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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지의 상관성 <제3장 2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3장 2항: “하나님께서는 가정된 모든 조건들 위에서 일어날 개연성이 있거나 또는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작정하실 때 그것이 미래에 있을 일로 미리 보셨기 때문에 작정을 하신 것이 아니며, 또 그러한 조건들을 보시고 그것들에 근거하여 일어날 것으로 미리 보셨기 때문에 작정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택의 예정은 믿음뿐 아니라 그 행위를 근거로 하지 않아”

 

 

본 항목이 설명하는 바는 세 가지입니다. ① 하나는 하나님의 전지성과 관련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든지 그것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들을 다 아시고 그 조건들에 따라서 일어날 개연성이 있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들을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②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작정과 관련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③ 마지막 하나는 작정의 이유와 관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작정하셨을 때 그 일이 일어날 것으로 미리 보셨기 때문에 작정을 하셨거나,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들을 미리 보셨기 때문에 작정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 항목의 세 가지 내용이 가리키는 요점은 하나님의 작정이 예지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러한 개혁주의 견해를 가리켜 흔히들 ‘예정예지’라 일컫습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지 사이의 상관성에 관련한 이러한 이해의 차이는 개혁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구분하는 신학적 쟁점입니다.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달리 알미니안주의와 세미-펠라기우스파는 하나님의 작정보다 예지가 앞선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것은 흔히들 ‘예지예정’이라 불립니다. 알미니안주의 또는 세미-펠라기우스파는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선택하기에 앞서서 그 사람이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고백하거나 행위를 실행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러한 예지에 근거하여 선택하시는 작정을 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개혁주의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선택을 하실 때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나 행위와 같은 어떤 조건을 미리 아시고 그것 때문에 작정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작정을 하시는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신학적 견해의 차이는 믿음 또는 행위가 구원을 받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이나, 혹은 선택의 예정이 실행이 될 때 믿음이나 행함이라는 조건들이 충족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냐 혹은 부정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혁주의나 알미니안주의나 모두 구원을 받기 위하여서는 믿음을 고백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은 믿음을 고백하는 조건을 실행함으로써 이루어지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논쟁점은 이러한 믿음이나 행함의 조건들이 하나님께서 선택의 예정을 하실 때 선택의 이유가 되도록 하나님께 영향을 주느냐에 있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그렇다고 생각하고 개혁주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즉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이의를 갖지 않지만, 믿음이 작정 그 자체의 원인이나 조건이 되느냐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가 다른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의 예정이 순전히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어떤 선행이나 믿음의 공로를 미리 보고 이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사람에게서 어떤 원인이나 조건 또는 이유를 찾아 그것들을 고려하여 어떤 이를 선택하기로 예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하고 기쁘신 뜻에 따라 하신 것임을 역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을 얻는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 비해 더 선하거나 더 훌륭하기 때문에 선택을 받은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개혁주의에 따르면, 신자에게서 발견하는 믿음과 행함은 선택의 예정을 위한 근거나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의 예정을 받은 결과이며 열매인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선택을 받았으므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주의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성경의 구절에 기초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하나님의 부르심은 믿음으로의 부르심이며 믿음은 그 부르심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의 부르심은 또한 미리 정하신 이들을 향한 것이므로 믿음은 예정의 결과인 것입니다.

 

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할 때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행 13:48)고 기록된 말씀도 믿음은 예정의 결과이며 열매임을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아울러 디도서 1장 1절의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라는 표현은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의 말씀과 더불어 믿음이 선택보다 앞서 있는 것이 아니며, 선택의 예정이 없이는 누구도 믿음을 가질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해설하시며 이르시기를 “천국이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마 13:11)라고 말씀하심으로 믿음의 지식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예정은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를 근거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의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근거하여 예정은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예정은 오직 부르시는 이의 뜻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선택의 예정이 행위를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로 택하심”(롬 11:5)을 받았다고 말하며,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선택의 예정은 믿음이나 행위를 미리 보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하나님께서 믿음이나 행함을 미리 보시고 선택의 예정을 행하시는 주장이 잘못 된 것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미리 보시는 믿음이나 행함이 어떻게 비롯되는지를 따져 볼 때에도 드러납니다. 우선 그것이 우리들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것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협력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미리 보신다는 그 믿음이나 행함이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이라면, 그 믿음이나 행함은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주어지는 대상이 이미 정하여져야 하므로 개혁주의 견해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지예정이란 믿음과 행함이 우리들 스스로에게서 비롯되거나, 아니면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협력한다는 두 경우를 말할 뿐입니다.

 

여기서 믿음과 행함이 우리들 스스로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전형적인 펠라기우스의 이단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또 사람이 하나님과 서로 협력을 하는 경우라고 할 때도 사람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이 행동을 하시는 경우라면, 이것은 펠라기우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조력자가 될 뿐이며,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사실상 구원할 자를 선택하실 수가 없게 되며, 어떠한 의미에서도 미리 선택하시는 예정(豫定)이란 불가능하며, 단지 나중에 보고 결정하는 후정(後定)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예정을 가르치는 성경의 진리에 완전히 어긋나는 오류입니다.

 

만일 예지예정이 옳다면 사도 바울이 구원과 예정에 대하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고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드리는 일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연한 헛된 일일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결정하면서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함을 신비로 노래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개혁주의의 ‘예정예지’는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를 미리 선택하셨다는 사실로 인하여 불만을 표합니다. 사람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자유가 무시당하며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전횡적인 주권만이 드러날 따름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지예정’을 따라가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지예정’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를 구원하실 수 없는 무능력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신관을 왜곡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구원을 감격함으로 감사하게 받고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는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개혁주의 예정론을 믿고 받는다는 것은 신앙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곧 죄이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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