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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5 (21:53:25)

일 상

 

< 조병수 목사, 합신총장 >

 

“우리는 매일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작품 만들고 있어”

 

학교로 출근하는 길은 집을 나서 골목 끝에서 버스 다니는 도로를 이용하여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버스 다니는 도로를 벗어나 학교로 들어선다. 집으로 퇴근하는 길은 출근길의 역순이다. 출근길과 퇴근길은 똑같다.

 

하루 일과는 묵상으로 시작해서 결재를 하고, 신문을 읽고, 이메일을 체크하고, 우편물을 점검하고, 회의를 이끌고, 식사를 하고, 통화를 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시설물을 돌아보고, 부서들로부터 보고를 받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인생의 대부분을 사소한 일로 보낸다. 다음 날도 거의 다를 바 없는 삶이 반복될 것이다. 내일도 오늘과 비슷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일상을 탈피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자그마치 비행시간이 반나절이나 걸리는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고색창연한 도시에는 중앙을 가로지르는 운하가 굽이굽이 흐른다. 곤돌라를 탄다. 선미에서 노를 젓는 뱃사공이 풍부한 중저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그에게 삶이 행복한지 묻는다. 이른 아침부터 피곤을 이기지 못하는 몸을 깨워 빵조각을 입에 물고 배를 몰러 나왔단다. 그의 대답은 어제처럼 거의 다를 바 없는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어제와 비슷하다. 인생의 대부분은 사소한 일로 연속된다.

 

사람들은 일상을 혐오하며 일상의 사소함에 분노한다. 그래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언젠가 드라마 속에서 본 것처럼 어쩌다 자동차 사고의 현장에 있게 되고, 차 안에 갇힌 멋진 영화배우를 구출해낸다. 사랑이 싹튼다. 갑자기 환경이 달라지면서 지금까지 평범하게 맺어있던 주변의 인간관계는 부질없어진다. 판 박듯이 돌아가는 일상에 지친 우리는 가끔 이런 드라마 같은 사건을 꿈꾼다. 때때로 우리는 극적인 일이 벌어져 일상을 한번 심하게 흔들어주기를 바란다.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지면 감당해내지 못할 줄을 알면서도 말이다.

 

일상이란 다 쓴 휴지조각처럼 마구 구겨버려도 될 정도로 그렇게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일상은 그 자체가 신기한 것이다. 물론 굉장한 변화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일상은 비록 아기자기하기는 하지만 시시가 다르고 나날이 다르다. 출근길의 구름과 퇴근길의 구름은 서로 모양이 같지 않다. 오늘 찾아온 손님과의 대화는 어제 찾아온 손님과의 대화와 다르다. 아침이 저녁과 다르듯이 어제와 오늘은 다르다. 아침은 아침대로 저녁은 저녁대로 의미가 있고, 어제는 어제대로 오늘은 오늘대로 의미가 있다. 일상은 그 자체가 작은 변화의 연속이기 때문에 각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일상은 지겨움이나 단조로움이 아니라 신기함과 변화무쌍이다.

 

게다가 일상은 나를 진정한 나로 만든다. 일상은 매순간 나를 조각한다. 일상은 나의 삶이 실현되는 현장이다. 이것이 일상의 위대함이다. 그래서 일생의 대부분을 사소한 일로 보내는 것에 화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소한 일상이야말로 나를 조금씩 천천히 빚어내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일상은 아주 조금씩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나를 조각하기 때문에 나는 진정한 내가 되는 동안에 아무런 아픔도 역겨움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은 저주가 아니라 은총이다.

 

사실 일상 하나하나는 매우 사소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상은 모두 모아지면 인생을 형성한다. 마치 어느 아티스트가 여러 색상의 자잘한 돌들을 주어와 바닥에 하나씩 둘씩 조합시켜 나가다보면 어느덧 하나의 그림이 드러나듯이, 일상은 매일같이 쌓여지면 인생이 된다. 일상이란 지금 당장은 사소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다 모아지는 날에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작품이 된다. 따라서 일상의 모음이 특별한 일이다. 위대한 것은 날이 갈수록 일상이 빠짐없이 모아진다는 사실이다.

 

일상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일상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별한 사람도 일상을 살고 있으며, 일상을 떠나보려는 것도 일상의 일부일 뿐이다. 출근길과 퇴근길이 결국 하나인 것처럼 특별함과 평범함은 결국 하나이다. 출근길과 퇴근길은 단지 오고가는 방향이 다를 뿐이듯이, 특별함과 평범함은 단지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대부분을 사소한 일로 보내는 것에 화내지 말라. 일상이야말로 위대한 삶이 실현되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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