는 동안 보속이 충분치 않으면 연옥에서 정화의 기간을 통해 갚아야 합니다. 이러한 교리들을 뒷받침하는 신학적 원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분리될 수 없는 범책과 벌책을 떼어 놓는 잘못된 개념의 시도입니다. 마치는 말 죄책은 범책으로 말미암는 벌책을 모두 포괄하며, 이 둘은 서로 함께 있어 범책이 없으면 벌책이 불가능하고 벌책이 남아 있다면 범책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가 벌책을 일부 남겨둔다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과를 제한하는 매우 잘못된 주장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이와 관련하여 단호하고 분명하게 “그로(죄책으로) 말미암아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에 묶이게 되며, 영적이며, 시간적이며, 영원한 모든 비참함과 더불어, 사망에 처하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하여 소위 범책과 벌책이 죄책 안에 포괄이 되는 죄책의 요소임을 확실하게 밝힙니다. 그리하여 죄책으로 인하여 영적이며, 시간적이며, 영원한 모든 비참함들 속에 놓이게 된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소망은 이 비참함의 형벌에서 완전히 해방을 시켜주시는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데에 있음을 교훈하는 올바른 토대를 놓고 있습니다.
194 no image <웨민해설 42 > 원죄(2) - 부패한 본성과 그것에서 비롯된 활동들의 죄의 성질 <제6장 5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3561 2014-07-22
원죄(2) - 부패한 본성과 그것에서 비롯된 활동들의 죄의 성질 <제6장 5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6장 5항: “본성이 이러한 부패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중생한 사람들에게 남아 있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고 억제되어 있다하더라도, 부패한 본성 자체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모든 활동들은 진실로 그리고 합당하게 죄이다.” “중생한 사람일지라도 본성의 부패를 가지고 있어서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모든 활동과 그 원인인 본성 자체가 곧 ‘죄’임을 고백해야” “천주교는 원죄로 인한 결과를 단지 원초적 의의 상실로 보는데 이것은 원죄로 인한 타락한 본성의 윤리적 악의 성질을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주장” 본 항은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하여 후손에게 미쳐진 죄의 오염의 상태, 곧 본성의 부패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교훈합니다. 하나는 중생한 사람일지라도 본성의 부패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모든 활동과 그것의 원인인 본성 자체가 모두 죄라는 사실입니다. 전자는 소위 ‘완전주의 성화론’을 부정하며, 후자는 천주교회의 ‘사욕(邪慾, concupiscentia)’론을 부정합니다. 1. 여전히 본성의 부패 상태에 있는 사람들 먼저 본 항과 관련하여 주목할 사실은 중생한 사람들에게도 본성의 부패함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 생명의 원리를 마음에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며 거룩함을 좇는 영혼의 성향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은혜를 가리켜 중생이라 합니다. 이러한 은혜는 성령님을 말미암는 것이며, 그 은혜를 입은 자는 돌 같은 마음이 제하여지고 살처럼 부드러워지며 새로운 의지로 하나님의 거룩과 선하심을 바라게 됩니다(엡 2:1-5; 고전 2:10-12; 겔 1:19; 36:27 등 참조). 하지만 부패한 본성이 중생한 사람에게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는 말씀에서 보듯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심령 안에는 성령을 따르고자 하는 중생의 은혜와 이를 거슬려 육체의 욕심을 따르고자 하는 본성이 서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적 전투를 위한 경건의 노력이 명령으로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이러한 싸움의 끝은 언제일까요? 본 항은 이러한 부패한 본성의 흔적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계속하여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완전주의 성화론에 대한 분명한 반대를 뜻합니다. 이들은 신자가 죄 없이 이 세상을 살며 율법을 온전히 지켜 무죄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있을 것을 말함으로써 이들의 주장을 배격합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에서 바로 확인이 됩니다. 이러한 영적 실존은 다윗(시 32:5), 솔로몬(왕상 8:46), 이사야(64:6), 베드로(마 26:70,72,74), 바울(롬 7:14) 등의 생활과 증언을 통해 더욱 확인이 됩니다. 흔히 의로운 자로 성경에서 언급이 되는 노아(창 6:9), 욥(욥 1:1), 아사(왕상 15:14) 등은 결코 일평생 완전한 자로 살았음을 증거하기 위한 본보기가 아닙니다. 성경이 때때로 신자들을 거룩한 자로 부르지만(고전 2:6; 엡 5:27 참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따라 이루어지는 은혜를 객관적으로 드러내며 일컫는 말이지, 신자들이 온전하며 죄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2. 죄는 본성 자체로부터 오는 모든 것 본 항은 중생한 사람에게 여전히 부패한 본성이 남아 있음을 말함과 동시에, 두 번째로 이렇게 남아 있는 본성의 부패함이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에 대해 말합니다. 중생한 사람에게 남아 있는 부패성은 당연히 중생하기 이전에 있던 본성이 발휘하던 부패의 영향력에 비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화된 것이며 억제되어 있고, 또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어떤 신자라도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하면 스스로를 속이며 진리를 떠난 자이로되(요일 1:8), 그가 만일 자신의 죄를 자백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그의 죄를 사하시며 그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 1:9). 복음이 주는 이러한 약속은 부패한 본성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억제되어 있으며,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이 주어짐을 교훈합니다(요일 3:8). 중생한 사람에게 남아 있는 부패한 본성의 성질과 관련하여 본 항이 말하는 중요한 요점은 그것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활동들과 함께 죄라는 사실을 지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회의 신학에 대한 반대를 나타냅니다. 천주교회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후손들에게 미쳐진 부패한 본성의 사실을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 본성의 부패성을 죄로 인정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천주교회는 한편으로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영향력이 본성의 부패를 가져왔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부패성이 완전히,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405항에서 말하기를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은 잃었지만, 인간 본성이 온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인간 본성이 그 본연의 힘에 손상을 입고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세력에 휘둘리며 죄에 기운다”고 가르칩니다. 원죄로 인한 이러한 죄의 경향성, 곧 사욕(邪慾; concupiscentia)으로 인하여 타락한 이후의 인간은 “죽음의 지배력을 지닌 존재, 곧 ’악마‘의 권세에 예속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07항). 이러한 천주교회의 주장은 언뜻 보면 개혁교회의 것과 유사해 보입니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고백은 앞서 살펴본 4항에서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않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리고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으로 온통 이끌려져 있다”고 고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훈과는 미묘하게 차이가 납니다. 3. 천주교의 잘못된 주장을 반박함 우선 천주교회는 사람이 본성의 부패로 말미암아 마귀에 예속되고, 죽음의 세력에 휘둘리며 죄에 기울어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타락 후에도 타락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유로운 상태임을 전제합니다. 왜냐하면 타락으로 인하여 나타난 영향은 원초적 의와 거룩함(iustitia et sanctitas originales)의 상실로 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설명을 하면, 천주교회는 본래 하나님께서 창조한 자연적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갈등이 있는 상태인데, 영혼의 영적 지배력에 육체가 조화롭게 놓일 수 있기 위하여서는 외적인 도움이 필요했다고 믿습니다. 이 외적인 도움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연의 상태에 덧붙여 주시는 초자연적인 ‘부가된 은사’(donum superadditum)입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하여 이 부가된 은사를 상실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이러한 원초적 의로 인하여 누리던 조화가 파괴되는 결과를 겪게 되었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00항). 그렇지만 본래 누리던 자유로운 상태는 여전합니다. 비록 원초적 의를 상실하여, 육체가 영혼의 지배력을 벗어나며, 악을 선택하는 경향성 아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선을 선택할 능력이 상실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407; 1732항) 그럴 때, 천주교회는 영혼의 지배력을 벗어나고자 육체와 영혼의 조화를 깨려는 부패한 본성인 사욕(邪慾; concupiscentia)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원죄로 인한 결과를 단지 원초적 의의 상실로만 볼 뿐이며, 원죄로 인한 결과로 나타나는 타락한 본성의 윤리적 악의 성질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단지 어쩔 수 없는 자연적인 것(insuperabilis)으로 여깁니다(트렌트 공의회, 제 5회기, ‘원죄에 대한 교령’ 제 1조 참조). 그러나 이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부패한 본성 자체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모든 활동들은 진실로 그리고 합당하게 죄”라는 사실을 확고히 강조합니다. 사욕(邪慾; concupiscentia)이 진실한 의미에서 죄의 본질에 합당한 완전한 죄임을 선언합니다. 천주교회의 변명에 따라 본성의 부패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사욕을 죄가 아니게끔 하지 않습니다. 율법에 순종을 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율법의 불순종을 죄가 아니게끔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에 어긋나는 것은 죄라고 말하며(롬 7:7 “...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또한 탐내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불순종으로 드러나는 탐심은 자신의 속에 있는 죄가 만들어낸 것이라고(롬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요컨대 율법에 대한 불순종의 행위인 탐심이나 그것을 초래하는 부패한 본성의 욕망이나 모두가 적절한 의미에서 죄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이라고 교훈합니다. 성령과 대조가 되는 육체의 소욕은 이미 그것으로 죄가 됨을 바르게 보여줍니다. 마치는 말 혹 어떤 이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을 들어, 욕심 곧 마음의 부패는 죄를 낳는 원인이지만 그것이 죄 자체는 아니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열매가 말해 주듯이 나타난 결과가 죄인 것은 그것을 낳은 것이 바로 같은 성질을 지닌 죄인 것임을 말해 주는 법입니다. 악한 결과는 원인의 악함을 말하며, 그 결과 악의 행동은 그 행동을 낳은 소욕의 악함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신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는 교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는 경계,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는 강론 등은 외적인 행동의 악과 내면의 부패성을 포괄하여 모두 죄로 정죄하십니다. 본 항에서 “부패한 본성 자체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모든 활동들은 진실로 그리고 합당하게 죄이다”라고 고백하는 바는 성경의 교훈을 참되게 반영합니다.
193 no image <웨민해설 41> 원죄(1) – 전면적 부패와 영적 무능력 <제6장 4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3507 2014-06-24
원죄(1) – 전면적 부패와 영적 무능력 <제6장 4항>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6장 4항: “원죄로 인한 본성의 부패로 인하여,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않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리고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으로 온통 이끌려져 있고, 온갖 범죄를 실제적으로 범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긍휼 없이 어떤 사람도 구원의 소망 없어” 본 항은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하여 그것이 아담의 후손이 짊어져야 했던 원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두 가지 설명, 즉 죄의 오염과 죄책 가운데 하나를 교훈합니다. 그것은 죄의 오염과 관련한 것으로, 본래는 순전하였던 인간의 본성이 아담의 죄로 인하여 부패함으로 나타난 결과에 대해 교훈입니다. 선과 관련하여, 사람은 비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이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못한 자들이 되었고, 또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하였고, 온갖 선과 대립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롬 5:6; 7:18; 8:7). 악과 관련하여, 사람의 마음은 선의 결핍 혹은 선과의 반대 또는 대립에 있으며(창 6:5; 8:21; 롬 3:10-12), 온통 악을 향한 성향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이러한 상태에 처하게 된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결국 온갖 범죄를 실제적으로 범합니다. 요컨대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한 부패는 원죄로 인한 결과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범죄, 곧 자범죄를 낳는 원인이 됩니다(약 1:14-15; 엡 2:2-3; 마 15:19). 누구나 죄의 오염과 죄책 가지고 있어 신앙고백서는 본 항에서 일반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소위 ‘선의 결핍 또는 결여’(privatio boni)로서의 죄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줍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않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었으며”라고 고백하고 있는 표현은 본성의 부패로 인하여 타락한 이후 인간에게 선을 기대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선의 결핍 또는 결여’로서의 죄의 이해는 마니교의 주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마니교는 선과 악을 각각 실체로 보는 이원론을 말합니다. 영원한 두 실체들이 서로 존재하며 투쟁하는 이원론의 형이상학은 결국 선뿐만 아니라 악의 실체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악의 책임을 부가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기독교는 결코 이를 용납할 수 없으므로 악을 선과 같은 실체로 보는 견해를 부정하고, 악이란 마땅히 있어야 하는 선의 결핍 또는 결여로 설명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란 ‘선의 결핍 또는 결여’라고 할 때, 그것이 말하고 있는 바는 죄란 결코 하나님께서 만든 어떤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죄가 실체라면 모든 실체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죄 또는 악을 만드신 분이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의 창조자가 아니시기 때문에 이러한 이해는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선하시며 모든 선의 기원이시고 또 그가 만드신 만물의 실체들이 선하다는 점에서, 선은 하나의 실체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여 죄는 실체가 아니라 선한 실체가 결여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 ‘선의 결핍 또는 결여’로서의 죄의 개념은 단순한 ‘선의 부재’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선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한 만물의 실체이므로 마땅히 존재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없다는 사실을 반영할 때, 선의 부재는 선의 결핍 또는 결여라는 부정적 의미를 갖습니다. 죄란 마땅히 있어야 하는 선이 결핍 또는 결여된 부정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곧 헤르만 바빙크가 예를 들 듯이, 돌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눈의 부재를 말하지만,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은 눈의 결핍 또는 결여로서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는 것과 같습니다. 눈이 없는 돌과 달리, 눈이 있는 사람은 마땅히 보아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하다면 이는 결핍 또는 결여된 부정적 상태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죄란 선의 결핍 또는 결여된 상태 그러나 신앙고백서가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않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었으며”라고 표현하고 있는 죄란 단순히 물리적 의미에서 선이 결핍 또는 결여된 상태를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죄는 윤리적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돌과 사람의 예를 따라 말한다면, 윤리성이란 이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이성이 없는 짐승에게는 선을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선의 부재를 말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성을 가진 사람은 본래 창조 때부터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존재로(posse non peccare) 마땅히 윤리성이 드러나도록 만들어졌으므로 그가 윤리에 어긋날 때 그것은 선의 부재가 아니라 선의 결핍 또는 결여를 드러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의 결핍 또는 결여는 단순히 어떤 물리적 의미에서의 실체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현상으로서 인격적 문제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를 포함하는 생각과 감정의 활동을 낳는 영혼이 자리하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결과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이어지는 고백을 통해서 죄가 윤리적인 면에서 인격적 문제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신앙고백서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타락 이후에 부패하였으며, 그 부패한 본성의 결과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성향을 전혀 갖지 않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선을 반대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또한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으로 온통 이끌려져 있고 온갖 범죄를 실제적으로” 범합니다. 타락한 이후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였다는 사실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9-20)에서 말씀에서 확인이 됩니다. 이러한 부패성에서 사람은 스스로 원하여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악한 행위를 선택하여 불법을 행하게 됩니다. 이렇듯이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였으며, 부패한 본성으로 모든 아담의 후손은 죄를 실제로 범하게 된다고 할 때 신앙고백서가 교훈하는 것은 사람의 인성 자체가 변질되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인성은 타락의 여부와 관계없이 여전히 동일합니다. 즉 타락 전 아담이나 타락 후 아담은 동일한 인성을 가진 동일한 사람이며, 또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부패한 성품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담의 후손들도 타락 전 아담과 동일한 인성을 가진 동일한 인간입니다. 아담의 타락이 인간 본성의 부패 가져와 신앙고백서가 원죄로 인한 본성의 부패로 인하여 선을 원하지 않으며 행할 수도 없으며 반대하고 오히려 악을 원하며 온갖 범죄를 행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인간에게 인성의 변질이 나타났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성에 선을 미워하고 악을 바라는 성질이 덧붙여졌음을 말합니다. 이 성질은 사람이기 위하여 필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성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인성을 가진 사람에게 덧붙여진 성질이기 때문에 우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패한 본성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질문은 사람의 본질을 묻는 것이고, 그 답은 사람이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는 본질적인 것을 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패한 본성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사람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 관련이 됩니다. 즉 사람은 타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이 영혼과 몸을 본질로 가지고 있으며, 다만 선을 원하지 않고 행할 능력도 없으며 반대하고 악을 원하므로 온갖 범죄를 스스로 범하는 성질을 갖게 된 자가 되었다는 것이 물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의 말씀은 동일한 인격이 한 편으로는 죄의 종이 되어 부정과 불법을 행하는 성질을 나타내며,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에게 종이 되어 거룩함을 이루는 성질을 나타낸다는 점을 밝혀줍니다. 동일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에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성질을 가진 옛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는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는” 성질을 가진 새 사람인 것입니다(엡 4:22-24 참조).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하여 설명한다면 이른바 넓은 의미에서의 구조적 형상을 말하는 것은 인성의 본질적 측면과 관련한 것이며, 좁은 의미에서의 기능적 형상을 말하는 것은 인성에게 부가된 성질의 측면과 관련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4장 2항 ‘사람의 창조’ - 기독교개혁신보 2013.4.12. 참조). 인간은 영적 무능력 상태 아래 있어 신앙고백서가 본 항목에서 교훈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사항은 부패한 성품으로 인한 죄의 오염이 전면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악을 행하고 싶은 마음으로 온통 이끌려져 있고, 온갖 범죄를 실제적으로 범한다”는 진술은 부패한 성품으로 인한 오염이 어떠한 제한이 없이 모든 인격 활동의 전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교훈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르게 갖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매우 필요합니다. 하나는 부패로 인한 죄의 오염은 비단 이성에만 아니라 감정, 그리고 의지의 전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전면성입니다. 사람은 타락한 이후에 진리가 아닌 것을 옳다고 판단하며, 악한 것을 기뻐하며 선택하는 성향을 갖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전면적인 타락의 양상과 더불어 또 다른 하나는 이러한 타락이 자연적이며 도덕적 측면에서의 가능성조차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신앙고백서가 본 항목에서 말하는 바가 타락한 이후 사람은 더 이상 타락할 수 없이 철저하게 타락해 있으며, 어떠한 선과 악의 양심적 구별도 불가능하고,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떠한 도덕적인 선도 행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여서는 안 됩니다. 비록 타락한 후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도덕적 선과 악의 구별의 능력이 제한 된 수준이지만 여전히 있으며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일반은총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면 본 항목에서 교훈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연적이며 도덕적 무능력이 아니라 영적인 무능력입니다. 원죄 아래 놓인 사람은 누구도 자연적인 상태에서 곧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으며,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의를 이룰 수가 없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는 전면적으로 근원이 부패한 자이며, 영적인 선을 행할 수가 없는 무력한 자임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범하는 모든 자범죄가 바로 원죄로 인하여 나타나는 결과임을 교훈하며, 죄의 오염으로 인하여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는 상태에서 죄의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함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새 사람 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긍휼이 도움으로 주어지지 않는 한 어떤 인간에게도 구원의 소망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는 신앙적 전제를 본 항목은 밝혀 줍니다.
192 no image <웨민해설 40> 아담의 원죄와 후손_김병훈 목사
편집부
4182 2014-05-13
아담의 원죄와 후손 <제6장 3항>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6장 3항: “그들은 모든 인류의 뿌리였기 때문에, 이 죄의 죄책은 전가되었으며, 죄로 인한 같은 죽음과 부패한 본성이 보통의 출생을 통해 그들에게 태어난 모든 후손들에게 전달되었다.” 본 항은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하여 그것이 아담의 후손이 짊어져야 했던 원죄에 대해서 두 가지를 교훈합니다. 하나는 아담의 죄책이 아담에게만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들에게도 돌아간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죄로 인하여 아담이 죄로 인해 겪게 되는 죽음과 동일한 죽음, 그리고 본성의 부패가 아담의 후손들에게 전달이 되었으며, 전달의 방식은 보통의 자연적인 출생에 의한다는 사실입니다. 1. 아담의 죄책의 전가 이것은 아담이 범한 죄와 그 죄책이 단지 아담과 하와 개인의 탓만이 아니라 또한 그 후손 모두의 탓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또한 성경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의 말씀이 그러하고,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는 말씀이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 그의 주장을 따르는 자들은 이 사실을 부인하고 앞서 보았던 성경의 구절들을 모방에 의한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즉 죄를 지은 아담을 보고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의 죄 지은 행동을 따라 죄를 지으므로 후손들도 아담처럼 죄를 지게 되었고, 그 결과 아담이 죽는 것처럼 자신들도 죽게 되었다고 주장을 합니다. 소시니안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재침례파와 항론파도 아담이 범한 죄의 책임이 그의 후손에게도 돌아간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부인합니다. 이들은 모든 인류가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된 것은 아담의 죄책이 그들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된 자의 후손으로 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아담의 죄책이 전가된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전가의 이유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의지의 탓으로 돌립니다. 아담이 범한 악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서 출생한 후손들도 동일하게 담당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여 놓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아담의 죄책이 후손들에게 전가 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형식적으로 인정을 하고 있지만 전가의 이유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말하며 사실상 부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오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책의 전가의 이유를 아담과 그의 후손의 관계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죄는 아담이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죄책이 아담뿐만 아니라 아담의 후손에게도 있는 까닭은 아담과 후손의 관계가 아주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그의 후손에게 있어서 아버지이고 그의 후손은 아담에게 대하여 자녀입니다. 아담은 정치적이며 법정적인 의미에서 그의 후손인 전 인류에 대하여 머리이며 왕입니다. 아담이 그의 후손에 대하여 아버지로서 자연적 관계를 갖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담이 정치적이며 법정적인 의미에서 그의 후손의 머리인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의 후손의 머리로 하여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인해 그가 죄를 범할 때 한 개인의 자격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대표적 지위로 행한 것입니다. 아담이 얻은 이익은 다 후손의 것이 되고, 아담이 잃은 손실도 또한 다 후손의 것이 되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마치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아담과 똑같은 처지에 있었더라면 우리도 아담처럼 죄를 범하였을 것이므로 우리도 아담의 죄책을 동일하게 받는다고 설명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단지 아담의 죄책이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까닭은 단지 우리가 아담과 똑같은 처지였다면 우리도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아담이 우리의 언약의 대표자라는 데에 있습니다. 죄책의 전가란 아담이 우리의 언약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아담이 범한 실제적인 죄가 우리에게도 전가되었으며 그래서 우리 모두도 죄에 대해서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책을 후손의 탓으로 돌린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아담의 후손이 죄책이 실제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이 죄를 범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담이 범한 죄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들 모두가 그 죄에 대하여 아담과 다를 바가 없이 똑같이 책임을 짊어지며 죄에 대한 형벌을 또한 받아야 할 만큼 그렇게 아담의 후손이 아담의 죄책에 대해 실제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죄를 범하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범한 불의에 대해 실제로 책임을 지시며, 우리는 의가 없지만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 공로가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앞서 살펴 본 성경 말씀에 이어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로마서 5장에서 확인됩니다. 여기서 성경은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을 모든 인류의 머리이며 뿌리로 삼으시므로 아담의 죄가 또한 그의 모든 후손의 탓이 되는 것처럼,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 선택을 받은 택자들의 머리이시므로 그의 공로가 다 택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제시한 바와 같이, 순종하지 않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순종하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는(롬 5:19) 말씀 그리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의 말씀은 이러한 원리를 명확히 보여 줍니다. 여기서 죄책의 전가와 관련하여 짚어야 할 중요한 논점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가 아담의 범죄가 원인이 되어 온 세상에 죄가 퍼져서 그 결과로 모든 후손들이 죽게 되는 효과가 나타났다는 유효적 원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책이 후손들에게 실제로 주어져 그 결과로 모든 후손들이 죽게 되었다는 공로적 원인을 뜻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사는 것이 살리시는 영이신 성령의 유효적 원인으로 인한 것이면서도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시는 공로적 원인 때문인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2. 아담의 죄로 인한 본성의 부패는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전달됨 둘째로 신앙고백서가 본 항목에서 고백하는 것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본성의 부패가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전달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죄책의 전가를 사실상 부정하였던 펠라기우스파, 소시니안파, 라코비안파 등은 내적인 본성의 부패와 같은 원죄의 유전을 또한 부정합니다. 이들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후손들에게 미치는 본성의 부패성과 같은 원죄란 없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자유선택의 능력이 손상되지 않았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내적 부패성이 보통의 자연적인 출생에 의하여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달이 된다는 교훈을 분명하게 고백을 합니다. 그 까닭은 성경이 교훈 하는 바에 따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바대로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창 6:5)는 말씀과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 8:21)는 말씀은 사람의 본성의 부패성을 말해주며, 또한 그 부패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어떻게 이렇게 부패한 본성이 보편적으로 전달이 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대답은 “아담은 백 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 5:3)에서 찾아집니다. 아담은 타락한 이후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을 그대로 받은 자신의 후손들을 낳습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 5:1)과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를 받은 아담은 진리와 거룩함과 의로 지음을 받았으나, 아담의 모양 또는 형상대로 출생하는 아담의 후손들은 부패성을 가지게 됨을 암시합니다. 아울러 다윗은 범죄한 이후에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고 참회한 고백은 최초의 범죄로 인한 원죄가 모태에서부터 전가됨을 지지합니다. 신약에서도 바울이 말한 바,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는 말씀은 이러한 죄의 오염의 전달을 교훈합니다. 타락 이후의 아담의 후손들은 흙에 속한 형상, 곧 첫째 아담의 형상을 따라 흙에 속하며 썩어질 자들인 반면에,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은 하늘에 속한 형상, 곧 둘째 아담의 형상을 따라 하늘에 속하며 썩지 않을 자들이 됩니다. 아울러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5,6)의 말씀, 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3)의 말씀도 본성의 부패성을 증거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리켜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발견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무죄한 피 곧 그들의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로 더러워졌도다”(시 106:38)는 말씀이나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1)는 말씀이 그러합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며 그것이 선악 간에 어떤 죄를 분변하기 이전을 말하며 따라서 무죄한 상태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원죄의 유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표현은 성인들의 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그러하다는 말씀일 뿐입니다. 바울 사도가 동일한 어머니에게서 쌍둥이로 출생한 자에게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분을 교훈하는 곳에서 본성의 부패성은 잘 드러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 여기서 쌍둥이가 아직 나지도 않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는 자범죄를 범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선택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택을 받은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모두 죄 중에 잉태된 부패한 자들임을 유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토기장이 비유에 빗대어 이르기를 선택은 선택된 자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말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11:21). 선택되기 이전에 모든 사람은 다 동일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단 진흙 한 덩이일 뿐입니다. 본성이 부패한 진노의 진흙 덩이일 뿐입니다. 신자의 자녀들은 거룩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 7:14).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거룩은 그 자녀들이 내재적으로 본성상 거룩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거룩은 교회와의 연합에 의한 것이며 언약적 의미에서 거룩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죄책이 사하여질 경우 그 죄책이 자녀들에게 전가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죄의 오염은 계속 전달이 됩니다. 할례자라 할지라도 그 자녀들은 할례를 받아야 할 자로 출생을 하는 것이며, 중생한 신자가 비록 새 마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자녀는 옛 마음과 부패성을 가지고 출생합니다. 새 마음은 은혜로 얻는 것이며, 옛 마음은 자연의 출생을 따라 전달이 됩니다. 결국 아담에게 있어서는 아담이라는 사람의 범죄가 인성을 부패시켰으며, 이제 후손들 가운데서는 부패한 인성으로 인하여 후손들도 죄를 범하는 일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오염된 본성이 어떻게 전달이 되는 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신앙고백서가 교훈하는 대로 보통의 출생방식을 통해 흙의 형상을 전달한다는 사실은 바른 신앙으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191 no image <웨신해설 39> 타락의 결과 <제6장 2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3010 2014-03-25
타락의 결과 <제6장 2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6장 2항: “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래 그들에게 주어졌던 의를 잃어버렸으며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끊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 가운데 죽은 자가 되었으며, 영혼과 몸의 모든 기능과 부분들이 완전히 더럽혀졌습니다.” “믿음의 은혜가 없었다면 진노의 심판 벗어날 길 없었을 것” 본 항의 교훈은 우리의 시조들이 범죄한 사실로 인하여 그들에게 미친 타락의 결과를 네 가지 내용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것들을 이해를 위한 논리적 순서에 따라 정리하여 제시한다면 (1) 창조 때에 받았던 원초적 의를 잃어 버렸다는 점이며, (2) 영혼과 몸의 기능과 부분들이 모두 완전히 더럽혀졌다는 점이고, (3) 그 결과 죄 가운데 죽은 자들이 되었으며, (4)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1. 상실된 원초적 의 첫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반영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죄를 범하여도 여전히 남아 있는 영혼의 기능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과는 달리, 죄를 범한 이후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영혼의 특성들을 가리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4장 2항에서 살펴보았듯이, 최초에 창조된 사람의 영혼에 부여된 ‘원초적 의’, 곧 하나님의 교훈에 완전히 순종하는 의지의 올바른 의와, 참된 지식, 그리고 거룩함 등은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 특성들입니다. 본 항은 이러한 원초적 의를 우리 조상들이 처음에 범죄 하여 타락한 이후로 잃어버렸음을 고백합니다. “오직 너희는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2. 완전히 더렵혀진 영과 몸의 기능 둘째, 영혼과 몸의 기능과 부분들이 모두 완전히 더럽혀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는 타락의 결과가 영혼과 몸이라는 인간의 구성 요소에 모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먼저 도덕적 측면에서 영혼은 죄로 오염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의 지성은 영적 진리와 관련하여 어두움에 갇히게 되었으며, 의지는 더 이상 타락하기 이전처럼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고 완악함과 반역으로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 때 순전하고 정결하였던 정서는 이제 어그러지고 뒤틀려져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기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또한 물리적 측면에서 몸은 죄책에 따른 죄의 형벌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선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 온갖 질병의 고통 속에 놓이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육체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타락한 인간은, 복된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을 잃은 채, 자신의 육체가 해체됨을 당하고 자신이 나왔던 흙으로 돌아가는 비참함을 겪게 된 것입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 3:19). 3. 죄 가운데 죽은 자들 셋째, 이러한 죄의 결과는 한 마디로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 뜻하며, 이것을 가리켜 본 항에서는 죄 가운데 죽은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2). 죄 가운데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육체의 죽음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한 이후에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영혼이 육체와 분리가 되는 상태, 곧 현세적이며 일시적인 죽음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었음을 말함과 동시에, 영원한 죽음을 말합니다. 영원한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삶을 마친 이후에 비로소 겪게 되는 죽음을 가리켜 말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이 죽음은 영혼과 몸이 분리된 채 겪는 죽음이 아닙니다. 영원한 죽음은 현세적 죽음에서 부활한 이후에 받는 죽음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최후의 심판을 통해, 부활한 영혼과 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복과 선하심에게서 영원히 떨어져 나가 분리되는 상태가 바로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리고 현세적 죽음과 영원한 죽음 이외에 기억해 두어야 할 또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죽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바로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 의와 진리와 거룩의 복된 원초적 의를 상실하게 되었을 때로부터, 이 세상에서 이미 겪게 되는 상태가 바로 영적 죽음입니다. 현세적이며 일시적 죽음은 영적 죽음에 대한 심판의 현세적인 결과이고, 영원한 죽음은 영적 죽음에 대한 심판의 영원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이러한 세 종류의 죽음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죄 가운데 죽은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4. 하나님과 단절된 교제 넷째,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더 이상 교제를 나누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타락의 결과들 가운데 어떤 것보다도 더 비극적이며 비참한 슬픔이며 고통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타락을 야기한 죄가 성질상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며 거부하는 것인 만큼, 하나님과의 교제를 스스로 거부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끊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과의 심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서 그 영광의 얼굴을 돌리시고 그 빛을 가리십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것은 스스로 헤쳐 나올 수 없는 불행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선이시며 또한 복이십니다. 선이시며 복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끊어지고 도리어 하나님의 저주와 분노를 초래한 자의 비극과 비참함은 이 세상에 속한 어떤 경험으로도 그 불행의 크기를 비교할 수 없으며 또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 비극을 자초하여 당한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서는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를 향해 하신 말씀을 통해서 잘 표현이 됩니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지만 나를 파는 사람에게는 불행이 닥칠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마 26:24).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 또는 상실이 의미하는 바는 좋은 것을 상실한 상태에 대한 아쉬움과 아픔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끊어짐이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1). 마치는 말 이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누가 하나님과의 교제의 회복을 바라며 죄사함의 은총을 구하지 않을까요? 믿음의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도 이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더 쌓아가는 여전히 더 없이 어리석고 불쌍한 자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믿음의 은혜를 주시고 구원하시는 끝 날까지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시다.
190 no image <웨신해설 38> 아담과 하와의 타락 <제6장 1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3812 2014-02-11
아담과 하와의 타락 <제6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6장 1항: “우리의 시조들은 사탄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 죄를 범하였습니다. 이들이 범한 그 죄는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자신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실 목적을 가지시고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따라 기쁘게 허용하신 것입니다.” “피조물은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하는 존재들” 본 항의 교훈은 우리의 시조들이 범죄한 사실과 그것과 관련한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것으로 크게 네 가지 내용들이 관찰이 됩니다. 우선 첫 번째와 관련한 것으로 (1) 우리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에게는 먹도록 허용이 되지 않은 금지된 열매가 있었다는 것이며, (2) 사탄이 이들을 유혹하여 먹도록 하였다는 것이고, (3) 그 결과 이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것이며. 그리고 두 번째 사실과 관련한 것으로 (4)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허용이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 항은 두 문장으로 된 간단한 진술문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의 큰 일들을 시작케 한 이유들과 그 일들의 성질 그리고 장래의 결국을 설명하는 매우 심오한 성경 계시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면 금지된 열매가 있었다는 사실이 주는 교훈부터 차례로 네 가지 내용들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1.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하신 이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다 먹도록 허락을 하시면서도 어찌하여 유독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도록 명령을 하셨을까요?(창 2:17) 이 질문의 답은 우리의 시조들이 임의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에 따라 살아야 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에서 확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잊은 듯이 살아갑니다. 마치 자신이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스스로 행할 권리가 있으며 그것을 금할 어떤 권위도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금지된 열매에 대해 강한 반발을 합니다. 바로 여기서 피조물인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떠한 권위에 따라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의 긴장이 발생합니다. 금지된 열매는 사람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삶을 억압하는 것으로 여기며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반발은 오히려 금지된 열매를 주신 까닭이 바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권위와 관련한 것임을 뚜렷이 드러냅니다. 피조물은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자신의 욕망의 성취에서가 아니라 오직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교훈과 일치하는 맥락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실과를 먹도록 자유와 권한을 주시면서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금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살아야 함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2. 사탄의 유혹에 빠진 하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지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 지는 본 항의 두 번째 내용인 사탄의 유혹의 과정을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사탄은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뱀을 사용하여 하와에게 접근하였습니다. 하와와 대화를 열어가면서 사탄은 하와를 간교한 시험으로 금지된 열매를 따먹도록 유혹을 합니다. 사탄 곧 마귀는 용 또는 뱀(계 20:2)이라 불리며, “온 천하를 꾀는 자”이며(계 12:9), 또한 거짓의 아비이며 처음부터 살인한 자입니다(요 8:44). 이 마귀의 존재가 어떻게 비롯되었으며,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여 진리를 거슬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범죄케 하여 저와 더불어 영원한 불못의 죽음으로 치달아 가는 파멸의 길로 이끄는 자라는 사실입니다(계 20:10). 마귀가 하와에게 다가와 시험한 유혹의 속삭임은 이러하였습니다. 먼저 간교한 의심을 불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이 질문은 순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어떤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며, 그 의도는 결코 선한 것일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셨나?” 하와는 이러한 마귀의 수작에 넘어가 과연 묘한 불만을 드러내게 됩니다. “...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 3:3). 하나님께서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을 뿐인데, 여기에 하와가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다소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하와 자신이 이미 최소한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의 의문의 심리에 노출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바로 불만과 저항의 심리로 이어져 갈 수 있는 징검돌이 놓인 셈입니다. 마귀는 하와에게 금지된 명령과 관련하여 의문의 심리를 불어 넣은 후에, 이제 하나님의 진실성과 선하심을 의심케 함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유혹을 하였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마귀는 하나님께서 거짓을 말하셨다고 말합니다. 하와는 마귀의 말이 진실한 것인지 아니면 먹으면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 것인지를 선택하여야 하였습니다. 이미 의문의 심리에 노출이 된 하와는 마귀의 말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거짓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하셨을까? 마귀는 하나님이 선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으로 은근히 이끌어 갑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3. 하나님께 범죄한 인류 결국 하와는 아담과 더불어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 항이 교훈하는 세 번째 내용입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지의 열매를 명하신 까닭이 결국 자신이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될 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마귀의 말을 믿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니며, 또 그것을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거짓된 위협을 더하신 것이므로, 더 이상 금지 명령 때문에 억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짓에 기초한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마귀의 속임수였으며 간교한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은 정녕 죽음에 이르는 심판을 받게 되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며, 또한 선악을 스스로 분별할 권리를 주장하는 인본주의는 피조물의 본분을 넘어서 방종의 삶을 살아 결국 멸망케 되는 불순종을 낳게 되는 근본적 이유가 되므로 이를 금하신 하나님은 실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마귀의 간교한 시험은 하와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부인하게 하였으며 결국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도록 금지하지 않았다면 시험도 없었을 것이며, 또한 인간이 죄를 범하여 심판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불평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시험을 받는 일도, 심판을 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금지의 열매를 둔 것 자체에 대하여 반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발이며,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반발입니다. 이러한 반발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존재 자체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죄의 증상의 반영일 뿐입니다. 금지의 열매를 따먹는 마음과 의지 그리고 행위는 결국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하여 행할 것과 금할 것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철저한 인본주의적 의지이며 피조물의 본분을 망각할 죄악입니다. 4. 은혜의 경륜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끝으로 본 항은 이러한 우리의 시조의 범죄가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는 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쁘게 허용하신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어떻게 순전하게 창조된 부패한 본성이 없는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주어지는 답은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따른 것이며 또한 거룩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말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하나님께서 강요하여 행하여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불순종을 강요하였다면 불순종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죄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따라 스스로 원하여 불순종을 선택한 것이기에 모든 불순종에 대한 죄의 책임은 자신들에게 돌아갑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관련하여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할 일은 없습니다. 또한 이 일은 하나님의 지혜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순전한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지 못하고 죄 아래에 놓이게 될 줄을 아십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던 본래의 상태는 순전하다 할지라도, 이들의 상태는 유한한 존재의 가변적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전한 원시 상태로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러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은혜를 충만히 부으심으로 이들의 가변성으로 인한 죄의 발생을 막으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의 계획 가운데 이들의 불순종의 사건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의 성질을 드러내시고 죄의 책임에 따른 심판을 선언하시고 사람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과 자비로 사는 것임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인간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가운데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역사가 마침내 이루어질 때, 이 모든 일들은 합력하여 악인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나고, 의인에게는 긍휼의 구원으로 나타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여 선택한 의인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부으셔서 아무도 다시는 죄의 상태로 변화되어 다시 불순종의 죄를 범하지 않는 영광의 상태 가운데 거하게 하십니다(롬 8:30, 계 22:14-15).
189 no image <웨신해설 37 >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섭리 <제5장 7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3623 2014-01-14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섭리 <제5장 7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세상에 복음 전하기 위해 하나님은 역사 속의 여러 사건들 이끄셔” 5장 7항: “하나님의 섭리가 일반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미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아주 특별한 방법을 따라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며,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처리합니다.” 본 항에서 교훈하는 요점은 하나님의 특별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의 존재와 활동을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존하시고 활동케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이러한 일반적인 섭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 활동을 통해서 창조된 만물을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들 전체 그리고 각각의 활동을 통하여 특별하며 특정한 목적을 이루어가십니다. 전자는 일반섭리라 말하며, 후자는 특별섭리라 말합니다. 신앙고백서는 본 항목을 다루기에 앞서 제5장 섭리 1항에서 “만물의 위대한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 행동들 그리고 일들을,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는 것조차, 그의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 그의 무오한 예지 그리고 그 자신의 의지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계획에 따라, 유지하시고, 관리하시고, 배정하시고, 통치하시며,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공의와 선과 긍휼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항에서 고백하는 것은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이 섭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며, 둘째는 크던 작던 모든 피조물과 그것들의 행동과 일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의 대상이라는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께서는 무오한 예지와 자신의 계획에 따라 섭리를 행하신다는 것이며, 넷째는 만물 전체와 각각을 유지, 관리, 배정, 그리고 통치하는 일이 섭리의 활동이라는 것이고, 마지막 다섯째는 이 모든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공의와 선과 긍휼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1항의 고백은 하나님의 일반섭리 뿐만 아니라 특별섭리를 둘 다 교훈합니다. 특별히 본 7항과 관련하여 셋째 고백과 다섯째 고백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고백의 교훈, 곧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무오한 예지와 그의 계획에 따라 실행이 된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단지 우연이거나 방향성이 없는 것이거나 유의미한 목적을 갖지 않는 것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어떤 일이건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는 바에 따른 것이며, 또한 그가 계획한 바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에 의하여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물리적이며 화학적이며 유기적인 자연의 활동이건, 아니면 도덕적이며 인격적인 자유의지에 의한 활동이건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에 따라 일어나도록 하셨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만물의 발생은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일어나게 됩니다. 그 목적은 1항의 다섯째 교훈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공의와 선과 긍휼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이 일어나도록 섭리하시고, 그 일들이 각각 모여서 합력하여 목적을 실현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여기서 바로 7항인 본 항목은 하나님께서 특별섭리의 대상과 목적을 특별히 교회를 향하여 두고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들에게 일반적인 활동의 규칙이나 원리를 부여하시고 그것들이 나름의 규칙이나 원리에 따라 활동하도록 일반적으로 섭리를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이러한 일들이 각각 그리고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을 위하여 일어나도록 특별히 섭리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특별섭리들 가운데 가장 특별히 교회를 위하여 섭리하시는 특별섭리가 있음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섭리에 관한 사실은 바로 역사를 어떤 의미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라는 질문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답을 줍니다. 단지 보편사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역사를 바로 보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교회를 돌보시며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관점, 곧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아야 역사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전체와 각각을 통해 역사를 실행하시는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악을 행한 유다를 심판하기 위하여 더 큰 악을 행하는 사납고 흉포한 갈대안인들을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하박국 선지자가 제기한 의문을 생각해 봅시다(합 1장). 선지자의 질문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특별섭리의 공의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의문에 대해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섭리의 교훈을 통해 해답을 줍니다. 그것은 “...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와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합3:18)는 말씀에서 확인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며 통치하신다는 특별섭리를 믿었습니다. 선지자가 제기한 의문은 특별섭리에 대한 믿음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지자는 교회를 돌보시며 교회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섭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를 찬양하였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살해토록 교사한 범죄를 행한 일은 너무나도 슬프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일깨우며, 제사의 효력이 제물이나 의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있음을 교훈합니다. 이 불행한 다윗의 사건은 교회를 돌보기 위한 특별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으며, 다윗 자신이 그러한 특별섭리로 인한 은총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요셉과 관련한 일들도 교회를 위한 특별섭리의 관점에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한 일들, 요셉이 꿈을 꾼 일들,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노예로 팔린 일들, 바로의 총리가 된 일들을 포함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 일들은 가나안 땅과 애굽에 좋은 기후를 주시다가 나중에는 가뭄의 기후를 겪는 과정을 통해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하나님의 일반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반섭리에 의한 배경은 요셉을 총리로 세워가는 특별섭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셉만을 위한 섭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야곱의 가족들 모두를 구원하는 섭리였으며, 후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 야곱의 열두지파를 이루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성취하는 섭리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를 위한 섭리였으며, 교회를 돌보시며 교회의 유익을 위한 특별한 섭리였습니다. 아울러 원본은 사라졌지만 수많은 사본들을 통해 성경의 내용들과 교훈들을 보전할 수 있도록 하신 일이나,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세상의 여러 사건들을 이끌어 가시는 일들도 모두 교회를 돌보시고 교회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섭리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신자의 개인의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욱 더 알아가며 하나님의 긍휼을 찬송하도록 하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닮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특별섭리입니다. 아직 신자가 아닌 사람이 마침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앞에 나오게 되는 일련의 모든 사건들은 다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내시는 섭리로 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개인의 측면과 관련한 섭리이면서, 교회를 돌보며 교회의 유익을 위한 특별섭리입니다. 이러한 특별섭리의 교훈으로 인하여 모든 신자는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188 no image <웨신해설 36>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제5장 6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3315 2013-12-17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제5장 6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5장 6항: “사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 그들이 범한 이전의 죄로 인하여 그들의 눈을 못 보게 하시며 마음을 강퍅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유보하십니다. 그들에게 그 은혜가 있었다면, 그들의 이해는 밝아졌을 것이며 그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였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때로는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은사를 빼앗기도 하시며, 그들의 부패로 인하여 죄의 기회가 되는 것들에게 노출을 시키십니다. 아울러 그들 자신의 정욕, 세상의 유혹, 그리고 마귀의 권세에 그들을 넘기십니다. 이로써 그들은 스스로 완악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부드럽게 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수단들 아래에서도 스스로 강퍅하게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악인들이 악을 행하고도 뉘우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해당해”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을 행하도록 부추기거나 속이는 분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그를 미혹한다는 생각은 매우 불경건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심의 본질과 속성에 따라서 결코 악을 조장하거나 불법을 행하도록 미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그런데 신앙고백서는 본 항목에서 교훈하기를 “사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재판장으로서 그들이 범한 이전의 죄로 인하여 그들의 눈을 못 보게 하시며 마음을 강퍅하게 하십니다”고 합니다. 이 진술을 유의하여 보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눈을 보지 못하게 하시고 또한 마음을 강퍅케 하시는 분으로 아주 잘못된 풀이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관련하여 이 항목이 고백하는 바는 우선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대상이 사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에게 눈을 못 보게 하시고 마음을 강퍅하도록 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들이 전에 지은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진술은 하나님께서 사악하고 불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도록 하시고 완악한 마음을 갖도록 하시는 것은 이미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심판으로 주신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두 가지 요점들을 교훈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행하시는 것을 빌미로 삼아 마치 하나님께서 불의를 행하시는 것처럼 말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들은, 사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이 악을 사랑하여 죄를 범하였으매, 이들로 하여금 악을 더욱 더 사랑하여 범하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더욱 커다란 형벌을 받도록 하시는 공의의 뜻으로 인해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의 방식과 관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악하고 불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악에 대한 감각이 더욱 더 무디어지고 악을 행하는 일에 더욱 더 담대해지도록 하시는 일은 공의의 심판이기 때문에, 이들이 이러한 일을 더욱 더 행하는 까닭이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이들의 마음에 악한 성정을 주입하거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강퍅하게 되도록 직접적으로 만드셨다는 데에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신앙고백서는 본 항목에서 하나님께서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범한 죄로 인하여 더욱 더 완악하여 지도록 하는 방식에 대해 네 가지를 교훈합니다. 첫째는 악을 사랑하는 그들에게서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할 어떤 은혜도 베풀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4). 둘째는 그들에게 이미 주셨던 어떤 은혜가 있으면 그것을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5)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드러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악을 행하는 자들의 마음이 더욱 더 완악하여져서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또한 보아도 눈을 감은 자와 같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마음을 부드럽게 할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 것이라는 심판을 드러내는 교훈입니다. 셋째는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부패한 성품에 따라 죄를 범할 수 있는 기회에 처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2:30). 시혼은 자신의 부패한 성품에 따라서, 이스라엘이 시혼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을 약속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통과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성품에 따라 그들로 하여금 죄를 범할 기회에 드러나도록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는 그들을 그들 자신들의 정욕과 세상의 유혹과 마귀의 권세에 넘기시는 것입니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10-12). 불경건하며 사악한 자들에게 행하여지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마지막 날에 최후의 심판을 통해 주시는 영원한 형벌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주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악인들로 하여금 더욱 더 악을 행하도록 허용하시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관찰은 악의 존재와 활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선하심이 부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의 활동의 증가는 그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해 내리시는 공의의 심판으로 인한 결과입니다. 이 세상의 악의 존재와 활동을 들어 하나님을 부인하려는 어떠한 논증도 성립이 되지를 못하며, 오히려 그러한 시도 자체가 또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드러내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세상에 있는 선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악한 일도 또한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187 no image <웨신해설 35-②>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와 하나님의 자녀의 타락 <제5장 5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3017 2013-11-19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와 하나님의 자녀의 타락 <제5장 5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5장 5항: “가장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 자신의 자녀들을 다양한 유혹들과 그들의 부패한 심령에 잠시 동안 내버려 두십니다. 이것은 그들이 범한 이전의 죄로 인하여 이들에게 벌을 주기 위함이며, 또는 그들의 부패성의 숨어있는 강력함과 심령의 거짓됨을 그들에게 드러내 주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겸비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더욱 가까이 그리고 끊임없이 도움을 바라며 하나님께 의지하도록 양육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들로 하여금 장차 죄를 범할 수 있는 모든 계기들에 대해 더욱 경계하고, 여러 가지 다른 의롭고도 거룩한 목적들에 대해 더욱 유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징계는 새로운 사람으로 돌이켜 거룩한 구원의 목적에 합당한 자로 서게 해” <지난 호에 이어> 네 번째 목적과 관련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의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 51:12-13). 자신의 심령이 얼마나 부패한 자이며 거짓된 자인가를 깊이 깨달은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용서를 간구하고 이를 체험하여 아는 자로서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며 의의 길로 나갈 것을 결심하는 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 때 다윗은 인구조사를 통해 자신이 행한 업적을 드러내며 군사의 규모를 파악하여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일은 다윗이 사단의 충동을 받아 행한 것이며(대상 21:1) 또한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일이었습니다(삼하 24:1).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처럼 사단의 유혹에 빠져 부패한 심령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일을 행하도록 내버려 두신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된 본성을 깨달아 하나님의 긍휼을 더욱 더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며 또한 그로 하여금 더욱 더 거룩한 자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깨달아 이르기를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삼하 24:10)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범한 죄악에 대해 벌을 받아야 했던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며 삼일 동안 온역이 임하는 벌을 택하였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삼하 24:14-16). 자신에게 제시된 형벌들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에 더욱 더 호소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미칠 형벌을 선택한 다윗은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참아 내지 못하고 그 형벌을 자신에게 주실 것을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참된 회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아뢰되 명령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 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하니라”(대상 21:17). 다윗은 더 이상 자신의 의를 노래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과시하기 위하여 인구조사를 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가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이며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 51:14-15). 하나님의 의를 노래하는 다윗은 이제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피흘린 죄를 그 노래 속에 담습니다. 인구조사라는 죄악의 행실을 통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다윗은 이제 솔로몬에게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의 행실을 갖출 것을 당부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네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 그 때에 네가 만일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든 규례와 법도를 삼가 행하면 형통하리니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지어다”(대상 22:12-1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주기로 그가 택하신 자녀라 할지라도 죄의 욕망에 따라 행하는 일이 있도록 내버려두시지만, 반드시 징계를 행하여 그로 하여금 신앙고백서가 교훈하는 바대로 새로운 사람으로 돌이켜 거룩한 구원의 목적에 합당한 자로 서게끔 하십니다. 히스기야 왕에게도 그러하셨고(대하 32장), 베드로에게도 그러하셨습니다(마 26장; 막 14장; 요 18장; 요 21). 하나님의 자녀의 타락과 실족 그리고 이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더 없이 지혜로우시며, 의로우시고, 또한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모든 성도 각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허물과 죄악을 범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낙심과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는 어리석은 일이 없어야 할 것을 교훈합니다. 허물을 범하는 일은 있는 법이며 또한 징계도 있는 법입니다(히 12:8). 따라서 잠시 동안 영혼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며 깊은 수렁에 빠질 때가 있더라도,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과 은혜의 섭리를 믿고 더욱 더 하나님께 엎드려 나가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86 no image <웨신해설35 -①>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와 하나님의 자녀의 타락 <제5장 5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3043 2013-11-05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와 하나님의 자녀의 타락 <제5장 5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5장 5항: “가장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 자신의 자녀들을 다양한 유혹들과 그들의 부패한 심령에 잠시 동안 내버려 두십니다. 이것은 그들이 범한 이전의 죄로 인하여 이들에게 벌을 주기 위함이며, 또는 그들의 부패성의 숨어있는 강력함과 심령의 거짓됨을 그들에게 드러내 주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겸비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더욱 가까이 그리고 끊임없이 도움을 바라며 하나님께 의지하도록 양육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들로 하여금 장차 죄를 범할 수 있는 모든 계기들에 대해 더욱 경계하고, 여러 가지 다른 의롭고도 거룩한 목적들에 대해 더욱 유의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로 택한 사람들일지라도 허물과 죄를 범할 수 있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들을 그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게 하시며 또한 다스리십니다. 그의 모든 섭리는 앞에서 살핀 4항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전능하신 능력과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한 선하심에 따라 실행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섭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어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신자들 가운데 죄를 범하는 타락의 사건들이 나타나도록 하시는 것일까요? 신앙고백서 5항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신앙의 교훈에서 떠나 유혹에 빠지고 부패한 심령에 이끌려 죄를 범하는 일이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러한 상황에 잠시 동안 내버려 두시는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타락하는 일을 겪도록 잠시 동안 내버려 두시는 데에는 네 가지 목적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해 벌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며, 둘은 그들의 심령이 심히 부패해 있으며 거짓되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기 위함이며, 셋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연약함을 진실히 깨달아 하나님의 도움을 더욱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넷은 그리하여 앞으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더욱 유의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이루어 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상의 네 가지 목적들은 단지 개념상의 해석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살피면 이러한 목적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은 삶 가운데 나타나고 또한 고백되고 있습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자녀로 선택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허물과 죄를 범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모든 선택한 사람들 각각이 옛 사람의 성품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새 사람의 성품에 따라 이것과 영적 싸움을 하여야 하는 부름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확인이 됩니다. 모든 신자 각각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회개의 삶을 통해(엡 4:22-24) 그의 신앙을 증거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록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받은 참된 중생자라 할지라도 그는 다양한 유혹들에 넘어지고 그들의 부패한 심령에 끌려가는 일을 범하게 됩니다. 이를 테면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다윗의 간음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고 말씀하셨던 다윗이지만 그도 정욕에 무너진 때가 있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전쟁으로 온 힘을 쏟을 그 때에 다윗은 왕궁에 남아 있으면서 충성된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보고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간음의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간음의 결과로 아이가 잉태케 되자 이를 감추기 위하여 우리아를 불러 아내와 동침케 하려 하였으나, 전쟁 중에 아내와의 편안한 쉼을 거부한 우리아의 충성심으로 말미암아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다윗은 우리아를 전투 중에 죽도록 꾀를 펴 악행에 악행을 더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삼하 11장). 이 모든 소행을 하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하 11:27)고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커다란 죄악을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다윗이 범하고 만 이 사건은 다윗에게 실로 커다란 영적 각성을 주는 교훈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당장에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삼하 12:14)는 예언에 따라 아이가 죽었으며, 후에는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 12:11)의 예언 또한 압살롬의 반역으로(삼하 16:22) 실행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는 모든 일은 신앙고백서가 고백하고 있는 대로 네 가지 목적들이 하나씩 차례로 다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과연 다윗은 첫 번째 목적인 책망과 벌을 받았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뿌리 깊이 부패한 자인가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에게 책망과 벌을 받으면서 두 번째 목적인 자신의 죄성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이러한 상태를 잘 드러냅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3-5) 다윗은 자신이 본성 상 부패한 자일뿐만이 아니라 전적으로 완전히 부패한 자임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에 이어 오직 자신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심을 말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호소하여 용서를 구하므로써, 세 번째 목적의 성취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0-11, 17). <다음호 계속>
185 no image <웨신해설 34-②>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문제 <제5장 4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3530 2013-10-08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문제 <제5장 4항>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5장 4항: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측량할 수 없는 지혜, 그리고 무한한 선하심이 그의 섭리 가운데 지극히 명백하게 드러나니, 심지어 첫 번째 타락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다른 모든 죄에 이르기까지 미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허용에 의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라, 허용과 더불어 그 일들을 자신의 거룩한 목적에 따라 강력하게 제한을 하거나 아니면 명령하시고 주관하심으로써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의 죄악성은 오직 피조물에게서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며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죄의 장본인이 아니시며 승인자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문제’와 관련하여, 선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는 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데에는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악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책임을 없음을 논증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설령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일에 주권적인 책임을 피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논증하는 것입니다. 지난 호에서 이 가운데 전자와 관련하여 비교적 최근에 제시된 논증인 소위 ‘자유의지 방어론’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번 호에는 이어서 전자와 관련하여 고전적인 논증을 소개하고, 이어서 앞서 말한 후자의 접근 방식, 곧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신 것이라는 논증에 대해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 전능하시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악이 존재하도록 하신다하더라도 그 악에 대한 책임이 없는 까닭을 설명하는 고전적인 방식은 악의 일과 관련하여 일 자체와 일의 성질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첫째, 사람이 악을 행할 때에 그러한 일 자체가 가능하도록 사람에게 행할 동력을 주시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임을 인정합니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 없이 스스로 어떤 일을 행할 동력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존재하도록 하시므로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활동하도록 하시므로 활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일의 성질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규명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악을 행할 때 그가 그 일을 행하는 일의 힘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행한 일이 악한 성질을 갖는 것에 대한 책임은 그 일을 행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그 일을 행한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시며 또 그 사람에게 그 일을 행할 힘을 주신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을 철학적 개념을 빌어 ‘질료’와 ‘형상’으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첫째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 그 일이 악한 것이라 할지라도 -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 그 능력을 가리켜 ‘질료’로 이해를 합니다. 둘째와 관련하여, 그 사람이 행한 활동이 악한 성질을 가질 때, 그 성질을 ‘형상’으로 봅니다. 여기서 불법 또는 죄라는 형상과 관련하여, 하나님께는 어떤 물리적 책임(causa physica)도 없으시며, 또한 윤리적 책임(causa ethica)도 없으십니다. 물리적 책임이 없으신 까닭은 악을 행한 사람이 행한 활동에 어떤 불법성을 불어넣으시거나 주입하시거나 또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러한 활동을 하도록 그 사람에게 불법성의 성질을 불어 넣으시거나 주입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윤리적 책임이 없으신 까닭은 하나님께서 불법을 활동을 행하라고 명령을 하시거나 인정을 하시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것을 하지 않도록 명하시고 벌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치가 이러하므로 어떤 사람이 악한 활동을 행하였을 때에 그 불법성에 대한 책임은 결코 하나님에게 물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불법성에 대한 책임은 그 활동을 한 그 사람에게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악의 허용에 대한 논증 하나님은 시편에서 찬양을 올린 것처럼 “죄악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며”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며”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 5:4-6). 하나님은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시며(합 1:13), 심지어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약 1:13). 누구도 하나님에게 시험을 받아 악을 행하였다고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신앙고백서는 “그 일들의 죄악성은 오직 피조물에게서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며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죄의 장본인이 아니시며 승인자도 아니십니다”라고 고백하도록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성의 책임이 물리적 힘이나 영향의 원인으로나 윤리적 원인으로나 결코 하나님에게 돌려질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지를 않으시고 허용을 하셨다는 것은(참조, 시 81:12; 행 14:16) 사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대한 죄의 책임을 물을 여지가 여전히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본 항목을 해설하면서 처음에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문제’와 관련한 두 가지 접근 방식 가운데 두 번째 문제, 곧 설령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일에 주권적인 책임을 피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논증하는 것과 관련한 답을 풀어가는 것이 됩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섭리가 타락한 천사를 포함하여 사람들의 모든 죄에 이르기까지 미친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단순한 허용에 의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라, 허용과 더불어 그 일들을 자신의 거룩한 목적에 따라 강력하게 제한을 하거나 아니면 명령하시고 주관하심으로써 그렇게 됩니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 말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말이 ‘악의 허용’(permissio mali)이라는 표현으로 의도하지 않는 바를 정확하게 인식하여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말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악을 허용하신다는 말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윤리와 도덕에 합당한 기준와 법을 제정하시는 입법자이시며 또한 이를 바르게 준수하였는가에 따라 심판하시는 재판관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허용하실 때 공의에 합당한 것을 허용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말을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해석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악과 관련하여 아무런 간여를 하지 않은 채 단지 물러나 수수방관을 하신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신 채, 그것이 어떻게 되는 가를 지켜보시는 관망자로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단순한 허용에 의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진술하여 교훈을 합니다. 3. 악의 허용에 대한 이해 그렇다면 ‘악의 허용’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무엇일까요? 첫째, 그것은 만물을 존재하게 하시고 그것들을 자신의 뜻에 따라 다스리시는 분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할 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힘을 행사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만물을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곧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주재로서 악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다시 윤리적으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죄를 막기를 원하지 않으셨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기뻐하시거나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을 하나님께서 단지 죄를 막기를 원하지 않으셔서 그 일이 일어나는 데에 아무런 조치를 행하지 않으셨다는 말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일도 하나님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악을 허용하셨다는 말에는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할 때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않으시기로 정하셨으며 그리하여 막을 수 있는 힘을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버리심(desertio)이라는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의미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악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셨거나 그러한 은혜를 거두셨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악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않으시기로 하신 것일까요? 선하신 하나님이 윤리적으로 악하여 악을 허용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 능력이 있어 얼마든지 악을 막으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악을 막으실 힘이 없으셔서 악을 허용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결국 이 의문은 악의 허용의 문제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나 선하심과 관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관련한 것임을 깨달을 때에 올바르게 풀어집니다. 둘째, 악의 허용과 관련하여 알아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실 때 목적하시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며, 그 과정도 다스리신다는 점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이와 관련하여 “허용과 더불어 그 일들을 자신의 거룩한 목적에 따라 강력하게 제한을 하거나 아니면 명령하시고 주관하십니다”고 고백을 합니다. 예를 들어, 요셉은 그를 노예로 팔아넘긴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라고 말하였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더 큰 선을 위하여 요셉을 형제들에 의하여 노예로 팔리게 하셨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 더 큰 선이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워 극심한 기근 가운데 야곱의 가족들을 보호하시고, 이들을 애굽으로 오게 하여 번성하게 하시어 훗날 출애굽의 대 역사를 이루심으로, 구속사의 증거와 예표를 남기시려는 것과 관련이 됩니다. 악을 행한 이들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지와 능력을 초월하여 사람들이 행한 악을 도리어 선으로 바꾸시는 지혜가 ‘악의 허용’ 가운데 담긴 깊고도 궁극적이며 비밀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미련한 사람의 눈에는 오직 지나고 나서야 어렴풋이 알게 되는 후험적인(a posteriori) 관점이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는 미리 작정이 된 선험적인(a priori)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궁극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악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과정에도 제한을 하시거나 명령하시거나 주관을 하십니다. 예를 들어, 요셉의 형제들이 처음에는 요셉을 죽이기로 꾀하였으나 르우벤과 유다에 의하여 죽임을 면하게 되는 일이 바로 이 사실을 설명합니다. 마치는 말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교훈에 순종하는 데에 가장 커다란 난관을 주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단지 섭리에 관한 의문을 넘어, 하나님께서 과연 전능하시며 선하신 분이심을 부정하는 무신론 논증이 대두되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악한 일의 죄악성은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사람에게 책임이 있음을 말하며, 따라서 하나님은 죄의 장본인이거나 승인자가 아니심을 확고하게 교훈합니다. 이에 따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측량할 길이 없는 지혜, 그리고 무한한 선하심을 바르게 고백하며 찬양하는 올바른 하나님의 섭리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84 no image <웨신해설 34-①>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문제 <제5장 4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4391 2013-09-24
하나님의 섭리와 악의 문제 <제5장 4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5장 4항: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측량할 수 없는 지혜, 그리고 무한한 선하심이 그의 섭리 가운데 지극히 명백하게 드러나니, 심지어 첫 번째 타락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다른 모든 죄에 이르기까지 미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허용에 의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라, 허용과 더불어 그 일들을 자신의 거룩한 목적에 따라 강력하게 제한을 하거나 아니면 명령하시고 주관하심으로써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의 죄악성은 오직 피조물에게서 비롯된 것이지 하나님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며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죄의 장본인이 아니시며 승인자도 아니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것은 선한 상태로 있기를 스스로 더 이상 원치 않았기 때문, 즉 자원하여 선을 버리고 악을 선택한 것” “하나님께 죄의 책임을 돌리려는 어떤 시도도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여야” 4항은 하나님의 섭리에 있어서 그의 주권과 사람들의 죄악과의 관계에 대해서 교훈을 합니다. 본 항에서 말씀하고 있는 진리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심지어 타락과 같은 행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측량할 길 없는 지혜와 무한한 선하심으로 실행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둘은 사람들이 죄들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들을 섭리 가운데 실행하시는 방식은 단순히 그것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결정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셋은 죄악의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의 결정에 따라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일의 죄악성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에게서만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1. 반신론적 삼단논법의 허구 신앙고백서의 본 항의 고백은 소위 무신론자들의 반신론적 논증을 위한 전가의 보도라고 일컬어지는 삼단논법을 전적으로 부인합니다. 반신론적 삼단논법은 이러합니다: (대전제)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또한 선하시다. (소전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한다. (결론) 그러므로 전능하시며 선하신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 논리가 말하는 바는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이상, 그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악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전능하시며 선하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이 논법을 반박하려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거나, 전능하시며 선하신 하나님이라도 세상에 악이 존재하도록 하실 수가 있다는 것을 논증하여야 합니다. 전자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할 도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후자와 관련하여서는 두 가지 접근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악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책임은 없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방식입니다. 악이 존재하되 그 악이 나타난 일에 있어서 책임의 장본인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 악의 존재를 이유로 삼아 전능하시며 선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논리는 성립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일에 주권적 책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논증입니다. 이 논증에 의하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에 대한 부정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로움의 문제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악의 존재가 결코 전능하시며 선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지를 못합니다. 2. 자유의지 방어론 문제는 어떻게 이 두 가지 논증들을 세울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대로 결정하여 실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죄악의 일들이 나타나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제받으실 수가 있는지를 어떻게 논증할 수가 있을까요? 첫 번째 접근과 관련하여 제시된 두 가지 논증을 소개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는 비교적 최근의 논리로, 소위 ‘자유의지 방어론’입니다. 이것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자유의지를 지닌 사람은 선과 악의 중립적인 상태에서 어느 것이든지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를 합니다. 소위 비결정적 자유선택의 능력이 사람에게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가정을 전제합니다. 곧 사람에게 비결정적인 자유선택의 능력이 부여된 세상이 그렇지 않은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이라는 전제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드실 수가 있으시며, 또한 선하시기 때문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비결정적인 자유선택의 능력을 부여하시는 세상을 만드신 것이 됩니다. 이러한 논증이 악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책임을 어떻게 면제하는 것일까요? 이미 짐작을 하셨겠지만, 비결정적 자유선택의 능력에 답이 있습니다. 비결정적인 자유선택의 능력을 지닌 사람은 어떤 일이든지 선택을 할 수 있는 완전한 중립의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비결정적인 자유선택을 침해받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향하여 그로 하여금 어떤 일을 행하도록 작정하신다면, 그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에 대하여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중립적인 상태에서 결정할 수 없도록 만들게 되며,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자유선택의 비결정성을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일단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사람에게 비결정적인 자유선택의 능력을 주신 이상, 사람이 선을 선택하든지 악을 선택하든지 전적으로 사람의 자유선택에 맡기시는 것이며, 그 선택의 책임에서 자유롭다는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3. 자유의지 방어론의 약점 이러한 ‘자유의지 방어론’의 약점은 사람에게 부여된 자유선택의 능력이 정말로 비결정적인 자유선택이냐는 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전제는 아직 확증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의 생각에는 사람의 자유선택은 비결정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이들은 사람의 자유선택이란 자원의 자유라고 주장을 합니다. 즉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할 때 그것이 외적인 강압이 없이 단지 스스로 하기를 바라는 것을 행할 수 있다면 사람은 자유롭게 그것을 행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원의 자유선택에 따르면, 사람은 타락한 이후에 항상 영적인 악을 범하는 필연성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악의 선택은 본성이 부패하여 스스로 원하여 행한 것이므로 자유롭게 죄를 지은 것으로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중생한 이후에는 성령님께서 새로 지으신 성품에 따라서 죄를 짓지 않고자 하는 자원의 의지로 선을 선택하는 자유를 갖게 됩니다. 물론 아직은 불완전하여 남아 있는 부패한 성정에 의해 죄를 자원하여 짓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의 복락을 누릴 때 사람은 새로운 거룩한 성품에 따라서 자원하여 늘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하는 자유선택을 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원의 자유선택의 개념에 따르면 하나님의 작정은 사람의 자유와 상호 양립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일을 행하도록 작정을 하셨을지라도 사람이 스스로 원하여 그 일을 행한다면 그는 여전히 자유롭게 그 일을 행한 것이며, 하나님의 작정이 그의 자유선택을 침해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유선택의 두 개념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타당성을 갖을까요? 개혁파는 자원의 자유 개념이 옳다고 믿으며, 알미니안파를 포함하여 세미-펠라기우스주의를 따르는 모든 이들은 비결정적 자유선택 개념을 주장합니다. 개혁파가 비결정적 자유선택을 부인하는 중요한 까닭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창조의 순전함 때문입니다. 만일 비결정성의 자유선택의 개념이 옳다면, 하나님께서 또한 자유로우실진대 하나님께서도 선과 악을 똑같이 선택할 수 있는 중립의 상태에 계시다고 말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으로 항상 선의 상태로 계십니다. 또한 창조 때에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의 중립의 상태로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과 악을 범할 영향력을 똑같이 받는 가운데 선이나 악을 선택할 중립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한 상태로 지음을 받았으며, 그 선한 상태로 있기를 원하면 계속 순전하며 무흠한 선의 상태로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타락한 것은 선한 상태로 있기를 스스로 더 이상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원하여 선을 버리고 악을 선택한 것입니다. 4. 자유 선택 개념의 문제 이상의 설명을 토대로 볼 때, ‘자유의지 방어론’은 두 가지 문제를 여전히 남깁니다. 우선 자유의지 방어론이 전제하는 자유선택의 개념이 과연 정당한가의 문제입니다. 만일 자유선택의 개념이 비결정적 자유가 아니라 자원의 자유라면, 사람이 자원하여 악을 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악을 범하는 행위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이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하나님께 죄의 책임을 돌리는 일이 여전히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살피는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의문과 관련하여 하나님께 죄의 책임을 돌리려는 어떤 시도도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여야 함을 교훈합니다. 다른 하나는 가령 비결정적 자유선택의 개념이 옳다고 하더라도, 자유의지 방어론이 하나님을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게 한 목적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악이 존재하는 세상을 만드신 것은 사람에게 비결정적 자유선택을 주시기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악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사람을 만드는 것이 더 나은 세상인가의 문제가 남습니다. 그리고 설령 사람의 자유는 악의 존재보다 더 귀한 것이며 악이 존재하며 사람이 자유로운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이 자유선택에 의하여 악을 선택하는 세상 자체를 만드신 하나님에게 왜 그런 세상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은 여전히 남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있게 됩니다. (다음 호에 계속)
183 no image <웨신해설 33> 통상섭리와 비상섭리<제5장 3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3391 2013-08-27
통상섭리와 비상섭리 <제5장 3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5장 3항: “하나님께서는 통상적인 섭리로 방편들을 사용하시지만, 그러나 기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방편들 없이, 방편들을 초월하여, 그리고 방편들에 역행하여 역사하신다.” “세상의 성공과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기적은 없어” 5장 3항은 하나님께서 섭리를 실행하시는 방식과 관련하여 통상적인 방편이외에도 비상적인 방편, 곧 기적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앞서 2항에서 보았듯이 제1원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제2원인들의 성질에 따라 자유롭게, 또는 필연적으로, 또는 우연적으로 섭리를 실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반드시 항상 제2원인들을 통하여, 그것의 작용 안에서만 실행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통상적인 제2원인들의 작용이 없이, 그것들의 통상적인 작용의 과정에서 벗어난 방식을 따라 섭리를 실행하시기도 하십니다. 이러한 비상섭리 활동을 가리켜 기적이라고 합니다. 신앙고백서는 비상섭리의 세 가지 유형들을 고백합니다. 하나는 통상적인 방편이 없이 행하시는 비상섭리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하셨을 때, 그 말씀은 떡이라는 방편이 없이도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를 교훈합니다. 과연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나(출 34:28)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었으며, 엘리야도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를 수가 있었습니다(왕상 19:8).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은 오병이어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며, 죽은 나사로의 이름을 불러 오직 말씀만으로만 그를 살리신 것은 아무런 도구를 사용하지 않은 비상섭리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통상적인 방편을 초월하여 행하시는 비상섭리입니다. 이를 테면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었고 그의 아내 사라의 태가 죽은 것과 같이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약속을 능히 지키시어 그에게 아들을 주실 줄을 견고하게 믿고 확신한 것(롬 4:19-21)은 통상적인 방편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하나님의 비상섭리를 믿은 것입니다. 사라의 태가 이미 늙어 기능을 못할 것이나 그러한 한계를 초월하여 이삭을 수태하도록 한 일은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그 위에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신 일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통상적인 방편을 역행하여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비상섭리입니다. 예를 들면 엘리사가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쇠도끼를 빠뜨려 당황하며 낙심하자,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 쇠도끼를 떠오르게 한 일(왕하 6:6)이 바로 그것입니다. 쇠도끼는 물에 가라앉는 것이 통상적인 자연법칙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법칙을 거슬려 비상섭리를 행하여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또 느부갓네살의 풀무불에서 머리털도 그을리지 않은 채 온전히 살아 나온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단 3:27)는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역행하는 이적의 비상섭리를 베푸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비상섭리들은 한결같이 임의로 실행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적들은 모두가 표적이었으니 단순히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이 권능과 구원의 은혜를 계시하고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기 위한 목적이 있는 하나님의 섭리이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어떤 마술적인 능력의 과시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비상섭리를 실행하신 일은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바라며, 부귀와 장수를 욕망하는 양태는 성경이 교훈하는 하나님의 비상섭리를 믿는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상섭리는 타락한 죄인과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에 따라 실행이 되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화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세상을 새롭게 하실 날을 바라는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비상섭리를 믿는 올바른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182 no image <웨신해설 32> 섭리 : 제1원인과 제2원인 <제5장 2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4521 2013-07-09
섭리: 제1원인과 제2원인 <제5장 2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5장 2항: “모든 일들은, 제1원인, 곧 하나님의 예지와 작정과 관련하여 볼 때, 불변하게 그리고 틀림없이 확실하게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섭리에 의해, 제2원인들의 성질에 따라서, 모든 일들이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또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도록 명하십니다.” “기독교의 섭리론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유로이 작정하신 것 보여줘” 2항에서 교훈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제1원인인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어떤 변화나 어긋남이 없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일어난다는 필연성과 관련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들은, 또한 제2원인들에 따라 어떤 일들은 그것들의 성질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또는 우발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제1원인인 작정과 관련하여서는 불변하게 필연적으로 실행이 됩니다. 그러나 제2원인들의 성질과 관련하여서는, 제1원인의 필연성으로 인하여 어떤 제한도 받지 않은 채 실행이 됩니다. 곧 우발적인 일들이나 자유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일어나는 일들이나, 또는 물리적이거나 화학적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들과 같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절대로 어긋나거나 변화가 없이 반드시 실행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들은 또한 그것들의 성질에 따라 우발적으로, 자유롭게, 혹은 필연적으로 일어납니다. 곧 하나님의 작정은 그것의 실행을 섭리할 때 실행의 수단을 배제하지 않으며 제2원인들에 대해 중립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작정된 일들은 제2원인들의 방식에 따라 그것들의 성질에 의해 다양한 모양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작정의 실행에 대한 신앙고백의 설명이 주는 신앙의 실천적인 유익은 무엇일까요? 첫째,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작정이 실행이 됨을 보고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태도를 갖는 믿음을 교훈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내가 그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출 21:12-13; 참고 신 19:5)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과실치사로 인하여 사람을 죽이게 된 경우, 그것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 있는 줄을 알고 과실치사를 범한 자의 생명을 보호하는 명령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전쟁터에서 적군의 화살을 맞아 죽게 된 일과 같은 우발적인 일도 성경은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선지자 미가야를 통해 예언하신 바가 이루어진 일임을 명확히 합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왕상 22:34-35). 치열한 전투 상황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게 되는 일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지만 그러한 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임을 믿을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교훈을 합니다. 둘째, 비록 사람이 스스로 뜻을 세워 작정을 하고 행한 일이라도 그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임을 믿도록 교훈합니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사 10:5-7).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일으켜 북왕국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그 때 앗수르는 스스로 작정하고 준비하며 침략하여 북왕국을 파괴하였지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하나님의 막대기이며 몽둥이였습니다. 실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며”(잠 16:9), 또한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생각과 자유로운 의지를 거슬리지 않으면서 실행되어집니다. 셋째, 이처럼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자신이 나름대로 자유롭게 결정하는 일들의 역할이나 책임들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음을 교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강제로 억압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사울이 마침 자신이 부하들과 함께 숨어 있는 동굴로 들어와 뒤를 보게 되어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었으나 그를 살려준 일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동굴 밖으로 나가자 자신도 따라 나가서 사울에게 어찌하여 자신의 생명을 빼앗으려 하는지를 묻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라 사울에게 호소를 하였습니다. 이 때 사울이 이렇게 답을 합니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삼상 24:18-19). 사울은 자신이 하필이면 다윗이 숨어있던 동굴로 들어가게 된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임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한 자신을 살려둔 다윗이 다윗을 죽이고자 한 자신보다 의로운 자임을 인정을 하고 하나님께서 선으로 갚아주실 것을 기원하였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어졌으나, 하나님의 기름을 부음을 받은 자를 죽이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라 말하며 그를 살려둔 다윗은 스스로 행하는 자유로운 결정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이러한 신앙고백 제2항의 교훈은 하나님의 섭리를 소위 말하는 ‘운명론’과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임을 가르칩니다.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의 일은 우발적인 것이 없으며 심지어 사람이 자유롭게 결정하는 일도 없으며, 모든 일들이 자연법칙과도 같이 결정이 되어 있다는 식의 운명론을 주장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의 일들이 마치 하늘의 별자리의 변화나 기운들에 의하여 결정이 된다는 식의 운명론을 말합니다. 신앙고백은 이러한 운명론들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관련하여 이 세상의 일들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세상의 일이 제2원인들의 성질에 우발적이거나 자유로이 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별자리들의 변화나 하늘의 어떤 기운이 이 세상에서 나타나는 일들을 결정한다는 것은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작정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매우 어리석으며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독교의 섭리론과 매우 유사하지만 잘못된 운명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이 아데네에서 설교할 때 만났던 스토아학파의 주장입니다. 이들의 견해들 가운데 일반적인 해석을 따르면 하나님조차도 어쩔 수가 없는 인과적인 굴레가 하나님 밖에서 결정론적인 운명의 힘으로 지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섭리론은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필연적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유로이 작정을 하셨기 때문임을 말할 뿐이지, 스토아학파가 말하듯이 하나님조차도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지배되는 절대적 필연성을 말하는 결정론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에 따라서 작정이 된 바가 제 2원인들의 성질들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실행이 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운명론’이라 일컫는 것은 칼빈이 말한 바처럼 여러 가지 잘못된 오해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금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기독교강요 1.16.8). 무엇보다도 ‘운명’이라는 단어가 성경에는 사용이 되고 있지 않음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181 no image <웨신해설 31-②> 섭리의 대상과 방식과 목적 <제5장 1항>_김병훈 교수
편집부
3886 2013-06-11
섭리의 대상과 방식과 목적 <제5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5장 1항 : “만물의 위대한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 행동들 그리고 일들을,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는 것조차, 그의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 그의 무오한 예지 그리고 그 자신의 의지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계획에 따라, 유지하시고, 관리하시고, 배정하시고, 통치하시며,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공의와 선과 긍휼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십니다.” “섭리의 통치 활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토록 하는 것” 신앙고백에서 살피는 세 번째 교훈은 섭리의 방식과 관련한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그의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 그의 무오한 예지 그리고 그 자신의 의지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계획에 따라” 실행이 됨을 고백합니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들을 보존하시고, 그 만물들을 통해 이루실 목적과 그것들이 이르게 될 결말에 대하여 영원 전에 작정하신 그대로 시간 안에서 펼쳐 가시는 통치를 가리켜 말합니다. 만물을 목적대로 이끌어 가시는 작정을 가리켜 선행적 섭리, 그리고 그것을 시간 안에서 실행하시는 통치를 가리켜 집행의 섭리라고 구별을 하여 말하기도 합니다. 전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내재적 활동인 반면에, 후자는 하나님 밖에서 실행이 되는 활동입니다. 흔히들 섭리라고 말할 때는 대체로 후자의 경우를 가리킵니다.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내재적 활동으로서의 선행적 섭리가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하며, 또한 무오하며 그리고 자유롭고 불변하는 하나님의 의지에 따른 것임을 고백합니다. 따라서 실행적 섭리도 동일한 성질을 갖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현실 가운데 악이 존재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비참함이 나타난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악하시거나 오류를 범한 까닭으로 이해하면 옳지 않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하나님의 선행적 섭리는 거룩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하여 행한 것이며, 그것에는 어떠한 오류도 있을 수가 없으므로 나중에 다시 변하는 것과 같은 일은 없습니다. 비록 현실 가운데 고통과 악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거룩하며 자비롭고 선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섭리의 성질을 조금이라도 확신이 있게 깨닫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섭리가 지극히 지혜롭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섭리는 “왜? 무슨 까닭으로? 무슨 목적 때문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함으로 그 빛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가 있게 되는 법입니다. 신앙고백의 본 항이 담고 있는 네 번째 교훈은 섭리의 활동과 관련한 것입니다. 신앙고백은 제시하는 활동은 네 가지입니다. 곧 유지, 관리, 배정, 그리고 통치하심을 뜻합니다. 창조와 섭리는 본래 하나님의 동일한 능력에 의한 단일한 행위이시지만, 제2원인들의 작용과 관련하여 서로 구별이 됩니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2원인으로서의 만물의 작용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섭리는 만물의 작용원리인 제2원인들을 통하여 그것들을 보존하고 정하신 목적대로 이끌어 가시며 통치하십니다. 따라서 섭리란 창조된 만물이 유지되도록 보존하고, 그것이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관리하며, 만물 각각의 활동과 일들을 목적에 적합하도록 배정하고, 그것이 실제로 실현이 되도록 통치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제1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섭리의 능력과 제2원인으로서의 자연법칙이나 이성적 자유의지 등과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잘못을 범하게 되므로 유의를 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제1원인만을 섭리의 근거로 삼고 제2원인의 작용관계를 무시하면 만물이 곧 신의 자기현현이라는 범신론의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또 반대로 제1원인을 거부하며 제2원인의 작용관계만을 세상의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제한을 하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신론의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신앙고백이 본 항에서 교훈하는 바는 모든 섭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공의와 선과 긍휼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창조의 목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창조의 목적이 실현이 되도록 만물의 활동과 일들을 보존하고 관리하고 배정하고 통치하는 활동이 섭리인 만큼, 섭리의 목적이 곧 창조의 목적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섭리는 창조의 목적을 실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내재적이며 집행적인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은 반드시 실현이 됩니다. 섭리의 통치 활동은 만물 전체가 그리고 만물 각각이 개별적으로만이 아니라 반드시 전체의 목적의 실현이라는 종합 아래에서 최종적인 목적을 이루도록 합니다. 그 궁극의 목적은 오직 하나이니 곧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토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의 길에서 어떤 일을 만나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어야 할 것이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와 선과 긍휼을 찬미하는 믿음의 기쁨, 경건의 능력, 영생의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시는 일이 바로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시 149:2).
180 no image <웨신해설 31_①> 섭리의 대상과 방식과 목적 <제5장 1항>_김병훈 교수 (19)
편집부
4212 2013-05-14
섭리의 대상과 방식과 목적 <제5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5장 1항: “만물의 위대한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 행동들 그리고 일들을,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는 것조차, 그의 지극히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 그의 무오한 예지 그리고 그 자신의 의지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계획에 따라, 유지하시고, 관리하시고, 배정하시고, 통치하시며,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공의와 선과 긍휼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십니다.” “창조 이후에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지위를 누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1.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섭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또한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섭리를 행하신다는 말은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세상은 우연에 의하여 움직여질 뿐이라고 하거나, 또는 이미 결정된 운명에 의하여 다스려질 뿐이라고 하는 말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아울러 18세기 이후에 하나님은 창조를 하신 후에 창조하신 만물과 그것들의 행동과 일들에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이신론(理神論, Deism) 또한 잘못된 것임을 뜻합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마치 시계공과 같아서 시계를 만들어 놓은 후에 태엽의 힘으로 기계적 작용을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두듯이 창조한 세계가 스스로 작용하도록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물리적이며 화학적이며 그리고 도덕적 법칙을 정하셨으며, 창조된 만물은 스스로 그러한 법칙들에 의하여 움직여 나갈 뿐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만물의 활동과 작용에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주장입니다. 21세기 지금까지도 자연주의적 과학관과 진화론에 갇힌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의 영향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은 만일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작용에 어떤 개입을 조금이라도 하신다면 적어도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이 세상은 물리적이며 화학적인 법칙에 따라서 마치 시계와 같이 하나의 체계를 갖춘 기계적 작용에 의하여 움직여 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개입을 하신다면 그것은 곧 기계적 작용을 방해하는 것이 되어 세상에 커다란 혼란과 파괴를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둘째, 이성적 존재인 사람과 천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유롭게 살도록 되어 있으며 도덕적 법칙에 따라 판단을 받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어떠한 개입을 하신다면 그것은 곧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잘못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만물 가운데 작용하도록 정하신 물리, 화학적 원리들이 ‘법칙’으로 인식이 될 정도로 일정한 규칙성을 부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절대적 의미에서 법칙은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이러한 물리, 화학적 법칙들을 정하신 후에, 또 자신의 뜻에 따라 잠시 유보하시기도 하실 수 있는 자유로움과 권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한 일로 인하여 이 세상에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바대로 많은 이적과 기사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발견이 되는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결코 이적과 기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절대적으로 폐쇄적인 법칙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섭리를 행하실 때 일반적으로는 자연법칙을 훼손하거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한 작정을 시간 안에서 실행을 하시는 섭리를 행하실 때 통상적으로 말해서 오히려 만물의 작용원리인 제2원인들을 확립하시고 그것들을 통하여 실행을 하십니다. 만일 물리, 화학적 법칙이나 도덕적 법칙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섭리의 실행을 부인할 만큼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가 된다면, 그것들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지위를 누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나 그 후에는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지위를 누리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주장입니다. 2. 섭리의 대상은 크던 작던 모든 피조물과 그것들의 행동과 일들을 망라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대상이 크던 작던 모든 피조물과 그것들의 행동과 일들을 망라한다는 사실입니다. 섭리의 대상이 크던지 작던지 모든 것을 망라한다는 것은 이성적 피조물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선택받은 자이건 그렇지 않은 자이건, 선한 행동이건 악한 행동이건, 우연적이건 필연적이건, 사회적 변화이건 자연적 변화이건 제한이나 구별함이 없이 이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울러 세상의 만물을 하나의 단일한 목적으로 이끌어 갈 뿐만 아니라, 만물 각각을 또한 개별적으로 살피고 관리함을 뜻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특별히 성경의 예들을 통해서 확인이 됩니다. 이를 테면, 느부갓네살은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심판을 받아 총명을 잃고 들짐승과 같이 지내는 일곱 때를 다 보내고 나서 이제 깨달아 이르기를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5)고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를 찬양했습니다. 이처럼 한 나라가 일어나고 망하는 것과 같이 커다란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또한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일이나(마 10:29), 우리의 머리털을 헤아리는 일(눅 12:7)과 같이 매우 작은 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출생하여 살아가는 인생의 길도 하나님이 정하신 바대로 실행이 됩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요셉이 형들에 의하여 애굽에 종으로 팔리게 된 일은 형들의 악행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넘어 요셉을 미리 이곳에 보내어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실행이 되는 과정이었습니다.(창 45:5) 크고 작은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짐을 교훈하는 이러한 예들은 성경에 가득 차 있습니다.
179 no image <웨신해설 30-②> 사람의 창조 <제4장 2항>_김병훈 목사 (17)
편집부
3181 2013-04-16
사람의 창조 <제4장 2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4장 2항: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신 후에 이성적이며 불멸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이들을 지으셨으며,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충만케 하시고, 이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셨으며, 이들에게 그것을 성취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의 자유로움에 따라 행하도록 허용이 되었으나, 자유의지는 변화를 받기 마련이므로, 죄를 범할 가능성 아래에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심령 안에 기록된 율법에 덧붙여,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한,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가운데 행복하였으며 피조물들을 다스렸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유로운 의지는 선으로 나가는 성향 있어” 신앙고백서가 본 항목을 통해서 교훈하는 마지막 다섯 번째 내용은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된 일은 그가 본래 죄를 짓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자유의지가 변화하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본래 거룩하며 복된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타락한 이후에 부패한 성품으로 인하여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는 비참한 상태로 존재하는 사람들과 달리, 최초의 아담과 하와에게는 어떤 죄의 억압이나 죄의 경향이 전혀 존재하거나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유한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변화를 겪는 성질에서 자유로운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불변성은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며, 가변성은 피조물의 성질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그가 지음을 받은 최초의 거룩함과 의의 상태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있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로서 죄로부터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말해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는 일과 죄를 범하지 않는 일 사이에 어느 쪽이라도 선택할 수 있는 중립적인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거룩하고 의롭게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로운 의지는 선으로 나가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개혁파 이외의 학파들이 말하는 바와 달리 아담과 하와가 순종과 불순종이라는 중립의 자유를 가진 상태로 창조를 받았고, 불순종을 선택하는 자유의지로 인하여 타락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를 표합니다. 개혁파 설명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으로 나가는 경향성이 동일한 중립의 자유의 상태로 창조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만일 중립적이라면 한편으로는 거룩하고 의로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로 악으로 이끌려 행동하는 것이 동시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하므로 불합리 합니다. 이들은 선으로 나가는 경향성을 따라 창조함을 받은 자들로서 순전한 자들이며 거룩하며 의로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하여 타락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개혁파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가변성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 못지않게 악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가변성을 지닌 존재로 지음을 받았음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즉 아담과 하와가 비록 순전한 상태로 창조함을 받아 선의 성향을 가진 자일 뿐 결코 악으로 이끌리는 성향을 부여받은 자들이 아니지만, 이들이 가변성에서 자유로운 자들이 아님으로 인하여 결국 악으로 이끌리는 경향도 갖는 변화를 겪게 된 것입니다. 이 변화는 한편으로는 선을, 다른 한편으로는 악을 향해 동시적으로 나가는 중립적인 상태로의 변화는 아닙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창조 때의 상태로 선을 향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변화를 겪은 후에 악을 향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는 순차적이며 서로 구분이 되는 변화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타락한 이후에 죄를 범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태로 전락이 되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178 no image <웨신해설30-①> 사람의 창조 <제4장 2항>_김병훈 목사 (10)
편집부
3671 2013-04-02
사람의 창조 <제4장 2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4장 2항: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신 후에 이성적이며 불멸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이들을 지으셨으며,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충만케 하시고, 이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셨으며, 이들에게 그것을 성취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의 자유로움에 따라 행하도록 허용이 되었으나, 자유의지는 변화를 받기 마련이므로, 죄를 범할 가능성 아래에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심령 안에 기록된 율법에 덧붙여,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한,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가운데 행복하였으며 피조물들을 다스렸습니다.” “하나님 외에 땅에 속한 그 어떤 것일지라도 사람에게 행복 주지 않아” 이번 호에서는 본 항이 교훈하는 다섯 가지 사항 가운데 지난 호에서 살펴본 두 가지 사항에 이어 남은 세 가지 사항입니다. 세 번째 내용은 사람은 임의로 사는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바로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심으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을 주셨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이처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금하신 것에 덧붙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심령 안에 율법을 기록하여 놓으셨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한 금지 명령은 사람이 지켜야 하는 규범을 대표적으로 상징함을 뜻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갖는 궁금증은 그 나무가 어떠한 나무이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이름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지,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주신 까닭은 무엇인지 등과 관련한 것들입니다. 우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성경이 이에 대해 아무런 실마리를 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사과나무인 듯이 아담과 하와가 유혹을 받는 그린 그림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한 근거를 아가서 8장 5절 “...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에서 찾기도 합니다만 이것은 올바른 주석의 결과가 전혀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라틴어로 악 또는 불행을 의미하는 단어나 사과나 실과를 뜻하는 단어가 모두 말룸(malum)이라는 동음이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그림이 널리 퍼졌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하여 유의할 점은 그 이름이 나무 자체가 선악을 구별하는 나무라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혹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그 자체로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신다고 말한 마귀의 말(창 3:5)을 근거로 열매 자체에 이러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마귀의 거짓된 미혹을 그대로 진실로 인정하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올바른 해석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이름을 ‘결과적’으로 그리고 ‘성례전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이라는 말은 아담과 하와가 실제로 그 열매를 먹은 후에 순종의 선과 불순종의 악이 어떻게 다른지를 실제로 경험하게 됨으로 인하여 당하게 될 결과, 즉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얼마나 많은 선을 잃어버렸으며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임을 미리 말하여 준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성례전적’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금지명령으로 인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악의 순종과 불순종을 시험하는 상징을 갖는다는 점을 반영합니다. 만일 금지 명령을 지켰더라면 하나님께 온전한 사랑의 순종을 드러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는 악을 드러내고 말았음을 볼 때, 상징성을 갖는 성례전적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17세기 개혁주의신학자 튜레틴(Francis Turretin)에 따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결과적’이며 ‘성례전적’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금지명령을 주신 이유와 관련하여 다름과 같은 교훈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첫째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도록 한 금지 명령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사람은 그의 주권 아래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교훈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외적인 상징을 두심으로써 불순종이 범한 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금지명령은 사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넷째로 비록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실제로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더라도 그것처럼 땅에 속한 것이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님을 교훈합니다. 끝으로 다섯째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이 최고의 행복임을 알고 다른 모든 일에 앞서 하나님을 섬기기에 힘을 다하여야 할 것임을 교훈합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바로 신앙고백의 본 항목에서 교훈하는 네 번째 내용을 확인하여 줍니다. 곧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를 하며 피조물을 다스리는 행복을 누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법과 명령을 지킬 때에라야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에덴동산은 육체의 삶에 최고의 평안을 주는 곳이며, 지극히 기쁜 즐거움으로 가득 찬 곳이며, 번민과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어떤 죄책도 없으며, 수치스러운 어떤 것, 두려워 할 어떤 것도 없으며, 어떤 분노나 영혼을 괴롭힐 어떤 것도 없는 곳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에덴동산은 지상의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한 금지 명령과 관련한 교훈을 통해서 신앙고백서는 아담과 하와가 누리는 참된 행복이 이러한 외적인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데에 있음을 고백을 합니다.
177 no image <웨신해설29-②> 사람의 창조 <제4장 2항>_김병훈 목사 (8)
편집부
3695 2013-02-19
웨신해설29-2사람의 창조 <제4장 2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4장 2항: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신 후에 이성적이며 불멸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이들을 지으셨으며,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충만케 하시고, 이들의 심령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셨으며, 이들에게 그것을 성취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의 자유로움에 따라 행하도록 허용이 되었으나, 자유의지는 변화를 받기 마련이므로, 죄를 범할 가능성 아래에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심령 안에 기록된 율법에 덧붙여,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한,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가운데 행복하였으며 피조물들을 다스렸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함으로써 참된 행복 누릴 수 있어” 2항에서 신앙고백이 교훈하는 두 번째 중요한 요점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본질을 반영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물론 이 말은 유한한 사람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그대로 드러내거나,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함께 신성을 나누고 있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은 단지 사람이 유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교훈할 따름입니다.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하여 교훈하는 바는 이러합니다. 사람은 단지 몸만을 가진 자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은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며 순수한 영이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외적인 몸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과 관련하여 나타납니다. 사람의 영혼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영혼은 스스로 존재하거나 하나님의 영에서 파생된 것이 아닙니다. 영혼은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물질이 아닌 영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으나 만들어진 것임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불멸하십니다. 이에 따라서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불멸의 성질을 갖습니다. 영혼은 육체가 사멸하듯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서는 영혼을 육체의 기능으로 보고 영혼의 사멸을 주장하는 유물론적인 무신론자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밝힙니다. 여기서 신앙고백이 영혼의 불멸성을 말할 때, 그것은 영혼이 스스로 영원히 존재한다거나,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멸하실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음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멸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고백이 영혼의 불멸성을 말하는 것은 영혼이 물질처럼 썩어 없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교훈하기 위함입니다. 제 일 원인이신 하나님과의 관련하여 불멸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 이 원인으로서 썩어 없어지지 않는 내적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사람이 몸을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을 죽일 수 없다는 말씀은 그 영혼이 제 이 원인과 관련하여 몸과는 달리 사멸되지 않는 내적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영혼은 제 일 원인이신 하나님과 관련하여서는 사멸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성경의 교훈(마 25:34, 31, 히 6:2)은 불멸성을 지닌 영혼이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영생 또는 영벌에 처하게 될 것임을 뜻합니다. 아울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혼을 가진 특별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자로서 영혼의 기능적 특성에 따라 지성적 능력으로서의 이성과 자연적인 정서, 그리고 자유롭게 자신의 마음을 결정하는 의지와 도덕성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사람에게만 특별한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동물들과 구분이 되는 특별한 지위를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한편으로 이러한 영혼의 기능적 특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이러한 측면들은 비록 사람이 죄를 범하여 타락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된 후에라도 상실이 되지 않은 채 여전히 유지가 됩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참조 약 3:9). 다른 한편 하나님의 형상은 이처럼 죄를 범한 이후에도 상실이 되지 않는 영혼의 기능들과는 달리 상실이 되는 영혼의 특성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교훈에 완전히 순종하는 의지의 올바른 의와, 참된 지식, 그리고 거룩함 등의 특성들입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최초에 창조된 사람의 영혼에 부여된 ‘원초적 의’를 구성합니다. 이러한 ‘원초적 의’의 상태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하신 말씀이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잠 7:29)는 말씀 가운데 암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초적 의’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한 이후에는 상실이 되며, 중생하여 믿음으로 나오는 자들에게 성령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점차 부분적으로 새롭게 회복이 됩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오직 너희는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24).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처럼 자신의 형상을 따라 특별한 존엄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을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참된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의 창조와 관련하여 신앙고백은 타락함으로 상실하였던 ‘원초적 의’를 회복하는 구원의 복을 더욱 더 충만히 누리기를 사모하며 힘써야 할 것을 교훈합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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