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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351 no image 교회의 은사와 성령의 부르심_송영찬 국장
편집부
4242 2010-10-27
교회의 은사와 성령의 부르심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은사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를 세우는 것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봉사하기 위해 주어졌다. 아울러 이 은사들은 교회를 수립하는 근거로 주어졌기 때문에 모든 보편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공통적인 요소이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사들로 교회를 풍성케 하신 목적은 지상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로서 존재하는 데 있어 아무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교회가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 은사들을 교회에 주신 것은 현재의 상태로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굳건히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존재이다. 여기에서 ‘기다린다’는 용어는 오래참는 기다림, 즉 열망을 가지고 기대하는 기다림(롬 8:19, 20, 23; 벧전 3:20)이다. 교회의 이러한 인내와 열심이 담긴 기다림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대한 것이다. 사도들에 의해 확실하게 예언되었고 그리스도의 백성이 참여할 부활과 그 나라의 완성과 관련된 그리스도의 재림은 교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열망하는 기다림의 목표이다. 이 모든 일들, 즉 교회가 마지막 날에 흠이 없는 궁극적인 존재의 목표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주신 은사들을 통해 교회를 붙드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교회를 부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나누게 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를 부르셔서 그리스도와 사귐과 교통을 갖게 하시는 일에 결코 후회가 없는 분이시다. 이 부르심은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이며 이로 인하여 영혼이 거듭나고 어두움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기게 된다. 따라서 부르심은 선택의 유일한 증거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기 위해 부르셨기 때문에 교회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롬 8:29)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동참자이며 그의 생명의 참여자이며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동참하는 존재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50 no image 거룩한 교회로 부름받은 성도들_송영찬 국장
편집부
4226 2010-10-13
거룩한 교회로 부름받은 성도들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바울은 예수 안에 속한 성도들을 가리켜 성결한 삶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나타냄으로써 그들이 바로 교회 안에 있음을 증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되어야 한다. 이 성화는 인간의 부정한 본성으로는 이룰 수 없다. 오로지 성령께서 죄로부터 교회를 분리시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성령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교회에 임재하신다. 따라서 참된 성화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을 때 일어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은 성령의 실질적인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다’는 말에서 ‘거룩하게 하다’라는 용어는 ‘깨끗하게 하다’는 의미이다. 이 용어는 주로 제사에 의한 속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된다(히 2:11; 10:14; 13:12). 죄는 범죄와 오염이라는 이중적 의미에서 말해지기 때문에 ‘거룩하여지다’ 혹은 ‘죄로부터 깨끗해지다’는 말은 대속에 의하여 죄사함을 받은 것, 또는 성령에 의하여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그들의 죄를 대속의 제사를 통해서 사함받은 자들, 또는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바쳐진 자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어떤 선행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만이 본성적으로 부정한 인간을 성화시키는 분이시다. 바로 이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아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게 하셨다. 이것은 성령 안에서 성화를 이루는 삶만이 비로소 교회의 부르심, 즉 소명이 유효적이 되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별히 교회를 가리켜 ‘성도들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써 성화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거룩하다’라는 헬라어 용어는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 다른 것들과 구별되어 바쳐졌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 신정국가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거룩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한 목적이 있어 구별되어졌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349 no image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_송영찬 국장 (20)
편집부
4395 2010-09-29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가리켜 ‘고린도 교회’라고 말하지 않고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에서 바울은 보편의 교회, 즉 고린도라는 지역에 나타난 교회로서 보편적인 교회의 한 지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교회는 여러 지역에 산재해 있지만 하나이다. 이들을 총칭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에클레시아(교회)라고 부른다. ‘에클레시아’는 문자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무리’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그리스도인들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을 의식해야 함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부르시지 않았다면 바울은 사도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반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에 속한 회원이다. 그들을 가리켜 바울은 ‘나의 교회’ 혹은 ‘우리 교회’라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한다. 동시에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교회의 일부라고 말하지 않고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른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켜 ‘교회’라고 부른다(롬 16:3-5). 바울의 에클레시아 개념은 히브리적인 교회 개념 곧 회당, 총회(assembly) 그리고 사도행전에 유일하게 언급된 ‘광야의 교회’(행 7:38)라는 개념과 더불어 ‘권위로 세워진 한 몸으로 구성된 일단의 사람들’이라는 헬라적 개념, 즉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바울은 어떤 지역에 모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든 혹은 어떤 사람의 집에 모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든 그들을 모두 ‘에클레시아’라고 부른다. 교회 전체를 가리킬 때나 어떤 특정한 곳에 모인 소규모의 그리스도인을 가리킬 때도 그들을 ‘교회’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지역에 있든, 어느 장소에 있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에클라시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에 의해 모두 부르심을 받은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에 속한 회원임을 명심하자. 그리고 그 교회의 머리는 바로 한 분 그리스도이심을 명심하자. 이를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당연히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
348 no image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오류_송영찬 국장 (121)
편집부
5780 2010-09-15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오류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일반적으로 다신론적이며 범신론적인 잘못된 우주관을 바탕으로 자연계를 신으로 섬기고 있던 고대인들과는 달리 성경은 자연계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창조 목록(onomastica)과 창조 신들에 대한 찬양, 또는 태양 신 아텐(Aten)을 찬송하는 아멘호텝(Amenhotep) 4세의 찬양 등과 같은 고대 창조 신화와 달리 성경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증거한다. 오히려 성경은 자연계의 피조물들을 앞세워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통치에 모든 피조물이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왕권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자연계의 창조와 피조물들을 질서 있게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주장한다. 창조는 혼돈의 바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것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성경의 주장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의존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물, 음식, 보금자리, 시간 등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여호와께서 어떤 식으로 모든 생물들을 돌보시는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생명을 보존하시기 위해 이런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창조하셨던 것이다. 또한 물, 지형, 계절, 낮과 밤 등은 생태계의 중요한 요소들이다. 성경은 이런 요소들을 학문적인 관심으로 관찰하지 않고 신학적인 관점, 즉 하나님에 대한 경이의 찬양으로 생태계를 재해석하고 있다. 때문에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별개가 아닌 하나로 통합된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만이 자연계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게 한다. 얼마전 유명하다는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모 방송사 뉴스에 출연해 “우주가 창조주의 뜻이 아니라 무(無)의 상태에서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한다. 이 얼마나 무책임한 발언인가. 그것을 소위 과학적 사고 방식이라고 여긴다는 것은 별 것도 아닌 지식으로 우주를 논하는 어리석음의 극치일 따름이다. 최소한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창조에 대해 다양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적 사고 방식이라 할 것이다. 차라리 우주의 탄생을 신비로 남겨두고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 학자의 양심이 아니겠는가.
347 no image 아직도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_송영찬 국장
편집부
4071 2010-09-08
아직도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이스라엘의 왕은 세속 국가의 통치자와 철저하게 구별되었다. 세속 통치자의 성격이 힘을 앞세운 통치 철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의 인자와 공의를 그 통치 철학으로 삼아야 했다. 이것은 왕의 규례(신 17:14-20)에 담겨 있는 기본적인 통치 이념으로 이스라엘의 왕은 신정국가인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국의 종말을 고하면서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 13:14)고 선언한 것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을 받았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마음에 합당치 않은 통치를 한다면 버림을 당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후에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는데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합당한 통치자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 다윗 왕의 통치 이념은 공의와 공평으로 집약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인 속성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통치자에게 요구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한편 하나님은 다윗 왕권의 항구성과 영속성을 보장하심으로 다윗 왕국의 존재 의의를 인정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왕국의 언약을 체결하심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고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다윗 왕국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의 성취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증거된다. 사실 역사 속에서 다윗 왕조가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었다(시 21:7). 만일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면 솔로몬 이후 존재했던 다윗 왕국은 벌써 그 존립 자체가 무의미했을 뿐 아니라 아예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윗 왕국을 역사 속에서 유지하신 분은 바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셨으며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속한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가 이 땅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 역이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처럼 변덕이 심한 사람들을 보존해 줄 교회는 이 땅에서 벌써 자취를 감취고 말았을 것이다.
346 no image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_송영찬 국장
편집부
4055 2010-09-01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시편 100편은 여호와의 영원한 성실하심으로 인해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7번이나 촉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1-4절에 걸쳐 등장하는 7개의 명령형 동사들은 확대된 예배의 부름을 요구한다. 그 대상은 ‘온 세상’에 주어지는데 이것은 우주적인 부름으로 확장된다. 여호와는 온 세상과 온 땅의 주(主)이시기 때문에 모든 민족들은 주 앞에 경외와 찬송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 시편 100편의 주장이다. 따라서 이 시편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향한 부름만이 아니라 연속적인 명령형들은 이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향하고 있으며 ‘여호와는 온 땅위의 위대한 왕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이 시편의 청중들은 ‘여호와를 섬기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섬긴다’는 단어는 폭넓게 사용되는데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종’의 기능을 의미하거나(겔 29:18) 통치자의 신민들이나 관리들의 역할을 의미한다(삿 9:28; 왕상 5:1; 렘 27:7). 그러나 이 단어가 신적 존재와 함께 사용될 때에는 예배의 행위를 암시한다(신 6:13; 10:12; 11:13). 따라서 ‘여호와를 섬기라’는 권고는 여호와께 예배할 것에 대한 촉구이며 여기에는 규정된 제의를 행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민 3:7; 수 22:27). 아울러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출 23:25)는 말씀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요구 사항이었다. 나아가 ‘섬기라’는 단어 속에는 예전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모세가 바로에게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광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것(출 3:12; 4:23; 7:16; 8:1, 20; 10:26)은 ‘섬긴다’는 단어의 내면에 정치적인 행위가 포함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여호와를 섬긴다’는 말은 종교적인 예배 행위뿐 아니라 여호와를 왕으로 섬기며 주께서 주신 법률의 통치를 받는다는 의미가 내포되는 것이다. 이처럼 ‘섬긴다’는 의미는 왕이신 여호와의 법적 통치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왕이신 하나님께 대한 전인적(全人的)인 충성을 요구한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함께 요구되는 것은 왕이신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표시이다.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께 충성을 서약한 백성들이다. 따라서 왕이신 하나님을 배신하는 자는 그 나라에서 추방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45 no image 하나님의 신현(神現)과 왕권의 성취_송영찬 국장
편집부
4129 2010-08-18
하나님의 신현(神現)과 왕권의 성취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여호와의 왕권'은 시편 96-99편의 핵심 사상이다. 이 시편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높이 들리우시고 세상의 열방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초청된다. 이 때 하나님은 '그룹 위에 등극해 계신 분'으로 묘사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개념을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는 공의와 공평으로 통치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왕의 능력은 공의를 사랑하는 것이라 주께서 공평을 견고히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과 의를 행하시나이다"(시 99:4)라는 시인의 선언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행사에서 증명하셨듯이 하나님은 인간 사회에서 안정되고 정당한 질서를 옹호하는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인은 다른 민족들에게 자기가 신봉하는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을 통해 증거하신 역사적인 사건들을 근거로 다른 민족들에게도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초청하고 있다. 이것은 고귀하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된 당연하고 자연스런 귀결이다. 이러한 사상의 배경에는 온 세상에 펼쳐질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자리하고 있다.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시 98:9)는 시인의 선포가 역사적인 사실로 실현될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 것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이 기도는 온 세상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백성으로 선택된 영적 이스라엘, 즉 오늘날 교회의 회중인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노래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우리가 매주 주기도문을 하면서도 공평과 정의로 구현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거나 그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반역자에 지나지 않다.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의 공평과 공의가 바로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구현되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344 no image 다원주의 세계와 기독교 유일신관_송영찬 국장
편집부
4605 2010-08-03
다원주의 세계와 기독교 유일신관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시 95:3)는 표현은 마치 하나님께서 여러 신들 위에 가장 위대한 분처럼 보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유일 신관과 모순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다신론(多神論) 문화에 둘러 싸여 있던 이스라엘 시대의 신관을 효과적으로 변증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애굽은 다신론이 지배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는 어려서부터 다신론의 분위기와 환경속에서 성장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 자신이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언약을 베푸신 분임을 증거하셨는데, 그 방법은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하나님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출 4:5)는 말씀을 친히 증거하셨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호와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심을 찬양하였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5:11)라는 찬양은 다신론을 배격하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권자임을 고백하고 있다. 고대 근동지방의 만신전(萬神殿) 개념에 따르면 여러 신들 중에서 하나의 최고의 신이 있어 그들을 다스리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이 개념은 후에 그리스 신화나 로마 신화에 영향을 미쳤고 제우스와 같이 그들 중에서 최고의 신을 인정하는 바탕이 되었다. 당시 사회는 그 사회에서 섬기는 신을 섬기지 않고서는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사회 풍습에 따라 신을 섬겨야 했다. 반면에 애굽을 떠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가나안 사회와는 달리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신론에 입각하여 신을 섬기던 당시 사회에 일대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시 95:4-5)는 선언은 지존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다른 신 개념과 비교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 시대 성도들 역시 이점에서 명확한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343 no image '보응의 신학'에 나타난 '공의'_송영찬 국장
편집부
4265 2010-07-21
'보응의 신학'에 나타난 '공의'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법 정신에 근거하여 법을 집행하였으며 이것은 언약의 이행과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고의성 없이 행해진 가해나 살인과 같은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 정신에 따라 구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기도 했다. 이른바 '도피성' 제도(출 21:13-14)는 하나님의 법 정신을 잘 대변하고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법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보복이나 복수를 철저히 금하고 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출 21:24)라는 명제는 법 집행이 보복이나 복수의 차원이 아닌 하나님의 공의의 차원에서 시행되어야 할 것을 지시한다. 이처럼 법 앞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산업에 속한 각 개개인의 인권을 충분히 존중해야 했다. 대신 하나님은 행악자에 대해 그에 합당한 형벌로 보응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공의로 법을 집행하신다는 신뢰 위에 법 이행에 있어 신중을 기했다. 이것은 인간이 행악자나 원수를 상대로 법 집행을 할 때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 법 적용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방지 장치였다. 그 장치 이면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행악자나 원수를 심판해 주실 것이라는 신뢰가 있었다. 여기에서 '보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었다.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신 32:35)는 말씀에 대한 신뢰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이스라엘 신앙의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보응의 신학'은 철저히 증오의 감정을 배제한다. 오히려 그들은 법 집행의 법률적인 관습에 따라 '보응의 신학'을 정립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응'은 정상적인 법 절차가 취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의를 실현하거나 회복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것은 온 땅의 심판자이신 주의 다스림의 주요 특성이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에 해당된다. 하나님은 하늘의 왕과 지상의 심판관으로서 신적인 절대권을 행사하는 분이시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이 땅에서 살아갈 삶의 원리조차 없어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42 no image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_송영찬 국장
편집부
4026 2010-07-07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성경의 공통적인 시각은 다음 몇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하나님의 왕권은 모든 권위를 초월한다. 일반적으로 왕은 화려한 어의로서 권위와 권세를 대신한다. 그렇다고 왕의 권위가 곧 능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실 능력이 없는 권위는 모양만 있을 뿐이며 그 실질이 없기 마련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어의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권위와 능력을 입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권위와 능력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둘째, 하나님의 왕권은 모든 시간 개념을 초월한다. 아무리 막강한 왕권이라 할지라도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치며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흥망성쇠의 개념을 초월하며 연수로 측정되지 않는다. 오로지 영원한 시간으로 표현될 뿐이다. 왕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고 다스리지 않았던 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셋째, 하나님의 왕권은 모든 공간 개념을 초월한다. 하나님은 하늘 위에 '높은 곳'에 계신 분이다. 이 높은 곳은 인간의 세계를 초월한 곳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그 어떤 개념보다도 높은 곳에 보좌를 두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권에 대해 어떤 세력의 도전이나 추월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의 왕권이 초 권위, 초 시간, 초 공간적이라는 초월적인 개념은 천상의 어전회의에서 묘사된 하나님의 왕궁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왕궁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시 93:5)는 시편 기자의 찬송은 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개념들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귀착된다. 하나님은 자신 이외의 다른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왕권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원인에 따라 행사되며 유지되며 보존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보좌가 영원하듯이 하나님의 증거 또한 영원하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법이 이 세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믿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정세가 불안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무관심한 교회의 불신앙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에 민감하다면 오늘날처럼 하나님 앞에서 방자하게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341 no image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의 열정_송영찬 국장
편집부
4557 2010-06-23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의 열정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언약의 파기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이 파괴된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즉 언약의 파기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존재 의의와 가치를 상실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처음 언약 파기 사건은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때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출 24장)한 후였고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두 개의 돌 판을 받으러 간 사이에 발생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에게 경배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로 크게 분노하셨다. 이에 모세는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낸 주의 백성에게서 진노를 거두어 주실 것을 간청했다. 모세의 간청을 들으신 하나님은 비로소 진노를 돌이키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언약 파기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그들이 한 순간에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모세의 중보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후에 모세는 출애굽한 1세대가 광야에서 죽고 난 뒤, 제2세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하게 될 때 이 사건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2세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언약 파기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를 경고한 바 있다(신 9장). 이 사건은 모세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바꾸게 하였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출애굽기 32장의 경우 하나님의 진노가 그처럼 강렬했다는 상태의 묘사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변화가 발생했다고 해석해선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진멸하시겠다는 뜻을 바꾸신 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영원한 언약의 성취라는 경륜에 근거해서 이해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처럼 이스라엘 공동체가 아닌 모세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실 권능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내 산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공동체일지라도 그들과 맺은 언약의 정신에 입각하여 스스로 뜻을 돌이키신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보이신 '인자하심'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에 오늘도 이 땅에서 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40 no image 하나님의 통치와 우리의 역사관_송영찬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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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81 2010-06-09
하나님의 통치와 우리의 역사관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히브리인들의 자기 인식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에서 설정 되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는 하나님의 존 재론(ontology)에 대한 이해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피조물 의 전인격적인 순종을 지고선(至高善)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무엇보다도 언 약 사상 아래 있는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과 지속적인 언약 관계의 유지를 통 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관에 근거한 히브리인들의 자의식(自意識)은 독특한 성격을 가진 역사관으로 발전되었다. 언약은 예언과 그 성취로서 역사 속의 현실로 성취 되었고 히브리인들의 역사관은 언약을 통해 주어진 약속과 그 성취 속에 담 겨 있는 의미를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밝혀 진 의미는 현실의 삶을 조명하고 미래의 삶을 예견하는 자료로서 중요한 잣 대가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현실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불완전한 세계로 비춰졌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는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며 종말에 가서는 하나님께 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 가 궁극적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종말론적 역사관을 낳게 했다. 이러한 종말론적 역사관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한 믿음으로부터만 나 올 수 있었다. 하나님의 전능성이 아니고서는 결코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 가 이루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조 신앙에 근거한 것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이 땅에 지으셨고 역사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궁극적인 창조의 완성인 안식의 세계로 인류를 인도하신다는 직선사관은 낙 관론적 종말론을 가져왔다. 히브리인들의 종말론적 역사관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그의 왕권을 강조한 다. 그리고 그들의 낙관론적 종말론은 역사의 최종 완성과 더불어 도래할 영 원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인생에 의미를 부 여했다(시 24:1). 여기에서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그 주재(主宰)이신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의 통치 아래 있음을 고백할 수 있었 다. 오늘날 교회의 회원인 우리들 역시 이러한 종말론적 낙관론 역사관에 따라 왕이신 하나님만을 우리의 주재로 고백하고 그분의 통치 아래 전적으로 순종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339 no image 예배의 기본 정신 _ 송영찬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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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2 2010-05-26
예배의 기본 정신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보이신 보편의 길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창조주이시며 역사를 주관하시고 주의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인 자하심에 대한 경외는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태도를 보이 는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소유로 인류 가운데서 발탁된 것도 바로 이것 을 위함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 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 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는 말씀 속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한 인격적인 참여가 바로 그 이 름에 합당한 태도이다. 피조물인 인류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최고의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열방 중에서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런 점에서 특 별히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시편 기자가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사와 같음도 없나이다”(시 86:8)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그가 우주의 주권자이시고 유 일하신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관을 가지고 있으며, 절대자이신 하나님 과의 인격적인 관계 아래에서 자신을 종과 같이 여기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 다. 나아가 “주여 주의 지으신 모든 열방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 에 영화를 돌리리이다”(시 86:9)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만이 온 세 상에서 유일하게 경배를 받으셔야 하며, 온 세상 열방이 그 앞에서 복종해 야 함을 주장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소원하는 시인의 심정을 드러내 보인 것이며, 바로 이 일의 성취를 위해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 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라고 간구하고 있다. 결국 시인은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완성과 아직 진행 중인 하나 님 나라의 건설 과정에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신앙의 긴장감을 통해 하나 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재확인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로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이런 자세를 떠나서는 결코 하나님께 마땅히 예배하는 것이 아님 을 명심해야 한다.
338 no image 하나님의 임재와 교회의 예배_송영찬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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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3 2010-05-12
하나님의 임재와 교회의 예배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하나님은 영(靈)이시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의 편재 (偏在)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은 역사 속에서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임재하신다. 아담과 맺으신 언약을 비롯해 아브라함, 노아, 모세와 이스라엘, 다윗 등과 언약을 맺으실 때 하나님은 개념이 아닌 실체(實體)를 보이셨고 그들과 언약 을 체결하셨다. 때문에 언약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적인 실체를 거부한다. 언 약은 오로지 역사의 한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 현현(顯現)하신 하나님의 실체 와 함께 주어졌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혹은 법궤)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보 좌로 삼으셨다는 점에서 신현(神顯)의 극치를 보여준다. 지성소에 자리하고 있는 언약궤 위에는 그룹 천사의 날개가 보위하고 있다. 이것은 하늘 궁정 을 가장 간소하게 축소시켜 놓은 형상이다. 바로 그 공간에 하나님께서 거처 하실 자리를 정하셨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주를 초월하시며, 하늘 궁정에서 친히 역사를 주관하시 고 결정하신다. 지성소는 바로 이 하나님의 궁정을 모방한 것이며 언약궤는 하나님의 보좌를 모방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나 라를 가장 작게 축소시킨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하나님의 나라의 축소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 신을 계시하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성전을 만들게 하셨다. 성전은 그때 까지 하나님께서 보이신 자기 계시의 극치로 독특한 존재 의의를 가지는 것 도 이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 성전을 자신의 몸과 동일시 한 것도 같 은 의미를 가진다(요 2:19-21). 때문에 성전은 단순히 종교적 예식을 치르기 위한 구별된 건물이 아니었다. 비록 가시적인 건축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극대화한 조형물이며, 적어도 우주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장소이자, 그 임재의 상징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성전을 통해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궁전 과 모든 악함과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비로소 교회를 통해 이 땅에 구현된다. 따라서 우리가 드리는 교회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를 경험할 수 없다면 우리 는 그저 공허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친 히 알현하는 바로 그 자리임을 명심하자.
337 no image 지존자이신 하나님_송영찬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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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9 2010-04-28
지존자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을 제거하시겠다는 약속은 유명한 '모 세의 노래'(신 32:20-23)에서도 확인된다. 이 노래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이방인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할지라도 이방인들이 주의 보배로운 백성 을 압제함으로써 주의 백성이 고통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시는 분이시다. 왜 냐하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질투를 일으켜 이스 라엘을 심판하신다 할지라도 주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에 대해서는 한없는 인 자를 느끼시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압제하면서 "우리 수단이 높음 이요 여호와의 행함이 아니라"(신 32:27) 하면서 자기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 의 이름을 모욕하는 악을 참지 않는 분이시다. 때문에 의인이라면 더 이상 이스라엘이 원수들의 압제를 당한다는 사실을 참 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곧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욕 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의인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교만 에 대해 분노하시는 거룩한 분노를 가진다. 이처럼 의인은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셨던 것처럼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대적하는 원수들에게도 이스라엘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분 노하시고 심판하실 것을 바라보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신 하나님 의 공의는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보수(報酬)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신 32:35).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 을 잘 알고 있는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담겨 있는 궁극적인 목적 이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8)에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원수들이 멸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비록 원 수들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 앞 에 되돌아서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을 보고 있는 시편 기 자의 위대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은 온 천하에 가장 위대한 영광스런 이름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이러한 시편의 역사관에 근거한 공의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유일한 지존자이시기 때문이다.
336 no image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 하라_송영찬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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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8 2010-04-14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 하라 최근 지구 곳곳에서 지진이나 기상 이변이 속출하는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서 유달리 많이 발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결같이 귀중한 생명들이 목숨을 잃는 일들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천암함 이 침몰하는 등 여기저기에서 귀중한 생명들이 희생을 당하는 일들을 보게 된다. 참으로 안타까울 뿐 아니라 천안함 유족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한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구조악 때문 에, 아니면 누군가 실수를 했기 때문에, 혹은 대자연의 이변이기 때문에 어 쩔 수 없이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치부하기가 쉽다. 그러나 역사의 현장에서는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우연하게 발생하는 일이 없다는 점을 주 의해 돌아보아야 한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종종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는 분으로 묘 사되고 있다. 이러한 재판은 하늘 궁정에서 전개되고 있는 하나님 의 어전회 의를 그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이때 '하나님의 어전회의'는 하나님께서 주관 하시는 공식적인 회의로서 여기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역사를 친히 결정하 게 된다. 하나님의 어전회의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알현하기 위해 천 사들이 도열해 있는 장면으로 그려지고 있다(욥 1:6). 이사야 역시 어전 회 의의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한다(사 6:1-13). 미가야 선지자는 어전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왕상 22:19- 23). 이러한 하나님의 어전 회의의 성격 중 하나가 재판정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절대적인 재판관이 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 은 곧 역사 속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절대적인 결정이다. 그 결정이 유보되거 나 변경되거나 수정되지 않는다.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그대로 역사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선지서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재판정을 개설하 실 때에는 이스라엘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사 3:13; 암 3:7, 9-11). 어쩌면 지금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교회들이 처한 영적 부패의 심각성 때문 에 하나님께서 어전회의를 개최하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상태에 서 회계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 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영적 부패로부터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할 때이다.
335 no image 부활 신앙과 '이신칭의'_송영찬 국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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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2 2010-03-31
부활 신앙과 '이신칭의' 일반적으로 '이신칭의'(以信稱義)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신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에 이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 한 단편적인 사고방식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성도들도 항상 의롭게 살아야 한 다는 부담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에 일찍부터 길들 여진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늘 힘에 겨운 신앙생활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이 이 신칭의로부터 오는 당연한 의무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성경, 특히 이신칭의의 신학적 배경을 제시하고 있는 로마서는 이신칭의에 대해 좀더 폭넓은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신칭의 가 신자 개개인의 구원 문제로 귀착되지 않고 교회의 지체로서 살아가는 성 도들의 삶에 대한 역동적인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신칭의'를 개인의 삶에 적용하기 이전 에 교회의 지체로 살 아가는 삶의 원동력이라는 점에 새로운 이해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근본적으로 교회의 문제이며, 믿음에 의 한 칭의 역시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고려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 다. 칭의가 단순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롬 1:17)는 신학적 서술로 끝나지 않고 칭의가 신약 시대의 교회에 미칠 근원적인 의미를 이해 함으로써 새 시대에 걸맞는 '교회의 삶'에 관심을 갖어야 한다. 왜냐하면 칭의가 결코 미래를 위한 약속만이 아니라 현재에서도 성도들이 누 리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부 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신자들은 사실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 래적 개념으로 칭의를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칭의의 결과로서 '구원' 또 는 '영생'의 개념은 이중 종말론적 관점, 즉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과 미래 종말론적 관점을 동시에 가지게 한다. 특히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칭의의 효과는 이를 보증하고 상징하는 교회 의 성례로부터 확인된다. 왜냐하면 칭의는 결국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의 능 력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그리스 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을 실현하는 제도가 곧 성례이다. 이번 성찬식을 통해 이 사실을 다시한번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334 no image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정신_송영찬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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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6 2010-03-17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정신 과거 이스라엘 공동체의 3대 절기는 출애굽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첫번째 절기는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약속처럼 애굽의 첫 태생 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을 대속하신 구원 사역의 결정적 사건을 기념한다. 유 월절은 봄의 첫 달인 유대력 정월 아빕 월(혹은 니산 월, 태양력 4월경) 14 일에 지켜졌다. 가족의 규모에 따라 그 달 10일에 흠 없고 일년 된 수양을 선택한 후, 14일 해질 때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고기는 무교 병과 쓴 나물과 함게 먹었다. 다음 날에는 무교절이 시작되었으며 7일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었다. 두 번째 절기는 칠칠절로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7주간 지속되는 절기이 다. 일명 유월절 안식일 이후 7번째 온다 해서 오순절이라고 불린다. 이 절 기(시반월, 태양략 6월경)에는 성년이 된 남자들이 여호와의 성전 앞에 모 두 모여 새 곡물을 가지고 풍성한 수확으로 복을 내려 주심에 감 사하는 첫 열매로 드렸다. 후기에 와서 칠칠절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 는 절기로 바뀌었다. 이때에는 매년 계약을 새롭게 갱신하는 의식을 행했다. 세 번째 절기는 장막절로 유대력 제7월 티쉬리 월(태양력 10월경)에 지키는 추수감사 잔치이다. 수장절 또는 초막절로 불리며 7월 15일 곧 대속죄일로부 터 다섯 번째 날부터 시작되어 7일간 계속되었다. 초막절에는 가족과 종들 과 과부와 고아들과 레위인 및 공동체 사회의 객들이 모두 참가하는 잔치로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 주심을 함께 누렸다. 그리고 매 칠 년마다, 즉 정 기 면제년에는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들으며 언약의 정신을 새롭 게 했다. 이러한 절기 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나아 가 이방인까지도)를 잔치의 자리에 초청하셨다는 개념이다. 때문에 절기 잔 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청에 대한 응답이었으며 당연히 잔치의 주 관자는 하나님이시다. 반면에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이며 이것은 언약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서도 바로 이러한 정신이 담겨 있음을 잊어서 는 안 될 것이다.
333 no image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의 삶_송영찬 국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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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5 2010-03-03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의 삶 시편에서 ‘선’(善)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에 관하여 사용될 때에는 각별한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 이 경우 ‘선’은 ① 기쁨, 즐거움, 만족 등의 의미 를 내포하며 ② 감각을 즐겁게 하고 ③ 미적 혹은 윤리적 만족을 지시한다. 한마디로 지, 정, 의를 모두 만족시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개념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 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만이 유일한 ‘선’이 되신다. “여호와는 선하시 다”(시 34:8)는 개념은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선은 하 나님의 본질에 속한다는 의미를 거진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선’이라는 개념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 나님은 객관적인 실제로서 선을 간주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선의 규범이 없기 때문이다. 선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며 하나님께서 영원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 역시 영원하다.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선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선’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가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선은 언약과 함께 역사 속에서 그 백성 을 구원하시는 과정을 통해 친히 보이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밝히 보여진다 (시 25:7-8).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은 동전의 양 면과 같이 동질성을 갖는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선하 심에 대한 경험을 가질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역사적인 사건에서 확인 된다. 언약의 성취와 관련해 구원이 그의 백성에게 임할 때 여호와께서 기뻐 하시며 즐거워하신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現 存)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진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체험 속에서 그의 선하심을 체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구약의 성도들들은 역사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 한 실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한 마디로 하 나님의 선하심은 언제나 성도들의 살아가는 구원의 삶 속 에서 성취되고 있 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 통치에 순종하는 삶이이야말로 하나님의 선하심 을 풍성하게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다 주게 된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신자들 만이 누리는 최고의 보람이 아닐 수 없다.
332 no image 최상의 예배를 위하여_송영찬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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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1 2010-02-17
최상의 예배를 위하여 이스라엘의 죄의식은 전적으로 언약을 그 기준으로 한다. 특히 출애굽 이후 에는 시내 산 언약에서 다루고 있는 율례와 법도와 관련하여 죄의식을 가지 게 된다. 여기에서 율례와 법도는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율례와 법도는 어디까지나 언약의 내용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례 와 법도에 규정된 규율을 어기는 것은 그들이 법을 어겼다고 보기 이전에 언 약 관계를 파기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언약에는 죄에 빠져 있는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구원의 행위를 행하시는 여 호와의 의지가 담겨 있다. 때문에 언약을 떠나서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길을 찾을 수 없다. 이처럼 언약은 죄의 근본적인 해결과 그 방안을 제시하고 있 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은 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율례와 법도를 행할 능력이 결 여되어 있었다. 그 대책으로 여호와께 서 마련하신 제도가 제사 제도였다. 제사 제도는 죄의 식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영적 무능을 고백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희생 제물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주어졌 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형식에 따라 제사를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율례와 법도를 주신 목적이 죄의식에 사로잡혀 인간의 본분을 행함 에 있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다. 동시에 율례와 법도 가 인류를 죄로부터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언약이라는 점에 서 제사 제도는 구속의 중요한 도리를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스라엘 백성은 율례와 법도를 통해 구원의 도리를 알고 제사 제도를 통해 구 속의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 역시 우리가 참여하는 교회의 예배를 통해 구속의 효과 를 지속적으로 누려야 할 것이다. 아울러 교회의 예배야말로 죄로부터 구속 함을 받은 모든 신자들에게 유일한 구원의 확증이라는 점에서 교회의 예배 형식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가장 합당한 형태를 갖춰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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