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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no image 나사렛 사람 예수_송영찬 국장
편집부
2002 2013-12-17
나사렛 사람 예수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마태복음 2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신지에 대하여 명백하게 제시하면서 유대인들과 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사실로 접근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먼저 독자들에게 “예수님이 어디에서 출생하셨는가?”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 후 구약에서 예언된 탄생지인 베들레헴을 밝혔고, 그 후 “왜 예수께서 베들레헴을 떠나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점들을 자세히 풀어줌으로써 메시아 사역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마태는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은 더 이상 유대에서 통용되고 있는 것처럼 멸시와 무식함과 천덕꾸러기로 불려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지자들의 예언에 근거하여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와서 드디어 그 광명이 역사 위에 비취게 되고,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해지게 되어 마침내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이 그의 백성 안에 친히 임재하시어 통치하신다”는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이 선포를 통해 구약에서 예언된 ‘여호와의 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실현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마태의 선포는 당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백성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까지도 상상하지 못했던 획기적인 사상이었다. 나아가 이 사실을 밝히고 있는 마태의 의도 속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하면서 교만을 부리던 유대인들이 명백하게 구약에서 메시아의 광채가 갈릴리에 비치게 될 것을 계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약의 계시에 대하여 암매한 가운데 빠져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고도의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시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그 가르침에 대하여 여러 면으로 접근하지 않고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면 계시에 대하여 들어보지도 못한 이방인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오히려 한번 받은 계시에 대하여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는다면 자칫 바리새인들이나 대제사장들과 같이 적극적으로 계시를 반대하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다. 항상 계시를 상고하며 그 본의를 좇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참 생명의 길로 나아갈 것이며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나님의 뜻에 다라 거룩한 나라를 세울 것이다. 이것이 중생한 성도의 증표이며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실제적인 삶의 모습이다. 성탄절 축하 잔치로 인해 정작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430 no image ‘하나님의 뜻’을 오용하지 말자_송영찬 국장
편집부
2078 2013-12-03
‘하나님의 뜻’을 오용하지 말자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M 교회 K 목사의 아들 K 목사가 “(교회의) 세습금지는 역사적 요구”라고 밝히고 "지난 예장 통합 총회에서 세습을 금지하기로 한 결의를 하나님의 응답으로 알고 따르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아들 K 목사의 진위가 어디까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언론을 상대로 이러한 발언을 한 것에 대해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는 점에서 심히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본인이 세습을 하고, 하지 않고 하는 사항은 전적으로 사적인 의견이며, 개인의 양심에 따라 결정하는 사안이다. 이런 일에 '역사적 요구'를 운운하거나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하는 거창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역사적인 요구'나 혹은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말은 이런 사적인 사안에다 붙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역사적인 요구' 또는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면 개인이 이리저리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사안에다 붙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관심사에 일일이 응답하기보다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 명백하게 밝혀 놓으셨다. 때문에 성경에는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역사적 요구'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인지 잘 명시되어 있다. 그러니 성경을 따라 살면 아주 간단한 것을 가지고 거창하게 '역사적 요구'라고 하거나 '하나님의 응답'이라고까지 운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요구'는 분명하다. 곧 사도들이 교회에 넘겨준 성경 66권을 변질시키거나 오염시키지 않고 다음 세대에게로 전수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 땅의 교회는 올바른 말씀 선포와 성례의 집행 및 정당한 권징의 시행을 수행해야 한다는 역사적인 사명 의식을 늘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요구’인 것이다. 나아가 그와 같은 교회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 교회의 항존직인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직분이 명확하게 교회 안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 좁은 길을 가고 있다는 명백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나타나게 되며 이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이다.
429 no image 실제적 무신론자_송영찬 국장
편집부
1959 2013-11-19
실제적 무신론자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역사 속에서 그 말씀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그 첫 번째 사건이 바로 우주 창조였다. 성경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명백하게 기록으로 증거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이 사실은 역사 속에 명백하게 선언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아무도 부정하거나,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무신론자들은 이 사실을 부인한다. 그리고 우주가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며 하나님의 우주 창조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발생한 사실을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 수 없다는 억지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 가운데서도 정작 불신자들이거나 무신론자들이나 다를 바 없이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마치 우주 저 편 아주 먼 곳에 계시는 것처럼 여기면서 도무지 하나님의 존재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역사의 현장에서 감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동(東)과 서(西)가 아주 먼 것처럼 언제나 피상적으로만 뇌리 속에 담아두고 있는 이 사람들은 교회의 회원이라는 명분만으로도 자신이 신자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의 현장을 주관하시며, 친히 약속하신 그대로 역사의 현장에서 친히 그 말씀을 성취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라는 말씀처럼 천국의 실제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증거하신다. 우리는 날마다 그 사실을 몸소 체득하고 살고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교인들 가운데서는 이 말씀을 단순히 관념적인 가르침으로만 알고 있으며, 가난하게 사는 것을 거부하고 억지로 부자처럼 되려고 온갖 거짓과 속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는 말씀이 바로 그 증거이다. 여전히 내가 내 자신의 삶을 주관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실제적 무신론자들과 다를 바 없다.
428 no image ‘신앙고백’과 ‘설교’_송영찬 국장
편집부
1791 2013-11-05
‘신앙고백’과 ‘설교’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교회에서 설교는 언제나 공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고백서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설교가 설교자의 개인적인 식견에 근거한 것이 아니며 언제나 공교회가 고백해 왔던 신앙의 고백을 계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장로교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교리문답 및 소교리문답을 신앙의 표준문서로 고백해 왔다. 개혁파교회에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벨직신앙고백서와 도르트 신경을 신앙의 표준문서로 고백해 왔다. 따라서 설교자는 자신이 설교할 모든 내용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위에서 언급한 공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을 근거해야 하며 동시에 지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 때문에 누군가 설교자가 설교한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하거나 혹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자 할 때에는 다름 아닌 신앙고백서를 근거로 질문을 하거나 또는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의 내용에 대한 이의는 오로지 신앙고백서를 근거해서 입증하거나 반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2천년 동안 사도들이 교회에게 전해준 성경계시를 보존해 왔고 계승해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교회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이 성경계시를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들에게도 동일하게 전승해야 하는 것이다. 혹 설교자가 언변이 좀 떨어진다 할지라도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 있다고 한다면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를 통하여 성령께서 하늘의 양식으로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설교자의 언변에 따라 그 하늘 양식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평가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문에 올바른 말씀 선포인가, 아니면 오염되고 부패한 설교인가에 대해 설교자는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자기 자신에 의해 면밀하게 관찰해야 하고 동시에 교회의 치리기관인 당회에 의해서 늘 관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개인의 고백이거나 주의 주장이 아닌 공교회의 신앙고백 위에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성령께서는 아름답고 오묘한 방식으로 이 설교를 하늘에서 베푸신 성도들의 양식으로 삼으신다. 동시에 성도들은 자기들이 초청받아 참여하고 있는 하늘 궁정의 예배에서 성찬에 참여하는 것처럼 이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설교라는 양식의 풍성한 식탁에 참여하는 기쁨과 위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427 no image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 유감_송영찬 국장
편집부
2494 2013-10-08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 유감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지난 40-50년 동안 신학계에서는 소위 ‘바울에 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f Paul, NPP) 학파들로 인해 신학적 학문의 열기가 고조되어 왔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이 학파의 거장으로 알려진 톰 라이트의 저서들이 거침없이 번역, 소개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세계적인 신학계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다. 반면에 ‘바울에 대한 새 관점’ 안에 담겨 있는 미묘한 신학적 해석의 차이점에 대해 바르게 알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가져다 줄 위험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는 말은 ‘바울이 말한 신학의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 몇몇 학자들이 말한 '바울 이해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관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말은 바울이 그렇게 말하거나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라 몇몇 학자들이 바울을 그렇게 말하거나 이해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몇몇 학자들이 바울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를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고백서들 및 교리문답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들과 교리문답서들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장 정확하게 밝혀서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면 먼저 교회의 신앙고백서들과 교리문답서들이 과연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주장하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가를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을 주장하기에 앞서 신앙고백서들과 교리문답서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한 신학적 오류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교회의 신앙고백서들 및 교리문답서들이 가장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어떤 신학적 논제들이라 할지라도 교회의 신앙고백서들 및 교리문답서들의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세가 성경이 성경으로 말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이것이 곧 성경을 성경으로 보존하는 교회의 준엄한 사명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426 no image 공예배에 담긴 기독론적 의미_송영찬 국장
편집부
6259 2013-09-24
공예배에 담긴 기독론적 의미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교회가 무엇이고, 왜 신자들이 교회에 가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신자들이 교회로 모이는 첫 번째 목적은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다. 예배에는 최소한 몇 가지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로는 기도, 찬송, 말씀봉독, 성례, 설교, 연보, 축도 등을 들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오늘은 교회가 무엇을 기도했고, 무엇을 찬송했고, 성찬은 왜 했는지도 모르고, 설교의 내용도 기억하지 못하며, 연보는 의례히 하는 것으로 여기하고, 축도는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과연 그것이 온전한 예배였는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참으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자체가 구원받은 신자로서 누리는 놀라운 은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도, 찬송, 말씀봉독, 성례, 말씀선포, 연보, 축도 등 그 모든 예배의 순서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성도들이 매주일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드려야 하는 이유가 되며, 동시에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은혜를 누리고 있다는 증표가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예배의 요소들을 통해 신자들을 날마다 장성케 하는 은혜를 기쁘게 베푸신다. 이런 점에서 말씀과 성찬과 기도를 개혁주의자들은 은혜의 방도라고 정의했으며, 이 은혜의 방도는 교회의 예배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 사실은 예배와 관련한 요소들 중 어느 것 하나라도 교회론적 이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이 놀라운 은택을 오로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 땅에서 교회로 부름은 받은 신자들이 오로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전한 예배를 수행할 수 있음을 가리킨다. 이로써 예배의 모든 순서는 기독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십자가에 친히 못 박히셨던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그렇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예배의 모든 순서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하며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예배에 참석한 모든 신자들이 그리해야 하며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425 no image 메시지 성경의 문제_송영찬 국장
편집부
2907 2013-09-10
메시지 성경의 문제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요즘 ‘메시지 성경’이 유행하는 모양이다. 읽기 쉽고 편집마저 화려해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 소위 ‘메시지 성경’이라는 책이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성경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시각에서 흔히 언급하는 그런 '경전 [scripture]'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의 경전이란 '종교의 교리를 적은 책'을 가리킨다. 반면에 성경은 교리를 적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다. 이와 관련해 벨직신앙고백서 제3항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전하는 것처럼(벧후 1:21) 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충동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말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특별한 돌보심 가운데 그분의 종들, 곧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계시된 말씀을 기록하라고 명령하셨고, 그분께서도 친히 자신의 손가락으로 율법의 두 돌판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기록들을 거룩하고 신적인 경전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성경의 번역은 원문에 있는 그대로 번역해 기록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내용이 메시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벨직신앙고백서 제7항 ‘성경의 충족성’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담고 있으며, 성경이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믿어야 할 모든 것을 충분히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모든 방식이 성경 안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라도, 심지어 사도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지금 성경에서 가르침 받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은 불법입니다.” 혹 누군가 성경을 번역한다고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의미를 가미해 번역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시 대신에 번역자의 메시지가 포함될 수 있음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런 류의 책들이 아무리 쉽고 혹 독자들에게 유익을 준다 할지라도 마찬이다. 아울러 우리는 이러한 행위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명백한 범죄라는 사실을 엄중하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424 no image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_송영찬 국장
편집부
2092 2013-08-27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성령께서는 오순절날에 이 세상의 역사 속으로 강림하시되 친히 보편의 교회로써 하나님 나라를 현시적으로 이 세상에 구상화하셨다. 그것이 지상에 건설된 교회이다. 따라서 새 사람으로 거듭 태어난 성도들은 교회의 보호와 지도를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자라게 하시는 독특한 신적 사역을 통하여 부활의 몸을 입는 그 날까지 인생의 행보를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신약의 교회와 그 회원들이 이처럼 새롭게 창조된 자리에 서있음에 대하여 선포한 바 있다(고후 5:1-7). 여기에서 바울은 육신의 장막인 우리의 몸이 죽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영적 장막을 입기 위한 것이며 생명에 삼킨 바 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와 같이 새롭게 지음을 받을 자로서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잠정적인 상태를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한다(고후 5:17). 이로써 옛 질서에 속한 이 세상의 법에 따라 살지 않고 새 질서에 속한 거룩하고 신령한 나라의 법에 따라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롭게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이 살아야 할 삶의 규범이 산상수훈이다(마 5-7장). 이 산상수훈은 새 사람으로 중생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적인 속성이 어떤 것인가를 천명하고 있다. 새 삶의 규범이 주는 권세와 능력을 소유하게 된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이로써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의당히 지켜야 할 영원한 하나님의 법에 대항하거나 저촉함 없이 새 사람은 자연스럽게 율법까지도 완성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새롭게 기능을 발현할 수 있는 영혼의 기능을 성령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성도들은 이제 새롭게 주어진 새로운 질서에 속한 사람의 규범인 산상수훈을 그들의 삶의 규범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동정녀를 통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스스로 죽으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비로소 성취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의 인격적인 감화를 통해, 즉 우리가 신의 속성을 명확하게 발휘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궁극적인 완성인 영화의 자리에 도달하게 된다. 이 모습의 가장 두드러진 현재의 상태가 바로 성령님으로 충만한 상태이다. 우리는 이렇게 오늘도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자.
423 no image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뜻_송영찬 국장
편집부
2310 2013-08-06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뜻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시편 기자가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 84:2)라고 토로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만군’의 무리 속에 존재하는 만물 중의 하나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주를 사랑하던 모든 신실한 성도들의 염원이기도 하다. 이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궁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복으로 여기고 있다. 시편 기자가 언약궤에 가까이 집을 짓고 사는 참새와 제비들을 복되게 여기고 부러워하는 것은 그것들이 마치 ‘만군’에 속한 무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시 84:3). 이에 그는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시 84:4)라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이 구절은 마치 ‘주의 궁전에 안식처를 가지고 주를 찬송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복되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야말로 주의 백성이 누리는 ‘지고의 선’(summum bonum)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궁정에 들어가고자 하는 강렬한 소망을 가진다. 그러나 여호와의 궁정에는 허락받은 사람만이 들어 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증표를 가지지 않고서는 감히 여호와의 궁정에 들어 갈 수 없다. 시편 기자가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5)라고 토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여호와의 궁정에 참여하라는 초청장을 가슴에 품고 있는 성도를 비유하고 있다. 이 구절 역시 ‘주께서 부르시어 여호와의 궁정에 들어갈 수 있는 증표인 시온의 대로를 마음에 가진 자야말로 가장 복이 있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초청을 받은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질고나 역경이라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위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시 84:6).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그만한 수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더 없는 영광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장차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시 84:7).
422 no image 제네바교회 교리문답 제1문_송영찬 국장
편집부
3431 2013-07-23
제네바교회 교리문답 제1문 ??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1542년 칼빈이 작성한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제1문 : 인간의 삶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은 1556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혀지게 되었으며 이후 개신교 신앙고백서들의 모판이 되었다. 1559년에 칼빈은 보다 원숙한 신학과 개혁신앙을 바탕으로 조국 프랑스에서 소수파로 박해를 받고 있던 위그노들인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위하여 신앙고백을 준비하였는데 그것이 프랑스 신앙고백이었다. 이 프랑스 신앙고백을 필두로 개신교 신앙고백들이 본격적으로 선포되었다. 1560년에는 존 녹스가 이끌던 스코틀랜드 교회에 도입되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시작한다.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또 인정하며 그에게만 의뢰하며 섬기며 그만을 예배하며 그만을 믿는다.” 1561년에는 벨직(벨기에) 신앙고백서가 선언되었다. 벨직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오직 그 분만이 유일한 절대자요 ... 모든 선의 넘치는 근원이 되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바이다.” 1563년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작성되었다. 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제1문은 다음과 같이 제네바교회 교리문답 제1문을 계승하고 있다. 1566년에는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가 선포되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는 프랑스 신앙고백서에 기초하고 있으며 특별히 프랑스 신앙고백서가 밝히고 있는 정경으로서의 성경을 가장 앞서 고백하고 있다. 1618년에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을 반박하는 돌트 신경이 선포되었다. TULIP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 돌트 신경은 칼빈주의 5대 신앙 강령을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고백서들의 역사를 계승하여 마침내 1646년에 소집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장로회의 신앙고백서가 선언되었다. 그리고 1648년에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은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을 계승하면서 각각 제1문에서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로 시작하고 있다. 제1문. 사람의 첫째 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첫째 되며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히 마음을 다하여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421 no image 그리스도의 중보와 교회의 예배_송영찬 국장
편집부
2380 2013-07-09
그리스도의 중보와 교회의 예배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교회의 예배는 기도와 찬송과 설교와 성찬과 연보 및 축도로 구성된다. 이 모든 요소들은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친히 증거 한다. 바로 이 증거에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신다. 이때 성령께서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회중의 찬송을 통해, 목사의 설교를 통해, 장로의 성찬배식을 통해, 집사의 연보분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에게 은혜와 평강을 선언하신다. 그것이 바로 축도 혹은 강복선언이다. 따라서 교회의 공예배는 성령께서 역동적으로 역사하시는 바로 그 현장이다. 교회의 공예배는 전적으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드려지게 된다. 지상에 있는 그 누구든지 혹 어떤 단체든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직접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짐에 있어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교회의 직분을 통해 행할 수 있도록 위임하셨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예배에는 그리스도로부터 위임을 받은 중보의 행위로써 직분의 권위가 행사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 정당한 예배를 드리게 된다. 이때 그 중보의 역할을 하는 직분자가 바로 목사와 장로와 집사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교회의 공예배는 신학교나 선교단체나 선교회나 여타 다른 단체의 집회와 구별된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함께 봉사하지 않는 집회는 결코 교회의 공예배가 아니다. 쉽게 말해 예배에서 설교와 성찬과 연보가 없다는 것은 거기에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 제한되거나 제외되었음을 의미한다. 성령께서는 이처럼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 단절되거나 제외된 집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통치를 드러내지 않으신다. 때문에 교회는 일찍부터 올바른 말씀선포와 정당한 성찬의 시행과 온전한 권징의 행사를 교회의 표지로 삼았던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수행하는 직분자들이 봉사하는 교회의 공예배를 통해 역동적으로 전 세계에 하나님의 통치 기관으로서 교회를 세우고 보존하며 양육하신다. 따라서 어떤 선교단체나 기독교 문서 출판 혹은 기독교 방송과 같은 기구나 기관들은 당연히 교회의 사업에 속한 것으로 교회의 소속이어야 하며, 교회가 시행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제한적이며 한정적이며 보조적인 가치와 의미만 가질 뿐이다.
420 no image 문제의 해결은 간단하다_송영찬 국장
편집부
2345 2013-06-25
문제의 해결은 간단하다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얼마 전 모 교단에서 ‘국가종교편향 대책 세미나’를 개최했다. 그 자리에서 한 발제자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먼저 ‘성령으로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기독교를 폄하하고 공격하는 움직임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또 전문연구기관 설립으로 종교편향과 안티세력들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국가종교편향 대책’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거슬린다. 우리 대한민국이 종교편향국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런 용어들이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가져다주는지조차 판단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그리고 기독교 지도자들이 ‘성령으로 하나 되는 모습’이 기껏 기독교를 폄하하고 공격하는 움직임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전문연구기관을 설립해서 종교편향과 안티세력들에 대응하자는 주장도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차제에 한국교회 스스로가 교회의 정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각 교단은 가짜 목회자들을 퇴출시켜야 한다. 그리고 교단 세력 확장을 위한 무자격 목회자 영입부터 중단해야 한다. 교단이 정작 개혁의 의지가 있다면 교세확장이 아닌 교단의 정화작업부터 실천해야 한다. 둘째, 각 교단 신학교는 더 이상 가짜 목회자 양산을 중단해야 한다. 무차별 신학생 모집을 중단하고 무자격 졸업생을 양산하지 않아야 한다. 신학교가 한국교회를 염려한다면 기독교신앙의 정수인 신앙고백서들과 교회질서 및 예배모범을 명확하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셋째, 각 지교회는 가짜 신도들을 퇴출하고 가짜 직분 남발을 중단해야 한다. 각 지교회는 무한확장이라는 과대망상강박증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살 길이다. 그러기 위해 각 지교회는 회원의 입교시에 분명히 공적 신앙고백을 확인해야 한다. 교회가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의 친목회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 넷째, 기독 방송 및 언론사들은 거짓 목사들 설교 방송이나 글들을 거부해야 한다. 돈벌이에 급급한 방송과 언론사들이 기독교 미신을 조장하는 첫 번째 공로자들이다. 돈의 힘에 빌붙어 사는 비겁한 방송인과 언론인들부터 척결해야 한다.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419 no image 고민 뚝! 공부 시작!_송영찬 국장
편집부
2106 2013-06-11
고민 뚝! 공부 시작!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교회 안에서 목사나 성도들은 더 이상 신앙적인 문제로 고민할 이유가 없다. 이미 교회의 신앙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보편교회의 신조들과 고백서들과 요리문답서들에 충분히 잘 규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권징조례와 돌 교회질서에서 충분히 규명한 바 있다. 기본적인 교회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교회의 본질까지도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예배와 관련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서 그 원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가르침을 따라 오래전부터 개혁교회에서는 예배에 가장 합당한 예전을 받아들여 그 순서에 따라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있다.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바른 교회들이라면 이처럼 신조와 고백서들에서 제시하고 있는 성경적인 가르침을 따라서 그대로 시행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참교회의 표지인 올바른 설교와 바른 성찬과 정당한 권징이 예배를 통해 구현되고 있고, 교회의 직분인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예배에서 봉사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온전한 신앙의 틀로서 교회를 이루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교회라면 더 이상 그 누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충성하며, 그것만으로도 이미 아름다운 교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조급하고 불안해한다.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너무 단조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언가 하나님을 위해 해보려는 것을 가리켜 신앙이 좋은 것처럼 오해를 한다. 하지만 역사적인 교회들이 그래왔듯이 전통적인 교회관에 근거한 예배 말고 다른 어떤 일을 교회가 꿈꾸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한 생색내기일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누군가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게 된다. 교회 안에서는 아무도 만족을 구하지도 않으며 만족을 주지도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겠다는 의지와 열심만으로 충분하다. 때문에 불만이 있다면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것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무엇으로 우리의 신앙에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장식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고 온전한 예배, 더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 신조와 신앙고백들부터 공부해야 할 것이다.
418 no image 사람의 난자(卵子)를 상대로 실험하는 것은 폭행_송영찬 국장
편집부
4149 2013-05-28
사람의 난자(卵子)를 상대로 실험하는 것은 폭행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미국 오리건 보건과학대 미탈리포프 교수 연구진이 복제 배아줄기세포 수립에 처음으로 성공하면서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 치료에 대한 기대감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난자에서 유전자가 들어 있는 핵을 빼고, 정상 유전자를 가진 피부세포를 전기 충격으로 융합시키고 이렇게 해서 복제 배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자의 본래 존재 목적은 자연스럽게 정자와 결합하여 생명을 잉태하고 인격을 갖춘 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함이다. 그 과정에서 난자는 자신에게 가장 이상적인 난자를 선택하는 선택권을 주도적으로 발휘한다. 이것이 아니라면 그 난자는 자연적으로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무효화한다. 이 난자를 실험 목적으로 임의 채취한다는 것은 마치 무력으로 포획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포획한 난자를 화학적 환경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은 불법적인 구금과 다를 바 없다. 나아가 그 난자에게 정상적인 DAN를 가지고 있는 정자가 아닌 임의의 체세포에서 추출해 낸 핵이나 이물질을 강제로 주입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세포에 바이러스를 침투시키는 것과 같은 악행이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결국 막대한 돈벌이가 된다는 무한한 욕심이 그 이면에 담겨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결국 돈 있는 사람의 금고를 수명연장이라는 가면을 쓰고 강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돈 없는 사람들은 결코 아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혹 그렇게 인공적으로 생산된 생체기관을 이식해서 성공한다고 한들 그것이 과연 본인에게나 혹은 가족에게나 인류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며 사람은 누구나 이 숭고한 자연의 질서를 거역하지 않고 순응해야 한다. 난자를 희생시켜가며 인공적으로 생체기관을 만들어 내는 것을 가리켜 과학의 승리라고 자만하기보다는 힘없는 난자를 자연스럽게 자기의 갈 길을 가게 하는 것이 더 인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과학자의 길이다. 정말 인류를 준중하고 사랑하는 과학자라면 더 이상 난자들을 희생시키는 폭행을 멈춰야 할 것이다.
417 no image TULIP으로 표현되는 ‘오직 은혜로’(Sola Gratia)_송영찬 국장 (12)
편집부
4279 2013-05-14
TULIP으로 표현되는 ‘오직 은혜로’(Sola Gratia)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구원은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것이 ‘오직 은혜로’이다. 이 가르침은 칼빈주의의 5가지 요점으로 알려져 있다. 그 첫 알파벳을 따서 TULIP으로 표현한다. T /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 우리는 죄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났다. 본성에 의해 우리는 참된 선을 행하기에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이것을 가리켜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한다(창 6:5; 시 51:5; 렘 13:23; 롬 5:12; 엡 2:1-3). U /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 단지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은 모든 인류로부터 교회의 충만한 수의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다. 이 선택은 후에 믿을 것과 신앙을 가질 것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기초한다(행 13:4; 롬 9:15; 엡 1:4). L /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을 구속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에 의해 구속받고 구원받은 유일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구원으로 선택된 신자들이다. 십자가상의 그의 죽음에 의해 그리스도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이 백성들만을 위해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였다(마 1:21; 요 10:15; 17:9). I / 저항할 수 없는 은혜(Invincible or Irresistible Grace) :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에 의해 믿음과 회개의 사역하심으로 사람의 마음에 역사 하신다. 성경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그를 죄에서 떠나 하나님을 향하게 만든다. 비록 성령의 은혜가 거부 될 수 있지만 그 것은 결코 완전히 거부될 수 없고 하나님의 영이 완고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실 수 있다(겔 36:26; 요6:44; 10:27; 엡 2:8; 빌 2:18). P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 죄의 능력 때문에 신자들은 그들이 자신에게 안주한다면 믿음 안에서 견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역사하는 택함 받고 성령에 의해 모든 참된 신자들이 끝까지 믿음을 유지하도록 견인하신다.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떨어져 나갈 수 없고 그들의 구원을 결코 잃을 수 없다(요 6:39; 10:28; 롬 8:28-30; 빌1:6).
416 no image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주는 교훈_송영찬 국장 (25)
편집부
3071 2013-04-30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주는 교훈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요시야는 26세경인 재위 18년(BC 622)에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이때 마침 성전을 수리하는 가운데 ‘율법책’ 사본이 발견되었다. 요시야는 백성의 장로들을 성전으로 소집하여 율법을 그들에게 읽어주고 여호와 앞에서 율법에 순종하겠다는 엄숙한 언약을 맺게 했다. 이 언약 체결식은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언약갱신의 의식을 치른 사건, 모세가 시내산에서 백성들에게 언약책을 읽어주고 체결한 언약식과 같은 맥락에서 거행되었다. 이처럼 시의적절하게 율법책이 발견됨으로써 요시야의 개혁 작업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요시야의 개혁으로 스바냐 선지자가 규탄했던 가나안의 바알숭배, 앗수르의 성신(星辰)숭배, 암몬의 밀곰숭배를 비롯해 성전 안에 안치되어 있던 남신 바알을 표상하는 물건들과 여신 아세라상, 태양에게 봉헌된 마상(馬像), 별을 숭배하기 위해 지붕 위에 세운 제단 등이 파괴되었다. 이로써 므낫세 때부터 있었던 갖가지 태양 제의와 성신(星辰) 제의 등을 비롯해 토착화되었던 이방 제의들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 종교개혁과 함께 이방신 제사장들을 비롯해 남창, 성창, 이방제의 종사자들이 처형되었다. 동시에 각 사당에서 행해지던 제의적 매음, 힌놈의 골짜기에서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던 인신제사 관습, 무당과 마술사를 통해 점을 치던 무속 관습 등이 금지되었다. 나아가 요시야는 북부에 있는 사마리아의 신당들과 벧엘 신전을 파괴하고 그곳의 제사장들을 처형했다. 요시야의 개혁은 멀리 북부 갈릴리까지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의 종교개혁에는 한계가 있었다. 곧 언약에 합당한 삶으로 복귀하기보다는 단지 제의적인 활동으로 만족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사회적인 죄악들 역시 개선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현상들은 유대 민족이 더 이상 선지자의 말을 들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단지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말고 그 이상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가져오게 만들 뿐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파멸의 구덩이를 향해 뛰어들고 있었다. 이 교훈은 어쩌면 지금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서야 한다. 이 길 만이 교회가 살 길이다.
415 no image 동성애자들에 대한 짧은 생각_송영찬 국장 (29)
편집부
2525 2013-04-16
동성애자들에 대한 짧은 생각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자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성적 취향을 소수자의 권익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성취해 보려는 아주 잔인하고 가공할 정도의 음모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당당하게 남성으로 살기보다는 사회적 약자라는 그늘 속에 숨어 은밀하게 자신의 성적 취향을 즐기려 하는 것은 어쩌면 사회를 우롱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눈물을 앞세우면 더 강한 호소가 됩니다. 관음증을 취향으로 가진 사람이 사회적 소수자라는 입장에서 눈물로 호소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지도 모릅니다. 성적 소수자라는 말은 그럴 듯하지만 정작 동성애자라는 단어는 남자나 여자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고 성적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취향 속에 갇혀버리기를 스스로 택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괴악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주를 오히려 원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원망 섞인 목소리로 대신하기도 합니다. 왜 그들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 회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을까요? 많은 사회적 소수자들도 얼마든지 자신의 선천적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힘들게 노력하지 않나요? 그들은 신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만들어 놓은 성적 취향의 트라우마를 신에게 전가시키는 ‘비겁한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들의 괴악한 행위를 지적하는 것이 교회의 잘못인가요? 교회는 성적 소수자들의 권익을 위한 모임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의 정서적 취향을 치유해야 할 책임은 교회뿐 아니라 사회와 가정도 짊어지고 있습니다. 단지 교회는 잘못된 성적 취향이 죄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대다수 사회적 약자들은 기꺼이 그 사실을 감수하고 스스로 이 사회의 일원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동성애자라구요? 남자나 여자로서 다른 이들에 비해 패배감이 크기 때문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실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라는 허울 좋은 간판 뒤에 숨어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당하게 남성은 남자답게 삽시다. 분명히 남자로서 책임도 다하고 의무도 다 해야 합니다. 여성들 또한 여성스러울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414 no image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_송영찬 국장 (17)
편집부
2698 2013-04-02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율법이 아닌 복음이 성도들에게 주는 새로운 경험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게 되는 자유를 통해 나타난다(갈 5:2-15). 이런 점에서 성도들은 더 이상 육신의 능력이 아닌 성령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경건한 성품을 드러나게 하는 능력으로 살게 된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과 후를 구별하는 경계선이었다. 즉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 이방인들을 의롭다 칭하지 않으셨던 시대와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의롭다고 칭하시는 현 시대를 구별한다(갈 3:8-9). 약속된 후손이 오기 전의 시대와 그 약속이 성취되는 현 시대를 구별한다(갈 3:19, 22). 믿음이 오기 전 시대와 믿음이 온 시대를 구별한다(갈 3:23, 25). 세상의 원리인 초등 학문에 예속된 종의 시대와 구속받은 자녀의 시대를 구별한다(갈 4:3-5). 이 원리는 바울의 생애에서도 발견된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행 9:1-9)은 바울의 생애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기 이전과 그리스도를 계시하신 이후로 구별시킨다(갈 1:13-15; 갈 2:20).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인들의 삶에서도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때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그들을 아시는 현재의 때로 구별시킨다(갈 4:8-9).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성취된 변혁이 너무나 철저했기 때문에 바울은 이전의 세계와 자신의 이전 존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끝났다고 말할 정도였다(갈 6:14). 그리고 이제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 창조’(갈 6:15)만이 중요하며 이 새 창조는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믿음 안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주장하게 되었다(갈 5:6). 이로써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고 하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이신칭의’를 증거했다. 이 이신칭의 사상은 이후 기록된 바울 서신서들의 신학적 근거였다. 그리고 이 이신칭의 사상은 AD 49/50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할례제도를 폐지하게 된 결정적인 신학적 근거로 작용했다(행 15장).
413 no image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이해_송영찬 국장 (8)
편집부
2226 2013-03-19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이해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스라엘 전 역사가 지향해 왔던 성취의 절정이었다. 즉 ①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갈 3:7-8, 16-17, 29; 4:22-23) ② 율법의 수여(갈 3:17, 19; 4:24-25) ③ 이스라엘의 포로기에 실현된 율법의 저주(갈 3:10, 13; 4:24-25)에 이은 하나님의 백성이 미래에 받을 구원과 회복에 관한 선지자들의 약속(갈 1:6-9)이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이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뒤에 주어진 율법, 즉 모세의 율법은 이미 맺어진 언약을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갈 3:15-18). 따라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위한 언약은 한번 맺어진 이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결코 취소되거나 폐기되지 않는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잠정적인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보호자인 셈이다. 율법은 마치 유대인들을 돌보는 종과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 주어졌다. 때문에 율법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반대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생명을 얻는 언약과 다른 방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졌기 때문이다(갈 3:21). 이처럼 율법은 사람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줌으로써 그들을 죄로부터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의 목적은 믿음에 의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세워주는 하나님의 방법이 계시될 때까지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율법의 기능이 성취되었다. 이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이로써 한시적인 율법의 기능도 끝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백성을 이루게 되었다(갈 4:1-7).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성도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고 그가 경험하였던 복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아들의 자격과 함께 그것과 연결된 특권들이 주어지게 된다. 특별히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며 미래에 하나님이 주실 유산을 상속할 상속자의 신분이 주어진다. 이것이 율법 아래에서는 없었던 새 생명의 경험이다.
412 no image 아랍 교회들의 부패와 이슬람교_송영찬 국장 (23)
편집부
2686 2013-03-05
아랍 교회들의 부패와 이슬람교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교회사의 첫 5세기 동안 강력한 로마제국은 동방 지역만 아니라 서방으로도 확장되었다. 그러나 476년에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더불어 그들이 로마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은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반면에 동로마 제국은 살아남았다. 당시 북아프리카, 이집트, 팔레스틴, 시리아는 동 로마제국에 속해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아직은 강력한 제국이었지만 결속력이 아주 강한 제국은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 역시 폭동과 내부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형편 속에서 기독교회의 국가들은 그리 선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점차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악해져 가고 있었다. 그 타락은 우상숭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 현상은 일단의 성골(聖骨)과 성자(聖者)들의 숭배로부터 발단되었다. 이들 성골과 성자들이 경배를 받게 되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이교도들의 예배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점점 부패해지고 말았다. 그러자 교회의 왕이신 주님께서는 이러한 불순종을 심판하셨다. 주님께서는 세속화 되어가는 교회들로부터 촛대를 옮기셨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이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한편 바울 사도 시대에 오늘날 아랍지역으로 불리는 아라비아는 대규모의 무역 활동을 하는 지역으로 유명했었다. 특별히 잘 알려진 것은 낙타를 사용한 대상들이었다. 여행을 하고 무역을 하는 아랍인들은 이때 복음과 접촉하였다. 그리고 교회들이 곳곳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아랍 지역의 교회들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그들은 첫 사랑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우상들을 숭배했다. 그 결과 아라비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도 타락하고 말았다. 이 아라비아 지역은 일찍이 바울 사도에 의해 복음을 받은 곳이었다. 바울 사도는 “나는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고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 기록한 바 있다. 결국 아랍지역의 교회들도 주님의 심판을 받았다. 한 때 그렇게 복된 이 아랍 지역은 사탄의 발판이 되고 말았다. 사탄은 아랍 지역에서부터 신실한 교회들을 공격했다. 그 사탄의 도구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함마드(Mohammed, 570?-632)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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