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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원문의 권위와 번역의 필요성 (제 1장 8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1장 8항> : (구약시대 하나님 백성들의 본래 언어였던)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여러 나라들에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 성경은,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영감이 된 것이며, 같은 예를 찾을 수가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섭리에 의해 모든 시대들에 걸쳐 순전한 상태로 유지가 되었기 때문에, 그 원문의 내용이 원본의 것 그대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 관련한 모든 논쟁에 있어서 교회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원문 성경에 근거하여 최종적인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당연한 권리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성경을 읽고 연구하도록 계명을 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어들을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이 전하여진 각 나라에서 사용이 되고 있는 언어로 이 원문들이 번역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 안에 풍성히 거하고, 사람들이 성경에 비추어 인정될 만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하여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영감된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는 원본에 있어”

 

 

제1장 8항에서 신앙고백서가 성경과 관련하여 고백하는 주요 명제들은 이러합니다. (1)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기록이 되었던 성경의 원문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화 섭리에 의해 순전하게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2) 교회는 성경의 원문에 근거하여 모든 종교적인 논쟁의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3) 원문 성경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알지 못하는 성도들도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성경의 주는 영적 부요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 성경은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으며 신약 성경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 가운데 일부분은 아람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10장 11절, 다니엘 2장 4절b부터 7장 28절까지, 그리고 에스라 4, 5, 6, 7장 일부분 등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은 매우 적은 양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류가 없으며 신앙과 행위의 규범으로서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고 말할 때의 성경은 바로 히브리어 또는 그리스어의 원어로 기록된 성경의 원본을 가리킵니다. 이 원본 성경이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하신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원본 성경은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재 현존하는 것은 원본을 베끼어 놓은, 일종의 갈대 잎인 파피루스 또는 양피지(羊皮紙)에 기록이 되었던 사본들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완전성을 말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사본들은 결코 무오한 것도 아니며 또한 서로들 간에 완전히 일치를 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원본이 소실이 되었다고 하여 성경의 원문까지도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서가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유례가 없는 아주 특별한 보호와 섭리를 베푸심으로 원본 성경의 원문이 순전하게 보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서는 현재 사본들을 통해 구성이 된 성경의 내용이 원본의 원문과 전체적이며 일반적으로 일치를 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본들의 수가 원문의 내용을 밝히기에 충분히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약 성경의 사본들은 고대의 다른 문서들에 비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사본들의 수가 많을수록, 사본들이 원본의 시기에 가까울수록, 그리고 사본들끼리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원본의 내용을 정확히 복구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고대 문헌들의 사본의 수는 열 개를 넘어가는 것이 드뭅니다. 더욱이 유명한 호머의 ‘일리어드’는 650개의 사본들을 가지고 있으나, 원본은 BC 800년 경인 반면에 그것의 사본들은 AD 2, 3세기에 된 것으로 원본과 사본의 기록 시기의 차이가 무려 천년이 넘습니다.

 

반면에 신약 성경의 사본들은 중요한 것들만 헤아려도 2,300여개에 이르며 전체적으로 5,000여개에 달합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본들이 원본 이후 2-3세대 안에 기록된 것들입니다. 아울러 초대 기독교인들이 사도들의 글을 인용하여 쓴 문서들의 것들만 모아도 원문의 내용을 추적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본들 사이에 차이가 있지는 않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상의 어떤 중대한 차이를 일으킬 만한 것이 없는 작은 차이들뿐입니다. 즉 원본의 원문이 사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순전한 상태로 전달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원문들이 각 나라와 민족들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각 나라의 말들로 번역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성경의 원어 자체가 기록된 당시에는 누구나 읽고 말할 수 있는 널리 통용이 되던 언어라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교훈을 살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풍요로움 가운데 성경의 교훈에 합당한 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합니다(요 4:24; 5:39; 행 17:11). 이와 관련한 신앙고백서의 교훈은 성경의 번역을 금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사사로이 성경을 읽는 것을 매우 경계하였던 당시의 천주교회의 결정을 반대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천주교회는 일반 성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하면 이들이 교만해지고 성도들의 권한 밖의 일들에도 호기심과 의문을 갖게 되며 급기야 교회의 교도권을 가벼이 여기고 스스로 더 지혜롭다고 여길 것이라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소위 이단들이 등장하게 된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이단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해 무지하도록 하는 것은 더욱 더 해로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세상에 등장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성경을 읽는 일을 허용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교훈들을 겸손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연구하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번역하거나 성경을 읽는 일을 경계하여야 한다고 하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얼핏 보기에는 친절하며 성도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천주교회가 전통의 미명 아래 범하고 있는 그릇된 교리나 오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로 해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천주교회가 라틴어 이외에 각 나라의 언어로 미사를 드리거나 성경을 번역하여 내 놓는 일들은 개신교의 영향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읽고 그 교훈을 부지런히 탐구하도록 하는 일에 개신교에 비해 소극적인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을 번역하여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신앙고백서의 교훈은 번역 성경과 원문 성경이 권위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신앙고백서는 번역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성경을 읽어 성경의 교훈을 알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하는 한 편,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모든 권위는 원본에 있음을 또한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어서 교리를 확정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논의들은 물론 모든 종교적 논의들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원문에 근거하여 결정이 되어야 함을 교훈합니다.

 

앞서 3항을 해설하면서 성경의 영감에 대해 말할 때 언급한 것처럼, 성경은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영감이 되었으며(완전 영감), 단지 사상만이 아니라 단어들도 영감이 되었고(축자 영감), 또한 사람의 저자가 기계적으로 사용이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이며 문화적인 특성들이 활용이 되었음(유기 영감)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은 번역본이 아니라 원본에 대한 고백입니다.

 

따라서 원본의 원문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경을 가지고 종교적 논의의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 570호(10.7.10일자)6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의 제목  성경: 구원에 필요한 계시로서의 명료성  성경:원문의 권위와 번역의 필요성 (제 1장 8항)으로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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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no image <웨신해설 17> 하나님 : 하나님의 자기 충분성과 영광(제2장 2항)_김병훈 목사 (113)
편집부
5318 2011-07-20
하나님 : 하나님의 자기 충분성과 영광(제2장 2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2장 2항 _ “하나님은 그 분 스스로 자신 안에 생명과 영광과 선과 복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 분만으로 스스로 완전히 충분하시며, 그가 만드신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필요하지 않으시며, 그들에게서 어떤 영광을 이끌어 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의 영광을 그것들 안에, 그것들로, 그것들에게,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만물은 그에게 속하여 있고,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그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들에 의하여, 그것들을 위하여, 그것들에게로 행하시는 최고의 주권적인 권세를 그것들에게 대하여 가지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 만물은 드러나며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하며, 무오하고, 피조물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것도 우연적이거나 불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계획들과 그의 모든 일들과 그의 모든 명령들에 있어서 지극히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사들과 사람들과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서 예배와 섬김과 복종 등 무엇이든지 받기에 합당하시며, 그것들에게 요구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제2장 2항에서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하나님과 관련한 명제들 가운데 이번에 살필 것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그 분 스스로 자신 안에 생명과 영광과 선과 복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그 분만으로 스스로 완전히 충분하시며, 그가 만드신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필요하지 않으시며, 그들에게서 어떤 영광을 이끌어 내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의 영광을 그것들 안에, 그것들로, 그것들에게,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만물은 그에게 속하여 있고,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명제에서 고백하는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자기 충분성과 영광입니다. 본 항목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완전성 그리고 충분성을 더할 수 없이 명료하게 고백을 합니다. 여기서 주목을 하여야 할 첫 번째 명제는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 안에 생명과 영광과 선과 복을 가지고 계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피조물인 사람과 비교하여 생각을 해보면 그 의미를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생명을 누리고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의 기간 동안에는 마치 자신 스스로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생명의 주인인 듯한 착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몸이 병들거나 불의의 사고로 죽음이 임박해오면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하여야 한다는 냉엄한 현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사람은 생명을 잠시 부여받아 생명을 맛보며 살뿐이며, 스스로 그 생명의 주인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은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며 하나님 자신이 곧 생명이심을 고백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헛것 같고 지나가는 그림자” 같을 뿐이며(시 144:4),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는 것”과 같지만(시 90:6), 반면에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분이시며(시 102:26a),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지고 계시며”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하나님이십니다(요 5:26). 스스로 생명이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서도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곧 여호와로 알리셨습니다(출 3:14). 그 말의 의미는 몇 가지를 포함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도 자신의 존재를 의존하지 않으시는 절대적 의미에서 자존하시는 분이시며 스스로 영원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존재와 본질에 있어서도 변치 않는 영원한 분이실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말씀을 변치 않고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과는 달리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과는 달리 “후회가 없으시기” 때문에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거나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는” 일이 없으십니다(민 23:19). 셋째는 하나님은 존재하며 기동하는 모든 것들의 원인이시라는 것입니다.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은 “홀로 하늘을 폈으며” 아무도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친 분이십니다”(사 44:24b). 하나님은 실로 그 분만으로 스스로 완전히 충분하시며, 자신을 위하여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의 존재나 도움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십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것들의 유일한 근원으로서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스스로 존재하시므로 생명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그 분 스스로가 생명이신 하나님은 또한 스스로 영광이 충만하십니다. “온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천사들은 서로를 불러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사 6:3) 찬양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물이 누리는 영광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주로서의 영광이며, 또한 구속주로서의 영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피조물이 누리는 영광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누리는 영광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과 같이 없어질 영광이며, 솔로몬의 영광이라도 들의 꽃보다 아름답지 못한 영광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며 길이 있을 영원한 영광이며, 그 자체로 다른 것에 비교될 수가 없으며 절대적인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에서 보듯이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비롯한 모든 만물들은 수 많은 천사들과 함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 찬양을 하는 것이며(계 5:13), 이는 모든 만물이 “아멘” 하듯이, 마땅한 바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스스로 충분하시며 영광이 충만하시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에게만 선과 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시며 스스로 모든 것이 충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스스로 선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 이외에 다른 어떤 기준이나 권위에 의하여 선하거나 또는 악하다는 판단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기준이나 권위에도 종속이 되지를 않으십니다. 만일 하나님을 판단할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 밖에 존재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존재는 피조물이므로 그 어떤 자도 하나님을 밖에 존재하여 하나님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하여 선과 악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에 대한 판단의 유일한 기준일 뿐입니다. 일찍이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하와를 미혹할 때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케 하였습니다. 마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될까봐 그런 것이라고 거짓을 하와의 귀에 넣어주었습니다.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악하다고 판단토록 부추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선이나 악으로 판단할 하나님 이외의 어떤 권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므로 시작이요 마지막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스스로가 모든 가치와 윤리의 기준이며 척도이며 근거입니다. 스스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계획하시거나 행하시는 모든 것에 있어서 선합니다. 그 일을 계획하고 행하신 분이 바로 스스로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미혹에 속아 하나님의 존엄과 영광을 거슬리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권위로 하나님을 선 또는 악으로 판단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며 사람들에게 선이 무엇인가를 교훈하신 율법을 통하여 압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시 119:68) 약속하신 바를 신실히 지키시며 사람이 순종하여 살아야 할 법도와 규례를 반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셨으며 모든 사람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토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스스로 복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이외에 복이라는 그 어떤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그와 같은 복을 가지고 계심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 안에 복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이 완전한 분으로서 복 자체이심을 뜻합니다. 피조물인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되는 것을 복이라고 여깁니다. 타락한 사람은 부패한 자신의 성품에 따라서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육체의 욕심의 만족만을 구하며 그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타락으로 인해 심령이 어둡고 부패해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피조물인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최상의 기쁨이며 행복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선하심은 스스로가 복이시며 또한 사람에게 복을 베푸시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시는 바로 임마누엘의 복을 베푸신다는 사실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곧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그와 교통하는 복을 누리도록 만유의 주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마 2:23)은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고 새 예루살렘에서 베푸실 영원한 생명의 복락에서 완성케 될 것이며 복의 극치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계 21:1-4). 이것을 바라보는 소망 가운데 믿음의 좁은 길을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 견고하게 걸어가는 성도가 누릴 상급이며 기업이며 자랑입니다. 과연 우리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대로, 우리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신 진정한 복이며, 복 중의 복입니다.
155 no image <웨신해설 16>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제2장 1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4830 2011-06-08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제2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에 따라 행하시는 것은 마땅한 일” 제2장 1항에서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하나님과 관련한 명제들 가운데 이번에 살필 것은 이러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에 가장 공의로우시며 지극히 두려운 분이시고,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범한 자를 결단코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 명제에서 고백하는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그의 심판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그 분 자체로 지극히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하나님의 사랑, 은혜, 긍휼 등과 같은 여러 특성들이 비롯됩니다. 오늘 살피는 신앙고백서는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이 또한 죄를 반드시 벌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정녕 선하시며 은혜로우십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심판을 행하지 않으신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은혜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 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없이는 결코 은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공의를 결코 부정하지를 않으며, 오히려 더욱 더 견고케 합니다.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는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습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 죄를 벌하시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확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곧 선택을 받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공의의 심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공의를 세우신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공의에 따라 죗값을 자신의 아들에게 철저히 요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죗값에 대한 만족이 없이도 죄를 사하시며 용서를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은혜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본성의 완전성을 반영하며, 상대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뜻의 실현의 성격을 반영합니다. 절대적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의 완전성을 올바르게 드러내심으로써 나타나는 의로우심을 말합니다. 반면에 상대적 측면에서의 의란 바로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이것은 절대적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의에 기초합니다. 신앙고백서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은 바로 상대적 측면과 관련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신앙고백서는 모든 피조물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통치적 권세를 가진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이에 근거하여 특별히 죄에 대하여 징계를 행하시거나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형벌의 의(iustitia vindicatrix)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범하는 자를 결단코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교훈을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며 악은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합니다”(시 5:4). 이처럼 죄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필연적으로 죄악에 대해서 형벌을 내리십니다. “...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7). 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리라”(롬 2:5-6). 하나님은 거룩하신 성품에 따라서 죄를 미워하시며 또한 그의 공의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벌을 내리시는 분이시므로 성경은 하나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교훈합니다. “...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b). “...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롬 3:5b-6). 그리고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살후 1:6,7a). 이처럼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자를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교훈은 다른 몇 가지 사실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각각의 사람의 양심이나(롬 2:14-15) 또는 율법에 담긴 도덕적 명령과 제사법 등이 그러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가장 분명하게 이 사실을 밝혀줍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든지 그렇지 않든지 자신의 공의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그토록 잔인한 죽음을 당하도록 하신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를 벌하시는 공의 때문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단지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죽음조차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악인의 죽음이라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죄가 없으시며 지극히 의로우신 그의 아들의 죽음을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께서 그의 죽음을 원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공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 공의가 바로 그리스도로 하여금 택자들을 위한 대리적 형벌의 죽음을 담당하실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롬 3:25a).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어떤 이들은 혹 이렇게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무슨 해가 되겠는가? 이러한 의문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여 제기되는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제정하시고 의와 선을 이루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지 않으신다면, 모든 피조물을 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시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을 향한 통치적 권위와 부조화를 낳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공의를 베푸시는 것은 긍휼을 베푸시는 것과 실행의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긍휼을 베풀어야할 의무를 지니고 계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않으신다고 하여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에 따라 행해집니다. 그러나 공의의 행사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자유롭게 행하시는 것이면서도 또한 필연적으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사람이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도에 따라 보응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정하신 법도를 보호하시는 것이며 자신의 공의에 따라 행하시는 마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고백할 때마다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또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의에 대해서는 산 자로서 죄를 가벼이 여기지 않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더욱 더 의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154 no image <웨신해설15-②> 하나님 :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제2장 1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4744 2011-05-11
하나님 :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제2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2장 1항 _ “오직 한 분뿐이신 살아계시며 참된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본질과 완전함이 무한하시며 지극히 순결한 영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몸이 없으시며, 여러 부분들이 없으시고, 고통이 없으시며, 불변하시고, 광대하시며, 영원하시고, 헤아릴 수 없으시며, 전능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획에 따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선과 진리가 풍성하시고, 불의와 범죄와 죄를 용서하시며,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에 가장 공의로우시며 지극히 두려운 분이시고,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범한 자를 결단코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회개하며 경건한 삶과 은혜 구하는 자들에게 긍휼 베풀어주셔”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은혜로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자녀들에게 어떤 공로나 자격을 요구하시며 그것을 근거로 하여 베푸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시어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셨으며(엡 1:5),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은혜와 평강을 부어주시며 영생을 주신 것들은 오직 은혜로 주어집니다(롬 3:24; 5:15; 딛 3:7).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은혜를 먼저 영원한 작정 가운데서 선택을 통해 베푸시며, 또한 시간 안에서 각각의 인생들을 향하여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끝까지 보호하시며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기까지 놀라운 섭리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십니다(엡 1장; 딤후 1:9-10). 하나님의 은혜는 죄에 대한 책임으로 인하여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에게 용서를 베푸실 때에 나타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긍휼은 죄로 인하여 비참한 상태에 빠진 죄인을 향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선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사람들이 비참한 상태에 놓인 다른 이들을 보며 느끼는 연민과 불쌍히 여기는 감정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란 마음의 어떤 동요나 고통의 상태를 표현하시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시고 구하여 내시고자 하시는 즉각적인 의지를 뜻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받을만한 어떠한 이유나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골라서 그들에게 그러한 이유나 조건 때문에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비참함에서 구조해 내시기를 바라시며 이로써 그의 선하심을 전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곧 하나님의 선하심 그 자체 때문에 긍휼을 베푸십니다(롬 9:18). 하나님의 긍휼은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는 모든 피조물을 향하여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과 좋은 것들을 공급하시는 손길을 통해서 나타납니다(시 104:27). 또한 타락하여 죄 아래 종노릇하는 비참한 죄인들 가운데 선택하여 불러내신 자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복을 주시는 손길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가 있는 대로 노를 발하시며 엄격한 공의의 심판을 행하시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십니다(시 103:8; 엡 2:4). 시편에서 찬송하듯이 하나님의 긍휼은 죄가 많은 곳에 오히려 더욱 더 넘쳐납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미 7:18-20). 하나님께서는 오직 회개하며 경건한 삶을 소망 중에 바라며 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그의 긍휼을 항상 풍성하게 베풀어주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기억하고 모든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와 구하며 그의 선하심을 찬송하여야 할 것입니다(시 51편; 벧전 1:3).
153 no image <웨신해설15-①> 하나님 :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선과 진리가 풍성하시고, 불의와 범죄와 죄를 용서하시며,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하나님(제2장 1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4521 2011-04-06
하나님 :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선과 진리가 풍성하시고, 불의와 범죄와 죄를 용서하시며,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하나님(제2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2장 1항 _ “오직 한 분뿐이신 살아계시며 참된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본질과 완전함이 무한하시며 지극히 순결한 영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몸이 없으시며, 여러 부분들이 없으시고, 고통이 없으시며, 불변하시고, 광대하시며, 영원하시고, 헤아릴 수 없으시며, 전능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획에 따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선과 진리가 풍성하시고, 불의와 범죄와 죄를 용서하시며,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에 가장 공의로우시며 지극히 두려운 분이시고,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범한 자를 결단코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통해 전달돼” 제2장 1항에서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하나님과 관련한 명제들 가운데 이번에 살필 것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선과 진리가 풍성하시고, 불의와 범죄와 죄를 용서하시며,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명제에서 고백하는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 긍휼 등은 모두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되는 여러 특성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체로 지극히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 그 분에게서 비롯되며, 변치 않는 그 분 자체의 절대적인 완전한 속성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달려나와 영생을 얻기 위해 행할 일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답해 주신 말씀(마 19:17; 막 10:18; 눅 18:19)에서 보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절대적 의미에서 그 분 자체로 선하십니다. 이처럼 스스로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향해 선하심을 베푸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피조물과의 관계적인 측면에서도 또한 선하십니다. 신앙고백과 관련하여서 특별히 후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선을 베푸시는 대상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모든 피조물을 향하여 베푸시며(시 36:5,6), 특별히 사람들과 관련하여 베푸십니다(행 14:17). 그리고 더욱 특별하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 택하신 자들을 향해 베푸십니다(시 73:1).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선에서 비롯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가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통해서 전달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또한 대상에 따라서 사랑을 부으시는 정도가 다르며, 하나님의 자녀를 향하여 베푸시는 사랑이 가장 완전하며 탁월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향해 그것들이 존재하기도 전부터 그의 작정 안에서 사랑의 의향을 나타내시며, 그러한 사랑의 뜻을 창조한 이후에 실행을 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와 관련하여 먼저 사랑의 의지로 그의 자녀들을 구원하여 주시기로 작정을 하시며(요 3:16), 선택하신 자들이 어떤 선을 행하기도 전에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사랑을 실행하십니다(엡 5:25; 계 1:5).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를 거룩하며 의로운 자로서 받으시며 영광의 상을 베풀어주십니다(사 62:3; 히 11:6).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얼마나 숭고하며 아름다운지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그 사랑을 받은 우리를 돌아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세와 권능을 가지신 만복의 근원이시며 지극히 높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아무런 조건이나 이유가 없이 오직 그 기쁘신 뜻에 따라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받는 우리는 연약한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아담 이후 죄와 형벌 아래 놓인 자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고사하고 미움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롬 5:8; 요일 4:9,10).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니 하나님을 반역한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일세”라는 찬송(새 95; 통일 82)이 실로 마음에 닿으며,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의 말씀에 실로 아멘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52 no image <웨신해설14-②> 하나님 :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획에 따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제2장 1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4595 2011-03-09
하나님 :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획에 따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제2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2장 1항 _ “오직 한 분뿐이신 살아계시며 참된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본질과 완전함이 무한하시며 지극히 순결한 영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몸이 없으시며, 여러 부분들이 없으시고, 고통이 없으시며, 불변하시고, 광대하시며, 영원하시고, 헤아릴 수 없으시며, 전능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획에 따라서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따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 위한 일” 지난 호에 이어 제2장 1항에서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획에 따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의 신앙고백의 내용을 계속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인 하나님의 의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몇 가지의 구별이 시도되어 왔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작정과 관련된 의지와 교훈과 관련된 의지의 구별입니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기로 또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시기로 결정하시는 ‘작정적 의지’를 말하며(엡 1:1), 후자는 피조물인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신앙과 행위의 규범을 뜻하는 ‘교훈적 의지’를 말합니다(롬 12:2). 전자는 반드시 이루어지며 어떤 저항도 있을 수 없습니다: “...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롬 9:19b) 후자에 대해서는 불순종이 나타납니다: “... 내게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다른 구별은 하나님의 기쁨과 관련한 것으로 하나는 ‘작정과 관련한 기쁨의 의지’이며 다른 하나는 ‘규범의 교훈과 관련한 기쁨의 의지’입니다. 예를 들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의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작정을 하실 때 그 작정을 기뻐하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문은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의 비밀을 숨기거나 드러내는 일과 관련하여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고 말씀하셨을 때 ‘아버지의 뜻’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가리킵니다. 이와 구별하여 규범과 관련한 구별은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교훈과 규범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용인하시는 것이며 그의 성품에 일치하는 것임을 뜻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표현하는 구별입니다. 예를 들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말씀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표현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성품에 합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시고 인정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구별은 한 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명하심으로써 알게 되는 의지와 다른 한 편으로 그 명령을 내리신 이면에 감추어져 있어 들어난 명령으로 만으로는 알 수가 없는 깊은 의지와의 구별입니다. 앞서 말한 것에 비교하면 전자는 교훈적 의지와 후자는 작정적 의지와 대응이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고 명령을 주셨을 때 우리는 그 명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삭으로 하여금 행하기를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가리켜 ‘나타난 의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창 22:12a)고 하심으로써 본래부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도록 하게 하실 의지가 없었음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하여 알게 되는 숨겨졌던 의지가 있는데 이를 가리켜 ‘숨겨진 의지’라고 합니다. 끝으로 ‘비밀한 의지’와 ‘계시된 의지’의 구별이 있습니다. 전자는 작정과 관련이 되며 후자는 교훈과 관련이 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예를 들어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의지가 심오하고 깊이를 측량할 길이 없으면서(시 36:6; 롬 11:33, 34),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 모두에게 알려지며 결코 멀리 있지 않음(신 30:14; 롬 10:8)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는지는 감추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선택은 비밀한 의지이지만, 그것이 미리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도 비밀한 의지는 어느 정도 확실하게 드러나며 또한 낙원에 이르게 되면 선택의 비밀한 의지는 밝혀지게 됩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계획을 세워 만물을 존재케 하시고 그 가운데 모든 일들을 일어나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이 모든 일들이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고백합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최고의 선이시며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에 따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신앙고백서를 낳은 역사도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이 글을 읽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이 순간의 일도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 줄 알고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할 것입니다.
151 no image <웨신해설14-①> 하나님 :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획에 따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제2장 1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4529 2011-02-23
하나님 :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획에 따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제2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조직신학 교수 > 2장 1항 _ “오직 한 분뿐이신 살아계시며 참된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본질과 완전함이 무한하시며 지극히 순결한 영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몸이 없으시며, 여러 부분들이 없으시고, 고통이 없으시며, 불변하시고, 광대하시며, 영원하시고, 헤아릴 수 없으시며, 전능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획에 따라서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제2장 1항에서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하나님과 관련한 명제들 가운데 이번에 살필 것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획에 따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이 명제가 고백하고 있는 내용은 두 가지로 하나는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의 원인으로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의 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만물이 존재하는 것과 그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뜻에 따라서 나타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찬양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이러한 찬양을 통해서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의지, 곧 어떤 존재나 일, 무엇이든지 그것들이 그렇게 나타나도록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원하심이 그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원인임을 계시합니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 44:24). 하나님의 원하심 이외에 다른 어떤 것들은 결코 만물의 궁극적 원인이 아니며, 이 세계는 피조물일 뿐이며 결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므로 존재케 되고 일어나는 만물 가운데는 평안뿐만 아니라 환난과 같은 일도 포함이 됩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왜 선하시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평안만이 아니라 환난도 이 세상 가운데 두시는지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의 지혜와 관련하여 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이 있도록 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환난이 과연 필요한가는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로 판단하실 일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이 한 예가 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셔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따른 것이며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그의 의지에 따른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도다”(행 2:23). 만물을 원하시는 대로 존재케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는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며 그 분이 최고의 선이시기 때문에 그 분의 의지에 대하여 어찌하여 그렇게 하는지를 묻고 이의를 제기할 자란 그 누구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단 4:35).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서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의지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여 결정하시는 의지의 행사가 그의 본질적 속성에 따라 행하여짐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는데 반하여 그의 결정은 변한다거나, 혹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데 그의 결정은 불의한 경우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의지의 결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속성을 반영하며 따라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계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의지의 특성과 관련하여 살필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대로 모든 일들을 행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그 의지가 필연적인가 아니면 자유로운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 자신과 관련하여서는 그 의지가 필연적이지만 그 외의 일에 관련하여서는 자유롭게 결정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필연적인 점은 하나님은 자신을 필연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사실과 관련합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선이시며 또한 궁극적인 목적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그 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자신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원함이며 결정입니다. 바로 여기서 신앙고백서가 하나님의 의지에 따른 계획을 말하면서 그 모든 계획이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까닭이 설명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과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자신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은 바로 하나님께서 또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바라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사실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이 모든 일을 그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실 때 모든 일은 또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에 따라 계획이 되며 실행이 됩니다. 그리하여 시편 8편에서 찬양하듯이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며(시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아울러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합당한 본분인 줄 알며 기쁨으로 여깁니다.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유 1:25).
150 no image <웨신해설13-②> 하나님 : 가장 지혜로우시며,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신 하나님_김병훈 목사
편집부
4581 2011-01-05
하나님 : 가장 지혜로우시며,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신 하나님 (제2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2장 1항 _ “오직 한 분뿐이신 살아계시며 참된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본질과 완전함이 무한하시며 지극히 순결한 영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몸이 없으시며, 여러 부분들이 없으시고, 고통이 없으시며, 불변하시고, 광대하시며, 영원하시고, 헤아릴 수 없으시며, 전능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획에 따라서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선과 진리가 풍성하시고, 불의와 범죄와 죄를 용서하시며,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에 가장 공의로우시며 지극히 두려운 분이시고,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범한 자를 결단코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제2장 1항에서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하나님과 관련한 명제들 가운데 이번에 살필 것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으시며, 전능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십니다.” 이 명제가 고백하고 있는 내용은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전능성과 지혜로우심과 거룩성과 자유로우심 그리고 절대성입니다. 지난 호에 이어 하나님의 지혜로우심과 거룩성과 자유로우심 그리고 절대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행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들을 매우 지혜롭게 작정하시고 행하십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각각에게 있어서 매우 실제적인 고백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은 그가 작정하신 목적을 이루기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만물들 각각을 이끌어 가시며 다스리심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믿는 우리는 항상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의미가 있음을 고백하고 의지하여야 하는 신앙의 요구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교훈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적용할 수가 없는 말씀입니다. 비록 나는 내가 겪는 일들의 의미를 다 헤아릴 수 없다하더라도, 그것이 합력하여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어 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고백은 목적에 대한 방식을 선택해 가는 하나님의 지혜를 믿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섭리에서 뿐만 아니라 창조와 구속의 측면에서 찬양을 받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나이다”(시 104:24)의 찬양이나, “모든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8-11)는 바울의 고백이 그러합니다. 창조와 섭리 그리고 구속의 사건 안에 담기어진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고 이를 찬양하는 것은 한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기쁨이며 또한 믿음의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모든 성도들과 함께 새 노래로 올릴 찬양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창조와 구속의 위대한 사역을 지혜와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 권능을 중심 주제로 담을 것입니다(계 4:11; 5:12-13 참조).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해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우선 도덕적 측면에서 어떠한 흠도 없으시다는 점을 말합니다. 도덕적 흠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교훈과 법에 어긋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법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도덕적 흠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서 더하여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다움을 드러내실 때 바로 그 자체가 거룩함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도덕법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완전함과 뜻에서 비롯되는 것인 만큼, 하나님의 본성과 그 뜻에서 어긋나는 모든 일을 미워하시며 또한 그것에 일치하는 일을 기뻐하시며 하나님의 완전함의 영광과 광채를 드러내실 때 절정에 이른 거룩성을 나타내시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가득 찬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보고(사 6:3),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사 6:3a)고 말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성은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죽음의 두려움을 상기시키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자유와 절대성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도록 합니다. 이 고백이 교훈하는 바는 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스스로 기뻐하며 하기를 바라시는 대로 행하시며, 다른 어떤 존재나 조건에 의하여 원하시는 바를 행하지 못하는 제약을 전혀 받는 법이 없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시는 자유로운 분이시며(시 115:3), 원하시는 바대로 존재하시는 스스로 계시는 절대적인 분이십니다(출 3:14).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는 교훈을 새기고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일에서 참된 기쁨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149 no image <웨신해설13-①> 하나님 : 헤아릴 수 없으시며전능하신 하나님_김병훈 목사
편집부
4939 2010-12-22
하나님 : 헤아릴 수 없으시며전능하신 하나님(제2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2장 1항 _ “오직 한 분뿐이신 살아계시며 참된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본질과 완전함이 무한하시며 지극히 순결한 영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몸이 없으시며, 여러 부분들이 없으시고, 고통이 없으시며, 불변하시고, 광대하시며, 영원하시고, 헤아릴 수 없으시며, 전능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획에 따라서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선과 진리가 풍성하시고, 불의와 범죄와 죄를 용서하시며,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에 가장 공의로우시며 지극히 두려운 분이시고,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범한 자를 결단코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신 계시 통해 하나님을 알게 돼” 제2장 1항에서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하나님과 관련한 명제들 가운데 이번에 살필 것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으시며, 전능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십니다.” 이 명제가 고백하고 있는 내용은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전능성과 지혜로우심과 거룩성과 자유로우심 그리고 절대성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전능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145편 3절은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이 찬양은 두 가지 점을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너무나도 크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너무나도 크셔서 그를 측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대조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 곧 크시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후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 곧 측량할 길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면서도 그 고백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바를 찬양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없는 바를 찬양합니다. 전 편에서 살핀 바처럼 하나님은 변화가 없으시며 광대하고 또한 영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특성들은 모두 우리가 경험 영역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비록 언어로 표현이 되고 있지만 그 언어가 가리키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대상은 변화를 겪으며, 유한하며, 시간의 제한 아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불변성과 광대성과 영원성을 말합니다. 즉 긍정이 아니라 부정의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사실은 우리가 갖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주의 자연현상들이나 역사의 사회 사건들에 대해서 갖는 지식과 성격이 전혀 다른 것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분석하고 개념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하여 지식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석에 근거한 개념적 분류가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분류를 따라서 말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의 방식에 따라서 말할 뿐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유한한 우리가 파악하거나 헤아릴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대해서 그것이 참이라는 확신을 과연 가질 수 있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가 없는 불가해한 하나님에 대해 갖는 지식은 유한한 우리가 분석하여 파악한 지식이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신 계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택한 그의 자녀들에게 영생을 주고자하는 그 목적과 뜻에 따라서 유한한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적절한 모양과 방법으로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오직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그 계시를 받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제한적이나마 알 수가 있으며 그 지식은 참된 지식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인정하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분은 전능한 분이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과연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능성을 그릇되게 오해를 하여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도덕적으로 악을 행하거나, 자신의 존재를 파멸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어긋난 일을 행하거나, 또 네모난 삼각형을 만드시는 것과 같은 모순된 일도 행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악하거나, 모순된 일을 하시거나, 자신의 본질과 성품에 어긋난 일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이란 하나님께서 의지를 가지시고 행하시고자 하는 일은 어떤 일이든지 하실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라도 그것이 악한 것이거나 모순되거나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의 작정하신 뜻대로 행하실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성의 교리입니다.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b)고 말한 것이나 예레미야 선지자가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고 말한 것은 지금 나타난 바의 일들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한계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설파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작정을 하지 않으셨을 뿐, 만일 하나님께서 행하기로 작정을 하신 일이라면 그 어떤 일도 못하실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전능성의 교리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난 일 이외에는 다른 일을 행하실 수 없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다음호 계속>
148 no image <웨신해설12> 하나님 : 불변하시고 광대하시며영원하신 하나님(제2장 1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5162 2010-12-08
하나님 : 불변하시고 광대하시며영원하신 하나님(제2장 1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하나님의 본질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 초월해” 신앙고백서가 제2장 1항에서 고백하는 하나님과 관련한 명제들 가운데 이번에 살필 것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광대하시며, 영원하십니다.” 이 명제가 고백하고 있는 내용은 하나님의 불변성과 광대성 그리고 영원성입니다.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이심, 곧 본질에 있어서 어떠한 변화를 겪지 않으시며, 또한 그가 세우신 뜻을 바꾸시는 변화를 행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시 102:26a)의 말씀이나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니라”(말 3:6)는 말씀, 그리고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는 말씀 등은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여 줍니다. 어떤 이들은 창조로 인하여 하나님에게도 어떤 변화가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신 이후에 나타나는 변화는 창조주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변화는 단지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로 인하여 존재케 된 피조물에 대하여 갖게 된 새로운 관계의 나타남일 뿐이며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 변화가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일도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반론이 되지를 못합니다. 성육신하신 일은 성자 하나님이 사람으로 변화를 겪으신 것이 아니며, 말씀이신 성자께서 단지 인성만을 취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서의 성자 하나님은 그 신적 본질에 있어서 아무런 변화를 갖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반론들은 하나님의 의지와 관련하여 제기가 됩니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며” 또한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는” 법이 없으신 분이십니다(민 23:19).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그것의 실행의 의지를 밝히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불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흔하게 드는 사례는 히스기야가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생명을 15년 연장을 받았던 사건입니다(사 38:1-6). 하지만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죽음이 예언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한 뜻에 따라 일어날 일이 예언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는다면 히스기야가 제2 원인에 따라 죽게 될 것임을, 곧 예를 들어 질병에 걸려 죽게 될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제 2원인에 간섭하시어 히스기야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히스기야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알리시고, 히스기야가 이에 반응하여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마침내 히스기야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는 일련의 모든 과정들을 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작정하신 뜻 가운데 두셨던 것입니다. 기도를 들으시고 그것에 대해 응답하시는 것도 기도를 행할 때 기도의 응답을 실행하시는 조건성도 또한 하나님의 작정을 실행하는 방식이지 하나님의 뜻이 바뀌시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히스기야의 사례는 하나님의 뜻의 불변성을 부정하는 사례가 아닙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돌이키시거나(렘 18:10), 뜻을 돌이키사 화를 내리시지 않았거나(출 32:14), 또는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을 하셨다(창 6:6)는 말씀들이 나옵니다. 얼핏보면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이 변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후회는 하나님에게 해당이 되는 특성이 아닙니다. 다만 표현이 사람의 양식에 따라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인 우리들이 하나님을 이해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의 초월적이며 탁월하신 존엄과 완전성에 따라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이러한 표현들을 통해 나타내는 바는 사람의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호의를 거두시고 형벌을 내리기로 하셨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경우를 보이는 것입니다. 불변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광대하시며 또한 영원하십니다. 이러한 속성들은 하나님은 완전함이 무한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연결이 됩니다. 공간적 측면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완전하신 무한함은 광대함으로, 시간적 측면과 관련하여 영원함으로 계시가 됩니다. 광대하심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 66:1).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 8:27).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성전 안에 들어가 포함이 되는 분이 결코 아니시며, 온 우주를 완전히 채우시며 그것을 넘어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온 우주에 가득 차 계신 하나님은 또한 우주의 어느 곳에서도 완전한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즉 몸이나 공기가 어떤 공간에 펼쳐져 있는 것처럼 우주를 가득 채우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주의 가장 작은 공간에서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완전하게 계십니다. 따라서 광대하신 하나님은 그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시며 알지 못하시거나 듣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십니다.(시 139편 참조)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다면 마귀와 귀신들, 또는 악인들에게도 함께 하시며, 또한 지옥에도 계시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마귀와도 함께 계실 수 있으며, 지옥에도 계실 수 있겠습니까? 우선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또한 만물의 보존자로서 마귀들과도 함께 하십니다. 그렇지만 마귀와 악인들에게는, 그리고 지옥에서는 오직 죄를 형벌하시는 심판주로서만 함께 하실 뿐이며, 결코 악을 인정하는 의미에서 이들에게도 함께 하시고 계시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오직 은혜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악인에게는 오직 공의와 형벌로, 의인에게는 은혜와 복으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영원하십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 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6-27).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의 단순한 무한한 연장으로 이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시간은 부분이며 영원은 전체인 것과 같은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시작이 없으시며, 또한 끝도 없으시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연속성이 없으심을 뜻합니다. 모든 피조물에게는 전과 후가 있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는 것과 같이 연속적인 변화가 이어져 나타납니다. 시간이란 이러한 변화와 함께 나타납니다. 하지만 완전하신 하나님에게는 어떠한 변화도 없으며 시간의 제한도 없으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계 1:4)라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제, 오늘, 미래의 연속적인 변화를 좇아서 살아계심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의 예에 따라서 과거, 오늘,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안에서 계속 존재하시는 것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과거에 계실 때는 현재나 미래에는 계시지 않았고, 현재에 계실 때는 과거나 미래에 계시지 않으며, 미래에 계실 때에는 과거나 현재에는 더 이상 계시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을 다 담고 있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항상 ‘지금’으로 있을 뿐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 분이십니다. 피조물의 존재를 규정하는 시간이란 결코 ‘항상’ ‘있었거나 있을’ 것이 아닙니다. 있었던 적이 있었을 뿐이며, 또한 있을 때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사라짐과 더불어 시간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147 no image <웨신해설11> 하나님 : 완전함이 무한하시며지극히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_김병훈 목사
편집부
5020 2010-10-27
하나님 : 완전함이 무한하시며지극히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예식만을 좇는 형식적 태도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말아야” 전편에 이어 두 번째로 제2장 1항에서 신앙고백서가 하나님과 관련하여 고백하는 주요 명제들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하나님은 본질과 완전함이 무한하시며 지극히 순결한 영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몸이 없으시며 여러 부분들이 없고 고통이 없으십니다.” 사람의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하나님 이 명제가 담고 있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은 본질과 완전함이 무한하시다는 사실이며, (2)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은 지극히 순결한 영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몸이 없으시고 여러 부분들이 합하여 되신 분이 아니며 고통이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정의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언어로 어떠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해 정의를 내릴 때 사람의 언어는 그 대상을 품는 어떤 것, 곧 대상보다 더 큰 분류를 지칭하고, 또 그 분류 안에 속한 다른 것들에 비해 그 대상을 특별히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을 그 분류에 부가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에 대해 정의를 내릴 때 사람보다 더 큰 분류인 동물을 지칭하고 동물의 범주 아래에 포함이 되는 다른 동물들, 예를 들면 코끼리, 사자, 호랑이 등과 비교하여 사람에게 독특한 특징을 덧붙이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는 식의 정의가 가능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우에는 하나님을 포함하는 더 큰 분류를 생각할 수가 없으며, 또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정의하는 것과 같은 방식과 같이 사람의 언어로는 하나님을 정의할 수가 없습니다. 혹시라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각각은 모두가 하나님이라는 점 때문에 어떤 정의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위격상의 차이를 담는 정의가 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본질을 설명하는 정의는 될 수가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드릴 때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의는 아니라 할지라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그것에 가장 비슷한 진술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입니다. 이 말씀에 기초하여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이 순결한 영이심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부정의 방식’(via negationis)을 통해서 접근되어야 합니다. ‘부정의 방식’이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 아니신가를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무한하며, 불변하시다는 말들이 그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순결한 영이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육체와 같은 것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며, 보이지 않으시고, 이런 저런 것들로 혼합이 된 분이 아니라는 부정의 방식을 통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몸을 가지고 계시다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는 정죄를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몸을 가지고 계시다면 하나님은 결코 한 분이실 수가 없습니다.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러 부분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거나, 아니면 전체가 하나로 통일된 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부분들로 이루어졌다면 부분들은 유한하거나 무한할 터인데 유한하다면 하나님이 유한한 부분들의 합이 되니 무한하신 분일 수가 없고, 또한 무한하다면 하나님은 여러 무한한 부분들의 합이 되니 무한한 많은 것들을 전제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무한이라는 하나님의 본질이 많은 수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인정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유한한 것이든 무한한 것이든 부분들의 합이실 수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몸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이 전체로 통일된 한 몸이라면 어떨까요? 마치 공기나 물이 전체로나 부분으로나 동일한 한 성질인 것처럼 하나님도 전체가 동일한 한 몸이라고 생각을 할 수는 없을까요? 이것도 틀린 생각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공기나 물이 그런 것처럼 하나님도 구분하여 나눌 수가 있을 것이며 그렇다면 분리된 양이 각각 또한 여전히 물이나 공기인 것처럼 하나님도 여럿이 있다는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몸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지 하나님이 여럿이거나 또는 유한하다는 것을 뜻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순결한 영이시라는 것은 바로 이 점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은 몸이 없으시며 오직 한 분이실 뿐이며 무한하신 분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몸을 가지고 계신다면 하나님은 결코 보이지 않는 분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모든 물체가 다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감지될 수는 있습니다. 모든 물질은 사람의 감각기관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반응을 통해서 그것의 존재가 감지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물질의 반응 형식을 통해서 감지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 1:17)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고 알리신 이름에 담겨 있는 바는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의 혼합이나 합성이 아니며 완전히 순수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의미에서 완전히 순일(純一, simplex)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완전하며 무한하신 분으로서 그 어떤 것에도 자신의 존재를 의존하지 않으시는 절대적 의미에서 자존하시는 분이시며 스스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몸을 가지고 있으시다면 결코 순일하며 자존하시며 영원하신 분이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실 수가 없습니다. 순결한 영으로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은 결코 변화를 겪으시거나 스스로 변질이 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어떤 것들이 모여 이루어지거나 합성이 된 분이 아니라 오직 순일한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처음과 끝이 동일하시며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아닌 어떤 힘이나 변화에 의하여 변화를 강요받으시거나 자신의 뜻이나 본질을 훼손당하시는 고통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람이 아는 것과 같은 소위 고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스스로 계시며 완전한 분으로 순결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변치 않으시며 변함을 겪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시간의 관점에서 영원하신 분으로 고백이 되며, 공간의 관점에서는 어디에나 계시며 어디에서나 동일한 분으로 계심을 뜻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든가(시 11:4), 그의 입으로 말씀하시고(잠 2:6) 그의 손으로 행하셨다(왕상 8:15)는 등의 표현이 나옵니다. 또 하나님께서 후회하시고(삼상 15:11,35), 진노하시고(민 11:1), 또는 기뻐하셨다(사 56:4)는 등의 표현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에 빗대어 하나님을 나타낸 것으로서 신인동형론적이거나 신인동정론적 표현들이라고 일컫습니다. 하나님이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를, 하나님의 손과 팔은 하나님의 권능을, 하나님의 입의 말씀은 하나님의 교훈과 진리를, 하나님의 귀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자비 등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후회하시거나 진노하시거나 기뻐하신다는 표현 등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곧 하나님의 교훈에서 벗어나 있거나 순종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현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몸을 가지고 계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인간의 상상력으로 형상물을 만들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하며, 영적 각성 없이 예식만을 좇아가는 형식적인 태도로 예배를 드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실로 우리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한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시고 죽지 아니함이 그에게 있으시고 가까이 가지 못한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가 없는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가지신 순결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146 no image <웨신해설10> 하나님 : 오직 한 분이신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_김병훈 목사
편집부
4778 2010-09-01
하나님 : 오직 한 분이신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2장 1항> : “오직 한 분뿐이신 살아계시며 참된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본질과 완전함이 무한하시며 지극히 순결한 영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몸이 없으시며, 여러 부분들이 없으시고, 고통이 없으시며, 불변하시고, 광대하시며, 영원하시고, 헤아릴 수 없으시며, 전능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시며, 가장 절대적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변하지 않으며 공의로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계획에 따라서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선과 진리가 풍성하시고, 불의와 범죄와 죄를 용서하시며,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에 가장 공의로우시며 지극히 두려운 분이시고, 모든 죄를 미워하시며 죄를 범한 자를 결단코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감각은 사람들에게 심겨져 있어” 제2장 1항에서 신앙고백서가 하나님과 관련하여 고백하는 주요 명제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것들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합니다. 이번 회에서는 그 가운데 하나만을 설명하기로 합니다: “오직 한 분뿐이신 살아계시며 참된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이 명제가 담고 있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는 사실이며, (2)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만이 살아계시고 참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어떠한 설명의 부연이 없이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변증적인 노력들을 제시하지 않은 채 하나님이 행하신 여러 일들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과 동일한 형식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믿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고 교훈하십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결코 아무런 증거도 없는 단순한 상상력의 결과물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자연 세계와 성경 가운데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지으셨음을 선포하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증거하는 성경은 또한 자연 세계에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이를테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의 말씀이나,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는 말씀이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증거가 객관적으로 분명하다는 성경의 증언은 하나님의 존재가 단지 믿음에 의한 발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성에 의한 발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자연 세계를 바라보며 이성의 빛을 따라갈 때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는도다”(시 14:1a)고 교훈을 합니다. 주의할 표현은 ‘어리석음’입니다. 이성의 빛에 비추어 증거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인하거나 깨닫지 못하니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 가운데 다른 면에 있어서는 이성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하나님에 관한 이성적 증거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어둠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어둠이 해소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계시를 바르게 인식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문제는 여전히 이성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눈이 열리게 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자연 세계의 증거들은 이성을 따라 분명하게 보이게 되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존재는 이성의 발견이기도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영적 어둠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존재를 모른다 할 수 없지만 밀려들어오는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증거들을 애써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실과 관련하여서는 신앙고백서 제6장의 주제인 인간의 타락과 죄의 형벌을 다룰 때에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무신론자란 사실상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감각을 사람에게 심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이성의 능력이 있듯이 이러한 신성에 대한 감각도 주어져 있습니다. 앞서 살펴 본 시 19편 1절과 로마서 1장 19-21절의 말씀 이외에도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2-23)는 말씀이 또한 이 사실을 증거합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떨쳐 버리려고 하여도 그럴 수가 없는 하나님의 증거가 또 있으니 그것은 양심입니다. 한 동안은 양심이 화인 맞은 것처럼 악행을 마구 행할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양심의 고통과 형벌의 두려움을 결코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하나님께서는 자기 존재의 흔적을 사람의 내면 안에 심어 두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의 섭리 가운데에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6-27). 하나님은 모든 인류들 각각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알되 그것을 애써 부정하는 영적인 미련함의 탓일 뿐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임을 고백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구약의 몇 구절을 찾으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와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5)는 말씀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성경의 증거를 신약에서도 찾아본다면,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 8:4)는 말씀과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는 말씀 등이 그러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증거 구절들은 성경에 가득차 있어서 더 이상의 예를 드는 것은 불필요한 일입니다. 요컨대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라는 신앙고백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 이외에 하나님과 같은 분은 결코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타락하여 우상을 섬기며 그것들을 신이라 일컫는다고 하더라도, 또 천사나 마귀와 같은 영적 존재들을 신이라 일컫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그것들은 결코 참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참조: 신 32:17; 시 115:4-7; 고후 4:4; 갈 4:8) 여기서 주의하여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 결코 없다는 말은 참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하나님으로 계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는 2장 3항을 다룰 때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하나님이심 곧 하나님의 본질과 관련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고 있는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임을 유념하여야 하겠습니다.
145 no image <웨신해설9> 성경: 성경해석의 원리와 성경으로 말씀하는 성령님(1장 9,10항)_김병훈 목사
편집부
6299 2010-08-03
성경: 성경해석의 원리와 성경으로 말씀하는 성령님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1장 9,10항> : <9항>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어떤 말씀의 참되며 완전한 의미에 대해 의문이 있을 때에는 (그 의미는 여러 가지가 아니라 단지 하나 뿐인데), 그 의미를 찾아 알아내기 위하여 보다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다른 말씀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0항> “신앙과 관련한 모든 논쟁들을 결정하여야만 할 때, 그리고 교회 회의들의 모든 신조들, 교부들의 견해들, 사람들의 교훈들과 사사로운 사상들을 검토해야만 할 때, 전적으로 의지하여야 할 판결을 내리실 최고의 판결자는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성령님 이외에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의 조명 아래 익혀 순종해야 하는 신앙과 삶의 표준” 제1장 9, 10항에서 신앙고백서가 성경과 관련하여 고백하는 주요 명제들은 이러합니다. (1) 성경 해석의 무오한 규칙은 성경 자체이므로, 성경의 의미는 보다 명확한 구절을 통해서 불분명한 구절들을 풀어내는 해석의 원리에 따라 밝혀져야 합니다. (2) 모든 신앙 논쟁과 교리의 결정 등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최고의 판결자는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오직 성령님뿐입니다. 성경은 신앙과 삶의 무오한 규칙입니다. 여기에 아울러 고백하여야 할 또 하나 무오한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해석과 관련한 것으로 신앙과 삶의 무오한 규칙으로서의 성경은 그 성경 자체가 성경을 해석하는 무오한 규칙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이 신앙의 절대적 규범이라는 사실은 성경을 해석하는 규칙이 성경 자체에 있을 것임을 이미 함축하고 있습니다. 절대 규범인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 성경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이 성경의 권위를 제한하는 절대 권위를 갖게 됩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그것의 권위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제한하는가의 문제를 낳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로서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완전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구원의 꼭 필수적인 조항에 관한한 통상적인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을 만큼 명료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은 성경 스스로 계시의 뜻을 해석할 규칙을 제공합니다. 개혁신학은 신앙고백서가 명시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성경 해석의 이러한 규칙을 가리켜 ‘성경의 유비’(analogia Scripturae)라는 용어로 일컬어 왔습니다. 성경 스스로에 근거하여 성경을 해석한다는 ‘성경의 유비’가 말하는 해석의 원리는 이러합니다. 첫째, 어려운 구절을 만났을 때 성경 이외의 다른 문헌이나 전통 또는 사상을 끌어들여 해석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둘째, 이미 그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난 구절들을 근거로 하여 성경 전체의 복음과 신앙의 교훈에 비추어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려운 구절의 의미를 설명해가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구절들이 다중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의미만을 전달함을 덧붙입니다. 이를 테면 성경의 전체적인 교훈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입니다. 의미가 명료한 성경 구절을 기초로 하여 의미가 불분명한 구절들을 해석해 가는 일반적인 노력을 ‘성경의 유비’라고 한다면, 그 명료한 의미들의 해석적 결과에 기초하여 신학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불분명한 구절들의 의미를 해석해 가는 노력을 가리켜서는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라고 일컫습니다. 즉 ‘성경의 유비’는 성경 해석의 형식적 측면을 표현한 것이며, ‘신앙의 유비’는 성경 해석의 내용적 측면을 반영한 것입니다. 신앙고백서가 9항에서 ‘성경의 유비’ 또는 ‘신앙의 유비’의 해석 원리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교훈하고자 하는 바는 기독교 신앙의 교리는 반드시 성경의 해석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고백서가 앞서 6항에서 고백한 바처럼 기독교의 신앙 진리를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또는 추론하여 확립할 때 성경의 편향된 구절들이나 불분명한 구절들에 근거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에 기초하여 성경을 해석하고 오직 그 토대 위에서만 신앙과 삶을 인도하는 신학의 전반이 세워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물론 여기서 신앙고백서의 논점은 성경의 모든 구절들이 ‘성경의 유비’에 따라 해석할 때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 전반에 걸친 이해의 토대 위에서 신학적 구조를 잘 이해하면서 불분명한 구절들에 대한 해석적 접근을 하여야 하며, 그 결과 성경의 복음적 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어야 함을 강조함이 9항의 요지입니다. 여기서 신앙고백서의 성경관과 관련하여 기억해두어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명료한 것으로 불분명한 것을 해석한다는 ‘성경의 유비’ 또는 ‘신앙의 유비’는 특별할 것이 없는 매우 단순한 이치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원리는 성경에 대한 중요한 고백을 전제로 합니다. 우선 이 원리는 신앙고백서가 2항과 3항에서 고백한 바처럼 성경의 각 권의 책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또한 각 권의 책들은 오고 오는 모든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마치 통일된 하나의 책인 것처럼 하나님의 일관된 구원 경륜을 담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러한 전제 위에서 신앙고백서는 명료한 구절로부터 불분명한 구절을 해석하되 성경 전체의 통일된 안목에서 그 의미를 풀어가야 함을 강조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강조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의 성경 해석의 원리는 곧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계시라는 성경관을 전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고백서는 현대신학의 고등 비평학과는 근본적으로 성경관을 달리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대한 마지막 신앙 항목으로 10항에서 언급하고 있는 종교의 모든 논쟁들의 최종적 권위를 가진 최고의 심판자이신 성령님을 고백합니다. 신앙고백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논쟁들은 물론 각종의 신조들과 교부들이나 신학자들의 견해들, 또는 누구의 가르침이나 사상들 모두가 다 성경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하며 성경의 해석적 지지를 받지 못하면 결코 인정이 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는 바처럼 어떤 교리적 판결이 있기 위해서는 분명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계시라는 객관적 근거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는 신앙 논쟁이나 신조들이나 교리들에 대한 검토를 하는 최종적인 최고의 판결자는 성경이라고 말하기보다 성령님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 점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님은 성경으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교회 회의가 어떠한 교리적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이 성경의 올바르며 해석에 따라 분명한 교훈에 일치하여 내려지게 되면 그것은 바로 성경으로 말씀하시는 성령님께서 행하신 것으로 고백을 하고 그 결정에 순종을 하여야 합니다. 성경의 올바른 해석에 기초한 명백한 교훈이 성령님의 인도로 볼 수 있는 까닭은 4항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성경은 사람의 저자들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단어와 사상들을 기록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교회의 결정이 이루어질 때, 그것이 성경의 객관적 교훈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동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이성적인 판단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내적인 설득에 의하여 이루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7항에서 고백한 바처럼 구원의 진리를 사모하며 성령님의 조명을 따라가는 자라야 성경의 교훈을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9항과 10항을 통해 성경에 대한 신앙고백서의 결론을 살피면서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다시금 새기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단지 오래된 고문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영원토록 살아서 지금도 계속해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계시하신 영감된 말씀이며, 그것은 통전적으로 살펴서 깨달아야 할 구원의 전체 경륜을 담고 있으며, 성령님의 조명 아래 겸손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익혀서 순종해야 하는 신앙과 삶의 표준이 되는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Selected no image <웨신해설8> 성경:원문의 권위와 번역의 필요성 (제 1장 8항)_김병훈 목사 (1)
편집부
5187 2010-07-07
성경: 원문의 권위와 번역의 필요성 (제 1장 8항)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제1장 8항> : (구약시대 하나님 백성들의 본래 언어였던)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여러 나라들에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 성경은,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영감이 된 것이며, 같은 예를 찾을 수가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섭리에 의해 모든 시대들에 걸쳐 순전한 상태로 유지가 되었기 때문에, 그 원문의 내용이 원본의 것 그대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 관련한 모든 논쟁에 있어서 교회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원문 성경에 근거하여 최종적인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당연한 권리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성경을 읽고 연구하도록 계명을 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어들을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이 전하여진 각 나라에서 사용이 되고 있는 언어로 이 원문들이 번역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 안에 풍성히 거하고, 사람들이 성경에 비추어 인정될 만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하여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영감된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는 원본에 있어” 제1장 8항에서 신앙고백서가 성경과 관련하여 고백하는 주요 명제들은 이러합니다. (1)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기록이 되었던 성경의 원문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화 섭리에 의해 순전하게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2) 교회는 성경의 원문에 근거하여 모든 종교적인 논쟁의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3) 원문 성경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알지 못하는 성도들도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성경의 주는 영적 부요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야 합니다. 구약 성경은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으며 신약 성경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 가운데 일부분은 아람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10장 11절, 다니엘 2장 4절b부터 7장 28절까지, 그리고 에스라 4, 5, 6, 7장 일부분 등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은 매우 적은 양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류가 없으며 신앙과 행위의 규범으로서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고 말할 때의 성경은 바로 히브리어 또는 그리스어의 원어로 기록된 성경의 원본을 가리킵니다. 이 원본 성경이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영감을 하신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원본 성경은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재 현존하는 것은 원본을 베끼어 놓은, 일종의 갈대 잎인 파피루스 또는 양피지(羊皮紙)에 기록이 되었던 사본들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완전성을 말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사본들은 결코 무오한 것도 아니며 또한 서로들 간에 완전히 일치를 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원본이 소실이 되었다고 하여 성경의 원문까지도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서가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유례가 없는 아주 특별한 보호와 섭리를 베푸심으로 원본 성경의 원문이 순전하게 보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서는 현재 사본들을 통해 구성이 된 성경의 내용이 원본의 원문과 전체적이며 일반적으로 일치를 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본들의 수가 원문의 내용을 밝히기에 충분히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약 성경의 사본들은 고대의 다른 문서들에 비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사본들의 수가 많을수록, 사본들이 원본의 시기에 가까울수록, 그리고 사본들끼리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원본의 내용을 정확히 복구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고대 문헌들의 사본의 수는 열 개를 넘어가는 것이 드뭅니다. 더욱이 유명한 호머의 ‘일리어드’는 650개의 사본들을 가지고 있으나, 원본은 BC 800년 경인 반면에 그것의 사본들은 AD 2, 3세기에 된 것으로 원본과 사본의 기록 시기의 차이가 무려 천년이 넘습니다. 반면에 신약 성경의 사본들은 중요한 것들만 헤아려도 2,300여개에 이르며 전체적으로 5,000여개에 달합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본들이 원본 이후 2-3세대 안에 기록된 것들입니다. 아울러 초대 기독교인들이 사도들의 글을 인용하여 쓴 문서들의 것들만 모아도 원문의 내용을 추적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본들 사이에 차이가 있지는 않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상의 어떤 중대한 차이를 일으킬 만한 것이 없는 작은 차이들뿐입니다. 즉 원본의 원문이 사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순전한 상태로 전달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원문들이 각 나라와 민족들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각 나라의 말들로 번역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성경의 원어 자체가 기록된 당시에는 누구나 읽고 말할 수 있는 널리 통용이 되던 언어라는 점에서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교훈을 살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풍요로움 가운데 성경의 교훈에 합당한 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합니다(요 4:24; 5:39; 행 17:11). 이와 관련한 신앙고백서의 교훈은 성경의 번역을 금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사사로이 성경을 읽는 것을 매우 경계하였던 당시의 천주교회의 결정을 반대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천주교회는 일반 성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하면 이들이 교만해지고 성도들의 권한 밖의 일들에도 호기심과 의문을 갖게 되며 급기야 교회의 교도권을 가벼이 여기고 스스로 더 지혜롭다고 여길 것이라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소위 이단들이 등장하게 된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이단의 오류를 방지하기 위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에 대해 무지하도록 하는 것은 더욱 더 해로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세상에 등장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성경을 읽는 일을 허용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교훈들을 겸손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연구하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번역하거나 성경을 읽는 일을 경계하여야 한다고 하는 천주교회의 주장은 얼핏 보기에는 친절하며 성도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천주교회가 전통의 미명 아래 범하고 있는 그릇된 교리나 오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로 해석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천주교회가 라틴어 이외에 각 나라의 언어로 미사를 드리거나 성경을 번역하여 내 놓는 일들은 개신교의 영향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을 읽고 그 교훈을 부지런히 탐구하도록 하는 일에 개신교에 비해 소극적인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을 번역하여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신앙고백서의 교훈은 번역 성경과 원문 성경이 권위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신앙고백서는 번역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성경을 읽어 성경의 교훈을 알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하는 한 편,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모든 권위는 원본에 있음을 또한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어서 교리를 확정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논의들은 물론 모든 종교적 논의들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원문에 근거하여 결정이 되어야 함을 교훈합니다. 앞서 3항을 해설하면서 성경의 영감에 대해 말할 때 언급한 것처럼, 성경은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영감이 되었으며(완전 영감), 단지 사상만이 아니라 단어들도 영감이 되었고(축자 영감), 또한 사람의 저자가 기계적으로 사용이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이며 문화적인 특성들이 활용이 되었음(유기 영감)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백은 번역본이 아니라 원본에 대한 고백입니다. 따라서 원본의 원문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경을 가지고 종교적 논의의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 570호(10.7.10일자)6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의 제목 성경: 구원에 필요한 계시로서의 명료성을 성경:원문의 권위와 번역의 필요성 (제 1장 8항)으로 수정합니다.
143 no image <웨신해설7> 성경: 구원에 필요한 계시로서의 명료성 (제 1장 7항) / 김병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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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3 2010-06-2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설(7)> 성경: 구원에 필요한 계시로서의 명료성 (제 1장 7항)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조교수 "누구라도 구원의 기본적인 진리를 이해할 수 있어" 1장 7항 :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들이 그 자체로 다 똑같이 명백한 것은 아니며, 또한 모든 이들에게 다 똑같이 분명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구원을 받기 위하여 알고 믿고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그러한 것들은, 학식이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보통의 수단들을 적절히 사용하여 그러한 것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경의 이 곳 또는 저 곳 등에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고 밝혀져 있습니다." 제1장 7항에서 신앙고백서가 성경과 관련하여 고백하는 주요 명제들은 이러합니다. (1) 성경에 담긴 내용들은 알기 쉬운 것도 있고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2) 그렇지만 구원을 받기 위하여 알고 믿고 또 지켜야 하는 내용들은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3) 그러므로 학식이 많고 적음에 상관이 없이 누구나 일반적이며 통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그러한 내용들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통상적인 방법으로 이해돼 신앙고백서는 앞서 살핀 6항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성경에 있는 계시의 교훈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한 것으로 사람의 구원을 위한 믿음과 선행에 필요한 모든 교훈들을 완전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7항에서 신앙고백서는 성경이 완전하며 충분하게 밝혀 주고 있는 계시의 모든 교훈들이 그 자체로 모두가 명료하거나 또는 누구에게나 알기 쉽도록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님을 말합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계시들이 그 자체로 모두가 이해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이미 성경 스스로가 증거를 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를테면 베드로후서의 "...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의 계시된 교리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며 또한 정당한 논리와 필연적인 추론을 사용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신관이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과 같은 교리들 생각해보면 이러한 교리가 성경에 있다는 사실은 명료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신지 또는 어떻게 참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참 사람이신지에 대한 방식들은 매우 신비로우며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사사로이 풀려고 하다가는 진리에서 어긋나며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가 있으므로 주의를 하여야 합니다. 또 어떤 성경의 교훈들의 경우에는 사람들의 이해력에 따라 차이가 나서 어떤 이는 다른 이들이 쉽게 받아들이는 교훈이 어렵게 여겨지기도 하고, 또 그 반대의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고백서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알아야 하며, 믿어야 하며, 또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교훈들의 명료성을 강조합니다. 이것들을 알기 위하여 특별히 많은 학식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며, 또 구원의 교훈들을 풀어내기 위하여 통상의 방법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방법이 요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을 받기에 꼭 필요한 기본 교훈들은 성경의 이 곳과 저 곳 등에 계시되어 있어서 부지런히 그리고 진지하게 찾는 자라면 누구라도 알 수가 있습니다. 신앙고백서가 이처럼 구원에 필요한 기본 교훈들의 명료성을 말하면서 학식이나 특별한 수단의 필요성을 부인할 때, 그것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입니다. 성경만으로는 구원의 계시가 불충분하다는 주장을 펴기 위하여 성경에 더하여 구전적 전승을 끌어온 로마 천주교회는 이제 여기에 더하여 성경의 계시들은 신비하며 불명료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오직 교회의 권위 있는 판단에 의해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바르게 풀이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을 합니다. 즉 로마 천주교회는 '가르치는 교회'(ecclesia docens)인 주교들의 해석적 도움을 받을 때에라야만 성경의 교훈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로마 천주교회에 맞서 신앙고백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에는 어떤 신비들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도 아니고, 또 성경의 모든 부분들이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명료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도 아니며, 구원의 필요한 계시들이 성경의 어느 곳을 읽던지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도 아닙니다. 신앙고백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성경 안에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구원에 필수적인 계시들을 신자들의 믿음의 눈으로 부지런히 읽으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 주셨음을 말합니다. 또 성경에는 교만을 낮추고 부지런히 연구하지 않으면 한 발치도 가까이 갈 수 없는 깊고도 넓은 계시들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구원에 꼭 필요한 것들은 명료하여 신자들이라면 다른 해석적 도움이 없이도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임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설령 성경의 어느 곳에서는 구원의 진리가 불명료하더라도 다른 곳의 계시를 살피면 구원에 필요한 교훈들을 명료하게 알 수 있음을 말합니다. 구원 계시의 명료성과 관련하여 종종 오해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읽는 주체인 사람과 관련한 것입니다.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명료성의 교훈은 구원의 진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 구원의 교훈을 명료하게 알 수 있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또 해석을 바르게 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이미 6항을 해설하면서 말씀드린 바처럼 구원을 얻기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깨달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오직 성령님께서 조명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에야 가능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식은 영적인 것이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죄로 인하여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이 이를 깨달아 알 도리가 없습니다. 이치가 이런 만큼 구원에 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지런히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도 중생하지 못하였거나 성령님의 조명을 받지 못하였다면 구원에 꼭 필요한 기본적인 교훈을 결코 명료하게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성령의 내적 조명, 이해의 집중, 교회의 가르침과 설교와 주석 등과 같은 통상적인 수단들의 유용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보통의 경우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지는 것이므로 분명한 신앙의 교훈에 어긋나지 않으면서(analogia fidei) 성경을 따라 해석하며(analogia Scripturae) 교훈과 교리를 정립하는 일은 교회가 성실히 감당하여야 하는 책임이며 권세(potestas doctrinae)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천주교회에 맞서 신앙고백서가 교훈하는 것은 비록 학식이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신앙의 마음과 구원의 열망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을 때에 누구라도 구원의 기본적인 진리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성경의 계시가 명료하다는 사실입니다. 신자는 성령님의 조명 아래 있어야 신앙고백서는 본 7항에서 성도들은 성경을 읽어도 성경 외의 전통이나 교회의 무오한 판단과 같은 외적인 도움이 없으면 성경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위험하거나 해로운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142 no image <웨신해설6> 성경: 구원에 필요한 계시로서의 완전한 충분성(제1장 6항) / 김병훈 목사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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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8 2010-06-2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설(6) 성경: 구원에 필요한 계시로서의 완전한 충분성(제1장 6항)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조교수 1장 6항: "하나님 자신의 영광 그리고 사람의 구원과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성경에 뚜렷이 기록이 되어 있거나, 올바르고 필연적인 논리적 판단에 의하여 성경에서 추론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의 새로운 계시를 통해서이건 사람의 전승을 통해서이건 성경에 밝혀진 것들과 다른 어떤 것들이 더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안에 계시된 일들을 이해하여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성령님의 내적 조명이 필요함을 인정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교회의 정치 조직을 구성하는 일과 관련하여서는 사람들의 활동들이나 사회들과 공통적인 상황들이 있으므로, 이러한 것들에 대한 규정은 자연의 빛과 기독교적 분별을 통해, 그리고 항상 지켜져야만 하는 말씀의 일반 규칙들에 따라서 정하여져야 함을 인정합니다." 제1장 6항에서 신앙고백서가 성경과 관련하여 고백하는 주요 명제들은 이러합니다. ①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들과 관련한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으며, 이것들은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혹은 논리적 추론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② 성경에서 밝혀진 것들과 다른 어떤 것들이 성령님의 새로운 계시라든가 사람의 전승에 의하여 추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③ 성경에 담긴 구원에 관한 진리를 깨달아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이 필요합니다. ④ 그리고 말씀의 일반적인 규칙들에 일치하는 범위 내에서 자연적인 빛과 기독교적 사리분별을 통해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앞서 살핀 바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며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한 성경이 담고 있는 계시를 통해서 알게 되는 내용은 무엇이며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밝혀줍니다. 우선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사람의 구원과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임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진리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렇다고 하여 무한한 내용을 다 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의 진리 자체는 무한하지만 성경에 담겨 있는 진리는 하나님의 무오한 진리이면서도 담고 있는 내용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 자체가 원형이라면 성경은 그 진리에 대한 모형으로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계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담겨 있는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이며 그렇지 않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구원을 위한 믿음과 선행에 필요한 모든 교훈들을 완전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밝혀줍니다. 구원의 계시와 관련하여 성경이 완전하며 충분하게 밝혀 준다고 하여 그와 관련한 교훈들이 모두 성경에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명확하게 밝혀져 있는 것들이 있는 반면에 이러한 것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정당하며 필연적인 추론의 결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서 이러한 예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장에서 보듯이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는 고백을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연결을 하면서 결과적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족장들이 살아있는 자들임을 밝히셨습니다. 곧 성경에서 추론하여 교훈을 끌어내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에 구원의 계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완전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담겨 있음을 말하는 반면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교회의 정치 조직을 구성하는 일과 같이 성경에는 명백하게 드러나 있지 않은 것들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과 관련해서는 일반적인 말씀의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연의 빛, 곧 이성과 도덕 그리고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등과 기독교적인 사리 분별을 통해서 결정할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예배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순서 등은 교회의 형편을 살피어 앞서 말한 원리를 따라서 결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고백서는 한 편으로는 분별없는 합리주의를 피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릇되게 완고한 성경주의에서 성경을 보호합니다. 그리하여 교회 생활에 있어서 임의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선택적 범위과 기준이 제시하여 줍니다. 이러한 성경의 완전성과 충분성의 교훈은 성경 이외에 어떤 다른 계시의 권위를 더하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확고히 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성령의 새로운 계시를 더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소위 재침례교도들과 같은 신령주의 열광자들을 비판하며, 또 사람의 전승을 더하지 말 것을 교훈함으로써 전승을 마치 성경을 대하듯 동일한 경외함으로 대하는 천주교회의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그 누구도 사적으로 계시를 받았음을 말하면서 교회는 물론 다른 어떤 이에게 객관적인 권위를 주장하려는 일이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성령님의 계시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경 이외에 다른 어떤 보충적인 규범을 세워 그것에게 하나님의 영감과 권위를 부여하신 것이 없습니다. 기록된 성경은 확실하고 분명하지만, 전승이란 본질상 불확실하고 불분명하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전승을 용납하는 것은 변질과 부패의 위험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인하여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비판을 확고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밝히신 바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과 구원을 얻기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깨달아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담긴 계시가 불명확하거나 불충분해서가 아닙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 분별합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한 말씀의 지식은 실로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계시의 지식을 깨달아 순종해야할 사람이 죄로 인하여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영적 진리를 이해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성경을 이성적으로 연구하고 학문적 성과를 낸다고 하여도 그것을 심령에 깨달아 은혜를 누리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앙고백서의 개혁신학은 구원의 시작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며 그렇게 시작된 구원을 누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드리는 믿음의 생활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이며,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영광을 뵙는 영화의 구원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됨을 고백합니다. 그러한 이치에 따라서 이 땅에 사는 우리의 구원과 복을 위하여 성령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주시고, 우리의 심령에 빛을 비추시어 그 말씀이 진리임을 증거하시며, 아울러 그 말씀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샬롬!
141 no image <웨신해설5> 성경: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제1장 4,5항) / 김병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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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2 2010-06-2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설(5)> 성경: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제1장 4,5항)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조교수 “성경은 성령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에 의해 관찰되는 것” 1장 4항: “우리가 성경을 믿고 순종하여야 하는 이유는 성경의 권위 때문입니다. 성경의 권위는 사람들이나 교회의 증언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성경의 저자이시며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만 인한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들어야 합니다.” 1장 5항: “우리는 교회의 증언으로 인하여 감동을 받아 성경을 높은 경외심으로 존중히 여기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의 성스러움, 교훈의 감화력, 문체의 위엄, 각 부분들의 내용적 조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림이라는) 성경 전체의 목적,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방편에 대한 완전한 발견, 그리고 기타 비교가 불가능한 탁월한 점들과 그것들의 완전성 등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논증들입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무오한 진리이며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완전히 인정을 하고 확신을 하게 되는 일은 우리의 심령 안에서 말씀에 의하여 말씀과 함께 증거를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내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습니다.” 제1장 4, 5항에서 신앙고백서가 성경과 관련하여 고백하는 주요 명제들은 이러합니다. ① 성경은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시라는 사실로 인하여 신적 권위를 갖습니다. ② 교회의 증언과 성경의 여러 특성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하기에 충분합니다. ③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확신하게 되는 일은 성령 하나님의 내적 사역으로 말미암습니다. 성경의 권위는 신적 기원으로부터 발생해 신앙고백서는 앞서 살핀 제1장 2항과 3항에서 정경인 66권만이 참된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을 이루며, 정경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소위 외경이라는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 교회에서 신적 권위를 갖지 못함을 덧붙여 고백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이어 4항과 5항에서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하고 확신하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또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밝혀줍니다. 우선 4항에서 신앙고백서는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를 지닌 책이므로 성경을 믿고 순종하여야만 한다는 신앙의 도리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러한 권위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밝힙니다. 신앙고백서의 설명은 성경의 권위를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서 찾지 말아야 할 것을 천명합니다. 이것은 설령 교회의 증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의 신적 권위의 근거가 되지 못함을 강조하기 위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여기서 천주교회의 주장에 대한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명합니다. 천주교회는 ‘교회는 그 존재를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에 의지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교회가 성경보다 우선하며 성경에 교회의 존재를 의존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회는 교회가 성경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경이 그 존재와 권위를 교회에 의존하며 교회에 의하여 인정을 받고 보호를 받는다고 믿습니다. 이에 대해서 신앙고백서는 ‘성경은 스스로 그것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하며 그것이 스스로 증거하는 바대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은 모든 교회가 믿고 순종하여야 할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신적 권위를 갖는다’고 고백을 합니다. 즉 성경은 그 권위를 개개의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교회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확고히 합니다. 천주교회는 개신교 신학자들이 종종 신학적 권위를 인정하며 의존하였던 어거스틴의 말을 빌어 성경에 대한 교회의 우선성을 강조합니다. 어거스틴의 말은 이것입니다. “교회가 나를 이끌어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천주교회는 이 말을 들어 성경의 권위는 교회의 권위로 인하여 인정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교회의 인도로 인하여 어거스틴이 성경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교회는 어거스틴을 성경으로 이끌어 주었지만, 어거스틴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게 된 것은 성경 자체로 인한 것임을 천주교회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권위가 사람이나 교회의 증언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있음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앙고백서가 성경의 권위와 관련하여 교회의 증언을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고백서는 5항에서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교회의 증언과 이로써 성경이 갖는 교회 안에서의 지위는 성경의 권위를 바르게 인식하고 성경을 고상히 여기며 경외의 마음으로 높이도록 이끌수 있음을 밝혀 둡니다. 그리하여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권위를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두면서도 또한 교회와의 관계성을 단절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신앙고백서는 성경이 하나님이 쓰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들을 열거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 담긴 내용들이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올리기 위한 목적에 따라서 각각의 부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하늘에 속한 영적 진리들, 특별히 구원의 유일한 방편과 같은 진리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관찰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 가운데 자신의 신성과 영광을 나타내 보이고 계신 것처럼,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성경 가운데 신성의 증거들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시고 계시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뿐만 아니라 문체의 장엄함이라든지, 성경의 교훈에서 받는 탁월한 영적이며 도덕적인 감동과 감화력 그리고 여러 탁월한 신적 증거들 또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게끔 이끌어 주는 중요한 증거들이라고 신앙고백서는 언급을 합니다. 신앙고백서는 한 편으로 이러한 객관적인 증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말해 주기에 충분한 논증력을 가지고 있음을 밝히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그것만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성경과 관련한 객관적이며 경험적인 신적 증거들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며 그것으로 인한 성경의 신적 권위들을 말해주는 증거력과는 별개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게 하고 그것을 완전히 확신하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내적 증거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권위의 인식에 있어서 객관적이며 경험적인 성경의 증거들보다는 성령님의 주관적인 내적 증거를 우선시 하며 강조합니다. 동시에 신앙고백서는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한 대목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내적 사역이 말씀에 의하여 말씀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외적 증거인 말씀의 교훈을 성령님의 내적 증거와 분리시키는 신비주의나 재세례파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사려 깊은 교훈입니다. 성경의 보증은 성령의 내적 사역 통해 요컨대 신앙고백서는 4, 5항을 통하여 성경의 권위는 영감이라는 신비한 방법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 그 분에게만 있으며, 이 사실은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하여 완전히 확신케 되며,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여러 증거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영감의 방편으로 기록함으로써 나타나는 특징들에 대해서 성령님의 내적 증거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에 의하여 관찰이 된 결과들임을 고백합니다. 샬롬!
140 no image <웨신해설4> 성경: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제1장 2,3항) / 김병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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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22 2010-06-2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설(4) 성경: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제1장 2,3항)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조교수 “성경은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이며 표준적인 규범” 1장 2항: “성경, 곧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현재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들이 포함이 됩니다. 그것들은 이러합니다. 구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 사무엘 하, 열왕기 상, 열왕기 하, 역대 상, 역대 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신약: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서, 데살로니가 후서, 디모데 전서, 디모데 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전서, 베드로 후서, 요한 1서, 요한 2서, 요한 3서, 유다서, 요한 계시록. 이 모든 책들은 신앙과 생활의 규범으로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주어졌습니다.” 1장 3항: “보통 외경이라 불리는 책들은 하나님께서 영감하신 것이 아니므로 정경인 성경 가운데 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떠한 권위도 갖지 못하며, 사람들이 쓴 글들과 다른 어떤 것으로 인정을 받아서도 안되며 사용이 되어서도 않됩니다.” 제1장 2, 3항에서 신앙고백서가 성경과 관련하여 고백하는 주요 명제들은 이러합니다. (1)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이 성경에 속하는 책들은 이미 다 기록되어 있으니, 현재 구약과 신약에 속한 66권의 책들입니다. (3)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기록되었으며 신앙과 생활의 규범입니다. (4) 외경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 아니며 사람의 글들과 특별히 다르게 다루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정경 66권만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 신앙고백서는 앞서 살핀 제1장 1항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얻기에 필요한 모든 진리들을 성경에 기록하여 담아 두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어 2항에서 성경에 기록된 그 진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경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혹 어떤 이들은 성경이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그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들은 성경의 어떤 말씀이 주관적으로 감동을 줄 때에라야 비로소 읽은 그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은 성경을 읽으며 아무런 영적 영향력을 받지 않는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성경 그 자체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객관적 측면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성경이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의 기록으로서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영감하여 기록하게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성경은 사람이 쓴 어떤 글들과도 다른 특징을 갖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감하신 글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글이기 때문에 사람이 지켜야 하는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이며 표준적인 규범으로서 권위를 갖습니다. 즉 성경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사람의 어떤 글들과 전혀 다른 특별한 책입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영감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설명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16-17세기 신학 토론 가운데 성경이 영감이 되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확정적인 사실로 고백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나 17세기 개혁주의 정통신학자들은 물론, 천주교회나 루터교회나 알미니안주의자들이나 모두가 성경론에 관하여서 16세기는 물론 중세와 교부시대에 고백되었던 교회의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서가 비록 구체적인 영감의 방식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대의 성경 영감과 관련한 전통적 이해를 고려할 때 그것은 완전 영감이며 축자 영감이며 또한 유기적 영감으로 이해가 됩니다. 즉 성령 하나님께서 사람의 저자들에게 그들을 통하여 전달하고자 하시는 교리들뿐만 아니라 단어들도 영감하셨으며, 동시에 저자들의 문체와 교육 정도 등 그들의 특성들을 사용하셨음을 당시의 신학은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서가 성경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영감이 되었으며(완전 영감), 단지 사상만이 아니라 단어들도 영감이 되었고(축자 영감), 또한 사람의 저자가 기계적으로 사용이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연적인 특성들이 활용이 되었음(유기 영감)을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방합니다.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책들을 구약과 신약 66권으로 제한합니다. 이 66권을 가리켜 정경이라 합니다. 정경 66권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따라 기록된 것으로 구약 시대의 경륜 아래 영감이 되었던 구약 39권과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새 언약의 경륜 아래 영감이 된 신약 27권으로 구성이 됩니다. 이 66권들 이외에는 어떤 책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없기 때문에 소위 외경이라고 일컫는 것들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떠한 권위도 인정받지를 못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이 사항을 분명하게 고백을 함으로써 16세기 후반에 트렌트 종교회의를 통해 천주교회가 임의로 신적 권위를 부여한 외경들을 정경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본래 외경은 유대인들의 히브리어 성경에 포함이 된 적이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에 의하여 인용이 된 적도 없고, 초대 교부들에 의하여 정경의 목록에 오른 적도 없습니다. 정경은 영감을 받은 것임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반면에 외경 가운데 어떤 책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음을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경인 구약 성경은 스스로 영감을 받은 것임을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신 31:19-22; 34:10; 민 16:28,29; 삼하 23:2; 왕상 21:19 등), 또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신약 성경 안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그 구약 성경이 영감이 된 것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마 2:15-23; 5:18; 눅 24:44; 요 10:35; 행 2:17; 4:25; 고전 9:9,10; 히 3:7; 4:7 등). 외경은 신앙과 행위의 귀범 될 수 없어 오직 성경만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고 영감의 권위를 가진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며, 외경은 결코 정경이 아님을 잘 이해하고, 외경을 인정하는 천주교회의 오류를 따라가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샬롬!
139 no image <웨신해설3> 특별계시인 성경의 필요성 / 김병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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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09 2010-06-2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강설(3) 특별계시인 성경의 필요성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조교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과 행위의 표준” <제1장 1항> 본성의 빛 그리고 창조와 섭리의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 그리고 능력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결코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롬 2:14,15; 1:19,20; 시 19:1-3; 롬 1:32; 2:1). 그렇지만 그것들은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하여 구원에 필요한 정도의 지식을 줄 정도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고전 1:21; 2:13,14). 그래서 주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교회에 자신을 계시하고 그의 뜻을 선포하셨습니다(히 1:1). 그리고 후에는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고 육신의 부패, 그리고 사탄과 세상의 악의에 맞서서 교회를 더욱 더 견고하게 세우고 위로하기 위하여 바로 그 진리를 모두 기록해 두도록 하셨습니다(잠 22:19-21; 눅 1:3,4; 롬 15:4; 마 4:4,7,10; 사 8:19,20). 이로 인하여 성경은 가장 필요한 것이 되었습니다(딤후 3:15; 벧후 1:19).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자기 백성들에게 계시하시던 이전 방식들을 중지하셨습니다(히 1:1,2). 제1장 1항에서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하여 성경에 나타난 계시를 말하기에 앞서 먼저 일반적이며 자연적인 지식에 대해서 밝힙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자연적인 지식의 불충분성과 성경의 필요성에 대해 고백을 합니다. 성경계시만이 구원의 길 제시해 신앙고백서가 밝히고 있는 명제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이 됩니다. 1)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가 없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본성의 빛, 그리고 창조와 섭리의 활동을 통해서 자신을 분명하게 계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이러한 지식만으로는 구원에 필요한 만큼 충분한 지식을 얻지 못합니다. 4)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얻기에 필요한 진리들을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교회에 특별히 계시하셨으며 이것을 기록하여 성경에 담아 두셨습니다. 5) 성경은 구원을 얻기에 반드시 필요하며, 특별한 계시 방식은 중지가 되었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방식 곧 내적으로는 사람들 자신의 이성적 본성 안에 하나님에 대한 선천적 지식을 주셨으며, 외적으로는 창조와 섭리의 활동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 형벌에 대한 두려움 또는 은혜의 복음을 받을 준비를 하는 등의 일이 가능케 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보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타락하여 죄를 범한 까닭에 이러한 지식을 통해서 구원에 관한 것은 고사하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조차 가질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한 내적인 선천적 지식과 외적인 창조와 섭리 활동이외에 또 다른 계시가 있어야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올바른 지식에 이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죄를 범한 이후로 자연에 계시된 하나님의 지식을 바르게 알지 못하게끔 되었으며, 그 결과 성경에 의존하지 않고는 자연 질서에 대한 바른 지식조차도 가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에 관한 이러한 자연적인 지식들은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포함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으며 악한 일에 대해서는 형벌이 있을 것이라는 지식을 넘어 어떻게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어떻게 그 죄에서 놓임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일반적이고 자연적인 지식은 침묵을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하나님은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을 통해 오직 그의 교회에만 특별히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특별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을 단지 자연과 본성에 따라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을 맺은 창조주이시며 또한 구속주로서 아는 지식입니다. 이러한 특별계시에 의한 언약 안에서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앞서 말한 자연적이며 일반적인 하나님의 지식과는 전혀 다른 지식입니다. 전자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식을 말하지만, 후자는 죄에 대하여 심판의 분노를 발하시는 하나님의 지식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지식에 대하여 흔히들 하나님에 대한 이중적인 지식이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관한 특별계시를 초자연 방식으로 여러 시대에 여러 모양으로 보여주셨으며 그것들을 또한 구약과 신약의 성경으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인생은 짧고 계시는 그 범위와 내용이 방대하며, 또 인간의 부패와 사탄의 진리 훼방에 대비하고,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를 견고히 세우고 위로를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의 때에 이르러서 특별계시들이 기록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여러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주셨던 직접적인 계시들도 온전히 기록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기록되지 않은 말씀이 기록된 말씀보다 시간적으로 앞섭니다만, 기록된 이후에는 기록된 말씀이 기록되지 않은 말씀을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을 때에도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는 존재하였지만, 성경은 기록되지 않은 말씀의 실질적 주제와 교훈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교회보다 앞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항상 성경의 권위 아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경의 권위 아래 있어 이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특별지식이 완전히 기록이 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계시를 직접적으로 전하는 방식들을 사용하지 않으시며, 교회는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인정합니다.
138 no image <웨신해설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사적 영향 / 김병훈 목사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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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64 2010-06-2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사적 영향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조교수 “칼빈주의에 근거한 교회의 표준 문서로 자리잡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소집된 목적은 잉글랜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표준적이며 공식적인 교리와 관련된 문서들을 만들어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개혁파 교리와 예배 표준 제시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소집 자체가 이미 장로교회 제도를 도입했던 스코틀랜드 의회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만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은 뚜렷한 개혁파 교리와 예배의 표준들과 아울러 장로교회 정치제도를 반영하였습니다. 1646년에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승인을 의회에 요청하였으나 에라스투주의를 지지했던 의회는 승인을 거부한 채 신앙고백서의 각 조항별로 성경 전거를 만들어 제시하도록 총회에 돌려보내며 이의 비준을 미루었습니다. 이와 달리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아무런 수정이 없이 신앙고백서를 1647년에 신앙의 표준문서로 즉각 받아들였습니다. 잉글랜드 의회는 1648년에 가서야 일부 항목을 제외한 채 부분적으로만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회중주의자였던 크롬웰이 1658년에 죽은 후 1661년에 왕위에 오른 찰즈 2세는 잉글랜드에 주교제도를 복구하였고 신앙고백서를 비준한 의회의 1648년 결정을 무효화하였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7세)는 카톨릭 신자이었으며 절대 왕정을 추구하였던 까닭에 잉글랜드 의회는 이에 대한 반발과 또 카톨릭으로의 복귀에 대한 염려 등으로 인하여 개신교 신자였던 오렌지 윌리암 공의 힘을 빌어 제임스 2세를 축출하고 윌리엄 3세와 메어리 2세를 함께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1690년에 다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회중교회자들과 심지어는 침례주의자들까지도 받아들였을 만큼 많은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1648년에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의 회중주의 청교도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회정치에 관련한 부분을 제외하고 그대로 인준하여 자신들의 신앙문서로 받는 ‘켐브리지 강령’을 발표했습니다. 이어서 1658년에 회중주의자들은 런던에 있는 사보이 궁전에 모여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장로교 교회정치에 관한 부분을 수정하여 노회로부터 개교회가 독립적인 권한을 갖는다는(이 이유 때문에 이들은 ‘독립파’라고 일컬어졌음) 회중주의 교회론을 담은 ‘사보이 선언문’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수정된 부분과 새로이 추가된 부분을 제외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전체를 그대로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보이 선언문’이 만들어진 후, 회중주의자들은 1680년에 보스턴에 모여서 이것을 ‘캠브리지 강령’과 더불어 자신들의 공통된 신앙고백으로 공인하였습니다. 침례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진 1946년보다 2년 앞서서 자신들의 첫 번째 신앙고백서를 1644년에 만들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침례주의자들은 신학적으로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르며 보편속죄를 주장하는 ‘일반침례주의자’들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칼빈주의를 따르며 제한속죄를 고백하는 ‘특별침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칼빈주의 침례주의자들 혹은 개혁파 침례주의자들로 불리기도 합니다. 1644년에 만들어진 침례주의자들의 첫 번째 신앙고백서는 개혁파 침례주의자들에 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널리 사용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진 후에 많은 개혁파 침례주의자들은 교회정치와 유아세례에 대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사용하였습니다. 1677년에 개혁파 침례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사보이 선언문을 참조하여 신앙고백서를 만들었으나 박해로 인하여 이것을 공식화하지 못하다가 1689년에 종교에 대한 관용정책이 시행이 되고 나서 ‘1689 침례주의 신앙고백서’라는 이름으로 공식화하였습니다. 미국의 개혁파 침례주의자들은 이것에 시편 찬송과 안수에 관한 부분을 덧붙여 1742년에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라는 이름으로 채택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약간의 신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개혁파 침례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기반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1706년에 첫 노회를 구성하고, 1716년에 첫 총회를 구성하였던 미국 장로교회는 1729년에 필라델피아 총회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모든 목사가 따라야할 표준 교리 문서로 채택을 하였습니다. 그후 미국 장로교회는 신앙고백서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습니다. 1789년에 미국 장로교회는 교회와 관련한 정부의 의무와 관련한 부분을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서 삭제하고, 교황을 적 그리스도로 규정한 부분을 삭체하는 등의 수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03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칼빈주의를 완화하는 기조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하였습니다. 다소 자유주의 신학적 경향을 취하였던 미합중국 장로교회에 반발하는 미국의 보수적인 장로교회들은 1789년의 수정판을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지금까지 신앙의 표준문서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해외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진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단의 표준문서로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1904년에 한국 장로교 독노회는 영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인도 장로교회가 채택한 12개 신조를 교단의 신앙고백으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초대 한국 장로교 독노회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또한 표준신앙문서로 채택하였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신학 전통 안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 주요 장로 교단들은 각각 합동 측은 1963년에, 통합 측은 1968년에, 그리고 고려 측은 1972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단의 표준적인 신앙문서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전 세계에 있는 장로교회들에 의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신앙표준문서로 널리 채택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신앙표준문서로 채택돼 신앙고백서가 갖는 교회사적 영향은 실로 세계적이며, 지금까지 여전히 고전적인 개혁파 교회의 신앙문서로 귀한 가치를 인정 받고 있습니다.
137 no image <웨신해설1>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간략한 역사적 배경 / 김병훈 목사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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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2 2010-06-2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 1>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간략한 역사적 배경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담임, 합신 조직신학 조교수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에 의해 성립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호부터 시작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담겨 있는 개혁신학의 사상들에 대한 해설을 연재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칼빈의 사상 계승한 웨신문서들 2009년 올해가 개혁신학의 기초를 놓은 칼빈이 탄생한지 500주년이 됨을 기념하는 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칼빈의 신학사상을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를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신앙문서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한 이들과 같은 17세기 개혁신학자들이 영적 생명력이 없는 합리주의와 작정 교리의 연역적 적용에 치우쳤으며, 칼빈의 신학적 통찰과 성경적 순수성에서 떠났다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칼빈의 주요 신학 사상들을 실체적으로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각 장의 해설을 통해서 확인이 될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리게 된 역사적 배경을 아주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이러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찰즈 1세가 통치하던 기간(1626-1649년)에 열렸습니다. 찰즈 1세는 영국 교회를 로마 카톨릭에 친화적 방향으로 이끌어 갔으며, '주교 없이는 왕도 없다'는 주장을 펴며 주교제도를 통해 교회에 대한 왕권의 통치권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찰즈 1세의 정책은 잉글랜드 교회에서 조차도 환영을 받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찰즈 1세는 장로교회였던 스코틀랜드 교회로 하여금 잉글랜드 교회와 같은 예배 형식을 따라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스코틀랜드판 '공동기도서'를 만들어 그것을 시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1637년 7월 에딘버러에서 이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1638년 12월에 글래스고우에서 총회를 소집하여 '공동기도서'의 도입을 거부하며 주교제도를 폐지하고 장로교회에 어긋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그 결과 찰즈 1세는 스코틀랜드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나 준비의 부족과 잉글랜드 의회의 비협조로 말미암아 오히려 스코틀랜드 군대에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이 군대를 가리켜 언약파 군대라고 합니다. 찰즈 1세는 의회를 소집하여 전비 마련을 위해 징세를 하려고 하였지만 의회가 이를 거부하는 탓에 의회를 해산하고 스코틀랜드 언약파 군대와 다시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 군대는 이제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에로 진격해 왔으며, 이에 찰즈 1세는 스코틀랜드 군대의 요구를 받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스코들랜드 군대의 요구는 잉글랜드 의회를 소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1640년 11월에 소집된 의회는 앞서 해산된 단기의회와 구별하여 장기의회라고 일컬어집니다. 장기의회는 왕과 대립을 한 끝에 1642년에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어 약 7년간에 걸친 내전을 치룹니다. 전세가 불리하였던 의회파는 전쟁 초기에 스코틀랜드 언약파와 동맹을 맺고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갑니다. 1643년 9월에 맺은 이 동맹을 가리켜 '엄숙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이라고 일컫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이 동맹을 통해서 잉글랜드 의회가 잉글랜드 교회를 스코틀랜드 교회와 같은 장로교회로 개혁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의회파는 후에 회중주의자 크롬웰의 지휘 아래 1649년에 찰즈 1세를 처형함으로써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시민 전쟁의 와중에 잉글랜드 의회는 의회에 대한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으며 이를 위한 교직자들의 총회를 소집할 것을 찰즈 1세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왕이 이를 다섯 번에 이르기까지 거부를 하자 왕의 재가를 받지 않은 채 상원의 동의를 얻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헨리 7세 채플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총대의 수는 모두 151명으로 이중 상원의원 10명, 하원의원 20명, 그리고 121명의 주교가 아닌 성직자들이었으며,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5명의 목사들과 3명의 장로들을 파견하였습니다. 의회에 의하여 과제를 부여받은 총회는 첫 회의가 열렸던 1643년 7월 1일부터 마지막 회의가 있었던 1649년 2월 22일까지 무려 5년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1,163번에 이르는 회의들을 가졌습니다. 5년 6개월 동안에 걸쳐 이뤄져 그 결과 '예배모범'(1645년), '장로회 교회 정치규범'(1645년), '신앙고백서'(1646년), 그리고 '대소요리문답'(1648년) 등의 네 가지 신앙 표준문서들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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