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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15>

사도신경만으로 충분한가?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22문>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답>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복음은 보편적이고 의심
할 여지없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조항인 사도신경이 요약하여 가르쳐 줍니
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우리가 신앙하는 믿음을 가장 잘 집약한 내용으로 생각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며 보편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신앙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
과 같은 훌륭한 고백서를 가진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보편적 신앙의 기준 ‘사도신경’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2문에 대한 대답을 읽으면서 우리가 꼭 기억해
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에 대한 요약으로
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수많은 값진 물건들을 담
고 있는 상자와도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네모반듯한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갖가지 소중한 물건을 담고 있는 상자입니다. 만일 이 상자를 값을
지불하고 사려고 한다면, 단지 상자의 값만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상자 속
의 모든 물건들의 값까지도 지불해야 하는 아주 값진 존재인 것입니다.
때로 상자 속에 있는 물건을 보지 못해서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
우도 있습니다. 20세기 초 미국북장로교회에서는 “사도신경으로 충분하다”
라는 말로 인해 논쟁이 일어났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북장로교회 선
교부에서의 선교 본질에 관한 의견 차이로 인해 메이첸(J. Gresham Machen)
의 주도로 장로교 해외독립선교부(1933년)가 태동할 즈음의 일입니다. 이러
한 일이 발생한 배경에는 20세기 초 유럽에서 밀려들어온 자유주의와 세속주
의의 여파로 일어난 신학적 논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가 처한 상황은 여러 장로교 목사들이 서명했던 오번선언서(1924
년)를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다섯 가지 근본 원칙들
즉 성경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속죄사역, 육체부활, 예수님의 초자
연적 기적능력과 같은 것들은 모두 이론에 불과
하며 교인들에게 이들을 믿도
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사상
에 대하여 어떤 이는 포용하는 입장을 그리고 다른 이들은 이를 결코 수용
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포용주의의 중심에는 미국북장로교회 선교부를 대표하는 로버트 스피어
(Robert Speer)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오번선언서에 동의를 했다 하더라
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포용해야 하며 그들을 선교사로 보낼 수 있
다고 했습니다. 스피어가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의 말을 빌려 주
장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신경으로 충분하다”였습니다.
이 말은 신조와 사상을 통해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배척할 것
이 아니라 비록 자유주의적이거나 알미니안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
더라도 사도신경을 말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모두 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의
표출이었습니다.
스피어는 교리와 신학에 대한 논쟁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에
손상만 줄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복잡한 교리에 대한 논의보다 서로 협력하
여 복음전하는 일에 전력해야 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와
같은 포용주의
적 입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장로교 해외독립선교부
가 태동했습니다.
사도신경을 포용주의의 실천에 이용했던 사람들은 사도신경이라는 상자 속
의 내용물들을 보지 못한 채 상자의 겉모습만 바라보았습니다. 겉모양이 비
슷한 상자는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내용의 깊이를
알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상자 속의 소중한 것을 잘 보지 못하는 실수는
우리 중에도 흔히 있을 수 있습니다. 늘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도 그 내용
이 교회적 삶에서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경우일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말 하나 하나를 교회는 성경 말씀의 토대 위에서 그 의미를 해
석해 나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의 해석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교회
가 역사 속에서 발전해 나감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해 나가야 할 것입니
다. 이를 통해 복음에 약속된 것들을 더 잘 알아가고 우리 교회는 더욱 역동
적인 모습을 갖추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신앙의 선
배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사도신경이라는 상자 속에 들어있는 보물
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그 뜻
을 상세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겉모양만으로 판단할 수 없어

스피어와 부쉬넬은 사도신경을 통해서 다른 가르침에 대한 교회의 포용주의
적 입장을 모색해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살펴보게 될 사도신경 속에
녹아있는 내용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갈 때 우리는 세상과 거짓 가르침에 대
해 더욱 구별되는 교회의 속성을 발견해 나갈 것입니다.

존귀한 자의 미소

은혜, 축복, 섬김, 평안, 강건, 승리, 담대, 화평… 한 낱말 한 낱말 천천
히 소리 내면서 그 뜻을 헤아리면 이처럼 아름다운 말이 없습니다. 입술로
소리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에 결 고운 물빛 무늬가 퍼져가는 것만 같습
니다. 그런데 그런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나인 ‘존귀’라는 말은 유독 내
영혼에 와 닿지 않는 불편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슴 저리는 낱말들 많아

저번 주일 목사님은 ‘성도들은 존귀한 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일점일획
도 틀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귀하게 선택받은 자라고 말
씀하였습니다. 그런 관점이라면 나도 존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그렇지만 그 말씀에 ‘아멘’하는
마음의 한편에서는 과연 그렇게 쉽게
‘아멘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지금도 불교와 미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는 점을 보고 온 날
이면 어린 시절의 나에게 미래에 대한 축복의 말씀보다는 염려를 가장한 암
울한 말씀을 많이 하였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그런 말이 딸의 마음에 오
래도록 남아 있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며 실제로 그러리라고는 상상도 하
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소심하고 상처를 잘 받는 나는
그런 말을 가슴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일이 찾아올 때
마다 그 말을 끄집어내며 존재의 하찮음을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
로 만나기 전까지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는 비록 횟수는 줄어들었을지 모르나 여전히 그 어두움은 오래되어 익숙한
것으로 내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지난 주간도 부부싸움으로 마음의 평정을 잃었습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면
나는 한동안 입과 귀를 다물어버립니다. 그런 채로 얼마 동안 시간이 흐르
면 당연히 나를 채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라 존재의 하
찮음에 대한 자기연민뿐입니다.
잠시 목사님의 설교가 떠올랐다가도 ‘존귀’와는 거리가 먼 내 삶을 되새기
고 말뿐입니다. 그런 마음을 주님께서 모르실 리 없습니다. 어떻게든 그 어
두움에서 이 연약한 자를 건져내고 싶어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
회를 주셨습니다.
교회 식구들과 함께 계곡 나들이를 가던 날 내게 맡겨진 일은 사진 촬영이었
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명이 한데 어울려 있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삼삼오
오 계곡에 발 담그고 있는 모습, 평상에 누워 편안하게 얘기하는 모습, 이런
저런 게임을 하는 모습….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한분 한분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찍고 있었습니
다. 이왕이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찍어드리기 위하여 5분, 10분을 기다리
기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쑥스럽다며 그만
찍으라고 하신 분들도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오기까지 찍고 지우
고 찍고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사진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놀랐
습니다. 촬영 실력이 신통치 않은 사람이 찍었다고 보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

도로 은혜로운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찍어주신 게 틀림없었습니
다. 그리고 더 놀란 것은 성도들의 얼굴에 퍼져 있는 환한 미소였습니다.
그 미소야말로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골짜기에서
고생하며 한숨짓고 눈물 흘리던 사람일지라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불려온 자
들은 존귀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알아차렸습니다. 내가 성도들의 미소를 보며 그들을 존귀한 자로 확
신할 수 있듯 하나님을 바라며 웃고 있는 나를 어느 누군가가 바라볼 때에
또한 나를 존귀한 자로 여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설교의 한 구절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내가 나를 바라볼 때에는 한심하고 부족해서 도저히 존귀한 자라 할 수 없
지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볼 때,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바라볼 때
에는 그 구속사에 당당하게 쓰임 받고 있는 존귀한 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
다.”
여전히 내 안의 어두움을 떨어내지 못하는 이 미련한 자에게 주님은 이렇게
정확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그 해답은 먼 데 있지 않았습니다. 주일 설교에
그리고 동역하며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내 곁의 성도들 얼굴에 있었습니
다. 행여 똑같은 잘못을 앞으로 또 저지를까 하여 이리도 가까운 곳에, 이리
도 확실한 해답을 찾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 얼굴 보며 해답 찾아

이제 한 가지 확신을 마음에 품습니다. 언젠가 어머니도 예수님을 만나게 되
는 날,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이 주지 못했던 존귀한 자의 미소를 보란듯이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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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사도신경만으로 충분한가?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22문>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답>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복음은 보편적이고 의심 할 여지없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조항인 사도신경이 요약하여 가르쳐 줍니 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우리가 신앙하는 믿음을 가장 잘 집약한 내용으로 생각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며 보편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신앙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 과 같은 훌륭한 고백서를 가진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보편적 신앙의 기준 ‘사도신경’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2문에 대한 대답을 읽으면서 우리가 꼭 기억해 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에 대한 요약으로 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수많은 값진 물건들을 담 고 있는 상자와도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네모반듯한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갖가지 소중한 물건을 담고 있는 상자입니다. 만일 이 상자를 값을 지불하고 사려고 한다면, 단지 상자의 값만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상자 속 의 모든 물건들의 값까지도 지불해야 하는 아주 값진 존재인 것입니다. 때로 상자 속에 있는 물건을 보지 못해서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 우도 있습니다. 20세기 초 미국북장로교회에서는 “사도신경으로 충분하다” 라는 말로 인해 논쟁이 일어났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북장로교회 선 교부에서의 선교 본질에 관한 의견 차이로 인해 메이첸(J. Gresham Machen) 의 주도로 장로교 해외독립선교부(1933년)가 태동할 즈음의 일입니다. 이러 한 일이 발생한 배경에는 20세기 초 유럽에서 밀려들어온 자유주의와 세속주 의의 여파로 일어난 신학적 논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가 처한 상황은 여러 장로교 목사들이 서명했던 오번선언서(1924 년)를 통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다섯 가지 근본 원칙들 즉 성경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속죄사역, 육체부활, 예수님의 초자 연적 기적능력과 같은 것들은 모두 이론에 불과 하며 교인들에게 이들을 믿도 록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사상 에 대하여 어떤 이는 포용하는 입장을 그리고 다른 이들은 이를 결코 수용 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포용주의의 중심에는 미국북장로교회 선교부를 대표하는 로버트 스피어 (Robert Speer)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오번선언서에 동의를 했다 하더라 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포용해야 하며 그들을 선교사로 보낼 수 있 다고 했습니다. 스피어가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의 말을 빌려 주 장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신경으로 충분하다”였습니다. 이 말은 신조와 사상을 통해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배척할 것 이 아니라 비록 자유주의적이거나 알미니안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 더라도 사도신경을 말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모두 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의 표출이었습니다. 스피어는 교리와 신학에 대한 논쟁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에 손상만 줄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복잡한 교리에 대한 논의보다 서로 협력하 여 복음전하는 일에 전력해야 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이와 같은 포용주의 적 입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장로교 해외독립선교부 가 태동했습니다. 사도신경을 포용주의의 실천에 이용했던 사람들은 사도신경이라는 상자 속 의 내용물들을 보지 못한 채 상자의 겉모습만 바라보았습니다. 겉모양이 비 슷한 상자는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내용의 깊이를 알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상자 속의 소중한 것을 잘 보지 못하는 실수는 우리 중에도 흔히 있을 수 있습니다. 늘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도 그 내용 이 교회적 삶에서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경우일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말 하나 하나를 교회는 성경 말씀의 토대 위에서 그 의미를 해 석해 나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의 해석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교회 가 역사 속에서 발전해 나감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해 나가야 할 것입니 다. 이를 통해 복음에 약속된 것들을 더 잘 알아가고 우리 교회는 더욱 역동 적인 모습을 갖추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신앙의 선 배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사도신경이라는 상자 속에 들어있는 보물 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그 뜻 을 상세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겉모양만으로 판단할 수 없어 스피어와 부쉬넬은 사도신경을 통해서 다른 가르침에 대한 교회의 포용주의 적 입장을 모색해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살펴보게 될 사도신경 속에 녹아있는 내용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갈 때 우리는 세상과 거짓 가르침에 대 해 더욱 구별되는 교회의 속성을 발견해 나갈 것입니다. 존귀한 자의 미소 은혜, 축복, 섬김, 평안, 강건, 승리, 담대, 화평… 한 낱말 한 낱말 천천 히 소리 내면서 그 뜻을 헤아리면 이처럼 아름다운 말이 없습니다. 입술로 소리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에 결 고운 물빛 무늬가 퍼져가는 것만 같습 니다. 그런데 그런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나인 ‘존귀’라는 말은 유독 내 영혼에 와 닿지 않는 불편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슴 저리는 낱말들 많아 저번 주일 목사님은 ‘성도들은 존귀한 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일점일획 도 틀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귀하게 선택받은 자라고 말 씀하였습니다. 그런 관점이라면 나도 존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그렇지만 그 말씀에 ‘아멘’하는 마음의 한편에서는 과연 그렇게 쉽게 ‘아멘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지금도 불교와 미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는 점을 보고 온 날 이면 어린 시절의 나에게 미래에 대한 축복의 말씀보다는 염려를 가장한 암 울한 말씀을 많이 하였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그런 말이 딸의 마음에 오 래도록 남아 있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며 실제로 그러리라고는 상상도 하 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소심하고 상처를 잘 받는 나는 그런 말을 가슴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일이 찾아올 때 마다 그 말을 끄집어내며 존재의 하찮음을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 로 만나기 전까지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는 비록 횟수는 줄어들었을지 모르나 여전히 그 어두움은 오래되어 익숙한 것으로 내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지난 주간도 부부싸움으로 마음의 평정을 잃었습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면 나는 한동안 입과 귀를 다물어버립니다. 그런 채로 얼마 동안 시간이 흐르 면 당연히 나를 채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라 존재의 하 찮음에 대한 자기연민뿐입니다. 잠시 목사님의 설교가 떠올랐다가도 ‘존귀’와는 거리가 먼 내 삶을 되새기 고 말뿐입니다. 그런 마음을 주님께서 모르실 리 없습니다. 어떻게든 그 어 두움에서 이 연약한 자를 건져내고 싶어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 회를 주셨습니다. 교회 식구들과 함께 계곡 나들이를 가던 날 내게 맡겨진 일은 사진 촬영이었 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명이 한데 어울려 있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삼삼오 오 계곡에 발 담그고 있는 모습, 평상에 누워 편안하게 얘기하는 모습, 이런 저런 게임을 하는 모습….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한분 한분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찍고 있었습니 다. 이왕이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찍어드리기 위하여 5분, 10분을 기다리 기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쑥스럽다며 그만 찍으라고 하신 분들도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오기까지 찍고 지우 고 찍고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사진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놀랐 습니다. 촬영 실력이 신통치 않은 사람이 찍었다고 보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 도로 은혜로운 사진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찍어주신 게 틀림없었습니 다. 그리고 더 놀란 것은 성도들의 얼굴에 퍼져 있는 환한 미소였습니다. 그 미소야말로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골짜기에서 고생하며 한숨짓고 눈물 흘리던 사람일지라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 불려온 자 들은 존귀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알아차렸습니다. 내가 성도들의 미소를 보며 그들을 존귀한 자로 확 신할 수 있듯 하나님을 바라며 웃고 있는 나를 어느 누군가가 바라볼 때에 또한 나를 존귀한 자로 여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설교의 한 구절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내가 나를 바라볼 때에는 한심하고 부족해서 도저히 존귀한 자라 할 수 없 지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볼 때,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바라볼 때 에는 그 구속사에 당당하게 쓰임 받고 있는 존귀한 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 다.” 여전히 내 안의 어두움을 떨어내지 못하는 이 미련한 자에게 주님은 이렇게 정확한 해답을 주셨습니다. 그 해답은 먼 데 있지 않았습니다. 주일 설교에 그리고 동역하며 한 분 하나님을 섬기는 내 곁의 성도들 얼굴에 있었습니 다. 행여 똑같은 잘못을 앞으로 또 저지를까 하여 이리도 가까운 곳에, 이리 도 확실한 해답을 찾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 얼굴 보며 해답 찾아 이제 한 가지 확신을 마음에 품습니다. 언젠가 어머니도 예수님을 만나게 되 는 날, 세상의 그 어떤 즐거움이 주지 못했던 존귀한 자의 미소를 보란듯이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75 no image 하이델베르크<14> 회복해야 할 믿음의 전투성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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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4 2006-07-26
하이델베르크 회복해야 할 믿음의 전투성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20문> 그러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멸망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 든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답>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은덕을 받 아들이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습니다. 21문>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답>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확실한 지식이며, 동시에 성신께서 복음으로써 내 마음속 에 일으키신 굳은 신뢰입니다. 곧 순전히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 문에 하나님께서 죄사함과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나에 게도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된 종교개혁 시대에 강조되던 원칙들 중 하나 는 바로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은 교회가 설립되던 시기부터 고백되어온 중요한 원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 늘날 많은 경우 믿음이 단지 관념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 니다. 관념적 믿음 의미 없어 초대교회의 믿음을 가진 성도, 즉 신자(信者)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 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세기 당시 ‘주’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 되었는데 가장 쉽게는 단순히 존경을 나타내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라는 단어는 단순한 존칭 이 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의미를 지 닌 뜻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일컫는 의미였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백 성들은 여호와라는 말을 거룩하게 여겨서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서 여호와를 지칭할 때 다른 단어를 사용하곤 했습니다. 예컨대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인 70인 역에서는 여호와를 지칭할 때 ‘주’라는 말을 사용했습니 다. 그러므로 유대적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 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1세기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스스로를 큰 곤경 속으로 몰아넣는 위험한 행위였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 나님으로 선언함으로써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저 주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선언하는 것 역 시 죽음을 동반할 수도 있는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강력한 고백적 선포는 일부 유대인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 릎 꿇게 했지만, 많은 이들로 하여금 분노의 칼을 갈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 습니다. 당시 ‘주’라는 단어가 이것과는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그것 은 바로 로마제국의 황제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1세기 당시 사람들은 로마 제국을 ‘세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로마제국은 전 세계를 호령하는 거대한 국가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 어떤 나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불멸 의 제국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로마제국의 심장부에는 바로 황제가 있었으 며 그 황제는 세상의 어떤 존재보다 뛰어난 존귀한 ‘주’로 받들어지고 있 었습니다. 로마인들이 그리스도를 알았을 때 그분을 ‘주’로 고백하는 일은 결코 쉬 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세상의 가장 위대한 존재 인 로마황제보다 더 큰 이로 선언하는 것이기 때 문입니다. 황제숭배라는 이 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그리스도를 세상의 유일한 ‘주’로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시민으로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 는 것은, 세상의 지극히 높은 자로서의 황제를 거부함으로써 핍박과 갈등을 예견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올바른 믿음을 통 하여 세상의 보편적 가치관을 부정함으로써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켜 나갔습 니다. 그들은 ‘주’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모습을 이루는데 있어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에도 말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직면했던 믿음의 문제는 관념적이거나 단지 지 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위험까지고 감수해야 하는 삶의 문제였습니 다. 오늘날 우리 교회 역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 습니다. 그렇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의 고백이 가졌던 믿음의 전투성을 우리 가운데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교회를 핍박하지 않으며 교회에 신앙의 자유를 주기 때문에 그렇다고 변호할 수도 있을 것 입 니다. 세상 속에 안주하고 있는 교회 그렇지만 세상의 가치관이 날로 사악해져 가고 세상의 수많은 인본주의적 사상과 아이디어들이 교회로 침투해 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전투성을 잃은 우리의 믿음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 답의 20, 21문에 관하여 우리는 지식과 삶을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태도로 묵 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74 no image 하이델베르크<13> 교회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는가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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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3 2006-07-13
하이델베르크 교회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는가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19문> 당신은 이것을(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보자이심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처음에 낙원에서 친 히 계시하셨고, 후에는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하셨으며, 또한 율법 의 제사들과 다른 의식들로써 예표 하셨고,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 몇 달 전 평소 알고 지내던 성경번역 선교사님께로부터 소포꾸러미 하나를 받았습니다. 받아드는 순간 그 내용물은 두툼한 책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 다. 무슨 책일까 생각하며 포장지를 뜯어보았습니다. 딱딱한 책 표지에는 제 가 알지 못하는 글씨로 제목인 듯 무엇인가가 쓰여 있었습니다. 다음 장에 쓰여 있는 그 선교사님의 짧은 설명으로 그것이 무슨 책인지 알았을 때 마음 속에는 알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선교사님이 소속한 팀에서 번역을 완성한 A국 방언의 구약 성경책이었습니다. 글씨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구약성경의 순서를 따라가 면서 지금 즈음은 모세오경이 지났겠구나, 문장의 배열을 보니 시편이겠구 나 생각하며 천천히 한장 한장 넘겨보았습니다. 이제까지 모국어로 된 구약 성경을 가지지 못했던 그곳 성도들이 이제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한 신앙생활을 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 한쪽 편에서는 걱정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언어로 된 구약성경책을 받아든 사람들이 앞으로 말씀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 나가 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잘 못 이해함으 로써 말씀의 본래 의미가 퇴색되고 교회의 본질마저 왜곡되는 경우를 이미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은 지금까지 머릿속에 생 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 승리했던 감동적인 이야기, 삼 손이 빠져 들었던 유혹에 관한 이야기, 이국 땅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던 다니엘의 이야기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통해서 도덕적 교훈을 얻 으려 노력했던 우리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인하여 용감해야 하고 한 가지 이상의 특별한 기술을 연마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삼손과 같은 유혹에 절 대 빠지지 않도록 늘 노력해야할 뿐 아니라 다니엘의 성실한 신앙을 본받아 하루 세 번 이상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성경의 이야기들로부터 받은 교훈을 실천에 옮김으로 써 우리 일상의 모습이 좀 더 좋아질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성경 이해를 통해서는 흔히 놓칠 수밖에 없는 성경의 본질이 있었습 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역사의 진행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9문은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예수 그리스도이 심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복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성경 전체 내용이 통일 성을 가지고 증거 하는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 스도를 빼고는 성경말씀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 님이 구약의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교제하실 때 그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 역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구약 제사의 제물은 바로 완전한 제사에 대 한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오시게 하 려고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셋을 주신 것도, 아브라함의 거짓말에도 불 구하고 사라를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보낸 것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오시 게 하시는 그분의 사역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우리의 삶을 위한 도덕적 교훈을 제공해주는 사건들이 나열된 책이 아닙니다. 선하거나 때로는 악한 인물들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 는 책도 물론 아닙니다. 성경전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꾸준히 말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머리로 하는 그의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막 받아든 A국 백성들도, 이미 오랫동안 성경책을 지녀왔던 우 리도, 그리스도가 온전히 자리한 올바른 방법으로 말씀을 이해하여 참된 교 회를 이루어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자칫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자리하지 않은 교회로 전락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말씀 속에서 예 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한, 그가 세우신 교회 의 본질도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73 no image 하이델베르크<12>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천상의 공동체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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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9 2006-06-28
하이델베르크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천상의 공동체인 교회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16문> 중보자는 왜 참 인간이고 의로우신 분이셔야 합니까? 답> 하나님의 의는 죄지은 인간이 죗값 치르기를 요구하나, 누구든지 죄인 인 사람으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7문> 중보자는 왜 동시에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까? 답> 그의 신성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그의 인성에 짊어지시며, 또한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18문> 그러나 누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고 의로우신 그 중보자 입니까? 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 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분입니다. 죗값을 온전히 치름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 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어야 했습 니다. 참 인간이어야만 모든 사람을 대 표할 수 있으며,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교리적 차원 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본질과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근원적 인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성은 그의 몸인 교회의 본질을 결정하기 때 문입니다. 교회 본질은 그리스도의 속성에서 나와 교회는 이 진리에 관해서 한 걸음도 양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 들이 이단자로 정죄 받게 되었습니다.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1566년)의 기독 론에서 볼 수 있듯이 아리우스, 세르베투스, 에비온파, 발렌티누스, 말시 온, 아폴리나리스, 유노미우스 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왜 곡되게 주장한 이단들이었습니다. 이들 중 그리스도의 속성에 관한 문제로 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 던 대표적 이단자는 바로 아리우스입니다. 니케아에서 범(汎)교회적 회의 (325년)가 열리게 된 것도 바로 아리우스를 따르는 무리의 세력이 거대해졌 기 때문입니다. 당시 모든 교회지도자들이 소집된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 받게 됩니다. 비록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처음부터 아리우스 가 이단자였던 것은 아닙니 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의 신성을 완전히 도외시하지 않았으며 그의 초자연적 사역을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외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있었던 존재가 아니라 인간들과 같은 피조물이었으나 어느 순간 신 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리우스는 왜 이렇게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게 되었을까요? 아리우스는 교회가 박해받던 시대와 평화를 누리는 시대를 걸쳐 살았던 사 람입니다. 교회가 핍박 속에 있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경건했으며 교 회는 역동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박해의 시대가 끝나고 평화로운 시대가 되 었을 때 신자들의 신앙심은 나태해지기 시작했으며 도덕적 타락이 뒤따랐습 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다시 이전의 경건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절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리우스도 그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도덕적 개혁을 추구하 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그리스도를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그리 스도 역시 원래 우리와 같은 피조물이었으나 그의 노력에 의해 하나님과 같 은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우스는 우리 인간들도 최선을 다한다 면 그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선 하다고 생각하는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본성을 새로 다듬고 그려냄으로 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상을 훼손시켰습니다. 아리우스 이후에도 예수님의 모습을 자의로 그려냄으로써 중보자 예수 그리 스도의 구속사적 의미를 변질시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은연중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 간적 측면에서의 훌륭한 점만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사회적, 윤리적 역할을 교회의 첫째 되는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 개혁의 물결 가운데서도 이러한 유의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날 교회의 잘못된 모습을 바로 잡으려는 개혁가들의 노력이 도처에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되는 진리의 말씀이 아닌 인 본주의적 도덕성과 민주주의적 질서를 개혁의 잣대로 삼을 때 역사적으로 반 복되어온 실수를 또 한 번 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 실수 반복하지 말아야 하나님은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라는 이 명확한 진 리를 끝까지 지켜나가 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경륜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방편입니다. 교회는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천 상의 공동체입니다.
72 no image 하이델베르크<11>_피조 세계 바라보기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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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7 2006-06-28
피조 세계 바라보기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14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자가 있습니까? 답> 하나도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책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 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둘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는 죄에 대한 하 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도 없고, 다른 피조물을 거기에서 구원할 수도 없 습니다. 15문>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합니까? 답> 참 인간이고 의로운 분이시나 동시에 참 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 나신 분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가는 동안 곳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심지어 겉모습이 우리와 달라 선뜻 다가서기 힘든 외국인들조차도 그들의 심성을 어느 정도 알고 나면 그들의 사람 됨됨이에 매료되곤 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도 그러합니다. 계 절마다 모습을 바꾸는 자연을 볼 때 우리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합니다. 특별한 것이라 고는 없어 보이는 사막이나 바다 같은 곳에서도 특유의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발견합 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람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해 왔습니다. 돌아보면 아름다운 것 많아 이처럼 피조세계는 아름답기만 한 존재일까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이 착하건, 그의 인격이 고귀하건 간에 모든 사람은 유죄판결을 선고받 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죄인되었을 때 자연과의 원래의 관계도 파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 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더러운 사람, 불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정하신 법칙을 위배했으므로 유죄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 낙원의 질서 역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람이 뱀과 대화를 나누 고 동산의 실과를 즐겼으나 이제는 서로를 증오하고 땀을 흘리는 수고를 해야만 생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죄에 물든 피조세계의 본질입니다. 이와 대조적 으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철저하게 죄를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분입니다(롬 2:5, 8). 칼의 날을 갈고 계신 분입니다(시 7:12- 13). 이러한 공의의 하나님 앞에서 죄의 본성을 지닌 피조세계에 속해 있는 우리가 유 죄판결로 인한 형벌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4문은 죄악된 모든 피조세계는 아무리 좋은 방법을 사용한 다 하더라도 그 본질적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악한 피조물이 다른 피조물을 결코 대신할 수 없지만 구약시대에는 다른 피조물을 이 용해서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통해서 죄씻음 받을 것으로 생각했 던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것이 아님을 또렷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보 면 말입니다(히 10장). 그것은 구원의 실체에 대한 그림자를 보여 줌으로써(히10:1) 하 나님의 백성이 그것을 소망하며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악 된 피조세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상으로부터 계획되어지고 주어지는 구원을 소망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 지 않고 순종을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삼상1 5:22). 그것은 유 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파괴된 피조세계 속에서 아무리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 드리려 해도 의를 이룰 수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정해진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편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피조물 회복은 오직 하나님 뿐 오늘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동물을 바치는 제사를 행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다른 사 람의 죄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피조물 사이의 사랑, 평 화, 존경 등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도 피조물이 새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의 교훈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악된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으며(고전 5:17) 우리는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나신 한 중보자만 을 소망해야하기 때문입니다(15문).
71 no image 하이델베르크<10> 면죄부_이윤호 집사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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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2 2006-06-01
하이델베르크 면죄부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12문>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 을 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죄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 13문>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아주 먼 옛날 교회에서는 고행을 행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죄책감으로부 터 벗어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고행의 방법이 점점 구체화되기도 했습니다. 가벼운 죄에 대해서는 단지 몇 일간의, 그리고 무거운 죄는 몇 년 간의 고행을 참고 견뎌야하는 등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하 나 쌓이고 쌓이면 고행을 해야 할 연수가 100년도 넘게 되어 일평생 고행을 한다 하더라도 죄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행으로 죗값 대신하려 해 죄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던 교회는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고안해 내었습니다. 면죄부가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돈을 바침으로써 고행을 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면죄부는 교회에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교인들에게는 죄책감을 덜어줄 수 있는 유익한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이디어는 면죄부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칠 돈이 없 는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도 교회는 길은 제시 해 주었습니다. 이교도와의 전쟁이나 대규모 공사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죄에 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유의 잘못된 신앙이 힘을 발휘하여 십자 군과 같은 대규모 원정과 성 베드로 성당과 같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아름다 운 건축물의 완성을 가능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고행, 면죄부 그리고 몸의 희생과 같은 유의 잘못된 실천들이 그 얼굴을 바 꾸어가면서 오늘 우리의 교회를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열심 있 는 봉사, 회개를 위한 울부짖는 기도 그리고 헌신적인 연보조차도 그것들이 조금이라도 죗값을 치르는 조건으로 여겨지고 우리의 자랑거리가 된다면 우 리시대의 또 다른 형태의 면죄부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로 인해 교회의 외형이 더욱 풍성해져 보이고 이를 행하는 자들 의 신앙심에 큰 만족감을 줄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가운데 우리 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죗값을 치러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 의 의(義)를 만족시키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12문). 하나님의 의(義)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 우가 많습니다. 보통사람의 눈으로 볼 때 별것 아닌 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범죄일 수도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그 한 예입니다(레 10:1-2).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그분께 나아갔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단 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 영광을 돌리려 했지 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생각대로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죽음이 라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사를 바라보는 우리 중에 하나님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 님 스스로 정하신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과 교제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 는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해결 하는 방법도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만 합니다. 죄의 해결 방법은 하나님께 있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끔찍한 죄와 비참함에 대한 해결책을 보여 주셨습니 다. 바로 죗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죗값을 치르고 하나님께 나아가 는 방법은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과 방법으로 죗값을 치 르려 한다면 결코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문과 13문은 형벌을 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 에 감사하도록 하는 동시에 우리가 고안해 낸 우리시대의 면죄부는 없을까 반성하도록 합니다.
70 no image 하이델베르크<9>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11문 돌아보기_이윤호 집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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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7 2006-05-19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11문 돌아보기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1999년 태국의 한 오지에서 몇 달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TV와 컴퓨터는 물 론 식수를 해결할 수도 시설조차 없는, 한참을 걸어가야 이웃집이 나오는 외 딴 곳이었습니다. 낮에는 이웃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노동을 하지만 밤이 되 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함께 한 형제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오지 생활 기억남아 어느 날 밤 다른 형제가 가지고 있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처음 접했습 니다. 한참 동안 손에서 그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 요리문답이 나에게 그 토록 가까이 다가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따금씩 생각해 봅니다. 아마 그것이 위로의 메시지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1문).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일상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내게 위로 거리가 되 어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었을 때, 진정한 위로를 갈급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앞부분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겨 나고 있었습니다. 주제가 위로인데 왜 계속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서(3-11 문)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것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일상의 비참함을 넘어, 아담에서부터 태생적으로 전해오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비참함을 말입니다. 인간의 비참함을 연이어 설명하고 있는 3문에서 11문까지의 내용을 읽고 또 읽어보았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내용은 점점 좁혀져서 결국 하나의 메 시지가 남았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단코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에 겹쳐져 있는 또 하나의 가르침을 볼 수 있었 습니다. 의에 관해서 하나님의 경륜에 맡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결단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습 가운데서 가능성을 발견하면 할수록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 라 생각했습니다. 그 가능성을 기반으로 열심히 노력만 하면 큰 강을 헤엄 쳐 목적하고 있는 땅으로 건너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진 정한 위로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의심 과 두려움만 커질 뿐이었습니다. 이제 스스로는 결단코 목적하는 곳으로 건너갈 수 없다는 비참한 존재적 사 실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크고 견고한 배에 올라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헤엄쳐서 건너는 데 대한 불안과 의심에서 해방되어 진 정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들은 이를 알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찬송을 할 때나 기도를 할 때 늘 우리 능력의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외형적으로 부족함을 시인하면서도 실상은 그 반대인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광야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약속의 땅을 정탐했던 백성 들의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메뚜기로 여길 만큼(민 13:33) 자신의 무능함을 잘 알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 중심은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백 성들이 스스로의 무능함과 비참함을 올바로 알았더라면 가나안 진격을 두려 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정한 비참함을 아는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길 수밖에 없 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의 두령들이 본 것 은 결코 인간의 연약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느낀 것은 자신의 전투력이 적군의 그것보다 우수하기만 하다면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적과 싸워서 이 길 수 있을 것이라는 더없이 교만한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주신 적개심(창 3:15)으로 인하여 전투하는 교회의 본분 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대한 악의 세력과 마주하고 있는 연약한 우리가 스스 로 전투능력을 쌓음으로써 위안을 얻으려한다면,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광야 교회가 걸어갔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으로 느끼는 막연한 부족함이 아니라 존재적 비참함과 죄를 절실하게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여호수아와 갈렙이 지닐 수 있었던 진정한 위안과 신앙의 역동성 을 우리 교회가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 알아야 이제까지 인간 본성의 뿌리깊은 죄와 비참함을 일깨워주는 하이델베르크 요 리문답 제1부에 해당하는 11문까지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12문부터는 제 2부를 시작할 것입니다. 바로 구속이라는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내용입 니 다. 인간의 본질적 죄와 비참함을 깨달은 우리가 이 내용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69 no image 하이델베르크<8> 그 칼을 갈으심이여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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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8 2006-04-20
하이델베르크 그 칼을 갈으심이여 이윤호 집사_선교와 비평 발행인 10문>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순종과 반역을 형벌하지 않고 지나치시겠습니 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죄와 자범죄 모두에 대해 심히 진노하셔서 그 죄들을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의로운 심판으로 형벌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고 선언하셨습니다. 11문>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하신 분이 아닙니까? 답>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분이나 동시에 의로우신 분입니다. 죄는 하나 님의 지극히 높으신 엄위를 거슬러 짓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이 죄에 대해 최고의 형벌, 곧 몸과 영혼에 영원한 형벌을 내릴 것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하여 그것 을 진리로 여깁니다. 특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막연한 생각 으로 우리 나름 대로 그의 속성을 다듬어 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마음씨 좋 은 성품을 가지고 늘 웃으시는 분으로 생각하며,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런 하 나님의 모습을 이야기 해 주는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랑의 속성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그 무엇보다 강조하지만 실상은 이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작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큰 목소 리로 선포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가려지는 수도 있습 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랑이 평가절하 되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은 특히 하 나님의 사랑이 세상에서 인정되는 선행과 동일시될 때 그러합니다. 더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인본주의적 생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함으로 써 교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사상이 있습니다. 바로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참 교회에서 고백하는 하나님의 경륜과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다원주의자들은 결 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이 그렇 게 편협하고 불공평 할 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늘 앞세우지만 그 본질 자체가 훼손된 경우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본주의적 생각에 빠져 있는 우 리가 흔히 놓치기 쉬운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성품입니다. 하 나님은 분노하시며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무자비해 보일 수 도 있습니다. ‘저가(하나님이)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 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화살)은 화전(불을 달고 쏘는 화살) 이로다(시7:12-13).’ 지금 다윗이 기록하는바 하나님은 분명 분노하시는 분 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임을 우리는 압니다(11문). 그의 의로우심이 마음씨 좋 은 하나님을 일컫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의미하는 것 은 그가 정하신 규칙대로 반드시 시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결코 지나치시 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10문).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규칙은 사람이 죄 를 범했을 때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진노의 불이 우리를 칠 것이라는 것입 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할 뿐 아 니라 태어 날 때부터 본성적 죄 아래 놓이게 된 존재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 이 갈아 놓으신 날선 칼, 활시위를 이미 당겨 놓은 불화살 그리고 죽이는 기 계가 바로 우리 앞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최대의 비참함입 니다. 이러한 인간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진노라는 다리를 건너지 않고서는 결코 하 나님의 사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당해야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이 가지는 의미를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보여주신 최고의 사랑을 느낄 수 있 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완전한 화목제물을 통한 사랑입니 다. 심판 알 때 사랑도 알아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성품과 심판을 항상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 지 않고는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 나가는 경륜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 다. 교회는 또한 이것을 세상에 큰 목소리로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68 no image 하이델베르크<7> 역동적 교회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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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1 2006-04-06
하이델베르크 역동적 교회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의 율법에서 요구하신다면 이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행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으나, 사람은 마귀의 꾐에 빠져 고의로 불순종하였고, 그 결과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도 하 나님의 그러한 선물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최초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을까? 자유의지가 없었다면 ‘고의적인’ 인간의 범 죄도 없었을 텐데. 자유의지는 첫 사람의 능력 하나님은 태초에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게 사람을 선하게 만드시고(6문) 사람 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에게 법을 주셔서 그것에 따를 것을 명령하시고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 다. 이와 더불어 사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 즉 자유의지를 주셨습니 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 유의지를 주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역동적 인 관계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자신의 관계가 일정한 상태 에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제의 수준이 점점 발전적으로 성장하기 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역동성은 본성적으로 죄 된 오늘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 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듯 어떤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었습 니다. 그렇지만 최초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 사탄의 유혹에 빠 져 자율적인 존재가 되려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것도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밖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인간에 게 언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 역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랑 의 표현이었습니다. 만약 그의 백성이 자율적인 의지로 율법을 지켜나가며 성취욕을 채우려한다 면 이 율법은 부당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후 사람 은 본성적으로 전적 무능한 존재가 되었으므로 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 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과 인간 의 근원적 비참함을 앎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면 하나님 의 백성으로서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교회에게 여전히 역동적인 관계를 요구하십니다. 교회가 가 지는 역동성은 교회 밖의 세상이 가지는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 는 독립적으로 어떤 인상적인 일을 창조적으로 해 낼 때 그것을 역동적이라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역동성이란 단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 다. 외형적으로 무미건조해 보일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마음대로 어떠한 것들도 고안해 내서는 안 된다는 율 법의 교훈을 우리는 이미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고안해 냈 을 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최 초 인간의 범죄 후 사람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행할 능력을 완전히 상 실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배를 하고 선교와 구제를 할 때 인본주의적 아이디어 에 의존하거나 세상에서 인정받는 방식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이 때 비록 외형 적인 활기는 있어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역동성은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실천 하나하나를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아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있는가 늘 점검 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의 실천 중에서 사람의 아이디어로부터 나 온 것을 철저히 제거하는 것, 이를 통해 교회는 역동적인 모습을 갖추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역동적인 삶은 말씀 순종에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율법을 통해서 부당한 요구를 하시지 않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선물을 상실하게 됨에서 비롯된 본성적 비참함을 일깨워 줍 니다. 이것은 또한 어떻게 해야 역동적인 교회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지 일 깨워줍니다. 교회의 역동성은 교회의 성장이나 활력이 아니라 완전히 무능한 존재를 자각함으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철저하게 의존함에 있는 것입니다.
67 no image 하이델베르크<6> 반(半)개혁주의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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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3 2006-03-24
하이델베르크 반(半)개혁주의 이윤호 집사_선교와 비평 발행인 6문>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 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또한 자신의 형상, 곧 참된 의와 거 룩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살고, 그 리하여 그 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7문> 그렇다면 이렇게 타락한 사람의 본성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답>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타락하고 불순종한 데서 왔습니 다. 그때 사람의 본성이 심히 부패하여 우리는 모두 죄악 중에 잉태되고 출생 합니다. 8문> 그렇다면 우리는 그토록 부패하여, 선은 조금도 행할 수 없으며 온갖 악 만 행 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신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참으로 그렇습 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 7, 8문은 비참한 인간본성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 한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우리 교회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점검케 하고 있습니 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다면(6문) 비참한 인간의 본성은 어디 에서 비롯되었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것이 ‘원죄’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7문). 기 독교 초기 역사에 등장한 인물 중에서 ‘원죄’를 부정함으로써 교회에 큰 파 장을 일으켰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펠라기우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 했듯이 그도 역시 연약하기 짝이 없는 현실교 회를 바라보며 지금보다 더 나 은 교회의 모습을 원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이를 위해서 인간의 부단한 노력 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름다운 장래 교회의 모습은 사람들이 얼마나 스스로 책임성 있게 노력하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 과대 평가해 그렇지만 그의 생각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바로 원죄입니다. 원죄 라고 하는 인간의 비참한 근원적 본성이 있는 한 사람의 노력이 자칫 무의미 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인간에게 운명적으로 지워진 원죄만 없다 면 교회의 미래는 우리가 노력하 기 나름일 것입니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아담 의 타락에서 기인한 원죄를 부정함으로써 인간 노력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사람이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 은 성도들에게 희망을 주는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얼마나 적극적인 자세로 열 심히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펠라기우스를 따 르는 사람들의 삶이 훨씬 더 도덕적이었을 수 있으며, 그들의 신앙 생활에 기 쁨이 넘쳐났을 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418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와 431년 에 베소 종교회의를 통해 이단으로 정죄 받기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펠라기우스 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인간 노력의 가능성으로 대신했기 때문 입니다. 펠라기우스는 비록 이단으로 정죄 받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 다. 많은 사람들이 원죄에 대한 펠라기우스의 이성적 판단을 떨쳐버릴 수 없 었기 때문입니다. 한걸음 양보하여 펠라기우스의 사상에 대한 타협이 일어나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함을 알면서도 펠라기우스의 인간 본 성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한 태도였습니다. 역사는 그들의 사상을 반(半)펠라기우스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펠라기우스주의와 같은 유의 인본주의적 생각을 철 저히 배격해야 함을 교회에 당부하고 있습니다. 원죄로 인한 인간의 태생적 인 비참함(7문)과 선에 대한 완전 무능함(8문)을 철저히 깨달을 때에야 비로 소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백성을 향한 경륜에 참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 니다. 오늘날 비록 펠라기우스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 히 교회 가운데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입으로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무엇이든 제대로 된 전략을 가지고 스스로 최선을 다하다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마땅히 뒤따라 올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사람을 의존하는 교회들 하나님의 은혜가 중요함을 강조하면서도 인본주의적 노력과 그 결과에 열중하 여 인간 본성의 전적 부패한 상태를 간과한다면 우리의 모습 속에 반(半)펠라 기우스적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거스틴은 왜 그 토록 집 요하게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혹 이를 놓친다면 우리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가리켜 반(半)개혁주 의 교회라 부를지도 모르겠습니다.
66 no image 하이델베르크<5> 기독교는 사랑할 수 없는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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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0 2006-03-09
하이델베르크 기독교는 사랑할 수 없는 종교? 이윤호 집사_선교와 비평 발행인 4문>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요약하여 그 율법의 요구를 가르쳐 주 십니다.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 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5문> 당신은 그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내 이웃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향해 입을 모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도 이 말에 이의를 제 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정도입니다. 교회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주위 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멀 리는 기아와 재난 속에 허덕이고 있는 다른 민족들 에게까지 힘써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교회는 세상으 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문 과 5문을 보면서 우리교회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겠습니 다. 우리는 과연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 사랑에 대한 진지한 질문 필요해 마태복음 19장에는 예수님을 찾아 온 한 청년에 관한 기사가 나타납니다. 예 수님께서 계명에 관해 말씀하셨을 때, 그 청년은 스스로 그것들을 다 지킨다 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를 도우라는 예 수님의 가르침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율법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지만, 정작 율법이 지니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이 청년처럼 율법의 의미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 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외형적 실천에는 열심인 채 말입니다. 이러한 유의 신앙생활을 하던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율법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질문했습니다(마 22:35-36).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하나님 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답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지니는 진정한 정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 더라도 율법의 진정한 의미, 즉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면 공허한 실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것을 지킬 수 있고 또한 이를 통해 의로 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천상의 사랑이 스며있는 율법의 의미 를 올바로 알 때, 율법을 지키려 노력할수록 우리의 죄악 된 모습이 점점 분 명히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놓친 채 실천하는 율법은 사람을 교 만하게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율법의 의미를 놓친 사랑은 어떠할까요? 율법의 함축으로 서 사랑은 오직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 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문에서 보듯이 그것은 아무도 실천할 수 없는 사랑입니 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핵심을 놓친 사랑은 교회의 울타리 밖에서 말하는 사랑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교회 밖으로 사랑을 실천하려 할 때 교회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더 좋아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간직 해야할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때로 이러한 사랑은 종 교다원주의와 같은 사상의 옷을 입고 교회를 위협하기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합니다. 실천 치중하다 본질 상실할 수 있어 신약성경 시대에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율법 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율법 과 사랑을 스스로의 힘으로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비참한 본성 이며, 그것을 아는 것은 은혜의 기본이 되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입니다. 동시에 기독교는 스스로 사랑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
65 no image 하이델베르크<4> 비참함을 깨달을 때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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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1 2006-02-22
하이델베르크 비참함을 깨달을 때 이윤호 집사_'선교와 비평’ 발행인 2문>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 아야 합니까? 답> 다음의 세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 가,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셋째, 그러 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3문>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의 죄와 비참함을 압니다. 1618년 네덜란드의 도시 돌트에서 중요한 교회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이듬해 까지 장기간 지속된 이 회의는 종교개혁 진행과정에서 신교내부로부터 일어 난 신학적 오류를 바로잡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교회대표들은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잘못을 드러내고 개혁주의의 원칙을 재정립했습니다. 이때 표방 된 내용이 오늘 우리에게 칼빈의 5대교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돌트신조 칼빈주의 5대 강령 정립 개혁주의 신학의 요점을 잘 담고 있는 칼빈의 5대교리에 흐르고 있는 중요한 원리중 하나는 인간의 전적무능, 혹은 전적부패입니다. 당시 알미니안주의자 들 역시 인간이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인간본성의 가능성 에 여전히 여지를 남겨두었습니다. 이에 대해 개혁가들이 다시 한 번 명확히 다진 원리가 바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었 습니다. 돌트총회의 선언은 그로부터 약 55년 전에 작성되었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의 가르침과 조화된 것이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목차역할을 하 는 제2문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원리에 대해서, 감사하는 삶 에 대해서 이해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인식해야할 내용이 바로 인간본성의 비 참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오늘, 개혁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경계선이 많 은 부분 손상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개혁가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지 만 많은 경우 ‘비참’과 ‘무능’과 같은 말들은 우리의 마음에서 점점 잊혀 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러한 단어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우리 스 스 로 못할 것이 없는 냥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전도를 통한 부흥전략이 그러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노력이 그러 합니다. 우리가 잘 계획하여 열심히 노력만 하면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 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밤을 새워가며 공부만 열심히 하면 성령의 도 우심 없이도 하나님을 잘 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하 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비참함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교회를 알아 가는 첫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비참한 상태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첫걸음 여기 율법의 역할이 있습니다. 율법을 통하지 않고 느끼는 비참함은 무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비참함을 느끼는 경우는 언제인가요? 경제 적으로 어려울 때,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손가락질 받을 때 혹은 깊 은 철학적 사색에 빠졌을 때 비참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 한 비참함은 세상이 가지는 비참함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이 세상의 다른 이들과 구별된 존재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의 백성들은 구별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 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율법을 통해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은 하나님이 그의 구별된 백성들과 긴밀히 교제하시고자 하는 방편이었습 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의미를 잘못 알아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하 나님과의 교제에 오히려 울타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율법을 지킨 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즉 죄악된 모습과 비참함을 잘 발견하여 하나님과 더 욱 가까이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참 함을 느끼는 것은 세상적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 느껴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의 시작에는 바로 우리의 죄된 모 습과 비참함의 자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람데오, 오직 하나님 앞 에서 우리의 비참함을 인식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통해서 올바른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64 no image 하이델베르크<3> 배타적 교회를 향한 위로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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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2 2006-02-16
하이델베르크 배타적 교회를 향한 위로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 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 러하므로 그의 성신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은 총 129개의 전체 요리문답에 대한 서론 역할 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해야 할 유일한 위로를 묻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의 상식과 같지 않은 대답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돈이나 건강, 사 회경제적 안정 그리고 좋은 이웃에서 위안을 찾는데 익숙한 우리에 게 진정한 위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사실에 있다고 말하고 있으 니 말입니다. 상식을 초월하는 첫 질문 전혀 다른 곳에서 위로를 찾고 있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스 도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선 배 개혁가들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신앙의 도리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 는 모습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제1문과 그 대답은 우리 각자에게 삶의 태도 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그렇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질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교훈적 의미를 새겨보는 것 또한 유익할 것입니다. 이 요리문답이 작성된 종교개혁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회의 전투하는 모습, 즉 비진리에 대한 배타적인 모 습에 있었습니다. 한쪽으로는 힘을 가진 부패한 구교에 대하여, 다른 한쪽으 로는 개혁을 추구하는 신교 내부에서 비롯된 잘못된 신앙사상에 대해 교회는 전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순결한 교회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었습 니다. 개혁주의 교회가 고난 중에 있었던 것 은 타협하지 않는 바로 이러한 모습 때 문이었습니다. 교회의 순결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자처하던 이들에게 살든지 죽든지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확인케 하 는 근원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유일한 위로가 그리스도에 속한 것에 있다고 고 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싸우고 그로 인한 고난 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질문이 초대교회 시대에 주어졌더라도 그들의 마음에 진지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다가갔을 것입니다. 그들도 싸우고 있었습니다. 로마라고 하는 거 대한 세력에 대항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영토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황 제를 신으로 숭배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두 명의 주를 함께 섬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또한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자처하는 유대주의자들의 핍박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거짓교사들을 경계하며 그들의 거짓가르침 을 배척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대립으로 초대교회는 핍박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교회의 순결을 지키는 가 운데 내일의 삶과 죽음을 예측할 수 없 는 그들은 진정한 위로의 의미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진정한 위로에 대한 이 질문을 대할 때 어쩌면 그 의미가 많이 바래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전투하는 모습을 점 점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세상의 가치와 대립하며 그 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대신 그들과 윤리적 잣대를 공유해 나가려 하고 있습니다. 위로 받을 이유 없어지고 있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속함으로 이방 나라와 구별되는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 아 세상의 빛으로서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출19:5-6; 사42:6).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유일한 위로로 여기는 우리 역시 세상과 타협할 것이 아닙니다. 오 히려 세상에 대한 빛으로서 역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시대의 교회처럼 배타적 교회의 모습을 가질 때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위로의 의미를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63 no image 하이델베르크<2> 위로의 메시지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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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7 2006-02-16
하이델베르크 위로의 메시지 이윤호 집사_선교와비평 발행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전체를 흐르고 있는 대 주제는 ‘위로’입니다. 이것 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나올 당시 교회가 처한 역사적 형편과 관계있으 며, 오늘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통해 그 교훈의 힘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 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된 때는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개혁가들과 이들 의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에게 결코 순탄한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평화회의가 개최되면서 독일에서의 종교 갈 등이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1563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이 작성될 시점의 전후사정은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유럽전역에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 구교 간의 갈등 심화돼 독일과 이웃하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발간되기 바로 전 해 ‘위그노전쟁’이라 불리는 동란으로 오래된 갈등이 폭발하기에 이 르렀 습니다. 바로 구교와 신교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위그노’는 프랑스 내의 신교도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신교는 독일과 스위스를 통해 들 어와서 칼빈파를 중심으로 각 계층에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프랑 스의 왕들과 구교도들은 이들을 탄압해 왔습니다. 결국 1562년 구교도들의 위 그노에 대한 바시에서의 학살을 시작으로 전쟁의 막이 올랐던 것입니다. 바시는 프랑스 동부지방의 도시로서 독일 서부에 위치한 하이델베르크와는 그 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습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종교전쟁으로 불리는 이 동란에 정치 적 배경이 있건 없건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큰 시련이었음에 틀림 없습니다. 이들이 목숨의 위협을 피해 이웃하고 있는 독일로 넘어 들어갔을 때 이를 지켜보던 독일 성도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헤아려볼 수 있을 것입니 다. 독일 북서쪽에 위치한 네덜란드의 신교도 역시 순탄한 역사 속에 있지 않았습 니다. 루터의 개혁이 시작된 후 1529년에 이미 칙령을 발표하여 개혁사상을 유포하는 행위를 사형에 해당하 는 범죄로 규정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알 5세가 1556년 스페인과 네덜란드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필립 2세에게 물 려주었을 때 네덜란드에 대한 핍박은 더욱 거세지게 됩니다. 필립 2세의 구교 중심의 종교정책은 반란과 살육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특히 1567년부터 1573년까지 역사적으로 신교도들을 탄압하는 ‘공포정치’라 불리 는 정황이 지속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하고, 망명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566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네덜란드 어로 출판되어 성도들의 손에 들려졌습니다. 독일의 경우, 신교도들은 비교적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대다수는 루터파였습니다. 칼빈주의는 아직 정식으로 인정되지 않은 때였 습니다. 칼빈의 가르침은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는 1648년이 되어서야 공 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니까요. 이러한 이유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 에 참여한 사람들이 구교뿐 아니라 ‘루터파’로부터도 심한 반대에 직면했 던 것입니다. 독일 역시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신교를 지지했던 영향력 있는 사람 들조차 다시 구교로 돌아 서는 조짐이 있던 때였습니다. 독일의 국제적 도시 하이델베르크. 당시 프랑스, 화란, 영국 등지로부터 이주해 온 많은 개신교도 들이 정착했던 팔쯔의 도시. 많은 이들이 고국에서, 그리고 이웃 나라에서 일 어나고 있는 교회에 대한 박해의 소문들을 들으며 고심하던 시련과 혼란의 시 대였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되어 교회에서 읽혀지던 시대는 결코 평온한 시 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신앙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시대였습니다. 올바른 신앙을 간직하기 위해서 교회가 핍박을 자처하던 시대 였습니다. 이러한 때 주어진 고백문서이기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 은 단순히 궁금한 내용을 신학적으로 해설하는 형식이 아닙니다. 이 요리문답 은 신앙적 삶에 대한 교회의 고백적 가르침이 힘있게 나타나는 위로의 메시지 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읽고 공부하고 고백한 사람들은 분명 ‘진 정한 위로’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위로의 메시지 힘있게 주어져 떨쳐버릴 수 없는 생각이 있습니다. 만약 16세기 하이델베르크의 성도들이 21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를 본다면, 지금 우 리야말로 ‘위로’를 필요로 하는 시 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발전된 지식 속 에서, 풍요로운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우리의 신앙의 기준들은 날로만 흐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16세기 당시는 교회가 싸워야할 대상이 분명한 시기였지만 지금은 우리가 맞서야 할 대상마저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들이야말로 ‘진정한 위로’를 필요로 하는 시대를 살아 가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62 no image 하이델베르크<1> 신앙을 사수하는 전투_이윤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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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35 2006-02-16
하이델베르크 신앙을 사수하는 전투 이윤호 집사_선교와 비평’ 발행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563년 독일의 유서 깊은 도시 하이델베르크에서 작 성되어 교회에서 읽혀지던 고백문서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한창이었을 때 작성된 연속성 있는 교회의 역사적 산물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된 16세기 중반 유럽인들의 대화의 중심에는 오 스만제국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약 100여 년 전 찬란한 기독 교문화를 꽃피웠던 동로마제국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힘없이 무너졌던 충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스만제국은 동로마제국 정복에 만족하지 않고 유럽의 중심부를 향한 진격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유럽의 심장부 비엔나 함락 을 꿈꾸던 술탄 술레이만의 야심은 유럽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있었습 니다. 기독교 세계 심장부 점령당해 오스만제국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기독교의 상징 과도 같은 역할을 하던 성소피아교회를 무너뜨 리지 않고 그것을 모스크로 바 꾸어 사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었다고 생각했을까, 그 래서 그 영광을 되찾으려는 노력이었을까, 교회는 성 베드로성당을 재건축하 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천재 미켈란젤로의 노력이 돋보이는 성 베드로성당 은 세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그 모습을 다듬어가고 있었 습니다. 진정한 교회의 본질을 망각한 채, 이러한 노력이 하나님에 대한 본분 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성 베드로성당의 건축이 보여주듯 교회의 힘은 강했으며 외형은 화려했습니 다. 그러나 교회가 선포하는 말씀의 본질이 흐려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교회 의 사명이라 여기는 실천은 이미 말씀에서 이탈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잘못 흘러가고 있는 교회의 참 모습을 되찾으려는 목숨을 건 노력이 일어났습니 다.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오랫동안 흘러내려 오던 잘못된 물결을 되돌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개혁가들은 부패한 교회로부터의 거센 핍 박을 이겨내야 했을 뿐 아니라, 개혁의 이름으로 불거지는 신학의 혼란 속에 서 올바른 신앙의 기준을 정립해 나가야 했습니다. n바른 신앙 기준 필요성 절박해 이에 대한 개혁가들의 노력 중 하나는 바로 고백문서들을 통해서 개혁신앙을 정립하고 그것을 가르쳐 올바른 신앙을 전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고백문서 들 중의 하나가 바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는 개혁주의 사상이 너무나도 잘 베여있어서 오늘날까지 많은 개혁주의 교회 에서 읽혀지고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16세기 중반을 회고하는 많은 사람들은 당시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오스만제국의 위용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은 그때 세워 졌던 성 베드로성당을 방문하여 그 예술적 가치를 칭송하며 감격하고 있습니 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오스만제국의 화려한 위세 보다, 성 베드로성당의 아름다움 보다 훨씬 소중하고 값진 유산이 있으니 바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 답입니다. 성 베드로성당과 시스타나성당의 아름다움을 위해 불구의 몸이 되기까지 열중 했던 미켈란젤로의 노력과는 본질상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올바른 신앙의 보존을 위해 고심했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작성자들의 전투적 정신 이었습니다. 비록 이를 가능하게 했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작성자로 알 려진 자카리아스 우르지누스, 카스파 올레비아누스와 같은 이름들은 우리에 게 너무나 생소하지만 말입니다. 값진 유산 하이델베르크 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교회의 분별력이 희미하던 시대에 말씀의 올바른 내 용을 보존하려는 개혁가들의 전투적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이 하이델베르 크 요리문답은 지금의 우리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1563년 이 고백문서 를 손에 받아 든 하이델베르크의 시민들이나 오늘날 그것을 다시 읽어가는 우 리 모두는 비록 역사적 지리적으로 흩어져 있으나 동일한 열 두 지파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약1:1). 그들과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면 서 교회를 흩어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세력과 싸워나가야만 하는 말세의 시대 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 고백문서의 작성자들의 정신 을 본받아 말씀의 보존을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혁하며, 그 신앙을 다음 세대로 물려주어야 할 사명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http://mnc.or.kr
61 no image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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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93 2003-09-25
성도들을 위한 소요리문답 해설 최충산 목사/ 충청노회 제30문: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시는가? 답: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믿음 일으키시고 또 효력있는 부르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 는 것이다. 본문: 요한복음 15:5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구속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 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는 어떤 것입니까? 성령께서 효력있는 부르심으로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구원의 큰 진리를 배웁니다. 그것은 그리 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인데, 그 성령 역사의 목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은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사입니다. 칼빈은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는 다면 그리 스도의 구속 사역의 혜택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상을 반복적으로 강 조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믿음으로 연합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와 그 백성 사 이에는 연합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 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이고, 또 그리스도는 우 리를 위해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대표로서 일하기로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믿음을 갖기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 이 있기 이전에 연합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창 12:1-3에 말씀하고 있 는 “큰 민족”안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창 15:3에 ‘하늘에 별’ 과 같이 많을 백성 안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마 20:28 에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하셨는데, 그 안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하셨습니다. 롬 5:18-19에 말하고 있는 대로 아담 안에서 죽은 당신의 백성을 두번째 아담인 예수 안에서 생명에 이르도록 하셨 습니다. 이미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 음이 있기 전에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서신 분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 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고, “그리스도에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 라고 했습니다(갈3:37-39). 이렇게 신약에 이르러 하나님의 백성이 현실로 나 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의식적인 믿음이 표현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 은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에 참여할 백성을 아셨던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 미리 정하신 백성에게 믿음을 일으키셔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주안에서 하나이며,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영화로운 몸, 새로운 인류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와 의 연합이 ‘신비적인 연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은 신비적이며, 성령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신비적 연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유기적인 특징을 있습니 다. ‘포도나무와 가지’(요15:5), ‘몸과 지체’(고전6:15-19), ‘머리와 몸’(엡1:22)으로 묘 사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와 신자는 유기적으로 연 합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연합에서 그리스도는 신자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 기 때문에 생명적인 연합이고, 전적으로 성령에 의하여 중재되는 연합이면 서, 동시에 신자 개인도 성령의 지배하심에 따라 신앙의 자각적인 행위를 통 하여 지속적으로 이 연합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호 작용을 내포하는 연 합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연합은 신자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개인적인 연합이며, 이 연합에 의하여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따 라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변화한다는 점에서 변혁적인 연합이라는 특징이 있습 니다. 이제까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모든 구원 과정의 기초 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대로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 켜 그의 피로 사신 구속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60 no image 우리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에 참여하게 하시는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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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9 2003-09-01
최충산 목사/ 충청노회 제29문-2: 우리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에 참여하게 하시는가? 답: 우리로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은 그의 성령께서 우 리에게 구속을 효력있게 적용하심을 인함이다. 본문: 디도서 3:5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 효력있게 적용하시는 성령의 역사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우리를 위한 구속 사역이라고 할 때 우리가 그 구속 에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지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떻 게 참여 할 수 있습니까? 요리문답은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일이라고 가르 칩니다. 인간의 행위와 노력으로 구속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 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6)라고 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님과 니모데모와의 대화에서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 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 이 물과 성령으로 나 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유대의 고매한 선생도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 가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오신 나라에 결단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 다. 이것은 어떤 종교적 기득권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고 “허물과 죄로 죽 은”(엡2:1) 인류 보편에 대하여 성령 역사 절대 필요성을 역설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말씀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 라 할 수 없느니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고린도 전서 2장 12절에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 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심이라” 말 씀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에 참여할 수 있는 것 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떤 분입니까? 성령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제 3위 하나 님으로 영원하신 분입니다(히9:14). 성령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신 분입니 다(시139-10). 모르는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고전2:1-11). 성령은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성령은 인격적인 분입니다. 지적인 분이시며(고 전2:10), 의지적인 분입니다(고전12:11). 정적인 분입니다(엡4:30). 그렇습니 다. 성령은 말씀하시고(계2:7), 인간의 연약함을 도우시고(롬8:25),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며 기도하시고(롬8:26), 우리를 가르치시고(요14:26), 주님을 증거하시고(요15:36), 우리를 인도하시고(요16:13, 행9:31), 주님의 역사를 도우시고(행16:6-7), 근심하시기도 하기도(엡4:30) 하십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하시고, 새로운 피조물 이 되게 하셔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를 보살피시고 인도하시는 보혜사이십니다. 요한 복음은 보혜시이신 성령 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령을 ‘편을 들어주는 사람’, ‘상담자’, ‘곁 에 있는 이’ 또는 ‘협조자’라는 뜻을 가진 보혜사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 니까? 성령은 삶의 용기와 힘 을 주시는 위로이시며,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같이 하면서 상담해 주시고 변호를 주시는 대변자는 뜻에서입니다. 또한, 성령은 진리의 성령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 보면 “저는 진리의 영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 하느니라”(요15:26-27) 했습니다. 계속해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 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 진리를 깨우쳐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하시 고, 모든 상황에 진리로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이러 한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복음 진리를 인식하게 하 시고, 마음으로 시인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동참시켜 주의 제 자와 군병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59 no image 우리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에 참여하게 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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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8 2003-08-06
성도를 위한 소요리문답 해설 29문1 최충산 목사/충청노회 문 29. 우리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에 참여하게 하시는가? 답. 우리로 그리스도의 사신 구속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은 그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구속을 효력있게 적용하심을 인함이다. 히9:12 그동안 우리는 왕이시고, 제사장이시며, 선지자라는 삼중직을 그리스도로 서 낮아지고 높아지신 신분에서 어떻게 완전하게 행하셨는가를 공부했습니 다.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전하셨고, 지금도 완전하게 사역하고 계십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객관 적으로 하실 일은 다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이루신 구속을 어떻게 나와 관련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29문부터는 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 사역이 개별적인 차원에 어떻게 적용 되 는가하는 문제입니다. . 1.그리스도의 값주고 사신 구속에 참여 먼저 생각해 보아 야할 것은 그리스도의 "값주고 사신 구속"입니다. "구 속"이라는 말은 남의 손에 있는 것을 값을 주고 찾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여 기서 말하는 구속은 그리스도가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죄의 값을 치르신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를 위한 구속이라 면 그 놀라운 역사에 우리가 참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놀라운 은혜에 어떻게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기의 죄 를 깨닫고 주를 믿으며 은혜를 구해야 되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이 문제를 요한복음은 장엄한 서론에서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 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 니다(13절). 인간의 조건과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 도의 사신 구속의 역사 안에 포함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죽었 던 자가 사는 일이요, 하나님의 원수된 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랑과 기쁨 이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성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 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에 참여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도구, 의의 병기로 하 나님의 역사에 쓰임받게 되는 일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총회에 속해 그 리스도 앞에 서게 될 영광스런 직분을 얻는 일입니다. 이러한 영광스런 구속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습니까? 디도서 3장 5-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 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 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그렇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행위로 구속의 은혜의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 을 철저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능력에 대한 철저한 절망과 거 부에서 구속의 역사에 대한 참여는 바르게 인식될 수 있습니다. "허물과 죄 로 죽었던"(엡2:1) 우리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엡2:4).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엡2:5). 우리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무능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 다 중요합니다. 이 때에만 성령의 역사에 대한 필연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 다. 우리가 새로운 이스라엘과 거룩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참여하는 것은 우 리의 철학적 사색이나 성찰의 결과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 고자 그리스도가 낮아지시고, 높아지시는 신분으로 일하실 필요가 있었다면 어찌 우리의 자의적인 선택으로 그리스도의 이루신 구속에 포함될 수 있습니 까? 성령의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놀라운 신비이 며, 은혜입니다.
58 no image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이 어떠한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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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5 2003-07-24
성도를 위한 소요리문답 해설 28문 5 최충산 목사(충남노회) 제 28문: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이 어떠한가? 답: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사흘만에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과 하 늘로 올라가신 것과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과 마지막 날에 세 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다. 딤후4:1 재림하실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높아지시는 최후의 단계는 재림입니다. 보통 재림을 높아지심의 단계에서 생략하는 일이 있는데 잘못입니다. 인간에게 수난 당하신 그가 심판 주의 주로 오시는 것만큼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신분을 나타내는 것은 없습니 다. 재림은 높아지심의 정점이라고 할 것입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의 진리입니다. 사도행전 1장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장면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면서 말씀하시기를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 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했습니다. 이루다 말할 수 없는 구절에서 성경은 그 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재림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현현의 의미를 가진 단어(딤후 1:10, 딤전6:1. 딤후4:1,살후2:8,딛2:13)와 계시의 의미를 가진 단어(벧전 1:7,13,고전1:7,살후1:7), 그리고, 강림의 의미(고전15:23, 살전2:19, 3:13,4:15,5:23)를 가진 각각 다른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렇게 감추었던 것이 환희 드러나고 최종적으로 진리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영광의 신분으로 도임하시는 종말적 사건입니다. 주님의 높아지심은 주님이 진정한 구세주이며, 심판주이시며, 모든 피조 세계를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하게 보여주는 높아지심의 정절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유명 한 조직신학자 벌카우어는 "재림으로서의 파루시아는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 심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화해의 의미와 힘에 대한 간과할 수 없는 계시 요, 돌이킬 수 없는 성취이다."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재림의 방식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이미 성령의 강림으로 주님이 영적으로 재림하셔서 교회에 임재해 계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 은 육체적, 가시적 재림은 아닙니다. 성경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도 그리 스도의 재림은 성도가 소망해야 할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고전1:7,4:5,빌 3:20, 골3:4, 계1:7 등). 그리스도의 재림의 양상은 가시적입니다. "본 그대 로 오시리라"(행1:11)하지 않습니까? 육체적으로 오십니다. 부활하신 그 육 체 그대로 주님은 오십니다. 심판의 재림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마24:36-51절 참조).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의 영광과 엄위가 그대로 나타나는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러 나, 성도에게는 구원의 완성이요, 승리의 재림일 것입니다. 성도는 온 피조물 과 원수 앞에서 그리스도의 소유로 헤아려 질 것이며, 영원한 희락으로 인도 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 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해야합니다. 성경은 주님 승천 이후 에 이미 받은 구원의 터 위에서 언제 오실 지 모르는 그리스도를 소망하라고 가르칩니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믿는 자는 그의 오심을 마땅히 믿 어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다시 오심에 근거해 있 습니다. 우리 삶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오심은 현재 우리의 삶 의 방향과 성격과 가치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오실 날을 고대하 면서 영접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벧전4:7). 그것은 초림과 재림의 종말론적 지평에 바로 서서 그리스도 중심적 사고와 삶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깨어 근신하라는 의미입니다(살전5:6, 벧전1:13,4:7). 우리는 이제까지는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그리스도 는 제사장, 선지자, 왕직을 낮아지신 자리, 그리고 높아지시는 자리에서 완벽 하게 수행하신 분입니다. 두 단계로 사역하신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의 사역 적 기초가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낮아지시고 높아지신 것 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행동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 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객관적 사실에 이해와 적용에 달려있는 것입니 다. 성도님들의 보다 더 깊은 이해와 성찰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57 no image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이 어떠한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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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3 2003-07-09
성도를 위한 소요리문답 해설 28문 4 최충산 목사/ 충청노회 제 28문: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이 어떠한가? 답: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사흘만에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과 하 늘로 올라가신 것과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과 마지막 날에 세 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다. 엡1:20 3.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 승천하신 후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하 나님의 우편이라는 말은 '가장 높은 자리'(왕상2:19,전10:2,마25:34,시45:9) 로서 권세와 영광의 장소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시110:1에 보 면,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했습니 다. 왕의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통치에 참여하는 것을 말하며, 최고의 명예 와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경우 그리스도와 교 회와 우주에 대한 지배권을 받으신 것과 그에 합당한 영광에 참여하게 되셨다 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 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하셨습 니다. 바울은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 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1:20)라고 했습니다. 또 한, 사도신경에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고 고백하고 있 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신인으로 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공적으로 위임받는 직위에 오르신 것을 의미합니 다. 칼빈은 "그는 하늘과 땅의 통치자로 임명되시고 그에게 위임된 통치권을 정식으로 허락 받으시되 그가 심판하러 오시기까지 계속하기로 되신 것"이라 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첫 째로, 왕적인 통치 사역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은 그 만의 안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의 주권을 행사하게 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리스도는 하나님아버지의 영원한 아들로서 시간 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서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이것을 그리스도 통치의 새로운 시작을 말합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 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 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 라."(엡1:21-22)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교회를 통치하시고, 현재 자연계의 모 든 세력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적하는 세력들에게 권위를 행사하시며, 최후의 원수를 굴복시키실 때까지 계속 통치하실 것입니다. 둘째, 영원한 대제사장의 사역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입 니다.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계승한 대제사장입니다. 그의 직분은 하늘에 오르셨다고 해도 갈리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는 완성된 자신 의 희생에 근거하여 그의 백성들을 계속 중보하고 계십니다. 그의 백성을 세 상에서 안정하게 보호하시고 백성들의 기도와 봉사가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간 구하고 계십니다. 요한 일서 2장 1절에 보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 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했습니다. 셋째로, 선지자적 사역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우편에서도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선지자 사역을 열심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떠나가시기에 앞 서,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며, 그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의 충만 함으로 부요케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26,16:7,15). 그 날 이후 주님은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 고, 사도들로 하여금 고난 중에도 진리를 증거 하게 하셨고, 교회를 설립하 게 하셨고, 신자들의 영혼과 삶 속에서 진리를 실현시켜 나아가셨습니다. 오 늘도 우리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춰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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