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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5.09 (00:00:00)
광야의 소리

세례 요한에 대한 오해


세례 요한이 헤로디아의 일로 감옥에 갇혀 지내던 중 제자 둘을 예수님
께 보내어 이렇게 여쭈도록 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이러한 세례 요한의 행위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아
이심을 의심하였던 증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에 근거하여 세례 요한 같
은 선지자도 옥에 갇히는 곤경에 빠져있을 때에는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의
심했었던 것처럼, 우리도 곤경에 빠질 때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의심할 수 있
다는 논리를 펴나가기도 한다.
이런 유의 논리는 어쩌면 자신의 감정을 세례 요한에게 이입시킨 결과라
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성경 본문의 의미나 기록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순전
히 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세례 요한도 그럴 수 있
을 것이라고 쉽게 판단해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감정이입을 바탕으
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의심했다고 단정짓는
것은 매우 위험
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믿
어 의심하지 않았다. 이는 박윤선 주석뿐 아니라 대부분 주석가들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조금만 수고해서 주석을 참고할 것 같
으면 그런 오류를 쉽게 벗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에 이럴 것이
다"고 얼른 단정짓는다는 것은 결코 정당한 태도라고 할 수 없다.
거기에 한 발 더 나가서 세례 요한 같은 이도 역경 가운데서 오히려 믿
음을 회복하였으니 우리도 역경에 처할 때 세례 요한처럼 믿음으로 이겨나
가자고 외친다는 것은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세례 요한이 의도한 바
도 아니고 본문을 기록한 이가 그와 같은 의미를 담아 놓은 것도 아닌데 어
떤 근거로 그런 망발을 할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의외로
상당수의 설교자들이 그런 유의 설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겠는가?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는 요한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다.
그 어투가 이를 증거 한다. 이 어투는 강력한 의문의
직설법이 아니고 가정
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흔히 누구를 기다릴 때, "내가 너 말고 다른 사람을
기다리랴?"고 가정법 어투를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본문을 대할 때 조금만 수고하면 될 것을,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너무나
분명한 것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간과해 버리는 못된 습성이 남아 있지 않
는가 돌이켜 보아야 한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일생을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
결과를 누가 보장해 주겠는가? 매일 조금씩 누적되어 가는 편견에 휩싸여
살아가는 인생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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