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511 no image 우리나라의 강_박부민 국장
편집부
1473 2017-02-22
<햇빛편지> 우리나라의 강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봄을 맞는 강은 얼부풀었다가 방금 녹은 아기의 볼처럼 발그레하다. 겨우내 숨죽인 몸을 천천히 이끌고 남은 눈송이를 털어내며 둔중한 산을 부드럽게 돌아 나오는 강. 어두운 엄동의 곡절을 안고 햇발 가득한 아침을 기다려 이윽고 뜨거운 입김 버무린 노을로 끓어오르는 강은 우리의 역사를 닮았다. 먼 마을 가까운 이웃을 아우르며 여린 갈대 뿌리 하나 쉽게 범한 일 없이 살갑게 흘러 얼음 녹이는 꽃바람의 고향에 그윽이 닿는 강. 우리나라의 강은 매몰차거나 거칠지 않고 저리도 순하게 흐른다. 너무 전투적이지 못하다며 자괴감에 허우적이는 사람들은 우리 역사의 이런 모습을 못마땅해 하지만 결국 끈질긴 생명력으로 숱한 도전을 이겨내고 길고 추운 밤의 꿈을 이루고 마는 것은 말없이 따뜻하고 착한 그 성품이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는 늘 약한 듯해도 끊이지 않고 마침내 산천을 적시는 참된 승리의 본류가 되고 만다. 한 가정을 지켜 내고 고을을 빛내고 나라와 세계를 장엄하게 이끌어가는 것은 완력이나 돈이나 명예나 지식으로 자랑하는 일순간의 포말과도 같은 거친 위세가 아니다. 온 들판을 헤집고 여러 마을을 집어삼켜 모두에게 상처를 주면서 제 앞만 생각하고 짓달리는 살벌한 물살은 불화와 죽음과 슬픔을 낳을 뿐이다. 그건 우리의 강, 우리의 역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 작지만 마음 깊은 우리나라의 강은 얼마나 굳센지 일제강점의 고난을 뚫고 지극한 나라사랑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믿음의 선조들의 청청한 가슴을 닮았다. 우리나라의 강은 서글픈 변란의 큰 산굽이를 만나 멈칫, 눈물짓기도 하지만 다시 숨 한 번 고르고는 이내 미소를 찾아 도란도란 오래 흐른다. 보라, 큰 바다로 멀리 흐른다.
510 no image 뿌리 깊은 하나 됨_박부민 국장
편집부
1294 2017-02-08
<햇빛편지> 뿌리 깊은 하나 됨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겨울이면 근처의 대숲이 마음을 끈다. 흑청 빛 센 바람이 불 때 마치 수양버들처럼 머리채를 흩날리며 우시시우시시 춤을 추어대는 작고 부드러운 숲. 가까이서 보면 대나무들은 아주 가녀린 몸매로 금방이라도 뽑혀나갈 것처럼 약한데 여간해서는 넘어지지 않는다. 폭설이 내린 날엔 눈의 무게를 못 이겨 길가로 휘어진 허리들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눈 녹은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상 복귀하여 말끔한 모습으로 햇빛을 받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튼실하게 하는 것일까? 살펴보니 깊은 뿌리와 하나 된 연대였다. 각 개체가 작은 동산에 깊이 뿌리내려 버티고 있을 뿐 아니라 촘촘히 붙어 서로 맞대고 어우러져 살고 있다. 칼바람 눈보라가 닥쳐도 흐트러지지 않고 개인의 뿌리를 더욱 공고히 하면서 동시에 전체로서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흔들려도 넘어지지 않고 휘어져도 쉽게 꺾이지는 않는 신축성. 상흔이 깊을 정도의 고난 속에서도 놀랍게 발휘되는 복원력. 연약해 보이지만 오랜 세월 제 자리를 지키며 숲을 지탱할 수 있는 그 뿌리 깊은 하나 됨은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생명력의 표상이다. 개인의 신앙의 뿌리를 바르게 내리고 전체가 거룩한 연대로 하나 됨을 지향해야 할 시간들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소통으로 화목하며 가까워지지 않으면 어찌 함께 겨울을 이겨내겠는가?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서로 힘을 써야 한다.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반응하며 움직이고 밀착해야 한다. 그것이 신축성과 복원력을 지닌 생명력 있는 모임을 만든다. 음산한 겨울바람도 아름다운 찬양의 피리 소리로 바꾸어 내는 경이로운 대숲을 오래 바라본다.
509 no image 그리운 설날_박부민 국장
편집부
1212 2017-01-25
<햇빛편지> 그리운 설날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산록의 까치들이 법석이며 겨울을 누빈다. 불 켠 추억의 남포등 속에 정다운 모습들이 떠오른다. 눈구름이 가까이 내려온 날, 부엌으로 장독대로 분주히 설날을 준비하던 어머니의 발길. 솔가지 타는 아궁이에 풍로를 돌리며 못내 세밑의 아쉬움을 털어 넣듯 송진 묻은 장작을 쪼개 넣으시던 아버지. 맛깔스러운 음식들의 향기. 굴뚝은 종일 뻐금뻐금 연기를 뿜고 밤 깎으시던 누런 할아버지 곁에서 사람살이 굳어진 속통을 단아하게 깎는 법을 배우며 차진 인절미를 볼 붉힌 홍시에 찍어먹곤 했다. 닳아빠진 고무신에 이윽고 흰쌀 같은 눈이 쌓이면 복슬강아지 발자국을 덧찍으며 아이들과 마실을 돌던 흙담 길이었다. 얼부푼 밤엔 칼 시린 시절의 손바닥을 화롯불에 설설 녹여 깊은 사랑을 톡톡 구워주시던 할머니의 탈바가지 얼굴. 그 주름 주름마다 맺히던 꽃망울. 겹 바른 창호지에 이울던 종짓불도 밤늦도록 붉고 구수하였다. 그립다. 정 깊이 모여들던 아늑한 앞마당. 큰 명절 설날에는 이토록 세파의 한시름을 놓고 인생의 시린 손바닥을 잠시나마 함께 녹이며 서로 사랑을 채워주던 정이 가득했다. 요즘엔 그 따뜻함이 많이 사라지고 힘들어 굳어진 표정의 귀향 행렬이 종종 우리를 안쓰럽게 한다. 왜 이리 서글퍼진 세태인가. 왜 이리 싸락눈처럼 쓸쓸해진 마음들인가. 경제만이 전부는 아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사랑하며 사느냐, 어떻게 참된 행복을 함께 나누느냐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만난 이웃들 친지들과 활짝 핀 얼굴들로 서로 축복해 주던 그 따뜻함이 몹시 그립다. 이 나라 성도들이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불빛 추억 속의 설날처럼 아늑한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면 좋겠다. 온 마을과 이웃과 가족들을 서로 끈끈히 엉기게 하던 그 뜨거운 온정의 화롯불이 더욱 활활 지펴지기를 기도한다. 외로움도 쓰라림도 계층도 세대도 그 무엇도 다 한 솥에 녹여내는 그리운 설날, 돌아오거든 다시 뜨거운 아랫목으로 함께 차지게 엉기리라.
508 no image 겨울 해바라기_박부민 국장
편집부
1114 2017-01-10
<햇빛편지> 겨울 해바라기 < 박부민 국장 nasaret21@hanmail.net > 종일 함박눈이 내린 밤에는 창호지 불빛이 유독 붉게 피었다. 감잎들이 달빛을 덮고 사그락거리는 쓸쓸한 뒤란의 겨울이 한 자 더 깊어지면 이불 속에서도 쉬 잠들지 못하고 봄이 오는 쪽으로 시린 귀를 열었다. 그러나 눈바람 소리만 배고픈 늑대울음처럼 밤새 뒷산을 헤집고 다녔다. 버젓한 놀이터도 별다른 놀이기구도 없었다. 아침부터 모여든 조무래기들은 거듭 쌓인 눈의 무게에 툭툭 솔가지 부러지는 숲에서 꿈을 좇듯 토끼몰이를 했다. 그러다 무료해져 둠벙에 들어가 썰매를 지치고는 몸이 얼면 옹기종기 붙어 따스한 해바라기를 하였다. 집 안팎의 추위가 크게 다를 바 없었던 겨우내 우리를 따뜻한 행복에 젖게 했던 것은 한낮의 해바라기와 밤의 화롯불이었다. 화롯불을 쬐는 일은 어른들이 잠자리에 들면 바로 끝나는 짧은 꿈같아서 우리에겐 구름 적은 날의 해바라기만이 온기의 근원이었다. 언덕에 기대어 갈라터진 손으로 콧물을 훔쳐가며 노래하고 장난도 치고 알 수 없는 마음의 서글픔을 나누면서 우리는 어린 날의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 더 눈이 내리고 땡땡 얼음이 얼고 땟국이 덜 가신 얼굴에 찬바람이 요리조리 벌겋게 싸리비 자국을 내며 동구 밖으로 달아날 때 봄은 천천히 동백꽃 수줍은 미소로 걸어왔다. 그제야 지푸라기 처마 끝의 고드름들이 동시에 줄줄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의 삶에도 이렇게 겨울이 깊어 차갑고 쓸쓸한 날들이 있다. 시퍼런 고드름처럼 얼어붙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그 속에도 근원적인 온기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고 서로 위로하며 해바라기를 하는 아름다운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 지금 눈보라 겨울 강을 건너는 그대여. 칼바람이 훑고 간 쓰린 상처들을 어루만지시는 좋으신 하나님이 계신다. 그렇기에 머잖아 봄은 더없는 큰 기쁨의 햇빛을 동반하고 우리 삶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눈물겹게 다가 올 것이다. 눈부시고도 분명하게 찾아 올 것이다.
507 no image ‘하나님의 사람’ 덕목들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09 2016-12-28
‘하나님의 사람’ 덕목들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교회의 회원인 신자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다음의 덕목들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을 향해 나타내어야 할 태도로써 ‘의와 경건’을 추구해야 한다. ‘의’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며 경건한 삶과 행동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심령과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의’는 이미 소유한 의로운 신분의 결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표준에 합당한 행동이며 법적인 의로움의 결과로 나타난 실제적인 의로움을 말한다. 경건은 ‘의’로부터 나오며 하나님을 향한 합당한 태도, 즉 행동 이면에 있는 경외심과 공경심을 가리킨다. 둘째, 신자의 내면과 관련해 ‘믿음과 사랑’을 취해야 한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하나의 동체를 형성하며 분리되지 않는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성령 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서 보여지는 ‘성령의 열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본질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셨다는 확신에 기초하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의존을 낳는 원리이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마음 속에 부어주신 것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존재하는 현재의 그리고 계속되는 관계이다. ‘소망’은 성도들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신뢰이다. 셋째, 신자의 외면과 관련해 ‘인내와 온유’를 추구해야 한다. ‘인내’는 삶의 모든 상황에서 지속적인 견실함을 보여주는 신자의 인격적인 측면으로 이것은 환난을 극복함으로써 형성된다. 이때 인내는 소망의 열매가 된다. ‘온유’는 인내와 달리 그리스도의 멍에를 받아들이는 신자들 안에서 발생하는 성품이다. 이러한 덕목들, 즉 의와 경건 그리고 믿음과 사랑 또한 인내와 온유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동시에 취하고 있으며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소극적으로 악을 피해야 하며 그것도 가능한 빨리 그것으로부터 멀리 떠나야 한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열심히 선을 추구해야 한다. 2016년을 보내고 2017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러한 덕목들을 더욱 추구하고 삶의 모든 정황 속에서 이러한 덕목들을 기꺼이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506 no image 흑암의 땅에 광명이 비취다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43 2016-12-14
흑암의 땅에 광명이 비취다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가나안 땅 갈릴리 지역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들에게 분배한 곳이었다. 이 지역은 솔로몬 이후 분열된 북이스라엘 왕국에 속해 있다가 BC 734년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에게 점령을 당한 이후 바벨론, 페르시아(바사), 마게도냐(헬라), 애굽, 시리아에 의해 차례로 점령되었던 곳이다. 통치자들이 바뀔 때마다 점령자들은 그곳 지역의 주민들에 의해 반란이 발생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주민을 강제로 타지방으로 옮기고 타지역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갈리리는 이방 여러 주민들이 이주해 오게 되었다. 그 결과 갈리리 지역은 잡다한 민족들이 섞여 살았기 때문에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지역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상당한 격차를 두고 있었다. 이곳을 ‘갈릴리’라고 지칭하기 시작한 것은 이사야에 의해 “이방의 갈릴리” 또는 “이방인들의 지역”이라고 불리면서부터였다. 이것은 갈리리가 앗수르의 지배 아래로 들어간 이래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를 받는 유다로부터 단절되기 시작하여 버림을 받고 흑암의 상태로 떨어진 곳임을 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다. 사실 갈릴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항상 비천하고 천박한 곳으로 받아들여졌고 당연히 그곳 사람들을 멸시하고 천대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BC 80년 마카비우스 독립전쟁 때까지 한번도 갈릴리가 이스라엘의 통치 아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신약 시대에 와서도 그 격차는 더욱 심해져 있었다. 한마디로 갈릴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소외된 흑암지역이었다. 그런데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시는 메시아의 날이 성취된 증거로 멸시와 천대를 받던 “이방의 갈릴리”에 영광의 빛이 임할 것을 예언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마태는 메시아이신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출생하되 그 광명이 땅 끝까지 미칠 것이며 그 효시는 갈릴리에서부터 메시아의 광명이 비추이게 될 것이라고 해석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곧 임마누엘임을 증거했다. 임마누엘이신 메시아가 갈릴리에 복음의 광명한 빛을 비추인다는 것은 마침내 고대하던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징표였다. 공평과 정의의 나라는 다름 아닌 흑암의 땅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되던 것이다.
505 no image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우리의 고백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56 2016-11-29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우리의 고백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의인은 결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자격이나 공로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근거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 이 비참한 상태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당하는 어떤 질병이나 고난보다 더 심하다는 사실을 의인만이 느낄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이다. 따라서 의인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구원을 의뢰한다. 이때 의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따라 자신이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을 믿는다. 더불어 의인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하나님께 눈물로써 애원하게 된다. 이 역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의 언약에서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에도 그랬고 그 이후의 역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인자하심 곧 언약적 사랑을 그의 백성에게 베푸셨다. 따라서 언약 공동체의 각 구성원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통해 그의 인자하심을 지속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 근거하여 신자들은 비로소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된다. 곧 신자들은 하나님의 의 앞에 있는 자신의 예전 상태에서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그의 인자하심을 근거로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신자는 더 이상 자기를 괴롭히는 그 많은 죄악의 어둠으로부터 비로소 밝은 빛의 길로 들어서게 됨을 찬송하게 된다. 이때 신자들은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자신의 간구를 받으실 것이라고 확신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단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며 영속적임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언약적 사랑을 찬송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의가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선언하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함의한다. 곧 신자의 찬송은 모든 악을 철저하게 규명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피난처가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로 부름을 받은 구약의 성도들의 고백이었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믿는 교회의 고백이며, 동시에 오고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와 신자들의 찬송이자 고백이 될 것이다.
504 no image 우리에게 왕은 누구인가?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47 2016-11-16
우리에게 왕은 누구인가?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각별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곧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시고 그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어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언약관계가 그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시편에서는 여호와를 가리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시5:2)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 호칭에는 만유의 창조자이시며 궁극적인 주재이심을 고백하는 보편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의 역사 의식에 비추어 볼 때, 이 호칭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공동체와의 긴밀한 연대감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이라는 영광스러운 구원 사건을 통해 그 자신을 친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계시하셨다. 그리고 최초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심으시어 그곳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던 것처럼 이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심으셨다. 또한 그곳에 에덴 동산과 같이 하나님의 지극하신 영광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친히 그 나라의 왕으로서 임재하시어 그 백성을 다스리신다. 따라서 하나님을 왕으로 호칭함에 있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상은 언약의 성취와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다스리시되 약속하신 언약을 신실히 수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 백성들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 이 사실은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성막을 주심으로 확고하게 드러내셨다. 성막의 양식과 구조는 여호와의 임재와 통치 나아가 그의 백성을 치유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사역을 상징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이제 그 백성들도 언제든지 여호와 앞에 나아가서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막 제도 안에서 직접 왕이신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영광스런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 시대의 신자들에게는 동일한 약속이 주어졌다. 바로 교회가 그것이다. 이제 신자들은 예배를 통해 왕이신 하나님을 친히 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곧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예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503 no image 성령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방도_송영찬 국장
편집부
1436 2016-11-01
성령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방도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신자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의 공적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에게 있어서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그 어디로부터 아무런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신자들이 공적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신자로서 살아갈 다른 길이란 없다. 우리 몸에서 육체는 전적으로 영혼의 기능을 통해서만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되어 있다. 이런 이유에서 영혼이 생명의 젖을 먹지 않고서는 육체도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이런 상태는 생명이 살아 있어도 그것은 생물학적인 생명일 뿐이며,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신자로서 꼭 필요한 영의 양식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유일한 통로가 공적 예배이다. 이 예배 안에서 성령께서는 은혜의 방도인 말씀과 성례와 기도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게 하신다. 성경 외에, 곧 예배 시간에 목사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 외에 그 어떤 책이든, 심지어 그 책이 칼빈의 저서라 할지라도 그것은 직접적인 은혜의 방도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일반은혜(일반은총, 일반계시)에 속할 따름이며 오로지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만이 특별은혜(특별은총, 특별계시)에 속하기 때문이다. 특별은혜(특별계시)는 성령께서 직접 작용하는 은혜의 방도를 가리킨다. 곧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성례(세례와 성찬)와 공적인 기도가 성령께서 직접 신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이 성경을 읽든지 기도할 때에는 은혜의 방도인 예배시간에 선포된 말씀과 예배에서 드리는 공적인 기도에 근거하여 골방에서든 어디서든 말씀읽기와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의 성경읽기와 기도는 어디까지나 예배에서의 공적인 말씀선포와 기도에 직접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공적 예배의 연속선상에서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성경읽기와 기도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것은 경건생활의 한 면이라 할 것이다. 반면에 공적 예배와 상관없는 성경읽기(특히 큐티와 같은 류) 또는 개인의 유익을 추구하는 기도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는 있을지라도 그것은 더 이상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도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502 no image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_송영찬 국장
편집부
1283 2016-10-18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의롭다 함’이라는 말은 법정적 용어로 재판관은 법정에서 두 당사자에게 한 사람에게는 의롭다고 인정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유죄 판결을 내려야 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이 판결이 반드시 당사자의 도덕적 성품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판관은 개인의 도덕적 품성이 아닌 판결해야 할 사건의 속성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유리하게 판결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불리하게 판결을 내려야 한다. 이 용어가 종교적인 문맥에서 사용될 때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가 하는 문제의 답변으로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사람이 아무리 선을 행해도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요구하신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는 또 다른 대안이 아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공로’와 반대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으며 오직 용서와 은혜와 사랑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제의를 받아들이겠다는 고백이다. 이 하나님의 제의는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즉 화목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인 참된 ‘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어질 뿐이다. 이 ‘의’를 가리켜 바울은 ‘믿음에 근거한 하나님의 의’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가 요약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소원한 관계에 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재정립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율법에서 난 ‘의’로 자신의 공로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다. 참된 ‘의’의 원천은 하나님 자신의 구속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 즉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신뢰하고 그에게 복종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에 의해 전인격적으로 수용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501 no image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교리에 근거한다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28 2016-10-04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교리에 근거한다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오늘날 개신교는 불행하게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각각 다른 교리를 주장하면서 다른 교파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한때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적인 바른 교리를 찾을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개신교 안에서 주장하는 교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은혜의 교리’로 이것을 ‘개혁주의’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자유의지 교리’라고 하며, 이것을 주장한 신학자 야곱 알미니우스의 이름을 따서 ‘알미니안주의’라고 한다. 자유의지 교리의 특징은, 말 그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다. 이 교리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예정하신 것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께서 만민을 위하여 죽으셨지만, 오직 이 사실을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 3. 사람은 자기의 의지로써 선을 행할 수 없고, 성령의 인도로 선을 행한다. 4. 거듭난 사람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로써 이루어지기는 하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다. 5. 믿는 자들이 성령의 도움으로 믿음을 보전하지만, 그 은혜에서 떠날 수 있다. 반면, 위 알미니안주의자들의 항론에 응답한 개혁주의 교리의 5개 조항은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여 하나님을 영접할 의지가 없다(Total depravity). 2.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만이 아무런 조건 없이 구원을 받으며, 믿음도 은혜로 얻는다(Unconditional election). 3.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만을 거듭나게 하신다(Limited atonement). 4.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은 인간이 거절할 수 없다(Irresistible grace). 5. 성도가 받은 구원은 상실될 수 없다(Per-severance of the saint). 이상의 비교에서 잘 나타나듯이 두개의 교리는 서로 상반된다. 그런데도 알미니안주의를 믿는 따르는 교파와 교인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성경을 올바로 깨닫고 성도에게 주어진 선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워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장로교회로서 더욱 개혁주의를 단단히 붙잡아야 할 것이다.
500 no image 심령이 가난한 자_송영찬 국장
편집부
1227 2016-09-21
심령이 가난한 자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우리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 것처럼(마 10:38; 16:24) 자기에 대한 부인과 부정을 말씀하셨다. 그러기 위해서 왜 자기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거기에는 자기 인식의 근거로써 절대적인 표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인격이다. 절대적인 진, 선, 미를 갖고 계신 하나님의 인격, 즉 그 하나님의 품성에 비추어 놓고 볼 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불순하고 불미스럽고 불의한가에 대한 통감(痛感)을 느끼게 된다. 단순하게 하나님은 절대적인 선과 의를 갖고 계시는 데 비하여 나는 불순하다, 불의하다는 정도가 아니다. 그 결핍에 대해 아픔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에 대해서 모자라는 분량을 발견하면 할수록 그 아픔은 커지기 마련이다. 즉 하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하나님에 대해 느끼면 느낄수록 자신의 불순과 불의함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죄에 대한 각성(覺醒)이라고 한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결핍을 죄라고도 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에 비추어 순일(純一)하지 못하고 그 절대적인 속성과 의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에 비추어 볼 때 절대적인 죄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또 하나님의 계시가 분명해질수록 더 죄감(罪感)을 느끼게 된다. 죄에 대한 감정이 발전된다는 의미이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의롭고,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어떤 위로를 받을 수는 없다. 이러한 상대적인 죄 감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울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깊이 느끼고 생각할수록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를 가지고 있는가를 통감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힐난하거나 비난하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더 죽고 싶을 정도의 심정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의식이 높아지고 깊어질수록 마음이 공허한 것이다. 곧 마음이 비어지는 것이다. 이 상태는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없고 대치할 수도 없다.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의의 결핍, 즉 죄를 발견했다면 그것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우리로서는 그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할 다른 방도를 포기해버린 상태가 심령이 가난한 상태이다.
499 no image 예배는 신앙고백 일치 위에 있어야_송영찬 국장
편집부
1279 2016-09-06
예배는 신앙고백 일치 위에 있어야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교회는 상호 구원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언약 공동체이다. ‘나’ 한사람의 구원의 완성이 결국 전체 교회원들의 구원을 완성하게 한다. 반면에 ‘나’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부실은 전 교회원들의 구원에 막대한 방해를 가져다주게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 대하여 심각한 책임을 통감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한 연합을 통하여 공동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란 몇몇 사람들의 생각이나 사회적인 현상이나 어떤 철학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복음의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매우 중시해야 한다. 결국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우리를 영적 연합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는 일찍부터 교회 회원들의 신앙을 하나로 묶어 놓기 위해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보다 잘 가르치고 보존하기 위해 교리문답을 작성해 이를 통해 신앙의 일치를 추구해 왔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한 마음을 이루고 한 뜻이 되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사회를 이룬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서 공동 사회를 이루어 나가고 하나의 독특한 성품을 표출해 나가게 되는데 그것이 교회의 고유한 문화이다. 이 문화는 이 시대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을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표방하게 하는 귀중한 자태로 역사 속에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종합하여 하나의 문화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배이다. 이 예배를 통해 거룩한 문화를 이 땅에 세워나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간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성하고 있는 언약 공동체인 교회로서의 삶의 형태가 단회적이지 않고 복음의 보호 아래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될 때 거기에는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매우 고상하고 독특한 문화가 발생하게 된다.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찬연히 빛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땅에 구체적이고 유형적이며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새 하늘 새 땅에서 온전하게 예배를 드리는 그 날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주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거기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모인 신자들만의 독특한 삶의 형태를 창출하게 되는 것이다.
498 no image 동질의 신앙과 동지애_송영찬 국장
편집부
1051 2016-08-23
동질의 신앙과 동지애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혼자 고전분투하면서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시대가 아니다. 때문에 오히려 공동의 교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교회를 세워나가고 그 안에서 신앙을 점검하는 것이 우선이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든지 신자 개인이 자기 혼자서 살 수 있도록 보냄을 받은 경우가 거의 없었고 함께 한 몸을 이루어야 할 지체들을 보내어 그들과 더불어 하나의 유형교회를 이루어 가고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삼손의 생애에서도 그와 같은 원리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하나님 나라로서 자태를 상실하고 오직 유일하게 삼손만이 교회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이스라엘 공동체로서 교회를 소망하였고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는 날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헌신하였다. 삼손이 항상 투쟁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을 압박하여 이스라엘로서 특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블레셋이라는 세력이었다. 삼손은 그 세력을 타파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본래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공동체로 회복될 것을 소망했다. 삼손은 자신만이라도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영원한 나라에 속하여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신앙을 회복하고 어떻게든지 지상에서 유형의 교회를 형성함으로써 함께 한 몸을 이룬 형제들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고자 하였다. 그러한 경우는 역사상에서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 삼손과 같이 한 사람으로 유형의 교회가 존재하는 시대는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한 시대, 한 지역에 동질의 속성을 갖고 있는 지체들을 함께 보내시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속한 사회 안에서 또 다른 독특한 사회(교회)를 형성케 하시고 그곳에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와 보호가 나타나도록 하셨다. 때문에 우리가 한 교회를 이룬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동질성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연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그리고 교회의 한 분자로 부름 받았는지의 여부를 서로 확인해야 한다. 이때 그 기준은 공교회가 고백한 신앙고백서들이다. 이처럼 신앙고백서들에 근거한 성도들의 교통은 매우 중요하다.
497 no image ‘하나님께 의뢰한다’는 의미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67 2016-08-02
‘하나님께 의뢰한다’는 의미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의뢰하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인식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이해 없이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내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롬 1:20-23).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할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게, 즉 그것이 사람이든 혹은 다른 피조물에게든, 아니면 이념이나 세상의 공리를 추구하는 사상이나 운동에 발현될 때에는 거기에 심각한 부패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의뢰하게 하는 동기를 가져다주게 된다. 우리를 하나님께 의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핍된 부분을 대신 채워주신다거나 지적(知的) 요소나 의지적(意志的)인 부분에서 결핍이 발생할 경우 적절한 방법으로 보충해 주거나 힘을 주신다는 차원에서 상호 협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자기의 힘이 모자랄 때 자기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에게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식으로 의뢰하는 것처럼 우리의 힘이나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대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으로 해결해 주실 것을 바라는 의미에서 우리를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은 내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어놓는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의적으로 내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의지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결단이 앞서야 한다. 자기를 무가치하게 여기고 존재의 의미를 부정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삶이 가지는 가치를 그만큼 인정하고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 가치가 조금이라도 결여되거나 제 가치를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써 자기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에 의해 자기 인생이 경영되는 것이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고 그 의미를 절대화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결단에서 나온 행위가 바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 이르게 될 때 비로소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어 가게 되는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그 목적에 대한 이해가 바르지 못하고 편협하여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였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오류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건져내시어 바른 삶의 방향으로 인도해 나가시는 것이다.
496 no image 올바른 예배의 정신_송영찬 국장
편집부
1234 2016-07-19
올바른 예배의 정신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온전한 예배는 참 교회의 세 표지인 말씀선포와 성례와 권징의 올바른 시행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말씀선포와 성례와 권징의 올바른 봉사와 시행을 위해 교회는 세 직분자들을 세웠다. 이때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분자들을 주신 것은 결국 온전한 예배를 위해 봉사하기 위함이다. “어떠한 제정된 예배도 하나님이 그 창시자요 제정자가 아니라면 적법하지 않다”(신 4:1-2; 12:32).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세우신 직분자들이 하나가 되어 예배에 봉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와 관련해 윌리엄 에임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게 열납될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예배가 효과적이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도록 예배에 그러한 덕목을 시여할 수 없다. 우리는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제정하는 능력이 하나님에 의해 어떤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마 15:9)”(윌리엄 에임스, 신학의 정수, 13장 13절). 이런 점에서 교회의 세 표지와 세 직분은 예배의 절대적 요소라 말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윌리엄 에임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제정된 방편들 중 일부, 예를 들면 말씀의 정중한 공적 설교, 세례와 성찬의 집행, 기도와 같은 것들은 믿음, 소망, 사랑의 실행과 증진을 간접적으로 야기시킨다. 그리고 이들 중 신자들이 회중 혹은 교회에 모이는 것,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직원들의 선출과 임직과 직분, 그리고 종교적 권징에 관한 관심과 같은 것들은 이러한 행위들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윌리엄 에임스, 신학의 정수, 13장 17절). 그러므로 교회가 예배를 드림에 있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법 또는 제도를 축소하거나 혹은 어떤 것을 더한다는 것은 심각한 신성모독의 패역을 저지르는 것과 같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는 모세의 명령과 같이 예배의 장소와 방식, 피의 금지 등등과 같은 예배의 부수적인 것들을 비롯해 어떤 하나라도 첨삭되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만일 이러한 명령을 어긴 인간이 자의적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면 그것은 미신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비록 하나님이 그 예배의 대상이 되고 목적이 된다 할지라도 미신에 빠진 예배는 그 행위 자체가 부당하며 가증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개혁주의 예배의 정신에 부합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495 no image 신자들은 예배를 통해 성장한다_송영찬 국장
편집부
1192 2016-07-05
신자들은 예배를 통해 성장한다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신앙고백서들과 교리문답서들을 학습할 때에는 그 본문을 숙지하는데 관점을 두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개인이나 교회에서 그룹별로 신앙고백서들이나 교리문답서들을 공부하고자 할 때에는 가급적이면 본문의 내용을 해설하기보다는 그 본문을 숙지하는 일에 힘쓰도록 이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일단 본문 내용을 숙지하고 나면 그 다음에 본인이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본문 내용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카테키즘의 기본적인 성격을 잘 활용해서 칼빈이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서를 작성했기 때문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성도들이 신앙고백서들이나 교리문답서들을 공부하고자 할 때에는 먼저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 혹은 좀 더 자세하게 내용을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년)을 참고하면서 이해를 도모한다면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다양한 형태의 신학서적들 특히 교의신학 서적들이 만이 있지만, 그 모든 서적들이 사실 기독교강요로부터 크게 발전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독교강요 첫판만 읽어도 신학의 기본적인 내용들은 바르게 정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강요를 요약 축소한 것이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이라는 특성을 감안한다면, 우선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서의 본문을 익숙하게 외우는 방법이 기독교 교리를 바르게 정립하는 가장 올바른 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서들의 해설은 본문의 해석에 그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이면 본문을 그대로 외우게 하는 것에 그 초점을 맞추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그렇지 않고 해설에 목적을 둘 경우 자칫 본문을 상실해 버리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럴 때 과유불급(過猶不及)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의 공적 예배를 통해서만이 신자들의 신앙이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의 방도로 말씀(성례 포함)과 기도로 주셨기에, 실은 신자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예배(시간에 선포되는 말씀과 베풀어주는 성찬, 그리고 교회의 기도)를 통해 성장하게 된다. 은혜의 방도를 교회의 예배가 아닌 다른 형식, 곧 개인 성경공부나 큐티라든지 집단 성경공부 혹은 개인 기도와 같은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94 no image 교회의 회원인가, 종교인인가?_송영찬 국장
편집부
1137 2016-06-21
교회의 회원인가, 종교인인가?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 교회는 하나님의 기업(엡 1:11), 그리스도의 몸, 그의 충만(1:22-23), 하나님의 걸작품(2:10), 하나의 새 사람(2:15), 하나님의 권속(2:19),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2:21-22),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의 연합체(3:6), 하나님의 지혜를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3:10),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몸(4:12-13), 온전히 성장한 완전한 사람(4:13), 그리스도의 신부(5:23-32), 하나님 사랑의 대상(5:25), 몸된 그리스도의 지체(5:30), 사탄에 대항하여 싸우는 하나님의 전사(6:11-18) 등 이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다양한 기능을 가진 하나의 통일체(entity)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며, 사람들 가운데 일치의 길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에게 대항하는 실체라고 정의한다. 또한 개인으로나 지역적인 집단으로서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즉 신자들을 자녀로 삼았다는 사실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고귀한 소명과 특권을 가졌기 때문에 그보다 못한 것에 만족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신자들 모두가 공동 상속자와 지체이며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존재로 그리스의 몸 안에서 동일한 신분을 가졌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 담긴 비밀’이라고 밝히고 있다(3:1-9). 이상을 종합하면 에베소서에서는 죄인들의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탁월한 위치를 강조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위대하심과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목적을 성취하시는 데 있어서 그의 몸된 교회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뭐든 기초가 잘못 세워진 것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교회가 무언지 조차 분명치 않은 개념으로 교회를 다니게 되면 결국 기독교가 일반 종교로 전락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불자이건, 천주교인이건, 기독교인이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아닌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결국 기복적인 세상의 종교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말함이고, 이 땅의 지교회들은 몸인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우리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인 지교회에 속한 회원들임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493 no image 우리가 이 땅에서 신자로 산다는 것_송영찬 국장
편집부
1174 2016-06-07
우리가 이 땅에서 신자로 산다는 것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이제는 우리가 신자답게 살아감에 있어서 모든 일에 깊은 사색과 철학과 신학이 항상 잘 어울려야 한다. 그래서 신자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 안에서 이 땅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신령하게 살아가야 한다. 바로 그러한 삶의 기준으로서 우리는 공교회가 고백한 신앙고백서에서 가르치고 지시하는 삶을 모델로 삼는다. 그렇다면 신앙고백서 위에 근거하지 않는 신자의 삶은 오히려 자기 나름대로 만들고 쌓아온 자신의 아집에 근거한 삶에 불과하다. 이러한 삶은 아무리 그가 신자로서 경건하게 보이고 열심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신앙의 굴레에 불과한 것이며, 나아가 이것은 자의적인 종교 행위로 밖에는 더 이상 해석되지 않는다. 자고로 기독교신앙은 내 자신이 자의적으로 살아온 삶의 경험이나 지식에 근거하여 기초하지 않으며, 창조 이래로 역사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계시한 성경에 기초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신앙의 규범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가장 명료하게 기술한 것이 바로 신앙고백서이다. 우리는 장로교 신자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 및 소요리문답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표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우리가 고백하는 모든 신앙의 모범은 이러한 표준 문서들의 가르침과 일치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모든 신자들이 자의적인 성경 해석이 아닌 공교회의 고백에 따른 신앙의 자태를 공유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신자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행위에 있어서나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에 있어서 하나의 실질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공교회의 고백을 통해 일체의 자의적인 신앙생활을 엄하게 배격해 왔으며, 이를 따라 살아가는 신자들은 비로소 합당한 삶의 기준을 근거한 자부심을 가지며 이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기준이 없다면 각 지교회마다 신자들마다 혹은 살아가는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신앙의 내용들을 가지게 될 것이며 결국 교회는 질서가 없고 신자들은 떠도는 부평초와 다를 바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 이처럼 자랑스런 고백서들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더욱 상고하고 삶의 기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492 no image 두로의 멸망이 주는 의미_송영찬 국장
편집부
1542 2016-05-24
두로의 멸망이 주는 의미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지중해 동쪽 해안가 도시 국가였던 두로는 천연적인 난공불락의 요새였기 때문에 오랜 바벨론의 포위 공격에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바벨론 군대가 천혜의 요새로 알려진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불태워 버렸다는 소식에 일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두로는 블레셋이나 시돈과 같은 이웃 국가들과 모종의 협약을 맺고 마지막에 있을 바벨론의 침공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울러 두로는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 실제적인 반 바벨론 세력의 선두로 나섬으로써 향후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을 하는 이 지역에서 패권을 잡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벨론이 두로 역시 점령하고 멸망시킬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바벨론 군대는 여러 지역의 군대들을 소집하였고 이로 인해 다양한 민족들이 군대의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에 두로는 비록 해안가에 위치한 천연적인 요새였지만 파도처럼 밀려드는 바벨론 군대를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느부갓네살은 성읍을 포위하여 공격함에 있어 당대에 널리 알려진 전략가였다. 느부갓네살은 오랜 기간 동안 효과적으로 두로를 포위하고 있었고, 포위 기간 동안에는 두로의 젖줄이 되는 주변 성읍들을 초토화 시켰으며 마침내 때가 되어서 공성퇴 무기들을 총동원하여 성읍을 깨뜨리고 그가 자랑하는 말을 타는 다국적 군대들을 성읍으로 돌진시켜 두로 백성들을 칼로 살육하고 두로의 재물을 약탈하며 성읍들의 잔재들을 모두 바다로 밀어 던져버리게 될 것이다. 한때 두로는 노래 소리와 수금 소리로 가득한 곳이었다. 확실히 두로는 막강한 해상 무역을 바탕으로 주변 도시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두로는 더 이상 이 지상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두로가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두로는 바벨론에 의해 처참한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BC 573년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군대를 보내 두로를 깊은 바다에 빠뜨려 다시는 살아나오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이 모든 일을 친히 역사 속에서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게 만들 것이다. 아울러 하나님은 창조 세계뿐 아니라 죽음의 세계까지도 주관하시는 우주적인 왕이며 주관자이심을 온 세상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