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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no image 하이델베르크<마지막회> 이제는 요리문답을 펼쳐야 할 때_이윤호 장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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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6 2010-03-31
이제는 요리문답을 펼쳐야 할 때 “신앙고백은 신앙의 정체성 정립하는 교회의 교과서” 127문> 여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로, 이러 한 간구입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너무나 연약하여 우리는 한 순간도 스 스로 설 수 없사오며,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귀와 세상과 우리의 육신 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나이다. 그러하므로 주의 성신의 힘으로 우리를 친히 붙드시고 강하게 하셔서, 우리가 이 영적 전쟁에서 패하여 거꾸러지지 않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의 원수에 대해 항상 굳세게 대항하게 하시옵소서.” 128문> 당신은 이 기도를 어떻게 마칩니까? 답>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이러 한 간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만물에 대한 권세를 가진 분으로 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며 또한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 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구하옵니다. 이로써 우리가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129문> “아멘”이라는 이 짧은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아멘”은 참되고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이런 것들을 소 원하는 심정보다도 더 확실하게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들으십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신성로마제국 의회(議會)가 열렸습니다. 종교 개혁이 시작된 지 수십 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교회의 참 모습을 드러내려했 던 개혁가들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개신교 신앙 공식적으로 인정돼 이번의 개혁운동은 그저 유행처럼 지나가는 일시적 현상이 아님이 명백해졌 을 때 제국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했습니다. 소위 신교도(新敎徒)들이라 일컬어지는 자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이단으로 규정하여 근 절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던 것입니다. 결국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이들의 신앙을 인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가톨릭 과 루터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가 허용된 것입니다. 단, 선택권자 는 영지의 통치자였습니다. 통치자의 종교가 곧 모두의 종교가 된다는 발상 이 오늘 우리에게는 무척 생소합니다. 그렇지만 봉건적 전통이 잔존하던 시 절, 통치자에게 그러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 다. 이런 생각을 해봄직 합니다. 일부지역에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신교도 가 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신교의 본질적 내용이 아니 라 통치자의 종교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 교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통치자 가 그렇게 결정했으니 말입니다. 말하자면 명목상의 신교도들인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종교 개혁가들이 요리문답을 작성하고 가르치는데 그토록 열심 이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저런 외적 상황에 영향을 받거 나 신선한 매력에 이끌려 신교도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그 의미를 올바로 알 지 못하여 은혜의 풍성함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 다. 그 때를 즈음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되었을 때, 이를 통해 신실 한 자들은 가톨릭과도 루터파와도 구별되는 개혁주의 신앙의 본질을 발견해 나갔을 것입니다. 당시 그들의 마음이 적지 않게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요 리문답은 그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몸에 배인 종교적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한 문항 한 문항 의미를 짚어가 는 동안, 그들은 신앙을 재발견해 나가는 참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어느 듯 요리문답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그리스도인의 전투하는 삶과 주님 을 인정하는 삶에 대한 교훈을 받았을 때 그들은 더할 나위 없는 위로를 얻 었을 것입니다. 암흑 같은 세상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확신했을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위로 말입니다. 반(半)펠라기우스주의적인 사고와 로마교회의 전통적 관행에서 벗어나 오직 성경적 관점으로 죄를 바라보게 되었을 때, 이제부터 무엇을 상대로 어떻게 전투하는 삶을 살아야 할지 자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주의적인 관점 에서 벗어나 만유의 주재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오직 그의 선하신 뜻에 따 라 세상을 다스리는 섭리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 질 수 있는 명백한 이유를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장차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명 목상 장로교인일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집 가까이에 있던 교회가 마침 장로교회였기 때문에, 교회로 이끌어준 친구나 부모님이 장로교회에 다 니고 있었기 때문에, 혹은 한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교회가 장로교회이기 때 문에 개혁주의 본연의 정체성을 모른 채 장로교회의 교인으로 지내오고 있다 면 말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면 교회는 요리문답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명목 상 개혁주의 교회, 개혁주의 성도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개혁되는 교 회, 개혁되는 성도가 되려면 말입니다. 지난 5년동안 에세이 하이델베르크 를 애독해 주신 독자제위께 감사를 드립니다. 실제로 개혁되는 교회 세워나가야 * 그동안 를 통해 신앙의 기본을 세우고 이 땅의 그리 스도인으로 산다는 사실을 일깨움으로써 주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위로와 함께 천국 백성의 정체성을 배양할 수 있도록 원고를 써주신 필자에게 심심 한 감사를 드립니다.
135 no image 하이델베르크<74> 죄의 용서를 구하는 교회_이윤호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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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6 2010-02-17
죄의 용서를 구하는 교회 “죄 용서 구하는 교회에게 하나님 은혜 주어져” 126문> 다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 옵소서”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주의 은혜의 증거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 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사 우리의 모든 죄과와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를 불쌍한 죄인인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과 그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간구로 시작합니다. 그 나라를 통해 하나님의 뜻 이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에 대한 소망이 뒤따르고, 그 나라의 한 복판 에서 나오는 양식으로 말미암아 그 백성들은 매순간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 다는 고백이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삶의 동력이 되는 하나님 나라 그 렇다면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는 이 나라에는 누가 참여할 수 있을까요? 간절히 원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격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나라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 다. 바로 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에 관한 문제를 이해하고 설명할 때 교회는 다양한 태도를 보여 왔습니 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 특유의 신학자세, 즉 합리적 정신에 의거하여 죄 를 분석하거나 분류하곤 했습니다. 예컨대 이해 타당한 잣대를 통해 죄의 경 중(輕重)을 판단하기도 하고 죄가 드러나는 양상에 따라 행동의 죄, 말의 죄, 생각의 죄 등으로 열거해 보기도 했습니다. 로마교회에서 규정한 일곱 가지 대(大)죄에 관하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 니다. 자랑,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욕망, 이 일곱 가지를 우선적으 로 절제함으로써 죄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이 엿보입니다. 아 니 죄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그들의 희망이 엿보입니다. 그렇지만 죄와 관련한 개혁주의 교회의 우선적인 관심은 보다 근본적인 것이 었습니다. 여기서 근본적(radical)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뿌리’(radix ) 에 그 어원(語源)을 두고 있는 말입니다. 즉 우리 마음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존재로서의 죄를 인식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가지 잘라내기를 반복하여도 도저히 없어지지 않는 속성, 게다가 단지 잔존하는 정도가 아니 라 끊임없이 자라나는 죄의 속성에 대한 인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근본적(radical)이라는 말은 과격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뿌리나 근원적인 부분까지 흔들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낼 때 그러합니 다. 결국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표 면적 거부감을 가질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의지적으로 과격하게 반발하 는 특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 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입니다. 도저히 제거할 수 없는 죄를 지니고 있으며, 그 죄는 너무나 과격해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을 격렬히 방해하려 하 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주시기에 앞서 어떤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를 언급 하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죄를 고백했다면 좀 더 절제함으로 죄 문제를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 이 스스로의 선행을 아뢰었 다면 남들보다 나은 선행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했을 것입니다. 죄에 대한 정당한 자각이 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것과 전혀 다른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참 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심으 로써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우 리의 성도됨이 오직 주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 니다. 오늘 우리는 좋은 교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때로는 교회의 좋 고 나쁨을 그저 단순한 비교에 의해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상대적으로 평가 를 한다면 어떤 교회는 더 많은 죄를 짓고 어떤 교회는 더 적은 죄를 지을 것입니다. 만약 상대적인 죄의 가벼움으로 인해 스스로를 좋은 교회로 여긴 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는 거리가 있는 판단일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는지 그렇지 않은 지는 죄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에 대 한 깨달음의 유무(有無)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다름 아닌 우리가 도저히 근 절할 수 없는 명백한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말입니 다. 그렇다면 참 교회의 표지라 여겨지는 요소들의 외적(外的) 형식을 하나하나 구비해 나가는 것 자체가 좋은 교회의 기준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가 가진 뿌리 깊고 과격한 죄의 근원을 절실하게 인식함으로써 먼저는 하나 님 앞에서 그 다음은 우리의 이웃 앞에서 한 없이 겸손할 수 있을 때, 비로 소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될 것입니다. 죄를 극복한 삶으로 드러내야 교회의 표지가 경직되고 화석화된 모습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진실한 모습으 로 드러나는 것은 오직 진심으로 죄의 용서를 구하는 교회에게 주어지는 은 혜일 것입니다.
134 no image 하이델베르크<73> 이신론(理神論)적 사고에 대한 경계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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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7 2009-12-02
이신론(理神論)적 사고에 대한 경계 "하나님의 은혜가 차지해야 할 자리 점점 사라지고 있어" 125문> 넷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우 리의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내려주시며, 그리하여 오직 주님이 모든 좋 은 것의 근원임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복 주심이 없이는 우리의 염려나 노력, 심지어 주님의 선물들조차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함을 알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피조물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 만 신뢰하게 하옵소서." 흔히들 근대사회를 '이성의 사회'라 부릅니다. 모든 지식을 이성이라는 잣대 로 재검증하려는 욕구가 표출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성적으로 납득 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보편화된 지식이라 하더라도 실제 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를 거 부하면서 말입니다. 이성을 앞세우는 풍조 만연해 그렇다고 해서 중세사회에서는 이성이 완전히 짓밟혔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 히려 로마가톨릭 신학은 사람의 이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교회 를 지탱하는 많은 신학적 문제들을 건전한 이성을 통해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성적 논 리로 증명하려 했으며, 성찬의 신비를 철학적 논리로 설명하려 했던 것입니 다. 그러므로 근대사회를 '이성의 사회'라 부를 때는 이성을 의존하는 정도가 그 이전과 비교해서 훨씬 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세 로마가톨릭 신학 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사람의 이성 사이의 합리적 조화를 꾀했다면, 근대의 이성주의에서는 사람의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를 점점 대체해 나갔던 것입니 다. 이러한 풍토 가운데 '이신론(理神論)'이라는 사상이 등장했습니다. 단어 자 체의 의미에서 드러나듯이 이것은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으 려는 종교적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신론은 참으로 그럴듯한 이론입니다. 자칫 이러한 생각이 매우 신앙적인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은 우선 천지창조가 하 나님의 위대한 역사임을 칭송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우주의 '자연 질 서'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자연의 질서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피조세계를 유 지하기 위해 섬세하게 만들어놓은 수단이라는 사실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이 러한 평범한 생각으로부터 그들은 전혀 어긋난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습니 다. 즉, 천지와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후 진행되는 역사 속에 섭 리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질서만으로도 세상 은 자체적 지속과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신론의 팽배는 사람들의 가치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하 나님과 그의 피조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러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연 질서라는 것은 사람의 이성적 관찰과 탐구에 의해서 발견되고 인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미세한 자연의 질서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라면 그것들을 알아감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하나하나 쌓아갈 수 있다 고 여겼던 것입 니다. 자연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말씀을 제처 두고 이성의 적절한 활용에 의해서 하나님과 세상을 알아가려는 태도를 가지게 된 것입니 다. 급기야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이 발견해 놓은 자연적 질서 에 더 민감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도 이신론적 사고에 흠뻑 젖어 있는지 모릅니 다. 자연적 질서를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섭리를 사실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말입니다. 예컨대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자연적인 현상이 며, 그 현상을 잘 인지한 의학(醫學)에 따라 그것이 좌지우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은 지극히 자연적 현상이며 그것 을 성실하게 활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에게 공급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러는 사이 우리를 눈동자처럼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차지해야 할 자리 가 점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이신론적 경향은 단지 자연현상뿐 아니라 사회적 통념에도 손길을 뻗 쳤습니다. 합리적 통념이 교회에까지 들어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 한 것입니다. 예컨대 조직을 제대로 정비 하여 체계화 하면 교회가 굳건하게 되어 어떠한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이성적 판단이 만연합니다. 교회를 굳건케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헤아리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 결과 교회의 긍정적인 모습을 세상에 많이 드러내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칭송할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라는 이성적 판단이 만연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간과한 채 말입니다. 요리문답은 오늘 우리에게 이신론적 사고에서 속히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 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손수 일구어낸 양식이 아닌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에 의한 것임을 자각하도록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한 걸음 한 걸음 진보하는 것은 우리가 고안해낸 아이디어와 거 기에 쏟아 부었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왕적 통치에 의한 것임을 인식하도 록 합니다. 하나님의 왕적 통치 인정해야 우리가 교회를 개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치밀한 계산과 전투의 지를 가짐으로써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고 백해야 할 것입니다.
133 no image 하이델베르크<72> 신적 통치에 대한 수동성과 능동성_이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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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6 2009-10-21
신적 통치에 대한 수동성과 능동성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관망적 태도가 문제" 124문> 셋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로, 이러한 간구입 니다. "우리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뜻을 버리고, 유일하게 선하신 주 님의 뜻에 불평 없이 순종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각 사람이 자신의 직분 과 소명을 하늘의 천사처럼 즐거이 그리고 충성스럽게 수행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향한 기도는 그 나라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간구로 이어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이 땅 사람의 뜻이 반영되 는 곳이 아니라는 고백적 기도입니다. 아무리 고귀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뜻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나라는 통치자이신 주님의 뜻만이 온전히 실 현되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구현되는 나라 그렇다면 이 나라에 속한 백성들은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대신 하나님의 통 치를 목격하며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의 백성들이 구경꾼 으로 멀찍이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어진 소명을 충 성스럽게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에 기꺼이 참여하도록 요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빈번히 만나온 난제(難題)들 중 하나는 수동성과 능동성의 문제입니 다. 실례로 성경의 저작이나 성도의 성화(聖化)와 같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에 있어서 기록자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이었습니다. 성경 전체가 예외 없이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경기록 자는 또한 능동적이었습니다. 그들 각자의 다양한 인격적 특성들이 배제되 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동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성령 하나님의 간섭 을 소홀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능동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성 령 하나님의 간섭범위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정도가 심해진다면 하 나님의 특별계시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화(聖化)를 이해하는 방식도 이러한 경우입니 다. 성경은 성도의 신앙을 선 한 곳으로 끝까지 이끌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로 인하여 우리는 위로(慰勞) 가운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서는 결코 실패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스스로를 무의지(無意志) 상태로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적극적으 로 이루어나갈 것을 또한 명령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수동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숙명주의(宿命主義)로 나아감으로 신앙의 활 력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능동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공로주의 (功勞主義)로 치달아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거나 신앙의 중심을 잃게 될 것 입니다. 어쩌면 수동성과 능동성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모순율(矛盾律)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통성 있는 교회는 이것의 조화를 고백 해 왔습니다. 이와 같은 조화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성도들에 게도 요청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 나라 통치자는 다름 아닌 주님 자신이시 므로 그 백성인 성도들은 철저히 수동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 든 사고 방식은 묻히고 하나님의 의지가 이 땅에 온전히 드러나기를 소망해 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부동(不動)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나라의 백성은 왕의 통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 나님은 어떤 비인격적인 힘이나 에너지로서가 아니라 성도의 직분과 소명을 통해 그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시는 하 나님은 기계적인 통치방식을 사용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수동적 태도를 소홀히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보다는 사 람의 바람이나 사회의 이념을 실현시키기에 급급했던 교회가 많이 있습니 다. 넘치는 열심이 올바른 향방을 잃어, 부흥의 본질을 상쇄(相殺)하기도 했 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능동성을 간과함으로써 역동성을 상실한 교회들도 있 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관념적으로 바랄 뿐, 주님이 주신 직분과 소명을 충성스럽게 이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개혁의 의지조차 상실한 채 말입니 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교회는, 오늘 우리가 소홀히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진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반성적으로 살펴야 할 것입 니다 . 하나님의 통치에 관망적(觀望的) 태도를 취하며 주어진 직분에 나태하 지 않았는지, 혹은 교회를 위해 몸을 희생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포기 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는지 말입니다. 단,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양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적당한 절충적 상태가 아 닙니다. 오히려 온전한 상태입니다. 자신을 순전히 비울 때 온전히 역동적 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철저히 비워야 어쩌면 요리문답이 작성될 때에는 굳이 별도로 언급하지 않아도 되었을 법 한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가장 심혈을 기울여야 할 문제가 되어버렸 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입니다.
132 no image 하이델베르크<71> 포기할 의사가 있는가?_이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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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7 2009-09-23
하이델베르크 포기할 의사가 있는가? 이윤호_‘선교와비평’ 발행인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우리 자아부터 포기해야” 123문: 둘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나라이 임하옵소서”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신으 로 우리를 통치하사 우리가 점점 더 주님께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교회 를 보존하시고 흥왕케 하옵시며, 마귀의 일들과 주님께 대항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세력들, 그리고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 반대하는 모든 악한 의논 들을 멸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져 주께서 만유의 주가 되실 때까지 그리하옵소서.” 교회설립 초기에 주님의 일꾼들에 의해서 선포된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였습 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교 회 등과 더불어 사도행전의 가장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입니다. 사도행전의 선포 내용은 ‘하나님 나라’ 빌립이 사마리아성 사람들에게 전했던 메시지는 다 름 아닌 하나님 나라였습 니다(행 8:12). 바울이 에베소와 로마에서 전파했던 메시지 역시 하나님 나 라였습니다(행 19:8; 20:25; 28:23). 바울이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그 리고 안디옥을 다시 찾아 제자들을 굳게 할 때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 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행 14:22). 사실상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 시작해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 끝 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 는 내용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어가 는 역동적인 모습이 사도행전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는 그 반대의 상황도 적지 않게 나타납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지 않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도행 전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결말 부분도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이 루어져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 대해서 옛날 이사야 선지자 가 이스라엘 백 성을 향해 던졌던 경고를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모두 하 나님의 말씀 앞에서 귀를 열지 못하고 눈을 뜨지 못하여 심판을 면치 못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말할 때 통치의 개념이 두드러진다면, 하나님 나라 를 선포하는 것은 새로운 통치체제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 니다. 사실 이 통치체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 내내 하 나님이 보여주셨던 것이지만 말씀에 민감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낯선 것이었 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유대인들에게 전해졌을 때 그 나라의 모습 은 그들이 임의대로 꿈꾸고 있던 회복된 다윗왕국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 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통치체제에 순응한다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기존의 사고체 계에 대한 포기를 전제로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수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 상 때부터 형성되어 전해오던 그릇된 이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메시아왕국을 기다리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자신들의 눈에 전혀 새로 운 모습으로 비쳐진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 기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방해함으로써 주님을 대항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우리의 거울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그들의 잘못 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우리의 모습도 자칫 그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소망하고 그것에 온전히 복종하고자 합니다. 바로 말씀과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참 교회의 모습, 참 성도의 모습을 이루어 나가는 것 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기도하는 우리가 실상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거부하는 경 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이상향(理想鄕)과 우리 자신의 사고체 계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세상의 가치관, 특히 인본주의적 사고에 젖어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하나 둘 더해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표 상을 임의대로 형성하도록 했습니다. 그 나라의 통치로 말미암을 교회의 흥 왕에 대해서도 이미 머릿속에 구체적인 형태를 그려놓아 버렸습니다. 자의적 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어 울리지 않는 우리의 가치관을 면밀히 찾아내어 적극적으 로 단념하지 않는 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것의 통치에 참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의 나라를 바라는 우리가 오히려 그것을 대적하는 세력의 편에 서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흥왕을 고대하면서도, 하나님 나 라의 선포에는 냉담하여 교회의 성장에 걸림돌이 되었던 사람들처럼 말입니 다. 하나님 나라에 걸림돌 되지 않아야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간구하는 우리는 과연 자아(自我)를 포기할 적극적인 의사가 있는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기도는 중언 부언하는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닐지 모릅니다.
131 no image 하이델베르크<70> 하나님의 이름은 왜 더럽혀지는가_이윤호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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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6 2009-08-18
하이델베르크 하나님의 이름은 왜 더럽혀지는가 이윤호_선교와 비평 발행인 “우리 몸에 베여 있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결심 있어야” 122문> 첫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무엇 보다 먼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바르게 알게 하여 주옵시며, 주께서 행하시 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거룩히 여기고 경배하고 찬송하게 하옵소서. 주께서 행하시는 일에는 주님의 전능과 지혜와 선하심과 의와 자비와 진리가 환히 빛나옵나이다. 또한 우리의 모든 삶을 지도하시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 을 주장하셔서, 주님의 이름이 우리 때문에 더럽혀지지 않고 오히려 영예롭 게 되고 찬양을 받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는 그의 거룩하심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생각이나 행 동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원히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 이 하나님 의 이름을 어떻게 여기든 상관없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 의 모범을 보이실 때 간구하신 내용을 보면 말입니다. 불변하는 하나님의 거룩성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고자 여러모로 애쓰고 있습니다. 분별력 이 비교적 약한 어린 아이들조차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여기지 않으려 주 의합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고백하며, 특히 기도하는 동안 예 수님의 본을 따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간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세상과 구별된 삶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를 통하 여 하나님의 존귀하신 이름이 밝히 드러날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 람들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도 있겠지만, 울타리 밖의 세상에 많이 있습니 다.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 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를 통해 서 하나님을 판단하고 그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거나 혹은 하찮게 여길 것 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이 세 상 가운데 더럽혀지는 경우가 많은지, 교회는 하 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여러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사회 속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영향력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봅니다. 사회에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혹은 한 지역의 사람 대 다수가 교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경배하는 모습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성경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와 관련된 예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더럽혀졌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하 나님의 백성이 이방 민족에 의해 유린당하고 약속의 땅마저 잃게 되는 상황 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열국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알려진 자들이 나라를 지켜낼 힘을 상실했을 때, 이방인들이 멸시하고 조롱한 것은 비단 이 스라엘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자신들이 모욕당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 서 더럽혀지는 것이 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이 다시 세상에서 높이 들릴 수만 있다면 어떠한 수고도 아끼지 않았을 것입 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될 방법을 모색했 을 것입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방민족의 발아래 짓밟히지 않고 만 국 중에 가장 힘 있는 나라가 되어 선민 이스라엘의 위상을 확고히 하려 했 을지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일컬을 수 없을 날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진 원인이 군사력의 쇠진(衰 盡)에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하나님께서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일반적 상식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진 원 인을 바로 이스라엘의 죄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적 행위인 산당 제 사를 끊임없이 반복한 것과 같은 그들의 죄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을 잘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의 방식대로 예배하고 섬긴 죄였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해 가장 미리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재발견하여 이미 몸에 베여 있는 죄로부터 돌이키려는 태도였 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이름이 더 럽혀지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가운데 교회 의 위상이 형편없거나 인상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회의 죄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오늘 우리 교회에 시기적절한 가 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바라는 기도가 전제하고 있는 성도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교훈은 바로 주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를 시 작으로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경배와 세상과 구별된 성도의 삶이 구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교훈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거 룩히 여김을 바라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질 수도 있을 것 입니다. 우리의 습관적인 죄가 문제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습관처럼 몸에 베여 있 는 죄가 없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30 no image 하이델베르크<69>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조건_이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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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4 2009-06-24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조건 이윤호_‘선교와비평’ 발행인 “그리스도에게 속할 때 비로소 아들로 인정돼” 120문> 그리스도께서는 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라 명하셨습니 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기도의 첫머리에서부터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하여 어 린아이와 같은 공경심과 신뢰를 불러일으키기를 원하셨는데, 이것이 우리의 기도의 기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아버지가 되셨 으며,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 부모가 땅의 좋은 것들 을 거절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121문>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왜 덧붙여졌습니까? 답> 하나님의 천상의 위엄을 땅의 것으로 생각지 않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 으로부터 우리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 다. 우리 교회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대화에서 상대방 에 대한 호칭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마음의 표현인 호 칭은 대화의 형식과 내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다양하게 표현되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들 그래서인지 간구하는 내용에 따라 그것에 걸 맞는 ‘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혹은 ‘사랑의 하나님’과 같은 호칭을 사용하기 도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이 가르쳐주신 ‘아버지’ 라는 말을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존경심과 신 뢰를 가지고 말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부자(父子) 관계는 간접적인 측 면이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간접적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제 요인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 자체로 하나님과 부자(父子) 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은 삼위일 체 하나님 상호간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상호 관계성에 대한 질문과 고백은 교회역사에서 가장 중요 한 신학적 주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교회사 최초의 범(汎)교회회 의가 니케아 에서 열렸을 때,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고백이었 습니다. 당시 교회는 예수님을 피조물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며 예 수 그리스도의 참된 존재성을 정당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이때 교회가 결코 빠뜨리지 않았던 것은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신 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다른 위격(位格)과의 관계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두 번째 범(汎)교회회의에서 보다 명확한 언어로 고백되었습니다. 이때 교회에서 선 언한 고백은 그 후 오랫동안 교회가운데 적지 않은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주 로 동방교회에서는 성령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하는 반면, 서방교회에서는 성령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그리고 성자 예수님으로 부터 나왔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발출(發出) 원인자에 대한 이 논쟁은 결국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각기 다른 길을 걷게 하는 결정적인 요 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개혁주의 선조들이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도 삼위 하나 님의 상 호 관계성에 대해서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습니 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바 되시고, 성령 하나님 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으로부터 나오셨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선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부자(父子) 관계를 명확히 고백하였습 니다. 그리고 성령의 나오심이 하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도 근거하고 있 다는 서방교회의 전통적 고백을 취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의 관계 를 확고히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다면 우리도 그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리문답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 으므로, 그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기도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의 관 계가 보다 잘 드러나야겠습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함으 로써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과, 그러므로 우 리 가 어린아이처럼 친밀하게 기도할 때 그리스도와 한 마음을 품는 것이 마땅 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늘날의 아버지상(像)은 자녀들이 원하고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 려는 모습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도 소망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절히 구하 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어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님의 뜻을 알려 하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우리의 기도에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좋으심은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와 한 마 음이 될 때 발견하게 되는 소중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어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그리스도의 뜻을 소홀히 여길 때 기도를 통 해 나타나는 참다운 은혜를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이 땅으로 끌어내려 세상 욕심을 부단히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129 no image 하이델베르크<68> 교회는 마땅히 빌 바를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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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1 2009-05-27
하이델베르크 교회는 마땅히 빌 바를 알고 있는가? 이윤호_‘선교와 비평’ 발행인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의미 바로 이해하길” 117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들으시는 기도는 어떠한 것입니까? 답> 첫째, 그의 말씀에서 자신에게 계시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게만 그 가 우리에게 구하라고 명하신 모든 것을 마음을 다하여 기도합니다. 둘째, 우리 자신의 부족과 비참함을 똑바로 철저히 깨달아 그의 엄위 앞에 겸손히 구합니다. 셋째, 비록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의 말씀에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 주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분명히 들어주신다는 이 확실한 근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118문>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무엇을 구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습니까? 답>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인데, 그리스도 우리 주께서 친히 가르쳐 주 신 기도에 그것들이 다 담겨 있습니다. 119문>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무엇입니까? 답>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 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 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 멘. 요리문답은 기도의 정의에 대해서 앞서 밝힌바 있습니다. 기도는 바로 감사 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은혜의 간구입니다. 이제 기도의 방법과 내용에 대 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속의 도전을 받고 있는 교회 우리 시대는 기도의 방법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때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책들이 많고 이 주제에 대한 강연과 집회 또한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들을 통해서 응답받는 기도를 위한 조건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역시 확신과 진정성일 것입니다. 즉 결과 에 대해 의심치 않고 기도해야 하며, 가식적이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 다. 이것은 기도의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습니 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은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한 가지 교훈을 말씀하고 있 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교훈을 로마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로 말씀하셨습니 다. 특히 고난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이 말씀을 하셨는데, 고난 중에 있는 로마의 성도들을 마음에 두고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교회는 두 부류의 사 람들로부터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고난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 다. 한 부류의 사람은 로마 시민이었습니다. 당대 최고 문명 사회의 구성원임을 자부하던 로마인의 눈에 교회는 제국의 변방에서 생겨난 대수롭지 않은 종교 로 보였을 것입니다. 여러 신들이 일상의 생활 속으로 들어와 삶이 곧 종교 가 되어버린 로마인들에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참 신(神)이라 부르짖는 교 회는 사회 속의 불편한 존재로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몇 년 후 발생한 로마 대화재사건에서 드러났듯이 교회는 그곳에서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로마의 교회에 고난의 요소가 되었을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 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썼던 AD 50년대 후반은 유대인들이 새로운 도약을 도모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AD 50년 글라우디오 황제의 명령에 따라 로마시 (市)를 떠났던 유대인들이 AD 54년 네로황제의 즉위와 더불어 다시 이 도시 로 들어와 그들의 회당을 정비하며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점 차 로마인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는 교회에게 그 유대인들은 분노했으며 오히려 교회 를 이단자로 몰아 핍박 했습니다. 말씀 계시 위에 바로 서 있어야 어떤 성도들은 로마인과 유대인이라는 거대한 존재 앞에서 교회의 존속을 의 심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나아 간 성도들은 무엇을 간구해야 했을까요? 만약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채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면 그들의 소원은 로마 인들보다 우수한 경제적, 문화적 수준을 갖춘 교회의 모습이었을지 모릅니 다. 혹은 유대인들보다 더욱 견고한 조직을 갖추어 어떤 상대에 대해서도 대 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교회의 모습을 원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 은 말씀에 계시된 방법으로 교회 를 유지시키시고 그의 백성을 향한 천상의 소원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도취에 빠져있는 현대 문명 은 기독교의 신비적 비밀을 그저 하나의 신념 정도로 치부해 버립니다. 하나 님의 말씀에 민감한 대신 견고한 조직을 갖추고 있는 교회들은 참 교회를 위 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탄식에 종속되지 않는다면 세상보다 우수한 현세적 문화를 갖 춘 교회를 소망할는지 모릅니다. 혹은 상대를 힘으로 대응할 수 있는 조직 력 있는 교회의 모습을 원할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때 사도 바울은 우리에 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도대체 알 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자각을 시작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의미를 하나하나 살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128 no image 하이델베르크<67> 우리의 기도,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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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1 2009-04-15
하이델베르크 우리의 기도,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는가 이윤호_선교지평 발행인 “메시아에 대한 정당한 인식 없다면 빈 껍질에 불과해” 116문> 그리스도인에게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답>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신을 오직 탄식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구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제3부에서 성도의 감사하는 삶을 다루면서 중요한 두 가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 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기도의 좌표를 보여주신 예수님 이러한 맥락 하에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그것은 감사 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말로 대답을 시작합니다. 기도는 감사의 행위이 며, 감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은혜의 간구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의미에 대해 보다 세 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근원적인 것들을 소홀히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성전에 올라가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등 장합니다.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그는 기도 중에 감사의 제목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토색, 불의, 간음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은 것과 자신은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 과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뢰고 있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킨 사람임에 틀림없습 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와는 달리 선민(選民)으로서의 민족적 자부심 역시 강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실제로 그의 삶은 하나님께 감사 할 기도의 제목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입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마태복음 6장에 나타나는 또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떠 올리게 합니다. 이 본문에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신분이나 기도의 내용을 언 급하는 대신 그들이 기도하는 모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 좋아하고, 이방인과 같 이 중언부언 하며 기도했습니다. 이들의 신분이나 기도의 내용을 알 수 없지만 그들의 기도에 대한 태도는 앞 서 언급한 바리새인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남이 보는 앞에 서 자랑스럽게 기도하기 좋아했다면 그들이 준수했던 율법의 내용을 열거하 거나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기도를 일컬어 외식하는 기도라 하셨습니 다. 결국 감사의 기도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의를 다 른 사람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가식적인 태도를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마땅 히 하나님을 향해 아뢰어야 할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평가를 의식하 며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의 감사 기도가 외식으로 여겨진 데는 보 다 근원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이 멸시했던 세리의 기도와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탄식하는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던 기사를 묵상할 때, 우 리 신앙선배의 가르침 하나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을 알 때 비로소 자아(自我)를 발견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세리의 탄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 지만 바리새인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의(義)에 대해서도, 자아 (自我)에 대해서도 올바로 판단하는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메시 아에 대한 정당한 인식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기도는 속이 텅 빈 껍질에 불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감사한 내용은 기껏 일반 종교인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필연적으로 그들의 간구 역시 중언부언 하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 니다. 은혜에 대해서도 올바른 지식이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자신은 세리와 같지 않음으로 인해 감사했듯이 우리는 바리새인 과 같지 않음으로 인해 안도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지 불식간에 우리가 비판하는 그들의 전철을 답습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적어도 기도에 있어서는 그러합니다. 우리가 감사할 내용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로 인한 교회적 삶일 것 입니다. 문제는 구원과 교회는 우리 가운데 가장 많이 거론되는 담화의 주제 이지만 그 의미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 원이 사람의 노력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구원받는 것은 매우 쉽다는 생각에 그치고 맙니다. 그럴듯한 외적 모양을 갖추는 것이 곧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라 여기기 십상입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오묘한 은혜와 구원받은 성도가 기쁨으 로 참여해야 할 교회적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습니 다. 어쩌면 우리는 합당한 지식을 추구하는데 무척 게으른 풍토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시던 그때처럼 말 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기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바람직 한 현상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기도는 성도의 삶에서 가장 중 요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열심히 기도하는 자체에 만족한다면 우리도 여전히 바리새인의 기 도 방식을 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감사와 은혜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 는 기도는 외식하는 기도이고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 다. 요리문답을 통해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은혜를 간구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 가르침을 온당히 받 아들이기 위해서 무엇에 대해 감사해 야 하고, 간구해야 할 은혜의 내용은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알아가야겠습니 다. 바리새인처럼 기도하지 말아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온당한 대화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127 no image 하이델베르크<66> 범죄의 범위_이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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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3 2009-03-04
하이델베르크 범죄의 범위 이윤호_‘선교지평’ 발행인 “그리스도께 온전히 굴복하는 관계 확인해야” 113문> 제10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계명 어느 하나에라도 어긋나는 지극히 작은 욕망이나 생각을 조금도 마음에 품지 않는 것이고, 언제든지 우리 마음을 다하여 모든 죄를 미워하고 모든 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114문>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이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 까? 답> 아닙니다.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이러한 순종 을 겨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굳은 결심으로 하나님의 일부 계 명만이 아니라 모든 계명에 따라 살기 시작합니다. 115문>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는 왜 그렇게 엄격히 십계명을 설교하게 하십니까? 답> 첫째, 평생 동안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더욱더 알게 되고, 그리하여 그 리스도 안에서 사죄와 의로움을 더욱 더 간절히 추구하도 록 하기 위함입니 다. 둘째,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목적지인 완전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 상으로 더욱 더 변화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께 성신의 은혜를 구하 기 위함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이자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원칙 제시하고 있는 ‘십계명’ 이러한 십계명은 금지명령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단순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 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다양한 영역에 대한 세밀한 지시 대신에 몇몇 특 정한 행위를 요구하고 금지하는 단순 명령어법이 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십계명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단편적인 순종으로 반응하는 경우 가 많습니다. 예컨대 몇몇 종류의 금지 행위를 단순히 멀리함으로써 십계명 의 요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폭음, 도박, 폭력, 교회출석 등 몇 가지 행위의 유무가 훌륭한 신앙인의 기준처럼 된 것도 맥락을 같이합니 다. 그렇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제9계명까지의 해설을 통해서 우리가 십 계명의 표면적 의미에 머무는 것을 경계해왔습니다. 각 계명 에 대한 적극적 이고 본질적인 순종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예컨대 이웃을 살해하지 않았다고 해서 제6계명에 대한 의무를 다한 것이 아 니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까지 주님의 요구임을 보여주었습니 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고 해서 제8계명에 대한 의무를 다한 것이 아 니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선을 행하는 것까지 주님의 요구임을 보여주었습니 다. 행간의 의미를 찾고 예수님의 교훈에 귀 기울였던 것입니다. 사실상 제 10계명은 이와 같은 십계명의 본질적 요구와 관련 있습니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제10계명은 분명 탐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천 국에 소망을 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배척해야 할 탐심입니다. 그렇지 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제10계명을 단지 탐심에 대한 문제로 국한시키 기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오히려 이것을 하나의 모범적 예시로 받아들입니 다. 탐심을 경계할 뿐 아니라 십계명의 모든 계명에 반응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 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로 드러난 가시적인 결과를 통해 죄의 유무 를 판단하는 것이 세상규범이지만, 주님께서는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은 마음 속의 거리낌조차도 죄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10계명은 어떤 범위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범죄로 분류될 수 있는 영역의 범위이고, 주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영역의 범 위이기도 합니다. 제10계명이 모든 계명에 대한 마음속의 죄를 정죄하고 있다면 우리의 범죄 는 특정한 시간이나 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매 순간 발생하게 됩니다. 범죄 의 범위가 무한히 증가하고 만 것입니다. 형제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이 들 때,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하는 마음을 가질 때, 혹은 부모님에 대해서 불 순종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이미 계명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한 것이기 때 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주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한 순간도 있을 수 없는 명백한 이유가 됩니다. 우리 삶에서 주님의 은혜가 간절한 명백한 이유 가 됩니다. 자발적 노력으로 계명의 요구를 다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 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십계명을 즐겨 설교할 때 많은 유익을 기대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거나 금지하신 10개의 명령을 행동으로 하나하나 지킴으로써 성도의 기본적 품성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매주일 엄숙히 하나님을 경배 하고, 성도 사이에 화목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십계명이 규정하고 있는 범죄의 범위를 발견하여 인간 본성의 한계 를 심각하게 깨닫지 못한다면 계명의 원래적 요구와는 거리가 있을 것입니 다. 십계명의 본질은 삶의 특정한 부분의 진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간절히 의지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긴밀히 교제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본성의 한계 보여주고 있어 교회개혁의 본질은 개혁주의 교회를 구성하는 모양 하나하나를 답습해 나가 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께 온전히 굴복함으로써 머리와 몸 의 관계를 정립하는 데 있습니다.
126 no image 하이델베르크<65> 교회 개혁을 방해하는 거짓 증언들_이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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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4 2009-02-11
교회 개혁을 방해하는 거짓 증언들 이윤호_‘선교지평’ 발행인 “무고한 사람들 죽였던 과거사 아직도 생생해” 112문> 제9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내가 어느 누구에게도 거짓 증언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왜곡하 지 않고, 뒤에서 헐뜯거나 중상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지 않 고 성급히 정죄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성급히 정죄하는 데에도 참여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당하지 않기 위해 본질 적으로 마귀의 일인 모든 거짓과 속이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법정에서나 기 타 다른 경우에도 나는 진리를 사랑하고 정직하게 진실을 말하고 고백해야 하며, 할 수 있는 대로 이웃의 명예와 평판을 보호하고 높여야 합니다. 제9계명은 법정의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판결을 하는 사람과 받 는 사람 그리고 증인이 있습니다. 증인의 말은 공정한 판결과 부정한 판결 모두의 원인이 되므로 하나님은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를 엄히 경고하고 있 습니다. 잘못된 판단의 빌미 제공하지 않아야 이 계명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이웃의 명예를 보호하는 것과 관련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 거짓 내용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왜곡하고 중상하는 것, 다른 사람을 성급히 판단하는 것, 다른 사람의 잘못된 판단에 참여하는 것들까지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금지 사항들이 공공연히 행해지던 역사의 한 장면을 기억합니다. 바 로 ‘스페인의 종교 재판’입니다. 스페인은 유럽의 여느 국가들과 다른 역 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슬림과의 치열한 공방으로 인한 것입니 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발흥한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 에 발을 디딘 이래로 스페인은 7백여 년에 걸친 분쟁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 습니다. 전쟁은 스페인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그렇지만 1492년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를 점령한 스페인의 통치 자들은 그들이 싸워야 할 또 하나의 대상을 발견했습니다.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이 그것이었습니다. 사상적 다양성이 존재하는 한 강력한 통일국가로 성 장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통치자들은 다른 종교를 신앙하거나 상이한 이상을 품은 사람들을 찾아 종 교 재판에 회부하여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이슬람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 못 한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희생이 이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종교 재판의 실제 역할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점차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것 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을 거짓으로 정죄함으 로써 부당한 죄값을 치르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중상(中傷)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네덜란드의 성도들에게까지 미쳤 습니다. 1556년 스페인의 왕이 된 펠리페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문인 합스부르크가(家)의 자손으로 스페인과 네덜란드 일대를 상속받았습니다. 그 는 종교개혁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여 가톨릭교회를 지키고 현 체제를 유지해야 할 임무를 자각했습니다. 그의 네덜란드 영지에서 급속히 확산되는 교회개혁의 움직임에 대한 해결책 은 기존 스페인 통치자들이 그들의 정적들에 대해서 해 왔던 방법 속에 있었 습니다. 즉, 개혁주의 신앙이 표방하는 바를 왜곡하고 신실한 성도들을 부당 하게 정죄함으로써 종교 개혁을 방해하려 한 것입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교회를 섬기던 기도 드 브레(Guido de Br�)의 기록에서 이러한 정황의 일부 를 알 수 있습니다. 펠리페 2세에게 보내는 그의 서신에는 개혁교회 목사로서의 항변이 적혀 있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혁주의 신앙을 가진 성도들을 국가의 권위에 도전 하는 반역자로 왜곡하고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항변이었습니다. 그의 벨직 신앙고백서 말미에는 장래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받을 성도들이 현세에서 겪 는 고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 성도들이 재판관과 권력자들에 의 해 이단자로 정죄 받고, 사악한 자들로 오해를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이처럼 권력자들은 개혁주의 신앙의 본질에 대해 정직한 판단을 하는 대신 에, 그들을 억압하기 위한 구실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 들이 권세자들의 정직하지 못한 판단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기존 체제를 통해 이미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사람 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여 자신의 의도와 는 무관하게 이웃을 정죄하는 일에 동참한 사람들도 적지 않 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의로 혹은 우연적으로 단지 어떤 이의 명예를 훼손했겠지만, 결과 적으로 교회의 온당한 개혁을 방해하는 모략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16세기 스페인의 가톨릭 옹호자들이 했던 것과 같은 무서운 재판들이 오늘날 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부분적으로 그 관행을 답습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이웃에 대해 경솔하게 판단할 때가 적지 않고, 이웃의 명예를 보호하고 높이는 대신 뒤에서 헐뜯기 십상이기 때 문입니다. 우리 이웃들의 명예 보호하고 높여야 제9계명에 대한 요리문답의 가르침을 쉽게 범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 다. 그리고 우리가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할 역사의 한 장면을 기억합니다. 어 떤 사람의 말을 분별없이 왜곡하거나 성급히 정죄함으로써 온당한 교회의 개 혁을 방해했던 한 종교 집단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125 no image 하이델베르크<64> 고백 없이 근절하기 힘든 죄_이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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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0 2009-01-14
고백 없이 근절하기 힘든 죄 이윤호_선교 지평 발행인 "도둑질에 대해서 엄히 경고하면서 외면할 수 없어" 110문> 제8계명에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국가가 법으로 처벌하는 도둑질과 강도질만을 금하신 것 이 아니고, 이웃의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고 시도하는 모든 속임수와 간계를 도둑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폭력으로 혹은 합법성을 가 장하고서 일어날 수 있는데 곧 거짓 저울이나 자나 되, 부정품, 위조 화폐 와 고리대금과 같은 일, 기타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모든 탐욕을 금하시고, 그의 선물들이 조금이라도 잘못 사용되거나 낭 비되는 것을 금하십니다. 111문> 이 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내가 할 수 있고 해도 좋을 경우에는 나의 이웃의 유익을 증진시키며,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이웃에게 행하고, 더 나아가 어려운 가 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8번째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 계명을 잘 지켜야 했습니다. 만약 이를 위반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가축과 관련된 기준 더 분명해 율법은 계명을 범한 자들의 배상 방법에 대해서 가축, 밭의 소산, 그리고 물 품 등의 예를 통해 규정해놓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명확하게 기준을 정해 놓은 것은 가축에 대한 것입니다. 만약 소를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소 한 마리에 소 다섯으로, 양의 경우에는 한 마리에 넷으로 갚아야 했습니다. 도둑질에 대한 배상 규정을 언급할 때 가축을 가장 선명한 기준으로 삼은 이 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다른 것에 비해 계수하기 쉬워서일 수도 있고, 가축과 관련한 절도 사건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 다. 어쨌든 가축은 이스라엘 백성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입 니다. 예컨대 야곱이 가축을 친 것과 관련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 다. 그가 나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 갈 때도 그의 자손들과 함께 가축들을 데 리고 갔 습니다. 낮선 곳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고센 땅에 거하 게 했던 바로가 그들에게 베푼 일자리도 그의 가축을 돌보게 하는 것이었습 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기로 작정했을 때 바로에게 했던 요구 중에는 가축 에 관한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즉, 가축들 중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모두 데려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밝힌 이유는 그것들 중에 어떤 것 을 취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생활을 거쳐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되었을 때도 소와 양은 음식이나 재산적 가치를 제공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중요 한 소유물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소유한 가축의 마리 수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 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웃의 가축을 도둑질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들의 눈에 풍족한 가축은 곧 안정된 삶을 의미했을지 모릅니다. 외양간에 가 축이 가득하다면 불의의 사고를 당해도 별 문제 없을 것입니다. 가축을 팔아 서 비용을 충당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가축을 많이 소유하게 된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큰 복을 받은 사 람으로 비쳐 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서라 면 부득불 다른 사람의 가축을 가져오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 니다. 마치 오늘의 어떤 교회가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식으로 평안을 구하 고 하나님의 복을 운운하며, 하나님의 일이라면 어느 정도의 부정행위는 용 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것과는 상반되는 고백이 성경말씀 한편에서 일어나 이스라엘 백 성 가운데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 라도 즐거워하며 기뻐할 것이라는 고백적 찬양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이 고백은 탐욕을 애써 억누름으로써 생겨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의 원대한 구원섭리와 구약교회의 정체성을 온전히 깨달음에서 비롯된 고백 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에 양이 없어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늘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하나님의 복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택받은 이 스라엘 백성은 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배태하고 있는 참 으로 복된 민족 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는 외양간을 가득 채울 때의 기쁨에 보다 익숙한 것이 사 실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교회는 이웃의 소유를 도둑질하지 말도록 가르치 고 있지만 일정 수준을 넘으려 하지 않습니다. 물질적 풍요를 통해 하나님 의 은혜와 복을 가늠하는 교회는, 합법성을 가장하여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 는 성도를 자연스럽게 용납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방법을 통해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교회 는, 온당치 못한 근거를 내세워 이웃의 희생을 강요하는 직분자가 때때로 필 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법으로 처벌하는 도둑질에 대해서 엄히 경고하는 교회가, 오히 려 제8계명을 통한 주님의 명령을 성도들이 범하도록 방치하기 십상입니다. 빠뜨린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8계명, 교회가 외면하기 쉬워 가축 한 마리 없는 텅 빈 외양간에서 오직 하나님의 구원섭리로 인하여 기뻐 하고 즐거워했던 선지자의 찬양이 우리 교회의 고백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 다. 이러한 고백 없는 노력이라면, 우리는 도둑질하는 죄에서 결코 멀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r
124 no image 하이델베르크<63> 세상의 가치관과 혼동될 때 교회도 무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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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8 2008-12-30
발람의 꾀(민 31:16) 이윤호_선교와 비평 발행인 "세상의 가치관과 혼동될 때 교회도 무너져" 108문> 제7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모든 부정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혼인의 관계 에 있든지 독신으로 있든지, 우리는 어떤 부정이라도 마음으로부터 미워하 고, 순결하고 단정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109문>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에서 간음, 또는 그와 같은 부끄러운 죄만을 금 하십니까? 답> 우리의 몸과 영혼이 모두 성신의 전이기 때문에 우리가 몸과 영혼을 순 결하고 거룩하게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부정한 행동이나 몸짓, 말이나 생각이나 욕망, 또한 그리고 유혹하는 모든 것을 금 하십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약속의 땅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습니 다. 그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직면한 여러 가지 도전들 중 하나는 이미 정착을 하고 있던 이방 민족들의 영토를 지나가야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통과를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 의 땅을 향하는 여정은 전투를 동반하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결코 녹녹치 않았던 가나안 여정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전투를 위해 잘 훈련된 군사들이 아니었습니다. 변 변한 전투 장비조차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이 이미 전투대열을 정비하고 있 는 군대와 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 코 힘없이 쓰러질 군대는 아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 직이는 군대였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의 승패는 객관적 전력의 우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 여 부에 달려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말미암아 승리가 보장된 군대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승전보는 주변으로 전해져, 모압과 미디안 사람들의 귀에까지 이 르렀습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은 이미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정면 대결에 서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던 모압과 미디안은 묘책을 고안해 내었습니다. 브 올의 아들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한 후 전쟁을 치르는 것이 었습니다. 그렇지만 발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 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의 입을 주관하셔서 저주 대신 오히려 축복 이 선포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얼마 후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을 치른 것도 아닌데 이만 명 이 상의 이스라엘 백성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 노하심의 결과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이라 불리는 이방신을 섬기는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후에 성경말씀이 밝히는 바 이 범죄의 원인은 '발람의 꾀'에 있었습니다. 발 람은 첫 계획의 실패로 낙담했던 모압과 미디안에게 새로운 계략을 제시했습 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공격하는 대신에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배반하 게 함으로써 그 민족을 자멸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발람은 어떤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우상숭배 하는 자리로 이끌었을까요? 바 로 음행을 통해서입니다. 발람은 모압과 미디안 여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도록 했습니 다. 뜻밖에도 그 계획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많 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그들과 음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발람 의 계획대로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방 여인들이 우상숭배 하는 자리로 이스라엘 남자들을 초대했을 때 그들 은 기꺼이 동참하여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어울렸습니다. 결국 이방 신 을 숭배함으로써 그들과 적극적으로 연합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 다. 이스라엘의 관심은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의 길을 가로막는 이방민족들과 싸울 때 그들의 마음은 비장했을 것입니다. 전투에 서 승리한다는 것은 곧 약속의 땅으로 근접하고 있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 다. 반면에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사들에게 이방 여인들과 간음하는 것 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을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는 허용될 수 있을 것이라 는 마음을 지니고 말입니다. 한두 번 음행 한다고 해서 약속의 땅을 향하는 행진을 멈추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올바로 파악한 이는 오히려 발람과 그의 꾀를 따르는 자들이었습니 다. 음행이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시키는 다리가 될 수 있다는 사 실을 그들은 발견했습니다. 나아가 이스라엘이 만약 하나님을 배반한다면 그 들의 존재 의미 마저 사라질 것이라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때로는 전쟁보 다 음행으로의 유혹이 더 효과적인 공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당했던 공격은 우리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때로는 소 리 없는 공격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음행을 하도록 합니다. 특히 음행에 대해서 무한히 관대한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마땅히 죄로 여겨야 할 음행이 개인의 권리나 우리시대의 문화로 여겨지는 것은 비단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적 가치관부터 구별해 내야 교회가 아무리 영적 성숙과 성장을 향해 매진하더라도 육체의 음행에 대한 세상 가치관을 올바로 판단하고 있지 않다면 이미 '원수들의 꾀'에 넘어가 버린 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발람의 꾀'에 넘어갔던 광야교회처럼 말입니 다.
123 no image 하이델베르크<62> 개혁주의 교회가 전투하는 방법_이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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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9 2008-12-11
하이델베르크 개혁주의 교회가 전투하는 방법 이윤호_'선교와 비평’ 발행인 “죄를 통해서 결코 선한 승리 얻을 수 없어” 105문> 제6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내가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그들을 미워하거나 해치거나 죽이지 않 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생각이나 말이나 몸짓으로 무엇보다도 행동으로 그리 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해도 안 되며, 오히려 모든 복수심을 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해쳐서도 안 되고 부주의하게 위험 에 빠뜨려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살인을 막기 위해서 국가는 또한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106문> 그런데 이 계명은 살인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을 금함으로써 살인의 뿌리가 되는 시기, 증오, 분노, 복수심 등을 미워하시며, 이 모든 것들을 살인으로 여기신다고 가르칩니다. 107문> 앞에서 말한 방식으로 우리 이웃을 죽이지 않으면, 그것으로 이 계명 을 다 지킨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기와 증오와 분노를 정죄하심으로써 우리가 우리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여, 인내와 화평 온유와 자비와 친절을 보 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해악으로부터 보호하며, 심지어 원수에 게도 선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교회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곳에서는 싸움이 끊 이질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사실상 교회의 크고 작은 다툼에 한두 번 연루되 어보지 않은 성도들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다툼도 있을 수 있어 때로는 그 정도가 심하여 성도 중 일부가 교회를 떠나는가 하면, 심지어 교 회가 둘로 나누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의 지적이 반드 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성도가 싸운다는 사실 자체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닐 수 있습니 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싸움을 하라는 명령을 여러 번 하고 있기 때문입니 다. 그 싸움은 그릇된 사상과 같은 무형의 대상을 향한 것일 수 있지만, 그 러한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맞선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 에게 보내는 그의 서신에서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거듭 당부 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일생동안의 삶이 싸움의 연속이었 음을 회고하는 장면에서는 전투적 모습을 잃지 않는 교회의 정체성을 되새기 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방식은 우리의 상식과 같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 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어느 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세 상 끝날 까지 그의 교회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것 은 악한 무리가 교회 안으로 전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시겠다는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불순한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심으로써 그의 백성으 로 하여금 그들과 싸우도록 하셨습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를 확신할 수 있 는 것은 교회를 내버려두지 않고 늘 함께 하실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신뢰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는 선한 싸움을 피하지 않으며 두 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하도록 명령하셨던 바울은 아주 특별한 요 구 하나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말다툼과 변론을 피하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 니다. 우리의 상 식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요구입니다. 말다툼이나 변론 은 싸움을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거짓 가르침으로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들과 맞선 다툼이나 논리 적 변론은 교회를 보호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을 일삼는 자들에게서 사도 바울이 본 것은, 자신의 이성적 판단에 의존하 고 있는 모습과 사랑을 소유하지 않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소극적인 태도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그것의 뿌리가 되는 미움 과 증오를 품지 않는 것이 일차적으로 이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지 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가 비록 원수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적극적 순종으로 그 계명을 지켰던 것입니다. 사실 이 계명은 교회 밖에서는 오히려 실천하기 쉬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 다. 우리가 조금의 손해만 감수한다면 세상의 이웃을 관대히 대할 수 있고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는 진정한 어려움은 교회 안에서 악한 세력을 만날 때입니다. 특 히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개혁주의 교회에서 말입니다. 성도들을 미혹하며 교회를 혼란하게 하는 거짓 무리들을 향해서 미움과 증오 하는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움에서 비롯된 다툼은 우리 교회에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없을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을 요구하는 제6계명을 범하는 죄가 되며 죄 를 통해서는 결코 선한 승리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전투하는 교회가 사용해야 할 무기와 그것을 사용하 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그 무기는 바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회가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온유한 가 르침과 온유한 징계로 싸우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승리는 계명에 순종할 때 얻게 돼 악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온유한 마음으로 오직 말씀을 드러낸다는 것이 적절 하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승리는 계명에 대한 순종의 결 과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122 no image 하이델베르크<61> 우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방법_이윤호 장로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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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8 2008-12-03
하이델베르크 우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방법 “직분자에게 주어진 권위는 교회가 보존해야” 104문> 제5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나의 부모님, 그리고 내 위에 있는 모든 권위에 모든 공경과 사랑과 신 실함을 나타내고, 그들의 모든 좋은 가르침과 징계에 대해 합당한 순종을 하 며, 또한 그들의 약점과 부족에 대해서는 인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의 손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를 흔히 개혁주의 교회라 일컫습니다. 우리가 개혁주의라는 정신 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이것이 성경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 다. 그렇지만 이 때 사용되는 개혁이라는 말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 한 의미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결코 남용되어서는 안 될 ‘개혁’ 오늘날 교회에는 이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로 위에 있는 권위에 대항한다는 의미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개혁주의 를 지향하는 사람조차 개혁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꺼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 니다. 개혁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종교개혁 시대에도 이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개혁의 물결에 편승하여 자신들 의 권익을 찾으려 했습니다. 당시 귀족과 성직자들의 잘못된 통치관행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통치자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개혁가들 의 외침에서 자신들의 항거에 대한 정당성을 임의로 찾았던 것입니다. 폭력 과 무질서가 그들을 뒤따랐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개혁이라는 단어의 의미 는 부당한 사회와 국가체제에 대한 도전 의지였습니다. 세상 통치자들이 개혁가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회를 핍박할 때도 그 가운데 있는 개혁 정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이루어졌습니다. 개혁주의 자들의 개혁을 통치 권력에 대한 항거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통치자에게 개 혁의 참된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던 귀도 드 브레의 이야기는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성경의 원리를 잘 표현한 것으로 널리 알 려진 벨직 신앙고백서를 작성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신앙고백서를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세상에 드 러내었습니다. 이것을 편지 한 통과 더불어 그가 있던 도시 도르닉 영주의 성 안으로 던져 넣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통치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 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교도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반 역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교회에는 개혁이라는 말의 의미를 우리 위에 있는 권위를 최소 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이 외에 성도들이 인정하고 복종해야 할 권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언뜻 보아 말씀만 의존하려는 그들의 생각이 옳아 보일지 모릅니다. 그렇지 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백성을 보존하고 다스리는 원리를 잘 알지 못 함에서 나온 발상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위의 권위자들의 손을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와 교회, 그리고 국가와 같은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우 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다 잘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 다. 교회 는 영적 어머니와 같은 곳입니다. 교회 직분자의 말씀과 권징에 순복함으로 써 우리의 영적 양식을 공급받아 장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은 교회로 부르시기 위해 육신의 부모를 통해 이 세 상에 오게 하시고, 그들에 의해서 육신과 정신의 젖을 받아 장성할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도록 국가라는 제도를 허락 해 주셨습니다. 정부에 의해서 선이 권장되고 악이 억제됨으로써 교회가 사 회 구성원들 가운데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 리가 위에 있는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받아 들임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부모와 교회와 국가는 모두 불완전한 상태로 이 세상에 존재합니 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이들에게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들 이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것을 권하고 명령할 때 불순종할 수 있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권위를 인정하고 그 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것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교훈하고 있습 니다. 성경은 특별히 우리 위에 있 는 권위 중에서도 교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끊임없이 개혁해 나감으로써 진리를 수호해 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허락된 방법은 직분을 허무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세우는 것이며, 권위를 향한 분쟁과 다툼이 아니라 성령의 검인 말씀을 올바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상식대로라면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교회의 참 개혁을 방해하는 것이 라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합당한 직분을 통해서 교회가 진리의 터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엄숙해 보존해야 할 교회의 직분 참 교회를 세상 끝날 까지 보존하고 인도해 나가시는 분은 바로 왕이신 그리 스도이시며, 그분은 직분을 통해서 교회를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개혁주 의 교회의 직분 맡은 자는 참으로 떨리는 마음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는 자 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121 no image 하이델베르크<60> 참으로 감사한 계명_이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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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8 2008-10-22
하이델베르크 참으로 감사한 계명 이윤호_‘선교와 비평’ 발행인 “주일성수는 하나님께 드리는 특별한 감사의 의무” 103문> 제4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첫째,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봉사와 그 봉사를 위한 교육이 유지되기를 원하시며, 특히 안식의 날인 주일에 내가 하나님의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 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성례에 참여하며 주님을 공적으로 부르고 가 난한 자들에게 기독교적 자비를 행하기 원하십니다. 둘째, 나의 일생 동안 악한 일을 그만두고, 주께서 그의 성신으로 내 안에서 일하시게 하며, 그럼 으로써 영원한 안식이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세 번째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는 여정 중 드로아에 들렀습 니다. 안식 후 첫날이 되자 바울 일행과 드로아의 성도들은 떡을 떼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주일에 발생한 특별한 사건 그곳 사람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없 었던 바울은 밤늦도록 그의 강론 을 이어갔습니다. 이때 특별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창틀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 여 삼층누(三層樓)에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사람들이 달려가 그를 일으키 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허리를 굽혀 그를 안으 며 그에게 생명이 있다 말하고, 날이 새기까지 말씀 강설을 계속한 후 그 도 시를 떠났습니다. 그 후의 상황을 누가는 짧지만 분명한 어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드로아의 성도들은 그 청년을 보며 적지 않은 위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유두고가 다 시 살아나서 다행이라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의 날에 주어졌 던 또 한 가지 은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은 무역항이 있는 이 도시를 최소한 두 번 방문했 습니다. 첫 번째 방문 때 성령님은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어 마게도냐로 인 도하셨습니다. 그때 이 도시에 어떠한 회심자가 있었는지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 방문 때에는 주님을 아는 자들이 있어서 주의 날에 바울 일행과 드로아의 성도들이 함께 떡을 떼러 모였습니다. 매주 안식 후 첫날 이 되면 성도들이 주의 날로 모였지만 그 날은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그리스 도의 사도된 바울이 함께 한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바울은 아주 오랫동안 말씀을 강설했습니다. 어떤 말씀을 전했 는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평소 교회와 세상을 향하 여 외쳤던 그의 소리를 생각해 본다면 그곳에서의 강론도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중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내용은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 디옥의 회당에서 설교 할 때 바울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날을 주의 날로 지켰던 드로아의 성도들은 부활의 의미를 배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일 때마다 그것을 기념하고 의미를 되새겼지 만 그들에게 갈등과 의심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몸의 부활을 이야기한 바 울을 기롱(譏弄)했던 아덴 사람들과 같은 행동이 이곳에서도 없지 않았을 것 입니다. 한편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의(義)로 여겨 다른 신(神)들을 배척하 는 성도들을 세상은 미워했을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부활을 은폐하려 했던 대제사장들의 편에 서 있는 자들은 드로아의 성도들을 거짓말쟁이로 비난했 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에 게 이와 같은 고난이 끊이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날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죽은 줄로 만 알았던 한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 에 확신하지 못하던 사람들의 눈앞에 한 증거가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생명 을 얻은 그 청년을 목격한 성도들은 부활의 메시지를 확신함으로 소망을 가 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사도는 그 도시를 떠났습니다. 지금 사도가 가는 길은 영광을 받기 위 함이 아니라 결박당하기 위한 것임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그를 다 시 못 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드로아의 성도들은 그날에 듣고 본 것을 인하여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의 날에 일어났던 그 사건은 그 뒤로 반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주일에도 그 다음 주일에도 그 은혜는 반복되어 성도들에게 확신과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시대든 참 성 도는 진리로 인한 고난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성도는 선 한 행실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선한 증거를 얻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 는 진리로 인해서는 배척을 받을 것입니다. 선한 증거를 얻으면서도 배척을 받는 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는 최후 심판의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진정 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감사한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위로받 을 방편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일입니다. 말씀의 강설과 찬송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 생 명을 확인하고 위로를 얻는 복된 날이 바로 주일인 것입니다. 주일에 다른 무엇을 하지 못해서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주일에 편리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 니다. 그렇지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참으로 감사 한 의무입니다. 주일을 온전히 지킬 때 고단한 삶 가운데 숨어있는 참 안식 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 주일 참된 위로 누리게 돼 드로아의 성도들에게 허락하셨던 그 은혜를 우리도 매 주일 바람이 마땅할 것입니다.
120 no image 하이델베르크<59> 우리가 했던 맹세를 기억하는가?_이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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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0 2008-10-01
하이델베르크 우리가 했던 맹세를 기억하는가? “맹세 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 소홀히 하는 것” 이윤호_‘선교와 비평’ 발행인 101문>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건하게 맹세할 수는 있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요구하는 경우, 혹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 웃의 복을 위하여 신뢰와 진리를 보존하고 증진시키는 데 꼭 필요한 경우에 는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맹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며, 그 렇기에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도 이것을 옳게 사용해 왔습니다. 102문> 성인이나 다른 피조물로도 맹세할 수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 정당한 맹세는 오직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불 러, 진리에 대해 증인이 되어 주시며 내가 거짓으로 맹세할 때에 형벌하시기 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예는 어떤 피조물에게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제3계명을 설명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 짓으로 사용하는 것과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합 당하게 사용하는 것에 관한 내용입니다. 임직자서약은 하나님께 하는 것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을 마치 그분이 기뻐하는 일인 양 여 기면서 실상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실현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거짓 증 거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으로써, 이미 앞서 살펴본 내용입 니다. 그렇지만 모든 맹세가 불가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맹세와 서원은 진리를 보존하고 증진하는데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성도 가 국가의 공직에 취임할 때 그 직책에 대한 맹세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국 가가 요구하는 경우입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배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합당한 맹세이며, 맹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눈가림이 아니라 성실함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 다.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 씀을 가슴에 둔 태도로 말입니다. 물론 국가나 사회가 요구하는 맹세가 하나님의 뜻과 마찰을 일으킨다면 마땅 히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와 사회 가운데 교회의 모습을 올바로 드 러내 는 것이 맹세를 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에서의 맹세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컨대 유아세 례나 목사의 임직과 같은 예식은 합당한 맹세 없이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 니다.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베풀 때 부모는 맹세합니다. 그것의 내용은 자녀 를 하나님께 완전히 바칠 것,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칠 것, 그리고 아이 앞에서 경건한 믿음과 행위의 본을 보일 것 등을 포함합니다. 이 서약은 목사의 묻는 말에 부모가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 지만 부모는 목사에게 서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서약을 뒤따르는 목사의 공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목사는 임직예식에서 맹세를 합니다. 그 내용은 신구약 성경에 대한 절 대적 신앙,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성경의 교훈과 부 합하는 것으로 믿고 그것들을 따를 것, 교회정치와 권징조례 및 예배모범을 따를 것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맹세는 노회장 앞에서 선서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지만 이 역 시 노회장에게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근 본적으로 장로와 집사에게도 해당합니다. 이와 같은 합당한 맹세는 교회가 진리를 보존하고 그것을 상속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합당한 맹세는 반드시 수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맹세한 내 용을 성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 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지 않는 거짓 맹세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자녀를 완전히 하나님께 바치기로 맹세한 부모가, 자신의 바람과 사 회적 기준대로 자녀를 양육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자녀에게 하나 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칠 것을 맹세한 부모가 학교의 공부를 더 중요하 게 생각해서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입 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했던 맹세를 어기는 것이 되며, 결국 거짓 맹세 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를 비롯한 직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그들은 이미 하나님 의 이름 앞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 문답을 따를 것을 맹세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사가 그 속에 담긴 내용을 잘 모른다 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아니면 내용을 알더라도 그것을 성실하게 따르지 않는 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임직식 때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맹세 를 저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히 여기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온갖 거짓 맹세가 성행하는 시대에 우리 개혁주의 교회에 합당한 맹세가 허 락된 것은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 상 가운데 빛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며, 교회로 하여금 진리를 보존하 고 전수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보존과 전수에 힘써야 그렇지만 이러한 유익은 성실한 이행이 뒤따를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고 교회 가운데서 했던 합당한 맹세 의 내용들을 망각한 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야겠습니 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히 여기는 죄이기 때문입니 다.
119 no image 하이델베르크<58> 증언과 위증僞證_이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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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1 2008-08-27
하이델베르크 증언과 위증(僞證) “복음의 본질 훼손하는 것이 가장 큰 위증” 이윤호_‘선교와 비평’ 발행인 제99문> 제3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우리가 저주나 거짓맹세, 또는 불필요한 서약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 게 하거나 잘못 사용하지 않는 것이며, 더 나아가 침묵하는 방관자가 되어 그러한 두려운 죄에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만 사용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고백 하고 부르며 우리의 모든 말과 행실에서 그분이 영광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 다. 제100문> 맹세나 저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 는 대로 그러한 죄를 막거나 금하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하나님께서 진노하 실 정도로 중대한 죄입니까? 답>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크고 하나 님을 진노케 하는 죄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사형으로 벌 하라 명하셨 습니다. 성경에서는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법정 구조를 통해 설명하곤 합니다. 예컨 대 ‘증인’과 같은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입니다. 증인이라는 단어는 바로 법정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증인이어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이 그리스도 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거짓이라 항변하는 세상에 대해 그들이 보고 들었던 것을 증언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증인은 목격자를 의미합니다. 증인은 자신의 개인적 의견이나 추측한 내용 을 말하도록 세워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직접 보고 들 은 것을 그대로 말하여 판결의 근거가 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와 같은 증인으로서의 제자들의 책무를 주님은 그들에게 맡기고 내버려두시 지 않았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면에서 제자들을 돕고 인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혜사 (advocate, RSV)라는 말 역시 법률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분은 무엇 보다 제자들이 목격했던 그 내용을 정확하고 담대하게 증언할 수 있도록 그 들을 인도할 것이었습니다. 증인이라는 역할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증인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바로 위증죄(僞證罪)입니 다. 본 것을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컨 대 본 것과 다른 사실을 말하거나, 본 사실을 말하더라도 자신의 생각을 덧 붙여 본질을 훼손시키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것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 닙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증언에 의해서 죄 없는 자가 정죄 받고 범죄자의 죄가 감추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 리는 예수님의 직접 목격자는 아닙니다. 일차적 의미의 증인은 예수님의 사 도들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증인들의 이야기로 가득 찬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증인이라는 단어는 일반 성도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특별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단어가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들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목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일차적 증인들의 증언 내용을 다시 전달한다는 의 미 에서 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의 후손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와 제상 사이에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법정에 증인으로 서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으로서 이 세 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증언에 관해서는, 우리의 개인적 생각이 나 판단이 아닌 그리스도의 일차적 증인의 증언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증언의 원칙에 충실하지 않다면 위증죄라는 무거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말하는 거짓 맹세는 바로 위증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3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 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이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의 이름을 경 솔히 일컫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보다 훨씬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위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차적 증인들의 증언 내용 과 다른 내용을 말하거나 그 내용에 무엇인가를 첨삭하는 경우입니다. 많은 교회는 예배당 꼭대기에 십자가를 달아둡니다. 그것이 가지는 유일한 의미라면 그 예배당에 모이는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무리임 을 밝히는 것입니다. 즉, 이 무리는 그곳에서 선언되는 말씀과 삶을 통해 삼 위일체 하나님을 증언하는 증인들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 증거해야 그렇지만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낸다는 사실 자체로 증인의 임무 를 다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우리 임의대로 드러낸다면 그것 은 위증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증언이 위증이 되지 않기 위해 교회는 사투를 벌여 야 할 것입니다.
118 no image 하이델베르크<57> 무형의 성상聖像_이윤호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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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7 2008-08-13
무형의 성상聖像 이윤호‘선교와 비평’ 발행인 “상상(想像)의 하나님을 만드는 것이 우상 숭배” 96문> 제2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 의 말씀에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97문> 그렇다면 어떤 형상도 만들면 안 됩니까? 답>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든 형상으로 표현될 수 없고 표현해서도 안 됩니 다. 피조물은 형상으로 표현할 수 있으나, 그것을 경배하기 위해 또는 하나 님께 예배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 형상을 만들거나 소유하는 일은 금하셨습니 다. 98문>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평신도를 위한 책”으로서 형상들을 허용해도 안 됩니까? 답>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 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말 못하는 우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씀에 대 한 살아 있는 강설을 통해 가르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8세기의 동로마, 즉 비 잔틴 제국에서는 첨예한 종교논쟁이 일어나게 됩니 다. 바로 성상(聖像)에 관한 문제로 말미암은 논쟁이었습니다. 이미 오랫동 안 동, 서방 교회에서는 성상과 성화를 사용해 왔습니다. 성상, 성화 파괴 논쟁 발발해 이교도들에게 성경말씀을 설명할 때와 성도들에게 신앙을 교육할 때 그것들 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여겨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비잔틴 제국 내의 일부 성직자들 사이에서 성상은 우상이므로 이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 세게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소위 ‘성상파괴논쟁’이라 부릅니다. 이 논쟁의 결과를 미리 말하자면, 교회는 성상의 사용을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겨 그것을 허용하는 것이 옳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범종교회의에서 성상이 교회 안에서 보존되어야 한다 는 결론을 내렸으며, 843년에 이르러 이 논쟁은 성상옹호론자들의 승리로 일 단락 맺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비잔틴제국에서 는 성상보다는 오히려 이콘(Icon :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벽화나 모자이 크, 목판 등에 신성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그린 그림)이라 칭하는 독특한 양 식의 교회예술이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성상이나 이콘들은 종교 개혁 을 통해 교회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문제의 시작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성상과 성화 를 사용해 오던 터에 왜 갑자기 성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게 되 었을까요? 물론 이것은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제기되어 오 던 신학적 문제였을 것입니다. 단지 이 시점에서 가시적으로 표출되었을 따 름입니다. 그렇지만 성상파괴론자들로 하여금 실재적 행동을 하도록 자극한 일이 있었을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이슬람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이 슬람 제국에서는 당시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차원에서 그들의 영토 내의 모 든 성상을 제거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성상을 옹호하는 기독교 인들을 우상숭배 하는 자들이라 비난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슬람의 도전이 부분적으로나마 성상반대론자들을 자극했을 것이 라는 주장이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인지 아 닌지 증명할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슬람 제국에서 성상파괴 운동이 일어난 것과 비잔틴제국에서 성상반대론자들이 그들의 목소 리를 높인 것 사이에는 근사한 시간적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이슬람에서는 일찍부터 성상을 철저히 금지해 왔습니다. 기독교인들 보다 무슬림들이 일찍부터 성상과 성화의 제거에 열심이었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까지 무슬림들은 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 고 그것을 숭배하거나 경배하는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성상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와 그들이 기독교를 향해 던진 비난은 어떤 의미 를 가질까요? 그들이 성상을 만들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 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본질은 그와 다 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만든 성상보다 훨씬 더 거대한 성상 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원래 존재하시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 른 하나님을 만들어 그것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형(無形)의 성상 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무슬림들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 그렇지 만 우리도 자칫 그와 유사한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 실입니다. 성상을 만들지 않는다고 천명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성상을 계속 만들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원래 존재하시는 하나님, 즉 존재론적 의미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오직 성경 의 빛을 통해 알 뿐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이나 짐작, 혹은 이성으 로 알 수 있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흔히 상상의 하나님을 만들어냅니다. 우리의 상식이나 세상의 보편적 가치기준으로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하나님 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것 을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여 우리 짐작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경우도 마찬 가지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 다. 자기식 신관이 우상 만들어 눈에 보이는 성상을 만들지 않는다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지만, 실상은 무형 의 성상을 만들어 섬김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 습니다.
117 no image 하이델베르크<56> 교회는 무엇을 의존하는가_이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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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8 2008-07-23
하이델베르크 교회는 무엇을 의존하는가 이윤호_‘선교와 비평’ 발행인 “계명보다 사람의 열심을 앞장 세워선 안돼” 93문> 십계명은 어떻게 나뉩니까? 답>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처음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르 치며, 둘째 부분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칩니다. 94문> 제1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내 영혼의 구원과 복이 매우 귀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온갖 우상숭배, 마술과 점치는 일과 미신, 성인이나 다른 피조물에게 기도하는 것을 피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분만 을 신뢰해야 하며, 모든 겸손과 인내로 그분에게만 복종하고, 모든 좋은 것 들을 오직 그분에게서만 기대하며,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경외하 며 그분만 섬겨야 합니다. 그러하므로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피조물을 포기합니다. 95문> 우상숭배란 무엇입 니까? 답> 우상숭배란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대신, 혹 은 하나님과 나란히, 다른 어떤 것을 신뢰하거나 고안하여 소유하는 것입니 다. 아마 한국교회는 제1계명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 철저히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철저히 배격하 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제일주의에 혼동하지 말아야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선교사들과 초기 교회지도자들은 이미 습성 화되어버린 우상 숭배적 행위를 철저히 근절시켰습니다. 복음을 깨달은 자들 은 조상 제사를 비롯한 크고 작은 미신적 행위들에서 떠나는데 주저하지 않 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상숭배가 죄악임을 명백히 깨달은 이상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고난을 피하려하지 않았 습니다. 이러한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보다 훨씬 나 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극소수를 제외한 유다 왕들은 우상숭배를 버젓이 행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돌 판이 들어있는 법궤를 중심에 간직하고 있던 그들이 바로 그 첫 째 계명을 지속적으로 범했다는 사실을 언뜻 납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렇지만 부분적으로나마 그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유다왕 아 하스에 관한 기록은 이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제공합니다. 아하스왕의 우상 숭배 동기를 생각해 보니, 우리의 모습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유다왕 요담의 아들이자 히스기야의 아버지인 아하스는 예루살렘에서 16년 을 치리하였습니다. 당시는 유다왕국이 이웃나라에 의해 시달림을 받던 때였 습니다. 아람의 군대와 북이스라엘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했기 때문입니 다. 유다왕국은 예루살렘 방어에 전력을 다했지만 자신들의 한계를 느꼈습니 다. 이에 대해서 아하스왕이 취한 행동은 힘이 센 나라에 군사 원조를 요청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최대강국은 앗수르였습니다. 아하스왕은 앗수르왕에게 신하의 예를 갖 추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앗수르는 다메 섹을 공격하여 아람왕을 죽임으로써 유다왕국의 안전을 지켜주었습니다. 고 마운 마음에 다메섹으로 단숨에 달려간 유다왕 아하스는 신앙 상식을 넘어서 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 곳에서 그가 했던 일은 앗수르의 제사단(壇)의 구조를 예루살렘의 제사장 에게 알려주어, 그것과 똑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 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아하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단에 제사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아하스로 하여금 이와 같은 배교 행위를 하도록 했을 까요? 어쩌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었을지 모릅니다. 앗수르의 종교의식을 따르는 것만큼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도 드물 것 입니다. 유다왕국의 운명을 힘센 이웃나라에 의존했던 것입니다. 역설적이게 도 그들은 하나님의 도성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첫째 계명을 범했 습니다. 그러므로 아하스왕의 범죄는 이방제단에 제사지냄으로써 비로소 성 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대신 앗수르라는 강대국을 의존하려 했을 때 이 미 우상숭배는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정의하는 우상숭배는 이와 맥락을 같이합니다. 우 상숭배란 다름 아닌 하나님과 나란히 다른 어떤 것을 신뢰하거나 고안하여 소유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우상숭배에 대해서 단호하 게 대처하려 노력해왔습니다. 온 갖 미신적 행위를 교회에서 척결하는데 뜻을 같이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우 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계명을 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아하스왕이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한 가운데 있는 돌 판의 첫 계명을 범 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적지 않게 하나님과 나란히 다른 것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교 회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보존하는 수단으로 합리 적 이성이나 민주주의적 체제를 하나님과 나란히 신뢰하려고 합니다. 우리 의 삶 속에서 과학이라는 신을 하나님과 나란히 두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 라 교회의 부흥과 선교를 위해서 세상의 경제 논리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세속적 방법이 신앙 대신할 수 없어 이런 점에서 교회를 보호하고 부흥시키려는 우리가 오히려 교회에 주신 하나 님의 계명을 범하는 일은 없는지 반성해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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