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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 예수님의 나무 생애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712 2017-12-20
햇빛편지 예수님의 나무 생애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하였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 흑암의 땅에 오셔서 나무와 밀접한 생애를 사셨다. 베들레헴 나무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의 생애의 출발은 누추했다. 그는 목수의 아들인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시골 갈릴리 나사렛의 일상에 충실하셨다. 목향과 톱밥 속에서 이웃의 목기와 농기구도 깎아 주고 이것저것 일용품들을 만들며 사셨다. 그 후 나무처럼 사람들을 품어 주신 공생애. 그는 자신을 생명을 주는 포도나무로 지칭하셨다. 그가 왕이 되리라 광적으로 기대한 군중들이 흔들어 대던 종려나무 이파리를 헤치며 예수님은 의외로 작은 나귀새끼를 타고 겸손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감람나무 무성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감람유를 짜내듯 땀을 흘리며 마지막 순종의 기도를 하셨다. 그는 마침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말씀처럼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 죄를 속하셨다. 그리고는 다 이루었다 하셨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물과 만왕의 왕이시다. 그토록 위대한 분이 가장 낮은 종으로 오신 것이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고 찬양하고 사랑한다. 그가 처음 오셨을 때는 흠모할 만한 풍채도 없어 많은 자들이 몰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다시 오실 때는 나팔 소리와 함께 만민의 눈앞에 위풍당당 왕의 모습으로 오시리라. 나무에서 시작하여 나무처럼 사시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의 생애. 우리는 그 생명의 나무에 접목된 언약의 나무이다. 그리하여 그 안에서 복락의 물을 마시며 무성한 잎과 과실을 맺는다. 그 은혜에 감사하고 엎드려 예수님께 경배하며 낮은 모습으로 이웃을 섬겨 언제나 샘 곁의 푸른 나무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이 성탄절의 참된 의미 아닌가.
530 까치밥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971 2017-12-06
햇빛편지 까치밥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돌담 곁 감나무에 빨갛게 햇빛을 받으며 남아 있는 홍시 몇 알을 바라보니 어린 날의 추억이 떠오른다. 긴 장대를 가지고 감을 따려고 어찌나 발돋움을 해댔던지 발목이 뻐근할 정도였다. 장대 끝에 가지가 꺾여 걸려 내려오는 탐스러운 감 덩이를 두 손에 넣으면 마치 인생의 따뜻한 호롱불 하나 받아든 마냥 밝아지고 감격스러웠다. 따는 재미에 푹 빠져 장대질의 사정권 안에 든 감들을 죄다 따려고 기를 쓰지만 우듬지 근처의 몇 개의 감들은 손에 닿지 못할 아스라한 욕망의 좌절을 맛보게 하곤 했다. 우리가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체득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어른들은 그 몇 개의 감들을 따지 말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까치나 새들이 먹을 것은 남겨 두라는 것인데 그게 바로 까치밥이었다. 새들이 와서 쪼아 먹도록 인정을 베푸는 것이다. 더러 빨간 감 몇 알씩 남아 있는 감나무가 삭막하지 않고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우리들의 따뜻한 마음이 가지에 함께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산그늘 속에서 노을을 받아 붉은 등을 켠 까치밥. 인생에는 가질 수 없는 것도 있음을 깨우쳐 준다. 더 나아가 우리가 누리는 것의 잉여를 누군가 더 약한 자들을 위해 배려하고 나누는 것이 인간됨의 기본 도리임을 가르쳐 준다. 서리 묻은 채 눈발을 맞이하는 저 까치밥은 추수 때 이삭을 다 베지 말라시며 소외된 자들을 위해 남겨 두게 하신 주님의 불빛 같은 사랑을 닮았다.
529 십일월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892 2017-11-22
햇빛편지 십일월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만산홍엽. 마을이 온통 불을 켠 나뭇잎들로 밝아진다. 산과 들에 억새풀들이 살랑거리며 지친 마음을 위로해 준다. 그러나 금세 찬바람이 불어와 첫눈이 흩날리면 화려한 빛깔은 갈색조로 변하고 낙엽들은 이러 저리 쓸린다. 벼 밑동들만 말없음표로 열 지어 남은 빈들의 쓸쓸함이 더해 가고 돌개울에 얼음이 끼면 마을은 또 다시 무채색의 겨우살이에 든다. 외면의 무수한 자랑거리들을 벗어 버리고 나무들은 겸허히 제자리에서 한층 내면으로 깊어 가는 생의 의미를 인식하며 짙은 하늘을 바라본다. 이토록 십일월은 오랜 곡절의 뒤안길을 쏘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와 철든 사람처럼 조용하고도 성숙한 얼굴을 지녔다. 11이라는 숫자는 아무런 치장도 없이 오직 소탈하게 두 다리로만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이다. 모든 것을 털어 내 버린 빈 몸으로 바람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곧게 선 그 모습. 겸허하나 단단한 자세. 그렇게 십일월은 요란함 없이도 많은 의미를 건네주는 말없음표를 닮았다. 고즈넉한 산마을에 십일월의 노을이 물들면 하늘의 종소리를 듣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거룩한 행렬처럼 새들이 날아든다. 우리도 제자리로 돌아와 화려함을 벗고 말수를 줄이자. 더욱 단단해지고 겸허히 깊어지는 이 계절을 건너가자.
528 정석과 해법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061 2017-11-07
햇빛편지 정석과 해법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신앙도 삶도 난해하다고 아우성이지만 조금만 차분히 풀어 보면 정석을 따라 해법이 나온다. 정석이란 말은 바둑의 공수에서 최선의 답, 불변하는 정해진 원리, 원칙이라는 뜻이다. 바둑 실력처럼 신앙과 삶도 정석 위에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정석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해야 한다. 정석을 많이 연구하고 공식을 대입해도 잘 안 풀리는 때가 있다. 약간이라도 변형되고 복잡한 문제가 나오면 갈팡질팡한다. 응용력이 약해서 그렇다. 거기엔 시간이 필요하다. 여러 문제들을 맞닥뜨려 풀며 실패도 하고 오답 풀이도 하며 그렇게 실력이 붙으면 유사한 문제들을 즐겁게 풀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익숙한 문제임에도 틀리기도 한다. 그 요지와 핵심을 놓쳐서 오해했거나 잘 풀어 나가다 중간에 공식 대입을 잘 못하고 부주의로 실수하는 때문이다. 너무 쉬워 우습게 알다가 놓치기도 하는데 겸허하고 침착하게 접근해야 한다. 습관적으로 실패하는 과정과 잊어버린 공식은 없는지도 살펴보자. 때론 문제 자체가 생소하고 여러 복합적인 해석을 요구할 때 속수무책으로 절망감에 빠진다. 나름 최선을 다해 터득한 지식과 경험을 기초로 성실히 풀었는데도 답을 얻지 못한다. 이럴 때는 좋은 참고서를 비롯해 자신보다 능력이 있는 선배나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더 나아가 정석의 지은이에게 문의해야 한다. 그 문제의 목적과 핵심이 무언지, 해법을 가르쳐 달라고 붙들고 매달릴 수밖엔 없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친절한 도우미이시다. 선지자 하박국과 선진들이 그랬듯이 절실한 질문을 갖고 나아갈 때 그분은 풀이 방식과 과정을 깨우쳐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즐겨 찾아갈 분은 하나님이시다.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풀 줄 안다는 것. 정석과 해법을 주시는 분이 계심을 믿는 것. 이것이 안정된 성도의 신앙과 삶이다.
527 단풍잎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442 2017-10-25
햇빛편지 단풍잎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산마을의 가을의 깊이는 산 위로부터 내려오는 단풍의 속도에 비례한다. 숱한 단풍잎들은 각양각색 사연을 품고 있다. 저마다 자서전을 쓰며 내려와 포개지는 꾸밈없는 몸짓들. 그 짙은 얼굴들을 들여다보면 영혼의 갈피를 적시며 밝은 빛이 번져 온다. 말끔하고 화려한 잎들도 좋지만 그을리고 뚫려 상처투성이인 잎들도 정감을 준다. 얼핏 초라해 보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것은 무슨 이유일까. 세월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늘을 향해 온 몸을 드리다 겸허히 제 자리를 찾아가는 천로역정 같은 드라마 때문이다. 격정의 시절을 보낸 후 내려앉는 나뭇잎들은 대부분 말이 적은 편이다. 살아온 내력을 나직이 몇 마디로 들려 줄 뿐이다. 그 어떤 웅변과 몸부림보다도 울림이 깊은 자기 성찰과 진지한 삶이 곱게 무늬지어 있다. 단풍이 드는 이유 중 하나는 월동 준비 때문이란다. 기온이 내려가면 나뭇잎과 가지 사이에 떨켜가 형성되어 낙엽이 지도록 하고 그 잎이 떨어진 자리를 보호한단다. 또 가을엔 엽록소가 파괴되어 녹색이 줄고 안 보이던 안토시아닌, 카로틴, 크산토필 같은 색소가 나타나 빨강 혹은 주황이나 노랑으로 물들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불필요한 양분은 배출하고 필요한 양분은 새 잎 돋는 봄까지 축적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햇빛과 비바람 속에서 물든 단풍은 낙엽이 되기 위함이요 낙엽은 또 다시 펼쳐질 푸르른 숲의 계절을 준비하는 창조의 산물이다. 낙엽들이 쌍그란 서리에도 서로 몸 부비며 따뜻한 시간을 엮어 가는 것은 주의 자녀들이 고난의 시대를 사랑으로 이겨 내는 숙연한 모습과도 같다. 아픈 몸 구멍 난 상처를 서로 감싸 안으며 긴 눈발이 지난 후에 다가올 봄날의 합창을 준비하며 저들은 자기 자리에서 썩어질 것이다. 그리고는 새로운 꿈으로 돋아난 잎들이 미소 지을 것이다.
526 가을빛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912 2017-10-10
햇빛편지 가을빛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에 햇빛을 받고 서서 산과 골짜기와 사람 사는 마을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깊은 가을의 색감이 감사와 찬양으로 마음을 잔잔케 한다. 하나님은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힘 있게 솟은 산과 여러 풍경 속에 우리를 더 깊은 성숙으로 이끄는 묵상 자료들을 펼쳐놓으셨다. 산마을의 품에 그윽이 안겨드는 가을빛은 밝고 부드럽고 따뜻하다. 반짝이는 은행잎, 찰랑이는 냇물, 너볏하게 숱한 세월을 건너온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황토밭, 돌담과 산록에 스며드는 빛은 고흐도 고갱도 모네도 어느 인상파 화가도 모사할 수 없는 영혼의 본색이다. 이 빛은 가난한 집의 낮은 굴뚝에도 널따란 종가집의 마루 밑에도 스며 있고 폐교의 작은 운동장에서도 조용히 숨을 쉰다. 지팡이를 짚고 조심스레 마실을 도는 노인의 굽은 등에도 종일 들판을 드나드는 새들의 바쁜 날개에도 발갛게 묻어 있다. 나무들과 풀들과 돌들과 햇빛이 어우러져 곱고 아늑한 산마을의 아름다움을 만든다. 인간도 저 그림 속에서 서로 어우러져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겸허히 받들며 살 때 참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가을빛은 그리스도의 은혜처럼 산마을의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속속들이 스며들어 모두가 깊은 평안을 누리게 한다. 고요하고 짙은 천국의 빛. 얼굴을 씻고 젖은 눈으로 본다. 온 산의 단풍잎이 일제히 등불을 켜고 일어서는 것을.
525 열매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108 2017-09-18
햇빛편지 열 매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햇살이 따갑다. 들판의 곡식들도 잘 익어 간다. 저렇게 비와 햇빛을 고루 맞으며 식물들은 제 열매를 맺기 위해 성숙해 가는 것이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유명한 시 ‘가을날’의 첫 대목이다. 가을의 멋진 열매를 위해 여름은 성숙의 과정을 제공하는 위대한 계절이다. 그러므로 가을의 소망을 품은 자는 그 모든 뜨거움을 견디며 결실의 날을 기다린다. 바람에 출렁이는 벼들, 외딴 산 속에 저 혼자 숨어 열린 청미래, 기슭의 남천, 개암열매 등 여기 저기 각종 열매가 익어 가는 풍경은 늘 감동을 준다. 사과나 배, 감 같은 이름 난 과일들은 자태나 맛으로 첫째를 다투는 열매들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풍성한 정서적 포만감과 기쁨을 선사한다. 한편 모과나 유자, 호두처럼 모양은 울퉁불퉁하지만 그 향과 맛과 열량이 뛰어나서 몸에 좋은 실속 있는 열매들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곳, 다채로운 모습의 열매들은 열매라는 그 자체로서 이미 아름답다. 산모퉁이 그 어떤 작고 하찮게 보이는 것이라도 열매라는 현재의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그 지난한 성숙의 과정은 참으로 숭고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할 때, 환경과 삶의 궤적은 모두 다를지라도 성숙한 성도라는 아름다운 열매로 익을 때까지의 치열함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임을 안다. 그래서 제 빛깔과 맛과 향이 깊어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열매들은 이름이 있든 없든 아름답다. 이 아득한 산마을은 각양의 열매들이 은혜로운 햇살에 익어 가는 향기로 그윽하다. 보라, 곧 추수의 날이다.
524 아 (我)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000 2017-09-06
햇빛편지 아 (我)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나 아(我). 한 글자. 외롭게 보이지만 큰 파급력을 지녔다. 철학적으로는 의미심장한 실존적 단어이다. 그러나 아집, 아상, 자아도취, 아전인수 등의 부정적인 의미에도 많이 연접해 있다. 그만큼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 중에 아집(我執)이나 아상(我相)은 사실 불교적인 용어인데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대상을 바르게 관찰하지 못해 오만과 분노와 고통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어 탐욕과 갈등의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은 나말고도 너라고 하는 존재들로 가득한데 그 너들이 모두 다 아(我)로서 나 중심으로 산다는 것. 그래서 독선과 이기성으로 너는 없고 나만 있는 사회가 된다. 이것은 세상의 갈등 구조에 대한 타당한 분석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 문제의 답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는 죽었으니 이제 나는 없고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삶이 재편성된다. 중생자가 아직 아상에 잡혀 있다면 바울처럼 자신을 쳐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무아(無我)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성경적 무아는 자기학대나 소극적인 삶의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자아의 소중한 가치를 기반으로 타인을 향한 독선과 이기성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이타적 삶으로의 전환을 권고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자신을 낮추고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의 좌표를 중요시한다. 주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은 이 좌표 위에서의 진정한 자아인식을 전제로 하신 말씀이다. 마틴 부버도 오래 전에 간파했다. 나와 너라는 세상의 기본 구조를. 하물며 중생자가 세상을 보는 자기중심성을 벗어난 그리스도 중심의 무아와 이타의 삶을 향해 구원 받은 것을 모른다면 어찌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하겠는가.
523 냉정과 온정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146 2017-08-23
햇빛편지 냉정과 온정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두부 자르듯 전후좌우가 분명한 태도로 산다면 군더더기 없고 참 좋을 것 같은데 쉽지 않다. 정 때문이다. 따라서 공적인 일임에도 정에 매이곤 하는데 그것을 온정주의라 한다. 정의 사전적 의미가 ‘오랫동안 지내 오면서 생기는 사랑하는 마음이나 친근한 마음’이다. 그러니 혈연, 학연, 지연 등으로 가까울수록 정을 저버리는 게 어려운 것이다. 이러한 정의 역기능에 과민해지면 정의로운 공정성을 이유로 매사에 차가운 사무적 태도로만 무장하게 된다. 지인에게는 물론이요 모르는 이에게는 더욱 가혹해진다. 그러나 냉정하게만 사는 것도 삭막하다. 공사를 추상같이 구분하는 것은 지당하지만 인격적으로 너무 매몰차게 대하는 경우도 왕왕 있기 때문이다. 일은 얻고 사람을 잃는다는 말이 그럴 때 나온다. 재고해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참된 정이라는 것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근본적인 따뜻함,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정서적 본능과 태도를 말한다. 이 정마저 발휘되지 않는다면 사회 속에서의 사람살이가 얼마나 매섭고 슬프겠는가. 그러므로 공적, 법적 질서를 수행하는 일에 공정과 냉정이 분명 중요하나 그 경우에도 사람을 대하는 최소한의 따뜻한 태도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일에는 온정과 관대함을 요구하면서 타인에게는 철두철미 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냉정을 견지하곤 한다. 그러나 정이 바르게 활용되는 기준은 자신에게는 냉엄하더라도 남에게는 관대한 자세이다. 타인의 공적인 잘못을 눈감아 주는 온정주의를 말함이 아니다. 당사자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을 헤아려 주고 최선의 따뜻한 언행심사로 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다. 개혁주의자일수록 냉정함 속에서도 경직됨 없이 참된 온정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522 샘터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140 2017-08-02
햇빛편지 샘 터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지금은 시골 어디에나 상수 시설이 좋아 편히 물을 사용하며 산다. 하지만 마을 공동 우물이나 샘터에서 물을 길어 마시던 시절이 있었다. 왜 그랬는지 그 힘든 샘터의 일은 대부분 여인들이 감당했었다. 소위 남정네들은 우물가에 안 나가는 게 체통을 지키는 거라는 통념 때문이었을까. 여하튼 물동이를 이고 새벽부터 샘터에 도착한 여인들은 안개 속에서 두레박을 내렸다. 그리고는 혹시 물 위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이물질들, 나뭇잎이나 먼지들을 이리 저리 흩어 치우고 가장 깨끗한 물을 퍼 올리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끌어올린 물을 동이에 담아 집으로 운반해 오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여러 번은 힘든 일, 내친김에 가득 채워 와야 했기에 무거운 물동이를 머리에 인다는 것은 여인들에게는 큰 고역이었을 터이다. 짚으로 만든 똬리를 머리에 얹고 그 위에 물이 찰랑찰랑 넘치는 물동이를 얹었는데 보통 혼자서는 힘들어 다른 이웃들이 올려 주곤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균형을 잡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혹 비탈이거나 돌쩌귀 많은 고샅일 경우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 위태로운 길을 우리의 어머니들은 물동이를 이고 비틀대며 조심조심 집으로 돌아오시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좋은 물을 마시게 하려고 정성껏 새벽 일찍 샘터에 나가시던 어머니의 마음을 다시 헤아려 본다. 그 물은 하나님이 삼손에게 주셨던 엔학고레의 생수요 세 용사가 다윗을 위해 목숨을 걸고 블레셋 진영을 돌파하여 갖고 온 생수와 같다. 우리에게 귀한 생수를 공급해 주시는 예수님의 절절한 마음이 다가온다. 참 사랑의 물.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정갈한 생명수 아닌가. 어느 날인가 어머니의 뒤를 따라가 보았던 그 안개 자욱한 샘터를 오래 가슴에 담고 산다. 첫새벽에 누군가를 위해 물을 길어 오는 마음으로 사명을 받드는 그대는 존귀하다.
521 어절씨구 새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161 2017-07-19
햇빛편지 어절씨구 새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사진_박종길(야생조류필드가이드)-검은등뻐꾸기> 슬픈 일이 많았던 우리 민족에게는 새들의 지저귐이 통상 울음으로 들렸다. 비둘기는 구구구, 종다리는 지지배배, 두견새도 꿩도 다 운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싱그러운 숲에서 들리는 온갖 새들의 소리는 분명 울음보다는 노래이다. 사람은 물론이요 지상의 동물들은 유독 생존 경쟁의 까칠함 속에서 매일 긴장하며 생활하지만 하늘을 나는 새들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서 늘 여유롭고 생기 있게 노래하는지도 모른다. 산록에 사는 각양 새들의 노래가 어우러져 마치 큰 합창곡을 듣는 것 같다. 그 중에는 재미있는 새 소리도 있다. 초여름이면 늘 우리 전통 민요 ‘옹헤야’의 한 대목인 ‘어절씨구’를 흉내 내듯 노래하는 새를 만난다. 산마을의 어디를 가도 틈만 나면 ‘어절씨구’ 하고 흥을 돋우니 나 또한 그 다음 소절인 ‘옹헤야’로 화답하며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아침에도 대낮에도 저녁에도 그저 ‘어절씨구’이다. 뭐 그리 고민하고 근심하느냐며 늘 즐겁게 살라고 위로와 격려를 준다. 하도 궁금해서 알아보았더니 그 새는 ‘검은등뻐꾸기’란다. 상처 같은 검은 등을 갖고 사는 그 뻐꾸기가 외로운 산길에 가장 힘이 되는 노래를 불러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우리도 날개는 없지만 하늘에 속한 백성이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격려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삶의 현장에서 매사에 힘을 내고 ‘어절씨구’ 노래하며 즐겁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 갈등이 채 치유되지 않아 나라가 아직 불안정하고 우리 안의 눈물이 다 마른 것도 아니다. 눈물에 젖어 있으면 대부분 감정이입을 하며 모든 만물과 만사를 슬픈 마음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의 앞날을 주께 의탁하며 그리스도가 주시는 근원적 기쁨을 통해 애써 노래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기쁨이 우울한 이 사회에 전이되어 변화를 일으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520 no image 발자국_박부민 국장
편집부
1192 2017-07-05
<햇빛편지> 발자국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비 갠 후, 닭들이 마당에 꽃잎을 찍어 댄다. 무수한 그 발자국들이 그려진 화폭을 걷다 잠시 내 발자국을 돌아본다. 거기에 고여 무늬지는 햇빛과 서늘한 그늘의 조화로 더욱 선명한 입체감을 갖는 발자국. 둘레가 부드럽고 아담하여 살아온 날들이 그리움으로 엉겨 있다. 처럼 인생의 아름다움도 빛과 그늘이 얽혀 만들어 낸다. 기쁨도 슬픔도 인생의 발자국을 분명한 윤곽의 흔적으로 만드는 요긴한 재료들이다. 그러므로 질척한 날들이 있더라도 흐트러지지 않고 겸허히 자기 분량만큼 정확히 찍혀 있는 발자국의 그 꿋꿋하고 과묵한 자세를 우리는 닮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주께서 맡기신 한 생애를 오롯이 살아 내는 것이 모두의 소망이리라. 그런데 저마다 개성 있고 의미 깊은 길을 걷고 싶어 하지만 돌아보면 때론 그 발자국이 왜 못나 보이고 추레해 보일까? 아마 내 자신만을 위해 아득바득 걸어왔던 쓰린 추억들 때문일 것이다. 내 행복, 내 기쁨, 내 성공만을 추구하며 급하게 휘몰아치듯 살아왔던 흔적 때문일 것이다. 조금은 버겁고 무겁더라도 나 아닌 타인의 유익을 생각하며 살면, 너무 심각하지도 경솔하지도 않은 내게 주어진 무게의 책임의식을 갖고 살면 이후로는 더 의미 깊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겠는가. 거친 삶에 지치고 쓸쓸해진 누군가가 인적 끊긴 절망의 모퉁이에서 한숨짓다가 나의 헌신과 봉사와 사랑의 발자국을 발견한다면 뜻밖의 격려와 위로로 삶의 용기와 의지를 다시 불 지필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뚜렷하고 값진 내 발자국이겠는가. 그런 작고 따뜻한 흔적 하나, 둘, 셋... 누군가를 위해 소박하게 남기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의 화폭 위에 새기는 참되고 아름다운 그림이다.
519 고귀한 눈물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202 2017-06-21
<햇빛편지> 고귀한 눈물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낡아 버린 밥솥의 뚜껑에 흥건히 맺힌 이슬은 온몸으로 뜨겁게 밥을 지어 바친 눈물이다. 흐릿해진 형광등에 돋는 검은 자국도 가슴을 태우며 어두운 방을 밝혀 준 눈물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 나를 위해 흘린 눈물들이 있다. 그 일생의 진액을 짜서 나를 위해 산화하며 흘린 고귀한 눈물들. 한 인간의 삶의 여정에는 대부분 누군가의 희생과 섬김이 있다. 돌아보라. 나와 그대의 지나온 생을, 그 생의 뒤안길을.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헌신을 아끼지 않은 조상과 부모와 형제자매, 친척들, 친구들, 동료들이 있다. 그러므로 작은 일을 이루었다고, 조금 살 만해졌다고, 행복하게 되었다고 그게 다 자신의 공이라 생각한다면 턱없는 착각의 과잉이다. 최근에 끝난 선거로도 쉽고 분명히 얻는 교훈이다. 도우미들, 숨은 공로자들, 지지자들, 그들 덕분에 당선자가 있는 것처럼 숱한 눈물이 뿌려져 내 인생의 화분에 꽃들이 이렇게 피어난 것이다. 나만을 위해 달려온 인생이었다면 이제 나를 위해 섬기고 희생했던 가족과 지인들의 그 공과 은덕을 기억하라. 기고만장하지 말자. 참으로 교만할 일이 아니다. 인생도 사회도 나라도 국제사회도 그렇다. 남의 눈물을 먹고 살진 자들, 타국의 도움으로 번영한 나라들. 이제는 역사와 주위를 돌아보며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와 우리 후대까지 이만한 신앙과 윤택함과 자유와 민주주의와 행복을 누리는 것은 희생하고 헌신했던 자들 덕분이다. 6.25가 그렇고 6월 민주 항쟁이 그렇다. 6월은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자신을 바쳐 우리를 지키고 도움을 준 숭고한 분들을 기억하며 감사를 표하는 시절이 되어야 한다. 나를 위해 자신을 바쳐 세월 속에서 낡아지고 흐려지는 것들을 다시 생각하라. 그런 역사와 사람들, 가족들, 이웃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실천할 것인가. 이제는 나와 그대의 차례이다. 그 눈물의 의미를 깨달았다면 대답해 보자. 나는 병아리 눈물만큼이나마 누군가를 위해 고귀한 눈물을 흘리며 사는가?
518 잡초 제거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250 2017-06-02
<햇빛편지> 잡초 제거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어느 마을에나 한두 채 정도의 무너져 가는 폐가가 있다. 인기척이 없는 휑한 집. 세월과 함께 삭아 내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한 인간도 가정도 사회도 나라도 저렇게 퇴락하는 것이겠거니 마음이 착잡해진다. 물론 어찌하든 고쳐서 쓸 만한 집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기둥도 서까래도 지붕도 아니다. 마당을 점령한 잡초가 더 큰 문제인 것이다. 제 때에 제거하지 않으면 온 집을 뒤덮어 버리는 번식력을 가진 잡초들. 어떤 덩굴 잡초는 그 뿌리가 너무 깊어서 호미로 파내어도 끄떡없다. 간신히 제거 작업을 하고 이만하면 됐다 싶어 얼마간 방심하면 그 틈에 다시 시퍼렇게 솟아나는 그 끈질김에는 맥이 탁 풀리고 만다. 민초들의 야성과 생명력을 이야기 할 때 흔히 잡초의 그 끈질김에 빗대기도 하지만 정작 잡초는 농민들에게 골치 아픈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마지못해 농민들은 제초제를 쓰는 것이다. 인체에도 해롭고 땅이 나빠지는 걸 알면서도 우선 힘에 부쳐 쉬운 길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그도 별 소용이 없다. 뿌리 깊은 잡초들은 일시적으로는 죽은 듯이 보여도 때가 되면 다시 살아난다. 우리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를 덮어 버리는 잡초와 같은 잘못된 사고방식과 습관의 고질은 우리를 퇴락시키는 주된 요인이다. 그러므로 그런 고질들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철저히 뽑아내야 한다. 특히 우리 사회 속에 여전히 왕성하게 번식하는 부정과 불의, 불공정, 이념적 편견과 이기주의, 지역주의. 그리고 모든 것을 경제 논리로만 재단하려 드는 물질만능주의. 그 잡초들을 제 때에 제거하지 않으면 개인과 사회를 뒤덮어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처음엔 잠복해 있거나 별 대수롭지 않던 미약한 잡초가 방관하는 사이 온 마당에 퍼져 결국 한 집을 덮어 버린다. 폐가는 무너지기 전에 묻혀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루지 말고 제 때에 뽑아야 한다. 단호히 작은 뿌리까지 없애 버려야 한다. 악습의 잡초를 키워 두지 말자.
517 기다림의 미학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608 2017-05-24
<햇빛편지> 기다림의 미학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새 대통령, 새 정권에 대한 온 국민의 기대가 크다. 하지만 지나친 기대와 조급한 채근은 금물이다. 한동안은 기다려 주고 협력하며 차분히 성원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 중의 하나가 기다림을 못 참는 것이다. 그렇게 지지해 주다가도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혹독한 비난과 비판으로 돌아선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고 우물에 가 숭늉 찾는다는 것이 우리나라에선 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단기간에 공약이 성취되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것이다. 당대에 큰 업적을 남기려는 성과주의도 여기서 비롯된다. 중앙이든 지방이든 이런 조급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 사회가 온통 불안정 속에서 늘 초조한 분위기가 된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사회인가? 빨간 신호등인데 그냥 짓달려 가는 차들이 종종 있다. 이걸 보면 기다림은 질서와도 관련이 깊다. 기다림의 미학을 모르니 법적 질서를 지키거나 정당한 순서를 기다릴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급행료 같은 뇌물로 제 순서를 앞당기는 불법, 비리, 부정이 발생하고 사회 계층 간의 위화감과 갈등이 확산되곤 한다. 기다리지 못하는 습관은 자기 파괴적인 자해 행위이며 사회적 고비용을 치르게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노력이나 성과를 참지 못하고 쉽게 힐난하고 매장해 버리는 각박한 사회를 만든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상비평적 함축어가 ‘빨리빨리’이다. 이것을 속도의 경제로 보면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나마 발전하게 된 장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다림의 습관이 산출해 내는 개인적 안정과 건강, 사회적인 질서와 상호 신뢰성은 경제적 셈법을 넘어선 막대한 유익과 가치를 우리에게 안겨 준다. 성숙한 사회는 기다림을 안다. 단번에 성과를 내라고 닦달하지 않는다. 농부가 가을의 추수를 기다리며 과정에 최선을 다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차근차근 일하며 참고 기다리는 습관을 기르면 좋겠다. 의미 깊은 기다림의 끝에는 모두가 풍성하고 좋은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516 no image 찬란한 기쁨의 계절
편집부
1339 2017-05-10
<햇빛편지> 찬란한 기쁨의 계절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온 마을이 연초록 융단으로 덮였다. 햇빛은 넘실대고 산은 더욱 힘찬 얼굴로 우뚝 선다. 이 푸른빛을 배경으로 모란꽃이 우아하게 피어났다. 김영랑 시인은 모란이 만개하는 이 오월을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 했다. 화려하게 피었다 지는 인생의 슬픔을 빗댄 것이겠지만 아마도 일제 강점기에 속으로 삼켰던 눈물을 의미한 것이기도 하리라. 이윽고 빼앗긴 들에도 찬란한 봄은 왔지만 슬픔이 가시지 않았던 것은 그 후의 분단과 동족상잔의 아픔과 역경의 세월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3월에도 4월에도 5월에도 격동의 역사를 써내려 왔다. 독립을 위해,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봄날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봄은 슬프면서도 찬란했었다. 제 철에 피어서 사람들을 위로하는 꽃들이 참 아름다운 이유는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순리를 저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영광을 송이송이 발현하며 제 자리에서 겸손히 자기 몫을 잘 감당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꽃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우리, 사람은 어떠한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지 못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제 자리를 이탈하기 일쑤이다. 이 꽃 피는 봄날에 새로운 미래를 위해 새로운 정권이 세워졌다. 어렵사리 뽑힌 일꾼은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제 자리를 지켜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겸허히 나라를 위해서만 일해야 한다. 덧붙여 우리 모두도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제 몫을 잘 감당하는 책임 있는 국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나라가 오월의 꽃과 빛을 닮아가기를 바란다. 천지에 슬픔은 자취도 없어지고 모란꽃보다 더 찬란한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나라가 되기를 소원한다. 우리의 후손들이 햇빛 쏟아지는 역사의 대로를 힘차게 달려가는 미래가 되기를 기도한다. 꽃향기 속에 생명력의 절정으로 향하는 이 계절은 구름 낀 날에도 푸른빛을 감추지 않는다.
515 땅울림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364 2017-04-19
<햇빛편지> 땅울림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어린 날 친구들과 땅에서 놀며 짓궂은 장난질을 했었다. 바람에 떨어진 풍뎅이를 잡아 발을 다 떼어 내고 목을 비비꽈 돌려놓으면 앵앵 제자리를 돌며 발버둥치는 꼴이 재미있어 히죽대던 철없는 아이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전자에 물을 담아 와 개미들이 종일 파놓은 개미집 구멍에 부어대는 엽기적인 짓까지 저지른 뒤에야 장난은 끝났다. 느닷없는 대홍수에 혼비백산 흩어지며 정신을 놓던 개미들의 아수라장이 우리에겐 즐거운 웃음거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금 철이 들어서 산 너머 고모네 집에 심부름 갈 때였다. 누가 따라오나 싶게 땅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분명히 땅이 울리는 소리였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소리는 독특한 지형 때문이었다). 어린 내 발자국 소리가 땅을 울리게 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순간 풍뎅이와 개미집에 장난쳤던 일이 떠올라 그 죄값으로 벌을 받는가 하여 들입다 달려가며 따라붙는 공포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땅울림은 더 크게 내 귀와 가슴을 두드렸다. 그 후로는 혼자 그 산을 넘는 일은 없었고 땅에서의 장난질도 그쳤던 듯하다. 미물을 함부로 대하는 마음도 돌아보면 좋지 못하거든 가난하고 힘없지만 말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눈물짓게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세월호 사건 같은 국가적 슬픔의 문제들을 외면하거나 조롱하는 일은 누구든 삼가야 한다. 더욱이 남의 나라를 침략한 당사자들이 진정한 회개함도 없이 죄악의 역사를 왜곡하고, 슬픔을 치유받지 못한 피해국과 국민들을 조롱하는 것은 또 하나의 죄악이다. 하나님이 땅에 심어 놓으신 이치가 그렇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마음을 하나님은 무척 싫어하신다. 멸시와 천대를 받아 억울한 피울음들이 쌓이면 거대한 땅울림이 일어나고 결국 모두가 울게 된다. 가인이 죽인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했다고 했다. 땅의 울음이 하나님께 상달되면 심판의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땅울림의 경고를 깨닫는 귀와 가슴을 가져야 할 것이다.
514 부활의 아침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465 2017-04-05
<햇빛편지> 부활의 아침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안개 속에서 막 깨어난 꽃잎에 이슬이 맺힌다. 꽃잎이 촉촉하게 빛나는 것은 이 눈물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화려한 인생도 눈물 한 방울 쯤은 머금고 산다. 누구든 삶의 길목에서 진한 눈물을 만나곤 한다. 실상 눈물이 온전히 마른 날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아픔이 오히려 생을 성숙시키기도 한다. 햇빛이 스며들어 이슬이 영롱하게 빛난다. 어떤 쓰라리고 슬픈 인생도 햇빛 한 가닥은 품고 있다. 모든 눈물 속에는 머잖아 찬란한 소망의 햇빛이 비쳐 오래 머물 것이다. 주님의 은혜가 있고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가 있고 기쁜 일들도 다가 올 것이다. 이토록 생명력으로 충일한 계절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은 의미 깊고 적절하다. 그런데 이 봄날은 죽음의 기침 소리 가득한 겨울의 눈물 끝에 비로소 다가오는 영광의 순간이 아니던가. 우리의 죄악과 그 징벌을 대신 담당하시고 죽음의 심연으로 내려가신 그리스도의 눈물과 고난이 없이는 천지에 가득한 생명의 향기는 불가능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분의 권능과 은혜의 햇빛이 세상의 눈물 속으로 스며들 때 비로소 진정한 봄날이 되는 것이다. 인생과 역사에 맺힌 눈물은 은혜의 햇빛으로 스며드는 생명을 갈망하는 아픔이다. 천지에 진동하는 큰 물소리와 만개한 꽃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 아침. 우리와 우리 사회의 내면에 고여 있던 모든 쓰라림과 슬픔과 절망 속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햇빛처럼 쏟아져 내리기를 기도한다. 이 빛나는 계절, 우리는 어떤 어둠과 눈물의 골짜기에서도 생명을 누릴 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513 왁자지껄 교향곡_박부민 국장 파일
편집부
1442 2017-03-22
<햇빛편지> 왁자지껄 교향곡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짹짹짹째재재재재삐리리릭삐삐삑. 아침부터 참새랑 까치랑 많은 새들이 숲과 들과 마을을 돌며 쉴 틈 없이 떠들어 댄다. 그에 더하여 각종 농기계 소리들이 합창하듯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우다다다타타크가가칼칼칼칼프프. 산기슭에서 작업하는 트랙터 소리, 길을 스쳐가는 경운기, 서로를 부르는 소리, 삽이나 괭이들이 땅에 끌리는 소리, 수시로 흘러나오는 이장님의 방송. 봄이 오면 어우러지는 온갖 소리들이 문자 그대로 소음이었다. 괴로운 잡음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그 모든 것이 정다워지기 시작했다. 아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소리를 낸다! 더더욱 봄의 소리들은 만물이 다시 깨어나는 이야기이고 생명의 잔치를 표현하는 노래임을 새삼 깨달았다. 겨울의 스산한 침묵과 잿빛 들판이 죽음을 닮았다면 그 죽음을 뚫고 나온 봄날은 생명의 소리들로 가득하다. 새 움이 트고 잎이 돋고 얼었던 땅이 녹아 푸석푸석 황토 내음이 묻어나며 골짜기마다 냇물이 졸졸 흐르고 사람들이 일터에서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아름다운 삶의 합창. 그것이 봄날의 교향곡이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소리만이 아니다. 때론 위태위태한 불협화음도 사실은 살아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서로의 귀에 예쁘게 들리는 소리만이 가치가 있고 선한 건 아니다. 모든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생명을 나타낸다. 소통의 과정에서 의견이 얽혀 시끄러워도 그것이 한편으로는 그 사회가 건강하다는 반증이다. 고요가 아름다운 때가 있지만 지나친 고요는 고독을 부른다. 오죽하면 수다를 통한 건강법까지 있겠는가. 음정과 박자는 다르고 서툴러도 생명의 소리들로 합주하는 봄날의 무대. 저 환희의 교향곡을 만들며 삶의 현장으로 함께 가자. 소음의 낙원을 바라보며 왁자지껄 나아가는 우리들은 살아 있다.
512 no image 다시 시작하는 봄_박부민 국장
편집부
1517 2017-03-08
<햇빛편지> 다시 시작하는 봄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잠깐의 꽃샘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봄이 왔다. 흙냄새를 맡으며 모두들 밭 갈고 씨 뿌리는 삶의 들판으로 돌아가는 시간. 생동하는 봄날을 꿈꾸며 긴 호흡으로 인내한 자에게 봄의 교향악은 더 없이 찬란하다. 이렇게 봄이 오면 만물은 다시 시작한다. 골짜기의 냇물도 다시 흐르고 숲속의 나무들도 꿈틀대며 생명이 약동하는 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 찬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지난날을 무작정 묻어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지난날이 전혀 무의미했다고 자조하거나 과오를 짐짓 모른체 해버린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잘못을 진정으로 반성하며 달라진 새 날을 맞이하겠다는 열망의 표현이다. 그래서 지나간 실패와 슬픔의 비천함에 더 이상 발목 잡히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그것은 또 한편 지난날의 영광이나 기쁨이나 성공에 그저 안주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제의 실패와 성공에 연연하지 않고 그것을 교훈 삼아 더욱 창조적인 오늘과 내일을 열어 가려는 자세이다. 그러므로 비록 뒤늦게라도 다시 시작하는 것은 참으로 겸손한 태도이며 결코 부끄럽거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이란 성찰과 결단을 통해 앞을 보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발전이란 실패의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주저 없이 다시 시작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성숙이란 성공의 기쁨 속에서도 자만하지 않고 꿈을 향해 겸허히 다시 시작하는 자세를 말한다.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모든 영역에서 우린 언제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개인과 가정과 사회가 날마다 새롭게 되는 길이다. 꽃피는 봄. 다시 시작하는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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