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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16 no image 하이델베르크<55> 교회에 주신 시금석_이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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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9 2008-07-02
하이델베르크 교회에 주신 시금석 “십계명은 그의 백성과 교제하시는 근간” 이윤호_‘선교와 비평’ 발행인 92문> 하나님의 율법이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출 20:2-17; 신 5:6-21).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 라.” 제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 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 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 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 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제3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 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 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 을 행할 것이나, 제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 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 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 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 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제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제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8계명: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지니라.”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 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십계명은 삶의 원칙으로 주어진 것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①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관하여, ② 우리의 구속에 관하여, 그리고 ③ 우리의 감사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세 번째 부분의 중심에 십계명의 교훈이 있습니 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기에 앞서 선언했 던 말씀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계명들을 주신 것은 자기 백성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 이셨습니다. 이 법을 지켜야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종 의 신분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원칙을 말씀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속에 관한 설명을 마친 요리문답은 그것에 감사 하는 삶의 원칙을 십계명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을 몇 가지로 구분하는데 익숙합니다. 예컨대 도덕법, 민 법, 그리고 의식법과 같은 분류입니다. 이런 분류에 따라 십계명은 도덕법 의 핵심으로 여겨집니다. 우리가 ‘도덕’이라는 말에서 느끼는 직관적 의미 때문에 십계명의 의미가 제한되는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들을 지키는데 있어서 단지 개 인의 윤리적 노력에 초점을 맞추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제사상에 절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든지, 이웃에게 거짓말하지 않기 위해서 노 력하는 것으로 십계명의 요구를 다 지킨 것으로 생각해버리는 경우입니다. 십계명이 도덕법이라고 해서 그 범위가 윤리적인 문제에 제한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사실상 십계명은 도덕법의 핵심으로써가 아니라 전체 율법 의 핵심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만을 돌 판에 새기시 고 그것을 법궤에 보관하게 하신 것은 십계명을 그의 백성과 교제하시는 근 간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도덕법 뿐 아니라 민법과 의식법과 같은 전 영역에 그 원 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민법과 의식법을 열심히 지킨다 하더라도 십계명의 원리에 어긋난다면 그저 무의미한 실천일 따름입니다. 이처럼 구약시대에 십계명이 모든 율법의 핵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개개인에 대한 모든 영역의 표준이 되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십계 명 역시 개인의 도덕적 삶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영역을 지배해야 할 것입 니다. 즉, 십계명은 우리 개인으로 하여금 윤리적으로 하나님께 바로 서 있 게 할 뿐 아니라,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는 방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습관에 따라 빠짐없이 주일 예배를 드리고 우리가 교회의 사명으로 여기는 것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십계명이라는 시금 석을 대었을 때 예배 중에 우상의 형상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 며, 사명감을 가진 실천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고 주님에 대해 서 거짓 증거 하는 예가 얼마나 흔한 일인지 발견하게 될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십계명을 지키지만 구약의 민법과 의식법들을 지키지는 않습니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 인하여 그것들이 새로운 옷을 입었기 때 문입니다. 구약의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끌어 낸 이스라엘 백성에 게 주신 것이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망으로부터 건져낸 그 의 교회에게 말씀하고 계신 계명입니다. 계명의 핵심과 멀어지는 것이 문제 구약의 이스라엘은 수많은 법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정작 그것들의 핵심인 십 계명의 정신과 멀어져 있던 때가 많았습니다. 모이기에 힘쓰고 성장을 위해 열심을 다하는 우리 교회 역시 말씀의 원리에 충실하고 있는지 살펴야겠습니 n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십계명을 통해서 말입니다.
115 no image 하이델베르크<54> 회개의 합당한 열매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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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6 2008-06-18
하이델베르크 회개의 합당한 열매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회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그 열매로 나타나” 88문> 사람의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답>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89문>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을 진노케 한 우리의 죄를 마음으로 슬퍼하고 더욱더 미워하고 피 하는 것입니다. 90문> 새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 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91문> 그런데 선행이란 무엇입니까? 답>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그리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행 한 것만을 선행이라 하며,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사람의 계명에 근거한 것 은 선행이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을 때 베드로의 힘찬 설교는 이 천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귀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울립니다. 신약 교회의 싹을 틔우는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그 설교를 듣고 모여든 사람들의 무리는 그 숫자가 늘고 늘어 지금까지 이르는 보편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의 증거는 오늘 우 리를 향한 메시지이며, 또한 우리가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회개 통해 처음 교회로 모이게 돼 베드로의 설교는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였습니다(행2:38). 그의 설교에 마 음이 찔려 어찌할 바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잘못 된 생각을 포기하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 한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임으로써 예루살렘 교회는 자라나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의 회개는 단지 생각을 바꾸는 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소 유하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깨달아 그것이 삶 속에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선행은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을 만한 것이었지만 그들이 소유한 진 리의 본질을 알게 된 세상으로부터 돌아온 반응은 교회에 대한 박해였습니 다. 박해도 그들의 새로운 삶을 방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회개한 새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기쁨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전혀 새로운 삶 속으로 뛰어든 것은 아 니었습니다. 소위 예루살렘 공의회라 불리는 사건이 소개되는 사도행전 15장 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약 교회의 성도들이 여전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 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그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먼 곳에까지 이르러 자신 들의 생각을 열성적으로 전파했습니다(행 15:24). 그들이 할례 문제를 다루 는 모임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아(행 15:5)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보통의 유대 인들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예루살렘 교회의 무리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변개되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 역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외치는 회개의 메시지에 화답하여 교회 의 무리에 참여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부 인하지 않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자신들의 이성적 사고로부터 완전히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할례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그들의 모습은 사뭇 진지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 은 유대인의 관례를 지키려 노력하는 그들에게서 교회의 도덕성을 발견하기 도 했을 것입니다. 성경의 정황으로 보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옳 은 것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 과 열심을 바로 잡아야 했으며, 그들의 가르침을 모범으로 삼고자 했던 많 은 성도들을 원래자리로 되돌리는 데 아낌없는 수고를 들여야 했습니다. 그 들로 하여금 회개와 하나님을 위한 선행의 의미를 다시 깨닫도록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바람 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결과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존의 이성적 가치관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과, 하나님 께 영광이 되는 선행의 내용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한 층 나아지는 것이 회개가 아님을 압니다. 회개는 우리 삶 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방향의 전환 만 강조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방향이 정확하게 맞추 어져야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방향전환 있어야 첫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사도 베드로가 그의 죽음을 앞둔 마지막 서신 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열매있는 삶의 중요성을 동시해 강조했던 그 마음을 헤아려봅니다(벧후 1:8).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열심을 내고 있으나 실상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봅니다.
114 no image 하이델베르크<53> 교회의 선행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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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5 2008-06-04
하이델베르크 교회의 선행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세상적 기준의 선행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86문> 우리의 공로가 조금도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우리의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는 왜 또한 선행을 해야 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셨을 뿐 아니라 그의 성신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여 그의 형상을 닮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 든 삶으로써 하나님의 은덕에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찬양받으시 기 위함이며, 또한 우리 각 사람이 그 열매로써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얻 고, 경건한 삶으로써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87문> 감사치도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삶을 계속 살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도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음란한 자, 우상 숭배자, 간음하 는 자, 도둑질하는 자, 탐욕을 부리는 자, 술 취하는 자, 욕하는 자, 강도질 하는 자나 그와 같은 죄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씀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부 분은 인간의 비참함에 관하여, 두 번째 부분은 구속에 관하여, 마지막 세 번 째 부분은 감사함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선행 행할 때도 기본 원칙 지켜야 오늘 보는 제86문은 바로 세 번째 부분의 첫 단추를 여는 문답입니다. 구속 을 통하여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에게 맨 처음 주어진 교훈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선행에 관한 것입니다. 선한 행실이 드러나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살펴야 할 것입니 다. 구속을 맛보지 못한 비참한 상태에 있는가, 아니면 구속 알고 그것을 감 사하는 위치에 서 있는가. 단, 이때의 선행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그것과는 구별된 것입니다. 20세기 개혁주의 변증학자들 중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남긴 사람들 중에 코 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이 있습니다. 그가 개혁주의 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기독교의 근본 교리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교회들이 그러하듯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 복음에 심각한 손상을 가져올 것임을 지적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과 조화된 방법에 따라 가감 없는 복음이 세상과 만났 을 때 일어나는 필연적 현상은 정면충돌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 냐하면 전적 부패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복음의 진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틸(Van Til)의 교훈은 우리와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되도록 세상과의 사상적 충돌을 피하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이러 한 노력으로 세상과 교회가 서로를 이해하는 영역이 넓어졌고, 세상은 교회 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때로 세상 사람의 눈에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세상이 교회에 대해 가지는 높은 기대수준으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 회는 세상과 공유할 수 있는 공통영역을 찾아, 그것을 발판으로 세상 가운 데 복음의 진리를 나타내 보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이 공감하기에 가장 용이한 영역은 아마 선행일 것 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 대다수는 자신의 종교나 도덕적 배경과 무관하게 선을 행하는 것 이 사람의 근본 된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로 세상 사람들이 보여주 는 선행의 모습은 교인들조차 탄성을 금하지 못할 만큼 헌신적이기도 합니 다. 교회 역시 선행을 강조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밖을 향해서도 선을 행하기에 열심입니다. 이것은 회심한 삶의 변화 정도를 판단하는 척도 로 쓰이기도 합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교회에 우호적인 인식을 가지게 하는 것 역시 주로 선행에 기인합니다. 선행에 있어서만큼은 교회와 세상이 뜻을 같이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86문에서의 선행에 대한 가르침은 세상에서 추구하는 그것과는 근 본에 있어서 같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상으로 여기 는 선행이란 근본적으로 왜곡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결단코 선을 행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 자체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시편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에서 말하는 인간상 역시 선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서의 모습 입니다(벨직신앙고백서 제14조). 교회가 선행에 있어 서 세상과 보조를 같이 한다면, 우리가 하는 선행 역시 왜곡된 것일 수 있 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감사함으로 드러나는 선행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비로 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말씀에 합당한 선행을 통해 삼위일체 하 나님께 찬양이 되고 주님과의 교제를 더욱 풍성하게 하여 우리의 믿음이 굳 건해 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선행이 세상 사람들의 이상을 만족시킴으로써 그들을 주님 께로 인도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에 합당한 선행은 세상과 충 돌을 일으켜 불신자들의 마음을 찔리게 할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작 정하신 사람들의 회개가 일어날 것입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이 하 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사도들이 실행으로 옮겼을 때, 바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선행은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 오늘 우리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당연히 여기는 수준의 선행으로 만족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할 것 입니다.
113 no image 하이델베르크<52> 신중해야 할 교회의 권징과 해벌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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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9 2008-05-15
하이델베르크 신중해야 할 교회의 권징과 해벌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시대적 용기 가져야 할 권징시행 주체들” 85문> 교회의 권징을 통해서 어떻게 천국이 닫히고 열립니까? 답>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가진 자가 교리나 생활에 서 그리스도인답지 않을 경우, 먼저 형제로서 거듭 권고할 것입니다. 그렇지 만 자신의 오류나 악행에서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그 사실을 교회 곧 치리 회에 보고해야 합니다. 그들이 교회의 권고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으면 성례에 참여함을 금하여 성도 의 사귐 밖에 두어야 하며, 하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제외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참으로 돌이키기를 약속하고 증명한다면 그들을 그리스도의 지체와 교회의 회원으로 다시 받아들입니다. 한부선(Bruce F. Hunt) 선교사는 우리에게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닙니 다. 그의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이나 은퇴하는 순간까지 지속되는 일관된 선 교사역을 생각해 볼 때 오늘날 그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의외 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는 합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 사실입 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교회의 권징과 적지 않은 연관이 있습니다. 잊혀진 인물, 한부선 선교사 일본이 한국교회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1938년 은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일본당국과 한국교회의 희비가 엇갈리던 해였습니 다. 바로 이 해에 조선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 입니다. 교회에 대한 일본당국의 압력이 행사된 총회였습니다. 회의가 열리기 전에 이미 참석자들에게 회유와 압력을 가하던 일본경찰들은 회의가 열리는 동안 내내 그 진행 과정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삼엄한 분위 기 속에서 신사참배를 허용하자는 동의안이 나왔습니다. 일본경찰들을 의식 한 듯 의장은 후속절차를 생략한 채 그 동의안을 가결시켰습니다. 어떤 이 는 안도감을, 또 어떤 이는 침통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결정의 부당성을 인식하더라도 무거운 마음을 억누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 황이었습니다. 그 때 “회장 규칙이요!”라는 외침이 있었습니다. 부당한 결 정에 대한 공적인 이의제기였습니다. 일본경찰은 곧바로 그를 붙잡아 회의 장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그 외침의 주인공은 바로 미국정통장로교회 (OPC)가 이 땅에 보낸 선교사 ‘한부선’이었습니다. 당시 한부선 선교사는 만주에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비록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에 참여할 것을 결정했지만 그는 권위에 복종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우상숭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사참배 를 반대하며 현세의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성도 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와 함께 하던 신앙의 형제들이 작성한 ‘장로교인 언약’에서 배교의 시대 에 교회가 지녀야 할 사명에 대한 그들의 고백을 엿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한부선 선교사에 대한 노회의 반응은 제명이었습니다. 제명의 이유는 총회 가 신사참배를 거행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불복할 뿐 아니라 그 것의 이단성을 교회에서 가르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일본경찰이 본국으로 철수하고 교회가 국가의 압제에서 벗어났을 때 교회는 심한 몸살을 앓게 되었습니다. 신사참배로 인해 고난을 당한 성도들 과 그것을 주도한 사람들 사이에 역사를 보는 시각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그렇지만 대다수 성도들은 신사참배의 이단성을 인정하고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반성의 시간을 가졌으며 앞으로 그와 같은 배교적 행위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장로교회는 반드시 해결 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제명된 성도들에 대한 적절한 절차가 그것입니다. 한부선 선교사와 같은 경우입니다. 교회는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였음을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한부선과 같은 이들 이 다시 교회와 연합하는 공적선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한부 선 선교사에게 ‘해벌’을 선언함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제명’ 상태로부터 ‘해벌’되었으니 이제 한부선은 교회와 협력하여 선교 사로서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 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심각한 모순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해벌’이라 는 법 절차가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입니다. ‘해벌’은 당사자의 행위가 실제로 범 죄행위였음을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은 분명한 죄이지만, 그동안 충분히 반성하고 죄로부터 돌이켰음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 었습니다. 해벌 조치가 아니라 그에 대한 제명 자체의 무효화를 이야기하는 성도들이 있었지만 총회는 처음의 ‘해벌’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종결하였습 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교회가 파송하는 선교사들에게 한부선과 같은 정신 을 전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권징은 단순히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방편이 아니라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선포, 성례와 더불어 권징은 참 교회의 표지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권징의 유무(有無) 자체가 표지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권징을 시행하는 주체가 합당한 성경 해석과 시대적 용기를 가지지 않는다면 권징이 오히려 교회를 혼란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징은 참 교회의 표지 오늘 우리 교회는 권징을 성실히 이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거나 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 지 않 는 한 올바른 권징을 기대하기 힘들 것입니다.
112 no image 하이델베르크<51> 우리 시대 목사와 장로가 살아가는 법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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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0 2008-04-23
하이델베르크 우리 시대 목사와 장로가 살아가는 법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장로는 설교를 순수하게 감독, 보존하는 기관” 83문> 천국의 열쇠는 무엇입니까? 답> 거룩한 복음의 강설과 교회의 권징인데, 이 두 가지를 통하여 믿는 자에 게는 천국이 열리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닫힙니다. 84문> 거룩한 복음의 강설을 통하여 어떻게 천국이 열리고 닫힙니까? 답>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사람들이 참된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마다 참으로 그들의 모든 죄를 사 하신다는 사실이 신자들 전체나 개개인에게 선포되고 공적으로 증언될 때, 천국이 열립니다. 반대로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정죄가 그들 위에 머문다는 사실이 모든 믿지 않는 자와 외식하는 자에게 선 포되고 공적으로 증언될 때, 천국이 닫힙니다. 이러한 복음의 증언에 따라 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장차 올 세상 에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성공적 목회’라는 말이 공공연히 사용됩니다. 이 말 은 교회의 부흥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서 필수적인 것이 설교를 잘 하는 것이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공적 목회는 설교에 달려 있어 설교의 향상을 위해 스스로 부단한 노력을 하며,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 에 다다르지 못했다고 판단되면 전문적으로 설교를 가르치는 단체를 찾기도 합니다. 이처럼 교회성장에 있어서 설교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 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요성의 인식이 늘 올바른 동기에서 유발된 것은 아 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설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도록 합니다. 이를 통 해 그것이 왜 교회의 표지가 될 수밖에 없는지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 하나를 알게 됩니다. 목사와 장로가 교회 앞에 떨 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장로교와 원칙상 동일한 고백 위에 있지만 전통에 있어 다소 차이를 보이는 개혁교회의 생활 가운데 특히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설교의 엄격성입니 r 다. 그 엄격성은 특히 공예배의 설교는 반드시 목사가 해야 한다는 원칙이 철두철미하게 지켜진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납니다. 목사가 아닌 성도가 아무리 성경적 지식이 해박하다 하더라도, 교회에 의해 서 공적으로 인정받은 목사가 아니면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이 원칙은 특 별한 경우라 해서 느슨해지지 않습니다. 예컨대 부득이한 이유로 목사가 공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라면, 본 교회 목사가 미리 준비해둔 설교 원고 나 교단 내 다른 목사의 그것을 장로가 낭독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목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갑작스러운 일에도 대비합니다. 사고 등의 이유로 미리 작성된 설교문이 없을 경우를 위해 교단차원에서 설교집을 발간 하여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장로가 대독할 수 있는 설교를 늘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동일한 원리 가운데 있으나, 개혁교회 형제들이 설교에 대해 서 보다 엄격한 전통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설교가 천국의 열쇠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천국의 문을 여는 것이므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성도는 이 땅 에서 이미 천국의 삶에 참여하며 다가올 천국 을 바라게 됩니다. 또한 목사 의 설교는 천국의 문을 닫는 것이므로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 앞 에 서게 될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는 곧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임을 되새기 게 합니다. 아무리 성도들에게 유익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말씀에서 비롯되지 않은 교 훈이라면 합당한 설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도 그것 을 목사 개인의 생각이나 가르침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 의 문이 열리게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선포가 천국의 열쇠라는 사실이 목사 개인에게 무한한 권위를 제공하 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렵고 떨리는 책임감을 줍니다. 왜냐하면 목사에 의 한 설교 자체가 천국의 문을 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 로에게 천국열쇠를 줄 때도 그의 올바른 신앙고백에 근거해서 주셨기 때문입 니다. 목사의 설교가 합당한 선포가 되지 않을 때 성도들은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 없는 절망적 상태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어머니로서의 역할 을 결코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장로에게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목사의 설교를 감 독함으 로 순수한 말씀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의 내용이 합당한지 아닌 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천상의 삶을 누릴 수 있고 그렇지 않고는 목사의 설교와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와 장로가 교회 앞에 참으로 두려운 직분이 아닐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 다. 참된 설교 통해 천상의 삶 누리게 돼 많은 경우, 오늘날 교회의 목표가 부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 와 장로의 역할 역시 부흥을 향해 방향 지워져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목사의 설교는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내용에 맞추어지기 십 상입니다. 그렇지만 목사와 장로에게 주어진 본질적 역할을 요리문답을 통 해 발견합니다. 그것이 우리시대 목사와 장로가 살아가는 법과 차이가 있음 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111 no image 하이델베르크<50> 성찬 참여 자격을 누가 결정하는가_이윤호 장로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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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3 2008-04-02
하이델베르크 성찬 참여 자격을 누가 결정하는가 “참된 말씀과 합당한 교제 가운데 있어야”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81문> 누가 주의 상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답> 자기의 죄 때문에 자신에 대해 참으로 슬퍼하는 사람, 그러나 그리스도 의 고난과 죽음에 의해 자기의 죄가 사하여지고 남아 있는 연약성도 가려졌 음을 믿는 사람, 또한 자신의 믿음이 더욱 강하여지고 돌이킨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이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외식하거나 회개하지 않 은 사람이 참여하는 것은 자기가 받을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82문> 자신의 고백과 생활에서 믿지 않음과 경건치 않음을 드러내는 자에게 도 이 성찬이 허용됩니까? 답>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이 더럽혀져서 하나님의 진노가 모 든 회중에게 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명령에 따 라, 그리스도의 교회는 천국의 열쇠를 사용하여 그러한 자들이 생활을 돌이 킬 때까지 성찬에서 제외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성찬을 앞둔 한 주간동안 자신을 돌아보며 점검하는 좋은 전 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요구하 신 내용이기도합니다. 때로는 이러한 자기 점검이 성찬 참여의 여부를 결정 하기도 합니다. 성찬은 주님이 배설하신 자리 예컨대 자신을 천천히 돌아보았을 때 남들에게 밝히기조차 꺼려지는 죄를 범 하였다면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지 않습니다. 반면 명백하게 두드러지는 죄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성찬의 떡과 포도주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범한 죄가 스스로 규정해 놓은 성찬 참여의 기준선을 넘나들 때, 떡과 포도주에 참여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성찬이 진행되는 순간까지 고 민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찬 참여의 자격을 스스로 규정하 는 경우를 찾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볼 때, 우선 용어를 살피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 니다. 성찬(聖餐)은 거룩한 만찬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올바른 표 현인 것 같습니다. 이 만찬을 통해서 우리는 신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므 로 거룩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많은 교회에서는 성찬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지만 다소 어감이 다른 표현인 ‘주의 만찬’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단어가 지닌 의미에 주목할 때, 우리는 적지 않은 교훈을 얻습니다. 이 말은 성찬 의 주인이 누구인지 매순간 생각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만찬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우리가 만나는 내용, 즉 성찬 참 여자의 자격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보다 분명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사람의 성찬 참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성도 개 인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만찬의 초청자는 바로 우리 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만찬에 참여하고 싶다 하더라도 이것의 주인이시고 초청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지 않는다 면 음식을 먹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서 만찬을 준비해 놓고 부르실 때, 우 리 의 개인적 판단으로 그것을 거절할 권리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찬에 참 여하고 안 하고는 오직 주님의 결정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만찬에 앞선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 한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 하였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에 앞서 그것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 역과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살피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성찬의 참여 여부를 결정하라는 말 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올바른 자세로 성찬에 참여할 것을 요 구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2문은 성찬참여 여부의 결정 주체가 누구인지를 암 시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주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중요한 사명 한 가지 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사람들을 분별하여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책임입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성도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 은 교회의 허락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이 만 찬의 주 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 사이의 관계를 알고 그에 합당하게 살고자 하 는 성도에게 성찬에 참여하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 만찬에 참여하도록 허락된 자들은 이를 통해 주님과의 관계가 더욱 견고 해 질 것이고, 거절된 자들은 돌이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애쓸 것입니 다. 그러므로 교회의 허락과 거절은 모두 성도의 신앙적 유익과 교회의 순결 을 위해 유익한 것입니다. 교회는 성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초대에 합당한 사람들을 분별 할 책임을 위임받았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운 데 올바른 말씀이 거하고 성도의 합당한 교제가 있을 때 비로소 이 일이 온 당하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찬 참여 결정은 교회의 권한 성도 개인에게도 중요한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성찬에 참여할지 말지를 스스 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성찬에 대한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110 no image 하이델베르크<49> 교회의 우상숭배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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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3 2008-03-19
하이델베르크 교회의 우상숭배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도 우상 숭배 해당돼” 80문> 주의 만찬과 로마 교회의 미사는 어떻게 다릅니까? 답> 주의 만찬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이루 신 유일한 제사에 의해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사해졌음을 확증합니다. 둘 째, 성신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으며, 그의 참된 몸은 지금 하늘에 있고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심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미사는 첫째, 그리스도가 산 자들이나 죽은 자들을 위해서 사제들에 의해 지금도 매일 드려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의해서는 그들이 죄사 함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의 형체 속에 서 몸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경배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러므로 미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와 고난을 부 인하는 것이며 저주받 을 우상 숭배입니다.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가 정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나곤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했 던 죄가 시대의 경계를 넘어 되풀이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 개념 정확히 세워야 구약성경에서 요시야 왕과 관련된 기록을 읽어나갈 때가 바로 이러한 경우입 니다. 요시야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왕들 중에서 드물게 선정(善政)을 펼쳤 던 왕입니다. 우리에게 ‘종교개혁의 왕’으로도 알려져 있듯이 그의 선정 은 통치 기술이 아니라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등극 십팔 년 되던 해에 성전 수리를 지시했습니다. 성전 수리 가 진행되던 중 그곳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었습니다. 율법책의 내용을 알게 된 왕은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얼마나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왔는지 깨닫고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왕은 나라의 지도자들을 불러 그들로 하여 금 이 책의 내용을 알도록 했습니다. 그 후 뒤따른 일이 바로 여호와의 전 을 원래 자리로 회복하는 개혁 운동이었습니다. 이 때 일어난 일들은 우리를 적지 않게 당황 하게 합니다. 왕의 명령으로 이 루어진 일은 다름 아닌 여호와의 전에서 아세라 상과 우상 신을 위한 갖가 지 기명(器皿)을 들어내어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성전에는 아세 라 상이 있었고 바알 등의 우상을 위한 제기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전에 그러 한 우상이 존재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한번 짐작해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 기 위해 이방 신상(神像)을 성전에 두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그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 마도 그들은 아세라 상과 같은 이방신의 형상을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신상(神像)들을 통해 하나님을 보다 실제 적이고 적극적으로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2계명을 통해 자신을 위한 형상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 는 방법을 자의적으로 고안해 내었던 것입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들의 이와 같은 종교적 습성은 사라지 지 않았습니 다. 중세의 로마교회에서 그와 같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 에 대한 다른 형상을 만들어놓고 섬겼습니다. 이미 완전한 제사를 이루신 예 수님 대신에, 사제들에 의해 지속적인 제사를 필요로 하는 예수님의 상을 만 들었습니다. 성찬의 떡 속에서 예수님의 본질을 찾음으로써 또 다른 형상을 통해 주님을 섬겼습니다. 성전은 곧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성전 안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신상을 두고 하나님을 섬긴 것과,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다른 속성을 만들어 놓고 예배하는 것은 동일한 범죄였습니다. 요시야 왕처럼 우리 신앙의 선배 들은 로마교회에 대해 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들의 미사를 저주받을 우상숭배 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조각하여 세워두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지 않 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를 믿는 우리는 그것이 사제들을 통해 되풀이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찬의 떡 속에서 그리스도의 본 질을 찾아 경배하는 행위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구약시대 이스 라엘과 중세 로마교회의 행위를 답습할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음은 부인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배 때의 설교자가 말씀과 다른 것을 말함으로 성도들의 머릿속에 또 다른 형상의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 때 잘못된 내용의 찬송 을 계속 되풀이함으로써 원래와는 다른 하나님의 형상을 빚어낼 수 있을 것 입니다. 다른 하나님 형상 빚을 수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머릿속의 형상을 실제 하나님으로 여기면서 신앙생활 을 한다면 우리 역시 우상숭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습니 다. 역사 속에서 우상숭배가 되풀이된다면 교회의 개혁 역시 멈추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109 no image 하이델베르크<48> 로마 천주교의 화체설에 대한 반박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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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35 2008-03-05
하이델베르크 로마 천주교의 화체설에 대한 반박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외형적 표징만으론 본질 왜곡시킬 수 있어” 78문>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합니까? 답> 아닙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죄 씻음 자 체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표와 확증인 것처럼, 주의 만찬의 떡도 그리스도의 실제 몸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찬의 떡을 그리스도의 몸 이라고 하는 것은 성례의 본질을 나타내는 성례적 용어입니다. 79문>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떡을 그의 몸이라고 하시고, 잔을 그의 피 혹 은 그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또한 바울 사도도 왜 그 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치 떡 과 포도주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흘리 신 피가 우리 영혼을 영생으 로 이끄는 참된 양식과 음료라는 사실을 가르치 려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표 와 보증으로써 우리에게 다음을 확신시키려 하셨습니다. 첫째, 우리가 그리 스도를 기념하면서 이 거룩한 표들을 육신의 입으로 받아먹는 것처럼 실제 로 성신의 역사에 의해 우리가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합니다. 둘째, 그리 스도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되어 마치 우리 자신이 직 접 모든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께 치른 것과 같습니다. 중세 로마천주교회는 성찬에 대한 소위 ‘화체설’을 정통성 있는 교리로 발 전시켰습니다. 떡과 포도주라는 재료가 성찬에 사용될 때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하여 새로운 본질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성찬 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교회에 여러 가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교회가 이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유익을 두 가지 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 니다. 화체설 주장하는 로마 천주교회 첫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성찬에 대하여 좀 더 납득할만한 이성적 설 명이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 실입니다. 어떤 물질의 원재료와 그것이 가지는 본질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은 이미 오랫동안 받 아들여지고 있던 철학적 사유였습니다. 그러므로 떡이라는 재료에 새로운 본 질을 부여하는 형식으로 성찬을 설명하는 것은 당시의 지성에 부합하는 것이 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떡을 가리켜 그의 몸이라 하신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화체설을 통해서 당시 사람들에게 이성적 타당성을 가지는 설명을 할 수 있 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발전하면 지성 사회에 복음을 변증하는 것도 그만큼 쉬워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로 화체설은 교회의 체제를 더욱 견고히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세 로마교회는 하나의 교회를 지향했습니다. 교회는 한 지역에 모여 있지 않고 여러 민족,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교황 을 중심으로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교황을 정점으로 다양한 사 회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로 모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 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황에 게 충성하는 성직자들에게 일반 성도들이 부여 하는 권위가 필수적이었습니다. 화체설에 따르면, 성찬을 위한 성직자의 기도가 있을 때 떡과 포도주의 본질 이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을 수 있도록 떡의 본질을 바꾸는 성직자의 기도는 엄숙한 가운데 이루어졌을 것입 니다. 이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태도는 더욱 더 경건했을 것입니다. 이 와 함께 성직자의 권위 또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 찬의 엄숙함과 집례자의 중요성이 한 층 강조되면서 교회는 보다 견고한 조 직체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중세 로마교회는 화체설을 통해 성찬을 보다 논리적으로 변증할 수 있었고, 교회의 체제를 더욱 견고히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화체설은 이와 같은 유익들을 교회에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표면상의 유익이 실상은 유익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표와 보증의 역할을 하는 성찬의 진 정한 의미가 퇴색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이 그리스도인 의 삶에 미치는 실재적 효력이 제대도 드러날 수 없었습니다. 성찬이 말하 는 그리스도의 구속사 역의 확실성도 오히려 가려지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유사한 경우가 떠오릅니다. 마치 벽돌이라는 일반적 건축 재료가 예 배당 구조물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때, 그것의 본질이 변한다고 생각하 는 경우입니다. 이를 통해서 보다 아름다운 예배당 건물을 지을 수 있고, 성 도들은 보다 경건한 모양으로 이곳에 모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분명 한 것은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진정한 의미가 오히려 퇴색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개혁가들은 성찬에 대한 로마천주교회의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사람의 이성 으로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말씀의 권위 아래서 믿음으로 받아들이 는 것, 주님이 허락하신 성례를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순 수한 의도를 살리는 것, 이것이 개혁가들의 의지였습니다. 개혁가들은 화체설 주장에 반박해 성찬에 대한 보편 타당한 이해, 그것의 엄숙함, 견실한 교회 체제 이러한 것 들 뒤로 성찬의 진정한 의미가 가려지는 경우가 오늘은 없는지 생각해 보아 야겠습니다.
108 no image 하이델베르크<47> 한 떡으로 연합됨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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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3 2008-02-20
하이델베르크 한 떡으로 연합됨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연합의식 갖춰야” 76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 은 무슨 뜻입니까? 답>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로 써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며, 나아가서 그리스도 안에 또한 우 리 안에 거하시는 성신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에 더욱 더 연합됨을 의미합니다. 비록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살 중의 살이요 그의 뼈 중의 뼈”이며, 마치 우리 몸의 지체들이 한 영혼에 의해 살고 다스림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한 성신 에 의해서 영원히 살고 다스림을 받습니다. 77문> 믿는 자들이 이 뗀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는 것처럼 확실히, 그리스 도께서 그들을 그의 몸과 피로 먹이고 마시우겠다는 약속을 어디에서 하셨습 니까? 답> 성찬을 제 정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 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 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바울 사도는 거듭 이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 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 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 라”(고전10:16-17).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찬과 더불어 진행되었습니다. 그들이 모여 떡을 떼었다 는 성경의 표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흔하 디 흔한 떡에 비유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유월절에 사용하던 양고기나 사 람들이 귀히 여기는 특별한 음식에 비유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성찬과 더불어 시작된 예배 그렇지만 성 찬의 떡은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보 여주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 는 그리스도의 죽으신 몸을 양식으로 삼지 않고는 한순간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음을 기억합니다. 사람은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때에 따라 떡을 떼는 예식을 행합니다. 교회에 따 라 떡을 나누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부드러운 빵을 미리 잘게 썰어놓고 한 사람씩 조각난 빵을 집어먹습니다. 우리와 신학적 차이가 있는 가톨릭의 경우는 무교병을 납작한 모양으로 만들어 성찬에 사용합니 다. 그리고 어떤 교회에서는 나누어지지 않은 한 덩어리의 빵을 성도 각자 가 직접 떼어먹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중 맨 마지막의 방법은 여러 개가 아닌 하나의 떡이 가지는 의미를 선명 하게 드러낸다는 유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따라 다양한 방법이 사용 될 수 있지만 하나의 떡에서 떼어지는 의미는 살아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 떡에서 여러 부분으로 떼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먹는 사람들도 하나의 공 동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 교회 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예식의 의미를 두 성경 구절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두 고린도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 입니다. 그 중 하나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교회의 분열이었습니다. 어떤 사 람들이 음식을 먼저 가져다 먹음으로 인해 하나 된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드 러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는 성찬의 의미와 조화되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떡을 나누는 성도는 동일한 메시지 안 에서 연합해야할 책임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또 다른 구절에서 한 떡에 참여하는 성찬의 의미를 말씀하고 있습니 다. 이 권면은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찬을 통해 이루어야 할 한 몸에 대한 속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상을 말씀하는 사도 바울 은 귀신의 상을 또한 언급합니다. 주의 상과 귀신의 상을 서로 겸하여 참여 해서는 안 됨을 마음에 새기도록 강권합니다. 성찬을 통해서 우리가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소중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 됨이란 귀신의 상에 참여하는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 하지 못할 연합 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신 몸에 참여함 으로써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치 그 자체에 의 미가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올바른 말씀을 소유할 때 한 떡을 떼는 연합 함의 의미가 살아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귀신의 상을 멀리하고 주의 상에 참여하는 것이 세상에 등을 돌리는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가감 없이 세상에 증거 하 여 그들을 주의 상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한 몸의 연합의식 가져야 가장 보편적인 음식에 자신의 몸을 비유하신 주님께서 그의 피에 대해서는 일상의 음료인 물 대신에 잔치에 사용되는 포도주에 비유하셨습니다. 한 떡 에 속한 공동체에 초대된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의 법 안에서 잔치의 기쁨을 맛보며, 앞으로 있을 더 큰 잔치를 기다리는 복됨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107 no image 하이델베르크<46> 성찬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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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28 2008-01-30
하이델베르크 성찬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실제로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삶 살아야” 75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단번의 제사와 그의 모든 공효에 당신이 참여함을 성찬에서 어떻게 깨닫고 확신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모든 성도에게 그를 기념하여 이 뗀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고 명령하시고 또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주님의 떡이 나를 위해 떼어지고 잔이 나에게 분배되는 것을 내 눈으 로 보는 것처럼 확실히, 그의 몸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드려지고 찢기셨으 며 그의 피도 나를 위해 쏟으셨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확실한 표로서 주님의 떡과 잔을 내가 목사의 손에서 받아 입으로 맛보는 것처럼 확실히,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 의 몸과 흘리신 피로써 나의 영혼을 친히 영생에 이르도록 먹이시고 마시우 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이 로마제국 치하의 교회는 큰 핍박 아래 있었습니다. 기원년 무렵 로마에서는 오랫동안 유지해 오던 공화체제가 붕괴되고 혼란한 시기를 지나 황제가 제국을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태동해 서 자라나기 시작한 것 역시 이 무렵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신(神)으로 여겨졌습니다. 핍박 아래 있었던 초기성도들 수백 년 간 공화체제에 익숙해 있던 로마사회에 황제의 권위를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황제를 신격화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는지 모릅니다. 혹은 혼란 을 제대로 수습하여 국가의 체제를 더욱 견실하게 만든 지도자를 로마 시민 스스로가 신으로 받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제 로마제국의 모든 사람 들은 황제를 신으로 섬겨야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제1계명을 어긴다는 이유로 황제숭배를 거부했습니다. 로마당 국은 국가의 권위에 순응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억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처럼 로마시대의 교회가 당한 핍박은 황제숭배 거부와 이에 대한 제국의 대 응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박해의 원인을 한마디로 단언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그 밖 의 박해 원인들이 다양한 방면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민간에서 일어난 반기독교 감정입니다. 유명한 역사가 유 세비우스와 같은 사람들도 생생하게 기록했듯이 기독교인들이 공중목욕탕과 시장과 거리에서 쫓겨나고, 매를 맞고 모욕을 당했으며, 약탈을 당하고 돌 에 맞는 일들도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일반 시민들이 가지고 있던 반기독교 정서는 당시에 떠돌던 유언비어를 통해 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널리 퍼진 것들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사람의 몸을 나누어 먹고 피를 마시는 야만적 의식을 행한다는 것이었습니 다. 이러한 소문은 비밀리에 모인 기독교인들이 예배 때 그리스도의 살을 떼 고 피를 나누었던 성찬의식이 잘못 와전된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을 모를 리 없었던 교회는 이에 대한 합당한 답변을 제시했을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 중에도 기독교인들의 집회를 조사하여 소문과는 달리 그것은 엄숙한 모임과 검소한 만찬임을 확인한 이들이 있었습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소문이 폭넓게 확산된 데는 교회에 대한 뿌 리깊은 반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교회의 박해는 실제로 성찬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릅니다. 성도가 성찬 의 외형적 참여에 머무르지 않고 이 성례의 은혜를 삶의 열매로까지 계속해 야 할 의무를 다했을 때(대요리문답,175), 세상 사람들은 그들은 미워했을 지 모릅니다. 로마는 다신교적 사회였습니다. 황제숭배를 부정하지 않는 한 어떠한 신앙 도 배척당하지 않았습니다. 민중들의 생활은 언제나 다신교적 분위기에서 이 루어졌습니다. 극장의 공연도, 운동장의 경기도 종교적 축제와 관련되어 있 었습니다. 여행자와 병사들이 그들의 안전을 신에게 의탁하는가 하면 농부들 은 풍작을 위해 신들에게 비를 간구 했습니다. 자연히 종교와 관련된 생업도 적지 않았습니다. 물건을 만드는 일도, 가축 을 기르는 일도, 심지어 무역을 하는 일도 그들의 이방 예배와 얽혀 있는 경 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로마의 다신교적 종교생활은 사회, 문화 그리고 경 제적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모일 때 주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떡과 포도 주가 직접 떼어서 분배되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실제로 우리를 위해 찢기셨으 며 우리 역시 이 사건에 실제로 참여한다 는 것을 나타내는 성찬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이교적 풍습에 젖어있는 로마문 화와 어울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또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떡과 포도주를 실제로 입을 통해 먹고 마시 는 것처럼,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양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고백해 왔습니다. 하늘로부터의 영양분을 공급받고 사는 성도들이 이방 종교의 우산 아래에서 양식을 구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경제적 궁핍 을 겪는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다신교적 사회에서 이러한 배타적인 기독교 에 대한 민간의 반응은 미움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일 년에 수 차례씩 성례를 거행합니다. 이 거룩한 예식 이 형식화 되어버리지 않았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로마제 국 치하의 기독교인들은 사람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오해를 받으며 세 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했습니다. 박해 아래 있는 참 성도의 길 그 소문이 와전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실제로 주님의 떡 을 떼고 잔을 나누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교회가 박해를 당한 이유입니 다. 우리에게 성찬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봅니다.
106 no image 하이델베르크<45> 유아세례에 관한 법리 法理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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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6 2007-12-26
하이델베르크 유아세례에 관한 법리(法理)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그리스도와 연합한 유아가 불신자와 구별되는 표지" 74문>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답> 그렇습니다. 그것은 유아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과 교 회에 속하였고, 또한 어른들 못지 않게 유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속죄와 믿음을 일으키시는 성신이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아들 도 언약의 표인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연합되고 불신자의 자녀 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구약에서는 할례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나 신약에서는 그 대신 세례가 제정되었습니다. 우리는 교회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헌법으로 대표될 수 있는 교회법 안에는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교리를 비롯하여 정치, 예배, 권징 등에 대한 지침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회법은 신앙생활 길잡이 이로써 우리는 성경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교 회가 안내하는 방향 을 따라 그것을 깨달아 가기를 노력합니다. 또한 교회가 특정 개인의 임의 적 판단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법이 정하고 있는 질서에 의해 유지되고 성장 하는 것을 원칙으로 여깁니다. 교회법은 신앙생활의 흐트러짐을 막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그것의 지향하는 의미가 퇴색하여 논란을 유발할 때도 있습니다. 유 아세례도 그러한 경우입니다. 유아세례에 관하여는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반대의 이유는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양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유아세례라는 말이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 는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유아세례를 행하는 우리는 성경말씀의 가르침에 순 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으 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아세례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교회들의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은 유아세례가 시행되 어야 함을 가르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헌법의 예배모범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아세례 의 의미를 밝힘과 동시 에 그것의 시행을 위한 세부규칙과 절차까지 정해놓고 있습니다. 예컨대 세 례는 누가 베풀어야 하는지, 어디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부모에게 어떤 확인과 권면이 있어야 하는지 등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오늘 날 교회가 유아세례를 베푸는 표준이 됩니다. 교회법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유아세례를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 다. 만약 교회법의 목적이 교회운영의 효율성 추구에 있다면, 우리는 편의 상 유아세례를 폐지하거나 상황에 따라 규정을 사사로이 가감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교회법이 교회행정의 효율성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교회에 법이 존재하는 보다 근원적인 목적은 성경말씀의 원리가 그 리스도인의 삶에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법정신을 알고 그것을 실천할 때 성경말씀에 더욱 실제적으로 반응할 수 있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가 교회의 훌륭한 전통이기 때문에 우리에 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유아세례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 타나지 않지만 예수님의 세례 명령 속에 그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 n데 그 실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세례는 유아들의 머리에 물이 뿌려짐으로 베풀어집니다. 이때 우리는 어른 들 못지 않게 유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속죄와 믿음을 일으키시 는 성신의 약속을 고백합니다. 세례는 믿는 부모의 품에 안긴 유아에게 목사 가 교회의 회중 앞에서 베풉니다. 이때 우리는 유아들도 어른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속한 성도 임을 고백합니다. 세례는 부모에게 그 의미를 확인시키고 권면하는 절차를 포함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연합된 유아가 불신자의 자녀 와 구별되어야 함을 되새깁니다. 목사의 권면은 부모의 직분을 잘 감당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헌법에 명 시된 부모의 직분이라는 말은 목사, 장로 그리고 집사와 같이 말씀 보존과 사랑의 공적실천을 위해 성도들에 의해 선출된 항존 직분과는 의미상 차이 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는 교회를 통해 보존된 말씀이 자녀들에 게 잘 전달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와 연합되게 하는 임무를 맡은 직분 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의 직분은 옛날 구약시대 할례를 베푼 부모들이 말씀을 집 문설주와 바 깥문에 기록하여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에 행할 때든지 누웠을 때든지 일어 날 때든지 항상 자녀들과 말씀을 나눔으로 구별된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을 드러내었던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가 자녀를 출산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자녀 를 선물로 주셨다고 말하곤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 다. 한 어린아이의 출생을 생물학적 관점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 에서 받아들이는 성경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는 부모의 직분 그렇지만 우리가 베푸는 유아세례의 규칙들에서 성경적 의미를 새겨볼 때 그 반대의 말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자녀들 에게 부모를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105 no image 하이델베르크<44> 일평생동안 세례를 잘 사용해야 할 의무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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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0 2007-12-13
하이델베르크 일평생동안 세례를 잘 사용해야 할 의무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발행인 72문> 세례의 물로 씻음이 곧 죄 씻음 자체입니까? 답>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신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 끗하게 합니다. 73문> 그러면 왜 성신께서는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죄를 씻음”이라 하셨습니까? 답>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서는 몸의 더러운 것이 물로 씻겨 지듯이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피와 성신 으로 없어짐을 우리에게 가르치려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죄가 영 적으로 씻겨 지는 것이 우리의 몸이 물로 씻겨 지는 것처럼 매우 실제적임 을 이러한 신적 약속과 표로써 우리에게 확신시키려 하셨습니다. "세례는 신자의 삶에 역동적 효력 나타내어야" 오늘날 우리는 각자가 속해있는 교회에 대해서 무엇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지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여러 가지 가 있을 수 있겠지만, ‘세례교인의 수’ 가 그 교회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 하나로 여겨질 것 같습니다. 그 숫자는 곧 교회의 규모를 의미하고 그 규모는 또한 교회의 부흥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자랑은 숫자와 무관해 교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입교한 성도들이 세례 받은 자로서 얼마나 합 당한 삶을 사는가 하는 것보다는 세례 받은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에 더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이 어느 정도는 일반화된 경향인 것 같습니다. 군부대나 기독교학교에서 행해지는 집단 세례는 이것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세례 받는 그 때를 신비로 운 역사가 일어나는 특별한 순간으로 생각하고 그 날 자체에 큰 의의를 두 는 것 같습니다.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생각이 고대 교회 때부터 있어왔는데 당시 적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은 세례 받는 때가 곧 중생을 경험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습니 다. 이것은 세례의 물로 씻음이 곧 죄 씻음 자체라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습 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문제 중 하나는 임종시의 세례에 관한 것입니 다. 복음을 알게 되었지만 미처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 갑자기 죽음이 다가 왔을 때 누구든지 그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세례의 물이 곧 죄 씻음을 의미한다면 그곳에 있는 어느 누구라도 죽음에 임박한 그 사람에게 속히 세례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고대교 회의 여러 교부들에 의해 가르쳐진 이러한 생각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거쳐 오늘에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러한 생각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세례 시에 사 용되는 물 자체가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직접 씻겨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죄가 예수 그 리스도와 성신을 통해 씻겨 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확실히 바 라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상징일 뿐 아무런 실제적 효력이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닙 니다. 실제로 세례의 상징성에만 치중하는 주장 때문에, 또 다른 방향으로 세례의 본질이 왜곡되고 그것의 역동적 의미가 희석되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 이 사실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죄 씻음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 이 단지 관념 적인 사실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실임을 확증하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세례의 의미가 교회를 통하여 올바로 선언된다면 그것이 성도 들의 삶에 역동적인 효력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성도 각자는 세례를 일평생동안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의 가르침은 참으로 의미 깊은 것입니다(167문). 이 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몸에 지닌 할례를 근거로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 이라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뜻을 알지도 따라 행하지도 않는 그들 은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의 조상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우리가 세례 받은 날과 시를 기억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하더라도 그 것에 합당한 행실이 삶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세례가 우리 가운데 올바 로 시행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신을 통해 죄 씻음을 받은 자는 또한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죄에 대해 절제하고 하나님이 옳다고 말씀하시 는 것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때의 물은 그 자체가 신비한 능력을 가진 물질이 아니라 영 적 죄 씻음 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그 의미가 올바로 선언될 때, 그 물은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강물이나 홍수와 같은 큰 효력 을 지니는 실제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일 년에 한 차례 혹은 여러 차례 세례식을 통해서 새로운 성도 를 맞이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향하여 축하의 인사를 건넬 뿐 아니라, 그 시 선을 우리 자신에게 돌려 세례 받은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세례에 합당한 삶 살아야 ‘세례교인의 수’를 자랑하는 교회는 성도들이 그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서 로 살펴야 하는 보다 큰 책임을 지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104 no image 하이델베르크<43> 세례가 요구하는 교회의 순결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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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9 2007-11-07
하이델베르크 세례가 요구하는 교회의 순결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세례는 개인 아닌 교회의 사명과 책임 문제” 71문> 세례의 물로 씻는 것처럼 확실히,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와 성신으 로 우리를 씻으신다는 약속을 어디에서 하셨습니까? 답> 세례를 제정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 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18:19),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 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이 약속은 성경이 세례를 ‘중생의 씻 음’ 혹은 ‘죄를 씻음’이라고 부른 데서도 거듭 나타납니다(딛 3:5; 행 22:16). 세례를 베풀지 않는 교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세례는 모든 시대 모든 나라 의 교회가 시행해야 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사람들의 합 의에 의해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직접주신 명령이며 약속 이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은 자신의 피와 성신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으 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사도행전과 디도서의 말씀을 통하여 그것이 곧 ‘중생의 씻음’ 혹은 ‘죄를 씻음’임을 확증하 고 있습니다. 중생의 상징으로서 세례 예식 예수님께서 세례를 직접 명령하신 것은 성경에 두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예수님께서 세례를 명령하신 두 기사는 동일한 사건 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적 배경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 천 사이의 한 시점이고, 공간적 배경은 갈릴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신 후, 갈릴리로 가서 다 시 그들과 교제하시던 때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그의 제자들을 불렀던 장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셨던 그 갈릴리에서 이제 그들을 세상으로 내 보내 는 일을 하십니다. 바로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하고 계신 것입니 다. 이 명령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세례 베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 명령에 순종할 때 복음은 세상 곳곳에 전 파될 것입니다. 예수님 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은폐 하려 하고 있습니다(마 28:11-15). 이 사실을 아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나 라가 어떻게 확장될 지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마 28:17). 그렇지만 제자들은 전혀 의심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늘과 땅 의 모든 권세를 받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전파를 명령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관장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는 제자들의 순종을 통해 성장할 것입니다. 그 순종은 바로 말씀을 전파하여 가르치는 것과 세례를 주 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믿어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피와 성신으로 자신 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던 존재 가 깨끗하게 씻김을 받았다는 사실은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 것이 아니 라 교회의 자각으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교회를 그리스 도의 신부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각하게 된 그리스도의 신 부로서의 존재감은 교회가 지녀야 할 책임감을 심어줍니다. 그것은 곧 깨끗 하게 된 교회가 그리 스도의 신부로서 깨끗함을 유지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물론 교회의 깨끗함을 세상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 다.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직분자들이 청렴결백(淸廉潔白)하고 행정이 민주 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면 그 교회는 아주 깨끗한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 다. 이러한 것들은 신부의 겉모습에서 드러나는 품성이나 외모에 비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부가 지녀야 할 훨씬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순결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무엇보다 순결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순결함이 란 영적 간음에 대립하는 개념입니다. 영적 간음은 하나님 이 외의 다른 신 을 섬기는 행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가치관과 원리에 더 귀 기울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명령과 약속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방법을 보여주셨 습니다. 그것은 단지 복음전파 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를 통해 성도와 교회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유지해 나갈 때, 그의 나라는 확장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의 사도들은 그의 명령을 따라 복음을 전파했을 뿐 아니라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는 데 일 생을 바쳤습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교회에서 ‘독한 창질’을 제거할 것을 명령한 것 도, 베드로사도가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발람’과 같은 거짓 교사들을 가려 낼 것을 경고한 것도, 교회가 갖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순결함을 유지하 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일 년에 수 차례 세례식을 거행합니다. 이때 새롭게 태어난 한 성도 의 순결함을 바라볼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교회가 가지는 그리스도의 신부 로서의 정체성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해야 우리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 가운데 세상의 정신이 승리하고 있는 부분은 없 는지 한번 되돌아보는 것도 세례의 의미를 새기는 데 유익이 될 수 있을 것 입니다. 세례는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깨끗함을 위해 전력을 다하도록 요구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3 no image 하이델베르크<42> 탈퇴예식脫退禮式으로서의 세례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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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6 2007-10-24
하이델베르크 탈퇴예식脫退禮式으로서의 세례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옛 습성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문제” 69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단번의 제사가 당신에게 유익이 됨을 거룩한 세례에서 어떻게 깨닫고 확신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물로 씻는 이 외적 의식을 제정하시고, 그의 피와 성신으 로 나의 영혼의 더러운 것, 곧 나의 모든 죄가 씻겨짐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것은 물로 씻어 몸의 더러운 것을 없애는 것처럼 확실합니다. 70문> 그리스도의 피와 성신으로 씻겨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짐은 십자가의 제사에서 우리를 위해 흘린 그리스 도의 피로 말미암아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께 죄 사함 받았음을 뜻합니다. 성 신으로 씻겨짐은 우리가 성신으로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거룩하게 되어,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 니다. 세례는 그리스도께 서 우리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일을 보여주시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 교회는 일 년에 수 차례 세례식을 거행합니다. 이 로써 우리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씻겨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 휼하게 됩니다. 세례는 교회 전체가 맛보는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사 람이 죄 사함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원이 됨을 선언하는 엄숙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회원됨을 상징해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되었음은 여러 모양으로 구체화됩니다. 예컨 대, 공동의회의 일원으로 교회의 제반 문제에 관여할 수 있게 됩니다. 각종 직분자를 선출할 권리를 가지게 되며, 피선거권이 부여되는 가장 기본적인 자격 조건을 갖춥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는 것입니다. 이로써 개별 교회를 넘어 보편교회에 속하는 하나님의 백성으 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죄 사함 받은 자가 누리는 하나님 왕국에서의 복된 삶입니다. 그러므로 죄 씻음의 표현인 세례는 자연 스럽게 입교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입교로서 의 세례는 동전의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는 그림입 니다. 요리문답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반대 면의 그림 또한 내포하고 있 습니다. 바로 세상 가치로부터 탈퇴하는 예식으로서의 세례입니다. 그것은 죄 씻음 받기 전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더러운지 인식하게 합니다. 세례 받은 자가 누리는 교회적 삶의 소중함은 교회에 속하지 않는 상태의 비 참함을 알 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생 때부터 처해진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 지 모른 채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 러므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주제를 필두로 하는 이유를 마음으로 깨달을 때 세례를 통한 감격도 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통해 사도들이 묘사한 세례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매우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바울 사도는 세례를 홍해도하 사건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바다 를 건넜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새로운 땅에 첫발을 내딛었음을 의미합니 다. 이와 동시에 물을 건넜다는 것은 이제까지 살던 땅을 떠났다는 것을 의 미합니다. 떠나지 않고서는 물을 지나 새로운 땅에 도달할 수 없으니 말입니 다. 사도 베드로는 세례를 노아 시대의 홍수를 통해 묘사합니다. 노아와 그의 가 족들이 물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것은 죄악 된 세상에 대한 완전한 심판과 더불어 일어난 일임을 기억합니다. 그 물은 그들을 땅 위로 들어 올린 것이 지만 동시에 물 아래 있는 모든 생명의 숨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입교예식인 세례는 또한 세상으로부터의 탈퇴예식입니다. 교회는 세례가 가지는 입교로서의 측면에 비해 탈퇴로서의 의미를 소홀히 했 던 때가 적지 않습니다. 세례를 통해 교회에 들어왔지만 세상의 가치관으로 부터 탈피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고대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도 이러한 경향 의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시 최고의 지성으로 여겨지던 헬라철학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들을 여전히 머릿속에 간직한 채 성경을 이해하고 복음을 변증하려 했습 니다. 그들로 인해 교회 내에 여러 가지 혼란이 일어난 것은 필연적인 일이 었습니다. 그들의 복음 이해가 매우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왜곡될 소지가 있 었고, 그들의 변증이 불신자들에게 설득력 있었지만 올바른 말씀 증거를 통 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세례를 통해 물을 건너는 경험을 했지만, 옛 습성으로부 터 탈피하지 못한 성향이 많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의 부흥을 세상의 기준에 의해 평가하고, 성령의 사역을 상상의 범주에서 이해 하려 하며, 직분으로 이루어진 교회의 질서를 세상 조직의 형태로 이해하는 등의 모습들이 이러한 경우일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떠났음을 선언해야 세례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오 직 성경중심의 공동체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에서는 죄에 대하여 죽어 가는 것을 세례의 한 본성으로 고백하고 있습니 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그곳의 가치로부터 탈퇴를 선언한 세 례 교인들입니다.
102 no image 하이델베르크<41> 성례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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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4 2007-10-10
하이델베르크 성례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66문> 성례가 무엇입니까? 답> 성례는 복음 약속의 눈에 보이는 거룩한 표와 인으로, 하나님께서 제정 하신 것입니다. 성례가 시행될 때, 하나님께서는 복음 약속을 우리에게 훨 씬 더 충만하게 선언하고 확증하십니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 서 이루신 단번의 제사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 을 은혜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67문> 그러면 말씀과 성례 이 둘은 우리의 믿음을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 가 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로 향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 니까? 답>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구원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 가 위에서 이루신 단번의 제사에 있다는 것을 성신께서는 복음으로 가르치 고 성례로 확증하십니다. 68문> 그리스도께서 신약에서 제정하신 성례는 몇 가지입니까? 답> 거룩한 세례와 성찬, 두 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복음서 기 자들은 각기 다른 사건들을 기술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마태는 갈릴리에서의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만 누가 는 예루살렘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복음서 기록자들은 단순히 사건을 나 열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어떤 확고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기 때문입니 다. 부활 확신 위한 복음서들의 기록 그렇지만 각각의 복음서에 나오는 기사들을 종합해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서 어디에서 누구에게 나타나셨는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갈릴리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 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그곳에 머무르지 않고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을 만났으며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예루살렘에서 갈릴리에 이르는 먼 거리를 오가게 하면서 그들을 만난 이유를 성경은 밝히지 않습니 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자들의 태도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활 직후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으나 (요 20:9),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깨달아 기쁨으로 차 있었습니다(눅 24:52).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사명’을 일러주셨습니다. 그 사명 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는 것과 양무리를 먹이는 것이었습니다(마 28:19; 요 21:15). 그렇지만 그 이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리 스도의 부활하심에 대해서 의심치 않는 믿음으로 확신하는 것이었습니다. 교 회의 기초가 될 그의 제자들이 감당해야할 사명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 렇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 의 부활을 확신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예수님의 방법은 제자들에 게 직접 자신의 몸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 수님의 부활체를 직접 본 이상 제자들은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셨던 그 자리에 없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 수님을 본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못 자국 을 보며 손가락을 그 손과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 다. 예수님은 그의 요구대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직접 만져보도록 허락하 셨습니다. 그의 불신(不信)을 꾸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활을 확실히 믿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의 제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인간 본성의 악함과 연약함을 잘 아는 분이십니다. 제자 의 의심은 시작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신약교회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없고 감각으로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어야만 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의심 많고 잘 잊어버리는 그의 백성들이 그의 약속 안에 믿음으로 거할 수 있는 방편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약속에 대해 우리 인간 이 볼 수 있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증표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의 심하는 제자에게 자신을 보이시고, 보이실 뿐 아니라 만지고 느끼도록 하셨 던 것과 동일한 그리스도의 심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성례 라 부릅니다. 우리 교회는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지만 그것 은 오직 그리스도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확신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그 확신 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성례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유 지될 것입니다. 성례는 주님의 약속에 대한 증표 연약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약속을 마음에 다져 나가도록 하 는 성례는 바로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성례가 온전히 거행되 지 않는 교회를 거짓 교회라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01 no image 하이델베르크<40> 교회에 무엇이 중요한가_이윤호 장로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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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0 2007-09-19
하이델베르크 교회에 무엇이 중요한가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믿음 생활의 핵심은 설교와 성례에 있어” 65문>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할 수 있는 데,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답> 성신에게서 옵니다. 그분은 거룩한 복음의 강설로 우리의 마음에 믿음 을 일으키며, 성례의 시행으로 믿음을 굳세게 하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5문은 우리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요소 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교회상(像)과도 연관된 문제입 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교회상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요? ‘선교’와 관련 된 한 가지 문제를 통해 이것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의 표지, 분명히 정립돼야 오늘처럼 선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때는 역사에서 그리 흔하지 않을 것입 니다. 대다수 교회는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선교하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세계 곳곳에서 복음 을 전하고 교회를 세웁니다. 선교사역에서 편안함을 느낄 만큼 상황이 좋은 선교지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선교사는 힘에 겨운 어려움들을 이겨내 는 가운데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알게 된 성도들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선교의 열기는 비단 선교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교사들은 때에 따라 파송 교회를 방문하여 선교사역을 보고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 습니다. 이와 같은 선교사와 파송 교회간의 교제는 많은 유익이 됩니다. 선 교사역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성도들에게 이러한 만남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교사의 상세한 설명으로 성도들은 간접적으로나마 그 곳의 형편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또한 다양한 질문들을 통해 앞으로 교회 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 가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경험을 떠올리며 한 가지 짚어볼 것이 있습니다. 선교사는 파 송 교회에 어떠한 내용을 보고하며 성도들은 어떠한 질문을 하는가 하는 것 입니다. 우선 선교사는 해당 지역의 외부적 특성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할 것 입니다. 정치 적 경제적 형편, 그 지역의 특수한 문화 그리고 그 곳 사람들 이 살아가는 생활 모습 등에 대한 설명은 성도들로 하여금 선교지에 대해 보 다 큰 관심을 가지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러한 형편 속에서 교회 가 세워지고 성장해온 모습을 설명할 것입니다. 어떤 지역에 몇 개의 교회 가 세워졌고 현재 몇 명의 성도들이 모이고 있으며 선교사는 교회의 성장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억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성도들의 질문은 선교 사의 설명을 더욱 풍성하게 할 것입니다. 해당 지역에서 사역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준비가 필요한지, 멀리서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질문과 대답들을 통해 앞으로 교회는 어떠한 선교정책 수립해야 할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개혁주의의 참교회상(像)을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전통적인 개 혁주의 교회는 교회가 갖추지 않으면 안 될 가장 기본적 요소가 무엇인지 선 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들 중 참교회와 거 짓교회로 구분하는 기준 이 되기도 합니다. 벨직신앙고백서에 따르면 참교회임을 드러내는 표지는 말씀 선포와 성례 그 리고 권징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편이 되 며, 우리 교회가 합당한 실천을 위해 분투해야 할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것 은 벨직신앙고백서에서 특별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장로교 표준 교리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개혁주의 교회의 고백을 생각해 본다면 선교사가 선교지에 세워진 교 회에 대해서 보고를 할 때, 그리고 성도가 선교지의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할 때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자연스럽게 제외되어 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지 교회의 다양한 형편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 지만 그 교회에서 어떠한 말씀이 설교되고 있고, 어떠한 믿음의 근거 위에 서 성례가 시행되고 있으며, 어떠한 모양으로 권징이 이루어지고 있는지가 미리 확인되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교회들이 추구하는 교회상에 대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성 도들이 믿음 생활을 잘 하는 교회를 생각할 때 기준 으로 삼는 것이 있을 것 입니다. 예컨대 다양한 성경공부 프로그램, 뜨거운 기도회 모임, 성도들이 큐티(QT)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등을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개혁주의 교회의 일원이지만 개혁주의의 기본 되는 원리에는 익숙하지 않는 것이 그 원인일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믿음 생활의 핵심은 설교와 성례이기 때문입니 다. 설교를 통해서 믿음이 일어나고 성례의 시행으로 믿음이 굳게 된다는 사실 은 오늘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성례를 통해 믿음이 굳건하게 된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내용 은 아닐 것입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요리문답 문항에서 성례의 의미를 확인 해 나갈 것입니다. 성례는 믿음을 굳게 하는 은혜 기독교강요의 한 부분을 생각해 볼 때(4.14.14), 성례를 행한다는 자체가 우 리에게 유익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믿음과 관계없이 받아들인 성례는 교회를 가장 확실하게 멸망시키는 것이다’라고 칼빈은 경고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100 no image 하이델베르크<39> 개혁주의 인간론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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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5 2007-09-05
하이델베르크 개혁주의 인간론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62문> 우리의 선행은 왜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으며 의의 한 부분이라 도 될 수 없습니까? 답>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 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 한 최고의 행위라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63문>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상주시겠다 고 약속하시는데, 그래도 우리의 선행은 아무 공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 까? 답> 하나님의 상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64문> 이러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되지 않겠 습니까? 답>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 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강단에서 설교되어지는 내용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 중 하 나는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한 것 이라는 사실이 늘 선포되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한 관심 가장 높아 세상을 둘러볼 때 구원이 정치 해방이나 다양한 도덕적 접근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가 적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조류 가운데 우 리 교회가 믿음에 대해서 성경적인 고백을 수호하고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 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행과 믿음의 문제에 대해 소중한 고백을 간직한 우리는 신앙 선배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선 복음을 들고 이 땅에 발을 디뎠던 선교사님 들을 기억합니다. 당시 그들을 파송했던 미국 장로교회에 자유주의적 신학 사상이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가장 보수적인 신학을 우리 교회에 뿌리내리려 노력했던 선교사님들의 노고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 다. 그들의 가르침을 통해 구원은 선행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진리 가 우리 속에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개혁주의 신앙의 기초가 되는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을 교회에 정착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리고 더 이른 시기로 올라가면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신앙 선조들의 영향 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진리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할 자리 를 사람의 선행으로 대신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 다. 당시 로마교회는 사람의 행위가 구원에 미치는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 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사람의 행위가 더하여 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 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 가운데는 훨씬 더 잘못된 생각을 가진 자들도 있 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선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의에 이를 수 있다고 가 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의 기초를 이룬 사람은 그 이전 시대의 펠 라기우스였습니다. 비록 교회는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지만 그의 사 상은 여전히 교회에 남아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선행에 대한 로마교회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생각 속에 자리하고 있는 근본적인 뿌리를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단순히 성도의 선행을 얼마만 큼 중요시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즉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문제에 그 출발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사람을 건강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 없이도 그분의 뜻을 알 수 있고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바 로 이러한 인간 존재에 대한 시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중세 로마교회는 사람의 본성이 비록 심각하게 훼손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수 있 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실천했던 선행과 고행은 의에 이르는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개혁주의 교회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인간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최초 사 람의 범죄 후, 모든 그의 후손들은 태생적으로 완전히 부패한 존재로 태어난 다는 것이 우리 개혁주의 교회의 고백입니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 없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어떠한 선행으로도 그분의 의 에 부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의 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개혁주의 인간론에 그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혁주의라 지칭하는 교회 가운데 선행으로 의에 이른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러 한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 습니다. 그렇지만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못하여 신앙 생활에 혼 돈을 가져오는 경우가 때로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강단에서 믿음을 강조 하는 설교가 이루어지면서도 그것이 성령의 역사에 의존하기보다 오리려 사 람의 이성과 감각에 호소하는 경우입니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에 속해 불신자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일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가능하다고 우 리는 고백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상에서 고안된 방법을 통해 교회의 부흥 을 꾀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이신칭의의 원리와 펠라기우스적 인간론이 서로 공존하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봅니다.
99 no image 하이델베르크<38> 어떤 에클레시아를 소망하는가?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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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3 2007-08-22
하이델베르크 어떤 에클레시아를 소망하는가?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60문>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됩니까? 답>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으로만 됩니다. 비록 내가 하나님 의 모든 계명을 크게 어겼고 단 하나도 지키지 않았으며 여전히 모든 악으 로 향하는 성향이 있다고 나의 양심이 고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공효 가 전혀 없이 순전히 은혜로 그리스도의 온전히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 룩함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나에게 죄가 전혀 없고 또한 내 가 죄를 짓지 않는 것처럼 실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 을 내가 직접 이룬 것처럼 여겨 주십니다. 오직 믿는 마음으로만 나는 이 선 물을 받습니다. 61문> 당신은 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답> 나의 믿음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실 만한 것은 아 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이 의를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하여 신앙의 기본이 될 만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 다. 그렇지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아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것을 믿는 것이며, 그 믿음으로 말미암 아 의로움에 이르는 것입니다. 의로움에 이르는 믿음만이 참 ‘신앙’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분명 상식적인 내용이 아 닙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가운데 거하는 성도는 이 세상 가운데 어떠한 본성으로 구별되게 존재하는 지 자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도가 지향해야 할 교회의 근본 되는 속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 로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단어를 들을 때 아테네의 에클레시아를 생 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테네는 당시 가장 유명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 다. 세상을 움직이는 정치적 권력은 로마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의 사 고를 주도하는 사상적 중심지는 아테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테네가 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비단 사상적 측면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테네에서 정착된 정치체제는 매우 민주적이어서 오늘날 사람들도 그것을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 부르기 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여느 고대국가와 마찬가지로 아테네에도 특권계층과 일반시민 간의 구별이 있어서 갈등은 필연적이었습니다. 특권계층 중에 대표적인 집단으로는 귀족 들로 이루어진 ‘아레이오스 파고스’ 회의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찍 부터 아테네의 원로원 역할을 했던 권위 있는 회의체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 설교할 기회를 얻었던 곳이 바로 이 회의 였습니다. 물론 사도바울 당시의 ‘아레이오스 파고스’는 정치적 권력을 상 당부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귀족세력을 견제하는 일반시민들의 모 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회, 즉 ‘에클레시아’였습니다. 아테네에 모범적인 정치체제가 정착된 데는 ‘에클레시아’의 역할이 컸습니 다.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 일반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특권계 층의 권력 독점 에 순응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테네의 ‘에클레시아’는 그 렇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찾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다했습니 다. 결국 ‘아레이오스 파고스’와 같은 귀족 집단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 습니다. 귀족 뿐 아니라 모든 시민들도 국정에 참여하여 스스로 사회를 이끌 어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분명 아테네에서 ‘에클레시아’는 역동적으 로 역사를 이끌어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 즉 자신의 에클레시아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 이 에클레시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당시 지식인들 중에는 아테네의 에클 레시아를 떠올리는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중 어떤 이들은 아테네의 역 동적인 에클레시아를 교회의 모형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에클레시아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공동체였습니 다. 아테네의 에클레시아는 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에클레시아는 성도들의 정성과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공동체 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의로우신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의존함으로써 존재가 치가 있 는 공동체였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성도들이 아테네를 따라가고자 했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아테네의 에클레시아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가 스스 로의 노력을 통해 의로움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합리적 이기 때문입니다. 피와 땀으로 좀 더 좋은 공동체를 일구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교회를 역동적인 모습으로 변모시킬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생각으로 교회 개혁할 수 없어 그러나 세상이 알지 못하는 교회의 역동성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믿음 가운데 생겨나는 것입니다. 의로움은 오직 믿음에 의 한 것이라는 종교 개혁가들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어떤 모습의 교 회를 소망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겠습니다.
98 no image 하이델베르크<37> 기존교회에서는 이것을 고백하지 않았는가?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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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2 2007-08-06
하이델베르크 기존교회에서는 이것을 고백하지 않았는가?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59문> 이 모든 것을 믿는 것이 당신에게 지금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며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 가 됩니다. 지금까지 사도신경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교회가 늘 고백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많은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공 예배 때 온 성 도가 함께 암송함으로써 그 의미를 되새깁니다. 공적인 신앙고백으로서 ‘사도신경’ 비록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통해 공적 고백을 하지 않는 교회들도 그것을 그들의 중심 신조 가운데 하나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이 내용을 믿는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며 또한 상속자 가 된다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22문답 에서 보았듯이 종교개혁 시대의 개혁가들은 사도신경의 고백적 내용들을 신 n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종교개혁은 기존교회의 비성경적 모습에 반대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개혁가 들의 눈에 비치는 기존교회는 진리로부터 많은 부분이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참 교회를 이루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 신앙 선배들 은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기존교회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의아하게 하는 것은 우리 신앙 선배들이 자신들과 구분 지었 던 그 기존교회도 동일하게 사도신경을 소중하게 여기는 공동체였다는 사실 입니다. 신자들에게 가장 근원적인 유익을 주는 이 고백서의 내용들이 그들 가운데서도 항상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사도신경을 고백해왔는지 명확히 규정하기란 그리 쉬운 일 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여러 사람들이 사도신경의 기원에 대해서 연구했지 만 각기 다른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의 기록자는 바로 예수님의 사도들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 었습니다. 예컨대 사도행전 15장에서 보여 지는 것과 같은 어떤 회의에서, 사도들이 신 앙의 전수를 위해 제시했던 각각의 내용 들이 사도신경으로 집약되었을 것이 라는 설명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사도신경의 한 글자 한 글자는 그 자체 로 사도적 권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설명에는 많은 의문과 반박이 뒤따릅니다. 우선 성경 자체 에서 그렇게 생각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할 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이러 한 주장에 대한 개연성 있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적 기원을 반박하는 학자들은 사도신경이 사도시대 이후에 생성된 역사 적 산물이라 생각합니다. 예컨대 역사 속에서 사도신경의 기원이라 생각될 수 있는 대표적인 문서는 2 세기 로마교회의 고백서와 6세기 혹은 7세기 프랑스교회의 그것입니다. 물 론 후자의 것에 비해 전자의 고백서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도신경과 는 내용상 차이가 현저합니다. 이와 같이 사도신경의 기원이 사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들 중에는 이것이 우리에게 권위 있는 신조가 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주장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신경이 사도적 기원을 가지지 않는다 는 사실이 곧 사도적 권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는 사도신경을 권위 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개혁 주의 교회에서는 이것을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 되는 내용으로 이해했습니 다. 개혁자들이 사도신경을 소중히 여긴 것은 이것이 사도들에 의해 직접 기 록된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리려 이 내용 속에서 사도들의 가르 침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이 우리에게 권위가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에 비단 개혁주의 교회만 사도신경을 소중히 여기며 그 가르침 을 마음속에 새기고자 노력했던 것은 아닙니다. 기존의 교회도 사도신경을 자랑으로 여기며 즐겨 암송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개혁주의 교회와 기존교 회는 그 내용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차이가 있었고 그것은 매우 큰 결과 로 나타났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우리 교회는 그것을 간직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만족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동일하게 사도신경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어떤 교회 는 기존교회가 될 수 있고 어떤 교회는 개혁된 교회가 될 수 있기 때문 입니 다. 요리문답은 사도신경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것을 통하여 유익을 얻는 것은 오직 그것이 진 리 안에서 해석되어 믿음을 통하여 올바로 드러날 때임을 기억해야 할 것 같 습니다. 진리 안에서 해석되고 고백되어야 우리는 사도신경의 내용과 가까이 하며 그것을 통해 얻게 되는 신앙적 유익 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신경을 끊임없이 암송하면서도 전혀 유 익을 얻지 못하는 사람 또한 있을 것입니다.
97 no image 하이델베르크<36> 살아서나 죽어서나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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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8 2007-07-19
하이델베르크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윤호 장로_선교와비평 발행인 56문> “죄사함”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 든 죄와 내가 일평생 싸워야 할 나의 죄악된 본성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 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에게 선물로 주셔 서 결코 정죄함에 이르지 않게 하십니다. 57문> “육신의 부활”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답> 이 생명이 끝나는 즉시 나의 영혼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올려질 것입 니다. 또한 나의 이 육신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킴을 받아 나의 영혼 과 다시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 58문> “영원한 생명”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답> 내가 이미 지금 영원한 즐거움을 마음으로 누리기 시작한 것처럼 이 생 명이 끝나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 로도 생 각지 못한 완전한 복락을 얻어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세상 사람들을 구분하곤 합니다. 인종을 기준으로 삼는 경 우가 많습니다. 피부색에 따라 흑인, 황인, 백인종으로 나누거나 민족에 따 라 아랍민족, 투르크민족 등과 같이 구분하는 것은 이러한 기준을 따를 때입 니다. 사람마다 다양하게 구별돼 경제적 수준을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도 흔한 일입니다. 이에 따라 선 진국 사람과 후진국 사람, 생활여건을 풍족하게 갖춘 사람들과 기본적인 의 식주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로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밖 에 직업이나 종교를 기준으로 세상 사람들을 구분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 다. 이와 같은 방법들로 사람들을 구분해 보지만 결국 가장 근원적인 측면에서 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어느 누구도 신선한 공기로 호흡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땅을 밟지 않고 생활할 수 없으며, 특 히 죽음이라는 운명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근본적으 로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 다. 그것을 나누는 기준은 바로 죄사함입니다. 한 부류는 그리스도로 인하 여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하여 죄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 두 부류의 사람 모두 이 땅에서 동일한 자연환경 속 에서 제한된 육신의 옷을 입고 살기 때문에 외형상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 습니다. 그렇지만 실상 이 두 부류는 근본적으로 구별된 존재임을 성경은 다 양한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그들이 죽음 이후에 도달하 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 땅에서의 생애를 마쳤을 때 우리가 처할 상황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주장 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신앙 선조들은 이에 대한 명확한 고 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생명이 끝나는 즉시 성도의 영혼이 그리 스도에게로 올려진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죽었을 때 수면 상태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주장하는 자 들도 있고 죽음은 모든 것의 종결이라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의 고백은 성도들이 생을 마감할 때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 는 것과 몸의 부활을 통해 영광스러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 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르침대로, 이 생명이 끝나는 즉시 지옥에 던지어져 고통과 칠흑 같은 어두움에서 지내게 될 것입 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장래에 대한 고백이 오늘 우 리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미쳐야 함을 호소합니다. 57문과 58문에서 보듯, 장래의 일은 우리의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천년왕국의 시기를 예수 님의 승천으로부터 재림 때까지로 생각한다면 이 세상을 떠난 성도가 맞게 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으로 다가옵 니다. 하늘로 올려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왕국통치에 참여함을 묘사하는 사도 요 한은, 또한 그들이 이 땅에 있었던 때의 삶을 함께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 다. 그들은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 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인해 목숨을 잃은 자들이었습니다. 이 말 씀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어, 교회를 미혹하려는 세상에 대하여 성령의 검으 로 싸울 수 있게 합니다. 밧모섬의 사도로부터 영광스러운 장래에 관한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은 이 땅 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 고 짐승의 표를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장래의 일에 대한 올바른 고백 위 에 서 있던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 선조들은 세상 재판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존 천주교의 유혹도 견뎌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성도와 세상의 구별은 단 지 죽음 이 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 을 통해 드러나야 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모습 각기 달라 개혁주의 교회는 앞으로도 고난 가운데 있을 것이지만, 승리할 것을 의심치 않는 것은 장래를 소망함으로써 얻게 되는 그리스도의 위로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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