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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491 no image 날마다 새롭게 보이시는 하나님_송영찬 국장
편집부
1299 2016-05-10
날마다 새롭게 보이시는 하나님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이 세상과 인류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리고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함께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다. 때문에 모든 인류는 하나님만을 창조주이며 유일한 신으로 섬겨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는 대 원칙을 정하셨다. 이 대원칙은 지금도 온 인류 앞에 그대로 존속한다. 아무도 이 대원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신’은 소위 사람들이 만들어 섬기는 바알이나 아세라 혹은 담무스와 같은 조작된 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여기에서 ‘다른 신’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곧 왜곡되고 오염된 신관을 가지고 알고 있는 다른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역사라고 하는 현장에서 보이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곧 오늘의 하나님은 어제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이 아니시다. 내일의 하나님은 오늘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이 아니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나이가 들고 키가 자라면서 지혜도 커지고 자라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어제까지 알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오늘도 어제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면, 이미 그것이 ‘다른 신’ 곧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같다. 따라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은 날마다 새롭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조차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죽음 신이 아니시다. 날마다 새롭게 자신을 보이시는 분이시며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서 새로워져야 할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시다. 호리라도 우리가 이 부분에서 소홀히 한다면 이미 우리는 오늘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역사라고 하는 시간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에게 날마다 새로운 시간이 계속 주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 더 이상 낡은 개념의 하나님만을 붙잡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불경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부지런히 알아가야 할 것이다.
490 no image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_송영찬 국장
편집부
1671 2016-04-26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합 1:2-4)라며 하나님께 탄원을 올렸다. 이 탄원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것으로, 하박국은 앗수르의 잔인한 폭정이 끝날 것으로 기대되었던 상황에서 또 다시 바벨론의 무법한 악행이 자행되고 있는 것에 대한 일종의 원망이었다. 갈대아 사람들이 온 세상을 휩쓸면서 인간 사회의 정의가 파괴된다는 것에 대해 하박국은 강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하박국은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라며 하나님의 정의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며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분명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2-4)는 말씀이 그 대답이었다. 비록 역사의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가 눈에 보이지 않고 감추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해 믿음으로 대처하며, 모든 세상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진행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깨닫기까지 인내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이었다(사 8:16-18 참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의 짧은 식견과 소견으로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구조적인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 결코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오늘도 기꺼이 살아내는 것이 신자의 삶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489 no image 우리 사회를 지켜내는 교회_송영찬 국장
편집부
1137 2016-04-12
우리 사회를 지켜내는 교회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이 세상과 인류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리고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함께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다. 때문에 모든 인류는 하나님만을 창조주이며 유일한 신으로 경배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는 대 원칙 아래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이 세상에서 유일한 제사장 나라로 세움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들과 맺은 언약의 증표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의 기업으로 삼게 해 주셨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가나안 땅, 곧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이 세상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사실 위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남 유다 말기의 백성들 역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말았다. 아직도 언약 백성임을 기억하게 하는 성전과 성전 예배와 몸에 세긴 할례와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그 땅에서부터 나는 것으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렸거나 혹 기억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네 가운데에 피를 흘리려고 뇌물을 받는 자도 있었으며 네가 변돈과 이자를 받았으며 이익을 탐하여 이웃을 속여 빼앗았으며 나를 잊어버렸도다”(겔 22:12)라고 책망을 하신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유다 백성들은 부패해졌고 무자비해졌다. 그리고 악랄하게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불쌍한 동족들의 피를 뽑아 자신들의 배를 불렸다. 곧 종교가 타락하면 사회조차도 공의를 잃고 불의에 물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유다 말기만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에 관하여 바르게 알려 하지 않고, 무식하고 무모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들이 많아질수록 이 사회도 악랄해지는 것이다. 그 결과는 불을 보듯 훤하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 안에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이 땅에서 교회는 바로 의인과 같은 존재이다. 곧 교회가 타락하면 이 사회도 무너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마저 악랄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488 no image 이스라엘의 정화와 제2의 출애굽_송영찬 국장
편집부
1243 2016-03-29
이스라엘의 정화와 제2의 출애굽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하나님은 사악한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해 엄하게 대처하셨다. 이에 하나님은 스스로 맹세하시면서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반드시 다스릴지라”(겔 20:33)고 선언하셨다. 여기에 등장하는 ‘능한 손과 편 팔’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해서 자주 사용했던 용어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 능한 손과 편 팔은 언약을 파기한 자들을 열국의 광야로 쫓아내어 그곳에서 엄중한 법적인 심판을 행하시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출애굽 사건을 다시 반복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곧 “너희 가운데에서 반역하는 자와 내게 범죄하는 자를 모두 제하여 버릴지라 그들을 그 머물러 살던 땅에서는 나오게 하여도 이스라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는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겔 20:38)는 말씀에서 보다 정확하게 밝혀진다. 이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1세대들이 광야에서 죽고 난 후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을 기억하게 한다. 이와 같은 정화의 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하나님은 광야의 심판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그들을 거룩한 땅으로 불러들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송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러한 일은 오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약속이다. 그날에 비로소 구별된 그 백성들이 거룩한 제물을 가지고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격적인 인도하심에 대해 “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20:42)고 정의하신다. 이 말씀은 분명히 제2의 출애굽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제2의 출애굽이 성취되는 그날에 새 언약 백성들은 근본적으로 악행을 싫어하게 될 것이며 오로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고 약속하신 새 언약의 성취와 같은 의미를 함의한다.
487 no image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구속을 믿는 것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67 2016-03-15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구속을 믿는 것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구약 시대의 부활 신앙은 시온이즘의 완성이었으며 낙관론적 종말론과 함께 내세에 하나님으로부터 기업을 받을 것이라는 신앙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현세와 내세 사이에는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구속이 절대적이었다. 이 구속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점에서 그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된다는 신앙을 가질 수 있었다. 내세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의와 불공평한 이 세상의 고난과 고통은 그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불의한 자들에 의해 의인들이 공격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가진 자들의 포악이었다. 가진 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늑탈하고 회유하면서 여전히 자신들의 부를 자랑하며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가진 자들의 횡포에 아무런 항거를 할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해 시편 기자는 세상의 불의를 향해 단호하게 외친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시 49:6-8). 일반적으로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영화와 영광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만일 그들의 재물이 자신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렇게 오만하게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지 않을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자만이 참된 인생을 경영할 수 있다는 것은 언약을 통해 주신 약속이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셀라)”(시 49:15)라고 노래한다. 이 시인의 독백은 결코 무력하지 않다. 비록 가진 자들에게 있어 이러한 선포는 귓등을 스쳐 지나가는 소리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을 바라보는 시인의 가슴속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감격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 음부의 권세로부터 의로운 자들을 구속하신다는 이 약속이야말로 부활 신앙의 극치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486 no image 쓸모없는 포도나무 같은 사람들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80 2016-02-29
쓸모없는 포도나무 같은 사람들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익숙한 나무였다. 특히 성전 문은 금으로 된 커다란 포도나무로 장식되어 있었고 어른 키보다 큰, 약 183Cm나 되는 포도송이가 그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그 백성을 취하여 약속의 땅에 심은 참된 포도나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비유하셨다. BC 586년경, 곧 유다 왕국이 역사상에서 사라지던 바로 그즈음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가리켜 쓸모없는 포도나무라고 지적하신다(겔 15:2). 이것은 포도원 농사 풍경에 익숙한 유다인들에게는 매우 현실감 있게 다가서는 이야기였다. 일반적으로 가지를 넓게 펼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번영을 상징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이 포도나무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혹은 신포도를 맺게 되는 경우에는 더 이상 포도나무로서 존재 가치가 상실되어 뽑아버리게 된다. 이러한 비유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렘 2:21)라고 백성들을 책망하는 모습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겔 15:3)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적에 대하여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뽑혀서 말려진 포도나무 가지로는 못 하나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뽑힌 포도나무는 묶어두었다가 말린 다음에 불에 태워버렸다. 이처럼 땔감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곧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불 심판이 다가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미 BC 605년과 BC 597년에 두 차례의 징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상숭배와 패역으로 가득 차 있는 예루살렘은 땔감정도로 밖에는 더 이상 존재 의미가 없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여전히 미신에 속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 역시 불심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485 no image 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_송영찬 국장
편집부
1249 2016-02-16
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요즈음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면 마치 BC 586년경 시드기야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당시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성전 안에서는 사악한 우상숭배들이 들끓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할 뿐 아니라 율법의 정신이 무너짐으로써 그 사회를 강포가 가득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공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시은소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좌시하지 않겠다고 수없이 경고하셨지만 유다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하듯이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고 만 것이다. 실로 그 땅은 힘없는 자들의 피로 가득했고 그 성읍에는 불법이 가득 차 있었다. 급기야 하나님은 이제 그 땅을 버리시기로 결정하셨으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의 행위대로 그들의 머리에 갚으리라”(겔 9:9)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성전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그 땅의 백성들을 친히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 중에서 남은자를 구별해 내셨다. 곧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다. 이것은 마치 출애굽 전날 밤에 죽음의 천사들로부터 그의 백성들을 구별하게 하셨던 유월절 사건을 돌아보게 한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남은자들을 찾으시고 민족 공동체의 사악한 죄악들에 대한 책임을 묻는 대신에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자 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더불어 시내산 언약 및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진노의 숯불을 쏟아 붓도록 명하셨고, 그 명령에 따라 가는 베옷 입은 천사가 한 그룹으로부터 맹렬하게 타오르는 숯불을 받아 두 손에 가득 받아 나가는 장면(겔 10:7)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 맹렬하게 타오르는 숯불이 한국교회 위로 옮겨지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이라도 한국교회는 올바른 말씀을 선포하고, 세례와 성찬을 바르게 회복하고, 정당한 권징을 회복해야 한다. 이로써 하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들이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484 no image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52 2016-01-26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반신국적인 경향을 가진 세상의 역사를 볼 때 의인들이 설자리는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언약을 통해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의뢰하는 것이다. 때문에 신자들은 구속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구속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순전히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만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상누각(砂上樓閣)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릇된 근거를 바탕으로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은 오히려 불필요한 위험을 초래한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에 냉정하고 객관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믿음은 결코 그릇된 형태의 확신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역시 이성적으로 판단한 확고한 근거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신뢰의 본질에 대한 철저한 평가를 바탕으로 얻어지는 것이 믿음이다. 이런 점 때문에 하나님은 언약을 주셨고 이 언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셨던 것이다. 아무런 약속도 없는 상태에서 믿음을 유추해 낸다는 것은 풍부한 상상력이면 가능하다. 그러나 약속에 대한 신뢰는 인격적인 확신이 동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래서 인격적이어야 한다. 신자들은 세속사를 볼 때 무모한 악인들의 행악이 매우 조직적이며 끈질기게 진행되고 있음을 꿰뚫어 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사납게 휘몰아치는 세속사의 탁류 속에서도 그 순전함과 건실함을 유지하고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구속사의 광맥을 놓치지 않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확신하게 된다. 나아가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를 경영하시는 전능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고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신자들은 반신국적인 세력을 대변하는 악인의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에 도달하고 만다는 사실을 알는 것이다. 사실 악인들의 역사는 영원토록 지속되지 않는다. 구속사에 대한 안목과 종말론적 세속사관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시며 역사를 경영하시는 전능자시며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감찰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483 no image 유다 왕국의 종말이 주는 교훈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89 2016-01-12
유다 왕국의 종말이 주는 교훈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온순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당시 바벨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기대하고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시드기야는 기대에 부응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때마침 시드기야 재위 3년(BC 595)에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인들 중 일부가 자신들이 속히 해방될 것이라고 선동하는 일부 거짓 예언자들의 선동을 받아 바벨론에서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폭동으로 인해 유다 땅에서는 일련의 불길한 소망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열망은 이듬해(BC 594)에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의 사절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반란을 모의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즈음 애굽의 호프라(Apries, BC 589-570)는 자신의 통치권을 아시아까지 확장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조성되자 애굽과 유다 그리고 두로와 암몬이 가담해 바벨론에 대한 반란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때 시드기야는 친 애굽 성향 방백들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이 반란에 가담하고 말았다. 바벨론의 대응은 너무도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BC 588년 10월에는 이미 유다 땅에 진군하여 예루살렘을 봉쇄했다. 그 이듬해까지 예루살렘은 버틸 수 있었지만 이미 운명은 결정된 상태였다. 시드기야는 부득이 항복을 하고자 하였지만 마음이 약한 시드기야는 항복할 기회조차 놓쳐버리고 말았다. BC 586년, 시드기야 재위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의 식량이 바닥이 날 즈음 바벨론군은 북쪽 성벽을 뚫고 쳐들어왔다. 이때 시드기야는 암몬에서 피신처를 구하고자 탈출했지만 여리고 평원에서 붙잡혀 수리아의 립라에 있는 느부갓네살 앞으로 끌려갔다. 그 자리에서 시드기야는 그 어떤 자비도 얻을 수 없었다. 이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들을 통해 수없이 경고했다. 하지만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들은 그 경고들을 무시하고 말았다. 그들은 바벨론이나 애굽과 같은 큰 나라의 군사력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언제나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임을 명심하자.
482 no image 이스라엘 왕국사에 비춰본 우리 인생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73 2015-12-29
이스라엘 왕국사에 비춰본 우리 인생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가장 먼저 모든 산과 언덕에 있던 가나안 종교인 풍요의 신들을 예배하는 산당들, 곧 바알과 아세라 등의 제당들을 제거해야 했다. 그러나 사사 시대를 거쳐 왕국 시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옛적에 무너뜨렸던 그 산당들이 점차 다시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유다 왕국의 초기인 르호보암(BC 931-913) 시대를 가리켜 열왕기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왕상 14:23-24)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심각한 우상숭배는 BC 721/722년에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30년도 채 지나지 않은 므낫세(BC 695-642) 통치시기에 남 유다 왕국 역시 우상 숭배가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비록 요시야(BC 640-608)가 종교개혁을 이뤄냈지만 그 때 뿐이었고 또 다시 사악한 각종 우상들을 위한 제단들이 전국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요시야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BC 605년(여호야김)과 BC 597년(여호야긴)에 두 번이나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되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 백성들이 돌아서기를 촉구하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경고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에스겔은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칼이 너희에게 임하게 하여 너희 산당을 멸하리라”(겔 6:3)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설 마음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침내 선지자들이 경고한 것처럼 BC 586년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다. 한때 하나님의 도성으로 불렸던 예루살렘은 이때 완전히 불에 태워져 소각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 하나님은 소수의 사람들을 남겨서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다. 그들은 70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해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이스라엘 왕국사는 하나님을 향해 끊임없이 배도하고 있는 우리들의 인생과 다름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가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순전히 오래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일 것이다.
481 no image 성탄절에 생각하는 믿음의 내용_송영찬 국장
편집부
1181 2015-12-15
성탄절에 생각하는 믿음의 내용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하나님은 자신이 아닌 어떠한 외부적인 세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분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 및 경륜과 인간의 공로에 대한 대조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오직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 때문에 우리를 새로 낳으셨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다. 그의 순전한 은혜에 따라 우리가 진리에 대한 지식의 빛을 받게 되었고 우리의 소망이 이 선택과 일치하게 되었다. 잘 알다시피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입양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부르셨음을 전제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영적인 탄생을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의 특수한 사역에 속한다. 이 일은 복음 사역자들에게 위임되었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증표가 된다. 때문에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고유한 일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효과적인 부름을 받을 때 비로소 새 사람이 되고 옛 성품을 저버리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시키는 것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되어짐을 의미하며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접근할 수 없음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야고보는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고 권면한다. 온순함과 포용성이 있는 마음은 성도의 특유한 성품이다. 야고보는 신자들에게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모든 것을 내어버리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 말은 더러운 옷처럼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려는 것이나, 자기 자신의 도덕 기준을 설정하여 따르려는 것이나,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이미 실패한 것과 같다. 우리는 해마다 거듭 반복되는 성탄절 절기 때마다 아기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한다. 당연히 아기 예수의 탄생은 우리들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열어주었다. 따라서 우리들 역시 그 아기 예수께서 오신 것과 같은 신비한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난 존재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신비가 곧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이다.
480 no image 공평과 신실함의 기관으로서 교회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51 2015-12-02
공평과 신실함의 기관으로서 교회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바벨론 포로 이후 구약 선지서들이 선포하고 있는 시온의 재건은 필연적으로 영적으로 순결한 이스라엘의 탄생을 예고한다. 이것은 시온의 재건과 이스라엘의 정화를 다루고 있는 시편의 주된 내용이다. 사실 과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을 정화하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성취된 이스라엘의 정화는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위치를 회복했음을 의미한다. 회복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서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은 이방의 구원으로 확장될 것에 대한 징조였다. 따라서 시온의 회복은 이스라엘의 구속과 동시에 이방의 구원도 함께 성취됨을 상징한다. 이사야의 메시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방의 구원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즉 이스라엘과 이방의 구원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처음부터 같은 차원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는 예루살렘 성을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성벽을 삼으신 성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곧 돌이나 흙으로 건축된 세상의 견고한 성은 마침내 무너지고 말 것이지만 새롭게 건설될 시온은 결코 무너짐이 없을 것이다. 그 시온 성은 공의와 신실함의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시온의 영역은 전 우주적이었는데 그 나라는 이 땅의 모든 경계선의 끝까지 확장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의 백성 역시 유다 땅에 한정되거나 하나의 민족으로 제한되지 않고 전 세계 백성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나라가 공의와 신실함으로 세워져야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통치됨으로써 구현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2천 년 전에 유대 당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탄생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되었다.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성취될 시온의 회복과 더불어 도래할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선포하는 기관으로서 이제 이 땅의 교회들은 계시로 주어진 성경에 따른 공평과 신실함을 몸소 구현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그 길만이 지금 우리 교회들이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479 no image 농부 '기드온'과 사사 '기드온'_송영찬 국장
편집부
1811 2015-11-17
농부 '기드온'과 사사 '기드온'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사사기에 보면 믿음의 용사라고 불리는 유명한 사사 ‘기드온’이 등장한다. 그런데 정작 기드온은 연약하고 순하게 생긴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했던 기드온은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자신을 보내실 것이라는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비록 자신의 힘이 미약하고 가문이 빈약할지라도 여호와께서 결정하신 일을 번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로 자기 앞에 서 계신 분이 과연 여호와 바로 그 분인가를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평소 여호와에 대한 기드온의 신앙을 알 수 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는 말을 듣고 그만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곧 그의 신앙이었던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사자는 이러한 기드온의 신앙을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기드온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부르신 것이다. 기드온이 일개 미미한 농부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조용히 농사일에 착념하고 살 정도의 인물이었다면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용사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기드온을 가리켜 “큰 용사”라 했던 것이다. ‘큰 용사’라는 말은 ‘전쟁에 능한 자’ 또는 ‘힘, 용맹, 능함’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대부분 전쟁과 연관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럴 경우 이 단어는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런 점에서 기드온은 하나님을 대신해 전쟁에 나갈 용사로 부름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기드온이 300명 용사들과 함께 미디안을 무찌른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런데 정작 우리들은 본래 기드온이 얼마나 무력한 인물이었는지를 잊어버리는 것 같다. 기드온을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힘이나 능력이나 그밖의 그 어떤 것으로도 결코 이루지 못하는 무능력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 힘으로나 지혜로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평소 우리는 그냥 은혜 가운데서 살려주시니 살아지고 살아낼 뿐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용사인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인 것이다.
478 no image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의미_송영찬 국장
편집부
1294 2015-11-03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의미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유다 총독으로서 느헤미야는 12년의 재직 기간을 마치고 페르시아로 돌아갔지만 곧 다시 왕을 설득하여 유다 총독으로 재임했다. 이는 전보다 더욱 개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함이었다. 느헤미야는 먼저 성전 제의를 확립하고 십일조를 거두어 정직한 재무관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장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문을 온 종일 닫아 두게 하였다. 또한 이방인들과의 통혼으로 인해 태어난 자손들이 히브리말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시켰다. 심지어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한 손자가 대적자인 산발랏의 딸과 혼인했다는 이유로 그를 국외로 추방시켰다. 이처럼 강력한 느헤미야의 개혁에서 이방인과의 통혼에 대하여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유대인 신앙 공동체에 대한 정체성 확립과 매우 긴밀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느헤미야서는 이방인들에 대하여 매우 배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배타주의에 근거한 근시안적인 사상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신령한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이 겉으로는 배타주의로 보여졌을 것이지만 그 내용에서는 결코 이방인을 배척하지 않았다.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정당한 신앙을 고백한다면 언제든디 그들을 신령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장차 새롭고 신령한 공동체로 태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비록 정치적인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하게 하였을지라도 이것이 그들의 정체성을 무너뜨리진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국가 체제를 갖추기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윗 왕국 이후 왕국의 멸망으로 인하여 그들이 잃어버린 국가적 형태에 대한 가치나 의미를 구태여 다시 회복할 필요는 없었다. 이것은 새 이스라엘,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태어날 신약 시대의 교회를 태동케 하는 중요한 역사적 이정표였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역사관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우리 시대의 교회들은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하는 기관들이다. 곧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역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 각오를 가지고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477 no image 제발 정신 차립시다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53 2015-10-20
제발 정신 차립시다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칼빈이 기초하여 프랑스 교회가 1559년에 공적으로 고백한 ‘프랑스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들의 세력이 미치는 한도에서 말씀 설교와 성례전을 파괴하고자 하는 모든 공상가들을 배척한다”(제25조). 이 고백은 말씀 설교와 성례전을 교회의 주요한 표지로 제시하고 있으며, 이를 부정하거나 부인하거나 도전하는 자들을 향해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고백의 총아라 할 수 있는 1647년에 교회가 공적으로 고백한 ‘웨스트민스턴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주님은 여러 시대에, 그리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기의 교회에 자신의 뜻을 선포하시기를 기뻐하셨으며, 그 후에는 진리를 더 잘 보존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고 육신의 부패와 사탄과 세상의 악에 대비하여 교회를 더욱 견고하게 하며 위로하시기 위해서 바로 그 진리를 온전히 기록해 두시는 것을 기뻐하셨다. 이같은 이유로 성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단되었다”(제1장 1절). 이 고백은 교회의 모든 말씀 설교와 성례전의 기준은 오로지 기록된 성경 66권이며, 그밖의 그 어떤 계시도 교회에 주어지지 않았음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교회는 신학적인 모든 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기록된 성경 66권만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았으며, 이 표준에 근거하여 교회의 표지인 말씀 설교와 성례전을 보존하고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의 명백한 표준을 떠나서 자의적인 직통계시, 꿈, 이상, 방언, 임파테이션, 관상기도 등을 들먹이며 교회를 어지럽히거나 오염시키는 일들을 그치지 않고 있다. 극단적인 예로 오순절 운동이나 신사도 운동을 비롯해 교회의 표준인 성경을 조각하여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해 그것이 마치 복음이나 되는 것처럼 혹세무민의 길을 조장해왔다. 이 모든 것이 성경을 아는 지식과, 이로 인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무지로부터 나온 방자한 행위들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한국교회도 적잖이 나이도 들고 철들만한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철없던 시절에 통했던 조악하고 조잡한 속임수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유린하거나 욕보이려 할 것인가? 제발 정신 좀 차리자.
476 no image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정의_송영찬 국장
편집부
1272 2015-10-06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정의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본래 개혁주의 교회는 개 교회주의를 지양하며 보편교회를 지향한다. 지상의 어느 누구도 자기가 속한 교회만이 참된 교회라고 고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이에 우리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고백하는 믿음에 관하여 명확하게 그 의미를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첫째가 우리는 신구약 성경 66권이 초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유일한 말씀이며, 사도교회 시대 이후 계시가 종결되었고, 우리의 신앙 교리와 신앙생활에 대하여 유일무이한 확실한 준칙(準則)으로 받는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는 살아계신 한 분 하나님을 믿으며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로 영원히 존재하심을 믿는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심을 믿는다. 그는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완전히 무죄하심과,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대인속죄(代人贖罪)하심과, 3일 만에 육체로 부활하사 승천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대제사장이 되심과, 크신 권능과 영광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이 세상에 친히 재림하실 것과, 만국을 의로 심판하시며 그의 모든 원수들에 대하여 완전히 승리하실 것과, 구속한 백성의 영원한 왕되심과 마침내 그의 나라를 성부께 바칠 것을 믿는다. 이와 함께 우리는 성령께서 인격이시고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성령께서 창조와 섭리와 구원, 특히 신자의 중생과 성결과 영광을 주장하심을 믿으며 성령께서 구속한 백성이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신자들에게 합당한 은사를 주심을 믿는다. 나아가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며,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을 떠나 사망하게 될 것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믿으며 또 이외에는 구원 얻을 다른 길이 없는 줄로 믿는다. 끝으로 우리는 의인과 불의한 자의 몸이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으며, 믿는 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사망의 부활을 얻을 것을 믿는다. 이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에 근거하여 우리는 보편의 하나인 교회를 지향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475 no image 미완의 종교개혁_송영찬 국장
편집부
1339 2015-09-22
미완의 종교개혁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남유다 왕국의 제15대 왕 요시야는 26세경인 재위 18년(BC 622)에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이때 마침 성전을 수리하는 가운데 ‘율법책’ 사본이 발견되었다. 요시야는 백성의 장로들을 성전으로 소집하여 율법을 그들에게 읽어주고 여호와 앞에서 율법에 순종하겠다는 엄숙한 언약을 맺게 했다. 이 언약 체결식은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언약갱신의 의식을 치른 사건과, 모세가 시내산에서 백성들에게 언약책을 읽어주고 체결한 언약식과 같은 맥락에서 거행되었다. 이처럼 시의적절하게 율법책이 발견됨으로써 요시야의 개혁 작업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개혁의 이면에는 제사장 나라로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심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요시야의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요시야의 개혁으로 스바냐 선지자가 규탄했던 가나안의 바알숭배, 앗수르의 성신(星辰)숭배, 암몬의 밀곰숭배를 비롯해 성전 안에 안치되어 있던 남신 바알을 표상하는 물건들과 여신 아세라상, 태양에게 봉헌된 마상(馬像), 별을 숭배하기 위해 지붕 위에 세운 제단 등이 파괴되었다. 이로써 므낫세 때부터 있었던 갖가지 태양 제의와 성신(星辰) 제의 등을 비롯해 토착화되었던 이방 제의들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 종교개혁과 함께 거세된 이방신 제사장들을 비롯해 남창, 성창, 이방제의 종사자들이 처형되었다. 동시에 각 사당에서 행해지던 제의적 매음, 힌놈의 골짜기에서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던 인신제사 관습, 무당과 마술사를 통해 점을 치던 무속 관습 등이 금지되었다. 나아가 요시야는 북부에 있는 사마리아의 신당들과 벧엘 신전을 파괴하고 그곳의 제사장들을 처형했다. 요시야의 개혁은 멀리 북부 갈릴리까지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의 종교개혁에는 한계가 있었다. 곧 언약에 합당한 삶으로 복귀하기보다는 단지 제의적인 활동으로 만족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사회적인 죄악들 역시 개선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현상들은 유다 민족이 더 이상 선지자의 말을 들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단지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말고 그 이상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가져오게 만들 뿐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파멸의 구덩이를 향해 뛰어들고 있었다. 우리는 역사적인 제100회 장로회 총회를 맞이했다. 더 이상 미완의 종교개혁에 머물지 않도록 우리 모두 심기일전해야 할 것이다.
474 no image 제100회 총회와 우리의 다짐_송영찬 국장
편집부
1223 2015-09-08
제100회 총회와 우리의 다짐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1981년 우리 교단이 출범할 때 비장한 결심으로 아래와 같이 제66회 총회를 소집했다. “우리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인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교회정치, 권징조례 및 예배모범을 우리의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삼는다”(총회소집문 제2항) 이 선언은 우리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 교단은 역사적이며 전통적인 장로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 이를 부정하는 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어 총회소집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의 특징인 하나님의 절대주권, 성경의 객관적 권위, 구원의 전적 은혜성,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의 몸으로서의 교회 등을 신봉하고 이상과 같은 바른 신학의 내용을 흐리게 해 온 이질적인 다양한 신학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개혁주의의 참 모습을 찾아내는 데 힘쓴다”(총회소집문 제3항). 이 선언은 종교개혁자들이 목숨을 바쳐서 지켜온 신앙의 본질을 우리 또한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짐하고 있다. 이러한 확고한 정신을 바탕으로 지난 34년간 우리 교단은 장로교회의 이념을 구현해 왔던 것이다. 이제 제100회 장로교 총회를 앞두고 있다. 이즈음에 과연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표준은 무엇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단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가를 경건하게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이에 우리 교단은 다음과 같은 정신으로 시작되었음을 돌이켜 보고자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며 교회의 통치자라는 바른 교회관의 확립과 모든 사역자들은 특권의식이나 주장하는 자세보다는 섬기는 자세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받들도록 힘쓴다”(총회소집문 제4항). 그렇다. 우리에게는 역사적 장로교회가 고백해 온 명확한 신앙의 표준문서가 있으며, 이질적인 요소들을 제거한 명쾌한 신학이 있으며, 특권의식을 거부하고 섬기는 자세로 봉사하는 확고한 교회관이 있다. 이번 제100회 총회는 이 점을 명백하게 온 천하에 천명해야 할 것이다.
473 no image 말세에 신자들이 가져야 할 신앙 정신_송영찬 국장
편집부
1416 2015-08-25
말세에 신자들이 가져야 할 신앙 정신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무슨 일이든지 자기의 지혜나 사회 세력이나 수단과 술수를 통하여 혹은 친구를 의지하려는 마음이 먼저 발생할 때가 무서운 시험이 닥칠 때이다. 차라리 예수를 부인하라고 요구해 오면 신앙에 대한 경각심이라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로 혹은 사회의 정황이나 주변 여건의 변화로 인하여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때 자칫하면 신앙의 원리를 포기하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받고 그 안에서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경우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문제를 풀기 위해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제쳐두고 우선 자신의 생존을 염려하여 세상과 타협하거나 잠정적으로 그 앞에 굴복해 버린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배교하는 자리에 빠지게 된다. 배교의 두드러진 특성은 자신의 인생을 경영함에 있어 하나님을 차선에 두는 것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최선의 방편은 늘 자기 안에서 혹은 이웃이나 주변의 사회적인 세력 안에서 얻으려 한다는 것이 배교의 첫걸음이다. 따라서 이러한 미혹이나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이 왜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먼저 찾아야 한다.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신 고유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이다. 이에서 벗어난 그 어떤 목적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할 명분은 없다. 따라서 한 개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명을 수행해야 할 것인가는 그 사람이 처한 교회적인 형편과 교회가 나가야 할 길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목적,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은 어느 시대나 바뀌지 않는 법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기 위해 정당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고 살아 있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의 정신이다. 이 신앙이 분명할 때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이유도 분명해진다.
472 no image 버려야 할 소아적인 구원관_송영찬 국장
편집부
1457 2015-08-04
버려야 할 소아적인 구원관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되는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이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양식을 섭취하고 장성하여 교회 안에서 각각의 존재 가치와 그에 따른 사명을 각성하고 수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인생의 목적을 완수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신자로서 가지는 각성이 교회아(敎會我)로 각성이 되어 있고 하나님 나라의 진행에 있어서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이르기 위해 교회 회원들이 모두 서로 그만한 각성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전 인격적인 일체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 일체감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감정이다. 모든 생활 감정이 이 사랑을 중심으로 일치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계를 우리는 유기체라고 한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생명체로서 각각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우리 동양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한국 교회가 그러한 경향이 농후하다는 점을 우리는 지나칠 수 없다. 이런 경향은 기독교 사상이 아닌 옛적부터 내려온 소승불교의 영향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나 형편은 상관하지 아니하고 나 하나 잘 되면 그만이라는 소아적인 사고방식과 극락왕생한다는 불교의 내세 신앙이 그대로 한국 교회에 유입되고 말았다. 그러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개인 구원에 관심이 많고 현실에서 가지는 신앙생활보다는 내세에서 복락을 얻고자 하는 내세 지향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함께 교회를 이루고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의 드높은 사상을 문화로 드러내고 그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을 통하여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의 관계는 소아적인 사랑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바탕으로 한 대의적인 사랑의 관계여야 한다. 그러한 삶의 모습은 ①하나님께 대한 숨김없는 사랑에서 나오며 ②그 사랑을 바탕으로 서로를 가장 그 사람답게 가꾸어주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한 삶으로 교회를 세울 때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바탕으로 하는 교회가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자기 혼자만 잘 믿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소아적인 구원관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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