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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 no image 안식 가운데 살고 있는 신자들의 의무_송영찬 국장
편집부
2961 2011-08-02
안식 가운데 살고 있는 신자들의 의무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하나님과 연합된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고상한 복이므로 그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계획과 행동은 이 궁극적인 목적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 자신이 취하신 안식을 우리가 얻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뜻이었다.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시 95:8)는 시편을 인용하여 바울은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히 4:6-7)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이 새로운 기회의 날, 즉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고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약속이 실현되어지는 ‘오늘’을 예언적으로 선포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구약에서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이 누린 진정한 안식은 마침내 성전이 건설되는 것으로 비로소 그 땅에서 성취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이 성전이 계시하는 바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비로소 안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즉 천국의 안식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신약의 성도들은 아직 천국에 이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성취된 안식의 때에 살고 있다. 신약의 성도들은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누렸던 안식보다 훨씬 더 좋은 안식을 누리고 있는 바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 즉 새로운 섭리 아래에서 영적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서 이 안식에 초대를 받았다. 이로써 신자들은 장차 임할 천국에서는 물론이지만 아직 이 땅위에서 진리를 믿음으로써 이 성취된 안식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휴식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위해 의도하셨던 모든 참된 것은 성도들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듯이 부주의와 굳은 성향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 안식이 상실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불순종이 그들에게 약속된 안식을 상실케 했던 과거의 교훈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항상 순종할 것을 지시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370 no image 함께 믿음 이뤄야 할 신앙공동체_송영찬 국장
편집부
2812 2011-07-20
함께 믿음 이뤄야 할 신앙공동체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안식에 참여하지 못했던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자칫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안식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의심을 가져올 수 있다. 심지어 낙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놓쳤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실패했다는 생각만으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변하는 것이 아님을 확신시켜 주고, 그들에게 포기함으로써 불신앙으로 배교할 것이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이 믿었을 때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도록 권면하고 있다(히 4:1). 선한 목자의 임무는 모든 양떼를 돌보면서 양 한 마리 한 마리에게 마음을 써서 그 양들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의 성도들 역시 자기 자신을 위함 같이 이웃을 위해 마음을 써서 그들 중 누구라도 도중에 탈락하는 이들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신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멸시할 때에는 예외가 된다. 이때 신자들에게 안식의 약속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유일하게 그들이 불신앙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신 1:30)라는 약속을 믿었더라면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전진하여 그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 기쁜 선포는 유익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으며 결국에는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말았다. 그 결과 그 기쁜 소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이 되는 대신에 극악한 죄를 일으키고 벌을 더욱 가중시키고 말았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주어진 기쁜 소식은 그것을 들은 신자들에게 믿음과 결합되지 못한다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복음은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복음이 교회 공동체의 신자들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의 기쁨으로 이끌어 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69 no image 안식에 대한 교회의 책임_송영찬 국장
편집부
2759 2011-07-06
안식에 대한 교회의 책임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안식’은 그 날을 고대하는 신실한 신자들에게 소망을 가져다 준다. 때문에 신자들에게 있어 ‘오늘날’은 하나님의 안식일로 삼을 만한 기간이며 이 시기는 완성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감사하는 시기인 동시에 소망 안에서 그분의 최종적인 사역의 마무리를 기다리는 시기이기도 한다. 이에 신자들이 예배 처소에 나아가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하며 찬양할 때, 그리고 현재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승리를 확신하는 신자들로 경건한 삶을 살아갈 때 ‘오늘날’은 그들에게 바로 ‘안식일’이 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2-13)고 제시하고 있다. 신자들은 핍박의 가혹한 시기에도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성도의 견인 곧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은혜와 계속적인 도움이 없을 때 사람들의 마음은 반역적이고 미혹되며, 무지하고 분별력이 없으며, 악하고 믿음이 없고 굳어지고 속고 불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시작을 잘 했다 할지라도 육신의 방종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출애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맛을 본 것에 불과했던 것처럼 출발점에서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위치가 어디이든지 출발점으로 되돌아간 것과 다를 바 없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유는 출애굽 사건으로 충분치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불순종, 즉 날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하지 않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상대적으로 이미 제2의 출애굽을 경험한 신약시대의 신자들이라면 계속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약속된 마지막 안식에 참여하게 된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심한 핍박 속에서도 변절하지 않는 신앙의 절개를 지속적으로 지켜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은 교회 회원들이 서로 격려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일은 교회 공동체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368 no image 안식을 예표하는 날로서 ‘오늘’_송영찬 국장
편집부
2814 2011-06-22
안식을 예표하는 날로서 ‘오늘’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다윗은 시편 95편에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그들의 조상들을 본받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윗은 모세가 말하는 장소에 주어진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해서 다툼을 의미하는 ‘므리바’와 시험을 의미하는 ‘마사’를 통해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 것을 부인함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했다. 그들이 물이 없어 갈하여 고통 중에 있었는데 이것을 빌미로 모세와 다툼으로써 하나님을 격동케 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히 3:9)고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처럼 완전히 확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이 전적으로 무시했다는 것은 그들의 어리석음과 경솔함으로 나타낸 증거이다. 그들은 그렇게 40년 동안이나 하나님께 짐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도 없는 자들에게 충실하고 꾸준하게 선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일어나서 대적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건전한 정신을 잃었고 건전한 감각이나 이성마저 갖추지 못했었다. 오랫동안 시련을 겪고 난 그들에게는 오히려 완고한 광기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이것이 죄에 빠져 있는 인류의 완악한 모습이다. 그 결과 그들은 약속된 안식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이 시편은 ‘오늘날’과 ‘안식’이라는 두 신학적 용어를 통해 인간의 경험이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현재, 즉 믿음을 위해 중요한 시기 또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신성한 시간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최후에 도래할 영원한 안식이 결코 오늘과 무관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나타나셔서 구속 사역을 모두 마치는 안식의 때가 되면 모든 슬픔과 고통은 끝이 나고 죽음도 삼킨바 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 피조 세계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던 모든 것들도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오늘’이라는 지금,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오늘은 바로 안식의 완성을 예표하는 바로 그 날임을 명심하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가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367 no image 성도의 견인과 말씀에 대한 순종_송영찬 국장
편집부
3237 2011-06-08
성도의 견인과 말씀에 대한 순종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신약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새로운 출애굽 사건으로 여기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자체도 출애굽으로 묘사되었다(눅 9:31). 이때 예수님은 유월절 양으로 묘사되기도 한다(고전 5:7; 벧전 1:19).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발은 좋았지만 그들은 믿음 안에서 계속 나아가지 못했고 결국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실패했다. 따라서 제2의 출애굽을 한 성도들은 그 사실만을 기념할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믿음과 충성된 순종을 보여야 한다. 이에 바울은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히 3:7-8)고 경계하고 있다. 이 경고는 현저하게 성도의 견인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예로부터 벗어나 땅과 자유와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들은 자유인의 존엄을 경험하게 될 것이었다. 그들은 성전에서 그들 방식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자기들 고유의 문화를 개발시키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 약속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노예로부터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평을 일삼았고 그 약속의 땅을 차지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조차 거부하고 말았다. 신약의 성도들 역시 동일한 의미의 약속을 받는다. 사람의 영혼과 개인의 자유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유를 주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죄로부터 해방을 주시고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가 되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허락해 주셨다. 대신에 여기에는 인격적인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복종’이다. 이 두 가지는 믿음의 필수 요소이다. 신뢰하고 복종하는 길 외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되게 하는 다른 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에 대한 ‘들음’과 그 들은 것에 바탕을 둔 ‘믿음’ 위에 성도들은 전적으로 서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은 유일한 하나님에게서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366 no image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_송영찬 국장
편집부
2903 2011-05-25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교회를 그의 손으로 세우셨기 때문이다(시 87:5). 바울은 그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고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통치하는 것은 ‘많은 형제들 중의 장자’ 곧 가족의 본래적인 통치자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세뿐 아니라 천사들, 즉 모든 피조물 위에 계신 분이시다. 여기에서 바울은 두 가지 사실을 밝히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의 안전이 보장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비롭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을 바라보면서 의지하는 한 실패하지 않는다. 교활하고 심한 유혹과 압력이 그리스도와 믿음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현혹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돕는 분이며,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그리스도에 참예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히 2:18) 신자들은 자신들의 소망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그 근거를 둘 수 있다. 둘째,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속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신자들이 인내를 가져야 할 이유는 결코 쉽고 안이한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내는 ‘실재의 시험’(the test of reality)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자들은 단지 회개와 용서의 문제뿐 아니라 초자연적인 목표를 향한 돌이킬 수 없는 삶의 헌신을 다짐해야 한다. 신자들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믿음이 실재가 되기 위해서는 끝까지 담대하며 더 나은 것들에 대한 분명한 소망 안에서 기뻐하는 단호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신 그분은 영원히 성실하시며 당신의 백성을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히 10:23; 11:11; 13:5-6). 이러한 진리는 신자들에게 되는 대로 살아가는 자기 만족의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살 수 없다.
365 no image 탁월한 교사이신 그리스도_송영찬 국장
편집부
3034 2011-05-11
탁월한 교사이신 그리스도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구약 성경에서 위대하고 선한 인물들을 실증적으로 모아 볼 때 이스라엘의 통치자인 모세만큼 주목을 끄는 인물은 없다. 모세만큼 개인의 인격이 애착심을 불러일으키고 존경을 금치 못하게 할뿐더러 그 인생의 행로가 교훈과 흥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별히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나님이 그를 위해 예비하신 일을 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인물이었다(출 3:4, 10, 14). 확실히 모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으며 사도였다. 그렇지만 모세에게는 제사장의 직분을 발견할 수 없다. 모세와는 달리 아론은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제사장의 임무는 오로지 아론과 그 후손들에게만 주어진 각별한 임무였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이 두 가지 직분이 모두 주어졌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고 선언한다.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그리스도 대신에 헛된 그림자나 환영을 붙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본문에서 ‘생각하라’는 동사는 그리스도에게 특별한 주목을 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주를 멸시할 때 반드시 중한 벌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게 되면 모든 과오와 암흑의 권세를 능히 추방하고 소멸시켜 버릴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주기 위해 그들의 부르심에 대해 상기시켜 주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이제 성도들에게 남아 있는 일이란 오직 길의 안내자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눈을 돌리는 일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부르심은 오직 그들 자신의 방향을 완전히 그리스도에게로 돌릴 때에만 확고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신앙의 유일한 교사이며 또한 그 자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신앙을 확고하게 하셨다. 따라서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는 도리, 즉 신앙은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 아니면 무익하고 헛된 것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외에 그 누구라도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없음을 명심하자.
364 no image 신자들의 고난 대신 당하신 그리스도_송영찬 국장
편집부
3476 2011-04-20
신자들의 고난 대신 당하신 그리스도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신자들이 비참과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위하여 성별되었다는 이 놀라운 은혜는 신자들이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의 입맞춤으로 받아야 하는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치욕은 삼켜지고 십자가의 영광이 빛을 발하는 일이 없이는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창조 문제가 언급될 때 창조는 아들 자신에게로 돌려진다. 왜냐하면 만물은 아들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창조될 때 그들 자신이 존재하는 위치에 놓여져 있다. 그 결과 엄숙하고 정당한 순서의 배열이 주어지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제일 첫 순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라고 말하고 있다. 신자들은 영광의 자녀가 될 미래의 운명을 향해 매일 나아가고 있지만 현재에도 그들에게는 그 날을 향해 성화의 과정이 발생하고 있다. 현재 여기에서 신자들은 계속해서 변화되고 있는데 그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되었고,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구별되었으며,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히 10:14, 29; 13;12). 성화는 성전에서 나온 이미지이다. 구약 시대에는 특성한 사람들, 선택된 그릇들, 정해진 날이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었다. 선구자이신 예수는 자신의 죽음으로 신자들이 이 영광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셨을 뿐 아니라 그 거룩한 길을 밟아가기에 합당한 사람들로 만드셨다. 그분은 인성 안에서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자신과 하나로 만드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 이처럼 거룩하게 쓰임받기 위해, 즉 하나님을 섬김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며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기뻐하신다. 따라서 신자들이 성화된다면 그것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이 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은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도록 구별되었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까지도 하나님께 속하여 있음을 인정하면서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
363 no image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_송영찬 국장
편집부
3396 2011-04-06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라고 바울은 선언한다. ‘합당하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맛보았다는 선언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역사적인 경험 속에서 일어났던 것이 하나님에 관해 알려진 특징과 목적에 일치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아들이 자기 자신을 인간의 상태와 동일시하고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을 하나님이 은혜롭게 선포하심은 시편 8편에서 찬양된 근본적인 의도와 전적으로 일치한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은 목표를 이루는데 합당했고 하나님의 확고한 목적에 따라 역사적으로 경험되었다. 특히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는 하나님을 가리키며, 이것은 창조에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와 관련된다. 만유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은 인류를 위한 계획을 이루실 그러한 방법으로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때 하나님의 확고하신 목적은 많은 자녀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구원하시는 사역이 적용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안에 포함된다. 그리고 ‘많은 아들’의 미래의 영광은 예수님의 승귀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의해 향유되는 현재의 영광으로 보증된다. 이러한 모티브는 구약 성경, 즉 하나님의 주도하심이 강조되는 애굽에서의 탈출과 연결되어 자주 나타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그들의 구원을 보증한 용사’라고 지칭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때 그리스도는 장자인 까닭에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제일 첫 번째 자리에 앉으실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며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머리와 그 지체의 하나됨(롬 8:19)에 담겨 있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갖 고난으로 단련되고 그들의 온 생애가 십자가의 생애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다스리심에 있어서 사용하는 평상적인 수단이라는 점에서 분명해지게 된다.
362 no image 고난과 함께 영광을 바라보자_송영찬 국장
편집부
3644 2011-03-23
고난과 함께 영광을 바라보자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원래 인간은 최상의 총애를 받는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 그리고 특별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독특한 위엄을 지닌 피조물로서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움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보배와 같은 존재이다. 나아가 인간은 모든 창조 세계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둠으로써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하는 존재, 즉 경쟁자가 없는 통치권을 부여받은 피조물이었다(창 1:26). 그러나 이런 묘사는 지금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과는 다르다. 오히려 지금 죄 아래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총애를 경멸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남용하며 자신의 위엄을 망각하고 죄로 인해 통치권에 제한을 받고 있다. 이와 반대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그리스도는 본래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신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통해서 인간이 되어질 모습을 보게 된다. 신자들은 ‘예수를 보면서’ 그분이 신자들의 선구자로 오셨음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인성을 모든 고난과 함께 짊어지셨다. 인간이 되심으로서 그리스도는 신자의 고뇌의 영역에 직접 들어오셨다. 인성을 입으셨을 때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삶과 죽음의 모든 위험한 곤경 앞에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리스도는 환난과 역경으로부터 보호받지 않으셨다. 신자들이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어려운 현실에 잠겨 허우적거릴 때 그리스도는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하셨다. 인간은 죽음의 위협 아래 일생을 살아간다. 예수님 역시 죽음을 맛보셨고 죽음의 육체적 과정을 통과하셨으며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가장 비참한 상태까지 경험하셨다. 예수님은 형제들과 같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그 무서운 경험을 통과하셔야 했다. 신자들의 선구자로서 예수님은 이 모든 과정을 신자들보다 앞서 지나가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고난의 길을 비켜가야 할 이유가 없다. 아직도 순탄하고 평탄한 길로만 가겠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에게 약속된 영광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361 no image 그리스도의 계시에 순종할 또 다른 이유
편집부
3216 2011-03-09
그리스도의 계시에 순종할 또 다른 이유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에 수반된 제재는 엄하고 피할 수 없다. 모든 계명에는 그것을 위반할 경우에 대해 규정된 적절한 형벌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의적 또는 계획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도전하면 집행유예라는 것이 없었다. 그런 행위들에는 이미 사형이 확정되어 있었다. 이처럼 율법이 경솔하게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면, 그리고 이 율법의 위반이 엄중한 형벌을 초래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계시하시고 대단히 많은 기적들에 의해서 확증된 복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그보다 더 엄중한 책임이 따를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언제나 그것이 복음이든 율법이든 똑 같이 주의해서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더욱 더 많이 계시하면 할수록 그 계시에 대한 존경심과 복종하고자 하는 의욕 역시 비례적으로 증가되어야 한다. 율법에 대한 무관심이 그에 따른 적절한 형벌을 동반하는 것처럼 복음에 대한 무관심 역시 불가피하게 심판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그러므로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히 2:1)고 경고한 바 있다. 그리고 “천사들로 하신 말씀(곧 율법)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2-3a)라고 우리를 경계시키고 있다. 이로써 바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복음이야말로 더 이상의 확증이나 증표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교회가 복음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받아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교회가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이미 많은 증거들에 의해 비준된 복음에 대해 경의를 가지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과오를 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가 그리스도의 계시에 순종하는 것은 복음전파를 위한 것이며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에 찬미의 마음을 일으켜서 복음의 가르침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결과 교회를 통해 온 세상을 향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이 더욱 확실하게 증거되어야 한다.
360 no image 공평과 공의로 구현되는 통치_송영찬 국장
편집부
3663 2011-02-23
공평과 공의로 구현되는 통치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예수님의 통치하심은 영원하며 다른 모든 것들 위에서 가장 높임을 받으시는 분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훌륭하게 구현하신다. 다윗 왕국의 왕들과 같이 불완전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분이 아니며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왕으로 인정을 받은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곧 하나님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이것은 예수님의 통치가 전전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바울 사도는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히 1:8)라고 선언한 바 있다. 나아가 예수님은 주와 창조주이시다. 예수님은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친히 손으로 지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새로운 나라를 친히 세우시는 분이다. 그 새로운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특히 시편에서 시온의 회복과 더불어 세계 열방이 여호와를 경외할 것이라는 선포는 제2의 출애굽을 통해 건설될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예수님에 의해 구현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에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세계 열왕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시 102:15-16)는 시인의 선포는 여호와의 임재와 함께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시 102:17)고 함으로써 예수님을 통해 왕이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구현될 것을 계시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공평과 공의로 구현된다. 때문에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며 주님의 몸된 교회의 회원이라면 바로 공평과 공의로써 우리의 특성을 나타내어야 한다. 요즘 우리 주변의 상황은 소통의 부재라는 말로 대치되고 있다. 그러나 소통의 부재라는 말은 공평과 공의로 구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공평과 공의는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통치 그 자체이다. 우리들로 인해 그 누구도 예수님의 공평과 공의로부터 차별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다.
359 no image 그리스도와 교회_송영찬 국장
편집부
3328 2011-02-09
그리스도와 교회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천사들의 이름은 전달자(messenger)를 의미하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전령으로 놀랍게 사용되곤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들은 구약뿐 아니라 신약의 세계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은 사역의 초기에 광야에서(눅 1:19, 26-37; 2:13-14; 마 4:11) 그리고 말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눅 22:43) 천사들로부터 힘을 얻으셨다. 그들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전달자로 주님 곁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역경과 위험으로 가득 찬 적대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그들을 돕기 위해 함께 있었다(행 5:19; 8:26; 10:3; 12:23; 27:23-25). 그러나 이 모든 일에 관련된 천사들은 결국 전달자였으며 이것이 그들의 이름이고 역할이었다. 반면에 그리스도는 천사들 중 가장 뛰어난 자보다 더욱 뛰어난 이름을 가지셨다. 그분은 단순한 전달자를 훨씬 능가하시는 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시 2:7; 삼하 7:14). 바울은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히 1:14)라고 답변을 함으로써 천사들이 결코 그리스도의 존귀와 영광에 미칠 수 없음을 입증하고 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지신다. 이 사실은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에서 확인된다. 이 구절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왕권에 대한 묘사로서 예수 그리스의 왕권은 부활을 통한 죽음의 승리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롬 1:4). 부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상의 왕들과 구별하였으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했으며, 인간을 초월하신 분이시며, 천사보다 높은 존재임을 나타냈다. 따라서 부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왕이심을 온 세상에 선포한 최종적인 즉위식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히 5:5). 교회는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로써 교회는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삼하 7:14; 대상 17:13)라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가족과 같은 영적 관계(고후 6:18; 계 21:7)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은 교회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358 no image 그리스도의 새창조 안에 있는 교회 (25)
편집부
4253 2011-01-19
그리스도의 새창조 안에 있는 교회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하나님의 본체 안에 있는 광채는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그 광채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취지 않으면 그 광채 앞에서는 아무도 살아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빛은 그리스도 안에서 비추이지 않는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빛을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될 때 비로소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아니면 창조된 만물을 결코 보살필 분이 없기 때문이다. 피조된 만물은 오직 그리스도의 자애로 말미암아 유지될 뿐이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태초이신 그리스도는 피조된 세계를 자신의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를 보존하신다. 나아가 그리스도는 오직 자신의 의지로 이 세상을 유지하고 보살피실 뿐 아니라 파괴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때문에 그리스도는 새 창조의 사역, 즉 신자들의 정결을 완성하시는 과업도 거절치 않으셨으며 십자가와 같은 행동을 통해 파괴된 창조 세계를 새롭게 하셨다. 예수님은 중단 없이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한 빛이시며 그 본체의 완전한 형상이시다. 그분은 계속해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자신을 주셨을 때 예수님은 시간의 한 시점에서 단번에 자신의 피를 흘리셨다. 이러한 구속 사역은 결코 반복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모세 율법의 그림자들에 의한 도움을 받지 않으셨다. 또한 레위 족속 제사장들이 죄를 사해 준 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었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았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한 민족에 제한되지 않았으며 전 인류를 위한 속죄였다. 그의 속죄는 완전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 가셔서 영원한 위엄과 권능을 얻으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우리는 이제 최고의 권한을 갖고 계시는 그리스도께 모든 다른 것에 앞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가장 높은 자리에 서 계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우리가 존재하는 가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애써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357 no image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시간_송영찬 국장
편집부
3477 2011-01-0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시간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대한 계시를 계속적인 부분과 다양한 방법으로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셨다. 이때 ‘옛적에’란 말은 구약 계시, 즉 구약성서의 계시를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던 하나님이 이 마지막 날에 그의 아들로 말씀하셨다. 바울 사도는 이 내용을 가리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고 밝힌 바 있다. 이때 하나님의 결정적이고 절정에 도달하고 있는 ‘이 모든 날 마지막’은 앞선 ‘옛적에’로 묘사된 시간의 함축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구속 역사의 과정에서 두 시대의 계승에 대한 전통적인 유대교회와 기독교의 개념을 구분시키고 있다. 특히 ‘마지막 날’로서의 현재 시간의 특징은 바울 사상의 지배적인 종말론적 적용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계시는 말씀의 어떤 한 부분이 아니라 마지막 결론적 말씀, 즉 신자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알아야 할 완전한 결론적 말씀이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구원을 위한 새로운 계시를 기다릴 이유가 없음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이 아들’의 사역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의도적으로 완고하게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대적한 자들이며 이들에게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바울 사도는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고 밝히고 있다. 창조에 있어 하나님의 목적과 목표는 그 아들에게 물려 줄 상속물을 마련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복되심을 찾으시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아들은 최후의 원인이시며 동시에 만유의 목적이 되신다. 이 사실은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에서 더욱 강화된다. 이 아들은 바로 태초(太初)가 되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리스도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시며 유효한 원인이시다(요 1:3). 신적 실존 안에서 아들이 가진 위치는 하나님 자신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오직 그 아들로 말미암아서만 되어지는 위치이다. 존재하는 만유(萬有)의 시작과 끝은 아들 안에서만 만날 수 있다. 2011년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달력의 낱장처럼 찢겨져 피안의 세계로 흘러갈지라도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명심하자.
356 no image 말씀하시는 하나님_송영찬 국장
편집부
3873 2010-12-22
말씀하시는 하나님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구약성서 시대에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뜻을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은 선지자들이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선택되었고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고서는 이 영광스러운 직분을 행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이처럼 특별한 계시 기관인 선지자들을 통해, 즉 모세로부터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며 저 멀리 계시고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무덤덤하게 우주를 움직여 가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며 논증하시고 사람들에게 탄원하시고 사랑을 호소하시며 명령하시고 대화를 나누시며 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하여 하늘과 땅을 따라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말씀 사건으로서의 신적 계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침묵을 깨뜨리면서 역사 속에 개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능동적으로 개입하신다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계시는 거룩한 세계에 대한 인간적인 단순한 인식이나 분별의 차원을 넘어선다. 계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으로의 사건이며 ‘누구에게 말씀하심’이며 동시에 ‘거룩한 소환’이기도 하다. 따라서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모든 피조물을 찾고 구원하고 회복시키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 행위를 통해 그의 백성을 화목케 하시며 양육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며 판단하신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상호 호혜적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향하시고 약속의 자녀로 지음받은 그들이 되도록 그들을 부르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야말로 특별한 조명(illumination)이나 신비한 깨우침(enlightenment)이 아니라 생생하면서도 삶을 변화시키는 대화 가운데로 우리들을 이끄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결국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들을 귀가 있는 존재로 지음 받았으며, 주시는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행동하는 존재들이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귀를 기울였으며 얼마나 정확하게 응답하였는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해에는 더욱더 그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일에 혼신을 다해야 할 것이다.
355 no image 교회의 유익 위한 성령의 은사_송영찬 국장
편집부
4088 2010-12-15
교회의 유익 위한 성령의 은사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신령한 일들 중에서 풍성하고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난다. 이 은사들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능력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며, 새로운 능력을 받도록 우리의 전 존재를 구속하신 구속주이시며, 기독교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표시이다. 이런 점에서 은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의 개별화되고 구체화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은사를 받지 않은 신자들은 없다. 그런데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는 말씀처럼 이 은사들은 단번에 주어지는 선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반면에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은사가 있다는 것은 그 은사가 가지는 고유한 속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모든 다양한 은사들은 한 성령이 주권적 결정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에게 각각 나누어주심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특히 은사는 성령의 나타남, 즉 성령의 현현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이 은사는 반드시 특정한 그리스도인이 영구적으로 소유하고 나타내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몸의 한 지체에게 이 은사를 구비시키심으로써 특정한 생활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은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확증하려는 목적으로 몸된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이지 신자들의 영적 성숙의 보장이나 지표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은사들은 모두 신령한 일들에 속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11)고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의 뜻대로 주어진다. 이것은 자기 뜻대로 은사를 주시는 성령의 인격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의 통합된 인격처럼 이 은사들은 위대한 유기체로서 교회의 통합된 인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행할 때 그리스도 예수의 절대적인 주님 되심이라는 기반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세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위대한 유기체로서 그 기능을 다해야 한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어떤 은사가 있다면 그것은 내 것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354 no image 주님의 임재와 성만찬_송영찬 국장
편집부
4024 2010-12-08
주님의 임재와 성만찬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주의 만찬에 대한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자세를 갖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동시에 함께 모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오직 성찬에 대한 바른 인식이 앞서게 될 때 그 안에서 동등한 사람들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강조되며 사회적인 차등의 벽들도 무너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전 11:27)고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다. 주의 만찬이 공동체를 서로에 대한 책임 속에서 함께 묶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주의’ 만찬이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니는 ‘너희를 위한’ 성격을 무시하고 부인하는 것은 주의 만찬을 욕되게 하는 일이며 주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의식에서 떡과 잔에 성도들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그 죽음이 재연될 때 주님은 그 만찬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성만찬을 가리켜 ‘주의 식탁’ 혹은 ‘주의 만찬’이라고 한다. 따라서 성만찬에 참여하는 그 자체가 커다란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벼운 자기 성찰조차 시작해 보지도 않고 주제넘게 주의 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이에 바울은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8-29)라고 권면하고 있다. 예배하는 공동체 내에서 특히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 성례전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그 식탁의 주인이시라는 주님의 임재를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주님이 베푸신 그 만찬의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신다면 그 자리는 결코 복된 자리라 할 수 없다. 만일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이 특별한 식탁이 다른 공동의 식사 자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배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만찬 예식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과 함께 무한하신 주님의 은혜로운 잔치 자리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353 no image 성찬식의 상징과 의미_송영찬 국장 (1)
편집부
4293 2010-11-24
성찬식의 상징과 의미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성찬식은 일반적인 애찬이나 식사로 제정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에서 항상 지켜야 할 예식이다. 또한 성찬식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의 은혜를 성도들에게 일깨우시고 성도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하신 제도이다. 어두운 그날 밤, 즉 주님께서 배반당하시던 그날 밤에 성만찬은 제정되었다. 지옥의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를 멸하려고 모였을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감사를 하셨다. 예수께서는 감사하시고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일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떡을 떼고 잔을 들고 마시는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주의 만찬은 ‘이미-아직’(already-not yet)의 긴장을 한데 묶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끈이다. 또한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종종 만날 수 있는 종말론적 긴장의 격류를 건너는 일종의 다리이기도 하다. 특히 성찬식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이 의식의 공동 거행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재연하는 일과 그 죽음을 선포하는 일을 함으로써 주의 만찬을 행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주의 만찬이 담고 있는 것은 그 죽음이 주의 제자들을 위한다는 성격과 그것이 은혜로 주어진 ‘새 언약’이라는 점이다. 바울이 성찬식의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주요 단어는 ‘새 언약’이다.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통해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자유를 주장하거나 엄격한 규율을 주장하거나 모두가 죄사함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알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되었다. 주님과 이러한 인격적 관계, 이러한 언약 관계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언약 관계 안에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언약 공동체가 확립된다. 이 언약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중심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배를 받는다. 이것이 주의 만찬에서 확인되는 핵심적 요소이다.
352 no image 세상보다 높은 교회의 윤리관_송영찬 국장 (1)
편집부
3735 2010-11-10
세상보다 높은 교회의 윤리관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신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지식은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다. 누구나 사변적 방식이나 철학적 방법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만 알게 된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2문).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조명과 교회의 정당한 말씀의 해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차서가 발생하게 되며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아직 기대할 수 없는 유아적 상태의 성도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유아적 상태에 있는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우상의 실체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이교도들이 신봉하는 신들은 사람들의 상상에 따른 산물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과 같이 아직 약한 신자들이 세상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교도의 신들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하지 못할 수 있다. 이처럼 개종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미신적인 견해들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게 되며 우상 숭배에 참여했다는 죄책을 가지게 된다. 또한 그들이 비록 율법주의자이거나 엄격주의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양심을 약하다고 탓해서는 안 된다. 모든 기독인들이 이 주제에 대하여 모두 온전한 지식을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교회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법을 따르는 실제적인 예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 사랑의 법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을 제한하는 사랑이다. 이것이 참된 기독교적 사랑이며 이것이야말로 참된 기독교적 자유이다. 나보다 연약하고 신앙이나 신학의 지식에 있어 낮은 수준의 형제들을 위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랑이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그 모범을 따르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에서는 연약한 성도들의 양심을 충동하는 일에 있어서 강한 성도들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세속적인 질서나 윤리보다 더 높은 의식을 가지는 교회의 거룩한 윤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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