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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no image 하이델베르크<35> 성도 간 교제의 조건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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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4 2007-07-04
하이델베르크 성도 간 교제의 조건 이윤호 장로/‘선교와 비평’ 발행인 55문> “성도의 교제”를 당신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첫째, 신자는 모두 또한 각각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주 그리스도와 교제 하며 그의 모든 부요와 은사에 참여합니다. 둘째, 각 신자는 자기의 은사를 다른 지체의 유익과 복을 위하여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할 의무가 있습 니다.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의 선조들에게는 늘 고난이 뒤따랐습니다. 그들이 올 바른 고백에 따른 교회로 모였을 때 기존 교회와 세상 통치자들이 그것을 인 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적지 않은 성도들이 참 교회를 찾아 먼 길을 떠났 습니다. 그 길은 고향과 친척과 생업을 포기해야 하는 길이었지만 참 교회 에 속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이었습 니다. 참 교회 위해 가족과 생업조차 포기해 그렇지만 개혁주의 신앙을 자각한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한결같은 마음을 품었던 것은 아닙니 다. 당시 사람들 중에 니고데모파(派)라 불렀던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니고데모파라 불린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 던 니고데모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주님을 찾았다는 데서 유래합 니다. 그렇지만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은 이유에 대해 명확히 단정지 을 수 없으므로, 니고데모파라는 이름의 적절성에는 일찍부터 의문이 제기되 어왔습니다. 이들은 사상적으로 개혁가들의 주장과 가르침에 동의하는 사람들이었습니 다. 그들은 당시 교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신학 속에서 비성경적 인 요소를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기존 교회의 체제를 이루고 있던 제도들 속에서 세속성을 찾아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개혁신앙을 고백 하는 성도들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대신, 로마 교회에 머물러 있는 쪽 을 택했습니다. 니고데모파라 불리는 이들이 취한 태도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 다. 참된 신앙은 누구와 함께 교회를 이루는가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개 별적 관계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개혁주의 교회가 박해 아래 있던 상황에서는 그것이 더 바람직해 보일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개혁주의 교회가 표면으로 드러난다면 기존 교회의 공 격이 더 거세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적으로 부패한 교회에 속해 있더 라도 개인의 경건 생활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 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러한 태도의 바탕에 놓여있는 한 가지 전제는 성도들 간 고백이 다르더라도 교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개혁가들에게 있어서 고백과 교제의 분리는 허용될 수 없었습니 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말하는 성도의 교제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이 해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성도들 간의 교제 를 하나로 묶어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몸 의 지체가 제 기능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성도들 간의 교제는 그 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고백의 통일위에서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시대의 교회는 성도의 교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슬픔과 고통을 당한 형제들이 있을 때 심방하고 위로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형제 중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한 자가 있을 때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서 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거나 운동을 하면서 되도록 많은 시 간을 공유하려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들만으로 성도의 교제가 이 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 고백으로 하나 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다른 지체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의 가르침은 고백에 기초한 교제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형제들 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참 교회의 가 르침으로 연합되고 권징에 순종하도록 하는 교제일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 는 혼탁한 세상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간직할 수 있도록 서로 돌아보 게 하여 형제에게 진정한 유익과 복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늘 성도들의 교제를 방해해 왔습니다. 성도들이 교회로 모이는 것 자체를 훼방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가 그러한 때였습니다. 이 러한 사단의 시험을 견뎌내고 이겨내었던 선조들의 역사를 우리는 간직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교회와 세상 통치자들이 죽음이나 육체적 고통으로 위협했 을 때도, 교회로 모이는 것과 참 고백에 기초한 성도의 교제를 중단하지 않 았던 신앙의 모범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신앙고백 위에 있어야 소수를 제외한 우리시대 대부분의 성도들은 교제의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단의 훼방이 중단된 것은 아닙니다. 교제의 열심 속에서 그리스 도에 대한 고백을 떼어 내려는 것이 사단의 계략일지 모르겠습니다.
95 no image 하이델베르크<34> 보편적이지 않은 보편교회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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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0 2007-06-21
하이델베르크 보편적이지 않은 보편교회 이윤호 장로/‘선교와 비평’ 발행인 54문> “거룩한 보편적 교회”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모든 인류 가운 데서 영생을 위하여 택하신 교회를 참된 믿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그의 말씀 과 성신으로 자신을 위하여 불러모으고 보호하고 보존하심을 믿습니다. 나 도 지금 이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이며 영원히 그러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보편교회를 고백할 때 ‘보편’이라는 단어를 정확히 이해하 기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의 사전적 의미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 에 따라 여러 가지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 편’이라는 단어를 쓸 때 그것은 특별하지 않고 일반적이며 한 곳에 제한되 어 있지 않고 널리 통용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느슨함의 의미가 함 축되어 있는 듯합니다. ‘보편’이란 말에 스스로 속지 말아야 이러한 사전적 의미로 보편교회를 이해할 때 우리는 각각의 교회들이 표방하 는 이런저런 주장들을 모두 어우르는 커다란 울타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모양과 색채가 현저히 달라 보이더라도 모두 기독교라는 하나 의 이름으로 묶어줄 수 있는 유연성 있는 울타리입니다. 이러한 울타리를 점 점 넓혀가고 그 속에 있는 각양 교회들을 통일시켜 나가려는 노력이 오늘날 교회일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 일치운동은 각각의 교회들이 가지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점 즉 보편성을 찾으려는 시도입니다. 서로의 차이점을 앞세운다면 논쟁과 갈등이 뒤따를 뿐 하나로 연합되는 교회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로의 모습 에서 공통분모를 찾아 나가다보면 서로를 인정하고 화합할 수 있을 것입니 다. 오늘날 이러한 움직임은 몇몇 분야에서 상당히 성공적인 듯합니다. 특히 복 음을 전파하는 선교현장에서 교회가 연합하는 현상은 두드러집니다. 추진하 는 목표가 동일하다면 교단 교파에 관계없이 서로 연합하는 것이 선교의 효 율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세계의 온 교회가 하나로 연합해 나갈 때 기독교의 위상은 훨씬 높아질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훨씬 좋게 생각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더 많은 일 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이 교회일치를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왜 냐하면 교회 일치의 문제는 공시적 관점과 더불어 통시적 관점에서 다루어져 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시적 관점에서의 일치가 우리 시대에 지역적으로 흩 어져 있는 교회들의 일치를 의미한다면, 통시적 관점에서의 일치는 우리 믿 음의 선조들의 신앙과 우리 교회의 신앙을 동일하게 하는 일치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교회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양보하여 나름대로 하 나의 교회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앞선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면 교회의 일치는 심각하게 손상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백하는 보편교회는 흔히 말하듯 그리 보편적이지 않습니 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말하는 바,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그것 은 반드시 ‘참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며 ‘말씀과 성신’이라는 방편을 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참된 믿음만을 지키되 참되지 않은 믿 음은 배격해야 하며, 말씀과 성신을 통하여 교회의 정체성을 수립해 나가되 인본주의적이고 세상 중심적 사고를 교회에서 가려내야 하는 결코 보편적이 지 않은 보편교회인 것입니다. 참된 믿음 안에서 하나로 성장해 가야할 보편 교회에 관해서 성경은 하나의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건축물의 그림입니다. 튼튼한 기 초 위에서 건물의 모양이 견고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 그림입니다. 건물에 부속된 한 부분이 아무리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만약 기초와 기둥에서 이탈한다면, 그것은 건축물과는 아무 상관없는 별개의 조형물에 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 기초를 사도와 선지자들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와 선지자들 이 건물의 기초라는 말은 그들의 계시적 말씀이 그 건축물, 즉 교회를 지탱 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 일치는 지붕을 이루는 기 와 한 장 한 장을 서로 견고하게 이어 나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 다. 그것들이 잘 어우러져 아무리 아름다운 기와지붕의 모습을 갖추었다 하 더라도 그 자체가 건물에 유익일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 기초와 기 둥 위에 올바로 연결되어 있을 때, 그것은 보편교회라는 건축물에 속한 소중 한 지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사도적 복음 위에 서 있어야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가 거룩한 보편교회를 고백할 때 무분별한 교회일치 를 추구하기보다 그것을 위한 철저한 신학적 검토를 선행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적 보편교회와의 일치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개혁주의 교회가 거룩한 보편교회를 고백할 때, 부흥이라는 옷을 입힌 교회확장을 추구하기 에 앞서 교회의 고백을 조심스럽게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적 기초에 근 거한 보편교회의 살아있는 지체로 이 땅에 존재하기 위해서입니다.
94 no image 하이델베르크<33>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_이윤호 장로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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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2 2007-06-07
하이델베르크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 이윤호 장로_선교와비평 발행인 53문> 성신께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첫째, 성신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둘 째, 그분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져서 나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며 나를 위로하고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것 같 습니다. 성경말씀을 겸손하게 살핌으로 우리 가운에 일하시는 성령님의 사역 을 깊이 깨닫는다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성경은 성령님의 사역을 무시하 는 행위에 대해 여러 차례 경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조심스러운 측면 또한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 데는 오순 절운동, 은사운동 그리고 빈야드운동과 같은 현대 성령운동의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에 대해 어느 때보다 관심 높아져 우리는 성령충만을 바 라며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데 열심입니다. 이것은 바람 직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도가 그것을 교회에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 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우리에게 “오직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성령 충만을 바라고 원하는 것만으로 사도의 명령에 순종했다 할 수는 없을 것입 니다. 중요한 것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충만 받는 것이 성도의 어떠한 상태를 말하는지 말씀을 통해 알아 가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이 보여주는 성령충만함에 대한 외적 증거는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에는 스데반, 베드로, 바나바, 바울 등과 같은 사람들이 성령충만한 사람으 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근거 와 성령충만한 결과로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현상을 우리는 성경말씀에서 발 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분들의 모범을 통해서 성경의 가르침과 우리의 생각 사이에 상당 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오순절 혹은 은사주의자들 이 정립해 놓은 성령충만에 관한 인식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 이 에 대한 부분적 이유일 수 있습니다. 즉 방언, 예언, 치유와 같은 특별한 은사 와 성도의 내적 체험과 같은 범주에서 성령충만을 이해하는 것이 그것입니 다. 그렇지만 성경말씀이 그들을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확증하는 근거는 무엇보 다 그들 가운데 드러나는 신앙적 삶입니다. 예컨대 스데반은 성경에서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그것은 그의 신앙적 삶이 다른 사람에게 모범 이 되어 집사직분을 감당하기에 합당한 성도였음을 보여줍니다. 바나바 또 한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제 막 복음을 알기 시작 한 안디옥의 성도들을 온전한 신앙의 길로 이끄는데 합당한 경건함과 지혜 를 가진 사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성경말씀은 복음선포를 성령충만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과 베드로는 그들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충만함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들 앞에서도, 새로운 선교지에서 당한 혼란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 대하게 증거할 수 있었음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 하라 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인식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시대적 사명 을 감당할 줄 아는 성령충만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말하는 성령님의 역할과도 조 화를 이룹니다. 성령님에 관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요리문답 은 그 중에서 특별히 두 가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부 성 자와 더불어 영원한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신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믿음의 성도들에 대한 성령님의 사역으로,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의 구속사역에 온전히 참여하여 신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일하십 니다. 이것은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을 충만을 받을 것’을 요구하는 바울의 명령과도 한 뜻을 이룹니다. 이 명령은 복음에 합당하지 못한 어리석 은 자들의 생활을 벗어나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실천하는 삶, 즉 성령충만한 성도의 상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엡 5:17, 18). 은사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이 드러나는 것을 성령 님의 사역과 동일시하면서 개혁주의 교회는 성령님의 사역을 무시한다고 비 판합니다. 그렇지만 개혁주의 정신은 성령을 소멸하지도 훼방하지도 않습니 다. 성경말씀을 통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 개혁주의가 지향하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이며 그것은 성령님의 사역을 통 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출발점, 즉 우리의 유일한 위로를 그리스도에게 속 함에서 찾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에게 온전히 의존할 때 가 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곧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93 no image 하이델베르크<32> 그날에 우리의 눈물을 닦아 내시리라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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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5 2007-05-23
하이델베르크 그날에 우리의 눈물을 닦아 내시리라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52문>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은 당신에게 어떤 위로를 줍니다. 답> 내가 어떠한 슬픔과 핍박을 당하더라도, 전에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시사 내게 임한 모든 저주를 제거하신 바로 그분이 심판자로 서 하늘로부터 오시기를 머리 들어 기다립니다. 그가 그의 모든 원수들 곧 나의 원수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형벌하실 것이며, 나는 그의 택함을 받은 모 든 사람들과 함께 하늘의 기쁨과 영광 가운데 그에게로 이끌어 들이실 것입 니다. 세상 끝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고 있습 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만큼 많은 내용을 말씀하시지 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왕으로서 만물을 통치하시 던 예수님이 심판자로 재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확실히 계시된 예수님 재림 사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사단이 옥에서 잠시 놓이게 된다는 사실도 성경을 통 해 압니다(계 20장). 그때 사단은 자신을 따르는 민족들을 모아서 교회를 공 격하기 위해 성도의 무리를 둘러싸게 될 것입니다. 이 순간은 하나님의 택 한 백성과 그들에게 해를 입히려는 자들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드러나는 때 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는 영광이요 그들의 대적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의 순 간인 그리스도의 심판은 교회가 고백해온 소중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장래 에 일어날 이 사건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장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의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 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로 하여금 참된 위로를 소 유하게 함으로써 흔들림 없는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 다. 심판이 어떻게 성도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동시대에 기록되었던 벨직 신앙고백서 마지막 장에서는 심판 날에 있을 하나 님의 위로를 아름다운 그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판의 날을 보여주는 그림 속에 참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들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고난의 흔적을 봅니다. 이제 성도들은 감격스러운 경험을 합니다. 바로 성도들의 눈물을 하나도 남 김없이 친히 닦아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성도들이 흘렸던 눈물은 결 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들의 신앙으로 인해 세 상 통치자들과 교회 재판관들에 의해 사악한 이단으로 정죄 당하면서 흘린 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세상이 배척하던 그들의 고백이 옳았음을 인정해 주십니다. 이제 심판의 날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때는 세상과 거짓교회가 거짓으로 내몰았던 성도의 고백이 실상은 옳았음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이며, 뿐만 아니라 신앙을 지켜 나가면서 흘렸던 그 들의 눈물을 하나님이 친히 닦아주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가 올 심판을 통해 위로를 경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습 니다. 그것은 교회의 순결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벨직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던 귀도 드 브레(Guido de Br�)는 감옥에 갇혀 순 교를 기다리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고백서를 작성한지 6년 후 의 일입니다. 그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습 니다. 곧 있을 자신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질지 모르는 아내에게 보냈던 마지 막 편지에서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고난을 받아들일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 다. 그가 진리를 지켜나가는 동안 겪었을 고난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반하지 않고 진리를 지켜나 갈 수 있었던 것은 심판 날에 대한 소망으로 현재적 위로 가운데 거할 수 있 었기 때문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사도의 고백이 우리 시대에 그리 공감 을 받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진리를 붙잡음으로 ‘사단의 회’로부터 온갖 고난을 당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안디 바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했으며, 그들을 진리가운데로 이끌던 사도 요한을 밧모섬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을 맛보아 야 했습니다. 이들이 알게 된 세상 끝 날에 일어날 일들은 이 세상 무엇으로부터도 얻을 수 없는 참된 위로였습니다. 그렇지만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슬픔과 핍박을 당해보지 못한 자들에게 세상 끝 날에 일어날 사건들은 그저 호기심을 충족 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종말은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로 이 시대는 교회에 대한 핍박이 존재하지 않는 평온한 시대이므로 성도가 당 해야 할 고난도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 다. 그렇지만 교회를 진리로부터 이탈시키려는 사단의 열심이 없거나 약해지 는 시대는 없을 것입니다.
92 no image 하이델베르크<31> 천년왕국은 언제?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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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1 2007-04-26
하이델베르크 천년왕국은 언제?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50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라는 말이 왜 덧붙여졌습니까? 답> 그리스도는 거기에서 자신을 그의 교회의 머리로 나타내기 위해서 하늘 에 오르셨으며, 성부께서는 그를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51문>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이 영광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는 성신으로 그의 지체인 우리에게 하늘의 은사를 부어 주십니다. 둘째, 그는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모든 원수들로부터 보호하고 보 존하십니다. 교회가 설립되던 때부터 복음과 다른 내용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도 베드로 가 교회에 남긴 마지막 당부가 거짓교사를 경계하라는 내용이었으니 말입니 다. 처음부터 있었던 거짓 교사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거짓교사들이 주(主)님을 부인했음 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사 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벧후 2:1-2). 그 리스도의 본질을 왜곡하는 내용이 보기 좋은 것으로 포장되어, 사람들은 주 를 부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별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이런 현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예 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실상은 교회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자리하 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교회는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단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경향 이 우리 모습가운데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교 회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의미가 단지 하나님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교회를 위하여 만물을 통치하고 계시다 는 사실에 있음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 약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에 대한 실재적이고 현재적인 자각이 없다면, 우리 역시 어느 정도는 주님을 부인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습니 다. 실재로 많은 경우 그 리스도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천년왕국을 단지 다가 올 미래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현재적 사역을 간 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왕이신 그리스도의 직접 통치가 없다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압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공격에 대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사단을 결박하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 다. 선교를 통하여 교회가 확장될 수 있는 것 역시 사단으로 하여금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계 20:1-3).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과 더불어 시작되어 그의 영광스러운 재림 때 가지 지속될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는 만물을 통치하고 계시며 자신의 교회 를 끝까지 보호하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28조에서, 그리스도의 왕적통치에 대한 실재적 자각으로 역동적 신앙생활을 했던 우리 선조들의 모범을 봅니다. 교회로 모이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고백서는 단지 환경이 좋을 때뿐만 아니라 여 건이 어려울 때라도 모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통치자들이 반대하 고 군 주의 칙령이 금할지라도 그리고 죽음이나 육체적 형벌이 따른다 할지라 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교훈을 따름으로 죽음이나 형벌을 맞이한 자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세상 통치자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했습니 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다스리는 유일한 왕이시며, 왕명(王命) 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보존되고 부흥하는 유일한 길임을 그들은 알 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보존과 부흥과 선교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교회의 부흥을 추구하면서 성공적인 세상 경영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때가 있습니 다. 교회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 과학자들이 내놓은 합리적인 해결책을 따르려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교회가 헤쳐 나가기 힘든 장벽을 만났을 때 세상 통치자들이 했던 방식을 배우려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을 머리로 모심으로써, 왕 의 다스림과 보호하심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친히 통치하시는 주님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지혜를 통해 교 회를 존속시키고 부흥시키려 할 것 이 아니라 세상의 그것과는 다른 그리스도의 뜻을 살피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지금,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우리를 보호하고 친히 다스리고 계시기 때 문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 교회는 이 땅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계시며 성도 들이 곧 들려 올라갈 하늘에 속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91 no image 하이델베르크<30> 위의 것처럼 보일지라도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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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9 2007-04-11
위의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49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언자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그의 아버지 앞에서 간구하십니다. 둘째,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으며, 이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인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올리실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그 보증으로 그의 성신을 우리에게 보내시며, 우리는 성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위의 것을 구하고 땅의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 구별된 존재입니다. 세상과는 달 리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재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우 리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구별성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땅의 것을 구하지 않 고 위의 것을 구한다는 데 있습니다. 성도는 재창조 받은 새로운 존재 위의 것을 구한다 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시며 훗날 우리가 주님을 대면하게 될 그 영광스러운 곳에 우리의 가치관 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으로 성도의 이러 한 삶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땅의 것을 구하지 말고 위의 것을 구하라는 말씀은 사도바울이 골로새 교인 들에게 당부한 말씀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골 3:1-2). 바울의 이 말씀 은 골로새 교회가 처한 형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는 거 짓 교사들의 해로운 가르침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가르침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의 가르침에서 몇몇 이교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 다. 하나는 그들이 가진 신비주의적 신앙 형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것과 어우러져 있는 유대주의적 의식입니다. 예컨대 그 거짓 교사들은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천사 숭배와 같은 특별 한 형태의 신앙을 요구했으며, 육체를 다스리기 위한 일정한 유대교적 수행 규칙을 역설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권능을 온전히 신뢰하 지 못하고 구원을 위한 다른 조건들을 거기에 덧붙였습니다. 이러한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경계하도록 한 후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 를 앞세워 사도 바울이 하신 말씀이 바로 땅의 것이 아닌 위의 것을 구하라 는 당부였습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이라는 말 속에는 세상 사람들이 일 반적으로 추구하는 세속적 가치관만 포함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골로새 교회에서 거짓 교사들이 추구하는 신앙 역시 땅의 것으로 생각해 야 합니다. 그 거짓 가르침의 근원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땅에 있는 인간의 생각 혹은 사단의 계략에 있으므로 그것 역시 땅에 속한 것이 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골로새 성도들은 쉽지 않은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 교사들의 추구하는 것이 분명 땅에 속한 것이지만, 그 겉모습 은 마치 위의 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사 숭배 와 같이 신비스러운 신앙 생활을 요구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추구하는 영적 인 세계는 세상 사람들이 탐하는 물질적인 목표와는 분명 구별되어 보였을 것입니다. 어떤 교인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고상한 것으로 여기고 따랐을 것 입니다. 일정한 형태의 금욕적 수행규칙도 마찬가지입니다. 방탕함을 즐기기 좋아하 는 세상 사람들의 삶과 비교해 볼 때, 금욕적 규칙을 요구하는 그들의 가르 침은 분명 위의 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것들이 모두 거짓인 이유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붙어있지 않았기 때 문입니다(골 2:19). 예나 지금이나 위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에 입을 모으지만, 실제로 무엇 이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인지 구별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이 교회가 직면한 어려움입니다. 마치 위의 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렇지 못한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것이란 단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속적 가치관과 달라 보이는 막 연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그 내용과 우리의 추구하는 것이 일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위에 것을 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땅의 것을 구하지 않고 위의 것을 구하는 것은 고난이 예고된 전투적인 삶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위의 것을 구하는 것은 땅에 있 는 지체를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골 3:5).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인다 는 말은 성도 개인의 인격체 속에 있는 세속적 요소를 버려야 함을 의미합니 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경건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진리와 무 관한 것들을 구별하여 제거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사단은 교회의 이 일을 방해할 것입니다. 이미 패배를 당한 사단이지만 여전 히 교회로 하여금 배교하도록 마지막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 로 요리문답에서는 우리가 위의 것을 구하는 것은 오직 승리하신 그리스도께 서 보내신 성령의 사역으로 가능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간교한 유혹과 싸워야 해 우리 스스로의 기준이 아닌 오직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확하 게 일치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위의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누리는 길입니다.
90 no image 하이델베르크<29> 올라가셨지만 지금 여기에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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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7 2007-03-28
하이델베르크 올라가셨지만 지금 여기에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46문> ‘하늘에 오르셨고’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서 하늘로 오르셨고, 우리의 유익 을 위하여 거기에 계시며, 장차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다 시 오실 것입니다. 47문> 그렇다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답>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인성으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나 그의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성신으로는 잠시도 우 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48문>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마다 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서로 나뉜다는 것입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은 아무 곳에도 갇히지 않고 어디나 계십니 다. 그러므로 신성은 그가 취하신 인성을 초월함이 분명하며, 그러나 동시 에 인성 안에 거하고 인격적으로 결합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보 통의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그리스도의 승천을 실재 사건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천은 언 뜻 보아 모순점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예수님의 승천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실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약속과 곧 이은 그의 승천은 서로 조화되지 않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학적 이고 인본주의적인 사고에 익숙하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잘 이해하 지 못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단은 사람들의 연약한 마음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 록 합니다. 많은 경우 사단은 과학을 도구로 사용합니다. 과학자들은 오랫동 안 미지의 세계로 여겨져 왔던 구름 위의 세계를 탐구하여 이제 많은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들 중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우주 어느 곳에도 예수님이 계신 하늘 나라와 같은 곳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의 승천 역시 실재의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성경 말씀과 과 학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때 흔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오히려 과학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우를 범하 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사단은 과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연약한 성도들을 미혹시키기 에 열심이었습니다. 사단은 20세기 초 미국교회를 진화론이라는 도구를 사용 해서 공격했습니다. 많은 교인들은 진화론을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진리로 생각했으며, 심지어 여러 교회 지도자들도 그것을 완강히 거부하지 않았습니 다. 결국 교회의 일부는 성경에서 설명하는 창조대신에 과학이 제시하는 자 연의 진화를 믿음으로써 과학을 우상신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믿음 없는 자들이 과학적 지식을 통해 성경말씀을 이해하려 노력하지만 하나 님은 우리에게 그의 말씀에 대한 의심치 않는 믿음과 그것에 대한 순종을 요 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이 목격한 그리스도의 승천을 사실 로 믿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낙심했던 그의 제자들이었지 만 그가 떠난 지금 그들은 오히려 새로운 희망 속에 거할 수 있었습니다. 제 자들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단지 사실로 인 정할 뿐 아니라 이성주의에 빠져 있는 현대의 우리가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떠남이 가지는 의미를 잘 알 았습니다. 즉 승천하심으로 우리를 떠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올라가심 을 통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명을 감당해 나가던 제자들의 삶은 결 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배척당했으며, 많은 경 우 죽음까지도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하나님 찬양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복음을 위해 고난 받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 것은 약속에 신실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들과 함께 하심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일에 역동적으 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을 전인격적으로 알고 체험 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몸을 입으심으로 인 간의 연약함을 직접 체휼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성과 더불어 승천하셨으 므로 지금 우리 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인성과 결합된 그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왕으로서의 권세를 가졌을 뿐 아니 라 우리의 연약함을 가장 잘 알고 계심으로써 우리를 인도하시기에 결코 부 족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한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 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바로 우리만의 특권입니 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특권 하나님의 동행하심에 대한 실제적 자각의 부재로 불평과 두려움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던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우리는 거울로 삼아 경계하여야 합니다.
89 no image 하이델베르크<28>그리스도의 부활을 어떻게 기념하는가?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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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0 2007-03-14
하이델베르크 그리스도의 부활을 어떻게 기념하는가?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45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는 부활로써 죽음을 이기셨으며 죽으심으로 얻으신 의에 우리로 참여하게 하십니다. 둘째,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이제 새로 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러 운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부활절을 절기로 지킵 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활절에 받는 삶은 계란이 큰 기쁨이 되기도 했습니 다. 십자가나 교회와 같은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계란은 그리스도와 성도 의 부활을 기억하게끔 하는 작은 도구였습니다. 부활절에 받는 계란 남달라 부활절에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교회에 입고 오는 하얀 한복이 또한 머릿속 에 남아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옛날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 섰던 여인들 n과 앞으로 있을 우리 몸의 부활을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부활절에서 빠질 수 없는 큰 행사로 연합예배를 들 수 있습니다. 사 람들이 가장 많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미리 정해 교단 교파의 구별 없이 수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으로 하나 되었음을 내외 적으로 확인하는 이 행사는 교회의 위상을 드높이기에 충분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방편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 다. 부활은 성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승 천을 앞둔 예수님께서 마지막 하신 일들 중 하나는 바로 제자들로 하여금 부 활의 확신 속에 거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도마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의 심하는 그의 제자에게 친히 그의 손을 보여주시고 옆구리의 상처까지도 만져 보게 하심으로써 교회의 터가 될 그의 제자들이 흔들리지 않는 부활신앙 위 에 거하도록 하셨습니다. 부활에 대한 굳건한 신앙 없이는 교회가 설 수 없 었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교회가 확장해 나갈 때도 우리 주님은 부활 신앙이 없는 확장을 결 코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성령의 간섭 속에서 이스라엘 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 사도행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 도행전 기록자가 보통의 그리스도인을 증인이라 호칭한 경우를 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증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의 메시지를 직접 들었던 그의 제자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전인격적으 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휼한 사람들을 통해 성령께서는 최초 교회의 모습 을 형성하고 확장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왜 이토록 중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의 부활이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생명력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죽은 존재와도 같음을 성경을 통해 압니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아담의 범죄에 대해 죽음을 약속하셨고 모든 인간은 그 곳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 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 그 죽 음을 완전히 물리치셨고, 그 승리로 인해 그리스도에 속한 그의 백성 역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 위에 선 교회는 세상이 가지 지 못 한 생명을 가진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그토록 중요하지만 초대교회 때부터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존재해 왔습니다. 고린도교회에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고, 디모데 가 보살피는 성도들 중에서도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그리 스도의 부활을 부정한다면 그들은 즉시 이단으로 정죄될 것이고 성도들은 그 들을 경계하고 멀리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초대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주장에 미혹되어 잘못된 신앙으 로 돌이켰던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혹시 당시 거짓 교사들은 그리스 도의 부활을 늘 이야기하고 때때로 부활을 기념하는데도 게으르지 않았지 만, 신자에게 생명력을 주는 부활의 참 의미를 훼손시켰던 것은 아닐까요? 혹시 우리도 이러한 유혹 가운데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외형상으로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고 흰옷을 입고 부활절 찬송을 함께 부르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표면적으로 선언합니 다. 옛날 로마 카톨릭에서도 부활절을 기념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오랜 기 간 동안 부활절 행사를 준비하는데 교회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활로 인한 생명력이 교회에서 드러나 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도 부활을 부정했던 사람들의 교훈에 대해 귀가 얇 아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리문답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방법이나 규칙을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습니다. 오직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만 생각하도록 합니다. 부활 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백성인 우리들이 새로운 생 명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다가올 영광스런 부활에 대한 소망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치관을 형성해 나가는 기준이 되는 것 이 그것입니다. 부활은 새생명 나타내는 것이어야 이 사실을 전인격적으로 깨달음으로써 세상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생명력 을 교회가 소유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88 no image 하이델베르크<27> 행복으로의 초대(?)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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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4 2007-02-28
하이델베르크 행복으로의 초대(?)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44문>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왜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내가 고통과 중대한 시험을 당할 때에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를 지옥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고 거기에서 풍성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그의 모든 고난을 통하여 특히 십자 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아픔과 공포와 지옥의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 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많은 교회에서는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 전도지를 만들어 사람들에 게 나누어주곤 합니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에 의해 손에 쥐어지는 전도지에 서 가장 많이 읽을 수 있는 문구들 중 하나는 ‘행복으로의 초대’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수많은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 은 돈이 많거나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라 해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 러한 세상 사람들에게 행복의 길을 제시함으로써 복음을 소개하는 것은 매 우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전도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 소유하는 행복이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기에 흔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실입 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이란 단순히 고통 없는 평온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 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하나님 왕국의 설립은 처음부터 평온한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 니다. 그 나라의 시작은 큰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스스로 왕국 되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헤롯의 군사들에 의해 땅은 피로 물들고 애곡하는 소리가 울려 퍼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던 세례요한은 통치자의 손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당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왕국 백성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역도 십자가라는 형틀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 나님의 방법은 죽음이라는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는 고난을 짊어진 시간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 의 몸을 입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고통의 크기를 우리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그 고통과 수난의 정도를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 진 언어와 감정의 한계를 실감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두렵고 끔찍한 상태를 빌어 그리스도의 고난을 고백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즉, 그들은 그리 스도께서 지옥에까지 내려가셨다는 말을 통해 그의 당하신 고통은 우리의 사 고가 미칠 수조차 없는 상태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고통의 연속일 것입니 다. 우리는 세상과 많은 것을 공유한 채 살아가고 있으며 때때로 세상과 아 주 친밀한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은 세상 사람 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해 존경심을 느끼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의 고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 그의 법에 순종한다면 여자의 원수인 사탄은 그것을 매우 싫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라도 더 그의 손아귀 안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 나님께서 사탄의 공격과 유혹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이 겨냄으로써 사탄과 더욱 원수지간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더욱 분 명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지옥과 같은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주 어진 고난을 견디고, 견딜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를 위해 지옥의 고통까지 겪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감 싸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의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됩니 다. 뿐만 아니라 지옥의 고통을 당하신 그리스도께서 승리를 이룩하셨다는 사실은 우리 역시 지금의 고난을 통하여 종국적인 승리를 얻을 것임을 확신 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위로 안에서 참된 행복 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으로 안내하는 초대장을 세상 사람 들에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행복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행 복의 의미를 비밀로 하셔서 그의 백성만 깨달을 수 있게 하시며, 멸망하는 자들의 눈에는 미련한 것으로 보이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감추어진 십자가의 비밀 돈, 권력, 명예 가운데 거함으로써 고통 없는 삶을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는 이들이 세상 사람입니다. 비록 고난과 시험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지옥의 고 통까지 당하신 그리스도의 위로를 유일한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는 이들이 바 로 그리스도인 입니다.
87 no image 하이델베르크<26> 십자가에 달린 옛사람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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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3 2007-02-07
하이델베르크 십자가에 달린 옛사람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42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우리도 왜 여전히 죽어야 합니 까? 답> 우리의 죽음은 자기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며, 단지 죄짓는 것을 그 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43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와 죽으심에서 우리가 받는 또 다른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공효로 우리의 옛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 고 죽고 장사되며, 그럼으로써 육신의 악한 소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 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그분께 감사의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수차례 참석해 보았던 부흥집회들을 한번 떠올려봅니다. 그곳 에서 가장 많이 설교되어지는 내용 중 하나는 바로 옛사람이 죽고 새롭게 태 어난 성도의 삶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관심의 대상이었던 옛사람과 새사람 특히 예수님을 믿기 전 소위 나름대로 방탕했던 과거사를 가진 부흥사들은 r 옛날 자신들의 경험담을 늘어놓기 일쑤였고, 설교의 후반부에 가서 그것과 대조적인 현재의 삶을 이야기 할 때 성도들은 큰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옛 사람, 즉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모습과 그 이후의 삶의 외형적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는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 와 같이 방탕했던 과거와 도덕적으로 성숙해진 현재의 대조, 즉 개인의 경험 을 통해서 옛사람의 죽음과 새로운 삶을 이해하는 것이 보통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는 옛사람과 새사람 사이의 경험적 차이를 상대적으로 적 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개혁주의 교회는 일생 동안 이러 한 방식의 대조가 두드러지지 않는 삶을 보편적으로 희망한다고도 할 수 있 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교회의 언약 가운데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유아세례 를 베풀고, 그들이 언약의 백성답게 잘 자랄 수 있도록 교회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개혁교회의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지는 것도 자라나 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개혁주의 신앙의 기초를 튼튼히 다지도록 하기 위함입 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신실하게 하나님을 알아간다면 방탕했던 과거와 그렇지 않은 현재 사이의 뚜렷한 경험상의 대조는 그들에게 그리 선명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의 죽음은 단지 우리의 경험을 통한 깨달음에 국한되지 않습 니다. 이제 막 태어난 어린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베풀 때 이미 옛사람이 죽 었음을 고백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직 가시적 죄를 범할 수 없는 어린 아이에 대해서조차 옛사람의 죽음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태생적 으로 짊어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죄 때문일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에서 비롯된 이것은 우리의 경험으로는 결코 상상할 수도 측량 할 수도 없는 무서운 죄입니다. 이러한 죄를 지닌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 와 함께 장사지냈다는 사실을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통해서는 온전히 이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옛사람의 죽음을 우리 경험을 통해 깨닫는다면 요리문답 43문의 대답에 서 말하듯이 옛사람을 장사지냄으로써 ‘육신의 악한 소욕이 더 이상 우리 를 지배하지 못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과거 와 현재 사이의 도덕적 삶의 모양이 아무리 차이난다 하더라 도 시시때때로 육신의 소욕에 의해 나약하게 쓰러지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장래를 보장하기보다는 오히려 불 확실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옛사람이 우리의 상상이 미치 지 못하는 무서운 죄 가운데 있었지만 이제 우리가 그것의 지배로부터 벗어 났음을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의 약속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고 장사지낸바 되었습 니다. 그렇지만 우리 앞에는 여전히 육체의 죽음이 놓여 있으며, 우리가 사 는 동안 한순간도 범죄로부터 자유로운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 다(42문). 우리는 장래에 있을 죽음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만큼 성숙한 신 앙을 가지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 각자가 걸어온 삶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부분적으로 옛사람의 죽음을 깨닫고 우리 자신의 보다 성숙한 모습을 위해 노력할 수 있지만 한계에 부딪 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으로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되었음을 확신하며 현재의 전투에 임할 수 있 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으로 육체적 죽음을 통한 그 나라로의 영 광스러운 참예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되어야 그러므로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음을 아는 것은 우리 의 경험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옛사람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익을 확신하는 것은 도덕적 성숙보다 오히려 그의 명령 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86 no image 하이델베르크<25> 교회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가?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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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8 2007-01-25
하이델베르크 교회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는가? 이윤호 장로_‘선교와 비평’ 발행인 40문> 그리스도는 왜 ‘죽으시기’까지 낮아져야 했습니까? 답>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에 우리의 죄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이외 에는 달리 치를 길이 없습니다. 41문> 그리스도는 왜 ‘장사’되셨습니까? 답>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가 진정으로 죽으셨음을 확증합니다. 인터넷을 통해 몇 장의 사진이 소개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눈을 떼 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진 속에 나타나는 주인공은 많은 사람들을 뒤로 한 채, 무척이나 무거워 보이는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걸어가고 있었습 니다. 그 모습이 무척 힘들어 보이면서도 진지해 보였습니다. 진지하게 보이는 십자가 짊어진 사람 그 뒤에 따라 나오는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멈칫하게 했습니다. 군집한 군중들 앞에서 몇몇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 니라 그들의 손에는 실 제로 못이 박혀 있었습니다. 한 카톨릭 국가에서 고 난 주간을 맞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행사의 일부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을 기억하며 그리스도가 주신 사랑과 겸손의 교훈을 되새기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아니지만 우리 역시 여러 모양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 억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마 성도들을 가장 감격하게 하는 사건일 것 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 리는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에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고백하는 내용이 많아서, 찬송 중에 다 함께 그것을 기억합니다. 고난주간이 되어 많은 성도들이 특별히 금식을 하는 것 역시 예수님이 죽음 으로 보여주신 무한한 사랑에 대하여 감사하며 그분이 겪으셨던 고난을 기억 하는 기회로 삼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모양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 을 기억함으로써 우리가 깨닫는 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과 겸손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 조금은 다 른 곳에 한 차례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 강조점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를 묻는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물음에 대 한 답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라는 것 이 그들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 신 사건이지만,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난 사건임을 성도들은 기 억해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성품과 섭리와 묶여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태생적으 로 죄 가운데 태어날 수밖에 없는 그의 백성들을 거룩하신 섭리 속에서 구원 하시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서 스스로 선한 계획을 세 우시고 이를 성실하게 이루어 나가시는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으 심은 바로 자신의 계획하심과 약속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가장 분 명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특별 한 공의를 통해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려 는 사람들이 있고, 금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의미를 엄 숙하게 상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 이 몸소 실천하신 사랑과 겸손을 배웁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그 사랑 과 겸손을 교회 안과 밖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아 무리 열심을 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작정하신 의로운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면 공허한 노력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공의 위에서 나타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공의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교회 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가리는 실수를 범할 수 있습 니다. 구약의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러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통한 구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의 의, 즉 그분의 계획하심과 뜻을 알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 나름 대로의 신앙생활은 열심이었고 활기가 있었지만, 그들이 간직한 메시아의 의 미는 이미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한 왜곡된 신앙 그리 스도의 대속적 죽음 위에 서 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뜻 대신에 이 땅의 원리에 따른 부흥을 꿈꾼다면 이와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일 컬어 하박국 선지자는 공의가 전혀 시행되지 않은 언약 백성이라 했습니다 (합1:4).
85 no image 하이델베르크<24> 교회가 능욕(凌辱)을 받지 않는다면_이윤호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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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1 2007-01-10
하이델베르크 교회가 능욕(凌辱)을 받지 않는다면 이윤호 장로_'선교와비평' 발행인 39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달리 돌아가신 것보다 특별 한 의미가 있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므로 그가 십자가에 달리심은 내게 임한 저주를 대신 받은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게 됩 니다. 종교마다 그것을 상징하는 표시가 있습니다. 예컨대 이슬람교의 표시는 초승 달입니다. 모슬렘들이 예배하는 장소인 모스크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양 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모양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다면 모스크 지붕의 맨 끝에 초승달이 얹혀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상징하는 상징물 있어 이 초승달 모양은 비단 모스크 뿐 아니라 여러 이슬람 국가들의 국기에도 새 겨져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그 나라 국민의 종교성을 짐작케 합니다. 그들의 선지자 마호메트가 계시를 받을 때 하늘에는 초승달이 떠 있었 다고 전해오 고 있습니다. 이제 막 차 오르려 하는 상태의 초승달은 마호메트의 계시를 통하여 그들의 종교가 동텄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표시는 무엇일까요? 아마 십자가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교회 지붕에는 한결같이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 회에서 사용하는 강대상이나 연보함과 같은 각종 물건에도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성도들은 십자가 모양을 본뜬 물건을 몸에 지니 고 다니면서 그것을 위안으로 삼기도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를 이야 기하고 그것을 가까이 두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십자가는 교회 밖의 사람에게도 사랑의 상징이 되어 큰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많은 박애주의적 봉사단체의 깃발에 십자가가 그 려져 있는 것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극심한 가난이나 분쟁이 있는 곳에서 봉 사하는 사람들의 옷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워 보입니 다. 십자가가 고통 받는 사람을 향한 사랑의 표시로 인식되어 세상 사람들도 십 자가를 매우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교회와 세상 모두에 게 기쁨과 평화의 원천이 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성경은 십자가를 통한 갈등적 요소 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성 문 밖에서(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우리 역시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히 13:13). 사랑의 가장 큰 표현인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우리는 그저 기쁨을 누리면서 그 사랑을 세상 가운데 이야기하고 베풀면 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능욕을 지고 성문 밖으로 그를 따라가야 하는 것일까요? 십자가는 사랑을 뜻하고 있지만 세상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상주의적 사 랑은 아니라는 사실이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본 질상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 굵은 획을 그어 그들을 뚜렷이 구분하 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저주로부터 벗어나 구 원에 참여한 교회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무서운 저주아 래 있음이 십자가를 통해 훤히 드러난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빛을 잃은 교회는 십자가 때문에 참 교회를 미워할 것입니 다. 세상의 어떠한 선한 행동도 십자가는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도덕적으로 고결한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웃 을 배려하는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십자가가 선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아무리 고상 한 가치를 추구한다 해도 영원한 저주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지 못하는 그 자체가 가장 큰 죄이기 때문입 니다. 이러한 배타적 메시지를 선포하는 교회를 세상은 미워하지 않을 수 없 을 것입니다. 세상과 빛을 잃은 거짓 교회는 십자가 때문에 참 교회를 멸시할 것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의 아름답고 견고해 보이는 도성에서 행복을 찾으며 만족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도 성은 꿈과 희망을 주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영문 밖으로 능욕을 지고 나아 가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고 끔찍하게 생각하는 그 곳으로 교회는 향하고 있습 니다. 세상이 그러한 교회를 손가락질하며 멸시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향한 능욕의 길에서 발견하는 성도의 참 기쁨 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소유한 십자가는 이슬람의 초승달과 같은 식의 상징이 아닙니다. 또 한 이 건물의 용도가 교회라든지, 이 물건들은 교회에서 쓰이는 것들임을 알 려주는 표시는 더더욱 아닙니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 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저주와, 구원받은 참 성도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과 구별된 길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저주의 상징 만약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 지 않는다면 우리는 과연 올바른 십자가를 선포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84 no image 하이델베르크<23> 왜 본디오 빌라도인가?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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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8 2006-12-20
하이델베르크 왜 본디오 빌라도인가? 이윤호 집사_‘선교와 비평’ 발행인 37문>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기간에, 특히 생의 마지막 시기에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습니 다. 그분은 유일한 화목제물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 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셨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 을 얻으셨습니다. 38문> 그분은 왜 재판장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답>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세상의 재판장에게 정죄를 받으셨으며, 이로 써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도신경에는 왜 예수님께서 본 디오 빌라도에게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님을 살해하려고 앞장서서 선동했던 사람은 빌라도 가 아니라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권력 앞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님 대제사장과 관원 그리고 백성들 앞에서 본디오 빌라도가 밝힌 것은 예수님 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고소한 죄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을 공관복 음과 요한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 해 배척과 고난을 당했지만, 로마총독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 이 사도신경의 고백입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일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행적을 보면 그의 사역을 방해하고 죽이려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 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결국은 로마제국의 관원들에 의해서 묶이는 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은 그가 로마병정들이 지키고 있는 로마감옥에서 죄수의 몸으로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서 계획되고 성취되어진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에 의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 가보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 맨 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모양으로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 인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 예언했습니다(행 21:11). 그러므로 로마인들이 바 울을 결박한 것은 우연한 상황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사 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가 우연이 아니듯 사도신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디 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확인하 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지방에서 본디오 빌라도는 평범한 한 명의 로마시민 이 아니라, 로마를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유대지방에서 빌라도 는 로마제국 그 자체를 의미하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총독은 로마제국의 절대자인 황제의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세상’이라고 불리던 로마제국은 하나의 여느 국가 이상을 의 미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의 지리적 사고 영역에서 거대한 로마제국 은 온 세상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총독 빌라도 아래 에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습 니다. 그 리스도를 죽음에 처하도록 한 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이었을 뿐 아니 라, 바로 우리자신들을 포함하는 온 세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의 원인이 로마총독 빌라도로 대표되는 온 세상에 있다 는 사실은 세상 어느 곳의 어떠한 누구도 예수님 앞에서 명백한 죄인임을 부 정할 수 없게 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화목제물이 아니고는 삶과 죽음 에 대한 어떠한 소망도 있을 수 없음을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는 이유가 되 었습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살해한 세상의 죄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책망하실 것입니다(요 16:8). 그리고 세상 죄를 선포하는 교회는 필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계승하는 제자들을 세상은 이미 미 워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요 15:19). 그렇지만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우 리 교회가 기뻐할 것은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선포로 세상에서 고난받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당한 고난과 바울의 옥에 메임 속에서 오히려 구원의 복음 이 나타나고 진보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세상의 죄를 책망하시 는 보혜사 성령의 사역에 무관심하고 오히려 세상과 화합하려 한다면 우리에 게 고난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83 no image 하이델베르크<22> 과학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_이윤호 집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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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0 2006-12-06
하이델베르크 과학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35문> “그분은 성신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라는 말 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하나님의 영원한 아드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여전히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성신의 사역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 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또한 다윗의 참된 자손이 되고 모든 일에 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36문> 그리스도의 거룩한 잉태와 탄생은 당신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므로 잉태되고 출생할 때부터 가지고 있 는 나의 죄를 그의 순결함과 온전한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려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 실험을 통해 발견해낸 자연과학 법칙과,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고 있는 인문 과학의 기준에 따라 모든 현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러한 기준을 바탕으로 성경을 이해하려하고 교회성장에 대한 계획을 세워 나갑니다. 이러한 과학의 조명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 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임하신 사건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도 완전히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전능 하신 하나님께서 작은 환경적 변화에도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아무런 저항 력 없는 간난아이로 태어나셨다는 것은 우리가 알기 쉬운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 탄생은 인간 이성 초월해 고대에도 이 문제로 교회가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이성을 지 배하던 생각 중에는, 인간의 육체란 단지 고기 덩이에 불과한 무가치한 것이 라 여기는 그것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젖은 사람들은 전능하시고 거 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육체를 입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습 니다. 이러한 태도는 언뜻 보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높이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사역의 기초를 뒤흔들려는 시도를 품고 있었 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방법에 대해 의심하는 생각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근대 자연과학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 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 났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과학자들이 하나님의 천지창조 의 역사성을 과학으로 입증해 내려 시도를 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과학적 사고가 교회에 들어와서 큰 자리 를 차지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장로교 목사들 중에서도 이를 부정하 는 자들이 있어서, 과학적으로 밝힐 수 없는 사실을 교회에서 진리인 것으 로 가르치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조직적으로 피력하기까지 했습니다. 1924년 의 오번선언서가 이에 해당하는 한 실례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과학적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진리 대신에 누 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을 신앙생활의 기준으로 삼으며, 이것을 세상에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같은 내용 대신에 누구나 쉽 게 알 수 있는 ‘긍정의 힘’이 나 ‘적극적 사고방식’과 같은 원리들이 교 회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적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논리가 기독교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자의 삶은 과학상식 초월해 그렇지만 교회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친히 육신의 몸을 입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 없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신비한 방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무죄하신 몸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심으로써, 교회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참된 인성 을 지니신 주님이 교회의 모퉁이돌이 되셨다는 사실은, 교회가 이 세상에서 굳건히 설 수 있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생활함 으로써 가장 가까이에서 눈과 귀로 목격한 주님의 생생한 증인들이 교회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거룩함과 역동성의 기초에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 고 우리에게 친히 오셨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사 실은, 과학과 이성적 사고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분명 거리끼고 미 련해 보 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의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비 밀스러운 임하심이,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교회의 참 씨앗이 되었다는 사실 을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uno-lee@hanmail.net
82 no image 하이델베르크<21> 우리는 영광스러운 노예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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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4 2006-11-15
하이델베르크 우리는 영광스러운 노예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33문>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분을 왜 ‘하나님의 독생자’라 부릅 니까? 답>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만 본질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기 때문입 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34문> 당신은 왜 그분을 ‘우리 주’라고 부릅니까? 답> 왜냐하면 그분이 금이나 은이 아니라 그의 보혈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 을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구속하셨고, 우리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 여 주의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태생적으로 죄악 된 본성을 가졌던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습니 다. 죄로 가득한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 임금인 마귀의 지배아래 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죄의 본성 아래 있었던 우리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방법으로 우리를 입양하심 으로써 양자로 삼 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분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기업을 상속할 수 있는 합법적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 의 자녀로써 그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특권입니다. 교회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라고 부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원래 우리는 마귀의 힘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어두움 속의 비참한 노예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값을 지 불하심으로써 우리를 그분의 소유로 삼았습니다. 이제 마귀의 노예가 아니 라 그리스도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의무, 즉 그리 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생의 의미를 가지는 사람이 되었 습니다. 새로운 주인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노예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한 참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노예로써 그분과 신비스러운 연합을 이룰 때 하나님의 자 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분이 우리를 양자로 삼는 의로 운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노예로써 그분의 명령에 얽매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양자로써 영광을 누리는 삶이 됩니다. 신약성경에는 하나님 자녀 됨의 신분을 자랑으로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로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 들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여 주여 하며,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의 일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 주님을 고백했지만 그분의 뜻을 알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신분의 획득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 만,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고백과 열심과 권능은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 중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써 권리를 주장하기 좋아 하지 만, 그리스도의 노예로서의 신분은 회피하려는 경향이 없는지 반성해 보 아 야 되겠습니다. 그 분을 ‘우리 주’라 부르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그의 노 예로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의 고난에도 기쁨으로 참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노예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우선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 지에서(롬 1:1),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갈 1:10), 그리고 그 의 사랑하는 제자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딛 1:1) 그 분의 명령에 조 건 없이 복종하는 노예 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고백하던 사람들이었습니 다. 그들은 종교개혁 시대에 부패한 기존 교회와 그 교회를 보호하는 국가 권력에 의해서 고통 받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위로가 필요 했습니다. 그들은 그 위로를 찾아냄으로써 기쁨으로 진리가운데서 고난을 이 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진리 안에서 고난도 극복해 그들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노예로써 그분 과 신비스러운 연합을 이루었다 는 사실이었습니다. 바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1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복종함 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을 누리게 되는 영광스러운 노예입니다.
81 no image 하이델베르크<20> 나는 크리스천인가?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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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6 2006-11-01
하이델베르크 나는 크리스천인가?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31문> 그분을 왜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부릅니까? 답> 왜냐하면 그분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임명을 받고 성신으로 기름 부음 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큰 선지자와 선생으로서 우리의 구 원을 위한 하나님의 감추인 경영과 뜻을 온전히 계시하시고,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우리를 구속하셨고, 성부 앞 에서 우리를 위해 항상 간구하시며, 또한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서 그의 말씀 과 성신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구원을 누리도록 우 리를 보호하고 보존하십니다. 32문> 그런데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라 불립니까? 답>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기 때문입니 다. 나는 선지자로서 그의 이름의 증인이 되며, 제사장으로서 나 자신을 감 사의 산 제물로 그에게 드리고, 또한 왕으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자 유 롭고 선한 양심으로 죄와 마귀에 대항하여 싸우고, 이후로는 영원히 그와 함 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가리켜 크리스천이라 부릅니다. 사람들은 왜 우리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를까 한번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왜 스스로를 크 리스천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을까 자문(自問)해 봅니다. 이에 대한 간단 한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크리스천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방면에서 어떤 모양으로 드러나는지에 관해서는 다 시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천 의식 재고해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크리스천으로 여기는 이유에 관해서는, 아마 그들과 는 달리 일요일이 되면 만사를 제쳐놓고 교회에 가는 것이 우리를 크리스천 으로 보는 가장 큰 이유일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흥청망청 술 마 시는 일도 절제하고 거짓말도 상대적으로 적게 하여 도덕적으로 좀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로 비추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은 우리가 교회에 연보를 하는 것을 의아해 하며 그것을 크리스천의 조건으로 볼지 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의 구석진 곳을 돌아보는 사 랑의 정신이야말로 크리스천이 소유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 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크리스천이라 부르고 있으 며, 어쩌면 우리도 크리스천을 규명하는 이러한 기준들에 만족해할지 모르겠 습니다. 사도신경에서는 주님을 예수라 칭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라 칭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리스도(Christ)를 따르기 때문에 크리스천(Christian)입니 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지적하는 크리스천의 의미는 일반적 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기준과는 다른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천은 바 로 그분의 ‘기름부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2문). 그리스도라는 말이 바로 ‘기름 부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 름 부은 자는 어떤 특별한 직무를 위해 구별되고 권능을 부여받은 자를 의미 합니다. 구약 시대 때 이런 특별한 직무를 위해 기름 부은 자들은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보여주신 가장 큰 선지자였습니다. 예수 님은 죄없는 자신의 몸으로 완전한 제사를 드린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 은 그의 왕국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고 보존하시는 권세 있는 왕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그의 기름부으심, 즉 선지자 되심과 제사장 되심 과 왕 되심에 참여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선지자인 우리의 입과 행동 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하고, 제사장인 우리는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과 교통해야 하며, 왕인 우리는 교회를 기웃거리 는 죄악들과 싸워서 우리의 왕국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직무 를 다하는 사람이 크리스천인 것입니다. 알맹이 없는 크리스천 탈피해야 그리스도는 메시아와도 같은 말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오랫동안 그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대다수의 백성들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써 다른 나라로부터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이 땅에서 영광스러운 백성이 될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도래한 메시아의 모습은 그들의 생각 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했 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속성을 오해한 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는 크리스천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의 속성을 모르는 채 메시아를 대 망했던 것처럼 우리는 크리스천의 의미를 명확히 모르는 채 크리스천으로 살 아가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속에서 선지자적 역할과 제사장적 역할, 그리고 왕적 역할 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에 대해 크리스천에 대해 잘 못 알고 있는 경우일 것입니다.
80 no image 하이델베르크<19> 하나 더했을 뿐이지만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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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5 2006-10-18
하이델베르크 하나 더했을 뿐이지만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발행인 29문> 왜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 곧 구주라 부릅니까? 답> 그가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고, 또 그분 외에는 어디에 서도 구원을 찾아서도 안 되며 발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30문> 그렇다면 자신의 구원과 복을 소위 성인에게서, 혹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데서 찾는 사람들도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그들은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말로는 자랑하지만 행위로 는 부인합니다. 예수가 완전한 구주가 아니든지, 아니면 참된 믿음으로 이 구주를 영접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에게서 찾든지 둘 중의 하나만 사실입니다. 바울 일행이 구브로와 소아시아 남부지역 선교여행을 마치고 파송 교회인 안디옥교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믿음의 형제들과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었을 때 유대로부터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으로 와서 형 제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 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 가르쳤습니다(행 15:1). 복음과 할례 동반할 수 없어 이들은 예루살렘교회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예루살렘 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그들을 가리켜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라 말하 고 있기 때문입니다(행 15:24). 바울과 바나바가 이들로 인해 발생한 다툼으 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리스도를 믿는 바리새파 중에서 그들과 동일 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행 15:5), 지금 안디옥에 올라와 할례를 가르치는 자들은 이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유대인들을 편의상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유대교에 충실한 유대인들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믿어 새 시대 교회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 식하던 유대인들입니다. 셋째는 새 시대의 교회에 속해 있으나 유대교적 관습을 여전히 지니고 있던 유대인들입니다. 바울의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돌로 바울을 쳤던 사람들 은 첫 번째 부류의 유대인들이며, 안디옥에 올라 와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 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바로 세 번째 부류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주(主)되심을 거부하던 사람들 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고백하고 믿었던 사람들이었 을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단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아 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다 른 하나를 덧붙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사도의 평가는 가혹했습니다. 그들을 일컬어 불필요한 것을 강조하는 사람이라 하지 않고 ‘거짓 형제’(갈 2:4)라고 부 르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에 관하여 오직 그리스도 만이 아니라 다른 것을 덧붙였을 때, 그들의 가르침 중 일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즉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옳고 할례에 대한 주장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리 스도에 대한 고백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이를 선명하게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 한 유의 사람들에 대해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말로는 자랑하지만 행위로 는 부인하는 자들’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30문). 종교개혁 당시 부패한 교회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덧붙였습니다. 교황 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 그러하고, 교회의 규례에 대한 절대화도 그러합니 다. 심지어 면죄부까지 그러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개혁가들은 이 러한 것들은 관행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로 인식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낼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리 고 그것에 다른 것을 덧붙인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자체가 거짓인 것입 니다. 오늘 우리를 잘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인가, 아니 면 그리스도에 다른 무엇인가를 덧붙이고 있는가? 그것이 열심일 수도 있고 관습이나 제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열심’으로 대신할 수 없어 만약 교회가 그리스도 외에 우리를 죄로부터 벗어나게 할 다른 무엇을 함께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연약한 교회가 아니라 거짓교회일 수 있다는 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9문과 30문의 교훈입니다.
79 no image 하이델베르크<18> 하나님의 섭리와 ‘교회보호형’ 타협가들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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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7 2006-09-27
하이델베르크 하나님의 섭리와 ‘교회보호형’ 타협가들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27문>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입니까? 답> 섭리란 하나님의 전능하고 언제 어디나 미치는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의 손으로 하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 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잎새와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먹을 것 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참으로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그의 손길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28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로써 여전히 보존하심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우리는 어떠한 역경에서도 인내하고, 형통할 때에 감사하며, 또한 장 래 일에 대해서도 우리의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신뢰하여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모 든 피조물이 완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므로 그의 뜻을 거슬러 일어나거 나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다른 여러 나라의 교회들이 부러워할 만큼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지금의 모습을 이루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 었을 것입니다. 두고두고 회자할 만큼 좋은 일이 있었던가하면 아직까지 그 곳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아픔도 있었습니다. 그 아픈 과거들 중의 하나 는 아마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던 시대에 있었던 신사참배 문제일 것입니 다. 여전히 아픈 추억 ‘신사참배’ 이 문제에 대해 외국 선교사들을 포함한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올바른 시각 을 가지려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의 압력은 거세게 밀어닥쳤습니다. 결국 1938년 평양에서 개최된 제27회 한국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 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공적인 굴복이었습니다. 그 후, 위험을 무 릅쓰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본이 강 요한 그 우상숭배정책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신사참배에 동조하던 우리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에는 몇몇 유형이 있었습니 다. 예컨대 황국신민화형, 현실순응적 융통형 그리고 형식적 순응형 등이 그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선동하는 일본에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있 었는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비록 잘못인줄 알지만 당면한 현실 속에서 그것 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또 하나의 유형이 있는데 바로 ‘교회보호 형’입니다. 이들은 신사참배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지만 계속 반대를 할 경우 일본의 권력에 의해 자칫 교회가 말살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 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속을 위해서는 적절한 타협이 불가피한 것으로 생 각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당시의 현실을 직시한 교회를 사랑하 는 사람들의 논리적 발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교회보호형 타협가들이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 님의 섭리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보듯이, 그것은 천지를 창조하 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특별한 원칙과 목적에 따라 우주만물을 지탱하고 이끌 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한 걸음 나아가 잎새와 풀, 비와 가뭄에까지 미치는 세밀한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교회를 보살피기 위함이라 는 고백입니다. 벨직신앙고백서에 서는 교회에 관해서 아주 특별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인류의 시작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존재할 것이라는 고백입 니다. 비록 어떤 경우에는 작아 보이고 사람들의 눈에 아무 것도 아닌 것처 럼 보이더라도 악한 세상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으 며 유지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섭리 대신할 수 없어 그러나 ‘교회보호형’ 신사참배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종말로 이끌기 위 해 모든 만물을 그분의 섭리 아래에 두셨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했던 것 같 습니다. 그들은 삼엄한 현실 속에서 교회를 보호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의 지하기보다는 태생적으로 죄악된 우리 스스로의 생각 속에서 그 해답을 찾으 려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에서도 교회를 존속시키려는 인본주의적 모습을 볼 수 있 습니다. 다원화되고 물질중심주의적인 이 세상에서 교회가 생존할 수 있는 다양한 타협적 묘안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변하지 않는 진리를 사수하고 악한 세상에 대하 여 그것을 선포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앞으 로도 많은 시련을 겪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련을 어떻게 이겨나갈까 미리 낙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께서 우주만물에 대한 그의 섭리를 통해 교회를 보호하실 것을 신뢰하기 때 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역경의 시대동안 인내하고 감사할 수 있었 던 주기철, 한상동, 손양원, 함일돈(Floyd E. Hamilton), 한부선(Bruce F. Hunt)과 같은 신앙의 선배들을 기억합니다.
78 no image 하이델베르크<17> 그들은 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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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1 2006-09-15
하이델베르크 그들은 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했는가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26문>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나는 믿사오며”라고 고백 할 때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아무것도 없는 중에서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의 영원한 작정 과 섭리로써 이 모든 것을 여전히 보존하시고 다스리심을 믿으며, 이 하나님 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나는 믿습니다.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그가 나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 워 주시며, 이 눈물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당하게 하시는 어떠한 악도 협력 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그리하실 수 있고, 신실하신 아버지이기에 그리하기를 원하십 니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전능하다 는 것은 무엇 이든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하나님 의 전능하심으로부터 ‘특별한’ 도움이나 혜택을 바라는 때가 많은 것 같습 니다. 능력으로 해결되는 혜택 바라기도 특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나 무엇인가 절실히 필요할 때, 전능하 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바람에 발맞추 어 간혹 선교지에서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과연 하나 님은 전능하신 분이구나 생각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특이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호칭 중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는 부분, 즉 ‘전능하신 하나 님’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는 과연 어떠한 때였을까요? 창세기에서 하나님을 ‘전능자’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은 놀랍게도 하나님 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주거나 어떤 극적인 구출을 연출하는 장면이 아니 라 오히려 그분의 구원 계획을 보여주는 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그를 열국의 아비 가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창 17:1-4). ‘전능하신 하나님’이 야곱으로 하여금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고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겠다고 합니다(창 28:3-4). 야곱에 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많은 국민이 그에게 서 나고 그의 허리에서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창 35:10-11).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셨다고 합니다(창 48:3- 4). 그분은 구속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고백하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알았던 것 같습니 다. 26문에 대한 답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앞부분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고 뒷부분은 그의 전능하심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입니 다. 이 두 부분이 만나는 중심에는 바로 구속 역사의 핵심인 그리스도가 있으 며, 그로 말미암아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음을 고백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도 아무 의미 가 없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작성하고 고백하는 당시는 ‘눈물 골짜기 같은 세 상에서 악을 당하던’ 시대였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간직한 성도들이 억압 자들로부터 적대적인 눈초리를 받아야 했을 뿐 아니라 칼과 몽둥이의 위협까 지도 당해야했던 고난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들의 신앙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이유 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의 백성을 경영해 나가시는 전능하심을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고난을 당해야 했던 바울의 고백도 동일했습니다. 그를 죽음에 처하 도록 한 대적자들로부터 벗어났을 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할 수도 있었 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 역시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에서 그분의 전능 하심을 찬양했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되 었다는 그 사실을 ‘전능하신 주’께서 알려주셨다고 합니다(고후 6:16- 18). 우리는 어떠한 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 니다. 우리의 눈에 특별하게 보이는 것들을 기대함으로써 하나님의 전능하심 을 고백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우리 자신 의 모습을 봅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구속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그분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그것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크 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능력은 구원하심에 있어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할 때 교회 밖에서 의미하는 ‘전 능’과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77 no image 하이델베르크<16> 사도신경은 종말론적 고백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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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9 2006-08-30
하이델베르크 사도신경은 종말론적 고백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해인 23문>사도신경의 조항들은 무엇입니까? 답>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나는 믿사오며, 그의 독생자 우 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믿사오니, 그분은 성신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으며,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셨고,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사흗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않아 계시며,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 다. 성신을 믿사오며, 거룩한 보편적 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사함과 육신 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24문>이 조항들은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답>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 둘째, 성 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 셋째, 성신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에 관한 것입니 다. 2 5문>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시는데, 당신은 왜 삼위, 곧 성부 성자 성신을 말합니까? 답>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말씀에서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 다. 곧 이 구별된 삼위는 한 분이시오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도신경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성부하나님의 사역, 성자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성령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삼위일체 하나 님의 사역에 대한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심위일체적 고백 삼위일체에 관해서는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구속의 역사를 거 치면서 많은 계시들이 빛 가운데 밝혀졌지만, 여전히 우리의 눈에 가려진 신 비로움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완전히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인본주 의적 시도는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이단이 생겨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이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교회의 상(象)을 확증하기 위해 고의 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속성을 왜곡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5문의 대답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 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에서 그렇게 말씀하 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경말씀 앞에 선 칼빈의 자세를 되새기게 합 니다. 즉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지 않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비록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하 늘로부터 임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기꺼이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그렇지만 인간 중심적 사고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자세에서 벗어나도 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수많은 경건 한 모양의 적(敵)들과 싸워나가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를 고백적으 로 받아들일 때 우리 신앙에 큰 위로와 유익이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할 수밖에 없도록 하고, 그 섭리 속에 들어있는 그의 백성인 우리는 필연적 위로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함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큰 유익이 있습 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종말론적 긴장감을 일깨우도록 한다는 것 입니다.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그리고 성령하나님의 사역들은 종말론적입 니다. 삼위 하나 님의 사역에 대한 고백 구약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고 예표 되심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종말론 적 예언이었으며, 그의 성육신은 그것들의 성취였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 래는 말세의 시대를 알리는 징조였으며 새 시대의 이스라엘, 즉 교회가 존재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새 시대의 교회는 세상 끝 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공동 체입니다. 그때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이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완성된 종말을 향해 전진하는 교회를 확장시키며 보호하고 계십니다. 삼위일 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이미 시작된 종말이 완성된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역사 속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합니다. 사도신경은 지난 날 하나님의 행하셨던 일들을 회고하는 암송문이 아닙니 다. 교인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지식들을 단지 일목 정연하게 압축해 놓 은 요약문도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하나 짚어 나가 는 사도신경은 종말론적 고백입니다. 종말의 완성을 소망하며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교회가 서 있는 구속 사적 위치를 찾게 하는 고백입니다. 그 역사적 사명에 따 라 신부(新婦)로서 의 순결한 모습을 이루기 위해 전투하도록 하는 교회의 역동적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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