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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 no image 목사 임직 받는 이들에게_송영찬 국장
편집부
2013 2014-10-07
목사 임직 받는 이들에게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작년에 강도사 고시를 치르고 총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은 목사 후보생들은 교회의 청빙을 받아 목사 고시를 치르고 이번 10월에 있는 가을정기 노회에서 목사로 임직을 받게 된다. 이로써 길게는 십 몇 년, 혹은 십 여 년 동안 목사가 되기 위한 대장정의 길을 마감하고 마침내 거룩한 교회의 직분자로 오롯하게 교회를 위해 헌신하게 된다. 이에 목사 임직을 받는 이들에게 그동안 달려온 면려의 길을 치하하며, 앞으로 교회의 직분자로 살아가기 위해 다짐해야 할 내용을 점검하고자 한다. 칼빈은 제네바교회의 교회법 초안(1544년)을 작성하면서 교회의 직분 중에서 가장 먼저 목사의 임직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에서 칼빈은 목사가 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사항을 점검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교리에 대한 것으로 목사 후보생이 성경에 관한 바르고 건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지를 확인하고, 또한 그가 그 성경 지식을 회중 앞에서 소상하게 말하여 회중을 세워 나아가기에 적합한 인물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둘째, 신앙에 대한 것으로 목사 후보생이 그릇된 견해를 취할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에게 교회가 승인한 교훈(교회의 신조 및 신경)을 받아들이고 받들 것을 고백하도록 하며 그가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것을 고백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생활에 대한 것으로 목사 후보생은 바울 사도가 딤전 3장 1-7절에서 제시한 바에 따라 선한 행실을 행하고 항상 자신을 삼가 행함으로써 비난받을 일이 없는 사람임을 확인해야 한다. 잘 알고 있듯이 바울 사도는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를 목사의 덕목으로 삼았다. 이제 목사로 임직을 받는 이들은 이러한 내용들을 숙지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선한 직분자에게 맡겨진 충성스러움을 힘써 행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450 no image 바울의 칭의관과 교회가 누릴 영광_송영찬 국장
편집부
2195 2014-09-23
바울의 칭의관과 교회가 누릴 영광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바울의 칭의관에 있어서 획기적인 내용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에서 분명해진다(롬 8:14).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의미는 그들이 곧 양자의 영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임을 의미한다(롬 8:15-16).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상속자의 자격을 부여받음으로써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영광을 상속하였음을 강조한다(롬 8:17). 여기에서 우리는 칭의가 결코 미래를 위한 약속만이 아니라 현재에서도 성도들이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신자들은 사실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칭의의 결과로써의 ‘구원’ 또는 ‘영생’의 개념은 이중 종말론적 관점, 즉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과 미래 종말론적 관점을 동시에 가지게 한다. 특히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칭의의 효과는 이를 보증하고 상징하는 교회의 성례로부터 확인된다. 왜냐하면 칭의는 결국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나아가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을 실현하는 제도가 곧 성례이다. 칼빈은 이와 관련해 제네바 교리문답 제330문과 331문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실현된 종말론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칭의를 통해 거룩한 나라의 본상을 이 땅에 드러내고 그 교회가 장차 완성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구현해내기를 기뻐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논리적 근거이기도 하다. 때문에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칭의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세우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같은 의미에서 칭의가 가지는 궁극적 목적으로써 미래 종말론적 관점을 충족시키기 위해 실현된 종말론적 관점으로 나타나는 교회의 삶에 대한 관심을 유추한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교회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참된 모습을 기대하며, 새창조의 완성을 향해 성령의 통치를 받으며 전진하는 교회가 누릴 영광이야말로 온 교회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449 no image 제한속죄, 더 이상 운운할 필요 있는가?_송영찬 국장
편집부
2651 2014-09-02
제한속죄, 더 이상 운운할 필요 있는가?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역사 속에서 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이래, 사람들은 구원과 관련하여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 왔다. 특히 회자되었던 내용들은 인간자력구원 혹은 신인협력구원과는 달리 전적으로 이신칭의에 따른 타력구원이 주요 논제였었다. 이와 관련해 오랜 논제들은 펠라기우스를 정점으로 이단으로 정죄됨으로써 오로지 이신칭의에 따른 타력구원만을 교회는 고백하게 되었다. 그리고 1618년에 공교회는 이와 관련한 교리를 신앙으로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도르트 신앙고백서의 주요 주제들인 TULIP 교리는 공교회가 심사숙고하고 연구하여 정립하게 된 것이다. 이 교리는 어느 누구 혹은 몇몇 사람들의 학설도 아니며, 또 그렇다고 이제 와서 신학적으로 재해석할 논제도 아니다. 곧 도르트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충분히 주지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TULIP 교리를 재평가할 대상이 이미 아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미 공교회가 고백해 온 그 내용을 우리는 고백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혹 내가 아직 그 내용을 모두 받아들이지 못한다 할지라도 신자는 공교회의 고백을 계승할 위치에 있는 것이며, 그 내용을 자신의 신학적인 식견이나 이론으로 모두 해명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 내용이 모두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고백서대로 외우고 고백하는 것이 일차적인 신자의 의무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역사적인 공교회가 고백해 온 그 내용을 숙지하고, 고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제한속죄'뿐 아니라 TULIP 교리를 논제로 삼아 논란을 불러일으킬 이유가 없다. TULIP 교리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해명이 되었으며, 개 교회 또는 신자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심도 있게 결정하는 일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그 교회는 또는 그 자신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로 갈라지는 것이다. 칼빈주의를 운운하면서 '제한속죄' 교리의 정당성을 따진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자신이 칼빈주의를 따르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교회와 신자는 교리를 모두 이해해서가 아니라 역사적인 공교회가 고백해 온 그 교리를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것에서 비로소 교회이며 신자임을 드러내어야 한다. 교회와 신자는 이처럼 교회의 신앙고백 위에 서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448 no image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라는 거짓_송영찬 국장
편집부
1729 2014-08-19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라는 거짓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많은 사람들은 정의를 부르짖기 좋아한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정의의 화신이나 되는 것처럼 정의롭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향해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그리고 자신이 부르짖는 정의로운 행동을 수행함으로써 마치 이 땅에 정의가 구현될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 커다란 함정이 숨겨 있다. 곧 이 세상에서 죄 있는 인간이 진정한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가장 큰 함정이다. 인간의 세계에서는 지금까지 그 어느 시대든 진정한 정의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사람들이 정의를 부르짖는 것은 결국 가진 자들 혹은 기득권자들을 옹호하기 위한 하나의 거짓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힘 있는 자가 정의이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혹 그들이 교회를 향해 또는 신자들을 향해 ‘정의’라는 이름으로 질타한다면 그 이유 또한 저들의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은 불편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마치 교회와 신자들이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것처럼 주장함으로써 ‘힘 있는 자가 정의’라고 하는 이 불편한 진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정의는 인간의 죄로부터 발휘되는 ‘힘의 철학’에 의해 지배되어 왔었다. 그리고 그 ‘힘의 철학’은 처음 가인이 아벨을 불의한 방법으로 살해할 때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것이 곧 ‘가인의 길’이다. 진정 사람들이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다면 힘의 철학으로 대변되는 가인의 길로부터 떠나야 한다. 곧 '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이 기본적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사실에는 결코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들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의 역사는 절대로 ‘힘의 철학’으로 경영되지 않는다. 마치 어떤 ‘힘’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결국 그 힘은 또 다른 힘에 의해 제압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을 이끌고 가는 방향을 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 경영 안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정의’를 발견할 수 있음을 명심하자.
447 no image 약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주의할 것_송영찬 국장
편집부
1932 2014-08-05
약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주의할 것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아닌 백성들을 위한, 또는 지배계급이 아닌 피지배층들을 위한 마음 씀과 그 배려에 있어서 우리가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그 백성들이나 피지배층들의 죄악이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방자하고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여서 평소에 온갖 자신의 이권만을 탐하고 이웃의 아픔에 대해 무관심하며 세상의 악한 행실을 더 달가워하고 즐거워하고 있는 현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백성들이 이기적이고 탐심이 가득해서 자기들에게 어떤 특혜나 이익을 가져다 줄 것처럼 속이는 자들에게 권력을 쥐어주게 된다면, 의당히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사실 어느 시대든, 어디서든 탐관오리들이 득실거리고 독재자들이 서슬이 퍼렇게 백성들을 유린하게 된 그 이면에는 그들보다 더 부패한 백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신자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물론 교회는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약자들의 인권과 권익을 먼저 염려해야 한다. 반면에 이 세상이 '그 악한 자'의 품 안에서 불의를 음식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교회가 기도할 때, 그 기도는 교회의 공적 신앙고백을 따라야 하며, 원론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각각의 사안에 따라 무엇이 진정한 공의인가에 대해 우리는 시대적인 혹은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잘 못 판단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회가 공적인 기도를 할 때에는 이런 점들에 대해 매우 조심해야 한다. 이 땅에서 약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에 따른 징계를 받을 수 있으며, 이들을 통하여 발생하게 되는 권력자들과 지배층들의 부조리와 구조적인 죄악들 또한 당연히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교회가 이러한 내면적인 원인들을 배제하고 무조건 약자들의 편만을 들게 될 때, 그 안에서 사회적인 또는 국가적인 불의와 부정이 싹트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따라서 먼저 백성들이 혹은 약자들이 스스로 불의와 부정에 대해 항거할 수 있어야 한다. 부패한 권력의 이면에는 불의를 좋아하는 부정한 백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446 no image 하나님의 영으로 드리는 예배_송영찬 국장
편집부
1970 2014-07-22
하나님의 영으로 드리는 예배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한다’(빌 3:3)는 말에서 ‘봉사하다’(λατρευειν)는 단어는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봉사한다는 의미로,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 또는 제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출 23:25; 신 6:12; 10:12; 수 22:27; 롬 9:4). 이와 관련해 진정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드리는(λατρευειν, 신 10:12) 특권이 이제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부름받은 성도들인 ‘교회’에게로 이전되었다. 오로지 이신칭의에 의해 구원을 받은 교회만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내면적인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로부터 떠나 외면적인 의식의 종교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한다(요 4:23-24).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포함한 모든 행동이 어떤 외적인 형식이나 의식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언자들에 의해 약속되었으며(겔 36:25-27)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생명과 능력과 사랑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에 비로소 성도들은 성령을 힘입어 참되고 받으실 만한 예배를 마음으로부터 드릴 수 있게 된다(요 4:23-24; 롬 12:1; 벧전 2:5).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깊은 본성 속에서 인도자로서 활동하심으로써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 결과 사랑과 봉사의 삶을 촉진시키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유일한 봉사(λατρευειν), 즉 예배이다.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신칭의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 논증하고(롬 1-8장),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 허물어진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인 교회의 시대가 열렸음을 확증한 후(롬 9-11장) 그들을 향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선포했던 것이다. 우리는 매 주일 참여하는 교회의 공적인 예배를 통해 이 사실을 늘 확인하고 우리가 그 자리에 있다는 점을 늘 감사해야 할 것이다.
445 no image 이성의 판단 기준과 성경_송영찬 국장
편집부
1792 2014-07-08
이성의 판단 기준과 성경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살아 온 경험, 지금 살고 있는 현장의 상태, 자신이 속한 집단적인 정황, 자신이 습득한 지식, 그리고 인과관계로 맺어진 주변 인물들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판단한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판단의 근거들 중 어느 하나 혹은 그 이상에서 잘못된 정보들이 입력될 경우 언제나 오판을 하게 된다. 그렇게 여러 번 오판하고 실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통해 자신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가를 돌아보며 반면교사의 자세로 다시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 다짐을 한다. 하지만 이미 오염되어 살아 온 인생의 길이만큼 더 많은 실수를 유발하는 것이 인생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이 좋다 할지라도 그의 정신이 여러 가지 잘못된 정보들로 오염되어 있다면 거의 판단은 어긋나게 되고 잘못된 결론을 가져오게 된다. 결국 사람의 판단이 옳고 그른가 하는 것은 그 자신 안에 담겨 있는 판단의 근거가 얼마나 정확하고 바른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그 자신 안에 있는 캐논(canon, 잣대)이 정확해야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도 바르게 작동한다. 그렇게 때문에 이미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어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결코 올바른 이성적 사고와 판단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것뿐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라고 제시한 바 있다. 결국 인생에 있어 모든 판단의 근거(criterion)는 오직 성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우주창조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알고,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알고, 그것들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판단의 시작이며 근원이다. 그리고 이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인류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것이 바로 기록된 성경(Canon)이다. 이처럼 기록된 성경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등불임을 명심하자.
444 no image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_송영찬 국장
편집부
1801 2014-06-24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참된 교회의 신자들이라면 하나님의 권능의 세계가 두 개의 영역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칙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은 교회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통치하시므로 이를 ‘권능의 왕국’이라고 부른다. 이 권능의 왕국은 여러 가지 역할을 하지만, 특별히 구속의 은총을 통하여 특별한 나라를 형성케 하신 ‘은혜의 왕국’이 확장되는 영역으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이 사실은 바울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고 한 의미와도 같다. 권능의 왕국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도 필요에 따라 특별한 은총을 베푸신다. 그래서 자연, 역사, 사회, 철학, 문학, 예술, 정치 등등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칼빈은 “진리가 어디에서 나타나든 우리는 그것을 결코 거부하거나 멸시하지 않는다”라고도 말하고 있는데(Ⅱ.2.15), 이는 “이교 철학자들도 부분적으로 진리를 인식했다”(참고, Ⅰ.3.1; Ⅰ.5.3)고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물론 칼빈은 두 가지 진리가 있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하나의 진리가 두 가지 영역에서 그렇게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반틸(C. Van Til)은 ‘인류에게 있는 선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데 대한 칼빈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참된 과학적인 발전은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요 1:4,5). 이와 관련해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한 한, 사람의 예리한 지성은 맹목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있었다’(마 16:17)라고 덧붙이고 있다(Ⅱ.2.19).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을 전제해야만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뜻은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만일 성령의 도움 없이 ‘하나님의 뜻’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광적인 생각이다. 이런 생각들은 영국 출신의 수도사 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년경)가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무지와 오만과 모독적인 망상과 파렴치한 짓에 불과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443 no image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인권’_송영찬 국장
편집부
1629 2014-06-10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인권’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능력에 의해 성도들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그 구원을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의는 세상을 정돈하고 질서를 잡으시는 창조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왜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게 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롬 1:18-3:20). 그 내용 가운데 바울은 인간의 타락상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①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는 지적 타락(롬 1:19-23), ②인간의 욕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복되게 정하신 모든 것을 역행하게 하는 정서적인 타락(롬 1:24-27), ③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무시하는 반역적인 교만을 표시하는 의지적인 타락(롬 1:28-32) 등이다. 이러한 인간의 지, 정, 의의 타락은 첫째,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게 하고 둘째,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역행하게 하고 셋째, 하나님의 정하심에 역행하는 악의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뿐이다. 이것은 인간이 어느 한 부분에서라도 정상적인 기능을 행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부패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먼저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여기로부터 참된 믿음이 시작된다. 아울러 복음은 하나님의 의, 즉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성취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질서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 상태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밝히고 있다. 곧 창조의 질서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작금 동성애자들을 비롯한 성적 소수자들의 인권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창조질서를 거역하는 이들 성적 소수자들은 인간의 지, 정, 의가 타락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진정 인권을 주장하려고 한다면 먼저 자신의 부패함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으로 돌아서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진정 그들의 인권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442 no image 복음,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_송영찬 국장
편집부
1698 2014-05-27
복음,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복음을 말하면서,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신자의 삶을 도외시 한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자세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전부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부로 고백하는 신자라면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살게 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만난 신자는 오늘도 바로 자신이 처한 그 자리, 곧 삶의 현장에서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은 자신만의 관념 세계에 도취되거나, 골방 속의 은밀한 개인적인 영역에 갇혀있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매일 맞닥뜨리는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그곳에는 치열한 영적 전투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불의한 사건과 현장이 있고 그 안에서 사랑으로 보듬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분투 속에서 좌절을 겪기도 하고, 그러한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바라기도 한다. 우리는 바로 그 치열한 삶의 중심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다. 복음에 기초한 삶은 바로 그런 것이다. 존재와 삶은 늘 함께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아(自我)는 자신의 삶의 자리로 자아를 확장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태어났기에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이웃들을 향하여 살아내는 것이다. 반대로 만일 존재와 삶을 분리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신을 기형적인 존재, 다시 말해 흉측한 괴물로 만들 뿐이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살아간다. 그 삶은 기쁘고 즐거운 삶이지만 결단코 행복만이 가득한 낭만적인 삶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자신이 속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리고 그 위치에서 주어진 삶에 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비록 그 자리가 누추하고 그 위치가 화려하지 않다 할지라도 묵묵히 살아내어야 한다. 이처럼 어떤 면에서는 처절하지만 열정적인 삶의 현장 속에 있는 신자의 삶,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신자들에게 있어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는 언제나 박진감 넘치는 벅찬 감사의 제목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441 no image 구원의 보증기관으로서 교회_송영찬 목사
편집부
1892 2014-05-13
구원의 보증기관으로서 교회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교회란 각 성도의 정당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현현을 이루며 하나님께서 경영하시고 계획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충일한 영광을 이땅에 드러내기 위한 삶의 유일한 터전으로서 이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각 성도가 정당한 삶을 발휘한다는 것은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의 삶을 성령께서 주장하실 때 이루어진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현현과 하나님께서 경영하시고 계획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충일한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고 구원의 완성이다. 이러한 삶이 유형적으로 나타난 최고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성도 각인이 자기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로우심을 이 땅에 드러내기 위한 유일한 삶의 터전으로서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최우선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삶의 보증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유형 교회의 한 회원으로서 교회 중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고 있다면 이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한 보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증이란 어디까지나 객관적이어야 한다. 반면에 어느 한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여 살아가는 것은 무형 교회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모습을 통해서는 그러한 보증이 외형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떤 성도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할 때 그에게 임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이 알아 볼 수 있는 길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유형의 형태로 드러난 상태 곧 교회로서 삶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성도들이 교회로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든지 기도나 헌상이나 찬송하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시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나 찬양, 헌상 그리고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응답이 있어야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고 있다는 보증이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응답이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서 확인이 되어야만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그 교회의 삶 속에서 성도 각인이 하나님의 보증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440 no image ‘세월호’ 침몰사고에 임하는 자세_송영찬 국장
편집부
1596 2014-04-29
‘세월호’ 침몰사고에 임하는 자세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세월호 침몰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비통하거나 낙심에 빠져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 신자들은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할지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리심을 받은 사실에 대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로 설명하고 있다. ‘너희가 죽었고’라는 부정과거 시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성도들도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 일은 역사의 한 시점에서 발생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모든 신자들도 죽은 것과 같다. 이것은 마치 땅에 심긴 씨앗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이 감추어진 것과 같이 신자들의 생명 역시 이 세상에서 감추어져 있으며, 그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에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신자들의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 안에 더불어 있게 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감추어진 내적인 생명이다. 이처럼 새 생명은 신비이며 비밀이다. 신자들은 이미(already) 새 생명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소유하게 될 완전함과 영원한 몸을 아직(not yet) 온전히 소유하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감추어져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안전하게 숨겨져 있으며 사람들의 눈에 감추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드러낼 영광을 소유하고 있다(고전 15:20-28). 그리고 그 사실은 단지 미래의 소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성취된 사실이다. 때문에 성도들은 하늘의 시민권자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하며 죄와 질병과 악의 세상을 해방시킬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를 기다린다(빌 3:20). 그동안 성도들은 이 땅에 있는 하늘의 식민시(colony)인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의 악한 결과들과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이때 교회의 머리이시며 만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골 1:18) 그의 군사들이 살아갈 능력을 공급하시며 미래에 대한 소망 안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게 하신다.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가진 신자들임을 기억하자.
439 no image 신자들이 이땅에서 살아가는 원칙_송영찬 국장
편집부
1683 2014-04-15
신자들이 이땅에서 살아가는 원칙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우리는 날마다 태양이 떠오르는 경이로운 세상을 살고 있다. 아무도 태양을 하늘에 메달 사람이 없고, 누구도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그만큼 경이롭다는 것을 가리킨다. 아무리 세상이 경천동지하고 마치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커다란 위기가 닥쳐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우리는 기꺼이 이 땅에서 숨 쉬며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맞이하며 살아내는 것이다. 직장은 그 작은 일상 중의 하나이며, 그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삶을 살아가라고 주신 하나의 방편이기에 죽을힘을 다해 직장생활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의 행보에 대해 일일이 반응을 하거나 일희일비 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도 우리의 실력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단한 반석이신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때문에 세상의 땅이 꺼지고 하늘이 불타 녹아진다 한들 우리는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고 두 눈을 뜨고 거침없이 이 세상을 헤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 일로 인해 그것들을 염려하거나 세상 사람들의 일로 우리가 분주하지 않아야 한다. 세상 일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불과하며,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밥벌이가 중요하지 생명의 소중함에는 까막눈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누구든 방해가 되거나 거침이 되면 가차 없이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벌이고 있는 사특한 밥그릇 싸움 가운데서도 의연하게 버텨야 한다. 왜냐하면 혹 그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 설 자들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우리는 단단하게, 의연하게, 흔들림 없이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 신자들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경이로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부활의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한 신자들이라면 기꺼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고난마저도 당당하게 마주대하되 비굴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비록 가슴이 무너지고 육체가 찢긴다 할지라도 웃으면서 이 세상을 넉넉히 이겨내는 것이다. 이들을 가리켜 성경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함을 기억하자.
438 no image 듣기에 거북한 ‘OO신학’이라는 용어들_송영찬 국장
편집부
1967 2014-03-25
듣기에 거북한 ‘OO신학’이라는 용어들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요즘 흔히 접하게 되는 용어 중 하나가 'OO신학(神學)'이라는 단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떤 단어든지 간에 거기에 '신학'만 덧칠하면 그 용어가 곧 학문적인 영역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탈바꿈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들로는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환경신학, 상황신학, 현장신학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성경해석 작업을 곧바로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변신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결과이다. 최근에는 보편적인 용어에까지 ‘신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애써 신학적 탐구가 가미된 학문의 영역인 것처럼 오도하는 경향도 높아지고 있다. 그 예로써 ‘결혼신학’이나 ‘성전신학’ 또는 '번영신학'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용어들은 ‘신학’이라는 말 대신에 ‘OO론(論)’ 혹은 ‘OO관(觀)’ 같은 하위 개념의 용어들로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아니면 이보다 더 낮은 하위 개념의 용어인 ‘OO에 대한 이해’ 혹은 ‘OO에 대한 탐구’ 정도만 사용해도 충분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학’(學)이라고 할 경우에는 상당한 범위의 학문적 용어이며 여기에는 다양한 이론의 가능성과 다양한 실험이나 검증의 단계들에게 그 길을 열어놓고 있다. 그런데 신학과 관련해 한 개인이나 단체의 주의 주장이나 이론을 ‘신학’이라는 용어로 변질시킬 경우 이것은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것처럼 오해하게 된다. 곧 한 개인 또는 단체의 이론이나 주장 혹은 개념을 ‘학’(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것이 마치 오랜 학문적 검증 과정을 거쳐 정립된 것으로 전문적이며 또한 오류의 가능성을 최대한 배제시킨 학설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신학의 영역은 우리 인생뿐 아니라 온 우주를 포함하는 거대 세계이다. 그런데 이 ‘신학’이라는 용어를 우리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에게 종속시키려 한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을 찬탈하고자 하는 탐욕이 가져다주는 교만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절대 영역과 관련된 ‘신학’이라는 용어를 일상의 개념에 차용함으로써 사상적 혼란을 가져오는 일을 적그리스도적인 행위로 강력하게 규탄하는 바이다.
437 no image 입신양명의 불편한 진실_송영찬 국장
편집부
2372 2014-03-11
입신양명의 불편한 진실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가장’(家長)이 절대적 강자로 군림하는 가부장적 유교적 문화권에 익숙해져 있다. 때로는 어머니가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매사가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지시를 받고, 그 지시를 얼마나 잘 수행했는가에 대한 평가를 따라 칭찬이나 벌을 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 가부장적 유교문화에서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게 만드는 것은 아버지나 혹은 어머니라고 하는 인격적 존재가 지니고 있는 존경심이 아니라, 그 분들의 경제력을 상징하는 ‘돈’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사실 한 가정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돈’을 가장 많이 벌어오는 사람이다. 다행이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오면 아버지가 실질적 가장으로서 존경을 받으며 권위를 지닌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돈을 더 잘 벌게 되면 그때부터 실질적 가장은 어머니가 된다. 그러다가 부모들보다 돈을 더 잘 버는 자녀가 나타나면 그때부터는 가장 돈을 잘 버는 사람이 그 가정의 실질적인 가장이 되는 체제로 변질된다. 그러다보니 언제나 초미의 관심사는 누가 돈을 많이 버는가에 모아지게 된다. 결국에는 돈 많이 버는 사람의 견해가 최종적인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쯤 되면 모든 사람들이 돈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이런 분위기는 사회 전반에도 깔려 있다. 이런 돈의 위력 앞에서 여지없이 창피를 당한 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녀들에게 전력투구를 해서 자녀들만이라도 기를 펴고 살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소위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월계관을 쓰기도 한다. 그것이 이 사회에서는 부모에게 가장 큰 효행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해지고 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입신양명이지 결국 출세를 한다 할지라도 따지고 보면 자기보다 강자에게는 비굴하고, 자기보다 약자에게는 군림하는 양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현상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에서 언제나 갈등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유전무죄(有錢武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다. 이제 입신양명이 효도의 대명사가 될 수 없다. 이 말은 “네가 억울하면 출세해봐라. 어림없다”는 말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 신자들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이다.
436 no image 성도들이 누리는 특권_송영찬 국장
편집부
1760 2014-02-25
성도들이 누리는 특권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율법은 사람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줌으로써 그들을 죄로부터 지켜준다.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 의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세워주는 하나님의 방법이 계시될 때까지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써 비로소 율법의 기능이 성취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복음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로써 한시적인 율법의 기능도 끝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이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백성을 이루게 되었다(갈 4:1-7).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성도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고 그가 경험하였던 복을 받는다. 이 복은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경험과 동일시된다. 이렇게 해서 믿음은 그리스도가 확보한 혜택을 성도들이 받는 유일한 길이 되었다. 이에 신자들은 율법 준수의 굴레 아래에서 노예같이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신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자녀의 자격과 함께 그것과 연결된 특권들이 주어지게 된다. 특별히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며 미래에 하나님이 주실 유산을 상속할 상속자의 신분이 주어진다. 이것은 율법 아래에서는 없었던 새 생명의 경험이다. 이 새로운 경험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게 되는 자유를 통해 나타난다(갈 5:2-15). 그러나 이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계명인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율법의 요구와 죄의 세력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자유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은 더 이상 육신의 능력이 아닌 성령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경건한 성품을 드러나게 하는 능력으로 살게 된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신자의 삶이다. 그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품이다(갈 5:16-26). 때문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율법을 동시에 섬기려고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에만 육신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갈 6:13-14). 성도들은 이 사실을 날마다 경험하는 특권을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것이다.
435 no image 고유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교회_송영찬 국장
편집부
1861 2014-02-11
고유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교회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한 교회가 어느 지역에 세워졌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고 한 교회가 세워졌는데 다른 교회와 그다지 다를 바 없다면 구태여 하나님께서 그런 교회를 따로 세우실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여기 우리 교회가 세워졌는데 시내에 있는 교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여기에 또 하나의 교회가 서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시내 교회에 가서 같이 예배드리고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된다. 교회를 하나님께서 따로 세우신 것은 그 교회에게 바라시는 독특한 역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교회를 따로 세우신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엄연히 하나님께서 세우신 증표가 있다. 그것은 그 교회만이 가지는 독특한 역사적 좌표와 역할이다. 이것을 가리켜 교회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많이 모이는 교회는 많이 모이는 대로 적게 모이는 교회는 적게 모이는 대로 각기 할 일이 있어 그렇게 모이게 하셨다. 각각의 교회적 사명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많이 모이게도 하시고 적게 모이게도 하시는 것이지 교회를 운영하는 목사의 능력 정도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시대적 사명이 있어야 교회가 독자적인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저 돈이 많고 사람들 숫자가 많으면 성공한 교회고 훌륭한 목사고 실력 있는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개척한 지 한 3년이면 자립하고 6년 지나면 땅 사고 교회당을 지어야 성공했다고 하는 이상한 풍토가 생겼다. 서울 강동에 있는 어떤 교회가 개척한 지 몇 년도 되지 않아 교인 수가 만 명이 넘자 사람들은 성공한 특별 케이스라고 다들 부러워서 그 사례를 연구하고 분석하여 어떻게 하면 빨리 부흥하는가를 전문적으로 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신학교의 논문 주제 거리가 된 적도 있었다. 교회의 역할이나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사명을 따지기도 전에 일단 목회에 성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시대 속에서 이런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말일지는 몰라도 교회는 이 점을 처음부터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교회를 개척해야 할 이유가 없다. 차라리 세상에 나가서 장사를 하면 했지 감히 하나님의 나라를 빙자해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든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명분 아래 이상한 짓 하는 것이 두렵고 떨리는 일인 줄 알아야 한다.
434 no image 지금도 ‘이스라엘’이 존재하는가?_송영찬 국장
편집부
1864 2014-01-28
지금도 ‘이스라엘’이 존재하는가?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작금에 이르러 ‘백 투 예루살렘’이라는 운동과 더불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처음 교회가 세워지고 난 후 바울은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했고 유대주의자들과는 다른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거나 특권적인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비록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불순종하고 비극적인 위치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는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더 이상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분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 장벽은 무너졌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평등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적인 유대인의 신분이나 특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누렸던 신분과 특권에 접붙임을 받은 것으로 바울은 이해했다. 하지만 이제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곧 새로운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다. 때문에 바울은 이방 선교를 구약에서 밝힌 약속의 성취로 이해했다. 이때 바울은 유대 율법과 할례를 이방인 개종자에게 부과하지 않는다고 해서 조상의 신앙을 배신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 일로 유대인들과 심지어 유대 기독교인들과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었지만 바울은 자신이 유대의 율법과 전통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 교회들로부터 연보를 모은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통일성, 즉 교회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이 이방인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를 하나의 통일체로 여긴 것은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가족으로 편입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나아가 바울은 이 연보를 이방 열방들의 부가 예루살렘으로 흘러들어 올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예언 성취로 이해했다. 이로써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을 통해 율법의 성취로 완성된 복음을 믿음으로 온 세상의 모든 만민들이 새로운 질서의 세계에 속하게 되었음을 증거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와 그렇지 않는 불신자들만 이 땅에 존재할 따름이다.
433 no image 꼭 읽어야 할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서_송영찬 국장
편집부
2850 2014-01-14
꼭 읽어야 할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서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개혁주의’에 대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 ‘개혁주의’란 종교개혁시대의 신앙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정신은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신앙 정신이 바로 칼빈의 가르침이다. 그것을 매우 간단히 요약한 것이 돌트신경에서 말하는 칼빈주의의 5대강령이라고 하는 TULIP이다. 이러한 칼빈의 가르침은 기독교강요에 풍성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칼빈은 이 기독교강요를 아직 신앙이 어린 성도들과 교회의 자녀들을 위해 요약해 만든 문답서가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서'이다. 이후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서를 바탕으로 프랑스 신앙고백서가 만들어졌고, 스위스 신앙고백서 및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그리고 벨직신앙고백서와 좀 더 나아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등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다양하게 신앙고백서들이 만들어진 것은 아무래도 유럽에 산재해 있는 각 민족들의 신앙 정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본적인 정신은 이미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서에 다 담겨 있다. 때문에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서만 읽어도 개혁주의가 추구하는 신앙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이처럼 명확한 개혁주의 신앙이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에 바르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미국장로교 선교사들과 감리교 선교사들이 당시 미국에 유행하고 있던 무디를 비롯해 오순절파 영향을 많이 받았고, 찰스 피니와 같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추구하는 인위적 부흥운동가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웨스트민스터를 수정한 미국 장로교의 자유주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시대적인 이유로 우리 한국교회 초창기에는 아직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인가를 정립하지도 못했고, 이후 여러 교파의 알미니안주의에 너무 빨리 물이 들고 만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대목이다.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은 개혁주의 시대의 신앙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이 그 첩경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 모두 ‘제네바 교회 교리문답서’를 읽자. 개혁주의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432 no image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두 가지 논제_송영찬 국장
편집부
1965 2013-12-30
갈라디아서의 중요한 두 가지 논제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바울은 2장 15-21절에서 갈라디아서의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두 가지 논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율법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아무런 긍정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율법주의, 즉 율법을 지킴으로써 공로를 쌓는다는 주장을 반대한다(갈 2:15-16). 둘째,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아무런 긍정적인 역할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언약적 율법주의, 즉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된 자신들의 신분을 증명한다는 주장을 반대한다(갈 2:17-20). 이런 점에서 갈라디아서 2장 15-21절은 갈라디아서의 명제적 진술이라 할 수 있다. 바울 사도의 지적처럼 할례나 율법의 어떤 요구가 하나님의 행하신 해방, 즉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선언에 지극히 작은 역할이라도 감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부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죽음에 대한 부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에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라고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다. 이 선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갈 1:4-5)이라고 갈라디아서 서두에서 말하고 있는 찬양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들이 자칫 빠져들기 쉬운 유대화주의자들의 함정을 경계하고 있다. 곧 ① 아직도 율법이 의롭게 되는 길로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② 할례를 받음으로써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다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웨신 제16장 5절은 이 점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행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죄 사함이나 영생을 얻을 만한 공로를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선행들과 장차 있을 영광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으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무한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2014년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구원은 적전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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